10598. 이 장의 속뜻은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세우기로 하셨던 교회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주님의 신성을 내적으로 도저히 받을 수 없는(could not receive the Divine interiorly) 민족이어서 그 교회가 아닌, 그 교회의 표상으로(the representative of a church, and not a church) 받게 되었다는, 이것이 이 장 1절로 9절의 주제입니다. In the internal sense of this chapter there is treated of the church that was to be instituted among the Israelitish nation. But as that nation was of such a character that it could not receive the Divine interiorly, it was received in order that there might be with it the representative of a church, and not a church. This is the subject treated of in verses 1 to 9.
10599. 그 후 속뜻으로 그 교회의 주된 것들(the chief things of the church)을 다루는데, 이는 이들이 교회를 표상할 수 있도록(in order that they might represent a church) 철저히 준수되어야 하는, 그런 것들이었습니다. 이것이 이 장 10절로 28절의 주제입니다. Afterward in the internal sense there are treated of the chief things of the church, which were wholly to be observed, in order that they might represent a church. This is the subject treated of in verses 10 to 28.
10600. 끝으로, 말씀, 교회 및 예배의 신성은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through of the Divine internal of the Word, of the church, and of worship, through their external) 빛나지만 그 민족 앞에서는 그렇지 않음을 다룹니다. 모세의 얼굴의 광채, 그리고 그가 백성과 말할 때에는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던 것이 이를 의미하는데, 이것이 29절로 35절의 주제입니다. Lastly, there is treated of the shining through of the Divine internal of the Word, of the church, and of worship, through their external; but not before that nation. This is signified by the shining of the skin of Moses’ face, and by the interposition of a veil when he was speaking with the people. Treated of in verses 29 to 35.
10523. 이 장에서 속뜻으로는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주제가 더 계속되는데요, 여기서는 예배에 관하여 그 퀄리티(quality), 즉 교회에 속한 것들에 관한 그 퀄리티에 대한 설명입니다. 1절로 6절에는, 예배와, 그리고 교회에 속한 외적인 것들(the external things)이 표상들(representatives) 안에 있을 수 있지만, 그러나 여전히 거기엔 아무런 신성한 것(anything Divine)이 없었다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전혀 내적이지 않았기(not anything internal) 때문이지요. 7절로 17절에는, 예배 그 자체에는, 그 자체로 보았을 때는요, 그들과 분리되어있는, 뭔가 신성한 것이(what is Divine) 있을 수 있다는 내용이, 18절로 23절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실이 그들에게는 보이지도, 지각되지도 않았다(not seen nor perceived)는 내용이 들어있습니다.In this chapter in the internal sense the subject of the Israelitish nation is further continued; but here its quality in respect to worship, thus its quality in respect to those things which are of the church. From verses 1 to 6 there is contained: that although they could be in representatives, which are the external things of worship and of the church, still there was not with them anything Divine, because not anything internal. From verses 7 to 17: that in the worship itself, regarded in itself, thus separate from them, there could be what is Divine. From verses 18 to 23: that nevertheless this was not seen nor perceived by them.
10393. 이 장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은 속뜻으로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교회가 세워질 수 없었던 이유는 그들이 무슨 내적인 것 없이 전적으로 외적이기만 했기(they were wholly in externals without any internal) 때문이며, 그들이 천국과 교회의 거룩한 것들을 모독하지 못하도록 그들에게는 내적인 것들이 완전히 닫혔다는 것(to prevent their profaning the holy things of heaven and the church, interior things were completely closed with them)입니다. 이 백성이 여호와 대신 예배했던 ‘금 송아지’(the golden calf)는 이들이 내적인 게 전혀 없이 전적으로 외적이기만 했음을, 그리고 모세가 깨뜨린 증거판들(the tables of the law)과 모세가 그 금송아지를 갈아 그 가루를 물에 타 그들에게 마시게 한 것, 그리고 레위 자손들에 의해 진영 내 삼천 명이 죽임을 당한 것은 이들의 내면이 완전히 닫혔다는 것을, 안 그러면 이들은 천국과 교회에 속한 거룩한 것들을 모독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상징합니다.In the internal sense in this chapter there is described that a church could not be instituted among the Israelitish people, because they were wholly in externals without any internal; and that to prevent their profaning the holy things of heaven and the church, interior things were completely closed with them. That this people was wholly in externals without any internal is signified by the “golden calf” which they worshiped instead of Jehovah. And that interior things with them were completely closed, lest they should profane the holy things of heaven and of the church, is signified by the tables of the law being broken by Moses, and by Moses grinding the golden calf and strewing the dust into the waters and giving them to drink, and also by their being slain in the camp by the sons of Levi to the number of three thousand men.
10394. 속뜻으로 좀 더 설명하자면, 비록 그들 가운데 교회가 세워질 수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가운데 표상들(表象, representatives)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교회의 가장 겉모습들(ultimates of the church)인데요, 끝에 가서는 말씀(the Word)으로 기록되기 위해서이며, 말씀은 이들 가장 겉모습들에서 닫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을 모세가 여호와께 간청하는 것으로 상징하고 있습니다.It is further described in the internal sense that although a church could not be instituted among them, there were nevertheless among them representatives which are ultimates of the church, to the end that the Word might be written, which should close in these ultimates. These things are signified by Jehovah’s being entreated by Moses.
10326. 이 장에서 다루는 주제는 그 속뜻으로는, 먼저 주님 사랑의 선과 주님 신앙의 선(the good of love to the Lord and in the good of faith in him) 가운데 있는 사람들로 된 표상교회(表象, a representative church)의 출범입니다. 이는 유다 지파 브살렐과 단 지파 오홀리압에 의해 만들어지게 될 것들에 대한 대략적인 나열로 상징됩니다. 이어 다루는 주제는 표상(representatives)을 통한 주님과 그 교회 간 결합입니다. 이는 거룩하게 지켜졌던 안식일(the sabbath)에 의해 상징되고 있습니다.The subject treated of in this chapter in the internal sense is, first, the setting up of a representative church with those who are in the good of love to the Lord and in the good of faith in him. This is signified by the things summarily enumerated as to be made by Bezalel of the tribe of Judah and Aholiab of the tribe of Dan. Afterward the subject treated of is the conjunction of the Lord with this church by means of representatives. This is signified by the sabbath which was to be kept holy.
10175a.이 장에서 다루는 주제는 향단, 속전, 물두멍과 씻기, 그리고 관유 및 향 준비입니다. 그 속뜻으로는, ‘분향’(焚香, burning incense)은 사랑과 체어리티(charity)로 드리는 예배의 모든 것을 주님이 들으시고 받으심을, ‘속전’(贖錢, the expiation of everyone by means of silver)은 주님께 드리는 예배의 모든 것, 자신을 위해서는 전혀, 그래서 어떠한 공로도 자신에게는 돌리지 않는 그런 것을, ‘물두멍과 씻기’(the laver and the washing)는 모든 예배에 앞서 먼저 악으로부터 정결해지는 것을, ‘관유 준비’(灌油, the preparation of the oil of anointing)는 예배에서 사랑의 퀄러티를, ‘향 준비’(香, the preparation of the incense)는 그렇게 드리는 예배의 퀄러티를 각각 상징합니다. The subjects treated of in this chapter are the altar of incense; the expiation of everyone by means of silver; the laver and the washing from it; and the preparation of the oil of anointing, and of the incense. In the internal sense by “burning incense” is signified the hearing and reception by the Lord of all things of the worship which is from love and charity; by “the expiation of everyone by means of silver” is signified the ascription of all things of worship to the Lord, and nothing to self, that no one may have merit. By “the laver and the washing” is signified purification from evils first in all worship. By “the preparation of the oil of anointing” is signified the quality of the love in worship; and by “the preparation of the incense” the quality of the worship from it.
9985. 이 장에서 다루는 그 속뜻 주제는 인성과 관련, 주님의 영화(the glorification of the Lord in respect to the human)인데요, 이것을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제사장직 취임(the inauguration of Aaron and his sons into the priesthood)으로 상징하고 있습니다.In the internal sense in this chapter the subject treated of is the glorification of the Lord in respect to the human, which is signified by the inauguration of Aaron and his sons into the priesthood.
9804.이 장에서 다루는 주제는 거룩한 옷들(the garments of holiness)인데 이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제사장 직분을 수행할 때 입어야 하는 옷들입니다. 이 제사장직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수행해야 할 직분인데요, 천적 신성과 관련된 주님(the Lord in respect to the Divine celestial)을 표상한 것입니다. 이것은 곧 천국의 신성한 선(the Divine good in heaven)이지요. 그리고 아론의 옷으로는 영적 신성(the Divine spiritual), 곧 거기서 나오는 신성한 진리(the Divine truth thence proceeding)를 표상했습니다.The subject here treated of is the garments of holiness which Aaron and his sons were to put on when they ministered. By the priesthood which Aaron with his sons was to administer was represented the Lord in respect to the Divine celestial, which is the Divine good in heaven; and by Aaron’s garments was represented the Divine spiritual, which is the Divine truth thence proceeding.
9710.이 장에서 다루는 주제는 그 속뜻으로는 사랑의 선으로 주님을 예배함(the worship of the Lord from the good of love)인데요, 이 예배를 ‘제단’(the altar)으로 상징하고 있고, 그리고 전반적으로는 이 제단과 관련된 모든 것을 가지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In this chapter, in the internal sense, the subject treated of is the worship of the Lord from the good of love. This worship is signified by “the altar” and is described in general by all things relating to the altar.
9711.그다음 다루는 주제는 가장 바깥 천국(the ultimate heaven)인데요, ‘뜰’(the court)로 표상, 설명하고 있습니다. Afterward the subject treated of is the ultimate heaven, which is represented and described by “the court.”
9712.끝으로 다루는 주제는 체어리티의 선(the good of charity)이며, 이를 통해 영적 천국(the spiritual heaven)이 주님으로 말미암아 신앙의 진리들(the truths of faith) 안에서 조명되고 있습니다. ‘감람유’(the oil of olive)와 ‘등불’(the luminary)은 이들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Lastly the subject treated of is the good of charity, through which the spiritual heaven is illumined by the Lord in the truths of faith; these things are signified by “the oil of olive” and by “the luminary.”
54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 55남풍이 부는 것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니라 56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57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아니하느냐 58네가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그가 너를 재판장에게 끌어가고 재판장이 너를 옥졸에게 넘겨주어 옥졸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59네게 이르노니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아니하고서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 하리라 하시니라 (눅12:54-59)
하나님의 신성은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흘러들어온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것은 사람의 쪽이어야 하며, 자신으로부터가 아니라 자신으로부터인 것처럼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받아들이는 능력이 사람에게 끊임없이 주어지며, 사람이 악을 제거하는 만큼 그 능력은 비록 주님의 것이지만 사람의 것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for the Divine proceeding which is “the Father in the heavens,” flows in with the evil equally as with the good, but the reception of it must be on man’s part, yet not on man’s part as from man, but as if from man, for the ability to receive is given to man continually, and it also flows in to the extent that man removes the evils that oppose, and does this also from the ability that is continually given, the ability itself appearing to be man’s, although it is of the Lord. (AE.644:23)
※ 오늘로 누가복음 12장을 마칩니다. 지난 7월 30일 주일부터 시작, 오늘까지 8주에 걸쳐 다루었는데요, 늘 이렇게 원고를 프린트하여 나누어드렸으니 수시로 다시 여러 번 읽으시고 확실히 자기 걸로 만드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겉 육을 입고 사는 사람들은 이 속뜻 설교를 결코 한번 듣고 완전히 자기 걸로 소화할 수 없기 때문이며, 이렇게 속, 곧 내적(內的, internal)으로 말씀 읽기를 연습하다 보면 어느덧 우리도 천사들처럼 내적으로, 영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하고, 그러면서 이 세상과 세상 모든 일, 곧 주변 일상을 비롯,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것에서 한발 물러나 그 영적 의미들을 천국, 천사들 관점, 곧 주님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며, 그렇게 되면서 우리 모두 세속적 사고에서 벗어나게 되어, 이 세상 사는 동안 주님을 향해 우리를 정결하게 보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살면서 세상을 위해서가 아닌, 주님을 위해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몸은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서 천국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복음서에는 외식하는 자에 대한 에피소드가 자주 나옵니다. 외식(外飾)이라는 말은 한글 성경의 번역이고, 영어 성경 표현은 위선(僞善)입니다. 위선이란 겉과 속이 다른 것입니다. 겉으로는 진실한 듯하나 속으로는 속이는 것, 겉으로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처럼 하면서 속으로는 증오하거나 멸시하는 것이지요. 복음서에 위선자의 대명사로 불리는 사람들은 바리새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임의로 왜곡, 말씀 속에 있는 내적이고 거룩한 것들을 파괴해 버렸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겉으로만 경건할 뿐, 속에는 악의와 교활한 속임수가 가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을 회칠한 무덤과 같다 비난하셨던 것입니다. 겉은 그럴듯하게 꾸몄지만 그 속은 죽은 자들의 해골과 뼈로 가득한 무덤처럼 말이지요. 교회의 교리가 잘못될 경우, 그 교리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바리새인들 같은 위선자가 됩니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공간 안에 있으면 누구나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하겠습니다.
※ 여기 ‘감염’(感染)이라고 했는데요, 출애굽, 즉 애굽을 나오다, 애굽에서 출발하다 하는 출애굽 모든 여정은 그 속뜻으로는, 악과 거짓에 감염된 상태에서 우리를 구원, 천국을 향해 거듭나게 하시는 과정입니다.
자, 그렇다면 참된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위선자가 아닐까요? 비록 참된 신앙 안에 있다 하더라도 거듭나기 전에는 위선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개인의 영적 상태에 따라 누구나 조금씩은 위선자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자신의 위선을 얼마나 아느냐 하는 것이고, 거기서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어떻게 하면 위선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또한 각 사람에게 오시는 주님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느냐 하는 것에 관한 말씀입니다. 본문 54절과 55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54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 55남풍이 부는 것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니라
구름이 서쪽에서 일면 소나기가 온다고 합니다. 이는 주님 활동하신 유대 땅의 지형적 특성 때문인데요, 그러나 그 속뜻으로도, 서쪽은 해가 지는 방향이기 때문에 교회 안에 사랑이 없는 때, 즉 교회의 마지막 때를 나타내며, 또 구름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가리키고, 소나기는 진리를, 그러므로 구름이 서쪽에서 일면 소나기가 온다는 것은 교회의 마지막 때 주님께서 말씀의 진리로 오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다음 절에는 남풍이 불면 심히 더울 거라는 것 역시 그 지역 지형적 특성이지만, 역시 그 속뜻으로도, 남풍은 주님에게서 나오는 선을 뜻하며, 그러므로 남풍이 불면 덥다는 것은 주님께서 말씀의 선으로 오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종합해 보면, 이 말씀은 교회의 마지막 때 주님이 말씀의 진리와 선으로 오신다는 뜻입니다.
신앙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자아의 욕망을 좇을 때 교회는 기울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때 주님은 천사들을 통해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려 하시지만, 그럼에도 불구, 신앙인들이 주님께로 돌아서지 않으면, 석양에 해 기울듯 교회 안에는 사랑이 식어갑니다. 바로 그때 주님께서 오셔서 타락한 교회를 정리하시고, 새로운 교회를 여시지요. 교회는 세상의 심장과 폐와 같아서 한순간도 없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오신다는 것은 본질적으로는 새로운 말씀의 진리와 선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소나기는 바로 그 진리이고, 남풍은 그 선을 뜻합니다.
서쪽에서 구름이 일면 소나기가 올 것을 아는 것처럼 진실한 신앙인들은 삶에서 일어나는 변화들을 통해 주님의 임재를 느낍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자기 안의 악과 거짓에 맞서 싸웁니다. 마치 노아 시대에 방주에 들어간 사람들이 세상을 덮은 거짓의 홍수와 맞서 싸우듯 그렇게 싸웁니다. 진실한 신앙인들은 그런 방법으로 시험을 딛고 한 단계 한 단계 거듭납니다. 하지만 반대로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에 빠져있는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처럼 자기들 내면의 교회에 오신 주님, 자신들을 찾아오신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박해합니다. 그 이유에 대해 스베덴보리 저, ‘계시록 해설’ 644번 글 20번 항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면의 악과 거짓으로 인해 눈이 어두운 자들은 진리를 보지 못하고 주님의 임재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럴 경우, 시험을 이기지 못한다.’ 시험을 이기지 못하면 죄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56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57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아니하느냐
그래서 주님께서는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한탄하신 것입니다. 시대를 분간하지 못한다는 것은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분별하지 못한다는 것이고, 그러므로 주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다시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아니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이 말씀은 진리를 생각할 때는 어느 누구의 간섭도 받지 말고 스스로 판단하라는 말씀입니다. 외부의 교회든 내면에 있는 교회든 처음 교회가 세워질 때는 누구나 자신의 판단에 따라 자유롭게 진리를 받아들입니다. 그때는 영이 순수하기 때문입니다. 영이 순수하다는 것은 진리를 위해 진리를 믿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타락해 마지막 때가 되면 신앙인들은 자신의 판단을 믿지 않고 타인의 판단을 믿습니다. 자신의 순수한 영으로 진리를 바라보지 않고 타락한 교회의 교리를 통해 진리를 바라보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주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21:18) 말씀에서 ‘베드로’는 교회의 신앙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는 진리에 대한 순수한 애정으로부터 진리를 생각하고 믿는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는 교회의 마지막 때 사람들은 스스로 진리를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말, 즉 잘못된 교리를 통해 진리를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신앙인들이 스스로 진리를 판단하고 믿기를 원하십니다.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 자유이며, 다른 사람의 말을 따르는 것은 노예가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위선자가 되지 않을까요? 어떻게 하면 스스로의 판단으로 진리를 믿을 수 있을까요?
58네가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그가 너를 재판장에게 끌어가고 재판장이 너를 옥졸에게 넘겨주어 옥졸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주님께서는 그 대답으로 ‘네가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그가 너를 재판장에게 끌어가고 재판장이 너를 옥졸에게 넘겨주어 옥졸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은 한글 성경 번역이고, 영어 성경의 번역은 이렇습니다. ‘네가 원수와 함께 행정관에게 갈 때 길에서 근면하여 그가 너를 재판장에게 넘겨 옥에 갇히지 않도록 하라’입니다. 말씀에서 ‘감옥에 갇히는 것’은 신앙인들이 진리와 선을 모두 잃어버리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악과 거짓의 노예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진리가 있어야 악과 거짓을 물리칠 수 있는데 진리가 없으니 악과 거짓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자의 삶이 아니라 죽은 자의 삶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되지 않도록 길에서 근면하라, 즉 진리 안에서 근면하라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진리 안에서 근면한 것일까요? 진리가 명령하는 일은 적극적으로 행하고 진리에 반하는 일은 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은 끝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59네게 이르노니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아니하고서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 하리라 하시니라
말씀에서 ‘갚는 것’은 진리를 가지고 잘못된 습관을 고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를 알면서 실천하지 않는 것은 주님 앞에 큰 빚을 짓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가지고 자신의 잘못된 습관을 깨닫고 고쳐나간다면 그것은 주님의 빚을 갚는 일이며, 주님께 기쁨을 드리는 일입니다. 주님께서 한 푼도 남김없이 갚으라 하신 것은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교회가 아무리 죄를 짓더라도 그것을 허용하십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지켜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그 악이 선을 넘게 되면, 다시 말해서 그대로 두면 영원히 구원받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를 것 같으면 지체 없이 오셔서 낡은 교회를 폐하시고 교회 안의 남은 자를 데리고 새 교회를 여십니다. 그것이 인류를 구원하시는 주님의 오랜 섭리이며 방법입니다. 교회의 마지막 때 낡은 교회를 폐하시고 새 교회를 세우시는 이 섭리는 개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신앙인들이 주님의 질서에 반하는 삶을 살 때 주님은 어느 정도는 허용하시지만, 도를 넘으면 직접 그의 내면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임재하실 때 진실한 사람들은 주님을 받아들여 주님과 함께 내면의 악과 거짓을 몰아내는 싸움을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한 번 더 거듭납니다. 반대로 진리보다는 세상에 뜻을 둔 위선자들은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시험에서 이길 수 없으며 결국 점점 더 깊이 악의 수렁 속으로 빠져듭니다. 주님은 위선자가 되기 쉬운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하십니다.
첫째는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라 하십니다. 이 말씀은 겉 사람의 자아로부터 진리를 바라보지 말고 속 사람에 계신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를 분별할 수 있으며, 그를 붙잡고 있는 위선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진리 안에서 근면하라 하십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진리 안에서 근면한 것은 진리에 반하는 일은 하지 않고 진리에 합당한 일은 게으름 부리지 않고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진리에 반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만, 게으름 부리지 않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지는 모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대단히 중요합니다. 진리의 명령 앞에서 게으름을 부릴 때 어둠이 내려앉는 것처럼 악하고 거짓된 것이 삶 가운데 은밀하게 내려앉습니다. 신앙인들은 그렇게 해서 지옥에 갇히게 되는데요, 그러므로 진리 안에서 근면해야 합니다. 항상 속 사람으로부터 진리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빛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호6:3)
9592.이 장에서는 성소와 장막에 의해서는 이층천, 즉 중간 천국이, 그리고 그 안에 이들 제작된 것들에 의해서는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이 표상되고 있으며, 이어 성소와 지성소, 즉 증거궤 사이 휘장(the veil between the habitation and the ark of the testimony)에 의해서는 이 천국과 가장 내적 천국(the inmost heaven)을 연결하는 중간 천국이 표상되고 있습니다.In this chapter the second or middle heaven is represented by the habitation and the tent; and the celestial and spiritual things therein are represented by the things of which these were constructed. And afterward the intermediate that unites this heaven and the inmost heaven is represented by the veil between the habitation and the ark of the testimon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