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25, AC.9443–9584

성소를 지을 예물 (1-9절, AC.9371-9483)

증거궤 (10-22절, AC.9484-9525)

진설병을 두는 상 (23-40절, AC.9526-9577)

 

9455.이 장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은 성막(聖幕, the tabernacle)과 그 안에 있는 상들, 그리고 아론의 의복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들(the collection)인데요, 거기다가 증거궤(證據櫃, the ark), 진설병을 위한 상(陳設餠, the table for the bread), 그리고 등잔대(燈盞臺, the lampstand)를 만드는 것(the construction)도 포함입니다. 이것들은 주님이 계신 천국들, 그리고 천적이고 영적인(天的, 靈的, the celestial and spiritual things) 모든 것을 표상하는데요(表象, represented), 이것들은 모두 그 안에 계신 주님으로 말미암는 것들이지요. 성막은 천국 그 자체를 표상합니다. 그 안의 증거궤는 가장 내적 천국을, 궤 안에 있는 언약의 돌판(the testimony or law)은 주님을, 상 위 진설병과 등잔대는 천적인 것들을, 아론의 의복은 영적인 것들을 표상하며, 이들은 모두 천국에 계신 주님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In this chapter is described the collection that was made for the tabernacle, for the tables therein, and also for the garments of Aaron; likewise the construction of the ark, of the table for the bread, and of the lampstand; by which were represented the heavens where the Lord is, and all the celestial and spiritual things which are from the Lord therein. By the habitation was represented heaven itself; by the ark in it, the inmost heaven; by the testimony or law in the ark, the Lord; by the breads of faces upon the table, and by the lampstand, the celestial things; and by the garments of Aaron the spiritual things, which are from the Lord in the heave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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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24, AC.9363–9442

 

시내산에서 언약을 세우다 (1-11절, AC.9371-9412)

시내산에서 사십 일을 있다 (12-18절, AC.9413-9437)

 

9370. 이 장에서 다루는 주제는 그 속뜻으로는 천국을 통해 주님이 주시는 말씀 및 그 말씀의 본성(what is the nature of it), 곧 말씀은 속뜻으로나 겉뜻으로나 신성하며(it is Divine), 말씀을 통해 주님과 사람 간 결합이 있다는 사실들입니다. The subject treated of in the internal sense is the Word given by the Lord through heaven; what is the nature of it; that it is Divine in both senses, the internal and the external; and that through it there is conjunction of the Lord with 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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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드린 것처럼,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 사람들은 특별히 무슨 신학교육 같은 거를 받지 않아도 주님으로부터 천사들처럼 퍼셉션(perception)이라는 것을 받아 모든 걸 통찰, 지각하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 시대에는 주님에 관한 진리들을 오늘날처럼 신학적 교리로 정돈하는 걸 무척 꺼리며 삼가던, 불편해 하던 시대였습니다.

 

이는 예를 들면, 선하고 착한 사람들한테 주님을 생활과 삶으로 보여주지는 않고, 대신 교리교육으로만 가르치려 할 때, 그들이 낯설어 하고 힘들어 하는 것과 같은 것이지요.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 그 시대에 벌써 주님에 관한 진리들을 수집, 체계화된 교리로 정돈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는데요, 이들이 바로 에녹이라 하는 사람들, 혹은 교회입니다.

 

주님 보시기에, 인류는 나중에는 결국 기록된 말씀을 가지고 교리로 주님과 연결될 것이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므로 그들을 잠시 따로 떼어 보관하시는데요, 그것이 바로 우리가 아는 말씀,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5:24)

 

의 배경, 속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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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23, AC.9239–9362

 

공평에 관한 법 (1-9절, AC.9247-9270)

안식년과 안식일에 관한 법 (10-13절, AC.9271-9284)

세 가지 절기에 관한 법 (14-19절, AC.9285-9301)

명령과 약속 (20-33절, AC.9302-9362)

 

9246. 이 장에서 다루는 주제는 그 속뜻으로는 교리에 관한 거짓들, 그리고 삶에 관한 악들을 피하는 것이며, 이렇게 될 때, 교리에 관한 진리들, 그리고 삶에 관한 선들이 심어지고, 그리고 이를 통해 교회에 속한 사람이 주님으로 말미암아 거듭난다는 것입니다. In this chapter the subject treated of in the internal sense is the shunning of the falsities of doctrine and of the evils of life; and that when this is done, truths of doctrine and goods of life are implanted, and through these the man of the church is regenerated by the L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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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22, AC.9112–9238

 

배상에 관한 법 (1-15절, AC.9124-9186

도덕에 관한 법 (16-31절, AC.9187-9231)

 이 절 넘버링은 현 성경 넘버링, 원본은 히브리 성경 넘버링을 따름

 

9123. 이 장에서 다루는 주제는 그 속뜻으로는 신앙의 진리와 체어리티의 선(the truth of faith and the good of charity)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가해진 상처(injuries)와 그 수정(amendment), 회복(restoration), 그리고 그러한 상처가 소멸될 때 필요한 도움(aid)입니다. 그 후에는 신앙의 진리에 대한 가르침을 다루며, 끝으로 체어리티의 선 안에 있을 때, 즉 사람이 선을 행할 때, 그 사람의 삶(생명)의 상태를 다룹니다. The subject treated of in this chapter in the internal sense is the injuries occasioned in various ways to the truth of faith and the good of charity, and their amendment and restoration; also the aid to be brought should they be extinguished. Afterward instruction in the truths of faith is treated of; and lastly, the state of a man’s life when he is in the good of char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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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21, AC.8958–9111

 

종에 관한 법 (1-11절, AC.8972-9005)

폭행에 관한 법 (12-27절, AC.9006-9063)

임자의 책임 (28-36절, AC.9064-9097)

배상에 관한 법 (37절, AC.9098-9103)

 

※ 37절을 21장에 포함시킨 것은 히브리 성경을 따른 것입니다. KJV에서는 22장 1절입니다.

 

8970.이 장에서 다루는 주제는 그 속뜻으로는 자신들이나 다른 사람들 안에 있는 신앙의 진리나 체어리티의 선(the truth of faith or the good of charity)을 해치거나 파괴하는 사람들에 관한, 즉 벌은 무엇이고, 회복은 무엇인지(what is the penalty; and what the restoration)에 관한 것입니다. 여기서는 그런 것들이 종과 관련된 판결이나 법, 동료나 종에게 가한 사망이나 상해, 뿔로 받는 소와 구덩이와 관련된 판결이나 법에 들어있습니다. In this chapter in the internal sense the subject treated of is those who injure or destroy, in themselves or in others, the truth of faith or the good of charity; what is the penalty; and what the restoration. Such things are here involved in the judgments or laws relating to servants, to the death or injury occasioned to companions or to servants, also relating to oxen that strike with the horn, and to a pit.

 

8971.말씀의 거룩함, 아니 지극히 거룩함(most holy)은 교회 안의 모든 사람에게 알려져 있습니다. 신앙의 진리 안에 있고, 그에 따른 삶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인정뿐 아니라 지각도(not only acknowledged, but is also perceived) 하는데요, 말씀을 읽을 때 그들은 거룩함에 대한 생각 가운데 계속 있기(continually kept in the idea of what is holy) 때문이지요. 그러나 반대로 신앙의 진리 안에도, 더욱 그에 따른 삶 가운데에도 있지 않은 사람들은 말씀 안의 그 어떤 거룩함도 인정은 고사하고 지각조차 못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말씀을 읽을 때 기록된 것 말고는 다른 더 깊은 것은 못 보는데요, 이들은 마음속으로는 말씀의 거룩함을 부인하고, 속으로 말하길 인간의 글이 더 낫다, 문체에 관한 한 솔직히 사람들이 쓴 글이 더 멋지지 않냐? 합니다. 이런 사실을 저는 저세상에서 어떤 사람들을 만나 생생하게 알게 되었는데요, 그들은 생전에 말씀은 신성을 통해 감동되었다는 사실을 속으로 부인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후 거기서 말씀은 그 일점일획에조차(as to every jot and smallest point) 거룩하고 신성함으로 충만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이것이 말씀 어디에서 나올 수 있는지 경탄해 마지않았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그들은 더 놀라운 말들을 듣고, 또 그 실상을 보았는데요, 말씀 안에 있는 모든 것에는 글자 상으로는 안 보이는 속뜻, 영적인 뜻이 있으며, 사람이 말씀을 읽을 때, 천국 천사들은 바로 이 속뜻과 함께한다는(this sense of the Word is with the angels in heaven) 사실입니다. 그들은 이런 사실을 보았으므로 그래서 인정은 했지만, 그러나 자기들은 세상에 있을 때 이런 사실을 몰랐으며, 그러므로 자기들은 비난에서 자유로운 거 아니냐는 거였습니다만, 그러나 이와 같은 사람들을 조사해 보니 이들은 살아생전, 그 어떠한 양심의 제약도 없이 그저 자기들이 좋아했던 그대로의 삶을 살아왔고, 그 결과 마음속으로 신(the Divine), 천국과 지옥, 죽음 이후의 삶, 그리고 신앙 관련 다른 모든 문제를 부인해왔으며, 이것이 그들로 하여금 말씀의 거룩함을 그동안 모르고 살아오게 한 원인이었다는 사실을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 신앙의 진리들, 그리고 그에 따른 삶 가운데 있어 온 모든 사람은 말씀의 거룩함을 붙들고, 그리고 또한 말씀을 읽는 동안, 과연 그렇다는 것을 속으로 지각해 오고 있었음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로써 그들은 자기들이 그렇게 살아온 원인이 말씀이 아닌, 그들 자신에게 있었음을 확실하게 인식했습니다. 선한 삶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그 내면이 천국을 향해 열려 있어 말씀의 거룩함이 천사들로부터 흘러 들어오지만, 반면, 악한 삶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그 내면이 천국을 향해서는 닫혀 있고, 대신 지옥을 향해 열려 있어 그 반대로 흘러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That the Word is holy, nay, most holy, is known to everyone within the church. This is not only acknowledged, but is also perceived, by those who are in the truths of faith and in a life according to them, for when reading the Word they are continually kept in the idea of what is holy. But those who are not in the truths of faith and in a life according to them do not acknowledge, still less perceive, anything of holiness in the Word. When these persons read the Word, they do not see anything higher in it than in any other writing. And they who in their hearts deny the holiness of the Word also say to themselves when they read it, that the writings of men are finer, because insofar as regards the literal sense they are composed in a finer style. This has been shown me by living experience with regard to those in the other life who in their hearts have denied that the Word has been inspired by the Divine. But when they were told that the Word is holy and Divine as to every jot and smallest point in it, they stood amazed, and marveled whence this could be. And when they were told further, and also shown to the life, that all things which are in the Word contain in them a spiritual sense which does not appear in the letter, and that this sense of the Word is with the angels in heaven when the Word is being read by man, they then acknowledged it because it was shown; but they said that they did not know this in the world, and that because they did not know it, they are free from blame. But when these same persons were examined, it was observed that they had lived just as they liked, without any restraints from conscience, and had therefore at heart denied the Divine, heaven and hell, the life after death, and all other matters of faith, and that this was the cause of their not having acknowledged the holiness of the Word. And it was further shown that all those who have been in the truths of faith and in a life according to them, have held the Word to be holy, and have also while reading it perceived in themselves that it is so. From this they were convinced that the cause was not in the Word, but in themselves. For with those who are in a life of good the interiors are open into heaven, whence the holiness of the Word flows in from the angels; whereas with those who are in a life of evil the interiors are closed toward heaven, but are open into hell, whence there flows in the contrary.

 

[2] 이 장에 나오는 남종, 여종, 그리고 소에 관한 판례나 율법(the judgments or laws)을 예로 들어 보지요. 악한 삶 가운데 있어 말씀의 거룩함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이런 판례나 율법 그 어디에 무슨 신성(Divine)이 있느냐 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자유인이 되지 않겠노라 하는 남종은 문이나 문설주 앞으로 갈 것이요, 그의 상전은 그의 귀를 송곳으로 뚫을 것이요, 그에 따라 그는 그를 종신토록 섬길 것이라는 판례, 매를 맞은 남종이 하루나 이틀을 연명하면, 그를 친 그의 상전은 형벌을 면할 것이라는, 그 이유는 그는 상전의 재산이기 때문이라는 판례, 상전에 의해 눈이나 이를 잃을 경우, 그에 대한 보상으로 그 남종은 놓임을 받을 것이라는 판례, 뿔로 받는 소는 돌로 쳐서 죽일 것이라는, 그리고 그 밖에도 거기 언급된 다른 많은 판례 등이 있지요. 속으로 말씀의 거룩함(the holiness of the Word)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이런 내용은 말씀이라 할 가치가 없으며, 시내 산에서 여호와께서 친히 구술하신(dictated by Jehovah Himself) 것이라고 하기에는 더더욱 하찮은 것으로 여깁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에 나오는 다른 모든 것 역시, 그게 역사적이든 예언적이든 똑같이 여기는데요, 그들이 그렇게 여기는 이유 역시 같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악한 삶 때문에 천국이 그들에게 닫혀 있기 때문이며, 결과적으로 그들은 뒤집힌 지각(a contrary perception), 거꾸로 된 지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한 삶 가운데 있는 사람들의 경우는 완전히 다릅니다. Take for example the judgments or laws in this chapter about menservants, maidservants, and oxen. They who deny the holiness of the Word, because they are in a life of evil, will say that in these judgments or laws they do not see anything Divine—as when it is said that a manservant who does not desire to go away free should be brought to a door or a doorpost, and his master should bore through his ear with an awl, and accordingly he should serve forever; also that if a manservant who is smitten shall live a day or two, his master who smote him shall not be punished, because he is his silver; as also that a manservant should be free for the loss of an eye or a tooth; and that an ox striking with the horn should be stoned, besides the other things there mentioned. They who in their hearts deny the holiness of the Word regard these things as not worthy of the Word, and still less worthy to be dictated by Jehovah Himself on Mount Sinai; in like manner do they regard all other things that are in the Word, whether historical or prophetical. But the reason why they so regard them is that heaven is closed to them on account of their life of evil, consequently they have a contrary perception. The case is quite different with those who are in a life of good.

 

[3] 천국에서 유입되는(which flows in from heaven) 말씀의 거룩함이 말씀 어디에서 오는 건지는 지금까지 말씀드린, 그리고 보여드린 말씀의 속뜻(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을 가지고 분명한데요, 즉 말씀에만 이 속뜻이라는 게 있으며, 이 속뜻은 천국에 속한, 즉 영생에 관한 그런 것들을 다룬다는 사실, 그리고 가장 내적으로는(內的, inmostly) 오직 주님에 관한 것만, 그래서 거룩한 것, 그 자체로 가장 거룩하고 신성한 것들(of holy things, nay, of Divine things themselves which are most holy)을 다루며, 또 이 속뜻이라는 것은 사람이 말씀을 읽는 동안 그와 함께한 천사들을 위한 것이라는 거, 결과적으로 신앙과 체어리티의 삶을 사는 사람들한테 거룩함에 관한 인플럭스와 그에 관한 퍼셉션(an influx of holiness, and a perception of it)이 함께하는 것은 이 속뜻으로 말미암음이라는, 이상의 사실들이 말씀의 속뜻과 관련, 모두 지금까지 말씀드려 왔고, 보여드려 온 것입니다. 이 장에 나오는 남종과 여종, 소에 관한 판례나 율법에 대한 말씀인데요, 속뜻으로는 이 안에 다음과 같은 것들, 곧 신앙의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에 관한, 그리고 신앙과 체어리티(charity)에 속한 것들과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에 속한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거나 파괴하려는 자들에 관한, 그리고 가장 깊은, 가장 높은 뜻으로는, 주님을 직접 그 상해와 파괴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자들에 대한 신성한 질서, 주님의 질서(Divine order)에 관한 것들이 들어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통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은 이 판례들 안에 얼마나 거룩한 것들이 들어 있는가 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 글자 상으로는(in the letter) 이런 것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Whence comes the holiness of the Word which flows in from heaven, is evident from all that has hitherto been said and shown about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namely, that the Word alone has an internal sense, and that this sense treats of such things as belong to heaven, which are the things of eternal life, and that inmostly it treats of the Lord alone, thus of holy things, nay, of Divine things themselves which are most holy; and that this sense is for the angels who are with man while the Word is being read, consequently that there is from this source an influx of holiness, and a perception of it, with those who are in the life of faith and charity. As regards the judgments or laws in this chapter about menservants, maidservants, and oxen, these contain in the internal sense such things as are of Divine order with respect to those who are in the truth of faith, and also with respect to those who injure or destroy the things which belong to faith and charity, and those which belong to love to the Lord; and in the inmost sense, those things which would injure or destroy the Lord Himself. From this everyone can see how holy in themselves these judgments are, however little they appear so in the le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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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20, AC.8853–8957

 

십계명 (1-17절, AC.8860-8925)

백성이 두려워 떨다, 제단에 관한 법 (18-23절, AC.8926-8946)

 

 

8859. 이 장에서 다루는 주제는 그 속뜻으로는 주님의 영적 교회에 속한 사람들한테 있는 선 가운데 심어질 신적 진리들(the truths Divine which are to be implanted in the good with those who are of the Lord’s spiritual church)입니다. 십계명(The ten commandments of the Decalogue)은 바로 그 진리들을 가리킵니다. 장 말미에 이어지는 희생제물들과 제단에 관한 계명들은 예배에 속한 외적 진리들(the external truths which are of worship)을 가리킵니다. In this chapter the subject treated of in the internal sense is the truths Divine which are to be implanted in the good with those who are of the Lord’s spiritual church. The ten commandments of the Decalogue denote these truths. The commandments concerning sacrifices, and concerning the altar, which follow in this chapter, denote the external truths which are of worsh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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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19, AC.8742–8852

 

이스라엘 자손이 시내산에 이르다 (1-25절, 장 전체, AC.8749-8845)

 

8748. 지금부터 이어지는 주제는 그 속뜻으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천국에서 나오는 신적 진리에 관한 계시(the revelation of truth Divine from the Lord out of heaven)이며, 이 장에서는 그것을 받을 준비에 관한 것입니다. In what now follows, the subject treated of in the internal sense is the revelation of truth Divine from the Lord out of heaven, and in this chapter the preparation for receiving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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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09-10(D1)-주일예배(2503, 눅12,49-53),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pdf
0.37MB

https://youtu.be/9o9EVXAqlLQ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49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5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51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52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53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눅12:49-53)

 

 

주님이 오시기 전에는 교회 안에 거짓과 악밖에 없어서 분쟁이 없었다. 그러나 주님에 의해 진리와 선이 밝혀지자 비로소 분쟁이 일어났다. 진리와 거짓, 선과 악 간의 분쟁이 없으면 개혁이 이루어질 수 없다 (계시록 해설 504:31) for before the Lord came into the world there were in the church nothing but falsities and evils, consequently there was no combat between these and truths and goods; but when truths and goods had been unveiled by the Lord, then it was possible for combats to exist, and without combats between these there can be no reformation; (AE.504:31)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그곳에는 가나안 원주민들, 즉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그리고 여부스 족속이 이미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들을 그 땅에서 모두 몰아내라 하셨지요. 그러나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는 가나안 도착과 함께 주님 명하신 대로 처음 땅 분배를 받아 흩어진 후, 자기 땅에 있는 가나안 사람들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완전히는 몰아내지들을 못했습니다. 두려움 때문일 수도 있고 그동안 너무 지쳤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유야 어떻든 그것은 잘못된 선택이었고, 사람이 주님을 끝까지 의뢰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하는 문제였는데요,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후 끊임없이 이 남은 가나안 원주민들에게 괴롭힘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 신앙인들도 악과 타협할 때가 있는데요, 그렇게 악과 타협할 때는 일시적으로는 평화를 얻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곧 전보다 더 큰 악에 시달리게 되는데요, 그리고 그렇게 시달릴 대로 시달리고 나서야 진리와 거짓, 선과 악은 절대 타협할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게 됩니다. 영적 전쟁에서는 어느 한쪽이 살기 위해서는 다른 한쪽은 반드시 죽어야 하는 것이며, 그래서 둘 사이에는 싸움이 그치지를 않습니다. 거듭나기 전에는 누구나 다 이렇게 내적 싸움을 하는데요, 그런데 이런 내적 싸움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바로 진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의 경우인데요,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자아와 세상의 욕망을 좇아 사는 것이 악이며 거짓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라면 내적 싸움이 없다는 게 오히려 참 씁쓸한 케이스가 되겠네요. 그런가 하면 진리를 알면서도 내적 싸움을 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세상 유혹을 이기지 못해 습관적으로 악을 행하는 사람의 경우인데요, 죄를 반복해서 짓다 보면 나중에는 죄를 지으면서도 수치심이나 굴욕감, 죄의식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들은 거짓을 진실이라 하고 진실을 거짓이라 뒤집기도 합니다. 내적 싸움이 없기 때문에, 겉으로 보면 자유롭고 평온해 보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평화도 아니고 자유도 아닙니다. 지옥에 사로잡혀 있는 것일 뿐이지요.

 

그러면 진정한 평화, 진정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와 관련해 오늘 본문 49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9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주님께서는 불을 땅에 던지러 왔다 하십니다. 불은 무슨 뜻일까요? 선과 악, 진실과 거짓 사이에 벌어지는 내적 싸움을 뜻합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개인이든 사회든 거듭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진실과 거짓, 선과 악 사이에 싸움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 오시기 전 이 세상에는 그런 내적 싸움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참된 진리가 없었기 때문인데요, 진리라는 게 있어야 거짓을 볼 수 있고, 그것과 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세상은 악과 거짓으로 가득했고, 그러므로 구원받을 자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붙잡혀 있는 것과 같은 모습이었지요. 그때 참된 진리이신 주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의미가 있는데요, 첫째는, 인간의 인식을 초월해 존재하셨던 여호와께서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같은 논리로, 그동안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었던 내적 진리가 주님이 오심으로써 이해할 수 있는 진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통해 누구나 내적 진리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인데요, 왜냐하면 아래 요한복음 1장 3절 이하의 증언처럼 주님은 곧 말씀이시며, 그러므로 주님의 인성과 신성이 하나가 되었을 때 말씀의 문자적 의미 안에 내적 진리가 충만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6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7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1:3-14)

 

그러니까 주님의 인성이 문자로 된 성경이라면 내적 진리는 주님 안의 신성, 곧 문자 안에 담긴 영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오신 세 번째 의미는, 인간에게 거듭남의 모범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 이유는 주님이 세상에서 인성과 신성을 하나로 만드시는 과정은 사실은 인간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이 결합하여 하나 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치열한 내적 싸움 없이는 거듭남도 없다는 것인데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5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주님께서는 내가 받을 세례가 있다 하십니다. 말씀에서 세례는 거듭남을 의미하는데요, 그렇다면 주님이 받을 세례는 어떤 것입니까?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로부터 받으신, 유전된 인성(human)을 벗으시고, 당신 안의 여호와께서 주시는 거룩한 인성으로 갈아입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옥과의 치열한 싸움과 승리로만 이루어지는데요, 그래서 인간이 거듭나는 모습과 흡사하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받으실 세례는 주님의 인성과 신성이 하나 되는 것임과 동시에, 주님에 의해 인간이 거듭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시공간 속에서 주님 자신에게 일어나는 세례임과 동시에, 시간을 초월해 모든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세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하신 것입니다.

 

51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라고 말씀하신 것도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분쟁하는 것은 곧 내적 싸움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내적 싸움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그것에 대해 52절과 53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52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53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주님이 오신 다음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둘과 셋으로 나뉘어 싸운다고 합니다. 여기서 숫자 셋은 진리는 진리인데 선이 없는 진리를, 그리고 숫자 둘은 선은 선인데 진리가 없는 선을 말합니다. 선 없는 진리나 진리 없는 선은 둘 다 온전한 것이 아니며, 둘 다 진정한 진리와 선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진리는 이웃을 화합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분열시키는데요, 교회 안에서, 아니면 개인의 마음속에서 이렇게 진리를 가장한 거짓, 또는 선을 가장한 악이 사람들의 마음을 갈라놓을 때가 아주 많습니다. 이것이 한 집에 다섯 사람이 둘과 셋으로 나뉘어 싸우는 것입니다.

 

언젠가 어떤 분이 제게 성경이 우선이냐 성문서, 즉 스베덴보리가 쓴 글이 우선이냐 라는 질문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답하기를, 성경의 문자적 의미는 주님의 인성에 해당하고, 성문서에서 밝히는 말씀의 내적 의미는 주님 안에 있는 신성과 통합니다. 주님의 인성과 신성이 하나이듯 그 둘은 하나이며, 똑같이 중요합니다 라고 말이지요. 만약 교회 안에서 어떤 이는 성경이 우선이라 하고, 어떤 이는 성문서가 우선이라 한다면 그런 것이 바로 둘과 셋으로 나뉘어 싸우는 것이며, 그러므로 그런 생각은 진리를 가장한 거짓입니다.

 

또 한 번은 새 교회에서는 진리 진리 하는데 진리보다는 사랑이 먼저가 아니냐고 하는 분도 계셨습니다. 그래서 사랑이 먼저이지만 진리를 알아야 올바른 사랑을 할 수 있으니 진리나 사랑이나 똑같이 소중합니다 말씀드렸는데요,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말씀드려도 듣지 않는 분은 안 듣습니다. 사소한 것 같지만 교회 안에 이런 분쟁이 가끔 생기는데요, 이걸 잘 관리하지 못하면 자칫 교인들 간 분열이 일어나고 맙니다.

 

그러면 아버지와 아들이, 어머니와 딸이 분쟁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 아버지는 자아의 악을 뜻하고 아들은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이 분쟁하는 것은 자아의 악이 진리를 대적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 어머니는 자아의 욕망을 뜻하고 딸은 진리에 대한 애정을 뜻합니다. 그래서 어머니와 딸이 싸우는 것은 자아의 욕망과 진리에 대한 애정이 서로 싸우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이 진리에 따라 살려고 할 때, 언제나 이런 내적 갈등을 경험합니다. 자아가 원하는 것들은 대개 세상 물질과 쾌락, 명예 같은 것인데 하나님의 진리는 주님과 주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라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적 싸움이 있어야 우리는 영적으로 크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 오시기 전 당시 세상은 암흑 상태였습니다. 그때는 모든 사람이 자기 욕심껏 사는 것이 선이며 정의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웃에게 악을 행하거나 거짓말을 하면서도 양심의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상태로는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완전한 진리의 능력으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이 당신의 인성을 거룩하게 만드셨을 때, 말씀의 문자적 의미 또한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자연계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이루어지기까지는 몇 가지 과정이 필요했는데요, 먼저, 문자로 된 신구약 성경이 인류에게 주어졌고, 그 다음에 말씀의 내적 의미가 밝혀진 것입니다. 그래야 온전한 말씀이신 주님이 오신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전자의 일은 주님이 부활하신 후 1500년이 지난 후, 가톨릭 사제들에 의해 독점되었던 성경이 평신도에게 돌아옴으로써 이루어집니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그때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후자의 일은 그로부터 250년 후에 주님의 종 스베덴보리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다시 250년이 흘러 극동의 한 작은 나라인 대한민국에까지 이 말씀의 내적 의미가 전해졌습니다. 그렇게 해서 모든 인류가 완전한 진리를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참된 기독교’ 508번 글은 지금은 누구나 신앙의 신비를 이해할 수 있는 시대라고 선언합니다. 말씀의 문자적 의미가 내적 의미로 인해 이제 완전하고 거룩한 말씀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진리가 바로 그 완전하고 거룩한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주님이 주신 이 진리를 가지고 각자 내면의 악과 싸워야 할 때입니다. 주님이 인성을 거룩하게 하신 것처럼 우리도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1:14)

 

 

원본

2020-09-06(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9-10(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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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18, AC.8635–8741

 

이드로가 모세를 방문하다 (1-12절, AC.8642-8682)

우두머리를 세워 재판하게 하다 (13-27절, AC.8683-8732)

 

8641. 이 장에서 다루는 주제는 속뜻으로는 처음부터 끝까지 연속적인 순서, 질서를 보이는 진리들이며, 신적 선(good Divine)에 의한 순서, 질서로 되어 있습니다. 맨 첫 단계 진리는 모세이며, 그로부터 연속적으로 파생된 진리들이 천부장과 백부장, 오십부장과 십부장입니다. 그리고 신적 선은, 이 신적 선으로 말미암아 순서, 질서가 세워졌는데요, 바로 모세의 장인 이드로입니다. The subject treated of in the internal sense in this chapter is truths in successive order from the First to the last, and that they are set in order by good Divine. Truth in the first degree is represented by Moses; the truths derived therefrom in successive order are represented by the princes of thousands, of hundreds, of fifties, and of tens. And good Divine, by which the setting in order is effected, is represented by Jethro, Moses’ father-in-la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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