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나의 대적이 이것을 보고 부끄러워하리니그는 전에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 여호와가 어디 있느냐 하던 자라그가 거리의 진흙같이 밟히리니 그것을 내가 보리로다11네 성벽을 건축하는 날 곧 그날에는 지경이 넓혀질 것이라12그날에는 앗수르에서 애굽 성읍들에까지, 애굽에서 강까지,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이 산에서 저 산까지의 사람들이 네게로 돌아올 것이나(미7:10-12)My she-enemy hath said,Where is Jehovah thy God?The day in which he shall build thy walls[macerias],that day shall the decree be far removed;that day also he shall come even to thee from Asshur,and to the cities of Egypt,and to the river[Euphrates](Micah 7:10–12).
이 구절이AC.120에 인용된 이유는, 앞선AC.118–119에서 세워진 ‘애굽–앗수르–브랏’이라는 구조, 곧 ‘기억 지식–이성–경계(최외곽)’의 질서가 단절이 아니라 ‘회복된 연결’로 작동할 때 어떤 상태가 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본문을 통해, 흩어져 있던 인간 내면의 기능들이 다시 하나로 모여 ‘성벽이 세워지는’ 상태, 곧 거듭남의 질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앗수르에서 애굽 성읍들에 이르고, 다시 ‘강’ 곧 브랏까지 이어진다는 표현은, 이성이 기억 지식과 연결되고, 그 흐름이 가장 바깥 경계까지 미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이동이나 확장이 아니라, ‘내면의 각 층위가 서로 단절되지 않고 질서 있게 이어지는 상태’를 말합니다. 곧 위로부터 오는 유입이 이성을 거쳐 기억 지식까지 내려가고, 다시 그 전체가 하나의 방향으로 묶이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성벽을 건축하는 날’이라는 표현이 이 구절의 핵심입니다. 성벽은 보호와 질서를 의미합니다. 이는 외적 인간, 곧 겉 사람이 이제 무너져 있는 상태가 아니라, ‘내적 질서에 따라 정돈되고 보호되는 상태’가 되었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지경이 넓어진다고 말하는데, 이는 단순한 영역 확장이 아니라, 주님의 질서가 인간 전체에 더 넓게 미친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이 산에서 저 산까지’라는 표현은, 인간 안의 모든 차원, 곧 가장 낮은 감각적 영역에서부터 가장 높은 영적 영역까지가 ‘하나의 질서 안으로 통합된다’는 뜻입니다. 이는AC.119에서 말한 ‘애굽–앗수르–이스라엘의 조화’가 실제로 이루어진 상태를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단순히 앗수르와 애굽이 언급되었기 때문에 인용된 것이 아니라, ‘이성,기억 지식,그리고 그 경계까지 포함한 인간 전체가 주님을 향해 다시 모이고 연결되는 회복의 장면’이기 때문에 인용된 것입니다.
정리하면, 이 미가서 본문은 인간 내면의 기능들이 흩어져 제각각 작동하던 상태에서, 다시 하나의 길로 연결되어 주님께 돌아오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통해, 이성은 고립된 능력이 아니라 기억 지식과 함께 주님께로 돌아올 때에만 참된 역할을 하며, 그 전체가 회복될 때 비로소 ‘성벽이 세워지는’ 영적 상태가 된다는 것을 확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애굽’(Egypt)이 기억 지식을 의미하는 것처럼, ‘유브라데 강’(Euphrates)도 기억 지식, 그리고 그 지식이 나오는 감각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예언서들에 나타난 말씀에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미가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As by “Egypt,” so also by “Euphrates,” are signified memory-knowledges, and also the sensuous things from which these knowledges come. This is evident from the Word in the prophets, as in Micah:
10나의 대적이 이것을 보고 부끄러워하리니 그는 전에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 여호와가 어디 있느냐 하던 자라 그가 거리의 진흙같이 밟히리니 그것을 내가 보리로다 11네 성벽을 건축하는 날 곧 그날에는 지경이 넓혀질 것이라12그날에는 앗수르에서 애굽 성읍들에까지, 애굽에서 강까지,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이 산에서 저 산까지의 사람들이 네게로 돌아올 것이나 (미7:10-12)My she-enemy hath said, Where is Jehovah thy God? The day in which he shall build thy walls [macerias], that day shall the decree be far removed; that day also he shall come even to thee from Asshur, and to the cities of Egypt, and to the river [Euphrates] (Micah 7:10–12).
예언자들은 주님께서 오셔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고, 그로 하여금 천적 인간과 같은 상태가 되게 하실 것을 이와 같이 말하였습니다. 예레미야서에서도 말합니다. So did the prophets speak concerning the coming of the Lord who should regenerate man so that he might become like the celestial man. In Jeremiah:
네가 시홀의 물을 마시려고 애굽으로 가는 길에 있음은 어찌 됨이며 또 네가 그 강물을 마시려고 앗수르로 가는 길에 있음은 어찌 됨이냐(렘2:18)What hast thou to do in the way of Egypt, to drink the waters of Sihor? Or what hast thou to do in the way of Asshur, to drink the waters of the river [Euphrates] (Jer. 2:18)?
여기서도 ‘애굽’(Egypt)과 ‘유브라데 강’(Euphrates)은 기억 지식을 의미하고, ‘앗수르’(Asshur)는 그로부터 나온 추론을 의미합니다. 다윗의 시편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where “Egypt” and “Euphrates” likewise signify memory-knowledges, and “Asshur” reasonings thence derived. In David:
8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나이다, 11그 가지가 바다까지 뻗고 넝쿨이 강까지 미쳤거늘(시80:8, 11)Thou hast made a vine to go forth out of Egypt; Thou hast cast out the nations; Thou hast planted her; Thou hast sent out her shoots even to the sea, and her twigs to the river (Euphrates) (Ps. 80:8, 11),
여기서도 ‘유브라데 강’(river Euphrates)은 감각적인 것과 기억 지식에 속한 것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유브라데 강은 이스라엘 땅이 앗수르 쪽으로 미치는 경계였는데, 이는 기억 지식이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지성과 지혜에 있어서 경계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같은 의미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에서도 나타납니다. where also the “river Euphrates” signifies what is sensuous and of the memory [sensuali et scientifico]. For the Euphrates was the boundary of the dominions of Israel toward Assyria, as the knowledge of the memory is the boundary of the intelligence and wisdom of the spiritual and celestial man. The same is signified by what was said to Abraham:
그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창15:18)Unto thy seed will I give this land, from the river of Egypt unto the great river, the river Euphrates (Gen. 15:18).
이 두 경계는 동일한 의미를 지닙니다. These two boundaries have a like signification.
해설
이 단락은 창세기 2장의 네 번째 강, 곧 유브라데 강이 왜 ‘경계’로 불리는지를 명확히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자리입니다. 앞선 AC.118–119에서 이성과 기억 지식의 질서가 제시되었다면, AC.120은 그 구조의 ‘가장 바깥선’을 그어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일관되게 말합니다. 애굽과 유브라데는 모두 기억 지식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단순한 정보 차원이 아니라, ‘감각에서 시작된 지식’까지 포함하는 가장 외적인 층위입니다. 기억 지식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 자체가 목적이 되면 더 이상 안쪽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유브라데는 ‘마지막 단계’이자 ‘경계’입니다.
미가서의 예언은 이 구조를 회복의 관점에서 보여줍니다. 성벽이 다시 세워지고, 규례가 회복되는 날에, 앗수르와 애굽, 그리고 유브라데로부터 사람들이 온다고 말합니다. 이는 이성(앗수르), 기억 지식(애굽), 감각적 기억의 경계(유브라데)가 모두 ‘주님의 거듭남의 역사 안으로 다시 불려 들어오는 장면’입니다. 곧, 외적인 것들이 내적인 질서로 재편입되는 순간입니다.
예레미야서의 질문은 반대로 경고의 의미를 띱니다. 왜 애굽의 물을 마시려 하느냐, 왜 앗수르와 유브라데의 물을 마시려 하느냐는 질문은, 인간이 ‘외적 지식과 이성적 추론을 근원으로 삼으려는 태도’를 책망합니다. 기억 지식과 이성은 마셔야 할 생명수가 아니라, 질서 안에서 사용되어야 할 도구입니다.
시편의 포도나무 비유는 매우 섬세합니다. 포도나무는 교회와 인간의 내적 생명을 의미합니다. 그 가지가 바다까지, 그리고 유브라데까지 뻗는다는 것은, 생명의 영향력이 ‘감각과 기억의 최외곽까지 미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가지가 뻗는 것과 뿌리가 거기 있다는 것은 다릅니다. 뿌리는 여전히 주님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결정적인 문장을 덧붙입니다. 유브라데가 이스라엘의 경계였던 것처럼, 기억 지식은 지성과 지혜의 경계라고 말입니다. 경계는 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지켜야 할 선’입니다. 그 선을 넘으면 질서가 무너지고, 그 안에 머물면 모든 것이 안전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인 애굽 강에서 유브라데까지는 이 전체 구조를 요약합니다. 주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신 영역은, ‘가장 외적인 기억 지식부터 가장 내적인 지성까지 전부’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질서 안에서만 ‘기업’이 됩니다.
AC.120은 이렇게 말합니다. 기억 지식은 끝이 아니라 경계이며, 그 경계를 지킬 때에만 이성과 지성, 그리고 사랑의 지혜가 자기 자리를 잃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네가 시홀의 물을 마시려고 애굽으로 가는 길에 있음은 어찌 됨이며 또 네가 그 강물을 마시려고 앗수르로 가는 길에 있음은 어찌 됨이냐(렘2:18)What hast thou to do in the way of Egypt,to drink the waters of Sihor?Or what hast thou to do in the way of Asshur,to drink the waters of the river[Euphrates](Jer. 2:18)?
이 구절이 AC.120에 인용된 이유는, 앞서 세워진 ‘애굽–앗수르–브랏’의 구조가 **올바르게 연결될 때의 복된 상태뿐 아니라, 그 질서가 뒤틀릴 때 어떤 왜곡이 생기는가**를 함께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미가서가 ‘회복된 연결’을 보여주었다면, 이 예레미야 구절은 그 반대로 **잘못된 의존과 왜곡된 흐름**을 드러냅니다.
먼저 애굽과 앗수르, 그리고 ‘그 강’ 곧 브랏은 동일한 상응 구조를 유지합니다. 애굽은 기억 지식, 앗수르는 이성, 브랏은 그 이성이 의지하는 최외곽의 지식 영역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본문은 이 세 곳으로 ‘가서 물을 마신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물을 마신다는 것은 **생명의 근원을 거기에서 얻으려 한다는 뜻**입니다.
문제는 방향입니다. 본래 질서는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거쳐 이성으로, 그리고 기억 지식으로 내려오는 흐름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반대가 일어납니다. 사람이 위로부터 받지 않고, **아래에 있는 기억 지식과 이성에서 생명을 얻으려는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애굽으로 가는 길’, ‘앗수르로 가는 길’이라고 표현됩니다. 이는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마음의 방향이 잘못 설정된 상태를 뜻합니다.
특히 ‘앗수르로 가서 그 강물을 마신다’는 말은, 이성을 통해 얻은 이해와 논리를 **최종 기준으로 삼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성은 본래 통로인데, 그것을 근원으로 삼는 순간, 사람은 자기 생각과 판단에 의존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애굽의 물을 마신다는 것은 기억 지식과 경험, 정보 자체를 생명의 근거로 삼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단순히 ‘애굽과 앗수르를 경계하라’는 말이 아니라, **유입의 방향이 뒤집힌 상태를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와야 할 것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려 할 때, 곧 기억 지식과 이성이 스스로 근원이 되려 할 때, 그것은 참된 생명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왜곡을 낳게 됩니다.
AC.120의 흐름에서 보면, 이 구절은 매우 중요한 균형을 잡아 줍니다. 인간 안의 기억 지식과 이성과 지성은 서로 연결되어야 하지만, 그 연결은 반드시 ‘주님으로부터 시작되는 흐름’이어야 합니다. 이 구절은 그 질서를 벗어난 연결, 곧 **자기 중심으로 엮인 지식과 이성의 결합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보여주기 때문에 인용된 것입니다.
정리하면, 이 예레미야 본문은 ‘어디에서 마시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인간이 생명의 근원을 주님이 아니라 자기 지식과 이성에서 찾을 때 어떤 상태가 되는지를 드러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통해, 이성은 사용할 대상이지 의지할 대상이 아니며, 기억 지식 역시 근원이 아니라 그릇일 뿐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시80:8, 11’
8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나이다,11그 가지가 바다까지 뻗고 넝쿨이 강까지 미쳤거늘(시80:8, 11)Thou hast made a vine to go forth out of Egypt;Thou hast cast out the nations;Thou hast planted her;Thou hast sent out her shoots even to the sea,and her twigs to the river(Euphrates) (Ps. 80:8, 11),
이 구절이 AC.120에 인용된 이유는, 앞에서 계속 다루어진 ‘애굽–앗수르–브랏’의 구조를 **부정이나 경고가 아니라, ‘올바르게 사용될 때의 확장과 결실’이라는 긍정적 장면으로 완성해 주기 위해서**입니다. 예레미야에서는 ‘애굽과 앗수르의 물을 마신다’는 왜곡된 의존이 경고되었다면, 시편 80편은 그와 동일한 요소들이 **주님의 질서 안에 놓일 때 어떻게 살아나는가**를 보여줍니다.
먼저 애굽에서 ‘포도나무를 가져왔다’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애굽은 기억 지식을 의미하지만, 이 본문에서는 그것이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출발점으로 사용됩니다’. 곧 기억 지식은 제거의 대상이 아니라, **주님께서 취하시어 새롭게 심으시는 재료**입니다. 이어서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심으셨다’는 말은, 그 지식 안에 섞여 있던 왜곡과 혼합된 요소들이 제거되고, 순수한 상태로 재정렬되는 것을 뜻합니다.
이제 ‘가지가 바다까지 뻗고 넝쿨이 강까지 미쳤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여기서 바다는 가장 외적인 영역, 곧 감각과 삶의 실제를 의미하고, ‘강’ 곧 브랏은 기억 지식의 경계, 인간 인식의 최외곽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곧, **주님께서 심으신 생명(포도나무)이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가장 바깥 영역까지 모두를 덮고 확장된다**는 뜻입니다.
이 장면이 AC.120에서 중요한 이유는, 같은 애굽과 강(브랏)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에서는 사람이 거기서 ‘물을 마시려’ 했고, 즉 그것을 근원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주님이 먼저 심으시고 자라게 하시며, 그 결과로 가지가 바다와 강까지 ‘뻗어 나갑니다’. 곧 방향이 완전히 다릅니다. 전자는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려는 시도이고, 후자는 위에서 아래로 흘러 내려가며 확장되는 생명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이 구절이 ‘경계까지 이른다’는 표현을 긍정적으로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브랏은 경계이지만, 그 경계는 닫힌 끝이 아니라 **생명이 미치는 범위의 끝**입니다. 즉, 주님으로부터 시작된 생명은 인간의 이성과 기억 지식을 지나, 가장 바깥 영역까지 도달하여 그 전체를 살아 있게 합니다.
정리하면, 이 시편 구절은 AC.120에서 다음을 보여주기 위해 인용됩니다. 기억 지식과 이성, 그리고 그 경계까지 포함한 인간의 모든 층위는 제거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질서 안에 놓일 때 전체가 살아나고 확장되는 영역**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잘못된 의존’과 ‘올바른 확장’을 대비시키며, 동일한 구조가 방향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낳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드러내는 본문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4. ‘창15:18’
그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창15:18)Unto thy seed will I give this land,from the river of Egypt unto the great river,the river Euphrates(Gen. 1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