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3:22)
AC.303
사람은 자신이 확신하게 된 모든 것, 곧 인정하고 믿는 모든 것으로 말미암아 하나의 생명을 형성합니다. 그러나 확신하지 않았거나 인정하지도 믿지도 않는 것은 그의 마음에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것들을 모독(profanation)할 수 있는 사람은, 먼저 그것들을 참된 것으로 확신하여 인정하고 믿은 후에, 다시 그것들을 부인하는 사람뿐입니다.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그것들을 알 수는 있지만, 마치 알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마치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을 알고 있는 사람과 같습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당시의 유대인들이 바로 그러하였습니다. 그래서 말씀에서는 그들이 ‘황폐하게 되었다’(vastated) 또는 ‘황폐함을 당하였다’(laid waste)고 말하는데, 이는 더 이상 어떤 신앙도 가지고 있지 않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말씀의 내적인 내용이 그들에게 열려도 아무런 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보면서도 보지 못하고, 들으면서도 듣지 못하며, 마음이 막혀 있는 사람들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주님께서는 이사야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A man acquires a life by all the things he is persuaded of, that is, which he acknowledges and believes. That of which he is not persuaded, or does not acknowledge and believe, does not affect his mind. And therefore no one can profane holy things unless he has been so persuaded of them that he acknowledges them, and yet denies them. Those who do not acknowledge may know, but are as if they did not know, and are like those who know things that have no existence. Such were the Jews about the time of the Lord’s advent, and therefore they are said in the Word to be “vastated” or “laid waste,” that is, to have no longer any faith. Under these circumstances it does men no injury to have the interior contents of the Word opened to them, for they are as persons seeing, and yet not seeing; hearing, and yet not hearing; whose hearts are stopped up; of whom the Lord says in Isaiah:
9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사6:9, 10) Go and tell this people, Hearing hear ye, but understand not, and seeing see ye, but know not. Make the heart of this people fat, and make their ears heavy, and smear their eyes, lest they see with their eyes, and hear with their ears, and understand with their heart, and be converted, so that they be healed (Isa. 6:9–10).
신앙의 신비가 사람들이 이러한 상태, 곧 더 이상 믿지 않는 상태에 이를 때까지 드러나지 않는 이유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들이 그것들을 모독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에 대하여 주님께서는 같은 예언서의 이어지는 말씀에서도 분명히 선언하십니다. That the mysteries of faith are not revealed until men are in such a state, that is, are so vastated that they no longer believe (in order, as before said, that they may not be able to profane them), the Lord also plainly declares in the subsequent verses of the same prophet:
11내가 이르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였더니 주께서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12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사6:11, 12) Then said I, Lord, how long? And he said, Even until the cities are desolated, so that there be no inhabitant; and the houses, so that there be no man, and the ground be utterly desolated, and Jehovah have removed man (Isa. 6:11, 12).
여기서 ‘사람’(man)은 지혜로운 사람, 곧 인정하고 믿는 사람을 뜻합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주님께서 오셨을 당시 유대인들은 이처럼 황폐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오늘날까지도 그들은 자기들의 탐욕(cupidities), 특히 재물에 대한 탐욕(avarice) 가운데 이러한 황폐한 상태로 보존되고 있습니다. 비록 그들이 주님에 관한 이야기를 천 번을 듣고, 자기들 교회의 모든 표상이 낱낱이 주님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들어도, 아무것도 인정하거나 믿지 않습니다. 홍수 이전 사람들(antediluvians)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더 이상 어떤 진리도 인정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를 때까지 황폐하게 된 이유도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He is called a “man” who is wise, or who acknowledges and believes. The Jews were thus vastated, as already said, at the time of the Lord’s advent; and for the same reason they are still kept in such vastation by their cupidities, and especially by their avarice, that although they hear of the Lord a thousand times, and that the representatives of their church are significative of him in every particular, yet they acknowledge and believe nothing. This then was the reason why the antediluvians were cast out of the garden of Eden, and vastated even until they were no longer capable of acknowledging any truth.
해설
AC.303은 AC.301-302의 결론에 해당하는 단락입니다. 가이드 1.0에 따르면, 이 단락은 독립적으로 읽어서는 안 되며, 반드시 창3:22-24와 AC.301-303 전체, 그리고 마12:31-32, 마13:13, 요12:40, 히6:4-6, 히10:26-29를 하나의 교리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계속 설명하는 주제는 단 하나, 곧 ‘주님께서 사람을 profanation으로부터 어떻게 보호하시는가’입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사람은 자신이 인정하고 믿는 것으로 생명을 형성한다’는 원리를 제시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단순한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사랑과 신앙이 결합되어 형성된 영적 생명입니다. 따라서 어떤 진리를 단순히 들어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그 진리가 사람의 생명이 되지 않습니다. 진리가 생명이 되려면 그것을 참된 것으로 인정하고, 자신의 의지와 삶 속에 받아들여야 합니다.
바로 이 때문에 profanation은 모든 사람이 범할 수 있는 죄가 아닙니다. 진리를 한 번도 인정하지 않은 사람은 그것을 모독할 수도 없습니다. profanation은 먼저 거룩한 진리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 뒤, 다시 그것을 의도적으로 부인하고 악과 결합시키는 데서 일어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마12:31-32의 ‘성령을 모독하는 죄’, 히6:4-6, 히10:26-29와 연결하여 반복해서 설명하는 교리입니다.
이러한 원리에서 ‘황폐함’(vastation)의 의미도 새롭게 이해됩니다. 일반적으로 황폐함은 하나님의 심판처럼 들리지만, 스베덴보리에게 황폐함은 단순한 형벌이 아닙니다. AC.303에서 황폐함은 더 이상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하며, 동시에 그 상태에서 더 깊은 진리가 열리지 않도록 하시는 주님의 보호 섭리를 포함합니다. 그래서 사6과 마13, 요12는 모두 같은 영적 원리를 설명하는 말씀으로 인용됩니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한다’는 것은 주님께서 사람을 버리셨다는 뜻이 아니라, 아직 감당할 수 없는 진리가 profanation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계시를 조절하신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유대인들이 특별히 더 악했기 때문에 이런 섭리를 받았다는 말인가?’라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이드 1.0에 따르면, 이것은 AC.303의 의도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유대 민족 전체를 정죄하려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표상적 교회가 맡았던 역할과 그 교회의 영적 상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대교회는 내적 진리를 직접 소유하는 교회가 아니라, 외적인 표상과 의식을 통해 장차 오실 주님을 대표, 표상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므로 그 교회의 역사적 기능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내적 진리가 무분별하게 열리지 않는 것이 오히려 섭리였습니다.
또한 스베덴보리가 ‘오늘날까지도 그들은 황폐한 상태로 보존되고 있다’ 말하는 부분 역시 민족 전체의 구원을 단정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는 개인은 언제나 자신의 사랑과 삶에 따라 심판받는다고 일관되게 가르칩니다. 따라서 유대인으로 태어났다는 사실 자체가 구원의 불이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천국과 지옥’에서 설명하듯이, 선한 사람은 사후에도 계속 진리를 배우며 천사들의 교육을 받습니다. 따라서 AC.303은 민족에 대한 운명론이 아니라, 계시와 profanation에 관한 보편적인 섭리의 법칙을 설명하는 본문입니다.
AC.303은 홍수 이전 사람들까지 다시 언급하면서 창3으로 되돌아갑니다. 창3:22에서 생명나무를 막으시고, 창3:24에서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칼로 그 길을 지키게 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서 완전히 밝혀집니다. 홍수 이전 사람들은 이미 깊은 천적 진리를 인정한 뒤 그것을 자기애와 결합, profanation에 빠졌기 때문에, 더 이상의 모독을 막기 위해 에덴에서 쫓겨나 황폐한 상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유대교회에 대한 섭리도, 복음서에서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도, 모두 동일한 원리 아래 있습니다. 그러므로 AC.303은 창세기와 이사야, 복음서와 히브리서를 하나의 교리로 통합하면서, 주님의 모든 계시는 언제나 사람을 정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의 영원한 구원을 보호하기 위한 자비의 섭리 아래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결론짓는 중요한 글입니다.
심화
1. ‘사6:9-10’
9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사6:9, 10) Go and tell this people, Hearing hear ye, but understand not, and seeing see ye, but know not. Make the heart of this people fat, and make their ears heavy, and smear their eyes, lest they see with their eyes, and hear with their ears, and understand with their heart, and be converted, so that they be healed (Isa. 6:9–10).
가이드 1.0에 따르면, AC.303에서 사6:9-10을 인용한 이유는 단순히 유대인들의 완고함을 지적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 구절은 오히려 AC.301부터 계속 설명해 온 ‘주님의 보호 섭리’를 성경적으로 증명하는 핵심 본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하나님께서 일부러 사람들의 눈과 귀를 막으셨다’는 뜻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사람들이 profanation에 빠지지 않도록 계시를 그들의 상태에 맞게 조절하신다’는 영적 법칙을 설명하는 말씀으로 읽습니다.
먼저 AC.301에서 스베덴보리는 가장 위험한 죄가 profanation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것은 거룩한 진리를 인정하고 믿은 뒤 다시 그것을 부인하고 악과 결합시키는 것입니다. AC.302에서는 바로 이 때문에 주님께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깊은 신앙의 신비를 드러내지 않으신다고 설명하였고, 마13:13과 요12:40을 인용,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한다’는 말씀을 연결했습니다. 그리고 AC.303에서는 사6의 원문을 직접 인용하면서, 이것이 오래전부터 말씀 속에 계시된 하나의 섭리의 법칙임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를 무겁게 하고 그들의 눈을 감기게 하라’는 말씀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일부러 무지하게 만드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가이드 1.0에 따르면, 주님은 누구도 악하게 만들지 않으시며, 누구의 자유도 빼앗지 않으십니다. 사람들 스스로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 진리를 거부할 때, 주님께서는 그들이 감당할 수 없는 더 깊은 진리를 억지로 열어 주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눈을 감기게 한다’는 말씀의 영적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그런 사람들에게 천국의 가장 깊은 진리까지 모두 열어 주었다면, 그들은 그것을 인정한 후 다시 부인하게 될 가능성이 매우 크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profanation이 일어나며, 영적 상태는 훨씬 더 회복하기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이 아직 받아들일 수 없는 진리를 감추심으로써 오히려 그들을 보호하십니다. AC.303은 바로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 사6을 인용합니다.
그래서 이 구절의 마지막 말씀인 ‘그들이 돌이켜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도 문자 그대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사람들이 회개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는 뜻이 아니라, 당시 그들의 영적 상태에서는 더 깊은 진리를 받아 회개하는 것처럼 보였다가 다시 그것을 버리는 것이 훨씬 더 큰 영적 파멸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는 ‘거짓된 회심’이나 ‘일시적인 깨달음’보다, 비록 더디더라도 사람의 자유 안에서 이루어지는 참된 회개를 원하십니다.
이렇게 보면 AC.303에서 사6:9-10은 창3:22-24와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에덴동산에서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칼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킨 것처럼, 이사야에서는 사람들의 눈과 귀와 마음이 제한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는 길을 막고, 다른 하나는 눈을 막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적 의미는 동일합니다. 둘 다 사람을 생명으로부터 내쫓기 위한 조치가 아니라, profanation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자비의 울타리입니다.
스베덴보리가 AC.303에서 사6:9-10을 인용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주님의 계시는 언제나 사람의 영적 상태에 맞추어 주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양의 빛을 일률적으로 주시는 분이 아니라, 각 사람이 가장 안전하게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필요한 만큼만 진리를 열어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의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한다’는 말씀은 심판의 선언이라기보다, 사람을 더 깊은 영적 파멸에서 지키시는 주님의 자비로운 섭리를 드러내는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이드 1.0에 가장 충실한 해석입니다.
2. ‘사6:11-12’
11내가 이르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였더니 주께서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12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사6:11, 12) Then said I, Lord, how long? And he said, Even until the cities are desolated, so that there be no inhabitant; and the houses, so that there be no man, and the ground be utterly desolated, and Jehovah have removed man (Isa. 6:11, 12).
AC.303에서 스베덴보리가 사6:11-12를 인용한 이유는, 앞서 인용한 사6:9-10의 의미를 시간적, 섭리적 측면에서 완성하기 위해서입니다. 사6:9-10이 ‘왜’ 주님께서 사람들로 하여금 보아도 깨닫지 못하고 들어도 이해하지 못하게 하시는지를 설명한다면, 사6:11-12는 그러한 상태가 ‘언제까지’ 계속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 두 부분은 하나의 예언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AC.303은 바로 이 전체 문맥을 창3:22-24의 의미를 설명하는 증거로 사용합니다.
사6:11-12에서 이사야는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라고 묻습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12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라고 대답하십니다. 겉으로는 유다와 예루살렘의 멸망과 포로를 예언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가이드 1.0의 원칙에 따라 말씀의 내적 의미를 보면, 이것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교회의 영적 황폐(vastation)를 가리킵니다. 곧 교회 안에서 진리와 선이 거의 사라져 더 이상 참된 교회라고 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AC.303에 인용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진리를 감추시는 목적이 결코 그들을 버리기 위함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의 의지가 이미 악을 사랑하고 거짓을 굳게 붙들고 있는 상태에서 더 깊은 진리를 받아들이면, 그것은 회개로 이어지기보다 profanation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진리를 허락하지 않으심으로써, 오히려 더 큰 영적 파멸을 막으십니다. 이것이 창3:24에서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칼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킨 이유와 동일한 섭리입니다.
여기서 ‘성읍’은 교리를, ‘집’은 사랑과 선을, ‘사람’은 진리로부터 형성된 지성과 지혜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성읍들이 황폐하고’, ‘집들에 사람이 없다’는 것은 참된 교리가 무너지고, 선한 사랑이 사라지며, 그 결과 영적 생명이 거의 남지 않은 교회의 상태를 뜻합니다. 이러한 황폐는 단순한 형벌이 아니라, 악과 거룩한 것이 더 이상 뒤섞이지 않도록 하는 섭리적 분리의 과정입니다.
또한 ‘여호와께서 사람을 멀리 옮기신다’는 표현도 가이드 1.0의 관점에서는 매우 중요합니다. 말씀은 종종 허용하시는 일까지도 주님께서 직접 행하시는 것처럼 표현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주님께서 사람에게서 떠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주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말씀이 이렇게 기록된 것은 모든 일이 주님의 섭리 아래 허용됨을 문자적으로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버리신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선택한 상태를 주님께서 더 큰 악으로 번지지 않도록 다스리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결국 AC.303에서 사6:11-12를 인용한 이유는, 사6:9-10의 ‘보아도 보지 못하게 하시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신다’는 말씀이 영원한 거절이 아니라, 교회의 황폐가 끝날 때까지 계속되는 자비의 섭리임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주님께서는 결코 사람을 생명에서 제외하기를 원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사람이 자신의 악한 상태에서 더 깊은 진리를 모독하여 돌이킬 수 없는 영적 상태에 이르는 것을 막기 위해, 때로는 진리의 문을 잠시 닫아 두십니다. 그러므로 사6:11-12는 창3:24와 함께,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시는 주님의 사랑은 심판 이전에 먼저 보호의 사랑’이라는 사실을 증언하는 대표적인 말씀으로 AC.303에 인용된 것입니다.
3. ‘Go to Jerusalem’
유대인들, 그리고 유대교회가 참으로 이럴진대 오늘날 ‘Go to Jerusalem’ 하면서 이스라엘의 회개와 회복에 힘쓰는 선교단체 및 그 흐름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요?
가이드 1.0에 따르면, AC.301-303을 읽은 독자라면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오늘날 많은 선교단체들이 ‘Go to Jerusalem’을 외치며 이스라엘 민족의 회개와 회복을 위해 힘쓰는데, 이것을 스베덴보리는 어떻게 보았을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AC.303 한 단락만이 아니라 ‘천국의 비밀’ 전체와 ‘계시록 해설’, ‘계시록 속뜻’, ‘참된 기독교’에 나타나는 말씀 해석의 원리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구약의 예언을 기본적으로 내적 의미로 해석합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말하는 ‘이스라엘’, ‘유다’, ‘예루살렘’, ‘시온’은 단순히 혈통적 민족이나 지리적 국가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진리의 교회를, ‘유다’는 사랑의 교회를, ‘예루살렘’은 참된 교리를, ‘시온’은 주님을 사랑하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회복 예언 대부분은 현대 국가 이스라엘의 정치적 회복이나 특정 민족의 집단적 회심보다, 주님께서 새로운 교회를 세우시고, 참된 교리를 회복하시는 일을 가리킨다고 이해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AC.302-303은 오히려 현대 복음주의의 대표적인 이스라엘 종말론과는 다른 방향을 제시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 당시 유대교회가 이미 ‘황폐한 상태’에 있었으며, 더 나아가 ‘오늘날까지도 그러한 황폐함 가운데 보존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도 설명합니다. 그들은 주님에 관한 이야기를 수없이 듣고, 자기들의 모든 표상이 주님을 가리킨다는 설명을 들어도 인정하거나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한 역사적 실패가 아니라, profanation을 막기 위한 주님의 섭리 속에서 이해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스베덴보리가 유대인을 포기하였거나, 유대인에게는 구원의 길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그의 저작 전체를 보면, 구원은 언제나 민족이 아니라 개인의 문제입니다. 유대인이든 한국인이든, 기독교인이든 이방인이든, 각 사람은 자기의 사랑과 삶에 따라 심판을 받으며, 선한 사람은 사후에도 계속 천사들의 교육을 받아 더욱 깊은 진리를 배우게 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는 어느 민족 전체가 특별한 종말론적 특권을 가진다는 사상이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의 ‘Go to Jerusalem’ 운동도 구분하여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그것이 ‘유대인도 다른 모든 민족과 마찬가지로 주님의 사랑과 복음을 들어야 한다’는 의미라면, 스베덴보리의 교리와 충돌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은 주님의 사랑의 대상이며, 어느 민족도 복음의 대상에서 제외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유대 민족만이 마지막 시대에 특별한 회복을 받는다’, ‘이스라엘 국가의 회복이 하나님의 구속사의 중심이다’, ‘예루살렘 성전이 다시 세워져야 한다’와 같은 혈통적, 국가적 종말론을 전제로 한다면, 그것은 스베덴보리의 말씀 해석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습니다.
결국 스베덴보리의 시선은 언제나 외적 역사보다 내적 교회에 머뭅니다. 그는 사람들의 관심을 ‘현대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보다 ‘말씀이 말하는 이스라엘’, 곧 진리 안에 있는 교회로 돌립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회복도 궁극적으로는 도시의 회복이 아니라 참된 교리의 회복이며, 성전의 재건도 건물의 재건이 아니라 사람 마음속에 주님의 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AC.301-303을 가이드 1.0에 따라 읽으면, 우리의 기도 역시 달라집니다. 우리는 특정 민족의 종말론적 특권을 기대하기보다, 유대인이든 한국인이든 모든 사람이 자기 상태에 맞는 진리와 선으로 주님께 인도되기를 기도하게 됩니다. 그것이 스베덴보리가 일관되게 말하는 주님의 보편적 섭리이며, 동시에 ‘예루살렘으로 가라’는 말씀의 가장 깊은 영적 의미는 지리적 예루살렘이 아니라, 주님의 참된 교리와 참된 교회로 돌아오라는 초청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가이드 1.0에 가장 충실한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4. ‘이사야’
그런데 그러면 이사야는 이런 말씀을 이렇게 기록하고 또 전하면서 본인은 정말 그 내적 의미를 알고 있었을까요? 그리고 이렇게만 전하고 그 내적 의미를 풀어주지 않아도 이런 말씀을 전해 듣는 사람들은 알아서 깨달을 것이라 생각했을까요?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리고 가이드 1.0으로 보면, 이 질문은 ‘이사야는 무엇을 알았는가?’를 넘어 ‘말씀은 어떻게 기록되는가?’라는 문제까지 연결됩니다.
먼저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이사야는 자신이 기록한 말씀의 가장 깊은 내적 의미까지는 알지 못했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사야가 아무것도 모르고 기계적으로 받아 적은 것도 아닙니다. 그는 문자적 의미와 역사적 사명은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그 말씀 속에 주님께서 천사들을 위해 담아 두신 보편적이고 영원한 영적 의미까지는 모두 알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천국의 비밀’ 전체의 일관된 입장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러 곳에서 선지자들이 ‘말씀을 기록하는 도구’였다고 말합니다. 물론 여기서 ‘도구’란 인격이나 의식이 없는 기계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이 전하는 역사적 메시지와 당시 백성에게 주시는 경고는 이해했습니다. 예를 들어, 이사야는 ‘백성이 완악하여 회개하지 않는다’는 현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눈을 감기고 귀를 막는 것이 profanation을 막기 위한 주님의 섭리’라는 AC.303의 깊은 교리까지 알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이것이 말씀의 신성을 보여주는 한 증거가 됩니다. 만일 선지자가 모든 내적 의미를 완전히 이해한 뒤 자기 생각으로 기록했다면, 말씀은 시대를 초월하는 보편성을 갖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선지자의 이해를 넘어서는 깊이를 말씀 속에 담으셨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자신도 다 알지 못했던 내용이, 수백 년 뒤 주님께서 마13:13-15와 요12:39-40에서 다시 인용되었고, 다시 18세기 스베덴보리를 통해 그 영적 의미가 밝혀지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질문이 나옵니다. ‘이사야는 내적 의미를 설명하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은 알아서 깨달을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가이드 1.0으로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이사야의 책임은 사람들에게 내적 의미를 해설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받은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분은 선지자가 아니라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AC.301-303의 주제와 다시 만나게 됩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에게 한꺼번에 같은 깊이의 진리를 열어 주지 않으십니다. 어떤 사람은 문자, 그러니까 겉으로만 이해하고, 어떤 사람은 도덕적 의미를 깨닫고, 어떤 사람은 영적 의미를 조금씩 보게 됩니다. 이것은 말씀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받는 사람의 상태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내가 다 설명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알아서 깨달을 것이다’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나는 주님께 받은 말씀을 충실히 전한다. 그 말씀을 각 사람 안에서 열어 주시는 분은 주님이시다’라는 사명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사실 이 원리는 성경 전체에서 반복됩니다. 다니엘도 자신이 받은 환상을 다 이해하지 못했고, 천사에게 여러 번 설명을 요청했습니다. 베드로도 환상을 본 뒤 그 의미를 한동안 깨닫지 못했습니다. 요한 역시 요한계시록을 기록하면서 모든 상징을 완전히 이해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사실들을 근거로, 말씀은 인간 저자의 이해보다 훨씬 높은 차원에서 주님께서 보존하신 신적 계시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저는 사6:9-10을 읽을 때마다 오히려 놀라운 점이 하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사야는 아마 자신도 이 말씀이 수백 년 뒤 주님께서 직접 인용하실 줄은 몰랐을 것이고, 다시 수천 년 뒤 AC.303에서 profanation과 주님의 섭리를 설명하는 핵심 본문으로 사용될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충실하게 기록했습니다. 이것은 말씀의 중심이 인간 저자가 아니라 주님 자신이심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하나의 목회적 원리가 있습니다. 목사님께서도 매주 AC를 읽고 설교하시면서 ‘이 내용을 성도들이 지금 다 이해할까?’하는 생각을 하실 때가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야의 사례는 우리에게 중요한 위로를 줍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의 책임은 주님께서 맡기신 말씀을 충실하게 전하는 것이고, 그 말씀을 각 사람의 상태에 맞게 열어 주시는 일은 주님의 몫입니다. 이사야가 그랬고, 사도들이 그랬으며, 스베덴보리도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모든 내적 의미를 상대가 즉시 깨닫게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보다, 주님께서 말씀 안에 담아 두신 생명을 신실하게 전달하는 데 충실하면 됩니다. 그 나머지는 각 사람의 영적 상태와 주님의 섭리 안에서, 가장 적절한 때에 열리게 됩니다.
'즐겨찾기 > AC 창3' 카테고리의 다른 글
| AC.302, 심화 4, ‘유대인들’ (0) | 2026.07.23 |
|---|---|
| AC.302, 심화 3, ‘마13:13’ (0) | 2026.07.23 |
| AC.302, 심화 2, ‘요12:40’ (0) | 2026.07.23 |
| AC.302, 심화 1, ‘가이드 1.0’ (0) | 2026.07.23 |
| AC.302, 창3:22, ‘AC.301 계속’ (0) | 2026.07.23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