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10을 끝까지 읽으면 한 가지 매우 흥미로운 대조가 나타납니다. 장의 처음에서는 나답과 아비후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지 않은 다른 불로 분향했다가 죽습니다. 그런데 장의 마지막에서도 명령대로 행하지 않은 일이 발생합니다. 속죄제 염소를 제사장이 먹어야 했는데 이미 불살라 버린 것입니다. 모세는 크게 노하지만 아론의 설명을 듣고 ‘좋게여겼습니다.’ 왜 앞의 일은 죽음으로 끝나고 뒤의 일은 받아들여졌을까요?
먼저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레10:19-20의 아론의 행동을 직접 상세하게 해설하여 두 사건의 차이를 항목별로 설명한 강한 원전은 이번 검토에서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이 마지막 장면에 세밀한 상응을 임의로 부여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본문 자체가 보여 주는 차이는 분명합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여호와께서명령하시지아니하신다른불’을 적극적으로 가져와 예배에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주님에게서가 아닌 다른, 사랑과 말씀 이외의 다른 근원에서 나온 예배로 직접 해설합니다.
반면 아론의 경우에는 다른 불을 가져오거나 자기 방식의 예배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두 아들을 잃은 바로 그날, 자신에게 닥친 비극 가운데서 속죄제물을 먹는 것이 과연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실 일인지 묻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그 설명을 듣고 받아들입니다.
따라서 이 두 사건은 ‘하나님의규칙을한번어기면죽는다’는 동일한 범주로 묶이지 않습니다. 나답과 아비후 사건의 중심은 스베덴보리가 직접 설명한 대로 예배의 ‘근원’이 바뀐 데 있습니다. 주님의 불 대신 다른 불, 말씀에서 나온 교리 대신 다른 근원에서 나온 것이 거룩한 예배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마지막 사건은 오히려 외적 규례와 그 규례가 섬기는 내적 목적 사이의 관계를 생각하게 합니다. 아론은 규례를 무시하여 자기 뜻대로 하겠다고 선언한 것이 아니라 ‘오늘이런일이내게임하였는데이것을먹는것이여호와보시기에과연옳겠느냐’고 묻습니다.
여기에는 영적 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 욕망을 하나님의 뜻보다 위에 놓고 거룩한 것을 자기 방식으로 바꾸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뜻을 진실하게 따르려 하기 때문에 오히려 ‘이상황에서그뜻은무엇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종은 기계적 복종과 같지 않습니다. 참된 순종에는 분별이 있습니다. 물론 인간이 자기 편의대로 말씀을 고치는 것을 ‘분별’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외적인 문자만 지켰다는 사실이 자동으로 내적인 순종을 보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점에서 레10마지막은 10절의 ‘거룩하고속된것을분별하며부정하고정한것을분별하라’는 말씀과도 잘 어울립니다. 이 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단순한 규칙 준수보다 더 깊은 분별을 요구합니다. 다른 불과 주님의 불을 분별하고,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분별하며, 마지막에는 주님께서 실제로 무엇을 기쁘게 여기시는지를 묻습니다.
그래서 레10은 엄격함으로 시작하지만 율법주의로 끝나지 않습니다. 거룩함은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외적 형식을 기계적으로 실행하는 데서 자동으로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거룩함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를 받아 그분의 뜻을 진실하게 분별하고 따르는 데 있습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다른불’을 가져왔고, 아론은 ‘여호와께서어찌좋게여기셨으리요?’라고 물었습니다. 바로 이 차이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는 자기에게서 나온 것을 거룩한 곳으로 가져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비통한 상황에서도 무엇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인지 묻는 것입니다. 거듭남이 깊어진다는 것은 규칙을 많이 아는 데서 그치지 않고, 주님의 사랑과 진리 안에서 그분이 기뻐하시는 것을 점점 더 분별하게 되는 것입니다. (SWC.레10심화5)
나답과 아비후가 죽은 뒤 모세는 미사엘과 엘사반에게 그들을 ‘성소앞에서진영밖으로’ 메고 나가라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시신 처리 이상의 표상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계시록해설’(Apocalypse Explained, 1757-1759, AE) 324(계5:8)는 레10:1-5를 직접 인용하며 나답과 아비후가 진영 밖으로 옮겨진 의미를 설명합니다. 그들의 예배가 천국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예배는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으며, 이스라엘의 진영은 천국과 교회를 표상했습니다.
따라서 ‘진영밖’은 단순히 공동체에서 추방당했다는 의미보다 더 깊습니다. 다른 불에서 나온 예배는 천국의 질서에 속하지 않으므로 천국을 표상하는 진영 안에 머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레4와 레6에서 보았던 ‘진영밖’과도 연결하여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만 각 제사의 문맥이 다르므로 모든 ‘진영밖’을 완전히 같은 세부 상응으로 처리해서는 안 됩니다. 공통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큰 원리는 천국과 교회의 질서에 속하지 않는 것이 분리되고 제거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거듭남의 중요한 면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흔히 주님께서 우리 안에 새로운 것을 넣어 주시는 것만 생각하지만, 거듭남에는 ‘밖으로옮겨지는것’도 있습니다. 이전에는 내 신앙이라고 생각했던 자기 의, 내 열심이라고 생각했던 자기애, 진리라고 확신했던 거짓이 주님의 빛 가운데 드러나면 그것은 더 이상 마음의 중심에 머물 수 없습니다.
특히 나답과 아비후가 표상한 것은 노골적인 세상 악이 아니라 ‘종교적형태를가진잘못된예배’였습니다. 그래서 더 중요합니다. 인간은 세속적인 욕심보다 종교적인 proprium을 더 오래 붙들 수도 있습니다. ‘나는주님을위해이렇게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이 자기애라는 사실을 발견하기가 더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불이 비추면 그 근원이 드러납니다. 주님에게서 온 사랑인지 자기에게서 나온 다른 불인지 분명해지고, 다른 불에 속한 것은 천국의 질서 밖으로 옮겨져야 합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다른 사람을 교회 밖으로 몰아내는 근거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레10의 내적 의미가 먼저 향하는 곳은 다른 사람의 신앙을 심판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내면입니다. ‘내안에서진영밖으로옮겨져야할다른불은무엇인가?’를 묻는 것이 먼저입니다.
거듭남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천국에 속하지 않는 것을 분리하는 과정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안의 모든 종교적 열심을 없애시는 것이 아니라 그 열심 가운데 자기애에서 나온 것을 드러내어 밖으로 옮기시고,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만이 예배의 불로 남게 하십니다. (SWC.레10심화4)
나답과 아비후 사건 직후 여호와께서는 아론에게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라고 명하십니다. 이것 때문에 ‘나답과아비후가술에취해다른불을드렸던것이아닌가?’라고 추측하기도 하지만, 성경 본문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음주 여부를 사실처럼 연결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포도주 금지 규례가 이 자리에 놓인 영적 이유에 대해서는 스베덴보리가 직접적인 단서를 줍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71(창9:21)은 레10:8-10을 직접 인용하면서 ‘술취함’이 신앙의 진리에 관한 오류와 혼란을 표상했기 때문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는 것이 금지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포도주 자체가 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AC.6377은 포도주가 좋은 의미에서는 영적 사랑의 선과 신앙의 선을 의미하며,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의 신적 선에서 나오는 신적 진리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성찬에서도 포도주가 거룩하게 사용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포도주에는 반대 의미도 있습니다. 진리가 악과 섞여 왜곡되면 포도주는 거짓을 나타내며, ‘술취함’은 진리와 거짓을 분별하지 못하고 오류 속에서 비틀거리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레10의 핵심은 술이라는 물질보다 ‘분별력을잃는상태’입니다.
실제로 본문 자체가 이유를 말합니다. ‘그리하여야너희가거룩하고속된것을분별하며부정하고정한것을분별하고’ 백성에게 여호와의 규례를 가르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에게 필요한 것은 종교적 흥분이 아니라 맑은 영적 분별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의 ‘다른불’과 연결됩니다. 나답과 아비후의 문제는 거룩해 보이는 것과 실제로 거룩한 것을 분별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향로와 향과 성소와 제사장이라는 외적 요소만 보면 모두 거룩했습니다. 그러나 그 안의 불은 다른 불이었습니다. 외적 거룩함과 내적 거룩함을 구별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같은 위험이 있습니다. 감동적이라고 해서 모두 신적이지 않고, 열정적이라고 해서 모두 체어리티에서 나온 것도 아니며, 성경 구절을 사용한다고 해서 모든 교리가 말씀에서 나온 것도 아닙니다. ‘내가강하게느낀다’는 사실과 ‘이것이주님의진리다’라는 사실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영적 생활은 단순한 흥분보다 분별을 향합니다. 무엇이 선처럼 보이는가보다 그 선의 근원이 무엇인지, 무엇이 진리처럼 들리는가보다 그것이 실제 말씀과 주님의 사랑에 일치하는지를 살핍니다.
특히 다른 사람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에게 이 분별은 더욱 중요합니다. 레10:11은 제사장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여호와의 규례를 가르쳐야 한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분별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진리를 가르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포도주 금지 규례는 레10의 중심 주제와 정확히 맞닿습니다. 다른 불과 주님의 불을 분별하고,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분별하며,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분별하는 것, 이것이 주님의 쓰임을 맡은 사람에게 필요한 영적 맑음입니다. (SWC.레10심화3)
레9:24과 레10:2를 나란히 놓으면 놀라운 문장이 반복됩니다. 레9에서는 ‘불이여호와앞에서나와’ 번제물과 기름을 사르고, 레10에서는 ‘불이여호와앞에서나와’ 나답과 아비후를 삼킵니다. 왜 같은 주님의 불이 한쪽에서는 예배를 완성하고 다른 쪽에서는 심판처럼 나타날까요?
스베덴보리의 상응에서 불은 좋은 의미에서는 신적 사랑을 나타냅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6832(출3:2)는 제단의 거룩한 불을 신적 사랑과 연결합니다. 따라서 레9에서 주님에게서 나온 불이 번제물과 기름을 사르는 것은 주님의 사랑이 참된 예배에 생명을 주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주님의 사랑 자체가 레10에서 갑자기 증오나 분노로 변한 것은 아닙니다. 달라진 것은 불의 근원이 아니라 그것을 만나는 상태입니다. AC.9375(출24:1)는 나답과 아비후가 말씀 이외의 다른 근원에서 나온 교리와 예배를 표상했다고 설명하고, AC.10244(출30:20)는 그들의 예배가 주님을 향한 사랑이 아닌 다른 사랑에서 나온 것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 신학의 중요한 원리와 연결됩니다. 주님에게서 나오는 것은 언제나 선과 사랑과 생명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받는 사람의 상태에 따라 동일한 신적 생명이 다르게 경험됩니다. 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신적 사랑은 기쁨과 생명이 되지만, 그 사랑에 반대되는 상태에서는 그것이 견딜 수 없는 것으로 경험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레9과 레10의 두 불을 ‘좋은하나님과화난하나님’의 변화로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변한 것은 인간의 상태입니다. 레9에서는 주님께서 명하신 질서 안에 놓인 제물이 그 불을 받아 예배가 완성됩니다. 레10에서는 다른 사랑에서 나온 예배가 그 동일한 거룩함과 만납니다.
빛도 비슷합니다. 같은 햇빛이 건강한 눈에는 세상을 보게 하지만 심하게 상한 눈에는 고통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태양이 어떤 사람에게는 사랑으로 빛나고 어떤 사람에게는 분노로 빛나는 것이 아니라 빛을 받는 상태가 다른 것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3절의 ‘나는나를가까이하는자중에서내거룩함을나타내겠다’는 말씀도 달리 들립니다. 주님의 거룩함은 인간의 상태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주님께 가까이 갈수록 그 거룩함과 조화를 이루는 것과 이루지 못하는 것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래서 레10의 불은 주님의 사랑과 반대되는 별도의 ‘분노의에너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레9의 불과 근본적으로 같은 신적 사랑의 거룩함 앞에서 무엇이 그 사랑에 속하고 무엇이 다른 사랑에 속하는지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거듭남에서도 일어납니다. 처음에는 자기애가 선처럼 보이고 자기 지혜가 진리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더 가까이 들어올수록 그 안에서 무엇이 주님의 것이고 무엇이 proprium의 것인지 드러납니다. 신적 불은 참된 선을 살리고 다른 불을 드러냅니다.
따라서 레9의 불과 레10의 불은 서로 반대되는 두 하나님을 보여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변함없는 한 분 주님의 신적 사랑 앞에서 서로 다른 인간의 상태가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보여 줍니다. 주님의 불은 언제나 사랑의 불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어떤 불을 품은 채 그 사랑 앞에 서는가입니다. (SWC.레10심화2)
나답과 아비후 이야기를 읽으면 가장 먼저 드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도대체다른불이무엇이었기에두사람이즉시죽어야했을까?’ 성경 본문은 그들이 ‘여호와께서명령하시지아니하신다른불’을 향로에 담아 분향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불이 물리적으로 정확히 어디에서 온 불이었는지보다 스베덴보리는 그 사건이 표상한 영적 의미를 매우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9375(출24:1)는 나답과 아비후를 직접 다룹니다. 그들은 아론의 아들들이므로 말씀에서 나오는 교리를 표상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다른불’을 가지고 분향한 것은 ‘말씀이외의다른근원에서나온교리로예배를세우는것’을 표상했다고 설명합니다. 불은 사랑의 선을, 향은 그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진리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AC.9965(출28:43)는 더욱 직접적입니다. 제단의 불은 신적 사랑, 곧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표상했지만 ‘다른불’은 지옥에서 나오는 사랑을 표상했다고 설명합니다. AC.10244(출30:20)역시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로 향을 피운 것은 ‘주님을향한사랑이아닌다른사랑에서나온예배’를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다른불’의 핵심은 불의 종류가 아니라 사랑의 근원입니다. 외적으로는 똑같이 향을 피웁니다. 똑같은 성소이고 똑같은 제사장이고 똑같은 향로입니다. 그러나 예배를 움직이는 사랑이 주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인간의 proprium에서 나온다면 영적으로는 전혀 다른 예배가 됩니다.
이것은 매우 무서운 동시에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거룩한일을하고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일을 움직이는 사랑까지 거룩하다고 보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하면서 명예를 사랑할 수 있고, 봉사하면서 인정받기를 사랑할 수 있으며, 진리를 변호하면서 자기 우월감을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겉의 향은 거룩하지만 속의 불은 다른 불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레9마지막 장면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레9에서 불은 ‘여호와앞에서나왔습니다.’ 인간이 만든 불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불이 번제물과 기름을 사릅니다. 참된 예배의 생명인 사랑은 주님에게서 인간에게 오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 사랑을 받아 다시 주님을 예배합니다.
그런데 레10에서 나답과 아비후는 자기들이 불을 가져옵니다. 바로 이 대비가 두 장을 연결합니다. 레9은 ‘주님의불’이고 레10은 ‘다른불’입니다. 하나는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 아닌 다른 근원에서 오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다른불’을 단순히 현대 예배 방식의 차이나 예전의 형식 문제에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찬양 형식이나 예배 순서가 익숙하지 않다고 그것을 ‘다른불’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본문의 내적 의미와 거리가 멉니다. 핵심은 외적 형식보다 훨씬 깊은 곳, 곧 그 예배를 움직이는 사랑의 근원입니다.
레10은 그래서 우리에게 ‘얼마나뜨겁게예배하는가?’보다 더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그뜨거움은어디에서오는가?’입니다. 자기애도 뜨겁고 종교적 열광도 뜨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의 불은 오직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입니다. 참된 거듭남은 내 안의 모든 불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어떤 불이 주님의 불이고 어떤 불이 proprium의 다른 불인지를 분별하여,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으로 예배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SWC.레10심화1)
레위기 10장은 바로 앞 장의 마지막 장면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레9:24에서 ‘불이여호와앞에서나와제단위의번제물과기름을’ 살랐습니다. 그리고 레10:2에서도 다시 ‘불이여호와앞에서나와’ 나답과 아비후를 삼킵니다. 같은 여호와 앞의 불인데 하나는 제물을 받아들이는 불이고 다른 하나는 제사장을 삼키는 불입니다. 이 충격적인 대비가 레10전체를 여는 열쇠입니다. 문제는 불이라는 외적 현상 자체가 아니라 ‘어떤사랑에서예배가나오는가’입니다.
1절에서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는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불을 담고 향을 놓아 여호와 앞에서 분향합니다. 겉모습만 보면 모든 것이 종교적입니다. 그들은 이방 제사장도 아니고 아론의 아들들이며, 향로를 들고 성소에서 향을 피웁니다. 문제는 단 하나, 그것이 ‘여호와께서명령하시지아니하신다른불’이었다는 것입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9375(출24:1)는 이 사건을 직접 해설하면서 나답과 아비후가 말씀에서 나오는 교리를 표상했으며, 그들이 ‘다른불’을 사용한 것은 말씀에서 나온 것이 아닌 다른 근원에서 예배와 교리를 세우는 것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불은 사랑의 선을, 향은 그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진리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AC.9965(출28:43)는 이 차이를 더욱 선명하게 합니다. ‘제단의불’은 신적 사랑, 곧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표상하지만 나답과 아비후의 ‘다른불’은 지옥에서 나오는 사랑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AC.10244(출30:20)도 레10:1-2를 직접 인용하면서 그들의 행동은 ‘주님을향한사랑이아닌다른사랑에서나오는예배’를 표상했다고 밝힙니다. 따라서 레10의 ‘다른불’은 단순히 불을 잘못 가져온 제의상의 실수가 아닙니다. 예배의 겉모습은 거룩하지만 그것을 움직이는 내적 사랑의 근원이 주님이 아닌 상태입니다.
이렇게 보면 레9와 레10의 연결이 매우 깊어집니다. 레9에서 인간은 제물을 준비하고 제단에 올렸지만 마지막 불은 ‘여호와앞에서’ 나왔습니다. 참된 예배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장에서 나답과 아비후는 그 불을 기다리지 않고 자기들의 ‘다른불’을 가져옵니다. 레9의 불은 주님에게서 인간에게 내려오는 사랑이고, 레10의 다른 불은 인간의 proprium에서 시작하여 하나님께 올리려는 사랑입니다. 겉으로는 둘 다 불이고 둘 다 예배에 사용되지만 근원은 정반대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상당히 날카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예배하고있는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무엇이나를예배하게하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설교도 다른 불로 할 수 있고, 기도도 다른 불로 할 수 있으며, 봉사와 선교와 성경 연구까지 다른 불로 할 수 있습니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 다른 사람보다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마음, 영향력을 갖고 싶은 욕망, 자기 교리를 지키려는 집착이 거룩한 행위의 연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외적인 향은 같아 보여도 그 향을 태우는 불이 다를 수 있는 것입니다.
2절에서 여호와 앞에서 나온 불이 나답과 아비후를 삼킨 것은 하나님께서 순간적인 실수에 격분하여 두 사람을 죽였다는 이야기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죽음’을 표상적 예배의 소멸과 천국과의 결합이 끊어지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AC.10244는 당시 이스라엘 교회에서 외적 의식이 내적인 천국의 실재를 정확히 표상할 때 그 표상을 통해 천국과의 결합이 있었으며, 규정된 표상을 깨뜨리면 그 결합을 더 이상 나타낼 수 없었다고 설명합니다.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은 ‘다른사랑에서나오는예배에는천국과의결합이없다’는 영적 사실을 극적으로 표상한 것입니다.
그래서 3절의 ‘나는나를가까이하는자중에서내거룩함을나타내겠다’는 말씀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간다는 사실 자체가 그 사람을 거룩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가까이 갈수록 무엇이 주님의 것이고 무엇이 proprium의 것인지 더 분명히 구별되어야 합니다. 거룩한 것을 다루는 사람이 자기 사랑과 자기 지혜를 거룩한 것에 섞으면 그것은 더 위험한 혼합이 됩니다. 목회와 말씀 연구와 예배 인도처럼 거룩한 것에 가까운 쓰임일수록 ‘내불인가,주님의불인가?’라는 자기 점검이 더 필요합니다.
4절로 7절에서는 나답과 아비후의 시신이 진영 밖으로 옮겨지고 아론과 남은 아들들은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어 애도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계시록해설’(Apocalypse Explained, 1757-1759, AE) 324(계5:8)은 나답과 아비후가 진영 밖으로 옮겨진 것을 직접 언급하면서 그들의 예배가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나온 것이 아니므로 천국에서 나온 예배가 아니었음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이스라엘의 진영이 천국과 교회를 표상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가족의 슬픔을 부정하라는 일반 명령이 아니라 표상교회 안에서 천국에 속하지 않은 예배가 밖으로 제거되는 장면입니다. 아론의 ‘잠잠함’ 역시 그의 내면 상태를 우리가 함부로 심리적으로 추측하기보다는 본문 그대로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8절부터 장면은 갑자기 포도주와 독주 문제로 넘어갑니다. 여호와께서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가 바로 이어집니다. ‘거룩하고속된것을분별하며부정하고정한것을분별하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여호와의 규례를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나답과 아비후 사건 뒤에 우연히 붙은 별개의 음주 규정이 아닙니다. 레10의 두 번째 핵심인 ‘분별’의 문제입니다.
AC.1071(창9:21)은 레10:8-9를 직접 인용하면서 술 취함이 신앙의 진리에 관한 오류와 정신적 혼란을 표상하기 때문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포도주와 독주가 금지되었다고 설명합니다. 포도주 자체는 좋은 의미에서 신앙의 진리와 영적 사랑의 선을 의미할 수 있지만, 술 취함은 진리가 거짓과 뒤섞여 올바른 판단을 잃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AC.6377도 포도주가 좋은 의미에서는 영적 사랑과 신앙의 선을, 반대 의미에서는 악에서 나온 거짓을 나타낼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상응은 단어 하나에 고정된 사전적 의미가 아니라 문맥과 계열 안에서 읽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보여 줍니다.
따라서 10절과 11절의 핵심은 금주 자체보다 ‘분별’입니다. 제사장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별하고 그것을 백성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데 다른 불의 근본 문제도 바로 분별의 실패였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자기에게서 나오는 사랑을 구별하지 못하고, 말씀에서 나오는 교리와 다른 근원에서 나오는 교리를 구별하지 못하면 외적으로 아무리 거룩한 예배를 드려도 내적으로는 다른 불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인간은 단순히 ‘선한가악한가’를 넘어 ‘이선처럼보이는것이어디에서오는가’를 분별하게 됩니다.
12절로 15절에서 모세는 남은 제사장들에게 소제와 화목제의 몫을 규례대로 먹으라고 다시 명합니다. 두 형제가 죽은 직후에도 거룩한 제사의 질서는 계속됩니다. 이것은 냉혹함을 의미하기보다 주님의 질서가 인간의 충격과 혼란 때문에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레6과 레7에서 보았듯 거룩한 것을 먹는 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자기 삶으로 삼는 것과 연결됩니다. 다른 불이 제거된 뒤 필요한 것은 빈자리로 남는 것이 아니라 다시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올바른 질서 안에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16절로 20절에서 뜻밖의 갈등이 생깁니다. 모세가 속죄제 염소를 찾았는데 이미 불살라져 있었습니다. 규례대로라면 피를 성소 안으로 가져가지 않은 이 속죄제물은 제사장이 거룩한 곳에서 먹어야 했습니다. 모세는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노합니다. 그런데 아론은 ‘오늘이런일이내게임하였는데내가속죄제물을먹었더라면여호와께서좋게여기셨겠느냐’고 답합니다. 놀랍게도 20절은 ‘모세가그말을듣고좋게여겼더라’고 끝납니다.
이 마지막 장면은 레10전체를 균형 있게 잡아 줍니다. 앞부분만 읽으면 이 장은 ‘규칙에서조금이라도벗어나면죽는다’는 이야기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서는 실제 규례에서 벗어난 일이 있었음에도 모세가 아론의 설명을 듣고 받아들입니다. 따라서 나답과 아비후의 핵심 문제는 단순한 절차상의 사소한 실수였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직접 해설처럼 문제의 중심은 ‘다른불’, 곧 다른 사랑과 다른 근원에서 나온 예배였습니다. 반면 아론은 비극 가운데서 거룩한 것을 형식적으로 먹는 것이 과연 주님 앞에 합당한지를 묻고 있습니다.
다만 이 마지막 사건에 대해서는 스베덴보리가 레10:19-20을 직접 상세하게 해설한 강한 원전을 이번 검토에서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론의슬픔은정확히이것을상응한다’거나 ‘모세가받아들인것은정확히이런영적상태를뜻한다’고 세부 상응을 만들어 내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본문 자체에서 확실히 볼 수 있는 것은 ‘문자적절차의기계적실행’과 ‘그규례가섬기는거룩한목적’이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참된 순종은 자기 뜻대로 규례를 바꾸는 것도 아니지만, 외적 형식만 수행하면 모든 것이 거룩해진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닙니다.
레10은 결국 ‘거룩함을어떻게분별할것인가?’라는 장입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향을 피웠지만 다른 불을 사용했습니다. 제사장들은 포도주와 독주를 피하여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분별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규례를 아는 모세와 비극을 겪은 아론 사이에서 ‘무엇이여호와께서좋게여기시는것인가?’라는 질문이 다시 제기됩니다. 이 모든 장면의 중심에는 분별이 있습니다.
레9에서 주님에게서 나온 불은 제물을 사르고 백성을 경배하게 했습니다. 레10에서 인간이 가져온 다른 불은 예배 자체를 무너뜨렸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우리 안에 ‘불이있는가없는가’가 아닙니다. 뜨거운 열심 자체도 기준이 아닙니다. 그 불이 어디에서 오는지가 기준입니다. 자기애에서 오는 열심인지, 세상 사랑에서 오는 열심인지, 아니면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참된 예배는 인간이 자기 불을 만들어 주님께 바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으로 다시 주님을 예배하고 그 사랑으로 이웃을 섬기는 것입니다. 레10의 두 불은 겉으로는 닮아 있지만 그 근원이 전혀 다릅니다. 거듭남이 깊어진다는 것은 바로 그 두 불을 점점 더 분명하게 분별하게 되는 것입니다. (SWC.레10해설)
레9의 마지막은 장엄합니다. 아론이 모든 제사를 마치고 백성을 축복하고,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 다시 백성을 축복하자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갑자기 ‘불이여호와앞에서나와제단위의번제물과기름을’ 사릅니다. 백성은 그것을 보고 소리 지르며 엎드립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불’만이 아니라 ‘여호와앞에서나와’입니다. 제단에는 이미 불이 있었고 제사장들도 제물을 불살랐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 제사의 참된 근원이 어디인지를 보여 주듯 불이 주님에게서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불을 사랑과 매우 깊게 연결합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6832(출3:2)는 불이 좋은 의미에서는 신적 사랑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레6:12-13의 ‘제단의불은항상피워꺼지지않게하라’는 말씀을 직접 인용하면서 그 영속적인 제단 불이 신적 선 자체, 곧 신적 사랑을 표상한다고 밝힙니다.
따라서 레9마지막의 불을 인간의 종교적 열심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이 자기 힘으로 뜨거워져서 제사가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불은 ‘여호와앞에서’ 나옵니다. 예배에 생명을 주는 사랑의 근원은 인간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이것은 레6의 ‘꺼지지않는불’을 한층 더 깊게 이해하게 합니다. 레6에서는 제단의 불을 끄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불은 주님의 영원하고 끊임없는 사랑과 자비를 표상합니다. 레9에서는 이제 그 불의 출처가 명시됩니다. 그 사랑은 인간에게서 시작되어 하나님께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인간에게 내려옵니다.
인간이 하는 일도 분명히 있습니다. 제물을 가져오고, 잡고, 피를 뿌리고, 씻고, 제단에 올리고, 규례에 따라 행합니다. 거듭남에서도 인간은 악을 죄로 여겨 피하고, 말씀을 배우고, 선을 행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노력 자체가 영적 생명을 만들어 내지는 못합니다.
주님의 사랑이 그 안에 들어올 때 비로소 선은 살아 있는 선이 됩니다. 같은 구제를 해도 자기 명예를 위해 할 수 있고 체어리티에서 할 수 있습니다. 같은 설교를 해도 자기 지식을 보이기 위해 할 수 있고 사람의 영적 선을 위해 할 수 있습니다. 외적 행위가 같아도 그 안에 어떤 ‘불’이 있는지가 다릅니다.
따라서 레9의 불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무엇을하고있는가?’만이 아니라 ‘그일을움직이는불은어디에서오는가?’입니다. 자기애와 세상 사랑의 불도 사람을 열심히 움직이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의 불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불이 내려왔을 때 백성은 아론을 칭찬하지 않습니다. ‘온백성이이를보고소리지르며엎드렸더라.’ 모든 예배와 모든 쓰임의 마지막 방향이 여기 있습니다. 참된 신적 사랑이 나타날 때 인간의 proprium은 자신을 높이지 않고 주님 앞에 엎드립니다.
레8에서 인간의 귀와 손과 발이 준비되었습니다. 레9에서 그 준비된 인간이 실제 쓰임을 행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서 성경은 다시 분명히 합니다. 거듭남을 시작하시고 완성하시며 쓰임에 생명을 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인간은 제물을 제단에 올리지만 불은 여호와 앞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지만 그 선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바로 이것이 레9마지막 한 절에 담긴 거듭남의 가장 깊은 아르카나입니다. (SW.레9심화5)
레9:22에서 아론은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를 모두 마친 뒤 백성을 향하여 손을 들어 축복합니다. 제사장으로 위임된 아론이 처음으로 실제 사역을 수행한 뒤 행한 마지막 행동이 ‘축복’이라는 점은 매우 의미가 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축복을 단순히 좋은 일이 일어나기를 비는 종교적 인사로 보지 않습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422(창12:3)는 ‘축복’이 주님에게서 오는 모든 선과 진리, 곧 천적·영적·자연적 차원의 좋은 것들을 포괄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제사장이 백성을 축복한다는 것은 아론 자신이 복을 만들어 백성에게 주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제사장의 쓰임을 통해 백성에게 전달되는 것을 표상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레8의 장면을 기억하면 더욱 아름답습니다. 레8에서는 아론의 ‘손’에 위임식의 제물들이 놓였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것이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의 것이며 주님에게서 온다는 인정을 나타낸다고 설명했습니다. 그 손이 레9에서는 백성을 향해 올라갑니다.
즉 먼저 받아야 줄 수 있습니다. 레8에서는 손이 주님에게서 받고, 레9에서는 그 손이 백성을 향해 축복합니다. 이것이 쓰임의 질서입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자기 것으로 움켜쥐지 않고 이웃에게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영적 쓰임의 기준은 ‘내가얼마나많이가지고있는가?’가 아니라 ‘주님에게서받은것이나를통해얼마나선한쓰임으로흘러가는가?’입니다. 진리를 많이 알고 있다면 그것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돕는 데 사용해야 하고, 물질을 받았다면 선한 쓰임에 사용하며, 경험과 지혜를 받았다면 다른 사람을 살리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론은 ‘손을들어’ 축복합니다. 손이 능력과 행함을 나타낸다는 스베덴보리의 일반적인 상응을 생각하면 축복은 말만의 행위가 아니라 선을 실제로 전달하는 쓰임과 잘 연결됩니다. 진정한 축복은 ‘복받으십시오’라고 말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내가 가진 것을 통해 실제로 이웃에게 선이 전달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레9의 첫 제사장 사역은 자기 영광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아론이 제사를 성공적으로 마쳤으니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손이 백성을 향해 올라갑니다. 그리고 곧이어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이것이 주님의 쓰임에 부름받은 사람의 방향입니다. 주님에게서 받고 이웃에게 흘려보내며, 마지막에는 사람의 시선이 자신에게 머물지 않고 주님께 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레8에서 채워진 손이 레9에서 축복하는 손이 되는 것, 이것이 위임에서 쓰임으로 나아가는 거듭남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SW.레9심화4)
레9에는 같은 약속이 두 번 나옵니다. 6절에서 모세는 ‘여호와의영광이너희에게나타나리라’고 말하고, 23절에서는 모든 제사가 끝난 뒤 실제로 ‘여호와의영광이온백성에게나타났다’고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여호와의영광’은 무엇일까요?
스베덴보리는 ‘영광’을 단순한 눈부신 광채로만 보지 않습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5922(창45:13)는 여호와의 영광을 신적 진리와 연결합니다. 천국에서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가 빛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그것이 ‘영광’으로 표현된다는 것입니다.
AC.10574(출33:18)는 더욱 깊이 들어갑니다. 여호와의 영광은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이며, 가장 참된 의미에서는 그 신적 빛 가운데 나타나시는 주님 자신과 관련됩니다. 또한 말씀과 교회와 예배의 속뜻, 곧 그 안에 있는 신적 실재가 ‘영광’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레9에서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났다는 것은 단순히 백성 앞에 굉장한 초자연적 빛이 나타났다는 데 의미가 머물지 않습니다. 표상적으로는 주님의 신적 진리가 교회와 예배 가운데 드러나고, 그 진리 안에서 주님의 임재가 지각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 영광이 언제 나타나는지가 중요합니다. 레9시작부터 즉시 나타나지 않습니다. 아론의 속죄제와 번제가 있고, 백성의 속죄제와 번제와 소제와 화목제가 있고, 아론의 축복이 있으며,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옵니다. 그 후에야 영광이 나타납니다.
이 순서는 주님의 임재를 인간이 의식으로 ‘불러낸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신적 질서에 따라 정결하게 되고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쓰임 안으로 들어갈 때, 이미 항상 임재하시는 주님이 인간에게 ‘나타날수있는상태’가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태양은 계속 빛나지만 창문이 닫혀 있으면 방 안은 어둡습니다. 창문을 연다고 태양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회개와 정결과 예배가 주님의 임재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들은 인간이 주님의 임재를 받아들이고 지각할 수 있는 상태로 준비되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레9의 영광은 거듭남의 아름다운 결과입니다. 진리를 단지 문자로 알고 있던 사람이 어느 순간 그 안에서 주님의 사랑과 지혜를 보기 시작합니다. 예배가 단순한 의무가 아니라 주님과 만나는 자리가 되고, 이웃을 섬기는 일이 단순한 도덕이 아니라 주님의 선이 흘러가는 쓰임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말씀 안의 ‘영광’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결국 ‘여호와의영광이나타난다’는 것은 멀리 계시던 하나님이 갑자기 가까이 오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의 상태가 변화하면서 언제나 임재하시던 주님의 신적 진리와 사랑이 비로소 지각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말씀과 예배와 이웃 안에서 주님의 영광을 보는 눈이 열립니다. (SW.레9심화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