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순진무구’라는 말을 들으면 흔히 어린아이의 해맑은 표정이나 세상 물정을 모르는 모습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AC.430에서 스베덴보리는 순진무구를 단순히 나이가 어리거나 경험이 적은 상태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참된 순진무구는 체어리티 없이 존재할 수 없으며, 참된 체어리티도 순진무구 없이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독자가 이번 번호를 이해하려면 먼저 이 두 가지가 왜 함께 언급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세상 경험이 적고 남을 쉽게 믿는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그에게 참된 체어리티가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다른 사람을 돕는 행동을 많이 한다고 해서, 그 행동의 내면까지 저절로 순진무구하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도움을 주면서도 자신의 공로를 드러내려 할 수 있고, 상대방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려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예는 순진무구와 체어리티를 겉모습만으로 판단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생각하도록 돕습니다.
AC.430은 이 두 가지의 관계를 ‘참된’ 순진무구와 ‘참된’ 체어리티라는 표현으로 밝힙니다. 순진무구가 참된 사랑과 분리될 수 없고, 체어리티도 순진무구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순진무구를 단순한 무지나 무력함으로, 체어리티를 단순한 외적 선행으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번 번호에서 둘의 구체적인 내적 구조를 모두 설명하지는 않지만, 어느 한쪽만을 떼어 내어 참된 영적 상태라고 부를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이 관계를 생각하면 주님께서 어린아이들을 가까이하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도 더 깊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른이 어린아이처럼 지식과 판단력을 버려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어린아이를 통해 밝히는 것은 순진무구와 체어리티에 관한 영적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배우고 이해하면서도,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신의 마음이 사랑과 분리되어 있지는 않은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제 라멕의 고백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AC.429에서 라멕이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말은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는 뜻이었습니다. AC.430은 그 어린아이가 순진무구도 나타낸다고 밝힙니다. 그렇다면 라멕의 황폐를 이해할 때 체어리티의 소멸만 따로 떼어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참된 체어리티와 참된 순진무구는 서로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라멕이 나타내는 상태가 왜 심각한지 이해하는 데 이번 번호가 중요한 이유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읽으며 자신에게 순진무구가 조금이라도 부족하다고 느끼는 순간, 곧바로 자신이 라멕처럼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고 판단할 필요는 없습니다. AC.430은 순진무구와 체어리티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으며, 앞의 번호들은 라멕이 나타내는 황폐의 상태를 다루고 있습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발견하는 일과 신앙과 체어리티가 소멸된 상태를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국 AC.430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참된 순진무구와 참된 체어리티가 서로 떨어져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어린아이의 속뜻을 이해하려면 그저 순수하고 해맑은 모습을 떠올리는 데 머물지 않고, 사랑과 연결된 순진무구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 관계를 이해할 때 라멕이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말이 왜 체어리티의 소멸을 나타내는지도 더 분명해집니다. (AC.430심화1)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창4:23)
AC.430
말씀에서‘어린것’(alittleone),곧‘어린아이’(littlechild)는순진무구를뜻하며,체어리티도뜻합니다.참된순진무구는체어리티없이존재할수없고,참된체어리티도순진무구없이존재할수없기때문입니다. 순진무구에는세단계가있으며,말씀에서는이를‘젖먹이들’(sucklings),‘유아들’(infants),‘어린아이들’(littlechildren)이라는말로구별합니다.참된사랑과체어리티없이는참된순진무구도없으므로,‘젖먹이들’(sucklings),‘유아들’(infants),‘어린아이들’(littlechildren)은사랑의세단계도뜻합니다.곧젖먹이가어머니나유모를향해품는사랑과같은부드러운사랑,유아가부모를향해품는사랑과같은사랑,그리고어린아이가자신을가르치는사람을향해품는사랑과같은체어리티입니다.그래서이사야에서는다음과같이말합니다. A “littleone,” or “littlechild,” in the Word, signifies innocence, and also charity, for true innocence cannot exist without charity, nor true charity without innocence. There are three degrees of innocence, distinguished in the Word by the terms “sucklings,” “infants,” and “littlechildren”; and as there is no true innocence without true love and charity, therefore also by “sucklings,” “infants,” and “littlechildren” are signified the three degrees of love: namely, tender love, like that of a suckling toward its mother or nurse; love like that of an infant toward its parents; and charity, similar to that of a little child toward its instructor. Thus it is said in Isaiah:
여기서‘어린양’(lamb),‘어린염소’(kid),‘송아지’(calf)는순진무구와사랑의세단계를뜻하고,‘이리’(wolf),‘표범’(leopard),‘어린사자’(younglion)는그반대되는것들을뜻하며,‘어린아이’(littlechild)는체어리티를뜻합니다. 예레미야에서는다음과같이말합니다. Here a “lamb,” a “kid,” and a “calf” signify the three degrees of innocence and love; a “wolf,” a “leopard,” and a “younglion,” their opposites; and a “littlechild,” charity. In Jeremiah:
‘남자와여자’(manandwife)는이해력과의지에속한것들,곧진리와선을나타내며,‘유아와젖먹이’(infantandsuckling)는사랑의첫단계들을나타냅니다. ‘유아’(infant)와‘어린아이’(littlechild)가순진무구와체어리티를나타낸다는사실은누가복음에나오는주님의말씀에서도매우분명하게드러납니다. “Manandwife” denote things of the understanding and of the will, or of truth and of good; and “infantandsuckling,” the first degrees of love. That an “infant” and a “littlechild” denote innocence and charity is very evident from the Lord’s words in Luke:
AC.430은 라멕이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말이 왜 체어리티의 소멸을 뜻하는지 설명합니다. 앞의 AC.429에서는 ‘사람’이 신앙을, ‘어린아이’가 체어리티를 나타낸다고 밝혔습니다.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린아이가 체어리티뿐 아니라 순진무구도 나타낸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참된순진무구는체어리티없이존재할수없고,참된체어리티도순진무구없이존재할수없다’는 말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의 중심은 어린 나이 자체가 아니라, 순진무구와 사랑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순진무구’는 단순히 세상 물정을 모르거나 잘못을 저지를 능력이 없는 상태와 구별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번 번호에서 순진무구의 완전한 정의를 제시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참된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할 수 없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따라서 어린아이의 모습이 순진무구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모든 어린아이가 언제나 사랑과 체어리티를 완전하게 지니고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말씀에서 어린아이는 우리가 살펴야 할 영적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순진무구에 세 단계가 있다고 말하면서, 말씀의 ‘젖먹이’, ‘유아’, ‘어린아이’를 구별합니다. 젖먹이는 어머니나 유모를 향한 부드러운 사랑과 연결되고, 유아는 부모를 향한 사랑과 연결되며, 어린아이는 자신을 가르치는 사람을 향한 체어리티와 연결됩니다. 이 구별은 사랑이 단 하나의 모습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관계에 따라 서로 다른 모습을 지닌다는 사실을 이해하도록 돕습니다. 다만 이번 번호는 모든 사람이 실제 나이에 따라 이 세 단계를 반드시 차례로 통과한다는 발달 이론을 제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에서 사용된 세 표현의 영적 의미를 구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서 스베덴보리는 사11:6을 인용합니다. 이 구절에는 이리와 어린양, 표범과 어린 염소, 어린 사자와 송아지가 함께 등장하며, 마지막에는 어린아이가 그들을 인도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어린양과 어린 염소와 송아지가 순진무구와 사랑의 세 단계를, 이리와 표범과 어린 사자가 그 반대되는 것들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어린아이가그들을인도한다’는 말에서 어린아이가 체어리티를 뜻한다고 밝힙니다. 이 인용의 목적은 각 동물에 대해 별도의 상세한 상응표를 만드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서로 반대되는 것들이 함께 등장하는 장면에서 어린아이가 체어리티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렘44:7에서는 ‘남자와여자’에 이어 ‘유아와젖먹이’가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남자와 여자가 이해력과 의지에 속한 것들, 곧 진리와 선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유아와 젖먹이는 사랑의 첫 단계들을 나타냅니다. 이 구절의 문자적 문맥은 유다 백성의 악행과 그로 인한 멸절의 경고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말씀 안에서 진리와 선뿐 아니라 사랑의 첫 단계들까지 언급되고 있음을 밝힙니다. 특히 원문 끝의 ‘남은것이아무것도없게하려느냐’는 표현은 이러한 상실의 심각성을 드러냅니다. 다만 AC.430은 여기서 리메인스의 교리를 별도로 풀이하지 않으므로, 그 개념을 자세히 설명하려면 관련 번호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눅18:15, 17에서는 주님께서 어린아이들이 자신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하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어린아이가 순진무구와 체어리티를 나타낸다는 사실의 근거로 제시합니다. 여기서 독자가 주목할 부분은 주님께서 단지 어린아이를 가까이하셨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어린아이와같이받아들인다’는 표현을 통해 어린아이가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는 상태와 연결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순진무구와 체어리티가 천국의 삶과 무관한 부수적 성품이 아님을 생각하게 합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사9:6을 인용하여 주님 자신이 ‘아이’라고 불리신다는 사실을 밝힙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순진무구 자체이시며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앞의 구절들에서는 어린양과 어린아이, 젖먹이와 유아를 통해 순진무구와 사랑의 여러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그 의미를 주님 자신에게 연결합니다. 여기서 주님을 ‘아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분의 능력이나 지혜가 미숙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같은 말씀에서 그분은 기묘자, 모사, 하나님, 용사,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라고도 불리십니다.
이렇게 보면 AC.430은 ‘어린아이’의 속뜻을 설명하면서 순진무구와 체어리티의 관계를 차례로 밝혀 갑니다. 먼저 두 가지가 서로 분리될 수 없다고 말하고, 젖먹이와 유아와 어린아이를 통해 사랑의 세 단계를 구별합니다. 이어 이사야와 예레미야, 누가복음의 말씀을 통해 그 의미를 확인한 다음, 주님께서 순진무구 자체이시며 사랑 자체이시라는 사실로 마무리합니다. 따라서 라멕이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말은 단순히 어떤 선한 행동이 줄어들었다는 뜻을 넘어, 교회 안에서 순진무구와 분리될 수 없는 체어리티가 소멸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AC.430해설)
AC.429에서 처음 읽는 독자가 특히 멈칫할 만한 표현은 ‘신앙에서태어나는체어리티’입니다. 앞에서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문제를 강조했는데, 이번에는 체어리티가 신앙에서 태어난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 두 설명을 단순히 ‘어느쪽이먼저인가’라는 순서의 문제로만 읽으면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려는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의 우열이 아니라, 라멕이 소멸시킨 두 가지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이번 번호의 문맥을 살펴보겠습니다. 라멕은 ‘한사람’과 ‘어린아이’를 죽였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을 신앙으로 풀이하고, ‘어린아이’를 체어리티로 풀이합니다. 이어 신앙을 부인하고 죽이는 사람은 신앙에서 태어나는 체어리티도 함께 부인하고 죽인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태어난다’는 표현은 여기서 신앙과 체어리티가 서로 무관하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히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신앙이라고 부르는 것에도 서로 다른 상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씀의 내용을 알고 그것이 참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아직 그 진리에 따라 이웃을 사랑하고 살아가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배운 진리가 삶 속에서 사랑과 선행으로 나타날 때, 우리는 그 신앙이 삶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 예는 AC.429의 문장을 이해하기 위한 설명이지, 스베덴보리가 이번 번호에서 신앙의 모든 단계를 상세히 구분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점에서 ‘신앙에서태어나는체어리티’는 체어리티가 신앙에 비해 덜 중요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과 체어리티를 떼어 놓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로 읽을 수 있습니다. 라멕의 고백에서 신앙을 죽이는 일은 체어리티를 죽이는 일과 함께 나타납니다. 신앙의 소멸을 말하면서 체어리티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설명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번 번호를 모든 사람의 거듭남에서 반드시 신앙이 시간적으로 먼저 생기고 체어리티가 나중에 생긴다는 공식으로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AC.429는 라멕의 말에 등장하는 ‘사람’과 ‘어린아이’의 의미를 설명하는 자리입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 전체를 이해하려면 앞에서 다룬 가인과 아벨의 해설, 그리고 이어지는 번호들을 함께 살펴야 합니다. 한 문장의 표현을 떼어 내어 스베덴보리의 전체 설명을 대신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독자의 입장에서 이번 번호가 던지는 질문은 오히려 분명합니다. 내가 신앙이라고 부르는 것이 단지 알고 인정하는 데 머물러 있는지, 아니면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와 실제로 연결되어 있는지 살펴보게 하는 것입니다. 다만 자신의 연약함이나 일시적인 실패를 곧바로 라멕의 ‘소멸’과 동일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번 번호에서 설명하는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가 모두 소멸된 황폐의 상태입니다.
결국 ‘신앙에서태어나는체어리티’라는 표현은 체어리티의 가치를 낮추기 위한 말이 아닙니다. AC.429에서는 신앙을 부인하고 소멸시키는 일이 그 신앙에서 태어나는 체어리티의 소멸과도 연결된다는 사실을 설명합니다. 이 관계를 이해하면 라멕이 ‘사람’과 ‘어린아이’를 함께 죽였다고 한 말이 왜 교회의 황폐를 나타내는지 조금 더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AC.429심화1)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창4:23)
AC.429
‘사람’(man[vir])이신앙을뜻한다는사실은이장의첫절에서분명하게드러납니다.하와가가인을낳았을때‘내가한사람을얻었다,여호와를’(Ihavegottenaman, Jehovah)이라고말했기때문입니다.여기서가인은신앙의교리를뜻했으며,그교리를‘한사람,여호와’(aman, Jehovah)라고불렀습니다.또한앞에서사람또는남자가이해력을뜻한다고밝힌내용에서도이를알수있습니다.이해력은신앙에속하기때문입니다.그가여기서‘어린것’(alittleone),곧‘어린아이’(alittlechild)라고부르는체어리티까지소멸시켰다는사실도여기에서따라나옵니다.신앙을부인하고죽이는사람은동시에신앙에서태어나는체어리티도부인하고죽이기때문입니다. That by a “man” [vir]is signified faith is evident from the first verse of this chapter, in that Eve said, when she bare Cain, “Ihavegottenaman,Jehovah”; by whom was meant the doctrine of faith, called “aman,Jehovah.” It is evident also from what was shown above concerning a man or male, that he signifies understanding, which is of faith. That he had also extinguished charity, here called a “littleone,” or a “littlechild,” follows, for he who denies and murders faith, at the same time also denies and murders the charity that is born from faith.
해설
AC.429는 앞의 AC.427에서 라멕의 말을 풀이하면서 제시한 두 가지 상응의 근거를 설명합니다. 라멕이 ‘한사람’을 죽였다는 것은 신앙을 소멸시켰다는 뜻이고,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것은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는 뜻이었습니다.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는 먼저 왜 ‘사람’이 신앙을 나타내는지 밝힌 다음, 신앙의 소멸이 체어리티의 소멸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설명합니다.
‘사람’이 신앙을 뜻한다는 첫 번째 근거는 창4:1입니다. 하와는 가인을 낳고 ‘내가한사람을얻었다,여호와를’이라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에서 이 구절의 가인이 신앙의 교리를 뜻한다고 풀이했습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의 ‘사람’은 단순히 남성이나 인간 일반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가인에게 적용된 ‘사람’이라는 표현을 앞선 해설과 연결하여, 그것이 신앙을 나타낸다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근거는 사람 또는 남자가 ‘이해력’을 나타낸다는 앞선 설명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해력이 신앙에 속한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이해력을 통해 신앙에 관한 것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과 ‘신앙’의 관계는 단순히 한 단어에 임의의 뜻을 붙인 결과가 아니라, 이해력과 신앙의 관계를 통해 설명됩니다. 다만 이해력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에게 살아 있는 신앙이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번 번호는 이해력이 신앙에 속한다는 관계를 밝히는 데 초점을 맞춥니다.
그렇다면 왜 ‘어린아이’는 체어리티를 뜻할까요?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를 ‘신앙에서태어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신앙을 부인하고 죽이는 사람은 신앙에서 태어나는 체어리티도 동시에 부인하고 죽인다고 말합니다. 라멕이 ‘사람’과 ‘어린아이’를 함께 죽였다고 한 것은, 신앙의 소멸과 체어리티의 소멸이 서로 무관한 두 사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신앙에서태어나는체어리티’라는 표현은 주의해서 읽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다른 곳에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여러 각도에서 설명하며, 특히 신앙을 체어리티와 분리하는 일을 경계합니다. 따라서 이 한 문장만으로 체어리티가 언제나 신앙보다 낮거나 부차적이라는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됩니다. AC.429의 직접적인 논지는 신앙을 소멸시키면 그 신앙에서 태어나는 체어리티도 함께 소멸된다는 데 있습니다.
이 설명은 앞에서 살펴본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와도 연결됩니다. 창4장의 앞부분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분리되는 문제를 다루었고, 라멕의 말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모두 소멸된 상태가 나타납니다. AC.429는 그 가운데 ‘사람’과 ‘어린아이’라는 표현을 통해 두 소멸의 관계를 밝힙니다. 라멕의 고백을 단순히 두 사람을 죽였다는 문자적 진술로만 읽으면 놓치기 쉬운 부분입니다.
결국 AC.429는 라멕이 죽였다고 말한 ‘사람’이 왜 신앙을 뜻하는지 창4:1과 이해력에 관한 앞선 설명을 통해 밝힙니다. 또한 ‘어린아이’가 체어리티를 뜻하는 이유를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에서 설명합니다. 신앙을 부인하고 소멸시키는 일은 그 신앙에서 태어나는 체어리티의 소멸과도 연결됩니다. 이처럼 라멕의 말은 신앙과 체어리티가 모두 사라진 교회의 황폐를 드러냅니다. (AC.429해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창4:23)
AC.428
이절과다음절의내용에서‘라멕’(Lamech)이황폐를뜻한다는사실이매우분명하게드러납니다.그가‘한사람을죽였다’(slainaman)고하고,‘어린아이’(littlechild)를죽였다고하며,가인은일곱배로보복을받겠지만라멕은‘일흔일곱배로’(seventyandsevenfold)보복을받을것이라고말하기때문입니다. From the contents of this and the following verse, it is very evident that by “Lamech” is signified vastation; for he says that he had “slainaman,” and a “littlechild,” and that Cain should be avenged sevenfold, and Lamech “seventyandsevenfold.”
해설
AC.428은 앞의 AC.427에서 풀이한 라멕의 고백을 다음 절까지 연결하여, 라멕이 왜 ‘황폐’를 나타내는지 확인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번 번호에서 새로운 상응을 길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대신 라멕이 직접 한 말들을 근거로, 그가 나타내는 상태가 황폐라는 사실이 매우 분명하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의 핵심은 창4:23의 ‘죽였다’는 표현과 창4:24의 ‘일흔일곱배’라는 표현을 함께 읽는 데 있습니다.
앞의 AC.427에서 ‘한사람을죽였다’는 말은 신앙을 소멸시켰다는 뜻이었고,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말은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는 뜻이었습니다. 이번 번호는 이 두 표현을 다시 언급합니다. 라멕의 황폐는 단순히 신앙이 약해진 상태나 체어리티가 잠시 부족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앞 번호에서 설명했듯이, 신앙과 체어리티가 소멸되고 더 이상 온전함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와 관련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다음 절의 ‘가인은일곱배,라멕은일흔일곱배’라는 말까지 함께 제시합니다. 창4:24는 가인에게 적용된 ‘일곱배’와 라멕에게 적용된 ‘일흔일곱배’를 대비합니다. 이 대비가 라멕의 황폐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는 것이 이번 번호의 설명입니다. 다만 AC.428자체는 일곱과 일흔일곱의 속뜻을 아직 풀이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일흔일곱 배를 황폐의 정도를 나타내는 단순한 수치로 계산하거나, 가인보다 라멕이 정확히 열한 배 더 악하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보복’이라는 표현을 곧바로 주님께서 분노하여 가인이나 라멕에게 복수하신다는 뜻으로 이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는 보복의 성격을 설명하기보다, 라멕의 말에 등장하는 두 죽음과 두 수치의 대비를 통해 황폐의 의미를 확인합니다. 보복과 숫자의 속뜻은 다음 절에 관한 설명을 살피면서 판단해야 합니다.
이처럼 AC.428은 짧지만 앞뒤 번호를 연결하는 역할을 합니다. AC.427은 라멕이 죽였다고 말한 ‘사람’과 ‘어린아이’의 의미를 밝히고, AC.428은 그 말과 다음 절의 보복에 관한 선언을 함께 제시합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는 라멕의 황폐에 관한 설명을 마무리하는 동시에, 창4:24의 ‘일곱배’와 ‘일흔일곱배’에 관한 해설로 독자를 이끕니다.
결국 라멕이 황폐를 나타낸다는 사실은 그가 신앙과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고 고백하는 말에서 드러나며, 다음 절에서 가인과 라멕의 보복을 대비하는 표현을 통해 더욱 분명해집니다. AC.428은 이 두 절을 하나의 문맥으로 읽게 하면서, 라멕의 상태를 이해하려면 신앙과 체어리티의 소멸뿐 아니라 이어지는 ‘일흔일곱배’의 의미도 살펴야 함을 보여 줍니다. (AC.428해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And Lamech said unto his wives, Adah and Zillah, Hear my voice, ye wives of Lamech, and with your ears perceive my speech; for I have slain a man to my wounding, and a little one to my hurt. (창4:23)
AC.427
‘라멕’(Lamech)은앞에서와같이황폐를뜻합니다.그가‘자기아내들인아다와씰라에게말하기를,너희귀로내말을들으라’(saiduntohiswivesAdahandZillah, Withyourearsperceivemyspeech)고한것은고백을뜻합니다.이러한고백은교회가있는곳에서만이루어질수있는데,앞에서말했듯이그의‘아내들’(wives)은교회를나타냅니다. ‘내가한사람을죽여내게상처를입혔다’(Ihaveslainamantomywounding)는그가신앙을소멸시켰음을뜻합니다.‘사람’(man)은신앙을나타내기때문입니다.‘어린아이를죽여내게해를입혔다’(alittleonetomyhurt)는그가체어리티를소멸시켰음을뜻합니다. ‘상처’(wound)와‘타박상’(bruise)은더이상온전함이남아있지않음을뜻합니다.‘상처’는신앙이황폐해졌음을,‘해’(hurt)는체어리티가황폐해졌음을나타냅니다. By “Lamech” is signified vastation, as before; that he “saiduntohiswivesAdahandZillah,Withyourearsperceivemyspeech” signifies confession, which can only be made where there is a church, which, as has been said, is signified by his “wives.” “Ihaveslainamantomywounding” signifies that he had extinguished faith, for by a “man” is signified faith; “alittleonetomyhurt” signifies that he had extinguished charity. By a “wound” and a “bruise” is signified that there was no more soundness; by a “wound,” that faith was desolated; by a “hurt,” that charity was devastated.
해설
AC.427은 창4:23에 나오는 라멕의 말을 풀이합니다. 앞의 AC.421-426에서는 라멕의 아내들과 자녀들을 통해 새 교회의 내적·외적 요소, 그리고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를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다시 라멕 자신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스베덴보리는 라멕이 앞에서와 같이 ‘황폐’를 나타낸다고 밝히며, 그의 말이 신앙과 체어리티의 소멸에 관한 고백이라고 설명합니다.
라멕은 먼저 자기 아내들인 아다와 씰라에게 말을 듣도록 요청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을 ‘고백’으로 풀이합니다. 그가 아내들에게 말한다는 사실이 중요한 이유는 아내들이 교회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고백이 교회가 있는 곳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고백은 단순히 어떤 사건을 이야기하는 행위가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가 소멸된 상태를 드러내는 말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어 라멕은 자신이 ‘한사람’을 죽였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사람’이 신앙을 나타내므로, 사람을 죽였다는 말은 신앙을 소멸시켰다는 뜻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는 창4:23의 살인에 관한 표현을 문자적 사건의 차원에서만 읽지 않고, 교회 안에서 신앙이 소멸된 상태를 나타내는 말씀으로 읽는 것입니다. 다만 이번 번호는 라멕이 어떤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 신앙을 소멸시켰는지까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 과정은 앞뒤의 황폐에 관한 설명과 함께 살펴야 합니다.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말은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음을 뜻합니다. 여기서 신앙과 체어리티는 서로 다른 표현으로 구별됩니다. ‘사람’은 신앙을, ‘어린아이’는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는 라멕의 말에 등장하는 두 죽음을 각각 신앙과 체어리티의 소멸에 연결함으로써, 이 고백이 교회의 한 부분만이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 모두에 관한 것임을 밝힙니다.
이 구별은 앞에서 살펴본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와도 연결하여 생각할 수 있습니다. 창4장의 앞부분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 그리고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상태를 다루었습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라멕의 고백을 통해 신앙과 체어리티가 모두 소멸된 상태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 연결을 근거로 가인과 라멕의 상태가 모든 면에서 동일하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AC.427이 직접 밝히는 것은 라멕이 황폐를 나타내며, 그의 말이 신앙과 체어리티의 소멸을 뜻한다는 사실입니다.
라멕은 이 두 죽음을 말하면서 자신에게 ‘상처’와 ‘해’가 생겼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상처’와 ‘타박상’이 더 이상 온전함이 남아 있지 않음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상처는 신앙의 황폐를, 해는 체어리티의 황폐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 표현들은 라멕이 입은 육체적 부상의 정도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소멸되어 교회 안에 온전함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를 나타냅니다.
여기서 ‘황폐’라는 말도 단순히 신앙생활이 잠시 약해지거나 체어리티를 충분히 실천하지 못한 상태와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번 번호에서 신앙과 체어리티가 ‘소멸되었다’고 말하며, 더 이상 온전함이 남아 있지 않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읽고 자신의 일시적인 연약함을 곧바로 라멕의 황폐와 동일한 상태로 판단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번 번호는 라멕이 표상하는 교회의 상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결국 AC.427에서 라멕의 말은 신앙과 체어리티가 모두 소멸된 상태에 관한 고백입니다. 아다와 씰라는 교회를 나타내며, 그들에게 말을 듣도록 요청하는 것은 고백을 뜻합니다. ‘사람’을 죽였다는 말은 신앙의 소멸을,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말은 체어리티의 소멸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상처와 해는 그 결과 더 이상 온전함이 남아 있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교회의 황폐가 단순히 외적인 형식의 변화가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의 생명에 관한 문제임을 살펴보게 됩니다. (AC.427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