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BU.006 | 불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갈애와 집착을 소멸하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 멸성제의 해탈과 주님에게서 오는 참된 자유

 

해설

인간은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지만, 고통을 일으키는 바깥의 조건이 사라진다고 해서 마음의 괴로움까지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가난에서 벗어나면 더 많은 재물을 원하고, 원하는 지위를 얻으면 그것을 잃을까 두려워하며,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조차 언젠가 헤어져야 한다는 불안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불교는 이러한 인간의 현실을 살피면서 고통의 궁극적인 해결을 단순히 외부 환경을 변화시키는 데서 찾지 않습니다. 불교의 근본 교리인 ‘사성제’(四聖諦, cattāri ariyasaccāni)는 고통의 현실을 밝히는 고성제, 그 원인을 설명하는 집성제, 고통의 소멸 가능성을 가르치는 멸성제, 그리고 그 소멸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는 도성제로 이루어집니다. 이 가운데 세 번째인 ‘멸성제’(滅聖諦, nirodha-sacca)는 고통의 근본 원인이 소멸하면 고통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갈애’(渴愛, taṇhā)란 감각적 즐거움과 존재의 지속, 또는 존재의 소멸을 갈망하는 목마름을 뜻하고, ‘집착’(執著, upādāna)은 그러한 대상을 자기 것으로 굳게 붙잡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불교가 말하는 소멸은 인간의 모든 감정이나 활동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갈애와 집착에 사로잡혀 고통을 반복하는 근본적인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가르침을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고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무감각한 상태를 추구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초기불교의 ‘상윳따 니까야’(相應部, Saṃyutta Nikāya) 56.11에 수록된 ‘초전법륜경’(初轉法輪經, Dhammacakkappavattana Sutta)은 멸성제를 갈애가 남김없이 사라지고, 그것을 버리고 놓아 자유로워지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고통을 일으키는 조건이 사라지면 그 결과도 소멸한다는 ‘연기’(緣起, paṭiccasamuppāda)의 원리입니다. 연기란 어떤 현상도 독립적으로 발생하지 않고 원인과 조건에 의존하여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같은 경전집의 SN 12.2는 ‘무명’(無明, avijjā), 곧 고통과 그 원인 및 소멸의 길을 바르게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여러 조건이 이어져 고통이 발생하며, 무명이 소멸하면 그에 의존하던 조건들도 소멸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과정에서 갈애가 소멸하면 집착이 소멸하고, 집착이 소멸하면 다시 존재하고 태어나는 과정도 멈추게 됩니다. 불교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열반’(涅槃, nibbāna)은 이러한 갈애와 무명, 고통과 ‘윤회’(輪廻, saṃsāra)의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열반은 단순히 마음이 편안해지는 심리적 안정과 같지 않습니다. 또한 열반을 인간이 완전히 없어지는 허무한 상태라고 단정하는 것도 불교의 설명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불교는 열반을 조건 지어진 존재의 반복적인 속박에서 벗어난 해방으로 이해하며, 그 궁극적인 상태를 일반적인 존재와 비존재의 개념으로 단순화하는 것을 경계합니다.

 

그렇다면 갈애가 소멸하면 인간은 더 이상 아프지도 않고 슬퍼하지도 않으며, 육체적인 고통도 전혀 경험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불교에서도 살아 있는 동안 깨달음에 이른 사람에게 육체적 통증과 질병, 늙음과 죽음이 여전히 나타날 수 있음을 인정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경험을 자기 존재에 대한 집착과 결합하여 새로운 괴로움으로 증폭시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상윳따 니까야’ 36.6에 나오는 ‘화살의 비유’는 이 차이를 잘 설명합니다. 가르침을 받지 못한 사람은 육체적인 고통을 경험할 때 정신적인 괴로움까지 더하여 마치 두 개의 화살을 맞는 것과 같지만, 바르게 수행한 사람은 육체적인 고통을 겪더라도 거기에 새로운 집착과 정신적 고통을 덧붙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멸성제를 ‘깨달으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불행이 사라진다’는 약속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누군가가 심한 슬픔이나 불안을 겪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에게 수행이 부족하다거나 집착이 많다고 판단해서도 안 됩니다. 불교의 멸성제는 고통받는 사람을 책망하기 위한 가르침이 아니라, 고통을 지속시키는 내적인 조건에서 벗어날 가능성을 보여 주는 가르침입니다. 여기에는 인간이 자기의 감정과 욕망에 무조건 끌려다닐 필요가 없으며, 그것들을 바르게 살피고 다스리는 가운데 새로운 자유를 경험할 수 있다는 귀중한 통찰이 있습니다.

 

이러한 통찰은 말씀에서 인간의 욕망과 자유를 다루는 방식과 비교할 만합니다. 예수께서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고 말씀하셨고, 이어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8:34)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자유는 단순히 원하는 것을 마음껏 하는 상태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을 지배하는 악에서 벗어나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 477–480번에서 인간의 삶을 결정하는 ‘지배적인 사랑’(ruling love)에 관하여 설명합니다.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사랑이 있지만 그 사랑들을 지배하고 하나의 방향으로 이끄는 중심적인 사랑이 있으며, 죽음 이후에도 그 사랑의 성격이 그의 영적 상태를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재물이나 명예를 사랑한다는 사실만으로 그의 내면을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그것들을 무엇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며, 무엇을 삶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사랑하는가에 있습니다. 자기 자신과 세상을 모든 것보다 앞세우면 다른 사람을 자신의 만족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기 쉽지만,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중심이 되면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과 재물도 선한 쓰임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불교의 멸성제가 갈애의 소멸을 통하여 속박에서 벗어나는 길을 설명한다면, 말씀은 인간을 지배하는 사랑의 질서가 바로잡힐 때 참된 자유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밝혀 줍니다. 두 설명은 자기중심적인 욕망이 인간을 속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만납니다. 그러나 불교의 갈애 소멸과 말씀에서 말하는 죄로부터의 자유를 곧바로 동일한 과정으로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이 차이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은 ‘거듭남’(regeneration)의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 DP, 1764) 83번에서 인간이 본래의 자연적 상태에서 영적 상태로 변화하는 거듭남을 설명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사랑과 욕망을 따라 살아가면서 그것이 자신에게 기쁨을 준다는 이유로 악을 선이라고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악을 인식하고 그것을 죄로 여겨 멀리하기 시작할 때 개혁이 시작되며, 주님의 도움으로 악과 싸워 이길 때 거듭남이 이루어집니다. 같은 저작 DP.100은 주님께서 인간의 속 사람 안에서 악을 제거하시려면 인간이 먼저 겉 사람 안에서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해야 한다는 신적 섭리의 법칙을 설명합니다. 여기서 ‘속 사람’(internal man)은 인간의 영적 내면을, ‘겉 사람’(external man)은 자연적 삶과 외적인 생각 및 행동의 차원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인간이 자기 힘만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은 마치 자기 힘으로 악을 멀리하는 것처럼 자유롭게 행동해야 하지만, 실제로 악을 제거하고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또한 거듭남은 모든 욕망과 개성을 없애는 과정이 아닙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랑이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 아래 놓이고, 인간의 의지와 이해가 선과 진리의 질서에 따라 새로워지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불교가 갈애와 무명의 소멸을 통하여 해탈을 설명한다면, 새 교회의 교리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사랑과 삶의 방향이 변화하는 거듭남을 설명합니다. 두 전통이 모두 인간의 내적 변화를 중요하게 여기더라도 그 변화의 궁극적인 근원과 목적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갈애와 집착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통해 얻는 평안과, 말씀에서 말하는 천국의 평안은 같은 것입니까? 두 평안 사이에도 구별이 필요합니다. 불교에서 갈애의 소멸은 집착에 따른 불안과 속박에서 벗어나는 해방과 연결되지만, 새 교회의 교리에서 천국의 평안은 주님과 결합하고 그분에게서 오는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이는 삶과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새 예루살렘을 위한 삶의 교리’(Doctrine of Life for the New Jerusalem, Life, 1763) 21–22번은 인간이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할수록 주님 안에 있게 되고, 그만큼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행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악을 멀리하는 목적은 단순히 마음의 불편함을 줄이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인간 안에서 악이 지배하던 자리에 주님에게서 오는 선이 역사하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이 점에서 참된 자유는 자기 자신만을 위한 욕망에서 벗어나는 소극적인 상태에 머무르지 않고, 선을 사랑하고 기쁘게 행하는 적극적인 삶으로 나타납니다. 가족을 사랑하고 일을 하며 정당한 즐거움을 누리는 것도 그 자체로 영적인 삶에 반대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사랑과 활동이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의 질서 안에 놓일 때 선한 쓰임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불교의 해탈을 아무런 적극적 사랑이나 자비도 없는 상태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불교 역시 자비와 이타적인 실천을 중요하게 여기며, 특히 대승불교에서는 다른 중생의 해탈을 돕는 보살의 삶을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양쪽의 차이는 한쪽에는 자비가 있고 다른 쪽에는 없다는 데 있지 않고, 그 자비와 선의 궁극적인 근원 및 영원한 삶의 목적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있습니다.

 

이 문제는 실제 신앙생활에도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사람은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종교를 찾을 수 있습니다. 병이 낫기를 원하고, 경제적인 어려움이 해결되기를 바라며, 가족 간의 갈등이나 마음의 불안이 사라지기를 기도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소망 자체를 무조건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종교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이 자기의 모든 소원을 이루는 데 머문다면, 종교는 오히려 자기중심적인 욕망을 강화하는 수단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불교의 멸성제는 이러한 욕망의 구조를 돌아보게 하며, 원하는 것을 끝없이 얻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속박하는 갈애에서 벗어나는 길을 제시합니다. 말씀 역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3)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의 필요와 고통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먼저 사랑하고 무엇을 최종 목적으로 삼아야 하는지를 바로잡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고통받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며, 고통의 소멸 자체를 경계해야 할 일로 여기시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인간의 영원한 행복은 외적인 문제가 모두 해결되는 데 있지 않고,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여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삶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의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구하는 동시에 다른 사람의 고통을 덜어 주는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마음의 평안을 얻는 것과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은 서로 분리된 두 목적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인간의 내면과 외적인 삶에 함께 나타나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결국 ‘갈애와 집착을 소멸하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라는 명제는 불교의 멸성제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가르침입니다. 불교는 인간이 끊임없이 원하는 것을 얻는 방식으로는 궁극적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그 고통을 지속시키는 갈애와 집착의 근본적인 조건이 소멸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자기중심적인 욕망을 성찰하고, 변하는 것을 영원한 행복의 근거로 붙잡지 않도록 경계하는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멸성제를 모든 감정과 사랑의 제거로 이해하거나, 깨달은 사람에게 더 이상 육체적인 고통이나 슬픔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불교의 열반과 말씀에서 말하는 천국의 생명을 동일시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기록한 새 교회의 교리에 따르면 인간의 참된 자유는 단순히 어떤 욕망이 사라진 상태가 아니라,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하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사랑과 의지가 새로워진 상태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악을 버려야 하지만, 그 자리에 참된 선을 주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불교의 멸성제가 인간을 속박하는 갈애에서 벗어나는 길을 보여 준다면, 말씀은 인간이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할 뿐 아니라 누구를 사랑하며 어떤 생명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밝혀 줍니다. 참된 자유는 자기의 욕망에 더 이상 끌려다니지 않는 데서 시작하여,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 안에서 선을 기쁘게 선택하고 이웃에게 유익을 이루는 삶으로 완성됩니다. (BU.006 해설)

 

요약

갈애와 집착의 소멸을 통하여 고통의 근본적인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불교의 멸성제에는 인간의 욕망과 자기중심성을 성찰하게 하는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다만 갈애의 소멸을 모든 의욕과 감정의 제거로 이해하거나, 열반을 단순한 무감각 또는 존재의 소멸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멸성제가 육체적 질병이나 외적인 불행의 완전한 제거를 약속하는 것도 아닙니다. 새 교회의 교리에 따르면 인간의 참된 자유는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하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임으로써 사랑과 의지가 새로워지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불교의 해탈과 말씀의 거듭남 사이에 있는 자기중심적 욕망의 극복이라는 공통점을 인정하되, 변화의 궁극적인 근원과 목적은 구별해야 합니다. 참된 자유와 천국의 평안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받아들여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BU.005 ‘고통의 원인은 갈애와 집착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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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IS.006 | 이슬람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알라는 지극히 자비로우시며 완전하게 정의로우시다’ - 신적 자비와 정의의 관계

 

해설

이슬람은 알라를 지극히 자비로우시면서도 완전하게 정의로우신 하나님으로 고백합니다. 꾸란의 여러 장은 ‘지극히 자비로우신 분’(al-Rahman)과 ‘한없이 자애로우신 분’(al-Rahim)이라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시작하며, 이러한 표현은 이슬람 신앙에서 자비(慈悲, mercy)가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지 보여 줍니다. 꾸란 7:156은 하나님의 자비가 모든 것을 포괄한다고 선언하고, 4:40은 하나님께서 누구에게도 지극히 작은 불의조차 행하지 않으신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16:90은 하나님이 정의와 선행, 친족에 대한 베풂을 명령하시고 악과 불의를 금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이슬람의 하나님 이해를 엄격한 율법과 심판에만 기초한 것으로 설명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 안에는 하나님의 자비와 정의를 함께 인정하고, 인간도 그 자비와 정의를 삶에서 실천해야 한다는 중요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하나님은 모든 선의 근원이시며, 불의나 악을 행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서 더욱 깊이 살펴보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정의가 서로 다른 두 속성으로서 때로는 충돌하거나 서로를 제한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본성 안에서 완전히 하나를 이루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슬람에서 하나님의 자비는 단순히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는 감정에 머물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생명을 주시고,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며, 잘못을 깨닫고 돌아올 기회를 주시는 분입니다. 꾸란 6:12는 하나님께서 자비를 스스로의 원칙으로 삼으셨다고 가르치며, 39:53은 자신의 영혼을 해친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자비를 절망하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그러나 꾸란은 동시에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특히 7:156은 하나님의 자비가 모든 것을 포괄한다고 선언하면서도, 그분이 원하시는 자에게 형벌을 내리신다고 말씀합니다. 이슬람 신학에서는 이러한 자비와 정의를 모두 하나님의 완전한 속성으로 이해하며, 그 관계를 설명하는 방식에는 학파에 따른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슬람이 하나님의 자비를 부정하고 형벌만 강조한다고 말할 수 없으며, 반대로 하나님의 형벌을 단지 인간의 오해에 불과한 것으로 설명한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이 두 요소는 실제로 이슬람의 계시와 신학 안에 함께 존재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검토해야 할 지점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비 자체이시라면, 그분이 악인에게 형벌을 내리신다는 표현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며, 그 형벌은 하나님의 본성에서 직접 나오는 것입니까?

 

스베덴보리는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 DP, 1764) 3–4항에서 신적 사랑(神的愛, Divine Love)과 신적 지혜(神的智慧, Divine Wisdom)가 주님에게서 하나로 나온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651항에서는 주님이 사랑 자체이시고 자비 자체이시며 선 자체이시므로, 어떤 사람에게도 악을 행하실 수 없다고 분명히 가르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자비와 정의는 서로 대립하는 두 성향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은 모든 인간의 구원을 바라며, 주님의 지혜는 그 사랑이 신적 질서(神的秩序, Divine Order)에 따라 실현되도록 역사합니다. 사랑은 진리를 떠나 제멋대로 행동하지 않으며, 진리 역시 사랑과 분리되어 냉혹한 심판으로 작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신적 정의(Divine Justice)는 하나님의 자비를 제한하거나 그 반대편에 서 있는 또 하나의 원리가 아니라, 신적 사랑과 지혜의 완전한 질서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인간은 때때로 자비를 베풀려면 정의를 양보해야 하고, 정의를 실현하려면 자비를 거두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주님 안에서는 이러한 모순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모든 역사는 사랑에서 비롯되며, 지혜를 통하여 선한 목적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해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악인을 심판하시며, 재앙을 내리시는 것으로 표현된 구절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 2335항에서 주님이 누구도 정죄하지 않으시며 지옥으로 심판하여 보내지 않으신다고 설명합니다. 그 이유는 주님이 자비 자체와 선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선을 거부하고 악을 사랑할 때 스스로 천국과 주님에게서 멀어지므로, 악한 사람의 상태가 정죄와 형벌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요3:17은 하나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목적이 세상을 심판하여 정죄하려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려는 데 있다고 말씀하며, 이어지는 19절은 사람들이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는 것이 심판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님의 사랑이 변하여 진노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거부함으로써 그것을 고통스럽게 경험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을 말씀의 문자적 의미에만 머물러 이해하지 않고, 그 안에 있는 속뜻(internal sense)을 통하여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인간의 영적 상태를 구별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정의는 악을 그대로 내버려 두거나 모든 행위를 동일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뜻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악은 실제로 악이며, 인간은 자신이 사랑하고 선택한 악에 따른 결과를 경험합니다. 영계에서도 악령들이 다른 존재를 해치려 할 때 그들의 행동에는 제약이 가해지며, 질서를 보호하기 위한 형벌과 고통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형벌은 주님이 분노를 해소하거나 보복의 즐거움을 얻기 위해 내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악이 더 큰 해악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제한하고 영적 질서를 보존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이 악을 허용하신다고 해서 그 악을 원하시거나 승인하신다는 뜻도 아닙니다. 허용(許容, permission)과 의지(意志, will)는 구별해야 합니다.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면서도 악이 무제한으로 퍼지지 않도록 인도하시는 것이 신적 섭리의 중요한 역사입니다. 따라서 참된 정의는 악을 선이라고 부르는 것도 아니고, 악인을 향한 증오와 보복을 정당화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선을 보호하고 악을 제한하며, 가능한 모든 사람을 구원으로 인도하시려는 주님의 사랑이 질서 있게 역사하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이슬람의 자비와 정의에 관한 가르침에 담긴 진리와 신학적 차이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극히 자비로우시며 어떤 불의도 행하지 않으신다는 고백은 참됩니다. 또한 인간이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지며, 악을 피하고 정의와 자비를 실천해야 한다는 가르침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정의를 인간의 죄에 대한 직접적인 보복이나 형벌 의지로 이해한다면,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주님의 신적 본성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이슬람 신학이 하나님의 정의를 인간적인 분노와 보복으로 설명한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이슬람에도 하나님의 자비가 인간의 상상을 넘어선다는 가르침과 심판의 공정성을 강조하는 다양한 해석이 있습니다. 다만 꾸란에는 하나님이 형벌을 내리시는 주체로 표현된 구절들이 분명히 존재하며,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은 그러한 표현을 주님의 영원한 사랑과 인간의 악한 상태라는 관점에서 다시 이해하도록 요구합니다. 이 차이는 단순히 형벌의 강도나 범위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본질적으로 어떤 분이신가 하는 신관(神觀)의 문제입니다.

 

이러한 구별은 기독교인에게도 매우 중요합니다. 기독교 안에서도 하나님은 사랑이시지만 동시에 공의로우시므로 죄인에게 반드시 형벌을 내리셔야 한다고 설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지어 성부 하나님은 인간의 죄에 진노하셨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 진노를 대신 받으심으로써 하나님이 인간을 용서하실 수 있게 되었다고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의 자비와 정의를 서로 충돌하는 속성으로 나누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본래부터 인간을 사랑하시며,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세상에 오신 분 역시 바로 그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구속(救贖, redemption)은 본래 자비롭지 않으셨던 하나님을 자비롭게 변화시킨 사건이 아니라, 언제나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악과 지옥의 세력을 이기시고 인간을 구원하실 길을 여신 사건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정의를 부정하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적 정의가 신적 사랑에서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시지만, 죄인을 미워하기 때문에 구원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의 뜻은 인간이 악에서 돌아서서 선을 받아들이고, 마침내 주님과 결합하여 천국의 생명을 누리는 데 있습니다.

 

결국 ‘알라는 지극히 자비로우시며 완전하게 정의로우시다’라는 이슬람의 고백에는 하나님의 본성에 관한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며 불의를 행하지 않으시고, 인간에게도 정의와 선행을 요구하십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서 더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정의는 서로 균형을 맞추어야 하는 두 속성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지혜 안에서 완전하게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까?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후자입니다. 주님의 자비는 인간을 향한 사랑이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주며, 주님의 정의는 그 사랑이 신적 질서에 따라 역사한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이러한 이해는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을 대할 때 정의라는 이름으로 보복하려 하지는 않습니까? 또 자비라는 이름으로 악을 묵인하거나, 누군가를 보호해야 할 책임을 회피하지는 않습니까? 참된 자비는 악을 정당화하지 않으며, 참된 정의는 사랑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문항이 우리에게 남기는 질문은 ‘하나님은 자비로운 분이신가, 정의로운 분이신가?’가 아닙니다. 그것은 ‘나는 자비와 정의가 하나인 주님의 사랑을 얼마나 바르게 이해하고 있으며, 그 사랑을 이웃에게 어떻게 실천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IS.006 해설)

 

요약

이슬람이 하나님은 지극히 자비로우시며 어떤 불의도 행하지 않으신다고 가르치는 것은 참된 진리입니다. 인간에게 정의와 자비를 함께 실천하도록 요구하는 가르침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인간에 대한 직접적인 보복이나 형벌 의지로 이해하는 것은 주님의 신적 본성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합니다. 주님은 사랑 자체와 자비 자체이시므로 누구에게도 악을 행하지 않으시며, 인간이 경험하는 정죄와 형벌은 악을 사랑하고 선을 거부하는 영적 상태 및 질서의 보존과 관련됩니다. 신적 자비와 정의는 서로 대립하는 속성이 아니라 신적 사랑과 지혜 안에서 완전히 하나를 이룹니다. 따라서 이슬람의 자비와 정의에 관한 고백 자체가 오류인 것은 아니며, 그 관계와 신적 형벌의 본질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서 스베덴보리의 신학과 중요한 차이가 나타납니다.

 

 

 

IS.005 ‘알라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 인간의 근본적인 의무다’

SL.IS.005 | 이슬람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알라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 인간의 근본적인 의무다’ - 복종과 자유로운 사랑 해설이슬람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삶의 태도 가운데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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