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RC.009 | 천주교(Roman Catholic)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교회가 정한 신앙의 진리를 믿고 지키는 것이 올바른 신앙이다’ - 진리의 근거는 교회의 권위에 있는가, 주님의 말씀에 있는가?

 

해설

‘교회가 정한 신앙의 진리를 믿고 지키는 것이 올바른 신앙이다.’ 이것은 천주교의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교회의 가르침과 신자의 순종에 관한 명제입니다. 천주교는 신앙을 개인이 성경을 읽고 자유롭게 해석하여 선택하는 것으로만 이해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교회에 복음을 맡기셨으며, 사도들에게서 이어지는 교회의 가르치는 직무를 통하여 신앙의 진리가 보존되고 전달된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신자는 교회가 가르치는 교리를 배우고 받아들이며, 그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이해에는 개인의 생각과 판단만으로 신앙을 결정하지 않고, 오랜 세월 교회가 보존해 온 진리를 존중해야 한다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근본적인 질문이 생깁니다. 어떤 교리가 참된 진리인 이유는 교회가 그것을 정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주님의 말씀에 근거하기 때문일까요? 교회가 가르치는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 권위에 순종하여 믿는 것이 참된 신앙일까요? 반대로 신자가 스스로 진리의 참됨을 살피고 질문하는 일은 교회에 대한 불순종일까요? 무엇보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신앙이 단순히 다른 사람의 말을 받아들이는 데 있지 않고,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를 이해하고 사랑하며 삶으로 실천하는 데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번 명제는 교회의 교리와 권위를 모두 부정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의 가르침이 어디에서 권위를 얻으며, 그 가르침이 어떻게 인간 자신의 살아 있는 신앙이 되는가를 묻는 문제입니다.

 

먼저 천주교의 공식적인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84–85항은 신앙의 유산이 성경과 성전에 담겨 교회 전체에 맡겨졌으며, 이를 권위 있게 해석하는 직무가 교회의 살아 있는 ‘교도권’(敎導權, Magisterium)에 맡겨졌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교도권은 로마 교황과 그와 친교를 이루는 주교들이 수행하는 공식적인 가르침의 직무를 뜻합니다. 천주교는 교도권이 단순히 신학적인 견해를 제시하는 기관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계시를 해석하고 신자들에게 신앙과 도덕에 관한 가르침을 전할 권한을 지닌다고 믿습니다. 특히 교리서 88항은 교도권이 계시에 포함된 진리나 그와 필연적으로 연결되는 진리를 결정적으로 제시할 때 ‘교의’(敎義, dogma)를 정의한다고 설명합니다. 신자는 이러한 교의를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선택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진리로 받아들이도록 요구받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구별이 있습니다. 천주교는 교회가 인간의 생각으로 새로운 신적 진리를 만들어 낸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교도권이 계시의 유산을 보존하고 해석하며 그 의미를 분명하게 제시한다고 이해합니다. 따라서 ‘교회가 정한 진리’라는 표현도 천주교의 공식적인 관점에서는 교회가 임의로 만들어 낸 진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진리를 교회가 권위 있게 가르친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천주교는 교회의 권위가 하나님의 말씀보다 높지 않다는 사실도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86항은 교도권이 하나님의 말씀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섬기는 직무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91–94항은 신자들이 계시의 진리를 이해하고 보존하며 그 이해를 더욱 깊게 하는 일에 참여한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천주교가 일반 신자에게는 진리를 이해할 필요가 없고 교회가 말하는 내용을 무조건 외우기만 하면 된다고 가르친다고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교리서 1783–1785항은 올바른 양심을 형성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기도하며 그 말씀을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교도권의 해석 권한은 개인 신자의 판단과 동일한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교리서 87항은 신자들이 목자들의 가르침을 온순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설명하며, 890–892항은 교도권의 가르침이 지닌 권위와 그에 대한 신자의 동의를 구별하여 제시합니다. 여기서 모든 교회의 발언이 동일한 수준의 무류성을 지닌다는 뜻은 아닙니다. 천주교는 결정적으로 선포된 교의와 그 밖의 권위 있는 가르침을 구별하며, 그에 따라 신자에게 요구되는 동의의 성격도 달리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정확하게 검토하려면 천주교의 공식적인 권위 구조를 인정하면서도, 그 구조가 진리의 참됨을 확인하는 과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신앙 공동체의 가르침을 존중하고 그 안에서 진리를 배우는 일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딤전3:15는 교회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집이며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부릅니다. 엡4:11-13은 주님께서 교회에 여러 가르치는 직무를 주신 목적이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데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교회의 가르침이 불필요하거나 각 사람이 자신의 생각만으로 신앙을 형성하면 된다는 뜻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성경은 교회의 가르침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만을 참된 신앙으로 제시하지도 않습니다. 행17:11은 베뢰아 사람들이 말씀을 간절한 마음으로 받으면서도 바울이 전한 내용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다고 기록합니다. 이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경멸하지 않았지만, 그 가르침이 성경에 부합하는지를 살폈습니다. 또한 요8:31-32에서 주님께서는 자신의 말씀 안에 거하는 사람이 참된 제자이며 진리를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신앙의 중심은 어떤 인간 조직의 권위 그 자체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과 그 말씀에 담긴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가르침을 존중하는 일과 그 가르침을 말씀에 비추어 분별하는 일은 반드시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올바른 교회의 가르침은 신자가 주님의 말씀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 그 진리 안에서 살아가도록 도와야 합니다.

 

이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살펴보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성경에 관한 교리’(Doctrine of Sacred Scripture, SS, 1763) 76항에서 교회는 말씀으로 말미암아 존재하며,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 그 교회의 성격이 결정된다고 가르칩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원칙입니다. 교회가 성경을 가지고 있고 그 성경을 낭독한다는 사실만으로 참된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교회가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그 말씀에서 어떤 교리를 이끌어 내며, 그 진리에 따라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가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말씀은 교회가 자신의 권위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자료가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가 자신의 가르침과 삶을 끊임없이 비추어 보아야 할 신적 진리의 근원입니다. 따라서 어떤 교리가 오랜 전통을 지녔거나 권위 있는 종교 지도자들이 그것을 가르쳤다는 사실만으로 그 교리가 참되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참된 교리는 주님의 말씀에서 나와야 하며, 그 말씀의 진리와 일치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교회가 교리를 가르치는 일을 부정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교리가 말씀을 올바르게 이해하도록 돕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가르칩니다. 다만 그 교리의 권위는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의 지위나 제도의 역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진리가 실제로 주님의 말씀에 근거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됩니다.

 

이 점에서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 351–352항은 특별히 중요한 직접적인 근거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지성과 지혜란 무엇이 진리이고 선인지, 무엇이 거짓이고 악인지를 내적으로 보고 이해하며 분별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반면 HH.352에서는 다른 사람이 참되다고 말했기 때문에 그것을 참이라고 믿고, 그 뒤에 그 믿음을 뒷받침하는 근거만 찾아 확신하는 상태를 ‘거짓된 지성과 지혜’(spurious intelligence and wisdom)의 한 형태로 설명합니다. 인간은 어떤 주장을 이미 참이라고 확정한 뒤에는 그 주장이 실제로 거짓이더라도 여러 가지 논거를 찾아 참처럼 보이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경계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진리를 배우는 행위 자체가 아닙니다. 누구나 처음에는 부모와 교사, 목회자와 교회를 통하여 신앙의 내용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그가 구별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배운 진리를 스스로 이해하고 사랑하는 신앙과, 그 진리가 참된 이유를 오직 가르친 사람의 권위에서만 찾는 신앙입니다. 특히 HH.352:2는 어린 시절 스승에게 배운 내용을 참되다고 믿었더라도 성장한 뒤 진리를 사랑하여 탐구하고, 그 진리의 참됨을 내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앞서 비판한 부류에 속하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교회에서 배우는 것과 스스로 진리를 이해하는 것은 서로 배척해야 할 행위가 아닙니다. 참된 신앙의 성숙은 배우는 단계에서 시작하여 진리를 자신의 이해와 삶 안에서 받아들이는 단계로 나아가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 7055:2에서도 같은 문제를 더욱 직접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는 사람들이 교회의 교리를 따르면서도 그것이 참되다는 사실을 교회가 가르쳤고 학식 있는 사람들이 전했다는 이유 외에는 알지 못하는 경우를 설명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도 신적 진리와 관련된 가르침이 전달될 수 있지만, 그것이 아직 그 사람 안에서 진리를 사랑하는 내적인 인식과 충분히 결합한 상태는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 진리 자체를 사랑하고 특히 삶을 위하여 진리를 배우려는 사람은 교회의 교리를 받아들이기 전에 그것이 실제로 참된지 살피려 하며, 그 교리가 진리와 일치하는가를 분별하려 합니다. 이 본문은 교회의 권위와 개인의 신앙 사이에 존재하는 중요한 차이를 보여 줍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암기하고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진리를 자기 자신의 이해 안에서 받아들이고 삶에 적용하지 않았다면 아직 신앙의 내적인 목적에 도달하지 못한 것입니다. 반대로 교회의 가르침을 배우면서도 그것이 왜 참된지 이해하고자 말씀을 살피고,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려는 사람은 참된 신앙의 성숙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신자가 교회보다 더 높은 개인적 권위를 행사한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 안에서 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분은 궁극적으로 주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교회의 교리는 그 진리를 전달하는 도구가 될 수 있지만, 진리의 근원 자체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권위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일이 곧 개인의 생각을 모든 진리보다 높이는 태도를 정당화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인간의 자연적인 이해와 감각이 언제나 올바른 판단을 내린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이미 믿고 싶은 것을 참이라고 확신하거나, 자신의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성경을 잘못 해석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가르침을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이 반드시 더 깊은 진리 안에 있다고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독립적인 판단 자체가 참된 신앙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AC.9300:4에서 사람이 말씀을 읽을 때 주님께서 그의 이해를 밝혀 진리가 무엇인지 깨닫게 하실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내적인 깨달음은 인간 자신의 총명함이나 자율적인 판단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려는 마음과 관계됩니다. 그러므로 참된 분별은 교회가 말했으므로 무조건 참이라고 확신하는 태도뿐 아니라, 교회가 말했으므로 무조건 거짓이라고 판단하는 태도도 경계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누가 가르쳤는가보다 그 가르침이 실제로 말씀에 부합하는가, 그리고 그것이 인간을 주님의 사랑과 진리로 이끄는가 하는 점입니다. 교회의 권위를 절대화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자신의 판단을 절대화하는 것 역시 참된 신앙의 길은 아닙니다.

 

이 문제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교리를 믿는 것과 교리대로 살아가는 것의 관계입니다. 천주교는 교회가 정한 진리를 지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신앙의 목적이 완성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2032–2038항은 교회의 가르침이 도덕적인 삶과 연결되어야 한다고 설명하며, 2044항은 그리스도인의 삶과 선한 행위가 복음의 진실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증언이라고 강조합니다. 따라서 천주교가 신앙의 순종을 단순히 교리적 동의와 제도적 복종으로만 이해한다고 비판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교리를 실천하는 일의 영적 의미를 더욱 깊이 살펴야 합니다. 인간이 어떤 규정을 지키는 이유가 교회의 처벌이나 주변의 평가가 두렵기 때문이라면, 그것은 외적인 순종에 머물 수 있습니다. 반대로 그 규정 안에 담긴 진리가 실제로 주님의 선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하여 그 선을 실천한다면 더욱 내적인 신앙의 행위가 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신앙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이해’(understanding)와 그 진리에 따라 선을 행하려는 ‘의지’(will)를 함께 강조합니다. AC.9050은 믿음의 진리와 사랑의 선이 인간 안에서 하나의 삶을 이루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신앙은 교리를 알고 동의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진리를 사랑하여 실제로 선을 행하는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교리를 지키는 행위가 귀중한 이유는 그 자체가 교회의 권위를 높이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진리가 인간의 삶에서 실현되도록 돕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교회와 신자의 관계도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에는 말씀을 가르치고 교리를 정리하며 신자들이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도록 인도하는 중요한 쓰임이 있습니다. 모든 신자가 처음부터 성경의 깊은 의미를 스스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체계적인 가르침과 공동체의 도움은 신앙의 성장에 필요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가르침이 이러한 쓰임을 감당하려면 신자가 진리를 이해하도록 돕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질문을 제기하는 일을 언제나 불순종으로 여기거나, 교리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신앙의 부족으로 판단한다면 신자는 자신의 이해와 양심을 사용하기보다 외적인 권위에 의존하게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신자가 겸손하게 말씀을 배우고 진리의 참됨을 살피며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도록 격려한다면, 교회의 가르침은 더욱 깊은 영적 쓰임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원칙을 가톨릭 신자들이 실제로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으며, 모든 천주교 신자가 교회의 권위에 무비판적으로 순종한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자신의 교회 안에서 진리를 진지하게 배우고 연구하며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신자들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는 개신교 신자라 하더라도 자신이 속한 교단이나 유명한 목회자의 해석을 무조건 참이라고 믿는다면 같은 문제에 빠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번 명제가 던지는 질문은 천주교만을 향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교회와 신자가 자신의 신앙이 진리 자체에 근거하는지, 아니면 진리를 가르친다고 주장하는 인간의 권위에 근거하는지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교회의 가르침을 믿고 지키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 참된 신앙이 되는지 분명하게 정리해야 합니다. 교회가 주님의 말씀에서 나온 진리를 가르치고, 신자가 그 진리를 이해하여 받아들이며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으로 실천한다면, 교회의 가르침을 믿고 지키는 일은 참된 신앙의 중요한 표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정했기 때문에 참되며, 그 권위에 순종하는 것 자체가 곧 올바른 신앙이라고 생각한다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진리는 교회의 권위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에게서 나옵니다. 교회는 그 진리를 받아들이고 가르치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지만, 진리의 근원이 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신앙의 목적은 어떤 교리 체계를 정확하게 보존하거나 제도적 질서를 유지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신자가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그 진리를 사랑하며 자신의 악을 죄로 여겨 피하고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가르침은 존중하되 그 가르침을 말씀보다 높여서는 안 되며, 자신의 이해와 양심을 사용하되 그것을 주님의 진리보다 높여서도 안 됩니다. 참된 신앙은 교회의 권위와 개인의 판단 가운데 어느 하나를 절대화하는 데 있지 않고, 둘 모두가 주님의 말씀과 그분의 사랑 앞에서 겸손하게 서는 데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믿고 지켜야 할 것은 어떤 인간 조직이 정했다는 이유만으로 진리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말씀 안에 밝혀 주신 참된 진리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를 실제로 살아갈 때 비로소 우리의 믿음은 지적인 동의를 넘어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RC.009 해설)

 

요약

‘교회가 정한 신앙의 진리를 믿고 지키는 것이 올바른 신앙이다’라는 명제에는 신자가 개인적인 생각만을 절대화하지 않고 교회가 보존하고 가르치는 진리를 배우며, 그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천주교는 교도권이 성경과 성전에 담긴 계시를 권위 있게 해석한다고 가르치지만, 교도권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높다거나 임의로 새로운 신적 진리를 만들어 낸다고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신자의 양심과 이해, 진리에 대한 탐구와 사랑의 실천을 인정하므로, 천주교가 무조건적인 복종만을 신앙의 전부로 가르친다고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로마 교황과 주교들의 교도권에 특별한 해석 권한을 부여하고, 확정적으로 제시된 교의에 신자가 신앙의 동의로 응답하도록 요구합니다. 이러한 권위 구조는 스베덴보리의 진리 이해와 중요한 차이를 드러냅니다. 그는 SS.76에서 교회가 말씀으로부터 존재하며 말씀에 대한 이해에 따라 교회의 영적 성격이 결정된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HH.351–352에서는 다른 사람의 권위 때문에 어떤 가르침을 참이라고 확신하는 것과, 진리 자체를 사랑하여 그 참됨을 이해하는 신앙을 구별합니다. AC.7055:2 역시 교회의 교리가 참된 이유를 단지 권위 있는 사람들이 가르쳤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상태와, 진리를 진리 자체를 위하여 그리고 삶을 위하여 사랑하는 상태를 구별합니다. 따라서 오류의 핵심은 교회가 교리를 가르치거나 신자가 올바른 교리를 존중하고 순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어떤 교리가 참되다는 궁극적인 근거를 교회의 제도적 권위에서 찾고, 신자 자신의 이해와 진리의 분별보다 그 권위에 대한 동의를 앞세우는 데 있습니다. 다만 이 비판은 천주교뿐 아니라 모든 교회와 신자에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그의 이름과 저작의 권위만을 내세우고 실제 말씀의 진리를 살피지 않는다면 같은 문제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가르침은 주님의 말씀에서 나오는 진리를 이해하고 실천하도록 돕는 한에서 참된 영적 쓰임을 감당합니다. 그러나 어떤 교회의 권위도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 자체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명제는 ‘교회가 가르치는 참된 진리를 배우고 실천하는 것은 올바른 신앙이다’라는 의미에서는 참되지만, ‘교회가 정했기 때문에 참된 진리이며 그 권위에 순종하는 것 자체가 신앙의 기준이다’라는 의미로 이해한다면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판정해야 합니다. 참된 신앙은 교리의 출처를 주님의 말씀에서 찾고, 그 진리를 이해와 의지 안에 받아들여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으로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RC.008. ‘대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은 채 죽으면 지옥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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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EO.009 |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동시에 거룩한 심판자이시다’ - 신적 사랑과 심판의 관계

 

해설

기독교 신앙에서 하나님에 관하여 가장 자주 듣는 두 가지 표현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와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심판자이시다’라는 고백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사랑하시며 죄인을 구원하기를 원하신다고 믿으면서도, 동시에 하나님께서 악을 미워하시고 죄인을 심판하시며 최후에는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신다고 배웁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가르침을 함께 생각하면 쉽게 해결하기 어려운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사랑 자체이시라면 어떻게 인간에게 진노하시며, 영원한 형벌을 선언하실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구원을 원하신다면 왜 어떤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고 어떤 사람은 지옥에 머무르게 됩니까? 흔히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하나님은 사랑이시지만 동시에 공의로우신 분이므로 죄를 반드시 벌하셔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만으로는 하나님의 사랑과 심판이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지 충분히 밝혀지지 않습니다.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마치 서로 다른 두 성품을 가지신 것처럼 생각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동방정교회는 이 문제를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자유,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의 임재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관점에서 깊이 다루어 왔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사랑이 의인에게는 기쁨으로, 악인에게는 고통으로 경험될 수 있다는 설명은 일반적인 형벌 중심의 하나님 이해와 상당히 다르게 들립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 역시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시므로 결코 분노하거나 복수하지 않으시며, 인간이 자신의 사랑과 삶의 상태에 따라 천국과 지옥을 선택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동방정교회의 사랑과 심판에 관한 가르침은 스베덴보리의 신학과 어디에서 만나며, 무엇이 다릅니까? 이 질문은 하나님의 본성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뿐 아니라, 인간의 구원과 영원한 운명에 관한 이해에도 깊이 연결됩니다.

 

동방정교회는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사랑이시라는 사실을 신앙의 중심에 둡니다. 요일4:8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선언하면서, 그 이유를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어 요일4:16에서도 하나님이 사랑이시며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거한다고 말씀합니다. 정교회는 이러한 성경의 증언을 단순히 하나님께서 때때로 사랑을 베푸신다는 의미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하나님께서 여러 상황에서 선택하시는 행동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과 본성에 속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이 선하게 행동할 때만 나타나는 보상도 아니며, 인간이 죄를 지었을 때 사라졌다가 회개하면 다시 생겨나는 감정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사랑이시며, 인간을 생명과 구원으로 이끄시기를 원하십니다. 미국 정교회(OCA)의 교리 해설 역시 하나님께서 사랑이시기 때문에 인간과 세상의 생명과 구원을 위하여 역사하신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사랑이란 인간이 원하는 것을 언제나 허락하시거나 악을 아무런 결과 없이 방치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참된 사랑은 인간이 악에서 벗어나 선과 진리 안에서 살아가도록 이끄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정교회는 하나님의 사랑과 거룩함, 자비와 정의를 서로 경쟁하는 별개의 성품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사랑 안에는 인간을 악에서 해방하시려는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심판은 하나님의 사랑과 무관하게 작용하는 별도의 신적 감정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 앞에서 자신의 실제 상태를 드러내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이러한 이해를 잘 보여 주는 것이 동방정교회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시리아의 이사악(Isaac of Nineveh)의 가르침입니다. 그는 지옥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완전히 제외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설명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사람에게 미치지만,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사람과 거부하는 사람이 경험하는 상태가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임재가 더없는 기쁨과 평화가 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자신의 악한 사랑에 머무르는 사람에게는 동일한 신적 임재가 고통스럽게 경험될 수 있습니다. 이사악은 이러한 고통을 사랑의 채찍이라는 강렬한 표현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사랑을 보내시고 다른 사람에게는 분노를 보내신다는 구조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동일하지만 그 사랑을 대하는 인간의 상태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미국 정교회의 ‘천국과 지옥’에 관한 교리 해설도 이러한 관점을 소개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가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낙원이지만 그분을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지옥으로 경험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을 근거로 동방정교회가 모든 심판과 형벌의 언어를 부정한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정교회의 예배와 성경 해석에는 여전히 최후의 심판과 영원한 생명, 정죄와 형벌에 관한 표현들이 존재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인간적인 분노와 복수의 감정만으로 설명하지 않으려는 깊은 신학적 흐름이 정교회 안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동방정교회는 하나님의 심판을 단순히 인간이 느끼는 주관적인 감정의 차이로만 이해합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정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것이라는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의 고백을 유지합니다. 또한 인간이 자신의 삶과 행위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마25:31-46에서 주님께서는 모든 민족이 인자 앞에 모이고,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별하듯 사람들이 구별되는 심판의 장면을 말씀하십니다. 이때 심판의 기준으로 제시되는 것은 단순히 어떤 교리적 명제를 정확하게 고백했는가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었는지,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것을 주었는지, 나그네를 영접하고 병든 사람과 갇힌 사람을 돌보았는지가 중요하게 나타납니다. 정교회는 이러한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이웃을 향한 사랑과 분리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단순히 신앙에 관한 정답을 맞혔는지 확인하는 절차가 아니라, 인간이 어떤 사랑으로 살아왔으며 그 사랑이 실제 삶에서 어떻게 나타났는가를 드러내는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선행이 자신의 공로만으로 구원을 얻는 수단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정교회는 선행과 거룩한 삶 역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과 협력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이해합니다. 따라서 사랑과 심판의 관계는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자유, 그리고 삶의 실제적인 변화라는 문제와 함께 살펴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죄인을 사랑하신다는 사실과 동시에 죄에 대한 진노와 심판을 말씀합니다. 겔18:23에서 주 여호와께서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가 돌이켜 사는 것을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겔33:11에서도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며 악한 길에서 돌이켜 살기를 원하신다고 선언하십니다. 반면 롬2:5-6에서는 회개하지 않는 완고한 마음이 진노의 날에 임할 심판을 쌓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히12:29에서는 하나님을 소멸하는 불이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해석의 문제를 만납니다. 하나님께서 악인이 돌이켜 살기를 원하신다는 말씀과 악인에게 진노하신다는 말씀을 어떻게 함께 이해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죄인을 향한 사랑을 중단하시고 분노라는 반대 감정으로 돌아서신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가 악을 사랑하는 인간에게 심판으로 경험된다는 뜻입니까? 동방정교회의 여러 교부와 영성 전통은 이 문제를 후자의 관점에서 설명해 왔습니다. 그러나 정교회 안에서도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을 어떤 방식으로 해석할 것인가에 관하여 강조점이 완전히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진노는 모두 단순한 비유에 불과하다고 정교회 전체의 입장을 단정하거나, 반대로 정교회가 하나님을 인간처럼 분노하고 복수하시는 분으로 이해한다고 규정하는 일은 모두 피해야 합니다. 각 전통이 성경의 심판 언어를 어떻게 해석하는지 정확하게 살펴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은 더욱 분명한 신학적 구별을 제시합니다. 그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1771) TCR.256에서 성경의 문자적 의미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고 복수하시며 사람을 벌하시고 지옥으로 보내신다는 표현들이 나타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표현들을 하나님의 실제적인 내적 성품에 관한 직접적인 묘사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시며 자비 자체이시고 선 자체이시므로, 인간의 악한 감정에서 비롯되는 분노와 복수심을 가지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성경이 때때로 하나님께 악한 감정과 형벌의 원인을 돌리는 이유를 ‘진리의 외관’(appearances of truth)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인간이 경험하는 현상과 실제 영적인 원인이 항상 동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연계에서 우리는 해가 동쪽에서 떠올라 서쪽으로 움직인다고 말하지만, 이러한 표현이 실제로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는 뜻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악한 상태에 빠져 고통을 경험할 때에는 마치 하나님께서 자신을 벌하시고 분노하시는 것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인간을 선으로 이끄시며, 악을 원하는 인간이 그 신적 생명을 잘못 받아들이기 때문에 고통과 심판이 나타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진노하신다는 성경의 표현은 인간의 경험에 따라 나타나는 외적인 진술로 이해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내적 본성이 실제로 분노와 복수로 변화한다는 교리를 세우는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단순한 관용이나 무조건적인 허용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분노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악을 선과 동일하게 취급하시거나 인간의 악행에 아무런 결과도 따르지 않도록 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에 인간이 악에 사로잡혀 자신과 이웃을 파괴하는 일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악은 인간을 참된 자유와 행복에서 멀어지게 하며, 악한 사랑에 머무르는 사람은 그 사랑에 상응하는 영적 상태를 형성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1758) HH.545-550에서 주님께서는 누구도 지옥으로 던져 넣지 않으시며, 악한 영 자신이 지옥으로 향한다고 설명합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천국으로 이끄시고 그들의 악을 멀리하시려 하지만, 악한 사랑을 자신의 생명으로 삼은 사람은 천국의 선과 진리를 견디기 어려워하며 자신과 비슷한 사랑을 가진 영들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지옥은 주님께서 인간에게 분노를 쏟아 붓기 위해 마련하신 형벌의 장소가 아니라, 악한 사랑이 스스로 선택하고 형성한 영적 삶의 상태와 공동체입니다. 그렇다고 지옥에서 일어나는 고통과 형벌이 단순히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지옥에도 실제적인 고통과 악의 억제를 위한 형벌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 고통과 형벌의 근원을 주님의 분노나 복수심에 두지 않고, 악 자체의 성질과 악한 영들 사이의 충돌 및 영적 질서의 보존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합니다.

 

이 지점에서 동방정교회의 심판 이해와 스베덴보리의 가르침 사이에 매우 흥미로운 공통점을 발견합니다. 정교회의 이사악은 하나님의 사랑이 의인과 악인에게 모두 미치지만, 그것을 경험하는 방식은 인간의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고 천국으로 인도하시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지배적 사랑에 따라 그 신적 생명을 서로 다르게 받아들인다고 가르칩니다. 두 전통 모두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사랑을 보내시고 다른 사람에게는 악의적인 분노를 보내신다는 단순한 이분법을 넘어서는 설명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두 전통의 심판과 지옥에 관한 가르침 전체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동방정교회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죽은 자의 부활, 그리고 최후의 심판을 미래의 궁극적인 사건으로 고백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육체의 죽음 이후 영계에서 깨어나고, 자신의 내적 사랑이 점차 드러나면서 천국 또는 지옥의 삶으로 나아간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그가 말하는 최후의 심판은 지상의 모든 무덤이 열리고 물질적인 육체가 동시에 부활하는 사건이 아니라 영계에서 이루어지는 심판입니다. 따라서 두 전통이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수용을 강조한다는 사실은 중요하지만,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사후 상태와 심판의 시기 및 구조를 이해하는 방식은 상당히 다릅니다. 이러한 차이는 이후 EO.081-090에서 별도로 다루어야 할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악한 사람에게도 언제나 사랑으로 역사하신다면, 왜 악한 사람은 그 사랑을 기쁨으로 경험하지 못합니까? 스베덴보리는 이 문제를 인간의 ‘지배적 사랑’(ruling love)과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삶에서 반복적으로 선택하고 사랑한 것들을 통하여 점차 내적인 성격을 형성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고 선한 쓰임을 이루는 데 기쁨을 느끼지만, 다른 사람은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는 일이나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일, 자기 이익을 위해 타인을 이용하는 데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비슷한 행동을 하더라도 그것을 움직이는 내적인 사랑은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천국의 삶은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선한 애정으로 이루어지므로, 자신과 세상을 지배하려는 사랑에 사로잡힌 사람에게는 그러한 삶이 오히려 견디기 어려운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미워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자신의 사랑과 반대되는 영적 질서를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지옥의 고통은 이처럼 인간이 어떤 사랑을 자신의 생명으로 삼았는가 하는 문제와 깊이 연결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사람이 지금 분노하거나 이기적으로 행동한다고 해서 그 사람의 지배적 사랑과 영원한 운명을 곧바로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지상에서 거듭날 수 있으며,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악에서 돌이킬 기회를 계속 제공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배적 사랑에 관한 가르침은 다른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판정하는 도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사랑과 삶의 방향을 살피도록 하는 영적 경고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하나님의 심판은 단순히 죽은 뒤에 받는 최종적인 판결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은 살아 있는 동안에도 주님의 진리 앞에서 자신의 상태를 발견하고, 그 진리를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선택을 계속합니다. 요3:19-21에서 주님께서는 빛이 세상에 왔으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심판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갑작스럽게 적대적인 감정을 품으셨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빛이 나타났을 때 인간이 그 빛을 사랑하는가, 아니면 어둠을 더 사랑하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주님의 진리는 인간의 거짓을 드러내며, 주님의 선은 인간이 자기중심적인 사랑을 돌아보게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잘못이 드러날 때 회개하고 변화되기를 원하지만, 다른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보다 진리를 거부하고 자신을 정당화하려 할 수 있습니다. 이때 진리는 그 사람을 파괴하려는 적대적인 힘이 아니라 그를 살리기 위해 주어진 빛입니다. 그러나 그 빛을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진리가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것으로 경험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심판의 영적 의미를 생각할 때에는 주님께서 언제 인간을 벌하시기로 결정하시는가 하는 문제보다, 인간이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문제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심판은 주님의 사랑이 변하는 사건이 아니라 인간의 참된 사랑과 상태가 진리의 빛 앞에서 드러나는 일과 깊이 연결됩니다.

 

이러한 이해는 고난과 불행을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에도 중요한 영향을 줍니다. 어떤 사람이 갑작스러운 질병이나 사고를 당하거나, 가정과 직장에서 큰 어려움을 겪을 때 우리는 쉽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심판하셨거나 벌하셨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특히 그 사람에게 어떤 잘못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그 고난을 하나님의 직접적인 형벌이라고 단정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판단에는 매우 신중해야 합니다. 눅13:1-5에서 주님께서는 비극적인 죽음을 당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죄인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일을 겪은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며, 오히려 듣는 사람들 자신이 회개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요9:1-3에서도 날 때부터 맹인인 사람의 상태를 그 사람이나 부모의 죄 때문이라고 단정하는 제자들의 생각을 바로잡으십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자연계의 고난과 영적인 심판을 일대일로 연결하는 것은 신적 섭리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악과 고통을 원하시거나 그 자체를 즐기시는 분이 아니시며, 인간의 자유와 자연계의 질서 안에서 발생하는 여러 일들을 섭리로 다스리시면서 가능한 선을 이루도록 역사하십니다. 따라서 고난을 겪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그가 어떤 죄 때문에 벌을 받았는지 찾아내는 일이 아니라, 그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을 사랑으로 돌보고 실제적인 도움을 제공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가르침이 고통받는 이웃을 정죄하는 도구가 된다면, 우리는 그 가르침의 중심에 있는 신적 사랑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구별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므로 분노하거나 복수하지 않으신다는 가르침이 인간의 책임이나 정의의 필요성을 약화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심각한 피해를 주었다면, 그 행동은 반드시 바로잡아야 하며 피해자를 보호하고 공동체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적절한 조치도 필요합니다. 사랑은 악을 모른 체하는 태도가 아니며, 용서는 악한 행동을 선한 행동으로 바꾸어 부르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사랑은 피해자를 보호하고 악의 확산을 막으며, 악을 행한 사람에게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변화할 기회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작용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지옥에서 악한 영들의 행동이 아무런 제약 없이 허용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는 악이 다른 사람을 해치지 못하도록 제한되고 질서에 따라 억제되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과 심판을 함께 이해한다는 것은 악한 행동에 대한 모든 책임을 없앤다는 뜻이 아니라, 그 책임을 다루는 목적과 태도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다시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복수심에 사로잡혀 상대방의 고통을 즐기는 것과, 악을 막고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주님의 사랑을 본받으려는 사람이라면 악을 악이라고 분명히 말하면서도 그 악을 행한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을 자신이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진리를 분별하고 정의를 실천하되, 인간의 영원한 운명을 확정하는 일은 주님께 남겨 두어야 합니다.

 

이러한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마음속에 그리고 있는가 하는 질문으로 다시 이어집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자신이 죄를 지을 때마다 화를 내시고, 자신이 충분히 회개하지 않으면 언제든 형벌을 내리실 수 있는 두려운 심판자로 생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무조건 자신을 이해하시고 자신의 모든 선택을 용납하시는 분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관념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결과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무한히 사랑하시지만 악을 선이라고 부르지 않으시며, 인간이 악 안에 머무르는 것을 진정한 행복이라고 인정하지도 않으십니다. 동시에 주님께서는 인간의 잘못을 발견할 때마다 분노로 돌아서시는 분이 아니라, 그 잘못에서 벗어나도록 끊임없이 생명과 진리를 공급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두려워한다는 것도 단순히 형벌이 무서워 벌을 피하려는 태도에서 더 깊은 의미로 나아가야 합니다. 참된 경외는 주님의 사랑을 거스르는 악을 경계하고, 그분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를 잃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발전해야 합니다. 이때 회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향해 품으신 분노를 누그러뜨리는 수단이 아니라, 자신이 붙잡고 있는 악을 버리고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됩니다. 기도 역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억지로 돌려놓으려는 행위가 아니라, 언제나 자신을 사랑하시는 주님께 돌아가 그분의 뜻을 따를 힘과 지혜를 구하는 일이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심판을 이해하는 방식이 실제 신앙생활을 변화시키는 중요한 지점입니다.

 

이제 처음의 고백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동시에 거룩한 심판자이십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 고백을 하나님 안에 사랑과 분노라는 서로 반대되는 두 성품이 존재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동방정교회는 하나님께서 사랑이시며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심판하신다고 고백하면서, 특히 여러 교부의 가르침을 통하여 동일한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의 내적 상태에 따라 기쁨이나 고통으로 경험될 수 있다는 깊은 통찰을 제시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시므로 실제로 인간적인 분노나 복수심을 품으실 수 없으며, 주님께서는 누구도 지옥으로 던져 넣지 않으신다고 명확하게 가르칩니다. 심판은 주님의 사랑이 변화하여 악한 사람을 향한 적대적인 의지로 바뀌는 일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사랑과 삶으로 형성한 영적 상태가 주님의 진리 앞에서 드러나는 일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심판자이시라는 사실은 그분이 사랑이시라는 사실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심판을 참되게 이해하려면 먼저 그분의 변하지 않는 신적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이 가르침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형벌을 두려워하는 신앙을 넘어, 악이 우리 자신과 이웃을 파괴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악에서 돌이키는 신앙으로 나아가도록 이끕니다. 또한 다른 사람의 불행을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쉽게 단정하지 않고, 악을 분별하면서도 사람의 최종적인 영적 상태는 주님께 맡기며, 자신은 사랑과 진리 안에서 살아가도록 부름받았음을 기억하게 합니다. 결국 참된 신앙은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심판하시는 하나님 사이에서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일이 아닙니다. 사랑 자체이신 주님께서 언제나 인간을 선과 생명으로 이끄신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분의 진리 앞에서 자신의 악을 버리며, 이웃을 향한 사랑과 선한 쓰임을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본 신적 사랑과 심판의 참된 관계입니다. (EO.009 해설)

 

요약

동방정교회는 하나님께서 사랑이시면서 동시에 거룩한 심판자이시라고 고백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그분의 사랑과 분리하여 이해하지 않으려는 중요한 신학적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시리아의 이사악을 비롯한 교부들의 가르침에서는 동일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의인에게는 기쁨으로, 거부하는 악인에게는 고통으로 경험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시므로 인간적인 분노와 복수심을 가지실 수 없으며, 성경에서 하나님께 진노와 형벌을 돌리는 표현들은 인간의 경험에 따른 진리의 외관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누구도 지옥으로 던져 넣지 않으시며, 인간이 자신의 지배적 사랑과 삶의 상태에 따라 천국 또는 지옥의 삶으로 나아간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두 전통은 하나님의 사랑이 변하지 않는다는 점과 인간이 그 사랑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가 중요하다는 점에서 만나지만, 최후의 심판과 사후 세계의 구조를 이해하는 방식에서는 차이를 보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심판은 하나님의 사랑이 분노로 바뀌는 사건이 아니라, 주님의 진리 앞에서 인간의 참된 사랑과 영적 상태가 드러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고난이나 다른 사람의 불행을 하나님의 직접적인 형벌로 단정하지 말고,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하며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참된 신앙은 심판을 두려워하는 데 머물지 않고, 사랑 자체이신 주님을 신뢰하면서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을 실천하는 데서 완성되어야 합니다.

 

 

 

EO.008.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모든 개념과 형상을 초월하신다’

SL.EO.008 |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모든 개념과 형상을 초월하신다’ - 부정신학과 신적 인격의 문제 해설동방정교회의 신학을 살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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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PR.009 | 개신교(Protestant)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 인간이 창조된 가장 중요한 목적이다’ -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과 주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참된 목적

 

해설

개신교 신앙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는 말은 신앙생활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원리 가운데 하나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성공이나 행복, 명예나 만족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 되며, 모든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공부하고 일하고 가정을 이루며 교회에서 예배하고 봉사하는 모든 활동도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더 높은 목적 아래 놓여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이해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삶의 절대적인 중심에 놓아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인간이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기를 원하실까요?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찬양과 예배를 통해 자신의 영광을 더 크게 만드시는 분이십니까? 만일 모든 인간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영광에는 무엇인가 부족함이 생기는 것입니까?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다는 말은 인간의 행복과 자유, 사랑과 기쁨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라는 뜻입니까?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질문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창조 목적을 다시 살펴보도록 이끕니다. 그는 주님의 영광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 영광을 인간의 찬양과 인정으로 더욱 높아지는 신적 명예처럼 이해하는 것은 주님의 본성과 창조의 목적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며, 주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가장 깊은 목적은 무엇일까요?

 

먼저 전통적인 개신교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문은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이냐고 묻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기쁨이 처음부터 함께 제시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문답은 인간이 자신의 행복을 완전히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의 명예를 높이는 도구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참된 행복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과 그분을 영원히 즐거워하는 삶이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고 이해합니다. 고전10:31에서 바울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권면하며, 롬11:36에서는 만물이 하나님에게서 나오고 하나님으로 말미암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고 고백합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인간의 삶이 자기중심적인 욕망에 갇혀서는 안 되며, 모든 것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중요한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을 인간의 창조 목적으로 강조하는 전통적인 개신교 신앙 자체를 곧바로 오류라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이 가르침을 실제로 이해하고 적용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영광을 요구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영광이 인간의 삶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충분히 구별하지 않으면 중요한 오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흔히 인간 사회의 명예와 영광을 떠올립니다. 왕은 백성에게 충성을 요구하고, 권력자는 자신의 업적을 기념하게 하며, 성공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인정과 칭찬을 통해 자신의 명예가 높아지는 것을 기뻐합니다. 이러한 인간적인 경험을 하나님께 그대로 적용하면, 하나님께서도 많은 사람이 자신을 찬양하고 경배하며 자신의 위대함을 인정해 주기를 원하시는 분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자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말이 많을수록, 예배가 더욱 화려할수록, 더 큰 교회와 더 많은 신자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널리 알려질수록 그만큼 하나님의 영광도 커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무한하고 완전하신 하나님께 인간의 인정이나 찬양이 부족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창조 이전에도 완전하셨으며, 인간이 존재하지 않았을 때에도 신적 사랑과 지혜의 충만함을 지니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인간의 명예욕과 같은 것으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예배와 찬양이 무의미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찬양을 필요로 하시기 때문에 인간이 찬양해야 하는가, 아니면 인간이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그분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찬양과 감사가 자연스럽게 나타나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앞의 이해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채워 드리는 존재가 되지만, 뒤의 이해에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신의 사랑과 지혜를 베푸시고, 인간이 그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존재가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사랑과 지혜’(Divine Love and Wisdom, DLW, 1763) DLW.47에서 사랑의 본질을 매우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사랑의 본질은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 밖의 다른 존재를 사랑하고, 사랑으로 그와 결합하며, 그 존재의 행복을 자신의 기쁨으로 여기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의 사랑뿐 아니라 무한하신 하나님의 신적 사랑을 이해하는 근본적인 원리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더욱 높이기 위해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이해한다면, 자칫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신의 만족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신다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신적 사랑은 정반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충만함을 더하기 위해 다른 존재를 필요로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에 다른 존재를 사랑하시고, 그 존재에게 자신의 사랑과 지혜를 나누어 주시며, 그 존재가 행복해지기를 원하십니다.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TCR.43에서도 스베덴보리는 신적 사랑의 본질이 자신 밖의 다른 존재를 사랑하고, 그들과 하나 되기를 원하며, 자신의 것으로 그들을 행복하게 하는 데 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창조 목적에 관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을 발견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증가시키기 위해 창조된 존재가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분과 결합하여 영원한 행복을 누리도록 창조된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이유는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충만한 신적 사랑을 다른 존재에게 베푸시기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창조 목적은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 DP, 1764) DP.27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신적 섭리가 지향하는 목적이 인간으로 이루어진 천국이며, 인간이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아가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천국은 인간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어떤 물리적 공간이나, 주님께 찬양을 드리는 존재들이 모여 하나님의 위대함을 끝없이 선언하는 장소로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천국은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인 인간들이 사랑과 지혜 안에서 서로 결합하여 이루는 영적 공동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사들이 처음부터 인간과 별개의 존재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살다가 사후에 천국에 들어간 존재들이라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천국을 이루는 것은 인간의 창조 목적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 인간에게서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마련하시며, 그가 자유롭게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존재가 되어 영원한 천국의 삶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창조의 목적은 인간이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높여 드리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사랑과 지혜를 인간에게 나누어 주시고, 인간이 그것을 자유롭게 받아들임으로써 주님과 상호적인 사랑의 결합을 이루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원하시는 것은 자신의 명예를 위한 복종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의 생명 안에서 참된 자유와 기쁨을 누리며 영원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 AC.5922에서 ‘영광’이 가장 높은 의미에서는 신적 진리, 곧 주님에게서 발출하는 신적 진리를 가리킨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천국의 영광은 그 신적 진리를 받아들인 천사들의 지혜와 이해, 그리고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와 관계됩니다. 여기서 영광은 누군가가 하나님을 칭찬함으로써 외부에서 더해지는 명예가 아닙니다. 주님의 신적 진리가 천국과 인간에게 나타나고, 그 진리를 받아들이는 존재들이 사랑과 지혜 안에서 살아가는 영적 현실입니다. 요1:14에서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으며 우리가 그 영광을 보았다고 증언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영광을 주님 안에 나타난 신적 진리와 연결합니다. 또한 마5:16에서 주님께서는 사람들 앞에 빛을 비추어 그들이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영광이 인간의 실제 삶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사람들은 어떤 신자가 하나님을 얼마나 크게 찬양하는지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주님의 진리를 따라 정직하게 살아가고, 어려운 이웃을 돌보며, 자신의 이익보다 선한 것을 선택하는 모습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선과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주님의 이름을 높이는 말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분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우리의 삶에 나타나도록 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예배와 찬양의 의미도 더욱 깊어집니다. 우리는 찬양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고백하고, 기도를 통해 그분의 도우심을 구하며, 예배를 통해 삶의 중심이 주님께 있음을 다시 확인합니다. 이러한 행위는 인간이 자신의 힘과 능력만을 의지하는 태도에서 벗어나 주님을 바라보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그러나 예배와 찬양의 횟수나 열정, 외적인 규모가 곧바로 하나님께 돌려 드린 영광의 크기를 결정한다고 생각한다면 문제가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 HH.222-227에서 천국의 예배와 설교를 설명하면서, 천사들의 예배가 진리의 가르침과 사랑의 삶에 깊이 관계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특히 천국의 참된 예배는 예배 장소 안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에만 한정되지 않고, 천사들이 살아가는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 전체와 관계됩니다. 이는 지상의 신앙생활에도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어떤 사람이 아름다운 찬양과 경건한 기도로 예배하면서도 일상에서는 가족을 무시하고 이웃에게 해를 끼치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을 행한다면, 그의 외적인 예배가 실제로 주님의 선과 진리를 얼마나 받아들이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반대로 특별한 종교적 활동이 눈에 띄지 않더라도 자신의 일을 성실히 감당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정직하게 살아가려는 사람의 삶에서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이 실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예배가 무의미하다는 뜻이 아니라, 예배의 참된 목적은 우리가 주님의 진리를 배우고 받아들여 그 진리대로 살아가도록 하는 데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쓰임’(use)의 개념이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는 신적 사랑과 지혜가 단순히 추상적인 관념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쓰임을 통해 나타난다고 가르칩니다. ‘신적 사랑과 지혜’ DLW.241은 사랑과 지혜와 쓰임의 관계를 목적과 원인과 결과에 비유합니다. 사랑은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목적이며, 지혜는 그 목적을 실현하는 길을 밝히고, 쓰임은 사랑과 지혜가 실제로 열매 맺는 자리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간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활동을 종교적인 형식으로 바꾸는 일이 아닙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으로 돌보고, 직장인이 정직하게 일하며, 교사가 학생을 올바르게 가르치고, 의료인이 환자를 성실하게 보살피며, 이웃이 서로의 어려움을 살피고 돕는 일에서도 주님의 선과 진리는 나타날 수 있습니다. 다만 어떤 일을 한다는 사실만으로 그 일이 곧 참된 영적 쓰임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동일한 직업과 활동을 통해서도 어떤 사람은 자신의 명예와 이익을 추구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은 이웃의 유익과 공동체의 선을 위해 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중요한 것은 외적인 행위의 크기만이 아니라 그 행위를 움직이는 내적인 사랑입니다. 인간이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대신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유익한 일을 기쁨으로 행할 때, 그 삶은 주님의 사랑과 지혜를 드러내는 쓰임이 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교회 안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정직하고 선한 삶의 자리에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을 지나치게 외적인 성과와 연결하면 신앙생활에서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크게 성공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업이 번창하고, 자녀가 좋은 성적을 얻고, 교회가 성장하며, 자신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물론 좋은 성과를 거두었을 때 그것을 주님의 은혜로 인정하고 감사하는 일은 귀합니다. 그러나 성공 자체를 하나님의 영광과 동일시하면 실패하거나 어려움을 겪는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한 것처럼 느끼기 쉽습니다.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 오랫동안 돌봄의 부담을 감당하는 사람,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 세상에서 특별한 성과를 얻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세상적인 성공이나 외적인 규모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각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주님을 바라보고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하며, 가능한 선한 쓰임을 성실하게 감당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어떤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 알려진 일을 통해 이웃에게 유익을 줄 수 있지만, 어떤 사람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리에서 가족과 이웃을 돌보며 깊은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관점에서 이러한 삶의 가치는 세상의 명예와 인정을 기준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는 말은 모든 사람이 눈에 띄는 성과를 이루어야 한다는 요구가 아니라, 어떤 처지에서도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자신의 삶에 받아들이라는 부름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또 하나 경계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자유와 양심을 억압하는 일입니다. 종교 지도자나 공동체가 자신들의 사업이나 계획을 하나님의 영광과 직접 연결하면,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마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취급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성장이나 특정한 사역의 성공을 하나님의 영광과 동일시할수록,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인간의 고통과 부당한 요구가 정당화될 위험도 커집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신적 섭리’ DP.71-99에서 주님께서 인간의 자유와 합리성을 보존하시며 그 안에서 역사하신다는 원리를 설명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자신의 자유를 잃고 강제로 복종하는 것을 참된 영적 결합으로 여기지 않으십니다. 인간은 진리를 이해하고 자유롭게 선택하며, 자신의 의지로 선을 사랑하는 존재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명분으로 다른 사람의 양심을 억압하고, 부당한 희생을 강요하며, 자신의 권위와 목적을 절대화하는 것은 오히려 주님의 신적 사랑과 지혜에 반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특히 인간이 하나님을 위한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자기 명예와 권력, 공동체의 외적인 성공을 추구하는 경우를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의 참된 의미는 인간이 자신을 높이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프로프리움’(proprium)에서 비롯되는 자기중심적인 사랑을 살피고, 주님의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여 이웃을 자유롭게 사랑하고 섬기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행복은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이 질문에서 우리는 다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첫 번째 대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이 두 표현은 서로 대립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참되게 이해할수록 인간이 주님 안에서 기쁨을 누린다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자신을 찬양함으로써 자신의 명예를 높이기를 바라시는 분이 아니라, 자신의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여 인간이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그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여 선한 삶을 살아갈 때, 주님의 신적 진리는 그의 삶에서 드러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인간 안에 나타나는 방식입니다. 여기서 기쁨은 자기 욕망이 충족될 때 느끼는 일시적인 만족과 구별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천국의 기쁨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 사랑으로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사랑은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의 행복을 기뻐하며, 천국의 삶은 그러한 사랑이 공동체 전체를 이루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행복은 서로 경쟁하는 목적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사랑과 지혜를 베푸시고,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여 주님과 결합하며 이웃을 사랑할 때, 하나님의 영광은 인간의 참된 행복과 함께 나타납니다.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 인간이 창조된 가장 중요한 목적입니까? 이 가르침에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절대적인 중심으로 삼아서는 안 되며,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또한 전통적인 개신교의 신앙고백도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영원한 기쁨을 분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이 가르침을 더욱 깊이 이해하려면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이며,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구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증가시키기 위해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영원부터 완전한 사랑과 지혜이시며, 인간의 찬양과 인정에 의해 더 완전해지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에 인간을 창조하셨으며, 그 인간에게 자신의 사랑과 지혜를 나누어 주시고, 인간이 자유롭게 그분과 결합하여 영원한 천국의 기쁨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명예를 높여 드리기 위해 자신의 삶을 소모하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사랑의 목적에 응답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악을 멀리하고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며,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을 기쁨으로 실천할 때 주님의 영광은 우리의 삶에서 나타납니다. 결국 참된 질문은 ‘나는 얼마나 많은 일을 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높였는가?’가 아닙니다. ‘나는 주님께서 나를 창조하신 사랑의 목적에 얼마나 응답하고 있는가?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이고 있으며, 그 사랑으로 이웃을 행복하게 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과 주님 안에서 영원한 기쁨을 누리는 삶은 서로 다른 두 목적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이 인간 안에 받아들여지고 그 사랑이 선한 쓰임으로 열매 맺을 때, 인간은 자신의 창조 목적을 이루어 가며 그 삶 자체로 주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본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창조 목적,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참된 삶의 의미입니다. (PR.009 해설)

 

요약

전통적인 개신교는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다고 가르치며,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문은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가르침에는 인간이 자기중심적인 욕망을 삶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 되며,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인정해야 한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명예나 영광을 더욱 크게 만들기 위해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이해하지 않습니다. ‘신적 사랑과 지혜’ DLW.47과 ‘참된 기독교’ TCR.43에 따르면 신적 사랑의 본질은 자신 밖의 다른 존재를 사랑하고, 그들과 결합하며, 자신의 사랑으로 그들을 행복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또한 ‘신적 섭리’ DP.27은 인간으로 이루어진 천국과 주님과의 영원한 삶이 창조의 목적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증가시키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이고 그분과 결합하여 영원한 행복을 누리도록 창조된 존재입니다. ‘천국의 비밀’ AC.5922에서 영광은 가장 높은 의미로 주님에게서 발출하는 신적 진리를 가리키며, 천국에서는 그 진리를 받아들인 존재들의 지혜와 체어리티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단순히 찬양과 예배의 양을 늘리거나 외적인 성과를 이루는 일이 아닙니다. 주님의 선과 진리를 자신의 삶에 받아들이고,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하며,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을 기쁨으로 실천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행복은 서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인간 안에서 선과 진리의 결합으로 나타나고, 그 사랑이 이웃의 행복을 위한 쓰임으로 열매 맺을 때 인간은 자신의 참된 창조 목적을 이루며 주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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