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When thou tillest the ground, it shall not henceforth yield unto thee its strength; a fugitive and a wanderer shalt thou be in the earth. (창4:12)

 

 

380. ‘밭을 갈다’는 이런 (이웃 사랑에서) 갈라져 나옴이나 이단 경작을 상징합니다. To “till the ground” signifies to cultivate this schism or heresy;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는 위와 같은 노력은 열매가 없음을 상징합니다. it shall not yield unto thee its strength” signifies that it is barren.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는 무엇이 선이요 진리인지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To be a “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 is not to know what is good and true.

 

 

381. ‘밭을 갈다’의 의미가 이런 갈라져 나옴이나 이단 경작임은 방금까지 말한 ‘’이 상징하는 바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That to “till the ground” means to cultivate this schism or heresy appears from the signification of “ground,” of which we have just now spoken;

 

효력을 주지 않다’가 그런 노력은 열매 없음을 상징함이 분명한 것은, 땅에 관한 언급을 보아도 그렇고, 위에서 말한 대로, 지금 보고 있는 이 사람들, 곧, 이웃 사랑 없는 신앙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실은 자기들은) 신앙이 전혀 없음을 주장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보아도 그렇고, 뿐만 아니라, 표현들 자체도 그렇습니다. and that its “not yielding its strength” denotes its barrenness, is evident both from what was said concerning ground, and from the words themselves, as well as from this consideration, that those who profess faith without charity, profess no faith, as was said above.

 

 

382.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는 것은 무엇이 선이요 진리인지를 알지 못하는 것 상징함이 분명한 것은, 말씀에서 ‘방황함’과 ‘피함’의 상징을 보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That to be a “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 signifies not to know what is good and true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wandering” and “fleeing away” in the Word.

 

예레미야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As in Jeremiah:

 

13그의 선지자들의 죄들과 제사장들의 죄악들 때문이니 그들이 성읍 안에서 의인들의 피를 흘렸도다 14그들이 거리 거리에서 맹인 같이 방황함이여 그들의 옷들이 피에 더러워졌으므로 그들이 만질 수 없도다 The prophets and priests wander blind in the streets, they have been polluted in blood; the things they cannot do they touch with garments, (애4:13-14)

 

여기서 ‘선지자들’은 가르치는 사람들이며, ‘제사장들’은 그 가르침대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where “prophets” are those who teach, and “priests,” those who live accordingly;

 

거리 거리에서 맹인 같이 방황하는 것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to “wander blind in the streets” is not to know what is true and good.

 

[2] 아모스에서 In Amos:

 

7어떤 성읍에는 내리고 어떤 성읍에는 내리지 않게 하였더니 땅 한 부분은 비를 얻고 한 부분은 비를 얻지 못하여 말랐으매 8두 세 성읍 사람이 어떤 성읍으로 비틀거리며 물을 마시러 가서 만족하게 마시지 못하였으나 A part of the field was rained upon, and the part of the field whereupon it rained not withered; so two or three cities shall wander unto one city to drink waters, and shall not be satisfied, (암4:7-8)

 

여기 ‘땅 한 부분은 비를 얻고’는 이웃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교리를 상징합니다; where by the “part of the field on which it rained” is signified the doctrine of faith from charity;

 

한 부분은 비를 얻지 못하여’는 이웃 사랑이 없는 신앙의 교리를 상징합니다. and by the “part” or “piece” “of the field on which it did not rain,” the doctrine of faith without charity.

 

비틀거리며 물을 마시러 가서’ 또한 진리 추구를 가리킵니다. To “wander to drink the waters” likewise denotes to seek after truth.

 

[3] 호세아에서 In Hosea:

 

16에브라임은 매를 맞아 그 뿌리가 말라 열매를 맺지 못하나니 비록 아이를 낳을지라도 내가 그 사랑하는 태의 열매를 죽이리라 17그들이 듣지 아니하므로 내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시리니 그들이 여러 나라 가운데에 떠도는 자가 되리라 Ephraim is smitten, their root is dried up, they shall bear no fruit; my God will cast them away, because they did not hearken unto him; and they shall be wanderers among the nations. (호9:16, 17)

 

여기 ‘에브라임’은 진리 혹은 신앙을 이해함입니다. 에브라임은 요셉의 장자였기 때문입니다. Ephraim” here denotes the understanding of truth, or faith, because he was the firstborn of Joseph;

 

그 뿌리가 말라’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웃 사랑을 가리킵니다. the “root which was dried up” denotes charity that cannot bear fruit;

 

여러 나라 가운데에 떠도는 자’는 무엇이 진리요 선인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wanderers among the nations” are those who do not know what is true and good.

 

[4] 예레미야에서 In Jeremiah:

 

28너희는 일어나 게달로 올라가서 동방 자손들을 황폐하게 하라 30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솔 주민아 도망하라 멀리 가서 깊은 곳에 살라 Go ye up against Arabia, and devastate the sons of the east. Flee, wander ye exceedingly; the inhabitants of Hazor have let themselves down into the deep for a habitation. (렘49:28, 30)

 

게달’과 ‘동방 자손들’은 하늘의 부 혹은 사랑에 속한 것들의 풍성함을 상징합니다. 이런 것들이 황폐해질 때, ‘도망하라’, ‘멀리 가라’, 즉, ‘피하며 유리하는 자’라는 말을 듣는데, 이때 이들은 선한 일을 전혀 못 합니다. Arabia” and the “sons of the east,” signify the possession of celestial riches, or of the things that are of love, which, when vastated, are said to “flee,” and “wander,” that is, to be “fugitives and wanderers,” when they do nought of what is good.

 

하솔 주민’, 혹은 영적 부를 보유한 사람들, 이 영적 부는 신앙의 부인데, 이런 말을 듣습니다. ‘하솔 주민아 깊은 곳에 살라’, 즉, 그들은 소멸된다는 말입니다. Of the “inhabitants of Hazor,” or those who possess spiritual riches, which are those of faith, it is said that they “let themselves down into the deep,” that is, they perish.

 

[5] 이사야에서 In Isaiah:

 

너의 관원들도 다 함께 도망하였다가 활을 버리고 결박을 당하였고 너의 멀리 도망한 자들도 발견되어 다 함께 결박을 당하였도다 All thy foremost ones wander together, they are bound before the bow, they have fled from far, (사22:3)

 

환상의 골짜기’, 혹은 신앙은 이웃 사랑 없이도 가능하다는 환상에 관하여 말씀하시면서, speaking of the “valley of vision,” or the fantasy that faith is possible without charity.

 

이어지는 구절인 14절에서 그 이유, 그렇게 말씀하시는 까닭을 보게 되는데요, 이웃 사랑으로부터 따로 떨어져 나온 신앙을 주장하는 사람이 바로 ‘피하며 유리하는 자’, 즉, 선과 진리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Hence appears the reason why it is said, in a subsequent verse (Isa. 22:14), that he who professes faith that is apart from charity is a “fugitive and a wanderer,” that is, knows nothing of good and truth.

 

만군의 여호와께서 친히 내 귀에 들려 이르시되 진실로 이 죄악은 너희가 죽기까지 용서하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22:14)

2021-05-30(D1)-창세기(창4,12, AC.380-382),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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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z2v4nAz-89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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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And now art thou cursed from the ground, which hath opened its mouth to receive thy brother’s bloods from thy hand. (창4:11)

 

 

378.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는 (이웃 사랑에서) 갈라져 나옴을 통해 (주님을) 피하게 되었음을 상징합니다. Cursed art thou from the ground” signifies that through the schism he had become averted;

 

그 입을 벌려’는 그 이단이 그것들을 가르쳤음을 상징합니다. which hath opened its mouth” signifies that the heresy taught them;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은 그것이 이웃 사랑에 폭력을 가해서, 그 불을 꺼버렸음을 상징합니다. to “receive thy brother’s bloods from thy hand” signifies that it did violence to charity, and extinguished it.

 

 

379. (이상의 표현들이) 이런 것들을 상징한다는 사실은 앞서 일어난 일들을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hese things are signified is evident from what has gone before;

 

그리고 ‘저주를 받는다’는 것은 선을 싫어한다는 의미임은 앞서 245번 글에서 이미 보았습니다. and that to be “cursed” is to be averse to good, has been already shown (n. 245).

 

불법들, 혐오스러운 것들, 증오들은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시선을 돌려 오직 아래, 곧 육체적이고 세속적인 것들, 그래서 지옥에 속한 것들만 바라보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For iniquities and abominations, or hatreds, are what avert man, so that he looks downward only, that is, to bodily and earthly things, thus to those which are of hell.

 

이런 일은 이웃 사랑이 쫓겨나 그 불이 꺼질 때 일어납니다. 이때 주님과 사람 사이 유대가 손상을 입게 되기 때문인데요, 오직 이웃 사랑이나 사랑, 자비로만 우리는 주님과 결합하기 때문입니다. 이웃 사랑 없는 신앙으로는 절대 안 됩니다. 이런 건 신앙도 아니요, 그저 신앙과 관련된 무슨 지식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며, 지옥의 패거리들끼리나 소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런 걸로 선한 사람들을 아주 교활하게 속일 수도, 자신들을 빛의 천사로 위장할 수도 있습니다. This takes place when charity is banished and extinguished, for then the bond which connects the Lord with man is severed, since only charity, or love and mercy, are what conjoin us with him, and never faith without charity, for this is no faith, being mere knowledge, such as the infernal crew themselves may possess, and by which they can craftily deceive the good, and feign themselves angels of light;

 

가장 사악한 설교자들이 종종 아주 경건한 척, 열정적으로 그러는 것처럼 말이지요. 입술보다 마음이 오히려 더 텅 비었는데도 말입니다. and as the most wicked preachers are sometimes wont to do, with a zeal like that of piety, although nothing is further from their hearts than that which proceeds from their lips.

 

머리로만 알고 있는 신앙 혹은 그런 신앙에서 나오는 생각들을 믿을 정도로 그렇게 빈약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 있을까요? 그냥 보기에도 아무 진정성이 없어 보이는 말을 하는데도 진심으로 마음을 담아 존경을 표하고, 그를 찬성하면서 생각하기를, ‘아, 이 사람은 참 괜찮은 사람이다.’ 할 사람이 있을까요?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다 알지요. 말만 그럴듯하게 한다는 걸 다 압니다. Can anyone be of judgment so weak as to believe that faith alone in the memory, or the thought thence derived, can be of any avail, when everybody knows from his own experience that no one esteems the words or assenting of another, no matter of what nature, when they do not come from the will or intention?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서로를 묶어주는 것은 바로 이것, 곧 진정한 의지입니다. It is this that makes them pleasing, and that conjoins one man with another.

 

사람의 의지가 그 사람의 진짜 모습입니다. 그의 마음이 안 담긴 생각이나 말 말고 말입니다. The will is the real man, and not the thought or speech which he does not will.

 

사람은 의지로부터 그의 천성과 기질을 얻습니다. 이것이 그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지요. A man acquires his nature and disposition from the will, because this affects him.

 

그러나 만일 누가 무엇이 선인가를 생각 중이라면, 신앙의 본질, 그것은 이웃 사랑인데요, 그것이 그 생각 안에 있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가 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But if anyone thinks what is good, the essence of faith, which is charity, is in the thought, because the will to do what is good is in it.

 

그러나 만일 그가 선한 것을 생각한다 말은 하면서도 정작 사악하게 산다면, 그는 오직 악한 것밖에는 의도할 수가 없고, 그런 이유로 거기에는 신앙이라는 게 전혀 있을 수가 없습니다. But if he says that he thinks what is good, and yet lives wickedly, he cannot possibly will anything but what is evil, and there is therefore no faith.

2021-05-29(D7)-창세기(창4,11, AC.378-379),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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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_T99-8xNfA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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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And he said, What hast thou done? The voice of thy brother’s bloods crieth to me from the ground. (창4:10)

 

 

373. ‘네 아우의 핏소리’는 폭력이 이웃 사랑에게 행해졌음을 상징합니다. The “voice of thy brother’s bloods” signifies that violence had been done to charity;

 

피의 호소’는 유죄 고발입니다. ‘’은 종파 분립이나 이단을 상징합니다. the “crying of bloods” is the accusation of guilt, and “ground” signifies a schism or heresy.

 

 

374. ‘핏소리’의 상징이 이웃 사랑에 행해진 폭력임이 분명한 것은, 말씀에 나오는 많은 본문들을 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보면, ‘소리’는 어떤 것에 대한 고발을, ‘’는 어떤 종류의 죄, 특히 증오를 가리킵니다. That the “voice of bloods” signifies that violence had been done to charity is evident from many passages in the Word, in which “voice” denotes anything that accuses, and “blood” any kind of sin, and especially hatred;

 

누구든지 자기 형제를 향하여 증오를 품는 사람들은 마음으로는 그를 죽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for whosoever bears hatred toward his brother, kills him in his heart;

 

주님이 가르치신 대로 as the Lord teaches:

 

21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Ye have heard that it was said to them of old, thou shalt not kill, and whosoever shall kill shall be in danger of the judgment; but I say unto you, that whosoever is angry with his brother rashly shall be in danger of the judgment; and whosoever shall say to his brother, Raca, shall be in danger of the council; but whosoever shall say, thou fool, shall be in danger of the hell of fire, (마5:21-22)

 

이 말씀들은 증오의 등급을 의미합니다. by which words are meant the degrees of hatred.

 

증오는 이웃 사랑과 반대입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여, 만일 손으로 안 되면, 영으로 죽입니다. 손으로 하는 외적 규제로만 제지됩니다. Hatred is contrary to charity, and kills in whatever way it can, if not with the hand, yet in spirit, and is withheld only by external restraints from the deed of the hand.

 

이런 이유로, 모든 증오는 ‘’입니다. 예레미야에서처럼 Therefore all hatred is “blood,” as in Jeremiah:

 

33네가 어찌 사랑을 얻으려고 네 행위를 아름답게 꾸미느냐 그러므로 네 행위를 악한 여자들에게까지 가르쳤으며 34또 네 옷단에는 죄 없는 가난한 자를 죽인 피가 묻었나니 그들이 담 구멍을 뚫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이 모든 일 때문이니라 Why makest thou thy way good to seek love? Even in thy skirts are found the bloods of the souls of the needy innocent ones. (렘2:33-34)

 

[2]’ 하면 증오인 것처럼, 모든 종류의 불법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증오는 모든 불법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And as hatred is denoted by “blood,” so likewise is every kind of iniquity, for hatred is the fountain of all iniquities.

 

호세아에서처럼 As in Hosea:

 

2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요 포악하여 피가 피를 뒤이음이라 3그러므로 이 땅이 슬퍼하며 거기 사는 자와 들짐승과 공중에 나는 새가 다 쇠잔할 것이요 바다의 고기도 없어지리라 Swearing falsely, and lying, and killing, and stealing, and committing adultery, they rob, and bloods, in bloods have they touched; therefore shall the land mourn, and everyone that dwelleth therein shall languish. (호4:2-3)

 

그리고 에스겔에서, 무자비함을 말씀하시면서 And in Ezekiel, speaking of unmercifulness:

 

2인자야 네가 심판하려느냐 이 피흘린 성읍을 심판하려느냐 그리하려거든 자기의 모든 가증한 일을 그들이 알게 하라 3너는 말하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자기 가운데에 피를 흘려 벌 받을 때가 이르게 하며 우상을 만들어 스스로 더럽히는 성아 4네가 흘린 피로 말미암아 죄가 있고 네가 만든 우상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혔으니 네 날이 가까웠고 네 연한이 찼도다 그러므로 내가 너로 이방의 능욕을 받으며 만국의 조롱 거리가 되게 하였노라 6이스라엘 모든 고관은 각기 권세대로 피를 흘리려고 네 가운데에 있었도다 9네 가운데에 피를 흘리려고 이간을 붙이는 자도 있었으며 네 가운데에 산 위에서 제물을 먹는 자도 있었으며 네 가운데에 음행하는 자도 있었으며 Wilt thou judge the city of bloods, and make known to her all her abominations, a city that sheddeth bloods in the midst of it? Thou art become guilty through thy blood that thou hast shed. (겔22:2-4, 6, 9)

 

너는 쇠사슬을 만들라 이는 피 흘리는 죄가 그 땅에 가득하고 포악이 그 성읍에 찼음이라 The land is full of the judgment of bloods, and the city is full of violence. (겔7:23)

 

그리고 예레미야 애가에서 And in Jeremiah:

 

13그의 선지자들의 죄들과 제사장들의 죄악들 때문이니 그들이 성읍 안에서 의인들의 피를 흘렸도다 14그들이 거리 거리에서 맹인 같이 방황함이여 그들의 옷들이 피에 더러워졌으므로 그들이 만질 수 없도다 For the sins of the prophets of Jerusalem, and the iniquities of her priests, that have shed the blood of the righteous in the midst of her, they wander blind in the streets, they have been polluted with blood. (애4:13-14)

 

이사야에서 In Isaiah:

 

이는 주께서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기시며 예루살렘의 피를 그 중에서 청결하게 하실 때가 됨이라 When the Lord shall wash away the filth of the daughters of Zion, and shall have purged the bloods of Jerusalem from the midst, with the spirit of judgment, and with the spirit of burning. (사4:4)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워졌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냄이라 Your palms are defiled in blood, and your fingers in iniquity. (사59:3)

 

에스겔에서, ‘’라 하는, 예루살렘의 혐오스러운 것들을 말씀하시면서 In Ezekiel, speaking of the abominations of Jerusalem, which are called “bloods:

 

6내가 네 곁으로 지나갈 때에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하고 22네가 어렸을 때에 벌거벗은 몸이었으며 피투성이가 되어서 발짓하던 것을 기억하지 아니하고 네가 모든 가증한 일과 음란을 행하였느니라 I passed by thee, and saw thee trampled in thine own bloods, and I said unto thee, Live in thy bloods, yea, I said unto thee, Live in thy bloods. (겔16:6, 22)

 

[3] 계시록에 보면, 마지막 때의 무자비함과 증오 또한 ‘’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The unmercifulness and hatred of the last times are also described by “blood” in the Revelation (16:3, 4).

 

3둘째 천사가 그 대접을 바다에 쏟으매 바다가 곧 죽은 자의 피 같이 되니 바다 가운데 모든 생물이 죽더라 4셋째 천사가 그 대접을 강과 물 근원에 쏟으매 피가 되더라 (계16:3, 4)

 

’는 영어로 ‘bloods’라 하여 복수로 언급되는데요, 모든 불공정하고 혐오스러운 일들이 증오로부터 솟구쳐 나오기 때문입니다. 마치 모든 선하고 거룩한 일들이 사랑으로부터 그렇게 나오는 것처럼 말입니다. Bloods” are mentioned in the plural, because all unjust and abominable things gush forth from hatred, as all good and holy ones do from love.

 

그래서 이웃을 향하여 증오를 느끼는 사람은 만일 그가 할 수만 있다면 그를 죽일 것입니다. 실제로 그는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그렇게 할 것입니다. Therefore he who feels hatred toward his neighbor would murder him if he could, and indeed does murder him in any way he can;

 

이런 것이 이웃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이며, 그것을 여기서 아주 적절하게 ‘핏소리’로 상징하고 있습니다. and this is to do violence to him, which is here properly signified by the “voice of bloods.

 

 

375. ‘호소’에 관한 두 표현, ‘voice crying’과 ‘voice of a cry’는 말씀에 흔히 나오는 표현 형식인데요, 어떤 동요, 소란, 혼란, 또는 어떤 행복한 일의 경우 등에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A “voice crying” and the “voice of a cry” are common forms of expression in the Word, and are applied to every case where there is any noise, tumult, or disturbance, and also on the occasion of any happy event (as in Exod. 32:17–18; Zeph. 1:9–10; Isa. 65:19; Jer. 48:3).

 

17여호수아가 백성들의 요란한 소리를 듣고 모세에게 말하되 진중에서 싸우는 소리가 나나이다 18모세가 이르되 이는 승전가도 아니요 패하여 부르짖는 소리도 아니라 내가 듣기에는 노래하는 소리로다 하고 (출32:17, 18)

 

9그 날에 문턱을 뛰어넘어서 포악과 거짓을 자기 주인의 집에 채운 자들을 내가 벌하리라 10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어문에서는 부르짖는 소리가, 제 이 구역에서는 울음 소리가, 작은 산들에서는 무너지는 소리가 일어나리라 (습1:9, 10)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에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사65:19)

 

호로나임에서 부르짖는 소리여 황폐와 큰 파멸이로다 (렘48:3)

 

본문에서는 고발을 가리킵니다. In the present passage it denotes accusation.

 

 

376. 이로부터 ‘피의 호소’는 유죄 고발을 상징한다 하는 것입니다. From this it follows that the “crying of bloods” signifies the accusation of guilt;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은 유죄이기 때문입니다. for those who use violence are held guilty.

 

시편에서처럼 As in David:

 

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 의인을 미워하는 자는 벌을 받으리로다 Evil shall slay the wicked, and they that hate the righteous shall be guilty. (시34:21)

 

에스겔에서 In Ezekiel:

 

네가 흘린 피로 말미암아 죄가 있고 네가 만든 우상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혔으니 네 날이 가까웠고 네 연한이 찼도다 그러므로 내가 너로 이방의 능욕을 받으며 만국의 조롱 거리가 되게 하였노라 Thou city art become guilty by the blood which thou hast shed. (겔22:4)

 

 

377. 여기 ‘’이 종파 분립 또는 이단을 상징한다는 것은, ‘’이 교리를 상징한다는 사실로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들을 자신의 일부로 하는 은 일종의 종파 분립입니다. That the “ground” here signifies a schism or heresy,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a “field” signifies doctrine, and therefore the “ground,” having the field in it, is a schism.

 

사람 자체가 ‘’이요, 또한 ‘’입니다. 이런 것들이 사람 안에서 수정(受精)되기 때문인데요, 사람은 그 안에서 수정되는 게 무엇이냐에 따라 그런 사람이 됩니다. 선과 진리로 수정된 사람은 선하고 진실한 사람이 되고, 악과 거짓으로 수정된 사람은 악하고 거짓된 사람이 됩니다. Man himself is the “ground,” and also the “field,” because these things are inseminated in him, for man is man from what is inseminated in him, a good and true man from goods and truths, an evil and false man from evils and falsities.

 

어떤 특별한 교리나 이단 가운데 있는 사람은 그것으로 일컬어지는데요, 그래서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이라는 용어는 종종 사람의 종파 분립이나 이단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됩니다. He who is in any particular doctrine or heresy is named from it, and so in the passage before us the term “ground” is used to denote a schism or heresy in man.

 

2021-05-28(D6)-창세기(창4,10, AC.373-377), '핏소리, 땅, 호소'.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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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XLeL3Dyd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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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And Jehovah said to Cain, Where is Abel thy brother? And he said, I know not, am I my brother’s keeper? (창4:9)

 

 

370.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는 이웃 사랑, 혹은 ‘아우 아벨’에 관하여 그들에게 일종의 딕테이트를 주는 어떤 영적 지각을 상징합니다. Jehovah said unto Cain” signifies a certain perceptivity from within that gave them a dictate concerning charity or the “brother Abel.

 

가인의 대답,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는, 신앙이 이웃 사랑을 아무것도 아닌 걸로 여기거나 이웃 사랑에게 순종하는 걸 내켜 하지 않아, 그 결과, 이웃 사랑과 관련된 모든 걸 거부했음을 상징합니다. Cain’s reply, “I know not, am I my brother’s keeper?” signifies that faith considered charity as nothing, and was unwilling to be subservient to it, consequently that faith altogether rejected everything of charity.

 

그들의 교리는 그런 모습이 되었습니다. Such did their doctrine become.

 

 

371. 태고인들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심’이라는 표현을 이용해서 퍼셉션을 상징했습니다. 그들은 주께서 그들에게 영적 지각 능력 주셨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By the “speaking of Jehovah” the most ancient people signified perception, for they knew that the Lord gave them the faculty to perceive.

 

이 퍼셉션은 사랑이 주(主)가 되는 동안은 계속될 수 있었습니다. This perception could continue no longer than while love was the principal.

 

주님 사랑이 식고, 그 결과, 이웃 사랑 또한 식으면 퍼셉션은 사라졌습니다. When love to the Lord ceased, and consequently love toward the neighbor, perception perished;

 

그러나 사랑이 아직 남아 있는 한은, 퍼셉션은 남아 있었습니다. but insofar as love remained, perception remained.

 

이러한 퍼셉션 능력은 태고 교회에 어울렸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면서, 홍수 후 사람들의 경우와 같이, 이웃 사랑이 신앙을 통해서 주어졌고, 양심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이 양심 또한 일종의 딕테이트를 주는데, 방식이 다릅니다. 이에 관해서는 나중에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씀드리겠습니다. This perceptive faculty was proper to the most ancient church, but when faith became separated from love, as in the people after the flood, and charity was given through faith, then conscience succeeded, which also gives a dictate, but in a different way, of which, by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양심이 딕테이트할 때, 그것은 마치 말씀에 나오는 ‘여호와께서 이르시되’와 같은 식입니다. When conscience dictates, it is in like manner said in the Word that “Jehovah speaks”;

 

양심이라는 게, 계시로 알게 하신 것들과 지식들, 그리고 말씀으로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because conscience is formed from things revealed, and from knowledges, and from the Word;

 

말씀이 말씀하시거나 딕테이트하실 때, 말씀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and when the Word speaks, or dictates, it is the Lord who speaks;

 

그런 까닭에, 심지어 오늘날에조차 양심이나 신앙에 관한 일을 언급할 때, ‘주께서 말씀하십니다’라고 하는 것보다 더 일반적인 표현은 없습니다. hence nothing is more common, even at the present day, when referring to a matter of conscience, or of faith, than to say, “the Lord says.

 

 

372. ‘지키는 자’가 된다는 것은 섬기는 것, 유대 교회의 ‘문지기’나 ‘수위’(문지방을 지키는 자)처럼 섬기는 걸 상징합니다. To be a “keeper” signifies to serve, like “door keepers” and “porters” (that is, the keepers of the threshold) in the Jewish church.

 

신앙은 이웃 사랑의 ‘지키는 자’입니다. 신앙은 원래 그래야 하니까요. 그런데 ‘가인’이라고 하는 교리의 원리들, 곧 신앙이 이웃 사랑을 다스리고자 하는 원리들을 따랐습니다. 7절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말입니다. Faith is called the “keeper” of charity, from the fact that it ought to serve it, but it was according to the principles of the doctrine called “Cain” that faith should rule, as was said in verse 7.

 

아래 인용은 '양심'에 대한 글입니다. 아직 번역을 곁들이지 못했습니다. 완성되면 곁들이겠습니다.

 

New Jerusalem and Its Heavenly Doctrine

 

9. Conscience

 

133. In a true conscience is man’s spiritual life itself, for there his faith is conjoined to charity.

 

On which account to act from conscience is to them to act from their spiritual life; and to act against conscience is to them to act contrary to that life of theirs.

 

Hence it is that they are in the tranquility of peace, and in internal happiness, when they act according to conscience, and in intranquility and pain, when they act against it.

 

This pain is what is called remorse of conscience.

 

 

134. Man has a conscience of what is good, and a conscience of what is just.

 

The conscience of what is good is the conscience of the internal man, and the conscience of what is just is the conscience of the external man.

 

The conscience of what is good consists in acting according to the precepts of faith from internal affection; but the conscience of what is just consists in acting according to civil and moral laws from external affection.

 

They who have the conscience of what is good, have also the conscience of what is just; but they who have only the conscience of what is just, are in a faculty of receiving the conscience of what is good; and they also do receive it when they are instructed.

 

 

135. Conscience, with those who are in charity toward the neighbor, is the conscience of truth, because it is formed by the faith of truth; but with those who are in love to the Lord, it is the conscience of good, because it is formed by the love of truth.

 

The conscience of these is a superior conscience, and is called the perception of truth from good.

 

They who have the conscience of truth, are of the Lord’s spiritual kingdom; but they who have the superior conscience, which is called perception, are of the Lord’s celestial kingdom.

 

2021-05-27(D5)-창세기(창4,9, AC.370-372),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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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mtYn0tMfsf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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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And Cain talked to Abel his brother; and it came to pass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hat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r, and slew him. (창4:8)

 

 

366.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는 시간의 경과를 상징합니다. Cain spake to Abel” signifies an interval of time.

 

가인’은 앞서 기술처럼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아벨’은 이웃 사랑, 곧 신앙의 아우를 각각 상징하며, 그래서 여기서 그는 두 번 ‘아우’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Cain,” as before stated, signifies faith separated from love; and “Abel” charity, the brother of faith, on which account he is here twice called his “brother.

 

’은 무엇이든지 교리에 속한 것을 상징합니다. A “field” signifies whatever is of doctrine.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는 분리된 신앙이 이웃 사랑의 불을 꺼트렸음을 상징합니다.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r, and slew him” signifies that separated faith extinguished charity.

 

 

367. 이웃 사랑이 신앙의 ‘아우’라는 것과, ‘’이 교리에 속한 무언가를 상징한다는 걸 증명하기 위한 것 말고는 이들 아케이나 확증을 위해 굳이 말씀 내 유사 구절들을 찾는 것은 불필요합니다. It is unnecessary to confirm these things by similar passages from the Word, except so far as to prove that charity is the “brother” of faith, and that a “field” signifies whatever is of doctrine.

 

이웃 사랑이 신앙의 ‘아우’라는 사실은 신앙의 속성이나 본질상 누구에게나 자명합니다. That charity is the “brother” of faith is evident to everyone from the nature or essence of faith.

 

이 형제지간(兄弟之間)이 에서와 야곱으로 표현되었으며, 그 장자권 및 그로 말미암은 주도권 다툼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This brotherhood was represented by Esau and Jacob, and was the ground of their dispute about the birthright and the consequent dominion.

 

이것은 또한 유다로 말미암은 다말의 두 아들, 베레스와 세라로(창38:28-30), It was also represented by Pharez and Zarah, the sons of Tamar by Judah (Gen. 38:28, 29, 30);

 

28해산할 때에 손이 나오는지라 산파가 이르되 이는 먼저 나온 자라 하고 홍색 실을 가져다가 그 손에 매었더니 29그 손을 도로 들이며 그의 아우가 나오는지라 산파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터뜨리고 나오느냐 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베레스라 불렀고 30그의 형 곧 손에 홍색 실 있는 자가 뒤에 나오니 그의 이름을 세라라 불렀더라 (창38:28-30)

 

또 에브라임과 므낫세(창48:13-14)로도 표현되었습니다. and by Ephraim and Manasseh (Gen. 48:13, 14); 

 

13오른손으로는 에브라임을 이스라엘의 왼손을 향하게 하고 왼손으로는 므낫세를 이스라엘의 오른손을 향하게 하여 이끌어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매 14이스라엘이 오른손을 펴서 차남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왼손을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엇바꾸어 얹었더라 (창48:13-14)

 

이 둘도 다른 유사한 경우들과 같이 장자권과 그로 인한 주도권 다툼이 있습니다. and in both of these, as well as in other similar cases, there is a dispute about the primogeniture and the consequent dominion.

 

신앙과 이웃 사랑은 교회의 자식들이기 때문에, For both faith and charity are the offspring of the church.

 

신앙을 일컬어 ‘남자’라 하였고, 이 장 1절에 나오는 ‘가인’을 가리켰지요, 이웃 사랑을 일컬어 ‘아우’라 불렀습니다. 사19:2, 렘13:14 및 다른 데서들도 말이지요. Faith is called a “man,” as was Cain, in verse 1 of this chapter, and charity is called a “brother,” as in Isa. 19:2; Jer. 13:14; and other places.

 

내가 애굽인을 격동하여 애굽인을 치리니 그들이 각기 형제를 치며 각기 이웃을 칠 것이요 성읍이 성읍을 치며 나라가 나라를 칠 것이며 (사19:2)

 

또 그들로 피차 충돌하여 상하게 하되 부자 사이에도 그러하게 할 것이라 내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사랑하지 아니하며 아끼지 아니하고 멸하리라 하셨다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13:14)

 

신앙과 이웃 사랑 간 결합을 ‘형제의 계약’(암1:9)이라 합니다. The union of faith and charity is called “the covenant of brethren.” (Amos 1:9)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두로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그 형제의 계약을 기억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로잡은 자를 에돔에 넘겼음이라 (암1:9)

 

가인과 아벨의 상징과 비슷한 것이 방금 말씀드린 야곱과 에서의 상징이었습니다. 야곱 역시 그의 형 에서를 대신하고 싶어 했다는 점에서 그런데요, 호세아를 보면 분명합니다. Similar to the signification of Cain and Abel was that of Jacob and Esau, as just said; in that Jacob also was desirous of supplanting his brother Esau, as is evident also in Hosea:

 

2야곱을 그 행실대로 벌하시며 그의 행위대로 그에게 보응하시리라 3야곱은 모태에서 그의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To visit upon Jacob his ways, according to his doings will he recompense him; he supplanted his brother in the womb. (호12:2-3)

 

그러나 에서, 곧 에서로 표현된 이웃 사랑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주도권을 쥘 것이라는 내용이, 그들의 아버지 이삭의 예언을 보면 나옵니다. But that Esau, or the charity represented by Esau, should nevertheless at length have the dominion, appears from the prophetic prediction of their father Isaac: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 하였더라 By thy sword shalt thou live, and shalt serve thy brother; and it shall come to pass, when thou hast the dominion, that thou shalt break his yoke from off thy neck. (창27:40)

 

또는 같은 건데요, 이방인들의 교회, 혹은 새 교회는 에서로, 유대인들의 교회는 야곱으로 표현됩니다. 그 이유는,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형제로 여겨야 한다는 말을 아주 자주 듣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의 교회, 혹은 원시 교회에서는 이웃 사랑으로 모두가 형제로 불렸습니다. Or what is the same, the church of the gentiles, or new church, is represented by Esau, and the Jewish church is represented by Jacob; and this is the reason for its being so often said that the Jews should acknowledge the gentiles as brethren; and in the church of the gentiles, or primitive church, all were called brethren, from charity.

 

마찬가지로 주님도 누가복음에서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들을 형제라 하셨습니다. Such as hear the Word and do it are likewise called brethren by the Lord (Luke 8: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시니라 (눅8:21)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 말씀을 행하는 사람들은 이웃 사랑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들으면서, 혹은 신앙인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행함은 없는, 혹은 이웃 사랑은 없는 사람들, 이들은 형제가 아닙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들을 어리석은 사람들에 비유하셨기 때문입니다. those who hear are such as have faith; those who do are such as have charity; but those who hear, or say that they have faith, and do not, or have not charity, are not brethren, for the Lord likens them unto fools (Matt. 7:24, 26).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마7:24)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마7:26)

 

 

368. ‘’이 교리를, 그리고 결과적으로 신앙과 이웃 사랑의 교리에 속한 것이면 무엇이나 상징한다는 것은 다음 예레미야 말씀을 보면 분명합니다. That a “field” signifies doctrine, and consequently whatever belongs to the doctrine of faith and charity, is evident from the Word, as in Jeremiah:

 

들에 있는 나의 산아 네 온 영토의 죄로 말미암아 내가 네 재산과 네 모든 보물과 산당들로 노략을 당하게 하리니 O my mountain in the field, I will give thy possessions [facultates] and all thy treasures for a spoil. (렘17:3)

 

이 구절에서, ‘’은 교리를, ‘재산’과 ‘보물’은 신앙의 영적인 부(富), 혹은 신앙의 교리에 속한 것들을 뜻합니다. 다음 말씀도 같습니다. In this passage “field” signifies doctrine; “possessions” and “treasures” denote the spiritual riches of faith, or the things that belong to the doctrine of faith. In the same:

 

레바논의 눈이 어찌 들의 바위를 떠나겠으며 먼 곳에서 흘러내리는 찬물이 어찌 마르겠느냐 Shall the snow of Lebanon fail from the rock of my field? (렘18:14)

 

신앙의 교리의 결핍 시, 시온을 향하여 선포하시기를, ‘시온은 밭 같이 경작지가 될 것’이라 하십니다. It is declared concerning Zion, when destitute of the doctrine of faith, that she shall be “plowed like a field.” (Jer. 26:18, Micah 3:12)

 

유다의 왕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가 유다의 모든 백성에게 예언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시온은 밭 같이 경작지가 될 것이며 예루살렘은 돌 무더기가 되며 이 성전의 산은 산당의 숲과 같이 되리라 하였으나 (렘26:18)

 

이러므로 너희로 말미암아 시온은 갈아엎은 밭이 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이 되리라 (미3:12)

 

에스겔에서 In Ezekiel:

 

또 그 땅의 종자를 꺾어 옥토에 심되 수양버들 가지처럼 큰 물 가에 심더니 He took of the seed of the land, and set it in a field of sowing, (겔17:5)

 

교회와 교회의 신앙을 다루고 있습니다. 교리를 일컬어 그 안에 종자가 있는 ‘’이라 하기 때문입니다. treating of the church and of its faith; for doctrine is called a “field” from the seed in it.

 

같은 본문에서 In the same:

 

들의 모든 나무가 나 여호와는 높은 나무를 낮추고 낮은 나무를 높이며 푸른 나무를 말리고 마른 나무를 무성하게 하는 줄 알리라 나 여호와는 말하고 이루느니라 하라 And let all the trees of the field know that I Jehovah bring down the high tree. (겔17:24)

 

요엘입니다. In Joel:

 

10밭이 황무하고 토지가 마르니 곡식이 떨어지며 새 포도주가 말랐고 기름이 다하였도다 11농부들아 너희는 부끄러워할지어다 밭의 소산이 다 없어졌음이로다 12밭의 모든 나무가 다 시들었으니 The field is laid waste, the ground mourneth, for the corn is wasted, the new wine is dried up, the oil languisheth, the husbandmen are ashamed, the harvest of the field is perished, all the trees of the field are withered, (욜1:10-12)

 

여기 ‘’은 교리를, ‘나무’는 지식들을, ‘농부들’은 예배자들을 각각 상징합니다. where the “field” signifies doctrine, “trees” knowledges, and “husbandmen” worshipers.

 

시편에서 In David:

 

밭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즐거워할지로다 그 때 숲의 모든 나무들이 여호와 앞에서 즐거이 노래하리니 The field shall exult and all that is therein; then shall all the trees of the forest sing, (시96:12)

 

여기서, ‘’이 어떻게 기뻐 어쩔 줄 몰라 하겠으며, ‘숲의 모든 나무들’이 어떻게 노래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 안에 있는 것들, 곧 신앙의 지식들 얘기인 것입니다. where it is perfectly evident that the field cannot exult, nor the trees of the forest sing; but things that are in man, which are the knowledges of faith.

 

예레미야에서 In Jeremiah:

 

언제까지 이 땅이 슬퍼하며 온 지방의 채소가 마르리이까 How long shall the land mourn, and the herb of every field wither? (렘12:4)

 

여기서도 분명한 것은, ‘’도, ‘지방의 채소’도 슬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표현들은 황폐함 가운데 있는 사람의 내면 속 어떤 것에 관한 것입니다. where it is also evident that neither the land nor the herbs of the field can mourn; but that the expressions relate to something in man while in a state of vastation.

 

비슷한 구절이 이사야에도 나옵니다. A similar passage occurs in Isaiah:

 

산들과 언덕들이 너희 앞에서 노래를 발하고 들의 모든 나무가 손뼉을 칠 것이며 The mountains and the hills shall break forth before you into singing, and all the trees of the field shall clap their hands. (사55:12)

 

주님 또한 세상 종말 관련 예언 가운데 신앙의 교리를 가리켜 ‘’이라 하십니다. The Lord also in his prediction concerning the consummation of the age calls the doctrine of faith a “field: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Then shall two be in the field, the one shall be taken and the other left, (마24:40; 눅17:36)

 

※ 개역개정 한글 성경에는 눅17:36 본문이 ‘(없음)’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은 신앙의 교리, 곧 참과 거짓 둘 다를 의미합니다. where by a “field” is meant the doctrine of faith, both true and false.

 

’이 교리를 가리키기 때문에, 신앙의 씨앗을 받아들이는 누구든, 그것이 사람이든, 교회든, 아니면 세상이든, 또한 일컬어 ‘’이라 합니다. As a “field” signifies doctrine, whoever receives a seed of faith, whether a man, the church, or the world, is also called a “field.

 

 

369. 이상으로부터, 그리고 다음 사실들이 이어집니다. 즉, 본문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가 가리키는 것은, 신앙과 이웃 사랑이 둘 다 신앙의 교리로부터 왔으면서도, 자기를 사랑에서 분리하는 신앙은 이웃 사랑을 무시하지 않고는 못 배기며, 그래서 결국은 이웃 사랑의 불을 꺼트린다는 사실입니다. From this then it follows that the words “Cain rose up against his brother Abel, and slew him,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ogether,” denote that while both faith and charity were from the doctrine of faith, yet faith separate from love could not but disregard and thereby extinguish charity;

 

오늘날의 경우를 보면, 이웃 사랑의 행위는 없이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입장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런 경우입니다. 바로 이런 가정으로 그들은 이웃 사랑의 불을 꺼트리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그들이 알고 있고, 입술로 고백하기를, 사랑 없이 신앙 만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as is the case at the present day with those who maintain that faith alone saves, without a work of charity, for in this very supposition they extinguish charity, although they know and confess with their lips that faith is not saving unless there is love.

2021-05-26(D4)-창세기(창4,8, AC.366-369),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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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rdZzsgRVm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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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If thou doest well, art thou not exalted? And if thou doest not well, sin lieth at the door; and to thee is his desire, and thou rulest over him. (창4:7)

 

 

361.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가 상징하는 것은, 네가 선에 대해 호의적이면 너는 이웃 사랑을 가졌다는 것이며,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가 상징하는 것은, 네가 만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이웃 사랑은 전혀 없고, 대신 악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If thou doest well, an uplifting” signifies that if thou art well disposed, thou hast charity; “if thou doest not well, sin lieth at the door” signifies that if thou art not well disposed, thou hast no charity, but evil.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가 상징하는 것은, 이웃 사랑은 신앙과 함께, 같이 지내는 걸 원하지만 그럴 수가 없는 게, 신앙이 이웃 사랑을 다스리고 지배하려고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To thee is his desire, and thou rulest over him” signifies that charity is desirous to be with thee, but cannot because thou desirest to rule over it.

 

 

362. ‘가인’이라 하는 신앙의 교리를 여기서 설명하고 있는데요,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하면, 그 결과, 이웃 사랑으로부터도 분리됩니다. 이웃 사랑은 사랑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The doctrine of faith called “Cain” is here described, which in consequence of separating faith from love, separated it also from charity, the offspring of love.

 

어디든지 교회가 있는 곳이면 이단들이 일어나는데요, 사람들은 신앙의 어떤 특별한 조항에 과도한 관심을 기울이다가 그만 그걸 메인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런 게 바로 인간 사고의 본성인데요, 사람은 어떤 것 하나에 과도한 관심을 보이다가 그걸 다른 것 앞에 두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며, 이런 경향은 특히 그가 그걸 자신의 고유한 발견이라고 주장할 때라든지, 그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 부풀어 올랐을 때 그렇습니다. Wherever there is any church, there arise heresies, because while men are intent on some particular article of faith they make that the main thing; for such is the nature of man’s thought that while intent on some one thing he sets it before any other, especially when his imagination claims it as a discovery of his own, and when the love of self and of the world puff him up.

 

그렇게 되면, 그때부터는 모든 것이 다 그것에 들어맞는 것 같고, 그것이 사실임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그는 결국 그것이 맞다 맹세까지 하게 됩니다. 심지어 그것이 거짓이더라도 말이지요. Everything then seems to agree with and confirm it, until at last he will swear that it is so, even if it is false.

 

바로 이런 식으로,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은 신앙을 사랑보다도 더 본질적인 걸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결과적으로 사랑 없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이런 삶에서 비롯된 자아와 판타지 둘 다에 대한 사랑으로 그들은 그런 어처구니없는 확신 가운데 있게 된 것입니다. Just in this way those called “Cain” made faith more essential than love, and as they consequently lived without love, both the love of self and the fantasy thence derived conspired to confirm them in it.

 

 

363. ‘가인’이라 부르는 신앙의 교리의 본질을 이 구절 설명 중 그 부분을 보면 알 수 있는데요, 그걸 보면, 이웃 사랑은 신앙과 결합할 수 있었다는 것, 그러나 신앙이 아닌 이웃 사랑이 주가 되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The nature of the doctrine of faith that was called “Cain” is seen from the description of it in this verse, from which it appears that charity was capable of being joined to faith, but so that charity and not faith should have the dominion.

 

이런 이유로,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를 먼저 거론한 것입니다. 이 표현은 선에 대해 호의적이면 이웃 사랑도 있을 수 있음을 상징합니다. ‘선을 행하다’의 속뜻이 기꺼이 선을 선택하고자 하는 마음인데요,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은 선한 일을 마음먹는 것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On this account it is first said, “If thou doest well art thou not uplifted?” signifying, If thou art well disposed, charity may be present; for to “do well” signifies, in the internal sense, to be well disposed, since doing what is good comes from willing what is good.

 

고대에는 행위와 의지가 하나였습니다. 행위를 보면, 그 의지를 알 수 있었지요. 그때는 위선이 뭔지도 모르던 시절이었습니다. In ancient times action and will made a one; from the action they saw the will, dissimulation being then unknown.

 

낯을 들다’가 이웃 사랑이 있다를 상징함은 얼굴에 대해 이미 말씀드린 내용을 보시면 분명한데요, 거기에 보시면, ‘낯을 들다’가 이웃 사랑을 가지고 있음을, 그리고 ‘낯을 떨구다’는 그 반대를 각각 상징하고 있습니다. That an “uplifting” signifies that charity is present is evident from what has been already said about the face, that to “lift up the face” is to have charity, and that for the “face to fall” is the contrary.

 

 

364. 두 번째로,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가 상징하는 것은, 만일 네가 선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다면 이웃 사랑은 전혀 있을 수 없고 대신 악이 있다는 것입니다. Secondly, it is said, “If thou doest not well, sin lieth at the door,” which signifies, If thou art not well disposed, there is no charity present, but evil.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은,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가 준비를 마치고 안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악을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웃 사랑이 전혀 없는 곳에는 오직 무자비함과 증오, 결과적으로는 모든 악만 있기 때문입니다. Everybody can see that “sin lying at the door” is evil ready and desirous to enter; for when there is no charity there are unmercifulness and hatred, consequently all evil.

 

보통, 죄를 일컬어 ‘악마’라고 부르는데, 지옥에 있는 이 악마의 동료들은 사람에게 이웃 사랑이 결핍될 때, 그 사람 마음의 문 아주 가까이 와 있습니다. 마음의 문에서 이 악마와 그의 동료들을 쫓아버리는 오직 유일한 방법은 주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Sin in general is called the “devil,” who, that is, his crew of infernals, is ever at hand when man is destitute of charity; and the only means of driving away the devil and his crew from the door of the mind is love to the Lord and toward the neighbor.

 

 

365. 세 번째입니다.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가 상징하는 것은, 이웃 사랑은 신앙과 함께, 같이 지내기를 원하지만 그럴 수가 없는 게, 신앙은 이웃 사랑을 다스리고 지배하려고 하기 때문이며, 그것은 질서에 반(反)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In the third place it is said, “Unto thee is his desire, and thou rulest over him,” by which is signified that charity is desirous to abide with faith, but cannot do so because faith wishes to rule over it, which is contrary to order.

 

신앙이 주도권을 쥐며, 지배하려고 하는 한, 그런 건 전혀 신앙이 아닙니다. 오직 이웃 사랑이 다스릴 때만 신앙이 됩니다. 위에서 보여드린 것처럼 이웃 사랑이 신앙의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 So long as faith seeks to have the dominion, it is not faith, and only becomes faith when charity rules; for charity is the principal of faith, as was shown above.

 

이웃 사랑은 불에 비유할 수 있겠는데요, 불은 열과 빛의 본질이지요. 열과 빛이 불에서 나오기 때문인데, 분리 상태에 있는 신앙은 마치 불의 빛은 빛인데 열 없는 빛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빛이 있어도 만물이 무기력하게 죽어가는 겨울철 빛입니다. Charity may be compared to flame, which is the essential of heat and light, for heat and light are from it; and faith in a state of separation may be compared to light that is without the heat of flame, when indeed there is light, but it is the light of winter in which everything becomes torpid and dies.

 

2021-05-25(D3)-창세기(창4,7, AC.361-365),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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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jEMufBdBn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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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And Jehovah said unto Cain, Why art thou wroth, and why are thy faces fallen? (창4:6)

 

 

35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가 의미하는 것은 양심에 진행된 각성(覺醒)으로, 구체적으로는, 그의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를 의미하며, 이것은 앞에서처럼 이웃 사랑이 떠나버림, 내면이 변함을 상징합니다. Jehovah said unto Cain,” means that conscience dictated; that his “anger was kindled, and that his countenance fell,” signifies as before that charity had departed, and that the interiors were changed.

 

※ 211번 글(창3:7)에서는 an interior dictate, 즉, 내적 직관 정도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해 보입니다.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창3:7)

 

※ 218번 글(창3:8)에서는 an internal dictate, 내면의 음성 정도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할 듯...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창3:8)

 

 

360.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가 양심에 진행된 각성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계속 확증해야 할까요? 앞에 비슷한 구절들의 설명들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That “Jehovah said unto Cain” means that conscience dictated, needs no confirmation, as a similar passage was explained above.

 

※ 영어 dictate로 표현된 이 말은 정리하면, 어떤 영적 실상을 직관적으로 깨닫게 되는 영적 각성, 통찰, 음성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쓰레기 더미 속에서 깜깜한 밤을 보내다가 동이 터 빛이 비치면 그때 비로소 ‘아, 내가 밤새 이런 쓰레기 더미 가운데 있었구나!’ 깨닫는 것처럼 말입니다...

 

퍼셉션을 받아 선악을 분별할 수 있게 되는 것과 비슷하겠습니다.

 

2021-05-24(D2)-창세기(창4,6, AC.359-360),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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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zl_iMh8eC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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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And unto Cain and unto his offering he looked not, and Cain’s anger was kindled exceedingly, and his faces fell. (창4:5)

 

 

355. ‘가인’은 지금까지 말씀드린 대로, 사랑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이나 분리 가능성을 용인하는 그런 교리를 상징합니다.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는 앞서와 같이 그런 예배는 받으실 수가 없었음을 상징합니다. By “Cain,” as has been stated, is signified faith separated from love, or such a doctrine as admits of the possibility of this separation; by his “offering not being looked to” is signified as before that his worship was unacceptable.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는 속에 있는 것들이 변했음을 상징합니다. By “Cain’s anger being kindled exceedingly, and his faces falling” is signified that the interiors were changed.

 

’(憤, anger)은 이웃 사랑이 떠나버렸음을, ‘안색’(顔色, faces)은 속에 있는 것들을 각각 가리키며, 그것들이 변하는 걸 ‘안색이 변했다’(fall)고 합니다. By “anger” is denoted that charity had departed; and by the “faces,” the interiors, which are said to “fall” when they are changed.

 

 

356. ‘가인’이 사랑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이나 이런 분리를 용인하는 교리를, 그리고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가 그런 자의 예배는 받으실 수가 없음을 각각 상징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앞서 보여드렸습니다. That by “Cain” is signified faith separated from love, or a doctrine that admits of this separation; and that “to his offering he looked not” signifies that his worship was not acceptable, has been shown before.

 

 

357. ‘가인이 분하여’는 이웃 사랑이 떠나버렸음을 상징함이 분명한 것은, 이것이 나중에 그가 그의 아우 아벨을 죽이는 것과 관련되기 때문이며, 아벨은 이웃 사랑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That “Cain’s anger was kindled” signifies that charity had departed is evident from what is afterwards related of his killing his brother Abel, by whom is signified charity.

 

분노는 무엇이든지 자아 사랑 및 그 탐욕과 배치되기만 하면 야기되는 아주 일반적인 악감정입니다. Anger is a general affection resulting from whatever is opposed to self-love and its cupidities.

 

이것은 악한 영들의 세계에서는 아주 생생하게 지각됩니다. 거기는 이웃 사랑은 전혀 없고, 대신 증오로 가득한 악한 영들의 결과, 주님을 대적하는 전반적인 분노가 있기 때문이며,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호의적이지 않은 것에는 무엇이든지 신경질적으로 안티를 드러내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분노가 이런 안티들을 생생하게 합니다. This is plainly perceived in the world of evil spirits, for there exists there a general anger against the Lord, in consequence of evil spirits being in no charity, but in hatred, and whatever does not favor self-love [amori proprio] and the love of the world, excites opposition, which is manifested by anger.

 

말씀에서 여호와에 관한 서술 시, ‘분노’, ‘진노’, 심지어 ‘노함, 격노’까지 자주 사용됩니다만 그러나 이런 것들은 사람에게나 쓰는 것이며, 단지 위에서 언급한 어떤 이유로 그렇게 표현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말씀을 읽다 보면 여호와의 무슨 속성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In the Word, “anger,” “wrath,” and even “fury,” are frequently predicated of Jehovah, but they are of man, and are attributed to Jehovah because it so appears, for a reason mentioned above.

 

그래서 시편에 기록되기를 Thus it is written in David:

 

49그의 맹렬한 노여움과 진노와 분노와 고난 곧 재앙의 천사들을 그들에게 내려보내셨으며 50그는 진노로 길을 닦으사 그들의 목숨이 죽음을 면하지 못하게 하시고 그들의 생명을 전염병에 붙이셨으며 He sent against them the anger of his nostril, and wrath, and fury, and trouble, and an immission of evil angels; he hath weighed a path for his anger, he withheld not their soul from death. (시78:49-50)

 

여호와는 누구에게도 화를 내신 적이 없으십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화를 자초하는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 가운데 재앙의 천사들을 보내시지도 않습니다. 반대로 사람이 그들을 자기한테로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Not that Jehovah ever sends anger upon anyone, but that men bring it upon themselves; nor does he send evil angels among them, but man draws them to himself.

 

이런 이유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좀 더 보면, ‘그는 진노로 길을 닦으사 그들의 목숨이 죽음을 면하지 못하게 하시고’; 또한 그래서 이사야에서도,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갈 것이라 무릇 그에게 노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리라’ (사45:24)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분명한 것은, ‘분냄’은 악, 또는 같은 의미이지만, 이웃 사랑으로부터 떠남을 상징합니다. And therefore it is added, that he “hath weighed a path for his anger, and withheld not their soul from death”; and therefore it is said in Isaiah, “To Jehovah shall he come, and all that were incensed against him shall be ashamed” (Isa. 45:24), whence it is evident that “anger” signifies evils, or what is the same, a departure from charity.

 

 

358. ‘안색이 변하니’가 내면이 변했음을 가리킨다는 것은 ‘얼굴’과 ‘변함’의 상징으로부터 분명합니다. That by the “faces falling” is signified that the interiors were changed,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face” and of its “falling.

 

얼굴은, 고대인들에게는, 속에 있는 것들을 상징했습니다. 속에 있는 것들이 겉으로 얼굴을 통해서 반영되기 때문인데요, 태곳적에는 사람들이 겉과 속이 완전히 일치하는 얼굴이었고, 그래서 사람들은 타인의 얼굴을 보고 그 사람이 어떤 기질이나 마인드의 사람인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The face, with the ancients, signified internal things, because internal things shine forth through the face; and in the most ancient times men were such that the face was in perfect accord with the internals, so that from a man’s face everyone could see of what disposition or mind he was.

 

그들은 속사정하고는 다른 얼굴을 하고 다니는 것을 무슨 괴물 같은 걸로 여겼습니다. They considered it a monstrous thing to show one thing by the face and think another.

 

무슨 척, 무슨 체 하는 것과 속이는 것은 그래서 혐오스럽게 여겨졌고, 이상과 같은 사유로, 얼굴을 보면 그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을 알 수 있었습니다. Simulation and deceit were then considered detestable, and therefore the things within were signified by the face.

 

이웃 사랑이 얼굴에 나타나 빛날 때, 그 얼굴을 일컬어 ‘위로 들린다’ 하고, 그 반대는 ‘아래로 떨어진다’ 합니다. 그래서 축복기도문에서 주님을,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시는’ 주님으로 서술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민6:26)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시4:6)

 

이것이 상징하는 것은 주님은 사람에게 인애(仁愛, cherity)를 베푸신다는 사실입니다. When charity shone forth from the face, the face was said to be “lifted up”; and when the contrary occurred, the face was said to “fall”; wherefore it is also predicated of the Lord that he “lifts up his faces upon man,” as in the benediction (Num. 6:26; and in Ps. 4:6), by which is signified that the Lord gives charity to man.

 

얼굴을 떨굼’이 의미하는 바는 예레미야에 보면 이렇습니다. What is meant by the “face falling,” appears from Jeremiah: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I will not make my face to fall toward you, for I am merciful, saith Jehovah. (렘3:12)

 

여호와의 얼굴’은 자비입니다. 그가 어떤 사람을 향해 ‘그 얼굴을 드심’은 그가 자비하심 가운데 그를 향해 인애를 베푸심인 반면, 그 반대는, 그가 ‘얼굴을 숙이심’, 곧, 사람의 얼굴이 변한 것, ‘안색이 변하니’입니다. The “face of Jehovah” is mercy, and when he “lifts up his face” upon anyone, it signifies that out of mercy he gives him charity; and the reverse when he “makes the face to fall,” that is, when man’s face falls.

 

2021-05-23(D1)-창세기(창4,5, AC.355-358), '가인의 제사, 분, 안색이 변하니'.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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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imPfAj3D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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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And Abel, he also brought of the firstlings of his flock, and of the fat thereof. And 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ing: (창4:4)

 

 

350. 여기 ‘아벨’은 앞서와 같이 이웃 사랑(charity, 인애, 자선, 기부 등)을 상징합니다. ‘양의 첫 새끼’는 거룩한 것을 상징하는데, 이 거룩은 홀로 주님 한 분에게만 해당하는 것입니다. ‘기름’은 천적(天的, the celestial) 그 자체를 상징하며, 이 역시 주님에게만 속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는 이웃 사랑의 행위들과 이웃 사랑으로 드리는 모든 예배들, 그래서 주님을 아주 기쁘시게 하는 예배들을 각각 상징합니다. By “Abel” here as before is signified charity; and by the “firstlings of the flock” is signified that which is holy, which is of the Lord alone; by “fat” is signified the celestial itself, which also is of the Lord; and by “Jehovah looking unto Abel, and to his offering,” that the things of charity, and all worship grounded in charity, were well-pleasing to the Lord.

 

 

351. ‘아벨’은 앞서 보여드린 대로 이웃 사랑을 상징합니다. That “Abel” signifies charity has been shown before.

 

이웃 사랑은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를 의미합니다. 자기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사람은 또한 슬픔 중에 있는 이웃을 향해 마치 자신을 향해 연민을 느끼듯 느끼기 때문입니다. By charity is meant love toward the neighbor, and mercy; for he who loves his neighbor as himself is also compassionate toward him in his sufferings, as toward himself.

 

 

352. ‘양의 첫 새끼’가 홀로 주님 한 분에게 속한 것을 상징한다는 것은 표상 교회에서 첫 새끼 혹은 초태생(初胎生)은 모두 거룩했다는 사실을 보면 분명합니다. 그들은 주님과 관련되었는데, 주님은 홀로 ‘초태생’, ‘장자(長子)’이시기 때문입니다. That the “firstlings of the flock” signify that which is of the Lord alone is evident from the firstlings or firstborn in the representative church, which were all holy, because they had relation to the Lord, who alone is the “firstborn.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들이 ‘초태생’입니다. Love and the faith thence derived are the “firstborn.

 

모든 사랑은 주님의 것입니다. 요만큼의 사랑도 사람의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 홀로 ‘초태생’이신 것입니다. All love is of the Lord, and not one whit of it is of man, therefore the Lord alone is the “firstborn.

 

이것을 고대 교회들에서는 사람과 짐승 가운데 처음 난 것을 거룩히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것으로 표현하였습니다. This was represented in the ancient churches by the firstborn of man and of beast being sacred to Jehovah; (출13:2, 12, 15)

 

2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태에서 처음 난 모든 것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 12너는 태에서 처음 난 모든 것과 네게 있는 가축의 태에서 처음 난 것을 다 구별하여 여호와께 돌리라 수컷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15그 때에 바로가 완악하여 우리를 보내지 아니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난 모든 것은 사람의 장자로부터 가축의 처음 난 것까지 다 죽이셨으므로 태에서 처음 난 모든 수컷들은 내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려서 내 아들 중에 모든 처음 난 자를 다 대속하리니 (출13:2, 12, 15)

 

그리고 속뜻으로 사랑을 상징하는 레위 자손은, 속뜻으로 신앙을 상징하는 르우벤과 시므온의 뒤를 따라 셋째로 태어났음에도, 모든 초태생을 대신하여 받아들여졌고, 제사장직을 받들게 되었습니다. and by the tribe of Levi, which in the internal sense signifies love—though Levi was born after Reuben and Simeon who in the internal sense signify faith—being accepted instead of all the firstborn, and constituting the priesthood. (민3:40-45; 8:14-20)

 

40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의 처음 태어난 남자를 일 개월 이상으로 다 계수하여 그 명수를 기록하라 41나는 여호와라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태어난 자 대신에 레위인을 내게 돌리고 또 이스라엘 자손의 가축 중 모든 처음 태어난 것 대신에 레위인의 가축을 내게 돌리라 42모세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대로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태어난 자를 계수하니 43일 개월 이상으로 계수된 처음 태어난 남자의 총계는 이만 이천이백칠십삼 명이었더라 44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45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태어난 자 대신에 레위인을 취하고 또 그들의 가축 대신에 레위인의 가축을 취하라 레위인은 내 것이라 나는 여호와니라 (민3:40-45)

 

14너는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구별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내게 속할 것이라 15네가 그들을 정결하게 하여 요제로 드린 후에 그들이 회막에 들어가서 봉사할 것이니라 16그들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게 온전히 드린 바 된 자라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초태생 곧 모든 처음 태어난 자 대신 내가 그들을 취하였나니 17이스라엘 자손 중에 처음 태어난 것은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내게 속하였음은 내가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태어난 자를 치던 날에 그들을 내게 구별하였음이라 18이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태어난 자 대신 레위인을 취하였느니라 19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취하여 그들을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주어 그들로 회막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봉사하게 하며 또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성소에 가까이 할 때에 그들 중에 재앙이 없게 하려 하였음이니라 20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께서 레위인에 대하여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을 다 따라 레위인에게 행하였으되 곧 이스라엘 자손이 그와 같이 그들에게 행하였더라 (민8:14-20)

 

주님은 주님의 인성 관련, 장자(長子)이십니다. 그래서 시편에 기록되기를 Of the Lord as the firstborn of all, with respect to his human essence, it is thus written in David:

 

26그가 내게 부르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하리로다 27내가 또 그를 장자로 삼고 세상 왕들에게 지존자가 되게 하며 He shall call me, my Father, my God, and the rock of my salvation. I will also make him my firstborn, high above the kings of the earth. (시89:26-27)

 

그리고 계시록에도 And in John: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Jesus Christ the firstborn of the dead, and the prince of the kings of the earth. (계1:5)

 

예배의 장자는 주님을, 교회의 장자는 신앙을 각각 상징함을 잘 관찰하시기 바랍니다. Observe that the firstborn of worship signify the Lord, and the firstborn of the church, faith.

 

 

353. ‘기름’은 천적(天的) 그 자체를 상징하는데, 이 천적이라는 것은 또한 주님에게 속한 것입니다. By “fat” is signified the celestial itself, which is also of the Lord.

 

사랑에 속한 모든 것이 천적입니다. The celestial is all that which is of love.

 

신앙 또한 그것이 사랑으로부터 나올 때는 천적입니다. Faith also is celestial when it is from love.

 

이웃 사랑은 천적입니다. Charity is the celestial.

 

모든 이웃 사랑의 선도 천적입니다. All the good of charity is the celestial.

 

희생제물들 몸 안 여러 종류의 기름들이 가리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하나 구별하여 말씀드리면, 간 또는 태를 덮고 있는 기름, 콩팥 기름, 창자 위와 전체를 덮고 있는 기름인데요, 이 기름들은 거룩하였고, 단 위 번제로 드려지는 것들이었습니다. All these were represented by the various kinds of fat in the sacrifices, and distinctively by that which covered the liver, or the caul; by the fat upon the kidneys; by the fat covering the intestines, and upon the intestines; which were holy, and were offered up as burnt offerings upon the altar. (Exod. 29:13, 22; Lev. 3:3, 4, 14; 4:8–9, 19, 26, 31, 35; 8:16, 25)

 

13내장에 덮인 모든 기름과 간 위에 있는 꺼풀과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을 가져다가 제단 위에 불사르고 22또 너는 그 숫양의 기름과 기름진 꼬리와 그것의 내장에 덮인 기름과 간 위의 꺼풀과 두 콩팥과 그것들 위의 기름과 오른쪽 넓적다리를 가지라 이는 위임식의 숫양이라 (출29:13, 22)

 

3그는 또 그 화목제의 제물 중에서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곧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4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 쪽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떼어낼 것이요 14그는 그 중에서 예물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곧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레3:3-4, 14)

 

8또 그 속죄제물이 된 수송아지의 모든 기름을 떼어낼지니 곧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9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쪽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떼어내되 19그것의 기름은 다 떼어 제단 위에서 불사르되 26그 모든 기름은 화목제 제물의 기름 같이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같이 제사장이 그 범한 죄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 31그 모든 기름을 화목제물의 기름을 떼어낸 것 같이 떼어내 제단 위에서 불살라 여호와께 향기롭게 할지니 제사장이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 35그 모든 기름을 화목제 어린 양의 기름을 떼낸 것 같이 떼내어 제단 위 여호와의 화제물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같이 제사장이 그가 범한 죄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 (레4:8-9, 19, 26, 31, 35)

 

16또 내장에 덮인 모든 기름과 간 꺼풀과 두 콩팥과 그 기름을 가져다가 모세가 제단 위에 불사르고 25그가 또 그 기름과 기름진 꼬리와 내장에 덮인 모든 기름과 간 꺼풀과 두 콩팥과 그 기름과 오른쪽 뒷다리를 떼어내고 (레8:16, 25)

 

그래서 이 기름들을 일컬어 ‘이는 화제로 드리는 음식이요 향기로운 냄새라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레3:14, 16) 하였습니다. They were therefore called the “bread of the offering by fire for a rest unto Jehovah.” (Lev. 3:14, 16)

 

14그는 그 중에서 예물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곧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16제사장은 그것을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로 드리는 음식이요 향기로운 냄새라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레3:14, 16)

 

같은 이유로 유대인들은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레3:17; 7:23, 25)라고 하는 이 말씀에 의해 모든 종류의 짐승 기름 먹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 For the same reason the Jewish people were forbidden to eat any of the fat of the beasts by what is called “a perpetual statute throughout your generations.” (Lev. 3:17; 7:23, 25)

 

너희는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 이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레3:17)

 

23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소나 양이나 염소의 기름을 먹지 말 것이요 25사람이 여호와께 화제로 드리는 제물의 기름을 먹으면 그 먹는 자는 자기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레7:23, 25)

 

이것은 교회가 천적인 것들은 말할 것도 없고, 내적인 것조차 인정하지 않는 그런 상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This was because that church was such that it did not even acknowledge internal, much less celestial things.

 

[2]기름’이 천적인 것들과 이웃 사랑의 선들을 가리킨다는 것은 예언서들을 보면 분명한데요, 이사야입니다. That “fat” signifies celestial things, and the goods of charity, is evident in the prophets; as in Isaiah: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Wherefore do ye weigh silver for that which is not bread, and your labor for that which satisfieth not? Attend ye diligently unto me, and eat ye that which is good, and let your soul delight itself in fatness. (사55:2)

 

그리고 예레미야 And in Jeremiah:

 

내가 기름으로 제사장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며 내 복으로 내 백성을 만족하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I will fill the soul of the priests with fatness, and my people shall be satiated with my good, (렘31:14)

 

여기서 기름은 정말 지방 덩어리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천적 영적 선을 가리킨다는 것이 너무나 자명한데요, where it is very evident that fatness is not meant, but celestial spiritual good.

 

그래서 시편입니다. So in David:

 

8그들이 주의 집에 있는 살진 것으로 풍족할 것이라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물을 마시게 하시리이다 9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They are filled with the fatness of thy house, and thou makest them drink of the river of thy deliciousnesses. For with thee is the fountain of lives; in thy light we see light. (시36:8-9)

 

여기 ‘살진 것’, ‘생명의 원천’은 천적인 것, 곧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을, ‘복락의 강물’과 ‘’은 영적인 것, 곧 사랑으로 말미암은 신앙에 속한 영적인 것을 각각 가리킵니다. Here “fatness” and the “fountain of lives” signify the celestial, which is of love; and the “river of deliciousnesses,” and “light,” the spiritual, which is of faith from love.

 

다시 시편입니다. Again in David: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나의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나의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My soul shall be satiated with marrow and fatness, and my mouth shall praise thee with lips of songs, (시63:5)

 

여기도 같습니다. ‘기름’은 천적인 것을, ‘기쁜 입술’은 영적인 것을 가리킵니다. where in like manner “fat” denotes the celestial, and “lips of songs” the spiritual.

 

이것이 천적인 걸 가리키는 것이 분명한 이유는 그것이 영혼을 아주 충분히 만족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That it is what is celestial is very evident, because it will satiate the soul.

 

같은 이유로, 땅의 첫 소산인 첫 열매들을 가리켜 ‘기름’(민18:12)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For the same reason the first fruits, which were the firstborn of the earth, are called “fat.” (Num. 18:12)

 

그들이 여호와께 드리는 첫 소산 곧 제일 좋은 기름과 제일 좋은 포도주와 곡식을 네게 주었은즉 (민18:12)

 

[3] 천적인 것들은 도저히 셀 수 없는 속(屬, genera)으로, 그리고 더욱 더 종(種)으로 세분되기 때문에, 모세가 백성 앞에서 말하여 낭송한 노래를 통해 다음과 같이 표현되었습니다. As celestial things are of innumerable genera, and still more innumerable species, they are described in general in the song which Moses recited before the people:

 

소의 엉긴 젖과 양의 젖과 어린 양의 기름과 바산에서 난 숫양과 염소와 지극히 아름다운 밀을 먹이시며 또 포도즙의 붉은 술을 마시게 하셨도다 Butter of kine, and milk of the flock, with fat of lambs and of rams, the sons of Bashan, and of goats, with the fat of the kidneys of wheat; and thou shalt drink the blood of the grape, unmixed. (신32:14)

 

이 구절의 속뜻을 모르고서는 그 어느 누구도 이 표현들이 상징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It is impossible for anyone to know the signification of these expressions except from the internal sense.

 

속뜻을 모르면, 위 구절의 표현들, ‘소의 엉긴 젖’, ‘양의 젖’, ‘어린 양의 기름’, ‘바산에서 난 숫양과 염소’, ‘지극히 아름다운 밀’, ‘포도즙의 붉은 술’은 그저 단어의 나열일 뿐 다른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겉으로는 그럴지라도 이 표현들은 그 전체로나 각각으로나 천적인 것들의 속과 종, 곧 모든 체계를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Without the internal sense, such expressions as the “butter of kine,” the “milk of sheep,” the “fat of lambs,” the “fat of rams and goats,” the “sons of Bashan,” the “fat of the kidneys of wheat,” and the “blood of the grape,” would be words and nothing more, and yet they all and each signify genera and species of celestial things.

 

 

354.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다’는 것이 이웃 사랑에 속한 것들, 곧 선행과 이에 기반한 모든 예배가 주님을 무척 기쁘시게 함을 가리킨다는 것은 앞에 ‘아벨’과 ‘제물’에 대한 글에서 설명했습니다. That “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ing,” signifies that the things of charity, and all worship grounded therein, are pleasing to the Lord, has been explained before, as regards both “Abel,” and his “offering.

 

2021-05-22(D7)-창세기(창4,4, AC.350-354), '기름, 아벨의 제사를 열납하심'.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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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h34yK8DhX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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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riages in Heaven

 


366. As heaven is from the human race, and angels therefore are of both sexes, and from creation woman is for man and man is for woman, thus the one belongs to the other, and this love is innate in both, it follows that there are marriages in heaven as well as on the earth. But marriages in heaven differ widely from marriages on the earth. herefore what marriages in heaven are, and how they differ from marriages on the earth and wherein they are like them, shall now be told.

 

 

367. Marriage in heaven is a conjunction of two into one mind. It must first be explained what this conjunction is. The mind consists of two parts, one called the understanding and the other the will. When these two parts act as one they are called one mind. In heaven the husband acts the part called the understanding and the wife acts the part called the will. When this conjunction, which belongs to man’s interiors, descends into the lower parts pertaining to the body, it is perceived and felt as love, and this love is marriage love. This shows that marriage love has its origin in the conjunction of two into one mind. This in heaven is called cohabitation; and the two are not called two but one. So in heaven a married pair is spoken of, not as two, but as one angel.(각주241)
 
각주241. It is not known at this day what marriage love is, or whence it is (n. 2727).

 

이하 생략...

 

천국과지옥.1.40.366-386.'천국 안의 결혼'.pdf
0.85MB

https://youtu.be/opk8lcdlvz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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