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창4:14)
AC.387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to be hid from thy faces)가 사랑의 신앙의 모든 선으로부터 분리됨이라는 것은 ‘주의 낯’(the faces of Jehovah)의 의미를 보면 분명합니다. ‘주의 낯’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자비(mercy)입니다. 이 자비에서 사랑의 신앙의 모든 선이 나오는데요, 그래서 여기 그의 ‘낯’으로 신앙의 선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That to be “hid from thy faces” signifies to be separated from all the good of the faith of love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faces of Jehovah.” The “face of Jehovah,” as before said, is mercy, from which proceed all the goods of the faith of love, and therefore the goods of faith are here signified by his “faces.”
해설
스베덴보리는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라는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주의 낯”(faces of Jehovah)이라는 상징의 본래 뜻에서 풀어 설명합니다. 성경 전반에서 “여호와의 얼굴”은 감정적 표정이나 물리적 현존을 뜻하지 않고, ‘여호와의 자비(mercy)’, 곧 하나님에게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사랑의 선한 영향’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얼굴은 단순히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와 사람에게 도달하는 모든 선의 근원’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자비로부터 나오는 것이 바로 ‘사랑의 신앙의 모든 선’, 즉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신앙의 선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중요한 구분을 합니다. 신앙은 단순한 진리의 인식이 아니라, 사랑에서 흘러나올 때에만 ‘선한 신앙’이 됩니다. 그러므로 “주의 낯”은 곧 ‘사랑에 근거한 신앙의 선’, 다시 말해 하나님과 인간을 실제로 연결해 주는 생명력의 흐름을 의미합니다. AC.387에서 “그의 얼굴들(faces)”이라는 복수 표현이 사용되는 것도, 이 선들이 하나가 아니라 다양한 형태로 인간의 삶 속에 흘러들어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라는 말은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일관되게, ‘하나님은 결코 당신의 자비를 거두지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숨겨짐은 언제나 사람 쪽에서 일어납니다. 가인의 경우, 사랑(체어리티)을 죽임으로써 그는 여호와의 자비가 흘러들어오는 통로를 스스로 막아버렸습니다. 그 결과 그는 더 이상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선들을 느끼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 상태는 단순히 “선한 감정이 사라졌다”는 차원이 아니라, ‘영적 생명의 근원과의 단절’을 뜻합니다. 진리는 아직 남아 있을 수 있지만, 그 진리는 더 이상 선을 낳지 못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이것이 바로 사랑 없는 신앙의 가장 치명적인 특징입니다. 진리는 남아 있으되, 그 진리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열과 생명은 사라진 상태인 것이지요.
결국 AC.387은 가인의 상태를 이렇게 규정합니다. ‘그는 진리로부터도 분리되었고(AC.386), 더 나아가 사랑에서 비롯되는 모든 신앙의 선으로부터도 분리되었다.’ 이것이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라는 말의 영적 의미이며, 하나님이 가인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가인이 사랑을 버림으로써 하나님의 자비를 인식할 수 없게 된 상태’를 정확히 묘사하는 아르카나입니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6
‘이 지면에서 쫓아내시온즉’(cast out from the faces of the ground)이 교회의 모든 진리로부터 분리됨이라는 것은 ‘땅’(ground)이 상징하는 바를 보면 분명한데요, ‘땅’은 그 진짜(genuine)뜻으로는 교회, 즉 교회에 속한 사람이며, 그래서 앞서 밝힌 대로, 교회가 주장하는 모든 것입니다. 어떤 말의 의미라는 것은 다루는 주제에 따라 필연적으로 달라지는데요, 그래서 심지어 잘못된 신앙, 예를 들면, 스키즘이나 이단 신앙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땅’이라 합니다. 여기 ‘이 지면에서 쫓아내시온즉’(driven out from the faces of the ground)은 그러나 더 이상 교회의 진리 안에 있을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That to be “cast out from the faces of the ground” is to be separated from all the truth of the church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ground,” which, in the genuine sense, is the church, or the man of the church, and therefore whatever the church professes, as shown above. The meaning of a word necessarily varies with the subject treated of, and therefore even those who wrongly profess faith, that is who profess a schism or heresy, are also called “ground.” Here however to be “driven out from the faces of the ground” signifies to be no longer in the truth of the church.
해설
스베덴보리는 먼저 “‘이 지면에서 쫓아내시온즉’이라는 말은 교회의 모든 진리로부터 분리되는 상태”라고 다시 강조합니다. 그 근거는 성경에서 “땅”(ground)이 단순한 자연적 흙이 아니라, ‘교회 혹은 교회에 속한 사람’을 상징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은AC전반에서 일관되게 보이는 상징 원리로, 땅은 곧 ‘진리가 심기고 자라는 영적 토양’, 즉 교회의 구조 전체를 나타냅니다. 그 구조 안에 속해 있을 때 사람은 진리와 선의 흐름을 받을 수 있지만, 그 구조에서 벗어나면 진리의 빛을 더 이상 공급받지 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서, ‘땅’이라는 단어가 항상 올바른 교회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상징은 말씀이 다루는 ‘주제’(subject)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통한 교회뿐 아니라 ‘분열된 교회, 이단적 가르침, 잘못된 신앙 고백을 가진 집단’도 때로는 “땅”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그들은 진정한 교리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외형상으로는 ‘교회’라는 형태를 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땅”이란 단어는 ‘교회의 본질이 아니라, 교회를 이루고 있다고 주장하는 외적 틀을 의미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본문의 경우, 즉 가인에 대해 언급될 때는 의미가 훨씬 더 엄중하다고 말합니다. “이 지면에서 쫓아내시온즉”은 ‘단순히 정통 교회에서 떠난다는 의미가 아니라, 교회가 가진 진리의 본질과 완전히 단절되는 상태’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가인은 진리의 틀 안에 있든 없든 그 자체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핵심은 ‘그가 더 이상 진리의 생명력과 연결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고자 하는 중심 메시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가인이 말한 ‘이 지면에서 쫓아내시온즉’은 더 이상 교회의 진리 안에 거하지 못하고, 진리의 빛과 이해의 흐름으로부터 단절되는 상태로 들어간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가인을 심판하여 내치는 것이 아니라, ‘사랑(체어리티)을 버린 신앙이 스스로 진리의 토대를 잃어버린 결과’입니다. 진리는 사랑과 결합될 때에만 생명을 지니는데, 가인은 이미 사랑을 죽였기 때문에 진리가 뿌리내릴 ‘땅’—즉 선한 내면—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따라서AC.386은 가인의 상태를 이렇게 요약합니다.
그는 외적으로는 여전히 교회를 말할 수 있으나, 그 내면에서는 교회의 진리와 완전히 단절된 사람, 즉 더 이상 교회의 진리 안에 있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는 단순한 위치 이동이 아니라 영적 생태계의 붕괴를 뜻합니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Behold thou hast cast me out this day from the faces of the ground, and from thy faces shall I be hid; and I shall be a 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everyone that findeth me shall slay me. (창4:14)
AC.385
‘이 지면에서 쫓아내시온즉’(cast out from the faces of the ground)은 교회의 모든 진리로부터 분리됨을,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hid from thy faces)는 사랑의 신앙의 모든 선(all the good of faith of love)으로부터 분리됨을,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는 무엇이 참이요 선인지를 모르는 것을,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everyone that findeth me shall slay me)는 모든 악과 거짓이 그를 파괴할 것을 의미합니다.To be “cast out from the faces of the ground” signifies to be separated from all the truth of the church; to be “hid from thy faces” signifies to be separated from all the good of faith of love; to be a “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 is not to know what is true and good; “everyone that findeth me shall slay me” signifies that all evil and falsity would destroy him.
해설
“이 지면에서 쫓아내시온즉”은 교회의 모든 진리로부터 분리됨을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성경의 ‘땅’(ground)은 단순한 자연적 토양이 아니라, 교회의 진리가 뿌리를 내리는 영적 기반을 상징합니다. “지면”은 그 진리를 받아들이는 속 사람의 영역을 뜻하고, 지면에서 쫓겨난다는 말은 진리와의 연결이 완전히 끊어진 상태, 즉 교회의 외적 형태는 남아 있어도 그 안에서 길을 잃어 진리의 빛을 더 이상 인지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가인은 사랑, 곧 체어리티 없이 신앙만을 주장했기 때문에 결국 진리의 토대에서도 밀려나게 된 것입니다.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는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모든 선으로부터 분리됨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은AC전반에서 항상 “하나님의 선(특히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선)”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즉 하나님의 얼굴로부터 숨겨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숨으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체어리티를 버림으로써 하나님의 선을 느끼고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선에 대한 지각(good perception)의 상실”이라 부르며, 이는 영적 생명력을 잃어가는 가장 명백한 징후라고 설명합니다.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는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 모르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표현을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의 단절”로 풀이합니다. 속 사람(내적 의지)에서 오는 선의 인도함이 없으므로, 사람이 무엇이 올바른지 무엇이 악인지 분별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리며 살게 됩니다. 이 상태에서는 지식은 남아 있지만 그 지식이 방향성을 잃어 무작위로 흩어지며, 신앙의 진리들은 더 이상 길을 안내하는 빛이 되지 못한 채 고립된 정보처럼 남아 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가인의 “방랑”입니다.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는 모든 악과 거짓이 그를 파괴할 것임을 의미합니다. 가인이 사랑과 선을 잃었을 때, 그는 더 이상 진리를 보호할 내적 힘이 없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만나는 자들”을 외부의 사람이나 존재가 아니라, “가인의 내적 상태에서 생겨난 왜곡된 신앙, 잘못된 개념들, 자기모순, 내적 거짓들”이라고 설명합니다. 즉, 사랑이 없는 신앙은 자기 내부에서 발생하는 악과 거짓에 의해 무너질 수밖에 없는 취약한 구조를 갖게 됩니다. 선이 없는 진리는 생명력을 잃고, 생명력을 잃은 진리는 악과 거짓의 공격 앞에서 방어할 힘이 없습니다.
결국AC.385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 없이 분리된 신앙은 교회의 진리와 선에서 분리되고, 그 결과 참과 거짓을 분별하지 못하며, 자연스럽게 자신 안에 있는 악과 거짓의 힘에 의해 붕괴되는 운명에 놓인다.’ 이 말은 하나님이 가인을 벌하신 것이 아니라, ‘가인이 사랑을 잃음으로써 스스로 그런 상태에 들어간 것’임을 밝혀 주는 중요한 아르카나입니다.
그런 걸 보면, 가인 안에 아직 뭔가 선한 것이 남아 있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후 체어리티의 모든 선은 사라졌는데, 그건 뒤에 나오는 라멕이 한 말을 보면 분명합니다.19절하고,23,24절입니다.Hence it appears that something of good still remained in Cain; but that all the good of charity afterwards perished is evident from what is said of Lamech (verses 19, 23–24).
19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24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창4:19, 23-24)
해설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라고 고백한 사실을 통해, 가인 안에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선의 흔적(리메인스)’이 남아 있었다고 말합니다. 사랑(체어리티)을 이미 억압하고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가인이 자신의 비참한 상태를 ‘인식하고 고통을 느끼는 것 자체’가 그 안에 ‘미세한 선(어떤 최소한의 선한 감수성)’이 여전히 존재함을 보여주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어서, 이 남아 있던 선도 결국 완전히 소멸되었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이후 등장하는 ‘라멕’(19, 23–24절)에 대한 묘사 때문입니다. 라멕은 가인의 계열이 도달한 ‘최종적 타락 상태’를 대표하는 인물로, 체어리티의 모든 선이 사라지고, 신앙의 진리마저 폭력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왜곡으로 변질된 상태를 상징합니다.
따라서AC.384의 핵심은 이렇습니다.가인(사랑을 잃은 신앙) 안에는 처음에는 아주 약한 선이 남아 있었으나, 그 선이 보존되지 못하고 결국 후손(라멕)의 시대에 이르러 ‘체어리티의 선이 완전히 사라진 교회의 상태’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And Cain said unto Jehovah, Mine iniquity is greater than can be taken away. (창4:13)
AC.383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Cain said unto Jehovah)는 자기가 악 가운데 있었다는 어떤 고백을, 이 고백은 무슨 내적 고통(internal pain)으로 나온 것입니다.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mine iniquity is greater than can be taken away)는 그로 인한 절망(despair)을 의미합니다.“Cain said unto Jehovah” signifies a certain confession that he was in evil, induced by some internal pain; “mine iniquity is greater than can be taken away” signifies despair on that account.
해설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라는 구절을 매우 깊은 영적 장면으로 해석합니다. 이 표현은 단순히 대화를 나누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가인의 내면에서 일어난 어떤 ‘자백’(confession)을 상징합니다. 그것은 진리(신앙)가 사랑(체어리티)을 떠나 버린 사실을 스스로 깨닫게 되었을 때 찾아오는 ‘내적 통증’(internal pain)에 의해 일어난 고백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가인이 아직 회개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는 “체어리티라는 사랑을 죽인 신앙”이라는 자신의 상태를 처음으로 의식하게 되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의식을 “고통을 동반한 자각”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고통은 외적 형벌의 두려움이 아니라 ‘영적 생명(아벨)이 사라진 데서 오는 내적 비어 있음’이며, 이것이 가인으로 하여금 여호와 앞에 입을 열게 만든 것입니다.
이어서 가인은 말합니다.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단순히 죄책감의 표현으로 보지 않습니다. 이 말은 ‘절망’(despair)을 뜻합니다. 즉, 자신의 상태가 너무 깊이 무너져서 ‘하나님께 돌아갈 길이 없다고 느끼는 영적 절망감’입니다.
여기에는 사랑 없이 존재하려는 신앙의 비극적 논리가 나타납니다. 사랑을 잃어버린 신앙은, 하나님과의 연결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자기 존재의 토대가 무너졌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순간 인간은 하나님께 버려졌다고 느끼지만,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실제 하나님이 떠나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체어리티라는 사랑을 잃어 하나님을 인식할 능력을 스스로 차단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절망은 신앙의 붕괴라기보다, 사실은 ‘회복의 첫 단계’입니다. 왜냐하면 절망 속에서 비로소 인간은 자신의 내면의 상태를 보게 되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할 가능성이 열리기 때문입니다.AC.383은 바로 이 점을 드러냅니다. 가인의 고백은 아직 회개는 아니지만, ‘하나님을 향한 첫 미세한 움직임’, 즉 내면 깊은 곳에서 울리는 ‘영적 통증의 인정’입니다. 하나님은 이 작은 움직임을 통해 회복의 길을 여시기 시작합니다.
라틴어proprium은 원전에서 사용된 용어로, 여기와 다른 여러 곳에서 ‘own’이라는 표현으로 번역되어 온 말입니다.propius의 사전적 의미는 형용사로서는 ‘one’s own,’ ‘proper,’ ‘belonging to one’s self alone,’ ‘special,’ ‘particular,’ ‘peculiar’입니다. 이proprium은 중성인데 명사로 사용되면, ‘possession,’ ‘property’를 의미하며, 또 ‘a peculiarity,’ ‘characteristic mark,’ ‘distinguishing sign,’ ‘characteristic’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영어 형용사 ‘own’은 웹스터에 ‘belonging to,’ ‘belonging exclusively or especially to,’ ‘peculiar’를 의미하는 걸로 봐서,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이 ‘own’이라는 말은proprius와 매우 정확히 일치하며, 라틴proprium에 맞는 어떤 명사를 만들면, 아주 가까운 번역 효과를 얻지 싶습니다.The Latin word proprium is the term used in the original text that in this and other places has been rendered by the expression “own.” The dictionary meaning of propius, as an adjective, is “one’s own,” “proper,” “belonging to one’s self alone,” “special,” “particular,” “peculiar.” The neuter of this which is the word proprium, when used as a noun means “possession,” “property”; also “a peculiarity,” “characteristic mark,” “distinguishing sign,” “characteristic.” The English adjective “own” is defined by Webster to mean “belonging to,” “belonging exclusively or especially to,” “peculiar”; so that our word “own” is a very exact equivalent of proprius, and if we make it a noun in order to answer to the Latin proprium, we effect a very close translation. [Reviser]
해설
이 설명은 스베덴보리가 사용하는 핵심 개념인 ‘본성’(proprium)을 언어적으로 정확히 이해하도록 돕기 위한 주해로서, 단순한 어휘 설명을 넘어 신학적 함의를 지니고 있습니다. 라틴어 ‘proprium’은 형용사 ‘propius’에서 나온 말로, 기본 의미는 ‘자기 자신의’, ‘고유한’, ‘자기에게만 속한’, ‘특유의’라는 뜻을 지닙니다. 이것이 명사형으로 사용될 때에는 ‘소유’, ‘재산’이라는 의미뿐 아니라, ‘특이성’, ‘고유한 성질’, ‘구별되는 표지’라는 뜻까지 포함합니다. 즉 ‘proprium’은 단순히 무엇을 ‘가지고 있다’는 소유 개념을 넘어, 한 존재를 그 존재답게 규정하는 내적 성질 전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영어 번역에서 이를 ‘own’으로 옮긴 것은 매우 적절한데, 왜냐하면 영어의 ‘own’ 역시 ‘...에 속한’, ‘배타적으로 속한’, ‘고유한’, ‘특유의’라는 의미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이 형용사 ‘own’을 명사처럼 사용하여 ‘사람 자신의 것’이라는 의미로 확장하면, 라틴어 ‘proprium’과 거의 정확히 대응하게 됩니다.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 신학에서 이 ‘본성’은 중립적 개념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거듭남 이전의 인간에게서 ‘자기 자신의 것’은 언제나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 결과로 선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악인 것, 진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거짓인 것들을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proprium’은 단순히 ‘나다움’이나 ‘개성’을 뜻하지 않고, 주님에게서 분리된 인간 상태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 됩니다. 이 설명은 왜 스베덴보리가 ‘사람 자신의 것’을 그렇게 반복해서 문제 삼는지, 그리고 왜 거듭남이란 결국 이 본성이 지배권을 내려놓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중심이 되는 과정인지를 언어 차원에서부터 분명히 해 줍니다. 즉 ‘본성’은 인간 정체성의 핵심이지만, 동시에 반드시 주님의 생명으로 대체되어야 할 출발점이라는 점에서, 이 짧은 언어 설명은 스베덴보리 신학 전체를 여는 열쇠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9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10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11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12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창4:6-12)
오늘 본문은 겉으로는 인류 최초의 형제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주님이 스베덴보리를 통해 밝히신 바인 그 속뜻으로는 ‘우리 내면에서 매일 일어나는 영적 사건’입니다. 여기 가인(Cain)과 아벨(Abel)은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의 겉 사람과 속 사람의 두 상태’, 즉 ‘신앙과 체어리티’를 상징하는데요, 곧 가인은 진리, 또는 ‘신앙’(faith)이라는 개념을, 아벨은 사랑, 선함, 자비, 곧 ‘체어리티’(charity)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잠깐, 이 ‘체어리티’, 곧 ‘이웃 사랑’과, 이 이웃 사랑이 말미암는 ‘주님 사랑’ 이야기를 먼저 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은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좀 다른데요,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 사랑’의 영어 표현은 ‘love to the Lord’이지만, ‘이웃 사랑’은 ‘love toward the neighbor’입니다. 바로 전치사 ‘to’와 ‘toward’의 차이이지요. 지난주에도 말씀드렸듯, 영어 전치사 ‘to’는 ‘직접적, 수직적’, ‘toward’는 ‘파생적, 수평적’입니다. 즉, ‘주님 사랑’은 가장 내적, 가장 직접적이며, 영혼의 중심에서 일직선으로 주님께 향하는 사랑, 즉, 본원적, 수직적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웃 사랑’은 이 역시 방향을 나타내지만, ‘to’와는 달리 여전히 과정 중에 있는, 완전히 도달한 것이 아닌, 흐름, 움직임, 지향을 나타내는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웃’은 누구일까요? 스베덴보리에게서 ‘이웃’(neighbor)은 단지 사람(person)만이 아니라, 공동선, 공동체, 나라, 교회, 진리, 선의 영역, 그리고 그 모든 선의 질서 등, 이 전부를 포괄하는 ‘더 넓어지는 사랑의 활동 범위’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웃 사랑’, 곧 ‘체어리티’는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밖으로 흘러나가 확장되는’ 방사형 구조를 갖습니다. 고정된 대상에게 일직선으로 닿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흘러 나가며 확장되는 것, 네, 그것이 바로 ‘toward’이며, 이런 것이 바로 ‘체어리티’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오늘 ‘아벨’의 속뜻이고 말입니다. ‘주님 사랑’이 나를 통해 ‘이웃’으로 흘러 나가는 사랑이 ‘체어리티’입니다.
참고로, 스베덴보리는 그의 저서, ‘천국과 지옥’에서 이 ‘이웃’의 개념을 더욱 깊이 설명하는데요, 거기서 그는 ‘이웃이란 대상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대상 안에 있는 주님의 신성, 곧 주님의 선과 진리’라고 합니다. 이 개념에 의하면, 결국 ‘이웃 사랑’, 즉 ‘체어리티’란 이웃 안에 있는 주님의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것이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도 말 그대로 원수를 사랑하라는 게 아니라 그 원수 안에 거하시는 주님을 사랑하라는 것이 되겠습니다. 그 사람이 이뻐서 사랑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 안에 거하시는 주님을 사랑하는 것, 곧 그 주님께 예의를 갖추는 것이 되겠지요. 우리가 일상 중에 이런 관점을 굳게 붙들 수만 있다면 우리를 긁는 많은 어려움의 순간들을 잘 헤쳐 나갈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저 사람을 부추기는 악한 영들이 나쁜 것이다. 저 사람 안에는 주님이 계시다. 나는 그 주님만 바라보아야 한다’면서 말이죠.
이런 배경을 가지고 계속해서 보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되었을 때, 인간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주는 ‘영적 구조도’와 같습니다.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7절)
이 한 구절 안에 인간의 자유, 유혹의 본질, 사랑 없는 신앙의 내적 위기, 그리고 회복의 길까지 모두 담겨 있습니다.
오늘 설교는 이 말씀의 속뜻을 펼쳐보며, 우리가 일상 속에서 갑자기 맞닥뜨리는 이 ‘가인’이라는 상태를 그때그때 어떻게 이해하고 극복할지 함께 살펴보는 것입니다.
먼저, 사랑을 잃어버린 신앙의 내면
주님께서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을 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5절)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이 분노는 단순한 기분 변화가 아니라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가진 필연적 결과입니다. 사랑 없는 신앙은 자기 의에 빠지고, 비교 의식에 떨어지며, 인정받지 못하면 분노합니다. 왜냐하면 진리에 관한 지식을 자기 정체성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원래 사랑에서 나오는 빛이며, 그러므로 사랑 없이는 생명을 가질 수 없습니다. 가인의 분노는 결국, ‘너의 신앙이 사랑을 잃었구나’ 하시는 주님의 은밀한 메시지였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도 만일 지식 중심이 되고, 교리 중심이 되고, ‘나는 맞고 너는 틀렸다’는 태도로 굳어진다면, 틀림없이 가인과 같은 불안과 분노가 나타날 것입니다.
둘째, 죄가 문에 엎드려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7절)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풀이합니다.
‘문’은 마음의 입구이고, ‘죄’는 사랑이 없는 곳으로 들어오려는 악의 기운이며, ‘엎드려 있다’는 말은 우리가 문만 열면 곧장 들어올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동일한 구절에서 굉장히 중요한 영적 진리를 선언하십니다. 바로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라고 말입니다. 여기 드러나는 세 가지는 이렇습니다. 하나는, 인간에게는 항상 ‘자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따를지, 분노를 따를지 선택할 자유 말입니다. 또 하나는, ‘리메인스’(remains), 곧 속 사람 안에 주님이 보관하신 주님의 선과 진리가 있어 언제든 사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끝으로, 주님은 절대 인간에게 ‘어쩔 수 없는 죄’를 허용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죄가 문에 엎드려 있지만, 그 문을 여는 선택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영적 인간학에서 핵심이 되는 가르침입니다.
셋째, 체어리티를 죽이는 신앙의 비극과 그 결과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8절)
가인이 아벨을 죽인 사건은 역사적 살인이 아니라 ‘신앙이 체어리티를 억압할 때 벌어지는 영적 죽음’입니다. 그러니까 교리가 사랑을 누르고, 지식이 겸손을 누르며, 그리고 신앙이 체어리티를 부정하는 순간, ‘아벨이 우리 안에서 죽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모든 종교 타락의 첫 번째 징조’라고 말합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9절)
주님이 모르셔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이 질문을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것입니다.
“너의 사랑은 어디 있느냐?”
“너의 겸손은 어디 있느냐?”
“너의 체어리티, 곧 너의 아벨은 어디 있느냐?”
이런 질문들은 가인처럼 사랑을 외면한 우리의 영혼을 흔들어 깨우시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10절)
피는 선의 생명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억압된 선(사랑)은 천적 나라에서 ‘실제로 울림을 일으킨다’고 말합니다. 즉, 우리의 사랑, 우리의 체어리티가 죽으면 우리의 영혼도 함께 울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12절)
‘땅’은 인간의 속 사람, 선의 자리입니다. 사랑, 곧 체어리티가 사라진 신앙은 이 속 사람과 연결되지 못하기 때문에, ‘어떤 영적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유리하는 자’가 된다는 말은,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듯, ‘사랑 없이 진리만 붙들 때, 인생과 신앙은 언제나 방황하게 된다’는 뜻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매일 문을 열 것인지, 혹은 닫을 것인지 선택합니다. 사소한 말 한마디, 작은 판단, 미묘한 교만, 인정받고 싶은 마음, 내가 옳다는 주장 등... 우리는 진리를 많이 아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진리가 사랑을 잃을 때가 문제입니다. 교리적 신앙, 지적 신앙, 정답 신앙은 사랑 없이 독립될 때, 즉 체어리티와 분리될 때, 가인이 됩니다. 가인은 우리 안에 존재하는 ‘지식 중심의 신앙’입니다. 반면, 아벨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사랑의 선함’이고요. 참 신앙은 사랑으로 말미암으므로 아벨을 잃으면 그 어떤 교리도, 성경 지식도, 예배 습관도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영혼의 생명이기 때문’이지요.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은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9절)
우리의 연약함으로, 우리의 비겁함으로 정작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를 외면했던, 그래서 원치 않게 가인이 되고만 우리를 향해, 그래서 이상하게 아무리 애를 써도 무슨 영적 열매와 성장 없이 방황하는 인생, 유리하는 신앙 가운데 고생하는 우리를 향해 오늘 주님이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7절)
주님은 우리에게 죄를 이기라고 명령하시는 분이 아니라, ‘이길 수 있는 힘과 자유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언제든 사랑, 곧 체어리티(아벨)를 다시 살릴 수 있는 길을 열어두시면서 말이지요. 우리를 도우시는 주님을 의지, 의뢰하면서 우리는 다시 힘을 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다시 체어리티의 사람, 선을 행하는 사람, 삶이 따뜻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저의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여 주세요. 지식과 교리로 판단하고 정죄하려는 가인의 마음을 버리고, 겸손과 체어리티로 우리 안의 아벨을 지키게 하여 주세요. 죄가 문 앞에 엎드릴 때, 제가 그 문을 열지 않게 하시고, 대신 주님이 주신 리메인스로 말미암아 선한 선택을 하도록 인도하여 주세요. 제 안에서 죽어가는 체어리티를 다시 살려 주시고, 제 안 영혼의 땅이 다시 열매 맺게 하여 주세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말씀’(Word)에 대해 알고나서는 이제는 바울 서신을 비롯, 그 안에 아르카나(arcana, inner sense)가 들어있지 않다는 신구약 성경들은 잘 읽지도, 그걸 가지고 주일설교 본문을 삼지도, 더 나아가 가급적 인용도 안 하고 있습니다. 저의 이런 태도가 건강한 건가요? 스베덴보리라면 어떻게 했을까요?
이 질문은 ‘스베덴보리 신학을 실천적으로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하는 핵심을 건드리는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리고 지금 목사님의 태도에는 ‘장점과 위험이 동시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실제 태도를 기준으로 하나씩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지금의 이런 ‘배제 중심 태도’는 스베덴보리는 권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해는 충분히 됩니다. ‘참 말씀’(The Word in the proper sense)이 무엇인지, 어디에 내적 의미가 담겨 있는지를 알고 난 뒤에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그 중심으로 영이 이끌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스베덴보리 자신은 다음 두 가지를 동시에 했습니다. 첫째, 참된 말씀, 곧 창, 출, 시편 일부, 복음서, 계시록에 집중하며, 그 내적 의미를 계시, 둘째, 성경 전체, 곧 바울 서신을 포함해 ‘기독교 세계가 사용하는 모든 성경’을 존중하며, 목회적 차원에서 활용. 그는 AC.10325, TCR.226 등에서 ‘바울 서신은 말씀의 ‘inner sense’(속뜻, arcana)를 가진 책은 아니지만, ‘교회의 질서를 세우는 데 주님의 섭리로 주어진 책’’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울 서신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았다’
그는 바울 서신의 신학적 오류를 지적할 때도 매우 조심스럽게 했다
예를 들어, ‘오직 믿음’(faith alone), 즉 ‘의롭다 함을 믿는 것만으로’라는 표현이 오해될 수 있다고 말하지만, 그렇다고 바울 서신 전체를 폐기하거나 비난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이 의도하신 ‘믿음-사랑의 결합’을 바울도 곳곳에서 말하고 있다. 문제는 교회가 그것을 잘못 해석해 버린 것이다.” 즉, 바울 자체 문제라기보다 ‘후대 교회의 해석 문제’라고 보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울 서신의 ‘목회적 기능’을 인정했다
그는 이런 관찰을 합니다. DP.234 등에서 ‘기독교 교회는 오랜 세월, 바울 서신을 통해 기본 윤리, 공동체 질서, 교리 체계를 유지해 왔다. 이것 또한 주님의 섭리다.’ 따라서 스베덴보리 신학을 따른다고 해서 바울을 적대할 이유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한 ‘참된 말씀’의 용도는 ‘영적 의미를 위해서’이다
지금 느끼시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단계입니다. 내적 의미가 보이기 시작하면, 다른 텍스트가 모두 ‘빛을 잃는 듯한’ 느낌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내적 의미의 빛만 붙잡고 목회를 하면 문제가 생긴다’고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그 이유는, AC.1408, AC.9025 등에서 밝히기를, ‘사람들은 외적 진리인 성경의 문자를 기반으로 하지 않으면, 내적 진리를 전혀 받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스베덴보리의 내적 의미는 ‘성경 전체의 문자적 세계 안에 심어져서 자라야 한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문자적 성경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오히려 영적 의미의 기반을 잃게 됩니다.’
스베덴보리 시대 설교자들은 어떻게 했을까?
스베덴보리가 사적으로 대화한 목회자들에 대한 기록을 보면, 그는 이렇게 권했습니다. 첫째, ‘사람들에게는 문자적 말씀을 통해 접근하라’ 내적 의미를 설교자가 ‘직접적으로’ 완전히 드러낼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러나 설교자 자신은 항상 그 내적 의미 안에서 설교를 준비하라’ 그러면 설교의 어조, 초점, 균형이 자연스럽게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셋째, ‘바울 서신도 영적 원리로 재해석해 설교에 사용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은 진리의 빛을 받는 것으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은 선과 진리의 결합으로, ‘새 사람을 입으라’는 거듭남의 과정으로 말이지요. 그러니까 스베덴보리는 ‘배제가 아니라 재해석을 원한 것’입니다.
목사님의 현재 모습은?
먼저, 좋은 면(강점)입니다. 내적 의미를 붙잡고자 하는 ‘순수한 열망’이 있으시고, ‘참된 말씀’ 중심의 신학적 정렬이 매우 정확하시며, 설교의 중심을 주님(여호와 예수)으로 세우는 방향성이 강하십니다. 이것은 매우 귀하고 건강한 모습이요, 과정입니다.
그러나 위험한 면도 존재하는데요, 예를 들면, ‘교인들의 기반인 문자적 성경을 충분히 존중하지 못할 위험’이 있고, ‘내적 의미를 나누기 전에 필요한 외적 질서가 무너질 위험’도 있으며, ‘바울 서신 등 교회 전통의 큰 기둥을 한 번에 없애는 효과’, ‘교회 분열과 오해, 배척을 불러오기 쉬움’ 등의 불필요한 위험 요소가 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AC.1832에서 이런 급진적 변화를 ‘사람들의 상태가 준비되지 않았을 때는 심지어 진리도 해가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주님도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며, 듣는 자들의 역량에 맞춰 대부분 쉬운 비유로 말씀하셨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스베덴보리식으로 하면 이렇게 정리됨
1단계, 개인적으로는 참 말씀에 집중하라
지금 목사님의 상태는 이 단계에 매우 잘 맞습니다.
2단계, 설교에서는 ‘문자적 말씀’과 ‘내적 원리’를 혼합하라
문자적 말씀이 ‘뿌리와 줄기’라면, 내적 의미는 ‘열매와 향기’입니다. 뿌리와 줄기만 있어도 안 되고, 뿌리와 줄기 없이 열매와 향기를 얻을 수도 없습니다.
3단계, 바울 서신도, 복음서나 시편 등 ‘말씀’의 빛을 비추어 ‘정화된 의미’만 사용하라
사용하되, 내적 의미의 원리로 걸러서 사용하면, 오히려 더 큰 힘을 얻습니다.
조언
지금처럼 ‘참 말씀 중심’으로 가시는 것은 아주 좋습니다. 스베덴보리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 서신을 비롯, ‘말씀’ 아닌 다른 성경은 ‘사용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스베덴보리는 권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교인들을 인도하는 데 이 성경들은 반드시 필요하고, 문자적 성경 전체가 사실 주님의 섭리로 교회에 주어진 것이며, 그 문자적 글도 결국은 ‘내적 의미의 문을 열어주는 외피’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식 ‘건강한 길’은 문자적 말씀을 존중하면서 내적 의미의 원리로 해석하고 사용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이 목사님이 목회자로서 가장 안전하고, 교인들을 영적으로 가장 깊고 온전하게 인도하는 길입니다.
늘 궁금한 게 있는데요, 스베덴보리는 왜 복음서 주석은 하지 않았나요? 주님의 육성이 담긴 복음서가 더 중요하지 않았을까요?
이 질문은 스베덴보리를 오래 읽은 분들조차 평생 품고 있는 핵심 질문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가 복음서를 주석하지 않은 것은 ‘의도적 선택’이며, 그의 전체 신학 구조 안에서 반드시 필요한 공백이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복음서 주석을 ‘안 한 게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한 것’
복음서에 대한 직접 주석은 없지만, 복음서의 내적 의미, 곧 속뜻을 그는 자신의 여러 저서, 예를 들면,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1758),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Divine Love and Wisdom, 1763), ‘하나님의 섭리’(Divine Providence, 1764), ‘참 그리스도교’(True Christian Religion, 1771) 등에서 전면적으로 풀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방식은 ‘본문을 따라가는 주석 방식’(exegesis)이 아니라, ‘복음서 전체에 내재된 구조적, 보편적 진리를 다시 전개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의 생애는 신적 진리의 충만한 계시’로서, ‘그 동일한 내적 의미가 구원론, 기독론, 재림론, 연합론 전체에 이미 녹아 있도록 하는 방식’이지요. 그래서 굳이 복음서 본문을 한 절씩 풀지 않아도 그 내적 의미 전체가 그의 저작들 전체 속에 재구성되어 나타나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스베덴보리는 복음서를 해설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복음서 자체를 ‘신학 전체’로 펼쳐 놓은 것’입니다.
복음서를 주석하지 않은 직접적 이유들
첫째, 복음서는 ‘말씀’(Word)의 범주가 창세기, 출애굽기, 선지서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을 두 범주로 나누는데요, 하나는, ‘내적 의미’(internal sense, heavenly sense, arcana, 속뜻)를 가진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모세오경과 선지서들, 그리고 시편 일부 및 계시록을 말합니다. 이 말씀들은 구절 하나하나가 상징과 표상으로 연결됩니다. 다른 하나는, 역사적 실제 기록을 기반으로 하나, 그 자체가 상징계는 아닌 ‘복음서의 문자’입니다. 복음서 역시 ‘말씀’이지만, 그러나 다른 종류의 말씀입니다. 그 안의 상징성은 예수님의 생애와 직접 결합되어 있으며, 그래서 창, 출 같은 방식의 상징 주석을 적용할 수 없습니다. 즉, 복음서는 ‘예수님의 실제 행적’이자 ‘내적 의미의 직접적 실현’이기 때문에 ‘상징 해석’을 위해 존재하는 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모세 이후 존재하던 성막과 제사가 주님 오신 이후 더 이상 필요가 없어 사라진 것과 같습니다. 성막과 제사는 주님을 표상하던 것들인데 정작 그 실체인 주님이 오시자 더는 그런 도우미들이 필요가 없어진 것이지요.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복음서를 창세기, 출애굽기처럼 절대적 상징 주석을 하지 않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둘째, 복음서는 예수님의 ‘육신으로의 신성화 과정’(glorification)을 그대로 보여주는 책이기 때문
스베덴보리는 ‘신적 인성(Divine Human)의 성화 과정(신성화, glorification)’이 복음서 전체의 핵심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과정은 곧바로 ‘내적 의미 자체’입니다. 즉, ‘예수님의 시험’, ‘기적들’, ‘설교’, ‘십자가’ 및 ‘부활’ 등, 이것들은 ‘상징의 외피가 아니라 내적 의미 그 자체의 역사적 구현’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건 주석할 필요가 없다’고 본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생애는 문자, 상징을 넘어 바로 ‘신적 실체의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역시 모든 문자와 상징, 표상, 상응이 가리키는 본체, 실체이신 분이 직접 오셨기 때문입니다.
셋째, 스베덴보리는 복음서를 이미 ‘보충 주석’ 형태로 곳곳에서 해설
주석서는 아니지만 복음서 본문을 해설한 문단들은 어마어마하게 많습니다. 예를 들면, 시험받으심에 대해서는 지옥 전체와의 전투로(AC, TCR 다수), 산상수훈에 대해서는 천국적 삶과 진리의 질서로, 기적은 선과 진리의 표상으로, 십자가는 마지막 시험과 완전한 연합, 부활은 인간 구원의 원형 등, 즉, 절대적으로 해설이 없는 것이 아니라 ‘본문 주석의 형태가 아닌, 신학 체계 속의 해설’로 그의 저작들 여기저기에서 다 언급할 수 없을 정도로 해설하고 있습니다.
그의 사명은 ‘재림기 말씀의 내적 의미 개방’이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사명을 다음처럼 정의합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를 열어 주는 일’과 특히 ‘모세오경과 선지서들을 통해서’라고 말입니다. 왜 이 두 곳일까요? 왜 복음서는 아닐까요?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예수님이 이미 복음서 속에서 ‘자신을 직접 계시하심’
복음서는 그 문자 의미 자체가 ‘신성의 직접 계시’이므로 ‘상징을 벗기기 위한 해설’(exegesis)이 필수적이지 않습니다.
둘째, 그러나 창세기, 출애굽기는 상징과 표상으로 감추어져 있어 재림 시기에야 드러낼 수 있는 구조
창세기의 아담, 노아, 아브라함, 출애굽기의 애굽, 홍해, 시내산 등 이 모든 것이 인간 영적 발전의 ‘내적 단계’이므로, 재림 때 완전히 드러내야 했습니다. 즉, 창세기, 출애굽기, 계시록은 재림을 위해 봉인된 책들이지만, ‘복음서는 이미 드러난 계시의 핵심’이라는, 이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셋째, ‘복음서 주석은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살아내는 것’
스베덴보리는 복음서의 핵심을 이렇게 보았습니다. ‘산상수훈’은 천국의 삶, ‘사랑, 자비, 용서, 겸손’은 천국의 질서, ‘십자가’는 인간 구원의 전체 과정, ‘부활’은 삶의 변형, 변모 등, 따라서 그는 말합니다. “사람이 복음서를 ‘해설’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삶으로 살아내야’ 한다. 복음서는 지성의 책이 아니라, 생명의 책이다.” 그는 복음서를 주석하지 않는 대신, 그 복음서의 내적 의미를 ‘삶의 길’(way of life)로서 제시했습니다.
요약
스베덴보리가 복음서를 주석하지 않은 이유는, 첫째, 복음서는 상징적 기록이 아니라, 신적 인간의 직접 계시이기 때문에, 둘째, 내적 의미는 이미 전체 신학에 통합되어 있기 때문에, 셋째, 주석의 대상은 ‘봉인된 말씀’인 창, 출, 계인 반면, 복음서는 그 자체로 개방된 말씀, 넷째, 복음서는 지식이 아니라 삶의 실천이 목적이기 때문에, 다섯째, 그의 사명 자체가 복음서 주석이 아니라 ‘말씀의 내적 의미 개방’이었기 때문에
참고로, 스베덴보리의 수십 권에 달하는 저작들은 전부 약어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AC는 ‘천계비의’(天界秘義, Arcana Coelestia, 1749-1756, 라틴)의 약어이고, HH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1758), CL은 ‘결혼애’(結婚愛, Conjugial Love, 1768)의 약어입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는 보통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속뜻을 풀어낸 책’으로 소개되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더 넓고 깊은 목적을 가진 저작입니다. 이 책은 성경의 문장을 하나하나 해석하는 주석서이면서 동시에, 성경이 어떤 책인지, 왜 살아 있는 말씀이라고 불리는지, 그리고 그 말씀이 인간의 삶과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는지를 설명하는 체계적인 신학서입니다. 저자인 스베덴보리는 이 책을 통해 ‘성경은 단순한 종교 문헌이 아니라, 하늘과 인간을 연결하는 언어’라는 주장을 일관되게 펼칩니다.
이 책의 가장 핵심적인 전제는 ‘성경에는 문자로 보이는 의미 너머에 속뜻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성경을 역사 이야기, 도덕 교훈, 종교 규범의 모음으로 읽습니다. 물론 그런 읽기도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것이 성경의 전부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문자에 드러난 이야기들은 겉모습일 뿐이며, 그 안에는 인간의 내면 상태, 신앙의 성장 과정,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깊은 내용이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이 숨겨진 차원을 그는 ‘아르카나’, 곧 ‘비밀’이라고 부릅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의 큰 특징 중 하나는, 성경의 이야기를 과거의 사건으로만 읽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의 천지창조 이야기는 우주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설명하는 과학적 보고서가 아니라, 한 인간이 무질서한 상태에서 질서를 회복하며 새롭게 태어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고 설명합니다. 빛과 어둠의 분리, 물과 땅의 구분, 생명의 점진적 등장 등은 모두 인간 내면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단계를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그때 거기에서 있었던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야 할 일’을 말하고 있다고 이해됩니다.
이 책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중요한 개념은 ‘상응’입니다. 상응이란,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에 존재하는 질서 있는 연결을 뜻합니다. 예를 들어 ‘빛’은 단순한 물리적 빛이 아니라 진리를, ‘물’은 진리를 받아들이는 상태를, ‘땅’은 인간의 마음 상태를 상징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성경의 거의 모든 사물과 사건은 영적인 의미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는 이 상응의 법칙을 통해 성경 전체를 하나의 일관된 구조로 읽어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어렵게 느끼는 이유는, 익숙한 성경 이야기가 전혀 다른 각도에서 해석되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단순한 최초의 남녀가 아니라 인간 내면의 상태를 나타내며, 에덴동산은 지리적 장소가 아니라 사랑과 지혜가 조화를 이루는 영적 상태를 뜻합니다. 뱀은 실제 동물이 아니라 인간 안에 있는 자기중심적 사고를 상징합니다. 이런 해석은 처음에는 낯설고 심지어 거부감을 줄 수도 있지만,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임의적인 해석이 아니라 성경 전체에 일관되게 적용되는 원리라고 주장합니다.
이 책이 단순한 상징 해설서와 다른 점은, 모든 해석이 결국 ‘주님’을 중심으로 모인다는 점입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에 따르면 성경의 모든 내용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주님을 가리킵니다. 주님은 생명의 근원이며, 성경이 살아 있는 이유도 그 안에 주님을 향한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떤 구절이든 주님과의 관계에서 이해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직 문자 차원에 머물러 있는 이해라고 말합니다.
이 책은 또한 인간에 대한 매우 현실적인 통찰을 제공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을 ‘겉 사람’과 ‘속 사람’으로 구분합니다. 겉 사람은 우리가 일상에서 드러내는 생각과 행동의 차원이고, 속 사람은 그 배후에 있는 사랑과 의도의 차원입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는 성경 이야기가 바로 이 속 사람의 변화와 회복을 다루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이 책을 읽다 보면, 성경이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라기보다 ‘나 자신의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많아집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이 책이 신앙을 지식이나 교리로만 다루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을 삶과 분리된 개념으로 보지 않습니다. 참된 신앙은 사랑과 행동으로 드러나며, 인간의 삶 전체를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에서 반복해서 강조되는 것은, 진리는 반드시 선과 결합되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살아 있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이 때문에 이 책은 이론서이면서 동시에 매우 실천적인 책이기도 합니다.
일반 독자에게 이 책이 주는 가장 큰 의미는, 성경을 읽는 새로운 눈을 열어 준다는 데 있습니다. 이전에는 이해되지 않던 본문이 살아 움직이며, 반복되는 이야기와 긴 족보, 복잡한 율법들조차도 의미를 갖게 됩니다. 성경이 갑자기 ‘지루한 책’에서 ‘끝없이 깊어지는 책’으로 바뀌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물론 이 과정은 쉽지 않으며, 단번에 이해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성경이 원래 그런 책이라고 말합니다. 천국과 연결된 책이기에, 한 번에 다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는 독자에게 어떤 믿음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이 책은 ‘이렇게 믿어라’라고 명령하기보다, ‘이렇게 볼 수도 있다’는 길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는 언제나 주님과의 더 깊은 만남, 그리고 삶의 변화가 놓여 있습니다.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새로운 교리를 배우는 것이라기보다, 성경을 통해 자기 자신과 삶, 그리고 하나님을 다시 바라보는 여정을 시작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 아래 링크는 그 첫 번째 글인 AC.1번 글로 이어지는, 즉 AC를 시작하는 링크입니다.라틴어 원본 대신 Potts 영역(1888-1902)으로 대신하였으며, 각 글 하단에 이해를 돕기 위해 원본에는 없는 해설들을 제가 달아 나가고 있으니, 읽어 보시고 도움들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 혹시 특정 번호의 글을 검색하실 때에는 글 목록 우측 상단 돋보기를 클릭, 왼쪽 목록에서 '태그'를 선택하신 후, 'AC 3' 형식으로 찾으시거나 '제목'에서 특정 키워드로 찾으시면 되겠습니다. 'AC 3'처럼 가운데 한 칸 띄는 이유는 이 검색기가 특수 문자 사용을 불허하기 때문이며, 그래서 처음부터 태그 입력을 저런 형태로 해놓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