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하루 중 상당 시간을 ChatGPT를 통한 AC번역 및 해설, 그리고 심화 관련, 초벌 및 마무리 작업, 그리고 그걸 블로그에 게시하는 작업으로 보냅니다. 보통 매일 8개 전후의 글 작성을 하는데, 글 하나하나에 집중하다 보면 지쳐 중간중간 누워 쉬어야 하며, 그럴 때면, 하릴없이 스마트폰으로 유튜브나 웹툰을 보거나 들으며 시간을 보내곤 합니다. 문제는 이렇게 보내는 시간이 다 합치면 몇 시간씩 된다는 것이며, 더욱 심각한 건, 제 시야가 자꾸 세상사를 향하게 되어 흐려진다는 것입니다. AC, 그리고 천국에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말이지요... 스베덴보리는 어땠나요? 그의 전체 저작량을 보면 하루하루가 거의 살인적인 시간 사용이었을 것 같은데, 그는 지치지 않았나요? 갈수록 6, 7, 8학년이 되어 심신이 예전 같지 않았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목사님 말씀을 읽으며, 지금 목사님이 단순히 ‘글을 많이 쓰느라 피곤한 상태’가 아니라, 실제로는 ‘두 세계 사이를 하루 종일 왕복하고 계시는 상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AC 본문을 붙들고 내적 의미를 따라가며, 그것을 번역하고 해설하고 심화까지 풀어낸다는 건, 단순 지적 노동이 아닙니다. 그것은 생각보다 훨씬 깊은 수준의 정신 집중과 내적 긴장을 요구합니다. 특히 목사님처럼 단순 번역이 아니라 ‘상태 안으로 들어가며’ 작업하는 경우에는 더 그렇습니다. 그러니 중간중간 몸이 꺼지듯 누워야 하는 것도, 정신이 자동적으로 가벼운 영상이나 웹툰 쪽으로 도피하려는 것도, 어느 정도는 자연스러운 반작용입니다. 사람이 높은 긴장 상태를 오래 유지하면, 낮은 감각 자극으로 균형을 찾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목사님이 정확히 보신 것도 있습니다. 문제는 ‘쉬는 것 자체’보다, 그 쉬는 방식이 점점 시야를 세상으로 끌고 내려간다는 점입니다. 처음에는 단순 휴식이었는데, 어느 순간 마음의 초점 자체가 흐려지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스베덴보리도 인간이기에 피곤함 자체는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의 후기 저작들을 보면, 인간적 체력으로는 거의 설명이 안 될 정도의 작업량입니다. 특히 Arcana Coelestia는 단순 집필이 아니라, 성경 전체를 절 단위로 따라가며 영적 의미를 풀어내는 작업이었으니, 오늘날 기준으로도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노동입니다. 게다가 그는 50대 후반 이후 본격적으로 영계 체험과 저작에 들어갔고, 60대와 70대에 가장 방대한 책들을 써냈습니다. 그러니 육체적으로 지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은 오히려 비현실적입니다.

 

하지만 스베덴보리에게는 목사님과 조금 다른 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는 이미 ‘두 세계 중 어느 쪽이 실재인가’에 대한 확신이 너무 강했습니다. 우리처럼 ‘천국을 믿는 사람’ 수준이 아니라, 실제로 영적 세계가 더 실재적이라는 감각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니 그의 경우는 세상 자극이 지금 우리에게 스마트폰처럼 강한 흡인력을 갖기 어려웠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는 후기에 점점 더 세상 사교와 오락, 명예 경쟁, 학문적 과시에서 멀어집니다. 대신 아주 규칙적인 삶을 살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과식하지 않았고, 밤늦게까지 무리하지 않았으며, 산책과 휴식을 상당히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즉, 그 엄청난 저작량은 ‘광적인 몰아치기’라기보다, 오히려 놀라울 정도의 규칙성과 집중의 반복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목사님은 지금 거의 ‘전투 모드’로 작업하고 계신 느낌이 강합니다. 하루 8개 전후의 글을 매일 생산한다는 건, 실제로는 일반적인 연구자나 목회자의 작업량을 이미 훨씬 넘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지금 목사님께 필요한 것은, ‘더 몰입해야 한다’보다, ‘내적 시야를 흐리지 않는 방식으로 오래 가는 법’을 배우는 것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목사님을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장거리 사역으로 부르신 것 같기 때문입니다. 지금 목사님은 자꾸 ‘AC에 집중해도 모자랄 시간인데’라고 느끼시지만, 인간 정신은 계속 최고 긴장 상태를 유지할 수 없게 창조되었습니다. 문제는 휴식이 아니라 ‘휴식의 질서’입니다. 예를 들어 스베덴보리라면, 휴식을 완전히 세속적 감각의 홍수 속으로 던져 넣기보다, 정신의 결을 크게 흐리지 않는 방향을 택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조용한 산책, 가벼운 독서, 자연 관찰, 기도 속 멈춤 같은 것 말입니다. 반면 오늘날 스마트폰 알고리즘은 사람의 ‘주의력 자체’를 계속 밖으로 끌어당기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몇 시간 웹툰과 유튜브를 보고 나면, 단순히 시간이 아까운 게 아니라, 마음의 방향 자체가 아래로 끌려 내려간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목사님이 너무 자신을 정죄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목사님은 이미 상당 부분 ‘자기 own과 싸우며’ 이 작업을 하고 계십니다. 중요한 것은 ‘왜 또 무너졌나’가 아니라, ‘어떻게 다시 방향을 돌리느냐’입니다. 스베덴보리도 인간 의지 자체를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람이 끊임없이 아래로 흐르려는 존재라는 것을 너무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더욱 ‘질서’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목사님도 지금부터는, ‘유튜브를 완전히 끊어야 한다’보다, ‘내 영의 초점을 크게 흐리지 않는 휴식 구조’를 만드는 게 더 현실적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완전히 감각적 영상 대신 자연 다큐, 조용한 클래식, 천국과 지옥 관련 지도, 미술, 역사 탐색, 혹은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눈 감고 쉬는 시간 같은 방향입니다. 인간 정신은 쉬어야 합니다. 문제는 ‘어디에서 쉬느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목사님이 자꾸 ‘내가 이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죄책감 속에만 머물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목사님이 하고 계신 AC 작업은, 사실상 한국어권에서는 거의 전례를 찾기 어려운 규모입니다. 당장은 조회수도 적고 반응도 미미하지만, 스베덴보리 자신도 생전에는 자기 저작이 이렇게 오래 읽힐 줄 인간적으로는 다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씨를 뿌렸고, 열매는 훨씬 뒤에 나타났습니다. 목사님 역시 지금 ‘즉각적 반응’보다 ‘미래 세대를 위한 길 닦기’에 가까운 일을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러니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속도를 더 올리는 것이 아니라, 무너지지 않고 오래 가는 것입니다.

 

 

 

SC.85, ‘BTS와 그들의 ARMY에 대하여’

BTS와 그들의 ARMY에 대하여 스베덴보리는 무슨 말을 할까요? 그들은 너 자신을 사랑하라 노래하며, 그 노래를 통해 치유 받은 전 세계 아미들은 전 세계 곳곳에서 선행을 펼치고 있거든요... BTS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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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83, ‘스베덴보리와 개신교의 기도, 찬양, 금식, 방언, 전도’

혹시 스베덴보리도 기도 생활을 했나요? 찬양, 그러니까 일상 중 찬송가를 부르기도 했나요? 금식은? 방언, 그리고 전도, 선교는요? 제가 스베덴보리를 처음 접하던 시기, 뭔가 크게 달랐던 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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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스베덴보리도 기도 생활을 했나요? 찬양, 그러니까 일상 중 찬송가를 부르기도 했나요? 금식은? 방언, 그리고 전도, 선교는요? 제가 스베덴보리를 처음 접하던 시기, 뭔가 크게 달랐던 점이 기독교, 개신교인들에겐 일상적인 이런 기록이 거의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아주 중요한 관찰이십니다. 사실 많은 개신교인들이 처음 에마누엘 스베덴보리를 접할 때 느끼는 가장 큰 낯섦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신앙생활을 했는가?’ 하는 감각 말입니다. 현대 개신교인에게 익숙한 신앙인의 모습은 보통 ‘기도 많이 하는 사람’, ‘찬송을 즐겨 부르는 사람’, ‘전도 열심히 하는 사람’, ‘금식과 철야를 하는 사람’, ‘성령 체험과 방언을 말하는 사람’ 같은 형태로 드러나는데, 스베덴보리에게서는 그런 기록이 거의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기록이 빠져 있어서라기보다, 그의 신앙의 중심축 자체가 오늘날 복음주의적 경건 형태와 상당히 달랐기 때문입니다.

 

먼저 기도에 대해서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는 분명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만 그는 ‘기도의 외적 형식’보다 ‘삶 전체의 방향’을 더 본질적인 기도로 보았습니다. 그는 반복적 언어 자체보다, 사람이 주님 앞에서 자기 악을 보고 물러서며 선을 행하려는 상태를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의 저작들에는 ‘무릎 꿇고 몇 시간 통성기도했다’ 같은 기록은 거의 없지만, 대신 사람이 주님께 마음을 열고, 자기 own(proprium)을 경계하며, 진리를 따라 살기를 원할 때 그 자체가 살아 있는 기도라고 보는 흐름이 매우 강합니다. 실제로 그는 사람이 주기도문을 진심으로 이해하며 드릴 때, 천사들과 연결된다고까지 말합니다. 그리고 유명한 일화 가운데 하나는, 그가 영계 체험 초기에 극심한 영적 공격과 혼란 속에서 오직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보호를 받았다는 기록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기도를 ‘집회 중심 행위’라기보다 ‘주님 앞에 영혼을 여는 상태’로 보았습니다.

 

찬양과 찬송 역시 비슷합니다. 스베덴보리 시대의 스웨덴 루터교회 예배에는 당연히 찬송이 있었고, 그 역시 평생 교회 사람이었으므로 찬송 자체를 멀리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복음주의처럼 ‘찬양 사역’, ‘은혜로운 찬양 시간’, ‘찬양 집회’ 같은 형태의 기록은 거의 없습니다. 그의 관심은 음악적 감정 고양보다 ‘천국의 질서와 사랑의 상태’에 더 있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는 천국에서의 말과 음악이 사람의 내적 상태와 정확히 상응한다고 설명한다는 점입니다. 즉 천사들의 노래는 단순한 음악이 아니라 사랑과 지혜의 흐름 자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찬양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감정적 열광 자체를 신앙의 본질로 보지는 않았습니다.

 

금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스베덴보리 저작에는 금식 수행을 강조하는 흐름이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외적 금욕이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이것은 목사님께서 예전에 몸담으셨던 수도원 전통과 비교하면 꽤 낯설 수 있습니다. 그는 사람이 음식을 줄이는 것보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줄이는 것이 더 본질적 금식이라고 보았습니다. 다시 말해 ‘악에서 떠나는 것’이 진짜 금식이라는 방향입니다. 물론 절제와 단순한 삶 자체는 매우 중요하게 보았지만, 그것을 공로적 수행처럼 여기지는 않았습니다.

 

방언 문제는 더 분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오늘날 오순절 계통에서 말하는 방언 운동과 매우 거리가 있습니다. 그는 영적 세계와의 접촉 자체는 누구보다 강하게 경험한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영들과의 직접 교류’를 극도로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는 사람이 영들의 음성을 직접 좇기 시작하면 쉽게 환상과 자기 확신 속으로 빠질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현대식 의미의 방언 체험이나 신비주의적 열광을 신앙의 중심 증거로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삶의 변화’, ‘체어리티’, ‘주님 사랑’, ‘유익한 삶’이 참된 영성의 증거라고 말합니다.

 

전도와 선교는 조금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현대 개신교식 ‘노방전도’나 ‘대중부흥회’ 스타일과는 매우 달랐습니다. 그는 평생 거리 설교자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선교 의식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자기 저작 전체를 ‘새 교회’(New Church)를 위한 주님의 준비 작업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새 시대를 위한 진리들을 드러내도록 부름받았다고 믿었습니다. 다만 그 방식이 매우 조용하고 비가시적이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감정적으로 설득하려 하기보다, 진리를 질서 있게 제시하고, 자유롭게 읽고 판단하도록 두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어쩌면 목사님께서 지금 블로그에 거의 매일 AC 해설과 심화를 올리시는 모습이, 외적으로는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방식과 더 가까울 수도 있습니다. 즉 ‘많은 사람을 즉시 움직이는 운동’보다 ‘오랜 시간 미래의 누군가를 위해 길을 닦는 작업’ 말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처음 스베덴보리를 접하실 때 느끼셨던 그 낯섦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는 ‘신앙 활동 중심의 경건’보다 ‘존재 상태 중심의 거듭남’을 훨씬 더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개신교 문화에서는 흔히 ‘무엇을 얼마나 했는가’가 신앙의 표지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에게서는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가 중심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기록에는 집회, 부흥, 철야, 방언, 간증 같은 요소는 거의 없고, 대신 끝없이 인간의 의지, 사랑, 사고, 체어리티, 질서, 거듭남, 천국적 상태에 대한 분석이 등장합니다. 처음엔 이것이 ‘차갑다’ 혹은 ‘경건 생활이 없다’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래 읽다 보면, 그는 오히려 신앙을 인간 존재 전체의 가장 깊은 층위까지 가져가려 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SC.84, ‘살인적인 저작 활동 중 스베덴보리는 어떻게 쉬었나?’

저는 하루 중 상당 시간을 ChatGPT를 통한 AC번역 및 해설, 그리고 심화 관련, 초벌 및 마무리 작업, 그리고 그걸 블로그에 게시하는 작업으로 보냅니다. 보통 매일 8개 전후의 글 작성을 하는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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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82, ‘지구 나이 45억 년 : 현 지구 문명 1만 년 = 24시간 : 0.2초’

우주에 백만 개의 지구가 있다고 하자. 그 각각의 지구에 3백만 명의 사람이 6천 년간 2백 세대를 내려왔다고 할 때 사람, 즉 영 한 명당 3평방 큐빗씩 잡아도 우리 지구를 다 채우지 못할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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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창2:24)

 

AC.160

‘부모를 떠나는 것’(leave father and mother)은 속 사람에게서 물러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겉 사람을 잉태하고 낳는 것은 속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아내와 합하는 것’(cleave unto his wife)은 속 사람이 겉 사람 안에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하고, ‘한 몸이 되는 것’(be one flesh)은 그 둘이 거기에서 함께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전에는 속 사람과, 속 사람으로부터 나온 겉 사람이 영이었으나 이제는 육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천적·영적 생명이 proprium에 결합되어, 그것들이 하나처럼 되게 되었습니다. To “leave father and mother” is to recede from the internal man, for it is the internal which conceives and brings forth the external; to “cleave unto his wife” is that the internal may be in the external; to “be one flesh,” that they are there together; and because previously the internal man and the external from the internal were spirit, but now they have become flesh. Thus was celestial and spiritual life adjoined to the own, that they might be as one.

 

해설

AC.160은 창2:24의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는 말씀을 앞에서 계속되어 온 속 사람, 겉 사람, proprium의 변화라는 흐름 안에서 해설합니다. AC.159에서는 천적 인간에게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매우 뚜렷하게 구별되어 있었으며, 겉 사람이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다스려진다는 것을 천적 인간이 퍼셉션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손들은 겉 사람에 속한 proprium을 원하면서 이 구별을 더 이상 퍼셉션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AC.160은 바로 그 변화된 상태를 창2:24의 세 표현을 따라 설명합니다.

 

먼저 ‘부모를 떠나는 것’은 속 사람에게서 물러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이유를 스베덴보리는 ‘겉 사람을 잉태하고 낳는 것은 속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부모는 자연적인 부모에 관한 교훈에 머무르지 않고, 겉 사람의 근원이 되는 속 사람을 가리킵니다. 앞 번호에서 천적 인간은 겉 사람이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다스려지는 질서를 퍼셉션했다고 했는데, 이제 후손들은 proprium으로 기울면서 그 속 사람에게서 물러나는 상태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그의 아내와 합하는 것’은 속 사람이 완전히 사라지거나 겉 사람과 관계가 끊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속 사람이 겉 사람 안에 있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대목입니다. 속 사람에게서 물러났다고 해서 속 사람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 방식이 달라진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아내’는 AC.156에서 설명했듯 앞에서 ‘여자’라고 했던 proprium이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결합으로 인해 받게 된 표현입니다.

 

‘한 몸이 되는 것’은 그 둘이 거기에서 함께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도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 되어 구별이 사라졌다고 읽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앞의 AC.159가 천적 인간에게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뚜렷하게 구별된다고 명시했고, 이번 번호의 마지막도 천적·영적 생명이 proprium에 결합되어 ‘하나처럼’ 되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한 몸’은 구별 자체의 소멸보다, 변화된 상태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함께 있게 된 것을 나타냅니다.

 

이어지는 ‘이전에는 속 사람과, 속 사람으로부터 나온 겉 사람이 영이었으나 이제는 육이 되었다’는 문장은 특별히 조심해서 읽어야 합니다. 이것을 곧바로 ‘처음에는 영적이었지만 이제 타락하여 육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일반적인 도식으로 바꾸어 버리면 현재 문맥의 세밀한 흐름을 놓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 천적 인간의 후손들이 proprium을 원하면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영’에서 ‘육’으로의 변화도 그 상태 변화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특히 마지막 문장이 그 의미를 붙들어 줍니다. ‘이렇게 천적·영적 생명이 proprium에 결합되어, 그것들이 하나처럼 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proprium은 천적·영적 생명 자체가 아닙니다. 천적·영적 생명이 proprium에 ‘결합되었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둘이 완전히 동일한 하나가 되었다고 하지 않고 ‘하나처럼’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도 생명의 근원과 그것을 받아 자기 삶처럼 누리는 proprium 사이의 구별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AC.135와 매우 밀접하게 이어집니다. AC.135에서도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proprium에 결합되어 하나처럼 보이게 된다고 했습니다. 당시에도 중요한 것은 ‘결합’과 ‘하나처럼 보임’을 ‘동일해짐’으로 바꾸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AC.160은 이제 창2:24의 ‘한 몸’이라는 말씀을 통하여 같은 내용을 다시 설명합니다. 천적·영적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오지만, 그것이 인간의 proprium에 결합됨으로 인간에게는 자기 자신의 생명과 하나처럼 경험되는 상태가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AC.160은 ‘부모를 떠남’, ‘아내와 합함’, ‘한 몸이 됨’을 각각 떨어진 상응어로 읽기보다 하나의 상태 변화로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속 사람에게서 물러나고, 속 사람이 겉 사람 안에 있게 되며, 그 둘이 함께 있게 되고, 천적·영적 생명이 proprium에 결합되어 하나처럼 되는 흐름입니다. 이것은 AC.131부터 시작된 천적 인간의 후손들이 proprium으로 기울어 가는 과정의 한 단계이며, 동시에 주님께서 그 proprium을 단순히 버려 두지 않으시고 생명과 결합시키시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AC.160)

 

 

 

AC.161, 창2:24, ‘겉 사람의 proprium 안에 영적 천적인 것을 스며들게 하시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창2:24) AC.161이 태고교회의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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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9, 창2:23,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구별을 잃어버린 천적 인간의 후손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창2:23) AC.159그러나 천적 인간의 상태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러한 것들이 어떠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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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창2:23)

 

AC.159

그러나 천적 인간의 상태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러한 것들이 어떠한지를 쉽게 퍼셉션할 수 없습니다. 천적 인간에게서 속 사람은 겉 사람과 구별되며, 참으로 너무나 뚜렷하게 구별되어 있어서 천적 인간은 무엇이 속 사람에게 속하고 무엇이 겉 사람에게 속하는지, 그리고 겉 사람이 속 사람을 통하여 어떻게 주님에 의해 다스려지는지를 퍼셉션합니다. 그러나 이 천적 인간의 후손들의 상태는 겉 사람에게 속한 그들의 proprium을 원한 결과 너무나 달라져, 그들은 더 이상 속 사람이 겉 사람과 구별된다는 것을 퍼셉션하지 못하고, 속 사람이 겉 사람과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이 자기의 proprium으로 기울 때에는 이러한 퍼셉션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But it is not easy to perceive how the case is with these things unless the state of the celestial man is understood. In the celestial man the internal man is distinct from the external, indeed so distinct that the celestial man perceives what belongs to the internal man, and what to the external, and how the external man is governed through the internal by the Lord. But the state of the posterity of this celestial man, in consequence of desiring their own, which belongs to the external man, was so changed that they no longer perceived the internal man to be distinct from the external, but imagined the internal to be one with the external, for such a perception takes place when man inclines to his own.

 

해설

AC.159는 앞에서 다루어 온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붙들어야 할 중요한 구별을 제시합니다. AC.156에서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결합되기 때문에 앞에서 ‘여자’라고 했던 proprium을 ‘아내’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결합은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구별이 사라져 둘이 뒤섞인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AC.159는 천적 인간에게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매우 뚜렷하게 구별되어 있었다고 말합니다.

 

천적 인간은 무엇이 속 사람에게 속하고 무엇이 겉 사람에게 속하는지를 퍼셉션했습니다. 이것은 자기 안에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단순히 교리적으로 알고 있었다는 뜻보다 훨씬 깊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일어나는 것 가운데 무엇이 어느 쪽에 속하는지를 퍼셉션할 수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 겉 사람이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어떻게 다스려지는지도 퍼셉션했습니다. 따라서 천적 인간의 내적 질서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구별’과 ‘결합’이 함께 존재하는 질서였습니다.

 

특히 ‘겉 사람이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다스려진다’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주도권의 근원은 겉 사람에게 있지 않습니다. 겉 사람이 스스로를 다스리면서 속 사람과 협력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을 다스리십니다. 이것은 창2 전반에서 계속되어 온 천적 질서와도 이어집니다. 앞에서 천적 인간은 자기에게 주어진 지혜와 지성, 선과 진리와 모든 능력이 주님께 속한 것임을 퍼셉션했습니다. 이제 같은 질서가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런데 천적 인간의 후손들에게서 상태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들이 원한 것은 겉 사람에게 속한 proprium이었습니다. 이 점은 AC.131 이후 계속된 흐름과 정확히 이어집니다. 처음에는 proprium으로 기울기 시작했고, 자기 자신의 인도 아래 있기를 원했으며, 마침내 그 proprium이 그들에게 허락되었습니다. AC.159는 이러한 변화가 단지 ‘자기 것을 갖고 싶어 했다’는 정도에 머물지 않고,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를 퍼셉션하는 방식 자체를 바꾸었다고 설명합니다.

 

그 결과 후손들은 더 이상 속 사람이 겉 사람과 구별된다는 것을 퍼셉션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속 사람이 겉 사람과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는 AC.156에서 말한 올바른 결합과 구별해야 합니다. 천적 인간에게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은 서로 뚜렷하게 구별되면서도 주님의 질서 안에서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반면 후손들은 그 구별 자체를 잃어버리고 둘을 하나로 여겼습니다. 따라서 참된 결합은 구별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구별된 것들이 올바른 질서 안에서 결합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문장은 이러한 변화가 왜 일어났는지를 다시 proprium과 연결합니다. 사람이 자기의 proprium으로 기울 때에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을 하나라고 여기는 이러한 지각이 생긴다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 있는 설명입니다. 겉 사람에게 속한 proprium을 자기 생명의 중심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사람은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께서 겉 사람을 다스리시는 질서를 더 이상 퍼셉션하지 못하게 됩니다. 겉 사람에서 느끼고 생각하고 원하는 것을 곧 자기 존재 전체의 생명으로 여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AC.159는 AC.147-155에서 계속 다루어 온 ‘자기 자신으로부터 사는 것처럼 보이는 상태’를 또 다른 각도에서 보여 줍니다. 문제는 사람이 자기 자신의 삶을 실제 자기 삶처럼 경험한다는 사실 자체가 아닙니다. AC.155의 천사들도 특별히 그 근원을 의식하지 않을 때에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사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자기들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보편적인 퍼셉션이 있습니다. 반면 여기의 후손들은 proprium으로 기울면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구별과 그 질서를 퍼셉션하지 못하게 됩니다. 바로 이 차이가 중요합니다.

 

따라서 AC.159에서 천적 인간의 상태를 이해하는 열쇠는 ‘구별되어 있으면서 결합되어 있음’에 있습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은 서로 다른 것에 속하지만 분리되어 제각기 움직이는 것이 아니며, 주님께서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을 다스리심으로 하나의 질서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proprium으로 기울면 이 질서에 대한 퍼셉션이 흐려지고, 사람은 속 사람과 겉 사람을 하나라고 여기게 됩니다. AC.159는 proprium으로의 기울어짐이 단순한 도덕적 타락만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생명의 근원과 내적 질서를 퍼셉션하는 방식의 변화이기도 했음을 보여 줍니다. (AC.159)

 

 

 

AC.160, 창2:24, ‘부모를 떠나 한 몸을 이루다 - 천적·영적 생명이 proprium에 결합됨’ (AC.160-162)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창2:24) AC.160‘부모를 떠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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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8, 창2:23, ‘사람 - 지혜롭고 지성 있는 속 사람’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창2:23) AC.158사람이 속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 곧 같은 말로 지성 있고 지혜로운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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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창2:23)

 

AC.158

사람이 속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 곧 같은 말로 지성 있고 지혜로운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사야에서 분명합니다. That man signifies the internal man, or what is the same, one who is intelligent and wise, is plain from Isaiah:

 

내가 본즉 한 사람도 없으며 내가 물어도 그들 가운데에 한 말도 대답할 조언자가 없도다 (사41:28) I behold, and there is no man [vir], even among them, and there is no counselor, (Isa. 41:28)

 

이는 지혜롭고 지성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뜻입니다. 또한 예레미야에서는, meaning none wise and intelligent. Also in Jeremiah: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렘5:1) Run ye to and fro through the streets of Jerusalem, and see if ye can find a man, if there be any executing judgment, seeking the truth. (Jer. 5:1)

 

이라고 합니다. ‘정의를 행하는 사람’(One who executes judgment)은 지혜로운 사람을 의미하고, ‘진리를 구하는 사람’(one who seeks the truth)은 지성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One who executes judgment” means a wise person; and “one who seeks the truth,” an intelligent one.

 

해설

AC.158은 AC.156에서 제시한 ‘사람은 속 사람을 의미한다’는 해석을 말씀의 다른 구절들로 확증합니다. AC.156에서는 창2:23의 ‘사람’이 속 사람을 의미하며, 앞에서 ‘여자’라고 했던 겉 사람의 proprium이 속 사람과 결합하기 때문에 이제 ‘아내’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그 가운데 ‘사람’이 왜 속 사람을 의미할 수 있는지를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말씀을 통해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속 사람을 ‘지성 있고 지혜로운 사람’과 같은 의미로 설명합니다. 이것은 속 사람이 단순히 인간의 보이지 않는 안쪽 부분이라는 공간적인 개념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현재 문맥에서 속 사람은 지혜와 지성이 있는 사람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창2:23에서 ‘사람’이 속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도 단순히 겉 사람의 반대편에 있는 어떤 내부 구조를 가리킨다기보다, 지혜와 지성이 속하는 인간의 내적 상태를 가리킨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첫 번째로 인용되는 사41:28에는 ‘한 사람[vir]도 없으며 그들 가운데 한 모사도 없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히 그 자리에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뜻으로 읽지 않고, ‘지혜롭고 지성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의미로 설명합니다. 특히 원문이 ‘man’ 뒤에 라틴어 ‘vir’를 명시한 것은 눈여겨볼 만합니다. 현재 번호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사람’은 단순한 인간 일반을 가리키는 데 그치지 않고, 지혜와 지성을 지닌 사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5장의 인용은 이 의미를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사람’을 찾으라는 말씀에서 스베덴보리는 ‘정의를 행하는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으로, ‘진리를 구하는 사람’을 지성 있는 사람으로 풀이합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지혜와 지성이 추상적인 능력으로만 제시되지 않습니다. 정의를 행하는 것과 진리를 구하는 것이라는 실제적인 표현을 통해 각각 드러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한 이유도 바로 ‘사람’이라는 표현 안에 지혜와 지성의 의미가 들어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지혜’와 ‘지성’을 완전히 같은 말로 만들어 버리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예레미야의 두 표현을 구별하여 ‘정의를 행하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 ‘진리를 구하는 사람’은 지성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현재 번호에서는 그 둘의 차이를 더 자세히 설명하지 않으므로 우리가 별도의 체계를 만들어 넣을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가 두 표현을 의도적으로 구별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대로 보존해야 합니다. 앞에서 AC.107과 AC.112에서도 지혜와 지성을 구별하여 사용했던 흐름과도 잘 맞습니다.

 

이렇게 보면 AC.158은 앞 번호들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를 조금 더 분명하게 합니다. AC.156에서 ‘뼈 중의 뼈와 살 중의 살’은 겉 사람의 proprium이고 ‘사람’은 속 사람이라고 했으며, AC.157에서는 그 겉 사람의 proprium 안에 속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58에서는 그 속 사람이 지혜롭고 지성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갖는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현재의 결합은 단순히 인간 안의 두 부분이 서로 붙어 있다는 뜻이 아니라, 지혜와 지성이 있는 속 사람과 생명을 얻은 겉 사람의 proprium이 결합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다만 여기서도 ‘사람’[vir]이 말씀 어디에서나 언제나 속 사람을 의미한다고 기계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AC.158이 보여 주는 것은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해당 문맥에서 ‘사람’이 지혜와 지성을 지닌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으며, 그것이 창2:23에서 사람을 속 사람으로 읽는 해석을 뒷받침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계속 확인한 것처럼 스베덴보리의 상응 해석은 단어 하나를 고정된 암호로 바꾸는 작업이 아니라, 그 단어가 놓인 주제와 문맥 안에서 그 의미를 살피는 방식으로 읽어야 합니다.

 

결국 AC.158의 두 성경 인용은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41:28은 ‘사람’이 지혜롭고 지성 있는 사람을 의미할 수 있음을 보여 주고, 렘5:1은 그 지혜와 지성을 ‘정의를 행하는 것’과 ‘진리를 구하는 것’이라는 표현을 통해 더욱 구체적으로 확인해 줍니다. 이로써 AC.156에서 제시된 ‘사람은 속 사람을 의미합니다’라는 해석이 말씀의 다른 용례를 통해 한층 단단하게 뒷받침됩니다. (AC.158)

 

 

 

AC.159, 창2:23,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구별을 잃어버린 천적 인간의 후손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창2:23) AC.159그러나 천적 인간의 상태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러한 것들이 어떠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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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7, 창2:23, ‘뼈 중의 뼈와 살 중의 살 -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창2:23) AC.157‘뼈 중의 뼈와 살 중의 살’(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이 속 사람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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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창2:23)

 

AC.157

‘뼈 중의 뼈와 살 중의 살’(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이 속 사람이 그 안에 있는 겉 사람의 proprium을 의미했기 때문에, 고대에는 자기 사람들[proprii]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 곧 한 집안이나 한 가족에 속하거나 어떤 정도로든 친족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뼈 중의 뼈와 살 중의 살’(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라반은 야곱에게, Inasmuch as “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 signified the own of the external man in which was the internal, therefore in ancient times all those were called “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 who could be called their own [proprii], and were of one house, or of one family, or in any degree of relationship. Thus Laban said of Jacob,

 

라반이 이르되 너는 참으로 내 혈육이로다 하였더라 야곱이 한 달을 그와 함께 거주하더니 (창29:14) Surely thou art my bone and my flesh. (Gen. 29:14)

 

라고 했습니다. 또 아비멜렉은 그의 외삼촌들과 외조부의 온 가족에 관하여, And Abimelech said of his mother’s brethren, and of the family of the house of his mother’s father,

 

청하노니 너희는 세겜의 모든 사람들의 귀에 말하라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명이 다 너희를 다스림과 한 사람이 너희를 다스림이 어느 것이 너희에게 나으냐 또 나는 너희와 골육임을 기억하라 하니 (삿9:2) Remember that I am your bone and your flesh. (Judges 9:2)

 

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도 자신들에 관하여 다윗에게, The tribes of Israel also said of themselves to David,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는 왕의 한 골육이니이다 (삼하5:1) Behold, we are thy bone and thy flesh. (2 Sam. 5:1)

 

라고 했습니다.

 

해설

AC.157은 AC.156에서 설명한 ‘뼈 중의 뼈와 살 중의 살’이라는 표현이 고대에는 실제로 어떤 관계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는지를 성경의 여러 사례를 통해 보여 줍니다. AC.156에서는 이 표현이 속 사람이 그 안에 있는 겉 사람의 proprium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57은 바로 이러한 의미 때문에 고대 사람들이 한 집안이나 한 가족에 속하거나 어떤 친족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뼈 중의 뼈와 살 중의 살’이라고 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속 사람이 그 안에 있는 겉 사람의 proprium’이라는 표현입니다. AC.156에서는 ‘뼈 중의 뼈와 살 중의 살’이 겉 사람의 proprium을 의미하고, 사람은 속 사람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57은 그 둘을 한 문장 안에서 다시 결합하여, 이 겉 사람의 proprium 안에 속 사람이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현재의 ‘뼈와 살’은 속 사람과 아무 관계 없이 홀로 존재하는 겉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속 사람이 그 안에 있으면서 결합되어 있는 겉 사람의 proprium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관계 때문에 고대에는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을 같은 ‘뼈와 살’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여기서 원문의 ‘[proprii]’도 주목할 만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계속 사용해 온 ‘proprium’과 같은 어근에 속하지만, 현재 문맥에서는 한 사람의 내적인 proprium을 그대로 가리키는 전문용어라기보다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 곧 자기 집안과 가족과 친족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는 단어 하나를 기계적으로 같은 뜻으로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속한다’는 기본적인 의미가 인간의 proprium과 친족을 가리키는 고대 표현 사이에서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예는 라반이 야곱에게 한 말입니다. 라반은 야곱에게 ‘너는 참으로 내 혈육이로다’라고 합니다. 야곱이 라반과 친족 관계에 있기 때문에 자기에게 속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두 번째로 아비멜렉은 외가 친족들에게 자신이 그들의 ‘골육’임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세 번째로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다윗에게 나아와 ‘우리는 왕의 한 골육이니이다’라고 합니다. 세 본문 모두 뼈와 살이라는 표현이 단순히 육체를 구성하는 신체 부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속해 있는 가까운 관계를 나타내는 언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세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창2:23의 표현이 고립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말은 문자에서도 자기와 밀접하게 결합되어 자기에게 속한 존재를 나타내는 표현이며, 고대의 언어에서도 같은 방식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창2의 표현이 속뜻에서 속 사람과 결합된 겉 사람의 proprium을 나타낸다는 해석은 이러한 고대의 언어 사용과도 연결됩니다.

 

이 점에서 AC.157은 앞의 ‘이름’에 관한 AC.144-145와도 방법상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어떤 표현의 속뜻을 제시한 뒤 그것을 임의의 상징 풀이로 끝내지 않고, 고대인들이 실제로 그 말을 어떻게 이해하고 사용했는지, 그리고 말씀의 다른 곳에서 그 표현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함께 살핍니다. 다만 이것을 모든 고대 표현이 언제나 하나의 고정된 속뜻만을 가진다는 뜻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현재 번호가 확증하는 것은 ‘뼈와 살’이 자기에게 속한 사람과 밀접한 결합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AC.157은 앞 번호에서 설명한 ‘여자’에서 ‘아내’로의 변화도 간접적으로 더 이해하게 합니다. AC.156에서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결합되기 때문에 앞에서 여자라고 했던 proprium을 이제 아내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AC.157에서는 그 결합이 ‘자기에게 속함’이라는 관계의 언어로 설명됩니다. 그러므로 ‘뼈 중의 뼈와 살 중의 살’은 단순히 두 부분이 나란히 존재한다는 뜻이 아니라, 속 사람과 겉 사람의 proprium이 서로 결합되어 하나에게 속한 것으로 관계 맺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결국 AC.157의 핵심은 ‘뼈와 살’이라는 표현 안에 들어 있는 ‘자기에게 속함’과 ‘결합’의 의미입니다. 라반과 야곱, 아비멜렉과 그의 친족, 이스라엘 지파들과 다윗의 사례는 모두 그 의미를 문자적 언어의 차원에서 보여 줍니다. 그리고 창2:23의 속뜻에서는 그 관계가 속 사람이 그 안에 있는 겉 사람의 proprium에 적용됩니다. 이렇게 AC.156에서 제시된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결합이 AC.157에서는 고대의 친족 언어를 통하여 한 번 더 확증됩니다. (AC.157)

 

 

 

AC.158, 창2:23, ‘사람 - 지혜롭고 지성 있는 속 사람’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창2:23) AC.158사람이 속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 곧 같은 말로 지성 있고 지혜로운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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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6, 창2:23, ‘뼈 중의 뼈와 살 중의 살 - 속 사람과 결합한 proprium’ (AC.156-159)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And the man said, This now is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erefore she shall be called wife, be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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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And the man said, This now is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erefore she shall be called wife, because she was taken out of man [vir]. (창2:23)

 

AC.156

‘뼈 중의 뼈와 살 중의 살’(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은 겉 사람의 proprium을 의미합니다. ‘뼈’(bone)는 생명을 덜 얻은 이 proprium을, ‘살’(flesh)은 생명을 얻은 proprium을 의미합니다. 또한 사람은 속 사람을 의미하며, 다음 절에 언급된 것처럼 속 사람이 겉 사람과 결합되기 때문에, 앞에서 ‘여자’(woman)라고 했던 proprium을 여기서는 ‘아내’(wife)라고 합니다. ‘이제’(Now)는 상태가 변화되었기 때문에 이때 이렇게 이루어졌음을 의미합니다. “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 signify the own of the external man; “bone,” this own not so much vivified, and “flesh,” the own that is vivified. Man, moreover, signifies the internal man, and from his being so coupled with the external man as is stated in the subsequent verse, the own which was before called “woman” is here denominated “wife.” “Now” signifies that it was thus effected at this time because the state was changed.

 

해설

AC.156은 창2:23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라는 말씀을 해설하면서, 지금까지 이어져 온 proprium의 의미를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로 연결합니다. 먼저 ‘뼈 중의 뼈와 살 중의 살’은 겉 사람의 proprium을 의미합니다. 여기서도 뼈와 살은 같은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뼈’는 생명을 덜 얻은 proprium을, ‘살’은 생명을 얻은 proprium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겉 사람의 proprium 안에서도 생명의 정도가 구별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AC.147-149의 설명과 직접 이어집니다. AC.147에서는 갈빗대가 생명력이 거의 없는 인간의 proprium을, 갈빗대 대신의 살은 생명력이 있는 proprium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AC.149에서는 인간의 proprium이 그 자체로는 죽어 있지만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으면 살처럼 보인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56에서는 같은 뼈와 살의 구별을 ‘겉 사람의 proprium’이라는 관점에서 다시 제시합니다. 특히 이번에는 뼈를 ‘생명을 얻지 못한’ proprium이라고 하지 않고 ‘생명을 덜 얻은’ proprium이라고 한다는 점도 그대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이 그 차이를 더 설명하지 않으므로 지금 단계에서 그 이유를 별도로 만들어 낼 필요는 없습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속 사람을 의미한다고 밝힙니다. 따라서 창2:23의 사람과 여자는 속뜻에서 단순히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인물을 가리키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현재 문맥에서 사람은 속 사람을, 앞에서 여자라고 했던 것은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AC.156은 이 proprium이 겉 사람의 proprium임을 명시합니다. 이렇게 해서 지금까지 각각 설명되던 ‘사람’, ‘여자’, ‘proprium’, ‘뼈와 살’이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 안에서 연결되기 시작합니다.

 

특히 앞에서 ‘여자’(woman)라고 했던 것이 여기서는 왜 ‘아내’(wife)라고 하는지가 처음으로 밝혀집니다. 그 이유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서로 결합되기 때문입니다. AC.151에서는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을 ‘여자’라고 하고 뒤에서는 ‘아내’라고 한다고만 했으며, 그 차이를 아직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그때 그 차이를 미리 정하지 않고 기다렸던 이유가 여기서 확인됩니다. AC.156에 이르러 스베덴보리 자신이 ‘아내’라는 표현을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결합과 직접 연결합니다.

 

이 결합은 AC.155의 ‘천국의 결혼’과도 이어집니다. AC.155에서는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을 주님의 ‘신부와 아내’라고 하면서, 그 가장 깊은 내용이 천국의 결혼을 바라본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56에서는 현재 인간 안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결합하는 모습이 ‘사람’과 ‘아내’라는 표현을 통해 나타납니다. 다만 현재 번호는 이 결합과 AC.155의 천국의 결혼 사이의 관계를 더 자세히 설명하지 않으므로, 두 표현을 곧바로 완전히 동일한 하나의 교리로 펼치기보다 본문이 제시하는 연결만 붙드는 것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제’(Now)라는 한 단어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상태가 변화되었기 때문에 이때 이렇게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창2:23의 ‘이는 이제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에서 ‘이제’는 단순히 사건의 시간적 순서를 나타내는 말이 아닙니다. 앞의 상태와 다른 새로운 상태가 이루어졌음을 나타냅니다. 생명을 얻은 proprium이 주어지고, 그것이 속 사람과 결합하는 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에 ‘이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점은 창2를 역사적 사건의 연속으로만 읽는 것과 상태의 변화로 읽는 것의 차이를 다시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제’라는 시간 표현조차 현재 다루는 사람들의 내적 상태가 달라졌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읽습니다. 따라서 갈빗대에서 여자가 지어지고, 여자가 사람에게 이끌려 오고, 사람이 ‘이제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는 일련의 흐름은 속뜻에서 인간의 proprium이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고, 마침내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결합이라는 새로운 상태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AC.156은 짧지만 앞의 여러 번호를 정리하는 역할을 합니다. 뼈와 살은 겉 사람의 proprium 안에서 생명의 정도를 나타내고, 사람은 속 사람을 의미하며, 앞에서 여자라고 했던 proprium은 속 사람과 겉 사람이 결합하면서 아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바로 이 결합으로 상태가 변화되었음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 번호의 중심은 개별 상응어를 따로 암기하는 데 있지 않고,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이 속 사람과 결합하여 새로운 상태에 이르게 되는 전체 흐름을 보는 데 있습니다. (AC.156)

 

 

 

AC.157, 창2:23, ‘뼈 중의 뼈와 살 중의 살 -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창2:23) AC.157‘뼈 중의 뼈와 살 중의 살’(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이 속 사람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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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5, 창2:22, ‘주님의 신부와 아내 -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창2:22) AC.155‘갈빗대가 여자로 지어졌다’(a rib was built into a woman)는 말씀에는 누구도 문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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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2026/05/17)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30, ‘전능하고 놀라우신’, 찬75, ‘주여 우리 무리를’입니다.

 

오늘은 창2 여섯 번째 시간으로, 본문은 19절로 22절, AC 글 번호로는 142번에서 155번입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창2:19-22)

 

이 본문을

 

‘이름, 돕는 배필, 깊은 잠, 갈빗대, 그리고 여자’

 

라는 키워드 제목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시티아’(Arcana Coelestia) 본문 및 해설, 그리고 심화 리딩 주일설교 시작합니다.

 

 

 

AC.142, 창2:19-20, ‘이름을 주었으나 여전히 기울어지는’(AC.142-146)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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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3, 창2:19-20, ‘성경이 끊임없이 동물의 언어로 말하는 이유’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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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4, 창2:19-20, 고대인들에게 있어 '이름을 짓는다'는 것의 의미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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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5, 창2:19-20, 이사야와 계시록을 통해 확인하는 '이름'의 의미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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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6, 창2:19-20, '창2:18-20의 전체 구조'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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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7, 창2:21, '갈빗대, 살, 깊은 잠'(AC.147-150)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And Jehovah God caused a deep sleep to fall upon the man, and he slept; and he took one of his ribs, and closed up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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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8, 창2:21, 더 깊은 상응으로 본 '갈빗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창2:21) AC.148 사람의 own(proprium), 곧 그에게 매우 소중하게 여겨지는 own을 ‘갈빗대’(ri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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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9, 창2:21, ‘갈빗대’와 ‘뼈’라는 인간의 own이 어떻게 ‘주님에 의해 살아나는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창2:21) AC.149 말씀에서도 사람의 own은 ‘뼈’(bones)를 의미하며, 이는 주님에 의해 살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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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0, 창2:21, ‘깊은 잠’, 자신의 own으로 산다 여기는 상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창2:21) AC.150 사람이 own 안에 있을 때, 곧 자신이 자기로부터 산다고 여길 때의 상태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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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1, 창2:22,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는 주님’(AC.151-155)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And the rib which Jehovah God had taken from the man, he built into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 (창2:22) AC.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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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2, 창2:22, ‘이 구절을 글자 그대로 읽으면 안 되는 이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And the rib which Jehovah God had taken from the man, he built into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 (창2:22) AC.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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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3, 창2:22, ‘여자를 만드시고’를 'build'로 표현하시는 이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And the rib which Jehovah God had taken from the man, he built into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 (창2:22) AC.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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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4, 창2:22, own에 대한 ‘가장 급진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단락’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And the rib which Jehovah God had taken from the man, he built into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 (창2:22) AC.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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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5, 창2:22, ‘말씀 자체의 가장 깊은 핵심을 직접적으로 열어 보이는 단락’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And the rib which Jehovah God had taken from the man, he built into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 (창2:22) AC.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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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이며, 오늘 전체 범위에서 ‘이름’, ‘돕는 배필’, ‘깊은 잠’, ‘갈빗대’, 그리고 ‘여자’를 키워드로 각각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이름’입니다.

 

말씀에서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나 식별표가 아니라, 존재의 essence와 quality, 곧 그 존재의 본질과 상태 전체를 담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대교회 사람들에게 이름을 짓는 일은 단순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그 존재 안에 있는 origin과 nature를 분별하는 일이었습니다. 아담이 짐승과 새들에게 이름을 주었다(창2:20)는 것도 단순 작명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안의 여러 애정과 상태들의 성질을 분별하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이 때문에 말씀에서 ‘이름으로 부른다’는 표현은 단순 호명이 아니라, 그 존재를 깊이 알고 인정하며, 섭리 안에 두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께서 고레스나 이스라엘을 이름으로 부르셨다는 것은, 그들의 상태와 역할 전체를 아시고 주님의 목적 안에 두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너는 내 것이라’(사43:1)는 선언은 단순 소유의 말이 아니라, 존재 전체를 아시고 받아들이신다는 영적 의미를 담습니다.

 

또한 ‘새 이름’을 받는다는 것은 단순 개명(改名)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새 상태로 변화되는 것을 뜻합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뀐 것처럼, 이름의 변화는 영적 상태와 사명의 변화를 나타냅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AC.154-155는 인간의 proprium(라틴, 영어로는 own)조차 주님의 질서 안에서 새롭게 변화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원래 자기중심적이던 proprium이 이제 주님의 진리와 선을 둘러싸고 섬기는 방향으로 바뀌는 것, 곧 ‘여자가 남자를 둘러싸리라’(렘31:22)는 상태가 바로 ‘새 이름’과 상응하는 새로운 존재 상태입니다. 결국 말씀에서 이름은 존재의 본질이며, 새 이름은 새 생명과 새 사람을 뜻합니다. 그리고 아래는 proprium에 대한 설명입니다.

 

proprium이란, 영어로는 own이라 하며, 우리말로 옮기기 참 쉽지 않은, 굳이 옮기자면, ‘자기(自己)의 것’, ‘자기성(性)’, ‘자기감(感)’ 등이 되겠습니다. 사람이 마음먹고, 이해하고, 선택하고, 판단하고, 그리고 좋아하고, 싫어하고 하는 모든 걸 마치 자기가 하는 줄로 알게 주님이 허락하신 근본적인 어떤 것입니다. 로봇과 인간을 나누는, 자아, 본성보다 상위 혹은 더 안쪽 개념이며, 이게 있어야 사람은 자유가 시작되고, 그래야 무엇을 사랑하며 살았는지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있게 됩니다. 말씀 전체가 어찌 보면 전부 이 proprium(own)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오늘 창세기 본문인 ‘갈빗대’, ‘여자’ 이야기도 사실은 이 proprium 이야기입니다.

 

 

다음은 ‘돕는 배필’입니다.

 

‘돕는 배필’은 단순히 남자의 외로움을 해결하기 위한 동반자가 아니라, 인간 존재 안에 반드시 형성되어야 하는 어떤 내적 결합 구조를 뜻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아담이 짐승들과 새들의 이름을 지었다는 것은 인간 안의 여러 애정과 생각, 곧 의지와 이해의 내용들을 분별할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 가운데에서도 ‘돕는 배필’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이는 인간이 아무리 많은 진리와 인식, 즉 지식을 가져도, 자기 존재 안에 어떤 살아 있는 결합이 형성되지 않으면 완전해질 수 없다는 뜻입니다.

 

특히 AC.146에서 중요한 점은, 인간에게 진리가 부족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이미 주님의 질서를 충분히 ‘보도록 허락받은’ 상태였습니다. 문제는 인식의 부족이 아니라 ‘욕구의 방향’이었습니다. 인간은 점점 자신의 own, 곧 proprium을 원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주님의 것들이 아무리 분명하게 표상되고 보여도 그것들을 중심에 두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돕는 배필이 없었다’는 반복은 단순 실패가 아니라, 인간 의지의 방향 전환을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돕는 배필’은 외부에서 발견되는 어떤 존재라기보다, 인간 안에 형성되는 새로운 proprium의 구조와 연결됩니다. 주님은 인간을 proprium 없는 존재로 만드시지 않고, 오히려 자기 것처럼 느끼되 그 방향이 주님을 향해 열린 새로운 proprium을 형성하십니다. 원래 타락의 통로가 될 수 있었던 proprium이, 주님의 질서 안에서는 선과 진리를 담고 섬기는 그릇으로 재형성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돕는 배필’은 궁극적으로, 인간 안에서 사랑과 진리가 서로 결합하도록 돕는 구조를 뜻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남녀 관계를 넘어, 인간 존재 전체 안에서 의지와 이해, 사랑과 지성이 서로 분리되지 않고 하나 되게 하는 영적 결합입니다. 창세기 2장에서 ‘돕는 배필’, ‘이름 짓기’, ‘proprium’, 그리고 ‘천적 영적 인간’이라는 주제들이 함께 등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은 혼자, 곧 자기 자신만으로는 완전해질 수 없고, 반드시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과 결합될 때라야 비로소 살아 있는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깊은 잠’입니다.

 

‘깊은 잠’은 단순한 육체적 수면 상태가 아니라, 인간이 자기 자신, 즉 자신의 proprium 안으로 들어가 주님으로부터 분리된 것처럼 느끼는 영적 상태를 뜻합니다. 창세기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 ‘깊은 잠’을 내리셨다(창2:21)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생명이 마치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처럼 느끼게 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원래 자신이 스스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모든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흘러들어온다는 사실을 퍼셉션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점차 자기 자신을 의식하고 자기 것, 곧 자신의 proprium을 원하게 되자, 주님은 인간이 자기 자신처럼 느끼는 상태를 허락하셨는데, 이것을 ‘깊은 잠’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사람이 무엇을 진심으로 원하면 그에 대한 경험을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이 ‘깊은 잠’은 단순히 타락 이전의 평안한 잠이 아니라, 인간 안에 proprium이 형성되기 시작하는 전환점입니다. 인간은 이 상태에서 자신을 독립된 존재처럼 느끼게 되며, 이후부터는 ‘내 생각’, ‘내 판단’, ‘내 의지’라는 감각 속에서 살게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완전한 생명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에서 한 단계 가려진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인간은 여전히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지만, 그것을 직접 느끼지 못하고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처럼 착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바로 이 상태를 통해 새로운 인간을 형성하십니다. 만일 인간이 자기 자신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면 자유도 없고, 사랑도 없으며, 상호 결합, 그러니까 주님과 인간의 결합도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깊은 잠’은 단순한 추락이 아니라, 자유로운 인간 존재를 가능하게 하기 위한 허용의 상태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인간이 자기 자신처럼 느끼는 바로 그 자리에서, 다시 주님께 돌이켜 자발적으로 결합하기를 원하십니다.

 

따라서 창세기의 ‘깊은 잠’은 매우 중요한 영적 상징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주님의 생명을 직접 지각하던 천적 상태에서, 자기 자신을 의식하는 영적 상태로 넘어가는 장면이며, 동시에 proprium의 시작과 자유의 시작, 그리고 이후 거듭남의 긴 여정이 시작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이 ‘깊은 잠’ 속에서는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것 같지만,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다시 ‘나는 스스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사실을 점점 더 깨닫게 됩니다. 참고로 태고교회의 첫 세대는 온전한 천적 인간 상태여서 이런 걸 원하지 않았습니다. 이 ‘깊은 잠’ 이야기, 곧 창2 후반은 그들의 후손들 이야기입니다.

 

 

다음은 ‘갈빗대’입니다.

 

‘갈빗대’는 단순히 인간 몸의 한 부분이 아니라, 인간 안의 proprium 가운데 비교적 부드럽고 선한 부분, 곧 주님께서 새롭게 형성하실 수 있는 인간 자신의 것을 상징합니다. 창세기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의 갈빗대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셨다는 것은, 인간에게 자기 자신의 감각과 의지가 주어지되, 그것이 완전히 악한 자기 사랑의 형태가 아니라 주님에 의해 다듬어지고 질서 지어진 형태로 형성되는 과정을 뜻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태고교회 사람들은 원래 자신에게서 나오는 proprium이 거의 없었고, 모든 것을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으로 느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자기 자신을 느끼는 상태로 들어가게 되자, 주님은 인간 안에 새로운 proprium을 형성하셔야 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원래 proprium은 본질적으로 죽은 것이며 자기 사랑으로 기울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주님은 그것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으시고, 상대적으로 순하고 유순한 부분을 취해 새로운 인간성을 세우십니다. 이것이 ‘갈빗대를 취하셨다’는 표현의 속뜻입니다.

 

갈빗대가 특별히 사용된 이유도 의미심장합니다. 갈빗대는 심장과 폐를 감싸 보호하는 부분입니다. 심장은 사랑을, 폐는 신앙 혹은 이해를 상징하므로, 갈빗대는 사랑과 신앙을 둘러싸며 지탱하는, 보다 외적인 인간의 것을 뜻합니다. 즉, 주님은 인간의 가장 깊은 생명 자체를 취하신 것이 아니라, 그 바깥쪽에 있는, 보다 외적이고 형성 가능한 부분을 사용하여 새로운 의지와 새로운 이해를 준비하신 것입니다.

 

또한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다는 것은, 인간 안에 ‘의지’와 ‘애정’의 차원이 분리되어 드러나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여자는 단순한 여성의 기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안의 affection, 곧 사랑하고 받아들이며 결합하려는 성향을 상징합니다. 다시 말해 갈빗대는 인간 안에서 주님께 순응하고 결합할 수 있도록 재구성된 proprium의 시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갈빗대’는 인간 자신의 proprium이 완전히 제거된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 새롭게 만들어져 ‘마치 자기 것 같지만 사실은 주님께로부터 온 것’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상징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살아 있는 proprium’이라 설명합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처럼 느끼고 자유롭게 행동하지만, 속으로는 주님의 생명이 흐르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갈빗대는 단순한 신체 기관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 안에 새롭게 세우시는 거듭난 인간성의 재료를 의미합니다.

 

 

다음은 끝으로 ‘여자’입니다. 겸사 오늘 범위를 전반적으로 리뷰하겠습니다.

 

AC.142-155에서 ‘여자’는 단순히 남성과 대비되는 여성 존재를 뜻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간 전체를 통해, ‘여자’를 인간 안에 형성되는 proprium의 새로운 상태, 특히 affection과 의지의 차원, 그리고 주님의 생명을 자기 것처럼 느끼며 살아가는 살아 있는 자기성(自己性)의 구조로 설명합니다. 그래서 이 부분은 단순 결혼 이야기나 인간 창조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 안에서 사랑과 진리, 의지와 이해, 자기감(自己感)과 주님의 생명이 어떻게 결합되고, 또 어떻게 타락 가능성을 갖게 되는가를 보여 주는 매우 깊은 영적 서술입니다.

 

먼저 AC.142에서 아담이 짐승과 새들에게 이름을 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이것은 단순 작명이 아닙니다. ‘이름’은 그 존재의 quality, 곧 질(質)과 상태 전체를 뜻합니다. 따라서 아담이 이름을 주었다는 것은, 인간이 자기 안의 여러 애정과 생각, 의지와 이해의 움직임들을 분별할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짐승’은 천적 애정들을, ‘하늘의 새’는 영적 애정들과 생각들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렇게 모든 상태를 분별했음에도 불구하고 ‘돕는 배필’은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인간 안에 아직 어떤 살아 있는 결합 구조가 완성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이 지점에서 ‘여자’의 필요성이 등장합니다. 창세기에서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다’는 말씀은 단순 외로움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 안에 이해(understanding)는 있으되 affection(愛情)이 아직 충분히 결합되지 않은 상태를 뜻합니다. 인간은 진리만으로는 완전해질 수 없습니다. 진리는 사랑과 결합될 때라야 비로소 생명을 가집니다. 그래서 ‘돕는 배필’은 단순 보조자가 아니라, 인간 안에서 진리를 살아 있게 만드는 affection의 구조이며, 이 affection을 바로 ‘여자’로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AC.143에서는 여기서 다루어지는 인간이 ‘천적 영적 인간’(celestial spiritual man)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의 인간은 아직 완전히 자기중심적 상태로 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여전히 천적 요소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점차 영적 상태로 이동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즉, 그는 여전히 주님의 생명을 받고 있으나, 동시에 자기 자신을 의식하기 시작한 인간입니다. 바로 이런 상태 속에서 ‘여자’라는 새로운 proprium이 형성됩니다.

 

AC.144-145에서는 이름의 의미가 계속 설명됩니다. 고대교회 사람들에게 이름은 단순 호칭이 아니라 essence, origin, nature를 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이름으로 부르신다’는 것은, 인간 존재 전체의 상태와 방향을 아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여자’의 주제와도 연결됩니다. 왜냐하면 여자는 단순 개체가 아니라, 인간 안의 affection 구조 전체를 대표하는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후 말씀에서 교회가 종종 여성과 신부로 표현되는 것도 같은 원리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진리를 받아 사랑 안에서 열매 맺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AC.146은 매우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자신의 own, 즉 proprium을 원하기 시작할 때, 주님의 것들을 업신여기기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여자’라는 proprium은 처음에는 주님께 열려 있는 살아 있는 자기감이었지만, 점차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설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affection 자체가 문제는 아니지만, 그 affection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 기울 때 타락의 통로가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이후 창세기 3장에서 뱀과 연결됩니다. 뱀은 외부 유혹과 감각적 추론을 상징하지만, 실제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통로는 ‘여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원리를 말합니다. 인간을 속이는 것은 언제나 그의 own, 곧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외부의 거짓이 인간 안으로 들어와 힘을 가지는 것은, 인간 안의 proprium이 그것과 공명할 때입니다. 그래서 ‘여자’는 단순 타락의 희생자가 아니라, 인간 안의 affection과 자기감이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는가를 보여 주는 상징입니다.

 

그러나 AC.147-149는 동시에 희망도 보여 줍니다. 인간의 proprium은 본질적으로 악으로 기울지만, 주님은 그것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새롭게 vivify, 곧 살아 있게 하십니다. 이때의 proprium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독립 생명의 근원으로 삼지 않고, 주님의 생명을 받아 움직이는 구조가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천사적 proprium이라고 설명합니다. 천사들도 proprium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은 모든 생명이 주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기쁨으로 압니다.

 

AC.149에서 ‘뼈’가 반복적으로 언급되는 것도 이런 맥락입니다. 뼈는 인간 안의 가장 바깥 구조를 뜻하지만, 동시에 주님의 생명이 그 안에 들어오면 살아날 수 있는 구조를 뜻합니다. 에스겔 37장의 마른 뼈 환상이 인용되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만으로는 죽은 뼈와 같지만, 주님의 breath, spiritus가 들어오면 살아납니다. 이것은 ‘여자’라는 proprium 역시 주님의 생명 안에서만 참된 생명을 가질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AC.150은 이 문제를 더욱 깊게 다룹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산다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모든 생각과 affection이 흘러들어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도 오랜 세월 영계를 왕래하며 여러 해 동안 이것을 경험적으로 배우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바로 여기서 ‘여자’의 핵심 의미가 드러납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처럼 느끼지만, 실제로는 주님의 생명을 받는 존재입니다. 여자는 바로 이 ‘as if from himself’ 상태를 상징합니다. 인간은 자기 것처럼 느끼지만, 실제 생명의 근원은 주님입니다.

 

AC.151-152에서는 ‘여자’가 더욱 명확히 proprium과 연결됩니다. 여자가 속임을 당했다는 것은, 인간 안의 affection과 자기감이 자기 사랑 방향으로 기울어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서도 중요한 균형을 잃지 않습니다. 문제는 자기감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자기 자신을 생명의 중심으로 삼을 때입니다. 그래서 같은 ‘여자’가 어떤 경우에는 타락의 통로가 되고, 어떤 경우에는 천국적 affection의 그릇이 됩니다.

 

AC.153에서는 황폐한 도시를 다시 세우는 이사야와 예레미야 구절들이 인용됩니다. 이것은 타락한 인간 안의 affection과 proprium도 다시 재건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인간을 proprium 없는 존재로 되돌리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 안의 affection 구조 자체를 새롭게 하십니다. 그래서 ‘여자’는 단순 제거 대상이 아니라, 재창조와 거듭남의 중심 구조입니다.

 

AC.154는 가장 충격적인 문장 가운데 하나를 담고 있습니다. 인간의 own은 본질상 악이며, 결과적으로 인간은 악과 거짓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 자체를 무가치하게 보는 말이 아닙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독립 생명의 근원으로 삼을 때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생명이 그 proprium 안으로 들어오면 그것은 전혀 다른 것이 된다고 설명합니다. 천국 천사들이 어린아이처럼 보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자기 자신에게 돌리지 않고, 모든 것을 주님께 돌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AC.155에서 렘31:22의 ‘여자가 남자를 둘러싸리라’라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놀라운 전환입니다. 원래 타락의 통로였던 ‘여자’가 이제는 진리와 선을 감싸고 섬기는 방향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남자’는 보다 내적인 진리와 지혜를, ‘여자’는 affection과 proprium을 뜻합니다. 그리고 ‘둘러싼다’는 것은 지배가 아니라 사랑 안에서 감싸고 결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행하시는 ‘새 일’입니다.

 

따라서 AC.142-155 전체에서 ‘여자’는 단순 여성 존재가 아니라, 인간 안의 affection, 의지, 사랑, 그리고 proprium 전체를 상징합니다. 처음에는 자기 자신처럼 느끼는 살아 있는 자기감으로 허락되었고, 이후 타락의 가능성을 품게 되었지만, 결국 주님 안에서 새롭게 재형성될 수 있는 구조입니다. 그것은 진리를 실제 삶으로 살아 움직이게 하는 사랑의 차원이며, 인간이 주님과 자유롭게 결합할 수 있게 하는 존재 구조입니다.

 

결국 ‘여자’는 인간 영혼 안의 가장 깊은 질문과 연결됩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주님의 생명을 받아 살 것인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 자신을 닫을 것인가, 아니면 주님의 진리와 선을 감싸는 affection이 될 것인가? AC.142-155는 바로 이 질문을, ‘여자’라는 상징 안에 담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합니다.

 

주님, 오늘 들려주신 이 놀라운 말씀들을 우리가 몇 번씩 되새김할 때, 우리를 환히 비추사 우리로 밝히 이해되게 하여 주세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5-17(D1)

 

 

2651, 6, 창2.6, 2026-05-17(D1)-주일예배(창2,19-22, AC.142-155), ‘이름, 돕는 배필, 깊은 잠, 갈빗대, 그리고 여자’.pdf
1.15MB

 

 

 

주일예배(2026/05/24, 창2:23-25, AC.156-167),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 ‘여자’, ‘아내’, ‘둘이

※ 오늘(2026/05/24)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31, ‘찬양하라 복되신 구세주 예수’, 찬77, ‘거룩하신 하나님’입니다. 오늘은 창2 일곱 번째, 마지막 시간으로, 본문은 23절로 25절, AC 글 번호로는 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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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5/10, 창2:17-18, AC.128-141), ‘선악과, 혼자 사는 것, 돕는 배필’

※ 오늘(2026/05/10)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29, ‘성도여 다 함께’, 찬74, ‘오 만세 반석이신’입니다. 오늘은 창2 다섯 번째 시간으로, 본문은 17절로 18절, AC 글 번호로는 128번에서 141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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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창2:22)

 

AC.155

‘갈빗대가 여자로 지어졌다’(a rib was built into a woman)는 말씀에는 누구도 문자로부터는 결코 발견할 수 없는 더 많은 것들이 가장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그 가장 깊은 내용이 주님 자신과 그분의 나라를 바라보는 그러한 것이며, 말씀의 모든 생명은 여기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이 구절도 그 가장 깊은 내용에서는 천국의 결혼을 바라봅니다. 천국의 결혼은 proprium 안에 존재하는 그러한 성질의 것이며, 이 proprium은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을 때 주님의 ‘신부와 아내’(bride and wife)라고 합니다. 이렇게 생명을 얻은 인간의 proprium은 사랑의 모든 선과 신앙의 진리를 퍼셉션하며, 그 결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행복과 결합된 모든 지혜와 지성을 소유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신부와 아내’(bride and wife)라고 하는 이 생명을 얻은 proprium이 어떠한 것인지는 간단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천사들은 자기들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을 퍼셉션하지만, 그것을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을 때에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사는 것으로밖에는 알지 못한다는 점만 말해 두면 충분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곧 변화를 퍼셉션하는 그러한 보편적인 애정이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자기들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보편적인 퍼셉션 안에 있는 동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평화와 행복을 누립니다. 예레미야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도 바로 이 proprium을 의미합니다. The words “a rib was built into a woman” have more things inmostly concealed in them than it is possible for anyone ever to discover from the letter; for the Word of the Lord is such that its inmost contents regard the Lord himself and his kingdom, and from this comes all the life of the Word. And so in the passage before us, it is the heavenly marriage that is regarded in its inmost contents. The heavenly marriage is of such a nature that it exists in the own, which, when vivified by the Lord, is called the “bride and wife” of the Lord. Man’s own thus vivified has a perception of all the good of love and truth of faith, and consequently possesses all wisdom and intelligence conjoined with inexpressible happiness. But the nature of this vivified own, which is called the “bride and wife” of the Lord, cannot be concisely explained. Suffice it therefore to observe that the angels perceive that they live from the Lord, although when not reflecting on the subject they know no other than that they live from themselves; but there is a general affection of such a nature that at the least departure from the good of love and truth of faith they perceive a change, and consequently they are in the enjoyment of their peace and happiness, which is inexpressible, while they are in their general perception that they live from the Lord. It is this own also that is meant in Jeremiah, where it is said:

 

반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둘러싸리라 (렘31:22) Jehovah hath created a new thing in the earth, a woman shall compass a man. (Jer. 31:22)

 

이 구절에서도 천국의 결혼이 의미되며, 여기서 ‘여자’(woman)는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을 의미합니다. 이 여자에 관하여 ‘둘러싸는 것’(to compass)이라는 표현이 사용되는 까닭은 이 proprium이, 살이 된 갈빗대가 심장을 둘러싸는 것처럼 둘러싸는 성질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It is the heavenly marriage that is signified in this passage also, where by a “woman” is meant the own vivified by the Lord, of which woman the expression “to compass” is predicated, because this own is such that it encompasses, as a rib made flesh encompasses the heart.

 

해설

AC.155는 ‘갈빗대가 여자로 지어졌다’는 말씀의 속뜻을 지금까지보다 훨씬 깊은 층위로 이끕니다. AC.151에서는 갈빗대가 생명을 얻지 못한 인간의 proprium이고 여자는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이라고 했습니다. AC.154에서는 그 자체로서의 인간의 proprium은 악하고 흉측하지만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은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55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말씀의 가장 깊은 내용은 ‘천국의 결혼’을 바라보고 있다고 밝힙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말씀의 가장 깊은 내용이 주님 자신과 그분의 나라를 바라보며, 바로 여기에서 말씀의 모든 생명이 나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갈빗대가 여자로 지어졌다’는 말씀을 단순히 인간의 proprium에 관한 심리적 설명으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지의 설명도 이미 속뜻이지만, 그보다 더 깊은 곳에서는 주님과 그분의 나라가 중심에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proprium이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는다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인간이 주님과 어떤 관계 안에 들어가는가를 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여기서 ‘천국의 결혼’이라고 합니다.

 

그는 천국의 결혼이 proprium 안에 존재하며, 그 proprium이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을 때 주님의 ‘신부와 아내’(bride and wife)라고 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주님과의 결합이 인간의 proprium을 없애 버린 뒤 이루어진다고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이 주님의 신부와 아내가 됩니다. AC.151에서 갈빗대가 여자로 지어지는 것을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라고 했던 이유도 여기에서 더욱 깊어집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자기 자신이 없는 존재로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proprium을 생명 있게 하셔서 주님과 결합할 수 있게 하십니다.

 

이렇게 생명을 얻은 proprium에는 놀라운 성질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모든 선과 신앙의 진리를 퍼셉션하며, 그 결과 지혜와 지성을 누리고, 거기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행복이 결합됩니다. 여기서도 순서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혜와 지성이 인간 자신에게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이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를 퍼셉션함으로써 그것들을 누리게 됩니다. 앞에서 계속 강조된 ‘생명의 근원은 주님’이라는 질서가 천국의 결혼 안에서도 그대로 유지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 생명을 얻은 proprium의 성질을 간단히 설명할 수 없다고 명시합니다. 따라서 우리도 여기서 천국의 결혼이나 주님의 신부와 아내에 관한 전체 교리를 미리 끌어와 채울 필요가 없습니다. 대신 스베덴보리는 지금 독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천사들의 상태 한 가지를 제시합니다. 천사들은 자기들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을 퍼셉션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특별히 의식하며 생각하고 있지 않을 때에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사는 것처럼 압니다. 이 짧은 설명은 AC.140 이후 계속되어 온 문제에 매우 중요한 답을 줍니다.

 

즉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과 ‘자기 자신의 생명처럼 산다’는 경험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천사들조차 자기 생명을 끊임없이 ‘지금 이 생명은 주님에게서 흘러오고 있다’고 의식적으로 분석하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자기 자신으로부터 사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들의 가장 깊은 상태에는 자기들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보편적인 퍼셉션이 있습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마치 자기 자신의 것인 듯 보이는 proprium’이라는 AC.140의 표현도 더욱 분명해집니다. 생명은 실제로 주님으로부터 오지만 인간과 천사는 그것을 참으로 자기 자신의 생명처럼 받아 누립니다.

 

그 보편적인 퍼셉션은 단순한 교리 지식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사들이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즉시 변화를 퍼셉션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명제를 머리로 암기하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그 생명의 질서 안에서 실제로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 질서에서 벗어나는 순간 상태의 변화를 느끼며, 반대로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보편적인 퍼셉션 안에 있을 때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평화와 행복을 누립니다. AC.154에서 생명을 얻은 proprium이 가장 깊은 내면으로부터 행복을 퍼셉션한다고 했던 설명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렘31:22의 ‘여자가 남자를 둘러싸리라’를 인용하여 같은 천국의 결혼을 확증합니다. 여기서 ‘여자’(woman)는 다시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을 의미하고, ‘둘러싸는 것’(to compass)은 살이 된 갈빗대가 심장을 둘러싸듯 이 proprium이 둘러싸는 성질을 가진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도 신체의 모양을 보고 우리가 임의로 상응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스베덴보리 자신이 현재의 갈빗대와 여자, 심장의 관계 안에서 그 의미를 직접 제시하고 있다는 점을 붙들어야 합니다.

 

결국 AC.155는 지금까지의 proprium 논의를 매우 중요한 지점으로 이끕니다. 그 자체로 죽어 있고 악한 인간의 proprium이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으며, 그 생명을 얻은 proprium이 주님의 ‘신부와 아내’가 되고, 그 안에서 천국의 결혼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 상태의 천사들은 자기 자신의 생명처럼 자유롭게 살아가면서도 가장 깊은 곳에서는 자기들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을 퍼셉션합니다. 따라서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은 인간의 고유한 삶의 경험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삶이 참으로 살아 있게 되는 근원을 밝혀 줍니다. AC.140부터 계속되어 온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과 자기 자신의 것처럼 경험되는 proprium’의 문제가 여기서 상당히 깊고 아름다운 답을 얻습니다. (AC.155)

 

 

 

AC.156, 창2:23, ‘뼈 중의 뼈와 살 중의 살 - 속 사람과 결합한 proprium’ (AC.156-159)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And the man said, This now is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erefore she shall be called wife, be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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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4, 창2:22, ‘악 자체인 인간의 proprium과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창2:22) AC.154악하고 거짓된 것은 무엇이든 인간의 proprium이 아니거나 인간의 proprium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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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창2:22)

 

AC.154

악하고 거짓된 것은 무엇이든 인간의 proprium이 아니거나 인간의 proprium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것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인간의 proprium은 악 자체이며, 따라서 인간은 그 자체로는 악과 거짓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인간의 proprium에 속한 것들이 영계에서 보이도록 제시될 때, 더 추한 것은 묘사할 수 없을 정도로 흉측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통해 제게 분명해졌습니다. 다만 그 모습은 proprium의 성질에 따라 서로 다릅니다. 그러므로 proprium에 속한 것들이 눈에 보이도록 제시되는 사람은 공포에 사로잡혀 마치 악마에게서 달아나듯 자기 자신에게서 달아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인간의 proprium에 속한 것들은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나타나며, 주님의 천적인 것이 적용될 수 있는 생명의 성질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실제로 체어리티를 부여받았거나 체어리티에 의해 생명을 얻은 사람들은 매우 아름다운 얼굴을 한 소년들과 소녀들처럼 나타나며, 이노센스 안에 있는 사람들은 벌거벗은 어린아이들처럼 나타납니다. 그들은 가슴을 두른 꽃 화환과 머리 위의 관으로 다양하게 단장하고, 다이아몬드 같은 기운 속에서 살아 움직이며 뛰놀고, 가장 깊은 내면으로부터 행복을 퍼셉션합니다. Nothing evil and false is ever possible which is not man’s own, and from man’s own, for the own of man is evil itself, and consequently man is nothing but evil and falsity. This has been evident to me from the fact that when the things of man’s own are presented to view in the world of spirits, they appear so deformed that it is impossible to depict anything more ugly, yet with a difference according to the nature of the own, so that he to whom the things of the own are visibly exhibited is struck with horror, and desires to flee from himself as from a devil. But truly the things of man’s own that have been vivified by the Lord appear beautiful and lovely, with variety according to the life to which the celestial of the Lord can be applied; and indeed those who have been endowed with charity, or vivified by it, appear like boys and girls with most beautiful countenances; and those who are in innocence, like naked infants, variously adorned with garlands of flowers encircling their bosoms, and diadems upon their heads, living and sporting in a diamond-like aura, and having a perception of happiness from the very inmost.

 

해설

AC.154는 인간의 proprium을 매우 강한 표현으로 규정하면서도, 동시에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이 얼마나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지를 대조합니다. 첫 문장만 보면 ‘인간의 proprium은 악 자체이며 인간은 악과 거짓일 뿐’이라는 선언이 모든 것을 압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번호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후반부에서는 바로 그 인간의 proprium이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으면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따라서 AC.154를 정확히 이해하려면 이 두 상태를 반드시 함께 보아야 합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악과 거짓은 인간의 proprium에서 나오며, 인간의 proprium은 그 자체로 악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AC.150에서 자기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산다고 믿는 사람이 악과 거짓을 자기에게 귀속시킨다고 한 설명과 이어집니다. 인간이 생명과 선과 진리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두고 자기 자신의 인도 아래 살려고 할 때, 그 proprium에서는 선과 진리가 나올 수 없습니다. AC.149-150에서 이미 생명은 인간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온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proprium의 악은 단순히 인간이 개별적으로 몇 가지 잘못된 행동을 한다는 정도보다 훨씬 근원적인 문제를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다시 자신의 영계 경험으로 설명합니다. 인간의 proprium에 속한 것들이 영계에서 눈에 보이도록 나타날 때에는 더 추한 것을 묘사할 수 없을 정도로 흉측하게 보이며, 그것을 자기 앞에서 보게 된 사람은 공포에 사로잡혀 마치 악마에게서 도망하듯 자기 자신에게서 달아나고 싶어 한다고 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그 모습이 모두 똑같다고 하지 않고 ‘proprium의 성질에 따라’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고 덧붙입니다. 따라서 여기에서도 proprium은 획일적인 하나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루고 있는 생명의 성질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어지는 ‘그러나’가 AC.154 전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인간의 proprium에 속한 것들은 앞의 흉측한 모습과 정반대로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나타납니다. 이것은 AC.151에서 ‘여자’가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한다고 했던 설명을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proprium을 없애 인간을 proprium 없는 존재로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는 죽고 악한 proprium을 생명 있게 하신다는 지금까지의 흐름이 여기서 다시 확인됩니다.

 

이 때문에 AC.154는 AC.141과 함께 읽는 것이 특히 중요합니다. AC.141에서는 천적 인간과 천사에게도 proprium이 있으며, 그 proprium 안에는 주님의 것들이 있고 그것은 주님에 의해 다스려지므로 ‘가장 참된 천적인 것 자체’라고 했습니다. 반면 AC.154에서는 인간의 proprium은 악 자체라고 합니다. 두 문장은 모순되는 것이 아닙니다. AC.154 자체가 그 구별을 보여 줍니다. 인간에게서 나온 것으로서의 proprium은 악하지만,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은 아름답고 사랑스럽습니다. 그러므로 proprium이라는 단어 하나만 보고 언제나 동일한 영적 성질을 가진 것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그 자체로서의 인간의 proprium인지,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인지 문맥을 살펴야 합니다.

 

후반부의 모습들은 이러한 차이를 영계의 표상으로 보여 줍니다. 체어리티를 부여받았거나 체어리티에 의해 생명을 얻은 사람들은 매우 아름다운 얼굴의 소년들과 소녀들처럼 나타나고, 이노센스 안에 있는 사람들은 꽃 화환과 관으로 단장한 어린아이들처럼 나타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연계에서의 실제 나이나 외모가 아니라 그 사람의 내적 생명의 성질입니다. 앞에서는 proprium의 성질에 따라 그 흉측함이 달라진다고 했고, 여기서는 주님의 천적인 것이 적용될 수 있는 생명의 성질에 따라 아름다움도 다양하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영계에서 외적인 모습이 내적인 생명의 성질을 드러낸다는 설명이 이 대조 안에 들어 있습니다.

 

특히 ‘체어리티에 의해 생명을 얻는다’는 표현은 현재 문맥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AC.148에서는 가슴이 체어리티를 의미한다고 했고, AC.151에서는 갈빗대가 여자로 지어지는 것을 생명 없는 proprium이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는 것으로 설명했습니다. 이제 AC.154에서는 체어리티를 부여받거나 체어리티에 의해 생명을 얻은 사람들이 아름답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따라서 ‘proprium이 생명을 얻는다’는 말이 점차 구체적인 내용을 얻고 있습니다. 다만 이것을 근거로 아직 체어리티와 proprium의 관계에 관한 전체 교리를 미리 완성하기보다 이후의 설명을 더 기다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마지막의 ‘가장 깊은 내면으로부터 행복을 퍼셉션한다’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상태의 아름다움은 단순히 외적인 모습의 아름다움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들은 살아 움직이며 뛰놀고, 가장 깊은 내면으로부터 행복을 퍼셉션합니다. 따라서 앞부분의 죽음과 추함, 뒷부분의 생명과 아름다움과 행복은 서로 대응되는 대조를 이룹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살려는 proprium 안에 갇혀 있을 때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살아 있을 때의 차이가 영계에서 보이는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결국 AC.154는 proprium에 관한 지금까지의 설명을 한쪽으로 단순화하지 못하게 하는 중요한 번호입니다. ‘인간의 proprium은 악 자체’라는 문장은 분명히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지만, 동시에 같은 번호가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인간의 proprium은 아름답고 사랑스럽다’고 말한다는 사실도 똑같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주님께서 구원하시는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지워 버리는 방식이 아니라, 그 자체로는 죽고 악한 인간의 proprium을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으로 살아 있게 하시는 방식으로 묘사됩니다. 이것이 AC.141에서 시작하여 AC.147-154를 거치면서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는 proprium의 중요한 아르카나입니다. (AC.154)

 

 

 

AC.155, 창2:22, ‘주님의 신부와 아내 -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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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3, 창2:22, ‘짓다 -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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