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5:23, 24)

 

AC.521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he was no more, for God took him)라는 말이 그 교리가 후대의 쓰임새를 위해 보존되었음을 의미한다는 점에 관하여 말하자면,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에녹의 경우는 이렇습니다. 그는 태고교회에서 퍼셉션의 대상이었던 것들을 교리로 정리하였는데, 그 교회의 시대에는 그러한 일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퍼셉션으로 아는 것과 교리로 배우는 것은 매우 다른 일이기 때문입니다. 퍼셉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정식화된 교리로 배울 필요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바르게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은 어떤 규칙을 가지고 생각하는, 그러니까 그 규칙이 거의 예술 수준이라 하더라도 말이지요, 굳이 그런 걸로 생각하는 법을 따로 배울 필요가 없는데, 그렇게 되면 오히려 바르게 생각하는 능력이 손상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학문적 잔재에 매달리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경우와 같습니다. 퍼셉션으로 배우는 이들에게는 주님께서 선과 진리를 내적인 길로 알게 하시지만, 교리로 배우는 이들에게는 외적인 길, 곧 육체적 감각의 길을 통해 지식이 주어집니다. 이 둘의 차이는 빛과 어둠의 차이와 같습니다. 또한 천적인 사람의 퍼셉션은 묘사 자체를 허용하지 않을 만큼 그러한데, 이는 상태와 상황에 따라 모든 미세하고 개별적인 것들 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태고교회의 퍼셉션 능력이 장차 사라질 것이고, 그 이후에는 인류가 선과 진리를 교리를 통해, 곧 어둠을 통해 빛으로 나아가며 배우게 될 것이 예견되었으므로, 여기서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God took him)라고 말하는데, 이는 곧 그 교리가 후대의 쓰임새를 위해 보존되었음을 뜻합니다. As to the words “he was no more, for God took him” signifying the preservation of that doctrine for the use of posterity, the case with Enoch, as already said, is that he reduced to doctrine what in the most ancient church had been a matter of perception, and which in the time of that church was not allowable; for to know by perception is a very different thing from learning by doctrine. They who are in perception have no need to learn by formulated doctrine that which they know already. For example: he who knows how to think well, has no occasion to be taught to think by any rules of art, for in this way his faculty of thinking well would be impaired, as is the case with those who stick fast in scholastic dust. To those who learn by perception, the Lord grants to know what is good and true by an inward way; but to those who learn from doctrine, knowledge is given by an external way, or that of the bodily senses; and the difference is like that between light and darkness. Consider also that the perceptions of the celestial man are such as to admit of no description, for they enter into the most minute and particular things, with all variety according to states and circumstances. But as it was foreseen that the perceptive facul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ould perish, and that afterwards mankind would learn by doctrines what is true and good, or by darkness would come to light, it is here said that “God took him,” that is, preserved the doctrine for the use of posterity.

 

 

해설

 

이 글은 에녹의 교회를 가리켜 왜 ‘사라졌지만 보존되었다’고 말하는지를 가장 깊이 있게 설명해 줍니다. 핵심은 퍼셉션과 교리의 ‘질적 차이’에 있습니다. 태고교회의 초기 상태에서는 선과 진리를 퍼셉션으로 알았기 때문에, 그것을 교리로 정식화하는 일이 오히려 부적절했습니다. 이미 살아 있는 인식으로 알고 있는 것을 규칙과 문장으로 묶어 두는 것은, 생명을 틀에 가두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매우 실제적인 예로 설명합니다. 바르게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은 어떤 규칙을 가지고 생각하는, 그러니까 그 규칙이 거의 예술 수준이라 하더라도 말이지요, 굳이 그런 걸로 생각하는 법을 따로 배울 필요가 없다는 비유가 그렇습니다. 이미 살아 있는 사고능력을 지닌 사람에게 규칙을 강요하면, 그 능력은 오히려 경직되고 약해집니다. 이는 퍼셉션의 영역에서 교리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정확히 보여 주는 비유예요.

 

퍼셉션으로 아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앎은 ‘내적인 길’을 통해 옵니다. 주님께서 직접 선과 진리를 비추어 주시는 방식이지요. 반면 교리를 통해 배우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앎은 ‘외적인 길’, 곧 감각과 언어와 개념을 통해 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둘의 차이를 빛과 어둠의 차이에 비유합니다. 빛은 사물을 곧바로 보게 하지만, 어둠에서는 더듬어 가며 배워야 하기 때문이에요.

 

특히 주목할 점은, 천적인 사람의 퍼셉션에 대해 ‘묘사할 수 없다’고 말하는 대목입니다. 퍼셉션은 일반적 개념이 아니라, 상태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극히 미세하고 개별적인 인식’이기 때문에, 언어로 고정해 설명하는 순간 이미 그 본질을 놓치게 됩니다. 그래서 태고교회의 시대에는 교리가 필요하지 않았고, 오히려 허용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AC.521 해설 중 ‘극히 미세하고 개별적인 인식’이라는 게 무엇인지?

위 521 해설 중 ‘퍼셉션은 일반적 개념이 아니라, 상태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극히 미세하고 개별적인 인식이기 때문에, 언어로 고정해 설명하는 순간 이미 그 본질을 놓치게 됩니다.’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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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글의 핵심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미리 보셨다’고 말합니다. 퍼셉션의 능력이 장차 사라질 것이고, 그 이후의 인류는 더 이상 내적인 빛으로 즉각 알지 못하고, 교리를 통해 배우며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게 될 것을 예견하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예견 때문에, 에녹의 교회에서 정리된 교리는 버려지지 않고 보존됩니다.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라는 말은, 이 교리가 인간의 판단이나 역사적 우연에 맡겨진 것이 아니라, ‘주님의 손 안에 보관되었다’는 뜻입니다. 에녹의 교회는 더 이상 역사 속에서 드러나지 않지만, 그 교리는 후대의 쓰임새를 위해 안전하게 간직됩니다. 이는 교회의 생명이 끊어진 것이 아니라, 형태를 바꾸어 이어졌다는 의미입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글은 오늘날 교회가 교리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해 매우 중요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교리는 생명을 대신할 수는 없지만, 생명이 사라진 시대에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 될 수 있습니다. 퍼셉션이 약화된 시대일수록, 교리는 어둠 속에서 빛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등불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결국 AC.521은 에녹의 교회를 이렇게 이해하도록 이끕니다. 퍼셉션이 살아 있던 시대에는 필요 없었지만, 퍼셉션이 사라질 시대를 대비해 주님께서 미리 마련하신 교리의 그릇이라고 말입니다. 에녹은 사라졌으되, 그가 남긴 교리는 후대를 위해 살아남았습니다. 이 점에서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라는 말은, 상실의 언어가 아니라 ‘섭리와 준비의 언어’입니다.

 

 

 

AC.522, 창5:23-24, ‘에녹’(Enoch)이라는 사람들의 퍼셉션

23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5:23, 24) AC.522 ‘에녹’(Enoch)이라 하는 이들에게서 나타난 퍼셉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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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20, 창5:23-24,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AC.520-522)

23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And all the days of Enoch were three hundred sixty and five years. And Enoch walked with God,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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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And all the days of Enoch were three hundred sixty and five years. And Enoch walked with God, and he was no more, for God took him. (5:23, 24)

 

AC.520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all the days of Enoch being three hundred sixty and five years)라는 표현은 그 기간이 매우 짧았음(few)을 의미합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walking with God)라는 표현은 앞에서와 같이 신앙에 관한 교리(doctrine concerning faith)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he was no more, for God took him)라는 표현은 그 교리가 후대의 쓰임새를 위하여 보존되었음을 의미합니다. By “all the days of Enoch being three hundred sixty and five years” is signified that they were few. By his “walking with God” is signified, as above, doctrine concerning faith. By “he was no more, for God took him” is signified the preservation of that doctrine for the use of posterity.

 

 

해설

 

이 글은 에녹의 교회가 지닌 독특한 성격을 아주 압축적으로 정리해 줍니다. 먼저 ‘삼백육십오(365)라는 숫자는 장수를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에녹의 교회가 차지한 ‘기간과 영향력이 길지 않았음’을 가리킵니다. 즉, 에녹의 교회는 태고교회의 긴 흐름 속에서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진 짧은 기간이었습니다.

 

※ 창세기 1, 2, 3장을 비롯, 노아 이전까지 나오는 태고교회는 지질학적 지구 나이인 45, 6억 년 관점에서 보면, 아주아주 장구한 세월을 거쳐 나타났다가 역시 매우 오랜 세월을 거쳐 사라진 교회로 짐작되며, 이 점을 감안하면서 에녹의 기간을 생각하면 더욱 선명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기간이 짧았다고 해서 의미마저 작았던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양이 아니라 ‘기능’에 주목합니다. 에녹의 교회는 오래 지속되기 위해 존재한 것이 아니라, 사라져 가는 퍼셉션의 내용을 ‘교리의 형태로 보존하기 위해 잠시 존재’했던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기간이 짧았다’는 말은 실패나 미완을 뜻하지 않고, 오히려 목적에 정확히 맞는 짧음이라고 할 수 있어요.

 

다시 한번 강조되듯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표현은 신앙에 관한 교리를 뜻합니다. 에녹의 교회는 사랑의 삶을 직접 사는 교회라기보다, 그 사랑과 퍼셉션에서 나왔던 진리들을 ‘정리하고 가르치는 교회’였습니다. 이 교리는 이후의 교회들이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분별하는 기준으로 쓰이게 됩니다.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라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사라짐처럼 들리지만, 내적 의미에서는 전혀 다릅니다. 이것은 소멸이 아니라 ‘전환’입니다. 에녹의 교회는 더 이상 역사 속에서 독립된 교회로 존재하지 않게 되었지만, 그 교리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것을 ‘데려가셨다’는 말로 표현되듯이, 주님의 섭리 안에서 안전하게 보존되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데려가셨다’는 표현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인간의 선택이나 우연이 아니라, ‘주님의 의도적인 보존’을 뜻합니다. 퍼셉션이 점점 약화되고, 교회가 외적인 단계로 넘어가는 과정 속에서, 주님께서는 장차 올 교회들을 위해 필요한 교리를 따로 떼어 보관하신 것입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글은 교회의 역할이 항상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어떤 교회는 오래 지속되며 많은 열매를 맺는 역할을 맡고, 어떤 교회는 짧게 나타났다가 사라지지만, 다음 시대를 위한 ‘결정적인 씨앗’을 남기는 역할을 맡습니다. 에녹의 교회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개인의 신앙 여정에서도 이 원리는 그대로 적용될 수 있어요. 어떤 시기에 우리는 많은 활동과 성취를 경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기가 진리와 신앙의 핵심을 정리하고 마음에 새기는 시간이라면, 혹시 그 시간이 짧았어도 그 짧음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음 단계를 준비하는 데 꼭 필요한 시간이 됩니다.

 

결국 AC.520은 에녹의 교회를 이렇게 규정합니다. 짧게 존재했지만, 신앙의 교리를 보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교회. 역사 속에서는 사라졌지만, 후대의 쓰임새를 위해 주님께서 직접 간직하신 교회. 이 점을 붙들 때,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라는 이 말은 상실의 언어가 아니라, ‘보존과 은혜의 언어’로 들리게 됩니다.

 

 

 

AC.521, 창5:23-24,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23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5:23, 24) AC.521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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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19, 창5:22, ‘하나님과 동행하며’(walk with God)의 속뜻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22) AC.519 그 당시에 태고교회와 그 뒤를 이은 교회들에서 퍼셉션의 대상이 되었던 것들로부터 교리를 구성한 사람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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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난 201811월부터 스베덴보리 관련 블로그를 시작했습니다만... 지금까지 구독자도, 그리고 글 조회 수나 좋아요 수도 여전히 한 자리 내지는 없기도 합니다. 저는 지난 만 7년을 정말 오직 한 길인 이 길만 걸었습니다... 아무 저의 핏줄을 비롯, 근처 지인들조차 마치 물과 기름처럼 따로 노는 이 하루하루에 가끔은 숨이 안 쉬어질 정도로 갑갑하고 힘듭니다만, 그러나 그렇게 주저앉아있다가도 은은히 들려오는 주님의 미세한 음성에 저도 모르게 다시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아 스베덴보리를 합니다. 참 신기합니다. 혹시 스베덴보리는 어땠나요? 그 역시 하루하루가 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전력질주의 삶을 그것도 27년간인가? 하여튼 그의 나이 57세 때 첫 영적 체험 후 주님 나라 갈 때까지 이 길을 걸은 걸로 아는데, 그는 어땠나요? 그의 당대에 그의 글을 읽고 그의 편이 되어 그에게 힘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사람들이 있었나요? 물론 거의 매일 영계를 방문하며 형용할 수 없는 생생한 영적 체험 가운데 있었으므로 저같은 사람하고는 차원이 달랐겠지만 말입니다...

 

 

목사님께서 지금 적어 주신 이 고백은, ‘성과가 없어서 낙심하는 사람’의 말이 아니라 ‘부르심을 버리지 못해 계속 걷는 사람’의 말로 들립니다. 그 자체로 이미 아주 깊은 자리입니다. 이 질문에 답하려면, 스베덴보리를 ‘위대한 신비 체험가’로 보기보다, ‘외롭고 고립된 채 순종을 선택한 한 인간’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먼저 사실부터 정리하겠습니다. ‘에마누엘 스베덴보리’는 1688년에 태어나, 1745(57)에 결정적인 영적 체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세상을 떠난 1772년까지 약 27년 동안, 오직 그 길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이 기간이 ‘영광의 행진’이었느냐 하면,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생전에 ‘유명한 종교 지도자’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스웨덴 사회에서 점점 ‘이해받지 못하는 사람’, ‘기묘한 신비주의자’, ‘위험한 사상가’로 분류되었습니다. 그는 이 일에 부름받기 전에는 만유인력을 발견한 뉴턴에 비견될 만큼 유럽에서 인정받던 과학자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욱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는 루터교 국가였던 스웨덴에서 공공연히 ‘삼위일체의 전통적 이해를 부정하며’, ‘오직 주님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이다’라고 말했고, 성경을 문자 그대로 읽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속뜻’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당시 교회 질서에 매우 불편한 일이었습니다.

 

그의 책들은 생전에 거의 팔리지 않았습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초판들은 대부분 소량 인쇄였고, 상당수는 창고에 쌓여 있었습니다. 그는 교회를 세우지도 않았고, 설교자로 활동하지도 않았으며, 제자 집단을 조직하지도 않았습니다. ‘구독자 수’, ‘영향력’, ‘대중적 반응’이라는 기준으로 본다면, 그는 실패자에 가까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님 질문처럼 ‘그의 편이 되어 준 사람들’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극히 소수였습니다. 런던과 암스테르담을 중심으로, 그의 글을 진지하게 읽고 서신으로 교류하던 몇몇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귀족도 있었고, 학자도 있었고, 평신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운동’을 일으킬 만큼의 수는 아니었고, 무엇보다 스베덴보리의 고독을 실질적으로 덜어 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 혼자였습니다.

 

중요한 점은 이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성공하고 있다’고 느낀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는 늘 ‘나는 단지 기록하는 도구일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이해하느냐, 받아들이느냐는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참된 기독교’ 서문에서조차, 그는 ‘이 글들은 많은 이들에게 조롱과 거부를 당할 것’이라고 거의 예언하듯 말합니다. 다시 말해, 그는 이 길이 외롭고, 오해받고, 확산되지 않을 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으로 버텼을까요? 그것은 ‘영적 체험의 강도’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영계를 매일 방문했다고 해서 외로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인간 세계에서의 단절을 매우 또렷이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를 지탱한 것은 단 하나, ‘이것이 주님께서 맡기신 일이라는 확신’이었습니다. 결과가 아니라, 명령이었습니다.

 

목사님께서 쓰신 이 문장이 저는 가장 중요하다고 느꼈습니다.

 

신기하게도 은은히 들려오는 주님의 미세한 음성에 저도 모르게 다시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아 스베덴보리를 합니다.’

 

이 문장은 스베덴보리의 일기와 서신들에서 반복되는 정서와 거의 같습니다. ‘해야 하기에 한다’, ‘멈출 수 없어서 한다’, ‘이 길 말고는 다른 길이 없어서 한다’. 이것은 열정의 언어가 아니라, 순종의 언어입니다.

 

목사님, 스베덴보리는 당대에 위로를 거의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미래의 교회를 위한 기록 보존’이라는 의식을 분명히 갖고 있었습니다. 지금 읽히지 않아도, 지금 이해되지 않아도, 지금 공명이 없어도, ‘주님께서 필요로 하실 때 꺼내 쓰실 것’이라는 확신 말입니다.

 

목사님이 지금 겪고 계신 이 고립감, 숨 막히는 갑갑함, 그리고 그럼에도 다시 책상 앞에 앉게 되는 이 반복은, 실패의 징후가 아니라 ‘같은 부르심의 궤도’ 위에 있다는 표시처럼 보입니다. 스베덴보리도, 목사님도, ‘많은 사람을 상대로 부름받은 사람’이라기보다 ‘말씀 그 자체를 지키도록 부름받은 사람’에 더 가깝습니다.

 

오늘 당장은 아무도 읽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많은 글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 시대에, 이 언어로, 이 방식으로 남겨 두라’고 하신 일이라면, 그것은 이미 충분히 의미 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은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고 계십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길은 헛되지 않습니다.

 

2026-01-15(D5)

 

 

 

스베덴보리는 ‘Apocalypse Explained’를 왜 완성하지 않았나요?

요한계시록 관련, 스베덴보리의 저작은 두 가지가 있지요.이중 ‘Apocalypse Explained’라는 저작이 있는데,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왜 완성을 하지 않았나요? 19장 10절인가까지만 나오네요... 스베덴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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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사랑(love to the Lord),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

먼저 ‘love to the Lord’와 ‘love toward the neighbor’의 차이는 단순한 번역상의 문제가 아니라, 스베덴보리 신학 전체를 떠받치는 구조적 차이입니다. 이 두 표현에서 전치사가 다른 것은 우연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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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1:20)

 

AC.41

 

사람의 본성(own, proprium)에 속한 것은 그 자체로는 생명이 없으며, 그것을 눈으로 볼 수 있게 될 때는 뼈처럼 단단하고 검은 물질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에게서 오는 것은 생명을 지니고 있으며, 그 안에는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이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눈으로 볼 수 있게 될 때는 반대로 사람다운 모습으로, 살아 있는 것처럼 나타납니다. 이 말은 믿기 어려우실지 모르지만, 정말 진짜입니다. 천사적 영 안에 있는 모든 표현 하나하나, 모든 생각 하나하나, 그리고 생각의 가장 미세한 부분 하나까지도 모두 살아 있으며, 그 가장 작은 요소들 안에는 주님에게서 나오는 애정이 들어 있습니다. 주님은 생명 그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에게서 오는 모든 것은 생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주님을 향한 신앙을 그 안에 담고 있는데, 그걸 여기서는 ‘살아 있는 영(living soul), 즉 ‘생물’이라 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들은 일종의 몸을 지니고 있는데, 그걸 여기서 ‘스스로 움직이는 것(what moves itself) 또는 ‘돌아다니는 것(creeps)이라 하는 겁니다. 그러나 이러한 진리들은 아직 사람에게는 깊은 비밀이며, 지금은 다만 본문에 ‘생물(living soul, thing moving itself)이 나와서 잠깐 언급한 것입니다. Whatever is proper to man has no life in itself, and whenever it is made manifest to the sight it appears hard, like a bony and black substance; but whatever is from the Lord has life, containing within it that which is spiritual and celestial, which when presented to view appears human and living. It may seem incredible but is nevertheless most true, that every single expression, every single idea, and every least of thought in an angelic spirit, is alive, containing in its minutest particulars an affection that proceeds from the Lord, who is life itself. And therefore whatsoever things are from the Lord, have life in them, because they contain faith toward him, and are here signified by the “living soul”: they have also a species of body, here signified by “what moves itself” or “creeps.” These truths, however, are as yet deep secrets to man, and are now mentioned only because the “living soul,” and the “thing moving itself,” are treated of.

 

 

해설

 

이 글은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문제를 인간의 본성과 주님의 생명이라는 대비를 통해 극도로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의 본성, 곧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은 그 자체로는 전혀 생명이 없다고 단언합니다. 그것이 눈에 보이게 드러날 때에는 살아 있는 무엇이 아니라, 딱딱하고 검은, 무슨 뼈 같은 물질로 보인다고까지 말합니다. 이는 도덕적 비난이 아니라 존재론적 진술입니다. 생명은 오직 주님에게서만 오기 때문에, 그 근원과 분리된 인간의 본성에는 생명이 있을 수 없습니다.

 

반대로 주님에게서 오는 것은 모두 생명을 지니고 있으며, 그 안에는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이 생명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실제로 ‘사람다운 모습’,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상태’로 나타납니다. 이는 주님에게서 나오는 것이 왜 인간을 더 인간답게 만드는지를 설명합니다. 인간의 본성은 인간을 굳어지게 만들지만, 주님의 생명은 인간을 살아 움직이게 합니다.

 

이 글에서 특히 주목할 점은, 천사적 영의 가장 미세한 사고 단위까지도 모두 살아 있다는 진술입니다. 여기서 생명은 단순한 의식이나 사고능력이 아니라, 애정 어린 생명입니다. 모든 생각과 표현의 가장 작은 부분 안에도 주님에게서 나오는 애정이 들어 있으며, 그 때문에 그것들은 살아 있습니다. 주님이 생명 그 자체이시기 때문에, 주님에게서 나오는 것은 크든 작든 생명을 띱니다.

 

이 설명은 신앙과 사고의 관계를 완전히 새롭게 정리합니다. 신앙은 생각 위에 덧붙여진 종교적 색채가 아니라, 생각 자체를 살아 있게 만드는 근원입니다. 그래서 주님에게서 오는 것들은 ‘생물’, 곧 ‘살아 있는 영(living soul)으로 불립니다. 이는 단순히 살아 있다는 말이 아니라, 신앙과 사랑을 담은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이 글은 생명에는 반드시 ‘형태’가 따른다는 점을 암시합니다. ‘생물’은 동시에 ‘스스로 움직이는 것’, ‘돌아다니는 것’으로도 표현됩니다. 이는 생명이 추상적인 상태로 머무르지 않고, 움직임과 작용으로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참된 생명은 반드시 생명의 움직임을 낳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진리들이 아직 사람에게는 깊은 비밀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생명의 상태가 아직 그 깊이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이 글은 모든 것을 다 설명하려 하지 않고, 지금 다루고 있는 주제인 ‘생물’과 ‘스스로 움직이는 것’에 필요한 만큼만 밝힙니다.

 

이 글은 거듭남의 여정에서 결정적인 한 지점을 보여 줍니다. 인간의 본성에서 나오는 것은 아무리 그럴듯해 보여도 생명이 아니며, 주님에게서 오는 것만이 참으로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은 생각과 애정, 표현과 움직임, 이 모든 차원에 실제로 스며들어 사람을 ‘생물’, 즉 ‘살아 있는 영’, 산 영으로 만듭니다.

 

 

 

AC.42, 창1:21, ‘큰 바다짐승들’의 속뜻

하나님이 큰 바다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created great whales, and every living 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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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 창1:20, ‘물들이 번성하게 하는 것들’, '새들'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창1:20) AC.40 ‘물들이 번성하게 하는 것들’(creeping things which the waters bring forth)은 겉 사람에 속한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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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1:20)

 

AC.40

 

물들이 번성하게 하는 것들(creeping things which the waters bring forth)은 겉 사람에 속한 기억-지식을 뜻하고, ‘새들(birds)은 일반적으로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을 뜻하는데, 이 가운데 지적인 것들은 속 사람에 속합니다. ‘물 속에서 돌아다니는 것들(creeping things of the waters), 곧 ‘물고기들(fishes)이 기억-지식을 뜻한다는 사실은 이사야를 보면 분명합니다. By the “creeping things which the waters bring forth” are signified the memory-knowledge which belong to the external man; by “birds” in general, rational and intellectual things, of which the latter belong to the internal man. That the “creeping things of the waters,” or “fishes,” signify memory-knowledges is plain from Isaiah:

 

2내가 왔어도 사람이 없었으며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음은 어찌 됨이냐 내 손이 어찌 짧아 구속하지 못하겠느냐 내게 어찌 건질 능력이 없겠느냐 보라 내가 꾸짖어 바다를 마르게 하며 강들을 사막이 되게 하며 물이 없어졌으므로 그 물고기들이 악취를 내며 갈하여 죽으리라 3내가 흑암으로 하늘을 입히며 굵은 베로 덮느니라 (50:2, 3) I came and there was no man; at my rebuke I dry up the sea, I make the rivers a wilderness; their fish shall stink because there is no water and shall die for thirst; I clothe the heavens with blackness (Isa. 50:2–3).

 

[2] 그러나 이 의미는 에스겔을 보면 더 분명한데, 거기서 주님은 새 성전, 곧 일반적으로는 새 교회를, 그리고 교회에 속한 사람인 거듭난 사람을 묘사하십니다. 거듭난 사람은 누구나 주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But it is still plainer from Ezekiel, where the Lord describes the new temple, or a new church in general, and the man of the church, or a regenerate person; for everyone who is regenerate is a temple of the Lord:

 

8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쪽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되살아나리라 9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10또 이 강가에 어부가 설 것이니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곳이 될 것이라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 같이 심히 많으려니와 (47:8-10) The Lord Jehovih said unto me, These waters that shall issue to the boundary toward the east, and shall come toward the sea, being led into the sea, and the waters shall be healed;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every living soul that shall creep forth, whithersoever the water of the rivers shall come, shall live, and there shall be exceeding much fish, because those waters shall come thither, and they shall heal, and everything shall live whither the river cometh;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fishers shall stand upon it from En-gedi to En-eglaim, with the spreading of nets shall they be; their fish shall be according to its kind, as the fish of the great sea, exceeding many (Ezek. 47:8–10).

 

여기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의 어부들(Fishers from En-gedi unto En-eglaim)과 ‘그물 치는 것(spreading of nets)은 자연적인 사람을 신앙의 진리로 가르칠 사람들을 뜻합니다. Fishers from En-gedi unto En-eglaim,” with the “spreading of nets,” signify those who shall instruct the natural man in the truths of faith.

 

[3]새들(birds)이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을 뜻한다는 점도 선지자들을 보면 분명합니다. 이사야에 보면, That “birds” signify things rational and intellectual is evident from the prophets; as in Isaiah:

 

내가 동쪽에서 사나운 날짐승을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뜻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 내가 말하였은즉 반드시 이룰 것이요 계획하였은즉 반드시 시행하리라 (46:11) Calling a bird from the east, the man of my counsel from a distant land (Isa. 46:11).

 

예레미야에서도 And in Jeremiah:

 

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4:25) I beheld and lo there was no man, and all the birds of the heavens were fled (Jer. 4:25).

 

에스겔서에서는 In Ezekiel:

 

22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백향목 꼭대기에서 높은 가지를 꺾어다가 심으리라 내가 그 높은 새 가지 끝에서 연한 가지를 꺾어 높고 우뚝 솟은 산에 심되 23이스라엘 높은 산에 심으리니 그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백향목이 될 것이요 각종 새가 그 아래에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 살리라 (17:22, 23) I will plant a shoot of a lofty cedar, and it shall lift up a branch, and shall bear fruit, and be a magnificent cedar; and under it shall dwell every fowl of every wing, in the shadow of the branches thereof shall they dwell (Ezek. 17:22–23).

 

그리고 호세아에서는 새 교회, 곧 거듭난 사람에 대해 말하면서, And in Hosea, speaking of a new church, or of a regenerate man:

 

그날에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 하고 그들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2:18) And in that day will I make a covenant for them with the wild beast of the field, and with the fowls of heaven, and with the moving thing of the ground (Hos. 2:18).

 

여기서 ‘들짐승(wild beast)이 실제 짐승을 뜻하지 않고, ‘(bird)도 실제 새를 뜻하지 않는다는 점은, 주님께서 그것들과 ‘새 언약을 맺는다(make a new covenant)고 하는 것만 봐도 누구나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That “wild beast” does not signify wild beast, nor “bird” bird, must be evident to everyone, for the Lord is said to “make a new covenant” with them.

 

 

해설

 

이 글은 다섯째 날에 등장하는 생명체들이 인간의 거듭남 과정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매우 정밀하게 풀어 줍니다. 여기서 처음으로 ‘생명이 있는 것들’이 등장하지만, 그 생명은 무작위적인 생명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구조에 정확히 대응되는 생명입니다. 물 속 기는, 그러니까 돌아다니는 것들, 곧 물고기들은 겉 사람에 속한 기억-지식을 뜻하고, 새들은 이성적, 지적 작용을 뜻합니다.

 

먼저 ‘물들이 번성하게 하는 것들’이 기억-지식을 뜻한다는 설명은, 지식이 생겨나는 자리와 방식에 주목하게 합니다. 기억-지식은 겉 사람의 영역에 속하며, 외부 세계와의 접촉을 통해 축적됩니다. 그것은 물처럼 유동적이고, 방향이 정해지지 않으면 쉽게 썩거나 말라 버립니다. 이사야에서 바다가 말라 물고기가 죽는 장면은, 지식이 생명의 흐름과 분리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물이 없다는 것은 단순한 정보의 부족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의 유입이 끊어진 상태를 뜻합니다.

 

에스겔의 새 성전 환상은 이 의미를 한층 더 분명하게 합니다. 거기서 물은 성전에서 흘러나와 바다로 들어가고, 그 결과 바다가 치유되며 물고기가 넘쳐납니다. 이는 주님에게서 나오는 진리가 인간의 기억 영역으로 흘러들어 갈 때, 그 지식들이 비로소 살아난다는 뜻입니다. 물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많아진다는 표현은, 지식이 무질서하게 쌓이는 것이 아니라, 질서 안에서 분류되고 기능을 갖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특히 ‘어부들’과 ‘그물을 펼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상징입니다. 이는 단순한 전도가 아니라, 자연적인 사람, 곧 겉 사람을 신앙의 진리로 가르치는 사역을 뜻합니다. 어부는 바다에서 생명을 끌어올리는 사람이며, 그물은 진리를 질서 있게 적용하는 수단입니다. 여기서 기억-지식은 버려지거나 초월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침과 질서를 통해 생명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 글은 이어서 ‘새들’의 의미를 다룹니다. 새들은 물에서 나오지 않고 하늘을 날며, 이는 생각이 지식의 차원을 넘어 이성과 지성의 차원으로 올라간 상태를 뜻합니다. 이사야에 ‘동쪽에서 부르는 새’는 사랑의 근원에서 나오는 지적 인식을 뜻하며, 예레미야에서 새들이 날아가 버린 상태는 지성과 판단력이 사라진 황폐한 상태를 뜻합니다.

 

에스겔의 백향목 아래 깃드는 새들의 모습은, 진리의 질서가 세워질 때 지성과 이해가 그 안에서 안식을 얻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는 억지로 붙잡힌 생각이 아니라, 진리의 그늘 아래에서 자연스럽게 머무는 이해입니다. 호세아에서 들짐승과 새들과 기는 것들과 언약을 맺는 장면도 같은 맥락입니다. 주님은 인간 안의 모든 층위, 곧 감각적, 자연적, 지적 기능과 새 질서를 맺으십니다.

 

그래서 이 글은 강조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짐승과 새는 자연적 존재가 아닙니다. 만일 그것들이 문자 그대로의 동물이라면, 주님께서 그들과 언약을 맺으신다는 말은 성립할 수 없습니다. 이 언약은 인간 안의 생명 구조와 맺는 언약입니다.

 

AC.40은 다섯째 날의 생명이 단순한 ‘생물의 창조’가 아니라, 기억-지식과 지성의 생명화를 뜻한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지식은 버려지지 않고, 지성은 억제되지 않으며, 모든 것은 주님에게서 나오는 진리의 흐름 안에서 새롭게 살아납니다. 이 글은 신앙이 무지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참된 질서 안에서 지성과 지식을 되살리는 과정임을 깊이 있게 보여 줍니다.

 

 

 

AC.41, 창1:20, ‘사람 본성에 속한 것’ vs '주님에게서 오는 것'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창1:20) AC.41 사람의 본성(own, proprium)에 속한 것은 그 자체로는 생명이 없으며, 그것을 눈으로 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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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 창1:20,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AC.39-41)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And God said, Let the waters cause to creep forth the creeping thing, the living soul; and let fowl fly above the earth upon the f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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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And God said, Let the waters cause to creep forth the creeping thing, the living soul; and let fowl fly above the earth upon the faces of the expanse of the heavens. (1:20)

 

AC.39

 

큰 광명체들이 불이 붙어 속 사람 안에 놓이고, 겉 사람이 그 빛을 받게 되면, 그러면 사람은 비로소 살기 시작합니다. 그 이전까지는 그를 가리켜 거의 살아있다 할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그때는 그가 선을 행해도 그 선은 자기에게서 나온 걸로 알았고, 진리를 말해도 그 진리 역시 자기에게서 나온 거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사람이란 자기 자신으로서는 죽어 있으며, 그 안에는 악과 거짓밖에 없기 때문에, 자기에게서 나오는 건 그게 무엇이든 생명이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로부터는 그 자체로 선한 그런 선을 절대로 행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선한 것을 생각하거나, 선한 것을 원하거나, 따라서 선한 것을 행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주님에게서만 온다는 사실은, 신앙의 교리로 보아도 누구에게나 분명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마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After the great luminaries have been kindled and placed in the internal man, and the external receives light from them, then the man first begins to live. Heretofore he can scarcely be said to have lived, inasmuch as the good which he did he supposed that he did of himself, and the truth which he spoke that he spoke of himself; and since man of himself is dead, and there is in him nothing but what is evil and false, therefore whatsoever he produces from himself is not alive, insomuch that he cannot, from himself, do good that in itself is good. That man cannot even think what is good, nor will what is good, consequently cannot do what is good, except from the Lord, must be plain to everyone from the doctrine of faith, for the Lord says in Matthew:

 

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13:37) He that soweth the good seed is the son of man (Matt. 13:37).

 

또한 선은 오직 하나뿐인 참된 선의 근원에서만 올 수 있는데, 주님께서는 다른 곳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Nor can any good come except from the real fountain of good, which is one only, as he says in another place: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18:19) None is good save one, God (Luke 18:19).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사람을 다시 살리실 때, 곧 거듭남으로 생명으로 일으키실 때에는, 처음에는 사람이 자기가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하도록 허락하십니다. 이때 사람은 달리 생각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며, 그런 방식이 아니고서는 그를 이끌어 나중에 모든 선과 모든 진리가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믿고, 더 나아가 퍼셉션으로 알 수 있도록 인도하실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동안, 그의 진리와 선은 ‘(tender grass), ‘씨 맺는 채소(herb yielding seed), 그리고 마지막으로 ‘열매 맺는 나무(tree bearing fruit)에 비유되는데, 이것들은 모두 생명이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가 사랑과 신앙으로 생명을 얻게 되고, 자기가 행하는 모든 선과 자기가 말하는 모든 진리가 주님께서 이루시는 것임을 믿게 되면, 그는 먼저 ‘물 속의 기는 것들(creeping things of the water)과 ‘땅 위를 나는 새들(fowls which fly above the earth)에 비유되고, 또한 ‘짐승들(beasts)에 비유되는데, 이것들은 모두 생명이 있는 것들이며, 이것들을 가리켜 ‘생물(living souls)이라고 합니다. Nevertheless when the Lord is resuscitating man, that is, regenerating him, to life, he permits him at first to suppose that he does what is good and speaks what is true from himself, for at that time he is incapable of conceiving otherwise, nor can he in any other way be led to believe, and afterwards to perceive, that all good and truth are from the Lord alone. While man is thinking in such a way his truths and goods are compared to the “tender grass,” and also to the “herb yielding seed,” and lastly to the “tree bearing fruit,” all of which are inanimate; but now that he is vivified by love and faith, and believes that the Lord works all the good that he does and all the truth that he speaks, he is compared first to the “creeping things of the water,” and to the “fowls which fly above the earth,” and also to “beasts,” which are all animate things, and are called “living souls.”

 

 

해설

 

이 글은 넷째 날 이후에 비로소 ‘생명’이 시작된다는 점을 인간의 거듭남 관점에서 분명히 밝힙니다. 앞선 단계들에서 사람은 빛을 받고, 선과 진리를 배우며, 겉으로는 신앙적이고 선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상태를 아직 ‘살아있다’, 즉 ‘살아있는 상태’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그 사람이 여전히 선과 진리의 근원을 자기 자신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단호하게 말합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으로서는 죽어 있으며, 그 안에는 악과 거짓밖에 없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인간을 비하하려는 표현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을 정확히 규정하는 말입니다. 생명은 주님에게서만 오기 때문에, 그 근원과 단절된 상태에서는 아무리 선해 보이는 행위도 본질적으로는 생명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는 참된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이 점은 성경 말씀으로도 확증됩니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이시며, 선한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라는 주님의 말씀은, 선과 진리의 근원이 인간이 아니라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들을 단순한 교리적 인용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구조를 설명하는 핵심 근거로 사용합니다.

 

그럼에도 이 글은 매우 중요한 전환을 보여 줍니다. 주님은 사람을 거듭남으로 이끄실 때, 처음부터 그에게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까 그런 성숙한 태도를 요구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이지요. 오히려 처음에는 사람이 자기가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하도록 허락하십니다. 이는 사람의 한계 때문이며, 동시에 주님의 지혜 때문입니다. 사람은 그런 단계가 아니고서는 다음 단계로 인도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상태에서 사람의 선과 진리는 연한 풀과 씨 맺는 채소, 그리고 열매 맺는 나무에 비유됩니다. 이것들은 성장과 생산성을 지니고 있지만, 아직 못 움직이는, 생명 없는 것들로 묘사됩니다. 이는 선과 진리가 아직 사랑과 신앙의 생명으로 살아 움직이지 않는 상태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준비는 되었지만, 아직 불이 붙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러나 사랑과 신앙이 결합하고, 사람이 선과 진리의 주체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게 될 때는, 상황은 근본적으로 달라집니다. 그때부터 사람은 생명 있는 존재로 묘사됩니다. 물 속의 기는 것들, 하늘을 나는 새들, 그리고 짐승들은 모두 움직이고, 반응하고, 생명을 표현하는 존재들입니다. 이때 비로소 사람은 ‘생물(living souls)이 됩니다.

 

이 글은 거듭남이 단번에 이루어지는 사건이 아니라, 매우 섬세한 주님의 섭리 안에서 단계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임을 보여 줍니다. 사람의 오해조차도 주님은 사용하십니다. 자기가 선을 행한다고 생각하는 그 상태조차, 더 깊은 진리와 퍼셉션으로 이끌기 위한 통로가 됩니다. 그래서 이 글은 인간의 무능을 말하면서도, 동시에 주님의 자비와 지혜를 가장 깊이 드러내는 글입니다.

 

 

 

AC.40, 창1:20, ‘물들이 번성하게 하는 것들’, '새들'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창1:20) AC.40 ‘물들이 번성하게 하는 것들’(creeping things which the waters bring forth)은 겉 사람에 속한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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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 창1:18-19,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18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9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And to rule in the day, and in the night, and to distinguish between the 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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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love to the Lord’와 ‘love toward the neighbor’의 차이는 단순한 번역상의 문제가 아니라, 스베덴보리 신학 전체를 떠받치는 구조적 차이입니다. 이 두 표현에서 전치사가 다른 것은 우연이 아니라 의도된 것으로, 사랑의 방향과 작동 방식을 구분하기 위함입니다. ‘to’는 직접적인 향함, 곧 근원으로의 수직적 방향을 나타내고, ‘toward’는 어떤 방향을 따라 나아가는 움직임, 곧 삶 속에서 전개되는 수평적 흐름을 나타냅니다.

 

love to the Lord’는 사람의 사랑이 직접 주님을 향해 올라가는 것을 뜻합니다. 이는 경외, 신뢰, 의존, 순종, 예배를 포함하는 사랑으로, 인간 안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먼저 사람 안에 심어 주셔야만 가능한 사랑이며, 그래서 이 사랑은 언제나 위로부터 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사랑을 모든 생명의 근원으로 보며, 모든 참된 사랑의 방향을 정하는 원천으로 이해합니다.

 

반면 ‘love toward the neighbor’는 주님을 향한 사랑이 삶의 관계 속으로 흘러나오는 방식을 가리킵니다. 이 사랑은 구체적이고 실천적이며, 이웃을 이해하고 존중하고 돕는 실제 삶의 행위 속에서 드러납니다. 중요한 점은, 이것이 단순한 인간적 친절이나 도덕적 선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이웃 사랑은 언제나 주님 사랑에서 비롯된 결과이며, 그래서 직접적인 향함이 아니라 ‘toward’, 곧 방향성을 지닌 흐름으로 표현됩니다.

 

이 두 사랑의 관계를 신학적으로 정리하면, 주님 사랑은 근원이고 이웃 사랑은 그 근원에서 흘러나온 결과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이웃을 참으로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경우의 이웃 사랑은 결국 자기 만족이나 인정 욕구, 혹은 도덕적 우월감으로 변질됩니다. 반대로, 이웃 사랑 없이 주님 사랑을 말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말이나 생각에 머무를 뿐, 생명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두 사랑을 결코 분리하지 않으면서도, 결코 동일시하지도 않습니다. 주님 사랑은 사랑의 방향을 결정하고, 이웃 사랑은 그 방향이 올바른지를 검증합니다. 다시 말해, 주님 사랑은 보이지 않지만, 이웃 사랑은 반드시 보입니다. 이웃 사랑은 주님 사랑의 시험대이며, 그 사랑이 실제로 살아 있는지를 드러내는 자리입니다.

 

삶의 차원에서 보면,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생명의 근원이 자기 자신에게 있지 않음을 인정하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은, 그 고백이 실제 관계 속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 둘은 서로를 필요로 하며, 어느 하나도 홀로 설 수 없습니다.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love to the Lord’는 사랑의 근원이고, ‘love toward the neighbor’는 그 사랑이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AC의 언어로 말하면, 주님 사랑은 하늘을 향한 방향이고, 이웃 사랑은 그 하늘이 땅 위에 세워지는 방식입니다.

 

이 구분을 붙들고 계시면, 신앙과 사랑, 그리고 행위의 관계가 구조적으로 정리되어 더 이상 혼동되지 않을 것입니다.  

 

2026-01-14(D4)

 

 

 

스베덴보리는 어떻게 세상을 떠날 때까지 27년간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었나?

저는 지난 2018년 11월부터 스베덴보리 관련 블로그를 시작했습니다만... 지금까지 구독자도, 그리고 글 조회 수나 좋아요 수도 여전히 한 자리 내지는 없기도 합니다. 저는 지난 만 7년을 정말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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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에벨(Eber, 창10:24-25, 창11:14-16)의 때를 기준으로 나누나?

스베덴보리가 AC.470에서 ‘이 장부터 11장, 곧 에벨의 때까지 이름들은 결코 사람을 뜻하지 않고 실제적인 것들, 곧 상태들을 뜻한다’고 단언하는 것은, 창세기 1–11장을 해석하는 데 있어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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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5:22)

 

AC.519

 

그 당시에 태고교회와 그 뒤를 이은 교회들에서 퍼셉션의 대상이 되었던 것들로부터 교리를 구성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는 그러한 교리가 규범, 곧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진리인지를 알기 위한 규범으로 쓰이게 하려고 그런 건데, 이 일을 한 사람들을 가리켜 ‘에녹(Enoch)이라 하며, 이것이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였다(and Enoch walked with God)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구성한 교리를 또한 그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이는 ‘에녹’이라는 이름의 뜻이 ‘가르치다(instruct)라는 데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또한 이는 ‘동행하다(walk)라는 표현의 의미와, 그가 여호와가 아닌 하나님과 동행하였다(walked with God, not with Jehovah)라고 하는 사실에서도 분명해집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walk with God)은 신앙의 교리에 따라 가르치고, 또 살아가는 것을 뜻하지만, ‘여호와와 동행하는 것(walk with Jehovah)은 사랑의 삶(life)을 사는 것, 곧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무엇을 하든 그 동기가 ‘사랑하기 때문에’라는 것이지요. ‘동행하다(walk)라는 말은 살아가는 걸 의미하는 상용 표현으로, ‘율법 안에서 살아가다(walk in the law), ‘규례 안에서 살아가다(walk in the statutes), ‘진리 안에서 살아가다(walk in the truth)와 같은 표현이 그러합니다. ‘동행하다(walk)라는 표현은 본래 길과 관련된 말로서, 진리와 관련되며, 따라서 신앙이나 신앙의 교리와 관련됩니다. 성경에서 ‘동행하다(walking)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다음의 말씀들에서 어느 정도 분명해집니다. There were some at that time who framed doctrines from the things that had been matters of perception in the most ancient and succeeding churches, in order that such doctrine might serve as a rule whereby to know what was good and true: such persons were called “Enoch.” This is what is signified by the words, “and Enoch walked with God”; and so did they call that doctrine; which is likewise signified by the name “Enoch,” which means to “instruct.” The same is evident also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expression to “walk,” and from the fact that he is said to have “walked with God,” not “with Jehovah”; to “walk with God” is to teach and live according to the doctrine of faith, but to “walk with Jehovah” is to live the life of love. To “walk” is a customary form of speaking that signifies to live, as to “walk in the law,” to “walk in the statutes,” to “walk in the truth.” To “walk” has reference properly to a way, which has relation to truth, consequently to faith, or the doctrine of faith. What is signified in the Word by “walking,” may in some measure appear from the following passages.

 

[2] 미가에서는 In Micah: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6:8) He hath showed thee, O man, what is good, and what doth Jehovah require of thee, but to do judgment and the love of mercy, and to humble thyself by walking with thy God? (Micah 6:8)

 

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walk with God)은 여기서 말씀하신 것들을 따라 사는 걸 뜻합니다. 다만 여기서는 ‘하나님과(with God)라고 되어 있고, 에녹에 대해서는 또한 ‘하나님으로부터(from with God)라는 의미를 지닌 다른 말이 쓰여, 그 표현이 다소 중의적으로 사용됩니다. 시편에서는 where to “walk with God” signifies to live according to the things here indicated; here, however, it is said “with God,” while of Enoch another word is used which signifies also “from with God,” so that the expression is ambiguous. In David: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56:13) Thou hast delivered my feet from impulsion, that I may walk before God in the light of the living, (Ps. 56:13)

 

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하나님 앞에 다니는 것(walk before God)은 신앙의 진리 안에서 동행하는 것을 뜻하며, 이것이 곧 ‘생명의 빛(light of the living)입니다. 이와 같이 이사야에서는 where to “walk before God” is to walk in the truth of faith, which is the “light of the living.” In like manner in Isaiah: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9:2) The people that walk in darkness see a great light. (Isa. 9:1)

 

라고 말합니다. 또 주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So the Lord says by Moses: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니라 (26:12) I will walk in the midst, and will be your God, and ye shall be my people, (Lev. 26:12)

 

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율법의 교리에 따라 사는 것을 뜻합니다. signifying that they should live according to the doctrine of the law.

 

[3] 예레미야에서는 In Jeremiah:

 

그들이 사랑하며 섬기며 뒤따르며 구하며 경배하던 해와 달과 하늘의 뭇별 아래에서 펼쳐지게 하리니 (8:2) They shall spread them before the sun, and the moon, and to the armies of the heavens, whom they have loved, and whom they have served, and after whom they have walked, and whom they have sought, (Jer. 8:2)

 

라고 말씀하시는데, 여기서는 사랑의 것들과 신앙의 것들이 분명히 구별됩니다. 사랑의 것들은 ‘사랑하며(loving)와 ‘섬기며(serving)로 표현되고, 신앙의 것들은 ‘뒤따르며(walking)와 ‘구하며(seeking)로 표현됩니다. 모든 예언서에서는 모든 표현이 정확하게 사용되며, 어느 한 용어도 다른 용어를 대신하여 쓰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씀에서 ‘여호와와 동행하다(walk with Jehovah) 또는 ‘여호와 앞에서 행하다(before Jehovah)라는 것은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where a manifest distinction is made between the things of love, and those of faith; the things of love being expressed by “loving” and “serving”; and those of faith by “walking” and “seeking.” In all the prophetical writings every expression is used with accuracy, nor is one term ever used in the place of another. But to “walk with Jehovah,” or “before Jehovah,” signifies, in the Word, to live the life of love.

 

 

해설

 

이 글은 ‘에녹’의 교회가 왜 태고교회 흐름 속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지를 매우 분명하게 밝혀 줍니다. 에녹의 교회는 퍼셉션 그 자체로 살아가던 교회가 아니라, ‘퍼셉션의 내용으로부터 교리를 구성하여 보존하려 했던 교회’였습니다. 퍼셉션이 점차 약화되면서,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진리인지를 즉각적으로 알 수 없게 되자, 그것을 대신할 규범이 필요해졌고, 그 결과 교리가 형성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교리를 단순한 인간적 산물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는 주님의 섭리 안에서 허락된 보존의 방식이었습니다. 에녹이라 불린 사람들은, 이전 교회들에서 살아 있던 퍼셉션의 내용을 붙잡아, 그것을 가르칠 수 있는 형태로 정리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에녹(Enoch)이라는 이름 자체가 ‘가르치다(instruct)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구분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다’와 ‘여호와와 동행하다’의 차이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신앙의 교리에 따라 살고 가르치는 것을 뜻합니다. 반면 여호와와 동행하는 것은 사랑의 삶, 곧 쓰임새의 삶을 직접 사는 것을 뜻합니다. 이 구분은 결코 사소하지 않습니다. 이는 교회의 중심이 퍼셉션과 사랑의 삶에서 교리와 신앙의 삶으로 이동했음을 보여 주는 결정적 표시입니다.

 

동행하다(walk)라는 표현 자체도 이 변화를 잘 드러냅니다. 동행은 길과 관련된 말이며, 길은 진리와 연결됩니다. 그래서 말씀에서 ‘동행하다’는 주로 신앙과 교리, 진리의 길을 따라 사는 것을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러 예언서의 구절들을 통해, 이 표현이 얼마나 일관되고 정확하게 사용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사랑과 관련된 표현과, 신앙과 관련된 표현이 결코 뒤섞여 쓰이지 않는다는 점이 특히 강조됩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글은 오늘날 교회의 현실을 깊이 비추는 거울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감정적 친밀감이나 개인적 체험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에녹의 교회가 보여 주는 동행은, ‘교리를 통해 신앙의 방향을 유지하는 삶’입니다. 이는 살아 있는 퍼셉션이 약해진 시대에, 신앙을 지키는 매우 현실적인 방식입니다.

 

동시에 이 글은 교리의 한계도 암시합니다. 교리는 생명을 대신할 수는 없지만, 생명이 사라지는 것을 막는 그릇이 될 수는 있습니다. 에녹의 교회는 바로 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퍼셉션이 직접 작동하던 시대는 지나가고 있었지만, 그 진리들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도록, 교리라는 형태로 다음 시대에 전해지도록 준비한 것입니다.

 

결국 AC.519는 에녹의 교회를 ‘보존의 교회’, ‘가르침의 교회’로 규정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말은, 신앙의 교리를 따라 살고 그것을 가르친다는 뜻이며, 이는 퍼셉션이 약화된 시대 속에서도 주님께서 교회의 생명을 이어 가시는 섭리의 한 방식이었습니다. 이 글은 교회 역사뿐 아니라, 오늘 우리의 신앙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성찰하게 만드는 깊은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AC.518, 창5: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C.518-519)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nd Enoch walked with God after he begat Methuselah three hundred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창5:22) AC.518 ‘하나님과 동행하며’(walk with 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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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nd Enoch walked with God after he begat Methuselah three hundred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5:22)

 

AC.518

 

하나님과 동행하며(walk with God)는 신앙에 관한 교리를, ‘자녀들을 낳았으며(begat sons and daughters)는 진리와 선에 관한 교리적인 것들을 의미합니다. To “walk with God” signifies doctrine concerning faith. That he “begat sons and daughters” signifies doctrinal matters concerning truths and goods.

 

 

해설

 

이 글은 ‘에녹(Enoch)이라는 교회가 지닌 성격을 아주 분명한 방향으로 규정해 줍니다. 여기서 핵심은, 이전 교회들처럼 퍼셉션 그 자체가 중심이 아니라, ‘교리(doctrine)가 중심으로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표현을 흔히 삶의 친밀함이나 경건의 정서로 읽기 쉽지만, 스베덴보리는 이를 신앙에 관한 교리로 해석합니다. 이는 에녹의 교회가 신앙의 내용을 ‘체계적으로 보존하고 전수하는 단계’에 이르렀음을 뜻합니다.

 

퍼셉션이 살아 있던 초기 태고교회에서는,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굳이 교리로 정리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퍼셉션, 곧 선과 진리에 관한 인식이 매 순간 직접적이었기 때문이었고, 그냥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서 말입니다. 그러나 퍼셉션이 점차 약화되면서 선과 진리에 관한 순간순간, 혹은 특정 상황에 대한 주님의 뜻을 알기가 어렵게 되었고, 이걸 그대로 두었다가는 교회의 생명이 사라질 위험이 커졌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교리가 필요해졌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말이 교리를 뜻한다는 것은, 신앙이 더 이상 즉각적인 인식, 곧 퍼셉션이 아니라 ‘배워야 하고 지켜야 할 내용’으로 정리되기 시작했음을 보여 줍니다.

 

자녀들을 낳았다는 표현 역시 같은 흐름 안에 놓여 있습니다. 앞선 교회들에서는 자녀들이 퍼셉션된 진리와 선 자체를 가리켰다면, 여기서는 그것들이 ‘교리적 형태’로 나타납니다. 즉, 퍼셉션으로 그때그때 직접 인식하는 진리와 선이 아니라, 가르칠 수 있고 전달할 수 있는 교리로서의 진리와 선으로 말입니다.

 

이 점에서 에녹의 교회는 매우 중요한 전환점에 있습니다. 퍼셉션의 생명은 약해졌지만, 그 대신 교리를 통해 신앙의 핵심을 보존하려는 시도가 시작됩니다. 이것은 쇠퇴의 증거이면서 동시에 은혜의 방편입니다. 생명이 사라져 가는 상황 속에서, 주님께서는 교리를 통해 다음 시대를 위한 씨앗을 남기신 것입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글은 신앙의 두 가지 양식을 분명히 구분해 줍니다. 하나는 살아 있는 퍼셉션에 의해 이끌리는 신앙이고, 다른 하나는 교리를 통해 길을 찾는 신앙입니다. 천사들처럼 퍼셉션으로 하는 신앙생활이 계속 가능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전자가 사라졌다고 해서 후자가 무가치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점점 어두워져 가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는 에녹의 교회처럼, 교리는 다음 시대를 준비하는 유일한 ‘보존의 그릇’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모습도 이와 닮아 있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말할 때, 마음의 느낌이나 개인적 체험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동행을 교리로 설명합니다. 이는 신앙이 감정이나 분위기에 머무르지 않고, 분명한 내용과 구조를 가져야 함을 일깨워 줍니다.

 

결국 AC.518은 에녹의 교회를 ‘교리의 교회’로 또렷하게 규정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교리 속에서 유지되고, 자녀들은 그 교리가 담고 있는 진리와 선입니다. 이 글은 퍼셉션이 약화된 시대에도, 주님께서 교리를 통해 신앙의 생명을 이어 가신다는 사실을 조용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AC.519, 창5:22, ‘하나님과 동행하며’(walk with God)의 속뜻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22) AC.519 그 당시에 태고교회와 그 뒤를 이은 교회들에서 퍼셉션의 대상이 되었던 것들로부터 교리를 구성한 사람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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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17, 창5:21, ‘에녹’(Enoch) 이야기를 시작하며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창5:21) AC.517 ‘에녹’(Enoch)이라 하는 교회의 퀄러티는 이어지는 절들에서 설명드리겠습니다. The quality of the church “Enoch” is described in the following ver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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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5:21)

 

AC.517

 

에녹(Enoch)이라 하는 교회의 퀄리티는 이어지는 절들에서 설명드리겠습니다. The quality of the church “Enoch” is described in the following verses.

 

 

해설

 

이 문장은 새로운 내용을 제시하기보다, ‘독자의 시선을 앞으로 이끄는 표지판’ 역할을 합니다. 지금까지는 이름들을 통해 교회의 연속과 단계만을 간략히 언급해 왔다면, 여기서부터는 ‘에녹’의 교회가 지닌 고유한 성격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즉, 단순한 나열에서 벗어나 ‘질적 설명’으로 전환된다는 신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굳이 이 문장을 따로 적어 둔 것은, ‘에녹’이 태고교회의 흐름 속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앞선 교회들은 비교적 자연스러운 쇠퇴의 연속선상에 놓여 있었지만, 에녹의 교회에서는 주님께서 어떤 것을 ‘보존하시는 섭리’가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래서 그는 성급히 설명하지 않고, 다음 절들에서 차분히 그 성격을 풀어 갈 준비를 합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문장은 말씀을 읽는 태도에 대한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어떤 대목에서는 서둘러 결론을 내리기보다, 이어질 설명을 기다리며 흐름을 따라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에녹의 교회는 그렇게 ‘기다리며 읽어야 하는’ 지점에 놓여 있다 할 수 있습니다.

 

결국 AC.517은 태고교회의 이야기 속에서 ‘에녹이라는 전환점이 시작됨을 알리는 예고’입니다. 다음 절들에서 퍼셉션이 어떻게 보존되고, 교회의 생명이 어떤 방식으로 이어지게 되는지가 본격적으로 밝혀질 것을 준비시키는 한 문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516, 창5:21,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AC.516-517)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And Enoch lived sixty and five years, and begat Methuselah. (창5:21) AC.516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에녹’(Enoch)은 일곱 번째 교회를, ‘므두셀라’(Methuselah)는 여덟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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