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이야기 세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부터는 창세기 본문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들어가기 앞서, 거듭 당부드리는 몇 가지입니다.

 

첫째, 사람의 영과 육은 정말 다르듯 말씀의 영과 육, 곧 속뜻과 겉 글자의 뜻은 정말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둘째, 말씀(the Word)은 어떻게든 주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려는 인간을 또한 어떻게든 주님과 연결되어 있게 하시려는 주님의 마음, 주님의 사랑이라는 사실입니다.

 

셋째, 주님의 관심은 오직 사람의 구원, 곧 거듭나서 천국에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데 있습니다. 말씀은 한마디로, 거듭남에 관한 책이라는 사실입니다.

 

넷째, 그래서 말씀은 그 주된 포커스가 오직 주님과 천국, 그리고 교회에 맞추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우선, 이 정도만 꼭 붙드셔도 앞으로 읽으시게 될 내용들을 향해 잘 준비된 마음, 착하고 좋은 마음 밭의 상태를 잘 유지하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주님의 신성은 이런 마음 상태라야 한 방울 누수 없이 고스란히 다 담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네, 그럼 시작합니다.

 

우리가 다 잘 아는 창세기 1장은 천지창조의 장, 천지를 창조하시고, 사람을 지으신 첫 육 일간 기록입니다. 이것이 겉 글자의 의미 그대로이며, 저 역시 사십여 년 전인 대학생 시절, 창조과학회에 심취, 공대생으로서 뭔가 과학적으로도 이론적 뒷받침이 되는 것 같아 더 깊이 들어갔던 생각이 납니다 ^^

 

그러면서도 당시 아인슈타인과 ‘코스모스’의 저자, 칼 세이건의 글 등을 통해, 한편으로는 미니, 마이크로, 분자, 원자, 중성자, 소립자, 미립자의 세계로, 또 다른 한편으로는 광활한 우주, 끝도 없는 유니버스의 세계로 등 양쪽 극단의 지식들을 조금, 아주 조금 접하고 제 안에 부인할 수 없었던 의문점들이 있었지요.

 

여기서 이런 얘길 말씀드리려는 건 아니지만... 한 가지만 말씀드리면, 우주 저 수많은 은하 중 비교적 가깝다고 하는, 250만 광년(光年, 빛이 1년 동안 가는 거리) 거리에 있는 안드로메다 은하만 해도 우리 태양계의 태양에 해당하는 항성 수가 1조 개... 이런 헤아릴 수 없는 별들을 그저 이 지구라는 조그마한 행성 하나를 밤에 반짝반짝 비추기 위한 용도로만 지으셨다고? 너무 비능률, 비효율적인 게 아닐까? 하는,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건 있었습니다 ^^

 

네, 이 얘긴 이쯤하고... 다시 창세기 1장입니다.

 

어쨌든 창세기 1장은 겉뜻으로는 창조 첫 육 일간 기록입니다. 그러나 속뜻으로는, 한 사람의 거듭남 전 과정과 관련된 여섯 단계 또는 상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지난번 천국 이야기 #3, ‘천국은 상태(狀態, state)의 나라’에서 말씀드렸듯 창세기를 포함, 말씀도 역시 ‘상태’ 관점에서 보시면 좋습니다.

 

사람의 거듭남을 무슨 계단처럼 딱딱 구분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대략적으로 보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해지는 노을, 아름다운 색조가 그레디언트하게 연이어져 딱딱 구분은 어려워도 대략적으로는 나눌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여기서 잠깐, 거듭난 사람과 거듭나지 않은 사람 간 한 가지 차이점을 말씀드리면요, 거듭난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새 의지(will)와 새 이해(understanding, 이성, 사고력, 이해하는 능력)를 받아 그것으로 주님의 선을 행할 마음을 먹고, 주님의 진리를 말하게 됩니다. 그러나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의지라기보다는 탐욕으로 기우는 갈망(yearning)이 있고, 이성이라기보다는 잔머리에 가까운 머리굴림(reasoning)이 있습니다. 네, 두 사람은 이렇게 다릅니다.

 

첫 번째 상태는 거듭남이 시작되기 전 상태입니다. ‘혼돈’, ‘공허’, ‘흑암’이라고 하는 상태입니다. 이때 주님의 자비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입니다.

 

두 번째 상태는 주님의 것과 사람의 것 사이, 어떤 구분이 생기는 상태로서, 주님의 것은 ‘리메인스’(remains)라 하여, 모든 사람의 영유아기를 비롯, 어린 시절에 주님으로부터 이슬비처럼 내려 조용히 쌓이는 주님의 선과 진리입니다. 주님은 이것을 모든 사람의 속 사람 안에 영구 보관하시며, 나중에 이걸 가지고, 각 사람의 거듭남의 여정을 도우십니다. 이 리메인스는 사람이 어떤 큰 시험, 불행, 혹은 슬픔 등을 겪을 때, 비로소 깨어나며, 그 사람의 인생에서 이 리메인스가 깨어나면, 그때까지 그가 정신없이 추구하던 모든 세상에 속한 것들은 휴면상태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 두 번째 상태 때, 주님께 속한 것과, 사람에게 속한 것 사이, 구분이 일어납니다. 참고로, 십일조의 기원이 바로 이 리메인스입니다.

 

세 번째 상태는 신앙의 말도 하고, 체어리티(charity, 이웃 사랑, 선행, 기부, 자선)도 실천하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자기밖에 모르던 사람이 기특하게도 전에 안 하던 이쁜 짓(?)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 안에 아직 활기, 생명력이 없습니다. 이런 걸 자기가 하는 줄로, 자기가 대단해서 하는 줄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풀’, ‘씨 맺는 채소’, ‘열매 맺는 나무’입니다.

 

네 번째 상태는 애정 어린 사랑의 사람, 조명받은 신앙의 사람이 되는 상태입니다. 드디어 속 사람 안에 신앙의 불, 체어리티의 불이 켜집니다. ‘두 큰 광명체’입니다.

 

다섯 번째 상태는 자기가 하는 신앙의 말과 체어리티의 행위가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음을 아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비로소 활기와 생명력을 갖는 상태입니다. ‘바다의 물고기’, ‘하늘의 새’입니다.

 

여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의 말을 할 때도, 사랑의 선을 행할 때도 주님을 사랑하여 마음에서 우러나서 하는 상태입니다. ‘생물’, ‘짐승’입니다. 비로소 그는 영적 인간이 되었으며, 이런 그를 가리켜 ‘형상’(image)이라 합니다. 그의 영적 삶은 ‘먹을거리’라고 하는, 신앙의 지식과 체어리티의 일로 더욱 더 밝아지고, 지속되며, 그의 몸과 감각 등 자연적 삶 역시 그렇게 밝아지고, 지속됩니다. 이때 그의 겉 사람은 이런 그의 변화를 저항하며, 그래서 그의 겉 사람과 속 사람 사이 전투가 일어납니다.

 

이 마지막 상태인 여섯 번째 상태 끝에 가서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데, 이제 도저히 이 사람이 예전 삶으로 유턴할 가망이 없다 판단한, 그의 평생에 그를 지옥으로 끌어당긴 악한 영들은 그를 포기하고 물러갑니다. 전투란 서로 상대가 있어야 하는데, 악한 영들이 더 이상 싸움을 포기하고 물러감으로 더 이상 싸울 일이 없게 됩니다. 그래서 드디어 쉴 수 있게 되며, 그래서 드디어 주님이 쉬실 수 있는 상태, 안식의 상태에 들어갑니다. 이것이 안식일의 속뜻입니다. 우리의 영적 전투는 사실은 우리 대신 주님이 싸우신 싸움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안식일인 것이며, 이 안식의 상태가 바로 일곱 번째 상태입니다.

 

이 일곱 번째 상태는 지상에서는 몇몇 성인(聖人)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 천국의 상태입니다. (사실, 후세를 사는 우리는 이분들을 성인이라고 하지만 정작 본인들은 이런 호칭에 대해 기겁을 하고, 정색을 할 겁니다...) 태고(太古, the most ancient) 시대, 아담 교회 때 사람들이 바로 이런 상태였고, 그래서 그때는 천사들도, 그리고 주님도 친히 지상의 사람들과 직접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었습니다. 네, 그런 상태가 바로 일곱 번째 안식의 상태이며, 이런 사람을 가리켜 천적(天的, celestial) 인간이라 합니다. 여섯 번째 상태에 도달한 인간을 영적 인간이라 하고, 여기서 악한 영들이 포기하고 물러간 사람들을 천적 인간이라 합니다.

 

참고로, 그래서 영적 인간의 이야기인 창세기 1장은 주님에 대한 호칭이 ‘하나님’이고, 천적 인간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2장은 주님에 대한 호칭이 ‘여호와’이신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겨우 첫 번째 상태에, 그중에서 일부가 두 번째, 그중에서, 그중에서... 여섯 번째 상태만 해도 아주아주 극소수입니다.

 

창세기 이야기의 오프닝, 개략을 너무 많이, 자세히 다루었나요? 앞으로 장별, 절별 자세히 다루는 방식은 좀... 순서대로 나가되 특별한 주제, 이슈 중심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마 이런 얘긴 생전 처음 듣는 분들이 많으실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우리가 창세기를 읽을 때, 우리 안의 천사들은 저렇게, 저런 속뜻으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영은 영, 육은 육인 것처럼, 우리는 육의 글자를 읽을 때, 천사들은 영의 글자, 곧 속뜻으로 읽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재림은 말씀의 속뜻으로 오십니다. 이 표현이 참 어려우실 듯한데요... 네, 어쨌든 그래서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하며, 기다리시는 아름다운 분들마다 어서 이 말씀의 속뜻 공부를 좀 하셔야 합니다. 네, 그래서입니다 ^^ 아멘아멘, 할렐루야!

2021-11-15(D2)-창세기이야기(3), '창1 천지창조 이야기는 사람의 거듭남에 관한 이야기'.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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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13

 

1562. 5절,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Verse 5. And Lot also, who went with Abram, had flock and herd, and tents.

 

아브람의 일행 롯도’, 주님 안에 있었던 겉 사람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겉 사람을 풍성하게 하는 것들을 각각 의미하며, ‘양과 소’는 겉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것들이고, ‘장막’은 그의 예배입니다. 이런 것들은 자신들을 속 사람으로부터 분리하고 있었습니다. And Lot also, who went with Abram” signifies the external man that was in the Lord; “had flock and herd, and tents” signifies those things in which the external man abounds; “flock and herd” are the external man’s possessions; “tents” are his worship: these things were separating themselves from the internal man.

 

 

1563. 아브람의 일행 롯도 And Lot also, who went with Abram.

 

이것이 ‘주님 안에 있었던 겉 사람을 의미함’은 롯(Lot)이 표상하는 바가 감각적인(sensuous) 사람, 같은 말이지만, 겉 사람임을 생각할 때, 분명합니다. That this signifies the external man that was in the Lord is evident from the representation of Lot as being the sensuous man, or what is the same, the external man.

 

누구나 다 그 안에 겉 사람과 속 사람이 있다, 혹은 같은 말이지만, 사람은 겉과 속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아는 얘깁니다. (※ 전에 말씀드린 내용에 대해 보시려면 AC.978, 994-995, 1015 참조) That there is an internal and an external in every man, or what is the same, that man is internal and external, is known to everyone within the church (concerning which see what has been said before, n. 978, 994–995, 1015).

 

겉 사람은 그 생명을 주로 속 사람, 즉, 영이나 혼으로부터 받습니다. The external man receives its life principally from the internal man, that is, from the spirit or soul.

 

겉 사람의 생명 자체가 일반적으로는 속 사람으로부터 옵니다. 그러나 이 생명은 겉 사람의 유기적 그릇들(organic vessels), 곧 속 사람 특유의 것들을 하나하나 자세히 담게 되어 있는, 겉 사람에게 있어 속 사람과 연결되어 있는 그릇들이 열리지 않는 한, 겉 사람한테 어떻게든 담길 수가 없습니다. Thence comes its very life in general; but this life cannot be received in its particulars, or distinctly, by the external man, unless its organic vessels are opened, which must be the recipients of the particulars and the singulars of the internal man.

 

※ 일단 무엇이든 뭘 담으려면 먼저 뚜껑이 열려야 하는데 안 열린다는 말이지요.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들은 오직 주님의 생명,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에 대해서만 열리기 때문입니다. 감각적이라고 다 무조건 나쁜 건 아닙니다. 겉 사람의 모든 감각적 즐거움도 그것이 주님으로 말미암으며, 주 안에서 그 쓰임새를 따라 누릴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활짝 열립니다. 그러나 반대로 악한 정욕과 자아와 세상을 사랑함으로 말미암는다면 그때는 열리지 않습니다. 그런 건 생명이라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지금 겉 사람의 생명이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데 둘 사이 무슨 불일치가 있어 그릇이 안 열리고, 그래서 속 사람의 생명이 겉 사람에게 흘러들 수가 없다는 얘깁니다.

 

수용체 노릇을 하게 될 이들 유기적 그릇들은 감각들, 특히 청각과 시각이라는 감각들을 사용하지 않으면 열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그릇들이 열리면 속 사람은 속 사람 특유의 것들을 가지고 그 안으로 흘러 들어갈 수 있습니다. These organic vessels, which are to be the recipients, are not opened except by means of the senses, especially those of hearing and sight; and, as they are opened, the internal man can flow in with its particulars and singulars.

 

그릇들은 감각들을 매개로 해서 지식과 즐거움, 기쁨들을 통해서 열립니다. 지식을 통해서는 이해에 속한 것들이, 즐거움과 기쁨을 통해서는 의지에 속한 것들이 열립니다. They are opened with the senses as the media, by means of knowledges [scientifica et cognitiones], and also by means of pleasures and delights; those belonging to the understanding by means of knowledges, and those belonging to the will by means of pleasures and delights.

 

[2] 이런 것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영적 진리와 함께 갈 수 없는 지식은 자기를 겉 사람한테로 슬그머니 밀어 넣을 것이며, 천적 선과 함께 갈 수 없는 만족과 기쁨도 그럴 것이라는 거, 육체적, 세속적, 그리고 땅에 속한 모든 것을 목적으로 삼는 것들의 경우도, 그런 것들이 목적이 될 때, 겉 사람을 밖으로, 아래로 끄집어내어 속 사람으로부터 제거되는 일이 반드시 일어난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From these things it may be seen that it must necessarily happen that such knowledges as cannot agree with spiritual truths will insinuate themselves into the external man; and that such pleasures and delights will insinuate themselves as cannot agree with celestial goods; as is the case with all those things which regard corporeal, worldly, and earthly things as the ends; which, when regarded as ends, draw the external man outward and downward, and so remove it from the internal man.

 

※ 즉, 영적, 천적, 그리고 주님을 향하지 않는, 그와는 정반대로, 육체와 세상, 세속을 향하는 것들은 겉과 속의 하나 됨은커녕, 오히려 분리와 제거의 운명에 처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먼저 흩어버리지 않으면 속 사람은 겉 사람과 하나 될 수가, 함께 갈 수가 없습니다. 속 사람이 겉 사람과 하나 되려면 반드시 이런 일들이 먼저 해결되어야 합니다. Wherefore, unless such things are first dispersed, the internal man cannot possibly agree with the external; so that before the internal man can agree with the external, such things must first be removed.

 

주님과 함께 이런 일들이 제거되거나 분리되는 바로 이런 것이 롯과 아브람 간 서로 헤어지는 걸로 표상되고 있습니다. That with the Lord these things were removed or separated is represented and signified by the separation of Lot from Abram.

 

2021-11-14(D1)-매일예배(2234, AC.1562-1563, 창13,5),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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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OIPV5Nf_w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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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14(D1)-제9권46호통429호.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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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장

전체로나 부분으로나 천국이 사람을 반영하는 것은

주님의 신적 인성에서 비롯된다

It Is from the Lord’s Divine Human

That Heaven as a Whole and in Part Reflects Man

 

81. 천국은 전체로나 부분으로나 주님의 신적 인성으로 말미암아 한 사람을 반영합니다. 그래서 천사들은 말하기를, 자기들은 주님 안에 있다 하며, 또 일부는 말하기를, 자기들은 주님의 몸 안에 있다 합니다. 그 의미는, 자기들은 주님의 사랑의 선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Because heaven as a whole and in part, from the Lord’s Divine human, reflects a man, the angels say that they are in the Lord; and some say that they are in his body, meaning that they are in the good of his love.

 

이것은 주님 자신 다음과 같이 가르치신 것입니다. And this the Lord himself teaches, saying,

 

4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6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7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8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9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요15:4-10) Abide in Me and I in you. As the branch cannot bear fruit of itself except it abide in the vine, so neither can ye, except ye abide in Me. For apart from Me ye can do nothing. Abide in My love. If ye keep My commandments ye shall abide in My love. (John 15:4–10)

 

 

82. 신성에 대한 이런 지각이 천국에는 있기 때문에, 천국 인플럭스(influx, 入流)를 받는 사람이면 누구나 하나님을 사람 모습으로 생각하는 능력이 그 안에 심겨져 있습니다. Because such a perception of the Divine exists in the heavens, to think of God as in a human form is implanted in every man who receives any influx from heaven.

 

그래서 고대인들이 주님을 그렇게 생각했고, 현대인들 역시 교회 안팎을 불문, 주님을 그렇게 생각합니다. Thus did the ancients think of him; and thus do the moderns think of him both outside of the church and within it.

 

단순한 사람들은 주님을 광채나는 마법사 에인션트 원으로 생각합니다. The simple see him in thought as the Ancient One in shining light.

 

그러나 이런 인사이트는 자기중심적 지성으로 악하게 살아 천국 인플럭스를 거절한 사람들한테는 소멸되었습니다. But this insight has been extinguished in all those that by self-intelligence and by a life of evil have rejected influx from heaven.

 

자기중심적 지성으로 그걸 소멸해온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원하는 반면, 악한 삶을 통해 그걸 소멸해온 사람들은 아예 하나님 자체를 원하지 않습니다. Those that have extinguished it by self-intelligence prefer an invisible God; while those that have extinguished it by a life of evil prefer no God.

 

둘 중 어느 쪽도 그런 인사이트가 존재한다는 걸 모릅니다. 그게 없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국에서 사람의 안으로 근본적으로 흘러들어오는 건 주님의 신성 그 자체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천국에 가기 위해 태어나는데, 하지만 신성에 대한 컨셉 없이는 아무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Neither of these are aware that such an insight exists, because they do not have it; and yet it is the Divine heavenly itself that primarily flows into man out of heaven, because man is born for heaven, and no one without a conception of a Divine can enter heaven.

 

 

83. 이런 이유로, 천국에 대한 컨셉이 전혀 없는, 즉 천국이 비롯되는 신성에 관한 컨셉이 전혀 없는 사람은 사후에 깨어나 천국의 첫 번째 문턱도 넘지 못합니다. For this reason he that has no conception of heaven, that is, no conception of the Divine from which heaven is, cannot be raised up to the first threshold of heaven.

 

이런 사람은 천국에 접근하자마자 어떤 저항과 일종의 아주 강한 반발을 지각합니다. 천국에 대하여 수용적이어야 할 그의 내면이 천국 형태가 되지 않도록 오히려 닫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천국에 더 다가갈수록 그의 내면은 아주 더 타이트하게 닫힙니다. As soon as such a one draws near to heaven a resistance and a strong repulsion are perceived; and for the reason that his interiors, which should be receptive of heaven, are closed up from their not being in the form of heaven, and the nearer he comes to heaven the more tightly are they closed up.

 

이것이 교회를 다니면서도 주님은 부인하는 사람들의 운명입니다. 소시니아인들 같이 주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사람들의 운명입니다. Such is the lot of those within the church who deny the Lord, and of those who, like the Socinians, deny his Divinity.

 

그러나 교회 밖에서 태어나 말씀이 없어 주님에 대해 무지한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의 운명에 대해서는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But the lot of those who are born out of the church, and who are ignorant of the Lord because they do not have the Word, will be described hereafter.

 

 

84. 아브라함, 롯, 여호수아, 기드온, 마노아와 그의 아내 및 그밖의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나신 신을 보면 옛사람들이 신을 사람으로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That the men of old time had an idea of the Divine as human is evident from the manifestation of the Divine to Abraham, Lot, Joshua, Gideon, Manoah and his wife, and others.

 

그들은 하나님을 한 사람으로 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 그를 온 우주의 하나님으로 경배하며, 하늘과 땅의 하나님, 여호와로 불렀습니다. These saw God as a man, but nevertheless adored him as the God of the universe, calling him the God of heaven and earth, and Jehovah.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분이 주님이셨음을 주님은 요한복음 8장 56절을 통해 친히 가르치십니다. 나머지 다른 사람들의 경우도 주님이심을 그분의 말씀으로 알 수 있습니다. That it was the Lord who was seen by Abraham he himself teaches in John 8:56; and that it was he who was seen by the rest is evident from his words: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요8:56)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상을 보지 못하였으며 (요1:18; 5:37) No one hath seen the Father, nor heard his voice, nor seen his form. (John 1:18; 5:37)

 

 

85. 그러나 겉 사람에 속한 감각적 컨셉으로 모든 걸 판단하는 사람들한테는 하나님이 사람이라는 사실은 거의 이해가 불가능합니다. 감각의 사람은 신에 대한 생각도 세상과 거기 속한 걸로만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인데요, 그는 어떤 신성과 영성의 사람을 생각할 때도 같은 식으로, 그러니까 일종의 육(肉)적이고 자연적인 사람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But that God is man can scarcely be comprehended by those who judge all things from the sense conceptions of the external man, for the sensual man must needs think of the Divine from the world and what is therein, and thus of a Divine and spiritual man in the same way as of a corporeal and natural man.

 

그래서 그는 결론짓기를, 만일 하나님이 사람이라면, 그는 틀림없이 온 우주만큼 커야 하며, 만일 그가 하늘과 땅을 다스리신다면, 세상 왕들이 하듯 많은 사람들을 통해서 다스리실 것이라고 말이지요. From this he concludes that if God were a man he would be as large as the universe; and if he ruled heaven and earth it would be done through many others, after the manner of kings in the world.

 

만일 그가 천국에는 이 세상 같은 무슨 공간이 없다는 말을 들으면 그는 조금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If told that in heaven there is no extension of space as in the world, he would not in the least comprehend it.

 

오직 자연과 자연의 빛으로밖에는 생각할 줄 모르는 그로서는 자기 눈에 보이는 공간 확장으로만 그런 걸 생각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For he that thinks only from nature and its light must needs think in accord with such extension as appears before his eyes.

 

하지만 천국을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정말 가장 큰 실수입니다. But it is the greatest mistake to think in this way about heaven.

 

그곳의 공간 확장은 세상의 확장과 다릅니다. Extension there is not like extension in the world.

 

세상에서의 공간은 정해져 있고, 그래서 측정 가능한 것이지만, 천국의 공간은 정해져 있지 않고, 그래서 측정불가입니다. In the world extension is determinate, and thus measurable; but in heaven it is not determinate, and thus not measurable.

 

천국 공간과 그 확장에 관해서는 나중에 영계의 공간과 시간과 연결지어 더 깊이 다루겠습니다. But extension in heaven will be further treated of hereafter in connection with space and time in the spiritual world.

 

좀더 말씀드리면, 사람들은 시력이라는 게 얼마나 멀리 뻗어나가는지, 즉 태양과 별을 넘어 훨씬 저 멀리 뻗어나가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좀 깊이 생각할 줄 아는 사람들은 다 압니다. 사람의 생각과 사고에 속한 내적 시야는 훨씬 더 넓게 확장되며, 그래서 더 깊은 내적 시야일수록 훨씬 더 멀리 계속 확장된다는 걸 말이지요. Furthermore, everyone knows how far the sight of the eye extends, namely, to the sun and to the stars, which are so remote; and whoever thinks deeply knows that the internal sight, which is of thought, has a still wider extension, and that a yet more interior sight must extend more widely still.

 

그러면 모든 것 가운데 가장 내적이시고, 가장 높으신 주님의 시야, 신성의 시야에 대해서는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까요? What then must be said of Divine sight, which is the inmost and highest of all?

 

생각, 사고라는 게 이런 확장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앞의 여러 장에서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천국의 모든 것은 거기 있는 모두와 공유되며, 천국을 만들고 또 가득 채우는 주님의 신성에 속한 모든 것 또한 그렇게 공유됩니다. Because thoughts have such extension, all things of heaven are shared with everyone there, so, too, are all things of the Divine which makes heaven and fills it, as has been shown in the preceding chapters.

 

 

86. 천국 천사들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보이지 않는 무엇으로, 즉, 생각으로도 선뜻 잡히지 않는 어떤 추상적 형태라 여기고 앉아있으면서도 스스로를 지성인입네 한다는 사실과, 자기들과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배움이 없고 단순무식하다 한다는 사실에 놀랍니다. 사실은 정반대인데도 말입니다. Those in heaven wonder that men can believe themselves to be intelligent who, in thinking of God, think about something invisible, that is, inconceivable under any form; and that they can call those who think differently unintelligent and simple, when the reverse is the truth.

 

그들은 또 말하기를, “스스로를 지성인이라 믿는 자들로 하여금 살펴보게 하시지요. 자신들이 자연, 즉 누구는 눈앞에 보이는 자연을, 누구는 자연의 보이지 않는 부분을 가리켜 하나님이라고 하고 있는 건 아닌지, 그리고 자신들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천사는, 영은, 사후에도 여전히 사는 그들의 영은, 사람 안에 있는 천국의 삶은, 지성을 구성하는 다른 많은 것들에 대한 것은 볼 줄 모르는 장님은 아닌지를 말입니다. 반면, 그들이 단순하다 하는 사람들은 그들 나름의 방식, 곧 하나님은 사람 모습으로 계신 신이시며, 천사는 하늘에 사는 사람이고, 그들의 혼은 사후에도 천사들처럼 사는 것이요, 사람 안에 있는 천국의 삶은 신의 계명을 따라 사는 것이라는,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They add, “Let those who thus believe themselves to be intelligent examine themselves, whether they do not look upon nature as God, some the nature that is before their eyes, others the invisible side of nature; and whether they are not so blind as not to know what God is, what an angel is, what a spirit is, what their soul is which is to live after death, what the life of heaven in man is, and many other things that constitute intelligence; when yet those whom they call simple know all these things in their way, having an idea of their God that he is the Divine in a human form, of an angel that he is a heavenly man, of their soul that is to live after death that it is like an angel, and of the life of heaven in man that it is living in accord with the Divine commandments.”

 

천사들은 이들이 지성인이며, 천국에 적합한 자들인 반면, 저들은 비지성, 몰지각, 어리석은 자라 합니다. Such the angels call intelligent and fitted for heaven; but the others, on the other hand, they call not intelligent.

HH.1.11.78-86. '11장, 천국이 사람 모습임은 주의 신적 인성에서 비롯된다'.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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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_Nz8lXrUez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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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 며칠, 계속된 글 공유로 좀 어떠실까 하여 오늘은 쉴까 하였으나 금요 오후, 천국 이야기 약속도 있고 하여 부득불 공유합니다. 많은 양해 바랍니다...

 

천국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과 많이, 아니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이곳은 물질, 저곳은 비물질, 이곳은 자연계, 저곳은 영계니까요. 그러나 주님의 방법으로 둘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그 결과, 이 세상은 천국을 가리키는 일종의 모델하우스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즉, 이 세상을 잘 관찰하면 ‘아, 천국은 어떤 곳이겠구나!’, ‘영계는 어떤 곳이겠구나...’ 짐작할 수 있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

 

천국을 비롯, 이 모든 피조세계에 주님이 심으신 몇 가지 설계 원리들이 있는데요, 그중 하나가 ‘비슷하면 가까이, 다르면 멀리’라는 게 있습니다. 바로 ‘상태(狀態, state)’ 이야기인데요, 상태가 비슷하면 같이 지낼 수 있지만, 다르면 같이 못 지낸다는 말입니다. 또 다른 원리 중 하나는 ‘심은 대로 거둔다’가 있습니다.

 

그런 예는 차고도 넘치지요. 우선, 천국과 지옥이 서로 하늘과 땅처럼 함께 할 수 없는 것이 있겠고요, 세 천국 간 구별이 있는 것이며, 천국 내에서도 또 수많은 공동체로 나뉘는 것이며, 같은 공동체 내에서도 서로 간 간격의 가깝고 먼 등등... 이 모든 것이 다 상태로 결정됩니다.

 

그러면 이 ‘상태’라는 게 뭘까요?

 

상태는 천국을 예로 들면, 천국을 구성하는 각 천사들의 사랑과 신앙, 그로 말미암은 지혜와 지성의 상태와 그 변화를 말합니다. 그리고 천사의 사랑과 신앙은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으므로 결국, 상태란 주님에 대한 상태, 주님에 대한 사랑과 신앙의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천국에서는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주님을 개인적으로 사랑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신성, 곧 주님의 선과 진리를 사랑한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곧 주님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신성에 대한 태도는 곧 주님에 대한 태도가 되는 것이지요 ^^

 

아, 한 가지 더, 천사라는 존재는 주님이 별도로 지으신 무슨 다른 피조물이 아닙니다. 본래, 그리고 진정한 ‘사람’이신 주님은 사람 이외의 그 어떤 피조물도 짓지 않으셨어요. 심지어 주님은 천국 전체도 사람 형상으로 지으실 정도이시지요. 우리가 사후(死後)에 천국에 올라가 천사가 되는 것입니다. 천국 구성원들을 천사라 하는 것이며, 현재 존재하는 모든 천사와 영들은 예전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천사 따로, 사람 따로로 알고 있는 것은 말씀을 겉뜻으로, 겉 글자의 뜻으로만 읽어서 그런 것입니다. 천사가 곧 사람이라 하신 말씀은 계21:17을 참조하셔요.

 

천국은 시공간의 나라가 아닌 상태의 나라라는 이 사실을 염두에 두면 천국을 무슨 지상 생활의 확장 정도로 생각하는 오류에서 물러날 수 있게 됩니다. 가령, 주님에 대한 현재 나의 사랑과 신앙의 상태로 모든 게 결정되는 나라에 들어가는 걸, 세상에서처럼 무슨 표 한 장 끊으면 들어갈 수 있는 데로 안다거나, ‘그동안 잘못 산 거 다 용서해 줄 테니까 들어가서는 잘 살아야 해’하는 윗분의 ‘은혜’로 들어갈 수 있는 데로 안다든가 등등 말이지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사후 신성(神性, Divine Essence, 선과 진리로 표현되는, 주님의 神으로서의 성품)이라는 대기로 충만한 나라에 들어가서 신성 호흡을 하며 살 수 있으려면 생전에 미리 그 호흡법을 연습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아무리 소위 ‘은혜’로 통과시켜 주신들 호흡을 할 수 없어 뛰쳐나오게 되지요... 신성을 준비한다는 건, 그 나라 주인님과 비슷한 상태가 된다는 말입니다. ‘비슷해야 가까이’, 곧 주님을 닮아야 주님 곁에서 지내죠!

 

참고로, ‘은혜’는 내면이 어떻든 그냥 ‘통과’시켜 주는 그런 은혜가 아니라, 한평생 선악 간 싸움에서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대신 우리와 동행하시며 도우시는 ‘은혜’, 끝까지 우리를 주님 자신을 향해, 천국을 향해 끌어당기시는 다함없으신 사랑을 말합니다.

 

실제로 이런 천국의 실상, 곧 천국은 주님 향한 내면 상태의 나라라는 걸 모른 채, 지상에서 남들 다 하는 대로 마치 무슨 동호회 활동하듯 교회를 다니며, 종교 생활 차원의 신앙생활을 하다가 사후 영계에 들어온 사람들은 처음엔 당연히 자기들은 천국 들어갈 수 있는 줄 알고 무척 원합니다. 이럴 경우, 주님은 자비로우셔서 얼마든지 원하는 가장 좋은 걸 체험하게, 맛보게 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은 천국, 그것도 가장 낮은 천국의 입구로 인도를 받습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그들이 천국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그들은 온몸이 뱀처럼 뒤틀리는 극심한 고통과 함께, 숨이 턱 막혀 질식할 것 같은 극심한 상태에 들어갑니다. 그들 내부에, 천국을 받을 수 있는 준비가 안 되어 있고, 대신 모든 게 천국 질서와는 정반대로, 거꾸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생전에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의 삶 대신, 자기 사랑, 세상 사랑의 삶을 살면서 천국 준비를 등한히 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교회를 다녔는데도 말이지요... 이윽고 그들은 죽을 것 같아 도저히 못 견뎌 그만 천국을 탈출, 뛰쳐나오게 됩니다.

 

이 모습이 제 3자가 보기에는 얼핏 천국에서 사람을 쫓아내는 것 같이 보이지만 전혀 아닙니다. 자기가 자발적으로 뛰쳐 나가는 것입니다. 그들은 천국을 뛰쳐 나와 자기 내면과 잘 어울리는 곳으로 가서, 겨우 ‘아, 이제야 살 것 같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는 천국에 올라갈 엄두도 내지 않게 됩니다. 천국은 늘 항상 누구에게나 오픈되어 있으며, 주님은 모든 사람이 천국에서 지낼 수 있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다만 ‘지낼 수만 있으면...’ 이라는 단서가 붙지만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직 지상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힘써 ‘상태’ 훈련, 곧 주님을 사랑하는 상태에 늘 머무르는 훈련에 전념해야 합니다. 이 훈련을 충분히 할 수 있도록 주님은 우리에게 다양한 사람들을 허락하시며, 온갖 환경과 상황들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평 대신, 원망 대신 순간순간 깨어있어 주님을 늘 주시하며, 늘 그분의 현존과 임재 가운데 생활하는 우리 모두 되시기를 주 예수님 이름 받들어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아멘,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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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는 어제 ‘말씀(The Word)이란?’ 글 공유 후, 주님께 드린 기도문입니다...

 

주님, 오늘 글을 수신, 읽어본 많은 구독자들 중 아마 대다수가, ‘내용 자체는 전반적으로 맞는 말 같은데 이상하게 화가 나네...’ 할 것 같습니다. 개신교인으로서 제가 3년 전, 처음으로 이런 내용을 접했을 때처럼 말이지요

 

개신교인에게 있어 바울 서신을 비롯, 다른 많은 신구약성경은 사실 성도들의 매일 일상 속 깊숙이 들어와 있는, 건드릴 수 없는 성역인데, 오늘 글은 그걸 통째로 건드리고 있으니까요...

 

주님, 오랜 세월 붙들고 살아온 성경 중 상당수가 사실은 메인이 아닌 조명이었다는 이런 글은, 비록 사람들을 힘들게 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을지라도 본의 아니게 개신교인들, 더 나아가 기독교인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며, 나름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는 주님, 저의 구독자들은 다들 착하고 진실한 사람들이오니 불쌍히 여기시며, 빛을 비추사 위로하여 주시옵소서. 이 글을 읽는 동안, 마음이 환하여지며, 눈이 밝아져 주님의 위로가 쏟아져 들어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글을 주님의 말씀으로 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시간이 걸리고 마음이 힘들더라도 오늘 글의 내용을 받아들이고, 혹시 주님의 말씀(The Word)보다 더 우선하였던 어떤 교리로 살아오지는 않았는지 주님 의지하며 돌아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비롯, 종교개혁 여러 슬로건들도 그런 입장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정황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러나 슬로건이라는 게 주님보다 클 수 없음을, 교리라는 게 주님보다 우선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이 불러 영계에 올라 루터, 멜랑히톤 및 칼빈을 만나 오랫동안 많은 대화를 나눴던 스베덴보리가 전하는 그중 루터의 말,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 alone)를 비롯, 자기가 힘써 주창했던 많은 독단교리들은 사실은 다 자기의 머리에서 나온 거라고... 당시 카톨릭하고는 무조건 대척점에 서야 해서 무리를 해서라도 어떤 교리들, 곧 신앙에서 체어리티를 분리해내는 교리를 만들어내야 했던 거라고...’(TCR.796:4)

 

주님, 우리 개신교인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다른 사람들이, 태어나보니 불교 가정이었고, 태어나보니 무슬림 가정이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태어나보니 개신교 가정이었고, 태어나보니 이런 교리들, 곧 사도들의 편지에서 추출한 교리들이었습니다...

 

주님, 저의 카톡 구독자들 중 상당수가 개신교인입니다. 저를 비롯, 이제 많은 새 일꾼들을 통해 이런 사실들을 저들에게 알리시고, 이제라도 우리로 하여금 주의 말씀(The Word)으로 돌아와 주의 다시 오심을 준비하게 하시는 주님의 뜻이 온전히, 그리고 아름답게 이루어지시기를,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 여호와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받들어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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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9

 

THE INTERNAL SENSE

 

 

977. 여기서 다루는 주제가 거듭난 사람(the regenerate man)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도 조금 부언하고자 합니다. 이렇게 하면 둘 다 더 잘 이해되지 싶어서입니다. As the subject here treated of is the regenerate man, a few words shall be said about what he is relatively to the unregenerate man, for in this way both will be apprehended.

 

거듭난 사람의 경우, 선한 것과 참된 것에 관한 어떤 양심(conscience)이 있어 그는 양심으로부터 선을 행하고 진리를 생각하는데요, 그가 행하는 선은 체어리티의 선(the good of charity)이요, 그가 생각하는 진리는 신앙의 진리(the truth of faith)입니다. With the regenerate man there is a conscience of what is good and true, and he does good and thinks truth from conscience; the good which he does being the good of charity, and the truth which he thinks being the truth of faith.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양심이 없거나, 있어도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거나 신앙의 진리를 생각하는 그런 양심이 아닌, 자기 자신이나 세상에 관한 사랑에 기반한 양심이며, 그래서 겉으로만 그럴싸하거나 거짓된 양심입니다. The unregenerate man has no conscience, or if any, it is not a conscience of doing good from charity, and of thinking truth from faith, but is based on some love that regards himself or the world, wherefore it is a spurious or false conscience.

 

거듭난 사람의 경우, 그가 양심을 따라 행할 때는 즐거움이 있지만 양심에 어긋나는 걸 하거나 생각할 때는 근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 중 정말 많은 사람들이 양심이 뭔지를 모르며, 심지어 양심을 따라 한다는 게 뭔지, 혹은 양심에 어긋나는 걸 한다는 게 뭔지를 모릅니다. 그들은 그저 자기들이 좋아하는 그런 것만 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 With the regenerate man there is joy when he acts according to conscience, and anxiety when he is forced to do or think contrary to it; but it is not so with the unregenerate, for very many such men do not know what conscience is, much less what it is to do anything either according or contrary to it, but only what it is to do the things that favor their loves.

 

이것이 그들을 기쁘게 하며, 만일 그들이 자기들이 좋아하는 것과 반대되는 걸 하게 되면, 그들은 근심하게 됩니다. This is what gives them joy, and when they do what is contrary to their loves, this is what gives them anxiety.

 

거듭난 사람의 경우, 그에게는 새 의지(a new will)와 새 이해(a new understanding)가 있습니다. 이 새 의지와 새 이해가 그의 양심입니다. 즉, 그의 양심 안에 이 둘이 있습니다. 주님은 이를 통해 체어리티의 선과 신앙의 진리로 하여금 일을 하게 하십니다. With the regenerate man there is a new will and a new understanding, and this new will and new understanding are his conscience, that is, they are in his conscience, and through this the Lord works the good of charity and the truth of faith.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경우, 그에게 있는 것은 의지가 아닙니다. 의지 대신 갈망(yearning)이 있으며, 그 결과 모든 악으로 기우는 어떤 경향(proneness)이 있습니다. 또 그에게 있는 것은 이해가 아니라 무슨 머리굴림(reasoning)만 있어 결과적으로 모든 거짓을 향한 구부러짐(falling away)만 있습니다. With an unregenerate man there is not will, but instead of will there is yearning, and a consequent proneness to every evil; neither is there understanding, but mere reasoning and a consequent falling away to every falsity.

 

거듭난 사람의 경우, 그에게는 천적, 영적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경우는 그저 육적(corporeal), 세속적 생명만 있습니다. 전자의 경우, 그가 선한 것, 참된 것을 생각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전에 말한 리메인스를 통해 주님의 생명으로부터 나오며, 그가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것도 여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With the regenerate man there is celestial and spiritual life; but with the unregenerate man there is only corporeal and worldly life, and his ability to think and understand what is good and true is from the Lord’s life through the remains before spoken of, and it is from this that he has the faculty of reflecting.

 

거듭난 사람의 경우, 속 사람은 지배적인 반면, 겉 사람은 복종적이고, 순종적입니다. 그러나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경우는, 겉 사람이 다스리고, 속 사람은 죽은 듯 조용합니다. 마치 없는 듯 말입니다. With the regenerate the internal man has the dominion, the external being obedient and submissive; but with the unregenerate the external man rules, the internal being quiescent, as if it had no existence.

 

거듭난 사람은 속 사람이 무엇인지, 겉 사람이 무엇인지를 알거나 깊이 생각할 줄 압니다. 그러나 이런 것에 관해,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거의 무지하며, 심지어 이런 걸 깊이 생각할 줄도 모릅니다. 그는 체어리티로 말미암는 신앙의 선과 진리에 대해 낯설기 때문입니다. The regenerate man knows, or has a capacity of knowing on reflection, what the internal man is, and what the external; but of these the unregenerate man is altogether ignorant, nor can he know them even if he reflects, since he is unacquainted with the good and truth of faith originating in charity.

 

이렇게 거듭난 사람의 퀄러티는 어떤지, 그리고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퀄러티는 또 어떤지를, 그리고 이들은 서로 정말 여름과 겨울처럼, 빛과 어두움처럼 완전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결론은, 거듭난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이지만,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Hence may be seen what is the quality of the regenerate, and what of the unregenerate man, and that they differ from each other like summer and winter, and light and darkness; wherefore the regenerate is a living, but the unregenerate a dead man.

 

 

978. 속 사람에 대해서, 그리고 겉 사람에 대해서 오늘날 아는 사람이 거의 없고, 있어도 매우 희귀합니다. What the internal man is, and what the external, is at this day known to few, if any.

 

다들 이 둘은 하나며 같은 것이라고 여기는데, 이는 사람들이 선을 행하는 것도, 진리를 생각하는 것도 다 자기가 하는 것으로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믿는 게 사람들의 고유 본성이지요. 하지만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서로 다른 건 마치 하늘과 땅만큼 다릅니다. It is generally supposed that they are one and the same, and this chiefly because men believe that they do good, and think truth from what is their own, for it is the nature of man’s own to believe this; whereas the internal man is as distinct from the external as heaven is from earth.

 

배운 사람이든 무학자이든 이 주제에 관해 좀 생각하게 해보면, 속 사람에 관해서는, ‘생각’(thought)이라고밖에는 무슨 다르게 생각하지를 못합니다. 그건 안에(within) 있으니까요. 그리고 겉 사람에 관해서는, 그건 ‘’(body), 감각(sense)과 쾌락(pleasure)이라는 생명을 가진 몸이다, 왜냐하면, 그건 밖이니까(without) 합니다. Both the learned and the unlearned, when reflecting on the subject, have no other conception respecting the internal man than its being thought, because it is within; and of the external man that it is the body, with its life of sense and pleasure, because this is without.

 

그러나 이렇게 속 사람이라고 여겨지는 생각은 거기, 곧 속 사람에 속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속 사람 안에는 주님의 것인 선과 진리들 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또 속 사람 안에는 주님에 의해 이식되어 심긴 양심이 있습니다. 하지만 악인들, 심지어 가장 악한 사람들 및 양심을 외면하는 사람들 역시 생각이라는 걸 할 줄 아는 걸 보면, 사람의 생각은 속 사람에게 속한 게 아닌, 겉 사람에게 속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Thought, however, which is thus ascribed to the internal man, does not belong thereto; for in the internal man there are nothing but goods and truths which are the Lord’s, and in the interior man conscience has been implanted by the Lord; and yet the evil, and even the worst of men, have thought, and so have those who are devoid of conscience, which shows that man’s thought does not belong to the internal, but to the external man.

 

이 감각과 쾌락의 생명을 가진 몸은 겉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은 영들 역시 똑같이 일종의 겉 사람을 소유한다는 사실을 보면 분명합니다. 비록 이 세상 살 동안 가졌던 그런 몸을 영들은 이젠 갖고 있지 않은데도 말입니다. That the body, with its life of sense and pleasure, is not the external man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spirits equally possess an external man, although they have no such body as they had during their life in this world.

 

모든 사람에게는 천사의 천국(the angelic heaven)과 상응하는 어떤 천적, 영적인 것이, 그리고, 천사 같은 영들의 천국(the heaven of angelic spirits)과 상응하는 어떤 이성적인 것(a rational)이, 그리고 영들의 천국(the heaven of spirits)과 상응하는 어떤 감각적인 내면(an interior sensuous)이 있다는 사실을 알기까지는 아무도 속 사람이 무엇인지, 겉 사람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But what the internal man is, and what the external, no one can possibly know unless he knows that there is in every man a celestial and a spiritual that correspond to the angelic heaven, a rational that corresponds to the heaven of angelic spirits, and an interior sensuous that corresponds to the heaven of spirits.

 

세 천국이 있고, 사람 안에도 역시 그 수만큼의, 아주 완전히 서로 다른 뭔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양심이 있는 사람은 사후, 제일 먼저 영들의 천국에 있게 되고, 이후 주님에 의해 천사 같은 영들의 천국으로 올라갔다가 마침내 천사의 천국에 이르게 되는데, 이는 그 사람 안에 천국과 같은 수만큼의 뭔가가 있지 않으면, 그리고 천국과 상응하는 그것의 상태가 천국과 같지 않으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For there are three heavens, and as many in man, which are most perfectly distinct from each other; and hence it is that after death the man who has conscience is first in the heaven of spirits, afterwards is elevated by the Lord into the heaven of angelic spirits, and lastly into the angelic heaven, which could not possibly take place unless there were in him as many heavens, with which and with the state of which he has the capacity of corresponding.

 

이 일로 저는 속 사람을 구성하는 게 무엇인지, 또 겉 사람을 구성하는 게 무엇인지를 배웠습니다. From this I have learned what constitutes the internal, and what the external man.

 

속 사람은 천적, 영적인 것으로, 내면(interior) 혹은 중간(intermediate)은 이성적인 것(what is rational)으로, 그리고 겉 사람은 감각적인 것(what is sensuous), 그런데 몸에 속한 대신 몸과 관련된 것들로 각각 형성됩니다. 이상의 내용은 사람뿐 아니라 영들도 마찬가지입니다. The internal man is formed of what is celestial and spiritual; the interior or intermediate man, of what is rational; and the external man of what is sensuous, not belonging to the body, but derived from bodily things; and this is the case not only with man, but also with spirits.

 

지식인들처럼 표현하자면, 세 가지, 속, 내면 및 겉 사람은 마치 목적, 원인 및 결과와 같습니다. 그리고 다들 잘 알고 있듯 원인 없는 결과 없고, 목적 없는 원인 없습니다. To speak in the language of the learned, these three, the internal, the interior, and the external man, are like end, cause, and effect; and it is well known that there can be no effect without a cause, and no cause without an end.

 

결과, 원인 및 목적은 외면과 내면, 그리고 가장 안쪽처럼 서로 구별됩니다. Effect, cause, and end, are as distinct from each other as are what is exterior, what is interior, and what is inmost.

 

엄밀히 말씀드리자면, 감각적인 사람은, 이 감각적인 사람은 그 사고가 감각적인 것들을 기반으로 하는 사람인데요, 이 사람이 겉 사람입니다. 영적, 천적인 사람은 속 사람, 그리고 이성적인 사람은 이 둘 사이 중간 사람으로, 속과 겉 간 커뮤니케이션을 가능하게 해주는 사람입니다. Strictly speaking, the sensuous man—or he whose thought is grounded in sensuous things—is the external man, and the spiritual and celestial man is the internal man, and the rational man is intermediate between the two, being that by which the communication of the internal and the external man is effected.

 

저는 이런 말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음을 알았습니다. 사람들은 겉의 것들 가운데 살고 있으며, 겉의 것들을 가지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I am aware that few will apprehend these statements, because men live in external things, and think from them.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을 짐승과 다를 바 없다 여기며, 몸이 죽을 때, 자신들도 함께 죽는다 믿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때 그들은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하는데도 말입니다. Hence it is that some regard themselves as being like the brutes, and believe that on the death of the body they will die altogether, although they then first begin to live.

 

선한 사람들은 사후, 가장 먼저 영들의 세계 혹은 영들의 천국에서 어떤 감각의 삶을 삽니다. 그러다가 천사 같은 영들의 천국에서는 내면적 감각의 삶을 살고, 그리고 드디어 천사의 천국에서 가장 내적 감각의 삶을 삽니다. 이 속 사람의 삶은 그 삶과 관련된 그 어떤 것도 사람은 거의 이해할 수 없다고 하는 천사의 삶입니다. After death, those who are good, at first live a sensuous life in the world or heaven of spirits, afterwards an interior sensuous life in the heaven of angelic spirits, and lastly an inmost sensuous life in the angelic heaven, this angelic life being the life of the internal man, and concerning which scarcely anything can be said that is comprehensible by man.

 

거듭난 사람은 선과 진리 및 영적 전쟁의 본성을 깊이 생각해봄으로써 그런 삶이 있음을 알 수도 있지 싶습니다. 주님이 속 사람을 통해서 체어리티의 선과 신앙의 진리가 겉 사람 안에 있게 하신 이후부터는 그것이 사람 안에 있는 주님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The regenerate may know that there is such a life by reflecting on the nature of the good and the true, and of spiritual warfare, for it is the life of the Lord in man, since the Lord—through the internal man—works the good of charity and the truth of faith in his external man.

 

그때 그의 사고와 어펙션(affection, 애정)에 지각되는 것은 어떤 일반적인 것인데, 그 안에는 속 사람한테서 나오는 셀 수 없는 것들이 들어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천사의 천국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절대 지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What is thence perceived in his thought and affection is a certain general which contains innumerable things that come from the internal man, and which the man cannot possibly perceive until he enters the angelic heaven.

 

(이 일반적인 것과 그 경험에서 나오는 본성에 관하여는 위 AC.545 참조) (Concerning this general and its nature, see above, n. 545, from experience.)

 

여기서 말씀드린 속 사람에 관한 내용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지만 그렇다고 구원받기 위해 이런 걸 꼭 알아야 하는 건 아닙니다. The things here said about the internal man, being above the apprehension of very many, are not necessary to salvation.

 

속 사람과 겉 사람이라는 게 있으며,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믿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It is sufficient to know that there is an internal and an external man, and to acknowledge and believe that all good and truth are from the Lord.

 

 

979. 거듭난 사람에 관한, 그리고 겉 사람에게로 흐르는 속 사람의 인플럭스에 관한 이런 관찰을 먼저 좀 하는 이유는, 본 장이 거듭난 사람과, 겉 사람에 대해 우위를 점하는 속 사람 및 겉 사람의 복종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These observations on the state of the regenerate man, and on the influx of the internal man into the external, have been premised because this chapter treats of the regenerate man, of the dominion of the internal man over the external, and of the submission of the external man.

AC.978, 창9, '창9, 속뜻'.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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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TQ-YzN7ER8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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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1

 

16.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Verse 1.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coelum] and the earth.

 

태고(太古, the most ancient time)를 ‘태초’(太初, the beginning)라 합니다. 천지가 처음 시작된 때이지요. The most ancient time is called “the beginning.

 

이때를 선지자들은 말씀 여러 곳에서 ‘옛날’(days of old), ‘영원’(days of eternity) 등으로 불렀습니다. By the prophets it is in various places called the “days of old” [antiquitatis] and also the “days of eternity.

 

태초’라는 표현, ‘처음, 시작’이라는 표현에는 또 사람의 거듭남 전체 과정 중 그 첫 번째 기간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사람은 그때 새롭게 태어나며,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The “beginning” also involves the first period when man is being regenerated, for he is then born anew, and receives life.

 

그래서 거듭남 그 자체를 가리켜 사람의 ‘새 창조’라고 합니다. Regeneration itself is therefore called a “new creation” of man.

 

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만들다’(make) 등 이런 표현들은 거의 모든 선지서, 거의 모든 데서 약간의 상징적 차이들은 있지만, 공통적으로 거듭남을 가리킵니다. The expressions to “create,” to “form,” to “make,” in almost all parts of the prophetic writings signify to regenerate, yet with a difference in the signification.

 

이사야처럼 말입니다. As in Isaiah: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사43:7) Everyone that is called by my name, I have created him for my glory, I have formed him, yea, I have made him. (Isa. 43:7)

 

그래서 주님은 같은 성경에서, ‘구속자’(redeemer), ‘태에서부터 지으신 이’(former from the womb), ‘지으신 이’(maker), ‘창조자’(creator)라 일컬음을 받으십니다. And therefore the Lord is called the “redeemer,” the “former from the womb,” the “maker,” and also the “creator”; as in the same prophet: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 (사43:15) I am Jehovah your holy one, the creator of Israel, your king. (Isa.43:15)

 

시편에서는 In David: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 (시102:18) The people that is created shall praise Jah. (Ps. 102:18)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시104:30) Thou sendest forth thy spirit, they are created, and thou renewest the faces of the ground. (Ps. 104:30)

 

하늘’(heaven)은 속 사람을, ‘’(earth)은 거듭남 이전 겉 사람을 가리킨다는 것은 앞으로 이어지는 내용을 통해 보시게 됩니다. That “heaven” signifies the internal man and “earth” the external man before regeneration may be seen from what follows.

 

AC.16, 창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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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a2ieKXEVGl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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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정치 뉴스나 유튜브 채널을 접하다보면 ‘아무개의 워딩을 그대로 전하면 이렇습니다...’ 하는 걸 간혹 읽거나 듣게 되는데요, 그것은 ‘입장과 지향점이 저마다 다른 기자들로 인해 이렇게 저렇게 재해석된 것 말고, 그 아무개의 입에서 나온 그대로의 말을 토씨하나 빠트리지 않고 그대로 전하다’라는 의미이지요. 말이란, 이 사람 저 사람 거쳐갈수록 그 의미가 조금씩 달라지니까요

 

성경도 그 66권 안에 소위 ‘워딩’과 ‘재해석’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특히 지난 이천년 성경의 형성 과정을 보면 여러 차례의 공의회를 거쳐 그때마다 이 책은 넣자, 저 책은 빼자 하여 오늘날 우리가 보는 이 66권 성경이 픽스되었기 때문입니다. 6등급 시력을 가지고 결정한 것입니다

 

신약성경 디모데 후서 3장 16절,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에 나오는 ‘성경’은 당시 성경인 구약을 가리키는 것으로,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고 있던 사도 바울을 포함, 다른 사도들 역시 자기들의 편지가 후대에 성경으로 채택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주 여호와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사람들로서, 이 소위 ‘워딩’과 ‘재해석’의 구분을 명확히 해야 하는데, 그 구분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성(聖)’, 즉, ‘거룩하다’ 할 수 있으려면 오직 신(神), 곧 주님이 하신 말씀인가 아닌가만 보면 됩니다. 오직 주님의 워딩에만 모든 등급의 지혜, 곧 주님 자신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구약이라고 다 주님의 워딩은 아닙니다. 신구약 66권 중 주님의 워딩, 곧 말씀(the Word)은 다음과 같습니다

 

구약 : 창, 출, 레, 민, 신, 수, 삿, 삼상, 삼하, 왕상, 왕하, 시, 사, 렘, 애, 겔, 단, 호, 욜, 암, 옵, 욘, 미, 나, 합, 습, 학, 슥, 말 (29권)

 

신약 : 마, 막, 눅, 요, 계 (5권)

 

오직 이 말씀들에만 주님의 지혜 전 등급이 다 들어있고, 나머지 성경들은 이 말씀들을 환히 비추는 조명의 역할로 쓰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이 나머지 성경들이 아무 쓰임새가 없었다면 지난날 여러 차례 성경 공의회 때, 주님은 이 글들이 성경에 포함되지 못하게 하셨을 것입니다

 

정리하면, 성경 66권 중 메인은 말씀들이고, 나머지는 이 말씀들을 환히 비추는 조명들이라는 것입니다

 

아케이나(arcana, 秘義, 주님의 모든 등급의 지혜)는 오직 말씀들에만 있으며, 말씀은 주님 자신입니다. 말씀들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특히 구약의 말씀들은 많이 난해하고 어렵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간절히 빛 비춰주시기를 구하며 말씀을 가까이 하시면 깨닫게 하시는 역사가 반드시 일어날 줄 믿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주님은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멘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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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1

 

The Internal Sense

 

14. 후속 작업에서, 주(主, the Lord)라는 이름은 온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오직 그분만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이름 앞뒤로 무슨 다른 형용 없이 오직 ‘’로만 일컬음을 받으십니다. In the following work, by the name Lord is meant the savior of the world, Jesus Christ, and him only; and he is called “the Lord” without the addition of other names.

 

온 천국에 걸쳐 그분은 주(主)로 시인 및 흠모의 대상이십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오직 그분에게만 있기 때문입니다. Throughout the universal heaven he it is who is acknowledged and adored as Lord, because he has all sovereign power in the heavens and on earth.

 

주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을 다음과 같이 부르라 명하셨습니다. He also commanded his disciples so to call him, saying,

 

너희가 나를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Ye call me Lord, and ye say well, for I am. (요13:13)

 

그래서 부활 후, 제자들은 그분을 ‘’라 하였습니다. And after his resurrection his disciples called him “the Lord.

 

※ 다음은 ‘주님의 교리’ 1번 글 참조 본문입니다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1:1-5)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1:14)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요3:19)

 

36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46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요12:36, 46)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요17:5)

 

 

15. 천국 전체가 주님 아닌 다른 아버지는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주님과 아버지는 하나이시기 때문이며, 이 사실을 주님은 다음과 같이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In the universal heaven they know no other father than the Lord, because he and the father are one, as he himself has said: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I am the way, the truth, and the life. Philip saith, Show us the father Jesus saith to him, Am I so long time with you, and hast thou not known me, Philip? He that hath seen me hath seen the father how sayest thou then, Show us the father? Believest thou not that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n me? Believe me that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n me. (요14:6, 8-11)

AC.14-15, 창1, '창1, 속뜻(The Internal Sense)'.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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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BCPr1rCGOs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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