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2:9)

 

AC.103

여기서 나무들(trees) 퍼셉션을 의미하는 이유는 천적 인간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적 인간을 다룰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주어의 성격에 따라 술어의 성격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The reason whytreeshere signify perceptions is that the celestial man is treated of, but it is otherwise when the subject is the spiritual man, for on the nature of the subject depends that of the predicate.

 

해설

AC.103은 바로 앞 AC.102에서 나무들이 퍼셉션을 의미한다고 한 이유를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나무가 퍼셉션을 의미한다고 한 것을 모든 말씀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고정된 상응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나무들이 퍼셉션을 의미하는 것은 지금 창2에서 다루고 있는 사람이 천적 인간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영적 인간을 다룰 때에는 그렇지 않다고 곧바로 덧붙입니다.

 

이것은 상응을 이해할 때 매우 중요한 원칙입니다. 말씀에 같은 자연적 대상이나 같은 단어가 나온다고 해서 언제나 똑같은 속뜻을 가진다고 기계적으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 대상이 누구에게 또는 무엇에 관하여 서술되고 있는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주어의 성격에 따라 술어의 성격이 달라진다고 한 것은 바로 이 점을 말합니다. 무엇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지가 달라지면 그것에 관하여 서술되는 것의 의미도 그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AC.102에서 나무들이 퍼셉션을 의미하는 까닭은 나무라는 자연물이 말씀 어디에서나 오직 퍼셉션만을 의미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창2에서는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고,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의 싸움이 그치며,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지성이 흘러드는 상태를 설명해 왔습니다. 특히 AC.99에서는 천적 인간이 자신의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주님께서 흘러드신다는 것을 지각한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천적 인간의 에덴동산에 있는 나무들이므로 여기서는 퍼셉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원칙은 상응을 자연물의 특징만으로 추론해서는 안 된다는 점도 일깨워 줍니다. 어떤 자연적 대상의 성질을 관찰한 뒤 그것이 영적으로 무엇을 의미할 것이라고 임의로 정해서는 안 되며, 앞의 어느 구절에서 특정한 의미로 해석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이후의 모든 구절에 그 의미를 그대로 적용해서도 안 됩니다. 말씀의 속뜻을 이해하려면 현재 무엇을 다루고 있는지, 그 표현이 어떤 문맥 안에 놓여 있는지, 그리고 주변의 다른 표현들과 어떤 관계를 이루고 있는지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특히 AC.103은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의 차이가 같은 표현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지금 다루는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주된 것이 되고 신앙이 그 사랑에서 나오며,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퍼셉션으로 지각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천적 인간을 다루는 현재 문맥에서는 동산의 나무들이 퍼셉션에 관계됩니다. 그러나 영적 인간을 다루는 문맥에서는 그 사람의 생명과 질서가 다르므로, 나무라는 동일한 표현도 그 주제에 맞게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AC를 읽으면서 각각의 상응을 발견하더라도 그것을 문맥에서 떼어 내어 고정된 대응표처럼 축적하는 데에는 주의가 필요합니다. 어떤 곳에서 동산이 지성을 의미했다고 해서 모든 동산이 언제나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고 단정하거나, 여기서 나무가 퍼셉션을 의미한다고 해서 말씀에 나오는 모든 나무를 곧바로 퍼셉션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상응에는 일관된 질서가 있지만, 그 구체적인 의미는 현재 다루는 주제와 문맥 안에서 밝혀져야 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AC.102에서 나무들의 의미를 제시한 직후 AC.103에서 곧바로 덧붙이는 중요한 주의사항입니다.

 

따라서 AC.103은 짧은 한 문장이지만 앞으로 AC 전체를 읽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중요한 번호입니다. 말씀의 어떤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물을 때에는 그 단어만 따로 떼어 보지 않고, ‘지금 말씀은 누구에 관하여, 어떤 상태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가?를 함께 물어야 합니다. 여기서 나무들이 퍼셉션을 의미하는 것은 천적 인간과 그의 에덴동산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원칙을 기억하면 앞으로 같은 표상이 다른 문맥에서 서로 다른 의미로 설명되더라도 그것을 모순으로 보지 않고, ‘주어의 성격에 따라 술어의 성격이 달라진다는 말씀의 속뜻의 질서 안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103)

 

 

 

AC.104, 창2:9, ‘퍼셉션은 무엇인가 -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지각하는 내적 감각’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4오늘날에는 퍼셉션이 무엇인지 알려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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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2, 창2:9,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 신앙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AC.102-106)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And out of the ground made Jehovah God to grow every tree desirable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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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And out of the ground made Jehovah God to grow every tree desirable to behold, and good for food; the tree of lives also, in the midst of the garden; and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2:9)

 

AC.102

나무(tree) 퍼셉션을 의미합니다. 보기에 좋은 나무(tree desirable to behold) 진리에 대한 퍼셉션을, 먹기에 좋은 나무(tree good for food) 선에 대한 퍼셉션을 의미합니다. 생명나무(tree of lives)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감각적인 것에서, 단순한 기억지식에서 나오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Atreesignifies perception; atree desirable to behold,the perception of truth; atree good for food,the perception of good; thetree of lives,love and the faith thence derived; the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faith derived from what is sensuous, that is, from mere memory-knowledge.

 

해설

AC.102는 창2:9에 나오는 여러 나무의 속뜻을 간결하게 제시합니다. ‘나무자체는 퍼셉션을 의미하고, ‘보기에 좋은 나무는 진리에 대한 퍼셉션을, ‘먹기에 좋은 나무는 선에 대한 퍼셉션을 의미합니다. 이어 동산 중앙의 두 나무 가운데 생명나무는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감각적인 것, 곧 단순한 기억지식에서 나오는 신앙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번호의 중심에는 천적 인간이 선과 진리를 어디에서 받아들이고 지각하는가 하는 문제가 놓여 있습니다.

 

먼저 나무가 퍼셉션을 의미한다는 것은 앞의 AC.96-99와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퍼셉션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내는 특별한 직관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 선과 진리를 지각하는 천적 인간의 상태와 관계됩니다. AC.99에서는 주님께서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통하여 천적 인간의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드시며, 그는 이것이 실제로 그러하다는 것을 지각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동산 안의 나무들은 바로 그러한 퍼셉션이 선과 진리에 관계하여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여 주기 시작합니다.

 

보기에 좋은 나무먹기에 좋은 나무도 단순히 아름답고 먹음직스러운 자연의 나무를 뜻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전자는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고 후자는 선에 대한 퍼셉션입니다. 여기서 진리와 선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앞에서 지성과 사랑이 함께 다루어진 것처럼, 천적 인간은 진리를 단순히 바라보고 이해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선을 받아들여 삶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동산의 풍성함은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뜻보다,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아 지각할 수 있는 내적 생명의 풍성함을 나타냅니다.

 

생명나무는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순서가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사랑과 신앙이라고 병렬적으로만 말하지 않고 신앙이 사랑에서 나온다고 밝힙니다. 이것은 앞에서 계속 설명해 온 천적 인간의 질서와 일치합니다. 신앙이 먼저 독립적으로 서서 사랑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주된 것이 되고 신앙이 그 사랑에서 나옵니다. 따라서 생명나무가 의미하는 생명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낸 신앙의 생명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이 신앙에까지 생명을 주는 질서입니다.

 

반대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감각적인 것, 곧 단순한 기억지식에서 나오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여기서도 기억지식 자체를 부정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앞의 AC.99에서 주님께서 천적 인간의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드신다고 했으므로, 기억지식은 그 자체로 거듭남에 방해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신앙이 어디에서 나오느냐에 있습니다.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앙이 아니라, 감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과 자신이 축적한 기억지식을 출발점으로 삼아 거기에서 신앙을 만들어 내려 할 때 질서가 달라집니다.

 

이 점에서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차이는 신앙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보다 더 깊습니다. AC.102는 두 경우 모두 신앙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그 신앙의 근원을 다르게 설명합니다. 생명나무에서는 신앙이 사랑에서 나오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신앙이 감각적인 것과 단순한 기억지식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창2의 두 나무를 이해할 때 중요한 질문은 무엇을 알고 있는가?만이 아니라 앎과 신앙의 생명은 어디에서 오는가?입니다. 천적 질서에서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이 먼저이고, 이해와 신앙과 지식은 그 사랑으로부터 생명을 받습니다.

 

AC.102는 아직 각각의 나무가 왜 이러한 의미를 가지는지를 상세히 논증하지 않습니다. 우선 상응의 의미를 제시하고 있으며, 이어지는 번호들에서 그것을 더 풀어 갈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단계에서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관한 뒤의 설명을 미리 가져와 결론을 확대하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제시한 대조를 정확히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동산의 나무들은 퍼셉션을 나타내며, 생명나무에서는 사랑으로부터 신앙이 나오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감각적인 것과 단순한 기억지식으로부터 신앙이 나옵니다. 이 서로 다른 생명의 질서가 앞으로 두 나무에 관한 설명을 이해하는 출발점입니다. (AC.102)

 

 

 

AC.103, 창2:9, ‘나무가 퍼셉션을 의미하는 것은 천적 인간을 다루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3여기서 ‘나무들’(trees)이 퍼셉션을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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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1, 창2:8, ‘동쪽은 주님 -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에서 오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창2:8) AC.101주님이 ‘동쪽’(east)이시라는 것은 말씀에서도 분명합니다. 에스겔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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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관찰한 수많은 부부의 사후 모습들인데요, 이 주제는 스베덴보리 신학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며, 목사님처럼 실제로 목회를 하시는 분에게는 특별히 자주 받는 질문일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생전에 결혼하지 않았지만, 영계를 왕래하며 수천 쌍의 부부를 관찰했습니다. 그는 그들의 사후 상태가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때로는 고통스러운, 때로는 감동적인 장면들을 통해 보았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렇습니다. ‘영적으로 맞지 않던 부부는 사후에 자동으로 분리되지만, 서로를 사랑했던 부부는 다시 만나 조용한 이별 또는 새로운 결합을 경험한다. 그리고 영적으로 깊이 맞았던 부부는 천국에서도 진짜 부부가 된다.’

 

 

겉으로만 신앙이 있었던 배우자의 경우, 자연스러운 이별

 

스베덴보리가 가장 자주 본 유형입니다. 지상에서는 교회 다니고, 예배 참석하고, 외적 신앙 행위를 하던 배우자가 실제로는 자기애, 명예욕, 세속 욕망, 이기적 동기 속에서 살았던 경우입니다. 이 부부는 지상에서는 서로 생활을 함께하더라도, 내적 삶(affection)은 이미 다른 방향입니다. 그래서 사후에는 중간 영계에서 자연스럽게 서로 멀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그들은 누가 끊어놓은 것이 아니라, 서로를 향한 사랑의 흐름이 없다.’ 이 이별은 다툼도 없고, 원망도 없고, 씁쓸함도 없이 아주 조용하게 이루어집니다. 왜냐하면 영계에서는 억지 동거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한쪽은 신앙이 깊고, 다른 쪽은 선한 사람인 경우’, 부드러운 재회와 조용한 결별

 

이 경우는 지상에서 흔히 있는 모습입니다. 예를 들어, 남편은 신앙이 깊고, 영적 진리를 사랑했는데, 아내는 신앙은 없지만, 선하고 다정하며 양심이 깊은 경우, 혹은 그 반대인 경우인데요, 스베덴보리는 이런 부부를 중간 영계에서 종종 보았습니다. 이럴 경우, 이들은 먼저 서로를 알아보고, 반갑게 재회합니다. 지상에서 서로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서로의 상태를 보고, 깊은 감사가 오갑니다. 지상에서의 사랑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영적 본질(사랑의 종류)의 차이가 드러나며, 결국 서로 다른 공동체로 들어갑니다. 이 과정은 대부분 매우 평화롭게, 슬픔 없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그들은 서로의 삶을 축복하며 헤어진다.’ 이 흐름은 서로의 내적 상태가 다르기 때문이지, 관계가 나빠서가 아닙니다.

 

 

한쪽은 깊은 영적 삶, 다른 쪽은 신앙과 선이 전혀 없는 경우’, 짧은 만남, 그리고 이별

 

스베덴보리는 이런 유형의 부부에 대해 약간은 안타까운 사례들을 기록합니다. 지상에서는 법적 부부였지만, 감정적으로는 멀리 떨어져 살았거나 사실상 각자 따로 삶을 살았던 부부들인데요, 이들은 사후에 잠시 재회하지만, 서로에게 아무런 영적 끌림이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묘사합니다. ‘그들의 만남은 의무감이 아닌, 마치 예절 같은 만남이었다.’ 그러고 나서 둘은 각자 자신의 상태에 맞는 길로 자연스럽게 떠납니다. 이것은 사랑이 없어서 생기는 이별이 아니라, 사랑의 종류(본질)가 완전히 달랐기 때문입니다.

 

 

서로를 사랑했지만, 영적 수준 차이가 컸던 부부’, 감동적인 장면들

 

이 경우는 매우 아름답습니다. 먼저 떠난 배우자의 깊은 영적 삶과 뒤따라온 배우자의 아직 미숙한 상태가 중간 영계에서 서로 비교됩니다. 예를 들어, 남편은 신앙과 진리의 삶을 깊이 걸었고, 아내는 신앙에 대해 잘 몰랐지만, 그 남편을 깊이 애정하고 존중하며 살았던 경우, 또는 그 반대인데요, 이런 경우, 사후에는 두 사람이 서로를 다시 만나 다음과 같은 ‘영적 교류’가 이루어집니다. 먼저 상호 감사의 눈물입니다. 지상에서 서로에게 준 사랑과 지지에 대한 감사를 표현합니다. 다음, 영적 차이의 인식인데요, 둘은 서로의 내적 상태 차이를 즉시 느낍니다. 천국 상태의 배우자는 그 상태를 낮추어 상대에게 맞추어 줍니다. 그러나 결국 각자의 자리로 들어갑니다. 영적 본질이 다르기 때문이지요.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정리합니다. ‘그들의 이별은 아픔이 아니라, 서로의 길을 인정하는 평화였다.’

 

 

영적 친화성이 깊었던 부부’, 천국에서도 진짜 부부가 된다

 

스베덴보리가 가장 감동적으로 기록한 장면들입니다. 이들은 지상에서 서로를 깊이 존중, 서로를 도우며 성장을 도왔고, 서로의 신앙과 양심의 길을 지지함으로써 마음의 깊은 결합이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사후에는 중간 영계에서 잠시 정화 과정을 거친 후, 둘이 천국의 같은 공동체로 들어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장면을 보고 말합니다. ‘그들은 다시 만나 , 이 사람이 나의 진짜 짝이었구나!’ 하는 환희를 느낀다.’ ‘지상에서는 서로의 마음을 충분히 보지 못했으나, 천국의 빛 속에서는 그 결합이 명백해졌다.’ 이 부부는 천국에서도 실제로 하나의 가정을 이루고 ‘일심동체 같은 삶’을 살아갑니다.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천국에서의 결혼은 영혼의 결합이므로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참된 하나이다.’ 지상에서 서로 깊이 맞았던 부부는 천국에서도 진짜 부부로 영원히 살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최종 결론, 부부 결합은 지상의 법률이 아니라 영적 본질이 결정한다

 

스베덴보리는 천 명 이상의 부부 사례를 관찰하고 이렇게 결론내립니다.

 

- 영적으로 맞지 않은 부부는 사후에 자연스럽게 분리된다.

 

- 사랑은 있었지만, 본질이 다르면 일시적 재회 뒤 조용한 이별이 있다.

 

- 한쪽만 깊은 신앙을 가졌더라도, 선한 자는 천국으로 인도된다.

 

- 천국에서도 부부는 지상의 외적 결혼이 아니라 내적 결합으로 결정된다.

 

- 정말 서로의 영적 본질이 맞는 부부는 천국에서도 영원히 함께 산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천국에서의 결혼은 주님에 의해 만들어지는 결합이며, 지상에서는 각자 서로를 돕는 길을 걷는 것이다.’

 

 

 

SC.74, ‘이미 한쪽은 천국에서 자신의 진짜 짝을 만나 결혼한 경우’

이미 한쪽은 천국에서 자신의 진짜 짝을 만나 결혼했지만, 뒤늦게 지상 배우자가 사후 중간 영계에 막 도착할 경우는? 이 질문은 결코 엉뚱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결혼론과 영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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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72, ‘천국에서의 가족은 어떻게 새롭게 구성되는가?’

스베덴보리는 천국을 탐방하면서 ‘천국의 가족이 어떻게 구성되는가?’라는 질문을 수없이 스스로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지상에서는 가족이 혈연으로 묶여 있지만, 영계에서는 혈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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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는 천국을 탐방하면서 ‘천국의 가족이 어떻게 구성되는가?’라는 질문을 수없이 스스로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지상에서는 가족이 혈연으로 묶여 있지만, 영계에서는 혈연이 본질적 요소가 아니라 애정의 본질(사랑의 종류)이 결합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여러 차례 관찰하면서 결국 확신한 결론은 이렇습니다. ‘천국의 가족은 지상 혈연을 바탕으로 재편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본질이 서로 맞는 사람들로 새롭게 구성된다.’ 그러나 이것이 지상 가족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깊고, 더 진정한 방식으로 재구성되는 것입니다. 아래에서 그 실제 모습을 깊이 있게 설명드리겠습니다.

 

 

천국에서의 가장 기본 원리, 혈연이 아니라 내적 애정(affection)이 가족을 형성한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에 들어갔을 때, 가장 충격을 받은 사실 중 하나가 ‘천국에서 가족은 혈연이 아니라 사랑이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명확합니다. 혈연은 자연계의 관계인 반면, 천국은 영적 친화성으로 결합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천국의 사람들은 자연적 혈연보다, 영적으로 친근한 이들과 더 깊은 결합을 이루게 됩니다. 그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천국에서는 같은 종류의 선을 사랑하는 이들이 서로를 가족으로 여긴다.’ 즉, 천국 공동체란 비슷한 선(善)의 냄새와 색깔을 가진 사람들의 집합입니다.

 

 

천국의 가족 공동체는 같은 종류의 선을 중심으로 형성된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공동체를 ‘향기’와 ‘빛깔’로 묘사했습니다. 예를 들어, 부드럽고 자비심 많은 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공동체, 진리를 추구하는 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공동체, 섬김과 겸손의 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공동체, 아이 같은 순전한 선을 가진 영들의 공동체 등, 이들은 마치 서로 ‘같은 영적 호흡’을 하듯 함께 있을 때 깊은 평화를 느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천국의 가족적 결합’이라 부릅니다.

 

 

지상 가족은 천국에서 새로운 방식의 따뜻한 가족이 된다

 

스베덴보리가 발견한 아름다운 사실 하나는 지상 가족이 천국에서 완전히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상과는 다른 방식의 가족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부모와 성인 자녀는 함께 살지는 않지만, 서로의 공동체를 자유롭게 왕래하며, 깊은 애정을 나눕니다. 신앙적, 성격적으로 가까웠던 형제자매는 종종 같은 층위의 천국에 있게 되어, 인간적으로 매우 가까운 관계를 유지합니다. 부부 중 영적 친화성이 같았던 경우에는 천국에서도 실제 부부로 생활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천국의 가족 관계는 지상에서보다 더 깊고, 더 진실하고, 더 자유롭다.’

 

 

천국의 한 공동체는 영적 친화성이 모여 이루는 가족 같은 사회

 

스베덴보리가 본 천국의 공동체는 단순한 모임이나 이웃이 아니라 ‘가족 같은 영적 공동체’입니다. 그 공동체 안에는 선배 같은 존재, 동료 같은 존재, 동생처럼 느껴지는 존재, 이웃 같은 존재가 자연스럽게 형성되며, 각자는 자신과 마음이 가장 잘 맞는 사람들과 깊은 우정을 나누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영적 가족의 재편성’이라고 부릅니다. 이 가족들은 혈연의 형태는 없지만, 그 깊이는 지상의 가족보다 더 깊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에서는 비난, 질투, 오해, 상처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상 가족과의 애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천국에서 새로운 가족 공동체를 갖는다고 해서 지상의 가족에 대한 애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지상의 가족은 천국에서도 사랑으로 기억되며, 서로의 평안을 기뻐한다.’ 즉, 지상 가족은 천국에서 감사와 기쁨으로 기억되는 특별한 인연입니다. 하지만 각자 영적으로 가장 편안한 공동체에 가기 때문에 모두 한 집에 살지는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지상 가족이 천국에서도 새로운 형태의 가족 공동체를 이루기도 한다

 

스베덴보리가 본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는 지상에서 실제로 영적 친화성이 매우 깊었던 가족이 천국에서도 비슷한 층위의 공동체에 들어가 더 밝고 자유로운 형태의 가족이 되는 모습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부부가 둘 다 선을 사랑했다면 천국에서도 실제 부부로 사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부모와 성인 자녀가 같은 천국 층위에서 자주 교류하기도 하고, 영적으로 깊은 유대를 맺은 형제자매가 같은 공동체 안에서 돕고 지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보고 말했습니다. ‘천국에서 가족은 지상보다 더 온전한 방식으로 보존된다.’

 

 

가장 중요한 핵심, 천국의 가족 공동체는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가장 조화롭게 재구성된다

 

결국 스베덴보리가 확인한 진리는 이것입니다.

 

- 천국에서는 혈연이 아니라 선(善)의 본질로 가족이 구성된다.

 

- 지상 가족은 사라지지 않고, 새로운 방식으로 유지된다.

 

- 영적으로 친화성이 깊었던 가족은 천국에서도 특별히 가깝다.

 

- 영적 수준이 다르면 서로 왕래는 가능하지만, 함께 살지는 않는다.

 

- 천국 공동체는 서로를 가족처럼 느끼는 새로운 영적 질서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슬픔 없이, 집착 없이, 평화와 기쁨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천국의 질서 안에서는 어떤 관계도 어그러짐이 없다. 모든 결합은 가장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SC.73, ‘부부 중 한 사람만 신앙이 깊은 경우, 사후에는 어떻게 되는가?’

다음은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관찰한 수많은 부부의 사후 모습들인데요, 이 주제는 스베덴보리 신학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며, 목사님처럼 실제로 목회를 하시는 분에게는 특별히 자주 받는 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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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71, ‘영계에서 가족끼리 자주, 그리고 드물게 만나는 경우’

영계에서는 누구와 자주 교류하고, 누구와는 특별한 때에만 만나고, 누구와는 거의 만나지 않게 되는가? 이것은 모두 내적 상태(state)에 의해 결정된다고 스베덴보리는 아주 일관되게 기록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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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계에서는 누구와 자주 교류하고, 누구와는 특별한 때에만 만나고, 누구와는 거의 만나지 않게 되는가? 이것은 모두 내적 상태(state)에 의해 결정된다고 스베덴보리는 아주 일관되게 기록합니다. 지상처럼 거리, 약속, 시간이 결정 요인이 아닙니다. 천국이나 중간 영계에서는 ‘영혼의 향방(향기)’이 곧 만남의 조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만남은 두 마음의 애정이 서로를 향해 열릴 때 이루어진다.’ 이 원리로 인해 가족 간에도 자주 보는 경우와 드물게 보는 경우가 생깁니다.

 

 

자주 만나는 가족, 애정의 기운이 서로를 자연히 가까이하게 하는 경우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여러 공동체에서 부모와 자녀, 형제자매, 친척들이 자주 교류하는 장면을 봤습니다. 이들이 자주 만나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지상에서 사랑을 나누었던 관계

 

지상에서 서로를 진지하게 사랑하고, 아끼고, 도와주고, 영적 성장을 북돋아 주는 관계였다면, 영계에서도 그 ‘향방’이 일치합니다. 영계에서 사랑은 방향을 만들어 내는 힘입니다. 서로 비슷한 방향으로 흐르는 영혼들은 자연스럽게 서로를 ‘불러냅니다.’

 

영적 친화성이 비슷한 경우

 

예를 들어, 부모와 자녀 모두 신앙적으로 비슷한 깊이를 가진 경우, 형제자매가 모두 선한 본성을 유지한 경우, 남매가 서로의 삶을 도와주며 지낸 경우, 이들은 천국에서도 비슷한 층위의 공동체에 들어가며, 정기적으로 만나 삶을 나누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비슷한 선을 가진 이들은 천국에서 자주 교류한다.’

 

서로의 영적 기쁨을 북돋아 주는 관계

 

천국의 사람들은 ‘누구와 함께 있을 때 영적 기쁨이 더 밝아지는가?’를 아주 정확히 느낍니다. 그 기쁨을 선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과 자연스럽게 자주 교류합니다. 가족 중에 이런 관계가 있었던 경우, 영계에서도 빈번한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드물게 만나는 가족, 애정은 있지만, 상태가 다를 때

 

스베덴보리는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지만, 영적 수준이 다르면 ‘자주 만나기 어렵다’고 기록합니다. 이것은 결코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상태가 서로 달라 애정이 지속되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둘의 영적 공기가 다를 때

 

스베덴보리는 자주 천국의 공기를 선함의 향기로 표현합니다. 예를 들어, 아버지는 아주 깊은 천국적 신앙 단계인 반면, 아들은 비교적 외적 선의 단계라면, 둘은 서로를 보지만, 영적 호흡(affection)이 오래 합쳐지지 못합니다. 그래서 만남은 가능하나 길게 머물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짧은 기쁨, 그러나 온전한 기쁨’이라고 표현합니다.

 

서로 좋아하지만, 정서의 깊이가 다를 때

 

어떤 가족은 지상에서 서로 사랑했지만, 영혼의 기질(애정의 종류)이 다릅니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은 ‘천적(天的) 사랑’을 가진 유형(순전한 선)인 반면, 다른 사람은 ‘영적(靈的) 사랑’을 가진 유형(진리를 통한 선)일 경우, 두 사람은 만날 때마다 진정한 기쁨을 느끼지만, 각자의 공동체로 돌아가야만 편안함을 느낍니다. 그래서 만남은 ‘특별한 일’처럼 반갑고 의미 있지만, 빈번한 일은 되지 않습니다.

 

서로 사랑하지만, 사명이 다른 경우

 

천국 사람들은 각자 맡겨진 일, 주님과의 결합의 형태, 섬김의 방식이 다릅니다. 그 사명의 깊이에 따라 서로를 자주 만나지 못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만남에 대한 욕심이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설명합니다. ‘천국의 사람들은 사랑에 집착하지 않는다. 사랑은 자유 속에서 더욱 밝아진다.’ 즉, 자주는 아니어도 항상 ‘열려 있는 관계’입니다.

 

 

거의 만나지 않는 가족, 영적 방향이 완전히 다른 경우

 

이 경우는 ‘관계 단절’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영계에서는 서로 다른 애정은 서로를 향해 움직일 수 없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은 선한 삶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은 명예, 자기애, 세속적 욕망을 사랑했다면, 중간 영계에서라면 잠시 재회할 수는 있지만, 그 후에는 자연스럽게 헤어집니다. 이때 천국인은 전혀 슬퍼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인은 악을 향해 마음이 끌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천국적 정서의 특징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결론, 자주 만남은 사랑의 친화성이고, 드문 만남은 자유의 표현이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에서의 가족 관계를 이렇게 종합합니다. 자주 만나는 경우는 서로 비슷한 선이거나 비슷한 신앙, 그리고 서로에게 기쁨을 주는 관계이거나 영적 공기가 비슷한 경우이고, 드물게 만나는 경우는 본질은 같으나 깊이가 다르거나, 서로를 사랑하지만, 영역(사명)이 다른 경우 등, 이럴 땐, 서로의 상태가 맞춰질 때만 만남이 허용된다. 그리고 거의 만나지 않는 경우는 본질의 사랑이 완전히 다른 경우이거나 영적 방향성이 전혀 반대인 경우이다.

 

 

결정적이고 실제적인 메시지

 

스베덴보리는 이 내용을 정리하며, 아주 중요한 목회적 통찰을 남깁니다. ‘사랑의 깊이는 영원히 기억되고, 각자의 거처는 영적 본질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나 만남의 자유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즉, 가족 사랑은 영원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그 사랑의 형태가 영계의 형태에 맞게 변형되어 가장 순전한 방식으로 보존된다는 것입니다.

 

 

 

SC.72, ‘천국에서의 가족은 어떻게 새롭게 구성되는가?’

스베덴보리는 천국을 탐방하면서 ‘천국의 가족이 어떻게 구성되는가?’라는 질문을 수없이 스스로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지상에서는 가족이 혈연으로 묶여 있지만, 영계에서는 혈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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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70, ‘영적으로 다른 상태의 가족이 서로를 만나는가’

스베덴보리는 영계를 왕래하면서 ‘영적으로 다른 상태의 가족이 서로를 만나느냐’는 질문을 수백 명에게 받았고, 또 실제 장면들을 여러 번 보면서 그 답을 아주 정교하게 정리했습니다. 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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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2:8)

 

AC.101

주님이 동쪽(east)이시라는 것은 말씀에서도 분명합니다. 에스겔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That the Lord is theeastalso appears from the Word, as in Ezekiel:

 

1 후에 그가 나를 데리고 문에 이르니 동쪽을 향한 문이라 2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에서부터 오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 같고 땅은 영광으로 말미암아 빛나니, 4여호와의 영광이 동문을 통하여 성전으로 들어가고 (43:1-2, 4) He brought me to the gate, even the gate that looketh the way of the east, and behold the glory of the God of Israel came from the way of the east; and his voice was as the voice of many waters, and the earth shone with his glory (Ezek. 43:12, 4).

 

주님이 동쪽(east)이시기 때문에 성전이 건축되기 전의 표상적 유대교회에서는 기도할 얼굴을 동쪽으로 향하는 거룩한 관습이 있었습니다. It was in consequence of the Lords being theeastthat a holy custom prevailed in the representative Jewish church, before the building of the temple, of turning their faces toward the east when they prayed.

 

해설

AC.101AC.98에서 제시된 동쪽은 주님을 의미한다는 설명을 말씀과 표상적 유대교회의 관습을 통하여 확증합니다. AC.98에서는 동산이 지성을, ‘에덴이 사랑을, ‘동쪽이 주님을 의미한다고 했고, 그 결과 동쪽 에덴의 동산이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흘러드는 천적 인간의 지성을 뜻한다고 했습니다. AC.100이 동산과 에덴의 의미를 이사야로 확인했다면, AC.101은 이제 그 가운데 남은 동쪽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인용하는 겔43:1-2, 4에서는 선지자가 동쪽을 향한 문으로 인도되고,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에서부터 오는 것을 봅니다. 그 음성은 많은 물소리 같고 땅은 그 영광으로 빛나며, 마침내 여호와의 영광이 동문을 통하여 성전으로 들어갑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말씀에서 동쪽이 주님을 의미하는 근거를 봅니다. 중요한 것은 동쪽이라는 자연적 방향 자체에 어떤 독립적인 거룩함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서 동쪽이 주님과 그분의 영광이 임하는 방향으로 표상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AC.98의 마지막 표현을 더욱 분명하게 해 줍니다. ‘동쪽 에덴의 동산에서 지성은 인간 자신에게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동산은 지성이며 에덴은 사랑이고 동쪽은 주님이므로, 천적 인간의 지성은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통하여 흘러드는 지성입니다. AC.99에서 설명했듯이 천적 인간은 자신의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주님께서 흘러드신다는 것을 지각합니다. 따라서 에덴동산이 동쪽에 있다는 표현은 천적 인간에게 있는 사랑과 지성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밝혀 줍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성전이 건축되기 전 표상적 유대교회에서 사람들이 기도할 때 얼굴을 동쪽으로 향하던 관습을 언급합니다. 그는 이 관습의 이유도 주님이 동쪽이시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동쪽을 향하는 외적인 행위 자체가 사람을 주님께 가까이 가게 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을 향하는 내적인 것을 외적으로 나타내는 표상이었습니다. 표상교회에서는 이러한 장소와 방향, 행위들이 그 자체를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가리키는 천적이고 영적인 실재 때문에 거룩한 의미를 가졌습니다.

 

따라서 AC.101을 오늘날의 기도 방향에 관한 규칙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것은 표상적 유대교회에서 그러한 관습이 왜 존재했는가 하는 속뜻입니다. 2의 에덴동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쪽이라는 자연적 방향에 시선을 고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가리키는 주님께 시선을 돌려야 합니다. 사람이 어디를 향하여 기도하느냐보다 그의 사랑과 생각이 누구를 향하고 있으며, 자신의 생명과 지성의 근원을 어디에서 찾느냐가 이 말씀의 속뜻에서는 더욱 중요합니다.

 

AC.98-101을 함께 보면 이제 동쪽 에덴의 동산이라는 짧은 표현의 구조가 상당히 선명해집니다. 동산은 지성을 의미하고, 에덴은 사랑을 의미하며, 동쪽은 주님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것들을 세 개의 독립된 상응으로 분리하여 기억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근원이시고, 그분으로부터 오는 사랑을 통하여 천적 인간의 지성이 생명을 얻는 하나의 질서가 이 표현 전체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에덴동산의 아름다움은 단순히 풍요로운 지식이나 높은 지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지성이 사랑 안에 있고 그 사랑과 지성의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 점에서 AC.101은 앞의 AC.88부터 이어져 온 한 가지 중요한 흐름도 다시 확인해 줍니다. 새로운 창조와 거듭남은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며, 생명의 숨도 주님으로부터 오고, 천적 인간의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 안으로 흘러드는 생명도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이제 그 동일한 근원이 동쪽이라는 표상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동쪽 에덴의 동산은 천적 인간이 자기 지성과 사랑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는 상태가 아니라, 그것들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퍼셉션하며 그 질서 안에서 살아가는 상태를 보여 줍니다. (AC.101)

 

 

 

AC.102, 창2:9,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 신앙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AC.102-106)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And out of the ground made Jehovah God to grow every tree desirable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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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0, 창2:8, '에덴과 동산, 사랑과 이해의 이중 질서'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창2:8) AC.100 ‘동산’(garden)이 지성(intelligence)을 의미하고, ‘에덴’(Eden)이 사랑(love)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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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2:8)

 

AC.100

동산(garden) 지성을, 에덴(Eden) 사랑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사야의 다음 말씀에서도 분명합니다. That agardensignifies intelligence, andEdenlove, appears also from Isaiah:

 

여호와가 시온의 모든 황폐한 곳들을 위로하여 사막을 에덴 같게, 광야를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가운데에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 (51:3) Jehovah will comfort Zion, he will comfort all her waste places, and he will make her wilderness like Eden, and her desert like the garden of Jehovah; joy and gladness shall be found therein, confession and the voice of singing (Isa. 51:3).

 

구절에서 광야(wilderness), 기뻐함(joy), 감사함(confession) 신앙의 천적인 것들, 사랑에 관계되는 것들을 표현하며, 사막(desert), 즐거워함(gladness), 창화하는 소리(the voice of singing) 신앙의 영적인 것들, 이해에 속한 것들을 표현합니다. 전자는 에덴(Eden), 후자는 동산(garden) 관계됩니다. 선지서에서는 같은 것에 관하여 표현이 계속해서 함께 나오는데, 하나는 천적인 것을, 다른 하나는 영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에덴의 동산(garden in Eden) 밖에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뒤의 10절에서 있습니다. In this passage, “wilderness,” “joy,andconfessionare terms expressive of the celestial things of faith, or such as relate to love; butdesert,” “gladness,andthe voice of singing,of the spiritual things of faith, or such as belong to the understanding. The former have relation toEden,the latter togarden”; for with this prophet two expressions constantly occur concerning the same thing, one of which signifies celestial, and the other spiritual things. What is further signified by thegarden in Eden,may be seen in what follows at verse 10.

 

해설

AC.100AC.98에서 제시한 동산에덴의 의미를 이사야의 말씀으로 확증합니다. AC.98에서는 동산이 지성을, ‘에덴이 사랑을 의미한다고 했고, 그 결과 동쪽 에덴의 동산이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흘러드는 천적 인간의 지성을 뜻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사51:3에서 광야를 에덴 같게하고 사막을 여호와의 동산 같게한다는 두 표현을 함께 제시함으로써, 에덴과 동산이 각각 사랑과 지성에 관계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51:3은 황폐해진 시온을 여호와께서 다시 위로하시고 회복시키시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광야가 에덴처럼 되고 사막이 여호와의 동산처럼 되며, 그곳에 다시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게 됩니다. 문자적으로는 황폐한 곳이 풍요롭고 기쁜 곳으로 회복되는 모습이지만, 스베덴보리는 그 안에서 인간의 내적인 회복을 봅니다. 황폐했던 인간 안에 주님으로부터 사랑과 지성이 다시 살아나고, 그에 따라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함께 회복되는 상태가 묘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특히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이사야의 표현들을 두 계열로 구별한다는 점입니다. ‘광야’, ‘기뻐함’, ‘감사함은 신앙의 천적인 것들, 곧 사랑에 관계되는 것들을 표현하고, ‘사막’, ‘즐거워함’, ‘창화하는 소리는 신앙의 영적인 것들, 곧 이해에 속한 것들을 표현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전자는 에덴과 관계되고 후자는 동산과 관계됩니다. 에덴이 사랑을 의미하고 동산이 지성을 의미한다는 AC.98의 설명이 이사야의 병행 표현 안에서도 확인되는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각각의 단어를 문맥과 관계없이 언제나 같은 뜻으로 대응시키는 상응 사전처럼 읽어서는 안 됩니다. AC.100에서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것은 이사야가 같은 하나의 일을 말하면서 서로 짝을 이루는 두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두 표현 가운데 하나는 천적인 것, 곧 사랑에 관계되고, 다른 하나는 영적인 것, 곧 이해에 관계됩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개별 단어를 따로 떼어 외우는 것보다, 말씀 안에서 사랑에 속한 것과 이해에 속한 것이 서로 구별되면서도 하나의 전체를 이루어 표현된다는 구조를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의 AC.99와도 잘 연결됩니다. AC.99에서는 천적 인간에게 주님께서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통하여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드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이해는 서로 단절된 두 영역이 아닙니다. 사랑이 주된 것이 되고 그 사랑으로부터 이해에 속한 것들이 생명을 받을 때 본래의 질서가 회복됩니다. AC.100에서 에덴과 동산이 한 구절 안에서 서로 대응하여 나타나는 것도 이러한 질서를 보여 줍니다. 사랑을 의미하는 에덴과 지성을 의미하는 동산은 구별되지만, ‘에덴의 동산안에서는 하나의 질서 안에 함께 있습니다.

 

또한 선지서에서는 같은 것에 관하여 표현이 계속해서 함께 나온다는 설명은 이사야를 비롯한 말씀의 표현 방식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줍니다. 겉으로 보면 비슷한 말을 되풀이하는 시적 병행법처럼 보일 수 있지만, 스베덴보리는 속뜻에서는 그 두 표현이 완전히 같은 말을 중복하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하나가 사랑과 선에 관계되는 천적인 것을 표현한다면 다른 하나는 이해와 진리에 관계되는 영적인 것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말씀의 반복처럼 보이는 표현에도 속뜻에서는 구별과 질서가 있다는 것입니다.

 

AC.100은 마지막으로 에덴의 동산의 의미가 창2:10 이하에서 더 밝혀질 것이라고 예고합니다. 이것은 지금 모든 의미를 한꺼번에 완성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에서도 중요합니다. 현재까지는 동산이 지성이고 에덴이 사랑이며, 이 둘이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관계 속에서 이해된다는 데까지 밝혀졌습니다. 앞으로 강과 네 갈래의 물줄기에 관한 설명이 이어지면서 에덴동산의 구조는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은 AC.98-100이 세워 놓은 기본 질서, 곧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이 주된 것이 되고 그 사랑으로부터 지성이 생명을 받는다는 구조를 붙들고 다음 설명을 따라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AC.98-100)

 

 

 

AC.99, 창2:8, ‘뒤집힌 질서가 회복될 때, 모든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옴을 지각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창2:8) AC.99영적 인간에게서 생명, 곧 생명의 질서는 이러합니다.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와 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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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는 영계를 왕래하면서 ‘영적으로 다른 상태의 가족이 서로를 만나느냐’는 질문을 수백 명에게 받았고, 또 실제 장면들을 여러 번 보면서 그 답을 아주 정교하게 정리했습니다. 결론은 단순합니다. 영적 수준, 즉 상태가 달라도 일시적 재회는 가능하다. 그러나 영원한 결합은 오직 영적 친화성이 있는 경우에만 가능하다. 즉, ‘만남은 가능’, 그러나 ‘함께 사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두 가지를 매우 정확하게 구분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본 실제 장면, 다른 수준에 살더라도, 사랑하면 찾아온다

 

스베덴보리는 어느 남성과 어머니의 관계를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아들은 지상에서 신앙을 진실하게 살았고, 천국의 한 공동체로 갈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반면, 어머니는 지상에서는 신앙을 고백했지만, 내적 삶은 그렇지 못해 중간 영계에서 오랫동안 정화 과정을 겪고 있었습니다. 아들은 천국 공동체에 이미 소속된 상태였지만, 어머니가 중간 영계의 한 단계에 도달했을 때, 그는 사랑의 인도하심으로 그곳에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기록합니다. ‘그는 어머니가 있는 곳에 곧바로 나타났고, 그녀는 즉시 아들을 알아보았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아들이 ‘천국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흐름이 그를 어머니의 상태, 즉 어머니와 같은 눈높이로 ‘임재’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것이 영계의 자연스러운 원리입니다.

 

 

만남은 가능하지만, 함께 사는 것은 영적 친화성에 달려 있다

 

스베덴보리는 여러 사례를 관찰하면서 확인했습니다. 서로 다른 천국 층위에 있어도 서로의 상태에 맞출 수 있으면 만날 수 있다. 왜냐하면 영계에서는 ‘수준 차이’가 공간적 거리가 아니라 상태의 밀도 차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원히 함께 사는 것, 그러니까 거처를 함께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은 자신과 비슷한 선과 진리의 수준을 가진 이들과 자연히 함께 살게 된다.’ 즉, 잠시 만나는 것은 사랑으로 가능, 그러나 영원한 결합은 본질(affectional state)에 따라 결정된다는 원리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본 세 가지 재회 형태

 

스베덴보리는 수많은 재회 장면을 관찰한 뒤, 이를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었습니다.

 

서로 사랑했지만 영적 수준이 달랐던 가족, 일시적 재회는 가능

 

예를 들면, 신앙적으로 깊이 살았던 자녀와 신앙이 얕았던 부모, 도덕적으로는 선했지만, 신앙적으로는 약한 형제, 경건했던 배우자와 세속적이었던 배우자 등은 중간 영계에서 충분히 서로를 만납니다. 이 만남은 지상에서의 감사, 못다 한 대화, 사랑의 표현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그 후 각자 자기 본질에 맞는 천국의 공동체로 들어가면 영원한 동거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슬픔이 없는 헤어짐’이라고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천국에 들어간 영혼은 타인의 상태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적 수준이 상당히 비슷했던 가족, 천국에서도 교류가 계속된다

 

이 경우는 같은 종류의 선, 같은 방식의 신앙, 비슷한 내적 애정을 가진 가족입니다. 이들은 종종 천국에서도 서로 가까운 공동체에 들어가며, 정기적으로 서로 교류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가족은 천국에서 더욱 가까워진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영적 친화성이 만들어 내는 결합입니다.

 

지상에서는 가족이었지만, 영적으로는 완전히 다른 경우, 만남 자체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지상에서는 가족 관계였지만, 한 사람은 선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은 자기애, 권력욕, 증오를 사랑했다면, 이 둘은 중간 영계에서도 서로를 자연스럽게 떠나게 됩니다. 이때의 ‘이별’은 지상적 슬픔을 동반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천국인은 악을 사랑하는 이를 그리워할 수 없다. 그 사랑은 천국의 사랑과 전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영적 수준이 달라서 함께 살지는 못하지만, 사랑의 기억은 존중된다

 

천국의 사람들은 지상의 가족 관계를 완전히 잊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기억은 지상적 집착이 아니라 감사와 자비의 형태로 남습니다. ‘그가 나에게 해준 사랑이 있었다.’, ‘우리는 지상에서 함께 걸어갔다.’, ‘그때 나는 보호받았다.’ 등, 이런 기억은 천국에서 빛처럼 따뜻하게 반짝입니다. 그러나 ‘왜 내 가족은 천국에 오지 않았는가?’라는 슬픔은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단호히 말합니다. ‘천국에는 슬픔이 없다. 슬픔을 남기는 기억은 주님이 제거하신다.’

 

 

결정적 통찰,영적 수준 차이는 재회를 막지 않지만,본질의 차이(사랑의 종류)’는 영원한 결합을 막는다

 

스베덴보리가 수천 건의 사례에서 얻은 결론은 이것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만나게 되고, 본질(선)은 함께 살게 한다. 그러나 악은 결합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즉, 만남은 사랑에 의해, 결합은 본질에 의해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의 법칙입니다.

 

 

 

SC.71, ‘영계에서 가족끼리 자주, 그리고 드물게 만나는 경우’

영계에서는 누구와 자주 교류하고, 누구와는 특별한 때에만 만나고, 누구와는 거의 만나지 않게 되는가? 이것은 모두 내적 상태(state)에 의해 결정된다고 스베덴보리는 아주 일관되게 기록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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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69, ‘가족 중 일부가 지옥 간 경우’

가족 중 일부가 지옥에 간 경우, 스베덴보리가 본 실제 관계 이 부분은 많은 성도들뿐 아니라 스베덴보리 자신도 깊이 고민했던 문제였습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는 살아 있을 때, 자신의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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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중 일부가 지옥에 간 경우, 스베덴보리가 본 실제 관계

 

이 부분은 많은 성도들뿐 아니라 스베덴보리 자신도 깊이 고민했던 문제였습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는 살아 있을 때, 자신의 가족 중 일부가 신앙적으로 매우 다른 길을 걸었고, 그들의 사후 상태가 어떨지 진지하게 궁금해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영계를 왕래하며 가장 먼저 확인한 사실은 이렇습니다. ‘지옥에 있는 가족과 천국에 있는 가족은 서로 만날 수 없다.’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두 세계는 ‘장소’가 아니라 ‘마음의 본질(affection)로 구분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본 실제 장면, 서로를 보려고 하지만, 접근하지 못한다

 

스베덴보리는 지상에서 매우 친하게 지냈던 형제 둘을 관찰했습니다. 한 사람은 선한 삶을 통해 천국으로 들어갔고, 다른 한 사람은 외적 신앙만 있었고, 내적으로는 자기애와 권력욕이 강해 결국 지옥으로 흘러갔습니다. 천국에 들어간 형제는 지상 기억으로 인해 한 번쯤 ‘그를 찾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스베덴보리가 묘사하듯, 그는 순간적으로 ‘희미한 인식’을 통해 지옥에 있는 형제를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그의 마음은 극도로 불편함을 느꼈고, 더는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천국인은 지옥의 악을 참을 수 없다. 단지 악과 접촉하는 순간, 선한 사랑은 즉시 뒤로 물러난다.’ 천국인은 ‘보고 싶다’는 자연적 마음이 잠시 일어날 수는 있지만, 지옥의 상태는 그 자체로 천국인의 영적 호흡을 막는 공기와 같기 때문에 결코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지옥에 있는 가족은 천국 가족을 바라볼 수 있는가?

 

스베덴보리는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천국을 ‘위로 올려다본다’는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영계에서는 위, 아래가 공간 개념이 아니라 상태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지옥 영들은 천국의 빛을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천국인을 ‘보는 것 자체가 고통’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악은 선을 견디지 못하며, 선은 악을 가까이할 수 없다.’ 따라서 지옥 가족이 ‘천국에 있는 가족을 보고 싶어 한다’는 지상적 상상은 영계에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지상에서의 사랑은 사라지는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부분을 매우 섬세하게 설명합니다. 천국 가족은 지상에서의 사랑을 잊지 않습니다. 다만 그 사랑은 고통 없이 불쌍히 여기는 자비의 형태로 변합니다. 지옥 가족은 천국 가족을 자연적 기억으로는 기억하지만, 영적으로 사랑하거나 그리워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악은 본질적으로 사랑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천국 가족이 지옥 가족을 보며 느끼는 마음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슬픔이 아니라, 그가 선택한 삶의 결과를 바라보는 조용한 연민이다.’ 천국에서는 결코 ‘영원한 상실의 고통’이라는 형태가 남지 않습니다. 주님이 그 고통을 제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천국 가족은 지옥 가족을 위해 기도하는가?

 

지상에서는 기도가 가능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영계에서는 중보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의 최종 상태가 결정되면, 그것은 본질(사랑의 형태)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국 사람의 마음속에는 그의 과거 가족에 대한 부드러운 자비의 정서가 남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천국적 기억’입니다. 고통이 아니라, 상대가 가엾다는 자비의 정서만 남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결론, 천국의 행복은 지옥 가족의 존재로 인해 전혀 흐려지지 않는다.’

 

스베덴보리는, 어떤 영계 탐방자도 이 사실을 처음에 믿기 어려워했지만, 천국의 실제를 경험하는 순간, 이 원리를 온전히 받아들인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천국에서는 선한 사랑, 참된 이해, 완전한 평화가 마음을 채우기 때문에 지상적 감정인 ‘영원한 슬픔’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천국인은 지옥에 있는 가족 때문에 불행해지지 않는다. 주님은 천국인에게 불행을 결코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천국의 기쁨은 지옥에 있는 가족 때문에 흐려지는 일은 없습니다. 그들은 단지 ‘그가 선택한 길’에 대한 조용한 연민만 남기기 때문입니다.

 

 

 

SC.70, ‘영적으로 다른 상태의 가족이 서로를 만나는가’

스베덴보리는 영계를 왕래하면서 ‘영적으로 다른 상태의 가족이 서로를 만나느냐’는 질문을 수백 명에게 받았고, 또 실제 장면들을 여러 번 보면서 그 답을 아주 정교하게 정리했습니다. 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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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68, ‘사후 첫 3일간 일어나는 일, 먼저 간 가족들, 그리고 돕는 천사들’

사후 첫 3일 동안의 의식 상태, ‘잠들어 있는 듯, 그러나 가장 따뜻하게 보호받는 시간’ 스베덴보리가 영계를 처음 왕래할 때, 가장 ‘신비한 현장’처럼 느꼈던 부분이 바로 사람이 죽은 직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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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 첫 3일 동안의 의식 상태, 잠들어 있는 듯, 그러나 가장 따뜻하게 보호받는 시간

 

스베덴보리가 영계를 처음 왕래할 때, 가장 ‘신비한 현장’처럼 느꼈던 부분이 바로 사람이 죽은 직후 3일간의 상태였습니다. 그는 실제로 여러 영혼이 이 첫 3일을 겪는 모습을 지켜보며, 이 기간을 ‘지상과 영계의 숨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주님의 자비로 본인이 실제로 이 첫 3일을 체험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야 더욱 생생하게 전할 수 있기 때문이었지요.

 

 

죽음의 첫 순간, 숨은 끊어졌지만, 의식은 아직 깨어 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사람의 육체가 죽는 순간은 영혼이 분리되는 과정의 시작에 불과합니다. 그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영혼은 처음에는 자신이 죽었는지 모른다. 육체에서 벗어났으나 의식은 이어진다.’ 영혼은 몸을 벗은 가벼움, 통증의 소멸, 청각과 촉각의 예민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아직 ‘죽음’을 인식하지는 못합니다.

 

 

천사들의 등장, 조용히 말없이, 그러나 따뜻하게

 

스베덴보리는 죽은 사람 곁에 항상 두 종류의 천사가 함께한다고 말했습니다. 천국의 가장 내적(內的, inmost) 천사들인 사랑의 천사들, 곧 천적 천사들(celestial angels)과, 다음 단계의 천사들인 진리의 천사들, 곧 영적 천사들(spiritual angels)이 말이지요. 이 두 종류의 천사들은 ‘말을 하지 않고’ 사람에게 다가옵니다. 그 이유는 죽음 직후의 영혼에게는 말보다 기운과 사랑이 더 크게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들은 따뜻함과 평화로 그를 감싼다. 영혼은 마치 어머니의 품에 안긴 아기처럼 안심한다.’

 

 

깊은 잠과 같은 상태, 그러나 의식은 천사에게 민감해진다

 

천사들의 사랑은 영혼에게 ‘잠과 비슷한 상태’를 가져옵니다. 그러나 이것은 무지나 혼미가 아니라, 지상 고통에서 벗어난 후, 내적 감각이 깨어나는 전진 준비 상태입니다. 이때 영혼은 과거 기억이 살짝 떠오르고, 지상에서 사랑했던 얼굴들이 희미하게 나타나며 깊은 평화가 감쌉니다.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지상에서의 생애 중 가장 편안한 순간이 이때이다.’

 

 

3일째 되는 즈음, 영혼이 눈을 뜬다

 

3일이란 숫자는 지상의 표현입니다. 영계에서는 ‘상태가 충분히 변한 시점’을 의미합니다. 이때 영혼은 천사들의 도움으로 새로운 실체(실존)를 깨닫게 됩니다. ‘내가 살아 있네!’, ‘여기는 어디지?’, ‘아프지 않다’, ‘몸이 가볍다’ 등, 이런 인식이 차례대로 떠 오릅니다. 그리고 천사들은 아주 부드럽게 말합니다. ‘당신은 새로운 삶에 들어오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중간 영계에서 가족이 서로를 탐색하는 실제 모습

 

중간 영계(영들의 세계)는 단순히 심판 대기실이 아니라, 사람의 진짜 속마음, 즉 속 사람이 드러나는 곳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이곳에서 가족들이 서로를 ‘찾고, 탐색하고, 만나는’ 아주 생생한 장면들을 봅니다.

 

 

중간 영계는 사랑이 인도하는 탐색의 장소

 

가족끼리는 영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서로 가까운 상태에 있으면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끌립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의 상태를 본능적으로 감지한다.’ 그래서 같은 상태에 있으면,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향해 움직입니다. 이것은 냄새, 소리, 감각이 아니라 ‘내면의 방향성(affectional orientation)입니다.

 

 

서로를 찾아가는 과정, 걷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상태가 이동한다

 

스베덴보리는 여러 차례 아버지가 아들을, 자녀가 어머니를 찾아가는 장면을 봅니다. 그는 말합니다. ‘그들의 걸음은 걷는 것이 아니었다. 마음이 끌리는 곳으로 순간적으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즉, 사랑에 의해 방향이 결정되고, 방향이 곧 거리입니다.

 

 

만나는 순간, 얼굴이 아니라 영혼을 알아본다

 

이 부분이 특히 중요합니다. 영혼들은 서로를 볼 때, 지상에서의 얼굴이 아니라, 영혼의 본질을 먼저 봅니다. 그래서 머리가 희어졌든, 어릴 때의 모습이든 그런 외적 요소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들은 서로의 존재를 알아보았고, 그 순간 슬픔과 후회가 녹아내렸다.’

 

 

갈등 있었던 가족, 해결의 기회가 주어진다

 

스베덴보리가 본 독특한 장면이 있습니다. 지상에서 서로 상처를 주고, 사실상 원한 상태로 죽은 가족이 중간 영계에서 재회하는 경우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들을 특별한 천사들이 인도하여 서로 솔직해질 수 있는 환경으로 데려간다고 합니다. 이때 그들은 지상에서 말하지 못했던 미안함, 설명, 오해, 진짜 속마음을 드러내게 됩니다. 이것은 ‘감정 폭발’이 아니라 정화와 진실의 과정입니다.

 

 

천국 천사들이 가족을 맞이할 때 취하는 세밀한 태도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천국 천사들이 지상 가족을 맞이하는 장면도 깊이 관찰했습니다. 이 장면은 매우 조심스럽고,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섬세한 사랑의 행동입니다.

 

천사들은 먼저 상대의 상태를 읽는다

 

천국 천사는 막 들어온 영혼에게 다가가기 전, 그 사람의 슬픔, 두려움, 혼란, 기대, 짐을 정확히 읽습니다. 그는 ‘어떻게 말해야 이 사람이 상처받지 않을까’를 미리 알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표현합니다. ‘천사는 단 한 마디도 상대에게 불편을 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천사들의 첫 번째 말은 환영의 선언이 아니라, 안심시키는 부드러운 음성이다

 

천사들은 크게 외치거나 감정적으로 환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천사의 말은 따뜻한 햇살같이 부드럽고 잔잔한 음성입니다. ‘당신은 안전합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이제 고통은 없습니다’ 등, 천사들은 이런 말을 서두르지 않고, 상대가 받아들일 수 있는 깊이에 따라 천천히 전합니다.

 

만약 천국에 속한 가족이 있다면, 천사들이 그 가족에게 사랑의 신호를 보낸다

 

스베덴보리는 이 장면을 여러 번 확인합니다. 천국에 있는 어머니의 상태가 갑자기 ‘미세하게 흔들리는 듯’, 천국에 있는 자녀의 마음에 ‘햇빛 같은 따뜻함’이 잠시 번지는 듯 말이지요. 이는 천사들이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왔습니다’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천국인(가족)은 ‘이동’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을 따라 자연스럽게 그의 눈앞에 나타납니다.’

 

천사는 결코 갑작스러운 감정 폭발을 유도하지 않는다

 

천사는 새로 들어온 가족이 감정적으로 무너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래서 충격이 너무 크지 않도록 천천히 안정시키기 위해 재회 순간을 조절하며, 양쪽이 가장 평화로운 상태에서 만나도록 매우 신중하게, 그러나 따뜻하게 도와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천사적 섬세함의 완성’이라고 합니다.

 

 

 

SC.69, ‘가족 중 일부가 지옥 간 경우’

가족 중 일부가 지옥에 간 경우, 스베덴보리가 본 실제 관계 이 부분은 많은 성도들뿐 아니라 스베덴보리 자신도 깊이 고민했던 문제였습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는 살아 있을 때, 자신의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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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67, ‘이미 천국에 있는 사람과 중간 영계에 이제 막 들어온 지상 가족과의 만남’

좀 엉뚱한 질문인데요, 제가 알기로 중간 영계에서 보내는 기간은 길어야 30년을 넘지 않는다고 했어요. 만일 이 기간 중에 이미 천국 특정 공동체로 배정된 사람은 마침 지상의 혈육이 사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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