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estruction of the world is not meant by the day of the last judgment
LJ.1
영적 의미를 알지 못한 사람들은 마지막 심판의 날에 보이는 세계의 모든 것이 파괴될 것이라고 이해해 왔습니다. 그때 하늘과 땅이 사라지고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신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모든 사람이 그때 무덤에서 일어나며, 선한 자는 악한 자와 분리된다고 말하는 등 같은 취지의 말씀들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이러한 견해를 더욱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표현들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에서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말씀의 문자적 의미는 자연적이며, 신적 질서의 가장 바깥 단계에 있고, 그 안에는 각각 그리고 모든 부분마다 영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문자적 의미에 따라서만 이해하는 사람은 여러 가지 견해로 이끌릴 수 있으며, 실제로 기독교 세계에서 수많은 이단이 그렇게 생겨났고, 각각이 또한 나름 말씀으로부터 확증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말씀 전체와 그 모든 부분 안에 영적 의미가 있다는 것, 더 나아가 영적 의미가 무엇인지조차 아무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마지막 심판에 대해 이제 말씀드리는 이러한 견해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보이는 하늘이나 사람이 거주하는 땅이 멸망하지 않으며, 둘 다 지속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the new heaven and the new earth)이란 하늘과 땅 모두에 존재하는 새로운 교회를 의미합니다. 하늘에도 교회가 있다고 하는 것은, 하늘에도 땅과 마찬가지로 말씀이 있고 설교가 있으며 신적 예배(Divine worship)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그곳의 모든 것은 더 완전한 상태에 있는데, 이는 그들이 자연 세계가 아니라 영적 세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곳의 모든 존재는 세상에 있을 때처럼 자연적인 사람이 아니라 영적인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그러함은 ‘Heaven and Hell’에서, 특히 말씀을 통해 하늘이 인간과 결합되는 것에 관한 항목(303–310)과 하늘에서의 신적 예배에 관한 항목(221–227)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Those who have not known the spiritual sense of the Word, have understood that everything in the visible world will be destroyed in the day of the last judgment; for it is said, that heaven and earth are then to perish, and that God will create a new heaven and a new earth. In this opinion they have also confirmed themselves because it is said that all are then to rise from their graves, and that the good are then to be separated from the evil, with more to the same purport. But it is thus said in the sense of the letter of the Word, because the sense of the letter of the Word is natural, and in the ultimate of Divine order, where each and every part contains a spiritual sense within it. For which reason, he who comprehends the Word only according to the sense of the letter, may be led into various opinions, as indeed has been the case in the Christian world, where so many heresies have thus arisen, and every one of them is confirmed from the Word. But since no one has hitherto known, that in the whole and in every part of the Word there is a spiritual sense, nor even what the spiritual sense is, therefore they who have embraced this opinion concerning the last judgment are excusable. But still they may now know, that neither the visible heaven nor the habitable earth will perish, but that both will endure; and that by “the new heaven and the new earth” is meant a new church, both in the heavens and on the earth. It is said a new church in the heavens, for there is a church in the heavens, as well as on the earth; for there also is the Word, and likewise preachings, and Divine worship as on the earth; but with a difference, that there all things are in a more perfect state, because there they are not in the natural world, but in the spiritual; hence all there are spiritual men, and not natural as they were in the world. That it is so, may be seen in Heaven and Hell, in a special article there, on the conjunction of heaven with man by the Word (n. 303–310); and on divine worship in heaven (n. 221–227).
해설
이 첫 문장은 스베덴보리가 왜 ‘마지막 심판’을 새롭게 설명해야 하는지를 밝히는 일종의 문을 여는 선언입니다. 그는 먼저 전통적 기독교가 품어 온 ‘우주적 파괴’의 상상을 지적합니다. 많은 신자들은 마지막 날에 별이 떨어지고 지구가 불타 사라지며, 죽은 육체가 무덤에서 다시 일어나는 장면을 실제 물리적 사건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런 이해가 문자에만 머문 결과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신학적 전환이 나타나는데, 곧 말씀은 자연적 층과 영적 층을 동시에 가진다는 것입니다. 문자만 붙잡으면 파괴의 종말이 보이지만, 영적 의미를 보면 그것은 ‘상태의 변화’, 곧 교회의 쇠퇴와 새로운 교회의 탄생을 말합니다. 이는 종말을 공포의 사건이 아니라 섭리 속 갱신의 과정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이 대목에서 특히 주목할 점은 ‘이단’에 대한 그의 설명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단이 단순히 악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말씀의 영적 의미가 아직 열리지 않았던 역사적 상황 속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했다고 봅니다. 다시 말해 그는 과거 교회를 정죄하기보다 ‘지금은 더 깊이 이해할 때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스베덴보리적인 태도인데, 섭리는 언제나 인류의 이해 수준에 맞추어 점진적으로 진리를 드러낸다는 관점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심판에 대한 문자적 신앙은 거짓이라기보다 ‘불완전한 단계’였다고 이해하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또 하나의 핵심은 ‘새 하늘과 새 땅 = 새 교회’라는 선언입니다. 성경에서 ‘하늘’은 내적 차원의 교회, ‘땅’은 외적 차원의 교회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우주의 재창조가 아니라 신앙의 구조가 새로워지는 사건입니다. 교회가 사랑과 신앙을 잃고 형식만 남을 때 영적 세계에서는 이미 심판이 일어나며, 그 결과 새로운 영적 공동체가 세워지고 그 영향이 결국 지상의 교회에도 흘러들어옵니다. 이런 관점은 역사를 ‘하늘과 땅이 서로 호응하는 유기적 과정’으로 보게 합니다.
특히 ‘하늘에도 교회가 있다’는 말은 매우 중요한 통찰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천국을 단지 안식의 장소로 생각하지만,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천국 역시 살아 있는 교회입니다. 그곳에는 말씀, 설교, 예배가 있으며 단지 더 완전할 뿐입니다. 이는 죽음 이후에도 인간의 영적 성장이 계속됨을 암시합니다. 다시 말해 천국은 정지된 상태가 아니라 더욱 깊이 주님을 받아들이는 역동적 질서입니다.
여기서 설교적으로 매우 풍성한 적용이 가능해집니다. 마지막 심판은 미래 어느 날 갑자기 오는 우주적 재난이 아니라, 인간과 교회 안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분리의 사건’입니다. 사랑에서 나온 것과 자기 사랑에서 나온 것이 갈라지고, 진리와 왜곡이 구별됩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심판을 기다리는 가장 올바른 태도는 날짜를 계산하거나 재난을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무엇이 하늘에 속하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를 분별하는 삶입니다.
또한 이 구절은 목회적으로 큰 위로를 줍니다. 세상이 무너질 것이라는 공포 대신, 주님은 언제나 ‘새 교회’를 준비하신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쇠퇴는 끝이 아니라 전환이며, 황혼 뒤에는 새벽이 옵니다. 스베덴보리가 보기에 심판은 파괴보다 정화에 가깝습니다. 불은 태워 없애기 위해서가 아니라 순금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됩니다.
마지막으로, 이 글 전체를 관통하는 숨은 주제는 ‘말씀의 깊이’입니다. 문자 아래에는 언제나 더 높은 의미가 있으며, 그 의미가 열릴 때 종말은 두려움의 교리가 아니라 희망의 복음으로 바뀝니다. 그러므로 LJ의 첫 문장은 단순한 종말론 설명이 아니라 독자를 영적 의미의 세계로 초대하는 선언이며, 동시에 앞으로 전개될 ‘마지막 심판은 이미 영적 세계에서 일어났다’는 거대한 논증의 기초를 놓는 서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노아의 홍수’의 속뜻을 설명해 주세요. 노아의 홍수는 실제 역사적으로 있었던 게 아니라는 말에 이 말을 처음 들었던 저도 그랬고, 거의 모든 개신교인, 기독교인들이 마음이 철컹 닫힐 것 같아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노아의 홍수의 속뜻을 설명할 때 가장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스베덴보리는 ‘노아의 홍수는 거짓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성경의 목적이 자연사나 지질학적 사건을 기록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영적 역사, 곧 인간 내면의 상태 변화를 계시하는 데 있다는 점입니다. 이 전제를 놓치지 않으면, 홍수 이야기는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제자리를 찾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노아의 홍수는 자연 현상에 대한 기록이기 이전에, 인류의 내적 생명이 전면적으로 붕괴된 상태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선과 진리의 ‘남은 것들’, 곧 ‘리메인스’(remains)가 인간 안에서 더 이상 작동하지 못하고, ‘무시무시한 욕구와 확신’(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에 의해 질식된 상태가 바로 홍수로 표현됩니다. 여기서 물은 사람을 죽이는 도구가 아니라, 사람의 내적 상태가 스스로를 압도하고 잠식한 결과를 나타내는 상징입니다.
그래서 홍수는 하나님의 분노나 충동적인 심판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인간의 내면이 더 이상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 그 상태는 스스로를 유지할 수 없으며, 그 붕괴는 홍수라는 언어 외에는 달리 표현될 수 없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인간이 ‘스스로 질식한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이 지점에서 많은 성도들이 묻게 됩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홍수가 있었던 것이냐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 가장 정직하고 안전한 대답은, 성경은 홍수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를 말하려는 책이 아니라, 왜 그런 언어로밖에는 표현할 수 없었는지를 말하려는 책이라는 설명입니다. 성경은 사건의 형태보다 그 사건이 상징하는 영적 실재를 계시합니다.
태고의 사람들은 오늘날처럼 추상 개념으로 사고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영적 상태를 자연 이미지로밖에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내적 붕괴는 땅이 무너지는 것으로, 선과 진리의 질식은 물에 잠기는 것으로, 전면적 혼돈은 홍수로 표현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영적으로 ‘홍수 같은 상태’는 자연적으로도 ‘홍수’라는 말로 표현되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가장 태고한 사람들의 표현 방식’입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성경은 틀린 책이 아니라, 우리가 잘못 읽어 왔던 책이 됩니다. 성경은 한 번도 스스로를 과학 교과서나 역사 연대기로 소개한 적이 없습니다. 성경은 자연의 언어로 영적 진실을 말하는 책이며, 그 언어를 문자 그대로만 붙잡을 때 오히려 성경의 진리가 가려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왜 노아는 살아남았는가라는 질문이 이어집니다. 노아는 도덕적으로 특별히 착한 개인이어서 살아남은 인물이 아닙니다. 노아는 홍수 이후에도 유지 가능한 새로운 인간 형식, 새로운 교회 상태를 대표합니다. 직접적인 퍼셉션(perception)에 의존하지 않고, 외적 진리와 양심을 통해 주님과 연결되며, 리메인스를 보존할 수 있는 인간 형식이 바로 노아로 상징됩니다.
따라서 노아의 홍수는 사람을 죽인 사건이 아니라, 사람의 형식이 바뀐 사건입니다. 이전의 인간 형식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고, 주님께서는 인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새로운 방식으로 살 길을 여셨습니다. 홍수는 끝이 아니라 전환이며, 멸절이 아니라 보존을 위한 단절입니다.
목회적으로는 이렇게 설명해 주어도 충분합니다. 노아의 홍수는 하나님이 화가 나서 사람들을 쓸어버린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이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인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새로운 방식으로 구원의 길을 여신 이야기입니다. 이 설명은 성경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리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이해를 깊게 만듭니다.
마지막으로 꼭 붙들어야 할 한 문장은 이것입니다. 노아의 홍수는 하나님의 심판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가 선택한 유일한 보존의 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관점으로 읽을 때, 홍수는 더 이상 두려운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의 우리를 살리고 있는 이야기로 다가오게 됩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3:24)
AC.307에서 스베덴보리는 ‘홍수’가 자연적 재난이나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태고교회 말기에 인간 내면에서 일어난 전면적 붕괴 상태’를 가리킨다고 분명히 합니다. 그 붕괴의 핵심이 바로 ‘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왜곡된 욕구와 확신)입니다. 여기서 홍수는 물의 범람이 아니라, 왜곡된 욕구와 확신이 인간의 내면(internal, 속) 전 영역을 덮어 버린 상태를 뜻합니다. 즉, 인간의 의지와 이해가 더 이상 위에서 아래로 질서 있게 작동하지 않고, 아래에서 위로 뒤집혀 폭주하는 상황을 상징합니다.
먼저 ‘insane cupidities’는 태고교회의 마지막 단계에서 나타난 ‘의지의 붕괴’를 뜻합니다. 태고교회는 본래 사랑으로부터 직접 진리를 지각하는 천적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욕구 자체가 질서 안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판단하기 시작하면서, 사랑은 주님을 향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향하게 되었고, 그 결과 욕구는 더 이상 제어되지 않는 상태로 변했습니다. 이 욕구들은 단순히 강해진 것이 아니라,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분별할 능력 자체를 잃었기 때문에 ‘광적’(insane)이라고 불립니다.
여기에 결합된 것이 ‘persuasions’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잘못된 생각이나 오류가 아니라, ‘자기 욕구를 절대적으로 옳다고 느끼게 만드는 내적 확신’입니다. AC.307의 문맥에서 이 확신은 외부의 어떤 진리도, 주님의 어떤 경고도 침투할 수 없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더 이상 ‘설득될 수 없는 존재’가 되며, 자신이 보고 느끼는 것만이 전부라고 굳게 믿습니다. 이 확신은 의지의 광기와 결합하여, 악을 악으로 인식하지 못하게 만들고, 오히려 그것을 지혜와 자유로 착각하게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홍수를 바로 이 상태의 상징으로 사용하는 이유는, 이 두 요소가 인간 전체를 ‘완전히 잠식’하기 때문입니다. 홍수처럼 물이 점점 차오르듯, 왜곡된 욕구와 확신은 처음에는 부분적으로 작용하다가, 결국 인간의 사고, 감정, 기억, 판단을 전부 덮어 버립니다. 이 상태에서는 어떤 진리도 숨 쉴 공간이 없으며, 남아 있던 내적 생명의 통로들이 모두 차단됩니다. 그래서 홍수는 ‘죽음’의 상징이 됩니다.
중요한 점은, 이 홍수가 ‘외부에서 온 것이 아니라 인간 안에서 솟아났다는 점’입니다. 물은 성경에서 보통 진리나 지식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진리가 완전히 전도되어, 인간의 기억 지식과 감각적 사고가 통제 없이 넘쳐흐르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 지식들은 본래 질서 안에서는 유익했으나, 자기 사랑과 결합되자 생명을 살리는 물이 아니라, 질식시키는 물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가 곧 ‘홍수’가 되는 이유입니다.
AC.307에서 이 상태는 창3:24의 생명나무 길 차단과 직접 연결됩니다. 이런 상태의 인간이 생명나무에 접근한다면, 곧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선과 진리를 자기 욕구와 확신으로 오염시키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홍수를 허용하시고, 동시에 새로운 인간 유형, 곧 노아로 상징되는 영적 인간을 일으키십니다. 이는 멸망이 목적이 아니라, ‘완전한 붕괴를 막기 위한 최종적 분리와 재구성’입니다.
결국 AC.307에서 ‘홍수’는 역사 이전의 한 사건이 아니라, ‘천적 인간이 자기 인도로 완전히 전도될 때 도달하는 종말 상태’를 뜻합니다. ‘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는 그 상태의 정확한 내적 정의이며, 홍수는 그것이 더 이상 회복 불가능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총체적 상징입니다. 이 점에서 홍수는 심판이기 이전에, 주님의 섭리가 더 이상 그 상태를 그대로 두지 않으셨다는 표지입니다.
이 해석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신앙이 자기 확신과 욕구에 완전히 잠식될 때, 인간은 여전히 살아 있으나 내적으로는 홍수 가운데 있는 상태가 됩니다. AC.307은 바로 그 지점을 향해, 홍수라는 강렬한 상징으로 우리를 경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3:24)
‘their 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에서 ‘cupidities’는 단순한 욕망이나 정욕이 아니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솟아나는 통제 불가능한 욕구’, 곧 의지의 왜곡을 뜻합니다. 이것이 ‘insane’으로 수식되는 이유는, 이 욕구들이 더 이상 이성이나 양심의 조절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상적인 욕구는 질서 안에서 목적을 향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욕구는 목적 자체가 자기 자신이며, 만족을 위해서라면 어떤 진리나 선도 훼손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다시 말해 이는 강한 욕망이 아니라, ‘영적 질서로부터 이탈한 의지의 광기’입니다.
‘persuasions’는 단순한 생각이나 의견이 아니라, ‘그 욕구들을 정당화하고 절대화하는 내적 확신’을 가리킵니다. 이 확신은 외부로부터 설득된 것이 아니라, 자기 사랑에서 스스로 만들어낸 신념이며, 한 번 굳어지면 어떤 반대 증거나 진리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persuasion’은 오류라기보다 ‘진리를 밀어내는 능동적 상태’로, 스스로를 참이라고 느끼게 만드는 강박적 확신입니다.
이 두 요소가 결합될 때, 인간의 내적 상태는 매우 위험해집니다. ‘insane cupidities’가 의지를 장악하고, ‘persuasions’가 이해를 장악하여, 의지와 이해가 함께 거짓된 방향으로 완전히 합류합니다. 이 상태에서는 악을 행하면서도 그것이 악이라는 인식이 사라지고, 오히려 선을 행한다고 확신하게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말하는 ‘자기 기만의 완성 단계’입니다.
창3:24에서 이 표현이 등장하는 맥락은 매우 중요합니다.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지키는 그룹과 불 칼은, 인간이 더 이상 그 상태로는 생명에 접근할 수 없음을 뜻합니다. 즉, 이 ‘광적인 욕구와 확신’의 상태로 생명나무, 곧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선과 진리에 접근한다면, 그것을 더럽히고 파괴하게 되기 때문에 길이 차단됩니다. 차단은 형벌이 아니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마지막 자비’입니다.
따라서 ‘their 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는 단순히 타락한 인간의 도덕적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이성의 붕괴 상태’를 가리킵니다. 욕구는 방향을 잃고, 확신은 검증을 거부하며, 그 결과 인간은 스스로를 가장 지혜롭다고 여기면서 가장 깊은 어둠 속에 머물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창3의 종결부에서 인간이 에덴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던 근본 이유입니다.
이 표현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신앙과 진리를 감각과 지식으로 재단하고, 자기 확신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상태가 바로 이 ‘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의 현대적 형태입니다. 그러므로 창3:24는 과거의 신화적 장면이 아니라, ‘신앙이 자기 인도로 전도될 때 필연적으로 도달하는 종착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로또하는 기독교인들, 특별히 뭘 좀 해 볼려고 해도 종잣돈 자체가 없어 힘들어하는 아들들을 위해 로또 생각을 하는 기독교인, 그러나 한편으로 아들들을 향하신 주님의 계획에 혹시 차질을 빚는 건 아닐까, 간섭하는 건 아닐까 하는 마음에 고민하는 기독교인을 위해 스베덴보리는 무슨 말을 할까요? 기독교인들은 로또하면 안 되나요?
이 질문을 스베덴보리의 자리에서 듣는다면, 그는 아마 이전보다 더 깊고 조용한 어조로 말을 건넸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단순한 경제적 절박함이나 부모의 애정만이 아니라, ‘주님의 계획을 내가 방해하고 있는 건 아닐까’라는 신앙적 두려움이 함께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마음을 매우 귀하게 보았을 것입니다. 그는 먼저 이렇게 말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네가 지금 두려워하는 것은 돈의 부족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를 해칠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이다.’ 이 지점에서 그는 이 기독교인을 가볍게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고민 자체가 이미 섭리를 믿고 있다는 표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자리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는 곧바로 한 단계 더 깊은 질문으로 들어갑니다. ‘그렇다면 지금 너는 주님의 섭리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 스베덴보리에게 섭리는 인간의 선한 의도를 필요로 하면서도, 동시에 인간의 조급한 개입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부모가 아들들을 위해 길을 열어주고 싶어 하는 마음은 섭리에 속하지만, 그 길을 ‘우연과 확률이라는 비질서적 수단으로 앞당기려는 시도’는 섭리를 돕는 것이 아니라 흔들 수 있다고 그는 보았을 것입니다. 특히 ‘혹시 내가 간섭하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때는, 이미 그 선택이 섭리의 리듬과 어긋나고 있다는 내적 신호로 보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스베덴보리는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주님의 계획은 네가 돕지 않아도 무너지지 않는다.’ 이것은 냉정한 말이 아니라 오히려 위로에 가까운 말입니다. 주님의 섭리는 인간의 조급함보다 훨씬 크고, 인간의 불안보다 훨씬 정교합니다. 아들들의 종잣돈이 없는 현재의 상태 역시 섭리의 한 부분일 수 있으며, 그것이 반드시 실패나 지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그는 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로또를 하면 안 되느냐’라는 질문에 대해, 이 경우에도 스베덴보리는 규칙으로 답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로또를 산다고 해서 네가 즉시 섭리를 파괴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선택이 네 마음을 어디에 고정시키는지는 분명히 살펴보아야 한다.’ 로또는 주님의 계획을 기다리는 인내를 강화하기보다, 그 인내를 단축시키고 싶게 만드는 방향으로 마음을 끌고 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이미 ‘이게 혹시 주님의 일에 내가 간섭하는 건 아닐까’라는 질문이 마음에 떠오른 상태라면,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단순한 양심의 소리가 아니라 ‘섭리가 보내는 미세한 경고음’으로 들었을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부모에게 이렇게 권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아들의 미래를 대신 해결해 주려 하지 말고, 함께 섭리를 신뢰하는 법을 가르쳐라.’ 돈을 마련해 주는 것보다, 기다리는 법과 질서를 존중하는 태도를 함께 견디는 것이 더 깊은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부모가 아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역할은, 주님의 계획을 앞당기는 것이 아니라 ‘그 계획이 작동하도록 조용히 공간을 남겨두는 것’이라고 그는 말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아마 이렇게 정리했을 것입니다. ‘이 질문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네가 로또보다 섭리를 더 신뢰하고 있다는 증거다.’ 스베덴보리는 이 기독교인을 향해 ‘하면 안 된다’고 단정하지 않으면서도, 분명히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이 선택은 돈의 문제가 아니라, 네가 주님의 계획을 얼마나 충분히 신뢰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대부분의 신앙인은 이미 마음속으로 방향을 알고 있다고 그는 보았을 것입니다.
※ 오늘 부를 찬송가는 순서대로 찬29, ‘성도여 다 함께’와 찬434, ‘귀하신 친구 내게 계시니’입니다.
오늘은 창세기 5장 여섯 번째, 마지막 시간으로 본문은 32절 한 절, AC 글 번호로는 534번에서 536번입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창5:32)
이 본문을
노아, 그리고
셈, 함, 야벳의 속뜻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 준비했습니다. 오늘 말씀에 주님이 빛을 비추셔서 이 시간 우리 영과 육이 활짝 열려 모두 들을 귀 만들어 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오늘 본문은 매우 짧습니다. ‘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라는 한 절이지요.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한 절에 창세기 전체의 큰 전환점이 들어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가계 기록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종말 이후에도 주님께서 교회를 완전히 끊어 버리지 않으셨다는 선언이며, 한 교회 안에서 서로 다른 성향과 방향을 지닌 세 흐름이 동시에 시작되었음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AC 본문과 그 해설을 그대로 인용, 함께 읽어보는 시간을 가지면 어떨까 합니다. 특별히 오늘 AC 본문은 534, 535, 536 셋밖에 안 될뿐더러 특별히 최근 새롭게 시작한 해설 버전을 실제로 접하실 수 있는 시간도 되기 때문입니다. 먼저 세 글을 리딩 후, 요약 정리하겠습니다. 먼저 AC.534입니다.
534
‘노아’(Noah)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고대교회(the ancient church)를 의미합니다. ‘셈, 함, 야벳’(Shem, Ham, and Japheth)은 세 고대교회를 의미하는데, 이들의 부모가 되는 교회가 바로 ‘노아’라 하는 고대교회입니다. By “Noah,” as has been said, is signified the ancient church. By “Shem, Ham, and Japheth” are signified three ancient churches, the parent of which was the ancient church called “Noah.”
해설
이 글은 노아 이후 전개될 교회 역사의 ‘기본 구조를 한 문장으로 제시하는 핵심 진술’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노아를 하나의 교회 상태로 규정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노아 교회가 이후 여러 교회의 ‘부모’가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이는 고대교회가 단일한 형태로 오래 지속된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서로 다른 성격의 교회들이 갈라져 나왔음을 뜻합니다.
앞서 태고교회에서는 하나의 중심적 교회 흐름이 여러 단계로 약화되며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노아 이후의 고대교회에서는 양상이 달라집니다. 동일한 교리적 토대 위에 서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방향과 강조점을 지닌 교회들이 동시에 존재하게 됩니다. 셈, 함, 야벳은 바로 그 분화를 대표하는 이름들입니다.
중요한 점은, 이 세 교회가 서로 무관하게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모두 노아 교회에서 나왔으며, 같은 뿌리를 공유합니다. 즉, 퍼셉션의 교회가 아니라 교리의 교회라는 공통 기반 위에 서 있습니다. 차이는 그 교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무엇을 중심에 두느냐에 있습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말하면, 이는 매우 현실적인 교회 이해를 제공합니다. 하나의 참된 교회에서 출발했더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 다른 교회 형태들이 생겨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문제는 분화 자체가 아니라, 그 분화가 여전히 같은 근원에 연결되어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셈, 함, 야벳을 모두 고대교회로 부르며, 이 점을 분명히 합니다.
이 글에서 ‘부모’라는 표현은 다시 한번 중요합니다. 부모는 자녀의 모든 선택을 대신하지는 않지만, 생명과 구조를 제공합니다. 마찬가지로 노아 교회는 이후 교회들이 존재할 수 있는 기본 틀과 신앙 구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이후의 교회들은 이 틀 안에서 각기 다른 길을 걷게 됩니다.
그래서 AC.534는 단순한 족보 설명이 아니라, ‘고대교회 전체를 조망하는 지도’와도 같습니다. 노아라는 하나의 중심에서 셈, 함, 야벳이라는 세 갈래가 뻗어 나가고, 이 세 갈래는 이후 인류 영적 역사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교회 유형의 원형이 됩니다.
535
‘노아’(Noah)라 하는 교회를 홍수 이전의 교회들 가운데 하나로 봐서는 안 된다는 점은, 29절에서 그를 가리켜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comfort them from their work and the toil of their hands, out of the ground which Jehovah hath cursed)라고 한 데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 ‘위로’(comfort)란, 그 교회가 살아남아 지속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 관해서는, 이후 주님의 신적 자비로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That the church called “Noah” is not to be numbered among the churches that were before the flood, appears from verse 29, where it is said that it should “comfort them from their work and the toil of their hands, out of the ground which Jehovah hath cursed.” The “comfort” was that it should survive and endure. But concerning Noah and his sons,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해설
이 글은 노아의 교회가 태고교회의 마지막 단계가 아니라, ‘이미 다른 질서에 속한 교회’임을 명확히 선 긋는 대목입니다. 앞서까지의 흐름만 보면, 노아가 태고교회의 연속선 위에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분명히 말합니다. 노아의 교회는 홍수 이전의 교회들에 포함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입니다.
그 근거는 29절에 나오는 ‘위로’라는 표현입니다. 이 위로는 단순히 고통을 덜어 주는 의미가 아니라, ‘존속과 지속’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노아의 교회는 사라질 교회가 아니라 남겨질 교회이며, 심판을 통과해 이어질 교회입니다. 이것은 태고교회와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태고교회는 라멕에 이르러 완전히 역할을 마쳤고, 더 이상 이어질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서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라는 표현이 다시 언급되는 이유도 분명해집니다. 태고교회의 마지막 상태에서는 이 수고와 고됨이 교회 자체의 종말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노아에게서는 같은 표현이 ‘위로’와 연결됩니다. 이는 상태가 같다는 뜻이 아니라, ‘같은 조건 속에서도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그 차이가 어디에서 나오느냐 하면, 교회의 성격에서 나옵니다. 태고교회는 퍼셉션에 기반한 교회였기 때문에, 퍼셉션이 사라지면 교회 자체가 더 이상 성립할 수 없었습니다. 반면 노아의 교회는 교리에 기반한 교회입니다. 퍼셉션이 사라진 조건 속에서도, 교리를 통해 질서를 유지하고 신앙을 보존할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같은 ‘수고와 고됨’ 속에서도, 노아의 교회는 무너지지 않고 지속됩니다. 참고로, 여기 ‘수고와 고됨’은 주님의 선과 진리 아는 일이 예전엔 퍼셉션으로 즉시 쉽게 알 수 있는 일이었지만, 점점 기울다가 라멕의 때쯤 이르자 ‘수고와 고됨’의 일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구분은 매우 중요합니다. 노아는 태고교회의 회복 버전이 아니라, ‘전혀 다른 교회 유형의 시작점’입니다. 따라서 노아를 태고교회의 한 인물로 설교하거나, 태고적 신앙을 되살린 인물로 묘사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관점과 어긋납니다. 노아는 퍼셉션을 되찾은 사람이 아니라, 퍼셉션 이후의 시대를 살아갈 수 있도록 준비된 교회의 대표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지점에서 자세한 설명을 미루고, ‘뒤에서 더 말씀드리겠다’고 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노아와 그의 아들들은 단순한 후속 인물이 아니라, 고대교회의 구조 전체를 설명하는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이 장에서는 위치만 정리하고, 본격적인 내용은 이후에 펼치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AC.535는 짧지만 결정적입니다. 노아는 태고교회의 끝이 아니라, ‘홍수 이후를 살아갈 교회의 시작’입니다. 이 한 문장을 통해, 독자는 창세기 전반부의 큰 전환점을 분명히 인식하게 됩니다. 이제 이야기는 멸망을 향해 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보존과 지속, 그리고 새로운 교회의 전개를 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536
앞선 글들에서 홍수 이전 존재하였던 교회들이 지녔던 퍼셉션에 관하여 많은 말씀을 드렸는데, 오늘날에는 이 ‘퍼셉션’(perception)이라는 것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아서,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지속적인 계시의 한 형태로 상상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인간에게 본래 심겨진 어떤 것으로 여기기도 하며, 또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단지 상상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퍼셉션은 사랑의 신앙(the faith of love) 안에 있는 자들에게 주님께서 주시는 바로 그 천적인 것이며, 보편적 천국(universal heaven) 안에는 무한한 다양성을 지닌 퍼셉션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퍼셉션이 무엇인지를 어느 정도라도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주님의 신적 자비로, 이어지는 글들에서 천국에 존재하는 주요한 퍼셉션의 종류들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As in the foregoing pages much has been said about the perception possessed by the churches that existed before the flood, and as at this day perception is a thing utterly unknown, so much so that some may imagine it to be a kind of continuous revelation, or to be something implanted in men; others that it is merely imaginary, and others other things; and as perception is the very celestial itself given by the Lord to those who are in the faith of love, and as there is perception in the universal heaven of endless variety: therefore in order that there may be among men some conception of what perception is, of the Lord’s Divine mercy I may in the following pages describe the principal kinds of perception that exist in the heavens.
해설
이 글은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하는 동시에, ‘이후 전개될 매우 중요한 설명을 위한 문턱’을 형성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독자의 상태를 정확히 짚어 냅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퍼셉션은 더 이상 살아 있는 경험이 아니라, 개념조차 모호한 대상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이 퍼셉션을 오해하는 여러 방식들을 차분히 나열합니다.
어떤 이들은 퍼셉션을 마치 끊임없이 주어지는 계시처럼 생각합니다. 이는 퍼셉션을 외부에서 갑자기 주어지는 초자연적 정보로 이해하는 태도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퍼셉션을 인간에게 본래부터 심겨진 본능이나 직관 정도로 여깁니다. 반대로, 어떤 이들은 퍼셉션이라는 말 자체를 비현실적인 상상으로 치부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모든 오해가 퍼셉션이 더 이상 지상 교회의 경험 속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생겨난 것임을 암시합니다.
그는 여기서 퍼셉션의 본질을 매우 분명하게 규정합니다. 퍼셉션은 사랑의 신앙 안에 있는 자들에게 주님께서 주시는 천적인 것이라고 말입니다. 즉, 퍼셉션은 인간의 능력도 아니고, 훈련의 산물도 아니며, 타고난 감각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주님과의 결합 상태, 곧 사랑과 신앙의 상태 안에서 주어지는 인식입니다. 이 점에서 퍼셉션은 계시와도 다르고, 본능과도 다르며, 상상과는 더더욱 다릅니다.
또한 스베덴보리는 퍼셉션이 단일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천국 전체에는 끝없는 다양성을 지닌 퍼셉션이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퍼셉션이 획일적인 기준이나 동일한 느낌이 아니라, 각 천적 공동체와 각 개인의 상태에 따라 다르게 주어지는 살아 있는 인식임을 뜻합니다. 앞서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미세하고 개별적’이라고 설명되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글의 중요한 전환점은, 스베덴보리가 이제 ‘설명 방식 자체를 바꾸겠다고 선언’하는 데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는 주로 지상 교회, 특히 태고교회의 상태를 통해 퍼셉션을 간접적으로 설명해 왔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천국에 실제로 존재하는 퍼셉션의 종류들을 직접 설명하겠다고 말합니다. 이는 퍼셉션이 추상 개념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며 질서와 구조를 지닌 인식이라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대목은 매우 중요한 신학적 태도를 가르쳐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퍼셉션을 신비화하지도 않고, 도덕화하지도 않으며, 인간의 능력으로 축소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퍼셉션을 ‘주님께서 주시는 천적 질서의 일부’로 다루며, 가능한 한 오해 없이 전달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전달 방식 역시, 계시적 선언이 아니라 설명과 분별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이 글은 또한 독자에게 하나의 약속처럼 읽힙니다. 퍼셉션이 무엇인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스베덴보리는 가능한 한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그 실체를 보여 주겠다고 말합니다. 이는 퍼셉션을 회복하겠다는 약속이 아니라, 퍼셉션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알게 함으로써, 오늘날의 신앙이 스스로의 위치를 정확히 인식하도록 돕는 작업입니다.
그래서 AC.536은 단순한 서론이 아니라, 이후 천국론과 인식론 전체로 이어지는 중요한 연결 고리입니다. 퍼셉션이 사라진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퍼셉션이 무엇이었는지를 바르게 알게 하는 것 자체가 이미 큰 신앙적 유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네, 이상입니다. 전에는 AC 본문만 제공, 간간이 설명을 곁들였다면, 지금은 아예 AC 글 하나하나를 문장 단위, 표현 단위, 그리고 전반적으로 해설하고 있어 나름 한결 읽어나가기가 편하지 않으실까 싶습니다. 이 해설의 초벌은 ChatGPT가 하고, 제가 검수를 거쳐 최종 싣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편으론 무척 조심스럽고, 그래서 더욱더 주님의 빛 비추심을 힘써 구하게 됩니다.
그럼, 이제 이런 배경을 가지고 간략한 요약 및 정리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첫째, 노아는 ‘새로운 교회’이지만, 그렇다고 갑자기 등장한 ‘완전히 다른 사람’은 아닙니다.
AC.534, 535에 따르면 노아는 홍수 이전 교회들 가운데 하나로 분류되지 않습니다. 그는 이미 퍼셉션의 교회가 끝나버린 이후,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세워지는 고대교회의 출발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노아가 갑자기 등장한 전혀 새로운 인간형은 아닙니다. 노아는 태고교회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남은 것들’, 곧 ‘리메인스’(remains) 위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주님은 언제나 ‘단절’이 아니라 ‘보존’을 통해 다음 시대를 여십니다. 퍼셉션이 사라졌다고 해서 인간을 포기하신 것이 아니라, 퍼셉션 없이도 살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여신 것입니다. 노아는 더 이상 ‘보는 사람’이 아니라, ‘배우고 붙드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배움과 붙듦의 출발점에는, 여전히 태고교회에서 남겨진 선과 진리의 리메인스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은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지만, 동시에 ‘주님의 끈질긴 연속성’을 증언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남겨 두십니다. 교회가 무너질 때조차, 완전히 무너지게 두지 않으십니다.
둘째, 셈, 함, 야벳은 ‘세 아들’이 아니라 ‘세 교회의 유형’입니다.
본문은 노아가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AC.534는 분명히 말합니다. 이 이름들은 개인이 아니라, 노아 교회로부터 갈라져 나올 세 고대교회를 가리킵니다. 한 교회 안에서 세 갈래의 흐름이 동시에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현실적인 그림입니다. 하나의 교회, 하나의 말씀, 하나의 복음 안에서도 사람들의 수용 방식은 같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내적 신앙으로, 어떤 이는 외적 순종으로, 어떤 이는 신앙의 외피만 붙들며 살아갑니다. 셈, 함, 야벳은 바로 이런 차이들을 대표합니다.
중요한 점은, 이 세 아들이 ‘같은 날 태어났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분열이 시간차를 두고 생긴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잠재되어 있었다는 뜻입니다. 노아 교회는 퍼셉션의 교회가 아니기에, 모든 사람이 동일한 내적 인식에 의해 하나로 묶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교리는 필요해졌고, 그 교리를 받아들이는 방식의 차이가 곧 교회의 차이로 드러나게 됩니다.
이것은 오늘 교회의 모습과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같은 예배, 같은 말씀, 같은 성경을 듣고도 서로 다른 방향으로 살아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문제는 차이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 차이를 주님 앞에서 어떻게 관리하느냐입니다.
셋째, 노아의 오백 세는 ‘지연’이 아니라 ‘준비의 시간’입니다.
본문은 굳이 노아의 나이를 밝힙니다. ‘오백 세 된 후에’ 아들을 낳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문자적으로 읽으면 지나치게 늦은 출산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교회의 상태와 준비의 완성으로 봅니다.
퍼셉션의 교회는 즉각적이었지만, 노아의 교회는 축적과 형성의 교회입니다. 시간이 필요합니다. 기억이 쌓여야 하고, 교리가 정리되어야 하며, 선과 진리를 구분하는 훈련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오백이라는 수는 그런 ‘충분히 성숙된 상태’를 상징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중요한 메시지를 줍니다. 신앙의 열매는 서두른다고 맺히지 않습니다. 주님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교회를 급히 확장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충분히 기다리시고, 충분히 다지신 후에 다음 세대를 여십니다.
오늘 본문은 조급함을 경계하는 말씀입니다. 빨리 결과를 보고 싶어 하는 신앙, 빨리 열매를 증명하고 싶어 하는 태도는 노아의 길이 아닙니다. 노아는 묵묵히 준비하다가, 때가 되었을 때 비로소 다음 세대를 맞이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은 짧지만, 매우 깊은 선언입니다. 퍼셉션의 시대는 끝났지만, 교회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보는 신앙은 사라졌지만, 배우는 신앙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의 교회 안에서 서로 다른 세 흐름이 태어났지만, 그 모든 시작은 여전히 주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노아는 홍수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한 인물이 아니라, ‘퍼셉션 이후의 인간은 어떻게 구원받는가’에 대한 주님의 대답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그 대답 위에 서 있습니다. 배우고, 붙들고, 살아내는 교회의 자리에 말입니다.
네, 창세기 이후 진도는 여기서 이렇게 잠시 멈추고, 맨 앞 첫 세 장인 창1부터 창3까지를 해설 버전으로 다음 주부터 다시 한 후, 이후 진도인 창6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우리가 AC 해설 버전 설교를 창4부터 시작한 관계로 이 부분이 빠졌기 때문입니다.
같은 데를 여러 번 반복하는 것에 대해 마음이 좀 불편하실 수도 있으나, 그러나 최근 한국기행에서 각 분야 장인들의 삶을 보셨듯 여기엔 주님의, 우리를 곁에서 붙드심이 있으신 줄 믿습니다. 힘내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의 내면을 아르카나로 아주 깊이, 그리고 충분히 다지셔서 우리 위에 큰 빌딩을 세우시려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기초공사를 오래오래 하시는 걸 보면 말입니다.
성경 전체를 떠받치는 반석은 창세기요, 그 안에서도 첫 세 장은 반석 중의 반석입니다. 여기에 주님과 천국, 그리고 교회를 향한, 그리고 우리 인간을 향한 모든 것이 들어 있기 때문인데요, 저는 AC 일을 이 부분에서만 만 7년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부족한데요, 그러나 뭐랄까... 표현할 수 없는 어떤 든든함이 생겼습니다. 요동치 않는 그 어떤 것인데요, 여러분에게도 이런 변화가 생길 줄 믿습니다.
제가 나누어드린 창1 번역 및 해설본을 곁에 두고, 읽고 또 읽고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주님이 곁에 계심을 마음으로 영으로 느끼실 줄 믿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비록 한 절이지만 이 한 절 안에 담아두신 주님의 깊은 아르카나를 살필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은혜와 자비를 더하심,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 아담으로 시작된 태고교회의 종말에 이번엔 노아를 준비, 인류의 소멸을 막으시고, 비록 이젠 전과는 다른 신인류가 되었지만, 그렇게라도 해서 계속 주님과 연결되고 이어지게 하시는 사랑과 섭리, 경륜을 볼 수 있었습니다. 주님, 이런 주님의 사랑을 저희도 본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시대든 교회든, 더 나아가 각 개인이든 주님은 우리의 최악의 상황과 상태 속에서도 한 줄기, 한 줌, 한 조각 리메인스를 찾아 그걸로 새롭게 이어가시는 것을 보면서 저희도 주님처럼 그렇게 쉽게 포기하지 않고 대신 사랑의 인내와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는 노아 이후 인류이오니 저희 역시 저희와 다른 사람들, 곧 저희 곁의 셈, 함, 야벳의 사람들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사람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무엇을 하든지, 무슨 생각을 하든지 늘 주님처럼 사랑으로, 그리고 사랑이라는 출발점에서 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을 사랑하오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창4:15)
먼저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바로잡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는 구절은, 가인을 보호하기 위한 과도한 형벌 경고가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살인자를 편들기 위해 더 강한 보복을 선언하신 말씀도 아닙니다. 아르카나의 관점에서 이 말씀은 ‘형벌의 크기’가 아니라 ‘영적 파괴의 깊이와 범위’를 말하는 표현입니다. 다시 말해, 이 구절의 초점은 ‘가인’이 아니라 ‘가인을 죽이려는 행위가 초래하는 결과’에 있습니다.
아르카나에서 ‘가인’은 한 개인이 아니라 ‘사랑에서 분리된 진리’, 곧 ‘신앙은 있으나 사랑이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상태는 분명 타락한 것이며, 교회의 온전한 상태가 아닙니다. 그러나 동시에 주님께서는 이 상태를 즉시 제거하지 않으십니다. 그 이유는, 이 상태가 비록 왜곡되어 있을지라도, 여전히 교회 안의 어떤 질서와 연속성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가인에게 ‘표’를 주어, 그 상태가 더 이상 다른 것을 ‘죽이지 못하도록’ 제한하시되, 성급하게 없애지는 않으십니다.
이 맥락에서 ‘가인을 죽인다’는 것은, 잘못된 신앙 상태를 주님의 섭리 안에서 기다리며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판단과 열심으로 단절하고 제거하려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즉, 아직 회복 가능성이 있는 것, 혹은 다른 선과 진리와 느슨하게나마 연결된 상태까지 함께 끊어 버리는 행위입니다.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에서 ‘칠’이라는 수 역시 문자적인 숫자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칠’은 반복적으로 ‘완전함’, ‘충만함’, ‘끝까지 간 상태’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 표현은 ‘형벌이 일곱 배 더 무겁다’는 뜻이 아니라, ‘그 결과가 전면적이고 회복이 극히 어려운 상태로까지 간다’는 의미입니다.
아르카나의 논리에서 보면, 사랑 없는 진리라는 하나의 왜곡된 상태 자체보다, 그것을 잘못 다루어 교회의 남아 있는 선과 진리까지 함께 파괴해 버리는 일이 훨씬 더 치명적입니다. 그래서 가인의 상태는 ‘표를 받아 제한’되지만, 가인을 죽이려는 행위는 ‘칠 배의 벌’, 곧 완전한 황폐에 가까운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섭리의 원리가 드러납니다. 주님은 악이나 왜곡을 다루실 때, ‘즉각적 제거’보다 ‘점진적 제한’을 먼저 행하십니다. 왜냐하면 교회와 인간의 내면에는 언제나 ‘보존되어야 할 리메인스(remains)’가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그 과정을 대신하여 정리하려 들 때, 특히 분노나 의로움의 확신 속에서 판단할 때, 그 판단은 거의 언제나 주님의 섭리를 넘어섭니다.
그래서 ‘가인을 죽이는 자’는, 겉으로는 정의를 세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주님이 보존하고 계신 질서를 무너뜨리는 자가 됩니다. 그 결과가 바로 ‘칠 배의 벌’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더 세게 때리신다는 뜻이 아니라, 그 행위 자체가 더 깊고 광범위한 영적 붕괴를 낳는다는 뜻입니다.
성도들에게 이 말씀을 풀어 줄 때에는, 도덕적 위협이나 공포의 언어보다는 다음과 같은 방향이 가장 적절합니다.
‘하나님은 잘못된 신앙 상태를 옳다고 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상태를 인간의 판단으로 성급하게 제거하는 것도 원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그 과정에서 아직 살아 있는 선과 진리까지 함께 죽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악을 즉시 없애기보다, 먼저 그 작용을 제한하시고, 회복 가능한 것들을 조용히 보존하십니다. 이 질서를 무시하고 우리가 대신 정리하려 들 때, 그 결과는 처음 문제보다 훨씬 더 큰 영적 황폐로 이어집니다. 성경이 말하는 ‘칠 배의 벌’은 바로 그 결과를 가리킵니다.’
정리하면, 창4:15의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는 말씀은, ‘사랑 없는 진리’라는 왜곡된 상태보다도, 그 상태를 주님의 섭리 없이 인간의 판단으로 제거하려는 태도가 훨씬 더 깊은 영적 파괴를 낳는다는 사실을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이 구절은 처벌의 위협이 아니라, 교회를 다루시는 주님의 인내와 섬세함, 그리고 인간 판단의 위험성을 동시에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 오늘 부를 찬송가는 순서대로 찬28, ‘복의 근원 강림하사’와 찬433, ‘귀하신 주여 날 붙드사’입니다.
오늘은 창세기 5장 다섯 번째 시간, 25절로 27절이며, AC 글 번호로는 526번에서 533번입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28라멕은 백팔십이 세에 아들을 낳고29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30라멕은 노아를 낳은 후 오백구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31그는 칠백칠십칠 세를 살고 죽었더라(창5:28-31)
이 본문을
노아, 인류를 위한 주님의 위로
라는 제목으로 말씀 준비했습니다. 오늘 말씀에 주님이 빛을 비추셔서 이 시간 우리 영과 육이 활짝 열려 모두 들을 귀 만들어 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오늘도 여전히 ‘퍼셉션’(perception)이 나옵니다. 이 창5를 하면서 계속 다루었지만, 여전히 알쏭달쏭, 흐릿합니다. 그렇다고 안 다룰 수도 없습니다. 창5를 끝으로 퍼셉션의 교회인 태고교회가 막을 내리고, 창6부터는 이제 전혀 새로운 교회인 노아의 고대교회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득불 오늘도 이 퍼셉션 이야기를 살짝이라도 좀 먼저 드리고 진도를 나가겠습니다. 오늘은 2월 첫주, 성찬이 있으므로 가급적 짧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퍼셉션을 한 문장으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퍼셉션은 생각을 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방향을 잡았더니 저절로 알게 되는, 그런 상태다.
무엇을 새로 알 때 우리는 보통 이렇게 압니다. ‘배워서 → 이해하고 → 판단하고 → 행동한다.’ 이 순서가 너무 익숙해서, 이것 말고 다른 앎의 방식이 있다는 것 자체가 잘 상상이 안 됩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거의 전부 이 방식으로 삽니다. 노아의 고대교회도 기본적으로 이쪽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이 순서가 달랐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살았습니다. ‘사랑이 먼저 있고 → 그 사랑 안에서 무엇이 옳은지가 보이고 → 그 보임대로 산다.’ 여기서 핵심은, ‘보인다’는 말입니다. 논리로 결론을 내리는 게 아니라, 마치 방향 감각처럼 즉각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엄마의 얼굴을 볼 때를 생각해 보세요. 비록 어린아이라 하더라도 아이는 엄마가 지금 슬퍼하신다는 걸 엄마 얼굴을 보고 그냥 ‘즉시 압니다.’ 무슨 학습을 해서 아는 게 아니고 말입니다. 이건 추론이 아닙니다. 사랑 안에서 생긴 ‘직관적 인식’입니다. 퍼셉션은 이와 비슷하지만, 대상이 더 깊습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은 ‘지금 이 상황에서 무엇이 선인가?’, ‘지금 이 선택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선택인가?’를 ‘생각을 거치지 않고’ 아는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퍼셉션에는 이런 특징들이 있습니다.
첫째, 퍼셉션은 ‘정보’가 아닙니다.
퍼셉션은 지식이 쌓여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교리로 가르칠 수도 없고, 말로 정리해도 생기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시작하지 않으면 퍼셉션은 절대로 생기지 않습니다.
둘째, 퍼셉션은 ‘판단’이 아니라 ‘방향 감각’입니다.
우리가 길을 걸을 때, 인공지능 로봇들처럼 ‘왼쪽으로 가면 15도 각도고, 오른쪽은...’ 이러면서 걷지 않듯이, 태고교회 사람들은 선과 진리를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이쪽이다’가 보였습니다.
셋째, 퍼셉션은 ‘나한테서 나오지 않습니다.’
이게 제일 중요합니다. 퍼셉션은 ‘내가 잘 훈련해서 얻는 능력’이 아닙니다. 사랑이 주님을 향해 열려 있을 때, ‘주님 쪽에서 흘러 들어오는 인식’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퍼셉션을 ‘계시의 한 형태’라고도 말하지만, 오늘 우리가 상상하는 ‘특별한 음성’이나 ‘신비 체험’과는 전혀 다릅니다. 아주 조용하고, 너무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이게 특별한 건가?’ 싶을 정도입니다.
그럼, 왜 오늘 우리는 퍼셉션을 거의 모를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랑의 질서, 순서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태고교회는 ‘사랑 → 인식 → 삶’의 구조였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걸 사랑으로, 사랑에서 출발했다면, 노아 이후의 고대교회, 그리고 오늘의 우리는 ‘배움 → 이해 → 선택 → 삶’의 구조입니다. 즉 머리로, 지식에서 출발합니다. 이건 타락이라기보다, ‘상태의 변화’입니다. 주님은 퍼셉션을 잃은 인간에게 퍼셉션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노아 교회는 퍼셉션이 아니라 교리, 기억, 훈련, 순종 위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오해 하나를 풀어야 합니다. 퍼셉션이 ‘더 ‘고급’해서’ 지금 우리에게 없는 게 아닙니다. 퍼셉션은 ‘지금 우리에게 맞지 않는 방식’이기 때문에 주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눈으로 길을 보던 시대에서 지도와 표지판을 쓰는 시대로 온 것과 비슷합니다. 눈이 나빠졌다고 길을 포기한 게 아니라, ‘다른 방식의 안내를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성인’(聖人)이라 하는 사람의 삶을 살다 간 사람들은 그러니까 이 ‘머리’의 시대에 태고교회처럼 ‘가슴’, 즉 ‘사랑’의 삶을 살다 간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오늘을 사는 우리가 퍼셉션을 이해할 때, 이렇게 생각하시면 좋습니다. 퍼셉션은 ‘우리가 회복해야 할 능력’이 아니라 ‘우리가 그랬던 적이 있었음을 이해해야 할 상태’입니다. 이걸 이해해야 노아의 고대교회가 왜 그렇게 중요한지, 왜 교리가 필요한지, 왜 믿음과 순종이 강조되는지 비로소 연결됩니다.
마지막으로, 아주 짧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퍼셉션이란 ‘주님을 사랑하는 상태에서,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가 생각 없이 보이던 삶의 방식’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그 퍼셉션을 잃은 인간을 위해 주님께서 새로 여신 길 위에 서 있습니다. 그래서 비교가 가능합니다. 퍼셉션의 교회 → 노아의 교회로, 보는 교회 → 배우는 교회로, 그리고 즉각적 인식 → 점진적 거듭남으로 말입니다.
네, 그럼, 몇 주에 걸친 퍼셉션 이야기는 이쯤에서 마치고, 이제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세 가지만 간략하게 나누고 이후 순서 진행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창5:28-31은 태고교회의 계보가 끝나고, 전혀 새로운 시대가 열리기 직전의 마지막 장면을 보여 줍니다. 라멕이라는 이름으로 대표되는 교회 상태는 이미 태고교회가 누렸던 퍼셉션을 전혀 보존하지 못한 상태에 이르렀고, 그 안에서 노아라는 이름이 등장합니다. 이 본문은 한 개인의 출생 이야기가 아니라, 한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교회가 준비되는 결정적인 전환의 순간을 증언합니다.
첫째, 라멕의 상태는 수고와 저주로 가득 찬 교회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라멕이 노아의 이름을 지으며 말한 고백을 보면,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라는 표현이 반복됩니다. 이는 얼핏 농사나 노동의 어려움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기 쉬우나, 그게 아니고, 선과 진리를 더 이상 자연스럽게 인식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라멕으로 상징되는 이 교회는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 너무도 일반적이고 흐릿해져서 사실상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무엇이 옳은지 알기 위해 늘 애써야 했고, 선을 행하기 위해 고된 노력을 해야 했으며, 그 결과는 기쁨이 아니라 피로와 좌절이었습니다. ‘수고’와 ‘손의 고됨’은 바로 자기 자신에게서 선과 진리를 만들어 내려는 시도를 뜻하며, ‘저주받은 땅’은 그러한 시도에서 나오는 것이 결국 거짓과 악으로 기울 수밖에 없다는 영적 현실을 보여 줍니다. 이 상태는 회복을 위한 과도기가 아니라, 이미 내부적으로는 끝에 도달한 상태였습니다.
둘째, 노아라는 이름은 새로운 교회를 향한 주님의 위로의 선언입니다.
라멕은 아들의 이름을 ‘노아’라 짓고, 그가 우리를 안위하리라 말합니다. 여기서 ‘안위하다’라는 말은 단순한 감정적 위로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표현을, 교회를 다시 회복시키시는 교리적 위로, 곧 새 교회를 통해 주어질 영적 쉼과 질서의 회복으로 해석합니다. 노아로 상징되는 교회는 태고교회처럼 퍼셉션을 전제로 하지 않습니다. 대신 에녹을 통해 보존된 교리와, 주님께서 남겨 두신 리메인스(remains) 위에 세워지는 교회입니다. 즉, 더 이상 즉각적으로 아는 교회가 아니라, 배우고 기억하고 순종함으로 거듭나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노아는 태고교회의 연장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방식의 시작입니다. 이 시작은 인간이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예전 기준을 요구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자비에서 비롯됩니다. 퍼셉션을 잃은 인류에게 더 이상 퍼셉션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대신 그 상태에 맞는 새로운 길을 여시는 것이 바로 노아교회입니다.
셋째, ‘칠백칠십칠’(777)이라는 숫자는 끝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 안에서의 완결을 말합니다.
라멕의 수명이 칠백칠십칠 세였다는 기록은 우연한 숫자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숫자는 상태를 표현합니다. 일곱은 거룩함과 완결을 뜻하는 수이며, 그것이 반복된 777은 한 질서가 완전히 마무리되었음을 상징합니다. 이는 인간적 성취의 완성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 안에서 더 이상 유지되지 않아야 할 상태가 비로소 정리되었음을 뜻합니다. 라멕의 죽음은 단순한 종말이 아니라, 태고교회 계열 전체의 종결을 알리는 표지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노아가 등장합니다. 주님은 어떤 교회나 교회 시대가 종말을 향해 갈 때, 그 교회나 교회 시대를 그 무너진 상태 그대로 방치하지 않으시고, 항상 다음을 준비하십니다. 라멕의 끝은 노아의 시작을 위한 자리 마련이며, 홍수는 파괴만이 아니라 새 교회의 토양을 정화하는 과정이 됩니다.
참고로, 교회뿐 아니라 각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만, 그러나 각 개인은 특별히 본인 의사에 따라 달라집니다. 아무리 한 개인의 인생이 망가져도 눅15에 나오는 둘째 아들처럼 돌이켜 거듭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결국 끝까지 돌이키지 않아 파국을 맞는, 그래서 결국 지옥으로 떨어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마 후자가 압도적으로 많지 싶습니다. 우리는 혹시 지금은 방황하고 연거푸 실수해도, 그래서 지금은 앞이 캄캄하고 숨 막히는 상황이더라도 어린 시절을 비롯, 지금도 주님이 내 안에 나도 모르게 쟁여놓으시는 리메인스, 곧 주님의 선과 진리가 있음을 기억, 그것을 활용하여 더 늦기 전에 돌이켜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본문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의 신앙은 지금 ‘수고와 고됨’의 상태에 머물러 있지는 않은가, 아니면 주님께서 준비하신 새로운 쉼의 질서로 나아가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주님은 인간의 한계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한계를 정확히 아시고, 그 상태에 맞는 새로운 교회를 여십니다. 노아는 바로 그 자비의 이름입니다. 수고의 끝에서 시작되는 쉼, 저주받은 땅 위에서 다시 세워지는 교회, 그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전하는 복음입니다.
이 본문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언제나 반복되는 주님의 섭리의 방식입니다. 한 시대가 끝날 때마다, 주님은 언제나 노아를 준비하십니다. 그리고 그 노아는 늘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안위’를 가져옵니다. 주님의 신실하심과 사랑, 그리고 자비로우심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혹시 오늘 우리가 이 시대 노아들이어도 이 길 끝에 천국 있음을 기억하고, 주님 맡기신 쓰임새의 삶, 저 노아들처럼 잘 살다 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오늘은 창세기 5장 네 번째 시간, 25절로 27절이며, AC 글 번호로는 523번에서 525번입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25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26라멕을 낳은 후 칠백팔십이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27그는 구백육십구 세를 살고 죽었더라(창5:25-27)
이 본문을
퍼셉션 이야기 (심화)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 준비했습니다. 오늘 말씀에 주님이 빛을 비추셔서 이 시간 우리 영과 육이 활짝 열려 모두 들을 귀 만들어 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에 대한 속뜻입니다.
25절(AC.523-524), ‘므두셀라’(Methuselah)는 여덟 번째 교회를, ‘라멕’(Lamech)은 아홉 번째 교회를 의미합니다. 이 교회의 어떠함(quality)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퍼셉션의 능력이 일반적이고 흐릿하였다는 점은 ‘노아’라 하는 교회에 대한 설명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러니까 완전성(perfection)은 감소하였고, 그와 함께 지혜와 지성도 감소하였습니다. 26-27절(AC.525), 이 역시 같은 의미입니다.
이상과 같은 속뜻에서 핵심은, 퍼셉션이 더욱 일반적이 되고, 흐려졌다는 점입니다. 비유하자면, 교회가 연명 치료에 들어갔다는 것으로, 주님이 주시는 퍼셉션이라는 생명으로 살아가야 하는 교회가, 이 생명을 받는 창 관리에 소홀, 부주의 및 대신 오랜 세월 지속적으로 세상을 향한 창을 열고 세상을 두리번거린 결과, 교회를 건강하게 하는 각종 장기가 거의 작동을 안 하게 되어 결국 생명 연장 장치에 의존, 심장도 폐도, 그리고 혈액을 비롯, 각종 장기를 기계 장비에 의존, 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닌, 참 안타까운 상태에 들어섰다는 뜻입니다. 이 중요 장기들은 주님의 퍼셉션이라는 생명으로 제 기능을 수행하는데 교회가 이 퍼셉션이라는 생명 공급받는 걸 소홀히 여겨 장기들의 건강을 방치했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므두셀라의 경우로 볼 수 있고, 라멕에 이르러는 이제 이 장치의 스위치를 언제 끄느냐, 인공호흡기를 언제 떼느냐의 시기만 남은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교회의 생명인 퍼셉션에 관해서 말이죠.
결국 오늘 본문 역시 다시 원점인 ‘퍼셉션’(perception) 문제의 계속이며, 그래서 지난주 설교 중 이 퍼셉션을 다룬 부분을 다시 복습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는 이 퍼셉션에 대해 전혀 무지하기 때문에, 내용도 어렵고 이해하기도 어렵습니다. 여러 번 반복이 그래서 꼭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퍼셉션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개념적 이해나 논리적 판단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인식입니다. 그것은 정보를 모아 분석한 결과도 아니고, 규칙을 적용해 도출한 결론도 아닙니다. 퍼셉션은 선과 진리를 직접 감지하고 즉각적으로 알아차리는 인식으로, 생각이 작동하기 이전에 이미 방향이 주어지는 상태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퍼셉션은 배우는 대상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며, 설명을 통해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상태로 작동합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어느 순간 엄마의 얼굴 표정을 보고, 속으로 ‘아, 엄마가 지금 힘들어하시는구나...’ 하며 엄마의 상태를 즉각적으로 아는 것과 비슷합니다. 누가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말이죠.
이때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미세하다’(the most minute)라는 표현은 퍼셉션이 불분명하거나 흐릿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퍼셉션은 너무 정밀해서 일반적인 언어로는 쉽게 포착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퍼셉션은 어떤 상황을 볼 때, 그 상황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를 분리하지 않고 한꺼번에 인식합니다. 그러니까 말하는 사람의 내적 상태, 듣는 사람의 준비 정도, 관계의 맥락, 시기의 적절성, 그리고 그 선택이 불러올 결과까지가 동시에 감지되는 식입니다. 이 모든 요소가 하나의 인식으로 주어지기 때문에, 퍼셉션은 매우 정교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퍼셉션은 항상 개별적으로 작동합니다. 같은 말, 같은 행동이라 하더라도 퍼셉션은 그것을 상황마다 다르게 인식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 선이 되지만, 다른 경우에는 침묵하는 것이 선이 됩니다. 이 차이는 원칙을 어긴 결과가 아니라, 상태, 곧 상황이, 사정이 다르기 때문에 생기는 분별의 차이입니다. 퍼셉션은 언제나 ‘지금 이 순간의 상태’를 기준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모든 경우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판단을 전제로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사랑이며, 그래서 천국을 상태의 나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퍼셉션은 교리와 뚜렷하게 구별됩니다. 교리는 전달되기 위해 반드시 일반화를 필요로 합니다. ‘항상’, ‘대체로’, ‘원칙적으로’와 같은 표현이 없으면 교리는 성립하기 어렵습니다. 많은 경우를 하나의 틀로 묶어야 가르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퍼셉션은 이러한 일반화 자체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퍼셉션은 언제나 이번 경우를 보고, 지금 상태를 봅니다. 비유하자면, 시력 차이요, 해상도 차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둘 다 높으면 사물이, 화면이 또렷하고 생생하게 보이지만, 낮으면 흐릿하게 무난하게 보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퍼셉션을 언어로 고정해 설명하는 순간 이미 그 본질을 놓치게 된다고 말합니다. 언어는 필연적으로 경계를 긋고, 흐름을 멈추고, 판단을 고정합니다. 그러나 퍼셉션은 흐르며, 상태에 따라 달라지며, 살아 움직입니다. 살아 있는 분별을 문장이나 규칙으로 붙잡아 두려는 순간, 우리는 그 생명 대신 틀만 붙잡게 됩니다. 주님으로 말미암는 사랑의 퍼셉션은 그 모든 정황 및 그 마음속 동기까지 보지만 일반화된 규범인 교리는 그런 걸 다 놓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산주의는 획일화, 통제, 차별 금지를 기치로 내걸지만, 자유민주주의는 다양화, 자유, 차이 인정을 붙잡는 것인가 봅니다.
스베덴보리가 든 사고의 비유는 이 점을 매우 잘 보여 줍니다. 바르게 생각할 줄 아는 사람에게 사고의 규칙을 가르치면, 오히려 사고의 자유로움이 약해질 수 있습니다. 이는 사고능력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외적인 규칙에 매이면서 내적 판단이 위축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영재를 일반 학교에 보낼 경우, 많은 경우 아이를 망치는 것과도 같은데요, 퍼셉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내적인 빛으로 알고 있는 것을 규칙으로 다시 배우게 하면, 그 인식은 점차 경직됩니다. 내면이 열려 매 순간 하늘의 빛으로 즉시 알면 되는 것을 굳이 자기들이 정한 어떤 룰을 따라야만 한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천적인 사람의 퍼셉션은 묘사하기 어렵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흐릿하거나 불분명해서가 아니라, 너무 구체적이고 상황 의존적이며 살아 있어서 일반 개념으로 묶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퍼셉션은 숙련된 장인이 재료를 다루며 느끼는 감각과 비슷합니다. 그 감각은 말로 완전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실제 작업에서는 매우 정확하게 작동합니다. 흑백요리사 시즌2에서 종이 한 장 차이보다 더 미세한 차이로 생존과 탈락이 결정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승자 최강록이 재료마다 그릇을 달리하여 다르게 조림한 것을, 예를 들면, ‘중불로 적당하게’ 이런 식으로 획일화, 규범화, 교리화를 하면, 이후 그 레시피를 사람들이 그대로 따라 했다고 해서 과연 그 맛이 재현될까요? 천국의 천사들이 바로 이런 퍼셉션으로 생활하며, 그래서 그들은 일상 대인관계나 지상의 누구를 도울 때 실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퍼셉션으로 섬기기 때문에 온전하며, 완전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동시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분명히 말합니다. 이러한 퍼셉션 능력은 장차 사라질 것이었고, 실제로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이후의 인류는 더 이상 내적인 빛으로 즉각 알지 못하고, 오직 잘 정돈된 교리를 통해 배우며 점진적으로 선과 진리에 이르게 되는데, 바로 이 전환을 대비하여, 에녹이라는 교회에게 퍼셉션 내용을 교리로 정리하는 일이 허락되었던 것입니다.
에녹의 교회는 퍼셉션 자체를 살아내는 교회가 아니라, 퍼셉션을 기억하고 보존하는 역할을 맡은 교회였습니다. 그 교리는 퍼셉션 그 자체는 아니지만, 퍼셉션이 다시 회복될 방향을 가리키는 표지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라는 표현은, 이 교리가 인간의 판단이나 역사적 우연에 맡겨진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 안에 안전하게 보존되었음을 뜻합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설명은 오늘날 우리의 신앙 현실을 깊이 비춥니다. 우리는 대부분 교리를 통해 신앙을 배웁니다. 이것은 잘못이 아니라, 현재 인류의 상태에 맞는 방식입니다. 다만 교리가 곧 생명이라고 착각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교리는 빛을 가리키는 창이요, 담아두는 그릇이지, 빛 그 자체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리하면, 퍼셉션이 ‘미세하고 개별적’이라는 말은 선과 진리를 규칙이나 원칙이 아니라 각 상태와 순간 속에서 직접 분별하는 살아 있는 인식을 뜻합니다. 이 인식은 너무 살아 있어서 언어로 고정될 수 없고, 교리로 완전히 담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퍼셉션은 사라졌고, 대신 교리가 보존되었습니다. 이 흐름을 이해할 때, 에녹의 교회와 그 보존의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어떻게 이제 좀 퍼셉션이 뭔지 잡히십니까? 다음은 성경에서 이 퍼셉션이 실제로 나타났던 사례들 중 두 가지를 찾아보고, 그 이해를 더욱 깊게 하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창세기 요셉의 이야기로 그가 보디발의 감옥에 있다가 바로 앞에 불려 나간 장면입니다. 창세기 41장입니다.
1만 이 년 후에 바로가 꿈을 꾼즉 자기가 나일 강 가에 서 있는데 2보니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강 가에서 올라와 갈밭에서 뜯어먹고 3그 뒤에 또 흉하고 파리한 다른 일곱 암소가 나일 강 가에서 올라와 그 소와 함께 나일 강 가에 서 있더니 4그 흉하고 파리한 소가 그 아름답고 살진 일곱 소를 먹은지라 바로가 곧 깨었다가 5다시 잠이 들어 꿈을 꾸니 한 줄기에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6그 후에 또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나오더니 7그 가는 일곱 이삭이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을 삼킨지라 바로가 깬즉 꿈이라 8아침에 그의 마음이 번민하여 사람을 보내어 애굽의 점술가와 현인들을 모두 불러 그들에게 그의 꿈을 말하였으나 그것을 바로에게 해석하는 자가 없었더라 9술 맡은 관원장이 바로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오늘 내 죄를 기억하나이다 10바로께서 종들에게 노하사 나와 떡 굽는 관원장을 친위대장의 집에 가두셨을 때에 11나와 그가 하룻밤에 꿈을 꾼즉 각기 뜻이 있는 꿈이라 12그 곳에 친위대장의 종 된 히브리 청년이 우리와 함께 있기로 우리가 그에게 말하매 그가 우리의 꿈을 풀되 그 꿈대로 각 사람에게 해석하더니 13그 해석한 대로 되어 나는 복직되고 그는 매달렸나이다 14이에 바로가 사람을 보내어 요셉을 부르매 그들이 급히 그를 옥에서 내 놓은지라 요셉이 곧 수염을 깎고 그의 옷을 갈아 입고 바로에게 들어가니 15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한 꿈을 꾸었으나 그것을 해석하는 자가 없더니 들은즉 너는 꿈을 들으면 능히 푼다 하더라 16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 17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꿈에 나일 강 가에 서서 18보니 살지고 아름다운 일곱 암소가 나일 강 가에 올라와 갈밭에서 뜯어먹고 19그 뒤에 또 약하고 심히 흉하고 파리한 일곱 암소가 올라오니 그같이 흉한 것들은 애굽 땅에서 내가 아직 보지 못한 것이라 20그 파리하고 흉한 소가 처음의 일곱 살진 소를 먹었으며 21먹었으나 먹은 듯 하지 아니하고 여전히 흉하더라 내가 곧 깨었다가 22다시 꿈에 보니 한 줄기에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23그 후에 또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나더니 24그 가는 이삭이 좋은 일곱 이삭을 삼키더라 내가 그 꿈을 점술가에게 말하였으나 그것을 내게 풀이해 주는 자가 없느니라 25요셉이 바로에게 아뢰되 바로의 꿈은 하나라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심이니이다 26일곱 좋은 암소는 일곱 해요 일곱 좋은 이삭도 일곱 해니 그 꿈은 하나라 27그 후에 올라온 파리하고 흉한 일곱 소는 칠 년이요 동풍에 말라 속이 빈 일곱 이삭도 일곱 해 흉년이니 28내가 바로에게 이르기를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신다 함이 이것이라 29온 애굽 땅에 일곱 해 큰 풍년이 있겠고 30후에 일곱 해 흉년이 들므로 애굽 땅에 있던 풍년을 다 잊어버리게 되고 이 땅이 그 기근으로 망하리니 31후에 든 그 흉년이 너무 심하므로 이전 풍년을 이 땅에서 기억하지 못하게 되리이다 32바로께서 꿈을 두 번 겹쳐 꾸신 것은 하나님이 이 일을 정하셨음이라 하나님이 속히 행하시리니 33이제 바로께서는 명철하고 지혜 있는 사람을 택하여 애굽 땅을 다스리게 하시고 34바로께서는 또 이같이 행하사 나라 안에 감독관들을 두어 그 일곱 해 풍년에 애굽 땅의 오분의 일을 거두되 35그들로 장차 올 풍년의 모든 곡물을 거두고 그 곡물을 바로의 손에 돌려 양식을 위하여 각 성읍에 쌓아 두게 하소서 36이와 같이 그 곡물을 이 땅에 저장하여 애굽 땅에 임할 일곱 해 흉년에 대비하시면 땅이 이 흉년으로 말미암아 망하지 아니하리이다 37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가 이 일을 좋게 여긴지라 38바로가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 하고 39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 40너는 내 집을 다스리라 내 백성이 다 네 명령에 복종하리니 내가 너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니라 41바로가 또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애굽 온 땅의 총리가 되게 하노라 하고 42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목에 걸고 43자기에게 있는 버금 수레에 그를 태우매 무리가 그의 앞에서 소리 지르기를 엎드리라 하더라 바로가 그에게 애굽 전국을 총리로 다스리게 하였더라 44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나는 바로라 애굽 온 땅에서 네 허락이 없이는 수족을 놀릴 자가 없으리라 하고 45그가 요셉의 이름을 사브낫바네아라 하고 또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을 그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니라 요셉이 나가 애굽 온 땅을 순찰하니라(창41:1-45)
사전에 누구에게 들은 바도 없이 현장, 즉 바로 앞에서 처음 듣고 바로 해석하는 요셉입니다. 사전 학습 없이 바로 아는 것, 곧 주님이 알려주시는 퍼셉션의 대표적 사례입니다. 놀라운 것은, 요셉은 어떻게 그런 청년의 때에 이런 놀라운 퍼셉션 능력, 곧 주님을 향한, 천국을 향한 창을 활짝 열 수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다음은 다니엘입니다. 다니엘 역시 당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 앞에서 그가 꾼 꿈을 풀어 주는 장면입니다. 이 사례는 더욱 놀라운 것이, 왕이 꿈을 알려주지도 않고 다니엘에게 네가 내가 꾼 꿈을 말하고, 그리고 그걸 해석하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1느부갓네살이 다스린 지 이 년이 되는 해에 느부갓네살이 꿈을 꾸고 그로 말미암아 마음이 번민하여 잠을 이루지 못한지라 2왕이 그의 꿈을 자기에게 알려 주도록 박수와 술객과 점쟁이와 갈대아 술사를 부르라 말하매 그들이 들어가서 왕의 앞에 선지라 3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꿈을 꾸고 그 꿈을 알고자 하여 마음이 번민하도다 하니 4갈대아 술사들이 아람 말로 왕에게 말하되 왕이여 만수무강 하옵소서 왕께서 그 꿈을 종들에게 이르시면 우리가 해석하여 드리겠나이다 하는지라 5왕이 갈대아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명령을 내렸나니 너희가 만일 꿈과 그 해석을 내게 알게 하지 아니하면 너희 몸을 쪼갤 것이며 너희의 집을 거름더미로 만들 것이요 6너희가 만일 꿈과 그 해석을 보이면 너희가 선물과 상과 큰 영광을 내게서 얻으리라 그런즉 꿈과 그 해석을 내게 보이라 하니 7그들이 다시 대답하여 이르되 원하건대 왕은 꿈을 종들에게 이르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해석하여 드리겠나이다 하니 8왕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분명히 아노라 너희가 나의 명령이 내렸음을 보았으므로 시간을 지연하려 함이로다 9너희가 만일 이 꿈을 내게 알게 하지 아니하면 너희를 처치할 법이 오직 하나이니 이는 너희가 거짓말과 망령된 말을 내 앞에서 꾸며 말하여 때가 변하기를 기다리려 함이라 이제 그 꿈을 내게 알게 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그 해석도 보일 줄을 내가 알리라 하더라 10갈대아인들이 왕 앞에 대답하여 이르되 세상에는 왕의 그 일을 보일 자가 한 사람도 없으므로 어떤 크고 권력 있는 왕이라도 이런 것으로 박수에게나 술객에게나 갈대아인들에게 물은 자가 없었나이다 11왕께서 물으신 것은 어려운 일이라 육체와 함께 살지 아니하는 신들 외에는 왕 앞에 그것을 보일 자가 없나이다 한지라 12왕이 이로 말미암아 진노하고 통분하여 바벨론의 모든 지혜자들을 다 죽이라 명령하니라 13왕의 명령이 내리매 지혜자들은 죽게 되었고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도 죽이려고 찾았더라 14그 때에 왕의 근위대장 아리옥이 바벨론 지혜자들을 죽이러 나가매 다니엘이 명철하고 슬기로운 말로 15왕의 근위대장 아리옥에게 물어 이르되 왕의 명령이 어찌 그리 급하냐 하니 아리옥이 그 일을 다니엘에게 알리매 16다니엘이 들어가서 왕께 구하기를 시간을 주시면 왕에게 그 해석을 알려 드리리이다 하니라 17이에 다니엘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그 친구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에게 그 일을 알리고 18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이 은밀한 일에 대하여 불쌍히 여기사 다니엘과 친구들이 바벨론의 다른 지혜자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지 않게 하시기를 그들로 하여금 구하게 하니라 19이에 이 은밀한 것이 밤에 환상으로 다니엘에게 나타나 보이매 다니엘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20다니엘이 말하여 이르되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 것은 지혜와 능력이 그에게 있음이로다 21그는 때와 계절을 바꾸시며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시며 지혜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총명한 자에게 지식을 주시는도다 22그는 깊고 은밀한 일을 나타내시고 어두운 데에 있는 것을 아시며 또 빛이 그와 함께 있도다 23나의 조상들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이제 내게 지혜와 능력을 주시고 우리가 주께 구한 것을 내게 알게 하셨사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고 주를 찬양하나이다 곧 주께서 왕의 그 일을 내게 보이셨나이다 하니라 24이에 다니엘은 왕이 바벨론 지혜자들을 죽이라 명령한 아리옥에게로 가서 그에게 이같이 이르되 바벨론 지혜자들을 죽이지 말고 나를 왕의 앞으로 인도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 해석을 왕께 알려 드리리라 하니 25이에 아리옥이 다니엘을 데리고 급히 왕 앞에 들어가서 아뢰되 내가 사로잡혀 온 유다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찾아내었나이다 그가 그 해석을 왕께 알려 드리리이다 하니라 26왕이 대답하여 벨드사살이라 이름한 다니엘에게 이르되 내가 꾼 꿈과 그 해석을 네가 능히 내게 알게 하겠느냐 하니 27다니엘이 왕 앞에 대답하여 이르되 왕이 물으신 바 은밀한 것은 지혜자나 술객이나 박수나 점쟁이가 능히 왕께 보일 수 없으되 28오직 은밀한 것을 나타내실 이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그가 느부갓네살 왕에게 후일에 될 일을 알게 하셨나이다 왕의 꿈 곧 왕이 침상에서 머리 속으로 받은 환상은 이러하니이다 29왕이여 왕이 침상에서 장래 일을 생각하실 때에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이가 장래 일을 왕에게 알게 하셨사오며 30내게 이 은밀한 것을 나타내심은 내 지혜가 모든 사람보다 낫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 해석을 왕에게 알려서 왕이 마음으로 생각하던 것을 왕에게 알려 주려 하심이니이다 31왕이여 왕이 한 큰 신상을 보셨나이다 그 신상이 왕의 앞에 섰는데 크고 광채가 매우 찬란하며 그 모양이 심히 두려우니 32그 우상의 머리는 순금이요 가슴과 두 팔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 33그 종아리는 쇠요 그 발은 얼마는 쇠요 얼마는 진흙이었나이다 34또 왕이 보신즉 손대지 아니한 돌이 나와서 신상의 쇠와 진흙의 발을 쳐서 부서뜨리매 35그 때에 쇠와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서져 여름 타작 마당의 겨 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나이다 36그 꿈이 이러한즉 내가 이제 그 해석을 왕 앞에 아뢰리이다 37왕이여 왕은 여러 왕들 중의 왕이시라 하늘의 하나님이 나라와 권세와 능력과 영광을 왕에게 주셨고 38사람들과 들짐승과 공중의 새들, 어느 곳에 있는 것을 막론하고 그것들을 왕의 손에 넘기사 다 다스리게 하셨으니 왕은 곧 그 금 머리니이다 39왕을 뒤이어 왕보다 못한 다른 나라가 일어날 것이요 셋째로 또 놋 같은 나라가 일어나서 온 세계를 다스릴 것이며 40넷째 나라는 강하기가 쇠 같으리니 쇠는 모든 물건을 부서뜨리고 이기는 것이라 쇠가 모든 것을 부수는 것 같이 그 나라가 뭇 나라를 부서뜨리고 찧을 것이며 41왕께서 그 발과 발가락이 얼마는 토기장이의 진흙이요 얼마는 쇠인 것을 보셨은즉 그 나라가 나누일 것이며 왕께서 쇠와 진흙이 섞인 것을 보셨은즉 그 나라가 쇠 같은 든든함이 있을 것이나 42그 발가락이 얼마는 쇠요 얼마는 진흙인즉 그 나라가 얼마는 든든하고 얼마는 부서질 만할 것이며 43왕께서 쇠와 진흙이 섞인 것을 보셨은즉 그들이 다른 민족과 서로 섞일 것이나 그들이 피차에 합하지 아니함이 쇠와 진흙이 합하지 않음과 같으리이다 44이 여러 왕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망시키고 영원히 설 것이라 45손대지 아니한 돌이 산에서 나와서 쇠와 놋과 진흙과 은과 금을 부서뜨린 것을 왕께서 보신 것은 크신 하나님이 장래 일을 왕께 알게 하신 것이라 이 꿈은 참되고 이 해석은 확실하니이다 하니 46이에 느부갓네살 왕이 엎드려 다니엘에게 절하고 명하여 예물과 향품을 그에게 주게 하니라 47왕이 대답하여 다니엘에게 이르되 너희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들의 신이시요 모든 왕의 주재시로다 네가 능히 이 은밀한 것을 나타내었으니 네 하나님은 또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이시로다 48왕이 이에 다니엘을 높여 귀한 선물을 많이 주며 그를 세워 바벨론 온 지방을 다스리게 하며 또 바벨론 모든 지혜자의 어른을 삼았으며 49왕이 또 다니엘의 요구대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세워 바벨론 지방의 일을 다스리게 하였고 다니엘은 왕궁에 있었더라(단2)
어떻습니까?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이 역시 정말 놀라운 퍼셉션 사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다만 다니엘의 경우, 왕이 그 꿈을 알려주질 않아 부득이하게 그 꿈의 주인이신 주님께 나아가 직접 여쭐 수밖에 없었고, 느부갓네살의 고백, 곧 ‘너희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들의 신이시요 모든 왕의 주재시로다’하는 고백대로 다니엘은 그에 합당한 예를 갖춰 주님 앞에 나아감을 봅니다.
이 두 사례는 퍼셉션의 아주 특별한 사례들, 곧 하나는 당시 애굽과 그 인근, 곧 그 시대 온 세계를 구원하시는 주님의 경륜을,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인류의 전체 역사, 곧 전체 교회사에 관한 대계(大計)를 보여 주시는 특별한 사례들입니다만, 그렇다고 퍼셉션은 늘 이런 크고 엄중한 사안에만 작동하나 보다 하시면 안 됩니다. 오히려 요셉이나 다니엘이나 평소 얼마나 주님을 향해 매 순간 깨어있었으면, 그러니까 항상 그 퍼셉션의 창이 열려 있었으면 이런 위급하고, 또 중차대한 경우에도 어김없이 작동, 참 감사한 대처를 할 수 있었을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시간을, 그리고 세월을 아껴 우리 역시 이 시대 오늘이라도 우리 자신의 이 잠들어 있는 퍼셉션 능력을 흔들어 깨워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일상 중 아주 작은 일에 대해서조차 주님의 뜻과 계획, 주님의 생각을 몰라 우왕좌왕, 여기도 찔러보고, 저기도 찔러보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삶이 갑갑하고 앞이 안 보이는 이유는 창문이 닫혀있어서입니다. 창문이 열려야 창문 너머 미래를, 앞날을 볼 수 있는데, 닫혀있으니 안 보이고, 안 보이니 계속 허우적대는 것입니다. 이제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었으면 좋겠습니다. 야곱이 세겜의 악한 일을 끊고 떠날 때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1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2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3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4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 5그들이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창35:1-5)
오늘 우리 역시 여전히 우리의 마음과 시선을 사로잡는 이방 신상들과 귀고리 역할을 하는 것들을 상수리나무 아래 묻어야 하겠습니다. 여기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는다’는 것은 ‘영원히 중심에 오르지 못하도록 가장 낮은 자리에 놓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어떤 악습일 수도 있고, 내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주님보다도 더 말이지요. 우리의 영적 성장과 성숙은 오랜 인내의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리고 같은 말인데, 우리의 퍼셉션 역시 그 창을 여는데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오랜 세월 나를 사로잡았던 것들로부터 헤어지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 같은 경우는 그래서 주님의 허락으로 무슨 결정적 체험들이 필요했는데, 하나는 고3 때 어머니 교통사고로 별세하신 일, 이 일로 저는 어린아이에서 어른으로 점프할 수 있었고, 그리고 다른 하나는 지난 2013년 개척의 해 겨울에 있었던 영적 체험, 곧 제게 와있던 악한 영을 비록 흐릿하게나마 영안이 열려 잠깐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일로 영계의 일이 저한테는 더 이상 이성적 논쟁과 사유의 대상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참 짧고 그간 창5에서 되풀이되던 형태의 문장이라 특별할 것도 없어 보이는 본문이지만, 오히려 그 덕에 퍼셉션에 대한 더욱 깊은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참고로, 창5를 두 주 더 다루어 마친 후, 창세기 진도 나가는 걸 잠시 멈추고, 현 번역에 해설 다는 진도에 맞추겠습니다.
말씀에는 전반적으로 네 가지 서로 다른 스타일이 있습니다. 첫째는 태고교회의 스타일입니다. 그들의 표현 방식은 이 땅의 것과 세상의 것을 말할 때, 그것들이 표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동시에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단지 표상으로 표현했을 뿐 아니라, 그것들을 하나의 역사적 연속으로 엮어, 더욱 생명력을 갖게 했는데, 이런 방식은 그들에게 더없이 큰 기쁨이었습니다. 이런 스타일을 가리켜 한나는 예언 가운데 이렇게 말했습니다. There are in the Word, in general, four different styles. The first is that of the most ancient church. Their mode of expression was such that when they mentioned terrestrial and worldly things they thought of the spiritual and celestial things which these represented. They therefore not only expressed themselves by representatives, but also formed these into a kind of historical series, in order to give them more life; and this was to them delightful in the very highest degree. This is the style of which Hannah prophesied, saying: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삼상2:3) Speak what is high! high! Let what is ancient come out of your mouth (1 Sam. 2:3).
※ 우리말 개역개정 번역이 너무 엉뚱하지요? 번역자들이 이런 배경지식 없이 번역한 결과입니다.
이러한 표상들은 시편에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시78:2-4)Such representatives are called in David, “Dark sayings of old” (Ps. 78:2–4).
2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며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려 하니3이는 우리가 들어서 아는 바요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에게 전한 바라4우리가 이를 그들의 자손에게 숨기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영예와 그의 능력과 그가 행하신 기이한 사적을 후대에 전하리로다(시78:2-4)
창조, 에덴동산 등에 관한 이 모든 내용, 곧 아브람 시대까지의 기록을 모세는 태고교회의 후손들로부터 전해 받았습니다. These particulars concerning the creation, the garden of Eden, etc., down to the time of Abram, Moses had from the descendants of the most ancient church.
[2] 둘째 스타일은 역사적 스타일로, 아브람 이후의 모세오경과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기, 열왕기에 나타납니다. 이 책들에서 역사적 사실들은 문자 그대로 나타나 있지만, 그 안에는 전체적으로도 부분적으로도 전혀 다른 것들이 내적 의미 안에 담겨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이어지는 글들에서 차례대로 설명하겠습니다. 셋째 스타일은 예언적 스타일입니다. 이 스타일은 태고교회에서 가장 신성하게 여겼던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러나 태고교회의 스타일처럼 연속적이고 역사적인 형식은 아니고, 단절되어 있으며, 내적 의미 없이는 거의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내적 의미 안에는 가장 깊은 비밀들이 담겨 있는데, 그것들은 아름다운 질서 속에서 이어지며, 외적 인간과 내적 인간, 교회의 다양한 상태들, 하늘 자체, 그리고 가장 깊은 차원에서는 주님을 다룹니다. 넷째 스타일은 다윗의 시편에 나타나는 스타일로, 예언적 스타일과 일상적인 언어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그 안에서는 다윗이라는 왕의 인격 아래에서, 내적 의미로는 주님이 다루어집니다. The second style is historical, which is found in the books of Moses from the time of Abram onward, and in those of Joshua, Judges, Samuel, and Kings. In these books the historical facts are just as they appear in the sense of the letter; and yet they all contain, in both general and particular, quite other things in the internal sense, of which, by the Lord’s Divine mercy, in their order in the following pages. The third style is the prophetical one, which was born of that which was so highly venerated in the most ancient church. This style, however, is not in connected and historical form like the most ancient style, but is broken, and is scarcely ever intelligible except in the internal sense, wherein are deepest arcana, which follow in beautiful connected order, and relate to the external and the internal man; to the many states of the church; to heaven itself; and in the inmost sense to the Lord. The fourth style is that of the psalms of David, which is intermediate between the prophetical style and that of common speech. The Lord is there treated of in the internal sense, under the person of David as a king.
해설
이 글은 말씀 전체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결정짓는, 매우 구조적인 설명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말씀을 하나의 동일한 스타일로 보지 않고, 네 가지 서로 다른 스타일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이는 성경 해석에서 매우 중요한 관점 전환을 요구합니다. 같은 방식으로 모든 본문을 읽으려는 시도는 필연적으로 오해를 낳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첫째 스타일로 소개되는 태고교회의 스타일은, 오늘날 우리가 ‘신화적’이라고 부르기 쉬운 방식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이것은 신화가 아니라, 가장 높은 차원의 언어입니다. 이 스타일의 핵심은, 외적 사물과 사건을 말하면서도 동시에 그 안에 담긴 영적, 천적 실재를 직접 떠올렸다는 점입니다. 그들에게 자연은 상징이 아니라, 곧바로 영적 세계와 연결된 창문이었습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태고교회의 사람들이 표상들을 ‘역사적 연속’으로 엮었다는 설명입니다. 이는 단순한 비유의 나열이 아니라, 하나의 살아 있는 이야기로 구성되었음을 뜻합니다. 창조 이야기, 에덴동산, 초기 족장들의 이야기가 단절된 상징이 아니라, 인간의 영적 상태가 변화해 가는 하나의 생명 서사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스타일은 그들에게 ‘최고의 기쁨’이었습니다. 진리를 안다는 것은 곧 삶의 기쁨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나의 예언과 다윗의 시편이 인용되는 것도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높은 말’,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은 난해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깊이를 뜻합니다. 이 ‘감추어졌던 것’은 악이나 무지가 아니라, 인간의 자연적 이해를 넘어서는 신적 깊이를 가리킵니다. 즉, 빛이 너무 강해 눈이 부신 상태와 같습니다.
둘째 스타일인 역사적 스타일은, 오늘날 독자들이 가장 익숙하게 느끼는 형식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말합니다. 이 역사들은 문자 그대로 사실이지만, 그 안에는 전혀 다른 차원의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즉, 역사성과 상징성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습니다. 역사로서 참이면서 동시에 내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 성경 해석의 핵심 중 하나입니다.
셋째 스타일인 예언적 스타일은, 많은 독자들이 가장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부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분명히 짚습니다. 이 스타일은 ‘연결된 역사 형식’이 아니라, 단절되고 압축된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적 의미 안에서는 이 파편들이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질서로 연결됩니다. 예언서가 혼란스럽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스타일의 문제가 아니라, 읽는 차원의 문제입니다.
이 예언적 스타일의 특징은 범위의 확장성입니다. 외적 인간과 내적 인간, 교회의 상태, 하늘의 질서,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주님 자신까지를 동시에 다룹니다. 그래서 이 스타일은 문자적 차원에 머물러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내적 의미로 들어가야 합니다.
넷째 스타일인 시편은 이 모든 스타일을 이어주는 다리와 같습니다. 예언처럼 높고, 그러나 일상 언어처럼 인간적입니다. 다윗이라는 인물의 감정과 경험을 통해 말하지만, 내적 의미에서는 주님의 상태와 주님의 왕적 통치를 노래합니다. 그래서 시편은 개인의 기도이면서 동시에 보편적 신앙 고백이 됩니다.
이 글 전체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말씀은 단일한 방식으로 읽히도록 쓰이지 않았습니다. 스타일을 구별하지 않으면, 의미도 왜곡됩니다. 그러나 스타일을 구별하고, 각 스타일이 가리키는 차원을 인식하기 시작하면, 말씀은 점점 하나의 살아 있는 구조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 구조의 중심에는 언제나 주님과 인간의 거듭남이 놓여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