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창4:16)

 

AC.398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가는 것’(go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이 사랑의 신앙에 속한 선에서 분리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14절의 해설에서 볼 수 있습니다. ‘놋 땅에 거하는 것’(dwell in the land of Nod)이 진리와 선 밖에 있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놋’(Nod)이라는 말의 의미에서 분명한데, 그것은 유리하며 피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리하며 피하는 자’(wanderer and fugitive)가 되는 것이 진리와 선을 빼앗긴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은 앞에서 볼 수 있습니다. ‘에덴 동쪽’(toward the east of Eden)이 전에 사랑이 지배하던 이해의 마음(intellectual mind) 가까이, 그리고 전에 체어리티가 지배하던 합리적 마음(rational mind) 가까이를 의미한다는 것은 ‘에덴 동쪽’의 의미에 관하여 앞에서 말한 것으로부터 분명합니다. 곧 ‘동쪽’(east)은 주님을, ‘에덴’(Eden)은 사랑을 의미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서는 의지와 이해로 이루어진 마음이 하나였습니다. 의지가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었기 때문에 이해는 의지에 속해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의지에 속한 사랑과 이해에 속한 신앙을 구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었고 신앙은 사랑에 속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에게서와 같이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된 후에는 더 이상 의지가 지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에서 의지 대신 이해가, 곧 사랑 대신 신앙이 지배하게 되었으므로, 그가 ‘에덴 동쪽에 거하였다’고 한 것입니다. 방금 말한 것처럼 신앙이 구별되었기 때문입니다. 곧 신앙에 ‘표가 주어져’ 인류의 쓰임을 위하여 보존되게 하신 것입니다. That to “go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 signifies to be separated from the good of the faith of love may be seen in the explication of verse 14; that to “dwell in the land of Nod” signifies outside of truth and good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word “Nod,” which is to be a wanderer and a fugitive; and that to be “a wanderer and a fugitive” is to be deprived of truth and good, may be seen above. That “toward the east of Eden” signifies near the intellectual mind, where love had previously reigned, and also near the rational mind, where charity had previously reigned, is evident from what has been said of the signification of “the east of Eden,” namely, that “the east” is the Lord, and “Eden” love. With the men of the most ancient church, the mind, consisting of the will and the understanding, was one; for the will was the all in all, so that the understanding was of the will. This was because they made no distinction between love, which is of the will, and faith, which is of the understanding, because love was the all in all, and faith was of love. But after faith was separated from love, as was the case with those who were called “Cain,” no will reigned any longer, and as in that mind the understanding reigned instead of the will, or faith instead of love, it is said that he “dwelt toward the east of Eden”; for as was just now observed, faith was distinguished, or “had a mark set upon it,” that it might be preserved for the use of mankind.

 

해설

AC.398은 앞의 AC.397을 상세히 설명하면서 가인으로 표상되는 변화가 인간 마음의 구조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를 보여 줍니다. 처음 두 표현은 앞에서 이미 설명된 의미를 다시 확인합니다.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가는 것’은 사랑의 신앙에 속한 선에서 분리되는 것이고, ‘놋 땅에 거하는 것’은 진리와 선 밖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 번호의 중심은 세 번째 표현인 ‘에덴 동쪽’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의지와 이해, 사랑과 신앙의 관계를 설명한 뒤, 가인에게서 그 주도권이 어떻게 뒤바뀌었는지를 밝힙니다.

 

먼저 ‘놋’이라는 이름 자체가 ‘유리하며 피하는 자’의 상태와 연결됩니다. 앞의 AC.380, AC.382, AC.388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는 무엇이 진리이고 선인지 알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가인이 놋 땅에 거했다는 것은 단순히 에덴을 떠나 다른 지역에 정착했다는 지리적 진술에 머물지 않습니다. 속뜻에서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진리와 선의 살아 있는 질서 밖에 놓인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에덴 동쪽’은 그보다 훨씬 미묘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동쪽’은 주님을, ‘에덴’은 사랑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인이 에덴 동쪽에 거했다는 것을 ‘전에 사랑이 지배하던 이해의 마음 가까이’이며 동시에 ‘전에 체어리티가 지배하던 합리적 마음 가까이’라고 설명합니다. AC.397에서는 이해의 마음만 언급했는데, 이번 번호에서는 합리적 마음까지 덧붙입니다. 따라서 가인의 상태를 이해하려면 ‘사랑-신앙’뿐 아니라 ‘의지-이해’라는 인간 마음의 구조까지 함께 보아야 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서는 의지와 이해가 하나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하나였다’는 것은 두 기능을 개념적으로 전혀 구별할 수 없었다는 뜻이라기보다, 서로 대립하거나 독립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의지가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었기 때문에 이해가 의지에 속해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즉 의지가 중심이었고 이해는 그 의지의 질서 안에서 움직였습니다.

 

그 이유는 다시 사랑과 신앙의 관계에서 설명됩니다. 사랑은 의지에 속하고 신앙은 이해에 속합니다. 그런데 태고교회 사람들은 사랑과 신앙을 서로 독립된 두 가지로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사랑이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었고 신앙은 사랑에 속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AC.393에서 ‘태고교회는 사랑에 속한 신앙 외에는 어떠한 신앙도 인정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신앙을 따로 언급하려 하지도 않았다’고 한 설명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따라서 태고교회의 질서는 ‘의지에서 이해로’, 그리고 ‘사랑에서 신앙으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인간 자신의 의지가 본래 선했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사랑과 선의 근원도 주님이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이 의지를 채우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랑 안에서 이해가 진리를 퍼셉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심은 인간의 의지 자체가 아니라 그 의지를 지배하던 주님으로부터의 사랑입니다.

 

가인에게서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된 후에는 더 이상 의지가 지배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 변화를 매우 대칭적인 문장으로 표현합니다. ‘의지 대신 이해가, 곧 사랑 대신 신앙이 지배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인의 분리가 가져온 마음의 구조적 변화입니다.

 

따라서 가인의 문제를 단순히 ‘신앙을 너무 강조했다’는 정도로 이해해서는 부족합니다. 문제는 주도권의 역전입니다. 본래 신앙은 사랑에 속해 있었고 이해는 의지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면서 이해가 독립적인 지배 위치에 올라섰습니다. 진리가 선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진리라고 여기는 것이 선 위에 서고, 신앙이 체어리티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체어리티를 판단하고 지배하려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앞의 AC.362-363에서 설명한 가인의 교리와도 정확히 맞닿습니다. 거기서 가인으로 표상되는 교리는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으며,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체어리티가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AC.398에서는 그 문제가 더 깊은 인간 마음의 차원에서 설명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 중 무엇이 먼저인가?’라는 교리적 논쟁의 배후에는 ‘이해와 의지 중 무엇이 지배하는가?’라는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매우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AC.393에서 스베덴보리는 홍수 후의 영적 인간에게서는 신앙의 지식이 먼저 오고, 그 지식을 통하여 주님께서 체어리티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AC.398의 ‘이해가 지배하게 되었다’는 말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말은 서로 다른 차원을 말합니다. 영적 인간에게 신앙의 지식이 ‘먼저 온다’는 것은 배우고 거듭나는 순서에 관한 것이며, 신앙이 사랑보다 ‘지배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식은 먼저 올 수 있지만 체어리티가 신앙에서 주된 것이 되어야 합니다.

 

바로 이 차이를 놓치면 가인의 신앙과 홍수 후 영적 교회의 신앙을 동일하게 만들어 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가인은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하여 이해가 의지 대신 지배하게 만든 상태입니다. 반면 주님께서 섭리하신 영적 교회의 질서는 신앙의 지식이 먼저 주어지더라도 그 신앙이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되고, 마침내 체어리티가 신앙에서 주된 것이 되는 질서입니다. 따라서 ‘신앙이 먼저 온다’와 ‘신앙이 지배한다’는 전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이 구별 때문에 AC.398 마지막의 ‘가인의 표’가 다시 중요해집니다. 주님께서는 사랑 대신 신앙이 지배하게 된 잘못된 질서를 승인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해와 신앙을 완전히 소멸시키지도 않으셨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구별되었고, 곧 신앙에 표가 주어져 인류의 쓰임을 위하여 보존되었다’고 다시 말합니다. 여기서 ‘for the use of mankind’, 곧 ‘인류의 쓰임을 위하여’라는 표현이 AC.395의 설명을 더욱 분명하게 해 줍니다.

 

왜 신앙을 보존해야 했습니까? AC.393에서 이미 답을 보았습니다. 인간이 더 이상 태고교회처럼 사랑으로부터 직접 진리를 퍼셉션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사람에게는 진리를 먼저 듣고 배우는 길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므로 이해와 신앙에 속한 지식이 보존되어야 했습니다. 그것을 통하여 주님께서 다시 체어리티를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인의 신앙은 잘못된 분리에서 시작되었지만, 주님께서는 그 안에서 앞으로 인류에게 쓰임이 될 수 있는 것을 구별하여 보존하셨습니다.

 

이제 ‘에덴 동쪽에 거하였다’는 표현도 훨씬 선명해집니다. 가인은 에덴 안에 있지 않습니다. 사랑이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며 신앙이 사랑에 속해 있던 본래의 천적 질서에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에덴과 아무 관계도 없는 완전한 소멸 상태로 사라진 것도 아닙니다. 그는 ‘에덴 동쪽’, 곧 전에 사랑이 지배하던 이해의 마음과 전에 체어리티가 지배하던 합리적 마음 가까이에 있습니다. 분리는 일어났지만 이해와 신앙이 보존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가까이’라는 표현은 AC.397에 이어 여전히 중요합니다. 그것은 가인의 상태가 선하고 정상적이었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 안에서 신앙이 앞으로 다시 선과 결합될 수 있는 쓰임을 위해 보존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사랑과 신앙의 본래적 하나 됨은 깨어졌지만, 신앙 자체가 제거되지는 않았습니다. 인간은 이제 그 보존된 신앙의 지식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는 다른 길로 인도될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AC.398은 태고교회에서 가인으로 넘어가는 변화와, 다시 홍수 후 영적 교회의 질서가 가능해지는 배경을 한꺼번에 보여 주는 중요한 번호입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의지와 이해가 하나였고, 사랑이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었으며 신앙은 사랑에 속해 있었습니다. 가인에게서는 그 결합이 깨져 이해가 의지 대신, 신앙이 사랑 대신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신앙을 없애지 않고 인류의 쓰임을 위해 구별하여 보존하셨습니다.

 

결국 가인의 문제는 ‘이해가 존재한다’거나 ‘신앙이 존재한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해가 의지에서,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스스로 지배하려 한 것이 문제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섭리는 그 뒤집힌 질서를 승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도 이해와 신앙을 보존하여 다시 선과 사랑을 받아들이는 수단으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인이 진리와 선 밖의 ‘놋 땅’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에덴 동쪽’, 곧 전에 사랑과 체어리티가 지배하던 마음 가까이에 거한다고 한 깊은 이유입니다. (AC.398 해설)

 

 

 

AC.399, 창4:17, ‘가인이 에녹을 낳고 성을 쌓다 - 분리된 신앙이 새로운 교리 체계를 낳다’ (AC.399-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And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and he was building a city, and 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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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7, 창4:16, ‘가인이 에덴 동쪽 놋 땅에 거하다 - 사랑이 지배하던 이해의 마음 가까이에 남은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And Cain went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 and dwelt in the land of Nod, toward the east of Eden. (창4:16) AC.397‘가인이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갔다’(Cain 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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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Jehovah set a mark on Cain, lest anyone should smite him)는 주님께서 신앙을 특별한 방식으로 구별하셔서 그것이 보존되게 하셨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표’(mark)와 어떤 사람에게 ‘표를 하는 것’(setting a mark)이 구별하는 수단을 의미한다는 데서 분명합니다. 에스겔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That “Jehovah set a mark on Cain, lest anyone should smite him” signifies that the Lord distinguished faith in a particular manner in order that it might be preserved,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a “mark,” and of “setting a mark” on anyone, as being a means of distinction. Thus in Ezekiel: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에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 하시고 (겔9:4) Jehovah said, Go through the midst of the city, through the midst of Jerusalem, and make a mark on (or designate) the foreheads of the men groaning and sighing for all the abominations, (Ezek. 9:4)

 

여기서 ‘이마에 표를 하는 것’(marking out the foreheads)은 실제로 그들의 머리 앞부분에 어떤 표나 선을 그린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계시록에서도 where by “marking out the foreheads,” is not meant a mark or line upon the front part of their heads, but to distinguish them from others. So in John, it is said that

 

그들에게 이르시되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 하시더라 (계9:4) The locusts should hurt only those men who had not the mark of God on their foreheads, (Rev. 9:4)

 

고 하는데, 여기서도 표를 가진다는 것은 구별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where also to have the mark means to be distinguished.

 

 

 

[2] 같은 책에는 ‘손과 이마에 표’(mark on the hand and on the forehead)를 받는 것에 관하여 기록되어 있습니다(계13:16). And in the same book we read of a “mark on the hand and on the forehead.” (Rev. 13:16)

 

 

 

그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들에게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계13:16)

 

같은 것이 유대교회에서는 첫째이자 큰 계명을 손과 이마에 매는 것으로 표상되었습니다. 이에 관하여 신명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읽습니다. The same thing was represented in the Jewish church by binding the first and great commandment on the hand and on the forehead, concerning which we read in Moses:

 

4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8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신6:4, 8) Hear, O Israel, Jehovah our God is one Jehovah; (Deut. 6:4, 8)

 

13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내 명령을 너희가 만일 청종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섬기면, 18이러므로 너희는 나의 이 말을 너희의 마음과 뜻에 두고 또 그것을 너희의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너희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며 (신11:13, 18) and thou shalt love Jehovah thy God with all thy heart, and with all thy soul, and with all thy strength, and thou shalt bind these words for a sign upon thy hand, and they shall be as frontlets between thine eyes. (Deut. 11:13, 18)

 

이것으로 사랑에 관한 계명을 다른 모든 계명보다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 표상되었습니다. 이로부터 ‘손과 이마에 표를 하는 것’(marking the hand and the forehead)의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By this was represented that they should distinguish the commandment respecting love above every other, and hence the signification of “marking the hand and the forehead” becomes manifest.

 

[3] 이사야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So in Isaiah:

 

18내가 그들의 행위와 사상을 아노라 때가 이르면 뭇 나라와 언어가 다른 민족들을 모으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볼 것이며 19내가 그들 가운데에서 징조를 세워서 그들 가운데에서 도피한 자를 여러 나라 곧 다시스와 뿔과 활을 당기는 룻과 및 두발과 야완과 또 나의 명성을 듣지도 못하고 나의 영광을 보지도 못한 먼 섬들로 보내리니 그들이 나의 영광을 뭇 나라에 전파하리라 (사66:18-19) I come to gather all nations and tongues; and they shall come and shall see my glory; and I will set a mark upon them. (Isa. 66:18–19)

 

시편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And in David:

 

16내게로 돌이키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주의 종에게 힘을 주시고 주의 여종의 아들을 구원하소서 17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 (시86:16-17) O turn unto me, and have mercy upon me, give thy strength unto thy servant, and save the son of thy handmaid. Set upon me a mark for good, and they that hate me shall see and be ashamed. (Ps. 86:16–17)

 

이 구절들로부터 이제 ‘표’의 의미가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가인이라 하는 어떤 특정한 한 사람에게 실제로 어떤 표가 주어졌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의 속뜻에는 문자적 의미에 담긴 것과는 전혀 다른 것들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From these passages the meaning of a mark is now evident. Let no one therefore imagine that any mark was set upon a particular person called Cain, for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contains things quite different from those contained in the sense of the letter.

 

해설

AC.396은 ‘가인의 표’가 무엇인지를 말씀의 여러 용례를 통해 확증합니다. 앞의 AC.392에서는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셨다’는 것이 주님께서 신앙을 특별한 방식으로 구별하여 그것이 보존되게 하셨음을 의미한다고 먼저 밝혔습니다. AC.393-395에서는 왜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까지 보존되어야 했는지를 설명했습니다. 이제 AC.396에서는 ‘표’라는 말 자체가 말씀에서 실제로 ‘구별’을 의미하는지를 에스겔, 계시록, 신명기, 이사야, 시편을 통하여 보여 줍니다.

 

가장 먼저 인용되는 겔9:4는 이 의미를 매우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예루살렘의 가증한 일들을 보고 탄식하며 우는 사람들의 이마에 표를 하라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실제 머리 앞부분에 어떤 선이나 표식을 그리는 것으로 읽지 않고, 그 사람들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는 것’으로 풀이합니다. 중요한 것은 표의 외형이 아니라 그 표를 통하여 어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어 보존된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창4장의 가인의 표 역시 같은 원리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계9:4의 ‘이마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아니한 사람들’도 같은 증거로 제시됩니다. 여기서도 이마에 있는 표는 사람을 영적으로 구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표’는 단순히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표시라기보다 그 사람이 어떤 상태에 속해 있는지를 구별하는 표상입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가인의 표도 가인이라는 개인에게 붙은 특이한 신체 표식으로 찾으려 하지 않습니다.

 

[2]에서는 계13:16의 ‘손과 이마에 표’가 언급되고, 이어 유대교회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손과 이마에 매도록 한 규례와 연결됩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그 표상을 ‘사랑에 관한 계명을 다른 모든 계명보다 구별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는 점입니다. 신6장의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계명이 첫째이자 큰 계명으로 구별되어야 했으며, 그것을 손과 이마에 두는 행위가 바로 그 구별을 표상했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가인 이야기 전체와도 깊이 연결됩니다. 가인의 문제는 사랑과 체어리티보다 신앙을 우위에 놓았다는 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표’의 의미를 확증하면서 다시 ‘사랑에 관한 계명’을 모든 계명보다 구별하는 표상을 가져옵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신앙이 보존되는 목적은 신앙이 홀로 지배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결국 다시 사랑과 체어리티를 주된 것으로 인정하는 올바른 질서에 들어가기 위해서입니다.

 

‘손’과 ‘이마’의 세부 상응을 이번 번호에서 지나치게 확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직접 증명하려는 것은 ‘표를 한다=구별한다’는 명제이기 때문입니다. 손과 이마가 각각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별도 심화로 펼치기보다, 사랑에 관한 첫째 계명을 다른 모든 것보다 구별하는 표상이었다는 본문의 논증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3]의 사66:18-19와 시86:16-17도 같은 목적을 가집니다. ‘표’를 세우거나 ‘은총의 표적’을 보이는 것은 어떤 사람이나 상태가 다른 것과 구별되어 있음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에 인용된 성경 구절들은 서로 다른 독립 주제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 하나의 사실, 곧 말씀에서 ‘표’와 ‘표를 하는 것’이 구별을 의미한다는 것을 확증하는 하나의 인용군입니다.

 

이제 다시 가인에게 돌아오면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셨다’는 말씀의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가인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을 표상합니다. 주님께서는 그 분리를 승인하신 것이 아니라, 그 상태에서도 신앙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도록 특별히 구별하여 보존하셨습니다. AC.393-394에서 설명했듯이 인류는 더 이상 태고교회처럼 사랑으로부터 직접 신앙에 속한 것을 퍼셉션할 수 없게 되었고, 이후에는 신앙의 지식을 먼저 듣고 배운 뒤 그것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체어리티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에 관한 지식이 완전히 사라져서는 안 되었습니다.

 

AC.395에서 그 보존이 왜 거룩한 문제였는지도 설명되었습니다. 가인을 죽이는 자에게 ‘칠 배’의 벌이 있다고 한 것은 일곱이 거룩하고 침해해서는 안 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분리된 신앙 자체가 거룩하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것을 이후의 구원을 위한 쓰임으로 구별하여 보존하셨기 때문에 함부로 파괴해서는 안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AC.396의 ‘표’는 바로 그 특별한 구별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가인의 표’에는 ‘구별’과 ‘보존’이라는 두 요소가 함께 있습니다. 먼저 주님께서 신앙을 특별히 구별하시고, 그렇게 구별하신 목적은 그것이 보존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가인의 표를 단순히 ‘하나님이 가인을 벌하시면서 동시에 보호하셨다’는 도덕적 이야기로만 읽으면 이 구조를 놓치게 됩니다. 속뜻에서는 인류의 영적 상태가 낮아진 뒤에도 주님께서 앞으로 구원에 쓰일 수 있는 신앙의 지식을 보존하시는 섭리가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번호 마지막에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강하게 문자적 독법에 경계를 세웁니다. ‘가인이라 하는 어떤 특정한 한 사람에게 실제로 어떤 표가 주어졌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가인의 표가 어떤 모양이었는지 알 수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아예 그런 질문 자체가 속뜻의 초점에서 벗어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해석하고 있는 가인은 한 개인의 전기적 인물이 아니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교회적·영적 상태를 표상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창1-11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을 때 매우 중요한 독법을 다시 확인해 줍니다. 문자적 이야기를 읽으면서 ‘가인의 표가 피부색이었을까, 흉터였을까, 어떤 초자연적인 표시였을까?’라고 추측하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이 본문에서 찾는 아르카나와 관계가 없습니다. 그의 관심은 ‘어떤 표였는가?’라는 외적 모양이 아니라 ‘왜 표가 주어졌는가?’라는 영적 기능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능은 신앙을 구별하여 보존하는 것입니다.

 

다만 이 마지막 문장을 근거로 말씀의 문자적 의미가 아무 가치가 없다고 확대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말씀에는 문자적 의미와 구별되는 속뜻이 있으며, 지금 자신이 해설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 속뜻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의 초점은 역사적·고고학적으로 가인의 몸에 어떤 표가 있었는지를 재구성하는 데 있지 않고, 그 이야기를 통하여 주님께서 교회의 신앙을 어떻게 보존하셨는지를 밝히는 데 있습니다.

 

AC.392-396을 한꺼번에 보면 이제 ‘가인의 표’에 대한 설명이 상당히 완성됩니다. AC.392에서 가인을 죽이는 것이 모독이고 표는 신앙의 특별한 구별과 보존이라고 먼저 선언했습니다. AC.393에서는 인간이 천적 상태를 잃은 뒤 신앙의 지식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받아야 하는 새로운 질서를 설명했습니다. AC.394에서는 바로 인류가 영원한 죽음 가운데 멸망하지 않도록 신앙이 보존되었다고 밝혔고, AC.395에서는 ‘칠 배’의 ‘일곱’이 그 보존의 거룩하고 침해할 수 없는 성격을 보여 준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396은 ‘표’ 자체가 말씀에서 구별을 의미한다는 것을 확증합니다.

 

결국 가인의 표는 ‘가인의 죄를 눈에 보이게 표시한 낙인’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의 타락 가운데에서도 구원을 위한 수단을 완전히 소멸시키지 않으시고 특별히 구별하여 보존하신 섭리를 나타냅니다. 인간은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했지만, 주님께서는 그 분리 때문에 신앙 자체까지 사라지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훗날 사람이 신앙의 지식을 듣고 배우며 그것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받을 수 있도록 보존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표’에서 궁극적으로 보아야 할 것은 가인의 몸에 새겨진 어떤 신비한 표시가 아니라, 인간의 실패 속에서도 구원의 길을 끊지 않으시는 주님의 보존 섭리입니다. (AC.396)

 

 

 

AC.397, 창4:16, ‘가인이 에덴 동쪽 놋 땅에 거하다 - 사랑이 지배하던 이해의 마음 가까이에 남은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And Cain went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 and dwelt in the land of Nod, toward the east of Eden. (창4:16) AC.397‘가인이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갔다’(Cain 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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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5, 창4:15,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 일곱은 왜 거룩한 것을 뜻하는가?’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5‘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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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5

‘가인을 죽이는 자는 누구든지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whosoever slayeth Cain, vengeance shall be taken on him sevenfold)는 이처럼 분리된 신앙이라 할지라도 그것에 폭력을 가하는 것은 모독(sacrilege)이 됨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가인’(Cain)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을 의미한다는 것과, ‘일곱’(seven)이 거룩한 것을 의미한다는 데서 분명합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일곱’이라는 수는 창조의 여섯 날과 일곱째 날 때문에 거룩하게 여겨졌습니다. 일곱째 날은 천적 인간을 의미하며, 그 안에는 평화와 쉼과 안식일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이 수는 유대교회의 의식에 매우 자주 나타나며 어디에서나 거룩하게 여겨집니다. 또한 이로 인해 크고 작은 기간들이 일곱으로 구분되어 ‘이레들’(weeks)이라고 불렸습니다. 메시아가 오기까지의 긴 기간들이 그러합니다(단9:24-25). That the words “whosoever slayeth Cain, vengeance shall be taken on him sevenfold” signify that to do violence to faith even when thus separated would be sacrilege,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Cain,” which is faith separated from charity, and from the signification of “seven,” which is what is sacred. The number “seven” was esteemed holy, as is well known, by reason of the six days of creation, and of the seventh, which is the celestial man, in whom is peace, rest, and the sabbath. Hence this number occurs so frequently in the rites of the Jewish church, and is everywhere held sacred, and hence also both greater and less periods of time were distinguished into sevens, and were called “weeks,” such as the great intervals of time to the coming of the messiah; (Dan. 9:24–25)

 

24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일흔 이레를 기한으로 정하였나니 허물이 그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 25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예순두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광장과 거리가 세워질 것이며 (단9:24, 25)

 

또 라반과 야곱도 칠 년의 기간을 ‘한 이레’(week)라고 불렀습니다(창29:27-28). and the time of seven years called a “week” by Laban and Jacob. (Gen. 29:27–28)

 

27이를 위하여 칠 일을 채우라 우리가 그도 네게 주리니 네가 또 나를 칠 년 동안 섬길지니라 28야곱이 그대로 하여 그 칠 일을 채우매 라반이 딸 라헬도 그에게 아내로 주고 (창29:27, 28)

 

같은 이유로 ‘일곱’이라는 수는 어디에서 나타나든 거룩하거나 침해해서는 안 되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시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For the same reason, wherever it occurs, the number seven is accounted holy or inviolable. Thus we read in David:

 

주의 의로운 규례들로 말미암아 내가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 (시119:164) Seven times a day do I praise thee. (Ps. 119:164)

 

이사야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In Isaiah: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 (사30:26) The light of the moon shall be as the light of the sun, and the light of the sun shall be sevenfold, as the light of seven days, (Isa. 30:26)

 

여기서 ‘해’(sun)는 사랑을, ‘달’(moon)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의미하며, 그 신앙은 사랑과 같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의 거듭남의 기간들이 일곱째, 곧 천적 인간에 이르기 전에 여섯으로 구분되는 것처럼, 황폐화의 기간들도 천적인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때까지 그렇게 구분됩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여러 포로 생활과, 마지막 포로 생활인 바벨론 포로로 표상되었는데, 이 포로 생활은 일곱 번의 십 년, 곧 칠십 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또한 땅이 그 안식년들 동안 쉬어야 한다는 말도 여러 번 나옵니다. 같은 것이 다니엘서의 느부갓네살로 표상됩니다. where the “sun” denotes love, and the “moon” faith from love, which should be as love. As the periods of man’s regeneration are distinguished into six, before the seventh arrives, that is, the celestial man, so also are the periods of his vastation, up to the time when nothing celestial remains. This was represented by the several captivities of the Jews, and by the last or Babylonish captivity, which lasted seven decades, or seventy years. It is also said several times that the earth should rest on its sabbaths. The same is represented by Nebuchadnezzar, in Daniel:

 

16또 그 마음은 변하여 사람의 마음 같지 아니하고 짐승의 마음을 받아 일곱 때를 지내리라, 23왕이 보신즉 한 순찰자, 한 거룩한 자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이르기를 그 나무를 베어 없애라 그러나 그 뿌리의 그루터기는 땅에 남겨두고 쇠와 놋줄로 동이고 그것을 들풀 가운데에 두라 그것이 하늘 이슬에 젖고 또 들짐승들과 더불어 제 몫을 얻으며 일곱 때를 지내리라 하였나이다, 32네가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면서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내서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리라 하더라 (단4:16, 23, 32) His heart shall be changed from man, and a beast’s heart shall be given unto him, and seven times shall pass over him. (Dan. 4:16, 23, 32)

 

또 마지막 때의 황폐화에 관하여 계시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And in John, concerning the vastation of the last times:

 

1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 6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7네 생물 중의 하나가 영원토록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 대접 일곱을 그 일곱 천사들에게 주니 8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으로 말미암아 성전에 연기가 가득 차매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 (계15:1, 6-8) I saw another sign in heaven, great and marvelous, seven angels, having the seven last plagues; (Rev. 15:1, 6–8)

 

또한 and that:

 

성전 바깥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계11:2) The gentiles should tread the holy city under foot forty and two months, or six times seven. (Rev. 11:2)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계5:1) I saw a book written within and on the back, sealed with seven seals. (Rev. 5:1)

 

같은 이유로 형벌의 엄중함과 그 가중됨도 ‘일곱’이라는 수로 표현되었습니다. 레위기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For the same reason the severities and augmentations of punishment were expressed by the number seven; as in Moses:

 

18또 만일 너희가 그렇게까지 되어도 내게 청종하지 아니하면 너희의 죄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일곱 배나 더 징벌하리라, 21너희가 나를 거슬러 내게 청종하지 아니할진대 내가 너희의 죄대로 너희에게 일곱 배나 더 재앙을 내릴 것이라, 24나 곧 나도 너희에게 대항하여 너희 죄로 말미암아 너희를 칠 배나 더 치리라, 28내가 진노로 너희에게 대항하되 너희의 죄로 말미암아 칠 배나 더 징벌하리니 (레26:18, 21, 24, 28) If ye will not yet for all this obey me, then I will chastise you sevenfold for your sins. (Lev. 26:18, 21, 24, 28)

 

시편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And in David:

 

주여 우리 이웃이 주를 비방한 그 비방을 그들의 품에 칠 배나 갚으소서 (시79:12) Render unto our neighbors sevenfold into their bosom. (Ps. 79:12)

 

이제 신앙에 폭력을 가하는 것은 모독이었습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신앙은 쓰임이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을 죽이는 자는 누구든지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whosoever should slay Cain, vengeance should be taken on him sevenfold)고 한 것입니다. Now as it was a sacrilege to do violence to faith—since as has been said it was to be of service—it is said that “whosoever should slay Cain, vengeance should be taken on him sevenfold.”

 

해설

AC.395는 ‘가인을 죽이는 자는 누구든지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는 창4:15의 말씀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 할지라도 그것에 폭력을 가하는 것은 모독이 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 근거는 두 상응에 있습니다. ‘가인’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고, ‘일곱’은 거룩한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가인을 죽이는 자에게 칠 배의 벌이 있다’는 것은 단순히 가인을 해치면 일곱 배나 더 심한 형벌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께서 보존하신 신앙을 함부로 파괴하는 일이 거룩한 것을 침해하는 일이 된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일곱’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가장 먼저 창조의 여섯 날과 일곱째 날로 돌아가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창1에서 인간의 거듭남은 여섯 날의 과정을 거쳐 일곱째 날의 천적 인간에 이릅니다. 그 일곱째 날에는 평화와 쉼과 안식일이 있습니다. 따라서 일곱이라는 수가 거룩한 이유는 단순히 고대 사람들이 숫자 7을 신비하게 여겼기 때문이 아니라, 말씀의 가장 처음부터 그것이 거듭남의 완성과 천적 상태, 그리고 주님 안에서의 안식을 표상하는 수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유대교회의 여러 의식과 시간의 구분에도 일곱이 반복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메시아가 오기까지의 기간을 다루는 단9:24-25의 ‘이레들’을 들고, 창29:27-28에서 라반과 야곱이 칠 년을 한 ‘이레’라고 부른 것도 예로 듭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숫자 7을 현대적인 숫자 암호처럼 계산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 안에서 일곱이라는 수가 반복적으로 거룩한 질서와 완결된 기간을 표상하는 방식으로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시119:164의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도 같은 의미에서 인용됩니다. 이것을 반드시 문자적으로 하루에 정확히 일곱 차례만 찬양해야 한다는 규정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상태에서 온전히 주님을 찬양하는 의미로 읽는 것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의 수는 단순한 산술적 수량을 넘어 영적 상태의 질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사30:26은 이번 번호에서 특히 중요합니다.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는 말씀에서 스베덴보리는 ‘해’를 사랑으로, ‘달’을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으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달이 해와 같이 된다’는 것은 신앙이 사랑과 같이 되어야 함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가인 이야기 전체와 정확히 맞닿습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 자체가 아니라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데 있었습니다. 참된 질서에서는 달이 해에서 빛을 받듯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받아야 합니다.

 

따라서 사30:26의 인용은 단순히 ‘일곱이 거룩하다’는 사실만 증명하는 구절이 아닙니다. 이번 문맥에서는 사랑과 신앙의 올바른 관계까지 다시 보여 줍니다. ‘해=사랑’, ‘달=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이라는 상응은 가인으로 표상된 분리된 신앙이 궁극적으로 회복되어야 할 방향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 신앙을 보존하신 목적도 신앙이 영원히 사랑에서 분리된 채 존재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 사랑과 결합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일곱’의 의미를 거듭남뿐 아니라 황폐화에도 적용합니다. 사람의 거듭남이 여섯 기간을 지나 일곱째의 천적 상태에 이르는 것처럼, 황폐화 역시 천적인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는 상태에 이르기까지 일정한 기간을 거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같은 ‘일곱’이 언제나 즐겁고 긍정적인 사건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일곱이 나타내는 것은 그 과정의 거룩한 질서 또는 완결된 상태이며, 문맥에 따라 거듭남의 완성과 황폐화의 완결 모두에 사용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여러 포로 생활과 칠십 년의 바벨론 포로가 이 맥락에서 언급됩니다. 칠십은 ‘일곱 번의 십 년’으로서 황폐화의 기간을 표상합니다. 땅이 안식년 동안 쉬어야 한다는 말씀 역시 같은 일곱의 질서와 연결됩니다. 따라서 안식과 황폐화가 표면적으로는 매우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둘 다 어떤 영적 기간이 주님의 질서 아래 그 정해진 상태에 이르는 것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느부갓네살에게 ‘일곱 때’가 지나가는 단4장의 말씀도 같은 이유로 인용됩니다. 사람의 마음이 짐승의 마음으로 바뀌고 일곱 때를 지나는 것은 황폐화의 상태를 표상합니다. 계15장의 일곱 마지막 재앙, 계11장의 마흔두 달, 계5장의 일곱 인도 같은 계열에 놓입니다. 여기서도 숫자 자체를 산술적으로 해독하는 것보다, 일곱이라는 수가 말씀 안에서 거룩하고 침해할 수 없는 질서 및 어떤 상태의 충만한 기간을 나타낸다는 스베덴보리의 해석 원리를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히 계11:2의 마흔두 달을 ‘여섯 번의 일곱’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창조의 여섯 날과도 연결하여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숫자 계산 자체를 독립적인 예언 연대표로 발전시키는 것은 이번 본문의 목적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모든 예를 드는 목적은 오직 ‘일곱’이 말씀에서 거룩한 것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확증하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레26장의 ‘칠 배의 징벌’이나 시79:12의 ‘칠 배나 갚으소서’처럼 형벌의 강화에도 일곱이 사용됩니까?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 이유 역시 일곱의 거룩함에서 찾습니다. 거룩한 것을 침해하는 일의 엄중함을 나타낼 때도 일곱이 사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칠 배’는 단순히 형량을 일곱 배로 계산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 행위가 거룩하고 침해해서는 안 되는 것과 관련되어 있음을 나타냅니다.

 

이제 다시 가인에게 돌아오면 AC.395의 논리가 선명해집니다. 가인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입니다. 그 신앙은 이미 본래의 천국적 질서를 잃었습니다. 그런데 AC.393-394에서 보았듯이 주님께서는 인류가 영원한 죽음 가운데 멸망하지 않도록 그 신앙을 보존하셨습니다. 인간이 더 이상 사랑으로부터 직접 진리를 퍼셉션할 수 없게 된 뒤에는 신앙의 지식이 먼저 주어지고, 그 지식을 통하여 주님께서 체어리티를 주시는 새로운 길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점이 이번 번호 마지막의 ‘since ... it was to be of service’를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신앙은 ‘쓰임이 있어야 했습니다.’ 여기서 신앙의 쓰임은 체어리티와 분리된 상태를 영구히 유지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신앙의 지식이 훗날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는 수단이 되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신앙을 완전히 파괴하면 주님께서 인간을 다시 체어리티로 인도하시는 하나의 중요한 수단까지 파괴하는 셈이 됩니다.

 

그래서 분리된 신앙임에도 그것에 폭력을 가하는 것이 ‘모독’이 됩니다. 이것은 잘못된 교리를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가인의 오류는 이미 매우 분명하게 비판되었습니다. 신앙을 체어리티보다 우위에 두고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러나 그 오류를 바로잡는 것과 신앙 자체, 특히 주님께서 이후의 구원을 위해 보존하신 신앙의 지식까지 파괴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이 점은 ‘가인의 표’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입니다. 주님께서 가인을 보호하신 것은 가인이 옳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타락 속에서도 앞으로 쓰임이 있을 것을 보존하십니다.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된 것은 악한 일이지만, 신앙에 속한 지식은 이후의 인간이 말씀을 듣고 배우며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는 수단으로 쓰일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가인의 표는 오류의 승인이 아니라 구원을 위한 보존의 표입니다.

 

여기에는 주님의 섭리에 관한 매우 깊은 원리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떤 것이 현재 불완전하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즉시 없애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 안에 앞으로 선을 위해 쓰일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보존하시고, 그것을 통하여 더 나은 질서로 이끄십니다. 가인의 신앙도 그러했습니다. 그것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었으므로 참된 질서를 잃었지만, 신앙의 지식이라는 측면에서는 이후 인간이 다시 체어리티를 받을 수 있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AC.395의 ‘일곱’은 단순한 성경 숫자 공부의 주제가 아닙니다. 일곱이 거룩한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왜 가인의 신앙이 함부로 파괴되어서는 안 되었는지를 밝혀 줍니다. 주님께서 구원을 위해 구별하여 보존하신 것에는 거룩한 쓰임이 있었고, 그 쓰임을 파괴하는 것은 모독이 될 수 있었습니다. ‘칠 배의 벌’은 바로 그 거룩하고 침해해서는 안 되는 성격을 표현합니다.

 

결국 AC.395는 창1의 일곱째 날에서 창4의 가인의 표까지 하나의 긴 선을 연결합니다. 창1의 일곱째 날은 사랑과 신앙이 하나 된 천적 인간의 평화와 안식을 나타냈습니다. 창4에서는 그 결합이 깨어져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신앙을 완전히 소멸시키지 않고 표를 주어 보존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보존의 거룩함을 다시 ‘일곱’이라는 수로 표현하셨습니다. 결국 처음의 목적도 마지막의 목적도 같습니다. 신앙이 홀로 남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사랑과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어, 인간이 주님과 결합되는 것입니다.

 

 

 

AC.396, 창4:15, ‘가인의 표는 무엇인가? - 주님께서 신앙을 구별하여 보존하신 표’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6‘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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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4, 창4:15, ‘가인의 표와 천국의 결혼 - 분리된 신앙을 보존하신 주님의 섭리’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4이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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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4

이제 이러한 일이 예견되었고, 인류가 영원한 죽음 가운데 멸망하지 않도록 섭리되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을 의미하는 가인에게 아무도 폭력을 가해서는 안 된다고 선언됩니다. 또한 그에게 표가 주어졌다고 하는데, 이는 주님께서 신앙을 특별한 방식으로 구별하셔서 그것이 보존되도록 하셨음을 의미합니다. 이것들은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아르카나이며, 주님께서 마태복음에서 결혼과 고자들에 관하여 말씀하신 다음 말씀에서도 그것들을 언급하셨습니다. Now as this was foreseen, and was provided, lest the human race should perish in eternal death, it is here declared that none should do violence to Cain, by whom is signified faith separated from charity; and further that a mark was set upon him, which means that the Lord distinguished faith in a particular manner, in order to secure its preservation. These are arcana hitherto undiscovered, and are referred to by the Lord in what he said respecting marriage, and eunuchs, in Matthew:

 

어머니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마19:12) There are eunuchs who were so born from their mother’s womb; and there are eunuchs who were made eunuchs of men; and there are eunuchs who have made themselves eunuchs for the kingdom of God’s sake; he that is able to receive it let him receive it. (Matt. 19:12)

 

천국의 결혼 안에 있는 자들이 ‘고자들’(eunuchs)이라고 불립니다. ‘어머니의 태로부터 그렇게 태어난 자들’(born from the womb)은 천적 천사들과 같은 자들이며, ‘사람에 의해 고자가 된 자들’(made of men)은 영적 천사들과 같은 자들이고, ‘스스로 그렇게 된 자들’(made so by themselves)은 천사적 영들과 같은 자들로서, 이들은 체어리티로부터라기보다 순종으로부터 행합니다. Those in the heavenly marriage are called “eunuchs”; those so “born from the womb,” are such as resemble the celestial angels; those “made of men,” are such as are like the spiritual angels; and those “made so by themselves,” are like angelic spirits, who act not so much from charity as from obedience.

 

해설

AC.394는 바로 앞 AC.393의 설명을 가인의 표에 직접 적용합니다. 인간이 태고교회와 같은 천적 상태에 계속 머물 수 없고, 결국 신앙을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분리하여 하나의 독립된 교리로 만들 것이 예견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분리 때문에 인류가 영원한 죽음 가운데 완전히 멸망하지 않도록 새로운 길을 섭리하셨습니다. 그래서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을 의미하는 가인에게 아무도 폭력을 가하지 못하게 하시고, 그에게 표를 주어 신앙을 특별한 방식으로 구별하고 보존하셨다는 것이 이번 번호의 첫 번째 핵심입니다.

 

이 대목은 AC.392에서 이미 제시되었지만, AC.394에서는 그 이유가 훨씬 분명해집니다. 분리된 신앙을 보존하신 이유는 그 분리 자체를 승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류가 완전히 멸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AC.393에서 살펴본 것처럼,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으로부터 신앙에 속한 것을 퍼셉션했지만, 이후의 인간은 먼저 신앙에 관한 지식을 배우고 그 지식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체어리티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신앙의 지식 자체가 완전히 파괴되어 버리면 이후의 인간이 체어리티로 인도될 길도 사라집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타락한 인간의 상태에서도 구원의 수단이 될 수 있도록 신앙을 보존하셨습니다.

 

여기서 ‘영원한 죽음 가운데 멸망하지 않도록’이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가인의 보존은 단순히 어느 한 교리 체계를 역사적으로 존속시키는 문제가 아닙니다. 인류의 구원 가능성과 직접 연결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더 이상 사랑으로부터 직접 진리를 퍼셉션할 수 없게 되었지만, 말씀을 듣고 신앙의 지식을 배우며 그 지식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표는 인간의 타락 이후에도 주님께서 구원의 통로를 완전히 끊지 않으셨음을 보여 주는 표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설명을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아르카나’라고까지 부릅니다. 그리고 뜻밖에도 마19:12의 ‘고자’에 관한 주님의 말씀을 가져옵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가인의 표와 고자에 관한 말씀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결혼’의 속뜻과 연결하고, 더 깊게는 천적 천사·영적 천사·천사적 영들의 서로 다른 상태를 설명하는 말씀으로 읽습니다.

 

여기서 먼저 ‘천국의 결혼’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의 결혼은 가장 깊게는 주님과 천국의 결합을 가리키고, 인간 안에서는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의 결합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의 문맥에서는 특히 사랑과 신앙이 올바르게 결합된 상태라고 이해하면 좋습니다. 가인의 문제는 바로 이 결혼을 깨뜨린 데 있었습니다.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하고 독립적인 것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표에 대한 설명 뒤에 ‘천국의 결혼’이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결혼 안에 있는 자들이 고자들이라고 불린다’고 합니다. 이 표현은 문자 그대로의 성적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19:12의 말씀을 상응적으로 읽으면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자연적·자기적인 결혼 상태를 벗어나 천국의 결혼, 곧 선과 진리의 결합 안에 있는 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고자’는 육체적 조건 자체보다 영적 상태를 나타내는 표상으로 읽어야 합니다.

 

첫째, ‘어머니의 태로부터 그렇게 태어난 자들’은 천적 천사들과 같은 자들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AC.393에서 설명한 태고교회의 상태와 연결됩니다. 천적 천사들은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퍼셉션합니다. 그들에게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은 처음부터 깊이 결합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신앙과 사랑의 분리를 경험한 뒤 다시 결합되는 방식보다, 처음부터 사랑 안에서 진리를 받아들이는 상태와 같습니다. 그래서 ‘태로부터 그렇게 태어난 자들’이라는 표현과 연결됩니다.

 

둘째, ‘사람에 의해 고자가 된 자들’은 영적 천사들과 같은 자들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천적 천사처럼 처음부터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퍼셉션하는 상태가 아니라, 밖에서 주어지는 신앙의 지식과 말씀을 통하여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를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체어리티를 받아들입니다. AC.393에서 말한 홍수 후 영적 교회의 질서와 같습니다. 즉 외적으로 들은 진리와 배운 신앙이 수단이 되어 내적으로 체어리티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셋째, ‘스스로 그렇게 된 자들’은 천사적 영들과 같은 자들이며, 이들은 ‘체어리티로부터라기보다 순종으로부터 행한다’고 합니다. 이 문장은 매우 조심해서 읽어야 합니다. 이것이 천사적 영들이 체어리티가 전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행동의 직접적인 출발점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천적 상태는 사랑에서, 영적 상태는 진리와 양심을 통하여 체어리티에서 행하지만, 이 보다 외적인 상태에서는 먼저 ‘이것이 주님의 명령이므로 행해야 한다’는 순종이 더 직접적인 동기가 됩니다.

 

따라서 세 부류는 모두 같은 수준에서 나열된 세 가지 인간 유형이라기보다, 선과 진리가 결합되는 서로 다른 방식과 정도를 보여 줍니다. 천적 천사는 사랑으로부터 직접 진리를 퍼셉션하고, 영적 천사는 배운 진리를 통하여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며, 천사적 영은 보다 외적으로 순종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질서의 목적은 결국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결합되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가인의 보존과 마19:12가 연결되는 이유도 보이기 시작합니다. 인간이 태고교회와 같은 천적 상태를 잃었어도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사랑에서 직접 진리를 퍼셉션할 수 없게 된 사람에게도 신앙의 지식을 통하여 체어리티로 나아가는 영적 길이 열렸고, 더 외적인 상태에서는 순종을 통하여 질서 안으로 들어오는 길도 남아 있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는 인간의 상태가 낮아질 때마다 그 상태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구원의 길을 마련하십니다.

 

이것이 ‘가인의 표’가 단순한 보호 표지가 아니라 주님의 섭리를 보여 주는 중요한 상징인 이유입니다.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한 것은 인간의 타락이지만, 주님께서는 그 분리된 신앙 안에 남아 있는 진리의 지식까지 파괴되지 않도록 보존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훗날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는 수단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가장 높은 질서를 잃었다고 해서 주님께서 구원의 모든 길을 닫아 버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낮아진 상태에서도 다시 올라올 수 있는 새로운 질서를 마련하십니다.

 

이번 번호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천국의 결혼’이라는 관점입니다. 가인 이야기를 단순히 신앙 대 체어리티의 싸움으로만 보면, 해결책이 어느 한쪽을 제거하는 데 있다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의 결혼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목표는 분리된 둘 가운데 하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을 다시 결합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신앙을 보존하신 것도 바로 그 결합의 가능성을 보존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AC.394는 주님의 섭리가 인간의 실패를 어떻게 다루는지를 매우 깊게 보여 줍니다. 주님은 인간이 천적 질서를 잃었다고 해서 인류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인간이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했을 때에도 신앙의 지식을 보존하시고, 그것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주실 길을 마련하십니다. 직접적인 퍼셉션이 사라진 뒤에는 양심의 길을, 더 외적인 사람에게는 순종의 길을 사용하시면서, 각 상태에서 인간을 선과 진리의 결합으로 이끄십니다.

 

결국 AC.394의 ‘가인의 표’는 단순히 타락한 신앙을 살려 두신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류가 영원한 죽음 가운데 멸망하지 않도록 주님께서 신앙을 특별히 구별하여 보존하신 섭리의 표입니다. 그리고 마19:12의 세 종류의 ‘고자’에 관한 말씀은 인간이 서로 다른 상태와 방식으로 천국의 결혼, 곧 사랑과 신앙의 결합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가장 높은 천적 상태를 잃어버린 인간에게도 주님께서는 영적 질서와 순종의 질서를 통해 다시 선과 진리의 결합으로 나아갈 길을 남겨 두셨습니다. 이것이 가인의 표에 감추어진 아르카나 가운데 하나입니다.

 

 

 

AC.395, 창4:15,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 일곱은 왜 거룩한 것을 뜻하는가?’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5‘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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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3, 창4:15,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홍수 후 교회의 양심 - 신앙과 체어리티의 새로운 질서’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3지금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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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3

지금 우리 앞에 있는 말씀의 속뜻을 계속 밝혀 나가기 전에, 신앙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태고교회는 사랑에 속한 신앙 외에는 어떠한 신앙도 인정하지 않는 성격의 교회였으며, 심지어 신앙을 따로 언급하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을 통하여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을 퍼셉션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한 천적 천사들도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인류가 계속 이러한 성격으로 있을 수 없고,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하여 신앙을 그 자체로 하나의 교리로 만들 것이 예견되었으므로, 그것들이 실제로 분리되도록 허용하시되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섭리하셨습니다. 곧 신앙을 통하여, 다시 말해 신앙에 관한 지식들을 통하여 사람들이 주님으로부터 체어리티를 받을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지식(cognitio), 곧 듣는 것이 먼저 오고, 그 후 지식 또는 들음을 통하여 체어리티, 곧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가 주님으로부터 주어지게 하셨습니다. 이 체어리티는 신앙과 분리될 수 없어야 할 뿐 아니라 신앙에서 주된 것을 이루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태고교회에 있었던 퍼셉션을 대신하여, 체어리티와 결합된 신앙을 통하여 얻어지는 양심이 뒤를 이었습니다. 이 양심은 무엇이 진리인지를 딕테이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딕테이트하였는데, 이는 주님께서 말씀에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홍수 후의 교회들은 대부분 이러한 성격이었으며, 주님의 강림 후 원시교회 또는 초대교회도 그러했습니다. 천적 천사들과 영적 천사들이 구별되는 것도 바로 이것에 의해서입니다. Before we proceed to elucidate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s before us, it is necessary to know how the case is with faith. The most ancient church was of such a character as to acknowledge no faith except that which is of love, insomuch that they were unwilling even to mention faith, for through love from the Lord they perceived all things that belong to faith. Such also are the celestial angels of whom we have spoken above. But as it was foreseen that the human race could not be of this character, but would separate faith from love to the Lord, and would make of faith a doctrine by itself, it was provided that they should indeed be separated, but in such a way that through faith, that is, through the knowledges of faith, men might receive from the Lord charity, so that knowledge [cognitio] or hearing should come first, and then through knowledge or hearing, charity, that is, love toward the neighbor, and mercy, might be given by the Lord, which charity should not only be inseparable from faith, but should also constitute the principal of faith. And then instead of the perception they had in the most ancient church, there succeeded conscience, acquired through faith joined to charity, which dictated not what is true, but that it is true, and this because the Lord has so said in the Word. The churches after the flood were for the most part of this character, as also was the primitive or first church after the Lord’s advent, and by this the spiritual angels are distinguished from the celestial.

 

해설

AC.393은 가인의 표에 대한 설명을 잠시 멈추고 신앙의 역사를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번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 우리 앞에 있는 말씀의 속뜻을 계속 밝혀 나가기 전에, 신앙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알아둘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이어질 가인의 표를 이해하려면 먼저 태고교회에서 신앙과 사랑이 어떤 관계에 있었고, 이후 그 관계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AC.393은 단순한 삽입 설명이 아니라 AC.392에서 말한 ‘분리된 신앙의 보존’을 이해하는 교리적 열쇠입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에 속한 신앙’ 외에는 어떠한 신앙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들이 ‘신앙’을 따로 언급하려 하지도 않았다는 설명입니다. 그들에게 사랑과 신앙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두 개의 별도 항목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 안에 있으면서 그 사랑을 통하여 신앙에 속한 것들을 퍼셉션했기 때문입니다. 먼저 어떤 교리를 배우고 그것이 참이라고 믿은 다음 사랑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가운데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내적으로 퍼셉션했습니다. 그래서 사랑과 신앙을 따로 떼어 ‘나는 이것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 자체가 그들의 본래적 질서와 맞지 않았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적 천사들도 이와 같다고 합니다. 이것은 태고교회의 상태와 천적 천사의 상태 사이에 깊은 상응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천적 상태에서는 사랑이 중심이며 진리는 그 사랑 안에서 퍼셉션됩니다. 진리를 먼저 지적으로 확보하고 그 진리를 통하여 선으로 나아가는 질서가 아니라, 선 안에서 진리를 보는 질서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금까지 ‘천적 인간은 사랑에서 신앙으로’라고 정리해 온 이유입니다.

 

그러나 인류가 계속 그러한 상태에 머물 수 없을 것이 예견되었습니다. 인간은 결국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하고’, 신앙을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교리로 만들게 됩니다. 이것이 가인으로 표상된 분리의 핵심입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그 분리를 원하셨다고 이해하지 않는 것입니다. 분리는 인간의 타락에서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인간이 그렇게 될 것을 예견하시고, 이미 낮아진 상태에서도 다시 체어리티를 받을 수 있는 길을 섭리하셨습니다.

 

그 새로운 길이 바로 ‘신앙에 관한 지식들에서 체어리티로’ 나아가는 질서입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 안에서 진리를 퍼셉션했다면, 이후의 인간에게는 먼저 신앙에 관한 지식이 주어집니다. 사람은 말씀을 듣고 배우며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지식과 들음을 통하여 주님께서 체어리티, 곧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를 주십니다. 따라서 순서는 달라집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으로부터 신앙에 속한 것을 퍼셉션했다면, 이후의 영적 인간에게서는 신앙의 지식이 먼저 오고 그 지식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형성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먼저 지식만 충분히 쌓으면 나중에 자동으로 체어리티가 생긴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AC.393은 체어리티가 ‘주님으로부터 주어진다’고 두 번이나 강조합니다. 지식 자체가 체어리티를 생산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의 진리를 듣고 배우는 것은 주님께서 사람에게 체어리티를 주실 수 있는 수단과 길이 됩니다. 사람이 그 진리를 받아들이고 삶으로 행하려 할 때 주님께서 그 안에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를 형성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질서에서도 생명의 근원은 여전히 주님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주어진 체어리티가 신앙과 ‘분리될 수 없어야 할 뿐 아니라 신앙에서 주된 것을 이루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순서와 주도권을 명확히 구별합니다. 시간적·교육적 순서에서는 신앙의 지식이 먼저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 질서와 주도권에서는 체어리티가 주된 것입니다. 이것은 AC.363에서 살펴본 원리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신앙이 먼저 배워질 수 있지만, 신앙이 지배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향하여 나아가야 하며, 체어리티가 신앙의 생명과 주된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합니다. ‘신앙이 먼저다’라는 말을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사람이 말씀을 듣고 진리를 배우는 교육적 순서에서 신앙의 지식이 먼저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본질적이고 우월하다는 뜻입니다. AC.393은 첫 번째 의미는 인정하지만 두 번째 의미는 분명히 부정합니다. 지식과 들음은 먼저 올 수 있지만, 그것을 통해 주님께서 주시는 체어리티가 신앙의 ‘주된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퍼셉션과 양심의 차이가 등장합니다. 태고교회에는 퍼셉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후에는 ‘체어리티와 결합된 신앙을 통하여 얻어지는 양심’이 그 자리를 이어받았습니다. 이 양심은 퍼셉션과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매우 정밀하게 ‘양심은 무엇이 진리인지를 딕테이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딕테이트한다’고 말합니다.

 

이 차이는 처음에는 미묘해 보이지만 매우 큽니다. 퍼셉션을 가진 태고교회 사람은 사랑으로부터 어떤 것이 선하고 참된지를 내적으로 알아차렸습니다. 반면 양심을 가진 영적 인간은 먼저 말씀을 통해 진리를 배웁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말씀에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것은 진리이다’라는 내적인 딕테이트를 받습니다. 즉 양심이 독립적으로 새로운 진리를 발견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계시되고 배운 진리를 진리로 인정하고 그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말해 주는 것입니다.

 

이 설명은 앞의 AC.359와 AC.370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AC.359에서는 가인에게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을 ‘conscience dictated’, 곧 ‘양심이 말해 주었다’고 했습니다. 반면 AC.370에서는 같은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다’를 ‘체어리티에 관하여 그들에게 어떤 딕테이트를 주는, 내면에서 오는 어떤 퍼셉션’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두 표현을 억지로 하나로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AC.393은 태고교회에 고유한 퍼셉션과 이후 체어리티와 결합된 신앙을 통해 형성되는 양심이 서로 다른 영적 기능임을 분명히 합니다. 따라서 앞의 표현 차이도 그대로 보존하면서, 가인으로 표상되는 과도기적 상태 안에서 퍼셉션의 어떤 흔적과 양심이라는 표현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조심스럽게 읽어야 합니다.

 

특히 AC.393은 ‘홍수 후의 교회들은 대부분 이러한 성격이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따라서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홍수 후 고대교회의 양심을 시대적으로 무분별하게 섞어서는 안 됩니다. 홍수 후의 영적 교회에서는 말씀과 신앙의 지식이 먼저 주어지고, 그것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며, 그 체어리티와 결합된 신앙으로부터 양심이 형성됩니다. 이것이 태고교회의 천적 질서와 구별되는 영적 교회의 질서입니다.

 

더 나아가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강림 후 ‘원시교회 또는 초대교회’도 이러한 성격이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단순히 홍수 직후 어느 고대 종교집단만의 특수한 구조가 아닙니다. 사람이 말씀의 진리를 먼저 듣고 배우며, 그 진리를 삶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주님에게서 체어리티를 받고, 그 결과 양심이 형성되는 것은 영적 교회의 기본적인 거듭남의 질서입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차이가 천적 천사와 영적 천사를 구별한다고 말합니다. 천적 천사는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퍼셉션하고, 영적 천사는 진리를 통하여 선으로 인도되며 양심의 질서 안에서 살아갑니다. 둘 가운데 하나가 천국이고 다른 하나가 열등하여 천국이 아니라는 뜻은 아닙니다. 둘 다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지만 그 받아들이는 방식과 질서가 다릅니다. 이것이 천적과 영적의 중요한 구별입니다.

 

이제 AC.392의 ‘가인의 표’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인간이 사랑으로부터 직접 신앙에 속한 것을 퍼셉션하는 태고교회의 상태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었고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시키기 시작했을 때, 주님께서는 단순히 그 신앙을 없애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신앙의 지식이 보존되게 하시고, 훗날 그 지식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받을 수 있는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분리된 신앙을 보존하셨다는 것은 분리를 승인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에게도 다시 체어리티가 주어질 수 있도록 신앙의 지식을 구원의 수단으로 보존하셨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가인의 표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된 것은 타락이지만, 그렇다고 신앙에 관한 모든 지식을 파괴해 버리면 이후의 인간은 무엇을 통하여 체어리티로 인도될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인간의 상태가 낮아진 바로 그 자리에서 새로운 길을 마련하십니다. 사랑에서 직접 진리를 퍼셉션할 수 없게 된 사람에게 말씀을 듣게 하시고, 신앙의 지식을 배우게 하시며, 그 지식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시고, 체어리티와 결합된 신앙으로부터 양심을 형성하십니다.

 

따라서 AC.393은 단순히 ‘옛날에는 퍼셉션이 있었고 나중에는 양심이 생겼다’는 교회사적 설명이 아닙니다. 인간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길을 계속 이어 가시는 주님의 섭리를 보여 줍니다. 인간이 더 이상 천적 방식으로 주님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을 때 주님께서는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가 받아들일 수 있는 더 외적인 길을 통하여 다시 내적인 사랑과 체어리티로 인도하십니다.

 

결국 AC.393의 핵심은 ‘순서는 바뀌었지만 목적은 바뀌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으로부터 신앙이 나왔습니다. 이후 영적 교회에서는 신앙의 지식이 먼저 오고 그것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주어집니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독립하여 생명을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체어리티는 신앙과 분리될 수 없으며 ‘신앙에서 주된 것’을 이루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가인의 신앙을 보존하신 것도 바로 이 목적을 위해서입니다. 분리된 신앙 자체를 영구히 존속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앙의 지식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가 주어지고 신앙과 사랑의 결합이 회복될 수 있도록 길을 남겨 두신 것입니다.

 

 

 

AC.394, 창4:15, ‘가인의 표와 천국의 결혼 - 분리된 신앙을 보존하신 주님의 섭리’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4이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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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2, 창4:15,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시다 - 분리된 신앙까지 보존하시는 이유’ (AC.392-396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And Jehovah said unto 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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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And Jehovah said unto him, Therefore whosoever slayeth Cain, vengeance shall be taken on him sevenfold. And Jehovah set a mark upon Cain, lest any finding him should smite him. (창4:15)

 

AC.392

‘가인을 죽이는 자는 누구든지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vengeance being taken sevenfold on anyone who slays Cain)는 이처럼 분리된 신앙이라 할지라도 그것에 폭력을 가하는 것은 모독(sacrilege)이 됨을 의미합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Jehovah set a mark upon Cain, lest any finding him should smite him)는 주님께서 신앙을 특별한 방식으로 구별하셔서 그것이 보존되게 하셨음을 의미합니다. By “vengeance being taken sevenfold on anyone who slays Cain” is signified that to do violence to faith even when thus separated would be a sacrilege; “Jehovah set a mark upon Cain, lest any finding him should smite him” signifies that the Lord distinguished faith in a particular manner, in order that it might be preserved.

 

해설

AC.392에서 드디어 창4장의 가장 수수께끼 같은 장면 가운데 하나인 ‘가인의 표’가 등장합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였습니다. 속뜻에서는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예상되는 것은 가인의 완전한 제거입니다. 그런데 정반대의 일이 일어납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을 죽이는 자는 누구든지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고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어 그가 죽임을 당하지 않도록 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이처럼 분리된 신앙이라 할지라도 그것에 폭력을 가하는 것은 모독이 된다’는 것과 ‘주님께서 신앙을 특별한 방식으로 구별하여 그것이 보존되게 하셨다’는 의미로 풀이합니다.

 

여기서 가장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보존’과 ‘승인’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인을 보존하셨다고 해서 가인으로 표상되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을 참된 신앙으로 인정하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앞의 여러 번호에서 그 신앙의 상태는 이미 충분히 밝혀졌습니다. 그것은 체어리티를 신앙 아래에 두고 마침내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며 소멸시킨 신앙입니다. AC.379에서는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 단지 지식이라고까지 했습니다. 따라서 AC.392의 보존은 ‘그 교리가 옳으니 보호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보존하십니까? AC.392는 아직 그 이유 전체를 풀어놓지는 않지만 결정적인 단서를 줍니다. ‘이처럼 분리된 신앙이라 할지라도 그것에 폭력을 가하는 것은 모독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 안에 완전히 소멸시켜서는 안 되는 어떤 것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AC.384가 중요해집니다. 거기서 스베덴보리는 ‘가인에게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AC.389에서는 악과 거짓이 사람을 죽인다는 것이 ‘그에게 생명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392에서는 그 완전한 소멸을 막기 위해 신앙이 보존됩니다.

 

따라서 ‘가인의 표’는 가인의 악을 승인하는 표가 아니라 보존의 표입니다. 주님께서는 잘못된 것을 잘못되지 않은 것으로 바꾸어 선언하시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상태 속에서도 아직 보존되어야 할 것을 구별하여 지키십니다. 이것은 주님의 섭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주님의 섭리는 언제나 완전한 상태만을 다루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이미 질서를 많이 무너뜨린 상태에서도 아직 남아 있는 선과 진리, 그리고 앞으로 회복의 가능성을 위해 필요한 것을 보존하십니다.

 

‘주님께서 신앙을 특별한 방식으로 구별하셨다’는 표현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distinguished faith in a particular manner’입니다. 즉 가인의 표는 단순히 몸에 어떤 표시를 새겼다는 문자적 이미지에 머물지 않습니다. 속뜻에서는 주님께서 이 신앙을 다른 것들과 구별하여 함부로 파괴되지 않도록 하셨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구별하셨는지는 뒤의 번호들을 더 읽어야 충분히 밝혀지겠지만, 적어도 AC.392에서는 ‘구별하여 보존함’이라는 두 요소가 핵심입니다.

 

여기서 ‘칠 배’도 눈에 띕니다. 그러나 이번 번호는 아직 ‘일곱’의 상응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지금 단계에서 ‘일곱은 완전함을 뜻하므로 칠 배의 복수는 완전한 형벌이다’와 같은 식으로 미리 결론을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어지는 번호에서 그 의미를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따라가는 것이 안전합니다. 현재 AC.392에서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가인을 죽이는 것’, 곧 이처럼 분리된 신앙에 폭력을 가하는 일이 모독으로 간주된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모독’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모독은 단순한 오류나 악과 같지 않습니다. 거룩한 것과 관계된 것을 알고 인정하면서 그것을 침해하거나 더럽히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따라서 가인의 신앙이 이미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었다고 해서 그 안에 있는 신앙에 관한 모든 것을 아무렇게나 파괴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잘못된 것 안에서도 말씀에서 나온 진리의 지식이나 거룩한 것과 관련된 어떤 것이 남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AC.392만으로 그 구체적인 구조를 모두 확정하기보다, 이어지는 설명을 기다리면서 우선 ‘분리된 신앙에도 함부로 폭력을 가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있다’는 데 머무는 것이 좋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교회나 다른 사람의 신앙을 바라볼 때에도 매우 조심스럽게 생각해 볼 만한 원리입니다. 어떤 사람의 신앙 안에 심각한 오류가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든 신앙적 요소를 한꺼번에 부수는 것이 반드시 선한 일은 아닙니다. 오류는 오류로 분별해야 하지만, 그 사람 안에 주님께서 보존하고 계시는 진리나 선의 가능성까지 함께 파괴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이것은 AC.392의 직접적인 역사적 의미라기보다 그 원리에서 조심스럽게 생각해 볼 수 있는 적용입니다. 이번 본문의 직접적인 대상은 가인으로 표상되는 고대의 교회 상태입니다.

 

앞의 AC.389-391을 거쳐 이번 번호에 도달했다는 것도 중요합니다. AC.389에서는 체어리티를 잃으면 사람이 주님과의 결합에서 분리되어 자기의 것에 맡겨지고, 그 결과 악과 거짓이 생명에 속한 것을 소멸시킨다고 했습니다. AC.390에서는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자들이 끊임없이 죽임당할 것을 두려워한다고 했고, AC.391에서는 악과 거짓 자체가 그 안에 형벌을 품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가인은 결국 악과 거짓에 의해 완전히 소멸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주님의 보존이 개입합니다.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가인의 표는 형벌보다 자비의 측면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가인은 자신의 상태가 가져오는 결과를 겪습니다. 지면에서 쫓겨나고,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하며,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결과가 무제한적으로 진행되어 생명에 속한 모든 것이 소멸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섭리는 인간의 자유와 그 선택의 결과를 없애 버리지 않으면서도, 구원의 가능성을 위해 보존되어야 할 것을 지키십니다.

 

여기서 AC.384의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다’는 표현을 곧바로 기술적인 의미의 ‘리메인스’와 동일시하지 않는 것도 여전히 중요합니다. 원문은 그곳에서 ‘remains’라는 전문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가인의 표는 리메인스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지금 확정해 버리기보다는,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으며, 생명에 속한 것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도록 보존이 이루어졌다’고 말하는 것이 현재 본문에 더 충실합니다. 이후 스베덴보리가 이 보존을 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따라가면 됩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신앙’을 보존하셨다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신앙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가인의 오류는 신앙이 존재했다는 데 있지 않고,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그것을 체어리티보다 우위에 두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따라서 해결은 신앙을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 다시 체어리티와 올바른 관계를 이루도록 보존되어야 합니다. 진리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선을 섬기도록 질서를 회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점은 창4장의 가인 이야기를 읽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고 해서 이제 ‘신앙은 나쁘고 체어리티만 남겨야 한다’는 결론으로 갈 수 없습니다.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어느 하나를 제거하는 것이 해답이 아니라, 둘의 올바른 결합과 질서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가인은 그 질서를 뒤집었지만, 주님께서는 그렇다고 신앙 자체가 완전히 소멸되도록 두지 않으십니다. 신앙을 특별히 구별하여 보존하십니다.

 

결국 AC.392에서 ‘가인의 표’는 주님의 섭리가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 주는 표상으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인간은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내려갔지만, 주님께서는 그 잘못된 상태 안에서도 보존할 수 있는 것을 찾으시고 그것을 구별하여 지키십니다. 인간의 악을 선이라고 부르시지는 않지만, 악 때문에 아직 남아 있는 모든 선과 진리까지 함께 멸망하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가인을 죽이는 자는 누구든지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와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셨다’는 말씀은 단순한 범죄자 보호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속뜻에서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심각하게 손상된 교회 상태 속에서도 주님께서 신앙을 특별히 구별하여 보존하시는 섭리를 보여 줍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목적은 가인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인간 안에서 생명에 속한 것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도록 지키시고 마침내 선과 진리의 질서가 다시 이어질 길을 남겨 두시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AC.393, 창4:15,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홍수 후 교회의 양심 - 신앙과 체어리티의 새로운 질서’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3지금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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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1, 창4:14, ‘악과 거짓은 그 자체 안에 형벌을 품고 있습니다 - 악령들이 서로 두려워하는 이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91악과 거짓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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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90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자들은 죽임을 당할 것에 대한 끊임없는 두려움 가운데 있는데, 이는 레위기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됩니다. Those who are in evil and falsity are in continual dread of being slain, as is thus described in Moses:

 

33내가 너희를 여러 민족 중에 흩을 것이요 내가 칼을 빼어 너희를 따르게 하리니 너희의 땅이 황무하며 너희의 성읍이 황폐하리라, 36너희 남은 자에게는 그 원수들의 땅에서 내가 그들의 마음을 약하게 하리니 그들은 바람에 불린 잎사귀 소리에도 놀라 도망하기를 칼을 피하여 도망하듯 할 것이요 쫓는 자가 없어도 엎드러질 것이라 37그들은 쫓는 자가 없어도 칼 앞에 있음같이 서로 짓밟혀 넘어지리니 너희가 원수들을 맞설 힘이 없을 것이요 (레26:33, 36-37) Your land shall be a desolation, and your cities a waste, and upon them that are left of you I will bring softness into their heart in the land of their enemies, and the sound of a driven leaf shall chase them, and they shall flee as fleeing from a sword, and they shall fall when none pursueth, and shall stumble everyone upon his brother, as it were before a sword, when none pursueth. (Lev. 26:33, 36–37)

 

이사야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In Isaiah:

 

16땅끝에서부터 노래하는 소리가 우리에게 들리기를 의로우신 이에게 영광을 돌리세 하도다 그러나 나는 이르기를 나는 쇠잔하였고 나는 쇠잔하였으니 내게 화가 있도다 배신자들은 배신하고 배신자들이 크게 배신하였도다 17땅의 주민아 두려움과 함정과 올무가 네게 이르렀나니 18두려운 소리로 말미암아 도망하는 자는 함정에 빠지겠고 함정 속에서 올라오는 자는 올무에 걸리리니 이는 위에 있는 문이 열리고 땅의 기초가 진동함이라 19땅이 깨지고 깨지며 땅이 갈라지고 갈라지며 땅이 흔들리고 흔들리며 20땅이 취한 자 같이 비틀비틀하며 원두막같이 흔들리며 그 위의 죄악이 중하므로 떨어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리라 (사24:16-20) The treacherous deal treacherously, yea, in the treachery of the treacherous they deal treacherously.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he who fleeth from the noise of the fear shall fall into the pit, and he that cometh up out of the midst of the pit shall be taken in the snare; the transgression thereof shall be heavy upon it, and it shall fall, and not rise again. (Isa. 24:16–20)

 

예레미야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In Jeremiah: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두려움을 네 사방에서 네게 오게 하리니 너희 각 사람이 앞으로 쫓겨 나갈 것이요 도망하는 자들을 모을 자가 없으리라 (렘49:5) Behold, I bring a dread upon thee, from all thy circuits shall ye be driven out every man toward his faces, and none shall gather up him that wandereth. (Jer. 49:5)

 

이사야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In Isaiah:

 

16이르기를 아니라 우리가 말 타고 도망하리라 하였으므로 너희가 도망할 것이요 또 이르기를 우리가 빠른 짐승을 타리라 하였으므로 너희를 쫓는 자들이 빠르리니 17한 사람이 꾸짖은즉 천 사람이 도망하겠고 다섯이 꾸짖은즉 너희가 다 도망하고 너희 남은 자는 겨우 산꼭대기의 깃대 같겠고 산마루 위의 기치 같으리라 하셨느니라 (사30:16-17) We will flee upon the horse, therefore shall ye flee; and, we will ride upon the swift, therefore shall they that pursue you be rendered swift; one thousand shall flee at the rebuke of one, at the rebuke of five shall ye flee. (Isa. 30:16–17)

 

말씀의 이 구절들과 그 밖의 여러 구절에서 거짓과 악 가운데 있는 자들은 ‘도망하는 자들’(fleeing)로, 그리고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하는 자들’(fear of being slain)로 묘사됩니다. 그들은 자기를 보호해 줄 자가 아무도 없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자들은 모두 이웃을 미워하므로 서로 죽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In these and other passages of the Word, those who are in falsity and evil are described as “fleeing,” and as in “fear of being slain.” They are afraid of everybody, because they have no one to protect them. All who are in evil and falsity hate their neighbor, so that they all desire to kill one another.

 

해설

AC.390은 바로 앞 AC.389에서 설명한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의 의미를 말씀의 여러 구절을 통해 확증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죽임을 당할 것에 대한 끊임없는 두려움’ 가운데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레위기, 이사야, 예레미야에서 사람들이 쫓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고, 작은 소리에도 놀라며, 두려움에서 달아나다가 함정에 빠지고, 사방으로 흩어지는 장면들을 가져옵니다. 이 인용들의 공통점은 실제로 누군가가 그들을 죽이려고 쫓아오는가보다 ‘쫓는 자가 없어도 도망한다’는 데 있습니다. 두려움의 근원이 외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내적 상태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레26:33,36-37은 이 점을 특히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바람에 불린 잎사귀 소리’만 들어도 칼을 피해 달아나는 것처럼 도망하고, 심지어 ‘쫓는 자가 없어도’ 엎드러집니다. 실제 위험의 크기와 그들이 느끼는 공포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상태 자체가 사람 안에 불안을 만들기 때문에 외부의 작은 자극도 자신을 위협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24:16-20에서도 같은 구조가 나타납니다. 두려움에서 벗어나려고 도망하지만 함정에 빠지고, 함정에서 올라오면 다시 올무에 걸립니다. 이것은 단순히 불운이 계속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사람이 자기 힘으로 안전을 확보하려 할수록 또 다른 두려움 속으로 들어가는 영적 상태를 묘사합니다. 주님과의 결합에서 오는 내적인 안전을 잃었기 때문에 장소를 바꾸거나 외적인 조건을 바꾸는 것만으로는 두려움의 근본 원인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렘49:5의 ‘두려움이 사방에서 온다’는 표현도 같은 상태를 보여 줍니다. 사방이 모두 위협으로 느껴지고 각자가 흩어지지만 ‘도망하는 자들을 모을 자’가 없습니다. 그리고 사30:16-17에서는 ‘빠른 것을 타고 도망하겠다’고 하지만 오히려 쫓는 자들이 더 빨라지고, 한 사람의 꾸짖음에도 천 사람이 도망합니다. 자기 힘으로 위험에서 더 빨리 벗어나려 할수록 두려움도 함께 빨라지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모든 장면을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사람의 내적 상태를 보여 주는 말씀의 표상으로 읽습니다.

 

그렇다면 왜 악과 거짓은 이러한 두려움을 만들어 냅니까? AC.389가 이미 그 근본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사람이 체어리티를 스스로 빼앗아 버리면 자신을 주님에게서 분리하고, 주님과 분리되면 자기 자신, 곧 자기의 것에 맡겨집니다. 그 상태에서는 생각이 거짓으로, 의지가 악으로 향합니다. 이제 AC.390은 그 상태가 인간관계에서는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여 줍니다. ‘자기를 보호해 줄 자가 아무도 없다’고 느끼게 되고, 그래서 모든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여기서 ‘자기를 보호해 줄 자가 아무도 없다’는 말은 단순히 사회적으로 친구나 후원자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더 깊게는 주님과의 결합에서 오는 영적 보호와 질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체어리티는 사람을 주님과 결합시키는 동시에 이웃과도 결합시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단순히 자기에게 유익한가 해로운가에 따라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체어리티가 사라지면 관계의 중심에 자기 사랑이 놓이게 되고, 다른 사람도 경쟁자나 위협으로 보이기 쉬워집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을 해칠 수 있는 마음으로 바라보므로 다른 사람도 자신을 그렇게 바라볼 것이라고 두려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마지막에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자들은 모두 이웃을 미워하므로 서로 죽이고자 한다’고 매우 강하게 말합니다. 이것은 악한 상태에 있는 모든 사람이 자연계에서 실제 살인을 계획한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AC.374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스베덴보리는 미움을 살인의 내적 뿌리와 연결합니다. 외적인 법, 명예, 손실에 대한 두려움, 사회적 규범 등의 제약 때문에 손으로 살인을 행하지 않을 수 있지만, 상대가 없어지기를 바라거나 그의 선을 파괴하려 하고 그의 불행을 기뻐하는 미움 속에는 영적인 의미에서 상대를 제거하려는 성질이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AC.390의 ‘두려움’도 모든 자연적인 두려움에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위험한 상황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인간의 정상적인 보호 반응입니다. 질병이나 사고, 전쟁이나 범죄 앞에서 두려움을 느낀다고 해서 그 사람이 악과 거짓 가운데 있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이번 번호에서 말하는 것은 악과 거짓이 지배적인 원리가 되었을 때 생기는 영적인 두려움입니다. 실제로 쫓는 자가 없어도 모두를 적으로 느끼고, 자기 안의 미움과 불신 때문에 다른 사람도 자신을 해칠 것이라고 끊임없이 의심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 점에서 가인의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도 새롭게 보입니다. 문자적으로는 살인을 저지른 가인이 이제 자신도 살해당할까 두려워하는 장면입니다. 속뜻에서는 체어리티를 소멸시키고 주님과의 결합에서 멀어진 신앙이 악과 거짓에 의해 자신에게 남아 있는 생명마저 파괴될 것을 두려워하는 상태입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였고 이제 자신이 죽임당할 것을 두려워합니다. 체어리티를 파괴하는 원리가 결국 자기 자신에게도 죽음의 위협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번호의 목적은 ‘악인은 항상 공포 속에 사니 그것이 벌이다’라고 말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악과 거짓 자체가 왜 평안과 안전을 만들어 낼 수 없는지를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악은 다른 사람과의 결합을 깨뜨리고, 거짓은 현실과 진리에 대한 시야를 왜곡합니다. 그 결과 사람은 점점 자기 자신 안에 갇히고 다른 사람을 신뢰하지 못하며 모든 것을 자기에게 대한 위협으로 해석하게 됩니다. 악과 거짓의 형벌은 외부에서 임의로 덧붙여지는 것만이 아니라 그 자체 안에 이미 파괴와 두려움의 결과를 품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는 결합을 만듭니다. 이것이 모든 자연적 위험을 없애 주거나 신앙인이 어떤 두려움도 느끼지 않게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영적인 중심에서는 차이가 생깁니다. 자기 자신만을 의지하여 모든 사람을 잠재적 위협으로 바라보는 대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이웃과의 관계를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AC.389가 ‘체어리티가 사람을 주님과 결합시킨다’고 한 뒤 AC.390이 두려움을 설명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대조를 보여 줍니다.

 

이번에 인용된 네 성경 구절도 각각 독립적인 새로운 교리를 제시하기 위해 나온 것이 아닙니다. 레위기의 ‘쫓는 자가 없어도 도망함’, 이사야의 ‘두려움에서 도망하다 함정에 빠짐’, 예레미야의 ‘사방에서 임하는 두려움’, 다시 이사야의 ‘한 사람의 꾸짖음에도 천 사람이 도망함’은 모두 하나의 상태를 서로 다른 모습으로 보여 줍니다.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사람은 내적인 결합과 보호를 잃었기 때문에 외부 전체를 위협으로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네 인용은 하나의 증거 묶음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결국 AC.390은 가인의 두려움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설명합니다. 가인을 두렵게 만드는 가장 깊은 원인은 밖에서 그를 찾아다니는 어떤 적이 아니라, 체어리티를 소멸시키고 주님과의 결합에서 멀어진 그의 영적 상태입니다. 악과 거짓은 사람을 다른 사람과 분리하고, 그 분리는 불신과 두려움을 낳으며, 마침내 남아 있는 생명까지 파괴하려 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지점에서 다음 이야기는 예상 밖의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가인이 죽임당할 것을 두려워할 때 주님은 그를 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표’를 주어 보존하십니다. 따라서 AC.390은 ‘가인의 표’ 직전에서 인간의 두려움과 주님의 보존을 극명하게 대비시키는 마지막 준비라고 볼 수 있습니다.

 

 

 

AC.391, 창4:14, ‘악과 거짓은 그 자체 안에 형벌을 품고 있습니다 - 악령들이 서로 두려워하는 이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91악과 거짓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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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9, 창4:14,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 체어리티를 잃으면 왜 악과 거짓에 맡겨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9‘그를 만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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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Behold thou hast cast me out this day from the faces of the ground, and from thy faces shall I be hid; and I shall be a 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everyone that findeth me shall slay me. (창4:14)

 

AC.385

‘지면에서 쫓겨나는 것’(cast out from the faces of the ground)은 교회의 모든 진리에서 분리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하는 것’(hid from thy faces)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모든 선에서 분리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가 된다는 것은 무엇이 진리고 선인지 알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everyone that findeth me shall slay me)는 모든 악과 거짓이 그를 멸망시키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To be “cast out from the faces of the ground” signifies to be separated from all the truth of the church; to be “hid from thy faces” signifies to be separated from all the good of faith of love; to be a “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 is not to know what is true and good; “everyone that findeth me shall slay me” signifies that all evil and falsity would destroy him.

 

해설

AC.385는 창4:14의 네 표현을 차례로 해석하면서 가인이 처한 영적 상태가 얼마나 위태로워졌는지를 보여 줍니다. ‘지면에서 쫓겨나는 것’은 교회의 모든 진리에서 분리되는 것이고,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하는 것’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모든 선에서 분리되는 것이며,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는 것은 무엇이 진리고 선인지 알지 못하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는 모든 악과 거짓이 그를 멸망시키리라는 뜻입니다. 이 네 가지는 서로 떨어진 상응들이 아니라 하나의 영적 붕괴가 진행되는 순서를 보여 줍니다.

 

먼저 ‘지면에서 쫓겨나는 것’은 ‘교회의 모든 진리에서 분리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앞에서 ‘땅’은 문맥에 따라 사람 자신, 교리, 그리고 가인의 경우에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열이 자리 잡은 상태를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지면에서 쫓겨난다’는 표현을 교회의 진리와의 단절로 해석합니다. 가인은 신앙을 높이려 했지만, 체어리티에서 신앙을 분리함으로써 결국 교회의 진리 자체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이것은 앞의 AC.380-382에서 보았던 역설과 같습니다. 진리를 지키기 위해 체어리티를 버렸다고 생각했지만, 그 결과 무엇이 진리인지 알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두 번째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하는 것’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모든 선에서 분리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는 진리의 상실에서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갑니다. 단지 무엇이 참인지 알지 못하는 것만이 아니라, 사랑에서 생명을 받는 신앙의 선과도 분리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얼굴’은 단순한 외적 형상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사랑과 자비, 선의 현존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얼굴에서 숨겨진다는 것은 주님께서 얼굴을 돌리셨다는 뜻으로 이해하기보다, 사람이 악과 거짓 때문에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흘러오는 사랑과 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살펴본 ‘저주’와도 같은 원리입니다. 주님께서 가인을 미워하시고 그에게서 선과 진리를 빼앗으신 것이 아닙니다. 가인이 체어리티를 배척함으로써 스스로 그것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자비는 변하지 않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상태가 변합니다. 그러므로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한다’는 표현은 주님의 부재라기보다 인간 쪽에서 일어난 수용 능력의 상실을 나타낸다고 보는 것이 안전합니다.

 

세 번째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는 AC.380과 AC.382에서 이미 설명했듯이 ‘무엇이 진리고 선인지 알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번 번호에서 이 표현이 다시 나오는 것은 앞의 두 상태가 실제로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교회의 진리에서 분리되고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선에서 분리되면, 결국 선과 진리를 분별할 방향을 잃습니다.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이 많은 종교적 지식을 가지고 있을 수는 있지만, 그 지식을 선을 위해 사용할 생명의 중심을 잃으면 무엇이 실제로 선이며 무엇이 실제로 진리인지 알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번 번호에서 가장 주목할 부분은 마지막입니다.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는 ‘모든 악과 거짓이 그를 멸망시키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문자적으로 읽으면 가인이 다른 사람에게 살해당할 것을 두려워하는 장면이지만, 속뜻에서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의 상태가 악과 거짓에 의해 완전히 파괴될 위험에 놓였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죽인다’는 것은 자연적인 생명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아직 남아 있는 영적인 것을 소멸시키는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AC.384가 중요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자기 악 때문에 어떤 내적 고통을 느끼고 그것을 어느 정도 고백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서 ‘가인에게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AC.385의 ‘모든 악과 거짓이 그를 멸망시킨다’는 말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존재가 다시 멸망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가인의 상태 안에 아직 보존되어 있는 어떤 것이 악과 거짓에 의해 완전히 소멸될 위험을 말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곧이어 가인을 죽이지 못하게 하는 ‘가인의 표’가 왜 필요한지를 이해하는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다만 여기서도 AC.384의 ‘선의 어떤 것’을 곧바로 전문적인 의미의 ‘리메인스’라고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아직 그렇게 부르지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가인에게 선에 속한 무엇인가가 아직 남아 있었으며, 이제 악과 거짓이 그것마저 파괴할 위험이 있었다는 정도입니다. 이후 스베덴보리가 가인의 표와 보존의 의미를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본 뒤 리메인스와의 관계를 판단하는 것이 더 안전합니다.

 

이렇게 보면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라는 가인의 두려움은 단순한 자기보존의 공포 이상으로 읽힙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뒤에도 신앙에 속한 어떤 지식과 선에 반응할 가능성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상태가 악과 거짓에 완전히 삼켜지면 그것마저 없어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섭리는 단지 완전한 사람이나 온전한 교회만을 보존하시는 방식으로 역사하지 않습니다. 심각하게 훼손된 상태에서도 아직 보존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지키시고, 궁극적으로 구원을 위해 사용하십니다.

 

여기서 앞으로 나올 ‘가인의 표’의 의미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문자적으로는 살인자인 가인을 왜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는지가 매우 낯설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속뜻에서 가인은 한 개인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교리와 그것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상태를 표상합니다. 그 상태가 잘못되었다고 해서 거기에 남아 있는 신앙에 속한 모든 것까지 즉시 소멸되도록 허용하시는 것이 주님의 목적은 아닙니다. 악과 거짓 가운데에서도 아직 보존될 수 있는 것을 보존하시는 것이 주님의 섭리입니다.

 

이 점은 ‘악과 거짓이 그를 멸망시킨다’는 표현을 이해할 때도 중요합니다. 악과 거짓은 주님에게서 오는 어떤 독립된 형벌의 도구가 아닙니다. 악은 선을 파괴하고 거짓은 진리를 왜곡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그것들을 받아들이고 확증할수록 자신 안에 남아 있는 선과 진리를 더욱 밀어냅니다. 따라서 악과 거짓에 의한 멸망은 외부에서 임의적으로 부과되는 형벌이라기보다 사람이 악과 거짓을 받아들임으로써 영적 생명을 스스로 파괴하는 과정입니다.

 

AC.385의 네 표현을 다시 연결하면 흐름이 매우 분명합니다. 먼저 교회의 진리에서 분리됩니다. 이어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선에서 분리됩니다. 그러자 무엇이 진리고 선인지 알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악과 거짓이 아직 남아 있는 것마저 완전히 파괴할 위험에 이릅니다. 이것은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가 단순한 교리상의 작은 차이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선과 진리는 서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그 결합을 깨뜨리면 결국 둘 모두를 잃어버리는 방향으로 진행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가장 위태로운 지점에서 창4의 이야기는 뜻밖의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가인이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라고 말한 뒤 주님은 그를 즉시 멸하도록 내버려 두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에게 표를 주어 죽임을 당하지 않게 하십니다. 따라서 AC.385는 단지 가인의 멸망을 선언하는 번호가 아니라, 왜 그에게 보존이 필요했는지를 보여 주는 번호이기도 합니다. 가인에게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고, 모든 악과 거짓이 그것을 완전히 파괴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어지는 ‘가인의 표’에서는 잘못된 상태를 승인하지 않으면서도 그 안에 남아 있는 것을 보존하시는 주님의 섭리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AC.386, 창4:14, ‘지면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 교회의 진리에서 분리되는 것’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6‘지면에서 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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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4, 창4:13, ‘가인에게도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습니다 - 라멕에 이르러 소멸되는 체어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창4:13) AC.384이로부터 가인에게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후 체어리티의 모든 선이 소멸되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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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창4:13)

 

AC.384

이로부터 가인에게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후 체어리티의 모든 선이 소멸되었다는 것은 라멕에 관하여 말한 것에서 분명합니다(창4:19,23-24). Hence it appears that something of good still remained in Cain; but that all the good of charity afterwards perished is evident from what is said of Lamech (verses 19, 23–24).

 

19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24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창4:19, 23-24)

 

해설

AC.384는 바로 앞 AC.383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짧은 설명입니다. AC.383에서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라는 말을 어떤 내적 고통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악 가운데 있음을 어느 정도 고백한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사실에서 ‘가인에게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다’고 결론짓습니다. 이것은 가인을 선한 사람으로 평가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미 가인은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체어리티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며, 마침내 ‘아벨을 죽이는 것’, 곧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럼에도 자기 악 때문에 내적인 고통을 느끼고 어느 정도 그것을 인정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 안의 선에 속한 모든 것이 아직 완전히 사라진 상태는 아니었음을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선의 어떤 것’이라는 제한된 표현을 그대로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에게 ‘선이 있었다’고 일반적으로 말하지 않고 ‘something of good still remained’라고 합니다. 즉 악이 크게 지배하고 있었지만 선에 반응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아직 남아 있었다는 뜻입니다. AC.383에서 보았듯이 가인은 자기 상태 때문에 내적 고통을 느꼈고, 자기가 악 가운데 있음을 어느 정도 고백했습니다. 만일 선에 속한 것이 완전히 소멸되었다면 그러한 내적 고통과 인정조차 일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바로 그 작은 반응 가능성이 이번 번호에서 말하는 ‘아직 남아 있던 선의 어떤 것’입니다.

 

이 점은 가인에 관한 지금까지의 설명을 지나치게 단순화하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가인은 ‘악’, 아벨은 ‘선’이라는 식으로 두 사람을 단순한 도덕적 인물 유형으로 나누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해석은 아닙니다. 가인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교리와 그것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상태를 표상합니다. 그 상태가 매우 심각하게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선의 가능성이 한순간에 완전히 없어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가 시작되고,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하고,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며, 그 결과 선과 진리의 방향을 잃어 가는 과정 가운데에서도 아직 선의 어떤 잔여가 남아 있었던 단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AC.384의 후반부는 곧바로 더 어두운 방향을 예고합니다. ‘이후 체어리티의 모든 선이 소멸되었다는 것은 라멕에 관하여 말한 것에서 분명하다’고 합니다. 즉 가인에게 남아 있던 선의 어떤 것이 계속 보존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가인으로 시작된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는 후대로 내려가면서 더욱 심화되었고, 마침내 라멕으로 표상되는 상태에서는 체어리티의 선이 완전히 소멸됩니다. 그러므로 AC.384는 가인의 상태를 설명하는 동시에 창4 후반부의 라멕을 미리 바라보게 하는 연결 문장입니다.

 

스베덴보리가 특별히 창4:19,23-24를 가리키는 것도 이 흐름 때문입니다. 창4:19에서는 라멕이 두 아내를 취하는 일이 나오고, 23-24절에서는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그리고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라는 라멕의 말이 나옵니다. 이 구절들의 구체적인 속뜻은 해당 번호에서 자세히 살펴보아야 하므로 지금 미리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AC.384에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 자신이 이 구절들을 ‘체어리티의 모든 선이 소멸된’ 후대의 상태를 보여 주는 근거로 미리 지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가인에서 라멕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단순히 악한 개인들의 계보가 아닙니다. 하나의 영적 원리가 세대를 거치며 어디까지 진행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교리적 계보입니다. 처음에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구별이 있었고, 그 구별이 분리가 되었으며,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 위에 서려고 했고,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습니다. 그러나 가인의 단계에서는 자기 악에 대한 어떤 내적 고통과 인정이 가능할 만큼 선에 속한 무엇인가가 아직 남아 있었습니다. 그 뒤 그 원리가 더욱 악화되어 라멕에 이르면 그것마저 소멸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이것은 앞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구별했던 ‘체어리티의 소멸’이라는 표현을 좀 더 세밀하게 읽게 합니다. 앞 번호들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것은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AC.384에서는 다시 ‘가인에게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두 진술은 모순되지 않습니다. 하나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교리에서 체어리티가 신앙의 본질과 주도 원리로서 배척되고 소멸되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상태에 속한 사람들 안에서 선에 속한 모든 흔적과 반응 가능성이 그 순간 완전히 없어졌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교리적 원리의 소멸과 사람 안에 남아 있는 선의 어떤 것을 구별하여 보고 있습니다.

 

이 구별은 앞으로 ‘가인의 표’를 이해할 때도 중요해질 것입니다. 만일 가인 안에 선에 속한 모든 것이 이미 완전히 소멸되어 아무것도 보존할 것이 없었다면, 왜 주님께서 가인을 즉시 멸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표를 주어 아무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는가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AC.384는 아직 그 답을 본격적으로 설명하지 않지만, 적어도 가인의 상태 안에 아직 보존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었다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합니다. 그러므로 이후의 ‘가인의 표’는 단순히 악인을 보호하시는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 아니라, 완전히 소멸되지 않은 것을 보존하시는 주님의 섭리라는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선의 어떤 것’을 곧바로 ‘리메인스’라고 단정하는 것은 아직 조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번 번호에서 ‘remains’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단지 ‘something of good still remained’라고 말합니다. 더 넓은 AC의 가르침과 연결하여 리메인스와의 관계를 생각해 볼 수는 있지만, AC.384 자체가 이것을 전문적 의미의 리메인스라고 명시한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은 원문이 말하는 만큼, 곧 ‘선에 속한 무엇인가가 아직 남아 있었다’고 두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목회적으로도 이 짧은 번호에는 중요한 통찰이 있습니다. 사람의 상태가 크게 무너져 있다고 해서 우리가 그 사람 안에 선에 반응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쉽게 단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을 근거로 다른 사람의 내면을 우리가 판정할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가인조차 자기 악 때문에 어떤 내적 고통을 느끼고 그것을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사람의 외적인 상태만 보고 그의 내면에 남아 있는 모든 가능성을 우리가 판단할 수 없음을 생각하게 합니다. 사람의 내면을 아시고 남아 있는 것을 보존하실 수 있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결국 AC.384는 가인의 이야기에 매우 중요한 미세한 차이를 넣습니다. 가인은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이르렀지만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악을 어느 정도 인정하게 하는 내적 고통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그 상태가 계속 악화되면서 라멕에 이르러서는 체어리티의 모든 선이 소멸됩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는 가인의 타락을 단번에 완성된 상태로 보지 않고 하나의 진행 과정으로 보게 하며, 동시에 아직 남아 있는 것을 보존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이후 ‘가인의 표’와 연결하여 바라볼 준비를 하게 합니다.

 

 

 

AC.385, 창4:14,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 남아 있는 것을 위협하는 악과 거짓’ (A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Behold thou hast cast me out this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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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3, 창4:13,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 악을 인정하게 한 내적 고통과 절망’ (AC.3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And Cain said unto Jehovah, Mine iniquity is greater than can be taken away. (창4:13) AC.383‘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Cain said unto Jehovah)는 어떤 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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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8 심화

2. 주님께서는 왜 ‘가인의 분리’를 처음부터 막지 않으셨을까?

 

AC.338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질문이 있습니다. 태고교회 안에서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따로 떼어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보기 시작했을 때, 주님께서는 이미 그 분리가 장차 어디까지 갈 것인지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실제로 창4의 흐름을 따라가면 신앙은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고, 마침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곧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상태에까지 이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왜 그 분리가 처음 나타났을 때 강제로라도 막지 않으셨을까요?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주님께서 그것을 ‘방치’하신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섭리 이해에서 주님은 인간이 악과 거짓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무관심하게 바라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선으로 이끄시고 악을 억제하시며, 사람이 돌이킬 수 있도록 진리를 공급하십니다. 다만 그 모든 일을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지 않는 방식으로 행하십니다.

 

따라서 ‘왜 막지 않으셨는가?’라는 질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를 없애는 방식으로 막지 않으셨다’고 대답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인간이 주님과 결합하려면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자유롭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강제로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사람의 행동을 외적으로 통제할 수는 있어도 그 사람으로 하여금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만일 인간이 잘못된 선택을 전혀 할 수 없도록 의지와 사고가 강제된다면, 겉으로는 질서 있는 행동이 나타날지 몰라도 자유로운 사랑의 결합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허용’의 원리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악을 허용하신다는 것은 악을 원하시거나 승인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는 가운데 그 자유가 잘못 사용되는 것까지 허용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허용’과 ‘방치’는 전혀 다릅니다. 방치는 인간을 내버려 두는 것이지만, 주님의 허용 안에는 끊임없는 억제와 인도와 보존이 함께 있습니다. 사람이 악으로 기울 때에도 주님께서는 그 악이 가능한 한 더 멀리 진행되지 않도록 억제하시고, 남아 있는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며, 다시 돌아설 수 있는 길을 계속 마련하십니다. 창4의 가인 이야기에서도 주님께서는 가만히 계시지 않습니다. 가인이 분하여 안색이 변했을 때 주님께서는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가인이 더 멀리 나아가기 전에 다시 선으로 돌아오도록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AC.328에 따르면 체어리티는 신앙이 자신을 주된 것으로 삼아 체어리티보다 높아지지만 않는다면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은 ‘신앙을 버려라’는 뜻이 아니라, 신앙이 다시 선과 체어리티와 올바른 관계 안에 놓이도록 부르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마지막 선택을 강제로 빼앗지 않으십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지 못하도록 그의 내면을 강제로 조종하시거나 다른 생각밖에는 할 수 없도록 만드시지 않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자유가 거듭남과 결합에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선을 보여 주시고 진리로 깨우치시며, 악을 억제하시고 내적으로 경고하시며, 돌아올 길을 열어 두십니다. 그러나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마지막 자리까지 대신 차지하지는 않으십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이 자유를 잘못 사용한다고 해서 주님의 섭리가 실패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가인은 결국 아벨을 죽이고, 속뜻에서는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킵니다. 인간 편에서 보면 매우 깊은 실패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뒤 주님께서는 가인에게 표를 주십니다. AC.330은 장차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질 것이기 때문에 신앙에 속한 것이 보존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보존된 것은 분리된 신앙의 잘못된 상태 자체가 승인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장차 선한 목적에 사용하실 수 있는 신앙에 속한 것을 보존하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섭리가 인간의 방식과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 줍니다. 우리는 어떤 것이 잘못되면 그것을 통째로 없애 버리고 싶어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인간이 왜곡한 것 가운데에서도 장차 구원의 질서 안에서 사용될 수 있는 것을 보존하십니다. 가인으로 표상되는 분리된 신앙은 잘못되었지만 신앙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그것을 사랑에서 떼어 냈지만 주님께서는 신앙이라는 수단 자체를 버리지 않으시고, 이후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될 수 있도록 보존하십니다.

 

이 점은 바로 뒤의 셋과 에노스에서도 보게 됩니다. AC.335에서는 주님께서 새로운 신앙을 주시고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심으셨다고 합니다. 따라서 인간이 신앙을 잘못 사용했다고 해서 주님께서 신앙 자체를 폐기하신 것이 아닙니다. 더 넓은 이후의 AC 문맥에서는 태고교회의 종말 가운데에서도 주님께서 리메인스를 보존하시고, 마침내 노아로 표상되는 새로운 교회가 일어나도록 준비하시는 흐름도 나타납니다. 다만 이것은 AC.338 한 번호가 직접 말하는 내용이라기보다 이후 AC에서 더 넓게 전개되는 섭리의 맥락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실패와 주님의 섭리는 동시에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은 자유를 오용하여 사랑과 신앙의 질서를 깨뜨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자유를 빼앗지 않으면서도 가능한 한 악을 억제하시고,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며, 새로운 회복의 길을 준비하십니다.

 

‘왜 주님께서는 가인의 분리를 처음부터 막지 않으셨는가?’라는 질문은 결국 ‘왜 인간에게 잘못 선택할 수 있는 자유까지 허용하셨는가?’라는 더 깊은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자유가 주님과의 결합에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다만 ‘자유롭게 사랑하려면 반드시 실제로 악을 행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자유란 악을 행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라는 뜻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인간이 강제가 아니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악을 선택할 가능성은 자유의 오용에서 따라오는 것이지 주님께서 원하시는 목적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의 섭리는 인간이 한 번도 잘못 선택하지 못하도록 모든 길을 차단하는 방식으로 역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유와 이성을 보존하면서 선으로 이끄시고, 악을 억제하시며, 잘못 선택했을 때에도 가능한 한 회개의 길을 열어 두십니다. 이것이 ‘허용’과 ‘방치’의 차이입니다. 방치는 인간을 포기하는 것이지만, 섭리는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면서도 한순간도 구원의 목적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이 가인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자유를 억지로 없애지는 않으시지만, 동시에 그가 다시 선으로 돌아설 길도 계속 마련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섭리를 ‘왜 더 강제로 개입하지 않으셨는가?’라는 기준으로만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가장 깊은 섭리는 때로 인간의 자유를 유지하면서 안에서 선을 향해 이끄시고, 인간의 실패 가운데에서도 남아 있는 것을 보존하여 다시 구원의 질서 안에서 사용하시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가인의 이야기는 바로 그것을 보여 줍니다. 인간은 사랑과 신앙을 분리할 수 있지만, 주님께서는 그 분리 자체를 선이라고 하시지 않으면서도 신앙에 속한 것을 보존하시고, 다시 체어리티와 결합될 길을 마련하십니다. 인간의 실패는 실제이지만, 그 실패보다 주님의 섭리가 더 깊습니다.

 

 

 

AC.338, 창4: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AC.338-340)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v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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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8 심화 1, ‘가인’은 처음부터 ‘사랑에서 완전히 분리된 신앙’이었나?

AC.338 심화1. ‘가인’은 처음부터 ‘사랑에서 완전히 분리된 신앙’이었나? AC.338을 읽다 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질문이 생깁니다. 앞의 개요에서 스베덴보리는 가인을 분명히 ‘사랑에서 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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