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02에서 스베덴보리는 ‘선악을알게하는나무’를 ‘감각적인것에서나오는신앙,곧단순한기억지식에서나오는신앙’이라고 설명합니다. 처음 읽으면 상당히 낯선 해석입니다. 성경 본문에는 ‘선악을알게하는나무’라고 되어 있는데, 왜 이것을 감각과 기억지식에서 비롯되는 ‘신앙’의 문제로 해석하는 것일까요? 더구나 이렇게 읽으면 감각이나 지식 자체가 위험하거나 악하다는 뜻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문맥은 그렇게 읽는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앞에서 스베덴보리는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을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AC.99에서는 주님께서 천적 인간의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드신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문제는 감각과 기억지식이 ‘있느냐없느냐’가 아닙니다. 그것들이 생명의 질서 안에서 어디에 놓이며, 무엇이 무엇의 근원이 되느냐가 문제입니다.
이 점에서 AC.102의 두 나무를 함께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생명나무’는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을 뜻합니다. 여기서는 사랑이 먼저이고 신앙이 거기서 나옵니다. 그리고 AC.105에 이르면 이 생명나무를 ‘주님의자비’라고까지 설명합니다. 모든 사랑과 신앙과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생명나무가 나타내는 질서에서는 신앙의 생명과 근원이 인간의 감각이나 지식이 아니라 주님께 있습니다.
반면 ‘선악을알게하는나무’에서는 신앙이 감각적인 것과 단순한 기억지식에서 ‘나옵니다’. 이 차이가 핵심입니다. 사람이 보고 듣고 배우고 기억한 것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들을 출발점으로 삼아 신앙의 진실 여부를 스스로 세우려는 질서가 문제로 제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감각으로확인할수있는가?’, ‘내가가진지식으로납득할수있는가?’가 신앙의 근원을 결정하는 자리에 놓이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그러므로생각하지말라’, ‘이성을사용하지말라’, ‘증거를살피지말라’는 뜻으로 확대해서도 안 됩니다. AC.102-106은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은 계속 인간 안에 있으며 주님의 유입을 받습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 섬기는 자리에 있는가, 아니면 그것들 자체가 참과 선을 판정하는 궁극적인 근원이 되는가 하는 질서의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이 해석은 반지성주의라기보다 신앙의 생명이 어디에서 시작되는가에 관한 설명으로 읽는 것이 적절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스베덴보리가 ‘생명나무’와 ‘선악을알게하는나무’를 서로 다른 신앙의 질서와 연결하는지 조금씩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사랑에서 신앙이 나오고 그 사랑과 신앙의 근원이 주님께 있는 질서이며, 다른 하나는 감각과 기억지식에서 신앙을 끌어내는 질서입니다. 결국 두 나무의 차이는 단순히 ‘신앙대지식’이 아니라, 신앙이 어디에서 생명을 얻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다만 AC.106은 ‘지식의나무’, 곧 감각적인 것과 단순한 기억지식에서 비롯되는 신앙의 본성이 ‘뒤에이어지는글들에서밝혀질것’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그 의미를 모두 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단계에서 분명히 해 둘 것은 감각과 기억지식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스베덴보리가 문제 삼는 것은 그것들로부터 신앙을 만들어 내려고 하는 생명의 질서라는 점입니다. 왜 그것이 인간의 타락과 연결되는지는 이어지는 설명을 따라가면서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AC.102심화1)
AC.31에서 스베덴보리는 바로와 애굽에 관하여 ‘단지감각과단지기억지식의원리’(theprincipleofmeresenseandofmereknowledge)를 뜻하며, 여기서는 그것들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되었음을 말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표현을 읽을 때 먼저 조심해야 할 것은 감각이나 기억 지식 자체를 나쁜 것으로 이해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은 감각을 통하여 자연세계를 접하고, 기억 지식을 통하여 배우고 생각합니다. 앞의 AC.24-29에서도 기억 지식은 거듭남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다루어졌습니다. 문제는 감각과 기억 지식이 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만’을 최종 기준으로 삼는 데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눈으로확인되지않는것은믿을수없다’고 하면서 영적인 모든 것을 감각적 증거 아래에 두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 천국, 영혼, 주님의 섭리와 같은 것을 오직 눈에 보이는 결과가 있는지 없는지로만 판단하는 것입니다. 질문하고 검토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자연적 감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만을 실재의 전부로 정하고, 그 범위를 넘어서는 것은 처음부터 존재할 수 없다고 판단하는 태도입니다. 감각적인 것이 영적인 것을 섬기는 자리가 아니라 영적인 것의 재판관이 될 때 질서가 뒤집힙니다.
기억 지식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과 신학과 교리에 관한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한 지식 자체는 귀중하며, 주님께서 거듭남 가운데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내가알고있는것만참이다’, ‘내이성이납득하지못하면주님의말씀도받아들일수없다’는 식으로 기억 지식을 가장 높은 자리에 놓으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지식이 사랑과 신앙을 섬기는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사랑과 신앙의 가능 여부를 판정하는 지배 원리가 되는 것입니다.
실제 삶에서는 이런 모습이 아주 미묘하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교리에는 매우 정확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대할 때에는 사랑과 자비가 사라질 수 있고, 말씀의 구절을 많이 알면서도 그 지식을 상대방을 판단하고 이기는 데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식이많아서사랑이사라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같은 지식이라도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 쓰이면 매우 유익합니다. 문제는 지식이 자기 지성에 대한 신뢰와 결합하여 사랑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갈 때입니다.
감각적인 사고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조 세계를 자세히 관찰하고 과학적으로 탐구하는 것 자체는 신앙의 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연의 질서와 아름다움을 통하여 주님의 지혜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연적 사실만을 전부라고 여기고 영적인 원인이나 목적 자체를 배제할 때, 감각은 더 이상 섬기는 도구가 아니라 지배하는 원리가 됩니다. AC.31에서 경고하는 것은 바로 이런 질서의 전도입니다.
그러므로 ‘감각과단지기억지식에의해사랑과신앙이소멸된다’는 말을 ‘과학이나지식이신앙을파괴한다’는 뜻으로 읽으면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지식과 이해를 거듭남의 중요한 단계로 봅니다. 오히려 사람의 감각과 지식이 자기보다 높은 것, 곧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섬길 때에는 그것들이 거듭남에 매우 유용하게 사용됩니다.
AC.31의 표현은 결국 ‘무엇이무엇을다스리는가?’의 문제입니다. 사랑과 신앙이 중심이 되고 감각과 기억 지식이 그것들을 섬기면 질서가 바르게 서지만, 감각과 기억 지식만이 최종 기준이 되어 사랑과 신앙을 재단하기 시작하면 영적 빛은 점차 가려질 수 있습니다. 에스겔에서 해와 달과 별이 어두워지는 모습은 바로 이런 상태를 나타냅니다. 자연적인 것 자체가 악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영적인 것 위에 올라가 지배할 때 사랑과 신앙의 빛이 소멸되기 때문입니다. (AC.31심화1)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7)
AC.128
세상적이고육체적인인간은마음속으로이렇게말합니다.‘내가볼수있도록감각적인것들을통하여,또는내가이해할수있도록기억지식을통하여신앙과신앙에속한모든것에관하여가르침을받지않는다면,나는믿지않겠다.’그리고그는자연적인것들이영적인것들과모순될수없다는생각으로자기입장을확증합니다.이와같이그는천적이고신적인것에관하여감각적인것들로부터가르침을받고자합니다.그러나이것은낙타가바늘귀로들어가는것만큼이나불가능합니다.그가이러한수단으로지혜로워지기를원하면원할수록그는더욱자기눈을멀게하며,마침내아무것도믿지않게되어영적인것이존재한다는것조차,영원한생명이있다는것조차믿지않게됩니다.이것은그가전제로삼은원리에서비롯됩니다.이것이바로‘선악을알게하는나무의열매를먹는것’(eatofthetreeoftheknowledgeofgoodandevil)이며,누구든지그것을더많이먹을수록더욱죽은상태가됩니다. 그러나세상으로부터가아니라주님으로부터지혜로워지기를원하는사람은마음속으로주님을믿어야한다고,곧주님께서말씀에서하신것들을믿어야한다고말합니다.그것들이진리이기때문입니다.그리고그는이원리에따라자신의생각을질서지웁니다.그는이성에속한것들과기억지식과감각적인것들과자연적인것들을통하여자신을확증하며,확증하지않는것들은제쳐둡니다. The worldly and corporeal man says in his heart, If I am not instructed concerning the faith, and everything relating to it, by means of the things of sense, so that I may see, or by means of those of the memory[scientifica],so that I may understand, I will not believe; and he confirms himself in this by the consideration that natural things cannot be contrary to spiritual. Thus he is desirous of being instructed from things of sense in what is celestial and Divine, which is as impossible as it is for a camel to go through the eye of a needle; for the more he desires to grow wise by such means, the more he blinds himself, till at length he believes nothing, not even that there is anything spiritual, or that there is eternal life. This comes from the principle which he assumes. And this is to “eatofthetreeoftheknowledgeofgoodandevil,” of which the more anyone eats, the more dead he becomes. But he who would be wise from the Lord, and not from the world, says in his heart that the Lord must be believed, that is, the things which the Lord has spoken in the Word, because they are truths; and according to this principle he regulates his thoughts. He confirms himself by things of reason, of knowledge, of the senses, and of nature[per rationalia,scientifica,sensualia et naturalia],and those which are not confirmatory he casts aside.
해설
AC.128은 앞에서 설명한 두 가지 질서를 각각 한 사람의 마음속 말처럼 펼쳐 보여 줍니다.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은 ‘내가감각으로볼수있고기억지식으로이해할수있어야믿겠다’고 말합니다. 반대로 주님으로부터 지혜로워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주님께서 말씀에서 하신 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먼저 그것을 믿고, 그 원리에 따라 자신의 생각을 질서 지웁니다. 따라서 두 사람의 차이는 한쪽은 생각하고 다른 쪽은 생각하지 않는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무엇을 출발점으로 삼아 생각하느냐가 다릅니다.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의 출발점은 감각과 기억지식입니다. 그는 천적이고 신적인 것조차 먼저 자연적인 차원에서 확인되어야 받아들이겠다고 합니다. ‘자연적인것들이영적인것들과모순될수없다’는 생각 자체만 떼어 놓으면 그럴듯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자연적인 것을 영적인 것의 심판자로 세운다는 데 있습니다. 보이지 않으면 믿지 않고, 자기가 가진 기억지식으로 이해되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원리를 먼저 세웠기 때문입니다. 이때 가장 바깥에 있어야 할 것이 가장 위에 올라가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것을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만큼 불가능하다고 표현한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감각적인 것은 자연계에 나타나는 것을 받아들이고, 기억지식은 그렇게 받아들인 것들을 기억에 간직합니다. 그것들은 자기 차원에서 반드시 필요한 기능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천적이고 신적인 것의 근원을 발견하여 그 진위를 판정하려 한다면, 아래에 있는 것으로 위에 있는 것의 근원을 만들어 내려는 셈이 됩니다. AC.121에서 제시된 천적 질서는 정반대였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지혜가 나오고, 지혜를 통하여 지성이, 지성을 통하여 이성이 나오며, 이성을 통하여 기억에 속한 앎들이 생명을 얻습니다.
따라서 ‘선악을알게하는나무의열매를먹는것’은 단순히 지식을 얻는 행위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선과 진리를 주님으로부터 받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알아내려는 질서의 전도를 의미합니다. 그런 까닭에 더 많이 먹을수록 더 많은 정보를 얻어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죽은상태’가 됩니다. 사람이 감각과 기억지식을 최종 기준으로 삼을수록 영적인 것을 받아들이는 내적인 길이 닫히고, 마침내 영적인 실재와 영원한 생명 자체도 믿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AC.128의 후반부는 이 대목을 반지성주의로 읽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매우 분명하게 합니다. 주님으로부터 지혜로워지기를 원하는 사람 역시 이성과 기억지식과 감각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을 사용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을 버리라고 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을 ‘통하여자신을확증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금지되는 것은 이성적 사고나 지식의 사용이 아니라 그것들을 신앙의 최초 원리로 삼는 것입니다. 동일한 이성과 기억지식도 어디에 놓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역할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 ‘주님께서말씀에서하신것들을믿는다’는 것도 생각을 중단하라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어지는 문장이 그 오해를 막습니다. 그는 ‘이원리에따라자신의생각을질서지웁니다.’ 즉 말씀의 진리를 받아들인 뒤 생각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진리를 중심으로 자신의 사고 전체를 질서 있게 세웁니다. 그리고 이성에 속한 것들과 기억지식과 감각적인 것들과 자연적인 것들 가운데 그 진리를 확증하는 것들을 사용합니다. 신앙과 사고가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가 사고의 질서를 바로잡는 것입니다.
마지막의 ‘확증하지않는것들은제쳐둔다’는 표현은 문맥 안에서 신중하게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자신이 믿고 싶은 것과 맞지 않는 사실은 무조건 무시해도 된다는 일반적인 지적 태도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스베덴보리가 다루는 것은 천적이고 신적인 것을 무엇으로부터 배우며 무엇을 최초 원리로 삼을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 문맥에서 핵심은 자연적인 지식이 신적인 진리 위에 서서 그것을 재판하지 못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이 문장을 현대적인 의미의 사실 회피나 무비판적인 확증 편향을 정당화하는 말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결국 AC.128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문제를 ‘지식대무지’의 대립이 아니라 ‘질서대질서의전도’로 보여 줍니다.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인간도 이성과 기억지식과 감각을 사용하고, 주님으로부터 지혜로워지는 사람도 그것들을 사용합니다. 차이는 그것들이 주인의 자리에 있는가, 아니면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를 섬기는 자리에 있는가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시작하여 이성과 기억지식과 감각적인 것에까지 내려가는 것이 생명의 질서라면, 감각과 기억지식에서 시작하여 그것으로 신적인 것을 판단하려는 것은 그 질서를 거꾸로 세우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선악을알게하는나무의열매를먹는것’의 핵심입니다. (AC.128)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7)
AC.127
감각적인것들과기억지식을통하여신앙의신비를탐구하려는욕망은다음장에서다루게될태고교회후손들의타락의원인이었을뿐아니라,모든교회의타락의원인이기도합니다.여기에서거짓들뿐아니라삶의악들도나오기때문입니다. A desire to investigate the mysteries of faith by means of the things of sense and of the memory was not only the cause of the fall of the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as treated of in the following chapter,but it is also the cause of the fall of every church;for hence come not only falsities,but also evils of life.
해설
AC.127은 바로 앞의 AC.126에서 제시한 경고가 얼마나 중대한 것인지를 밝힙니다.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 신앙의 신비를 탐구하려는 욕망은 단순한 지적 방법의 잘못이 아니라 태고교회 후손들의 타락을 일으킨 원인이었으며, 더 나아가 모든 교회의 타락을 일으키는 원리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제 논점은 한 개인이 선과 진리를 어떻게 아느냐 하는 데서 교회 전체가 어떻게 그 본래의 질서를 잃게 되는가 하는 문제로 확대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다시 한번 감각과 기억지식 자체의 위험성이 아닙니다. AC.118-121과 AC.125에서 이미 본 것처럼 감각과 기억에 속한 것들은 인간의 정상적인 질서 안에 있으며, 천적 인간도 기억에 간직된 것을 숙고했습니다. 문제는 ‘신앙의신비를탐구하려는욕망’이 감각과 기억지식을 출발점으로 삼는 데 있습니다. 즉 주님으로부터 주어진 선과 진리를 받아 그 빛 안에서 자연적인 것들을 이해하는 대신, 자연적인 감각과 이미 알고 있는 기억지식을 기준으로 삼아 신앙의 신비가 참인지 아닌지를 판정하려는 것입니다.
AC.126에서는 이렇게 질서가 뒤집힐 때 ‘신앙의천적인것’이 파괴된다고 했습니다. AC.127은 그 결과가 왜 교회의 타락으로까지 이어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신앙이 더 이상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받아들이는 질서 안에 있지 않고 인간 자신의 감각과 지식의 판단 아래 놓이게 되면, 인간은 자신이 이해하고 확인할 수 있는 것만을 참이라고 여기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신앙의 근원이 주님에게서 인간 자신으로 옮겨지고, 앞의 AC.122-124에서 반복해서 강조한 ‘모든것이주님의것’이라는 천적 질서도 무너지게 됩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그 결과로 ‘거짓들’뿐 아니라 ‘삶의악들’까지 나온다는 설명입니다. 만일 문제가 단순히 잘못된 추론에 그친다면 이것은 지성의 오류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의 질서는 삶의 질서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과 세상에서 출발하여 선과 진리를 판단하기 시작하면, 자기에게서 나온 욕망과 판단을 정당화하는 거짓도 함께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잘못된 앎의 질서는 결국 잘못된 삶의 질서로 이어집니다.
이 점은 왜 스베덴보리가 단순히 ‘탐구’라고 하지 않고 ‘탐구하려는욕망’이라고 말하는지도 생각하게 합니다. 문제는 질문을 하거나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 자체가 아닙니다. 지금까지 AC자체가 수많은 성경 구절을 살피고 서로 연결하면서 선과 진리를 이해하도록 이끌어 왔습니다. 여기서 경계하는 것은 인간 자신의 감각과 기억지식을 최종 권위로 삼아 신앙의 신비를 자기 힘으로 파헤치고 판정하려는 내적인 성향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신앙에관해서는질문하거나연구해서는안된다’는 뜻으로 읽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말하는 핵심을 놓치는 것입니다.
또한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태고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명시합니다. 태고교회 후손들의 타락은 다음 장, 곧 창3의 속뜻에서 구체적으로 다루어지겠지만, 여기서는 미리 그 원리를 밝히면서 그것이 ‘모든교회’의 타락 원인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창3의 뱀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타락의 이야기도 단지 아주 먼 과거의 한 사건으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는 방향이 이미 제시됩니다. 주님에게서 받아야 할 것을 자기 자신과 세상에서 찾으려는 질서의 전도는 어느 시대의 교회에서도 반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AC.127의 핵심은 지성과 연구를 포기하라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무엇이 우리의 지성과 연구를 지배하는가를 묻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위에 있고 이성과 기억지식이 그 아래에서 쓰일 때에는 그것들이 생명을 받습니다. 그러나 감각과 기억지식이 위에 올라가 신앙의 신비를 심판하기 시작하면 질서가 뒤집히며, 그 결과는 거짓된 생각에만 머물지 않고 삶의 악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질서의 전도가 태고교회 후손들의 타락을 설명하는 열쇠이며, 동시에 모든 교회가 경계해야 할 타락의 원리입니다. (AC.12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Bu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thou shalt not eat of it; for in the day that thou eatest thereof, dying thou shalt die.(창2:17)
AC.126
이말씀을방금설명한말씀과함께보면,주님으로부터오는모든퍼셉션을통하여무엇이참되고선한지를아는것은허락되지만,자기자신과세상으로부터그것을아는것은허락되지않는다는것을의미합니다.다시말하면,우리는감각적인것들과기억지식을통하여신앙의신비를탐구해서는안됩니다.그렇게하면신앙의천적인것이파괴되기때문입니다. These words,taken together with those just explained,signify that it is allowable to become acquainted with what is true and good by means of every perception derived from the Lord,but not from self and the world;that is,we are not to inquire into the mysteries of faith by means of the things of sense and of the memory[per sensualia et scientifica],for in this case the celestial of faith is destroyed.
해설
AC.126은 창2:16의 ‘동산각종나무의열매는네가임의로먹되’라는 허락과 이어지는 창2:17의 금지를 하나의 질서 안에서 이해하게 합니다. AC.125에서는 ‘모든나무의열매를먹는것’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을 통하여 무엇이 선하고 참된지를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AC.126은 그 반대편을 밝힙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을 통하여 선과 진리를 아는 것은 허락되지만,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그것을 알아내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아느냐’보다 ‘어디에서아느냐’입니다. 천적 인간에게 선과 진리를 아는 것 자체가 금지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앎의 근원을 주님으로부터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 바꾸는 데 있습니다. AC.123-124에서도 천적 인간은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퍼셉션하며, 지혜와 지성과 이성과 지식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AC.126의 금지는 지식을 제한하는 금지가 아니라 생명의 근원과 질서를 뒤집지 말라는 금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감각적인것들과기억지식을통하여신앙의신비를탐구해서는안된다’고 표현합니다. 이 문장은 AC.80의 설명을 거의 그대로 다시 불러옵니다. 그러나 여기까지 읽어온 독자는 이제 이것을 감각이나 기억지식 자체에 대한 부정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는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AC.118에서는 기억지식을 천적·영적 인간의 질서에서 최하위 또는 경계라고 했고, AC.120에서는 감각적인 것과 기억지식이 지성과 지혜의 경계를 이룬다고 했으며, AC.121에서는 이성을 통하여 기억에 속한 앎들이 생명을 얻는 것이 천적 질서라고 했습니다. AC.125에서는 태고교회 사람들조차 기억에 간직된 것을 숙고했다고 명시했습니다.
그러므로 ‘감각적인것들과기억지식을통하여’ 탐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그것들을 사용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이 자연계에서 보고 듣고 배우며 기억하고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인간 삶의 정상적인 부분입니다. 문제는 가장 바깥에 있는 감각과 기억지식을 신앙의 신비를 판정하는 최초의 기준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주님으로부터 안을 거쳐 밖으로 흘러야 할 천적 질서가 거꾸로 되어, 바깥의 것이 안의 것을 판단하게 됩니다.
바로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그렇게 할 경우 ‘신앙의천적인것이파괴된다’고 말합니다. 앞에서 계속 보아 온 천적 질서의 핵심은 사랑과 신앙, 지혜와 지성, 이성과 앎이 모두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내감각으로확인할수있는가’, ‘내가이미알고있는기억지식으로설명할수있는가’를 먼저 세우고, 그것으로 신앙의 신비를 받아들일지 말지를 결정한다면 신앙은 더 이상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질서 안에 있지 않게 됩니다. 파괴되는 것은 인간의 이성이나 지식이 아니라 신앙 안에 있어야 할 천적인 질서입니다.
이 점에서 AC.126은 이성을 사용하지 않는 맹목적인 신앙을 권하는 말도 아닙니다. AC.121은 이성을 천적 질서 안에 분명히 포함시켰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성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이성이 어디에서 빛을 받느냐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지혜와 지성을 거쳐 생명을 받는 이성은 그 아래의 기억지식까지 살아 있게 하지만, 감각과 기억지식을 출발점으로 삼아 신앙의 신비를 재판하려는 이성은 질서를 거꾸로 세우게 됩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가 경계하는 것은 이성 자체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 세상에서 출발하는 탐구입니다.
따라서 AC.126은 창2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관한 금지를 이해하는 결정적인 문턱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선과 진리를 알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알아내어 자기 것으로 만들지 말라고 하십니다. 천적 인간에게 허락된 길은 주님으로부터 받아 알고, 받은 것을 자유롭게 누리고 사용하면서도 그 근원이 주님이심을 인정하는 길입니다. 감각과 기억지식도 그 질서 안에서는 제 역할을 하지만, 그것들이 주님을 대신하여 신앙의 신비를 판단하는 출발점이 될 때 신앙의 천적인 것이 파괴됩니다. (AC.126)
‘애굽’(Egypt)과마찬가지로‘유브라데’(Euphrates)도기억지식을의미하며,또한이러한기억지식이나오는감각적인것들을의미합니다.이것은선지서의말씀에서분명합니다.미가에서는다음과같습니다. As by “Egypt,” so also by “Euphrates,” are signified memory-knowledges, and also the sensuous things from which these knowledges come. This is evident from the Word in the prophets, as in Micah:
선지자들은사람을거듭나게하셔서천적인간과같이되게하실주님의오심에관하여이와같이말했습니다.예레미야에서는다음과같습니다. So did the prophets speak concerning the coming of the Lord who should regenerate man so that he might become like the celestial man. In Jeremiah:
여기서‘애굽’(Egypt)과‘유브라데’(Euphrates)는마찬가지로기억지식을의미하고,‘앗수르’(Asshur)는거기서나오는추론을의미합니다.시편에서는다음과같습니다. where “Egypt” and “Euphrates” likewise signify memory-knowledges, and “Asshur” reasonings thence derived. In David:
여기서도‘유브라데강’(riverEuphrates)은감각적인것과기억지식에속한것을의미합니다.유브라데가앗수르쪽을향한이스라엘영토의경계였던것처럼,기억지식은영적이고천적인인간의지성과지혜의경계이기때문입니다.아브라함에게하신다음말씀도같은것을의미합니다. where also the “riverEuphrates” signifies what is sensuous and of the memory[sensuali et scientifico]. For the Euphrates was the boundary of the dominions of Israel toward Assyria, as the knowledge of the memory is the boundary of the intelligence and wisdom of the spiritual and celestial man. The same is signified by what was said to Abraham:
이두경계는같은의미를지닙니다. These two boundaries have a like signification.
해설
AC.120은 앞의 AC.118에서 ‘브랏’, 곧 유브라데가 기억지식을 의미하며 최하위 또는 경계라고 한 설명을 말씀의 여러 구절을 통하여 확인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의미가 조금 더 구체화됩니다. ‘애굽’과 마찬가지로 ‘유브라데’도 기억지식을 의미할 뿐 아니라, 그러한 기억지식이 나오는 감각적인 것들까지 의미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기억지식이 왜 천적 인간의 질서에서 가장 바깥쪽에 놓이는지도 점차 분명해집니다. 그것은 사람이 자연계에서 감각을 통하여 받아들이고 기억에 저장하는 것들과 관계되기 때문입니다.
먼저 미7:10-12를 인용한 이유는 이 구절에 앗수르와 애굽과 강, 곧 유브라데가 함께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사람을 거듭나게 하셔서 천적 인간과 같이 되게 하실 주님의 오심에 관한 예언으로 읽습니다. 따라서 여러 나라와 지역과 경계에 관한 표현도 단순한 지리적 이동에 머무르지 않고, 거듭나는 사람 안에서 이루어지는 내적인 질서와 관계됩니다. 앞에서 에덴의 네 강을 천적 인간의 내적인 것들에 관한 묘사로 읽었던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렘2:18에서는 애굽의 시홀 물을 마시는 것과 앗수르로 가서 유브라데 물을 마시는 것이 함께 언급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애굽’과 ‘유브라데’가 기억지식을 의미하고, ‘앗수르’는 거기서 나오는 추론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인용은 특히 중요합니다. 앞의 AC.119에서는 앗수르가 이성을 의미한다고 했지만, 여기서는 기억지식에서 나오는 추론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이성적 능력이 있다는 것과 그 이성이 무엇을 출발점으로 삼아 추론하는가는 구별해서 보아야 합니다. 기억지식에서 출발하여 그것을 근거로 위의 것들을 판단하려는 질서와,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통하여 이성의 명철함을 받는 질서는 같지 않습니다.
시80:8, 11의 포도나무는 애굽에서 나와 심어지고 그 가지가 바다까지, 넝쿨이 유브라데까지 뻗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유브라데강’이 감각적인 것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자연적인 경계와 영적인 경계의 관계를 통하여 직접 설명합니다. 유브라데가 앗수르 쪽을 향한 이스라엘 영토의 경계였던 것처럼, 기억지식은 영적이고 천적인 인간에게 있는 지성과 지혜의 경계입니다. 따라서 ‘경계’라는 말은 기억지식을 무가치한 것으로 낮추는 표현이 아니라, 그것이 내적인 생명이 자연적인 차원에 이르는 가장 바깥쪽에 놓여 있음을 나타냅니다.
창15:18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주겠다고 하신 땅이 애굽 강에서 큰 강 유브라데까지라고 한 것도 같은 이유로 인용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두 경계가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명시합니다. 따라서 약속의 땅을 둘러싼 자연적인 경계 역시 속뜻에서는 인간의 내적인 상태와 관계된 경계를 표현합니다. 이것은 앞의 AC.117에서 말씀의 역사적 부분에 들어 있는 모든 것도 아르카나를 의미하고 표상하며 그 안에 담고 있다고 한 원리가 실제로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보여 주는 또 하나의 사례입니다.
AC.120은 또한 AC.80이후 계속 남아 있던 감각과 기억지식의 문제를 상당히 선명하게 해 줍니다. 감각적인 것과 기억지식은 인간에게 없어야 할 것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천적 인간에게도 그것들은 존재하며 전체 질서의 경계를 이룹니다. 문제는 가장 바깥의 경계에 있는 감각과 기억지식으로부터 출발하여 사랑과 신앙의 내적인 것들을 판단하려는 데 있습니다. AC.118에서 참된 이성의 명철함은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의 이성적 마음 안으로 들어온다고 했으므로, 거듭난 질서에서는 생명의 흐름이 가장 바깥에서 안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안을 거쳐 밖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AC.120의 여러 인용 구절은 모두 유브라데가 왜 기억지식과 감각적인 것을 의미하며, 왜 그것이 ‘최하위또는경계’라고 불리는지를 밝히는 데 기여합니다. 미가는 이 의미를 주님의 오심과 인간의 거듭남이라는 큰 문맥에 놓고, 예레미야는 기억지식에서 나오는 추론의 문제를 보여 주며, 시편과 창세기는 유브라데라는 실제 경계를 통하여 기억지식이 지성과 지혜의 경계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처럼 감각과 기억지식은 배척되는 것이 아니라 제자리에 놓여야 하며, 그 위에 있는 이성과 지성과 지혜 역시 궁극적으로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질서 안에 있어야 합니다. (AC.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