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1:31)

 

AC.63

그동안 주님은 계속해서 인간을 위하여 악과 거짓에 맞서 싸우시며, 여러 싸움을 통해 그를 진리와 선 안에 굳게 세우십니다. 이 싸움의 시간은 곧 주님께서 역사하시는 시간이며, 그래서 예언자들 가운데서는 거듭난 인간을 하나님의 손가락의 일(the work of the fingers of God)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리고 사랑이 주된 원리가 되어 작용하기 전까지 주님은 쉬지 않으십니다. 일이 이만큼 진전되어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게 되면, 그 상태를 ‘심히 좋았더라’(very good)라고 합니다. 이는 그때에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시기 때문입니다. 여섯째 날의 끝에서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 선한 영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며, 인간은 하늘, 곧 천적 낙원으로 인도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다루겠습니다. Meanwhile the Lord continually fights for him against evils and falsities, and by combats confirms him in truth and good. The time of combat is the time of the Lord’s working; and therefore in the prophets the regenerate man is called the work of the fingers of God. Nor does he rest until love acts as principal; then the combat ceases. When the work has so far advanced that faith is conjoined with love, it is called “very good”; because the Lord then actuates him, as his likeness. At the end of the sixth day the evil spirits depart, and good spirits take their place, and the man is introduced into heaven, or into the celestial paradise; concerning which in the following chapter.

 

해설

AC.63은 창1:31의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는 말씀에 대한 설명을 마무리하면서, 지금까지 진행된 거듭남의 전투에서 실제로 누가 일하고 계셨는지를 매우 분명하게 밝힙니다. 바로 앞 AC.62는 사람이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 여섯째 날에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AC.63은 그 과정의 이면에서 ‘주님은 계속해서 인간을 위하여 악과 거짓에 맞서 싸우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의 거듭남을 인간 자신의 영적 성취 과정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에게 전투가 있고 그가 그 전투를 실제로 겪지만, 그를 위하여 악과 거짓에 맞서 싸우시고 그 전투들을 통해 그를 진리와 선 안에 굳게 세우시는 분은 주님입니다.

 

이것은 AC.59와도 직접 연결됩니다. 거기서 스베덴보리는 악한 영들이 사람의 욕정을 자극하도록 허용되지만, 그것들을 선을 향해 기울이시는 분은 주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사람을 매 순간, 심지어 매 순간의 가장 작은 부분까지 보호하지 않으신다면 사람은 즉시 멸망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AC.63은 이제 그 흐름을 ‘전투의 시간은 주님께서 일하시는 시간’이라고 압축합니다. 따라서 사람이 시험과 전투를 겪는다는 것과 주님께서 그를 위하여 싸우신다는 것은 서로 반대되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은 실제로 전투를 겪지만, 그 전투 가운데 그를 붙드시고 진리와 선 안에 굳게 세우시는 능력의 근원은 주님께 있습니다.

 

여기서 ‘전투의 시간은 주님께서 일하시는 시간’이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 실패, 질병, 갈등을 곧바로 ‘지금 주님께서 특별한 영적 전투를 하고 계신 증거’라고 해석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AC.63의 문맥은 거듭남 가운데 악과 거짓에 맞서는 전투입니다. 따라서 이 문장을 모든 인생의 어려움을 설명하는 만능 공식으로 확대하기보다, 거듭남의 전투 가운데 주님께서 사람을 버려 두지 않으시고 계속 일하신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사람에게는 싸움으로 경험되는 그 시간이 동시에 주님께서 그를 진리와 선 안에 굳게 세우시는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래서 예언자들 가운데 거듭난 인간을 ‘하나님의 손가락의 일’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여기서 ‘손가락’이라는 단어 자체를 가지고 곧바로 ‘가장 미세하고 정교한 섭리’를 뜻한다고 별도의 상응을 만들어 낼 필요는 없습니다. AC.63이 이 표현을 사용하는 문맥의 핵심은 ‘일’의 주체입니다. 거듭난 인간은 자기 손으로 자기 자신을 만들어 낸 작품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가락의 일’입니다. 거듭남이 인간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 주님의 일이라는 앞 문장을 다시 강조하는 표현으로 읽으면 충분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사랑이 주된 원리가 되어 작용하기 전까지’ 쉬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여기서 ‘사랑이 주된 원리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사랑이라는 감정이 많아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로 앞 AC.60-61에서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가 되고, 신앙에 관한 지식에 속하는 것은 이해에,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 속한 것은 의지에 속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63은 그 사랑이 ‘주된 원리’로 작용할 때까지 주님께서 쉬지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무엇보다 원문 자체가 이어서 ‘그때 전투가 그친다’고 하므로, 사랑이 주가 되는 것과 전투가 그치는 것이 직접 연결되어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사랑이 주가 되면 모든 선한 행동이 아무 노력 없이 자동으로 흘러나온다’거나 ‘그 뒤로는 내적 갈등이나 시험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까지 확대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AC.63이 직접 말하는 것은 이 여섯째 날의 거듭남의 전투가 사랑이 주된 원리가 되어 작용할 때 그친다는 것입니다. 이 상태가 이후의 모든 영적 삶에서 어떤 모습으로 지속되는지는 뒤의 설명을 더 따라가야 합니다.

 

일이 이만큼 진전되어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면 그 상태를 ‘심히 좋았더라’라고 합니다. 이것은 AC.60의 설명과 정확히 이어집니다. AC.60에서는 앞선 상태들이 ‘좋았더라’였던 것과 달리 이 상태가 ‘심히 좋았더라’인 이유가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루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AC.63은 같은 사실을 다시 말하면서 그 이유를 하나 더 덧붙입니다. ‘그때에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표현은 처음 읽는 독자에게 상당히 낯설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움직이신다’고 하면 마치 사람이 자기 의지와 자유를 잃고 주님께 조종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AC.63의 문맥에서 그런 뜻으로 읽을 이유는 없습니다. 앞에서는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고 사랑이 주된 원리로 작용한다고 했고, 그 상태에서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신다고 합니다. 즉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이 그 사람의 생명에서 주된 것이 된 상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자유와 정확히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는 별도의 큰 주제이므로, 이번 글에서는 ‘움직이신다’를 곧 강제나 조종이라고 이해하지 않는 정도로 충분하겠습니다.

 

여기서 ‘자신의 모양’이라는 표현도 앞의 ‘하나님의 형상’과 연결됩니다. AC.62는 여섯째 날에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고 했고, AC.63은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면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의 목적은 인간이 독립적으로 선해져서 주님 없이도 잘 살아가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 사람 안에서 점점 더 생명의 중심이 되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고 인간 자체가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본문은 여전히 ‘그를’ 움직이신다고 합니다. 주님과 인간을 동일시하지 않으면서도 인간의 거듭난 생명의 근원이 주님에게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AC.63은 여섯째 날의 끝에서 매우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고 합니다.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 선한 영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는 것입니다. AC.59에서 악한 영들이 오랫동안 사람과 함께 있도록 허락되어 그의 욕정을 자극한다고 했던 것을 기억하면, 처음 읽는 독자는 자연스럽게 ‘그러면 이제 악한 영들과의 관계가 완전히 끊어진다는 뜻인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이 질문은 본문 이해에 직접 필요한 것이므로 심화에서 따로 살펴보겠습니다. 다만 메인에서는 원문이 말하는 사실을 그대로 붙들면 됩니다. 여섯째 날의 끝에서 악한 영들이 떠나고 선한 영들이 그 자리를 대신합니다. 이것을 곧바로 ‘악한 영들은 여전히 똑같이 주변에 있지만 영향력만 약해진다’는 식으로 바꾸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이후 영들과 인간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하는지 충분한 근거와 함께 보는 것이 안전합니다.

 

마지막으로 사람은 ‘하늘, 곧 천적 낙원으로 인도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즉시 ‘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다루겠습니다’라고 덧붙입니다. 이 마지막 문장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도 여기서 너무 빨리 답을 만들어 내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늘’이라는 말을 보자마자 사후에 죽어서 천국으로 간다는 뜻이라고 단정해서도 안 되고, 반대로 무조건 ‘살아 있는 동안 마음속에 형성되는 천국 상태일 뿐’이라고 단정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다음 장에서 설명하겠다고 했으므로, 우선 이 표현이 창2의 일곱째 날과 이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의 설명을 따라가는 것이 좋습니다.

 

이 점은 앞 AC.62에서 우리가 일곱째 상태에 관한 질문을 서둘러 완성하지 않은 이유와도 연결됩니다. 여섯째 날에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 되고, AC.63에서는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며 사랑이 주된 원리가 되어 전투가 그칩니다. 악한 영들이 떠나고 선한 영들이 대신하며, 사람은 하늘 또는 천적 낙원으로 인도됩니다. 그러나 그 ‘천적 낙원’이 정확히 무엇이며 일곱째 상태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는 이제 다음 장이 설명할 몫입니다. AC가 스스로 ‘다음 장에서’라고 한 것을 우리가 이번 해설에서 미리 완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렇게 보면 AC.63의 중심은 인간이 얼마나 열심히 싸워 높은 상태에 도달했느냐가 아닙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입니다. 주님이 인간을 위하여 악과 거짓에 맞서 싸우십니다. 주님이 전투를 통해 그를 진리와 선 안에 굳게 세우십니다. 사랑이 주된 원리가 되어 작용할 때까지 주님은 쉬지 않으십니다.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면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를 다음 상태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창1:31의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는 말씀에서 가장 먼저 붙들어야 할 주어 역시 ‘하나님’입니다. AC.60-63은 ‘심히 좋았더라’의 속뜻을 신앙과 사랑의 결합, 하나님의 형상, 그리고 거듭남의 전투와 연결하여 밝혔지만, 그 모든 과정의 주체를 인간에게 돌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것입니다. AC.63은 여섯째 날의 마지막에서 바로 그 사실을 다시 한번 강하게 밝혀 줍니다. 거듭난 인간은 자기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가락의 일’입니다.

 

심화

1. ‘그때에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신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AC.63 심화 1, ‘그때에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신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AC.63 심화 1, ‘그때에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신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AC.63의 ‘그때에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신다’는 표현은 처음 읽으면 조금 불편하게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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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란 무슨 뜻인가?

 

AC.63 심화 2,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란 무슨 뜻인가?

AC.63 심화 2,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란 무슨 뜻인가? AC.63은 ‘여섯째 날의 끝에서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 선한 영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앞 AC.59에서는 악한 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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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살아 있는 사람이 어떻게 ‘하늘, 곧 천적 낙원’으로 인도되는가?

 

AC.63 심화 3, 살아 있는 사람이 어떻게 ‘하늘, 곧 천적 낙원’으로 인도되는가?

AC.63 심화 3, 살아 있는 사람이 어떻게 ‘하늘, 곧 천적 낙원’으로 인도되는가? AC.63 마지막에는 처음 읽는 사람을 잠시 멈추게 하는 문장이 나옵니다. ‘인간은 하늘, 곧 천적 낙원으로 인도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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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4, 창1, 말씀의 속뜻 : 말씀의 가장 참된 생명과 천사들의 지각 (AC.64-66)

AC.64이것이 바로 말씀의 속뜻(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이며, 말씀의 가장 참된 생명입니다. 이는 문자적 의미에서는 전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 안에 담긴 아르카나는 너무나 많아서, 그것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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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2, 창1:31, 여섯 날의 거듭남 : 조금씩 하나님의 형상이 되어 가는 사람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1:31) AC.62인간의 거듭남에 속한 시간들과 상태들은 일반적으로도, 그리고 개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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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1:30)

 

AC.59

여기서 자연적 인간의 음식으로 오직 ‘모든 푸른 풀’(vegetable and the green of the herb)만이 언급되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거듭남의 과정에서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되어 가는 동안, 그는 끊임없이 전투에 놓이게 되며, 이 때문에 주님의 교회는 ‘전투하는 교회’(militant)라 불립니다. 거듭나기 전에는 욕정들이 지배권을 가지는데, 이는 인간 전체가 욕정들과 거기에서 나온 거짓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거듭남의 과정에서 이 욕정들과 거짓들은 한순간에 제거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 전체가 파괴되고 말기 때문인데, 이는 그가 지금까지 획득해 온 유일한 생명이 바로 그런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악한 영들이 오랜 시간 동안 그 사람과 함께 있도록 허락되며, 이들은 그의 욕정들을 자극합니다. 그 결과 욕정들은 수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느슨해지고, 마침내 주님에 의해 선을 향해 기울어질 수 있게 되며, 이렇게 사람이 개혁됩니다. 이 전투의 시기 동안, 사랑과 신앙, 곧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 속한 모든 선과 진리를 극도로 미워하는 악한 영들은, 사람에게 ‘채소와 푸른 풀’에 비유되는 음식 외에는 아무 것도 남겨 주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사람에게 ‘씨 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에 비유되는 음식도 주시는데, 이는 평온과 평화의 상태와 그 안에 있는 기쁨과 즐거움입니다. 이 음식은 주님께서 간헐적으로 주십니다. The reason why the “vegetable and the green of the herb” only are here described as food for the natural man is this. In the course of regeneration, when man is being made spiritual, he is continually engaged in combat, on which account the church of the Lord is called “militant”; for before regeneration cupidities have the dominion, because the whole man is composed of mere cupidities and the falsities thence derived. During regeneration these cupidities and falsities cannot be instantaneously abolished, for this would be to destroy the whole man, such being the only life which he has acquired; and therefore evil spirits are suffered to continue with him for a long time, that they may excite his cupidities, and that these may thus be loosened, in innumerable ways, even to such a degree that they can be inclined by the Lord to good, and the man be thus reformed. In the time of combat, the evil spirits, who bear the utmost hatred against all that is good and true, that is, against whatever is of love and faith toward the Lord—which things alone are good and true, because they have eternal life in them—leave the man nothing else for food but what is compared to the vegetable and the green of the herb; nevertheless the Lord gives him also a food which is compared to the herb bearing seed, and to the tree in which is fruit, which are states of tranquillity and peace, with their joys and delights; and this food the Lord gives the man at intervals.

 

[2] 주님께서 매 순간, 아니 매 순간의 가장 작은 부분까지도 사람을 보호하지 않으신다면, 그는 즉시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이는 영의 세계에는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 속한 것들에 대해 형언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하고 치명적인 증오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의 확실성은, 제가 지금까지 수년 동안, 비록 육신 안에 있으면서도, 저 세상의 영들, 그중에서도 가장 악한 영들과 함께 지내 온 경험을 통해 확언할 수 있습니다. 저는 때로 수천의 영들에게 둘러싸여, 그들이 독을 내뿜고, 가능한 모든 방식으로 저를 괴롭히도록 허락받았으나, 주님의 보호 아래서 제 머리카락 하나도 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오랜 경험을 통해 저는 영의 세계와 그 본성, 그리고 거듭나고 있는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의 행복에 이르기 위해 반드시 견뎌야 하는 전투에 대해 충분히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주제들은 일반적인 설명만으로는 누구도 의심 없는 신앙으로 믿게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에 관한 세부적인 내용들은 뒤이은 글들에서 계속 설명될 것입니다. Unless the Lord defended man every moment, yea, even the smallest part of every moment, he would instantly perish, in consequence of the indescribably intense and mortal hatred which prevails in the world of spirits against the things relating to love and faith toward the Lord. The certainty of this fact I can affirm, having been now for some years (notwithstanding my remaining in the body) associated with spirits in the other life, even with the worst of them, and I have sometimes been surrounded by thousands, to whom it was permitted to spit forth their venom, and infest me by all possible methods, yet without their being able to hurt a single hair of my head, so secure was I under the Lord’s protection. From so many years’ experience I have been thoroughly instructed concerning the world of spirits and its nature, as well as concerning the combat which those being regenerated must needs endure, in order to attain the happiness of eternal life. But as no one can be so well instructed in such subjects by a general description as to believe them with an undoubting faith, the particulars of the Lord’s Divine mercy will be related in the following pages.

 

해설

AC.59는 바로 앞 AC.58에서 남겨 둔 질문에 답합니다. AC.58은 같은 사람의 자연적인 것들에게 ‘채소와 풀의 푸른 것’이 음식으로 주어진다고 했지만, 왜 자연적 인간의 음식이 그렇게 묘사되는지는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AC.59는 바로 그 이유를 거듭남의 ‘전투’에서 찾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거듭남 가운데 영적 인간이 되어 가는 동안 ‘계속 전투에 종사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주님의 교회를 ‘전투하는 교회’(militant)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여기서 전투는 다른 사람이나 다른 종교와 싸우는 외적인 전쟁을 뜻하지 않습니다. 문맥상 사람 안의 욕정과 거짓, 그리고 그것들을 자극하는 악한 영들과 관련된 거듭남의 전투입니다.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이 대목부터 상당히 낯설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거듭남을 ‘나쁜 사람이 점점 좋은 사람이 되는 과정’ 정도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AC.59에서 스베덴보리가 묘사하는 과정은 훨씬 더 격렬합니다. 거듭나기 전에는 욕정들이 지배하고 있으며, 그 욕정들에서 거짓들이 생겨납니다. 거듭남이 시작되면 이 기존의 생명과 주님에게서 오는 새로운 선과 진리 사이에 전투가 일어납니다.

 

여기서 ‘욕정’(cupidities)은 단순히 사람이 무엇인가를 원한다는 일반적인 의미의 욕구와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AC.59에서 말하는 욕정은 거짓을 낳으며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의 선과 진리에 반대되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따라서 모든 자연적 소망이나 즐거움을 곧바로 ‘욕정’이라고 부르는 것은 본문의 범위를 벗어납니다.

 

더 놀라운 것은 ‘거듭나기 전에는 인간 전체가 욕정들과 거기서 나온 거짓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본질적으로 아무 가치 없는 악이다’라는 인간 존재에 대한 정죄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문맥은 거듭나기 전 사람이 획득해 온 생명의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실제로 지배권을 행사해 온 삶이 욕정과 거짓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왜 그것을 즉시 제거하지 않으실까요? AC.59의 대답은 매우 중요합니다. 욕정과 거짓이 한순간에 없어지면 ‘인간 전체를 파괴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지금까지 획득해 온 생명이 바로 그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악이 인간의 본래 생명이므로 보존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또한 악이 거듭남에 꼭 필요한 좋은 재료라는 뜻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현재 그 사람이 실제로 살아온 생명의 상태를 한순간에 없애 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거듭남은 기존 인간을 순간적으로 소멸시키고 전혀 다른 인간을 그 자리에 놓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악한 영들이 오랫동안 그 사람과 함께 있도록 ‘허용된다’고 합니다. 이 문장은 특히 조심해서 읽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악한 영들을 보내어 사람을 악하게 만드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본문의 단어는 ‘허용된다’(are suffered)입니다. 악한 영들의 작용은 주님의 선한 작용과 같은 것이 아니라 허용되는 것입니다.

 

그 악한 영들은 사람의 욕정들을 자극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 욕정들은 무수히 많은 방식으로 ‘느슨해집니다’(loosened). 마침내 그것들이 주님에 의해 선을 향해 기울어질 수 있을 정도가 되고, 그렇게 사람이 개혁됩니다.

 

여기서도 주어를 정확히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악한 영들이 사람을 선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악한 영들은 욕정을 자극합니다. 욕정들이 느슨해지는 과정이 허용됩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선으로 기울이시는’ 분은 주님입니다. 악한 영들의 활동과 주님의 활동을 같은 종류의 작용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또 이 한 문장을 가지고 ‘악한 영은 자유로운 선택을 만들어 주기 위해 필요하다’, ‘욕정이 올라오지 않으면 사람에게 선택의 기회가 없으므로 거듭남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완성된 이론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인간의 자유와 영들의 유입, 시험의 질서는 AC 전체에서 더 자세히 다루어집니다. AC.59가 직접 밝히는 것은 악한 영들이 욕정을 자극하도록 허용되고, 그 욕정들이 무수한 방식으로 느슨해져 주님께서 선으로 기울이실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악을 사용하신다’는 말과도 조심스럽게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악을 선한 것으로 만드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악은 악입니다. 다만 악한 영들의 활동을 무제한으로 내버려 두시는 것이 아니라 허용의 범위 안에 두시며, 그 가운데서도 사람을 선으로 이끄신다는 것이 본문에서 볼 수 있는 방향입니다.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악한 영들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 속한 모든 선과 진리를 극도로 미워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이 선과 진리만이 참으로 선하고 참된 것이라고 덧붙입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악한 영들이 전투 중인 사람에게 남겨 주는 음식은 ‘채소와 풀의 푸른 것’에 비유되는 것뿐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AC.58에서 왜 자연적 인간의 음식이 그렇게 묘사되었는지에 대한 AC.59의 대답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채소와 풀의 푸른 것’을 ‘삶이 단조롭고 메마르며 겨우 버티는 심리 상태’라고 구체적으로 번역해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AC.59는 그런 심리적 묘사를 하지 않습니다. 지금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전투 중 악한 영들이 사람에게 그것에 비유되는 음식 외에는 남겨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상태에서도 다른 음식을 주십니다. ‘씨 맺는 채소’와 ‘열매 있는 나무’에 비유되는 음식입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스베덴보리가 그것이 무엇인지 직접 설명합니다. ‘평온과 평화의 상태와 그 안의 기쁨과 즐거움’입니다.

 

이 대목은 매우 중요합니다. 앞의 AC.57에서는 씨 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가 영적 음식과 관련하여 설명되었는데, 여기에서는 전투 중 주님께서 간헐적으로 주시는 평온과 평화, 기쁨과 즐거움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같은 자연적 표상이 언제나 단 하나의 문장으로만 정의되는 기계적인 상징 사전을 만들 수 없다는 것도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문맥과 스베덴보리의 직접 설명을 따라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 음식을 ‘간헐적으로’ 주십니다. AC.59은 왜 항상 평화 상태를 유지하게 하지 않으시는지 세부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너무 편안해지면 거듭남이 중단되기 때문에 평화를 일부러 거두신다’거나 ‘다시 전투할 힘을 주기 위한 휴식 시간이다’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이 직접 말하는 것은 전투 가운데서 주님께서 평온과 평화의 상태, 그 기쁨과 즐거움을 간헐적으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만으로도 거듭남의 전투를 매우 어둡게만 읽지 않게 해 줍니다. 전투가 있다는 것과 주님께서 평화를 주신다는 것이 같은 문단 안에 있습니다. 악한 영들이 활동하지만 그 활동이 마지막 말을 하는 것이 아니며, 주님께서 사람을 선으로 기울이시고 평온과 평화도 주십니다.

 

두 번째 단락에서 스베덴보리는 더욱 강한 말을 합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매 순간, 아니 매 순간의 가장 작은 부분까지’ 보호하지 않으시면 사람은 즉시 멸망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영의 세계에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 속한 것들에 대한 형언할 수 없이 강렬하고 치명적인 증오가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문장은 단순히 ‘주님은 가끔 위험할 때 우리를 도와주신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AC.59의 표현대로라면 인간의 보존 자체가 지속적인 주님의 보호 아래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독립적으로 자기 자신을 지키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이례적으로 자신의 경험을 직접 증거로 제시합니다. 그는 당시 이미 여러 해 동안 육체 안에 있으면서 저 세상의 영들과 교류해 왔으며, 가장 악한 영들과도 함께 있었다고 말합니다. 때로는 수천의 영들에게 둘러싸여 그들이 ‘독을 내뿜고’ 가능한 모든 방식으로 자신을 괴롭히도록 허용되었지만, 주님의 보호 아래 머리카락 하나도 해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 대목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정말 문자 그대로 수천의 영들을 경험했다는 뜻인가?’, ‘왜 스베덴보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우리도 이런 영적 경험을 해야 하는가?’ 같은 질문이 생깁니다. 이것은 AC.59 본문의 의미를 넘어 스베덴보리의 영계 경험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하는 독립적인 문제이므로 별도의 심화에서 다루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만 AC.59 자체에서 확실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이것을 비유나 상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는 자신의 실제 경험에 근거한 사실로 제시합니다. 따라서 그의 저술을 해설하면서 이 대목을 단순한 문학적 비유로 바꾸는 것도 본문에 충실한 독법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 경험을 가지고 ‘스베덴보리는 수천의 악령을 혼자 이겨 낸 영적 거인’이라고 읽어서도 안 됩니다. 본문의 강조점은 정반대입니다. 그는 자신이 강해서 견뎠다고 하지 않고 ‘주님의 보호 아래서’ 안전했다고 말합니다. AC.59의 주인공은 스베덴보리의 영적 능력이 아니라 그를 보호하신 주님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여러 해의 경험을 통해 영의 세계와 그 본성, 그리고 거듭나는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의 행복에 이르기 위해 견뎌야 하는 전투에 관하여 충분히 배웠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자신의 경험을 단순한 개인 간증으로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 설명한 거듭남의 전투와 주님의 보호를 증언하는 근거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문장은 또 하나의 중요한 절제를 보여 줍니다. 그는 이런 주제를 일반적인 설명만으로 말한다고 해서 누구든 의심 없는 신앙으로 믿게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신적 자비로 그 세부 사항들을 뒤에서 계속 말하겠다고 합니다.

 

이것을 ‘진리는 사람이 받을 수 있는 만큼만 조금씩 주어진다’는 일반 원리로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AC.59의 직접 의미는 스베덴보리가 지금 한 일반적인 설명만으로는 이런 낯선 영적 현실을 충분히 납득시키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래서 뒤에서 더 구체적인 사항들을 제시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태도는 우리에게도 AC.59를 읽는 좋은 방법을 보여 줍니다. 악한 영, 욕정의 자극, 영적 전투, 수천의 영들과의 경험 같은 말을 한꺼번에 완전한 영계 시스템으로 만들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세부 사항은 뒤에서 더 말하겠다고 했으므로, 지금은 이 글이 직접 말하는 구조를 정확하게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그 구조는 이렇습니다. 거듭남 가운데 영적 인간이 되어 가는 사람은 전투를 겪습니다. 거듭나기 전 그를 지배하던 욕정과 거짓은 한순간에 제거될 수 없습니다. 악한 영들이 욕정을 자극하도록 허용되고, 그 욕정들은 무수한 방식으로 느슨해지며, 마침내 주님께서 그것들을 선으로 기울이실 수 있게 됩니다. 전투 중 악한 영들은 선과 진리를 미워하지만, 주님께서는 사람에게 간헐적으로 평온과 평화, 기쁨과 즐거움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서 주님께서는 사람을 매 순간 보호하십니다.

 

따라서 AC.59의 중심을 ‘왜 악한 영들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일반적인 신정론으로 확대하기보다, ‘거듭나는 사람의 전투 가운데 주님께서 어떻게 허용하시고 보호하시며 선으로 이끄시는가?’라는 문맥 안에서 읽는 것이 정확합니다.

 

이 글은 거듭남을 인간의 자기계발로 보지 않습니다. 사람이 자기 안의 욕정을 찾아내어 자기 힘으로 재배열하는 과정도 아닙니다. 전투는 실제로 있으며 인간은 그것을 겪습니다. 그러나 욕정을 선으로 기울이시는 분도 주님이고, 전투 중 평화를 주시는 분도 주님이며, 매 순간 사람을 보호하시는 분도 주님입니다. 그래서 AC.59의 마지막 무게중심은 인간의 싸움보다 더 깊은 곳, 곧 싸우는 인간을 한순간도 놓지 않으시는 주님의 보호에 있습니다.

 

심화

1. 왜 주님은 욕정과 거짓, 악한 영들의 작용을 즉시 제거하지 않으시는가?

 

AC.59 심화 1. 왜 주님은 욕정과 거짓, 악한 영들의 작용을 즉시 제거하지 않으시는가?

AC.59 심화 1. 왜 주님은 욕정과 거짓, 악한 영들의 작용을 즉시 제거하지 않으시는가? AC.59에서 처음 읽는 사람을 가장 놀라게 하는 대목 가운데 하나는 이것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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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스베덴보리의 ‘수천의 영들에게 둘러싸인 경험’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AC.59 심화 2. 스베덴보리의 ‘수천의 영들에게 둘러싸인 경험’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AC.59 심화 2. 스베덴보리의 ‘수천의 영들에게 둘러싸인 경험’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AC.59 후반부에는 처음 AC를 읽는 사람이라면 그냥 지나가기 어려운 대목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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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0, 창1:31, ‘심히 좋았더라’(AC.60-63)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And God saw everything that he had made, and behold it was very good.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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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8, 창1:30,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AC.58-59)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to every wild animal of the earth, and to every fowl of the hea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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