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63 심화

3. 살아 있는 사람이 어떻게 ‘하늘, 곧 천적 낙원’으로 인도되는가?

 

AC.63 마지막에는 처음 읽는 사람을 잠시 멈추게 하는 문장이 나옵니다. ‘인간은 하늘, 곧 천적 낙원으로 인도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다루겠습니다.’ 지금까지 창세기 1장을 한 사람의 거듭남의 과정으로 읽어 왔는데, 그 사람이 죽었다는 말도 없는데 갑자기 ‘하늘’로 인도된다고 하니 자연스럽게 ‘이것이 사후 천국에 들어간다는 뜻인가?’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먼저 가장 중요한 단서는 스베덴보리 자신이 바로 뒤에 붙인 말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다루겠습니다.’ 따라서 AC.63만 가지고 ‘하늘, 천적 낙원’의 뜻을 모두 확정하려 하기보다, 이것이 다음 장의 일곱째 날 설명으로 넘어가는 연결 문장이라는 사실을 먼저 보는 것이 좋습니다.

 

문맥상 이 사람이 여기서 육체적으로 죽었다고 볼 이유는 없습니다. AC.62는 인간의 거듭남에 속한 여섯 상태를 말했고, AC.63은 여섯째 날 끝에서 사랑이 주된 원리가 되고 전투가 그치며 악한 영들이 떠나고 선한 영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어지는 ‘하늘, 곧 천적 낙원으로 인도된다’는 말 역시 지금까지 설명해 온 거듭남의 연속선상에서 읽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곧바로 ‘하늘은 장소가 아니라 오직 마음의 상태라는 뜻이다’라고 결론 내려도 될까요? 그것도 조금 조심하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실제 사후의 천국도 분명히 말합니다. 따라서 이번 표현 하나를 근거로 ‘천국은 장소가 아니고 인간 내면의 상태일 뿐이다’라고 하면 스베덴보리의 천국 이해를 지나치게 축소하게 됩니다.

 

반대로 ‘하늘로 인도된다’는 말이 있으니 이 사람이 여기서 죽어 실제 사후 천국으로 들어간다고 읽는 것도 현재의 문맥과 맞지 않습니다. 지금 설명되는 것은 창조의 여섯 날에 대응하는 인간의 거듭남이고, 스베덴보리는 그 다음 상태를 다음 장에서 계속 설명하겠다고 합니다.

 

따라서 현 단계에서 가장 안전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늘, 곧 천적 낙원’이 여섯째 날 이후에 이어지는 거듭남의 상태와 관계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확히 어떤 상태이며 왜 ‘하늘’과 ‘천적 낙원’이라고 불리는지는 창2와 이어지는 AC의 설명을 따라가면서 밝혀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AC.63의 마지막 문장은 독자에게 일종의 예고편과 같습니다.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진행된 거듭남의 창조가 이제 새로운 상태로 넘어갑니다. 사랑이 주된 원리가 되어 전투가 그치고, 악한 영들이 떠나며 선한 영들이 대신하고, 사람은 ‘하늘, 곧 천적 낙원’으로 인도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바로 거기서 멈추며 ‘다음 장에서’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여기서 멈추는 것이 좋겠습니다. 물론 AC 전체를 이미 알고 있다면 일곱째 날, 천적 인간, 안식, 천상의 사람의 상태 등을 미리 연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스베덴보리가 말씀을 따라 설명하는 순서를 그대로 경험하게 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창세기 1장이 끝났으니 이제 창세기 2장의 말씀 자체가 먼저 나오고, 그 말씀을 AC가 어떻게 여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과 AC의 관계를 생각할 때에도 중요합니다. AC.63의 마지막 한마디를 가지고 다음 장의 의미를 우리가 먼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먼저 창2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의 속뜻을 스베덴보리가 어떻게 설명하는지 따라가는 것입니다. AC는 말씀보다 앞서 독자를 끌고 가는 책이 아니라 말씀 안에 있는 것을 밝히는 해설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살아 있는 사람이 어떻게 하늘로 인도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현재 단계의 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이것은 사망 장면을 묘사하는 문장이 아니라 거듭남의 여섯째 상태에서 다음 상태로 넘어가는 문맥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 곧 천적 낙원’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스베덴보리 자신이 ‘다음 장에서’ 설명하겠다고 했으므로, 우리도 그 설명을 기다리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AC.63, 창1:31, 주님이 싸우시는 거듭남의 전투 : 신앙과 사랑의 결합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1:31) AC.63그동안 주님은 계속해서 인간을 위하여 악과 거짓에 맞서 싸우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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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3 심화 2,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란 무슨 뜻인가?

AC.63 심화 2,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란 무슨 뜻인가? AC.63은 ‘여섯째 날의 끝에서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 선한 영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앞 AC.59에서는 악한 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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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3 심화

2.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란 무슨 뜻인가?

 

AC.63은 ‘여섯째 날의 끝에서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 선한 영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앞 AC.59에서는 악한 영들이 오랫동안 사람과 함께 있도록 허락되어 그의 욕정을 자극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자연스럽게 질문이 생깁니다. ‘악한 영들은 사람에게 계속 관계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왜 여기서는 떠난다고 하는가?’

 

먼저 AC.63이 실제로 말하는 것을 그대로 존중하는 것이 좋습니다. 본문은 분명히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 선한 영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처음부터 이것을 ‘사실 떠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주변에 있으면서 영향력만 약해진다’고 바꾸어 번역하듯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떠난다’고 했으면 우선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동시에 이 한 문장을 가지고 ‘거듭난 사람에게는 이제 어떤 악한 영도 전혀 접근할 수 없으며 악의 영향 가능성 자체가 영원히 사라진다’고 확대해서도 안 됩니다. AC.63은 여기서 영들과 인간의 관계 전체를 설명하는 글이 아니라 여섯째 날의 끝에서 일어나는 상태 변화를 요약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맥에서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큰 전환이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AC.59에서는 전투 가운데 악한 영들이 사람의 욕정을 자극하고 있었고, AC.63에서는 사랑이 주된 원리가 되어 작용하면서 그 전투가 그칩니다. 바로 그 뒤에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 선한 영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따라서 악한 영들의 떠남은 적어도 전투가 그치고 새로운 상태로 들어가는 변화와 직접 연결되어 있습니다.

 

기존 설명처럼 이것을 ‘악한 영들이 지배권을 잃는다’고 표현하면 이해에는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AC.63의 문장 자체가 정확히 정의한 뜻이라고 단정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떠남’이 영계에서 어떤 관계 변화와 정확히 대응하는지, 악한 영들이 이후 사람과 전혀 관계하지 않는다는 뜻인지 아닌지는 관련 AC들의 설명을 더 살펴보아야 합니다.

 

특히 ‘사람에게는 언제나 선한 영과 악한 영이 함께 있어 균형이 유지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질문은 매우 중요하지만, 그것 역시 인간의 자유와 영적 균형에 관한 더 큰 교리에 속합니다. 그 교리를 AC.63 한 문장 안에 억지로 끌어와 ‘그러므로 떠난다는 것은 사실 밖으로 밀려난다는 뜻이다’라고 결론 내리면, 오히려 본문의 표현을 다른 교리에 맞추어 수정하는 셈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번에는 두 사실을 함께 붙들면 좋겠습니다. 첫째, AC.63은 여섯째 날 끝에 악한 영들이 실제로 ‘떠난다’고 말합니다. 둘째, 이 한 문장만으로 인간과 악한 영의 모든 관계가 완전히 끝난다고까지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그 사이의 세부적인 영적 질서는 스베덴보리가 뒤에서 더 설명하는 내용을 따라가며 확인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무엇보다 본문의 강조점은 악한 영들이 어디로 이동했는가를 추적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선한 영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는 것입니다. 여섯째 날까지 이어진 전투가 그치고 사랑이 주된 원리가 되면서 사람을 둘러싼 영적 상태에도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라는 말을 읽을 때 가장 먼저 붙들 것은 ‘악한 영은 완전히 소멸하는가, 몇 미터 밖으로 물러나는가?’ 같은 공간적인 그림이 아니라, 여섯째 날의 전투가 끝나고 다음 상태가 시작된다는 문맥입니다. 영들의 세계에서 ‘떠남’이 정확히 어떤 상태의 변화를 뜻하는지는 충분한 관련 본문을 만나면서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되겠습니다.

 

 

 

AC.63 심화 3, 살아 있는 사람이 어떻게 ‘하늘, 곧 천적 낙원’으로 인도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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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3 심화 1, ‘그때에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신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AC.63 심화 1, ‘그때에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신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AC.63의 ‘그때에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신다’는 표현은 처음 읽으면 조금 불편하게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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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3 심화

1. ‘그때에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신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AC.63의 ‘그때에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신다’는 표현은 처음 읽으면 조금 불편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움직이신다’고 하면 사람이 자기 생각과 의지를 잃고 외부의 힘에 의해 조종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문장을 앞뒤 문맥에서 떼어 내지 않고 읽으면 강조점이 조금 달라집니다. 바로 앞에서는 ‘사랑이 주된 원리가 되어 작용할 때’ 전투가 그친다고 했고, 이어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게 되면’ 그 상태를 ‘심히 좋았더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신다고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가장 먼저 붙들어야 할 것은 ‘움직이신다’보다 ‘그때’입니다. 어떤 때인가 하면 사랑이 주된 원리로 작용하고 신앙이 사랑과 결합한 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사람을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신다는 것은 사랑과 신앙의 결합이라는 거듭남의 문맥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사람이 자기 의지를 잃고 수동적인 도구가 된다는 뜻을 이 문장에 넣을 이유는 없습니다.

 

또 ‘자신의 모양으로’라는 말도 중요합니다. 바로 앞 AC.62는 사람이 여섯째 날에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AC.63은 이제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신다고 합니다. 이것은 거듭난 인간의 생명이 자기 자신에게서 독립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사람은 주님처럼 신적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을 받아 살아가는 가운데 주님의 형상과 모양이 됩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자유는 어떻게 되는가 하는 질문이 남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질문이지만 AC.63 한 문장이 인간의 자유와 주님의 유입에 관한 전체 교리를 설명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의지와 인간의 의지가 완전히 하나가 된다’, ‘이 상태가 인간에게 가능한 최고의 자유이다’ 같은 결론까지 이번 글의 직접적인 뜻으로 확정하기보다, 관련 AC들이 자유와 의지를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함께 보면서 다루는 것이 좋습니다.

 

다만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AC.63은 주님의 역사와 인간의 존재를 서로 없애는 방식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그를’ 움직이십니다. 사람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동시에 그 움직임의 근원이 주님에게 있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문장을 ‘주님이 전부 하시니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수동주의로 읽는 것도, 반대로 ‘결국 인간이 자기 힘으로 선하게 사는 것이다’라고 읽는 것도 본문의 균형을 놓치게 됩니다.

 

처음 AC를 읽는 독자에게는 일상적인 예가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웃을 용서해야 한다는 진리를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미움과 싸우고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 진리와 사랑이 아직 충분히 결합되어 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가운데 진리와 사랑이 결합하고 사랑이 삶의 주된 원리가 된다면, 그가 선을 행하는 생명의 근원은 자기 공로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고 고백하게 됩니다. 다만 이것은 AC.63을 이해하기 위한 예이지,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신다’는 표현의 모든 의미를 이 한 사례로 정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이 표현이 지키고 있는 가장 중요한 진리는 거듭난 생명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 되었다고 해서 이제 스스로 생명의 근원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과 사랑이 결합하고 사랑이 주된 원리가 되어도 생명의 근원은 여전히 주님입니다. 오히려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자기 안의 선이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여기기보다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더 깊이 인정하게 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신다’는 말을 가장 안전하게 이해하면, 신앙과 사랑이 결합한 사람 안에서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 그의 생명을 이끌게 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와 주님의 유입이 정확히 어떻게 하나가 되는지는 이 한 문장보다 훨씬 큰 주제이므로, 이번에는 AC.63이 말하는 범위 안에서 멈추는 것이 좋겠습니다.

 

 

 

AC.63 심화 2,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란 무슨 뜻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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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3, 창1:31, 주님이 싸우시는 거듭남의 전투 : 신앙과 사랑의 결합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1:31) AC.63그동안 주님은 계속해서 인간을 위하여 악과 거짓에 맞서 싸우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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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2 심화

1. 왜 일곱째 상태에 이르는 이는 ‘거의 없다’고 하는가?

 

AC.62는 인간의 거듭남에 속한 시간들과 상태들이 여섯 단계로 나뉘며, 사람이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 여섯째 날에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는 여섯째 날에서 끝나지 않고 일곱째 날의 안식으로 이어집니다. 여기서 AC를 처음부터 따라온 독자라면 AC.13에서 이미 읽었던 한 문장이 떠오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섯 번째 상태까지 이르는 이는 ‘적고’(few), 일곱 번째 상태에 이르는 이는 ‘거의 없다’(scarcely)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먼저 가장 중요한 것은 AC.13이 말한 것보다 더 많이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여섯 번째 상태에 이르는 사람이 적고 일곱 번째 상태에 이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 표현을 ‘사실은 누구나 결국 일곱째 상태에 이른다’거나 ‘모든 사람이 각자 다른 방식으로 일곱째 상태를 완성한다’는 뜻으로 바꾸어 읽을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거의 없다’를 ‘아무도 갈 수 없다’로 바꾸어서도 안 됩니다. ‘scarcely’는 문자 그대로 ‘거의 없다’, ‘좀처럼 없다’는 뜻이지 ‘절대로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AC.13이 말하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일곱째 상태에 이르는 경우는 존재하지만 매우 드물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구별이 필요합니다. AC.62가 직접 설명하는 것은 ‘여섯 단계’와 ‘여섯째 날에 하나님의 형상이 됨’입니다. 일곱째 상태의 성질을 AC.62가 여기서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AC.62 한 문장만 가지고 ‘여섯째 날은 영적 천국이고 일곱째 날은 천적 천국이다’, 또는 ‘모든 사람은 여섯째 날을 거쳐 일곱째 날의 천적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식의 체계를 만들면 본문보다 앞서가게 됩니다.

 

AC.13으로 돌아가 보면 첫째 상태에서 일곱째 상태까지의 전체 윤곽이 이미 간단히 제시되어 있습니다. 거기에서 일곱째 상태는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었을 때의 상태로 설명됩니다. 따라서 일곱째 상태가 매우 높은 거듭남의 상태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거듭나는 사람에게 반드시 동일한 방식으로 도달되어야 하는 보편적인 마지막 단계인지,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와 정확히 어떻게 관계되는지는 관련 글들을 더 충분히 함께 보아야 합니다.

 

이 점이 중요한 이유는 ‘일곱째 상태에 이르는 이는 거의 없다’는 말을 너무 빨리 통계나 운명론으로 바꾸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천적 인간으로 태어나는 사람은 극소수인가?’, ‘나는 영적 유형으로 태어났으니 애초에 일곱째 상태에는 갈 수 없는가?’ 같은 질문이 곧바로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13과 AC.62는 사람들을 출생 때부터 두 종류로 분류하는 설명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두 글만으로 ‘누가 처음부터 영적 인간형이고 누가 천적 인간형인가’를 판정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온순하고 다정한 성격이면 천적 인간이고,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성격이면 영적 인간이라는 식으로 사람의 자연적 기질을 스베덴보리의 ‘영적’과 ‘천적’에 그대로 대응시켜서도 안 됩니다. 그것은 AC가 사용하는 용어보다 훨씬 피상적인 구별이 됩니다.

 

그러면 AC.13의 ‘거의 없다’는 말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붙들어야 할까요? 가장 먼저 거듭남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겠습니다. 창세기 1장의 여섯 날과 이어지는 일곱째 상태는 며칠 동안 몇 가지 종교적 체험을 하면 끝나는 과정이 아닙니다. AC.62가 굳이 ‘조금씩 조금씩’이라고 말하는 것도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 되어 가는 과정이 점진적임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것을 낙심의 근거로 삼을 필요도 없습니다. AC.62의 초점은 ‘너는 몇째 날까지 갈 수 있느냐’를 묻는 데 있지 않습니다. 사람이 처음 상태에서 자기 힘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창조 가운데 조금씩 조금씩 변화된다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관심도 ‘나는 일곱째 상태에 들어갈 수 있을까?’라는 자기 등급 판정보다 지금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에 두는 편이 좋습니다.

 

또 ‘거의 없다’는 말을 보고 그 상태에 이른 사람을 주변에서 찾아내려 할 필요도 없습니다. 누가 여섯째 상태이고 누가 일곱째 상태인지 외적인 모습만 보고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AC.13이나 AC.62는 제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말씀은 다른 사람을 분류하기보다 거듭남이 얼마나 깊은 주님의 역사인지를 보게 합니다.

 

무엇보다 창세기 본문의 순서를 존중하는 것이 좋습니다.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말씀은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입니다. AC.62 역시 이 여섯째 날에 이르기까지 사람이 어떻게 ‘조금씩 조금씩’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지를 말합니다. 일곱째 날은 곧 이어지는 창2:1-3의 말씀에서 본격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단계에서 가장 안전한 결론은 이것입니다. AC.13은 일곱째 상태에 이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실제로 말합니다. 그 표현을 약화시킬 필요도, ‘아무도 없다’고 강화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고 AC.62는 사람이 여섯 창조의 날을 통해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 여섯째 날에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고 말합니다. 이 두 진술을 그대로 붙들고, 일곱째 상태와 천적 인간의 더 깊은 관계는 관련 AC들이 직접 설명할 때 따라가는 것이 좋습니다.

 

이런 독법은 답을 조금 늦추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오히려 AC를 더 정확하게 읽는 방법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아직 설명하지 않은 것을 우리가 먼저 체계화하기보다, 말씀과 AC가 열어 주는 순서를 따라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입니다. 거듭남 자체가 ‘조금씩 조금씩’ 이루어진다고 하듯, 그것을 이해하는 일도 그렇게 진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AC.62, 창1:31, 여섯 날의 거듭남 : 조금씩 하나님의 형상이 되어 가는 사람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1:31) AC.62인간의 거듭남에 속한 시간들과 상태들은 일반적으로도, 그리고 개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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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1:31)

 

AC.62

인간의 거듭남에 속한 시간들과 상태들은 일반적으로도, 그리고 개별적으로도 여섯 단계로 나눌 수 있으며, 이것들을 그의 창조의 날들(the days of his creation)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사람이 전혀 인간이라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출발하여, 처음에는 겨우 인간이라 할 만한 어떤 상태가 되고,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 마침내 여섯째 날에 이르러 하나님의 형상(an image of God)이 되기 때문입니다. The times and states of man’s regeneration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are divided into six, and are called the days of his creation; for, by degrees, from being not a man at all, he becomes at first something of one, and so by little and little attains to the sixth day, in which he becomes an image of God.

 

해설

AC.62는 창세기 1장의 여섯 날을 지금까지 스베덴보리가 왜 인간의 거듭남의 여섯 상태로 읽어 왔는지를 한 문장으로 정리해 주는 글입니다. 말씀에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AC.62는 이 ‘날들’을 인간의 거듭남에 속한 시간들과 상태들이라고 하며, 그것들을 ‘그의 창조의 날들’이라고 부릅니다. 창세기 1장의 창조를 인간의 거듭남이라는 속뜻으로 읽어 온 앞의 모든 설명이 여기에서 매우 간결하게 요약되는 셈입니다.

 

먼저 ‘인간의 거듭남에 속한 시간들과 상태들’이라는 표현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섯 날을 단순히 여섯 개의 종교적 지식이나 여섯 가지 덕목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거듭나면서 지나가는 ‘상태들’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첫째 날에서 여섯째 날까지는 무엇을 여섯 가지 배운다는 목록이라기보다, 주님께서 한 사람을 새롭게 창조해 가시는 과정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AC.62는 이것을 ‘그의 창조의 날들’이라고 부릅니다. 이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창세기 1장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는 이야기이고, AC는 그 말씀의 속뜻 안에서 인간의 거듭남 역시 하나의 창조라고 밝힙니다. 이것은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고쳐서 더 나은 사람이 되어 간다는 이야기와는 다릅니다. 앞에서 계속 살펴본 것처럼 거듭남의 생명과 선과 진리의 근원은 주님에게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창조의 날들’이라는 말에서도 창조의 주체를 인간 자신에게 돌리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어지는 표현은 처음 읽는 사람에게 상당히 충격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사람은 처음에 ‘전혀 인간이라 할 수 없는’ 상태에 있다고 합니다. 물론 이것은 육체적으로 사람이 아니라거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 거듭남이라는 문맥에서 ‘사람’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AC.49에서도 참 사람은 오직 주님이시며, 인간은 주님에게서 받는 만큼 사람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전혀 인간이라 할 수 없다’는 강한 표현도 그 연장선에서 읽어야 합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로 살아가는 참된 인간성이라는 관점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을 다른 사람을 낮추는 데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저 사람은 거듭나지 않았으니 사람이 아니다’라는 식의 판단은 AC.62의 목적과 전혀 다릅니다. 이 말씀의 속뜻은 다른 사람의 인간 자격을 판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거듭남이 얼마나 근본적인 새 창조인지를 보여 줍니다. 자연적으로 태어난 것만으로 거듭남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 안에서 새로운 창조를 이루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AC.62에서 특히 아름다운 표현은 그 다음의 ‘조금씩 조금씩’입니다. 사람은 ‘전혀 인간이라 할 수 없는’ 상태에서 단번에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겨우 인간이라 할 만한 어떤 상태가 되고, 그 뒤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 마침내 여섯째 날에 하나님의 형상이 됩니다. 거듭남이 점진적인 과정이라는 사실을 이보다 간결하게 보여 주는 표현도 드물 것입니다.

 

여기서도 원문이 말하는 만큼 정확하게 읽는 것이 좋습니다. ‘조금씩 조금씩’이라고 했다고 해서 이번 한 문장만으로 거듭남의 모든 세부 과정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단계에서 무엇이 먼저 일어나고, 얼마나 오래 걸리며, 반드시 어떤 후퇴를 몇 번 겪어야 하는지까지 AC.62가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번 글이 직접 말하는 것은 사람이 단번에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by degrees’, 곧 단계적으로, ‘by little and little’, 곧 조금씩 조금씩 거기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처음 AC를 접하는 독자에게도 중요한 균형을 줍니다. 창세기 1장의 여섯 날을 거듭남의 상태로 읽는다고 해서 ‘나는 지금 셋째 날인가, 넷째 날인가?’를 판정하는 영적 등급표로 사용할 필요는 없습니다. AC.62는 사람에게 자기 단계를 측정하라고 하기보다, 거듭남이 주님의 창조이며 단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큰 질서를 보여 줍니다.

 

마침내 여섯째 날에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 됩니다. 이 표현은 앞의 AC.26부터 이어져 온 창1:26-27의 설명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는 것은 외모가 하나님과 비슷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사람이 주님에게서 신앙과 사랑, 선과 진리를 받아 살아가게 되는 것과 관계됩니다. 특히 AC.51-53은 ‘형상’과 신앙, 이해의 관계를 설명했고, AC.60-61은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루는 여섯째 상태를 설명했습니다. AC.62는 그 흐름을 받아 여섯째 날에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고 정리합니다.

 

다만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이 되었다’는 것을 곧 ‘거듭남의 모든 것이 최종적으로 끝났다’는 뜻으로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창세기의 말씀은 여섯째 날 뒤에 일곱째 날로 이어지고, AC 역시 일곱째 상태를 따로 설명합니다. AC.62가 지금 직접 말하는 것은 여섯째 날에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일곱째 날이 무엇이며 여섯째 날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그 내용을 직접 다루는 글에서 살펴보는 편이 안전합니다.

 

이 점을 지키면 ‘그러면 여섯째 날에 완성되었는데 왜 일곱째 날이 또 필요한가?’, ‘모든 사람이 결국 천적 인간이 되어야 하는가?’, ‘영적 천국에 갈 사람과 천적 천국에 갈 사람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가?’ 같은 질문을 이번 한 문장에서 억지로 모두 해결할 필요도 없어집니다. 이런 질문들은 AC 전체를 읽으면서 충분한 근거가 모였을 때 다루어야 할 큰 주제들입니다. AC.62는 그것들을 한꺼번에 해결하는 글이 아니라 여섯 날의 의미를 요약하는 글입니다.

 

또 ‘일반적으로도, 그리고 개별적으로도’라는 표현도 너무 빨리 하나의 도식으로 만들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적어도 이 표현을 통해 거듭남의 여섯 상태가 단 한 번의 피상적인 변화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곧바로 ‘인류 전체의 역사에도 정확히 여섯 단계가 있고, 한 사람의 생애에서도 같은 여섯 단계가 계속 반복된다’는 완성된 체계를 세우기보다는, 뒤에서 스베덴보리가 이 표현을 어떻게 펼치는지를 계속 확인하는 편이 좋습니다.

 

AC.62의 핵심은 오히려 아주 단순합니다. 창세기 1장의 여섯 날은 속뜻에서 인간의 거듭남에 속한 시간들과 상태들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은 ‘그의 창조의 날들’이라고 불립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형상으로 완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새 창조 안에서 조금씩 조금씩 변화되어 마침내 여섯째 날에 하나님의 형상이 됩니다.

 

이렇게 읽으면 창1:31의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라는 말씀도 지금까지의 모든 흐름을 품고 있는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첫째 날의 빛에서 시작하여 여섯째 날의 ‘심히 좋았더라’에 이르기까지, AC는 이 창조의 말씀 안에서 한 인간이 주님에 의해 새롭게 창조되어 가는 거듭남의 아르카나를 밝혀 왔습니다. 그리고 AC.62는 그 긴 흐름을 ‘조금씩 조금씩’이라는 말과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로 압축합니다.

 

그러므로 이번 글에서 가장 오래 기억해 둘 표현을 하나 고른다면 ‘조금씩 조금씩’이어도 좋겠습니다. 거듭남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단번에 높은 상태에 뛰어오르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을 새롭게 창조해 가시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그 창조의 목적은 사람이 자기 자신을 더욱 크게 만드는 데 있지 않고, 주님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 마침내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데 있습니다.

 

심화

1. 왜 일곱째 상태에 이르는 이는 ‘거의 없다’고 하는가?

 

AC.62 심화 1. 왜 일곱째 상태에 이르는 이는 ‘거의 없다’고 하는가?

AC.62 심화 1. 왜 일곱째 상태에 이르는 이는 ‘거의 없다’고 하는가? AC.62는 인간의 거듭남에 속한 시간들과 상태들이 여섯 단계로 나뉘며, 사람이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 여섯째 날에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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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3, 창1:31, 주님이 싸우시는 거듭남의 전투 : 신앙과 사랑의 결합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1:31) AC.63그동안 주님은 계속해서 인간을 위하여 악과 거짓에 맞서 싸우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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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1, 창1:31, 영적(靈的, spiritual), 천적(天的, celestial)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1:31) AC.61 신앙에 관한 지식에 속하는 모든 것은 영적(靈的, spiritual)이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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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1:31)

 

AC.61

신앙에 관한 지식에 속하는 모든 것은 영적(靈的, spiritual)이라 하고,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 속한 모든 것은 천적(天的, celestial)이라 합니다. 전자는 인간의 이해(understanding)에 속하고, 후자는 그의 의지(will)에 속합니다. All things relating to the knowledges of faith are called spiritual, and all that are of love to the Lord and our neighbor are called celestial; the former belong to man’s understanding, and the latter to his will.

 

해설

AC.61은 매우 짧지만 앞으로 AC를 읽는 데 자주 만나게 될 두 용어, 곧 ‘영적’(spiritual)과 ‘천적’(celestial)을 이해하는 중요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에 관한 지식에 속하는 모든 것’을 영적이라 하고,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 속한 모든 것’을 천적이라 합니다. 그리고 전자는 인간의 ‘이해’에, 후자는 ‘의지’에 속한다고 합니다.

 

바로 앞 AC.60에서는 창1:31의 ‘심히 좋았더라’가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루고, 그 결과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 사이에 결혼이 이루어지는 상태라고 설명했습니다. AC.61은 그 설명에 이어 ‘그러면 영적인 것이 무엇이고 천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아주 간결하게 밝혀 주는 글입니다.

 

먼저 ‘영적’이라는 말을 주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영적이다’라고 하면 세속적이지 않다거나, 신앙심이 깊다거나,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관심이 많다는 뜻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AC.61에서 스베덴보리는 훨씬 구체적인 뜻으로 사용합니다. ‘신앙에 관한 지식에 속하는 모든 것’을 영적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인간의 ‘이해’에 속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이해’는 단순히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는 결과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무엇이 참인지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분별하는 능력과 관계된 말입니다. 이 점은 연결된 심화에서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반면 ‘천적’이라고 하는 것은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 속한 모든 것’입니다. 이것들은 인간의 ‘의지’에 속합니다. 여기서 의지도 단순히 ‘의지가 강하다’, ‘무엇을 해내려는 의욕이 있다’는 일상적인 의미보다 넓게 읽어야 합니다. 사람이 무엇을 원하고 사랑하는가 하는 내적 생명의 한 능력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AC.61의 문장을 가장 단순하게 놓아 보면 이렇습니다. 신앙에 관한 지식에 속하는 것들은 이해에 관계되고,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 속하는 것들은 의지에 관계됩니다. 전자를 ‘영적’, 후자를 ‘천적’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영적인 것은 지식이고 천적인 것은 사랑이니, 영적인 것은 머리에만 있고 천적인 것만 실제 생명이라는 뜻인가?’ 그러나 AC.61을 그렇게 읽으면 곤란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두 종류의 것을 구별하고 있는 것이지, 영적인 것을 무가치한 지식으로 낮추고 천적인 것만 참된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앞 AC.60에서도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이 서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결혼’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구별되지만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또 ‘신앙에 관한 지식’을 단순한 성경 상식이나 교리 암기로만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물론 말씀과 교리를 배우고 아는 것이 포함되겠지만, AC에서 신앙에 관한 지식은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데 관계됩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이해’를 단순한 정보 저장소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단순한 따뜻한 감정으로만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것을 ‘의지’에 속한다고 하는 데에는 사람이 무엇을 실제로 원하고 사랑하는가 하는 문제가 들어 있습니다. 사랑은 단순히 어떤 대상에 좋은 느낌을 갖는 것보다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너무 쉽게 ‘이해 = 머리’, ‘의지 = 가슴’이라고 바꾸는 것도 조심하는 것이 좋습니다. 처음 설명하기에는 쉬운 비유지만, 이해와 의지는 신체 기관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인간의 내적 생명을 설명할 때 사용하는 두 근본적인 능력에 관한 말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을 알고 그것이 참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신앙에 관한 지식과 이해의 측면을 생각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실제로 이웃의 선을 원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면, 여기에는 의지와 사랑의 측면이 있습니다.

 

이 예는 AC.61의 구별을 이해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아는 것은 무조건 영적이고 행동하는 것은 무조건 천적이다’라는 공식으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행동의 근원이 어떤 사랑과 의지에 있는지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조심해야 할 것은 ‘영적’과 ‘천적’을 단순히 신앙의 낮은 단계와 높은 단계로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AC 전체에서는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가 매우 중요한 주제로 발전하지만, AC.61 자체는 ‘먼저 영적 인간이 된 다음 더 발전하면 천적 인간이 된다’는 단계표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특히 앞에서 이미 살펴본 것처럼 스베덴보리는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질서에 차이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영적 → 천적’이라는 하나의 직선적인 승급 과정으로 이해하면 앞으로의 AC를 읽을 때 오히려 혼란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AC.61이 말하는 만큼만 정확히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신앙에 관한 지식에 속하는 모든 것은 영적이고 이해에 속하며,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 속한 모든 것은 천적이고 의지에 속한다.’ 이것이 이 글의 직접적인 정의입니다.

 

그러면 왜 바로 앞 AC.60에서는 이 둘 사이에 ‘결혼’이 이루어진다고 했을까요? 이해와 의지,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서로 완전히 무관한 채 따로 존재하는 것이 거듭남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AC.60은 그것들이 하나를 이루는 상태를 말했고, AC.61은 그 결합을 이루는 두 종류의 것이 각각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여기서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 속한 모든 것’이라는 표현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천적인 것을 설명하면서 막연히 ‘사랑’이라고만 하지 않고 그 사랑의 방향을 분명히 합니다.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입니다.

 

따라서 자기 자신을 높이려는 사랑이나 세상을 지배하려는 사랑까지 단지 ‘사랑’이라는 이유로 천적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AC.61이 천적이라고 부르는 사랑은 구체적으로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입니다.

 

이 점은 처음 AC를 읽는 독자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사랑’을 강조한다고 해서 모든 종류의 사랑을 동일하게 선한 것으로 보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을 사랑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바로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 속한 모든 것’을 천적이라고 명시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의지에 속한다는 말은 신앙생활에서 사랑이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사람이 무엇을 실제로 원하고 사랑하는가는 그의 내적 생명과 깊이 관계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해를 버리고 사랑만 있으면 된다는 결론도 나오지 않습니다. 바로 앞 말씀의 속뜻은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이 ‘결혼’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이해와 의지,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서로 결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AC.60과 AC.61을 함께 읽으면 창1:31의 ‘심히 좋았더라’가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AC.60은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루기 때문에 ‘심히 좋았더라’라고 한다고 했고, AC.61은 그 가운데 신앙에 관한 지식에 속하는 것들은 영적이며 이해에 속하고,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 속하는 것들은 천적이며 의지에 속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이번 글을 읽으면서 ‘나는 영적 인간인가, 천적 인간인가?’부터 판정하려 하기보다 먼저 스베덴보리가 사용하는 언어를 정확히 익히는 것이 좋습니다. 앞으로 AC에서 ‘영적’, ‘천적’, ‘이해’, ‘의지’라는 말이 계속 등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설명의 출발점은 여전히 창1:31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AC.61은 말씀을 대신하여 인간에 관한 별도의 철학 체계를 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앞 AC.60에 이어 이 말씀의 ‘심히 좋았더라’ 안에 있는 신앙과 사랑,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의 결합을 좀 더 분명하게 밝혀 주고 있습니다.

 

심화

1. ‘understanding’을 왜 ‘이해’라고 번역하는가?

 

AC.61 심화 1, ‘understanding’에 대한 번역

AC.61 심화1. ‘understanding’을 왜 ‘이해’라고 번역하는가? AC.61에는 앞으로 AC에서 매우 자주 만나게 될 두 단어가 함께 나옵니다. ‘understanding’과 ‘will’입니다. 여기서는 각각 ‘이해’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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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2, 창1:31, 여섯 날의 거듭남 : 조금씩 하나님의 형상이 되어 가는 사람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1:31) AC.62인간의 거듭남에 속한 시간들과 상태들은 일반적으로도, 그리고 개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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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0, 창1:31, ‘심히 좋았더라’(AC.60-63)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And God saw everything that he had made, and behold it was very good.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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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0 심화

1.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은 무엇인가?

 

AC.60에는 매우 짧지만 중요한 표현이 나옵니다.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입니다. 그리고 이 둘이 하나를 이루기 때문에 창1:31의 상태가 ‘심히 좋았더라’라고 불린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가장 먼저 조심해야 할 것은 이것을 단순히 ‘신앙 = 아는 것’, ‘사랑 = 행동하는 것’으로 정의하는 것입니다. 처음 이해하기에는 편리하지만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신앙과 사랑의 의미를 너무 좁게 만들 수 있습니다.

 

신앙은 단순한 지식이 아닙니다. 어떤 성경 구절을 기억하거나 어떤 교리를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곧 신앙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에는 진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관계됩니다. 따라서 ‘신앙에 속한 것들’은 진리, 그것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 그리고 그 진리에 따라 생각하고 분별하는 것들과 관계된다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예를 들어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단순히 외우고 있다는 것은 기억 지식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의 말씀임을 인정하고, 이웃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비추는 진리로 받아들이며, 실제 상황에서 무엇이 옳은지를 분별하는 기준이 된다면 신앙에 속한 것과 더 깊이 관계됩니다.

 

‘사랑에 속한 것들’ 역시 단순한 감정이나 행동 하나와 같지 않습니다. 사랑은 사람이 무엇을 원하고 좋아하며 목적으로 삼는가 하는 의지의 생명과 관계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실제 삶에서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실제로 이웃의 선을 원하고, 그 사람에게 무엇이 참으로 유익한지를 생각하며, 가능한 범위에서 그 선을 행하려 한다면 사랑에 속한 것이 삶에 나타난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알면 신앙, 행동하면 사랑’이라는 공식은 피해야 합니다. 사람은 사랑 없이도 많은 종교적 행동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칭찬을 받기 위해 선행할 수도 있고, 자기 의를 드러내기 위해 봉사할 수도 있습니다. 겉으로 행동했다는 사실만으로 그 행동의 내적 사랑이 무엇인지 곧 판정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신앙 역시 단순히 머리에만 있는 정보가 아닙니다. AC.60에서 신앙에 속한 것들은 결국 사랑에 속한 것들과 ‘하나’를 이룹니다. 따라서 살아 있는 신앙을 단순한 지식 저장소처럼 생각하는 것도 맞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신앙에 속한 것들 = 진리와 그것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데 관계된 것들’, ‘사랑에 속한 것들 = 선과 그것을 원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데 관계된 것들’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조금 더 안전합니다.

 

바로 다음 AC.61은 이 문제를 한 걸음 더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신앙에 관한 지식에 속하는 모든 것을 ‘영적’이라고 하고,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에 속하는 모든 것을 ‘천적’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AC.60의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은 다음 글의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을 이해하는 준비가 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영적’과 ‘천적’의 전체 차이를 미리 다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AC는 순서대로 설명하고 있으므로 다음 글이 말할 몫은 다음 글에 남겨 두는 것이 좋습니다.

 

AC.60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둘이 ‘하나를 이룬다’는 사실입니다. 진리를 알고 인정하는 것과 선을 사랑하고 원하는 것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무엇이 옳은지 알면서도 전혀 다른 것을 원할 수 있습니다. 정직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 거짓을 통해 이익을 얻고 싶어 할 수도 있고,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마음으로는 계속 복수하기를 원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그가 알고 인정하는 진리와 그가 실제로 사랑하고 원하는 것은 아직 하나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AC.60이 ‘심히 좋았더라’라고 부르는 상태에서는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룹니다. 따라서 사람이 참되다고 인정하는 것과 그가 사랑하고 원하는 것이 서로 결합합니다.

 

이것을 단순히 ‘알던 것을 이제 실천한다’는 정도로만 이해하면 조금 부족합니다. 실천은 물론 중요하지만,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결합은 더 안쪽의 의지와 이해에 관계됩니다. 무엇이 참인지 인정하는 이해와 무엇이 선한지 사랑하는 의지가 서로 하나의 생명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AC.60은 이 결합을 단순한 협력이라고 하지 않고 ‘결혼’이라고 부릅니다.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 사이에 결혼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둘 가운데 하나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구별되면서 하나를 이룹니다.

 

이 대목은 말씀의 ‘심히 좋았더라’를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단지 ‘이 사람은 이제 성경을 많이 안다’고 보시고 ‘심히 좋았더라’고 하시는 것도 아니고, 단지 ‘좋은 행동을 많이 한다’고 하셔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AC.60의 설명에 따르면 그 깊은 이유는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진리와 선, 이해와 의지가 서로 분리된 채 각자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결합된 것입니다.

 

다만 이것을 가지고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내적 상태를 쉽게 판정해서는 안 됩니다. 겉으로 매우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는지는 우리가 완전히 알 수 없고, 많은 선행을 하는 사람의 가장 깊은 동기도 겉으로만 보고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이 설명은 ‘누가 여섯째 날 인간인가’를 분류하기 위한 도구라기보다, 거듭남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의 속뜻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결합을 인간 자신의 작품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창1:31은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라고 시작합니다. ‘심히 좋았더라’고 평가받는 상태도 하나님께서 지으신 창조의 결과입니다.

 

속뜻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자기 힘으로 생명 있게 만들고 사랑과 결혼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가운데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루게 됩니다.

 

따라서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을 가장 간단하게 구별한다면, 전자는 진리와 그것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데 관계된 것들이고, 후자는 선과 그것을 원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데 관계된 것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60이 정말 강조하는 것은 그 구별 자체보다 그 다음입니다. 이 둘이 ‘하나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하나 됨 때문에 말씀은 앞선 날들의 ‘좋았더라’를 넘어 여섯째 날에 이르러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합니다.

 

 

 

AC.60, 창1:31, ‘심히 좋았더라’(AC.60-63)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And God saw everything that he had made, and behold it was very good.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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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And God saw everything that he had made, and behold it was very good.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sixth day. (창1:31)

 

AC.60

이 상태를 ‘심히 좋았더라’(very good)라고 하는 이유는, 앞선 상태들을 단지 ‘좋았더라’(good)라고만 했던 것과 달리, 이제는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 사이에 결혼이 이루어집니다. This state is called “very good,” the former ones being merely called “good”; because now the things which are of faith make a one with those which are of love, and thus a marriage is effected between spiritual things and celestial things.

 

해설

AC.60은 창1:31의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는 말씀 가운데 특히 ‘심히 좋았더라’에 주목합니다. 앞선 창조의 날들에도 하나님께서는 지으신 것을 보시고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섯째 날에는 처음으로 ‘심히 좋았더라’고 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왜 여기에서만 ‘심히’라는 말이 더해지는지를 사람의 거듭남이라는 속뜻에서 설명합니다.

 

AC.60의 대답은 매우 간결합니다. 이제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 사이에 결혼이 이루어집니다.

 

여기서 먼저 중요한 것은 ‘심히 좋았더라’라는 말씀 자체입니다. AC는 이 말씀을 다른 표현으로 바꾸어 놓는 것이 아니라, 왜 말씀에서 앞선 상태들은 ‘좋았더라’라고 하고 이 상태에서는 ‘심히 좋았더라’라고 하는지 그 속뜻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해설의 중심도 언제나 창1:31의 이 말씀에 두는 것이 좋습니다.

 

‘좋았더라’와 ‘심히 좋았더라’의 차이는 단순히 앞의 것들도 좋았지만 마지막 것은 조금 더 좋았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AC.60은 그 차이를 신앙과 사랑의 관계에서 찾습니다. 앞선 상태에서는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아직 이렇게 ‘하나’를 이루는 상태로 설명되지 않았지만, 이제 여섯째 상태에서는 둘이 하나를 이룹니다.

 

그렇다고 앞선 상태의 신앙이나 선과 진리가 살아 있지 않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앞의 AC들에서도 이미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과 선과 진리를 말했습니다. 따라서 여섯째 날 이전의 상태를 ‘아직 죽어 있는 상태’, 여섯째 날을 ‘비로소 생명이 처음 생긴 상태’라고 구분할 필요는 없습니다.

 

AC.60이 직접 강조하는 것은 ‘하나가 됨’입니다. 신앙에 속한 것들이 따로 있고 사랑에 속한 것들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 그것들이 하나를 이룹니다. 이것이 ‘심히 좋았더라’라고 불리는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은 무엇일까요? 처음 AC를 읽는 독자에게는 이 표현이 조금 추상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현재 연결된 심화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만 메인에서는 신앙과 사랑을 단순히 ‘머리와 가슴’, 또는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 정도로만 축소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로 다음 AC.61에서 스베덴보리는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을 ‘영적’이라 하고, 사랑에 속한 모든 것을 ‘천적’이라 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AC.60은 그 다음 설명으로 들어가기 위한 문을 열어 줍니다. 여기서는 우선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가 되며, 이것이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의 ‘결혼’이라고 불린다는 사실을 붙들면 충분합니다.

 

‘결혼’이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신앙과 사랑이 함께 있다’고 하지 않고,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 사이에 ‘결혼이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하나 됨은 어느 한쪽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구별되는 것들이 결합하여 하나를 이루는 상태입니다.

 

다만 이번 한 문장만 가지고 ‘결혼’의 전체 교리를 펼칠 필요는 없습니다. 선과 진리의 결혼, 천상의 결혼, 의지와 이해의 결합 등은 AC 전체에서 계속 깊어지는 주제입니다. AC.60에서는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루는 것이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의 결혼이다’라는 직접적인 설명까지만 정확히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또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을 곧바로 서로 경쟁하는 높고 낮은 두 단계로 읽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번 문장에서는 둘 사이에 ‘결혼’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즉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것은 둘의 분리가 아니라 결합입니다.

 

그렇다고 ‘영적’과 ‘천적’의 차이가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결혼이라는 표현 자체가 둘의 구별을 전제로 합니다. 서로 다른 것이면서 하나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영적이고 무엇이 천적인지는 바로 다음 AC.61이 설명하므로, 여기에서 미리 지나치게 세분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신앙과 사랑이 하나가 된다는 것이 실제로 무슨 뜻인가?’라는 질문도 생길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말씀의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 실제로는 그것과 반대되는 것을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 그가 아는 것과 그가 사랑하는 것은 하나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그가 참된 것을 알고 그것을 사랑하며, 사랑하는 것과 믿는 것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면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룬다’는 말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AC.60의 문장을 독자가 이해하도록 돕기 위한 예이지, 이 한 가지 예가 ‘결혼’의 전체 뜻을 정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사랑’을 단순한 감정으로 이해하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사랑에 속한 것들이 신앙에 속한 것들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믿는 내용에 대해 따뜻한 감정을 느낀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사랑은 의지와 삶에 깊이 관계됩니다. 다만 이 부분 역시 이어지는 AC들이 더 자세히 설명합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을 단순히 교리 내용을 많이 아는 것으로 축소해서도 안 됩니다. 신앙에 속한 것들은 진리와 이해에 관계하지만, AC.60에서 말하는 상태는 그것들이 사랑에 속한 것들과 하나를 이루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신앙과 사랑을 서로 독립된 두 종교적 능력처럼 생각하기보다, 하나의 생명 안에서 결합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이 점에서 창1:31의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라는 말씀도 해설의 중심을 다시 주님께 돌려놓습니다. 이 상태를 ‘심히 좋았더라’고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보고 ‘이제 나는 충분히 거듭났고 심히 좋은 사람이 되었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심히 좋았더라’를 인간의 영적 자기평가 기준으로 사용해서도 안 됩니다. ‘나는 신앙과 사랑이 하나가 되었는가? 그렇다면 나는 여섯째 날 인간인가?’라고 자신의 영적 등급을 판정하는 것이 이 말씀의 목적은 아닙니다. AC는 창조의 날들을 통해 거듭남의 질서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이지, 사람에게 자기 영적 수준표를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또 현재의 여섯째 상태를 ‘거듭남의 최종 완성’이라고 부르는 것도 조금 조심하는 것이 좋습니다. 창1의 여섯째 날이 매우 높은 상태이고 ‘심히 좋았더라’고 불리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창2에는 일곱째 날이 이어지고, AC.62부터는 일곱째 날과 천적 인간의 상태가 설명됩니다.

 

따라서 AC.60의 ‘심히 좋았더라’를 가볍게 낮출 필요도 없지만, 뒤에 이어지는 일곱째 날의 몫까지 여기에 미리 가져와 ‘모든 거듭남의 최종 완성’이라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번 글이 말하는 만큼만 충분히 말하면 됩니다.

 

그렇다면 왜 앞선 상태들은 ‘좋았더라’이고 이번에는 ‘심히 좋았더라’일까요? AC.60의 답은 끝까지 단순합니다. 이제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 사이에 결혼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창세기 1장의 거듭남 흐름에서 매우 중요한 변화입니다. 사람에게 진리가 있고 신앙이 있다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이 사랑에 속한 것들과 하나를 이룹니다. 신앙과 사랑이 서로 분리되어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고 하나를 이루는 상태를 말씀은 ‘심히 좋았더라’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생명의 근원을 인간 자신에게 돌려서는 안 됩니다. 창1:31은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라고 합니다. 창조의 주체가 하나님이신 것처럼, 속뜻에서 진행되는 거듭남 역시 인간이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내는 새로운 창조가 아닙니다.

 

그래서 AC.60을 읽을 때 가장 마지막에 남아야 할 말도 인간의 성취보다 말씀의 선언이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AC.60은 바로 이 말씀의 ‘심히 좋았더라’ 안에,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루고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 사이에 결혼이 이루어지는 거듭남의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고 밝힙니다.

 

 

심화

1.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은 무엇인가?

 

AC.60 심화 1.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은 무엇인가?

AC.60 심화 1.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은 무엇인가? AC.60에는 매우 짧지만 중요한 표현이 나옵니다.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입니다. 그리고 이 둘이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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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1, 창1:31, '영적과 천적 : 이해의 신앙과 의지의 사랑이라는 인간 구조의 두 축'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1:31) AC.61 신앙에 관한 지식에 속하는 모든 것은 영적(靈的, spiritual)이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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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9, 창1:30, ‘모든 푸른 풀’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1:30) AC.59 여기서 자연적 인간의 음식으로 오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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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9 심화

2. 스베덴보리의 ‘수천의 영들에게 둘러싸인 경험’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AC.59 후반부에는 처음 AC를 읽는 사람이라면 그냥 지나가기 어려운 대목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수년 동안 육신 안에 있으면서 저 세상의 영들과 교류했으며, 가장 악한 영들과도 함께 있었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때로는 수천의 영들에게 둘러싸여 그들이 독을 내뿜고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자신을 괴롭히도록 허락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문장을 만나면 먼저 ‘정말 이런 일이 실제로 있었다는 말인가?’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AC.59 자체만 놓고 보면 대답은 분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비유나 상징적인 이야기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실제로 경험한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 경험의 역사적 사실성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스베덴보리 자신은 무엇이라고 주장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먼저 구별하는 것이 좋습니다. 적어도 저자의 말을 있는 그대로 읽는다면, 그는 이것을 실제 영계 경험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AC.59에서 더 중요한 질문은 ‘왜 이 이야기를 여기에서 하는가?’입니다. 이 경험담 바로 앞에서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사람을 매 순간, 아니 매 순간의 가장 작은 부분까지 보호하지 않으시면 사람이 즉시 멸망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말을 증언하기 위해 자신의 경험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수천의 영들이 자신을 둘러싸고 가능한 모든 방식으로 괴롭히도록 허락되었는데도 ‘머리카락 하나’ 해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자신의 영적 능력에서 찾지 않고 ‘주님의 보호’에서 찾습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를 ‘스베덴보리는 수천의 악령과 싸워 이길 정도로 대단한 영적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읽으면 본문의 중심이 뒤집힙니다. 그가 말하려는 것은 자기의 강함이 아니라 주님의 보호입니다.

 

‘머리카락 하나도 해를 입지 않았다’는 표현을 읽을 때에도 성경의 언어가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성경에는 주님의 보호를 말하면서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러나 AC.59이 여기서 그 성경 구절을 직접 인용하여 상응을 논증하는 것은 아니므로, 억지로 별도의 성경 해석을 덧붙일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한국어 독자에게는 주님의 보호를 표현하는 익숙한 성경적 언어와 자연스럽게 울림을 이루는 정도로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다.

 

또 ‘수천’이라는 숫자를 상징적인 숫자로 바꾸어 해석할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경험을 말하면서 실제로 매우 많은 영들에게 둘러싸였다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이 숫자를 가지고 영계의 집단 규모나 구조를 계산할 수도 없습니다. 이번 글의 중심은 숫자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왜 스베덴보리에게 이런 특별한 경험이 허용되었을까요? AC.59은 여기서 그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인류에게 영계의 비밀을 밝히는 사명을 받았기 때문에 반드시 이런 일을 겪어야 했다’고 이번 한 글만으로 단정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다른 저술들을 따라가면 그가 자신에게 영계가 열렸으며 보고 들은 것을 기록했다고 반복해서 말하는 것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AC.59의 이 특정 경험이 왜 허용되었는지는 더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판단해야 합니다.

 

또 이 경험을 모든 신앙인의 표준으로 삼아서도 안 됩니다. AC.59은 모든 거듭나는 사람이 영들을 눈으로 보고 그들과 대화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오랜 경험을 통해 ‘거듭나고 있는 사람들이’ 겪는 전투에 관하여 배웠다고 말합니다. 그의 특별한 경험과 모든 사람의 경험을 동일하게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체험이 강렬한 사람이 더 높은 신앙인이라는 결론도 나오지 않습니다. AC.59의 강조점은 얼마나 많이 보고 들었느냐가 아니라 인간이 주님의 보호 아래 있다는 사실입니다.

 

반대로 스베덴보리의 말을 존중해서 읽는다면 영과 영계를 전부 인간 심리의 비유로 환원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는 영의 세계와 그곳의 영들을 실제적인 것으로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의 저술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가 무엇을 실제라고 주장하는지를 그대로 받아들여 읽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모든 불안이나 나쁜 생각, 갑작스러운 감정의 변화를 곧바로 ‘악한 영의 공격’이라고 판정할 수 있다는 뜻도 아닙니다. AC.59은 그런 진단법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오늘 마음이 갑자기 불안하니 악한 영이 가까이 왔다’, ‘이런 생각이 떠올랐으니 어떤 영이 내게 넣은 것이다’라고 판단하는 것은 AC.59이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아간 적용입니다. 사람의 감정과 생각에는 신체적·심리적·환경적 요인도 있으므로 특정 느낌만으로 영적 원인을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이 경험담은 무엇을 말해 줄까요? 가장 먼저 AC.59 자체가 말하려는 것을 받아들이면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극심한 영적 적대 가운데서도 주님의 보호 때문에 자신이 해를 입지 않았다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해 영의 세계와 그 본성, 그리고 거듭나는 사람들이 겪는 전투에 관하여 배웠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독자에게 특별한 영적 체험을 추구하라고 권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거듭남의 전투와 그 가운데 있는 주님의 보호에 대한 증언입니다.

 

여기서도 AC보다 앞에 있는 것은 말씀입니다. 우리가 스베덴보리의 놀라운 영계 경험에 마음을 빼앗겨 그의 체험 자체를 신앙의 중심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AC의 역할은 독자의 관심을 스베덴보리 자신에게 묶어 두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해설하고 있는 말씀과 그 말씀의 주님께 돌려보내는 데 있어야 합니다.

 

실제로 AC.59에서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목적도 ‘나를 보라’가 아닙니다. ‘주님의 보호’를 증언하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에게 아무리 특별한 경험이 있었다 해도 생명과 안전의 근원은 자기에게 있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 한 번의 일반적인 설명만으로 독자에게 모든 것을 믿으라고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주제들은 일반적인 설명만으로 의심 없는 신앙을 갖게 할 만큼 충분히 가르칠 수 없으므로 세부 사항들을 뒤에서 계속 설명하겠다고 합니다.

 

우리도 같은 태도로 읽으면 좋겠습니다. ‘수천의 영들’이라는 놀라운 한 문장만 떼어 내어 영계의 전체 구조를 만들거나 스베덴보리의 특별함을 강조하기보다, AC 전체를 계속 따라가며 그가 무엇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확인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대목의 중심은 ‘수천의 영’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아닙니다. 그 수천의 영들에게 둘러싸인 상황에서도 ‘머리카락 하나도’ 해를 입지 않도록 그를 보호하신 주님입니다.

 

그래서 AC.59의 이 매우 특이한 경험담을 가장 안전하게 읽는 방법은 ‘스베덴보리가 얼마나 놀라운 영적 세계를 보았는가?’에서 멈추지 않고 ‘그가 이 경험을 통해 누구를 가리키고 있는가?’라고 묻는 것입니다. 그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사람을 매 순간 보호하시는 주님입니다.

 

 

 

AC.59, 창1:30, 거듭남의 전투 : 악한 영들의 공격과 주님의 보호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1:30) AC.59여기서 자연적 인간의 음식으로 오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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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9 심화 1. 왜 주님은 욕정과 거짓, 악한 영들의 작용을 즉시 제거하지 않으시는가?

AC.59 심화 1. 왜 주님은 욕정과 거짓, 악한 영들의 작용을 즉시 제거하지 않으시는가? AC.59에서 처음 읽는 사람을 가장 놀라게 하는 대목 가운데 하나는 이것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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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9 심화

1. 왜 주님은 욕정과 거짓, 악한 영들의 작용을 즉시 제거하지 않으시는가?

 

AC.59에서 처음 읽는 사람을 가장 놀라게 하는 대목 가운데 하나는 이것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신다면 그 안의 욕정과 거짓을 빨리 없애 주시면 될 것 같은데, 오히려 그것들이 한순간에 제거되지 않으며 악한 영들까지 오랫동안 그 사람과 함께 있도록 허락된다고 합니다. 도대체 왜 그러실까요?

 

먼저 AC.59 자체가 제시하는 이유를 정확히 보아야 합니다. 거듭나기 전에는 욕정들이 지배권을 가지고 있으며, 인간 전체가 욕정들과 거기에서 나온 거짓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한순간에 제거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인간 전체를 파괴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지금까지 획득해 온 생명이 바로 그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주님께서 창조하신 인간 자체가 악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또한 욕정과 거짓이 인간에게 꼭 필요한 좋은 것이므로 보존해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거듭나기 전 그 사람이 실제로 살아오면서 자기 것으로 획득한 생명의 상태입니다.

 

사람은 오랫동안 무엇인가를 사랑하고, 그 사랑에 따라 생각하고 판단하고 선택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 가운데 악한 욕정이 지배해 왔다면 욕정과 거기에서 나온 거짓은 몸에 묻은 먼지처럼 간단히 털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실제 삶과 깊이 얽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것을 한순간에 제거하여 사람 자체를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거듭나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악을 그대로 인정하거나 정당화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AC.59의 방향은 분명히 ‘개혁’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악한 영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사람과 함께 있도록 ‘허락됩니다’. 여기서 반드시 구별해야 할 것은 ‘허락하신다’와 ‘뜻하신다’입니다. 악한 영들의 악은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악을 행하라고 명령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악한 영들은 자기 성질에 따라 사람의 욕정을 자극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작용이 마지막 결과를 결정하지는 못합니다. AC.59은 그렇게 자극된 욕정들이 수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느슨해지고, 마침내 ‘주님에 의해’ 선을 향해 기울어질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이 문장에서 가장 중요한 주어는 결국 ‘주님’입니다. 악한 영들이 욕정을 선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악한 영들이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을 개혁하시고 선을 향해 이끄시는 분은 주님입니다.

 

그렇다면 왜 욕정을 자극하게 하시는가, 자극된 욕정이 왜 느슨해지는가 하는 질문이 남습니다. 그러나 AC.59은 그 세부적인 과정을 여기서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빈칸을 너무 빨리 채울 필요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욕정이 드러나야 사람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악이 나타나지 않으면 선을 자기 것으로 선택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면 그럴듯하지만, 그것은 적어도 AC.59이 이 자리에서 직접 설명하는 내용은 아닙니다. 인간의 자유와 시험에 관한 다른 AC들을 충분히 살펴본 뒤 더 정확하게 연결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글에서는 스베덴보리가 직접 말하는 데까지 가면 충분합니다. 악과 거짓은 사람의 획득된 생명에 깊이 얽혀 있기 때문에 한순간에 제거되지 않습니다. 악한 영들이 욕정을 자극하도록 허용되고, 그 욕정들은 여러 방식으로 느슨해지며, 마침내 주님께서 그것들을 선을 향해 기울이십니다.

 

여기서 한 가지 오해도 피해야 합니다. ‘악이 즉시 없어지지 않는다면 굳이 악과 싸울 필요가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AC.59의 주제 자체가 ‘전투’입니다. 악이 즉시 제거되지 않는다는 것은 악을 용납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거듭남이 실제 전투를 포함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자기 안에서 이전의 욕정이 다시 올라오는 것을 발견했다고 해서 곧 ‘나는 전혀 거듭나지 않았구나’라고 단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AC.59의 설명대로라면 거듭남의 과정 자체에 옛 생명과의 전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반대로 ‘이 욕정도 주님께서 아직 남겨 두신 것이니 괜찮다’며 합리화해서도 안 됩니다. 욕정은 여전히 선과 진리에 반대되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주님께서 그것을 즉시 제거하지 않으신다는 것과 그것을 선하다고 인정하신다는 것은 전혀 다른 말입니다.

 

또 이 원리를 다른 사람에게 너무 쉽게 적용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주님도 악을 당장 없애지 않으시니 다른 사람의 잘못도 그냥 두어야 한다’는 목회 원칙이나 교육 원칙이 AC.59에서 곧바로 나오지는 않습니다. 신적 섭리의 방식과 인간이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식은 구별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AC.59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무엇보다 주님께서 한 인간을 얼마나 깊이 아시면서 거듭나게 하시는가 하는 점입니다. 사람에게 얽혀 있는 악과 거짓을 단순히 잘라 내는 대상으로만 보지 않으시고, 그 사람 자체를 파괴하지 않으면서도 마침내 선을 향해 이끄십니다.

 

그리고 악한 영들의 악한 의도조차 주님의 다스림 밖으로 벗어나 마지막 결과를 결정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선과 진리를 미워하지만, 그들의 미움이 주님의 목적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AC.59에서 ‘악한 영들이 허락된다’는 놀라운 말을 읽을 때 악한 영들에게 시선을 빼앗기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본문의 중심은 그들이 아닙니다. 그들의 작용 가운데서도 사람을 버리지 않으시고, 그 사람의 옛 생명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마침내 선을 향해 이끄시는 주님이 중심입니다.

 

 

 

AC.59 심화 2. 스베덴보리의 ‘수천의 영들에게 둘러싸인 경험’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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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9, 창1:30, 거듭남의 전투 : 악한 영들의 공격과 주님의 보호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1:30) AC.59여기서 자연적 인간의 음식으로 오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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