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to every wild animal of the earth, and to every fowl of the heavens, and to every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 wherein is a living soul, every green herb for food; and it was so. (창1:30)

 

AC.58

같은 사람의 자연적 음식이 여기서 설명됩니다. 그의 자연적인 것은 ‘땅의 들짐승’(wild animal of the earth)과 ‘하늘의 새’(fowl of the heavens)로 상징되며, 이들에게는 먹을 것으로 채소와 풀의 푸른 것이 주어집니다. 그의 자연적 음식과 영적 음식 둘 다 시편에 이렇게 묘사됩니다. The natural meat of the same man is here described. His natural is signified by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and by the “fowl of the heavens,” to which there are given for food the vegetable and the green of the herb. Both his natural and his spiritual food are thus described in David:

 

그가 가축을 위한 풀과 사람을 위한 채소를 자라게 하시며 땅에서 먹을 것이 나게 하셔서 (시104:14) Jehovah causeth the grass to grow for the beast, and herb for the service of man, that he may bring forth bread out of the earth (Ps. 104:14),

 

여기서 ‘가축’(beast)이라는 말은, 같은 시편의 11절과 12절에 언급된 ‘들짐승’과 ‘공중의 새’ 모두를 포함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where the term “beast” is used to express both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and the fowl of the heavens which are mentioned in verses 11 and 12 of the same psalm.

 

11각종 들짐승에게 마시게 하시니 들나귀들도 해갈하며 12공중의 새들도 그 가에서 깃들이며 나뭇가지 사이에서 지저귀는도다 (시104:11, 12)

 

해설

AC.58은 바로 앞 AC.56-57에서 설명한 ‘음식’이라는 주제를 계속 이어 갑니다. AC.56에서는 천적 인간에게는 천적 음식이, 영적 인간에게는 영적 음식이, 자연적 인간에게는 자연적 음식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어 AC.57에서는 영적 인간의 음식이 ‘씨 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로 표현된다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이제 AC.58은 ‘같은 사람의 자연적 음식’을 설명합니다.

 

여기서 첫 문장의 ‘같은 사람’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람으로 화제를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앞에서 다루고 있는 그 사람에게 영적인 것이 있는 것처럼 자연적인 것도 있으며, 이제 그 자연적인 것에 주어지는 음식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곧바로 ‘인간 안에 자연적·영적·천적 세 층이 동시에 하나의 구조로 존재한다’는 전체 인간론까지 완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AC.58이 직접 말하는 것은 훨씬 단순합니다. ‘같은 사람의 자연적 음식’이 있으며, 그의 자연적인 것이 ‘땅의 들짐승’과 ‘하늘의 새’로 상징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땅의 들짐승’과 ‘하늘의 새’를 함께 그 사람의 ‘자연적인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두 표현을 우리가 임의로 더 세분하지 않는 것입니다. 현재 해설에서는 들짐승을 ‘자연적 애정’, 새를 ‘자연적 사고와 기억 지식’이라고 나누었지만, AC.58 자체는 그렇게 각각의 의미를 정의하지 않습니다.

 

물론 앞의 AC들에서는 짐승과 새가 각각 애정과 이해·지적인 것들과 관련하여 설명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상응은 단순한 고정 사전처럼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이번 AC.58에서는 스베덴보리가 직접 ‘들짐승’과 ‘새’를 묶어 ‘그의 자연적인 것’이라고만 말합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그 범위를 그대로 지키는 것이 좋습니다.

 

이 자연적인 것들에게 음식으로 주어지는 것은 ‘채소와 풀의 푸른 것’입니다. 이것이 이번 글의 직접적인 중심입니다. 앞의 AC.57에서 영적 인간의 음식은 ‘씨 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라는 표현으로 설명되었는데, 이번에는 자연적인 것들에게 주어지는 음식이 더 단순하게 채소와 풀의 푸른 것으로 표현됩니다.

 

다만 이것을 곧바로 ‘자연적 인간은 외적 지식과 경험의 결과물만 먹는다’거나 ‘자연적 음식은 생명을 직접 낳지 못한다’고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AC.58은 그런 세부적인 성질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왜 자연적 인간에게 이런 음식만 주어지는지는 바로 다음 AC.59에서 더 자세히 설명됩니다. 따라서 그 이유를 미리 완성하기보다 다음 글에 남겨 두는 것이 좋습니다.

 

이 점은 AC.58과 AC.59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AC.58은 ‘무엇이 자연적 음식인가’를 말하고, AC.59는 ‘왜 그 자연적 인간에게 채소와 풀의 푸른 것만 음식으로 주어지는가’를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이번 글에서 그 이유를 지나치게 많이 만들어 넣으면 다음 AC.59의 몫을 앞질러 가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 시104:14을 인용합니다. ‘그가 가축을 위한 풀과 사람을 위한 채소를 자라게 하시며 땅에서 먹을 것이 나게 하셔서’라는 말씀입니다. 이 구절은 자연적 음식과 영적 음식이 말씀 안에서 함께 묘사되는 예로 제시됩니다.

 

여기서 시104:14을 너무 복잡하게 풀 필요는 없습니다. AC.58이 이 구절을 인용하는 직접적인 목적은 ‘가축을 위한 풀’과 ‘사람을 위한 채소’라는 표현을 통해 자연적 음식과 영적 음식이 함께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현재 해설에서는 ‘가축을 위한 풀’을 자연적 애정에게 공급되는 기초적 선과 진리, ‘사람을 위한 채소’를 이성적 이해에 공급되는 더 높은 진리라고 자세히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AC.58은 그렇게 해설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시104:14의 모든 표현을 독립적인 상응 체계로 풀려면 다른 AC의 충분한 근거가 더 필요합니다.

 

또 ‘사람을 위한’이라는 표현을 가지고 ‘자연적 생명은 영적·천적 생명을 섬기기 위해 존재한다’는 전체 질서를 바로 끌어낼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 생각은 스베덴보리의 인간론 전체에서는 관련될 수 있지만, AC.58의 직접 설명은 아닙니다.

 

시104:14 뒤에 스베덴보리는 한 가지 언어상의 설명을 덧붙입니다. 이 시편에서 ‘가축’(beast)이라는 말이 같은 시편 11절과 12절에 등장하는 ‘들짐승’과 ‘공중의 새’를 함께 표현하는 말로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설명도 처음에는 조금 낯설 수 있습니다. 왜 새까지 ‘가축’이라는 말 안에 포함한다고 할까요?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자연과학적 분류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시104의 문맥에서 ‘beast’라는 표현이 앞서 언급된 들짐승과 새를 함께 포괄하는 방식으로 사용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을 ‘짐승과 새는 상응적으로 모두 자연적 생명 영역이므로 하나의 범주다’라고 우리가 더 큰 체계로 확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AC.58이 직접 말하는 만큼만 받아들이면 충분합니다. 같은 시편 11절과 12절에 언급된 들짐승과 새를 14절의 ‘가축’이라는 말이 함께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번 글에서 또 하나 주의할 것은 자연적인 것을 곧바로 악한 것으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AC.58은 그 사람의 자연적인 것이 있고, 그것에 맞는 음식이 주어진다고 말할 뿐입니다. 자연적인 것 자체가 악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 점은 앞의 AC.56에서도 이미 보았습니다. 자연적 인간은 자연적인 것들로 기뻐하며, 그의 음식은 주로 기억 지식으로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자연적인 지식이나 자연적인 삶 자체를 악이라고 한 것은 아닙니다. 자연적인 것은 인간에게 실제로 존재하는 하나의 영역이며, 그것에 맞는 음식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반대로 자연적 음식만으로 모든 영적 생명이 충분하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AC.56-57은 이미 영적 인간에게 영적 음식이 따로 있다고 구별했습니다. 따라서 자연적 음식과 영적 음식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이번 AC.58은 그 둘을 구별하면서도 같은 사람 안에서 함께 다룹니다.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여기서 이런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연적인 것은 영적인 것보다 낮고 가치가 없는 것인가?’ 그러나 AC.58만으로 그렇게 결론 내릴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은 우열의 평가보다 각 영역에 맞는 음식의 차이를 설명합니다.

 

또 ‘자연적인 것은 반드시 영적인 것을 섬겨야 한다’는 결론도 이번 글에서는 조금 기다리는 편이 좋습니다. 그런 질서는 이후 거듭남 전체를 통해 더 분명히 드러나겠지만, AC.58의 중심은 자연적 음식이 무엇으로 묘사되는가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글은 오히려 단순하게 읽는 것이 좋습니다. 앞에서는 영적 인간의 음식이 설명되었고, 이제 같은 사람의 자연적인 것에 주어지는 음식이 설명됩니다. 그의 자연적인 것은 ‘땅의 들짐승’과 ‘하늘의 새’로 상징되고, 그들에게는 채소와 풀의 푸른 것이 음식으로 주어집니다.

 

그리고 시104:14은 자연적 음식과 영적 음식이 함께 묘사되는 말씀의 예로 인용됩니다. ‘가축을 위한 풀’과 ‘사람을 위한 채소’가 각각의 음식으로 나타납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가축’이라는 말이 같은 시편에 앞서 나오는 들짐승과 새를 함께 표현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이 AC.58이 직접 말하는 전부에 가깝습니다. 짧은 글이지만 다음 AC.59로 넘어가기 위한 중요한 준비가 됩니다. 왜 자연적 인간에게 ‘채소와 풀의 푸른 것’만 음식으로 주어지는지는 아직 설명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다음 글에서 거듭남의 전투와 연결되어 훨씬 더 깊게 밝혀집니다.

 

따라서 이번 AC.58은 ‘자연적 음식이 더 높은 생명을 섬기는 질서’를 완성하는 글이라기보다, 다음 설명을 위한 사실을 먼저 제시하는 글로 읽는 것이 정확합니다. 같은 사람에게 영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이 있으며, 자연적인 것에도 그에 맞는 음식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그 이유는 AC.59에 남겨 둡니다.

 

 

 

AC.59, 창1:30, 거듭남의 전투 : 악한 영들의 공격과 주님의 보호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1:30) AC.59여기서 자연적 인간의 음식으로 오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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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7, 창1:29, ‘씨 맺는 채소’, ‘열매 맺는 나무’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창1:29) AC.57 ‘씨 맺는 채소’(herb bearing seed)는 쓰임을 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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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7 심화

1, ‘쓰임을 지향하는 모든 진리’란 무엇인가?

 

AC.57의 첫 문장은 처음 읽으면 꽤 낯섭니다. ‘씨 맺는 채소는 쓰임을 지향하는 모든 진리이다.’ 진리는 참이면 참인 것이지, 왜 스베덴보리는 진리에 굳이 ‘쓰임을 지향한다’는 말을 붙였을까요?

 

먼저 영어 표현을 그대로 보면 ‘every truth which regards use’입니다. 여기서 regards는 단순히 ‘관찰한다’는 뜻보다 ‘향한다’, ‘목적으로 삼는다’, ‘관련되어 있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따라서 ‘쓰임을 지향하는 진리’라는 번역은 진리가 어떤 목적을 바라보고 있다는 뜻을 살린 표현입니다.

 

가장 먼저 주의할 것은 여기서 ‘쓰임’이 현대적인 의미의 ‘실용성’과 같지 않다는 점입니다. ‘이 진리가 당장 돈이 되는가?’, ‘문제를 빨리 해결해 주는가?’, ‘생활에 바로 써먹을 수 있는가?’라는 뜻의 usefulness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쓰임’은 훨씬 깊은 개념입니다. 어떤 것이 선한 목적을 섬기며, 주님께서 세우신 질서 안에서 다른 것의 유익을 위해 기능하는가와 관계됩니다. 따라서 진리가 쓰임을 지향한다는 것은 진리가 단지 머릿속에 저장되거나 지적 만족을 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선한 삶을 섬기는 방향을 가진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예를 들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진리를 안다고 해봅시다. 그 문장을 정확하게 설명하고 원어까지 분석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의 목적이 다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 진리는 결국 실제로 이웃을 선하게 대하고, 무엇이 그 이웃에게 참된 선인지 분별하며, 그 선을 위해 행동하는 삶을 향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진리 → 즉시 행동’이라는 단순 공식으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진리는 먼저 생각을 바로잡고, 어떤 진리는 오랜 시간 사람의 판단을 형성하며, 어떤 진리는 시험 가운데서 비로소 깊이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쓰임을 지향한다’는 것은 모든 진리가 듣자마자 곧바로 눈에 보이는 행동 하나를 만들어 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또 ‘행동만 하면 진리가 쓰임을 이룬다’는 뜻도 아닙니다. 사람은 잘못된 생각에서 매우 열심히 행동할 수도 있습니다. 선한 의도라고 생각하면서 실제로는 이웃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 선과 진리가 함께 중요하다는 원리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진리는 선을 섬기지만, 선 또한 진리에 의해 올바른 방향을 받아야 합니다.

 

이 점에서 AC.57의 표현은 앞의 AC.44와도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이해가 말씀을 듣고 의지가 그것을 행한다고 했습니다.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것은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을 분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진리는 사람 안에 들어와 삶과 결합하는 방향을 가집니다.

 

그러나 ‘쓰임’은 단지 ‘내가 무엇인가 좋은 일을 했다’는 개별 행동보다 넓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술 전체에서는 인간의 직무, 관계, 사회생활, 천국의 질서까지 모두 쓰임과 연결되어 설명됩니다. 각 존재가 전체를 위해 어떤 선한 기능을 하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AC.57 한 문장에서 쓰임의 전체 교리를 모두 끌어올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씨 맺는 채소’가 단순한 추상적 진리가 아니라 ‘쓰임을 바라보는 진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씨 맺는 채소’일까요? 현재 심화에서는 채소가 빨리 자라고 낮게 자라므로 ‘초기의 진리’, 나무는 오래 살고 깊이 뿌리내리므로 ‘성숙한 선’이라고 설명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AC.57은 이런 자연적 특징들을 근거로 해설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채소 = 초보 단계’, ‘나무 = 성숙 단계’라는 고정표를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직접 제시한 대응은 ‘씨 맺는 채소 = 쓰임을 지향하는 모든 진리’, ‘열매 맺는 나무 = 신앙의 선’입니다. 그 이상은 문맥에서 충분한 근거가 있을 때만 더 나아가는 것이 좋습니다.

 

‘씨’라는 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씨가 다른 생명을 낳는다는 자연적 특징은 이해를 도울 수 있지만, 이번 글에서는 씨 자체의 상응을 독립적으로 풀지 않습니다. ‘씨 맺는 채소’라는 전체 표현이 진리를 뜻한다고 먼저 받아들이는 것이 안전합니다.

 

그러면 ‘쓰임을 향하지 않는 진리’도 있을까요? 이 질문은 조금 구별해서 보아야 합니다. 객관적으로 참된 진리는 본래 선한 질서를 섬기는 방향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그 진리를 자기 지식과 우월감, 논쟁과 지배의 수단으로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 문제는 진리 자체보다 그 진리를 받아들이고 사용하는 인간의 상태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말씀의 진리를 많이 알면서도 그것을 다른 사람을 정죄하거나 자기의 우월함을 드러내는 데 사용한다면, 지식으로는 진리를 가지고 있어도 그 진리가 그의 삶 안에서 본래의 선한 쓰임을 이루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반대로 아주 많은 교리를 알지 못해도 자신이 아는 진리를 성실하게 삶에 적용하여 이웃의 선을 섬기는 사람은 그 진리가 쓰임을 향하도록 받아들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조심해야 합니다. ‘쓰임’이라고 하면 언제나 남에게 눈에 띄는 봉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의 쓰임은 자녀를 돌보는 것일 수도 있고, 정직하게 직무를 수행하는 것일 수도 있으며, 정확하게 판단하는 것, 약속을 지키는 것, 해를 끼치지 않는 것처럼 겉으로 작아 보이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쓰임의 규모가 아니라 선한 목적을 섬기는가 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쓰임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해서 모두가 큰 종교적 사역이나 특별한 봉사를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리고 쓰임은 사람의 자기 공로를 세우는 방식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나는 이런 쓰임을 하고 있으므로 영적으로 높은 사람이다’라고 생각한다면 쓰임의 외형은 유지하면서도 그 중심은 자기 사랑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AC.57의 문맥에서 영적 음식은 주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리가 쓰임을 향하고 그 쓰임이 실제 선으로 나타나는 것의 근원 역시 인간 자신에게 두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받아들이고 행하지만 생명과 선과 진리의 근원은 주님입니다.

 

이것이 ‘쓰임을 지향하는 진리’를 이해할 때 매우 중요한 균형입니다. 진리는 삶을 향합니다. 그러나 그 삶을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내어 공로를 쌓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진리가 사람 안에서 선한 목적과 결합하여 실제 쓰임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는 ‘아는 것’과 ‘사는 것’을 서로 적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지식을 경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이 무엇을 믿고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 먼저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아는 것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진리가 쓰임을 지향한다는 말은 ‘이론은 필요 없고 행동만 중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른 행동을 위해 바른 진리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진리가 진리답게 살아 있으려면 선한 목적과 쓰임을 향해야 합니다.

 

따라서 AC.57의 표현을 가장 간단하게 풀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쓰임을 지향하는 진리’란 자기 안에서 끝나는 진리가 아니라 선한 삶과 선한 목적을 섬기도록 주어진 진리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씨 맺는 채소’가 영적 인간의 음식이라고 불리는 이유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영적 인간은 단지 많은 사실과 교리를 축적하는 것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은 진리를 선한 쓰임을 향하도록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AC.57을 읽으며 ‘나는 얼마나 많은 진리를 알고 있는가?’라는 질문만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보다 더 깊은 질문은 ‘내가 아는 진리가 무엇을 향하고 있는가?’입니다. 자기 지식과 자기 확증을 향하는가, 아니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선과 이웃의 유익을 향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AC.57, 창1:29, ‘씨 맺는 채소’, ‘열매 맺는 나무’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창1:29) AC.57 ‘씨 맺는 채소’(herb bearing seed)는 쓰임을 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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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And God said, Behold, I give you every herb bearing seed which is upon the faces of all the earth, and every tree in which is fruit; the tree yielding seed, to you it shall be for food. (창1:29)

 

AC.56

천적 인간은 오직 천적인 것들로 기뻐하는데, 이것들은 그의 삶과 일치하기 때문에 이르기를 ‘천적 음식’(celestial food)이라 합니다. 영적 인간은 영적인 것들로 기뻐하며, 이것들 역시 그의 삶과 일치하므로 이르기를 ‘영적 음식’(spiritual food)이라 합니다. 자연적 인간도 마찬가지로 자연적인 것들로 기뻐하는데, 이것들은 그의 삶에 속하므로 이르기를 ‘음식’(food), 곧 ‘먹을거리’라 하며, 주로 기억 지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여기서는 영적 인간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그의 영적 음식을 표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곧 ‘씨 맺는 채소’(herb bearing seed)와 ‘열매 맺는 나무’(tree in which is fruit)로 묘사되며, 이것들은 일반적으로 ‘씨 가진 나무’(tree yielding seed)라 합니다. 그의 자연적 음식은 다음 절에서 설명됩니다. The celestial man is delighted with celestial things alone, which being in agreement with his life are called celestial food. The spiritual man is delighted with spiritual things, and as these are in agreement with his life they are called spiritual food. The natural man in like manner is delighted with natural things, which, being of his life, are called food, and consist chiefly of memory-knowledges. As the spiritual man is here treated of, his spiritual food is described by representatives, as by the “herb bearing seed,” and by the “tree in which is fruit,” which are called, in general, the “tree yielding seed.” His natural food is described in the following verse.

 

해설

AC.56은 창1:29의 ‘먹을거리’를 설명하면서 매우 흥미로운 관점을 제시합니다. 천적 인간에게는 천적 음식이 있고, 영적 인간에게는 영적 음식이 있으며, 자연적 인간에게는 자연적 음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음식은 육체가 먹는 자연적인 음식이 아니라 각각의 인간이 무엇으로 기뻐하며, 무엇이 그의 삶과 일치하는가를 나타내는 영적인 의미의 음식입니다.

 

스베덴보리가 가장 먼저 말하는 것은 천적 인간입니다. 천적 인간은 ‘오직 천적인 것들로 기뻐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천적인 것들이 그의 삶과 일치하기 때문에 ‘천적 음식’이라고 부릅니다. 이어 영적 인간은 영적인 것들로 기뻐하며, 그것들이 그의 삶과 일치하기 때문에 ‘영적 음식’이라고 합니다. 자연적 인간 역시 자연적인 것들로 기뻐하고, 그것들이 그의 삶에 속하기 때문에 ‘음식’이라고 하며, 그것은 주로 기억 지식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먼저 주의할 것은 천적·영적·자연적 인간을 단순히 ‘높음 → 중간 → 낮음’이라는 세 칸짜리 단계표로 읽지 않는 것입니다. AC.56의 직접적인 관심은 세 부류의 서열을 정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각각의 삶에는 그 삶과 일치하여 기쁨을 주는 것이 있고, 그래서 그것을 ‘음식’이라고 부른다는 점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기뻐하는 것’을 음식이라고 부를까요? AC.56은 음식의 상응에 대한 전체 교리를 여기서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문장 자체에서 중요한 단서를 줍니다. 천적인 것들은 천적 인간의 ‘삶과 일치’하고, 영적인 것들은 영적 인간의 ‘삶과 일치’하며, 자연적인 것들은 자연적 인간의 ‘삶에 속하기’ 때문에 음식이라고 불립니다. 따라서 여기서 음식은 단순히 머리로 알고 있는 정보가 아니라 그 사람의 삶에 맞으며 그가 기쁨을 얻는 것과 관계됩니다.

 

이것은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느냐만 보면 그 사람의 영적 수준을 정확히 판정할 수 있다’는 간단한 진단법을 주려는 말은 아닙니다. 사람에게는 동시에 여러 종류의 기쁨이 있고, 자연적인 기쁨 자체가 악한 것도 아닙니다. AC.56의 요점은 훨씬 제한적입니다. 천적·영적·자연적 인간에게 각각 그 삶과 일치하는 것들이 있고, 그것들이 그들에게 음식이라고 불린다는 것입니다.

 

천적 인간이 ‘천적인 것들로 기뻐한다’고 할 때에도 이를 곧바로 ‘사랑 자체만으로 기뻐하며 더 이상 진리의 매개가 필요 없다’고 풀 필요는 없습니다. 앞의 AC.51-53에서 천적 인간이 의지에 속한 사랑에서 출발한다는 설명을 보았지만, AC.56은 여기서 천적 음식의 세부 성질을 정의하지 않습니다. 그저 천적 인간은 자기 삶과 일치하는 천적인 것들로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영적 인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영적인 것들로 기뻐한다고 해서 ‘아직 사랑에 도달하지 못하고 진리만 먹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앞의 AC.48에서 영적 인간은 이미 신앙으로부터뿐 아니라 사랑으로부터도 행동하기 시작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글의 ‘영적 음식’을 사랑과 분리된 진리나 교리 지식으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이 점에서 ‘음식’과 단순한 ‘정보’를 구별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어떤 사람이 영적인 사실을 많이 알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 그의 영적 음식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AC.56은 음식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그것이 ‘그의 삶과 일치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지식의 보유량보다 그 사람이 어떤 종류의 삶 안에 있으며 무엇으로 기뻐하는지가 이번 표현의 중심에 더 가깝습니다.

 

자연적 인간의 경우에는 스베덴보리가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그의 음식은 자연적인 것들이며 ‘주로 기억 지식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기억 지식은 앞의 AC.40에서도 만났습니다. 외부에서 배우고 기억에 저장하는 지식들입니다. 이런 지식 자체를 낮거나 악한 것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자연적 인간의 삶에 속하는 중요한 재료이며, 이후 영적인 것들이 받아들여지는 데에도 쓰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자연적 음식 = 세상적 성공과 쾌락’이라고 단순화하는 것은 AC.56보다 좁습니다. 본문이 직접 예로 드는 것은 오히려 기억 지식입니다. 자연적 인간은 자연적 차원에 속하는 것들로 기뻐하며, 그 음식은 주로 기억 지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것이 선하게 사용되는지 악하게 사용되는지는 또 다른 문제이며, AC.56은 여기서 그것을 논하지 않습니다.

 

이번 글에서 특히 중요한 문장은 ‘여기서는 영적 인간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입니다. 창1의 현재 문맥이 영적 인간을 다루고 있으므로, 창1:29에 나오는 음식도 영적 인간의 음식으로 해석됩니다. 그리고 그 음식이 ‘씨 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라는 표상으로 묘사된다고 합니다.

 

여기서 서둘러 ‘씨 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의 세부 속뜻을 만들어 넣을 필요는 없습니다. AC.56은 아직 그것들을 각각 무엇이라고 해석하지 않고, 영적 인간의 음식이 이 두 가지 표상으로 묘사된다고만 합니다. 바로 다음 AC.57에서 스베덴보리가 이 두 표현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므로 그 해석은 다음 글의 몫으로 남겨 두는 것이 좋습니다.

 

따라서 ‘풀은 생명이 있지만 오래 지속되지 않는 상태’, ‘나무는 더 안정되었지만 아직 천적 사랑에는 이르지 못한 상태’, ‘씨는 앞으로 더 높은 생명으로 발전할 잠재력’이라고 이번 글에서 미리 정리하는 것은 피하는 편이 좋습니다. 그런 설명은 AC.56의 직접 내용이 아니며, 다음 AC.57이 실제로 말하는 해석과도 어긋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씨 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를 일반적으로 ‘씨 가진 나무’라고 부른다고 덧붙입니다. 이 표현 역시 이번 글에서 별도의 성장 단계로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들이 영적 인간에게 주어진 영적 음식을 표상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창1:29의 ‘내가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는 말은 단순히 최초 인간에게 채식을 명령하는 구절을 넘어, 속뜻에서는 영적 인간에게 주어지는 음식에 관한 말씀으로 읽힙니다. 다만 AC.56은 이 한 문장에서 음식의 모든 상응을 완성하지 않습니다. 천적·영적·자연적 음식의 차이를 간단히 제시하고, 현재 문맥에서 영적 인간의 음식이 무엇으로 표상되는지를 밝히는 데 그칩니다.

 

여기서 ‘주신다’는 표현도 눈여겨볼 수 있지만, 이번 AC가 그 단어의 속뜻을 따로 해설하지 않으므로 지나치게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앞의 AC.39 이후의 큰 흐름을 기억하면, 참된 선과 진리와 생명의 근원이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라는 원리는 그대로 유지됩니다. 영적 음식 역시 인간이 자기 안에서 스스로 만들어 내는 생명의 근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56에서 처음 읽는 독자에게 가장 흥미로운 표현은 아마 ‘그의 삶과 일치하기 때문에’일 것입니다. ‘내 삶과 일치하는 것이 음식이고, 그래서 그것으로 기뻐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것은 이번 문장의 표현을 넘어 사람의 기쁨과 삶의 관계를 생각하게 하는 좋은 질문이므로 별도의 심화에서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다만 여기서부터 곧바로 ‘내가 무엇에서 기뻐하는지만 보면 내가 자연적 인간인지 영적 인간인지 천적 인간인지 알 수 있다’고 자기 진단을 시작할 필요는 없습니다. 순간적인 즐거움 하나와 한 사람의 삶 전체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AC.56이 말하는 것은 각각의 인간에게 그의 ‘삶과 일치하는’ 것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의 기쁨은 한순간의 감정이라기보다 삶의 성질과 관계하여 읽는 편이 안전합니다.

 

또 자연적인 것에서 기뻐한다고 해서 그것 자체로 자연적 인간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영적 인간도 자연계에서 살며 음식, 휴식, 학문, 가족, 일과 같은 자연적인 선을 기쁘게 누릴 수 있습니다. AC.56의 구별을 ‘무엇을 조금이라도 즐기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이 그 사람의 삶에 속하고 그 삶과 일치하는가의 문제로 읽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따라서 AC.56의 핵심을 ‘천적 인간은 사랑을 먹고, 영적 인간은 진리를 먹고, 자연적 인간은 지식을 먹는다’는 세 문장으로만 압축하면 너무 단순해집니다. 어느 정도 기억을 돕는 표현은 될 수 있지만, 본문이 강조하는 ‘삶과 일치함’이라는 중요한 조건이 빠지기 때문입니다.

 

또 ‘거듭남이란 먹는 음식이 자연적 음식에서 영적 음식으로, 다시 천적 음식으로 바뀌는 과정’이라고 정리하는 것도 AC.56이 직접 말하는 범위를 넘어갑니다. 특히 앞에서 보았듯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관계를 모든 사람이 차례로 통과하는 하나의 직선 단계표로만 보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AC.56은 훨씬 단순하면서도 깊은 사실을 말합니다. 사람에게는 그의 삶과 일치하여 그가 기뻐하는 것들이 있고, 말씀은 그것을 ‘음식’이라는 언어로 표현합니다. 천적 인간에게는 천적 음식이, 영적 인간에게는 영적 음식이, 자연적 인간에게는 자연적 음식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창1에서 다루는 것은 영적 인간이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씨 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가 그의 영적 음식으로 제시됩니다.

 

그 두 음식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는 바로 다음 AC.57에서 밝혀집니다. 따라서 AC.56은 그 해석을 미리 완성하기보다 ‘사람에게도 영적인 음식이 있으며, 그 음식은 그의 삶과 일치하여 그를 기쁘게 하는 것’이라는 기본 원리를 붙들고 다음 글로 넘어가게 하는 짧은 연결 글로 읽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심화

1. ‘그의 삶과 일치하기 때문에 기뻐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AC.56 심화 1, ‘그의 삶과 일치하기 때문에 기뻐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AC.56.심화1. ‘그의 삶과 일치하기 때문에 기뻐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AC.56에는 비슷한 문장이 세 번 반복됩니다. 천적 인간은 천적인 것들로 기뻐하며 그것들이 그의 삶과 일치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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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7, 창1:29, ‘씨 맺는 채소’, ‘열매 맺는 나무’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창1:29) AC.57 ‘씨 맺는 채소’(herb bearing seed)는 쓰임을 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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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5, 창1:28, ‘생육, 번성', '결혼한 땅’, '땅에 충만', '풀, 나무, 공중의 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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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And God blessed them, and God said unto them,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 and subdue it; and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heavens, and over every living 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 (창1:28)

 

AC.55

태고의 사람들은 이해와 의지, 곧 신앙과 사랑의 결합을 결혼이라 했기 때문에, 그 결혼에서 생겨나는 선의 모든 것은 ‘생육’(fruitfulness)이라 했고, 진리의 모든 것은 ‘번성’(multiplications)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들 가운데서도 이런 표현들이 사용되는데요, 예를 들어 에스겔입니다. As the most ancient people called the conjunction of the understanding and the will, or of faith and love, a marriage, everything of good produced from that marriage they called “fruitfulness,” and everything of truth, “multiplications.” Hence they are so called in the prophets, as for instance in Ezekiel:

 

11내가 너희 위에 사람과 짐승을 많게 하되 그들의 수가 많고 번성하게 할 것이라 너희 전 지위대로 사람이 거주하게 하여 너희를 처음보다 낫게 대우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12내가 사람을 너희 위에 다니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 이스라엘이라 그들은 너를 얻고 너는 그 기업이 되어 다시는 그들이 자식들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리라 (겔36:11, 12) I will multiply upon you man and beast, and they shall multiply and be fruitful, and I will cause you to dwell as in your ancient times, and will do better unto you than at your beginnings, and ye shall know that I am Jehovah, yea, I will cause man to walk upon you, even my people Israel (Ezek. 36:11–12).

 

여기서 ‘사람’(man)은 이스라엘이라 하는 영적 인간을 뜻하고, ‘전 지위’(ancient times)는 태고교회를, ‘처음’(beginnings)은 홍수 이후의 고대교회를 뜻합니다. 이 본문에서 진리에 속한 ‘수가 많음’(multiplication)이 먼저 언급되고, 선에 속한 ‘번성’(fruitfulness, 앞에서는 multiplications을 ‘번성’으로 번역, 서로 다른 영어를 같은 한글 단어로 번역한 바람에 헷갈릴 수 있으니 주의해야)이 그다음에 언급되는 이유는, 이미 거듭난 사람이 아니라 이제 거듭나게 될 사람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By “man” is here meant the spiritual man who is called Israel; by “ancient times,” the most ancient church; by “beginnings,” the ancient church after the flood. The reason why “multiplication,” which is of truth, is first mentioned, and “fruitfulness,” which is of good, afterwards, is that the passage treats of one who is to become regenerated, and not of one who is already regenerated.

 

[2] 이해가 의지와 결합하거나, 신앙이 사랑과 결합할 때, 주님께서는 그 사람을 ‘결혼한 땅’(a married land)이라 하십니다. 이사야입니다. When the understanding is united with the will, or faith with love, the man is called by the Lord “a married land,” as in Isaiah:

 

다시는 너를 버림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임이라 (사62:4) Thy land shall be no more termed waste, but thou shalt be called Hephzibah [my delight is in her], and thy land Beulah [married], for Jehovah delighteth in thee, and thy land shall be married (Isa. 62:4).

 

이 결합에서 나오는 진리의 열매들을 ‘아들’(sons)이라 하고, 선의 열매들을 ‘딸’(daughters)이라 하는데, 이는 말씀 전반에서 매우 자주 나타나는 표현입니다. The fruits thence issuing, which are of truth, are called “sons,” and those which are of good are called “daughters,” and this very frequently in the Word.

 

[3] 땅이 ‘가득 차게 된다’(replenished)는 것은 진리와 선이 많아진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에게 복을 주시고 말씀하실 때, 곧 그에게 역사하실 때, 선과 진리는 헤아릴 수 없이 증가합니다. 주님께서 마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The earth is “replenished,” or filled, when there are many truths and goods; for when the Lord blesses and speaks to man, that is, works upon him, there is an immense increase of good and truth, as the Lord says in Matthew:

 

31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32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마13:31, 32) The kingdom of the heavens is like to a grain of mustard seed, which a man took and sowed in his field, which indeed is the least of all seeds, but when it is grown, it is the greatest among herbs, and becometh a tree, so that the birds of the heavens come and build their nests in the branches thereof (Matt. 13:31–32).

 

‘겨자씨 한 알’(grain of mustard seed)은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되기 전의 선을 뜻하는데, 그것이 ‘모든 씨 가운데 가장 작다’(the least of all seeds)고들 하는 이유는, 그가 자기가 하는 선을 자기한테서 난 거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자기한테서 나는 건 실상 악밖에 없는데도 말입니다. 그러나 아직 거듭남의 상태 중에 있기 때문에, 그 안에는 선이 있습니다. 비록 그것이 가장 작은 선, 보잘것없어 보이는 선일지라도 말입니다. A “grain of mustard seed” is man’s good before he becomes spiritual, which is “the least of all seeds,” because he thinks that he does good of himself, and what is of himself is nothing but evil. But as he is in a state of regeneration, there is something of good in him, but it is the least of all.

 

[4] 마침내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면 그것은 크게 자라 ‘풀’(herb)이 되고, 결합이 완성되면 ‘나무’(tree)가 됩니다. 그리고 이 나무의 가지에 ‘공중의 새들’(birds of the heavens), 곧 진리들, 지적인 것들이 깃드는데(build their nests in its branches), 이 가지들은 기억 지식(memory-knowledges)입니다. 사람이 영적 인간일 때, 그리고 영적 인간이 되어 가는 동안에는 전투 상태에 있기 때문에,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subdue the earth and have dominion)는 말씀이 덧붙여집니다. At length as faith is joined with love it grows larger, and becomes an “herb”; and lastly, when the conjunction is completed, it becomes a “tree,” and then the “birds of the heavens” (in this passage also denoting truths, or things intellectual) “build their nests in its branches,” which are memory-knowledges. When man is spiritual, as well as during the time of his becoming spiritual, he is in a state of combat, and therefore it is said, “subdue the earth and have dominion.”

 

해설

AC.55는 앞의 AC.54에서 설명한 ‘결혼’에서 무엇이 나오는지를 다룹니다. AC.54에서 태고교회 사람들은 영적 인간 안의 이해를 남자, 의지를 여자라 했고, 이 둘이 하나로 작동할 때 그것을 결혼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제 AC.55에서는 그 결혼을 이해와 의지의 결합, 또는 신앙과 사랑의 결합이라고 다시 말하면서, 그 결합에서 산출되는 선과 진리를 창1:28의 ‘생육하고 번성하라’와 연결합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의 사람들이 이 결혼에서 생겨나는 선에 속한 모든 것을 ‘생육’(fruitfulness)이라 하고, 진리에 속한 모든 것을 ‘번성’ 또는 ‘증가’(multiplications)라고 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생육 = 질, 번성 = 양’과 같은 일반적인 구별이 아닙니다. AC.55가 직접 제시하는 대응은 선과 진리입니다. 결혼에서 선이 산출되는 것을 생육이라 하고, 진리가 산출되는 것을 번성이라 한 것입니다.

 

이것은 앞의 AC.43과도 연결됩니다. 거기에서도 ‘생육하다’는 사랑에 속한 것들에, ‘번성하다’는 신앙에 속한 것들에 적용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AC.55는 갑자기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 이미 제시된 생육과 번성의 의미를 이제 이해와 의지, 신앙과 사랑의 ‘결혼’과 연결하여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결혼에서 선과 진리가 나온다’는 표현도 자연적인 출산을 그대로 영적인 과정에 옮겨 놓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이 이해와 의지, 신앙과 사랑의 결합을 결혼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그 결합에서 산출되는 것들도 결혼에서 생겨나는 열매의 언어로 표현했다는 것입니다. 결합은 정지된 상태가 아니라 선과 진리를 산출하는 살아 있는 결합으로 묘사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보여 주기 위해 먼저 겔36:11-12을 인용합니다. 여기서 ‘사람’은 이스라엘이라 불리는 영적 인간을 뜻하고, ‘전 지위’는 태고교회를, ‘처음’은 홍수 이후의 고대교회를 뜻한다고 직접 설명합니다. 그리고 특히 ‘증가’(multiplication)가 먼저 나오고 ‘생육’(fruitfulness)이 뒤에 나오는 순서에 주목합니다.

 

왜 진리에 속한 증가가 먼저이고 선에 속한 생육이 뒤에 나올까요? AC.55의 답은 분명합니다. 이 구절이 ‘이미 거듭난 사람’이 아니라 ‘거듭나게 될 사람’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의 AC.52-53에서도 영적 인간에게서는 이해와 신앙에 속한 것이 먼저이고 사랑에 속한 것이 뒤따른다는 설명을 보았습니다. 여기에서도 그 질서와 연결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을 ‘거듭남의 모든 초기 단계에서는 반드시 지식의 양이 먼저 늘어나고 나중에 선이 들어온다’는 세밀한 공식으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AC.55가 직접 밝히는 것은 겔36의 이 문맥에서 진리에 속한 증가가 먼저 언급되는 이유입니다. 말씀의 순서에 의미가 있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그 한 문장을 모든 사람의 거듭남에 대한 획일적인 시간표로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어지는 사62:4에서는 또 하나의 아름다운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해가 의지와 결합하거나 신앙이 사랑과 결합할 때 사람을 주님께서 ‘결혼한 땅’이라고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곧 ‘결혼한 땅’이라고 부르는 말씀을 인용합니다.

 

여기서 ‘땅은 언제나 인간을 뜻한다’고 고정적으로 정의할 필요는 없습니다. AC.55가 이 구절을 인용하는 직접적인 이유는 이해와 의지, 신앙과 사랑이 결합한 상태가 말씀에서 ‘결혼한 땅’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이 인용은 앞의 AC.54에서 시작된 ‘결혼’이라는 주제를 이어 줍니다.

 

그 결합에서 나오는 열매들 가운데 진리에 속한 것은 ‘아들’, 선에 속한 것은 ‘딸’이라고 한다는 설명도 이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말씀 전반에서 매우 자주 나타난다고 합니다. 여기서도 우선 AC.55가 말하는 만큼만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아들 = 진리에 속한 열매’, ‘딸 = 선에 속한 열매’입니다. 이를 곧바로 현실의 남성과 여성의 성질에 대한 설명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 대목은 바로 앞 AC.54에서 교회가 선에 대한 애정 때문에 ‘딸’, ‘처녀’, ‘아내’라고 불린다고 했던 설명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말씀에서 가족과 결혼의 언어는 단순히 자연적인 혈연관계를 넘어 인간 안의 선과 진리 및 그 결합과 산출을 표현하는 데 사용됩니다. 다만 각각의 표현이 등장할 때에는 그 문맥에서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무엇을 뜻한다고 설명하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그다음 창1:28의 ‘땅에 충만하라’가 설명됩니다. 땅이 ‘가득 차는 것’은 진리와 선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사람에게 복을 주시고 말씀하신다는 것은 곧 그에게 역사하시는 것이며, 그때 선과 진리는 헤아릴 수 없이 증가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생육과 번성의 주체를 인간 자신의 능력으로 돌리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증가의 근원은 주님의 복과 역사입니다.

 

이것은 앞의 AC.39 이후 계속 이어진 원리와도 일치합니다. 사람에게 참으로 살아 있는 선과 진리가 있다면 그것의 근원은 주님입니다. AC.43에서도 주님에게서 생명을 가진 것은 생육하고 번성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55에서는 같은 원리가 ‘땅에 충만하라’는 말씀과 연결됩니다. 주님께서 역사하실 때 사람 안의 선과 진리가 풍성해집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마13:31-32의 겨자씨 비유를 인용합니다. 여기서 특히 주의할 것은 AC.55가 겨자씨를 무엇이라고 해석하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겨자씨 한 알’을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되기 전의 선’이라고 직접 말합니다. 따라서 이것을 곧바로 ‘처음 주어진 작은 진리’라고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왜 그 선이 ‘모든 씨 가운데 가장 작은 것’일까요? 사람은 그때 자신이 선을 자기에게서 행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은 악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 사람이 거듭남의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 안에는 어떤 선이 있으며,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가장 작은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대목은 처음 읽는 독자에게 상당히 어려울 수 있습니다.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은 악밖에 없다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선이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핵심은 선의 근원과 사람이 그것을 자기 것으로 느끼는 상태를 구별하는 데 있습니다. 사람은 아직 선을 자기에게서 행한다고 생각하지만, 거듭남 가운데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이 그 안에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앞의 AC.39에서 사람이 처음에는 선과 진리를 자기에게서 나온 것처럼 생각하도록 허용된다는 설명과 함께 읽으면 이해하기가 조금 쉬워집니다.

 

그 후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사랑과 결합함에 따라 그것이 자라 ‘풀’이 되고, 마지막으로 그 결합이 완성되면 ‘나무’가 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AC.55가 직접 제시한 진행입니다. 처음에는 매우 작은 선으로 표현된 겨자씨가 있고,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면서 자라 풀이 되며, 그 결합이 완성될 때 나무가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씨 = 진리’, ‘풀 = 삶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진리’, ‘나무 = 완전히 안정된 영적 구조’라는 별도의 단계표를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이번 문맥에서 겨자씨는 스베덴보리가 명시적으로 ‘선’이라고 했습니다. ‘풀’에 대해서도 AC.55는 식물 자체의 성질을 하나하나 영적인 특징과 대응시키지 않습니다. 풀이 부드럽고 잘 흔들린다는 자연적 특징에서 겸손이나 유연성을 끌어내는 것은 흥미로운 묵상이 될 수는 있지만 AC.55의 해설로 제시할 근거는 없습니다.

 

나무가 되었을 때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듭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새들이 진리들 또는 지적인 것들을 뜻하고, 가지들은 기억 지식이라고 직접 설명합니다. 따라서 작은 선에서 시작된 것이 신앙과 사랑의 결합 가운데 성장하면서, 마침내 진리와 지적인 것들이 기억 지식이라는 가지에 깃들 수 있는 상태가 묘사됩니다.

 

이것을 보면 AC.55에서 지식과 기억 지식은 결코 무가치한 것이 아닙니다. 앞의 AC.40에서도 기억 지식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주님에게서 오는 신앙으로 살아 있게 되는가가 중요했습니다. 여기에서도 기억 지식은 나무의 ‘가지’가 되어 진리와 지적인 것들이 깃드는 자리가 됩니다. 문제는 지식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생명과 결합하여 어떤 질서 안에 놓이는가입니다.

 

마지막 문장은 새로운 주제를 엽니다. ‘사람이 영적 인간일 때, 그리고 영적 인간이 되어 가는 동안에는 전투 상태에 있기 때문에,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말씀이 덧붙여진다.’ 여기서 창1:28의 ‘정복하라’와 ‘다스리라’가 거듭남의 전투와 연결됩니다.

 

따라서 ‘정복하고 다스린다’는 말을 자연계나 다른 사람에 대한 지배욕의 정당화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AC.55의 속뜻에서는 영적 인간의 전투 상태와 관계됩니다. 다만 이 한 문장만으로 전투의 대상과 방식, 시험의 전체 구조를 세세하게 완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직접 밝히는 것은 영적 인간에게 전투가 있으며, 그 때문에 ‘정복하라’와 ‘다스리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이 전투를 단순히 ‘아직 천적 인간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기는 싸움’이라고 정리하는 것도 피하는 편이 좋습니다. AC.55의 직접 표현은 ‘영적 인간일 때’와 ‘영적 인간이 되어 가는 동안’ 전투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천적 인간과의 관계는 이후 AC가 더 설명하도록 남겨 두는 것이 좋습니다.

 

AC.55 전체를 다시 보면 하나의 흐름이 보입니다. 먼저 이해와 의지, 신앙과 사랑의 결합이라는 ‘결혼’이 있습니다. 그 결혼에서 선과 진리가 산출되어 ‘생육’과 ‘번성’이 일어납니다. 주님께서 복을 주시고 역사하실 때 그 선과 진리는 크게 증가하여 ‘땅에 충만’하게 됩니다. 그리고 영적 인간은 그 과정에서 전투를 겪기 때문에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창1:28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속뜻에서 단순히 무엇인가가 많아진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이해와 의지, 신앙과 사랑의 결합 안에서 선과 진리를 산출하고 풍성하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풍성함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내는 성취가 아니라 주님께서 복을 주시고 말씀하실 때, 곧 사람 안에 역사하실 때 이루어지는 증가입니다.

 

 

 

AC.56, 창1:29,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AC.56-57)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And God said, Behold, I give you every herb bearing seed which is upon the fa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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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4, 창1:27, ‘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1:27) AC.54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가 속뜻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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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1:27)

 

AC.54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가 속뜻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태고교회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말씀의 속뜻이 그들의 후손들 가운데서 사라지자, 이 아르카나 역시 함께 사라졌습니다. 그들의 결혼은 행복과 기쁨의 주된 근원이었고, 그래서 그들은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결혼에 비유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그 안에 담긴 행복을 느끼고 인식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또한 내적인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오직 내적인 것들, 즉 속의 것들로만 기뻐했습니다. 겉의 것들은 눈으로 보기만 했고, 그것들이 무엇을 나타내는지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겉의 것들은 그것들이 그들의 생각을 속의 것들, 곧 내적인 것들로, 그리고 거기서 천적인 것들로, 결국에는 그들의 모든 것 되신 주님께로 돌이키게 해줄 때에만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천상의 결혼을 생각했으며, 그들은 자기들의 결혼이 누리는 행복이 바로 거기에서 온다고 퍼셉션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영적 인간 안에 있는 이해(understanding)를 남자라 불렀고, 의지(will)를 여자라 불렀으며, 이 둘이 하나로 작동할 때, 그것을 결혼(marriage)이라 불렀습니다. 그 교회로부터 이런 식으로 말하는 방식이 전해져 내려왔는데, 그로 인해 선에 대한 애정으로 교회를 가리켜 ‘딸’(daughter)과 ‘처녀’(virgin), 곧 ‘시온의 처녀’(virgin of Zion), ‘예루살렘의 처녀’(virgin of Jerusalem)라 하였고, 또한 ‘아내’(wife)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 주제들에 대해서는 다음 장 23절과 3장 15절에서 더 보게 될 것입니다. What is meant by “male and female,” in the internal sense, was well known to the most ancient church, but when the interior sense of the Word was lost among their posterity, this arcanum also perished. Their marriages were their chief sources of happiness and delight, and whatever admitted of the comparison they likened to marriage, in order that in this way they might perceive its felicity. Being also internal men, they were delighted only with internal things. External things they merely saw with the eyes, but thought of what was represented. So that outward things were nothing to them, save as these could in some measure be the means of causing them to turn their thoughts to internal things, and from these to celestial things, and so to the Lord who was their all, and consequently to the heavenly marriage, from which they perceived the happiness of their marriages to come. The understanding in the spiritual man they therefore called male, and the will female, and when these acted as a one they called it a marriage. From that church came the form of speech which became customary, whereby the church itself, from its affection of good, was called “daughter” and “virgin”—as the “virgin of Zion,” the “virgin of Jerusalem”—and also “wife.” But on these subjects see the following chapter, at verse 23, and chapter 3, verse 15.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창2:23)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창3:15)

 

해설

AC.54는 창1:27의 마지막 표현인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를 설명합니다. 자연적인 뜻에서는 물론 남성과 여성의 창조를 말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속뜻에서 ‘남자와 여자’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태고교회 사람들이 잘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아르카나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태고교회 사람들이 결혼과 자연계의 외적인 것들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를 길게 설명합니다.

 

여기서 처음 읽는 독자가 주의할 것은 AC.54가 자연적인 남녀나 실제 결혼을 부정하고 그것을 단지 인간 심리의 비유로 바꾸려는 글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실제 결혼이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매우 큰 행복과 기쁨의 근원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결혼이라는 자연적 현실을 통해 더 내적인 결합을 보았습니다. 자연적인 결혼과 그 속뜻 가운데 하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외적인 것 안에서 내적인 것을 보았다는 것이 이번 글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 사람들의 결혼이 그들에게 ‘행복과 기쁨의 주된 근원’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무엇이든 결혼에 비유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면 결혼에 비유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결혼의 행복을 지각했습니다. 오늘날 독자에게는 조금 낯선 표현이지만, 이 문장은 태고교회가 ‘결합’을 얼마나 중요하게 보았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런데 그들이 결혼을 바라보는 방식은 외적인 모습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AC.54는 그들을 ‘내적인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외적인 것들을 눈으로 보았지만, 생각으로는 그것들이 무엇을 표상하는지를 보았습니다. 외적인 것 자체가 그들에게 아무 의미도 없었다는 말은 자연계의 사물이나 삶을 무가치하게 여겼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의 요점은 외적인 것이 그 자체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외적인 것을 보면 그들의 생각은 그것이 표상하는 내적인 것으로 향했고, 내적인 것에서 다시 천적인 것으로, 그리고 마침내 ‘그들의 모든 것’이신 주님께로 향했습니다. 이 흐름은 AC를 처음 읽는 사람에게 상응과 표상이라는 것이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보여 주는 매우 좋은 사례입니다. 자연적인 것을 버리고 영적인 것만 보았다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것 안에서 더 내적인 것을 보았고 궁극적으로 주님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자연계는 막다른 곳이 아니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이 생각을 그 자체에 붙잡아 두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실재를 향하게 했습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기들의 결혼을 경험하면서 그들은 그보다 더 내적인 ‘천상의 결혼’을 생각했고, 자기들의 결혼에서 누리는 행복이 바로 그 천상의 결혼에서 온다고 퍼셉션했습니다.

 

여기서 ‘천상의 결혼’이라는 말이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상당히 어렵습니다. 이것을 곧바로 ‘천국에 가면 이루어지는 남녀의 결혼’만으로 이해해서도 안 되고, 반대로 실제 남녀의 결혼과 아무 관계가 없는 추상적인 심리 현상으로만 이해해서도 곤란합니다. AC.54 자체에서는 이 용어의 전체 교리를 아직 펼치지 않습니다. 다만 태고교회 사람들이 자연적인 결혼의 행복을 더 높은 결합에서 오는 것으로 퍼셉션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이 개념은 앞으로도 AC에서 매우 중요하게 등장하므로 별도의 심화에서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이 설명을 거쳐 스베덴보리는 마침내 창1:27의 ‘남자와 여자’가 속뜻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밝힙니다. ‘그들은 영적 인간 안에 있는 이해를 남자라 불렀고, 의지를 여자라 불렀으며, 이 둘이 하나로 작동할 때 그것을 결혼이라 불렀다.’ 이것이 AC.54의 핵심 문장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남자 = 이해’, ‘여자 = 의지’라는 대응이 나옵니다. 다만 이것을 곧바로 현실의 모든 남성은 이해를 대표하고 모든 여성은 의지를 대표한다는 심리적 성별론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AC.54가 직접 말하는 것은 ‘영적 인간 안에 있는’ 이해와 의지입니다. 한 인간 안에 있는 두 기능을 남자와 여자라는 결혼의 언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남성에게는 이해만 있고 여성에게는 의지만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AC.54의 속뜻에서 한 영적 인간 안에 이해와 의지가 있고, 그 둘의 관계가 남자와 여자의 관계로 표현됩니다. 따라서 이 글을 현실 남녀의 지적 능력이나 감정적 성향을 분류하는 근거로 사용하는 것은 본문의 범위를 벗어납니다.

 

또 ‘남자 = 이해’, ‘여자 = 의지’라는 대응을 지나치게 기계적인 사전처럼 사용할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 창1:27의 속뜻을 설명하면서 태고교회의 결혼에 대한 인식과 영적 인간 안의 이해와 의지의 결합을 연결합니다. 이후 다른 문맥에서 ‘남자’, ‘여자’, ‘남편’, ‘아내’ 등이 등장할 때에는 그 문맥에서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다시 보아야 합니다.

 

AC.54가 특히 강조하는 것은 이해와 의지가 각각 따로 있다는 사실보다 ‘이 둘이 하나로 작동할 때’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그것을 ‘결혼’이라고 불렀습니다. 이해와 의지의 구별은 결합을 위한 구별입니다. 둘이 없어져 하나의 기능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서로 구별되면서 하나로 작동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53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AC.53에서는 이해에 속한 신앙과 의지에 속한 사랑을 구별했습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뒤따르고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앞선다고 했습니다. 이제 AC.54에서는 이해와 의지가 ‘하나로 작동할 때’ 그것을 결혼이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앞에서는 둘의 질서를 구별했다면 이번에는 둘의 결합에 시선이 놓입니다.

 

그렇다고 ‘이해에 들어온 진리가 의지로 내려가 사랑이 되면 그것이 곧 결혼이다’라는 하나의 고정된 거듭남 공식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특히 영적 인간의 진행을 설명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되는 표현일 수 있지만, 앞의 AC.52-53에서 천적 인간은 의지에 속한 사랑이 먼저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AC.54의 더 근본적인 요점은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로 변한다는 데 있지 않고, 이해와 의지가 하나로 작동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 구별은 우리가 앞에서 보아 온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영적 생명은 한쪽 기능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AC.54 자체는 ‘이해 = 진리 = 신앙’, ‘의지 = 선 = 사랑’이라는 모든 대응 관계를 한꺼번에 체계화하는 글은 아닙니다. 지금 이 글이 직접 말하는 만큼을 붙들면 충분합니다. 영적 인간의 이해를 남자, 의지를 여자라 했고, 둘이 하나로 작동할 때 그것을 결혼이라 했습니다.

 

그런 다음 스베덴보리는 이 태고교회에서 하나의 언어 습관이 비롯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교회 자체가 선에 대한 애정 때문에 ‘딸’과 ‘처녀’, 예를 들어 ‘시온의 처녀’, ‘예루살렘의 처녀’라고 불렸으며 또한 ‘아내’라고도 불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씀에서 교회가 여성적 표현으로 등장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중요한 단서입니다.

 

여기서도 ‘교회 = 여자’라는 하나의 고정된 공식만 기억하기보다 왜 그런 표현이 사용되는지를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AC.54가 직접 밝히는 이유는 ‘선에 대한 애정’입니다. 교회가 선에 대한 애정과 관련되기 때문에 딸·처녀·아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주제에 대해서는 창2:23과 창3:15에서 더 보게 될 것이라고 직접 예고합니다. 따라서 지금 여기서 ‘아내로서의 교회’, ‘여자와 여자의 후손’, ‘남편과 아내의 모든 상응’을 미리 완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AC 자체가 뒤에서 다시 다루겠다고 하므로 그때까지 남겨 두는 것이 오히려 전체 흐름을 따라가는 좋은 독법입니다.

 

AC.54에서 또 하나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태고교회의 상태입니다. 그들은 단순히 상응에 관한 지식을 많이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대로라면 외적인 것을 보면서 그것이 표상하는 내적인 것을 생각했고, 거기서 천적인 것으로, 마침내 주님께로 생각이 향했습니다. 상응은 그들에게 외워 둔 상징 사전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과 관계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오늘날 AC를 읽으며 상응을 공부할 때에도 중요한 주의를 줍니다. ‘남자 = 이해’, ‘여자 = 의지’라고 외우는 것만으로 태고교회의 인식에 도달하는 것은 아닙니다. AC.54에서 태고교회의 시선은 외적인 것에서 내적인 것으로, 내적인 것에서 천적인 것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주님께 향합니다. 상응의 목적은 자연적인 상징 자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더 내적인 것과 주님을 보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시선 안에서 결혼은 특별한 의미를 가졌습니다. 그들의 실제 결혼은 행복과 기쁨의 주된 근원이었고, 그 행복의 근원을 더 높은 천상의 결혼에서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해와 의지가 하나로 작동하는 것도 ‘결혼’이라고 불렀습니다. 서로 다른 둘이 각자의 성질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구별된 채 하나로 작동하는 것이 결혼이라는 표현 속에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AC.54의 중심을 ‘남자는 이성적이고 여자는 감정적이다’라는 자연적 성별 구분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실제 결혼은 중요하지 않고 인간 내면의 이해와 의지만 중요하다고 읽어서도 안 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자연적인 결혼은 더 내적인 결합을 비추는 귀한 표상이었고, 그들은 자기들의 결혼의 행복이 천상의 결혼에서 온다고 퍼셉션했습니다.

 

결국 AC.54는 창1:27의 ‘남자와 여자’를 통해 인간 안의 두 기능이 어떻게 하나를 이루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해와 의지는 구별되지만 하나로 작동할 때 ‘결혼’이라 불립니다. 그리고 이 결혼의 언어는 인간 개인 안에서 끝나지 않고 교회를 ‘딸’, ‘처녀’, ‘아내’라고 부르는 말씀의 표현으로까지 이어집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결합의 시선은 더 깊이 들어가면 천적인 것으로, 마침내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모든 것’이셨던 주님께 향합니다.

 

심화

1. ‘천상의 결혼’이란 무엇인가?

 

AC.54 심화 1, ‘천상의 결혼’이란 무엇인가?

AC.54.심화1. ‘천상의 결혼’이란 무엇인가? AC.54에는 매우 중요한 표현 하나가 등장합니다. ‘천상의 결혼’(heavenly marriage)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자기들의 결혼이 주는 행복이 이 천상의 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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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5, 창1:28, ‘결혼의 열매 : 신앙과 사랑의 결합에서 생육과 번성이 일어나는 거듭남의 확장'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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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3, 창1:27,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AC.53-54)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And God created man in his own image, in the image of God created he him;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창1:27) AC.53 여기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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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And God created man in his own image, in the image of God created he him;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창1:27)

 

AC.53

여기서 ‘형상’(image)이 두 번 언급되는 이유는, 이해에 속한 신앙을 ‘자기 형상’(his image)이라 하며, 의지에 속한 사랑을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이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은 영적 인간에게서는 뒤따르지만, 천적 인간에게서는 앞서 나옵니다. The reason why “image” is here twice mentioned is that faith, which belongs to the understanding, is called “his image”; whereas love, which belongs to the will, and which in the spiritual man comes after, but in the celestial man precedes, is called the “image of God.”

 

해설

AC.53은 매우 짧습니다. 그러나 바로 앞 AC.51-52에서 설명한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 신앙과 사랑, 이해와 의지의 관계를 창1:27의 문장 자체와 연결하는 중요한 글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이번에 주목하는 것은 ‘형상’이라는 말이 한 절 안에서 왜 두 번 반복되는가 하는 점입니다.

 

창1:27은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라고 합니다. 영어로도 ‘And God created man in His own image, in the image of God created He him’이라고 하여 image가 두 번 나옵니다. 우리는 이것을 같은 뜻을 강조하기 위한 단순한 반복으로 읽기 쉽지만, 스베덴보리는 두 번의 ‘형상’을 서로 구별하여 읽습니다.

 

첫 번째 ‘형상’, 곧 ‘자기 형상’(His image)은 ‘이해에 속한 신앙’을 가리키고, 두 번째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은 ‘의지에 속한 사랑’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이것이 AC.53이 직접 말하는 중심입니다.

 

여기서 먼저 매우 조심해야 할 것이 ‘자기 형상’이라는 우리말 표현입니다. 한국어만 보면 ‘자기’가 사람 자신을 가리키는 것처럼 읽힐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형상은 아직 사람이 자기 이해와 판단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상태’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영어 원문은 ‘His image’이며 여기서 His는 사람(man)이 아니라 하나님(God)을 가리킵니다. 즉 ‘하나님이 사람을 그분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다’는 문장입니다. 따라서 첫 번째 ‘자기 형상’을 인간의 자기중심성이나 proprium과 연결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왜 같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리키는 표현 안에서 스베덴보리는 첫 번째를 신앙, 두 번째를 사랑과 연결할까요? 바로 앞 AC.51-52의 설명이 배경이 됩니다. AC.51에서는 영적 인간을 ‘형상’, 천적 인간을 ‘모양’이라고 구별했고, AC.52에서는 영적 인간에게서는 이해와 신앙에 속한 것이 먼저이고, 천적 인간에게서는 의지에 속한 사랑이 먼저라고 설명했습니다. AC.53은 그 구별을 창1:27의 두 번 반복되는 ‘형상’에 적용합니다.

 

첫 번째는 ‘이해에 속한 신앙’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계속 보아 온 영적 인간의 질서와 관계됩니다. AC.52에서 영적 인간을 나타내는 창1:26의 순서에서는 이해와 신앙에 속하는 물고기와 새가 먼저 나오고, 의지와 애정에 관계되는 짐승이 뒤에 나왔습니다. 이제 AC.53도 같은 질서를 이어서, 이해에 속한 신앙을 첫 번째 ‘형상’과 연결합니다.

 

두 번째는 ‘의지에 속한 사랑’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이 사랑이 ‘영적 인간에게서는 뒤따르지만, 천적 인간에게서는 앞선다’고 합니다. 이 한 문장은 AC.52의 설명을 거의 압축해서 다시 말한 것입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이해와 신앙에 속한 것이 먼저이고 사랑이 뒤따르며, 천적 인간에게서는 의지에 속한 사랑이 앞섭니다.

 

여기서 ‘뒤따른다’와 ‘앞선다’는 표현을 정확하게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영적 인간에게 사랑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AC.48에서 이미 영적 인간은 신앙으로부터뿐 아니라 사랑으로부터도 행동하기 시작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영적 인간을 ‘신앙만 있는 사람’, 천적 인간을 ‘사랑만 있는 사람’으로 나누어서는 안 됩니다. 둘의 차이는 신앙과 사랑 가운데 하나가 있고 하나가 없다는 데 있지 않고 그 둘의 질서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를 간단하게 ‘영적 인간 = 신앙 → 사랑’, ‘천적 인간 = 사랑 → 신앙’이라고 적으면 어느 정도 기억에는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스베덴보리의 완전한 정의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AC.53이 직접 말하는 것은 ‘사랑이 영적 인간에게서는 뒤따르고 천적 인간에게서는 앞선다’는 것입니다. 신앙과 사랑의 관계 전체는 이후 AC에서 더욱 세밀하게 설명됩니다.

 

현재 해설에서는 첫 번째 ‘자기 형상’을 ‘아직 중심이 사람 쪽에 있는 상태’, 두 번째 ‘하나님의 형상’을 ‘중심이 하나님 쪽으로 옮겨진 상태’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AC.53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첫 번째의 ‘자기’ 역시 하나님을 가리키므로, ‘자기 형상 →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 중심 → 하나님 중심’의 변화로 읽는 것은 본문의 문법과도 맞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두 번의 ‘형상’을 ‘하나의 형상이 미완성에서 완성으로 발전하는 두 단계’라고 단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AC.53은 ‘형상이 둘인가 하나인가’를 논하려는 글이 아니라, 두 번 반복된 표현이 각각 이해에 속한 신앙과 의지에 속한 사랑을 가리킨다고 설명하는 글입니다. 따라서 이 짧은 문장에서 ‘형상의 완성’이라는 별도의 교리를 만들어 내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직접 제시한 구별을 따라가는 편이 좋습니다.

 

그렇다고 신앙과 사랑이 서로 무관하게 떨어져 있다는 뜻도 아닙니다. 바로 앞 AC.48에서 영적 인간은 신앙과 사랑으로 함께 행동하는 사람으로 설명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AC.54에서는 ‘남자와 여자’를 이해와 의지의 결합, 곧 일종의 결혼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AC.53은 신앙과 사랑을 둘로 갈라놓기 위한 글이라기보다, 서로 결합될 두 요소의 질서를 구별하여 보여 주는 글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이 점에서 AC.53은 다음 글로 넘어가는 매우 자연스러운 다리이기도 합니다. 여기서는 이해에 속한 신앙과 의지에 속한 사랑을 구별합니다. 이어지는 AC.54에서는 창1:27의 ‘남자와 여자’를 통해 이해와 의지의 결합을 설명합니다. 즉 먼저 둘을 구별하고, 이어 그 둘이 어떻게 하나를 이루는지를 보여 주는 흐름입니다.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여기서 또 하나의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이 신앙보다 더 중요하다는 뜻인가?’ AC.53만으로 두 가지를 경쟁시키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어느 하나를 버리고 다른 하나를 택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 질서와 결합입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신앙이 먼저이고 사랑이 뒤따르며,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앞섭니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의 결합이 중요합니다.

 

또 ‘천적 인간은 사랑이 앞서므로 진리를 배우거나 신앙이 필요 없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앞의 AC.52에서도 천적 인간을 나타내는 순서에서 짐승 뒤에 새와 물고기가 계속 존재했습니다. 사랑이 앞선다는 것은 이해와 신앙이 사라진다는 뜻이 아니라 그 질서가 다르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영적 인간에게 신앙이 먼저라고 해서 그의 신앙이 단순한 지식이나 지적 동의라는 뜻도 아닙니다. AC.48에서 이미 그가 신앙과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선을 행하는 살아 있는 영적 인간임을 보았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신앙’은 거듭남과 분리된 죽은 지식이 아니라 이해에 속하면서 사랑과 결합되어 가는 신앙입니다.

 

AC.53은 이런 점에서 앞의 여러 글을 단 한 문장에 압축합니다. 이해와 의지, 신앙과 사랑,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이라는 구별이 창1:27의 두 번 반복되는 ‘형상’ 안에 담겨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첫 번째 ‘형상’은 이해에 속한 신앙과, 두 번째 ‘하나님의 형상’은 의지에 속한 사랑과 관계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영적 인간에게서는 뒤따르고 천적 인간에게서는 앞섭니다.

 

따라서 이번 글의 핵심을 ‘자기 형상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발전한다’거나 ‘신앙 중심에서 사랑 중심으로 이동하면서 형상이 완성된다’고 정리하기보다, 원문 그대로 기억하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이해에 속한 신앙’과 ‘의지에 속한 사랑’이 있으며, 두 번의 ‘형상’은 이 둘과 관계됩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신앙이 먼저이고 사랑이 뒤따르며,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앞섭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AC.54에서 이 두 요소는 ‘남자와 여자’라는 표현을 통해 다시 등장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AC.53은 어떤 완성의 종착점이라기보다, 이해와 의지, 신앙과 사랑이 어떻게 구별되고 다시 결합되는지를 보여 주는 다음 아르카나로 들어가는 짧고 중요한 연결점입니다.

 

 

 

AC.54, 창1:27, ‘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1:27) AC.54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가 속뜻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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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2, 창1:26, ‘순서에 깃든 아르카나’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6) AC.52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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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2 심화

1. ‘영적 인간’, ‘천적 인간’

 

AC를 처음 읽는 독자에게 ‘영적 인간’이라는 표현은 비교적 익숙하지만 ‘천적 인간’이라는 말은 상당히 낯설 수 있습니다. 일상적인 한국어에서 ‘천적’이라고 하면 흔히 ‘서로 잡아먹는 관계의 천적(天敵)’을 먼저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 번역에서 사용하는 ‘천적’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영어 celestial을 옮긴 말로, ‘하늘의’, ‘천국적인’, 더 정확하게는 스베덴보리가 구별하는 천적 차원에 속한 성질을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는 celestial과 spiritual을 매우 자주 구별합니다. 우리말로는 각각 ‘천적’과 ‘영적’이라고 옮깁니다. 둘 다 자연적·세속적인 것과 대비되는 넓은 의미에서는 영적인 것에 속하지만, 스베덴보리의 전문적인 용법에서는 서로 같은 말이 아닙니다. ‘천적’은 특히 사랑과 선, 의지에 속한 것과 깊이 관계되고, ‘영적’은 신앙과 진리, 이해에 속한 것과 깊이 관계됩니다.

 

AC.52는 이 차이를 매우 간결하게 보여 줍니다. 영적 인간을 설명할 때는 이해와 신앙에 속한 ‘물고기’와 ‘새’가 먼저 언급되고 그다음에 ‘짐승’이 나옵니다. 반면 천적 인간을 설명하는 시8에서는 ‘짐승’이 먼저 나오고 그다음에 ‘새’와 ‘물고기’가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천적 인간이 ‘의지에 속한 사랑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라고 직접 밝힙니다.

 

따라서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을 이해하는 첫 번째 열쇠는 ‘어느 쪽에는 사랑이 있고 어느 쪽에는 사랑이 없다’가 아니라 ‘무엇이 먼저인가’입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이해와 신앙에 속한 것이 먼저 나타나고, 천적 인간에게서는 의지에 속한 사랑이 먼저 나타납니다.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합니다. 영적 인간을 ‘머리로만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바로 앞 AC.48에서 스베덴보리는 여섯째 상태의 영적 인간이 신앙으로부터뿐 아니라 사랑으로부터도 행동하기 시작한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영적 인간에게 사랑이나 선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이미 거듭난 인간이며 AC.48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불립니다.

 

마찬가지로 천적 인간을 ‘생각이나 진리가 필요 없는 사람’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AC.52에서 천적 인간을 나타내는 순서에도 새와 물고기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다만 짐승이 먼저입니다. 이것은 이해와 진리가 없어졌다는 뜻이 아니라 의지에 속한 사랑이 먼저이고 이해에 속한 것들이 그 뒤에 놓이는 질서를 보여 줍니다.

 

이 차이는 앞의 AC.51에서도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영적 인간은 주님의 ‘형상’이고 천적 인간은 주님의 ‘모양’, 곧 닮음이라고 했습니다. 또 영적 인간은 ‘빛의 아들’과 ‘친구’라고 불리고, 천적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린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호칭들을 곧바로 높고 낮은 신분표처럼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들은 두 상태의 성질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는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천적 인간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AC.52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그는 ‘사랑으로 선을 행하며’, ‘의지에 속한 사랑에서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그의 다스림은 속 사람에서 겉 사람을 향합니다. 이것은 영적 인간의 다스림이 겉 사람에서 속 사람을 향한다는 것과 대비됩니다.

 

이 대목을 쉽게 설명하려고 ‘영적 인간은 옳기 때문에 선을 행하고 천적 인간은 좋아서 선을 행한다’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어느 정도 방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은 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스베덴보리의 정확한 정의로 굳히면 곤란합니다. 영적 인간 역시 사랑으로 행동하며, 천적 인간 역시 진리와 이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 인간의 차이는 단순히 ‘의무 대 자발성’보다 더 깊은 내적 질서의 차이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이후 설명까지 넓혀 보면 이 차이는 더욱 분명해집니다. 천적 인간에게는 선과 사랑에서 진리를 지각하는 ‘퍼셉션’이 중요한 특징으로 나타나고, 영적 인간에게는 진리를 배우고 그것에 따라 형성되는 ‘양심’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태고교회를 설명할 때는 천적 인간과 퍼셉션이 특별히 중요하게 등장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천적 인간은 생각하지 않고 직감으로 안다’고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퍼셉션은 단순한 감이나 느낌이 아닙니다. 또한 양심이 퍼셉션보다 가치가 낮은 가짜 영적 기능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서로 다른 인간 상태에서 주님께서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게 하시는 서로 다른 질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천적’이라는 말 자체도 여기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한국어의 ‘천적’(天敵)이 아니라 celestial을 번역한 전문 용어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 자체에도 천적 왕국과 영적 왕국의 구별이 있으며, 천적 천사와 영적 천사의 차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천적’은 단순히 ‘아주 영적인’, ‘영적보다 한 단계 높은’이라는 정도 표현이 아니라 독특한 성질을 가진 범주입니다.

 

이 때문에 ‘영적 인간이 계속 성장하면 모두 천적 인간이 되는가?’라는 질문에도 조심해서 답해야 합니다. 창세기 1장에서 2장으로 이어지는 현재의 설명에서는 영적 인간 다음에 천적 인간이 등장하므로 하나의 더 깊어지는 흐름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전체 저술에서는 영적 천국과 천적 천국, 영적 천사와 천적 천사가 지속적으로 구별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을 ‘영적 단계 졸업 후 천적 단계로 승급한다’는 하나의 직선 과정으로만 설명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두 상태를 완전히 관계없는 두 종류의 인간으로 떼어 놓는 것도 현재 창세기 해설의 흐름을 놓칠 수 있습니다. 창1의 거듭남에서 창2의 더 내적인 상태로 이어지는 진행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금 단계에서는 ‘둘은 분명히 구별되지만, 그 관계의 모든 세부를 하나의 간단한 단계표로 만들지 않는다’는 태도가 가장 안전합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어느 상태든 생명의 근원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AC.49-50에서 반복해서 본 것처럼 선과 진리와 생명은 인간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옵니다. 영적 인간이 이해와 신앙에서 출발한다고 해서 자기 지성으로 거듭나는 것도 아니며, 천적 인간이 사랑에서 출발한다고 해서 자기 사랑에서 선을 만들어 내는 것도 아닙니다. 두 경우 모두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서로 다른 질서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AC에서 ‘영적’과 ‘천적’을 만나면 단순히 ‘낮은 단계와 높은 단계’라고 번역해 읽기보다 먼저 무엇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살펴보면 좋습니다. 대체로 ‘영적’은 진리·신앙·이해와, ‘천적’은 선·사랑·의지와 특별히 연결됩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기계적인 일대일 사전처럼 적용해서는 안 되고 각 문맥에서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AC.52에서 가장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이해와 신앙에 속한 것이 먼저이고, 그의 다스림은 겉 사람에서 속 사람을 향합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는 의지에 속한 사랑이 먼저이고, 그의 다스림은 속 사람에서 겉 사람을 향합니다. 둘 다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는 거듭난 인간이지만,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들이 질서를 이루는 방식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천적’이라는 낯선 용어는 바로 그 차이를 보존하기 위해 필요한 말입니다. 앞으로 태고교회, 퍼셉션, 창세기 2장, 천적 천국과 영적 천국을 읽어 갈수록 이 구별은 점점 더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AC.52, 창1:26, ‘다스림의 방향 전환 : 이해에서 사랑으로,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6) AC.52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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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1 심화

1. ‘형상’과 ‘모양’은 정확히 어떻게 다른가?

 

AC.51의 첫 문장은 간단해 보이면서도 상당히 어렵습니다. ‘형상은 모양 자체가 아니라 모양에 따른 것이다.’ 그리고 곧이어 ‘영적 인간은 형상이고, 천적 인간은 모양, 곧 닮음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묻게 됩니다. ‘형상과 모양이 도대체 어떻게 다른 것인가? 형상은 조금 닮은 것이고 모양은 완전히 닮은 것이라는 뜻인가?’

 

먼저 AC.51이 직접 말하는 범위를 분명히 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 글은 ‘형상’과 ‘모양’이 같지 않다고 분명히 구별합니다. 영적 인간을 형상, 천적 인간을 모양이라고 하고, 창세기 1장은 영적 인간을, 창세기 2장은 천적 인간을 다룬다고 합니다. 따라서 두 말이 단순히 같은 뜻을 강조하기 위해 반복된 것이라고 보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해석과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곧바로 ‘형상은 70퍼센트 닮은 상태이고 모양은 100퍼센트 닮은 상태’처럼 정도의 차이로만 이해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는 단순한 성숙도의 숫자 차이보다 더 깊습니다. AC가 앞으로 진행되면서 그는 두 인간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방식, 신앙과 사랑의 관계, 양심과 퍼셉션 등의 차이를 점차 설명합니다.

 

AC.51에서 가장 먼저 주어진 단서는 ‘형상은 모양 자체가 아니라 모양에 따른 것’이라는 표현입니다. 즉 형상에는 분명 원형을 따르고 닮는 관계가 있지만, 그것이 곧 모양 자체와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 차이를 스베덴보리는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에 대응시킵니다.

 

이것을 앞의 AC.48과 연결하면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여섯째 상태에 이른 영적 인간은 신앙으로부터뿐 아니라 사랑으로부터도 행동하기 시작하며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불립니다. 따라서 ‘형상’은 아직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나 단순히 진리를 머리로만 아는 사람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미 살아 있는 영적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형상은 아직 미완성이고 모양만 완성이다’라고 단순화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영적 인간도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살아가는 참된 거듭남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형상’이라는 말 자체를 결함이나 실패의 의미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천적 인간을 ‘모양’이라고 한다고 해서 그가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같아진다는 뜻도 아닙니다. ‘닮음’은 ‘동일함’이 아닙니다. 인간은 아무리 높은 천적 상태에 있어도 생명의 근원이 되지 않습니다. AC.39 이후 반복해서 본 것처럼 모든 선과 진리와 생명의 근원은 주님입니다. 인간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모양’ 역시 피조물이 창조주와 본질적으로 하나가 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핵심적인 차이는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대해서는 AC.51보다 뒤의 설명들이 더 많은 빛을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계속해서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을 구별하며, 영적 인간은 진리와 신앙을 통해 선으로 인도되고, 천적 인간은 사랑과 선에서 진리를 지각하는 성질을 가진 것으로 설명합니다. 특히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를 설명할 때 ‘퍼셉션’이라는 개념이 매우 중요하게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 설명을 ‘영적 인간은 머리로 살고 천적 인간은 가슴으로 산다’는 식으로 단순화해서도 안 됩니다. 앞의 AC.48에서 이미 영적 인간도 신앙으로부터뿐 아니라 사랑으로부터 행동한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영적 인간에게 사랑이 없고 천적 인간에게만 사랑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차이는 사랑의 유무보다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어떤 질서와 방식으로 받아들여지고 결합되는가에 더 깊이 관계됩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그러면 영적 인간이 계속 거듭나면 결국 천적 인간이 되는가?’ 현재 AC.51만으로 그렇게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이 글은 창세기 1장의 영적 인간과 창세기 2장의 천적 인간을 구별하지만, 모든 개인의 거듭남을 ‘영적 단계 졸업 후 천적 단계 진입’이라는 하나의 직선 과정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의 이후 저술에서는 천적 천국과 영적 천국, 천적 천사와 영적 천사가 서로 구별되어 지속적으로 설명됩니다. 따라서 ‘영적’과 ‘천적’을 단순한 초급과 고급의 관계로만 생각하면 그의 전체 체계를 이해하기 어려워집니다. 한편 창세기 1장과 2장의 연속된 설명 안에서는 분명 더 내적인 상태가 이어지는 흐름도 있습니다. 이 두 측면을 모두 고려해야 하므로 AC.51 한 문장만으로 ‘모든 영적 인간은 결국 천적 인간이 된다’거나 그 반대를 확정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그렇다면 왜 AC.51은 영적 인간을 ‘빛의 아들’과 ‘친구’, 천적 인간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를까요? 이 호칭들은 두 상태의 차이를 보여 주는 성경적 증거로 제시됩니다. 그러나 이것들을 곧바로 ‘친구보다 자녀가 한 단계 높은 신분’이라는 인간관계의 서열로 바꾸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AC.51의 직접적인 목적은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에게 서로 다른 호칭이 적용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특히 ‘빛의 아들’이라는 표현에는 영적 인간과 진리의 빛 사이의 관계가 드러납니다. 반면 ‘하나님의 자녀’에 관해 인용된 요1:13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이것들은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성질을 이해하는 단서가 될 수 있지만, AC.51은 이 한 글에서 그 차이를 모두 체계화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앞으로의 설명을 기다리면서 이 구별을 열어 두는 것이 좋습니다.

 

이 점에서 ‘형상’과 ‘모양’을 가장 안전하게 이해하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둘 다 주님을 닮는 인간의 영적 상태를 가리키지만 동일한 상태는 아닙니다. ‘형상’은 영적 인간에게, ‘모양’은 천적 인간에게 해당하며, 스베덴보리는 후자를 전자와 구별되는 더 내적인 성질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 차이를 단순히 ‘미완성 대 완성’, ‘낮은 단계 대 높은 단계’, ‘친구 대 아들’이라는 하나의 서열표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앞으로 AC를 계속 읽으면서 이 차이는 점점 더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특히 창세기 2장의 천적 인간, 태고교회의 퍼셉션, 그리고 이후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의지와 이해의 질서를 살펴보면 AC.51의 짧은 구별이 왜 중요한지 더 분명해집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이렇게 기억하면 충분합니다. ‘영적 인간은 주님의 형상이며, 천적 인간은 주님의 모양이다. 형상은 모양 자체는 아니지만 모양을 따른다. 둘은 모두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는 거듭난 인간의 상태이지만, 스베덴보리는 그 둘의 내적 성질을 분명히 구별한다.’ 이것이 AC.51이 앞으로의 긴 설명을 위해 놓아 두는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AC.51, 창1:26, ‘형상’과 ‘모양’ :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6) AC.51‘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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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6)

 

AC.50

태고교회는 ‘주의 형상’(image of the Lord)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천사들과 영들에 의해 주님의 다스림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데, 그러나 실제로는 사람마다 적어도 두 영과 두 천사가 함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영들을 통해 사람은 영계와 소통하고, 천사들을 통해서는 천국과 소통하는 것이지요. 영계를 통한 소통과, 천국을 통한 소통, 그리고 그 천국을 통해 주님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사람은 전혀 살 수 없는 구조입니다. 사람의 생명은 이 결합에 전적으로 달려 있어서, 만일 영들과 천사들이 물러난다면 그는 즉시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까 존재 자체를 유지할 수가 없게 된다는 말입니다. The most ancient church understood by the “image of the Lord” more than can be expressed. Man is altogether ignorant that he is governed of the Lord through angels and spirits, and that with everyone there are at least two spirits, and two angels. By spirits man has communication with the world of spirits, and by angels with heaven. Without communication by means of spirits with the world of spirits, and by means of angels with heaven, and thus through heaven with the Lord, man could not live at all; his life entirely depends on this conjunction, so that if the spirits and angels were to withdraw, he would instantly perish.

 

[2] 사람은 거듭나기 전과 후에 있어 다스림을 받는 방식이 전혀 다릅니다.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서는 악한 영들이 사람과 함께 있으며, 그들이 사람을 강하게 지배합니다. 이때에도 여전히 천사들은 함께 있으나 거의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다만 사람이 가장 극단적인 악으로 떨어지지만 않도록 막아 주며, 실제로 그의 욕정을 통해 어떤 선으로 굽히고, 감각의 오류를 통해 진리로 굽힐 뿐입니다. 이때 사람은 함께 있는 영들을 통해 영계와는 소통하지만, 악한 영들이 지배하고 천사들이 그 지배를 겨우 막고 있는 상태이므로, 천국과의 소통은 매우 미약합니다. While man is unregenerate he is governed quite otherwise than when regenerated. While unregenerate there are evil spirits with him, who so domineer over him that the angels, though present, are scarcely able to do anything more than merely guide him so that he may not plunge into the lowest evil, and bend him to some good—in fact bend him to good by means of his own cupidities, and to truth by means of the fallacies of the senses. He then has communication with the world of spirits through the spirits who are with him, but not so much with heaven, because evil spirits rule, and the angels only avert their rule.

 

[3] 그러나 사람이 거듭나면 상황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이제는 천사들이 주도적으로 다스리며, 사람에게 모든 선과 진리를 불어넣고, 악과 거짓에 대해서는 두려움과 혐오를 일으키게 합니다. 물론 천사들이 이끌기는 하지만, 그것은 봉사의 방식일 뿐이며, 실제로 사람을 다스리는 분은 오직 주님 한 분뿐입니다. 주님께서는 천사들과 영들의 사역을 통해 사람을 다스리십니다. 이러한 이유로 여기에서는 먼저 복수형으로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Let us make man in our image)라고 하고, 곧이어 단수형으로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그를 창조하셨다’(God created him in his own image)라고 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천사들의 사역을 통해 일하시지만, 다스림과 창조의 주체는 오직 주님 한 분뿐이라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주님께서도 이 점을 이사야에서 분명히 밝히십니다. But when the man is regenerate, the angels rule, and inspire him with all goods and truths, and with fear and horror of evils and falsities. The angels indeed lead, but only as ministers, for it is the Lord alone who governs man through angels and spirits. And as this is done through the ministry of angels, it is here first said, in the plural number,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nd yet because the Lord alone governs and disposes, it is said in the following verse, in the singular number, “God created him in his own image.” This the Lord also plainly declares in Isaiah:

 

네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지은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땅을 펼쳤고 (사44:24) Thus saith Jehovah thy redeemer, and he that formed thee from the womb, I Jehovah make all things, stretching forth the heavens alone, spreading abroad the earth by myself (Isa. 44:24).

 

천사들 자신도 자신들에게는 어떤 능력도 없으며, 오직 주님한테서 나오는 그분의 힘으로만 자기들은 일한다고 고백합니다. The angels moreover themselves confess that there is no power in them, but that they act from the Lord alone.

 

해설

AC.50은 바로 앞의 AC.49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주제를 뜻밖의 방향으로 깊게 들어갑니다. AC.49에서는 최고의 뜻에서 참 사람은 주님이시며, 인간 안에서도 주님에게서 온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만이 참으로 ‘사람의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50은 태고교회 사람들이 ‘주의 형상’이라는 말에서 우리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것을 이해했다고 하면서, 그 가운데 인간의 생명과 영계·천국의 연결, 그리고 주님께서 사람을 어떻게 다스리시는가 하는 문제를 설명합니다.

 

첫 문장부터 현대 독자에게는 매우 낯선 내용이 나옵니다. 사람은 자신이 주님에 의해 천사들과 영들을 통하여 다스림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며, 모든 사람에게 적어도 두 영과 두 천사가 함께 있다고 합니다. 영들을 통해 사람은 영들의 세계와 소통하고, 천사들을 통해 천국과 소통하며, 그리하여 천국을 통해 주님과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결합이 없으면 사람은 전혀 살 수 없으며, 영들과 천사들이 물러나면 즉시 소멸할 것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여기서 가장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천사들과 영들이 사람에게 생명을 준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AC.50의 문장 자체가 연결의 최종점을 ‘주님’에게 둡니다. 사람은 영들의 세계 및 천국과 연결되어 있고 ‘그리하여 천국을 통해 주님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천사나 영이 생명의 독립적인 근원이 아니라, 사람의 생명이 주님과의 결합에 의존한다는 것이 중심입니다. 앞의 AC.39-43에서도 이미 모든 참된 생명과 선과 진리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점이 반복해서 설명되었습니다.

 

‘사람마다 적어도 두 영과 두 천사가 함께 있다’는 말 역시 처음 접하면 여러 질문을 낳습니다. ‘그렇다면 내 옆에 네 명의 보이지 않는 존재가 늘 따라다닌다는 뜻인가?’, ‘두 영은 모두 악한 영인가?’, ‘왜 하필 둘씩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AC.50 자체는 그 모든 세부를 여기서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후 AC.5848-5849에서도 사람에게 두 영과 두 천사가 있어 각각 지옥과 천국과의 소통을 이루게 한다고 다시 말하며, AC.5977-5978에서는 왜 둘씩인지를 인간의 의지와 이해라는 두 기능 및 이에 상응하는 천국과 지옥의 두 종류와 연결하여 더 자세히 설명합니다. 이 문제는 별도의 심화에서 다루겠습니다.

 

AC.50의 직접적인 관심은 숫자 자체보다 사람의 상태에 따라 이 영적 다스림의 양상이 어떻게 달라지는가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은 거듭나기 전과 거듭난 뒤 전혀 다르게 다스림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여기서부터 [2]와 [3]이 서로 대조됩니다.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서는 악한 영들이 사람과 함께 있으며 그들이 강하게 지배한다고 합니다. 천사들도 여전히 함께 있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사람이 가장 낮은 악으로 빠지지 않도록 돌이키고, 그를 어떤 선과 진리 쪽으로 굽히는 정도라고 설명합니다. 이때 사람은 함께 있는 영들을 통해 영들의 세계와는 소통하지만, 악한 영들이 지배하고 천사들은 그 지배를 막고 있기 때문에 천국과의 소통은 그만큼 강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특히 눈에 띄는 문장이 있습니다. 천사들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을 ‘그의 욕정을 통해 어떤 선으로’, ‘감각의 오류를 통해 진리로’ 굽힌다고 합니다. 이것을 ‘욕정과 감각의 오류가 사실은 좋은 것’이라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AC.50이 말하는 것은 사람이 아직 거듭나지 않은 현재 상태에 있을 때 천사들이 그 사람에게 없는 높은 상태를 억지로 전제하여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가 실제로 처해 있는 상태 안에서 극단적인 악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붙들며 어떤 선과 진리 쪽으로 돌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한 문장만으로 ‘욕정을 선한 에너지로 바꾸면 된다’는 일반적인 거듭남 방법론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또 ‘악한 영들이 지배한다’는 말을 사람에게 아무런 자유나 책임이 없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내 악한 생각과 행동은 사실 악한 영들이 한 것이니 나는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를 AC.50은 제공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자유와 천국·지옥 사이의 평형, 그리고 유입된 것을 사람이 어떻게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가는 스베덴보리가 다른 곳에서 훨씬 더 자세히 설명합니다. AC.50은 지금 그 전체 메커니즘을 설명하려는 글이 아니라 거듭나기 전과 후에 주님의 다스림이 사람에게 어떻게 다르게 나타나는지를 대비하고 있습니다.

 

[3]에서는 상황이 바뀝니다. 사람이 거듭나면 천사들이 다스리고, 사람에게 모든 선과 진리를 불어넣으며 악과 거짓에 대해서는 두려움과 혐오를 일으키게 한다고 합니다. 여기서도 ‘천사가 선과 진리를 만들어 주는 존재’라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다음 문장에서 천사들이 인도하기는 하지만 오직 ‘사역자들’로서 그렇게 할 뿐이며, 실제로 사람을 다스리는 분은 오직 주님 한 분이라고 분명하게 선을 긋습니다.

 

이 한 문장이 AC.50 전체를 읽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앞에서는 영과 천사들의 작용을 매우 강하게 말하지만, 그들을 독립된 주체로 세우지 않습니다. 천사들은 사역자이고, 주님께서 천사들과 영들을 통해 사람을 다스리십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수많은 중간 존재가 있어서 하나님은 간접적으로만 사람에게 접근하신다’는 구조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의 강조점은 오히려 그 모든 사역 가운데 실제로 다스리고 배열하시는 분은 주님 한 분뿐이라는 데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창1:26의 매우 유명한 질문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내 형상대로 내가 사람을 만들자’가 아니라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라고 복수형으로 말씀하실까요? AC.50은 이에 대해 아주 분명한 해석을 제시합니다. 주님께서 천사들의 사역을 통해 사람을 다스리시기 때문에 먼저 복수형으로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고 한 것이며, 그러나 실제로 다스리고 배열하시는 분은 주님 한 분뿐이기 때문에 바로 다음 절에서는 단수형으로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적어도 AC.50에서 스베덴보리가 창1:26의 ‘우리’를 어떻게 이해하는지 정확하게 보여 줍니다. 그는 여기서 ‘우리’를 여러 신들의 회의로 보지 않고, 주님과 그분을 섬기는 천사들의 사역이라는 관계 속에서 읽습니다. 그러나 창조와 거듭남의 실제 주체는 천사들이 아니라 주님 한 분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곧바로 사44:24을 인용합니다.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땅을 펼쳤고.’ 이 구절을 가져오는 직접 목적은 매우 분명합니다. ‘우리’라는 복수형이 천사들도 창조의 공동 주체라는 뜻으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홀로 만물을 지으셨으며, 스베덴보리도 이어서 ‘주님만이 다스리고 배열하신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사44:24의 하늘과 땅 각각의 세부 속뜻을 여기서 추가로 만들어 낼 필요는 없습니다. 이 인용은 무엇보다 ‘주님 홀로’라는 논증을 뒷받침합니다.

 

마지막 문장도 같은 균형을 확인합니다. 천사들 자신도 자기들에게는 아무 능력이 없으며 오직 주님에게서 오는 힘으로만 일한다고 고백한다는 것입니다. AC.50은 천사들의 역할을 매우 크게 말하면서도 동시에 천사들에게 어떤 독립된 능력도 돌리지 않습니다. 사람은 천사와 영들을 통해 영계와 천국에 연결되어 있지만, 생명의 근원도, 다스림의 근원도, 창조와 거듭남의 주체도 주님 한 분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현재 해설처럼 ‘하나님의 형상 = 주님의 통치가 막힘없이 흐르는 상태’라고 하나의 공식으로 정의하기보다 AC.50이 말하는 만큼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가 ‘주의 형상’이라는 말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것을 이해했다고 한 뒤, 그들이 알고 있던 인간의 영적 연결과 주님의 다스림을 하나의 예로 펼쳐 보입니다. 그리고 거듭난 사람에게서는 천사들이 사역하고 주님께서 그들을 통해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창1:26의 ‘우리의 형상대로’와 연결합니다.

 

따라서 AC.50은 ‘하나님의 형상’이 단순히 사람의 외모가 하나님을 닮았다는 뜻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동시에 이것을 단순히 인간의 도덕적 성품 몇 가지로도 축소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참된 영적 생명 전체가 주님에게 의존하고, 주님께서 천국과 천사들의 사역을 통해 사람을 다스리시며 거듭나게 하신다는 더 큰 질서 안에서 ‘형상’을 바라봅니다. 다만 형상과 모양의 더 정확한 구별은 다음 AC.51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어지므로, 그 설명까지 여기서 미리 당겨 올 필요는 없습니다.

 

AC.50을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천사와 영들에 관한 설명이 가장 눈에 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글이 정말 강조하는 것은 ‘네 명의 보이지 않는 존재가 사람 곁에 있다’는 신기한 정보 자체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은 자기에게서 독립적으로 생명을 가진 존재가 아니며, 그의 생명은 궁극적으로 주님과의 결합에 달려 있다는 것, 그리고 천사들과 영들의 모든 사역 배후에서 실제로 다스리고 생명을 주시는 분은 오직 주님 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수형 ‘우리’ 뒤에 곧바로 단수형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창조하셨다’가 이어집니다. 많은 사역자가 있어도 창조와 거듭남의 주체는 한 분이십니다.

 

심화

1. ‘두 영과 두 천사’는 누구이며, 왜 둘씩 있는가?

 

AC.50, 심화 1, ‘두 영과 두 천사’는 누구이며, 왜 둘씩 있는가?

AC.50.심화1. ‘두 영과 두 천사’는 누구이며, 왜 둘씩 있는가? AC.50을 처음 읽으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문장 가운데 하나가 ‘사람마다 적어도 두 영과 두 천사가 함께 있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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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1, 창1:26, ‘형상에서 모양으로 : 빛의 아들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나아가는 거듭남의 길’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6) AC.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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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9, 창1:26,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AC.49-52)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And God said, Let 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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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And God said,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fter our likeness; and let them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heavens, and over the beast, and over all the earth, and over every creeping 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 (창1:26)

 

AC.49

태고교회, 곧 그 교회의 사람들과 주님께서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을 나누셨는데, 그때 주님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드릴 말씀이 많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이러한 이유로,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 외에는 누구도 ‘사람’(man)이라는 호칭으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에게서 나온 것들만을 ‘사람’(men)이라고 했고, 자기 자신을 그 호칭으로 부르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자기 안에서 인식된 것들, 곧 주님에게서 왔다고 퍼셉션된 모든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만을 ‘사람의 것’(of man)이라 했습니다. 그것들은 주님에게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In the most ancient church, with the members of which the Lord conversed face to face, the Lord appeared as a man; concerning which much might be related, but the time has not yet arrived. On this account they called no one “man” but the Lord himself, and the things which were of him; neither did they call themselves “men,” but only those things in themselves—as all the good of love and all the truth of faith—which they perceived they had from the Lord. These they said were “of man,” because they were of the Lord.

 

[2] 이로부터 예언서들에서 ‘사람’(man)과 ‘인자’(the son of man)는 최고의 뜻으로는 주님을 뜻하고, 속뜻으로는 지혜와 총명을 뜻하며, 따라서 거듭난 모든 사람을 뜻하게 됩니다. 예레미야입니다. Hence in the prophets, by “man” and the “son of man,” in the supreme sense, is meant the Lord; and in the internal sense, wisdom and intelligence; thus everyone who is regenerate. As in Jeremiah:

 

23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25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렘4:23, 25) I beheld the earth, and lo, it was void and emptiness, and the heavens, and they had no light. I beheld and lo there was no man, and all the birds of the heavens were fled (Jer. 4:23, 25).

 

이사야에서 ‘사람’(man)은 속뜻으로는 거듭난 사람을, 최고의 뜻으로는 유일한 사람으로서의 주님을 뜻합니다. In Isaiah, where, in the internal sense, by “man” is meant a regenerate person, and in the supreme sense, the Lord himself, as the one man:

 

11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곧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너희가 장래 일을 내게 물으며 또 내 아들들과 내 손으로 한 일에 관하여 내게 명령하려느냐 12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으며 내가 내 손으로 하늘을 펴고 하늘의 모든 군대에게 명령하였노라 (사45:11, 12) Thus saith Jehovah the holy one of Israel, and his former, I have made the earth, and created man upon it; I, even my hands, have stretched out the heavens, and all their army have I commanded (Isa. 45:11–12).

 

[3] 이 때문에 주님은 예언자들에게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에스겔입니다. The Lord therefore appeared to the prophets as a man, as in Ezekiel: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 (겔1:26) Above the expanse, as the appearance of a sapphire stone, the likeness of a throne, and upon the likeness of the throne was the likeness as the appearance of a man above upon it (Ezek. 1:26).

 

다니엘에게 나타나셨을 때에는 ‘인자’(the son of man), 곧 사람이라 일컬음을 받으셨습니다. 이는 같은 뜻입니다. And when seen by Daniel he was called the “son of man,” that is, the man, which is the same thing:

 

13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14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단7:13, 14) I saw, and behold, one like the son of man came with the clouds of heaven, and came to the ancient of days, and they brought him near before him; and there was given him dominion, and glory, and a kingdom, that all people, and nations, and languages should serve him. His dominion is an everlasting dominion, which shall not pass away, and his kingdom that which shall not be destroyed (Dan. 7:13–14).

 

[4] 주님께서는 복음서에서도 자신을 자주 ‘인자’(the son of man), 곧 사람이라 하시며, 다니엘에서와 같이 영광 가운데 오실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The Lord also frequently calls himself the “son of man,” that is, the man, and, as in Daniel, foretells his coming in glory:

 

그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마24:30) Then shall they see the son of man coming in the clouds of heaven with power and great glory (Matt. 24:30).

 

여기 ‘하늘 구름’(The clouds of heaven)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뜻하고, ‘능력과 큰 영광’(power and great glory)은 말씀의 속뜻을 뜻합니다. 이 속뜻은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나 오직 주님과 그분의 나라만을 가리키며, 바로 여기서 속뜻의 능력과 영광이 나옵니다. The “clouds of heaven” are the literal sense of the Word; “power and great glory” are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which in all things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has reference solely to the Lord and his kingdom; and it is from this that the internal sense derives its power and glory.

 

해설

AC.49는 창1:26의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에서 이제 ‘사람’이라는 말 자체를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앞 AC.48에서는 여섯째 상태에 이른 사람이 ‘영적 인간’이며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를 ‘사람’이라고 하며, 더 근본적으로 말씀의 속뜻에서 ‘사람’이란 무엇을 뜻할까요? AC.49의 대답은 매우 강렬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오직 주님만을 ‘사람’이라고 불렀으며, 자기들 자신조차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처음 읽으면 상당히 당황스러운 말입니다. ‘그러면 인간은 사람이 아니라는 뜻인가?’ 그러나 AC.49가 생물학적 종으로서의 인간이나 인간의 존엄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과 태고교회의 영적 인식에서 ‘사람’이라는 말이 무엇을 가리켰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참된 사람됨의 근원은 인간 자신의 proprium에 있지 않고 주님에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에게서 나온 것들만을 자기 안에서 ‘사람의 것’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AC.49는 구체적으로 밝힙니다. ‘사랑의 모든 선’과 ‘신앙의 모든 진리’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조건이 하나 붙습니다. 단순히 사람이 선을 가지고 있고 진리를 알고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그것들이 ‘주님에게서 왔다고 퍼셉션’했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사람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지막 문장이 이유를 아주 간단하게 말합니다. ‘그것들은 주님에게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앞의 AC.39-48과도 정확하게 연결됩니다. AC.39에서는 사람이 선과 진리가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믿고 지각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살아나기 시작한다고 했고, AC.41에서는 주님에게서 오는 것에는 생명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49에서는 같은 원리가 ‘사람됨’에 적용됩니다. 참된 선과 진리의 생명이 주님에게서 오기 때문에, 최고의 뜻에서 ‘사람’은 그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을 가리키며, 속뜻에서는 주님에게서 지혜와 총명을 받아 거듭난 사람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주님만이 참 사람’이라는 말을 인간을 낮추는 표현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참된 사람됨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밝히는 말입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서 선과 진리와 생명을 만들어 내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를 받아들임으로써 참된 지혜와 총명을 가진 사람이 되어 갑니다. 따라서 이 말의 초점은 ‘누가 인간 자격이 있는가?’를 판정하는 데 있지 않고 ‘인간의 참된 영적 생명의 근원이 누구인가?’를 밝히는 데 있습니다.

 

AC.49의 첫 문장에는 또 하나 매우 놀라운 내용이 있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과 주님께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을 나누셨고, 주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에 대해 ‘많이 말할 수 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그가 말하지 않은 내용을 상상하여 채울 필요는 없습니다. 적어도 AC.49가 직접 말하는 것은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사람으로 나타나셨다는 것과, 바로 이것이 그들이 오직 주님만을 ‘사람’이라고 부른 이유와 연결된다는 사실입니다. 이 짧은 유보 문장은 자연스럽게 궁금증을 일으키므로 별도의 심화에서 다루겠습니다.

 

그다음부터 스베덴보리는 예언서에서 ‘사람’과 ‘인자’가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여기서 먼저 매우 중요한 구별을 제시합니다. ‘사람’과 ‘인자’는 ‘최고의 뜻’에서는 주님을 뜻하고, ‘속뜻’에서는 지혜와 총명을 뜻하며, 따라서 거듭난 모든 사람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어지는 모든 성경 인용을 읽는 열쇠입니다.

 

렘4:23,25에서 예레미야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 빛이 없고 ‘사람이 없다’고 말합니다. AC.49가 이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사람’이라는 말이 단순히 생물학적 인간만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앞에서 ‘사람’의 속뜻을 지혜와 총명, 따라서 거듭난 사람이라고 밝혔기 때문에 ‘사람이 없다’는 표현 역시 그 문맥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함께 나오는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다’는 표현도 앞의 AC.40에서 새가 이성적·지적인 것들과 관계된다고 설명한 내용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그러나 AC.49는 여기서 예레미야 전체의 황폐 상태를 단계별로 해설하지 않으므로 그 이상을 세밀하게 구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45:11-12에서는 여호와께서 ‘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에서도 속뜻의 ‘사람’을 거듭난 사람으로, 최고의 뜻의 ‘사람’을 유일한 사람으로서의 주님과 연결합니다. 여기서도 핵심은 자연계 인간의 창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안의 ‘사람’이라는 표현에 그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겔1:26은 주님께서 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는지를 보여 주는 직접적인 예로 인용됩니다. 에스겔은 보좌 위에 ‘사람의 모양 같은’ 형상을 봅니다. AC.49는 이 환상의 보좌나 남보석 등의 세부 상응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단 하나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앞에서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사람으로 나타나셨다’고 한 것이 예언자들의 환상에서도 이어진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 역시 최고의 뜻에서 ‘사람’이 주님을 가리킨다는 논증에 사용됩니다.

 

단7:13-14에서는 그 표현이 ‘인자’로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다니엘에게 보이신 분이 ‘인자’, 곧 ‘사람’이라고 불렸으며 이것이 같은 뜻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도 인자의 왕국과 권세에 관한 모든 세부를 해설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자’라는 호칭이 주님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 인용의 직접 목적입니다.

 

그리고 이 흐름은 복음서로 이어집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자주 ‘인자’라고 부르셨으며, 마24:30에서는 다니엘의 표현과 마찬가지로 인자가 하늘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AC.49는 ‘사람’이라는 주제와 함께 말씀의 문자 의미와 속뜻이라는 또 하나의 중요한 주제를 짧게 엽니다.

 

스베덴보리는 ‘하늘 구름’이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뜻하고, ‘능력과 큰 영광’이 말씀의 속뜻을 뜻한다고 직접 밝힙니다. 그리고 그 이유도 설명합니다. 말씀의 속뜻은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나 오직 주님과 그분의 나라만을 가리키기’ 때문이며, 바로 거기서 속뜻의 능력과 영광이 나온다고 합니다. 이것은 AC.49가 직접 말하는 매우 중요한 말씀론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더 나아가 ‘우리가 속뜻을 깨닫는 순간 곧 인자의 재림이 일어난다’는 식으로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글이 확실히 말하는 만큼만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나’라는 표현은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의 속뜻은 인간의 심리나 도덕적 교훈을 흥미롭게 찾아내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 그 모든 것은 주님과 주님의 나라를 향합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의 ‘사람’ 역시 결국 인간 자신에게서 설명이 완성되지 않고, 최고의 뜻에서는 주님에게까지 올라갑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인 이유를 이해하려면 먼저 그 형상의 원형이신 주님을 보아야 한다는 방향이 여기서 열립니다.

 

이 점에서 AC.49는 앞의 AC.48과 다음 글들을 이어 주는 매우 중요한 다리입니다. AC.48에서는 여섯째 상태의 영적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AC.49는 곧바로 인간 자체를 바라보지 않고 먼저 주님을 바라봅니다. 최고의 뜻에서 ‘사람’은 주님이시며, 인간 안에서 참으로 사람의 것이라 할 수 있는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도 모두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는 것은 인간 자신의 독립적인 위대함을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서 성립하는 사람됨과 관계됩니다.

 

동시에 여기서 ‘거듭난 사람만 사람이고 다른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라는 식의 판단을 해서는 안 됩니다. AC.49는 사람의 사회적 가치나 존엄을 분류하는 글이 아닙니다. ‘사람’이라는 말씀의 표현이 최고의 뜻과 속뜻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하는 글입니다. 이 구별을 놓치면 스베덴보리의 매우 깊은 인간론을 오히려 사람을 차별하는 주장으로 오해하게 됩니다.

 

결국 AC.49가 말하는 ‘사람’의 비밀은 생명의 근원에 관한 문제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자기 안의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를 자기 소유라고 여기지 않고 주님에게서 온 것으로 퍼셉션했습니다. 그래서 오직 주님을 ‘사람’이라 불렀고, 주님에게서 온 것들만을 ‘사람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언서의 ‘사람’과 ‘인자’, 에스겔과 다니엘의 사람 형상, 복음서의 인자, 그리고 말씀의 구름과 영광까지 이어지는 모든 인용은 결국 이 중심을 향합니다. 최고의 뜻에서 참 사람은 주님이시며, 인간의 참된 지혜와 총명과 사람됨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서 생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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