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 영상은 처음부터 시청자의 감정을 한쪽으로 강하게 끌고 갑니다. 결혼 전에는 ‘요즘 누가 외벌이를 해? 나도 300 버는데 그걸 왜 놔?’라고 말했던 아내가 임신 후 회사를 그만두고, 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한 뒤에도 직장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남편은 월급 380만 원으로 세 식구의 생활비와 대출을 감당하면서 점심값까지 아끼는데, 아내는 어린이집 등원 후 친구들과 카페와 브런치 식당을 다니고 필라테스를 등록하고 제주 여행까지 갑니다. 영상 첫 장면부터 남편의 통장에는 11만 원밖에 남지 않았는데 아내는 ‘내가 얼마나 힘든 줄 알아? 나 요즘 숨 돌릴 틈이 하나도 없어’라고 말합니다. 이런 구성이라면 시청자가 남편에게 감정이입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먼저 영상이 만들어 놓은 감정의 자리에서 조금 물러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요즘 여자들은 편하게 살려고 전업주부가 되려 한다’는 식으로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영상 자체도 육아 때문에 실제로 직장을 떠날 수밖에 없는 여성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을 언급합니다. 또한 전업주부라는 삶의 형태 자체를 잘못이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마지막에 영상이 정확하게 짚듯이 ‘문제는 전업주부라는 선택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결혼 전에 한 사람이 ‘나는 아이를 낳으면 집에서 아이를 키우며 살고 싶다’고 솔직하게 말하고 상대가 그것을 알고 동의했다면 그것은 두 사람이 함께 선택한 결혼의 모습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영상의 진짜 문제가 드러납니다. ‘맞벌이냐 외벌이냐’가 아니라 ‘진실이 있었느냐’입니다. 남편은 결혼 전 자신의 월급명세서를 보여주면서 혼자 벌어 대출을 갚고 아이까지 키울 자신이 없다고 솔직하게 말합니다. ‘우리 둘 다 계속 일하는 거 맞지?’라고 명시적으로 확인합니다. 아내는 ‘당연하지’라고 대답합니다. 남편은 그 대답을 기초로 결혼 후의 경제생활을 계산했고, 실제 신혼 1년 동안 두 사람은 함께 일하며 적금을 붓고 내 집 마련을 계획합니다. 따라서 이 약속은 연애 중 흘려들은 막연한 희망이 아니라 결혼생활의 구조를 결정한 중요한 전제였습니다.

 

그런데 영상 후반부에서 아내는 마침내 ‘나 다시 회사 다니고 싶지 않아. 애 때문이 아니야. 그냥 그 길로 돌아가기 싫어’라고 고백합니다. 남편에게 결정적으로 아팠던 것은 아내가 직장생활을 싫어한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차라리 결혼 전에 이 말을 들었다면 적어도 선택이라도 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자유를 얼마나 존중하시는가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참된 자유에는 진리가 필요합니다. 사실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는 온전한 선택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상대에게 중요한 사실을 감춘 채 그의 선택을 받아냈다면 외형적으로는 상대가 자유롭게 결정한 것처럼 보여도 그 자유의 토대는 훼손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결혼에서 정직은 단순히 ‘거짓말을 하지 않는 예의’ 정도가 아닙니다. 배우자의 자유를 존중하는 사랑의 한 형태입니다. ‘나는 아이를 낳으면 직장을 그만두고 싶다’, ‘나는 외벌이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 ‘나는 자녀를 꼭 원한다’, ‘나는 부모를 모시고 살고 싶다’, ‘나는 빚이 이만큼 있다’ 같은 문제들은 결혼 전에 솔직하게 밝혀야 합니다. 상대가 그 사실을 알고도 나와 결혼할 것인지를 선택할 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원하는 결혼을 얻기 위해 상대가 싫어할 만한 사실을 감추는 순간, 사랑은 이미 상대를 위한 사랑보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사랑’ 쪽으로 기울기 시작합니다.

 

이 지점에서 proprium이 아주 교묘하게 나타납니다. proprium은 언제나 ‘나는 이기적이다’라는 얼굴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정당화할 수 있는 이유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냅니다. 영상 속 아내에게 처음에는 ‘돌까지’라는 이유가 있었고, 돌이 지나자 ‘두 돌까지’, 다시 아이가 어린이집에 들어가자 ‘아프면 누가 데리러 가느냐’, ‘경력 단절 여성을 누가 뽑아주느냐’라는 새로운 이유가 등장합니다. 남편이 하나를 해결하면 또 다른 이유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밝혀진 내면의 실제 이유는 훨씬 단순했습니다. ‘나는 다시 회사에 다니고 싶지 않다’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자기기만의 무서운 점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먼저 정해 놓고 그 욕구를 정당화할 이유를 나중에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가 육아, 건강, 가족, 희생처럼 선한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 자기 자신조차 속이기 쉽습니다. ‘나는 편하고 싶다’고 말하면 양심에 걸리지만 ‘아이를 위해서다’라고 말하면 스스로도 선한 사람처럼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외적 명분보다 그 아래 있는 사랑, 곧 ‘무엇을 위해 이것을 원하는가’를 봅니다. 주님 앞에서는 명분보다 동기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영상 속 아내의 지난 3년을 ‘놀았다’고 단순화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출산과 초기 육아가 실제로 매우 힘든 노동이라는 사실은 영상 자체도 인정합니다. 아이가 태어난 첫 1년 동안 남편 역시 아내가 일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루 종일 아이를 돌보는 것 자체가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례의 문제를 ‘밖에서 돈을 벌지 않으면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읽어서는 안 됩니다. 가정 안의 노동 역시 실제 노동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중요한 것은 노동의 시장가격보다 그 노동이 공동의 선을 위해 이루어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느 순간부터 부부 사이의 ‘공동의 짐’이 무너졌다는 데 있습니다. 남편이 원하는 것도 처음부터 반드시 월 300만 원짜리 정규직 복귀는 아니었습니다. 하루 네 시간, 월 100만 원 정도라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원했던 것은 영상의 표현대로 ‘우리 집 돈 문제를 둘이 같이 들고 있다는 감각’이었습니다. 이 문장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결혼은 모든 일을 정확히 50 대 50으로 나누는 제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시기에는 한 사람이 돈을 더 벌 수 있고, 어떤 시기에는 다른 사람이 육아를 더 맡을 수 있으며, 질병이나 실직이 생기면 한쪽이 거의 전부를 감당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양이 똑같으냐가 아니라 ‘우리가 이것을 함께 지고 있느냐’입니다.

 

‘결혼애’(Conjugial Love, 1768, CL)에서 스베덴보리가 바라보는 결혼의 핵심 역시 두 사람이 점차 하나의 삶을 이루어 가는 데 있습니다. 참된 결혼에는 ‘하나가 되고자 하는 의지’가 있습니다(CL.215). 그렇다면 결혼생활에서 돈은 ‘당신 돈’과 ‘내가 쓸 돈’으로 완전히 분리될 수 없고, 육아 역시 ‘당신이 맡아야 할 일’이 될 수 없으며, 집안일 역시 한 사람의 고정된 운명이 될 수 없습니다. 서로의 형편과 능력과 시기에 따라 역할은 달라질 수 있지만 그 모든 것을 ‘우리의 삶’으로 받아들이는 내적 태도가 필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상 속 가장 심각한 장면은 어쩌면 카페도 필라테스도 제주 여행도 아닙니다. 아내가 ‘당신 월급으로 못 사는 것도 아니잖아’라고 말하는 장면입니다. 이 말 안에서는 남편의 노동이 이미 ‘우리 가정을 위해 한 사람이 감당하는 희생’이 아니라 그냥 매달 들어오는 380만 원으로 변해 있습니다. 남편이 점심값 6천 원을 아끼고, 야근하고, 막차를 타기 위해 뛰고, 회사에서 자리가 흔들릴까 두려워하는 과정은 사라지고 결과인 월급만 남습니다. 사람은 사라지고 기능만 남은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살펴본 ‘감동 주는 일본 여자와 눈치 주는 한국 여자’ 영상과도 묘하게 연결됩니다. 그 영상의 핵심은 ‘상대가 한 일을 알아봐 주는가’였습니다. 이번 영상에서도 남편이 무너진 이유는 단순히 돈이 부족해서만은 아닙니다. 자신의 부담과 두려움이 배우자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영상 후반부는 외벌이 남편들이 ‘수고했다’보다 ‘당신이 뭘 아느냐’는 말을 더 많이 듣고, 그래서 결국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게 된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남편에게만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전업주부의 가사와 육아를 남편이 ‘집에서 하는 게 뭐가 힘들어?’라고 말한다면 정확히 같은 오류입니다. 배우자의 수고를 보지 않고 그 역할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남편의 월급도 당연하지 않고 아내의 밥과 빨래와 육아도 당연하지 않습니다. 어느 한쪽이 ‘나는 원래 해야 할 일을 하고 있고 당신도 원래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감사가 사라지고 결혼은 사랑의 공동체에서 권리와 의무의 거래로 바뀌기 쉽습니다.

 

영상 속 아내에게 또 하나 나타나는 것은 ‘비교’입니다. ‘내 친구 남편들은 그런 거 안 따져’, ‘지은이 남편은 애 어린이집 보내면 필라테스라도 다니라고 한대’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영상에 따르면 그 비교 대상의 경제적 조건은 이 가정과 상당히 달랐습니다. 비교의 문제는 다른 가정의 ‘결과’만 가져오고 그 결과를 가능하게 한 조건은 가져오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다른 집의 여행, 자동차, 주택, 육아 방식, 소비 수준만 바라보면 내 배우자는 계속 부족한 사람이 됩니다. 이것은 결혼 안에서 체어리티를 매우 빠르게 말라가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한 가지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나는 힘들다’는 말이 한 사람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내가 육아 때문에 힘들다고 말할 권리가 있다면 남편도 생계 때문에 두렵다고 말할 권리가 있습니다. 남편이 직장에서 힘들다고 말할 권리가 있다면 아내 역시 하루 종일 아이와 씨름하며 지쳤다고 말할 권리가 있습니다. 사랑은 ‘누가 더 힘든가’를 판정하는 경쟁이 아닙니다. 한쪽의 고통이 다른 쪽의 고통을 무효화하지 않습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나도 힘들어’라고 상대의 고통을 덮기 전에 ‘당신도 힘들었구나’를 말할 수 있는 데서 시작합니다.

 

이 영상의 마지막 해결 과정에서 그래서 눈여겨볼 것이 있습니다. 남편은 결국 가계부 전체를 식탁에 펼쳐 놓습니다. 그리고 ‘석 달 안에 하루 네 시간이든 재택이든 일을 시작하자’, ‘그때까지 가족카드 한도를 줄이자’, ‘일을 시작하면 등원과 주말 오전은 내가 맡고 아이가 아프면 연차를 번갈아 쓰자’는 구체적인 조건을 제시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남편이 아내를 굴복시켰다’고 읽을 장면은 아닙니다. 적어도 영상의 서사 안에서는 그동안 감정과 변명 속에 묻혀 있던 문제를 ‘현실의 숫자와 구체적인 역할’ 앞으로 가져온 것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에도 한 가지를 덧붙입니다. 결혼에서 상대를 변화시키는 궁극적인 방법은 명령과 압박이 아니라 진리와 자유입니다. 가계의 실제 형편을 함께 보고, 서로의 수고를 정확하게 말하고, 무엇을 감당할 수 있고 무엇을 감당할 수 없는지를 진실하게 밝힌 뒤 두 사람이 자유롭게 공동의 질서를 다시 세워야 합니다. ‘내가 돈을 버니 내 말을 들어라’도 잘못이고 ‘내가 아이를 낳고 키웠으니 당신이 모든 경제적 책임을 져라’도 잘못입니다. 둘 다 자신의 기여를 상대를 지배할 권리로 바꾸는 순간 사랑의 질서에서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영상에서 가장 아픈 지점은 어쩌면 돈도, 직장도, 카페도 아닙니다. ‘결혼 전에 알았더라면 선택할 수 있었을 텐데’라는 남편의 말입니다. 결혼은 상대의 자유로운 ‘예’를 받아 이루어지는 관계입니다. 그런데 그 ‘예’를 얻기 위해 중요한 진실을 감춘다면 상대는 내가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가 아니라 내가 보여준 사람에게 ‘예’라고 한 셈이 됩니다. 그래서 사랑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 말을 하면 이 사람이 나와 결혼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어도 말해야 할 것은 말하는 용기입니다. 그것이 상대의 자유를 존중하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결혼 전에 정말 물어야 할 것은 ‘맞벌이할 거지?’ 하나가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돈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아이를 낳으면 누가 어느 정도 일을 줄일 것인가?’, ‘한 사람이 직장을 그만두고 싶어지면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 ‘가사와 육아는 어떻게 나눌 것인가?’, ‘부모의 도움은 어디까지 받을 것인가?’, ‘소비 수준을 어디에 맞출 것인가?’ 같은 질문입니다. 영상은 날짜와 금액까지 구체적으로 정하라고 조언합니다. 실제 삶에서는 모든 미래를 계약서처럼 정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서로가 어떤 삶을 원하는지는 숨기지 않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결국 이 영상의 제목도 조금 달라집니다. ‘왜 이 여자는 전업주부를 원하게 되었을까?’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나는 배우자에게 내 진짜 욕구를 얼마나 정직하게 보여주고 있는가?’입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선한 명분을 이용하고 있지는 않은가?’입니다. 이것은 영상 속 아내에게만 던질 질문이 아닙니다. 남편에게도, 아내에게도, 결혼을 준비하는 사람에게도, 이미 수십 년을 함께 산 부부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거듭남은 자기 욕구가 없는 사람이 되는 과정이 아닙니다. 자기 욕구를 진실의 빛 가운데 바라보는 과정입니다. ‘나는 직장에 돌아가기 싫다’면 먼저 그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배우자에게도 솔직히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외벌이를 감당하기 두렵다’면 그것 역시 숨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두 사람이 각자의 두려움과 욕구를 진리 가운데 꺼내 놓을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을 함께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영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월 380만 원도, 61만 원의 카페와 브런치 비용도, 1억 800만 원의 사라진 소득도 아닐 것입니다. 숫자는 문제를 보이게 했을 뿐입니다. 더 깊은 곳에는 ‘당신이 알고 선택할 수 있도록 나는 나 자신을 진실하게 보여주었는가?’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사랑은 상대에게서 원하는 것을 얻는 기술이 아니라 상대가 자유롭게 나를 선택할 수 있도록 진실한 나를 내어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위에서 두 사람이 ‘당신 책임’, ‘내 책임’을 넘어 ‘우리의 짐’이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결혼은 비로소 한 몸의 질서를 향해 갑니다. 한 사람이 돈을 벌든 둘이 벌든, 한 사람이 아이를 더 돌보든 둘이 정확히 나누든 그것은 가정마다 달라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선택 안에 진실과 자유와 상호성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결혼의 핵심은 ‘누가 더 많이 했는가’를 계산하는 데 있지 않고, 두 사람이 자기성을 조금씩 내려놓으며 서로의 선을 원하고 함께 하나의 삶을 이루어 가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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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 영상은 상당히 자극적인 대비로 시작합니다. 같은 남자가 한국에서는 늘 부족한 남자 친구가 되었는데 일본에서는 작은 행동에도 고마움을 받는 남자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픈 남자 친구에게 한국인 여자 친구는 ‘괜찮아? 근데 오늘 내 친구 생일 모임은 어떡하지?’라고 묻고, 일본인 여자 친구는 죽과 음료를 들고 찾아옵니다. 영상은 이 두 장면을 출발점으로 삼아 ‘눈치 주던 한국 여자’와 ‘감동 주던 일본 여자’를 대비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서 먼저 한 가지를 걷어내야 합니다. 이것은 ‘한국 여자와 일본 여자는 본질적으로 이렇다’는 이야기가 될 수 없습니다. 영상이 제시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두 여성과 한 남자의 사례이며, 국적이나 민족 전체의 영적 성향을 이것으로 일반화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 사례 안에서 드러나는 ‘사랑을 받는 방식과 사랑을 주는 방식’을 살펴보는 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영상 속 첫 번째 관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사랑에 끊임없이 ‘정답’이 있다는 것입니다. 100일에는 꽃다발이 아니라 목걸이를 알아서 준비해야 했고, 친구 모임에 가도 되는지 안 되는지를 상대의 말이 아니라 표정과 분위기로 알아내야 했으며, 조용하면 ‘어렵다’고 하고 적극적으로 말하면 ‘오버한다’고 합니다. 남자가 행동을 고쳐도 그 변화 자체에는 별다른 반응이 없고 새로운 부족함이 다시 발견됩니다. 영상은 이를 매우 정확하게 ‘연애를 하는 건지 매일 시험을 보는 건지 모르겠다’는 말로 표현합니다. 반면 두 번째 관계에서는 요구가 비교적 명확하고, 상대가 베푼 작은 행동을 알아보고 ‘고맙다’고 표현하며, 잘못했을 때도 무엇이 서운했고 다음에는 어떻게 해주었으면 하는지를 직접 말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과 만나는 중요한 지점이 있습니다. 사랑은 본질적으로 상대에게서 무엇을 받아내는 데서 기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선을 원하고 그에게 선을 행하는 데서 기쁨을 느낍니다. 천국적 사랑과 자기 사랑의 차이도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 사랑은 끊임없이 ‘상대가 나를 어떻게 대하는가’를 계산하지만, 천국적 사랑은 ‘나는 상대에게 어떤 선이 될 수 있는가’를 생각합니다. 물론 인간의 연애와 결혼에서 사랑받고 싶은 욕구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사랑받고 싶은 욕구가 관계의 중심이 될 때입니다. 그러면 상대의 행동은 어느 순간부터 모두 사랑을 측정하는 시험지가 됩니다.

 

영상의 표현을 빌리면 이것이 바로 ‘사랑을 확인받으려는 사랑’입니다. 은정 씨 역시 성우 씨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라고 영상은 분명히 말합니다. 다만 좋아하는 만큼 바라는 것이 많았고, 그 바람을 직접 말하기보다 상대가 알아서 맞혀주기를 원했습니다. 맞히면 당연한 것이 되고 틀리면 서운한 것이 됩니다. 이것은 연애에서 매우 흔하게 나타나는 proprium의 한 모습으로 볼 수 있습니다. ‘나를 사랑한다면 이것쯤은 알아야지’, ‘나를 사랑한다면 이 정도는 해야지’, ‘다른 남자 친구들은 한다는데 왜 당신은 못 해?’라는 생각입니다. 여기에는 사랑이 있지만 그 사랑 안에 자기중심성이 섞여 있습니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는 대신 상대의 행동을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가’라는 척도로 계속 환산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영상에서 반복되는 ‘비교’는 영적으로도 주목할 만합니다. ‘친구 남자 친구는 이것을 해줬다’, ‘다른 남자들은 다 한다’, ‘언니 남자 친구는 이것도 보냈다’는 말입니다. 비교가 관계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상대는 더 이상 고유한 한 사람이 아니라 타인과 경쟁하여 일정한 기준을 충족해야 하는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사랑은 ‘당신이어서’ 기뻐하는 것인데, 비교는 ‘다른 사람보다 당신이 얼마나 잘하는가’를 묻습니다. 그래서 비교가 지속되면 선물도 선물이 아니게 되고, 배려도 배려가 아니게 되며, 사랑에서 자발적으로 하던 행동조차 점차 의무가 됩니다.

 

반대로 두 번째 관계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거창한 희생이 아닙니다. ‘지난번에 김치 먹고 싶다고 하셔서요’, ‘오늘 우산 씌워줘서 고마워요’, ‘예약까지 알아봐줘서 고마워요’ 같은 아주 작은 반응입니다. 상대가 지나가듯 한 말을 기억하고, 우산을 씌워주느라 젖은 어깨를 알아보고, 맛없는 식당에서도 결과보다 예약하고 준비한 마음을 봅니다. 영상 후반부에서 성우 씨가 일본인 여자 친구와의 차이를 ‘그 사람은 내가 한 걸 알아봐줘’라고 한 것은 그래서 의미가 있습니다.

 

‘알아봐준다’는 것은 생각보다 깊은 사랑의 행위입니다. 우리는 가까운 사람의 선을 가장 쉽게 ‘당연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고마웠던 출퇴근길 배려가 몇 년 뒤에는 당연한 일이 되고, 처음에는 감사했던 식사 준비와 설거지와 육아와 경제적 책임이 시간이 흐르면 ‘원래 당신이 해야 하는 일’이 됩니다. 영상도 정확히 이것을 지적합니다. 월급이 들어오는 것, 주말에 아이를 데리고 나가는 것, 명절에 운전하는 것 등이 어느 순간 모두 당연한 일이 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감사는 단순한 인간관계 기술보다 더 깊습니다. 내가 받은 선을 ‘내가 당연히 받을 몫’으로 보지 않는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자기성에서 한 걸음 물러나는 일입니다. 배우자가 밥을 해주는 것도, 돈을 벌어오는 것도, 차로 데려다주는 것도, 아플 때 돌보는 것도 그 사람에게서 자동으로 발생하는 기능이 아닙니다. 한 인격이 나를 위해 시간과 힘을 사용한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보는 순간 상대는 ‘내 필요를 충족시키는 사람’에서 ‘나에게 선을 베풀고 있는 한 사람’으로 다시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고마워’라는 짧은 말은 관계 안에서 proprium의 지배를 약하게 만드는 매우 작은 체어리티의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영상에는 이것을 아주 잘 보여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남자가 처음 만든 김치찌개가 맛이 없었는데 유이 씨는 한 그릇을 다 먹고 ‘한국 사람이 해준 김치찌개 처음 먹어 봐요. 다음에 또 해 줘요’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남자는 유튜브를 보며 요리를 연습하고 나중에는 된장찌개와 제육볶음까지 만들게 됩니다. 이것을 단순히 ‘남자를 움직이는 여자 화법’ 정도로 읽으면 너무 얕습니다. 사랑이 상대 안의 선을 발견하고 인정해 줄 때 그 선이 더욱 자라날 수 있다는 이야기로 읽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끊임없는 비난 속에서도 변할 수 있지만, 자신 안의 작은 선을 누군가 알아봐줄 때 훨씬 자유롭게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중요한 균형이 필요합니다. 유이 씨처럼 무조건 칭찬하고 참고 맞춰주는 것이 이상적인 사랑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영상에는 오히려 매우 중요한 반례가 있습니다. 성우 씨가 약속을 잊고 술자리에 가서 한 시간을 기다리게 했을 때 유이 씨는 ‘괜찮아요’라고 덮어버리지 않습니다. ‘어제는 조금 서운했어요. 다음에 늦으면 먼저 연락해 줘요’라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또 일본 전철에서 전화 통화하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는 사실도 알려줍니다. 다만 ‘틀린 것을 알려주되 창피하지 않게’ 알려줍니다. 바로 이것이 체어리티와 연결됩니다. 사랑은 상대의 잘못을 못 본 척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더 나아질 수 있도록 진리를 사랑 안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영상의 핵심은 ‘남자는 칭찬해야 말을 듣는다’도 아니고 ‘일본 여자는 한국 여자보다 남자를 잘 다룬다’도 아닙니다. 더 깊은 질문은 ‘나는 사랑하는 사람의 선을 보고 있는가, 아니면 부족한 것만 찾고 있는가?’입니다. 상대에게 열 가지 선이 있고 한 가지 부족함이 있을 때 proprium은 이상하게도 그 한 가지에 시선을 고정합니다. 그리고 그 부족함이 채워지면 잠시 감사하는 대신 열한 번째 부족함을 찾아냅니다. 그렇게 되면 상대는 아무리 노력해도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보다 계속 평가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것은 남녀 어느 한쪽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남편도 아내의 수많은 수고를 ‘원래 아내가 하는 것’으로 만들 수 있고, 아내도 남편의 수고를 ‘원래 남편이 하는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부모도 자녀의 효도를 당연하게 여길 수 있고, 자녀도 부모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목회자도 교인의 섬김을 당연하게 여길 수 있으며 교인도 목회자의 수고를 당연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당연함’은 감사가 사라지는 자리이며, 감사가 사라지면 관계는 조금씩 권리와 의무의 거래로 변하기 쉽습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상대의 반응에 따라 성우 씨 자신이 달라졌다는 점입니다. 서울에서는 ‘안 하면 서운하다고 할까 봐’ 행동했지만 도쿄에서는 ‘하고 싶어서’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고맙다는 말을 들으니 다시 데려다주고 싶고, 맛있다는 말을 들으니 다시 요리하고 싶어졌다는 것입니다. 외적인 행동은 비슷합니다. 데려다주고, 선물을 하고, 음식을 만들고, 기념일을 챙깁니다. 그러나 내적 동기가 달라졌습니다. 하나는 두려움과 의무에서 나오고 다른 하나는 자유와 기쁨에서 나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영적 삶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했느냐만이 아니라 ‘어떤 사랑에서 그것을 했느냐’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이 영상은 결혼애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합니다. ‘결혼애’(Conjugial Love, 1768, CL)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참된 결혼적 결합은 상대를 이용하여 나의 행복을 충족시키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의 선을 기뻐하면서 점차 하나의 삶을 이루어 가는 관계입니다. 참된 결혼에는 ‘하나가 되고자 하는 의지’가 있습니다(CL.215). 그러나 하나가 된다는 것은 한쪽이 다른 쪽의 기대를 완벽하게 읽고 맞추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의 내면을 알려고 하고, 필요한 것은 정직하게 말하며, 받은 선에는 감사하고, 잘못은 사랑 안에서 바로잡으면서 두 사람 모두 조금씩 자기성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상 제목의 ‘감동 주는 일본 여자와 눈치 주는 한국 여자’라는 구도는 ‘스베덴보리의 렌즈’ 앞에서는 결국 사라져야 합니다. 국적을 떼어내고 나면 남는 것은 두 종류의 사랑입니다. ‘내가 얼마나 사랑받는지 끊임없이 확인하려는 사랑’과 ‘상대에게서 오는 작은 선을 발견하고 기뻐하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랑은 한국인 안에도, 일본인 안에도, 남자 안에도, 여자 안에도 모두 있을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한 사람 안에서도 이 두 모습을 동시에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떤 날에는 배우자가 해준 작은 일을 보고 진심으로 ‘고마워’라고 말하면서도, 다른 날에는 ‘그 정도는 당연한 것 아니야?’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때에는 상대의 실수를 부드럽게 알려주다가도 어떤 때에는 ‘그것도 몰라?’라며 자존심을 상하게 합니다. 그래서 이 영상은 ‘어떤 여자를 만나야 하는가?’라는 질문보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읽을 때 훨씬 깊어집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비추는 마지막 지점은 주님입니다. 인간에게 있는 모든 참된 선의 근원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입니다. 그러므로 상대에게서 작은 선을 발견하고 감사하는 습관은 궁극적으로 그 사람을 넘어 그 선의 근원이신 주님을 향하게 합니다. 배우자가 오늘도 수고했다는 것, 나를 기다려 주었다는 것, 아픈 나를 돌보았다는 것, 서툰 음식을 만들어 주었다는 것, 내 말을 기억해 주었다는 것을 알아보는 사람은 일상의 평범한 순간 속에 들어오는 선을 발견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영상 마지막의 ‘남자는 거창한 대접을 받고 싶은 게 아니다’라는 결론도 조금 넓혀 말할 수 있겠습니다. 남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베푼 작은 선이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에 닿았음을 알고 싶어 합니다. ‘고마워’, ‘오늘 수고했어’, ‘당신이 해줘서 좋았어’, ‘그때 내가 힘든 걸 알아줘서 고마웠어.’ 이런 말은 작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상대의 존재와 선을 ‘내가 보고 있다’는 고백입니다.

 

어쩌면 오래된 관계가 메말라가는 가장 위험한 순간은 싸움이 많아졌을 때보다 ‘고마운 것이 없어졌을 때’인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고마운 일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너무 익숙해져 당연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거듭남은 거창한 곳에서만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내 곁의 사람이 해준 아주 작은 일을 다시 발견하는 데서도 시작될 수 있습니다. ‘왜 이것밖에 못 하지?’에서 ‘이것도 해주었구나’로 시선이 바뀌는 순간입니다.

 

결국 이 영상에서 가장 오래 남겨둘 문장은 ‘한국 여자와 일본 여자는 다르다’가 아니라 이것일 것입니다. ‘은정 씨는 사랑을 확인받으려 했고 유이 씨는 사랑을 알아봐줬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 문장을 우리 자신에게 돌려놓습니다. ‘나는 지금 사랑을 확인받으려고 하는가, 아니면 내 곁에 이미 와 있는 사랑을 알아보고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는 한국인도 일본인도,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주님 앞에서 자기 사랑을 내려놓으며 서로의 선을 발견하는 법을 배워 가는 두 사람만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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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앞의 영상을 부부의 입장에서 보면 가장 강하게 남는 질문은 ‘우리는 정말 한 팀인가?’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시선을 조금 옮겨 부모의 자리에서 바라보겠습니다. 그러면 질문도 달라집니다. ‘결혼한 내 자녀와 그 배우자가 한 팀이 되도록 나는 얼마나 잘 물러나 주고 있는가?’입니다. 영상에는 시어머니의 말, 장모의 개입, 명절 방문 순서, 음식 준비, 용돈, 육아, 제사와 친척 관계 등 수많은 문제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켜고 부모의 자리에서 보면 이 모든 문제의 밑바닥에는 하나의 영적인 문제가 숨어 있습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것’과 ‘자녀를 내 삶의 연장으로 붙들고 있는 것’은 같은가 하는 문제입니다.

 

성경은 결혼에 관하여 매우 놀라운 순서를 제시합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2:24). 여기에는 ‘떠남’이 먼저 있고 ‘합함’이 있으며 그 결과 ‘한 몸’이 됩니다. 물론 이것은 부모와 관계를 끊으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부모 공경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결혼이 이루어지는 순간 관계의 질서에는 분명한 변화가 생깁니다. 이전까지 부모와 자녀가 하나의 가정이었다면 이제 그 자녀는 배우자와 새로운 가정을 이루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창2:24의 ‘떠남’은 자녀에게만 요구되는 일이 아닙니다. 자녀가 부모를 떠나야 한다면 부모 역시 자녀가 떠날 수 있도록 놓아주어야 합니다. 어쩌면 후자가 더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결혼애’(Conjugial Love, 1768, CL)에서 스베덴보리는 참된 결혼의 본질을 두 마음의 결합에서 찾습니다. 두 사람이 단순히 한집에서 사는 것을 넘어 점차 하나의 삶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그 안에는 ‘하나가 되고자 하는 의지’가 있습니다(CL.215). 그렇다면 결혼한 자녀를 둔 부모가 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사랑 가운데 하나는 바로 그 결합을 보호해 주는 것입니다. 아들과 며느리 사이, 딸과 사위 사이에 형성되고 있는 ‘우리’를 존중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이 어린 시절에는 보호하고 가르치고 개입하는 사랑이었다면, 결혼 이후에는 상당 부분 ‘물러남으로써 보호하는 사랑’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이것이 어려운 까닭은 부모에게는 자녀의 결혼보다 부모-자녀 관계가 훨씬 오래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들은 며느리를 만나기 수십 년 전부터 내 아들이었고, 딸은 사위를 만나기 수십 년 전부터 내 딸이었습니다. 부모에게는 수많은 기억과 희생과 애착이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 깊은 곳에서는 결혼 후에도 ‘내 아들’, ‘내 딸’이라는 감각이 가장 먼저 작동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결혼한 자녀에게는 이제 또 하나의 매우 중요한 정체성이 생겼습니다. ‘누군가의 남편’, ‘누군가의 아내’입니다. 부모가 이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악의가 전혀 없어도 자녀의 결혼생활에 끊임없이 압력을 가할 수 있습니다.

 

명절은 이 질서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때입니다. ‘이번에는 언제 오니?’, ‘몇 시에 올 거니?’, ‘자고 갈 거지?’, ‘큰아버지가 오시는데 얼굴은 보고 가야지’, ‘명절인데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니?’ 각각의 말만 떼어 놓으면 크게 잘못된 말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실제로 부모 입장에서는 오랜만에 자녀를 보고 싶은 마음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요구가 양가에서 동시에 들어오면 자녀 부부는 그 사이에서 선택해야 합니다. 부모에게는 ‘조금만 더 있다 가라’는 한마디이지만, 자녀의 배우자에게는 ‘우리 친정보다 시댁이 항상 우선이다’ 또는 그 반대의 메시지로 경험될 수도 있습니다. 영상이 보여 주는 갈등의 상당 부분은 바로 이런 작은 요구들이 반복되면서 생겨납니다.

 

여기서 부모가 특별히 살펴야 할 것은 ‘나는 요구하지 않았다’는 자기평가입니다. 직접 ‘우리 집부터 와라’고 말하지 않았더라도 서운한 표정, 반복되는 질문, 다른 집 자녀와의 비교, ‘옛날에는 다 그랬다’는 말, 늦게 왔을 때의 냉랭함으로 충분히 압력을 줄 수 있습니다. 자녀는 부모를 잘 알기 때문에 부모가 명시적으로 요구하지 않아도 무엇을 원하는지 압니다. 그러므로 부모의 거듭남은 말만 조심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어야 사랑받는다고 느끼는 마음’ 자체를 살펴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proprium의 문제가 등장합니다. proprium은 노골적인 이기심으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주 선한 외형을 입을 때 분별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가족인데 이 정도는 해야지’,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당연하지’, ‘우리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명절에 가족이 모이는 게 뭐가 나쁘니?’ 모두 그 자체로 틀린 말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 말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입니다. 자녀의 자유와 새 가정을 존중하는 사랑이 들어 있을 수도 있고, ‘내가 부모이니 이 정도는 받을 권리가 있다’는 자기성이 들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외적 행동만 보면 둘은 비슷하지만 내적 동기는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영상에서 매우 중요한 대목은 ‘아들이 효도하고 싶은데 며느리가 일을 하고, 딸이 효도하고 싶은데 사위가 비용을 부담한다’는 지적입니다. 부모의 입장에서도 이것은 깊이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며느리가 차린 명절상을 받으면서 ‘우리 아들이 참 효자다’라고 생각한다면 실제로 그 효도의 상당 부분을 누가 감당하고 있는지 보아야 합니다. 반대로 딸이 부모에게 좋은 선물을 해왔을 때도 그 비용과 준비가 사위에게 어떤 부담이 되었는지 부모는 알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모가 자녀의 효도를 기쁘게 받는 것과 자녀 배우자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때로는 부모가 먼저 ‘너희가 무리하면서까지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 주는 것이 오히려 더 깊은 가족 사랑일 수 있습니다.

 

특히 며느리와 사위를 ‘우리 집 사람이 되었으니 우리 집 방식에 따라야 하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결혼은 한 사람이 다른 집안으로 편입되어 그 집안의 관습에 복종하는 사건만은 아닙니다. 두 사람이 새로운 가정을 이루는 사건입니다. 따라서 ‘우리 집은 원래 이렇다’는 말은 생각보다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이 새로운 가족에게 과거의 질서를 그대로 강요하는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통은 소중하지만 사람보다 높을 수는 없습니다. 전통이 사랑을 돕는다면 보존할 가치가 있지만, 전통 때문에 한 사람이 지속적으로 고통받는다면 부모 역시 그 전통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부모가 자녀 부부에게 아무 말도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것 역시 반대 극단입니다. 자녀가 결혼했다고 부모의 지혜와 경험이 무가치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부모는 조언할 수 있고 걱정할 수 있으며 잘못된 것을 잘못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조언’과 ‘지배’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조언은 상대에게 자유를 남겨 둡니다. 지배는 내가 원하는 결론을 상대가 선택해야 마음이 놓입니다. ‘내 생각은 이렇지만 결정은 너희 둘이 잘 의논해서 해라’라고 말하고 실제로 다른 결정을 했을 때도 그것을 존중할 수 있다면 조언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알아서 해라’라고 말해 놓고 다른 선택을 하면 서운함과 냉대로 대한다면 사실상 선택권을 준 것이 아닙니다.

 

또 하나 부모가 매우 조심해야 할 것은 부부 사이의 갈등에 들어가는 방식입니다. 자녀가 배우자에 대한 불만을 부모에게 털어놓을 때 부모의 본능은 자기 자녀를 보호하는 쪽으로 움직입니다. 그러나 부부싸움은 화해하면 끝날 수 있어도 부모의 마음에 새겨진 며느리나 사위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은 오래 남을 수 있습니다. 자녀는 다음 날 배우자와 화해했는데 부모는 몇 년 전 들은 이야기를 아직 기억하는 일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결혼한 자녀가 배우자를 흉볼 때 무조건 함께 분노해 주는 것이 반드시 사랑은 아닙니다. 때로는 ‘많이 힘들었겠구나. 그래도 그 문제는 너희 둘이 잘 이야기해 보아라’ 하고 자녀를 다시 배우자에게 돌려보내는 것이 그 결혼을 보호하는 부모의 지혜일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매우 깊은 영적 원리가 있습니다. 참된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을 ‘내 것’으로 만들려 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인간에게 자유를 주시는 것처럼, 사랑은 상대가 자기 자리에서 바르게 설 수 있도록 돕습니다. 자녀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자녀의 모든 선택을 대신하고, 자녀의 배우자와 경쟁하고, 자녀가 자신보다 배우자를 우선할 때 배신당했다고 느낀다면 그 사랑 안에는 소유하려는 자기성이 섞여 있을 수 있습니다. 부모에게도 거듭남이 필요하다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자녀를 키우는 동안에는 붙잡아 주는 것이 사랑이었다면 어느 시점부터는 놓아주는 것이 사랑이 됩니다.

 

그래서 결혼한 자녀가 ‘이번 명절에는 처가부터 가겠습니다’, ‘이번에는 여행을 가려고 합니다’, ‘제사는 이렇게 간소화했으면 합니다’, ‘이번에는 오래 있지 못합니다’라고 말할 때 부모의 마음에 서운함이 생기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감정은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다음입니다. 그 서운함을 자녀에게 죄책감으로 돌려줄 것인가, 아니면 주님 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살필 것인가입니다. ‘왜 나는 아이들이 오지 않으면 이렇게 섭섭한가? 내가 원하는 가족의 모습을 아이들에게 강요하고 있지는 않은가? 아이들이 나를 사랑한다는 증거를 특정한 방식으로 확인받으려 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런 질문이 부모 자신의 거듭남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부모에게는 또 하나의 어려운 시험이 있습니다. 자녀의 배우자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입니다. 부모의 눈에는 분명 부족한 점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기억해야 할 것은 그 사람이 ‘내 며느리’, ‘내 사위’이기 이전에 자녀가 평생을 함께 살아갈 배우자라는 사실입니다. 부모가 며느리나 사위를 지속적으로 깎아내리면 결국 자녀에게 두 충성 사이에서 선택하도록 요구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녀가 배우자를 보호하면 ‘결혼하더니 변했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창2:24의 질서에서 보면 어느 정도의 변화는 오히려 당연합니다. 부모를 버린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결혼적 결합을 보호하기 위해 경계를 세우는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모에게 가장 아름다운 말 가운데 하나는 어쩌면 ‘우리 때문에 너희 둘이 싸우지는 마라’일 것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 일은 우리가 감당할 테니 너희 가정을 먼저 잘 세워라’라고 말할 수 있다면 더욱 깊은 사랑일 것입니다. 이것은 부모를 중요하지 않은 존재로 만드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부모가 자신의 자리를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자녀의 사랑을 붙잡아야만 안심하는 부모가 아니라 자녀가 배우자와 잘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기뻐할 수 있는 부모, 이것은 결코 작은 영적 성숙이 아닙니다.

 

여기서 부모 공경의 의미도 새롭게 볼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효도를 요구하는 것과 자녀가 자유롭게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전혀 다른 열매를 맺습니다. 강요된 효도는 외적 행동을 얻을 수는 있지만 마음까지 얻기는 어렵습니다. 반대로 부모가 자녀 부부의 자유와 경계를 존중하면 오히려 자녀가 기쁜 마음으로 부모를 찾을 가능성이 커집니다. 사랑은 붙잡을수록 멀어지고 자유를 줄수록 가까워지는 역설적인 면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강제로 사랑을 받아내지 않으시는 이유와도 통하는 지점입니다.

 

명절 역시 이런 의미에서는 부모에게 하나의 거울이 됩니다. ‘아이들이 몇 시에 왔는가’, ‘얼마짜리 선물을 가져왔는가’, ‘며느리가 음식을 얼마나 했는가’, ‘사위가 얼마나 오래 앉아 있었는가’를 평가하는 시간이 아니라, ‘나는 이들의 결혼을 평안하게 해주는 부모인가?’를 돌아보는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며느리가 부엌에서 일하고 있을 때 ‘너도 앉아서 쉬어라’라고 말하고, 사위가 불편하게 앉아 있을 때 자연스럽게 쉴 자리를 만들어 주고, 자녀 부부가 다음 일정 때문에 일어나려 할 때 ‘그래, 얼른 가 봐라’ 하고 보내 줄 수 있다면 그것도 매우 실제적인 체어리티입니다. 거창한 신앙 고백보다 이런 작은 행동 속에서 사랑의 질서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결국 부모의 입장에서 이 영상의 핵심 질문은 ‘왜 요즘 자녀들은 명절을 힘들어하는가?’가 아닐 것입니다. 더 깊은 질문은 ‘나는 자녀가 결혼한 뒤에도 여전히 부모-자녀 관계가 그들의 삶에서 가장 우선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입니다. 그리고 ‘내가 섭섭하지 않기 위해 자녀의 배우자가 희생하도록 요구하고 있지는 않은가?’입니다. 이 질문은 부모에게 결코 편안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은 언제나 이런 불편한 자기 발견을 통과합니다.

 

창2:24의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라는 말씀은 그래서 자녀에게만 주어진 말씀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자녀에게는 ‘떠날 용기’를 요구하고 부모에게는 ‘보낼 사랑’을 요구합니다. 자녀가 떠나는 것이 거듭남이라면 부모가 보내는 것 역시 거듭남입니다. 어린 자녀에게는 손을 잡아 주는 부모가 필요하지만, 결혼한 자녀에게는 그 손을 조금씩 놓아주는 부모가 필요합니다. 붙잡고 싶은 마음이 올라올 때마다 ‘이 아이는 내 소유가 아니라 주님께 속한 한 사람이며, 이제 배우자와 함께 새로운 삶을 이루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부모의 가장 큰 성공은 자녀가 언제까지나 부모를 가장 먼저 찾게 만드는 데 있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아들과 며느리가 서로 사랑하고, 딸과 사위가 서로를 보호하며, 그들의 아이들이 평안한 가정 안에서 자라는 것을 기뻐하면서 자신은 한 걸음 뒤에서 그 결혼을 축복할 수 있게 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우리 집에 먼저 와라’보다 ‘너희 둘이 의논해서 편한 대로 해라’, ‘며느리가 이것도 안 하느냐’보다 ‘너희 둘이 행복하게 살아라’, ‘결혼하더니 자식이 변했다’보다 ‘이제 정말 자기 가정을 이루어 가는구나’라고 말할 수 있는 부모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이것은 단순한 세대 갈등 해결법이 아닙니다. 사랑의 질서를 배우는 일입니다. 부모의 사랑도 주님의 손 안에서 계속 변화하고 정화되어야 합니다. 처음에는 품는 사랑이었다가, 가르치는 사랑이 되고, 기다리는 사랑이 되며, 마침내 놓아주고 축복하는 사랑으로 성숙해 갑니다. 어쩌면 결혼한 자녀를 둔 부모에게 주어진 거듭남의 한 장면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내 자녀를 얼마나 붙잡고 있는가’가 아니라 ‘주님 안에서 얼마나 자유롭게 놓아줄 수 있는가.’ 자녀의 결혼을 지켜 주기 위해 기꺼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것, 그것 역시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매우 깊은 사랑입니다.

 

 

 

SY.102, 존버의 경제학, ‘명절 이혼이 많은 진짜 이유’ (20260922)

※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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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 영상은 명절이 끝난 뒤 이혼이 늘어나는 현상에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영상이 실제로 다루는 것은 ‘명절 때문에 이혼하는 부부’가 아닙니다. 오랫동안 쌓여 있던 부부 관계의 균열이 명절이라는 특별한 환경에서 한꺼번에 드러나는 과정입니다. 영상의 표현대로 명절은 ‘원인이라기보다 촉매제’입니다. 시댁과 처가, 방문 순서, 음식 준비, 설거지, 육아, 용돈, 제사, 친척들의 질문과 비교가 며칠 안에 집중되면서 평소에는 감추어져 있던 관계의 질서가 밖으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영상은 그 수많은 갈등을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모읍니다. ‘우리는 정말 한 팀인가?’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켜면 영상에서 말하는 ‘한 팀’이라는 표현이 훨씬 깊어집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결혼은 단순히 두 사람이 공동생활을 하는 계약이 아닙니다. ‘결혼애’(Conjugial Love, 1768, CL)에서 그는 참된 결혼의 본질을 두 마음(minds)이 하나를 향하여 결합되어 가는 데서 찾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육체적으로 한집에 사는 것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 서로의 선과 진리가 결합하면서 두 사람의 삶이 점차 하나의 삶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결혼애에는 ‘하나가 되고자 하는 의지’가 있습니다(CL.215). 성경의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창2:24)는 말씀 역시 단순히 육체적 결합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내적 결합의 질서를 품고 있습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영상 속 지영 씨를 무너뜨린 것은 정말 전 몇 장이나 설거지가 아닙니다. 영상에서도 정확히 그 점을 짚습니다. 시어머니의 말은 여러 해 견뎠지만 남편이 ‘우리 엄마가 틀린 말했어? 네가 조금만 더 노력하면 되잖아’라고 말하는 순간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왜 그 한마디가 그렇게 무거웠을까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결혼을 통해 형성되어야 할 ‘우리’가 그 순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내가 요구했던 것은 남편이 어머니와 싸워 달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과 나는 하나의 새로운 삶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여전히 자신의 원가족을 중심으로 판단하고 배우자에게 그 질서에 적응할 것을 요구합니다. 외적으로는 결혼했지만 내적인 관계의 중심은 아직 이동하지 않은 셈입니다.

 

여기서 창세기 2장의 말씀이 놀랍도록 현실적으로 다가옵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2:24). 이 말씀에서 ‘부모를 떠난다’는 것을 부모를 버리거나 효도를 중단한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문자적으로도 결혼은 부모와의 관계를 끊는 명령이 아닙니다. 그러나 결혼 후 관계의 질서에는 분명한 변화가 생깁니다. 이제 남편과 아내 사이에 새로운 가장 가까운 공동체가 형성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에 대한 사랑이 배우자와의 결혼적 결합을 지속적으로 침범하거나 파괴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많아서 생긴 문제가 아니라 사랑들의 ‘질서’가 뒤바뀐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영상에서 특히 예리한 대목이 바로 ‘내 부모는 내가 챙긴다’는 제안입니다. ‘아들이 효도하고 싶은데 며느리가 일을 하고, 딸이 효도하고 싶은데 사위가 비용을 부담한다’는 지적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생각해 볼 만한 대목입니다. 선(good)은 단지 외적으로 선해 보이는 행동이라고 해서 선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행동 안에 들어 있는 사랑과 목적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선합니다. 그러나 ‘내가 효자가 되고 싶은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배우자의 노동과 시간과 감정을 당연한 자원처럼 사용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외형은 ‘효도’이지만 그 안에는 자기 사랑(proprium)이 숨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 집은 원래 그래’, ‘며느리라면 이 정도는 해야지’, ‘사위가 그 정도도 못하나’라는 말에는 전통이라는 이름을 입은 proprium이 숨어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렌즈를 반대쪽에도 똑같이 적용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시댁을 비판하기 위한 렌즈도, 며느리나 사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렌즈도 아닙니다. 배우자가 언제나 ‘내 편’을 들어야 한다는 주장 역시 잘못 이해하면 또 하나의 proprium이 될 수 있습니다. ‘당신은 내 배우자니까 내가 옳든 그르든 내 편이어야 해’라는 요구는 결혼애가 아닙니다. 참된 결혼적 결합은 두 사람이 서로의 자기성을 강화해 주는 동맹이 아니라 함께 주님의 질서 아래 들어가는 결합이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잘못했으면 부모의 잘못을 인정하고, 배우자가 잘못했으면 배우자의 잘못 역시 사랑 가운데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영상의 ‘내 편’이라는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무조건 나를 편드는 사람’이 아니라 ‘나와 함께 선과 진리를 향해 서는 사람’으로 한 단계 정화되어야 합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부당한 말을 했을 때 남편이 ‘우리 엄마 원래 그래. 네가 참아’라고 말하는 것은 배우자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아내가 ‘당신 어머니가 저런 말을 했으니 이제 다시는 만나지 마’라고 요구한다면 그것 역시 반드시 올바른 질서라고 할 수 없습니다. 가장 건강한 반응은 영상이 제안한 것처럼 남편이 자신의 어머니에게 ‘엄마, 그 문제는 우리가 알아서 할게’라고 경계를 세우면서도 어머니를 미워하거나 모욕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히려 체어리티(charity)에 가깝습니다. 체어리티는 모든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영원한 선을 바라보며 질서를 세우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부모 공경과 배우자 사랑은 본래 서로 경쟁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문제는 ‘누구를 더 사랑하느냐’가 아니라 각각의 사랑을 어느 자리에 놓느냐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은 질서의 나라입니다. 높은 사랑이 낮은 사랑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을 제자리에 놓습니다. 부모를 사랑하고 공경하면서도 배우자와 함께 형성한 새로운 가정의 경계를 지킬 수 있습니다. 오히려 제대로 세워진 결혼 관계 안에서 부모를 사랑할 때 그 효도 역시 더 자유롭고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배우자를 희생시켜 부모를 만족시키는 것은 결국 부모와 배우자 모두에게 좋지 않은 열매를 남깁니다.

 

영상에서 명절의 또 다른 특징은 평소 숨겨져 있던 것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거듭남의 관점에서 특히 흥미롭습니다. 우리는 평온할 때 자신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피곤하고, 돈이 들고, 교통이 막히고, 아이가 울고, 부모가 압박하고, 배우자가 예민해지면 평소 숨어 있던 자기 사랑과 지배욕과 인정 욕구가 밖으로 올라옵니다. 그렇다면 명절은 단순히 피해야 할 스트레스 기간만은 아닙니다. 영적으로 보면 내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여 주는 작은 시험(temptation)의 장이 될 수도 있습니다. ‘왜 아내가 우리 부모에게 이것밖에 못 하지?’, ‘왜 남편은 우리 친정에서는 저렇게 무뚝뚝하지?’, ‘왜 내가 손해 봐야 하지?’ 하는 감정들이 올라올 때, 우리는 그 감정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상 제목인 ‘존버의 경제학’도 이 렌즈 아래에서는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결혼에서 무조건 오래 버티는 것이 선은 아닙니다. 그러나 불편함이 생길 때마다 관계를 포기하는 것 역시 결혼의 깊은 의미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참느냐, 떠나느냐’라는 이분법보다 ‘이 관계 안에서 무엇이 거듭나고 있는가?’입니다. 일곱 번의 명절 동안 한 사람이 계속 참고 다른 사람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참음이 반드시 거듭남으로 이어진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참음이 사랑에서 나온 인내가 아니라 두려움과 체념으로 굳어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갈등을 계기로 남편과 아내가 자기 안의 proprium을 발견하고 서로의 고통을 듣고 관계의 질서를 다시 세운다면, 바로 그 갈등이 거듭남의 재료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영상 마지막의 질문은 매우 좋습니다. ‘오늘 뭐 불편한 거 없었어?’ 겉으로 보면 아주 평범한 한마디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것은 상당히 깊은 질문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당신 마음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는 알고 싶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결혼적 결합은 상대를 소유하는 데서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내면을 존중하며 알려고 하는 데서 깊어집니다. 다만 여기에 한마디를 더 보탤 수 있겠습니다. ‘오늘 내가 당신을 힘들게 한 것은 없었어?’입니다. 첫 질문이 상대의 고통을 듣는 질문이라면 두 번째 질문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질문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proprium의 벽에 작은 틈이 생깁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결혼의 최종 목적은 두 사람이 서로에게 완벽한 배우자가 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두 사람 모두 불완전한 인간이며 각자 자기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결혼의 중심에 배우자만 놓으면 결국 서로에게 감당할 수 없는 요구를 하게 됩니다. 참된 중심은 주님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도,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는 것도 결국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서로에게 흘려보내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결혼은 스베덴보리에게 단순한 행복의 제도가 아니라 거듭남의 매우 깊은 학교가 됩니다. 가장 가까이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내 proprium이 가장 많이 드러나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가장 깊은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도 있는 관계입니다.

 

결국 이 영상이 묻는 ‘우리는 정말 한 팀인가?’라는 질문에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렇게 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 팀’이라는 것은 배우자가 무조건 내 편이 되어 부모와 싸워 주는 것이 아닙니다. 두 사람이 부모를 공경하면서도 서로를 희생시키지 않고, 서로의 잘못을 감싸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바로잡으며, 각자의 proprium을 상대에게 관철시키는 대신 함께 주님의 질서 아래 서는 것입니다. 그렇게 남편과 아내가 ‘내 부모’, ‘네 부모’, ‘내 돈’, ‘네 시간’, ‘내 희생’을 넘어 조금씩 ‘우리’가 되어 갈 때, 창세기의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는 말씀은 결혼식 날 읽고 끝나는 문장이 아니라 수십 년에 걸쳐 이루어지는 거듭남의 말씀이 됩니다.

 

그러므로 명절은 어쩌면 결혼을 무너뜨리는 날이라기보다 결혼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드러내는 날인지도 모릅니다. 시댁도 처가도, 전도 설거지도, 용돈도 방문 순서도 그 자체가 본질은 아닙니다. 그것들을 통하여 ‘나는 배우자를 사랑하는가, 아니면 배우자를 통해 내 뜻을 이루려 하는가?’, ‘나는 부모를 공경하는가, 아니면 부모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배우자를 사용하고 있는가?’, ‘배우자가 힘들다고 말할 때 나는 그의 고통을 듣는가, 아니면 즉시 나도 힘들었다며 자기변호를 시작하는가?’가 드러납니다. 그런 의미에서 명절은 불편하지만 정직한 거울입니다.

 

그리고 그 거울 앞에서 발견한 것이 아름답지 않더라도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거듭남은 자기 안에 악이 없음을 확인하는 과정이 아니라, 주님의 빛 가운데 그것을 발견하고 돌이키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명절에 싸웠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싸움 이후입니다. ‘누가 옳았는가?’만 묻는 대신 ‘이번 일을 통해 주님께서 내 안의 무엇을 보여 주셨는가?’라고 묻기 시작할 때, 명절의 갈등조차 결혼을 파괴하는 사건에서 두 사람을 조금 더 하나로 만들어 가는 거듭남의 재료로 바뀔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 영상을 통해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한 번 더 비추어 볼 수 있는 지점입니다.

 

 

 

SY.103, 존버의 경제학, ‘명절 이혼이 많은 진짜 이유’ - 부모의 입장

※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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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 영상은 처음 들으면 상당히 불편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상티어’, ‘중티어’, ‘하티어’로 나누고, 남자의 키와 외모, 학력, 직업, 연봉, 자산, 부모의 경제력과 노후 준비를 하나하나 따진 뒤 어느 등급에 속하는지를 정합니다. 여자 역시 나이와 외모, 학력, 직업, 연봉, 자산, 부모의 재산과 노후 준비 등을 놓고 같은 방식으로 분류합니다. 심지어 어떤 조건이 조금만 달라져도 ‘상에서 중으로 내려간다’, ‘하에서 중으로 올라가기 어렵다’는 식으로 이야기합니다. 사람을 하나님 앞에 선 한 인격으로 보는 데 익숙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거부감부터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영상을 곧바로 ‘사람을 돈과 외모로 평가하는 세속적인 이야기’라고 밀어내기 전에 한 가지는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영상은 ‘사람의 참된 가치가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신학 강의가 아니라, 결혼정보회사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실제 사람들이 어떤 조건으로 서로를 선택하고 거절하는지를 오랫동안 관찰한 사람이 그 현실을 설명하는 영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상이 보여 주는 ‘결혼 시장의 민낯’에는 상당한 현실성이 있습니다. 실제 결혼은 사랑만으로 이루어지는 추상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두 사람이 만나 함께 살고, 집을 마련하고, 돈을 벌고, 자녀를 낳아 기르고, 양가 부모와 관계를 맺으며 수십 년을 살아가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상대의 직업이나 경제력, 건강, 성격, 가정환경, 부모의 노후 문제 등을 살펴보는 것 자체를 탐욕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결혼을 앞둔 사람이 ‘이 사람과 실제 생활을 함께 감당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것은 오히려 책임 있는 태도일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지상생활의 외적인 조건 자체는 무가치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외적인 것을 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보다 위에 올라가 사람 전체의 가치를 결정하기 시작하는 데 있습니다.

 

영상에서 가장 인상적인 표현 가운데 하나가 ‘육각형’입니다. 남자 상티어의 사례로 제시된 사람은 35세, 178cm, 연세대 공대 졸업, 유명 IT 대기업 과장, 연봉 1억 5천만 원, 순자산 10억 원, 서울 아파트 보유, 부모 역시 안정적인 직업에서 은퇴했고 노후 준비도 끝난 사람입니다. 진행자는 이런 사람을 어느 한 곳도 특별히 걸리는 것이 없는 ‘큰 육각형’이라고 부릅니다. 반면 외모와 키는 좋지만 연봉과 자산이 상대적으로 적은 사람은 ‘작은 육각형’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사실 하나가 드러납니다. 이 육각형에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나타내는 항목이 거의 없습니다. 정직한가, 따뜻한가, 책임감이 있는가, 배우자를 존중하는가,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 아는가, 욕망을 절제할 수 있는가, 배우자가 병들거나 실패했을 때도 곁을 지킬 사람인가 하는 것은 육각형의 축에 들어 있지 않습니다.

 

바로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가져와 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을 결정하는 가장 깊은 것은 그 사람이 ‘무엇을 소유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가’입니다. 사람의 생명은 그가 사랑하는 것에 있으며, 결국 사람은 자신이 지배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내적 모습이 형성됩니다. 그래서 지상에서는 대단히 성공하고 좋은 조건을 갖춘 사람이 영계에서는 전혀 다르게 드러날 수 있고, 반대로 세상에서는 별 볼 일 없어 보였던 사람이 놀랍도록 아름다운 내면을 지닌 사람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죽음 이후에는 학벌도, 직함도, 통장 잔고도, 부동산도, 부모의 사회적 지위도 가져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가지고 살아가는 동안 형성된 ‘사랑의 성품’은 그대로 가지고 갑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정말 중요한 ‘결혼 티어’는 무엇일까요? 질문 자체를 조금 바꾸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은 상티어인가?’가 아니라 ‘이 사람의 지배적 사랑은 무엇을 향하고 있는가?’라고 물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고 상대를 자기 행복을 위한 도구로 여기는 사람인지, 아니면 상대의 행복을 자기 행복처럼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인지가 훨씬 중요합니다. 재산이 10억인지 1억인지보다 돈을 어떻게 벌었고 어떻게 사용하는지가 중요하며, 좋은 직장에 다니는가보다 맡은 일을 정직하고 성실하게 하는지가 중요합니다. 외모가 아름다운가보다 그 아름다움을 자기 우월감과 타인을 지배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지, 아니면 감사하며 겸손하게 살아가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선과 진리는 추상적인 종교 개념이 아니라 이렇게 일상생활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상에 등장하는 조건들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30세 남자가 모은 돈이 500만 원이고 부모의 노후 준비도 되어 있지 않다면 결혼을 생각하는 상대가 걱정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39세 여성이 월세로 살고 있고 부모의 노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그것 역시 실제 결혼생활에서 고려할 현실적인 요소입니다. 여기서 ‘사랑만 있으면 됩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오히려 무책임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조건을 ‘현실적인 고려 사항’으로 보는 것과 그것을 ‘인간의 등급’으로 바꾸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라는 점입니다. ‘이 사람과 결혼하면 경제적으로 어려울 수 있다’와 ‘그러므로 이 사람은 하티어 인간이다’ 사이에는 매우 큰 간격이 있습니다.

 

영상에서 남녀를 평가하는 방식이 서로 다른 것도 흥미롭습니다. 남성은 직업, 연봉, 자산, 학력, 키, 외모, 부모의 경제력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반면, 여성에게는 특히 나이와 외모가 강력한 요소로 작용합니다. 그래서 33세에 대기업에 다니고 연봉 8천만 원, 순자산 3억 원에 본인 명의 오피스텔까지 있는 여성도 ‘중티어’로 분류되고, 39세 여성에게는 학력이나 연봉이 조금 더 좋아지는 정도로는 ‘하티어’를 벗어나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뒤집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요소로 ‘예쁨’을 반복해서 제시합니다. 이것은 이 영상이 만들어 낸 규칙이라기보다, 진행자의 주장대로라면 실제 결혼 시장에서 사람들이 보여 주는 선택을 압축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히려 우리는 영상 자체보다 그 영상을 가능하게 만든 우리 사회의 욕망을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매우 아이러니한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은 조건으로 평가받기를 싫어하면서 상대는 조건으로 평가합니다. 남자는 자신의 연봉과 자산만 보는 여성을 싫어하면서 젊고 예쁜 여성을 원할 수 있고, 여자는 자신의 나이와 외모만 보는 남성을 불쾌하게 여기면서 상대 남성에게 높은 연봉과 안정된 직업과 자산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결국 서로가 서로에게 ‘나라는 사람 전체를 봐 달라’고 요구하면서 정작 자신은 상대를 몇 개의 조건으로 압축해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남녀 어느 한쪽의 문제라기보다 인간의 proprium이 관계 안에서 나타나는 한 모습으로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좋은 것을 받아야 한다’는 욕구가 먼저 서고, ‘나는 상대에게 어떤 사람이 되어 줄 것인가’라는 질문은 뒤로 밀리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결혼애에 관한 가르침은 여기에서 방향을 완전히 바꿉니다. 참된 결혼은 ‘내게 가장 좋은 조건을 가진 사람을 확보하는 것’에서 시작하지 않고, 두 사람이 서로의 선과 진리를 사랑하며 하나를 이루어 가는 데서 시작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남자와 여자의 결합을 단순한 육체적 결합이나 생활 공동체로만 보지 않고, 더 깊은 차원에서는 사랑과 지혜, 선과 진리의 결합과 연결해서 봅니다. 그래서 참된 결혼애에서는 한 사람의 행복이 다른 사람의 행복과 점점 분리되지 않게 됩니다. ‘당신 때문에 내가 행복하다’에서 더 나아가 ‘당신이 행복한 것이 나의 행복이다’라는 상태로 향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적 연애 감정과는 상당히 다른 차원의 사랑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영상 속 ‘상티어’라는 개념도 뒤집힙니다. 세상에서 상티어인 사람이 반드시 천국적 의미에서도 상티어인 것은 아닙니다. 연봉 1억 5천만 원에 자산 10억 원, 서울 아파트와 좋은 학벌을 갖추었더라도 배우자를 자기 성공의 장식품처럼 여기고, 상대가 늙거나 병들거나 사회적 지위를 잃었을 때 사랑이 식어 버린다면 그 결혼의 내적 토대는 매우 약합니다. 반대로 연봉 3천만 원대의 평범한 직장인이고 아직 큰 재산이 없더라도 정직하게 일하고, 자신의 책임을 다하며, 배우자를 존중하고, 어려울 때 함께 견디며, 자신의 욕망보다 가정의 선을 먼저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의 내면에는 전혀 다른 종류의 가치가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가난하다고 해서 자동으로 선한 것도 아니고 부유하다고 해서 악한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초점은 언제나 재산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그것을 대하는 사랑의 질서에 있습니다.

 

여성의 아름다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영상에서는 ‘예쁘면 된다’는 말이 여러 번 반복됩니다. 현실의 결혼 시장에서는 실제로 외모가 강력한 경쟁력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자연적인 끌림이 있고 결혼에서 육체적 매력 역시 일정한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묘사하는 천국의 아름다움은 훨씬 흥미롭습니다. 영계에서는 내적인 상태가 외적인 모습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선한 애정과 지혜가 얼굴과 몸짓에까지 나타납니다. 지상에서는 화장과 성형과 옷과 젊음으로 외적 아름다움을 어느 정도 만들어 낼 수 있지만, 영계에서는 마음의 상태를 영원히 감출 수 없습니다. 결국 ‘어떤 얼굴을 가지고 태어났는가’보다 ‘어떤 사랑을 가지고 살아왔는가’가 그 사람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결정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영상에서 말하는 ‘39세’라는 숫자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결혼 시장에서는 나이가 올라갈수록 특히 여성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실제 출산 가능성이나 사람들이 선호하는 연령대와 연결된 현실적인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가치까지 나이에 따라 내려가는 것은 아닙니다. 26세 여성은 존재론적으로 39세 여성보다 더 가치 있는 인간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연봉 1억 5천만 원인 남성이 연봉 3천 2백만 원인 남성보다 하나님 앞에서 더 높은 등급의 인간인 것도 아닙니다. 시장에서의 ‘희소가치’와 인간의 ‘본질적 가치’를 구별하지 않으면 우리는 어느 순간 시장의 언어로 사람의 영혼까지 가격표를 붙이게 됩니다.

 

그래서 이 영상에서 가장 깊이 생각해 볼 문장은 오히려 ‘결혼 시장의 민낯을 봐야 한다’는 말일지도 모릅니다. 맞는 말입니다. 현실을 모른 채 이상만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민낯’을 보았다면 한 걸음 더 들어가야 합니다. 왜 우리는 이렇게 사람을 분류하고 있는가, 왜 남자는 여자의 젊음과 아름다움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고 여자는 남자의 경제력과 사회적 안정성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는가, 그리고 그 욕망 가운데 어디까지가 창조 질서 안의 자연스러운 필요이고 어디부터가 자기중심적인 욕망으로 변질되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바로 여기서 영적 분별이 시작됩니다.

 

특히 결혼을 준비하는 사람이 이 영상을 본다면 ‘나는 어느 티어인가?’보다 더 중요한 질문을 하나 해보았으면 합니다. ‘나는 어떤 배우자를 받을 자격이 있는가?’보다 ‘나는 누군가에게 어떤 배우자가 되어 줄 준비가 되어 있는가?’입니다. 내가 상티어 상대를 원하는 것보다 내가 상대에게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먼저입니다. 나는 돈을 얼마나 모았는가뿐 아니라 돈을 책임 있게 다룰 줄 아는가, 좋은 직장을 얻었는가뿐 아니라 맡은 일에 충실한가, 외모를 얼마나 관리했는가뿐 아니라 상대의 늙어가는 모습을 사랑할 수 있는가,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는가뿐 아니라 배우자의 부모를 존중할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이런 질문들은 결혼정보회사의 프로필 용지에는 들어가지 않을지 모르지만 실제 결혼생활에서는 오히려 훨씬 오래 남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결혼관은 아주 현실적인 힘을 갖습니다. 결혼은 결혼식 날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살아가면서 계속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35세에 ‘큰 육각형’이었던 사람도 50세에 직장을 잃을 수 있고, 건강을 잃을 수도 있으며, 사업에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26세의 아름다운 얼굴도 60세와 70세가 되면 변합니다. 부모의 재산도 사라질 수 있고 서울 아파트의 가격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만일 결혼을 붙들고 있는 것이 이런 조건뿐이라면 조건이 무너질 때 관계도 함께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 오랜 세월 형성된 선한 애정과 신뢰, 존중과 책임, 그리고 서로의 영적 선을 바라는 사랑이 있다면 외적인 조건이 변해도 결혼의 더 깊은 부분은 오히려 강해질 수 있습니다.

 

결국 이 영상이 보여 주는 ‘상·중·하’는 틀렸다기보다 매우 제한된 지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혼정보회사가 실제 매칭을 위해 사용하는 지도에는 분명 유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인간 전체를 설명하는 지도라고 생각하는 순간 문제가 생깁니다. 그 지도에는 사람의 영혼이 표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연봉 1억 5천’, ‘순자산 10억’, ‘강남 아파트’, ‘해외 명문대’, ‘167cm의 예쁜 외모’ 같은 항목은 적을 수 있지만, ‘이 사람은 배우자가 아플 때 밤새 곁을 지킬 사람인가’, ‘자신이 잘못했을 때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돈 앞에서 양심을 버리지 않는가’,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가’, ‘상대의 행복에서 자신의 기쁨을 찾을 수 있는가’ 같은 것은 숫자로 적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긴 결혼생활에서는 오히려 이런 것들이 결정적인 조건이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 영상을 보고 난 뒤 남는 결론은 ‘결혼정보회사의 티어 분류는 나쁘다’가 아닙니다. 오히려 ‘외적 조건의 세계에서는 그런 분류가 생겨날 수밖에 있다는 현실을 인정하되, 그것을 인간의 참된 가치와 혼동하지 말자’에 가깝습니다. 외적인 조건은 결혼을 시작하는 데 영향을 줄 수 있지만, 결혼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결국 두 사람 안에 형성된 내적인 것입니다. 외모는 만남의 문을 열 수 있고, 경제력은 생활을 안정시킬 수 있으며, 좋은 가정환경은 결혼생활에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두 영혼이 하나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상의 표현을 빌려 조금 다른 질문을 해볼 수 있습니다. ‘천국에서는 누가 상티어일까?’ 아마 이 질문에 연봉과 학벌과 자산을 적는 칸은 없을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는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이 가졌는지가 아니라, 가진 것을 가지고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가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얼굴을 가졌는지가 아니라 그 얼굴 뒤에 어떤 애정이 자리 잡았는지, 얼마나 좋은 직장을 가졌는지가 아니라 그 자리에서 얼마나 정직하고 유용한 삶을 살았는지, 얼마나 좋은 배우자를 얻었는지가 아니라 자신이 배우자에게 얼마나 좋은 사람이 되어 주었는지가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결혼 시장에서 말하는 ‘큰 육각형’보다 더 귀한 육각형이 있다면 어쩌면 이런 것일지도 모릅니다. ‘선함, 진실함, 책임, 절제, 배려, 그리고 상대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으로 여기는 사랑.’ 이것들은 결혼정보회사의 프로필에는 잘 나타나지 않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결혼을 영원한 결합으로 자라게 하는 훨씬 본질적인 조건들입니다. 세상에서는 ‘누구와 결혼했는가’가 성공처럼 보일 때가 많지만, 천국을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그보다 더 깊은 질문이 남습니다. ‘나는 결혼을 통해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이 영상의 ‘상·중·하 티어’를 넘어 우리가 끝까지 붙들어야 할 질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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