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96에서 스베덴보리는 고대와 말씀에서 ‘콧구멍’으로 냄새로 말미암아 기분 좋은 모든 것을 이해했으며, 이것이 퍼셉션을 뜻한다고 합니다. 처음 접하는 독자에게는 다소 뜻밖의 상응입니다. 눈이 이해나 인식과 관계된다는 것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지만, 왜 코와 냄새가 퍼셉션과 연결되는 것일까요?
우선 AC.96이 직접 제시하는 연결을 따라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콧구멍’에서 곧바로 퍼셉션으로 뛰어가는 것이 아니라 ‘콧구멍 - 냄새 - 기분좋은것 - 퍼셉션’이라는 흐름이 있습니다. 즉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코라는 신체기관 자체보다 냄새를 통하여 어떤 것을 기분 좋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작용입니다.
이 점은 지금까지 설명된 천적 인간의 퍼셉션과 잘 연결됩니다. 퍼셉션은 단순히 어떤 명제를 논리적으로 추론하여 결론을 얻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천적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내적으로 퍼셉션합니다. AC.95에서 사랑의 생명이 그를 ‘사람’이 되게 한다고 했고, AC.96에서는 사랑과 신앙에 관한 것들이 주님께 가장 기분 좋은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퍼셉션은 사랑과 신앙의 생명과 분리된 지적 판단으로 제시되지 않습니다.
냄새의 특징을 생각해 보면 이 표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사람은 어떤 향기를 맡을 때 매번 논리적 추론을 거친 뒤에야 그것이 향기로운지 불쾌한지를 아는 것이 아닙니다. 냄새는 직접적으로 받아들여지고 그 성질이 감지됩니다. 물론 자연적인 후각과 영적인 퍼셉션이 동일하다는 뜻은 아니지만, 스베덴보리가 고대의 표현과 말씀에서 냄새와 퍼셉션을 연결하는 이유를 이해하는 하나의 실마리가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현대적인 의미의 ‘직감’이나 ‘느낌’을 곧바로 퍼셉션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어떤 것에 좋은 느낌을 받았다고 해서 그것이 곧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지금 다루는 것은 천적 인간의 상태이며, 그의 사랑과 신앙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질서 안에 놓여 있는 가운데 주어지는 퍼셉션입니다.
따라서 ‘콧구멍이퍼셉션을뜻한다’는 말을 신체기관 하나와 영적 개념 하나를 기계적으로 짝짓는 상응표로 이해하기보다, 말씀 안에서 냄새와 향기로움이 어떤 것을 받아들이고 그 성질을 퍼셉션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문맥에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AC.96은 그 연결을 통하여 창2:7의 ‘콧구멍’이 단순한 해부학적 표현이 아니라 천적 인간의 생명과 퍼셉션에 관계된 표현임을 밝혀 줍니다. (AC.96심화1)
사1:6은 읽는 사람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말씀입니다. ‘발바닥에서머리까지성한곳이없다’는 표현은 몸의 어느 한 부분이 아니라 온몸이 상한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어 상처와 타박상과 새로 생긴 종기가 등장하고, 그것들을 짜내거나 싸매거나 기름으로 부드럽게 하지도 않았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AC.431에서 이 말씀을 인용하여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를 설명합니다. 독자에게 중요한 질문은 이 신체적 상처의 묘사가 라멕의 영적 상태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연결을 이해하려면 먼저 라멕의 말을 다시 살펴보아야 합니다. 라멕은 ‘한사람’을 죽였고 ‘어린아이’를 죽였다고 말합니다. AC.429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신앙을, 어린아이가 체어리티를 뜻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AC.431에서는 사람에게 연결된 상처가 신앙의 황폐를, 어린아이에게 연결된 타박상이 체어리티의 황폐를 뜻한다고 밝힙니다. 그러므로 라멕의 말에서 상처는 단순히 살인을 저지른 뒤 자신이 입은 육체적 부상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소멸된 상태를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이사야의 말씀은 이러한 상태를 더 넓은 이미지로 보여 줍니다. 상처가 한 곳에만 있다면 몸의 다른 부분은 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에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를 읽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발바닥과 머리의 개별 상응을 새로 정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몸 전체에 성한 곳이 없다는 묘사가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를 얼마나 심각한 상태로 나타내는지 살펴보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상처’, ‘타박상’, ‘종기’를 구별한다는 사실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는 상처를 신앙에, 타박상을 체어리티에, 종기를 그 둘 모두에 연결합니다. 우리 눈에는 모두 몸이 상한 모습을 나타내는 비슷한 말로 보이지만,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표현들이 저마다 고유한 의미를 지닌다고 설명합니다. 이 구별을 알면 이사야의 말씀이 단순히 고통스러운 장면을 반복해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를 함께 나타내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한곳이없다’는 말을 읽는 우리는 무엇을 조심해야 할까요? 우선 이것을 자신이 겪는 모든 신앙의 흔들림에 그대로 적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을 이해하지 못해 답답하거나,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 일을 후회하거나, 자신의 부족함을 발견하는 경험이 곧 라멕의 황폐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AC.431은 라멕이 나타내는 상태와 그 상태를 설명하는 말씀의 표현을 풀이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연약함을 이 본문만으로 최종 판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또한 이사야가 상처를 싸매거나 기름으로 부드럽게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고 해서, AC.431이 그 상태의 회복 가능성에 대한 모든 것을 설명했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번호에서 상처와 타박상과 종기가 무엇을 뜻하는지 밝힙니다. 회복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혹은 특정한 상태가 회복될 수 있는지에 관한 판단은 이번 번호의 직접적인 설명과 구별해야 합니다. 본문이 말하는 황폐의 심각성을 충분히 받아들이되, 본문이 말하지 않은 결론까지 덧붙이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국 ‘발바닥에서머리까지성한곳이없다’는 말씀은 AC.431에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를 보여 주는 강렬한 이미지입니다. 라멕의 ‘상처’와 ‘타박상’은 각각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를 나타내며, 이사야의 ‘종기’는 그 둘 모두에 관해 쓰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신앙과 체어리티를 따로 떼어 놓은 채 교회의 온전함을 생각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살펴보게 됩니다. (AC.431심화1)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창4:22)
AC.425
오늘날세상사람들은‘놋’(brass)이자연적선을뜻한다는사실을알지못합니다.또한말씀에등장하는모든금속이속뜻으로는각각고유한의미를지닌다는사실도알지못합니다.이를테면‘금’(gold)은천적선을,‘은’(silver)은영적진리를,‘놋’(brass)은자연적선을,‘쇠’(iron)는자연적진리를뜻합니다.다른금속들도마찬가지이며,‘나무’(wood)와‘돌’(stone)역시저마다고유한의미를지닙니다. 궤와성막과성전을만드는데사용한‘금’,‘은’,‘놋’,‘나무’도이러한것들을나타냅니다.이에관해서는주님의신적자비로나중에설명하겠습니다.이러한의미는예언서에서도분명하게드러납니다.이사야에서는다음과같이말합니다. It is unknown to the world at the present day that “brass” signifies natural good, and also that every metal mentioned in the Word has a specific signification in the internal sense—as “gold,” celestial good; “silver,” spiritual truth; “brass,” natural good; “iron,” natural truth; and so on with the other metals, and in like manner “wood” and “stone.” Such things were signified by the “gold,” “silver,” “brass,” and “wood,”used in the ark and in the tabernacle and in the temple, concerning which,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That such is their signification is manifest from the prophets, as from Isaiah:
이말씀은주님의오심과그분의나라,그리고천적교회에관한것입니다.‘놋대신금’(forbrassgold)은자연적선대신천적선을,‘쇠대신은’(forironsilver)은자연적진리대신영적진리를뜻합니다.‘나무대신놋’(forwoodbrass)은육체적선대신자연적선을,‘돌대신쇠’(forstonesiron)는감각적진리대신자연적진리를뜻합니다. 에스겔에서는다음과같이말합니다. treating of the Lord’s advent, of his kingdom, and of the celestial church. “Forbrassgold,” signifies for natural good celestial good; “forironsilver,” signifies for natural truth spiritual truth; “forwoodbrass,” signifies for corporeal good natural good; “forstonesiron,” signifies for sensuous truth natural truth. In Ezekiel:
이말씀은두로에관한것입니다.두로는영적·천적부요함을지닌사람들을뜻하며,‘놋그릇’(vesselsofbrass)은자연적선을가리킵니다. speaking of Tyre, by which are signified those who possess spiritual and celestial riches; “vesselsofbrass” are natural goods.
여기서도‘돌’(stones)은감각적진리를,‘쇠’(iron)는자연적진리,곧이성적진리를,‘놋’(brass)은자연적선을뜻합니다. 에스겔은다음과같은모습을보았습니다. where also “stones” denote sensuous truth; “iron,” natural, that is, rational truth; and “brass,” natural good. Ezekiel saw:
여기서도‘놋’은자연적선을뜻합니다.사람의‘발’(foot)이자연적인것을표상하기때문입니다.이와비슷하게다니엘에게도다음과같은모습이나타났습니다. where again “brass” signifies natural good, for the “foot” of man represents what is natural. In like manner there appeared to Daniel,
‘놋뱀’(brazenserpent, 민21:9)이주님의감각적·자연적선을표상했다는사실은앞에서살펴보았습니다. That the “brazenserpent” (Num. 21:9) represented the sensuous and natural good of the Lord may be seen above.
모세가놋뱀을만들어장대위에다니뱀에게물린자가놋뱀을쳐다본즉모두살더라(민21:9)
해설
AC.425는 두발가인이 다루는 ‘놋과쇠’의 속뜻을 더 넓은 말씀의 문맥에서 확인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에 등장하는 금속들이 단순한 재료가 아니라 각각 고유한 의미를 지닌다고 설명합니다. 금은 천적 선, 은은 영적 진리, 놋은 자연적 선, 쇠는 자연적 진리를 뜻합니다. 이 구별은 금속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나무와 돌에도 각각 고유한 의미가 있으며, 궤와 성막과 성전을 만드는 데 사용한 재료들 역시 그러한 의미를 지닙니다. 다만 이번 번호는 모든 재료의 속뜻을 자세히 설명하기보다, 두발가인과 직접 관련된 놋과 쇠의 의미를 밝히는 데 집중합니다.
먼저 사60:16-17은 금속과 재료들의 의미를 서로 비교하여 보여 줍니다. ‘놋대신금’은 자연적 선 대신 천적 선을, ‘쇠대신은’은 자연적 진리 대신 영적 진리를 뜻합니다. 이어 ‘나무대신놋’은 육체적 선 대신 자연적 선을, ‘돌대신쇠’는 감각적 진리 대신 자연적 진리를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이 주님의 오심과 그분의 나라, 그리고 천적 교회에 관한 것이라고 밝힙니다. 따라서 이 구절의 재료 교체는 단순히 값싼 물건을 값비싼 물건으로 바꾸는 일이 아니라, 서로 다른 차원의 선과 진리를 나타냅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이 구절을 인간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거듭남의 단계표로 곧바로 바꾸어 읽지 않는 것입니다. AC.425는 각각의 재료가 무엇을 뜻하는지 분명히 밝히지만, 사람이 육체적 선에서 자연적 선으로, 다시 천적 선으로 나아가는 구체적인 과정까지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자연적 선을 단순한 도덕적 의무감으로, 천적 선을 특정한 감정 상태로 정의하지도 않습니다. 우선 말씀 안에서 선과 진리가 서로 다른 차원으로 구별되어 표현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겔27:13에서는 ‘놋그릇’이 등장합니다. 이 말씀은 두로의 무역에 관한 기록이며, 스베덴보리는 두로가 영적·천적 부요함을 지닌 사람들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그 문맥에서 ‘놋그릇’은 자연적 선을 나타냅니다. 앞의 AC.424에서 세공업자가 선과 진리를 아는 사람 또는 그 기억지식과 관련되었다면, 이번 번호에서는 두로의 상품 가운데 등장하는 놋그릇을 통해 자연적 선의 의미를 확인합니다. 다만 ‘그릇’이라는 말에 별도의 의미를 더하여 인간의 마음이나 교리의 그릇이라고 풀이하는 것은 이번 번호가 직접 제시한 설명은 아닙니다.
겔27:13에 등장하는 ‘두발’이라는 이름도 창4장의 ‘두발가인’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AC.425는 이 두 이름의 관계를 따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름이 비슷하고 놋이 함께 등장한다는 이유만으로 두 인물이 동일한 속뜻을 지닌다고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이 구절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밝히는 것은 두로의 의미와 ‘놋그릇’이 자연적 선을 나타낸다는 사실입니다.
신8:9에서는 ‘돌’, ‘쇠’, ‘놋’이 함께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돌을 감각적 진리로, 쇠를 자연적 진리, 곧 이성적 진리로, 놋을 자연적 선으로 풀이합니다. 특히 여기서는 자연적 진리를 ‘이성적진리’라고도 표현합니다. 앞에서 쇠가 자연적 진리를 뜻한다고 설명한 내용을 이 구절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만 ‘돌은쇠’라는 표현을 감각적 진리가 실제로 이성적 진리로 변화하는 과정에 관한 상세한 설명으로 확대하기보다는, 본문이 밝힌 두 진리의 구별에 먼저 주목해야 합니다.
겔1:7은 놋의 의미를 ‘발’과 연결하여 보여 줍니다. 에스겔이 본 네 생물, 곧 그룹들의 발은 광낸 놋처럼 빛났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의 발이 자연적인 것을 표상하므로, 그 발에 나타난 놋 역시 자연적 선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는 놋이 자연적 선이라는 설명과 발이 자연적인 것을 표상한다는 설명이 서로 맞물립니다. 그러나 ‘광낸놋’이 정결하게 된 자연적 선의 특정한 상태를 뜻한다거나, 이 환상의 모든 신체 부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까지 이번 번호에서 밝히지는 않습니다.
단10:5-6도 비슷한 방식으로 인용합니다. 다니엘이 본 사람은 세마포 옷을 입고 우바스의 금띠를 띠었으며, 팔과 발은 광낸 놋과 같았습니다. 이 구절에서는 금과 놋이 한 형상 안에 함께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에서 금이 천적 선을, 놋이 자연적 선을 뜻한다고 밝혔습니다. 따라서 다니엘의 환상은 놋이 자연적 선을 나타낸다는 설명을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사례가 됩니다. 다만 이 번호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팔과 허리와 몸의 각 부분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까지 풀이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민21:9의 ‘놋뱀’을 언급합니다. 그는 놋뱀이 주님의 감각적·자연적 선을 표상했다는 사실을 앞에서 이미 설명했다고 말합니다. 앞의 인용들이 놋의 의미를 여러 말씀에서 확인하는 사례였다면, 놋뱀은 그 의미가 주님과 직접 관련되는 사례입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그 설명을 반복하지 않고 앞선 해설을 가리키므로, 놋뱀의 의미는 별도의 심화에서 살펴보겠습니다.
결국 AC.425는 금속과 재료의 속뜻을 통해 선과 진리가 서로 다른 차원에서 나타난다는 사실을 설명합니다. 특히 이사야와 에스겔, 신명기와 다니엘의 말씀은 ‘놋은자연적선,쇠는자연적진리’라는 앞선 설명을 뒷받침합니다. 그리고 놋뱀에 관한 마지막 언급은 자연적 선의 의미가 궁극적으로 주님과도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창4장의 두발가인이 다루는 놋과 쇠가 단순한 금속이 아니라 자연적 선과 진리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이해하게 됩니다. (AC.425해설)
시150:3-5에는 나팔, 비파, 수금, 소고, 현악기, 퉁소, 제금 등 여러 악기가 연이어 등장합니다. 문자적으로는 다양한 악기를 사용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권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AC.420에서 이 말씀을 인용한 뒤, 이 악기들이 찬양의 대상이 된 신앙의 선들과 진리들을 나타낸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각각의 악기에 고유한 의미가 없다면 이렇게 많은 종류의 악기가 언급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덧붙입니다. 이번 심화의 출발점은 바로 이 설명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에서 표상적 예배에 사용된 악기들이 서로 다른 것을 나타냈다고 설명했습니다. 수금과 비파, 노래와 그와 비슷한 악기들은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을 찬양하는 데 사용되었고, 나팔과 같은 관악기들은 신앙의 거룩한 것들, 곧 천적인 것들을 찬양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시150편의 악기들을 모두 단순히 ‘찬양의기쁨’이라는 하나의 뜻으로만 묶으면,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악기들 사이의 구별을 놓치게 됩니다.
이번 번호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개별 의미도 있습니다. 앞의 AC.419는 수금이 영적 진리를, 퉁소가 영적 선을 의미한다고 밝힙니다. AC.420은 시149:3을 설명하면서 소고는 선을, 수금은 진리를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시150편에 등장하는 수금과 소고, 퉁소를 읽을 때에는 이러한 설명을 참고할 수 있습니다. 다만 악기가 언급되는 모든 구절에서 세부 의미가 언제나 완전히 동일한 방식으로 적용된다고 단정하기보다는, 각 구절의 문맥과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함께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제금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시150편에는 큰 소리 나는 제금과 즐거운 외침의 제금이 함께 등장합니다. 그러나 AC.420은 두 제금의 개별적인 속뜻을 밝히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각 악기에 고유한 의미가 있다고 말하면서도, 그 의미들은 적절한 곳에서 설명하겠다고 예고합니다. 그러므로 이번 번호만을 근거로 제금이 특정한 종류의 선이나 진리를 의미한다고 확정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뜻이 있다는 사실과 그 뜻을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은 구별해야 합니다.
또한 여러 악기가 함께 등장한다는 사실을 곧바로 천국의 완전한 합주에 관한 상세한 묘사로 바꿀 필요도 없습니다. AC.420의 마지막 문단은 천사들과 영들이 소리를 선과 진리의 차이에 따라 구별하고, 서로 일치하는 소리만 받아들인다고 말합니다. 이 설명은 악기의 소리와 영적인 것들 사이에 관계가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시150편의 각 악기가 천국의 어떤 공동체나 어떤 상태에 해당하는지까지 이 번호가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본문이 밝히는 범위 안에서 악기들의 다양성과 고유한 의미를 이해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예배에서 사용하는 악기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으로도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420은 오늘날 어떤 악기를 사용해야 한다거나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예배 규칙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것은 말씀에 기록된 악기들의 표상적 의미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근거로 특정 악기의 영적 우열을 정하거나, 악기의 종류만으로 예배의 진정성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외적 악기의 소리와 그것이 말씀 안에서 나타내는 영적인 의미를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 시150:3-5에 많은 악기가 등장하는 이유는, 스베덴보리의 설명에 따르면 각각의 악기가 신앙의 선과 진리에 관한 고유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이 번호는 그 모든 의미를 완전히 밝히지는 않지만, 말씀의 악기들을 의미 없는 반복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는 중요한 원칙을 제시합니다. 우리는 이미 밝혀진 수금과 소고와 퉁소의 의미를 붙들면서, 아직 설명되지 않은 악기들의 속뜻은 관련된 말씀과 저작의 근거를 확인할 때까지 열어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AC.420심화2)
시147:7은 ‘감사함으로여호와께응답하며수금으로우리하나님께찬송할지어다’라고 말합니다. 문자적으로 읽으면 같은 주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이 나란히 놓인 구절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AC.420에서 이 두 표현을 구별하여 설명합니다. ‘감사’는 신앙의 천적인 것들과 관련되므로 ‘여호와’가 언급되고, ‘수금으로찬송함’은 신앙의 영적인 것들과 관련되므로 ‘하나님’이 언급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짧은 구절에서도 그는 사용된 표현의 차이에 주목합니다.
먼저 ‘감사’(confession)는 이번 번호에서 신앙의 천적인 것들과 관련됩니다. 여기서 천적인 것들은 앞서 설명한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감사는 단순히 정해진 말을 입 밖으로 내는 행위로만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의 감사가 신앙의 천적인 것에 관련된다고 밝힙니다. 따라서 이 표현을 읽을 때에는 감사의 말 자체만이 아니라, 그 감사가 관련되는 사랑과 선의 측면을 함께 살펴보아야 합니다.
반면 ‘수금으로찬송함’은 신앙의 영적인 것들과 관련됩니다. AC.419에서 수금은 영적 진리를 의미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시147:7의 수금 찬양은 앞서 밝힌 악기의 속뜻과 이어집니다. 이 구절에는 감사와 수금 찬양이 함께 있지만, 스베덴보리는 둘을 같은 의미의 반복으로 보지 않습니다. 각각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에 관련되는 표현으로 구별합니다.
이 구별과 함께 ‘여호와’와 ‘하나님’이라는 이름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번 번호에서 감사와 관련하여 ‘여호와’가, 수금 찬양과 관련하여 ‘하나님’이 언급된다고 직접 말합니다. 다만 이것을 근거로 말씀의 모든 ‘여호와’와 ‘하나님’을 문맥과 관계없이 하나의 공식에 대입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는 시147:7의 두 표현이 왜 구별되어 사용되었는지에 관한 설명을 먼저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앞의 AC.418에서 스베덴보리는 마음의 애정이 천적이고 그 결과로 나오는 노래가 영적이라고 말했습니다. 시147:7에 관한 설명도 그 관계를 떠올리게 합니다. 감사가 신앙의 천적인 것과 관련되고, 수금 찬양이 신앙의 영적인 것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두 설명을 합쳐 감사는 언제나 내면에만 있고 찬양은 언제나 외면에만 있다는 식으로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번 번호에서 직접 제시된 것은 두 표현이 각각 어떤 것과 관련되는가 하는 구별입니다.
이 구절은 예배의 언어를 읽는 우리의 태도에도 도움을 줍니다. 감사와 찬송을 단순히 비슷한 종교적 표현으로 지나칠 수 있지만,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표현 하나하나가 고유한 의미를 지닌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일상적인 감사와 찬송을 엄격하게 분리하여 어느 한쪽만 천적이고 다른 쪽만 영적이라고 판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구절의 속뜻을 통해 사랑과 신앙에 속하는 것들이 말씀 안에서 구별되어 표현될 수 있음을 이해하면 됩니다.
결국 스베덴보리가 시147:7을 인용한 이유는 감사와 수금 찬양이 각각 신앙의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에 관련되며, 그에 따라 ‘여호와’와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사용되었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같은 주님을 향한 한 구절의 예배 안에서도 서로 다른 의미가 표현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사랑과 신앙의 구별을 살피면서도, 그 둘이 함께 주님께 향하는 예배의 문맥 안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됩니다. (AC.420심화1)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창4:21)
AC.420
말씀에는여러가지악기가언급되며,각악기에는저마다고유한의미가있습니다.이에대해서는주님의신적자비로적절한곳에서설명하겠습니다.그러나여기서는시편이말한것만을인용하겠습니다. In the Word mention is made of various instruments, each having its own signification, as will be shown, of the Lord’s Divine mercy, in its proper place; here however we shall adduce only what is said in David:
여기서‘장막’(tent)은천적인것을표현하고,‘즐거운외침’(shouting),‘노래함’(singing),‘찬송함’(singingpraises)은거기서나오는영적인것을표현합니다.또다른곳에서는다음과같이말합니다. where by “tent” is expressed what is celestial, and by “shouting,” “singing,” and “singingpraises,” what is spiritual thence derived. Again:
이말씀은신앙의진리들을나타내며,이러한것들이바로그진리들에관하여말해진것입니다. denoting the truths of faith, concerning which these things are said.
[2]영적인것들,곧신앙의진리들과선들은수금과비파,노래와그와비슷한악기들로찬양되었습니다.그러나신앙의거룩한것들,곧천적인것들은나팔과같은관악기들로찬양되었습니다.이때문에성전에서는그렇게많은악기가,또그렇게자주사용되었습니다.이는이주제나저주제를각각특정한악기로찬양하기위한것이었습니다.그결과악기들은그것들로찬양되는대상들을가리키는것으로받아들여지고이해되게되었습니다. Spiritual things, or the truths and goods of faith, were celebrated with the harp and psaltery, with singing and analogous instruments, but the holy or celestial things of faith were celebrated with wind instruments, such as trumpets and the like; and this was why so many instruments were used about the temple and so often, in order that this or that subject might be celebrated with certain instruments; and in consequence of this the instruments came to be taken and understood for the subjects that were celebrated with them.
‘감사’(confession)는신앙의천적인것들과관련되므로‘여호와’(Jehovah)가언급됩니다.반면‘수금으로찬송함’(singpraisesupontheharp)은신앙의영적인것들과관련되므로‘하나님’(God)이언급됩니다.또다른곳에서는다음과같이말합니다. “confession” has respect to the celestial things of faith, and therefore mention is made of “Jehovah”; and to “singpraisesupontheharp” has reference to the spiritual things of faith, wherefore “God” is spoken of. Again:
이악기들은찬양의대상이된신앙의선들과진리들을나타냅니다.각각의악기에고유한의미가없다면,이렇게많은종류의악기가여기에언급되었을것이라고생각해서는안됩니다.또다른곳에서는선과진리의지식들에관하여다음과같이말합니다. These instruments denote the goods and the truths of faith which were the subjects of praise; for let no one believe that so many different instruments would have been here mentioned unless each had a distinct signification. Again, referring to the knowledges of good and truth:
한가지언급할만한사실이있습니다.천사들과영들은소리들이선과진리에관련하여어떻게다른지에따라그소리들을구별합니다.노래와악기에서나는소리뿐아니라목소리도그렇게구별합니다.그리고서로일치하는소리만받아들입니다.이는소리들,따라서악기들의소리가선과진리의성질및본질과조화를이루게하기위한것입니다. It is worthy of mention that angels and spirits distinguish sounds according to their differences with respect to good and truth, not only those produced in singing and by instruments, but also those of voices; and they admit none but such as are in accord, so that there may be a concord of the sounds, and consequently of the instruments, with the nature and essence of the good and the true.
해설
AC.420은 앞의 AC.418-419에서 설명한 악기의 속뜻을 말씀의 여러 구절을 통해 확인합니다. AC.419에서 스베덴보리는 수금이 영적 진리를, 퉁소가 영적 선을 의미한다고 밝혔습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그 설명을 한 악기에만 한정하지 않고, 말씀에 등장하는 여러 악기가 저마다 고유한 의미를 지닌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모든 악기의 뜻을 여기서 밝히려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 성경 구절을 인용하여 악기와 노래가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을 어떻게 나타내는지 보여 주는 것이 이번 번호의 중심입니다.
먼저 시27:6에서 ‘장막’은 천적인 것을, ‘즐거운외침’과 ‘노래함’과 ‘찬송함’은 거기서 나오는 영적인 것을 표현합니다. 앞서 야발의 장막이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관련되고, 유발의 악기가 신앙의 영적인 것들과 관련된다고 설명한 내용이 이 시편 안에서 함께 나타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장막과 노래가 단순히 예배 장소와 예배 행위를 가리키는 데 그치지 않고, 천적인 것과 거기서 나오는 영적인 것의 관계를 표현한다고 봅니다. 이어 인용한 시33:1-4에서는 수금과 열 줄 비파, 새 노래가 등장한 뒤 ‘여호와의말씀은정직하며그가행하시는모든일은진실하시도다’라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이 신앙의 진리들에 관한 말씀이라고 밝힙니다. 악기와 노래가 언급되는 문맥 자체가 말씀의 정직함과 주님이 행하시는 일의 진실함에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어서 스베덴보리는 표상적 예배에서 악기들이 구별되어 사용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은 수금과 비파, 노래와 그와 비슷한 악기들로 찬양되었고, 신앙의 거룩한 것들, 곧 천적인 것들은 나팔과 같은 관악기들로 찬양되었습니다. 성전에서 많은 악기가 사용된 것은 단순히 음악을 풍성하게 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찬양하는 대상에 따라 특정한 악기가 사용되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입니다. 그 결과 악기 자체가 그것으로 찬양되는 영적인 대상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이는 모든 악기가 같은 뜻을 지닌다는 말이 아니라, 서로 다른 악기들이 서로 다른 것을 표상한다는 뜻입니다.
시71:22-23은 이러한 설명을 다시 확인합니다. 비파와 수금으로 주님을 찬양하는 말씀 안에 ‘주의진리’가 직접 언급되기 때문입니다. 시147:7에서는 한층 세밀한 구별이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감사’가 신앙의 천적인 것들과 관련되므로 ‘여호와’가 언급되고, ‘수금으로찬송함’은 신앙의 영적인 것들과 관련되므로 ‘하나님’이 언급된다고 설명합니다. 같은 구절 안에서도 감사와 수금 찬양, 여호와와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닌다는 것입니다. 시149:3에서는 ‘소고’가 선을, ‘수금’이 진리를 의미한다고 직접 밝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악기들의 소리를 감상하여 의미를 추측하는 일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해당 말씀에서 구별하여 밝힌 선과 진리의 의미를 살피는 일입니다.
시150:3-5에는 나팔, 비파, 수금, 소고, 현악기, 퉁소, 제금 등 여러 악기가 연이어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각각에 고유한 의미가 없다면 이렇게 많은 종류의 악기가 말씀에 언급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번 번호에서 이 모든 악기의 개별 의미를 하나씩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앞에서 밝혀진 의미들을 바탕으로 이 시편이 신앙의 여러 선과 진리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이해하되, 아직 설명되지 않은 악기의 뜻까지 임의로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어지는 시43:3-4는 ‘주의빛과주의진리’로 시작하여 거룩한 산과 처소, 하나님의 제단과 수금 찬양으로 이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선과 진리의 지식들에 관한 구절로 인용합니다. 여기서는 수금이 등장하는 찬양이 주님의 빛과 진리에 의한 인도라는 문맥 안에 놓여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사23:16은 앞의 찬양 시편들과 성격이 다릅니다. 이사야 23장은 두로에 관한 예언이며, 인용된 구절은 잊힌 음녀에게 수금을 가지고 성읍을 돌아다니며 노래하라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도 신앙에 속하는 것들과 그 지식들에 관한 말씀으로 인용합니다. 따라서 수금과 노래가 등장한다고 해서 그 장면을 곧바로 선한 예배나 진리의 회복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이 구절이 여기서 사용된 이유는 수금과 노래가 신앙의 지식과 관련된 표현이라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해당 예언 전체의 속뜻을 설명하려면 두로와 음녀에 관한 문맥을 별도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의 인용에서는 진리와 선의 구별이 더욱 직접적으로 나타납니다. 계5:8에서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가진 ‘거문고’는 신앙의 진리들을, ‘향이가득한금대접’은 신앙의 선들을 의미한다고 스베덴보리는 밝힙니다. 같은 예배 장면 안에 진리와 선이 함께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어 시42:5와 시69:31을 통해 다윗이 악기 연주를 ‘찬송’과 ‘감사’라고 부르는 용례를 제시합니다. 계14:2-3에서는 하늘의 거문고 소리와 새 노래를, 계15:2에서는 유리 바닷가에 선 이들이 가진 하나님의 거문고를 인용합니다. 이 구절들은 앞서 설명한 현악기와 신앙의 진리 사이의 관계를 뒷받침합니다. 다만 이번 번호는 새 노래나 유리 바다의 세부적인 속뜻까지 풀어 주지는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천사들과 영들이 소리를 선과 진리의 차이에 따라 구별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노래와 악기 소리뿐 아니라 목소리도 구별하며, 서로 일치하는 소리만 받아들입니다. 소리와 악기가 선과 진리의 성질 및 본질에 조화를 이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설명은 앞서 제시한 악기의 상응이 단순한 문학적 비유가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이해한 영계의 질서와도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다만 이 번호는 어떤 음높이나 악기 소리가 어떤 선과 진리에 해당하는지 구체적인 목록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상의 음악을 듣고 사람의 영적 상태를 판정하는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결국 AC.420은 말씀의 악기들이 단순한 음악 도구 이상의 의미를 지니며, 각각 신앙의 선과 진리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여러 구절로 설명합니다. 시편의 장막과 노래는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관계를, 소고와 수금은 선과 진리의 구별을,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은 신앙의 진리와 선이 함께 나타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마지막의 천사와 영들에 관한 설명은 소리의 조화가 선과 진리의 성질과 관련된다는 점을 밝힙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찬양의 외적 소리만이 아니라, 그 찬양이 표현하는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를 함께 살펴보게 됩니다. (AC.420해설)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And God called the dry [land] earth, and the gathering together of the waters called he seas; and God saw that it was good.(창1:10)
AC.28
말씀에서‘물’(waters)로는여러지식(knowledges, cognitionesetscientifica)을,‘바다’(seas)로는그많은물,곧지식의집합을의미할때가참많은데요,이사야에보면,It is a very common thing in the Word for “waters” to signify knowledges [cognitiones et scientifica],and consequently for “seas” to signify a collection of knowledges.As in Isaiah:
AC.28은 앞의 AC.27에서 시작된 ‘물’, ‘바다’, ‘땅’의 의미를 말씀의 여러 다른 구절을 통해 확증합니다. AC.27에서는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에게 들어온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 겉 사람의 기억에 들어가 기억 지식(scientifica)으로 머물며, 이렇게 모인 지식들이 ‘바다’를 이루고, 겉 사람 자체는 ‘마른땅’으로 표현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28에서는 이것이 창1:9-10에만 적용되는 일회적인 풀이가 아니라, 말씀의 다른 곳에서도 반복하여 나타나는 의미임을 보여 줍니다. ‘물’은 여러 지식(cognitionesetscientifica)을, ‘바다’는 그 많은 물, 곧 지식의 집합을, ‘땅’은 그것들을 받아들이는 수용체(recipient)를 의미합니다.
먼저 사11:9의 ‘물이바다를덮음같이여호와를아는지식이세상에충만할것임이니라’는 말씀은 ‘물’과 ‘바다’가 지식과 관계된다는 사실을 매우 직접적으로 보여 줍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주목하는 것은 ‘여호와를아는지식’의 충만함이 바로 ‘물이바다를덮는것’으로 표현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창1:10의 모인 물과 바다를 지식들과 그 집합으로 읽는 것은 창세기의 한 구절에 임의로 붙인 상징 풀이가 아니라, 말씀의 다른 곳에서도 확인되는 언어의 연결이라는 것입니다.
이어 사19:5-6은 그 반대 상태를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직접 ‘지식의결핍이다루어지는곳’이라고 소개합니다. ‘바닷물이없어지겠고강이잦아서마르겠고’라는 표현은 앞의 사11:9에서 물이 충만한 모습과 대조됩니다. 앞에서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의 충만함이 물의 충만함으로 표현되었다면, 여기에서는 물이 없어지고 마르는 모습이 지식의 결핍을 나타냅니다. 이 두 구절을 함께 놓으면 AC.28에서 말하는 물과 지식의 관계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다만 이 자리에서 애굽, 강, 갈대와 부들의 세부 상응까지 모두 풀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AC.28의 직접적인 목적은 물과 바다가 지식 및 그 집합과 관계된다는 사실을 말씀의 용례로 확증하는 데 있습니다.
학2:6-7은 조금 다른 각도에서 같은 원리를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새교회에대해말하면서’라고 소개하고, ‘하늘과땅과바다와육지를진동시킬것’이라는 말씀을 인용합니다. AC.28은 여기서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 각각의 속뜻을 세밀하게 풀이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새 교회의 형성을 말하는 문맥에서도 창조의 언어인 하늘, 땅, 바다, 육지가 함께 사용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창세기의 자연적 창조 언어가 말씀의 다른 곳에서는 교회의 영적 상태와 새로워짐을 표현하는 데에도 사용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예로 이해하면 충분합니다.
슥14:7-8에 이르면 스베덴보리는 더욱 분명하게 ‘거듭나는중인사람에대하여’라고 말합니다. ‘어두워갈때에빛이있으리로다’라는 말씀에 이어, ‘그날에생수가예루살렘에서솟아나서절반은동해로,절반은서해로흐를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도 물과 바다가 거듭남의 문맥 속에 등장합니다. 그러나 AC.28은 ‘동해’와 ‘서해’, ‘여름’과 ‘겨울’의 세부적인 의미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그 이상의 상응을 덧붙이기보다, 물과 바다가 단순한 자연물에 그치지 않고 거듭나는 사람의 영적 상태를 묘사하는 말씀의 언어로 사용된다는 사실에 머무는 것이 안전합니다.
시69:33-34역시 같은 점을 다른 모습으로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황폐해졌다가거듭나주님을경배하게될사람’을 묘사하는 말씀이라고 직접 소개합니다. ‘천지가그를찬송할것이요바다와그중의모든생물도그리할지로다’라는 표현에서 하늘과 땅과 바다가 거듭난 사람의 상태를 묘사하는 데 사용됩니다. 여기에서도 ‘바다가운데움직이는모든것’을 별도로 ‘살아있는지식’이라고 확정하거나, ‘찬송’을 인간 존재 전체의 특정한 영적 상태로 세분할 필요는 없습니다. AC.28에서의 직접적인 역할은 하늘과 땅과 바다라는 표현들이 인간의 거듭남과 주님을 경배하는 상태를 말할 때에도 사용된다는 것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마지막 슥12:1은 앞의 인용들과는 조금 다른 역할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들면서 ‘땅’이 수용체(recipient)를 의미한다는 것이 여기에서 분명하다고 말합니다. ‘하늘을펴시며땅의터를세우시며사람안에심령을지으신이’라는 표현에서, AC.28이 특히 주목하는 것은 ‘땅’이 무엇인가를 받아들이는 자리라는 점입니다. 이것은 앞의 AC.27에서 마른 땅, 곧 겉 사람이 드러난다는 설명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다만 여기에서도 ‘사람안의심령’을 근거로 거듭남 전체의 세부 구조를 새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AC.28에서 필요한 만큼 말하면, ‘바다’가 지식들의 집합이라면 ‘땅’은 그것들을 받아들이는 수용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구별이 하나 있습니다. ‘물’이 지식을 의미한다고 해서 지식 자체가 곧 영적 생명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또한 ‘땅’이 수용체라고 해서 땅 자체가 생명을 만들어 내는 능력을 가진다는 뜻도 아닙니다. 앞의 AC.27에서 보았듯이 자연적이든 영적이든 천적이든 겉 사람의 기억 속에 들어간 것들은 그곳에서 기억 지식으로 머물며, 나중에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집니다. 그러므로 지식이 기억에 모여 있다는 것과 그 지식이 실제 선한 삶으로 살아 움직이는 것은 같은 단계가 아닙니다.
이 점은 바로 다음 창1:11-12와 AC.29로 이어질 때 더욱 분명해집니다. 물이 모여 바다가 되고 땅이 드러난 뒤에야 그 땅에서 풀과 씨 맺는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AC.28은 아직 거듭남의 열매 자체를 설명하는 단계가 아니라, 그 열매가 나타날 수 있는 질서가 준비되는 상태를 보여 줍니다. 사람은 많은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아직 그것을 삶에서 행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기억 속의 지식과 실제 생명의 열매를 동일시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AC.28의 핵심은 ‘많이아는사람이곧영적인사람이다’라는 데 있지 않습니다. 물은 여러 지식이고, 바다는 그 지식들이 모인 집합이며, 땅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수용체입니다. 이 모든 것은 아직 다음 단계의 생명을 위한 준비와 질서에 속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상태에서 창1:10은 ‘하나님이보시기에좋았더라’고 말합니다. 지식이 모이고, 바다가 형성되고, 땅이 드러남으로써 이제 다음 단계에서 생명이 싹트고 열매 맺을 자리가 마련된 것입니다. (AC.28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