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the Lord,who is the very life itself)
AC.2에서 스베덴보리는 주님을 단지 ‘생명을주시는분’이라고 하지 않고 ‘생명그자체이신주님’(theLord, whoistheverylifeitself)이라고 합니다. 이 표현은 말씀에 왜 생명이 있는지를 설명하는 가운데 등장하지만, 동시에 스베덴보리가 주님과 생명을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보여 주는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우리는 보통 어떤 사람이 ‘생명을가지고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주님을 ‘생명그자체’라고 할 때에는 주님께서 우리처럼 생명을 받아 가지고 계신 존재라는 뜻이 아닙니다. 생명의 근원이 주님 자신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피조물은 스스로 생명의 근원이 될 수 없으며, 살아 있다는 것 자체를 주님에게 의존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생명이 있지만 주님은 ‘생명그자체’이십니다. 이 차이가 중요합니다.
AC.2에서는 이 깊은 주제를 인간 생명의 구조 자체를 설명하기 위해 꺼낸 것이 아니라 ‘말씀의생명은어디에서오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꺼냅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생명이 그 안의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을 가리키는 데서 온다고 합니다. 말씀의 가장 깊은 생명과 주님을 분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이어 ‘그분을내적으로바라보지않는것은살아있지않다’고까지 말합니다.
여기서 ‘주님을가리킨다’는 것을 모든 구절에서 문자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찾아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2자체가 ‘그나름의방식으로’(initsownway)주님을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구약의 어떤 본문은 문자적으로 인물의 생애를 말하고, 어떤 본문은 전쟁이나 율법이나 족보를 말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외적인 것 안에 있는 내적인 것이 각기 그 나름의 방식으로 주님을 향하기 때문에 그것이 살아 있고 신성한 말씀이라고 설명합니다.
‘생명그자체’라는 표현은 이후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읽으면서 훨씬 더 깊어질 주제입니다. 인간이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는다는 것, 그 생명을 마치 자기 자신의 것처럼 느끼도록 허락받는다는 것, 생명이 어떻게 인간에게 유입되는가 하는 문제들은 이후 각각의 문맥에서 더 자세히 살펴야 합니다. AC.2한 번호에서 그 전체 교리를 미리 완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따라서 AC.2에서 ‘생명그자체이신주님’을 이해하는 가장 안전한 출발점은 이것입니다. 말씀에는 그 자체로 독립된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의 모든 것이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을 내적으로 바라보고 그분을 가리키기 때문에 생명이 있습니다. 주님은 단순히 말씀에 생명을 더해 주시는 분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 자체이시며, 바로 그분을 향하는 내적인 것이 말씀을 살아 있고 신성한 말씀 되게 합니다. (AC.2심화2)
이러한생명이없다면,문자로서의말씀은죽은것입니다.이점은기독교세계에알려져있듯이,인간이속사람(internalman)과겉사람(externalman)으로이루어져있는것과같습니다.속사람과분리되면겉사람은몸일뿐이며,그러므로죽은것입니다.살아있으며겉사람을살아있게하는것은속사람이기때문이며,속사람은영혼입니다.말씀도이와같아서,문자만으로보자면영혼없는몸과같습니다. Without such a life,the Word as to the letter is dead.The case in this respect is the same as it is with man,who—as is known in the Christian world—is both internal and external. When separated from the internal man, the external man is the body,and is therefore dead; for it is the internal man that is alive and that causes the external man to be so, the internal man being the soul. So is it with the Word, which,in respect to the letter alone, is like the body without the soul.
해설
AC.3은 AC.1과 AC.2에서 말한 ‘말씀의생명’을 인간의 몸과 영혼이라는 매우 선명한 비유로 설명합니다. AC.1에서는 말씀의 겉 글자 안에 내적인 것들이 있다고 했고, AC.2에서는 말씀 안의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을 가리키기 때문에 말씀에 생명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에서는 그 내적인 생명과 겉 글자의 관계를 ‘속사람과겉사람’, 더 직접적으로는 ‘영혼과몸’의 관계에 비유합니다.
첫 문장인 ‘이러한생명이없다면,문자로서의말씀은죽은것입니다’에서 ‘이러한생명’은 바로 앞 AC.2와 연결됩니다. AC.2에서는 말씀의 모든 것이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을 내적으로 바라보고 그분을 가리키기 때문에 말씀에 생명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AC.3의 ‘이러한생명’은 막연히 성경을 읽을 때 느끼는 감동이나 교훈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 안에 있는 내적인 것,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것이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을 향하는 데서 오는 생명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인간에게 비유합니다. 인간에게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있고, 속 사람과 분리된 겉 사람은 몸일 뿐이며 죽어 있습니다. 살아 있는 것은 속 사람이고 겉 사람을 살아 있게 하는 것도 속 사람이며, 여기서 그는 속 사람을 영혼에 비유합니다. 그리고 이 구조를 그대로 말씀에 적용하여 ‘문자만으로보자면영혼없는몸과같다’고 합니다. 따라서 AC.3의 핵심은 문자와 속뜻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문자만을 그것을 살리는 내적인 것과 분리하여 볼 때 무엇을 잃게 되는지를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이 점에서 문자적 의미를 낮추어 볼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영혼없는몸’이라고 한 것은 몸이 불필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비유의 초점은 몸 자체의 무가치함이 아니라 영혼과 분리된 몸의 죽음에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의 문자도 버려야 할 껍데기가 아니라, 그 안의 내적인 것과 함께 읽혀야 합니다. 이후 AC전체에서 스베덴보리가 실제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문자를 한 구절씩 붙들고 그 속뜻을 해설하는 것 자체가 이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는 문자를 떠나 속뜻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문자 안에서 내적인 것을 밝히고자 합니다.
따라서 AC.3은 AC.1-3의 흐름을 매우 간결하게 완성합니다. AC.1은 ‘겉글자안에내적인것들이있다’고 했고, AC.2는 ‘그내적인것들이생명그자체이신주님을가리키기때문에말씀에는생명이있다’고 했으며, AC.3은 ‘그생명과분리된문자는영혼없는몸과같다’고 합니다. 이제 독자는 왜 스베덴보리가 창세기의 문자에만 머물지 않고 그 안의 속뜻을 열어 가려 하는지 이해할 준비를 갖추게 됩니다. 말씀의 문자는 몸과 같고, 그것을 살아 있게 하는 내적인 것은 영혼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의 궁극적인 근원은 앞선 AC.2에서 밝힌 대로 주님이십니다. (AC.3해설)
그러나기독교세계는아직도말씀안에있는모든것이전체적으로나개별적으로나,아니가장작은세부적인것하나하나,가장미세한점하나에이르기까지도영적이고천적인것들을의미하고그안에품고있다는사실을깊이알지못하고있습니다.그로인해구약성경은거의소중히여김을받지못하고있습니다.그러나말씀이참으로그러한성격을지닌다는사실은단한가지숙고만으로도알수있습니다.말씀이주님의것이며주님으로부터온것이라면,그것은필연적으로천국과교회와종교적인믿음에속한것들을그안에지니고있어야하기때문입니다.만일그렇지않다면그것은주님의말씀이라불릴수없을것이며,그안에생명이있다고도말할수없을것입니다.그렇다면그생명은어디에서오는것입니까?그것이생명에속한것들에서오지않는다면어디에서오는것이겠습니까?곧그안의모든것이전체적으로나개별적으로나생명그자체이신주님을가리키기때문에그말씀에는생명이있는것입니다.그러므로그분을내적으로바라보지않는것은살아있지않으며,말씀가운데어떤표현이든그안에그분을품고있지않다면,다시말해그나름의방식으로그분을가리키지않는다면,그것은신성한것이아니라고참으로말할수있습니다. The Christian world,however,is as yet profoundly unaware of the fact that all things in the Word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nay,the very smallest particulars down to the most minute iota,signify and enfold within them spiritual and heavenly things,and therefore the Old Testament is but little cared for.Yet that the Word is really of this character might be known from the single consideration that being the Lord’s and from the Lord it must of necessity contain within it such things as belong to heaven,to the church,and to religious belief,and that unless it did so it could not be called the Lord’s Word,nor could it be said to have any life in it.For whence comes its life except from those things that belong to life,that is to say,except from the fact that everything in it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bears reference to the Lord,who is the very life itself;so that anything which does not inwardly regard him is not alive;and it may be truly said that any expression in the Word that does not enfold him within it,that is,which does not in its own way bear reference to him,is not Divine.
해설
AC.2는 AC.1의 선언을 한층 더 강하게 밀고 나갑니다. AC.1에서는 구약의 겉 글자 안에 ‘하늘의깊은비밀들’이 있으며, 그 안의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주님과 주님의 천국, 교회, 종교적인 믿음 등을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이제 AC.2에서는 그 범위를 더욱 분명히 하여, 말씀의 모든 것이 ‘가장작은세부적인것하나하나,가장미세한점하나에이르기까지도’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의미하고 그 안에 품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기독교 세계가 이것을 깊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구약 성경을 거의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고 진단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어떤 부분에는 속뜻이 있고 어떤 부분에는 없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의 주장은 훨씬 철저합니다. 말씀은 전체적으로뿐 아니라 개별적으로도, 심지어 가장 미세한 것에 이르기까지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 주장을 자신의 영계 체험부터 내세워 증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단한가지숙고’만으로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그 숙고란 말씀이 ‘주님의것이며주님으로부터온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만일 말씀이 참으로 주님의 것이며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면, 그 안에는 반드시 천국과 교회와 종교적인 믿음에 속한 것들이 들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을 ‘주님의말씀’이라고 부를 수도 없고, 그 안에 생명이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AC.1이 ‘말씀안에내적인것들이있다’고 선언했다면, AC.2는 그 내적인 것들이 있어야 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를 말씀의 근원, 곧 주님에게서 찾습니다.
여기서 AC.2의 중심어인 ‘생명’이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렇다면그생명은어디에서오는것입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말씀의 생명은 그 안의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 ‘생명그자체이신주님’을 가리키는 데서 온다고 답합니다. 따라서 말씀의 생명은 단지 오래 살아남은 종교 문헌이라는 데 있지 않고, 문장이 아름답거나 인간에게 감동과 교훈을 준다는 데 있는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더 근본적인 이유는 말씀의 가장 깊은 지향이 주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은 주님에게서 왔고, 그 안의 모든 것은 각기 그 나름의 방식으로 다시 주님을 가리킵니다.
이 때문에 마지막 문장은 매우 강합니다. ‘그분을내적으로바라보지않는것은살아있지않다’고 하고, 말씀 가운데 어떤 표현이든 그 안에 주님을 품고 있지 않으며 그 나름의 방식으로 주님을 가리키지 않는다면 ‘신성한것이아니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든 구절의 문자적 표면에 주님의 이름이 직접 나타나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구약의 족보와 역사, 율법과 전쟁, 지명과 숫자처럼 겉으로는 주님과 직접 관계없어 보이는 표현들까지도 내적으로는 각기 그 나름의 방식으로 주님을 가리킨다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주장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이후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가장 세밀한 표현들까지 속뜻을 따라 읽어 갑니다.
그러므로 AC.2는 앞으로 펼쳐질 방대한 AC해설의 중요한 근거를 제공합니다. 왜 단어 하나, 이름 하나, 숫자 하나까지 그렇게 세밀하게 살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이 이미 여기에 있습니다. 말씀의 생명은 일부 유명한 구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나개별적으로나’그 안에 있으며, 그 생명의 근원은 ‘생명그자체이신주님’입니다. AC.1에서 ‘말씀안에하늘의깊은비밀들이있다’는 문을 열었다면, AC.2에서는 왜 그 비밀들이 말씀의 가장 작은 것에까지 있어야 하는지를 밝힙니다. 말씀은 주님의 것이며 주님으로부터 왔고, 그 안의 모든 것이 그 나름의 방식으로 주님을 가리키기 때문에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AC.2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