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6 심화

1.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과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이 무엇인가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이웃 사랑’에 대해 어디를 보니 ‘charity’를 쓰던데, 그러면 ‘charity toward the neighbor’라 해도 되는지요? 그리고 왜 ‘주님 사랑’은 전치사 ‘to’를 쓴 반면, ‘이웃 사랑’은 ‘toward’를 쓰나요?

 

 

AC.36에는 스베덴보리의 신학 전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두 표현이 나옵니다.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과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입니다. 주님께서 가장 큰 두 계명으로 말씀하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스베덴보리도 신앙의 중심에 놓습니다. 그렇다면 이 두 사랑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며, 자주 등장하는 ‘체어리티’(charity)와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먼저 ‘주님 사랑’은 단순히 주님에 대해 따뜻한 감정을 느끼거나 ‘나는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런 애정과 고백을 무가치하게 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사랑은 결국 사람이 무엇을 원하며 어떻게 살아가는가와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주님을 가장 높이 여기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며,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대로 살고자 하는 데서 실제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 점은 AC.36의 문맥에서도 분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교리를 알고 인정하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특히 그 교리가 가르치는 모든 것에 순종하는 데’ 있다고 말한 직후, 그 교리가 가장 먼저 가르치는 것이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사랑은 단순한 감정과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까닭에 그 사랑에 따라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사람을 좋아하거나 모든 사람에게 무조건 친절한 감정을 가지라는 뜻으로만 이해해서는 부족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웃의 참된 선을 바라고 그 선을 위해 행동하는 것과 깊이 연결됩니다. 따라서 무엇이 실제로 이웃에게 선한 것인지를 분별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상대가 원하는 것을 무조건 들어주는 것이 언제나 이웃 사랑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이웃’의 범위도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말보다 넓습니다. 가까이 있는 한 사람에서 시작하여 여러 사람의 공동체, 사회와 국가, 교회, 더 나아가 주님의 나라까지 ‘이웃’이라는 관점에서 다루어집니다. 다만 AC.36에서는 이웃의 단계와 질서를 자세히 설명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므로, 여기서는 우선 ‘이웃 사랑은 이웃의 참된 선을 원하고 그 선을 행하는 사랑’이라고 이해하면 충분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웃 사랑’과 ‘체어리티’(charity)는 어떤 관계일까요? 스베덴보리의 저술에서 둘은 매우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charity`는 흔히 이웃을 향한 사랑과 그것이 삶에서 선으로 나타나는 것을 가리키는 핵심 용어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영어의 `charity`를 보고 단순히 ‘자선’, ‘기부’, ‘구제’라고 생각하면 스베덴보리의 뜻보다 지나치게 좁아집니다. 그에게 체어리티는 훨씬 넓은 영적 개념입니다.

 

그래서 우리 번역에서는 `charity`를 문맥마다 곧바로 ‘이웃 사랑’으로 바꾸기보다 ‘체어리티’라고 살려 두는 것이 유익합니다.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은 말 그대로 사랑의 대상을 이웃에 두는 표현이고, ‘체어리티’는 그러한 이웃 사랑이 선을 원하고 행하는 삶의 원리로 나타나는 것을 폭넓게 가리키는 스베덴보리의 중요한 교리적 용어로 계속 만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둘을 서로 전혀 다른 것으로 나눌 필요도 없지만, 언제나 완전히 같은 단어처럼 바꾸어 써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면 `charity toward the neighbor`라고 표현해도 될까요? 영어 표현 자체로는 가능하며, 스베덴보리의 저술에서도 charity와 neighbor는 매우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그러나 번역에서는 원문이 `love toward the neighbor`라고 하면 ‘이웃 사랑’으로, `charity`라고 하면 기본적으로 ‘체어리티’로 옮기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야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어떤 단어를 사용했는지도 독자가 구별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재미있는 질문이 하나 남습니다. 왜 스베덴보리는 `love to the Lord`라고 하면서 `love toward the neighbor`라고 했을까요? `to`와 `toward`가 다르니 여기에 특별한 영적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는 있지만, AC.36은 이 전치사의 차이에 별도의 교리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to`는 주님과의 직접적인 결합을, `toward`는 주님에게서 나온 사랑이 밖으로 흘러가는 것을 뜻한다고까지 확정하는 것은 피하는 편이 좋습니다. 그것은 영어 표현의 미묘한 차이에서 본문이 직접 말하지 않은 신학적 의미를 끌어내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전치사의 차이보다 두 사랑의 관계입니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서로 경쟁하는 두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것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선을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나며, 그 선은 이웃을 향한 실제 삶 속에서 드러납니다. 반대로 이웃을 향한 참된 사랑 역시 그 선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두지 않고 주님께 둡니다.

 

그래서 주님 사랑을 ‘뿌리’, 이웃 사랑을 ‘열매’라고 비유하면 이해에는 도움이 됩니다. 다만 이것도 AC.36의 직접적인 표현이라기보다 관계를 쉽게 이해하기 위한 비유입니다. 핵심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서로 떼어 놓을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AC.36이 신앙을 설명하다가 결국 이 두 사랑으로 향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신앙은 머리로 무엇을 알고 인정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사랑이 실제 삶의 선으로 나타날 때 신앙은 신앙답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 사랑’, ‘이웃 사랑’, ‘체어리티’는 앞으로 AC를 읽으면서 계속 만나게 될 서로 깊이 연결된 핵심 개념들입니다.

 

 

 

AC.36, 심화 2,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AC.36.심화 2.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AC.36 참조 구절인 마22: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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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 창1:14-17, '신앙은 순종이다 : 사랑 없는 믿음은 신앙이 아니다'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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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 심화

2. 왜 ‘도망함’(flight)이 ‘마지막 때와 각 사람이 죽을 때’를 뜻하는가?

 

위 AC.34 본문 중 인용 구절, ‘이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막13:18)에 나오는 ‘일’(flight)을 기독교, 개신교에서는 ‘휴거’라 하여 매우 특별하게 생각하는데, 이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AC.34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랑 없는 신앙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각각 겨울과 봄의 햇빛에 비유한 뒤, 막13:18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 나지 않도록 기도하라.’ 그리고 곧바로 ‘여기서 도망함(flight)은 마지막 때를 뜻하며, 또한 각 사람이 죽을 때를 뜻합니다. 겨울은 사랑이 없는 삶이고, 환난의 날은 저세상에서의 그 비참한 상태입니다’라고 설명합니다.

 

처음 읽으면 상당히 뜻밖입니다. ‘도망함’이라는 말이 어떻게 ‘마지막 때’를 뜻하고, 더 나아가 ‘각 사람이 죽을 때’를 뜻할 수 있을까요? 혹시 사람이 죽을 때 영혼이 육체에서 빠져나가 어디론가 ‘날아가는 것’을 flight라고 표현한 것일까요?

 

먼저 이 가능성부터 제외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여기서 영어 flight는 ‘비행’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막13의 문맥에서 flight는 위험을 피해 ‘도망함, 피신함’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이해하면서 영어 단어의 다른 뜻인 ‘비행’을 끌어올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이것을 현대 종말론에서 흔히 말하는 ‘휴거’와 동일시해서도 안 됩니다. AC.34에서 스베덴보리는 flight를 휴거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가 직접 제시하는 속뜻은 ‘마지막 때’와 ‘각 사람이 죽을 때’입니다. 그러므로 이 심화에서 먼저 붙들어야 할 것은 그가 실제로 제시한 이 두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왜 ‘도망함’이 ‘마지막 때’를 뜻할까요? 막13의 문자적 문맥에서 도망함은 한 상태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고 결정적인 끝을 향해 가는 상황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말씀을 교회의 마지막 상태에 적용합니다. AC.32에서도 ‘세대의 종말’을 사랑이 거의 없고 그 결과 신앙도 거의 없는 상태로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연계의 어느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도망하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한 교회의 상태가 마지막에 이르는 영적 의미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또한 각 사람이 죽을 때’를 뜻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교회 전체의 마지막과 한 개인의 자연계 삶의 마지막 사이에 대응되는 점이 있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는 그 교회의 마지막 상태가 있고, 개인에게는 자연계에서의 삶을 마치는 때가 있습니다. AC.34는 막13의 말씀을 이 두 차원에 함께 적용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죽을 때’를 단순히 육체에서 영혼이 빠져나가는 이동 순간으로 이해하면 AC.34의 핵심을 놓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바로 이어 설명하는 것은 이동의 방식이 아니라 그때의 ‘상태’입니다. ‘겨울은 사랑이 없는 삶’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 나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말씀을 AC.34의 속뜻에 따라 읽을 때 중심 질문은 ‘죽을 때 영혼이 어떻게 이동하는가?’가 아니라 ‘자연계의 삶을 마칠 때 그 사람의 영적 상태가 어떠한가?’입니다. 그때가 ‘겨울’, 곧 사랑이 없는 삶의 상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AC.34 전체의 주제와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이 글의 처음부터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사랑과 신앙의 결합입니다. 사랑과 신앙은 하나를 이루며, 사랑 없는 신앙의 교리적 지식만 가지고 있는 영들은 ‘생명의 차가움과 빛의 어두움’ 가운데 있다고 했습니다. 이어 그는 사랑 없는 신앙의 생명을 겨울철 햇빛에 비유합니다. 빛은 있지만 열이 없어서 아무것도 자라지 못하고 모든 것이 굳어 있는 상태입니다.

 

반대로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은 봄철의 햇빛과 같습니다. 빛과 함께 열이 있어 모든 것이 자라고 번성합니다. 바로 이 겨울과 봄의 대조를 설명한 다음에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 나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말씀이 인용됩니다. 따라서 ‘겨울’의 의미는 앞의 설명과 분리해서 읽을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각 사람이 죽을 때’를 언급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자연계에서 살아 있는 동안 사람은 사랑과 신앙이 결합된 삶을 향하여 거듭날 기회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연계의 삶을 마칠 때 그 사람의 지배적인 생명이 사랑 없는 겨울과 같은 상태라면, 그것은 단순히 추운 계절에 죽었다는 뜻이 아니라 영적으로 사랑이 없는 상태에서 자연계의 삶을 마쳤다는 뜻이 됩니다.

 

AC.34은 그 뒤의 ‘환난의 날’도 ‘저세상에서의 그 비참한 상태’를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 역시 자연계의 재난이나 종말 시간표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랑 없는 삶이 사후에 어떤 상태와 연결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따라서 이 인용 전체는 AC.34가 계속 말해 온 ‘사랑 없는 신앙에는 참된 생명이 없다’는 원리를 매우 엄중한 방식으로 강조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죽을 때’라는 표현 때문에 임종 순간의 감정이나 마지막 몇 분의 상태에 지나치게 집중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AC.34가 말하는 ‘겨울은 사랑이 없는 삶’입니다. 즉 문제는 죽는 바로 그 순간 사람이 평안했는가 두려워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자연계에서 어떤 사랑을 자신의 생명으로 삼아 살아왔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갑작스러운 사고로 죽었거나, 의식을 잃은 채 죽었거나, 임종 때 심한 고통과 두려움을 겪었다고 해서 그것을 ‘겨울에 도망한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겨울은 육체적 임종 상황이 아니라 ‘사랑이 없는 삶’이라는 영적 상태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이 구별은 목회적으로도 중요합니다. 막13:18을 AC.34의 설명에 따라 읽으면서 ‘좋은 상태에서 죽어야 한다’는 말을 임종의 외적 모습에 적용하면 불필요한 두려움을 만들 수 있습니다. 평안하게 임종했다고 해서 반드시 영적으로 봄인 것도 아니고, 고통스럽게 임종했다고 해서 영적으로 겨울인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보는 것은 자연적 죽음의 외형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삶을 이루어 온 사랑의 성질입니다.

 

이렇게 보면 ‘도망함’이 왜 각 사람이 죽을 때를 뜻하는지도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막13의 종말에 관한 말씀을 교회의 마지막에만 한정하지 않고 개인의 자연계 삶의 마지막에도 적용합니다. 그리고 그때 중요한 것은 ‘그 마지막이 사랑 없는 겨울의 상태인가, 아니면 사랑과 신앙이 결합된 생명 가운데 있는가’입니다.

 

따라서 AC.34에서 flight를 ‘비행’이나 ‘휴거’로 이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사람이 죽으면서 영혼이 육체에서 빠져나가는 이동 자체를 flight라고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직접 주는 열쇠는 ‘마지막 때’, ‘각 사람이 죽을 때’, 그리고 ‘겨울은 사랑이 없는 삶’이라는 세 표현입니다.

 

결국 이 인용의 중심은 ‘어떻게 세상 끝에서 탈출할 것인가?’가 아니라 ‘자연계의 삶을 마칠 때 나는 어떤 사랑의 상태에 있는가?’입니다. AC.34 전체가 말하듯 신앙은 사랑과 분리되어서는 안 되며, 사랑 없는 신앙은 겨울의 햇빛과 같습니다. 그래서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 나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말씀은 사랑과 신앙이 하나가 된 삶의 중요성을 마지막 순간의 관점에서 다시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AC.34, 창1:14-17, 사랑과 신앙은 하나다 : 겨울의 빛과 봄의 빛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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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 심화 2,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

AC.34.심화 2.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위 AC.34 본문 중 인용 구절,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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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 심화

1. 천적 천사들의 ‘생명과 지성의 빛’은 어떤 상태일까?

 

위 AC.34 본문, ‘그러한 생명과 지성의 빛 가운데 있는 그 상태는 거의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and are in such a life and light of intelligence that scarcely anything of it can be described.) 말인데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라고 했지만... 그래도 최대한 어떤 묘사가 좀 가능할까요? 저렇게만 말하면 그저 어리둥절하기만 해서요...

 

AC.34에서 스베덴보리는 자신에게 허락된 영계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천적 사랑 가운데 있는 천사들은 주님에게서 오는 그 사랑으로 인해 ‘신앙에 속한 모든 지식 안에 있으며’, ‘그러한 생명과 지성의 빛 가운데 있는 그 상태는 거의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만 읽으면 오히려 궁금증이 커집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다니, 도대체 어떤 상태라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먼저 가장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AC.34에서 실제로 말한 범위를 정확히 붙드는 것입니다. 그는 여기서 그 상태를 세세하게 묘사하지 않습니다. 천적 천사들이 어떤 느낌을 느끼는지, 생각이 어떤 속도로 움직이는지, 어떤 방식으로 진리를 알아보는지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 빈자리를 상상으로 채워 ‘천적 천사들은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이런 감정을 느낀다’고 단정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럼에도 AC.34 자체가 알려 주는 것은 분명합니다. 첫째, 그들은 ‘천적 사랑 가운데’ 있습니다. 둘째, 그 사랑은 그들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입니다. 셋째, 그 사랑으로 인해 그들은 ‘신앙에 속한 모든 지식 안에’ 있습니다. 넷째, 그 결과 그들에게는 놀라운 ‘생명과 지성의 빛’이 있습니다. 이 네 가지를 함께 보면 어느 정도 그 상태의 윤곽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장 먼저 주목할 것은 ‘생명’입니다. 바로 앞의 AC.33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랑과 생명을 떼어 놓을 수 없다고 설명했습니다. 사랑이 없다면 생명도 있을 수 없고, 사랑이 어떠한가에 따라 생명과 기쁨도 그러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참된 생명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AC.34의 천적 천사들이 놀라운 ‘생명’ 가운데 있다는 말은 앞의 설명과 연결됩니다. 그들은 주님에게서 오는 천적 사랑 안에 있기 때문에 그 사랑에 따른 생명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다음은 ‘지성의 빛’입니다. 이것을 단순히 머리가 매우 좋다거나 지식이 많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34가 강조하는 것은 천적 천사들이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으로 인해 ‘신앙에 속한 모든 지식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즉 사랑과 신앙에 속한 지식이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들의 지성의 빛은 사랑 없는 지적 능력이나 교리 지식의 축적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 점은 바로 뒤에 나오는 반대 사례를 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랑 없이 신앙의 교리적 지식만 가진 영들’을 보았다고 합니다. 이들에게는 지식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신앙에 관한 교리적 지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생명의 차가움과 빛의 어두움’ 가운데 있었습니다. 천적 천사들에게는 ‘생명과 지성의 빛’이 있고, 사랑 없는 교리적 지식만 가진 영들에게는 ‘생명의 차가움과 빛의 어두움’이 있습니다. 이 대조가 AC.34의 핵심입니다.

 

따라서 천적 천사들의 ‘지성의 빛’을 이해하는 가장 안전한 방법은 ‘사랑에서 분리되지 않은 지성의 상태’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신앙에 속한 지식은 차가운 지식으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생명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바로 그 결합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그들의 상태를 단순히 ‘많이 아는 상태’가 아니라 ‘생명과 지성의 빛 가운데 있는 상태’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앞의 AC.32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스베덴보리는 천적 천사들이 ‘사랑에 속한 신앙’ 외에 다른 신앙을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자기들의 사랑과 생명과 행복이 자기 자신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알고, 고백하며, 지각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AC.34의 천적 천사들을 이해할 때에도 같은 질서를 볼 수 있습니다. 사랑과 신앙이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고, 그 모든 생명의 근원이 주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우리의 경험에 빗대어 조금이라도 상상해 볼 수 있을까요? 아주 제한적인 비유는 가능합니다. 어떤 사람이 선한 일을 ‘해야 하니까’ 억지로 하는 경우와, 진심으로 이웃의 유익을 사랑하여 기쁘게 하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같은 행동이라도 후자의 경우에는 ‘무엇이 옳은가’라는 앎과 ‘그것을 하고 싶다’는 애정이 더 가까이 결합되어 있습니다. 이런 경험은 천적 천사들의 상태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랑과 진리가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자연적 수준에서 희미하게 이해하도록 돕는 비유 정도로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적 천사들의 상태를 ‘아무런 고민도 없이 모든 진리를 한순간에 직관적으로 아는 상태’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AC.34가 여기서 그렇게 자세히 설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생명과 지성의 빛’을 어떤 특별한 황홀감이나 감정 상태로 묘사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것은 그보다 더 근본적인 사랑과 신앙의 질서입니다.

 

왜 그 상태를 ‘거의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했는지도 여기에서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직접 경험했다고 말하는 천적 사랑의 생명과 지성의 빛은 자연계에 사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사랑과 지식의 관계와 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진리에 어긋날 수 있고, 진리를 안다고 하면서도 그대로 살고 싶어 하지 않을 수 있으며, 신앙에 관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실제 사랑의 삶과 분리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34에서 천적 천사들의 상태는 바로 그 반대편에 놓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천적 사랑과 신앙에 속한 지식이 결합되어 있고, 거기에서 생명과 지성의 빛이 나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분리된 상태를 가지고 그 결합의 상태를 온전히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에 스베덴보리도 ‘거의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문장을 신비한 황홀경에 대한 묘사로 읽는 것이 아닙니다. AC.34의 문맥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과 신앙의 결합에 관한 것입니다. 사랑과 신앙은 하나를 이루며, 사랑 없는 신앙의 지식은 겨울 햇빛처럼 생명을 내지 못하지만,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은 봄의 햇빛처럼 생명을 일으킵니다. 천적 천사들의 ‘생명과 지성의 빛’은 바로 이 사랑과 신앙의 결합이 천국에서 얼마나 충만한 생명을 이루는지를 보여 주는 사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상태를 완전히 묘사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무엇이 그 상태의 핵심인지는 말할 수 있습니다. ‘많이 아는 상태’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 안에서 신앙에 속한 지식이 살아 있는 상태’, ‘사랑과 신앙이 분리되지 않아 생명과 지성의 빛을 이루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 설명은 결국 우리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게 합니다. AC.34가 천적 천사들의 놀라운 상태를 보여 주는 목적은 단순히 천국에 대한 호기심을 채우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바로 다음에 사랑 없이 신앙의 교리적 지식만 가진 영들의 차갑고 어두운 상태를 대조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은 ‘얼마나 많은 신앙 지식을 알고 있는가?’만이 아니라 ‘그 지식이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의 삶과 결합되어 있는가?’입니다.

 

천적 천사들의 ‘생명과 지성의 빛’은 우리에게 아직 충분히 표현할 수 없는 천국의 상태입니다. 그러나 AC.34가 밝혀 주는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그 생명과 빛의 근원은 천사들 자신에게 있지 않고 주님에게 있으며, 그들에게 사랑과 신앙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바로 이 질서가 그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운 상태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입니다.

 

 

 

AC.34, 심화 2,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

AC.34.심화 2.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위 AC.34 본문 중 인용 구절,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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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 창1:14-17, ‘사랑 없는 신앙은 빛이 아니다 : 생명을 가르는 광명체의 본질’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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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 심화

2. 왜 광명체 본문에서 갑자기 ‘사랑, 생명, 기쁨과 행복’을 말하는가?

 

지금 광명체 본문인데, AC.33은 조금은 뜬금없이 참된 사랑, 참된 생명, 참된 기쁨과 행복 얘기를 하네요. 짐작은 되지만... 좀 풀어 설명해 주세요.

 

창1:14-17의 넷째 날 본문은 해와 달과 별, 곧 ‘광명체들’에 관한 말씀입니다. AC.30부터 스베덴보리는 이 광명체들을 사랑과 신앙으로 설명해 왔습니다. 그런데 AC.33에 이르면 갑자기 ‘참된 사랑’, ‘참된 생명’, ‘참된 기쁨과 행복’을 이야기합니다. 얼핏 보면 광명체의 속뜻을 설명하다가 잠시 다른 주제로 빠진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30-33의 흐름을 함께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AC.33은 앞에서 말한 ‘더 큰 광명체’, 곧 사랑이 왜 그렇게 근본적인지를 설명하는 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AC.30에서 스베덴보리는 ‘두 큰 광명체’를 사랑과 신앙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더 큰 광명체’는 사랑이고 ‘더 작은 광명체’는 신앙이라고 했습니다.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얻기 때문에 사랑이 먼저입니다. AC.32에서는 이 질서를 더욱 분명히 하여, 태고교회와 천적 천사들은 사랑과 분리된 신앙을 알지 못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왜 사랑이 그토록 근본적일까요? 왜 사랑이 ‘더 큰 광명체’이고, 신앙은 그 사랑에서 생명을 얻는다고 하는 것일까요?

 

AC.33은 바로 이 지점에서 사랑과 생명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랑이 없다면 생명도 있을 수 없으며, 사랑에서 흘러나오지 않는 기쁨도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랑이 어떠한가에 따라 생명이 그러하고, 기쁨도 그러하다’고 합니다.

 

따라서 사랑은 단순히 신앙과 나란히 놓이는 하나의 종교적 덕목이 아닙니다. 사랑은 사람의 생명과 직접 관계됩니다.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생명의 성질이 달라지고, 그 사람이 무엇에서 기쁨을 느끼는지도 달라집니다. 이것이 ‘더 큰 광명체’인 사랑을 설명하다가 생명과 기쁨의 이야기가 나오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더욱 강하게 설명하기 위해 ‘사랑, 같은 말이지만 욕망을 제거한다면 생각은 즉시 멈추고 사람은 마치 죽은 사람과 같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앞의 심화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것은 생각이 무가치하다는 뜻이 아니라 생각을 움직이는 더 깊은 생명의 원리가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은 무엇인가를 원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생각하고 추구하고 행동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구별이 하나 더 필요합니다. 사랑이 생명과 기쁨의 근원이라고 해서 모든 사랑에서 나오는 생명과 기쁨이 같은 것은 아닙니다. 바로 이 때문에 AC.33은 ‘참된 사랑’, ‘참된 생명’, ‘참된 기쁨과 행복’을 구별하여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도 ‘생명과 기쁨의 어떤 모양’이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사람은 자기 자신을 높이는 데서 큰 활력을 느낄 수도 있고, 재물이나 지위나 명예를 얻는 데서 강한 기쁨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나는 무엇인가를 사랑한다’, ‘나는 이것을 하면서 매우 기쁘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이 참된 사랑과 참된 기쁨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참된 사랑은 무엇일까요? AC.33은 ‘참된 사랑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참된 생명은 그분에게서 오는 사랑의 생명이며, 참된 기쁨은 그 생명에서 오는 기쁨’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사랑, 생명, 기쁨이 하나의 질서로 연결됩니다. 그 근원은 사람 자신이 아니라 주님입니다.

 

이것이 AC.32와도 정확하게 이어집니다. AC.32에서 천적 천사들은 자기들의 사랑과 생명과 행복이 자기 자신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알고, 고백하며, 지각한다’고 했습니다. AC.33은 이제 그 원리를 좀 더 일반적인 형태로 설명합니다. 참된 사랑은 주님을 향한 사랑이고, 참된 생명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생명이며, 참된 기쁨은 바로 그 생명에서 나옵니다.

 

따라서 AC.33의 사랑·생명·기쁨 이야기는 광명체 본문에서 벗어난 별도의 주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더 큰 광명체가 사랑이다’라는 말의 깊이를 밝혀 주는 설명입니다. 사랑이 큰 광명체라는 것은 단순히 사랑이 신앙보다 더 밝다거나 더 중요하다는 정도의 뜻이 아닙니다. 신앙이 사랑에서 생명을 얻고, 인간의 생명과 기쁨의 성질 역시 사랑의 성질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사랑이 근본적인 것입니다.

 

여기서 또 하나 조심할 점은 ‘광명체’를 단순히 ‘진리의 빛’이라고 바꾸어 설명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문맥에서 두 광명체는 각각 사랑과 신앙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진리의 빛이 사랑과 결합되어야 참된 빛이 된다’는 식으로 설명하기보다, AC.30-33이 실제로 말하는 사랑과 신앙의 관계를 그대로 따라가는 편이 정확합니다. 사랑이 더 큰 광명체이고 신앙은 더 작은 광명체이며,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넷째 날에 광명체가 나타난다는 것을 곧바로 ‘이제 참된 기쁨과 행복이 완성된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도 없습니다. AC.33은 거듭남의 넷째 상태 전체를 여기서 완결하여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광명체 가운데 특히 사랑이 가지는 생명적 성격을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후 거듭남의 과정은 계속 이어집니다.

 

이렇게 보면 AC.33의 흐름은 오히려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더 큰 광명체는 사랑이다. 그런데 왜 사랑이 더 큰 광명체인가? 사랑은 생명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의 성질에 따라 생명의 성질도, 기쁨의 성질도 달라진다. 그리고 참된 사랑과 참된 생명과 참된 기쁨의 근원은 주님에게 있다.’ 이런 흐름입니다.

 

결국 AC.33에서 ‘참된 사랑, 생명, 기쁨과 행복’이 등장하는 이유는 광명체 이야기를 떠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광명체의 속뜻을 더 깊이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해가 단순히 밝은 천체가 아니라 ‘사랑’을 나타낸다고 할 때, 그 사랑은 인간 생명의 가장 깊은 곳과 관계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참된 생명은 사람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래서 창1의 넷째 날은 단순히 사람 안에 무엇인가 ‘밝은 것’이 생기는 단계가 아닙니다. AC.30-33의 흐름에서 보면 사랑과 신앙의 질서가 나타나고, 신앙이 사랑에서 생명을 얻으며, 그 사랑과 생명의 참된 근원이 주님이라는 사실이 점차 밝혀지는 단계입니다. AC.33의 사랑과 생명과 기쁨에 관한 설명은 바로 이 넷째 날의 아르카나를 한층 더 깊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AC.33, 창1:14-17, ‘사랑이 곧 생명이다 : 참된 사랑과 거짓 사랑의 결정적 분별’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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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 심화 1, ‘생각이 즉시 멈춘다’

AC.33.심화 1. ‘생각이 즉시 멈춘다’ 위 AC.33 본문, ‘만일 사랑, 같은 말이지만 욕망을 제거한다면, 욕망은 사랑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생각은 즉시 멈추고, 사람은 마치 죽은 사람과 같이 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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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6)

 

AC.52

사람이 영적일 동안에는, 그의 다스림이 겉 사람에서 속 사람을 향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여기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Let them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heavens, and over the beast, and over all the earth, and over every creeping 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 그러나 사람이 천적이 되어 사랑으로 선을 행하게 되면, 그의 다스림은 속 사람에서 겉 사람을 향해 이루어집니다. 주님이 시편에서 자신을, 그리고 그분의 모양인 천적 인간을 이렇게 묘사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So long as man is spiritual, his dominion proceeds from the external man to the internal, as is here said: “Let them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heavens, and over the beast, and over all the earth, and over every creeping 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 But when he becomes celestial, and does good from love, then his dominion proceeds from the internal man to the external, as the Lord, in David, describes himself, and thereby also the celestial man, who is his likeness:

 

6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7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8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시8:6-8) Thou madest him to have dominion over the works of thy hands; thou hast put all things under his feet, the flock and all cattle, and also the beasts of the fields, the fowl of the heavens, and the fish of the sea, and whatsoever passeth through the paths of the seas (Ps. 8:6–8).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먼저 ‘짐승’(beasts)이 언급되고, 그다음에 ‘새’(fowl), 그리고 그 뒤에 ‘바다의 물고기’(fish of the sea)가 언급됩니다. 이는 천적 인간이 의지에 속한 사랑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그는 영적 인간과 다릅니다. 영적 인간을 설명할 때에는 이해와 신앙에 속한 ‘물고기’(fishes)와 ‘새’(fowl)가 먼저 언급되고, 그다음에 ‘짐승’(beasts)이 언급됩니다. Here therefore “beasts” are first mentioned, and then “fowl,” and afterwards the “fish of the sea,” because the celestial man proceeds from love, which belongs to the will, differing herein from the spiritual man, in describing whom “fishes” and “fowl” are first named, which belong to the understanding, and this to faith; and afterwards mention is made of “beasts.”

 

해설

AC.52는 바로 앞 AC.51에서 제시한 ‘영적 인간은 형상이고, 천적 인간은 모양이다’라는 구별을 한 단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이번에 스베덴보리가 주목하는 것은 ‘다스림이 어느 방향으로 이루어지는가’입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겉 사람에서 속 사람을 향해 다스림이 이루어지고, 천적 인간에게서는 그 반대로 속 사람에서 겉 사람을 향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처음 읽으면 상당히 낯선 표현입니다. 우리는 보통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무조건 ‘겉에서 속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AC.52는 오히려 두 방향을 구별합니다. 사람이 영적일 동안에는 겉 사람에서 속 사람을 향하고, 사람이 천적이 되어 사랑으로 선을 행하게 되면 속 사람에서 겉 사람을 향합니다. 따라서 이 글에서 ‘겉 → 속’과 ‘속 → 겉’은 어느 하나가 무조건 옳고 다른 하나가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서로 다른 질서를 설명하는 표현입니다.

 

영적 인간에 대해서는 창1:26의 순서가 그 증거가 됩니다.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여기서는 물고기와 새가 먼저 언급되고 짐승이 뒤에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순서를 중요하게 봅니다. 물고기와 새는 이해에 속하며, 따라서 신앙과 관계되고, 짐승은 의지에 속한 것과 관계됩니다. 그러므로 이해와 신앙에 속한 것들이 먼저 언급되는 순서는 영적 인간의 질서를 나타냅니다.

 

이것은 앞의 AC.40과 AC.44 이후의 설명을 기억하면 이해하기가 조금 쉬워집니다. 물고기와 새는 기억 지식 및 이성적·지적인 것들과 관계되었고, 짐승들은 의지와 애정에 속한 것들과 관계되었습니다. 이제 AC.52에서는 그 각각의 상응을 다시 설명하는 데 머물지 않고, 왜 그것들이 그 순서로 배열되어 있는지를 봅니다. 즉 말씀의 피조물 목록 자체가 영적 인간의 내적 질서를 표현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천적 인간을 설명할 때는 순서가 반대가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시8:6-8을 인용합니다. 거기서는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 그다음에 ‘공중의 새’, 마지막에 ‘바다의 물고기’가 나옵니다. 창1:26에서는 물고기와 새가 짐승보다 먼저였는데, 시8에서는 짐승이 먼저이고 새와 물고기가 뒤따릅니다. AC.52가 이 시편을 인용하는 핵심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직접 설명합니다. 천적 인간은 ‘의지에 속한 사랑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의지와 애정에 관계되는 짐승들이 먼저 언급되고, 그 뒤에 새와 물고기가 나옵니다. 반면 영적 인간을 설명할 때는 이해와 신앙에 속한 물고기와 새가 먼저 나오고 짐승이 뒤에 나옵니다. 이처럼 두 성경 구절의 배열 차이를 통해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질서 차이를 읽어 냅니다.

 

여기서 ‘천적 인간은 사랑에서 출발한다’는 말을 ‘천적 인간은 진리를 생각하거나 이해할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AC.52가 말하는 것은 이해가 없어지거나 진리가 필요 없어지는 상태가 아니라 무엇이 출발점이 되는가 하는 질서의 차이입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도 새와 물고기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만 짐승이 먼저 언급되고 그 뒤에 새와 물고기가 옵니다. 따라서 의지에 속한 사랑이 먼저라는 것이지 이해에 속한 것들이 제거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반대로 영적 인간을 ‘사랑 없이 머리로만 신앙생활하는 사람’이라고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바로 앞 AC.48에서 스베덴보리는 영적 인간이 이미 신앙으로부터뿐 아니라 사랑으로부터도 행동하기 시작한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를 ‘한쪽은 이성만 있고 다른 쪽은 사랑만 있다’는 식으로 나눌 수 없습니다. AC.52의 구별은 훨씬 섬세합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이해와 신앙에 속한 것이 먼저이고, 천적 인간에게서는 의지에 속한 사랑이 먼저입니다.

 

이 점은 기존 해설에서처럼 ‘영적 인간은 옳기 때문에 하고, 천적 인간은 좋아서 자연스럽게 한다’는 예로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두 인간의 정확한 정의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영적 인간도 사랑으로 선을 행할 수 있으며, 천적 인간이라고 해서 모든 선택에서 아무런 분별도 필요 없이 자동적으로 선을 행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AC.52가 직접 말하는 것은 ‘어디에서 출발하는가’와 ‘다스림의 방향’입니다.

 

그렇다면 ‘다스림’은 무엇을 뜻할까요? 창1:26에는 사람이 물고기와 새와 짐승과 땅의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고 되어 있습니다. AC.52는 이것을 자연계 동물에 대한 인간의 통치 문제로만 읽지 않고, 지금까지 물고기·새·짐승이 나타내 온 인간 안의 것들과 연결하여 읽습니다. 따라서 여기서의 다스림은 거듭난 사람 안에서 이해와 의지에 속한 것들이 어떤 질서 아래 놓이는가 하는 문제와 관계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다스림=강압이 아니라 질서’라고 한 문장으로 정의한 뒤, 시8의 ‘발 아래’를 감각·습관·기억·행동까지 모두 통제되는 상태라고 세분할 필요는 없습니다. AC.52는 ‘발’의 상응이나 ‘발 아래 둔다’의 세부 속뜻을 해설하지 않습니다. 이 시편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주목하는 것은 ‘짐승 → 새 → 물고기’라는 순서입니다. 따라서 인용 구절은 그 목적에 맞게 읽는 것이 좋습니다.

 

여기서 앞의 AC.47과 흥미로운 연결도 생깁니다. AC.47에서도 스베덴보리는 창1:24와 25에서 생물들이 언급되는 순서가 달라진 것을 그냥 문체상의 변화로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거기서는 그 순서 변화가 거듭남이 겉 사람에서 시작하여 속 사람으로 진행되는 것과 관계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52에서도 다시 단어의 ‘배열’이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질서를 드러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의 속뜻은 단어 하나하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문맥 속 배열과 순서에도 관계된다는 것을 보여 주는 좋은 사례입니다.

 

다만 여기서 ‘성경의 모든 단어 순서는 각각 반드시 별도의 상응을 가진다’고 일반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AC.52에서 창1:26과 시8:6-8의 서로 다른 배열을 의도적으로 비교하고, 그것을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로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AC.51과 함께 읽으면 이 차이는 더 중요해집니다. 앞에서는 영적 인간을 ‘형상’, 천적 인간을 ‘모양’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AC.52는 그 차이의 한 측면을 보여 줍니다. 영적 인간의 다스림은 겉 사람에서 속 사람을 향하고, 천적 인간의 다스림은 속 사람에서 겉 사람을 향합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이해와 신앙에 속한 것들이 먼저 나타나고, 천적 인간에게서는 의지에 속한 사랑이 먼저 나타납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곧바로 ‘모든 개인은 먼저 영적 인간이 되었다가 반드시 천적 인간으로 바뀐다’는 일직선 단계표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바로 앞 AC.51에서도 보았듯이 스베덴보리는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을 분명히 구별하며, 이후 AC에서도 이 구별은 계속 중요하게 유지됩니다. 창세기 1장에서 2장으로 이어지는 현재의 서술에는 더 내적인 상태로 나아가는 흐름이 있지만, 그것과 모든 사람의 영적 유형을 하나의 승급 과정으로 보는 것은 같은 문제가 아닙니다.

 

AC.52가 천적 인간에 대해 특별히 덧붙이는 표현은 ‘사랑으로 선을 행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천적 인간의 출발점은 의지에 속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다스림이 속 사람에서 겉 사람을 향하고, 그에 따라 말씀의 배열에서도 애정과 의지에 관계되는 짐승들이 먼저 나옵니다. 뒤이어 이해에 관계되는 새와 물고기가 놓입니다.

 

그러므로 이 글의 핵심을 단순히 ‘이해에서 사랑으로 발전한다’고만 정리하는 것보다, 두 질서의 방향을 함께 기억하는 편이 정확합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이해와 신앙에 속한 것이 먼저이며 다스림은 겉 사람에서 속 사람을 향합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는 의지에 속한 사랑이 먼저이며 다스림은 속 사람에서 겉 사람을 향합니다. 창1:26과 시8:6-8의 피조물 순서가 바로 그 차이를 보여 줍니다.

 

AC.52는 그래서 아주 짧지만 중요한 글입니다. ‘물고기, 새, 짐승’이라는 익숙한 상응을 다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순서를 바꾸어 놓았을 때 인간의 내적 질서까지 달라진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바로 이 차이가 앞의 ‘형상’과 ‘모양’,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구별을 한 단계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게 합니다.

 

심화

1. ‘영적 인간’, ‘천적 인간’

 

AC.52, 심화 1, ‘영적 인간’, ‘천적 인간’

AC.52.심화1. ‘영적 인간’, ‘천적 인간’ AC를 처음 읽는 독자에게 ‘영적 인간’이라는 표현은 비교적 익숙하지만 ‘천적 인간’이라는 말은 상당히 낯설 수 있습니다. 일상적인 한국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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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3, 창1:27,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AC.53-54)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And God created man in his own image, in the image of God created he him;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창1:27) AC.53 여기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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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1, 창1:26, ‘형상’(image), ‘모양’(likeness)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6) AC.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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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2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And God blessed them, saying,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fill the waters in the seas, and the fowl shall be multiplied in the earth.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fth day. (창1:22, 23)

 

AC.43

주님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지니게 된 모든 것은 크게 열매 맺고 번성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육신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다지 드러나지 않지만, 다른 삶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그러합니다. 말씀에서 ‘열매 맺다’(be fruitful)라는 표현은 사랑에 속한 것들에 대해 사용되고, ‘번성하다’(multiply)라는 표현은 신앙에 속한 것들에 대해 사용됩니다. 사랑에 속한 ‘열매’(fruit) 안에는 ‘씨’(seed)가 들어 있는데, 이 씨로 인해 그것은 크게 번성합니다. 또한 말씀에서 주님의 ‘축복’(blessing)은 열매 맺음과 번성을 뜻하는데, 이 모든 것이 축복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Everything that has in itself life from the Lord fructifies and multiplies itself immensely; not so much while the man lives in the body, but to an amazing degree in the other life. To “be fruitful,” in the Word, is predicated of the things that are of love, and to “multiply,” of the things that are of faith; the “fruit” which is of love contains “seed,” by which it so greatly multiplies itself. The Lord’s “blessing” also in the Word signifies fruitfulness and multiplication, because they proceed from it.

 

해설

AC.43은 창조의 다섯째 날에 처음 나타난 살아 있는 것들이 왜 곧바로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축복을 받는지를 설명합니다. 앞의 AC.39-41에서는 사람이 선과 진리가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믿고 지각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참으로 살아 있는 것들이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43은 그렇게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은 것에는 또 하나의 특징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고 ‘열매 맺고 번성한다’는 것입니다.

 

첫 문장이 이 글 전체의 중심입니다. ‘그 안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은 엄청나게 열매 맺고 번성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무엇인가의 수가 많아진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지금 스베덴보리는 거듭나는 사람 안에서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은 사랑과 신앙에 속한 것들이 열매 맺고 번성하는 것을 창1:22의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말씀과 연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매우 흥미로운 말을 하나 덧붙입니다. 이러한 열매 맺음과 번성은 사람이 육신 안에서 사는 동안에는 그다지 크게 나타나지 않지만 ‘다른 삶’에서는 놀라울 정도라고 합니다. 여기서 ‘놀라울 정도’가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인지, 또 왜 사후에는 그렇게 되는지를 AC.43은 더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것을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어지기 때문에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식으로 구체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글에서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입니다.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은 것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보다 다른 삶에서 훨씬 더 놀라운 열매 맺음과 번성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오히려 우리에게 중요한 주의를 줍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영적 성과의 크기로 그 사람 안에 있는 생명의 모든 가능성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것 역시 ‘지금 아무 변화가 없어 보여도 사후에는 자동으로 엄청나게 성장한다’는 약속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AC.43의 주어는 분명히 ‘그 안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가진 모든 것’입니다. 강조점은 인간 자신의 잠재력이 아니라 그 생명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데 있습니다.

 

그다음 스베덴보리는 ‘열매 맺다’와 ‘번성하다’를 구별합니다. 말씀에서 ‘열매 맺다’는 사랑에 속한 것들에 대해 말하고, ‘번성하다’는 신앙에 속한 것들에 대해 말한다고 합니다. 창1:22의 두 동사가 단순히 같은 뜻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속뜻에서는 사랑과 신앙이라는 서로 구별되는 것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말씀에서 ‘열매’와 ‘번성’ 같은 표현을 만날 때에도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사랑에 속한 ‘열매’ 안에 ‘씨’가 들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씨로 말미암아 열매가 크게 번성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너무 멀리 나가 ‘씨는 언제나 정확히 무엇을 뜻한다’는 별도의 체계를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AC.43이 강조하는 것은 사랑에 속한 열매가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다시 번성할 수 있는 씨를 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연의 열매 속에 씨가 들어 있어 다시 새로운 생명을 낳듯, 이 표현을 통해 사랑에 속한 것과 신앙에 속한 것의 열매 맺음과 번성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마지막으로 AC.43은 ‘주님의 축복’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설명합니다. 말씀에서 주님의 ‘축복’은 열매 맺음과 번성을 뜻하는데, 그 이유는 ‘그것들이 축복에서 나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창1:22의 순서를 그대로 설명합니다. 먼저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라고 하고, 이어서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합니다. 곧 생육과 번성의 근원이 그들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복’이라고 하면 건강, 형통, 보호, 물질적 풍요 등을 먼저 떠올릴 수 있습니다. AC.43은 여기서 그러한 모든 의미를 포괄적으로 정의하려는 글은 아닙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복은 언제나 외적인 복과 관계없고 오직 내적 성장만을 뜻한다’고 일반화해서도 안 됩니다. 이 글이 분명히 밝히는 것은 창1:22의 문맥에서 주님의 축복이 ‘열매 맺음과 번성’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생명을 주시고, 그 생명이 사랑과 신앙에 속한 것들 안에서 열매 맺고 번성하게 되는 것이 여기서 말하는 축복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보면 AC.43은 앞의 몇 글을 아름답게 마무리합니다. AC.39에서는 사람이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알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살아난다고 했고, AC.40에서는 기억 지식과 이성적·지적인 것들이 살아 있는 물고기와 새로 나타났으며, AC.41에서는 주님에게서 오는 것에는 실제로 생명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AC.42에서는 그 기억 지식의 개별적인 것들을 포괄하는 일반적인 것들까지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AC.43에서는 그렇게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은 것들이 ‘열매 맺고 번성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글의 중심은 ‘나는 얼마나 많은 영적 열매를 만들어 냈는가?’라는 자기 평가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시 생명의 근원으로 돌아갑니다. 열매 맺음과 번성은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은 것의 성질이며, 그것이 가능한 것 자체가 주님의 축복입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영적 생명을 만들어 내고 증식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사람 안에서 사랑에 속한 열매를 맺고 신앙에 속한 것들을 번성하게 합니다. 창조의 다섯째 날에 하나님께서 살아 있는 것들을 만드시고 곧바로 복을 주신 장면은 바로 이 거듭남의 질서를 보여 줍니다.

 

 

 

AC.44, 창1:24-25,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A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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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 창1:21, ‘큰 바다짐승들’

하나님이 큰 바다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created great whales, and every living 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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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And God said, Let the waters cause to creep forth the creeping thing, the living soul; and let fowl fly above the earth upon the faces of the expanse of the heavens. (창1:20)

 

AC.39

큰 광명체들이 불이 붙어 속 사람 안에 놓이고, 겉 사람이 그 빛을 받게 되면, 그러면 사람은 비로소 살기 시작합니다. 그 이전까지는 그를 가리켜 거의 살아있다 할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그때는 그가 선을 행해도 그 선이 자기에게서 나온 걸로 알았고, 진리를 말해도 그 진리 역시 자기에게서 나온 거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사람이란 자기 자신으로서는 죽어 있으며, 그 안에는 악과 거짓밖에 없기 때문에, 자기에게서 나오는 건 그게 무엇이든 생명이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로부터는 그 자체로 선한, 그런 선을 절대로 행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선한 것을 생각하거나, 선한 것을 원하거나, 따라서 선한 것을 행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주님에게서만 온다는 사실은, 신앙의 교리로 보아도 누구에게나 분명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마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After the great luminaries have been kindled and placed in the internal man, and the external receives light from them, then the man first begins to live. Heretofore he can scarcely be said to have lived, inasmuch as the good which he did he supposed that he did of himself, and the truth which he spoke that he spoke of himself; and since man of himself is dead, and there is in him nothing but what is evil and false, therefore whatsoever he produces from himself is not alive, insomuch that he cannot, from himself, do good that in itself is good. That man cannot even think what is good, nor will what is good, consequently cannot do what is good, except from the Lord, must be plain to everyone from the doctrine of faith, for the Lord says in Matthew:

 

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마13:37) He that soweth the good seed is the son of man (Matt. 13:37).

 

또한 선은 오직 하나뿐인 참된 선의 근원에서만 올 수 있는데, 주님께서는 다른 곳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Nor can any good come except from the real fountain of good, which is one only, as he says in another place: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눅18:19) None is good save one, God (Luke 18:19).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사람을 다시 살리실 때, 곧 거듭남으로 생명으로 일으키실 때에는, 처음에는 사람이 자기가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하는 걸 허락하십니다. 이때 사람은 달리 생각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며, 그런 방식이 아니고서는 그를 이끌어 나중에 모든 선과 모든 진리가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믿고, 더 나아가 퍼셉션으로 알 수 있도록 인도하실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동안, 그의 진리와 선은 ‘풀’(tender grass), ‘씨 맺는 채소’(herb yielding seed), 그리고 마지막으로 ‘열매 맺는 나무’(tree bearing fruit)에 비유되는데, 이것들은 모두 생명이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가 사랑과 신앙으로 생명을 얻게 되고, 자기가 행하는 모든 선과 자기가 말하는 모든 진리가 사실은 주님께서 이루시는 것임을 믿게 되면, 그는 먼저 ‘물속의 기는 것들’(creeping things of the water)과 ‘땅 위를 나는 새들’(fowls which fly above the earth)에 비유되고, 또한 ‘짐승들’(beasts)에 비유되는데, 이것들은 모두 생명이 있는 것들이며, 이것들을 가리켜 ‘생물’(living souls)이라고 합니다. Nevertheless when the Lord is resuscitating man, that is, regenerating him, to life, he permits him at first to suppose that he does what is good and speaks what is true from himself, for at that time he is incapable of conceiving otherwise, nor can he in any other way be led to believe, and afterwards to perceive, that all good and truth are from the Lord alone. While man is thinking in such a way his truths and goods are compared to the “tender grass,” and also to the “herb yielding seed,” and lastly to the “tree bearing fruit,” all of which are inanimate; but now that he is vivified by love and faith, and believes that the Lord works all the good that he does and all the truth that he speaks, he is compared first to the “creeping things of the water,” and to the “fowls which fly above the earth,” and also to “beasts,” which are all animate things, and are called “living souls.”

 

해설

AC.39부터 창조의 다섯째 날이 시작됩니다. 앞의 셋째 날에는 연한 풀과 씨 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가 나타났지만,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을 아직 ‘생명이 없는 것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제 물에서는 기는 생물이 나오고 하늘에는 새가 날기 시작합니다. 창세기 본문의 자연적인 모습에서도 정지해 있던 식물의 세계에서 움직이는 동물의 세계로 넘어갑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변화를 사람의 거듭남에서 처음으로 ‘살기 시작하는’ 중요한 전환으로 읽습니다.

 

그 전환은 언제 일어날까요? AC.39의 첫 문장이 그 답을 줍니다. 큰 광명체들이 밝혀져 속 사람 안에 놓이고 겉 사람이 그 빛을 받게 될 때입니다. 앞의 넷째 날에서 큰 광명체와 작은 광명체는 사랑과 신앙을 나타냈습니다. 이제 그것들이 단지 사람이 알고 있는 교리나 개념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내적 생명을 비추고, 겉 사람도 그 빛을 받게 됩니다. 그때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비로소 살기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이 표현이 상당히 당혹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전에도 사람은 선을 행했고 진리를 말했습니다. 그런데 왜 스베덴보리는 그때까지 그를 ‘거의 살아 있다고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일까요? 문제는 그 선과 진리가 겉으로 존재했느냐 아니냐가 아닙니다. 사람이 그것들의 근원을 어디에 두고 있었느냐가 핵심입니다. 그는 자기가 선을 행하고 자기가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AC.39의 매우 강한 문장이 나옵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으로서는 죽어 있으며’, 그 안에는 ‘악과 거짓밖에 없다’고 합니다. 이것을 인간에게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모욕적인 선언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핵심은 ‘생명의 근원’입니다. 사람은 생명을 자기 안에서 스스로 만들어 내는 독립적인 생명의 원천이 아니며, 참된 선과 진리의 근원도 자기 자신이 아닙니다. 선은 오직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그래서 AC.39은 ‘사람이 자기로부터는 그 자체로 선한 선을 행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표현은 ‘그 자체로 선한’입니다. 사람이 외적으로 친절한 행동을 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유익한 일을 전혀 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AC.39의 관심은 그 선의 궁극적인 근원이 어디인가에 있습니다. 사람이 참으로 선한 것을 생각하고 원하고 행할 수 있다면, 그 선의 생명과 근원은 사람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마13:37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와 눅18:19의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를 인용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이 두 구절은 이번 글에서 서로 다른 복잡한 교리를 설명하기 위해 등장한다기보다, 선의 근원이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라는 중심 명제를 뒷받침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의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처음부터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주님께서 하신다’고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요? AC.39은 놀랍게도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사람을 다시 살리시고 거듭나게 하실 때, 처음에는 사람이 ‘내가 선을 행하고 내가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하도록 허락하신다고 합니다.

 

그 이유도 분명히 밝힙니다. 그 단계의 사람은 달리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방식으로는 나중에 모든 선과 진리가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믿고, 마침내 퍼셉션하도록 인도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거듭남을 이끄시는 주님의 질서가 잘 드러납니다. 주님께서는 아직 도달하지 못한 상태를 사람에게 처음부터 강요하시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상태에서부터 그를 이끌어 가십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균형입니다.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말이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AC.39의 사람은 실제로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합니다. 다만 처음에는 그것을 자기에게서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자신이 행하는 선과 말하는 진리의 참된 근원이 주님임을 먼저 믿고, 나중에는 퍼셉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인간의 행동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행동의 근원에 대한 인식이 바뀌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셋째 날의 식물과 다섯째 날의 생물을 비교하면 AC.39의 뜻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사람이 아직 선과 진리를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는 동안 그의 선과 진리는 ‘연한 풀’, ‘씨 맺는 채소’, ‘열매 맺는 나무’에 비유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을 ‘생명이 없는 것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제 사랑과 신앙으로 살아나 자기가 행하는 모든 선과 자기가 말하는 모든 진리를 주님께서 이루신다고 믿게 되면, 물의 기는 것들과 하늘을 나는 새들과 짐승들에 비유됩니다. 이것들은 ‘생물’입니다.

 

여기서 ‘생명이 없다’와 ‘생명이 있다’는 표현을 자연계의 생물학적 생명처럼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앞 단계의 사람에게 생각이나 감정이나 활동이 없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거듭남의 속뜻에서 선과 진리가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신앙의 생명을 받아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식물에서 동물로 넘어가는 창조의 변화가 거듭남의 내적 변화와 대응합니다.

 

또 하나 주의할 것은 ‘모든 선을 주님께서 행하신다’는 사실을 입으로 인정하는 것만으로 곧 이 상태에 이르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AC.39은 단순한 문구 암기를 말하지 않습니다. 먼저 그것을 ‘믿고’, 나중에는 ‘퍼셉션’한다고 합니다.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내가 선하다’는 자기 공로의 의식에서 벗어나 선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것을 실제 삶 안에서 더욱 깊이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AC.39은 인간을 무능하게 만들어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하는 글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이 실제로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하면서도 그것을 자기 소유로 주장하지 않는 생명으로 인도되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아직 ‘내가 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단계에서도 그를 버리지 않으시고, 그 상태를 허락하시면서 한 단계씩 이끌어 마침내 선과 진리의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알게 하십니다.

 

이렇게 보면 다섯째 날에 처음으로 ‘생물’이 등장하는 이유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선과 진리가 있다는 것만으로는 아직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이 사랑과 신앙으로 생명을 얻고, 사람이 그 생명의 근원이 주님임을 인정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거듭남의 새로운 단계가 열립니다. AC.39에서 ‘살기 시작한다’는 것은 바로 이 전환을 가리킵니다.

 

심화

1. 왜 처음에는 ‘내가 선을 행한다’고 생각하도록 허락하실까?

 

AC.39, 심화 1, 왜 처음에는 ‘내가 선을 행한다’고 생각하도록 허락하실까?

AC.39.심화1. 왜 처음에는 ‘내가 선을 행한다’고 생각하도록 허락하실까? AC.39에서 특히 마음에 오래 남는 문장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자기가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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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 창1:20, ‘물들이 번성하게 하는 것들’, '새들'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창1:20) AC.40 ‘물들이 번성하게 하는 것들’(creeping things which the waters bring forth)은 겉 사람에 속한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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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 창1:18-19, ‘이는 넷째 날이니라’

18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9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And to rule in the day, and in the night, and to distinguish between the 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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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창1:14-17)

 

AC.36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한 사람들은 신앙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어떤 이들은 신앙을 단지 생각이라고 여기고, 어떤 이들은 주님을 향한 생각이라고 여기며, 또 어떤 이들은 신앙의 교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신앙 교리에 포함된 모든 것을 아는 것과 인정하는 데에만 있지 않고, 특히 그 교리가 가르치는 모든 것에 순종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 교리가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것, 곧 사람이 반드시 순종해야 할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love to the Lord)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love toward the neighbor)입니다. 사람이 이 사랑 안에 있지 않다면, 그는 신앙 안에 있지 않습니다. 이 점에 대해 주님은 너무도 분명하게 가르치셔서, 조금도 의심할 여지를 남기지 않으십니다. 마가복음입니다. They who have separated faith from love do not even know what faith is. When thinking of faith, some imagine it to be mere thought, some that it is thought directed toward the Lord, few that it is the doctrine of faith. But faith is not only a knowledge and acknowledgment of all things that the doctrine of faith comprises, but especially is it an obedience to all things that the doctrine of faith teaches. The primary point that it teaches, and that which men should obey, is love to the Lord, and love toward the neighbor, for if a man is not in this, he is not in faith. This the Lord teaches so plainly as to leave no doubt concerning it, in Mark:

 

29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막12:29-31) The foremost of all the commandments is, Hear, O Israel, the Lord our God is one Lord; therefore thou shalt love the Lord thy God with all thy heart, and with all thy soul, and with all thy mind, and with all thy strength: this is the foremost commandment; and the second is like, namely this, thou shalt love thy neighbor as thyself; there is none other commandment greater than these (Mark 12:29–31).

 

마태복음에서 주님은 앞의 계명을 ‘크고 첫째 되는 계명’(first and great commandment)이라 하시며,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on these commandments hang all the law and the prophets)라고 하십니다 (마22:37-40). 여기서 ‘율법과 선지자’(law and the prophets)는 신앙의 보편적 교리이며, 말씀 전체를 뜻합니다. In Matthew, the Lord calls the former of these the “first and great commandment,” and says that “on these commandments hang all the law and the prophets.” (Matt. 22:37–41) The “law and the prophets” are the universal doctrine of faith, and the whole Word.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22:37-40)

 

해설

AC.36은 매우 직접적인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한 사람들은 신앙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상당히 강한 말입니다. 그런데 이 문장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스베덴보리가 무엇을 ‘신앙’이라고 부르는지부터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는 어떤 교리를 머리로 알고 참이라고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아직 신앙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신앙을 여러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신앙을 종교적인 생각이라고 여기고, 어떤 사람은 주님을 생각하는 마음이라고 여기며, 어떤 사람은 올바른 교리를 알고 인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것들이 전혀 필요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원문은 신앙이 신앙 교리에 포함된 것들을 ‘아는 것과 인정하는 데에만 있지 않고’라고 말합니다. 즉 ‘앎’과 ‘인정’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더 필요할까요? 스베덴보리는 ‘특히 그 교리가 가르치는 모든 것에 순종하는 데에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순종’은 AC.36을 이해하는 중요한 말입니다. 신앙은 머릿속에 있는 교리로 끝나지 않고, 그 교리가 가르치는 것을 실제 삶에서 따르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처음 읽는 독자에게 질문이 하나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기독교 신앙이란 결국 계명을 잘 지키는 것인가?’ AC.36은 곧바로 그 오해를 막아 줍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순종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수많은 규칙을 외적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교리가 가장 먼저 가르치며 사람이 순종해야 할 핵심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신앙은 순종이다’라는 말을 ‘명령을 잘 따르는 것이 신앙이다’라는 뜻으로만 이해하면 부족합니다. 어떤 순종인가가 중요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람이 이 사랑 안에 있지 않다면 그는 신앙 안에 있지 않다’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사랑과 분리된 신앙을 독립적인 영적 실재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라고 진심으로 고백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뜻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AC.36의 논점은 신앙의 고백이나 교리의 인정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데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사랑과 삶으로부터 분리하는 데 있습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주님께서 가장 중요하다고 가르치신 사랑을 삶에서 완전히 떼어 놓는다면,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온전한 신앙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입니다.

 

이를 확증하기 위해 AC.36은 스베덴보리 자신의 철학이나 신학 체계를 먼저 제시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직접 인용합니다. 막12:29-31에서 주님은 모든 계명 가운데 첫째로 하나님을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을, 둘째로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을 말씀하시며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스베덴보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신앙의 중심에 두는 직접적인 근거입니다.

 

이어 마22에서도 같은 두 계명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더욱 중요한 말씀이 덧붙습니다.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율법과 선지자’가 ‘신앙의 보편적 교리이며 말씀 전체’를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성경의 수많은 가르침 가운데 두 항목을 골라 중요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가 달려 있는 중심 원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리는 중요하지 않고 사랑만 있으면 된다’는 말과도 다릅니다. 오히려 참된 교리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교리는 무엇이 참인지 가르치고, 사람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러나 그 교리를 아무리 정확하게 알고 인정하더라도 그것이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AC.36의 기준에서는 신앙의 본래 목적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반대로 사랑을 강조한다고 해서 진리를 아무렇게나 생각해도 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AC.36 자체가 ‘신앙의 교리’와 그것이 ‘가르치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무엇에 순종할지를 알려면 먼저 무엇이 참인지 배워야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대립시키는 것은 ‘교리냐 사랑이냐’가 아니라 ‘삶과 분리된 교리적 신앙’과 ‘사랑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신앙’이라고 보는 편이 정확합니다.

 

이렇게 보면 앞의 AC.35와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AC.35에서는 이해가 하늘을 향하면서도 의지가 그 반대 방향을 향할 수 있는 인간의 분열을 다루었습니다. AC.36에서는 그 문제가 신앙의 언어로 다시 나타납니다. 이해로 교리를 알고 인정하는 것과 실제로 그 교리가 가르치는 사랑 안에서 사는 것이 갈라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AC.36은 우리에게 단순히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라고만 묻지 않습니다. ‘당신이 믿는다고 하는 것이 당신의 사랑과 삶에서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라고도 묻습니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빠진 신앙은 아무리 많은 지식과 올바른 고백을 가지고 있어도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신앙의 본질에는 아직 이르지 못합니다.

 

결국 AC.36에서 신앙은 머리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알고 인정한 진리가 사랑과 만나고, 그 사랑이 순종하는 삶으로 나타날 때 신앙은 신앙답게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하는 순간 신앙 자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된다고 말합니다. 신앙의 중심에는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두 큰 계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심화

1.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

 

AC.36, 심화 1,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

AC.36.심화1.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과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이 무엇인가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이웃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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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AC.36, 심화 2,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AC.36.심화2.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AC.36 참조 구절인 마22: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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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 창1:14-17,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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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 창1:14-17, ‘의지'(will)와 '이해’(understanding)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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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창1:14-17)

 

AC.35

사람에게는 두 가지 타고나는 역량(faculties), 곧 의지와 이해(will and understanding)가 있습니다. 이해가 의지의 지배를 받을 때, 이 둘은 함께 하나의 마음을 이루며, 그 결과 하나의 생명이 됩니다. 이때에는 사람이 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을 동시에 생각하고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해가 의지와 어긋날 때에는, 그러니까 신앙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신앙과 반대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의 경우인데요, 이때는 하나의 마음이 둘로 나뉘는데, 하나, 곧 이해는 스스로를 하늘로 높이려 하고, 다른 하나, 곧 의지는 지옥을 향해 기울어지지요. 그런데 모든 행위에서 실제로 행동하는 쪽은 의지이기 때문에, 만일 주님께서 그 사람을 자비로 붙들어 주지 않으신다면, 그 사람 전체는 곧장 지옥으로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Man has two faculties: will and understanding. When the understanding is governed by the will they together constitute one mind, and thus one life, for then what the man wills and does he also thinks and intends. But when the understanding is at variance with the will (as with those who say they have faith, and yet live in contradiction to faith), then the one mind is divided into two, one of which desires to exalt itself into heaven, while the other tends toward hell; and since the will is the doer in every act, the whole man would plunge headlong into hell if it were not that the Lord has mercy on him.

 

해설

AC.35는 인간에게 있는 두 가지 기본 역량, 곧 ‘의지’와 ‘이해’를 다룹니다. 얼핏 보면 아주 단순한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사람은 무엇인가를 원하고,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이해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 두 역량의 관계를 통해 앞에서 계속 다루어 온 사랑과 신앙의 문제를 인간 마음의 구조 안으로 가져옵니다.

 

먼저 처음 읽는 독자에게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 있는 문장이 있습니다. ‘이해가 의지의 지배를 받을 때’ 의지와 이해가 하나의 마음과 하나의 생명을 이룬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보통 반대로 생각합니다. ‘욕망대로 행동하지 말고 이성으로 욕망을 통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의지’는 단순히 순간적인 욕망이나 충동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원하고 사랑하는가와 연결된 마음의 근본적인 역량입니다. ‘이해’ 역시 단순한 지능이 아니라 무엇이 참인지 알고 생각하는 역량입니다.

 

그러므로 AC.35의 핵심은 ‘생각하지 말고 원하는 대로 행동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실제로 원하는 것과 그가 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대로라면 사람이 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을 또한 생각하고 의도할 때 의지와 이해는 함께 하나의 마음을 이루며, 그 결과 하나의 생명을 이룹니다. 안에서 원하는 것과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또 하나의 주의가 필요합니다. 의지와 이해가 일치하기만 하면 무조건 좋은 사람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악을 원하면서 그것을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어떤 의미에서는 생각과 욕구가 일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AC.35가 지금 다루는 문맥은 앞선 AC.34의 ‘사랑과 신앙’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신앙을 이해로는 인정하면서 실제 의지는 그 신앙과 반대되는 삶을 원하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직접 예로 드는 사람이 바로 ‘신앙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신앙과 반대되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진리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해로는 하늘을 향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옳은지 알고, 신앙을 말하고, 교리를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원하는 것과 살아가는 방향은 그것과 반대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때 ‘하나의 마음이 둘로 나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AC를 처음 읽는 사람에게 상당히 중요한 대목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은 단순히 머릿속에서 어떤 교리를 참이라고 인정하는 데서 완성되지 않습니다. 이해가 하늘을 향한다고 해서 사람 전체가 하늘을 향하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고 원하는가, 그리고 그 의지가 삶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가 함께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그래서 AC.35에는 매우 강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해는 자신을 하늘로 높이려 하지만 의지는 지옥을 향하며, 모든 행위에서 실제로 행하는 쪽은 의지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자비를 베풀지 않으신다면 사람 전체가 곧장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의지가 행위자’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사람이 무엇을 알고 있는가만으로 그의 삶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무엇을 원하며 그 원하는 바가 행위로 어떻게 나타나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해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AC.35 자체도 이해가 ‘하늘로 높아지려 한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진리를 이해할 수 있고, 자기 삶과 다른 더 높은 것을 볼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의지와 분리된 채 머리에만 머물 때입니다. ‘나는 이것이 옳다는 것을 안다’와 ‘나는 이것을 원하고 행한다’ 사이에 깊은 틈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서 AC.35의 마지막 말이 더욱 중요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이런 분열을 설명하고 끝내지 않고 ‘만일 주님께서 그 사람을 자비로 붙들어 주지 않으신다면’이라고 덧붙입니다. 인간에게 이해와 의지의 모순이 있다는 사실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 주님의 자비라는 것입니다. 이 한 문장에서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자비가 없다면 인간이 스스로 자기 상태를 유지하거나 구원할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다만 AC.35은 여기서 주님께서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그 사람을 붙드시고 의지와 이해를 회복시키시는지까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해를 이용하여 의지를 이렇게 교정하신다’는 식으로 작동 방식을 미리 확정하기보다, 우선 이 글이 직접 말하는 데 머무는 것이 좋습니다. 사람이 자기 의지대로만 내버려져 있지 않고 주님의 자비 아래 붙들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AC.35는 단순한 인간 심리 분석을 넘어 우리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게 합니다. ‘나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만 묻지 않고 ‘나는 실제로 무엇을 원하는가?’까지 묻게 하기 때문입니다. 입으로는 주님을 믿고, 이해로는 선과 진리를 인정하면서도 실제 의지가 전혀 다른 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이 분열입니다.

 

그러므로 의지와 이해가 ‘하나의 마음, 하나의 생명’을 이룬다는 말은 단순히 생각과 행동을 일치시키라는 도덕적 충고보다 깊습니다. 사람이 이해로 받아들인 신앙과 실제로 원하는 삶이 서로 갈라지지 않고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 그 둘이 갈라져 있는 우리를 절망 가운데 버려두지 않고 붙드시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AC.35의 마지막에 ‘자비’가 등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심화

1. ‘우리를 자비로 붙들어 주시는 주님’

 

AC.35, 심화 1, ‘우리를 자비로 붙들어 주시는 주님’

AC.35.심화1. ‘우리를 자비로 붙들어 주시는 주님’ 위 AC.35본문, ‘만일 주님께서 그 사람을 자비로 붙들어 주지 않으신다면’(if it were not that the Lord has mercy on him.)말인데요, 우리를 지으신 신(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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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 창1:14-17, '신앙이란 무엇인가?'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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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 창1:14-17, ‘사랑과 신앙은 하나’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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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창1:14-17)

 

AC.34

사랑과 신앙은 분리될 수 없는데, 이는 둘이 하나요, 동일한 것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에 ‘광명체들’(luminaries)을 언급하실 때, 그것들을 하나로 간주,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으라’(Let there be [sit]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라고 라틴어 단수 표현을 하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저는 주님의 허락으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놀라운 사실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천적 사랑 안에 있는 천사들은, 주님한테서 오는 그 사랑으로 인해 신앙에 속한 모든 지식 안에 있는데, 그러한 생명과 지성의 빛 가운데 있는 그 상태는 거의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사랑 없이 신앙의 교리적 지식만 가진 영들은, 생명의 차가움과 빛의 어두움 속에 있어, 하늘의 뜰 첫 문턱에도 가까이 가지 못하고 다시 물러납니다. 이들 가운데는 주님의 계명대로 살지 않으면서도, 자기는 주님을 믿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을 두고 주님께서 마태복음에서 말씀하시기를, Love and faith admit of no separation, because they constitute one and the same thing; and therefore when mention is first made of “luminaries” they are regarded as one, and it is said, “Let there be [sit]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Concerning this circumstance it is permitted me to relate the following wonderful particulars. The celestial angels, by virtue of the celestial love in which they are from the Lord, are from that love in all the knowledges of faith, and are in such a life and light of intelligence that scarcely anything of it can be described. But, on the other hand, spirits who are in the knowledge of the doctrinals of faith, without love, are in such a coldness of life and obscurity of light that they cannot even approach the first threshold of the court of the heavens, but flee back again. Some of them, while not living according to his precepts, say that they have believed in the Lord, and it was of such that the Lord said in Matthew:

 

21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마7:21, 22, 끝까지) Not everyone that saith unto me, Lord, Lord, shall enter into the kingdom of the heavens, but he that doeth my will: many will say to me in that day, Lord, Lord, have we not prophesied through thy name (Matt. 7:21–22, to the end).

 

[2]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신앙 안에도 있으며, 그렇게 해서 천적 생명 안에 있지만, 자기는 신앙이 있다 말하면서도 사랑의 삶을 살지 않는 사람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사랑 없는 신앙의 생명은 겨울철 햇빛과 같아 아무것도 자라지 않고 모든 것이 얼어붙어 죽은 것과 같습니다. 반면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은 봄철 햇볕과 같아, 태양의 열로 인해 모든 것이 자라고 번성합니다.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도 정확히 이와 같은데, 이런 것들은 보통 말씀에서 세상과 땅 위에 있는 것들로 표현됩니다. 또한 신앙이 전혀 없는 상태와 사랑 없는 신앙은, 주님께서 세대의 종말을 예고하시면서 ‘겨울’(winter)에 비유하셨습니다. 마가복음에서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Hence it is evident that those who are in love are also in faith, and thereby in heavenly life, but not those who say they are in faith, and are not in the life of love. The life of faith without love is like the light of the sun without heat, as in the time of winter, when nothing grows, but all things are torpid and dead; whereas faith proceeding from love is like the light of the sun in the time of spring, when all things grow and flourish in consequence of the sun’s fructifying heat. It is precisely similar in regard to spiritual and heavenly things, which are usually represented in the Word by such as exist in the world and on the face of the earth. No faith and faith without love are also compared by the Lord to “winter,” where he foretells the consummation of the age, in Mark:

 

18이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 19이는 그날들이 환난의 날이 되겠음이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시초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막13:18, 19) Pray ye that your flight be not in the winter, for those shall be days of affliction (Mark 13:18–19).

 

여기서 ‘일’(flight)은 마지막 때를 뜻하며, 또한 각 사람이 죽을 때를 뜻합니다. ‘겨울’은 사랑이 없는 삶이고, ‘환난의 날’(day of affliction)은 저세상에서의 그 비참한 상태를 말합니다. “Flight” means the last time, and also that of every man when he dies. “Winter” is a life destitute of love; the “day of affliction” is its miserable state in the other life.

 

해설

AC.34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랑과 신앙의 관계를 한층 더 분명하게 밝힙니다. ‘사랑과 신앙은 분리될 수 없는데, 이는 둘이 하나요, 동일한 것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AC.34 전체의 중심입니다. 사랑과 신앙은 단순히 서로 잘 협력해야 하는 두 가지 종교적 요소가 아니라, 본래 하나를 이루도록 되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창1:14의 표현 자체에서 이 질서를 봅니다. 처음 ‘광명체들’이 언급될 때 복수의 광명체들을 가리키면서도 라틴어에서는 ‘있으라’에 단수형 ‘sit’가 사용되었다고 지적합니다. 그는 이것을 사랑과 신앙이 하나를 이룬다는 사실과 연결합니다. 앞의 AC.30-33에서 큰 광명체는 사랑이고 작은 광명체는 신앙이며,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얻는다고 설명했는데, 이제 AC.34에서는 그 둘이 본래 분리될 수 없는 하나라고 더욱 분명히 말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스베덴보리는 자신에게 허락된 영계의 경험을 소개합니다. 천적 사랑 안에 있는 천사들은 주님에게서 오는 그 사랑으로 인해 신앙에 속한 모든 지식 안에 있으며, 그들의 생명과 지성의 빛은 거의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랑과 신앙의 결합입니다. 천적 사랑과 신앙에 속한 지식이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하나의 천국적 생명을 이루고 있습니다.

 

반대편에는 ‘사랑 없이 신앙의 교리적 지식만 가진 영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신앙에 관한 지식 자체가 없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리적 지식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그들이 ‘생명의 차가움과 빛의 어두움’ 가운데 있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하늘 뜰의 첫 문턱에도 가까이 가지 못하고 다시 물러난다고 합니다. 이것은 AC.34에서 매우 중요한 대조입니다. 문제는 신앙에 관한 지식의 유무만이 아니라, 그 신앙이 사랑과 결합되어 생명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어떤 이들은 주님의 계명대로 살지 않으면서도 자신들은 주님을 믿었다고 말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스베덴보리는 마7:21 이하를 인용합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주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과, 실제 삶에서 주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분리될 수 없음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이 인용을 통해 AC.34가 말하는 ‘사랑’이 단순한 감정이 아님도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가 대조하는 것은 ‘사랑의 삶’과 ‘사랑 없이 신앙이 있다고 말하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사랑과 신앙의 결합은 단순히 마음속에서 따뜻한 사랑의 감정을 느끼면서 교리를 믿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이 실제 삶과 결합되어 주님의 계명에 따라 살아가는 데까지 이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 이 차이를 자연의 매우 선명한 비유로 설명합니다. 사랑 없는 신앙의 생명은 겨울철의 햇빛과 같습니다. 빛은 있지만 열이 없으므로 아무것도 자라지 않고 모든 것이 굳어 죽은 것과 같습니다. 반대로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은 봄철의 햇빛과 같습니다. 태양의 열로 인해 모든 것이 자라고 번성합니다.

 

이 비유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두 경우 모두 ‘빛’이 있다는 점입니다. 사랑 없는 신앙에도 신앙에 관한 교리적 지식과 생각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빛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생명을 낳는 사랑과 결합되어 있지 않으므로 겨울의 햇빛처럼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반대로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은 봄의 햇빛처럼 생명을 일으키고 자라게 합니다.

 

따라서 AC.34의 핵심을 단순히 ‘사랑이 신앙보다 중요하다’고 요약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더 정확하게는 ‘사랑과 신앙은 본래 하나이며,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그 참된 생명을 잃는다’는 것입니다. 신앙을 버리고 사랑만 가지라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생명을 얻는 신앙이 참된 신앙이라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자연의 모습들이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말씀에서 표현하는 데 사용된다고 설명합니다. 자연계의 겨울과 봄, 빛과 열, 성장과 죽음 같은 모습들이 말씀 안에서 영적인 상태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세대의 종말을 말씀하시면서도 ‘너희가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셨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막13:18의 ‘도망함’(flight)을 ‘마지막 때’를 뜻하는 것으로 풀이하고, 동시에 각 사람이 죽을 때를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겨울’은 사랑이 없는 삶, ‘환난의 날’은 저세상에서의 그 비참한 상태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AC.34의 앞부분에서 설명한 ‘사랑 없는 신앙’을 매우 엄중한 모습으로 다시 보여 줍니다.

 

이 대목에서는 ‘도망함’을 현대 기독교 종말론에서 말하는 ‘휴거’와 곧바로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AC.34에서 스베덴보리는 그렇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의 관심은 언제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이 지상에서 사라지는가 하는 종말 시간표에 있지 않고, 사람이 마지막 때 또는 죽음을 맞을 때 어떤 영적 상태에 있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그 상태가 ‘겨울’, 곧 사랑 없는 삶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의 사후 상태에 관한 매우 중요한 원리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자연계에서 얼마나 많은 신앙 지식을 가지고 있었는가, 얼마나 자주 주님의 이름을 불렀는가 하는 것만으로 천국의 생명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AC.34가 제시하는 대조는 분명합니다. 사랑 없는 교리적 지식은 생명의 차가움과 빛의 어두움 가운데 있지만,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에는 천국적 생명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지식이나 교리를 불필요한 것으로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AC.34 자체가 천적 천사들이 ‘신앙에 속한 모든 지식 안에 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지식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그것이 어떤 생명과 결합되어 있는가입니다. 사랑과 신앙이 하나를 이룰 때 신앙에 관한 지식도 살아 있는 질서 안에 있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 AC.34는 앞의 AC.30-33을 더욱 선명하게 완성해 갑니다. AC.30에서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얻는다고 했고, AC.32에서는 태고교회와 천적 천사들이 사랑과 분리된 신앙을 알지 못한다고 했으며, AC.33에서는 사랑이 생명과 기쁨의 성질을 결정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4에서는 그 모든 내용을 ‘사랑과 신앙은 분리될 수 없으며 하나를 이룬다’는 말로 집약합니다.

 

결국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겨울의 빛이 아니라 봄의 빛입니다. 신앙에 관한 지식과 고백이 있으면서 사랑의 삶과 분리되어 있다면 그것은 생명을 자라게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 안에서 신앙이 생명을 얻을 때, 사랑과 신앙은 본래의 질서대로 하나를 이루게 됩니다. 이것이 AC.34에서 두 광명체를 통해 밝혀지는 핵심입니다.

 

심화

1. 천적 천사들의 ‘생명과 지성의 빛’은 어떤 상태일까?

 

AC.34, 심화 1, ‘생명과 지성의 빛 가운데 있는 상태’

AC.34.심화 1. ‘생명과 지성의 빛 가운데 있는 상태’ 위 AC.34 본문, ‘그러한 생명과 지성의 빛 가운데 있는 그 상태는 거의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and are in such a life and light of intelli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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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왜 ‘도망함’(flight)이 ‘마지막 때와 각 사람이 죽을 때’를 뜻하는가?

 

AC.34, 심화 3, ‘일’(flight)

AC.34.심화 3. ‘일’(flight) 위 AC.34 본문 중 인용 구절, ‘이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막13:18)에 나오는 ‘일’(flight)을 기독교, 개신교에서는 ‘휴거’라 하여 매우 특별하게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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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 창1:14-17, ‘의지'(will)와 '이해’(understanding)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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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 창1:14-17, 생명과 기쁨, 행복의 근원은 ‘사랑’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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