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Cain)이사랑에서분리된신앙,또는그러한분리가가능하다고인정하는교리를의미한다는것과,‘그의제물을돌아보지않으셨다’(tohisofferinghelookednot)는것이그의예배가받아들여질수없었음을의미한다는것은앞에서설명했습니다. That by “Cain” is signified faith separated from love, or a doctrine that admits of this separation; and that “tohisofferinghelookednot” signifies that his worship was not acceptable, has been shown before.
해설
AC.356은 새로운 내용을 전개하기보다 바로 앞 AC.355의 첫 두 내용을 확인하고 정리하는 짧은 연결 단락입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두 가지 모두 ‘앞에서설명했다’고 밝힙니다. 첫째,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또는 그러한 분리가 가능하다고 인정하는 교리를 의미합니다. 둘째, ‘그의제물을돌아보지않으셨다’는 것은 그러한 신앙에서 나온 예배가 받아들여질 수 없었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번호의 역할은 이미 나온 내용을 다시 길게 설명하는 데 있다기보다, 이제 AC.357과 AC.358에서 이어질 ‘분노’와 ‘안색이변함’의 속뜻을 설명하기 위한 전제를 분명하게 세우는 데 있습니다.
특히 ‘가인’의 의미에는 단순히 신앙과 사랑이 실제 삶에서 분리되어 있는 상태뿐 아니라 ‘그러한분리가가능하다고인정하는교리’까지 포함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사람이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삶에서는 아직 체어리티가 충분히 나타나지 않는 것과, 사랑과 체어리티가 없어도 신앙은 그 자체로 참된 신앙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후자의 경우에는 분리가 하나의 교리적 원리로 정당화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신앙과 사랑을 개념적으로 ‘구별’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과 사랑을 구별하여 이해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그 생명인 사랑에서 떼어 내고도 온전한 신앙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인정하는 ‘분리’에 있습니다.
‘그의제물을돌아보지않으셨다’는 말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가인이라는 개인을 주님께서 미워하시거나 그의 제물을 보고 감정적으로 거절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의 AC.349에서 살펴본 것처럼 외적 예배는 내적인 것으로부터 생명을 얻으며, 그것들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주님에게서 생명을 얻습니다. 따라서 체어리티라는 내적 생명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오는 예배는 외적인 형식을 갖추고 있어도 살아 있는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주님께서는신앙은기뻐하지않으시고체어리티만기뻐하신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AC.353은 오히려 신앙 역시 사랑에서 비롯될 때에는 천적이라고 했습니다. 문제는 신앙 자체가 아니라 ‘사랑에서분리된신앙’입니다. 그러므로 가인과 아벨의 대비는 ‘신앙대체어리티’가 아니라 ‘체어리티에서분리된신앙’과 ‘체어리티와결합되어생명을얻는신앙’의 대비입니다. 아벨이 의미하는 체어리티는 신앙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에 생명을 줍니다.
이렇게 보면 AC.356은 짧지만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중요한 연결점입니다. 지금까지는 ‘가인이무엇을의미하는가’, ‘그의제물은무엇을의미하는가’, ‘왜그예배가받아들여질수없는가’를 설명했다면, 이제부터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인간의 내적인 것들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지가 드러납니다. 가인은 제물을 계속 드리고 있으므로 외적인 종교생활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예배의 내적 생명인 체어리티가 떠나면 외적인 예배만으로 그 결핍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상태에서 ‘가인이몹시분하여안색이변했다’는 다음 말씀이 이어집니다. 따라서 AC.356이 다시 확인하는 핵심은 단순합니다. 신앙은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홀로 살아 있을 수 없으며, 예배 역시 체어리티에서 생명을 얻을 때 살아 있는 예배가 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사랑과 선의 생명은 인간 자신에게서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옵니다.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But to Cain and his offering he looked not; and Cain’s anger was kindled exceedingly, and his faces fell. (창4:5)
AC.355
앞에서말한바와같이‘가인’(Cain)은사랑에서분리된신앙,또는그러한분리가가능하다고인정하는교리를의미합니다.그의‘제물을돌아보지않으셨다’(offeringnotbeinglookedto)는것은앞에서와같이그의예배가받아들여질수없었음을의미합니다.‘가인이몹시분하여그의안색이변했다’(Cain’sangerbeingkindledexceedingly,andhisfacesfalling)는것은내적인것들이변했음을의미합니다.‘분노’(anger)는체어리티가떠났음을뜻하고,‘안색’(faces)은내적인것들을뜻하는데,그것들이변할때안색이‘떨어졌다’(fall)고말합니다. By “Cain,” as has been stated, is signified faith separated from love, or such a doctrine as admits of the possibility of this separation; by his “offeringnotbeinglookedto” is signified as before that his worship was unacceptable.By “Cain’sangerbeingkindledexceedingly,andhisfacesfalling” is signified that the interiors were changed.By “anger” is denoted that charity had departed; and by the “faces,” the interiors, which are said to “fall” when they are changed.
해설
AC.355부터 창4:5의 속뜻이 시작됩니다. 앞의 AC.346-354에서는 가인과 아벨의 제물을 통하여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예배와 체어리티에 기초한 예배의 차이를 살펴보았습니다. 가인에게도 행위와 예배가 있었지만 그 안에는 체어리티의 생명이 없었고, 아벨의 예배에는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의 생명이 있었습니다. 이제 말씀의 초점은 ‘그차이가드러난뒤가인에게어떤변화가일어나는가?’로 옮겨갑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이몹시분하여안색이변했다’는 말씀을 단순히 한 개인이 화를 냈다는 심리 묘사로 읽지 않고, 체어리티가 떠나면서 ‘내적인것들이변하는’ 교회적 상태의 변화로 읽습니다.
먼저 AC.355는 ‘가인’의 의미를 다시 확인하면서 중요한 표현 하나를 덧붙입니다. 가인은 ‘사랑에서분리된신앙’뿐 아니라 ‘그러한분리가가능하다고인정하는교리’를 의미합니다. 여기에는 단순한 생활상의 부족보다 더 깊은 문제가 들어 있습니다. 사람이 신앙을 고백하면서 실제 삶에서는 충분한 체어리티를 보이지 못하는 것과, ‘신앙은사랑과체어리티에서분리되어도여전히참된신앙일수있다’고 교리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후자의 경우에는 분리가 하나의 원리로 정당화됩니다. 그렇게 되면 체어리티는 더 이상 신앙의 생명으로 여겨지지 않고, 있어도 좋고 없어도 되는 부수적인 것으로 밀려날 수 있습니다.
이 흐름을 이해할 때 ‘처음에는단순한구별이었는데나중에분리가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조금 조심해야 합니다. 신앙과 사랑을 개념적으로 구별하는 것 자체는 악이 아닙니다. 오히려 후대의 인간에게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무엇인지 구별하여 배우는 일이 필요합니다. 가인의 문제는 AC.338에서 이미 신앙을 사랑 안에서 살아 있는 것으로만 보지 않고 ‘그자체로하나의것’으로 인식하고 인정하기 시작한 데서 나타납니다. AC.347이 처음의 가인 교리가 후에 이른 상태만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고 한 것도, 처음에는 신앙이 사랑에서 그렇게 멀리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가인의 흐름은 정상적인 구별이 자동으로 악이 된 것이 아니라, 신앙의 독립성이 인정되고 그 분리가 점점 멀어져 마침내 분리 자체를 허용하는 교리로 굳어지는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그의제물을돌아보지않으셨다’는 말씀도 앞의 설명과 연결됩니다. AC.349에서 ‘제물’은 예배를 의미했고, AC.354에서는 체어리티에 기초한 아벨의 예배가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가인의 제물을 돌아보지 않으셨다는 것은 주님께서 가인이라는 개인에게 화가 나셔서 그의 제사를 거부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온 예배가 주님의 질서와 합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선이 아벨에게는 열리고 가인에게는 닫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서로 다른 것은 인간 쪽의 받아들이는 상태입니다. 체어리티와 결합된 예배에는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흐를 수 있지만,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예배는 그 생명의 질서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가인이몹시분하였다’는 반응이 나타납니다. AC.355는 이 ‘분노’를 ‘체어리티가떠났음’으로 풀이합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의 모든 분노가 곧 체어리티의 소멸을 뜻한다는 일반적인 심리 공식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상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상태에서 분노는 체어리티가 더 이상 그 안에서 살아 있지 않음을 드러냅니다.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고, 자신의 독립성과 우위를 주장할수록 체어리티는 설 자리를 잃습니다. 마침내 체어리티 자체가 자기주장을 방해하는 것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인의 분노는 단순히 ‘내제물이받아들여지지않았다’는 서운함보다 훨씬 깊은 영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렇다고 분노라는 감정 자체를 언제나 악이라고 단정해서도 안 됩니다. 불의와 악을 보고 일어나는 정당한 분개도 있을 수 있고, 자연적인 인간의 감정은 매우 복합적입니다. AC.355가 직접 말하는 것은 그러한 일반적인 감정론이 아니라 ‘가인’의 속뜻 안에서 분노가 체어리티의 떠남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여 ‘저사람이화를냈으니체어리티가없다’고 판단하기보다, 자기 안에서 신앙이나 교리적 확신이 사랑과 체어리티를 밀어내면서 분노와 적대감을 낳고 있지는 않은지를 살펴보는 데 사용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이어지는 ‘안색이변했다’는 말씀은 이 변화가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 줍니다. 영어 원문의 ‘hisfacesfalling’은 문자적으로는 ‘그의얼굴들이떨어졌다’는 표현인데, 스베덴보리는 ‘얼굴들’(faces)이 내적인 것들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얼굴에 관한 상응을 AC.355보다 지나치게 앞서 풀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 번호가 직접 밝히는 결론을 붙드는 것입니다. 곧 ‘가인의안색이변했다’는 것은 ‘내적인것들이변했다’는 뜻입니다. 체어리티의 떠남은 단지 외적인 태도 하나가 달라진 정도가 아니라 사람의 내적 상태 자체에 변화가 일어났음을 나타냅니다. 얼굴이 그 내적인 것을 표상하기 때문에 내적인 것이 변하면 얼굴이 ‘떨어졌다’고 표현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AC.355는 가인의 진행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지금까지의 흐름은 교리나 예배의 문제로만 보일 수도 있었습니다. 사랑에서 신앙이 분리되고, 그 신앙에서 죽은 행위가 나오며, 그 행위에서 체어리티 없는 예배가 나옵니다. 그러나 이제 그 분리는 인간의 내적인 것들 자체에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신앙과 사랑의 관계를 뒤집는 것이 단지 머릿속의 신학적 오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계속 붙들고 살아갈 때 애정과 의지의 방향까지 바뀔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내적인 변화가 다음 단계에서 체어리티를 의미하는 아벨을 실제로 소멸시키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AC.338부터 이 지점까지를 연결하면 그 흐름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신앙은 본래 태고교회의 사랑 안에서 살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인으로 표상되는 상태에서는 신앙이 ‘그자체로하나의것’으로 인식되고 인정되기 시작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신앙은 사랑에서 더욱 멀리 분리되고, 마침내 그러한 분리가 가능하다는 교리까지 형성됩니다. 그 신앙에서도 행위가 나오고 예배도 이루어지지만 체어리티가 없으므로 그 행위와 예배에는 내적 생명이 없습니다. 이제 AC.355에서는 체어리티가 떠나고 내적인 것들이 변합니다. 그리고 이 흐름은 결국 창4:8의 ‘가인이그의아우아벨을쳐죽이니라’, 곧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상태로 나아갑니다. 따라서 아벨의 죽음은 아무런 내적 과정 없이 갑자기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오래 진행되어 온 분리의 마지막 결과입니다.
이 때문에 AC.355는 교리와 삶의 관계에 대해서도 중요한 경고를 줍니다. 교리의 오류가 모두 즉시 사람을 악하게 만든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람은 많은 것을 불완전하게 알고도 선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교리가 악한 삶을 정당화하거나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만들며, 그러한 분리를 계속해서 옳다고 확증하게 한다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교리는 우리가 무엇을 참이라고 여기고 무엇을 선이라고 판단하는지를 형성하기 때문에, 오랫동안 붙들고 있는 거짓된 질서는 결국 애정과 삶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가인의 교리가 위험한 것은 단순히 한 문장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 아니라 신앙을 그 생명인 사랑에서 떼어 내는 방향으로 사람을 이끌기 때문입니다.
특히 종교적 확신을 가지고 있을 때 이 점은 더욱 중요합니다. 가인은 종교를 버린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여호와께 제물을 드렸습니다. 외적인 예배가 계속되고 있음에도 그 안에서는 체어리티가 떠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읽으며 바른 교리를 고백한다는 사실만으로 우리의 내적 상태가 언제나 바르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진리를 알수록 그 진리가 나를 주님 앞에서 낮추고 있는지, 이웃의 선을 기뻐하게 하는지, 자신의 악을 살펴 피하게 하는지, 다른 사람을 섬기는 쓰임으로 나아가게 하는지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있다면 진리는 자기 우월감의 근거가 아니라 사랑이 어떻게 바르게 행해야 하는지를 밝혀 주는 빛이 됩니다.
다만 여기서 ‘다른사람의선을기뻐할수있는가’를 체어리티의 유일한 심리적 척도로 삼을 필요는 없습니다. 체어리티는 단순히 따뜻한 감정을 많이 느끼는 상태보다 깊습니다. AC.351에서 보았듯 그것은 이웃의 참된 선을 바라고, 그의 어려움을 자기와 무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사랑입니다. 따라서 체어리티가 살아 있다는 것은 감정 표현의 정도보다 이웃의 참된 유익을 원하고 그것을 위해 실제로 선을 행하려는 방향에서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체어리티의 근원 역시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AC.355마지막에서 가장 주목할 것은 아직 아벨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가인의 내적인 것들이 이미 변했고 체어리티가 떠난 상태가 드러났지만, 창4:6에서 여호와께서는 바로 그 가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분하여함은어찌됨이며안색이변함은어찌됨이냐.’ 이것은 다음 AC.359이하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게 되지만, 이미 중요한 방향을 보여 줍니다. 인간의 상태가 악해지고 내적인 것들이 변하고 있을 때에도 주님께서는 곧바로 그를 버리시는 분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씀하시고 경고하시며, 악이 완전히 행위로 굳어지기 전에 돌이킬 길을 제시하십니다. 그러므로 AC.355의 어두운 변화는 주님의 부르심이 끝났다는 선언이 아니라, 그 부르심이 더욱 절실해지는 지점입니다.
결국 AC.355의 중심은 ‘가인이화를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핵심은 ‘체어리티가떠났고,그결과내적인것들이변했다’는 데 있습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하나의 독립적인 것으로 인정되고, 그 분리가 교리적으로 허용되며, 그 상태에서 행위와 예배가 계속될 때, 결국 체어리티 자체가 밀려나고 인간의 내적 상태가 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참됨은 교리적 정확성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참된 신앙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으며, 그 생명은 실제 이웃의 선을 위한 삶과 쓰임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AC.355는 아벨이 죽기 직전, 가인의 ‘얼굴’이 먼저 변했다는 말씀을 통하여 체어리티의 소멸은 언제나 외적인 행위 이전에 내적인 질서의 변화와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창4:2)
AC.345
‘농사하는자’(tilleroftheground)가체어리티가없는사람을나타낸다는것,곧사랑에서분리된신앙안에아무리깊이있다하더라도체어리티가없는사람을나타내며,그런신앙은신앙이아니라는사실은뒤에이어지는내용에서분명합니다.여호와께서그의제물을받지않으셨고,그가자기형제를죽였기때문입니다.곧그는‘아벨’(Abel)이의미하는체어리티를소멸시켰습니다.육체적이고세상적인것들을바라보는사람들을가리켜‘땅을경작하는사람들’(tilltheground)이라고했다는것은창3:19,23에서분명합니다.거기에는사람이‘에덴동산에서내보내져땅을경작하게되었다’(castoutofthegardenofEdentotilltheground)고기록되어있습니다. That a “tilleroftheground” is one who is devoid of charity, however much he may be in faith separated from love, which is no faith, is evident from what follows: that Jehovah had no respect to his offering, and that he slew his brother, that is, destroyed charity, signified by “Abel.”Those were said to “tilltheground” who look to bodily and earthly things, as is evident from what is said in Gen. 3:19, 23, where we read that the man was “castoutofthegardenofEdentotilltheground.”
AC.345는 창4:2의 마지막 표현, 곧 ‘가인은농사하는자였더라’의 속뜻을 설명하면서 AC.341부터 이어진 가인과 아벨의 대비를 마무리합니다. 아벨은 ‘양치는자’이고 가인은 ‘농사하는자’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자연적인 직업의 우열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AC.343에서 양 치는 자는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고 사람을 그 선으로 인도하는 사람을 나타냈고, AC.344에서는 신앙에 관한 모든 지식과 교리의 목적이 체어리티라고 했습니다. 이제 AC.345는 그 반대편에 있는 가인을 보여 줍니다. 그는 신앙에 속한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체어리티가 없는 상태이며, 바로 그런 상태를 여기서는 ‘농사하는자’라고 합니다.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말씀에서 ‘농사하는자’나 ‘땅을경작하는자’가 언제나 악한 의미를 가진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자연적인 농사나 노동 자체가 부정적인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말씀에서 ‘땅’은 문맥에 따라 좋은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따라서 ‘아벨은목축을했으므로선하고가인은농사를지었으므로악하다’는 식으로 읽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려는 속뜻과 전혀 다릅니다. AC.345에서 ‘농사하는자’가 부정적인 의미를 갖는 것은 가인이 의미하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상태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상응과 표상의 의미는 단어 하나에 언제나 똑같이 붙어 있는 고정된 암호가 아니라 말씀의 문맥과 그 안에서 나타나는 영적 상태에 따라 읽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을 앞으로 일어날 두 사건을 통하여 확인합니다. 하나는 여호와께서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인이 자기 형제 아벨을 죽인 것입니다. 특히 두 번째 사건은 결정적입니다. 아벨이 체어리티를 의미하므로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것은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가인은 신앙 자체가 전혀 없는 사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사랑에서분리된신앙안에아무리깊이있다하더라도’라고 말합니다. 외적으로는 신앙이 매우 강해 보일 수도 있고, 신앙에 관한 지식과 교리가 풍부하며 그것을 열심히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있다면 스베덴보리는 다시 한번 단호하게 ‘그런신앙은신앙이아니다’라고 합니다. AC.341에서 나온 선언이 AC.345에서 그대로 반복되는 것은 이것이 가인의 정체를 이해하는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344와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신앙에 관한 기억 지식과 인식 지식과 교리가 아무리 많아도 그것이 사람을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만들지 못하고 체어리티라는 목적에 이르지 못한다면 ‘텅빈아무것도아닌것’이라고 했습니다. AC.345의 가인은 바로 그 위험이 실제로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문제는 신앙에 속한 지식과 교리를 가지고 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체어리티를 향하지 않고 사랑에서 분리된 채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삼는 데 있습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섬기고 선으로 나아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완결된 것으로 여겨질 때, 신앙은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AC.345가 이 지점에서 창3:19, 23으로 돌아가는 것도 중요합니다. 창3에는 사람이 에덴동산에서 내보내져 ‘땅을경작하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AC.345에서 ‘땅을경작하는사람들’을 ‘육체적이고세상적인것들을바라보는사람들’과 연결합니다. 따라서 창4의 가인이 ‘농사하는자’라는 말은 앞 장에서 나타난 이 상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에덴으로 표상된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에서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 안에서 신앙에 속한 것들을 퍼셉션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그 질서에서 멀어지면서 시선은 점차 더 낮고 외적인 것에 향하게 됩니다. AC.345는 그러한 상태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사이의 관계를 ‘땅을경작함’이라는 같은 표현을 통하여 연결해 보여 줍니다.
여기서 ‘육체적이고세상적인것들을바라본다’는 말을 자연계의 삶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읽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몸을 돌보고, 일하고, 돈을 관리하고, 가족을 부양하며, 자연계에서 맡겨진 수많은 쓰임을 수행해야 합니다. 자연적인 것들은 그 자체로 악하지 않으며 오히려 영적인 목적을 실현하는 중요한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스베덴보리가 말하듯 무엇을 ‘바라보는가’입니다. 곧 무엇을 중심과 목적으로 삼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자연적인 것과 세상적인 것이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과 쓰임을 섬긴다면 그것들은 질서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과 종교까지 자기 명예와 이익, 우월감과 세상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하게 된다면 질서는 뒤집힙니다. 신앙에 속한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신앙의 시선과 목적이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에 머물 수 있다는 것이 ‘농사하는자’ 가인이 보여 주는 위험입니다.
이렇게 보면 ‘양치는자’ 아벨과 ‘농사하는자’ 가인의 대비도 더욱 분명해집니다. 아벨은 체어리티이고, 양 치는 자는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AC.343에서 보았듯 참된 목자는 양 떼를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하고, 체어리티는 모으고 결합합니다. 반면 AC.345의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붙들면서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을 바라보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한쪽은 신앙이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선과 쓰임으로 나아가는 방향이고, 다른 한쪽은 신앙이 사랑에서 떨어져 점점 자기 자신에게 머무는 방향입니다. 이 차이는 처음에는 아주 작아 보일 수 있습니다. 신앙과 사랑을 서로 구별하여 생각하는 것처럼 시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계속 살펴보았듯 문제는 구별 자체가 아니라 분리입니다. 구별된 신앙이 사랑과 다시 결합되지 않고 독립적인 것이 되면, 마침내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고 그 체어리티를 밀어내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AC.345는 앞으로 일어날 아벨의 죽음을 이미 해석하고 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은 갑자기 일어난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AC.338부터 설명해 온 분리의 결과입니다. 본래 사랑 안에서 살아 있던 신앙에 속한 것을 따로 꺼내어 ‘그자체로하나의것’으로 인정하고, 마음에 새겨져 있던 것을 단지 지식으로 알게 되며, 신앙을 체어리티라는 목적에서 분리한 결과가 마침내 ‘형제를죽이는’ 데까지 이릅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을 인간의 모든 교리적 구별에 적용하여 ‘교리를세우는것자체가결국체어리티를죽인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후대의 인간에게는 말씀의 진리를 배우고 교리로 이해하며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 진리가 주님께서 주시는 체어리티와 결합하느냐, 아니면 사랑에서 분리되어 자기 완결적인 신앙으로 남느냐에 있습니다.
결국 AC.345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나는신앙을가지고있는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내신앙은무엇을바라보고있으며어디를향하고있는가?’입니다. 말씀과 교리를 많이 알고 신앙을 강하게 고백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진리가 우리로 하여금 자기 안의 악을 죄로 여겨 피하게 하고, 주님을 더 사랑하게 하며,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고 실제 쓰임을 행하게 한다면 신앙은 체어리티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자기 우월성을 확인하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거나 세상적인 목적을 이루는 수단이 되고, 체어리티를 부차적인 것으로 밀어낸다면 우리는 ‘농사하는자’ 가인의 모습을 우리 자신 안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가인의 비극은 신앙을 버린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앙을 붙들면서 그 신앙의 생명과 목적인 사랑과 체어리티를 잃은 데 있습니다. ‘사랑에서분리된신앙은신앙이아니다.’ 이것이 AC.341에서 시작하여 AC.345에서 다시 한번 확정되는 창4:2의 결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