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어리티 없는 신앙이 결국 선과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게 된다는 스베덴보리의 설명은 처음에는 다소 이상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성경을 많이 알고 교리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설령 그의 삶에 사랑이 부족하더라도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지는 더 잘 분별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지적인 차원에서는 많은 진리를 알고 그것들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AC.379-381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앎’은 단순히 교리 내용을 기억하고 설명할 수 있다는 뜻보다 훨씬 깊습니다.
AC.379에서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가 사람을 주님과 결합하게 하는 ‘결속’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 단순한 지식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핵심은 진리가 그 자체로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교리를 알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사랑과 선으로 이어지지 않을 때, 그 진리는 사람 안에서 생명을 얻지 못하고 기억과 이해성 안에 머물게 됩니다. 다시 말해 진리를 ‘아는것’과 진리가 자기 삶에서 ‘참인것을보는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스베덴보리에게서 진리의 목적은 선입니다. 진리는 사람이 무엇이 선인지 알게 하고, 그 선으로 인도하기 위해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진리를 배우면서 실제로 선을 행하고 악을 죄로 여겨 피할 때, 그 진리는 점차 그의 의지와 삶에 결합됩니다. 그때 그는 단순히 ‘이것이옳다고배웠다’고 말하는 데서 더 나아가 왜 그것이 옳은지를 삶을 통해 알게 됩니다. 반대로 진리를 많이 배우면서도 그것을 자기 삶의 선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진리와 그의 실제 애정 사이에 틈이 생깁니다.
이것이 AC.380의 ‘땅이다시는그효력을네게주지아니할것이요’라는 말씀과 연결됩니다. 가인은 계속 ‘땅’을 갈 수 있습니다. 곧 신앙에 관한 지식을 계속 연구하고 배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체어리티가 소멸한 상태에서는 그 땅이 더 이상 결실하지 않습니다. 지식은 늘어날 수 있지만 그것이 선한 삶이라는 열매로 이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 결과를 ‘피하며유리하는자’가 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진리를 전혀 모르는 것이 아니라,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들을 하나의 살아 있는 중심에서 보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이 점은 ‘체어리티가있으면교리를몰라도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과 체어리티는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신앙의 진리는 무엇을 사랑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며, 체어리티는 그 진리를 살아 있게 합니다. 눈이 있어야 길을 볼 수 있지만 실제로 걸어야 목적지에 이르는 것과 비슷합니다. 보는 것과 걷는 것을 서로 경쟁시키는 것이 잘못인 것처럼,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하나를 제거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을 가진 것 자체가 아니라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마침내 그것이 체어리티를 지배하게 한 데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없는신앙은신앙이아니다’라는 말은 교리적 정확성을 가볍게 여기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교리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를 묻는 말입니다. 진리를 연구할수록 주님과 이웃을 더 사랑하고, 자기 악을 더 분명히 보고 그것을 버리며, 실제 쓰임의 삶으로 나아간다면 그 진리는 살아 있는 신앙이 되어 갑니다. 그러나 진리를 연구할수록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만 많아지고 자기의 지적 우월성을 확인하는 데 그친다면, 지식은 증가해도 그 지식이 자라야 할 ‘땅’은 점차 효력을 잃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선과 진리에 대한 영적인 분별은 지식의 양만으로 생기지 않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사랑하고 그 선을 행하려는 삶 안에서 진리는 서로 연결되고 질서를 얻습니다. 체어리티는 진리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살아 움직일 수 있게 하는 생명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 안에 있을 때 사람은 진리를 단지 기억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이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를 보게 됩니다. 이것이 체어리티를 잃은 가인이 마침내 ‘피하며유리하는자’가 되는 이유이며, 동시에 신앙이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AC.381심화1)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창4:9)
AC.372
‘지키는자’(keeper)가된다는것은섬기는것을의미합니다.유대교회에서‘문지기들’(doorkeepers)과‘문을지키는자들’(porters),곧문지방을지키는자들이그러했습니다.신앙이체어리티의‘지키는자’라고불리는것은신앙이체어리티를섬겨야하기때문입니다.그러나‘가인’이라하는교리의원리에따르면신앙이지배해야했으며,이는7절에서설명한바와같습니다. To be a“keeper”signifies to serve, like“doorkeepers”and“porters”(that is, the keepers of the threshold) in the Jewish church.Faith is called the“keeper”of charity, from the fact that it ought to serve it, but it was according to the principles of the doctrine called“Cain”that faith should rule, as was said in verse 7.
해설
AC.372는 창4:9에서 가인이 한 말 가운데 ‘내가내아우를지키는자니이까?’의 ‘지키는자’(keeper)를 설명합니다. 바로 앞 AC.370에서 스베덴보리는 이 대답이 신앙이 체어리티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고 체어리티에 종속되기를 원하지 않았으며, 마침내 체어리티에 속한 모든 것을 거부했음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72에서는 왜 ‘지키는자’라는 말이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나타내는지를 설명합니다. 결론은 매우 분명합니다. ‘신앙이체어리티의지키는자라고불리는것은신앙이체어리티를섬겨야하기때문입니다.’ 따라서 가인의 질문은 단순히 ‘내가동생을보호할책임이있습니까?’라는 책임 회피를 넘어, 속뜻에서는 ‘왜신앙이체어리티를섬겨야합니까?’라는 영적 질서에 대한 거부가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지키는자’가 ‘섬기는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하면서 유대교회의 문지기들을 예로 듭니다. 문지기는 문이나 문지방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는 집이나 성전 자체의 주인이 아니라 그곳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입니다. 그의 역할은 자신이 지키는 것을 대신하거나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온전히 기능하도록 섬기는 데 있습니다. 바로 이 이미지가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에 적용됩니다. 신앙은 체어리티의 ‘지키는자’입니다. 신앙의 진리들은 무엇이 선인지, 무엇이 악인지, 이웃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어떤 악을 죄로 여겨 피해야 하는지를 가르칩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은 체어리티를 보호하고 인도하며 체어리티가 삶에서 올바르게 나타나도록 섬깁니다.
여기서 ‘신앙은체어리티를섬긴다’는 말을 신앙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문지기가 집을 섬긴다고 해서 문지기의 역할이 불필요한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오히려 신앙의 진리가 없으면 인간은 자기가 선이라고 느끼는 것을 곧바로 참된 선이라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선한 의도만으로 무엇이 실제로 이웃에게 유익한지를 언제나 정확히 아는 것도 아닙니다. 진리는 사랑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밝혀 줍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가 신앙의 생명이라고 해서 진리가 불필요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기고, 체어리티는 신앙에 생명을 줍니다. 문제는 둘 가운데 하나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둘의 올바른 질서를 회복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앞의 창4:7, 특히 AC.361-365에서 살펴본 ‘주도권’의 문제와 정확히 이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거기서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하지만 신앙은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AC.372마지막에서 ‘이는7절에서설명한바와같습니다’라고 한 것은 바로 그 논의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AC.372를 이해하려면 ‘신앙과체어리티가운데어느것이먼저생기는가?’라는 시간적 순서보다 ‘둘이결합된뒤무엇이무엇을위해존재하는가?’라는 목적과 주도권의 질서를 보아야 합니다. 영적 인간의 거듭남에서는 진리를 먼저 배우고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로 인도되는 과정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최종적인 질서에서 신앙이 사랑을 지배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는 선을 섬기며,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깁니다.
이 점은 방금 AC.371에서 살펴본 ‘신앙을통하여체어리티가주어졌다’는 말과도 잘 연결됩니다. 홍수 후 영적 인간에게서는 먼저 말씀과 계시된 진리를 배우고, 그것으로 양심이 형성되며,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로 인도되는 질서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신앙을통하여’ 체어리티가 주어진다고 해서 신앙이 체어리티의 근원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체어리티와 모든 선의 근원은 언제나 주님이십니다. 신앙은 주님께서 인간을 체어리티로 이끄시는 수단이 됩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체어리티를 섬긴다는 AC.372의 설명과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주어진다는 AC.371의 설명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함께 읽을 때 영적 인간의 질서가 더 선명해집니다. 진리가 먼저 의식에 들어올 수 있지만, 그 진리가 궁극적으로 섬기는 것은 선이며, 신앙이 살아 있게 되는 것은 체어리티 안에서입니다.
반대로 ‘가인’이라 하는 교리는 이 질서를 뒤집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의교리의원리에따르면신앙이지배해야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가인의 문제를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신앙을 사랑과 구별하여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생각하고, 그다음에는 사랑과 분리하며, 나중에는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기고, 마침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합니다. 그 결과 아벨, 곧 체어리티가 소멸됩니다. 그리고 아벨을 죽인 뒤에는 ‘내가내아우를지키는자니이까?’라고 말합니다. 결국 ‘나는체어리티를섬기지않겠다’는 선언입니다. 신앙이 자신의 올바른 기능을 거부하고 오히려 주인이 되려고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할 때 체어리티가 소멸되는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앙이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으면 사람이 무엇을 알고 있는가, 어떤 교리를 정확히 고백하는가, 어떤 진리를 다른 사람보다 더 잘 이해하는가가 신앙생활의 중심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면 진리가 사람을 사랑과 쓰임으로 인도하기보다 자기의 의로움과 우월성을 확인하는 수단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진리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라, 진리를 사용하는 사랑의 질서가 뒤집힌 것입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을 가졌다는 데 있지 않고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하여 그것이 체어리티를 지배하게 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키는자’라는 표현에는 단순한 보호 이상의 아름다운 질서가 담겨 있습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지킵니다. 이웃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악을 선이라고 부르지 않도록 진리가 체어리티를 지키고, 좋은 의도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잘못된 행동을 정당화하지 않도록 진리가 체어리티를 지킵니다. 또한 감정적인 호의만을 체어리티라고 착각하지 않도록 무엇이 이웃의 참된 선인지를 말씀의 진리가 밝혀 줍니다. 그러나 그렇게 진리가 체어리티를 지키는 목적은 진리가 왕좌에 앉기 위해서가 아니라 체어리티가 더 순수하고 지혜롭게 쓰임을 행하도록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앙은 체어리티의 ‘문지기’와 같습니다.
이 원리는 오늘날 교회와 개인의 신앙을 살피는 데도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교리가 정확하고 성경 지식이 많으며 신앙고백이 분명한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사람을 더 겸손하게 하고, 악을 죄로 여겨 피하게 하며, 이웃의 참된 선을 구하고, 맡겨진 쓰임을 성실하게 감당하도록 섬기지 않는다면 신앙과 체어리티의 질서를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반대로 체어리티를 강조한다는 이유로 진리를 가볍게 여기는 것도 올바른 질서는 아닙니다. 문지기가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문지기가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진리는 선을 섬기고,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기며, 선과 진리 모두의 근원과 주인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결국 AC.372는 가인의 ‘내가내아우를지키는자니이까?’라는 질문에 속뜻으로 매우 분명한 대답을 줍니다. ‘그렇다.신앙은체어리티의지키는자가되어야한다.’ 그러나 가인의 교리는 그 질서를 거부했습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기려 하지 않고 오히려 지배하려 했으며, 그 결과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습니다. 따라서 이 짧은 번호는 가인과 아벨 이야기 전체의 핵심을 다시 압축합니다. 참된 신앙의 위대함은 체어리티 위에 군림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로 체어리티를 지키고 섬기며,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 있는 신앙이 되는 데 있습니다.
AC.361-365를 따라오면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단순히‘신앙과체어리티가운데어느것이더중요한가?’라는 비교가 아니라, ‘둘이어떤질서로결합되어야하는가?’라는 문제라는 것이 점점 분명해집니다.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고 합니다.그러므로 체어리티는 신앙을 밀어내지 않습니다.오히려 신앙과 결합하기를 원합니다.문제는 신앙이 체어리티를 자기 아래에 두고 지배하려 하는 데 있습니다.AC.365는 이를 아주 단호하게 정리합니다. ‘신앙이주도권을가지려하는동안에는신앙이아니며,체어리티가주도할때비로소신앙이된다.’이 말은 스베덴보리의 신앙 이해를 압축해서 보여 주는 매우 중요한 문장입니다.
왜 그렇습니까?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은 단순히 어떤 명제를 참이라고 인정하는 지적 동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신앙은 진리에 속한 것이고,진리는 선을 위해 존재합니다.진리가 선에서 떨어져 독립하려 하면 그것은 생명의 근원에서 떨어져 나옵니다.다시 말해 신앙은 스스로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사랑과 체어리티에서 생명을 받습니다.그래서 체어리티는 신앙의 곁에 붙어 있는 부수적인 덕목이 아니라,신앙을 신앙답게 하는 생명입니다.
이 점을AC.365는 불꽃과 빛의 비유로 설명합니다.체어리티는 불꽃과 같고,신앙은 그 불꽃에서 나오는 빛과 같습니다.불꽃에는 열이 있고 빛이 있습니다.열은 사랑에,빛은 진리에 해당합니다.불꽃에서 빛이 나오는 것처럼 사랑에서 진리가 생명을 얻습니다.그리고 열과 빛이 함께 있을 때 생명이 자랍니다.봄과 여름의 햇빛이 그러합니다.빛만 있는 것이 아니라 따뜻함이 함께 있기 때문에 씨앗이 싹트고,나무가 자라고,열매가 맺힙니다.
그런데 불꽃에서 열을 제거하고 빛만 남기면 어떻게 될까요?스베덴보리는 그것을‘겨울의빛’이라고 합니다.겨울에도 분명 빛은 있습니다.오히려 맑은 겨울날의 빛은 아주 선명할 수 있습니다.사물의 윤곽도 또렷하게 보입니다.그러나 생명을 일으키는 열이 없습니다.그래서 땅은 굳고,나무는 얼며,생명 활동은 멈춥니다.바로 이것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모습입니다.진리에 관한 지식은 있을 수 있고,교리를 매우 정확하게 설명할 수도 있으며,논리적으로는 빈틈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그러나 그 진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 빛에는 열이 없습니다.
이 비유는 우리가‘참된신앙’을 무엇으로 판단해야 하는지 다시 묻게 합니다.흔히 우리는 얼마나 많은 진리를 알고 있는지,교리를 얼마나 정확하게 설명하는지,성경을 얼마나 바르게 해석하는지를 신앙의 중요한 척도로 생각합니다.물론 그것들은 중요합니다.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오히려 더 근본적인 질문은‘그진리가나를어떤사랑으로이끌고있는가?’입니다.진리를 더 많이 알수록 주님을 더 사랑하고,이웃을 더 선하게 대하며,자기 사랑을 내려놓고,쓰임을 행하게 된다면 그 진리는 체어리티의 열을 가진 살아 있는 빛입니다.반대로 진리를 더 많이 알수록 자기 우월감이 커지고,다른 사람을 판단하고,자기 교리를 지키기 위해 체어리티를 희생한다면 그 빛은 겨울의 빛이 될 수 있습니다.
가인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가인은 신앙을 버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오히려 신앙을 너무 높였습니다.AC.362는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이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그 순간 질서가 뒤집혔습니다.본래 신앙은 사랑과 체어리티를 섬겨야 했지만,오히려 사랑과 체어리티를 자기 아래에 두려 했습니다.그래서AC.361에서는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하지만,신앙이 그것을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함께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AC.363에서는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해야 한다고 했고,이제AC.365에서는 체어리티가 주도할 때에야 신앙이 참으로 신앙이 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체어리티가주도한다’는 것은 정확히 무엇을 뜻할까요?이것을‘사랑이중요하니교리는별로중요하지않다’거나‘착하게살기만하면무엇을믿든상관없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그것은 스베덴보리의 뜻과 거리가 멉니다.불꽃에는 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빛도 있기 때문입니다.참된 체어리티는 진리를 필요로 합니다.무엇이 참된 선인지,어떻게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지,어떤 것이 실제로 이웃에게 유익한지 알기 위해서는 진리가 필요합니다.진리 없는 사랑은 쉽게 맹목적인 애정이나 자기 방식의 친절로 흐를 수 있습니다.그러므로 신앙과 체어리티는 반드시 결합되어야 합니다.
다만 그 결합에서 무엇이 목적이고 무엇이 수단인지는 분명해야 합니다.진리는 선을 위해 있고,신앙은 체어리티를 위해 있습니다.우리는 진리를 알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진리를 통하여 선을 사랑하고 행하기 위해 삽니다.교리는 그 자체로 최종 목적이 아니라 삶을 주님의 질서에 맞추도록 인도하는 수단입니다.그래서 신앙이 체어리티를 섬길 때,신앙은 자기 자리를 찾습니다.반대로 신앙이 체어리티 위에 올라서려 할 때,수단이 목적을 지배하는 질서의 전도가 일어납니다.
이 점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어떤 교회는 교리의 정확성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어떤 교회는 성경 해석의 정통성을,어떤 교회는 특정 신앙고백이나 교단적 전통을,어떤 교회는 성령의 은사나 종말론이나 예배 형식을 매우 중요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그것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문제는 그 하나가 전체보다 앞서고,그것을 지키기 위해 체어리티를 희생하기 시작할 때입니다.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자기 입장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더 중요해지고,진리를 가르치는 목적이 이웃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이기는 것이 되면 이미 겨울의 빛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를 읽는 사람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상응을 알고,말씀의 속뜻을 이해하고,퍼셉션과 양심의 차이를 설명하고,신앙과 체어리티의 질서를 정확히 말한다고 해서 자동으로 살아 있는 신앙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오히려 그런 지식이‘나는남들이모르는것을안다’는 자기 사랑과 결합하면,진리의 빛은 점점 차갑게 변할 수 있습니다. ‘체어리티가신앙의생명’이라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체어리티를 잃을 수도 있습니다.이것이 가인의 위험이 얼마나 미묘한지를 보여 줍니다.
그래서AC.365는 신앙의‘내용’만이 아니라 신앙의‘온도’를 묻게 합니다.빛은 있는데 열이 있는가?진리는 있는데 사랑이 있는가?교리는 있는데 체어리티가 있는가?성경을 많이 아는데 그 지식이 나를 더 온유하게 만드는가?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능력이 커질수록 다른 사람을 더 살리게 되는가,아니면 더 쉽게 정죄하게 되는가?이런 질문이 신앙의 생명을 점검하는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 조심해야 합니다.체어리티가 주도한다고 해서 인간의 자연적 친절이나 감정적 따뜻함이 신앙보다 우위에 있다는 뜻도 아닙니다.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체어리티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입니다.그것은 단순히‘사람을좋아하는마음’이나‘좋은사람이되고싶은마음’이 아닙니다.주님의 진리를 받아 그것에 따라 이웃에게 선을 행하려는 영적 사랑입니다.따라서 참된 체어리티의 근원은 언제나 주님입니다.인간에게서 스스로 나오는 선이 아니라,주님으로부터 유입되는 선이 인간 안에서 받아들여져 이웃을 향한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AC.364와AC.365는 서로 깊이 연결됩니다.AC.364에서는 체어리티가 없으면 무자비함과 증오와 악이 들어오고,그 악을 마음의 문에서 몰아낼 유일한 수단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했습니다.그리고AC.365에서는 체어리티가 주도할 때라야 신앙이 참으로 신앙이 된다고 합니다.즉 체어리티는 단지 신앙을 따뜻하게 만드는 장식이 아니라,악을 물리치고 신앙에 생명을 주는 실제적인 영적 생명입니다.
그러므로‘체어리티가주도해야한다’는 것은 결국‘주님이주도하셔야한다’는 말과도 연결됩니다.체어리티의 근원이 주님이기 때문입니다.내가 체어리티를 만들어 내서 신앙을 지배하는 것이 아닙니다.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선이 내 안에 받아들여지고,그 선이 신앙과 진리를 질서 있게 사용하도록 하는 것입니다.이렇게 보면 체어리티의 주도권은 인간의 선행이 신앙보다 우월하다는 뜻이 아니라,주님의 선이 인간의 진리를 살아 있게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거듭남의 질서와도 맞닿습니다.거듭남의 초기에는 사람이 먼저 진리를 배웁니다.무엇이 선이고 악인지,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에서 배웁니다.이 단계에서는 진리가 앞에서 인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그러나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그 진리는 의지 안으로 들어가 선과 결합됩니다.처음에는‘옳기때문에’행하던 것을 나중에는‘사랑하기때문에’행하게 됩니다.이때 진리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선 안에서 살아납니다.마치 빛이 불꽃에서 나오는 것처럼 됩니다.결국 진리와 선,신앙과 체어리티가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체어리티가주도한다’는 말을 시간적인 순서로만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반드시‘먼저사랑하고나중에믿는다’는 단순한 순서가 아니라,신앙의 최종적인 생명과 목적이 체어리티에 있다는 뜻입니다.자연적 인간의 거듭남 과정에서는 진리를 먼저 배우는 경우가 많지만,그 진리가 결국 선과 결합하지 않는다면 아직 완성된 신앙이 아닙니다.진리는 선을 향해 가야 하고,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완성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보면‘겨울의빛’이라는 비유가 더욱 깊어집니다.겨울의 빛도 빛이기 때문에 사람은 그것을 보고‘나는잘보고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바로 이것이 위험합니다.전혀 어둡다면 오히려 자신의 상태를 알기 쉽습니다.그러나 많은 진리를 알고 있고 교리적으로 밝다고 생각하면,그 빛에 열이 없다는 사실을 놓치기 쉽습니다.가인 역시 자기 신앙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오히려AC.362에서 보았듯 자기 사랑과 거기서 나온 환상이 자신의 교리를 계속 확증했습니다.그래서 모든 것이 자기 생각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빛은 점점 강해지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실제로는 더 추워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교리적 확신과 영적 생명을 구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확신이 강하다고 해서 반드시 살아 있는 신앙은 아닙니다.어떤 사람은 자기 교리에 매우 확신하면서도 체어리티를 잃을 수 있습니다.반대로 참된 신앙은 진리를 굳게 붙들면서도 그 진리가 사랑과 선을 향하게 합니다.참된 빛은 사람을 따뜻하게 하고 살립니다.그래서 진리가 참으로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라면 결국 체어리티와 결합하려는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가인과 아벨의 관계를 다시 볼 수 있습니다.아벨은 가인을 없애려 하지 않았습니다.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했습니다.문제는 가인이 아벨과 함께 있기를 원한 것이 아니라 아벨 위에 서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신앙이 체어리티의 형제가 아니라 주인이 되려고 했습니다.그래서 둘의 결합이 깨졌습니다.그리고 이 지배욕이 결국 다음 단계에서 아벨을 죽이는 것으로 나아갑니다.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했던 신앙이 마침내 체어리티 자체를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인의 비극은 단순히‘사랑이부족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질서가 뒤집혔다는 데 있습니다.신앙이 목적이 되고,체어리티가 수단이 되었습니다.진리가 선 위에 올라섰습니다.교리가 삶보다 앞섰습니다.그리고 그 질서의 전도가 지속되자,결국 사랑 없는 신앙이 자기 사랑과 결합하여 체어리티를 파괴했습니다.
우리에게도 가장 중요한 점은 이 질서를 바로 세우는 것입니다. ‘내가무엇을믿는가?’는 중요합니다.그러나 그와 함께 반드시‘그믿음은나를어떤사랑으로이끌고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내가진리를알고있는가?’와 함께‘그진리가내안에서선이되고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나는옳은교리를가지고있는가?’와 함께‘그교리가내이웃을더사랑하게하고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이 질문 앞에서 신앙과 체어리티는 경쟁하지 않습니다.오히려 서로 제자리를 찾습니다.체어리티가 신앙에 생명을 주고,신앙은 체어리티에 빛을 줍니다.사랑은 진리를 따뜻하게 하고,진리는 사랑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밝혀 줍니다.불꽃과 열과 빛이 하나를 이루듯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도 하나입니다.인간 안에서 그 둘이 다시 하나가 될 때 신앙도 살아 있고,체어리티도 지혜롭게 됩니다.
결국AC.365가 우리에게 묻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당신의신앙에는빛이있는가?’가 아닙니다. ‘그빛에열이있는가?’입니다.그리고 그 열은 자기 열심이나 감정적 뜨거움이 아니라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곧 체어리티입니다.그 열이 함께할 때 신앙의 빛은 생명을 살립니다.그러나 그 열이 사라지면 아무리 밝은 빛이라도 겨울의 빛이 되어 모든 것을 굳게 하고 죽게 합니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신앙은 체어리티를 지배하는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신앙입니다.진리가 선을 섬기고,아는 것이 사랑하는 것으로 이어지며,믿는 것이 삶이 되는 신앙입니다.그리고 그 모든 생명의 근원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입니다.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이 우리 안에서 체어리티가 되고,그 체어리티 안에서 진리의 빛이 살아날 때,비로소 우리의 신앙은 겨울의 빛이 아니라 생명을 키우는 따뜻한 빛이 됩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4:7)
AC.365
셋째로,‘죄가너를원하나너는죄를다스릴지니라’(Untotheeishisdesire, andthourulestoverhim)고하였는데,이는체어리티가신앙과함께있기를원하지만신앙이체어리티를지배하려하기때문에그렇게할수없음을뜻하며,이것은질서에어긋나는것입니다.신앙이주도권을가지려하는동안에는신앙이아니며,체어리티가주도할때비로소신앙이됩니다.체어리티는신앙의본질적인것(theprincipaloffaith)이기때문인데,이는위에서설명한바와같습니다.체어리티는불꽃에비유할수있습니다.불꽃은열과빛의본질적인것으로,열과빛은불꽃에서나오기때문입니다.그리고분리된상태의신앙은불꽃의열이없는빛에비유할수있습니다.실제로빛은있지만그것은겨울의빛이며,그안에서는모든것이굳어지고죽게됩니다.In the third place it is said, “Untotheeishisdesire,andthourulestoverhim,” by which is signified that charity is desirous to abide with faith, but cannot do so because faith wishes to rule over it, which is contrary to order.So long as faith seeks to have the dominion, it is not faith, and only becomes faith when charity rules; for charity is the principal of faith, as was shown above.Charity may be compared to flame, which is the essential of heat and light, for heat and light are from it; and faith in a state of separation may be compared to light that is without the heat of flame, when indeed there is light, but it is the light of winter in which everything becomes torpid and dies.
해설
AC.365는 창4:7의 마지막 말씀, ‘죄가너를원하나너는죄를다스릴지니라’의 속뜻을 본격적으로 설명하면서, 지금까지 이어져 온 ‘신앙과체어리티’의 관계를 매우 선명하게 결론짓습니다. 앞의 AC.361에서는 이 말씀이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하지만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함께할 수 없다는 뜻이라고 개괄했고, AC.363에서는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65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앙이주도권을가지려하는동안에는신앙이아니며,체어리티가주도할때비로소신앙이된다’고까지 말합니다. 이것은 창4의 가인과 아벨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선언입니다.
먼저 ‘그의소원은네게있으나’에 해당하는 ‘Untotheeishisdesire’를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머물기를 원하는 것으로 풀이합니다. 여기에는 가인과 아벨의 관계에 관한 중요한 사실이 담겨 있습니다. 아벨, 곧 체어리티는 가인, 곧 신앙을 밀어내려 하지 않습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을 없애려 하지도 않고 신앙과 경쟁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본래 신앙과 체어리티는 서로 분리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를 가르치고, 체어리티는 그 진리를 사랑하고 삶으로 행하게 합니다. 둘은 한 생명을 이루어야 합니다.
문제는 가인이 그 관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너는그를다스릴지니라’는 말씀을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는 상태로 읽습니다. 여기서 가인의 근본적인 질서 전도가 드러납니다. 가인은 체어리티 자체가 필요 없다고 처음부터 주장한 것이 아닙니다. 체어리티를 인정하되 그것을 신앙 아래에 두려고 합니다. 신앙을 첫째로 세우고, 사랑과 체어리티를 그 뒤에 따라오는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질서에어긋난다’(contrary to order)고 단언합니다.
이 ‘질서’가 무엇인지는 앞의 글들을 통해 이미 드러났습니다. 사랑에서 체어리티가 나오고, 체어리티 안에서 신앙이 생명을 얻습니다. AC.362에서는 체어리티를 ‘사랑의자손’(the offspring of love)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정상적인 질서는 ‘사랑→체어리티→살아있는신앙’입니다. 신앙이 이 질서에서 벗어나 자기 스스로 첫째가 되려 하면 그 순간 신앙은 자기 생명의 근원에서 떨어져 나갑니다. 바로 이것이 가인의 길입니다.
그래서 AC.365의 ‘신앙이주도권을가지려하는동안에는신앙이아니다’라는 표현은 매우 강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신앙은조금부족한신앙이다’라거나 ‘불완전한신앙이다’라고 하지 않습니다. ‘신앙이아니다’(it is not faith)라고 합니다. 그리고 ‘체어리티가주도할때비로소신앙이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의 정체성이 단순히 어떤 교리를 참이라고 인정하는 데 있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체어리티와 결합하여 체어리티를 섬기는 진리라야 비로소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여기서 ‘체어리티는신앙의본질적인것(theprincipaloffaith)’이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principal’을 단순히 ‘중요한요소’ 정도로 이해하면 약합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에 부가되는 여러 덕목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하나라는 뜻이 아니라, 신앙을 신앙답게 하는 중심적이고 본질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체어리티를 제거하고도 신앙 자체는 그대로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인의 오류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이름은 신앙일 수 있어도 그 안에 신앙의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추상적인 설명을 스베덴보리는 아주 아름다운 자연의 비유로 풀어냅니다. ‘체어리티는불꽃에비유할수있습니다.’ 불꽃에서 열과 빛이 나옵니다. 여기서 불꽃은 근원이며, 열과 빛은 그 불꽃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불꽃에서 열을 떼어내고 빛만 남긴다면 겉으로는 여전히 밝아 보일 수 있지만, 생명을 살리는 따뜻함은 사라집니다.
이 비유에서 체어리티와 신앙의 관계가 아주 선명해집니다. 체어리티는 불꽃과 같고, 신앙은 그 불꽃에서 나오는 빛과 같습니다. 참된 신앙에는 빛이 있습니다. 진리를 보고 이해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 빛이 살아 있는 빛이 되려면 불꽃의 열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곧 진리를 아는 것과 사랑하는 것이 함께 있어야 하고, 진리를 이해하는 것과 그 진리에 따라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반대로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은 ‘불꽃의열이없는빛’과 같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런 상태에도 ‘실제로빛은있다’고 인정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분리된 신앙이라고 해서 아무런 진리도 없고,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을 많이 알 수도 있고, 교리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도 있으며, 매우 논리적인 신학 체계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빛은 있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빛에 열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겨울의빛’(the light of winter)이라고 부릅니다. 이 표현은 가인의 신앙을 설명하는 데 대단히 적절합니다. 겨울에도 태양은 빛납니다. 사물을 볼 수도 있고 길을 분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빛에는 생명을 일으키는 따뜻함이 없습니다. 땅은 얼어 있고 나무는 굳어 있으며 씨앗은 싹트지 않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안에서는모든것이굳어지고죽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앞의 AC.348-349와도 놀랍도록 정확하게 연결됩니다. 체어리티 없는 신앙에서 나온 행위는 ‘죽은행위’였고, 내적인 것이 없는 외적 예배는 ‘죽은예배’였습니다. 이제 AC.365에서는 왜 그것들이 죽을 수밖에 없는지를 ‘겨울의빛’으로 보여 줍니다. 빛은 있는데 열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지식과 교리는 있는데 체어리티의 사랑이 없습니다. 그러니 행위에도 생명이 없고 예배에도 생명이 없습니다.
이 비유를 조금 더 깊이 보면 ‘빛을없애야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도 분명해집니다. 겨울의 문제는 빛이 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열이 없는 데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스베덴보리는 신앙이나 진리, 교리를 낮추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들이 본래의 생명을 되찾기를 원합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하면 겨울의 빛은 생명을 살리는 빛이 됩니다. 진리가 사랑과 결합하고, 이해가 의지와 결합하며, 아는 것이 삶과 결합될 때 신앙은 비로소 본래의 기능을 합니다.
따라서 ‘체어리티가주도한다’는 말도 ‘사랑만있으면진리는중요하지않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불꽃에는 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빛도 있습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진리를 밀어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리와 함께 있습니다. 선은 진리를 통하여 어떻게 선을 행해야 하는지를 알고, 진리는 선 안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문제는 둘 가운데 하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을 올바른 질서 안에서 결합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체어리티가신앙과함께있기를원한다’는 말씀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AC.362의 이단에 관한 설명도 다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은 신앙이라는 참된 것을 붙잡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하나의 참된 것을 질서 밖으로 끌어내어 첫째 자리에 놓자, 그 진리 자체가 생명의 근원에서 분리되었습니다. 빛을 붙잡았지만, 불꽃에서 떼어낸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사랑과 거기서 나온 환상이 그 빛을 계속 확증했습니다. 그래서 점점 더 밝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점점 더 추운 겨울의 빛이 되어 갔습니다.
이 점은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을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는 신앙의 ‘빛’을 많이 가질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교리를 공부하고, AC를 읽고, 상응과 속뜻을 이해하고, 신학적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상당히 정확하게 분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빛 때문에 이웃을 더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을 판단하고 낮추며, 자기 지식을 자랑하고, 자기와 다른 사람을 미워하게 된다면 그 빛에는 열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밝아 보여도 그것은 ‘겨울의빛’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체어리티가 주도한다는 것은 진리를 적게 알고 대충 믿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깊이 진리를 배우되 ‘이진리가나를어떻게주님사랑과이웃사랑으로이끄는가?’를 끊임없이 묻는 것입니다. AC를 읽는 목적도 AC에 관한 지식을 많이 축적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 진리를 통하여 주님을 더 사랑하고, 이웃을 더 지혜롭게 사랑하며, 실제 삶에서 더 선한 쓰임을 행하게 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때 진리의 빛에는 체어리티의 열이 함께 있게 됩니다.
이제 AC.361-365전체를 돌아보면 흐름이 아주 선명해졌습니다.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가인은 체어리티를 자기 아래에 두려 합니다.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고, 자기 사랑으로 그것을 확증합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에게 체어리티가 주도하는 본래의 질서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체어리티가 없으면 악이 마음의 문 앞에 있게 되지만,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그 악을 물리칩니다. 그리고 이제 AC.365에서는 체어리티가 주도할 때에야 신앙이 참으로 신앙이 된다고 결론짓습니다.
그래서 가인과 아벨의 문제는 결국 ‘신앙이냐체어리티냐’의 양자택일이 아닙니다. ‘신앙과체어리티가어떤질서로결합되어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아벨은 가인을 없애려 하지 않습니다.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가인이 아벨 위에 서려고 할 때 둘의 결합은 깨집니다. 그리고 그 결합이 깨지면 신앙은 불꽃에서 떨어져 나온 겨울의 빛처럼 되어, 결국 그 안의 모든 것을 굳게 하고 죽게 합니다.
그러므로 AC.365의 겨울빛 비유는 창4의 가인 이야기를 아주 간결하게 압축합니다. ‘빛이있는가?’만 물어서는 안 됩니다. ‘그빛에열이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나는진리를알고있는가?’만이 아니라 ‘그진리가내안에서주님사랑과이웃사랑의따뜻함으로살아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체어리티의 불꽃에서 나오는 빛이라야 살아 있는 신앙의 빛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창4:2)
AC.345
‘농사하는자’(tilleroftheground)가체어리티가없는사람을나타낸다는것,곧사랑에서분리된신앙안에아무리깊이있다하더라도체어리티가없는사람을나타내며,그런신앙은신앙이아니라는사실은뒤에이어지는내용에서분명합니다.여호와께서그의제물을받지않으셨고,그가자기형제를죽였기때문입니다.곧그는‘아벨’(Abel)이의미하는체어리티를소멸시켰습니다.육체적이고세상적인것들을바라보는사람들을가리켜‘땅을경작하는사람들’(tilltheground)이라고했다는것은창3:19,23에서분명합니다.거기에는사람이‘에덴동산에서내보내져땅을경작하게되었다’(castoutofthegardenofEdentotilltheground)고기록되어있습니다. That a “tilleroftheground” is one who is devoid of charity, however much he may be in faith separated from love, which is no faith, is evident from what follows: that Jehovah had no respect to his offering, and that he slew his brother, that is, destroyed charity, signified by “Abel.”Those were said to “tilltheground” who look to bodily and earthly things, as is evident from what is said in Gen. 3:19, 23, where we read that the man was “castoutofthegardenofEdentotilltheground.”
AC.345는 창4:2의 마지막 표현, 곧 ‘가인은농사하는자였더라’의 속뜻을 설명하면서 AC.341부터 이어진 가인과 아벨의 대비를 마무리합니다. 아벨은 ‘양치는자’이고 가인은 ‘농사하는자’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자연적인 직업의 우열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AC.343에서 양 치는 자는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고 사람을 그 선으로 인도하는 사람을 나타냈고, AC.344에서는 신앙에 관한 모든 지식과 교리의 목적이 체어리티라고 했습니다. 이제 AC.345는 그 반대편에 있는 가인을 보여 줍니다. 그는 신앙에 속한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체어리티가 없는 상태이며, 바로 그런 상태를 여기서는 ‘농사하는자’라고 합니다.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말씀에서 ‘농사하는자’나 ‘땅을경작하는자’가 언제나 악한 의미를 가진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자연적인 농사나 노동 자체가 부정적인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말씀에서 ‘땅’은 문맥에 따라 좋은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따라서 ‘아벨은목축을했으므로선하고가인은농사를지었으므로악하다’는 식으로 읽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려는 속뜻과 전혀 다릅니다. AC.345에서 ‘농사하는자’가 부정적인 의미를 갖는 것은 가인이 의미하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상태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상응과 표상의 의미는 단어 하나에 언제나 똑같이 붙어 있는 고정된 암호가 아니라 말씀의 문맥과 그 안에서 나타나는 영적 상태에 따라 읽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을 앞으로 일어날 두 사건을 통하여 확인합니다. 하나는 여호와께서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인이 자기 형제 아벨을 죽인 것입니다. 특히 두 번째 사건은 결정적입니다. 아벨이 체어리티를 의미하므로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것은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가인은 신앙 자체가 전혀 없는 사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사랑에서분리된신앙안에아무리깊이있다하더라도’라고 말합니다. 외적으로는 신앙이 매우 강해 보일 수도 있고, 신앙에 관한 지식과 교리가 풍부하며 그것을 열심히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있다면 스베덴보리는 다시 한번 단호하게 ‘그런신앙은신앙이아니다’라고 합니다. AC.341에서 나온 선언이 AC.345에서 그대로 반복되는 것은 이것이 가인의 정체를 이해하는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344와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신앙에 관한 기억 지식과 인식 지식과 교리가 아무리 많아도 그것이 사람을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만들지 못하고 체어리티라는 목적에 이르지 못한다면 ‘텅빈아무것도아닌것’이라고 했습니다. AC.345의 가인은 바로 그 위험이 실제로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문제는 신앙에 속한 지식과 교리를 가지고 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체어리티를 향하지 않고 사랑에서 분리된 채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삼는 데 있습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섬기고 선으로 나아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완결된 것으로 여겨질 때, 신앙은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AC.345가 이 지점에서 창3:19, 23으로 돌아가는 것도 중요합니다. 창3에는 사람이 에덴동산에서 내보내져 ‘땅을경작하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AC.345에서 ‘땅을경작하는사람들’을 ‘육체적이고세상적인것들을바라보는사람들’과 연결합니다. 따라서 창4의 가인이 ‘농사하는자’라는 말은 앞 장에서 나타난 이 상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에덴으로 표상된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에서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 안에서 신앙에 속한 것들을 퍼셉션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그 질서에서 멀어지면서 시선은 점차 더 낮고 외적인 것에 향하게 됩니다. AC.345는 그러한 상태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사이의 관계를 ‘땅을경작함’이라는 같은 표현을 통하여 연결해 보여 줍니다.
여기서 ‘육체적이고세상적인것들을바라본다’는 말을 자연계의 삶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읽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몸을 돌보고, 일하고, 돈을 관리하고, 가족을 부양하며, 자연계에서 맡겨진 수많은 쓰임을 수행해야 합니다. 자연적인 것들은 그 자체로 악하지 않으며 오히려 영적인 목적을 실현하는 중요한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스베덴보리가 말하듯 무엇을 ‘바라보는가’입니다. 곧 무엇을 중심과 목적으로 삼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자연적인 것과 세상적인 것이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과 쓰임을 섬긴다면 그것들은 질서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과 종교까지 자기 명예와 이익, 우월감과 세상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하게 된다면 질서는 뒤집힙니다. 신앙에 속한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신앙의 시선과 목적이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에 머물 수 있다는 것이 ‘농사하는자’ 가인이 보여 주는 위험입니다.
이렇게 보면 ‘양치는자’ 아벨과 ‘농사하는자’ 가인의 대비도 더욱 분명해집니다. 아벨은 체어리티이고, 양 치는 자는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AC.343에서 보았듯 참된 목자는 양 떼를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하고, 체어리티는 모으고 결합합니다. 반면 AC.345의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붙들면서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을 바라보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한쪽은 신앙이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선과 쓰임으로 나아가는 방향이고, 다른 한쪽은 신앙이 사랑에서 떨어져 점점 자기 자신에게 머무는 방향입니다. 이 차이는 처음에는 아주 작아 보일 수 있습니다. 신앙과 사랑을 서로 구별하여 생각하는 것처럼 시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계속 살펴보았듯 문제는 구별 자체가 아니라 분리입니다. 구별된 신앙이 사랑과 다시 결합되지 않고 독립적인 것이 되면, 마침내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고 그 체어리티를 밀어내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AC.345는 앞으로 일어날 아벨의 죽음을 이미 해석하고 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은 갑자기 일어난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AC.338부터 설명해 온 분리의 결과입니다. 본래 사랑 안에서 살아 있던 신앙에 속한 것을 따로 꺼내어 ‘그자체로하나의것’으로 인정하고, 마음에 새겨져 있던 것을 단지 지식으로 알게 되며, 신앙을 체어리티라는 목적에서 분리한 결과가 마침내 ‘형제를죽이는’ 데까지 이릅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을 인간의 모든 교리적 구별에 적용하여 ‘교리를세우는것자체가결국체어리티를죽인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후대의 인간에게는 말씀의 진리를 배우고 교리로 이해하며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 진리가 주님께서 주시는 체어리티와 결합하느냐, 아니면 사랑에서 분리되어 자기 완결적인 신앙으로 남느냐에 있습니다.
결국 AC.345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나는신앙을가지고있는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내신앙은무엇을바라보고있으며어디를향하고있는가?’입니다. 말씀과 교리를 많이 알고 신앙을 강하게 고백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진리가 우리로 하여금 자기 안의 악을 죄로 여겨 피하게 하고, 주님을 더 사랑하게 하며,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고 실제 쓰임을 행하게 한다면 신앙은 체어리티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자기 우월성을 확인하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거나 세상적인 목적을 이루는 수단이 되고, 체어리티를 부차적인 것으로 밀어낸다면 우리는 ‘농사하는자’ 가인의 모습을 우리 자신 안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가인의 비극은 신앙을 버린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앙을 붙들면서 그 신앙의 생명과 목적인 사랑과 체어리티를 잃은 데 있습니다. ‘사랑에서분리된신앙은신앙이아니다.’ 이것이 AC.341에서 시작하여 AC.345에서 다시 한번 확정되는 창4:2의 결론입니다.
이것이신앙이지향하는모든것의목적입니다.이목적에이르지못한다면,모든지식이나교리가대체무엇이겠습니까?그저텅빈아무것도아닌것에불과합니다. This is the end of all it has in view, and if this be not attained, what is all knowledge or doctrine but a mere empty nothing?
해설
AC.344는 짧지만 지금까지 이어진 가인과 아벨의 문제를 매우 날카로운 질문 하나로 압축합니다. ‘신앙이무슨소용이있겠습니까?’라는 질문입니다. 이것은 신앙을 낮추거나 불필요한 것으로 만드는 질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이 무엇을 위하여 주어졌는지를 묻는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에 관한 기억 지식(scientia), 인식 지식(cognitio), 그리고 신앙의 교리(doctrine of faith)를 차례로 언급한 뒤, 그 모든 것의 목적은 사람이 ‘신앙이가르치는대로살아가는사람’이 되는 데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문제는 진리를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에만 있지 않습니다. 그 진리가 사람 안에서 무엇을 이루고 있으며, 그 진리를 아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여기서 기억 지식과 인식 지식, 그리고 교리를 불필요하거나 낮은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말씀의 내용을 배우고 기억해야 하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고 인식해야 하고, 서로 관련된 진리들을 질서 있게 연결하여 교리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진리가 없으면 무엇이 참된 선인지도 올바르게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AC.344는 바로 그 모든 것에 ‘무엇을위해서인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지식과 교리는 그 자체로 종착점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사람이 진리에 따라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 주어집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의 목적은 사람이 단지 ‘무엇을믿는사람’이 되는 데 있지 않고, 그가 믿는 진리가 가르치는 대로 ‘그러한사람이되는’ 데 있습니다. 진리를 아는 것과 진리가 자기 삶의 성질이 되는 것은 다릅니다. 주님께서 진리를 주시는 것은 우리의 머릿속에 정확한 교리 체계만을 만들어 놓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진리를 통하여 우리의 의지와 사랑과 삶을 거듭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신앙이가르치는가장중요한것은체어리티’라고 합니다. 이것은 체어리티가 신앙이 가르치는 여러 항목 가운데 조금 더 중요한 한 항목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이 가르치는 진리들이 궁극적으로 사람을 이끌어 가야 할 방향과 목적이 체어리티라는 뜻입니다. 바로 앞 AC.342에서 르우벤은 신앙을, 시므온은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을, 레위는 체어리티를 의미한다고 한 것도 같은 질서를 보여 주었습니다. 신앙은 자신에게 머물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삶으로 나아가야 하며, 주님께서는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이루십니다. 그러나 이것을 인간이 먼저 신앙을 만들고, 그다음 행위를 쌓아 마침내 자기 힘으로 체어리티를 만들어 낸다는 기계적인 과정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도 체어리티도 그 생명과 근원은 주님께 있습니다. 인간은 진리를 배우고 그것에 따라 살려고 하지만, 그 진리를 선과 결합시키고 살아 있는 체어리티가 되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막12:28-35와 마22:34-39가 여기 인용되는 이유도 바로 이것입니다. 두 본문에서 주님께서는 모든 계명의 중심을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두십니다. 특히 ‘네마음을다하고목숨을다하고뜻을다하여주너의하나님을사랑하라’는 첫째 계명과 ‘네이웃을네자신같이사랑하라’는 둘째 계명은 신앙이 궁극적으로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가 ‘신앙이가르치는가장중요한것은체어리티’라고 말할 때, 그는 단순히 교리보다 윤리적 행동이 중요하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과 계명과 주님에 관한 모든 참된 진리는 결국 사람이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들어가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막12장에서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낫다고까지 말합니다. 따라서 외적인 종교 행위나 신앙고백 역시 그 안에 사랑과 체어리티의 생명이 없으면 자기 목적에 이르지 못합니다. 이 두 복음서 인용은 바로 이 한 가지 사실을 확증하기 위해 함께 제시된 것이므로, 각각 별도의 심화로 확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체어리티가목적이므로신앙은중요하지않다’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진리 없는 막연한 선의나 인간적인 호감이 아닙니다. 무엇이 실제로 이웃에게 선한 것인지, 무엇이 주님의 질서에 맞는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진리가 필요합니다. 따라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는 어느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하나를 버리는 관계가 아닙니다. 진리는 선을 향하고, 신앙은 체어리티를 향하며, 선은 진리와 결합하고 체어리티는 신앙에 생명을 줍니다. 목적이 수단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수단의 참된 가치를 결정합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향할 때 신앙은 비로소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에 맞게 쓰이며, 체어리티 역시 진리를 통하여 바른 방향과 형태를 얻습니다. 그러므로 AC.344의 질문은 ‘신앙인가,체어리티인가?’가 아니라 ‘신앙은무엇을위해존재하는가?’입니다.
이것을 가인과 아벨의 관계에 놓으면 AC.344가 이 자리에서 등장하는 이유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가인의 근본적인 문제는 신앙을 없애거나 부정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에 속한 것들을 따로 구별하고 교리로 정리하여 그것을 ‘그자체로하나의것’으로 인정하기 시작했습니다. AC.340에서는 그 결과 이전에 마음에 새겨져 있던 것이 단지 지식으로 아는 것이 되어 갔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44는 그 분리가 왜 치명적인지를 목적의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는 것은 단순히 두 요소가 서로 떨어지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신앙이 자기 자신의 목적을 잃는 것입니다. 아벨은 체어리티이며, 가인이 아벨에게서 분리된다는 것은 신앙이 자신이 향해야 할 목적에서 분리된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무엇인가 한 부분이 조금 부족한 신앙이 아니라 자기 생명과 목적을 잃은 신앙이 됩니다. 바로 앞 AC.341에서 스베덴보리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두고 ‘그런신앙은신앙이아니다’라고 단언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AC.344의 마지막 문장은 매우 강합니다. 체어리티라는 목적에 이르지 못한다면 모든 지식과 교리는 ‘텅빈아무것도아닌것’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지식과 교리 그 자체를 ‘아무것도아닌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목적과 생명에서 분리된 지식과 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방대하고 정교한 신학 체계를 가지고 있어도 그것이 사람을 주님께로 돌이키고, 자기 안의 악을 죄로 여겨 피하게 하며,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고 실제 선을 행하게 하지 못한다면 그 지식은 아직 영적인 목적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반대로 진리가 사람 안에서 악을 드러내고, 회개하게 하고, 삶을 바꾸며, 이웃을 향한 선한 쓰임으로 나아가게 한다면 그 진리는 더 이상 머리에만 있는 지식이 아니라 삶 속에서 열매를 맺는 살아 있는 신앙이 되어 갑니다.
이 점은 AC를 공부하는 우리에게 특히 직접적인 질문이 됩니다. 우리는 신앙, 체어리티, 퍼셉션, 상응, proprium, 리메인스, 속 사람과 겉 사람,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 같은 수많은 아르카나를 배우고 있습니다. 이러한 지식은 귀하며,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AC.344는 바로 그런 공부를 하는 사람에게 ‘그래서당신은어떤사람이되어가고있는가?’라고 묻습니다. 아르카나를 더 많이 알수록 다른 사람의 오류를 더 잘 찾아내는 사람이 되는 데 그치고 있는지, 아니면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더 잘 발견하고 주님 앞에서 더 겸손해지며 이웃의 참된 선을 더 구하는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아르카나에 대한 지식마저 자기 우월성을 세우는 수단이 된다면, 우리는 가인의 문제를 공부하면서 동시에 가인의 길을 걸을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배운 진리가 우리 자신을 살피게 하고, 악을 피하게 하며,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와 쓰임으로 나아가게 한다면 그 지식은 주님께서 거듭남을 위하여 사용하시는 귀한 수단이 됩니다.
결국 AC.344의 핵심은 단순히 ‘지식보다사랑이중요하다’는 말보다 훨씬 정교합니다. ‘진리는삶을위해존재하고,신앙은체어리티를향하여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기억 지식과 인식 지식과 신앙의 교리는 모두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사람 안에서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삶의 중심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 곧 체어리티입니다. 가인의 오류는 신앙을 귀하게 여긴 데 있지 않고 신앙을 그 목적에서 분리하여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삼게 한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AC.344가 우리에게 묻는 가장 중요한 질문도 ‘나는얼마나정확한신앙을알고있는가?’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내가알고믿는이진리는주님께서나를어떤사람으로만들어가시는데쓰이고있는가?’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향하고, 진리가 삶이 되며, 그 모든 것 안에서 주님께서 사람을 새롭게 하실 때 비로소 신앙은 자신의 목적에 이르고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And she added to bear his brother Abel; and Abel was a shepherd of the flock, and Cain was a tiller of the ground.(창4:2)
AC.341
교회의두번째자손은체어리티이며,‘아벨’(Abel)과‘형제’(brother)가이를의미합니다.‘양치는자’(shepherdoftheflock)는체어리티의선을행하는사람을나타내고,‘농사하는자’(tilleroftheground)는체어리티가없는사람을나타냅니다.비록그가사랑에서분리된신앙안에아무리깊이있다하더라도그러하며,그런신앙은신앙이아닙니다. The second offspring of the church is charity, signified by “Abel” and “brother”; a “shepherdoftheflock” denotes one who exercises the good of charity; and a “tilleroftheground,” is one who is devoid of charity, however much he may be in faith separated from love, which is no faith.
해설
AC.341은 매우 짧지만 가인과 아벨을 이해하는 핵심 구조를 한 문장 안에 압축하고 있습니다. 바로 앞 AC.338-340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첫 번째 자손을 ‘신앙’이라고 하고 그것을 ‘가인’으로 나타냈습니다. 이제 창4:2로 넘어오면서 교회의 두 번째 자손은 ‘체어리티’이며, 그것을 ‘아벨’과 ‘형제’가 의미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속뜻에서 처음부터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특히 눈여겨볼 것은 스베덴보리가 체어리티를 ‘아벨’뿐 아니라 ‘형제’도 의미한다고 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가인이 ‘그의아우아벨’을 죽이는 사건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본래 서로 남남인 두 가지가 아니라 함께 있어야 하는 것들이며, 체어리티는 신앙의 ‘형제’입니다. 따라서 가인이 자기 형제 아벨을 죽인다는 것은 결국 신앙이 자신과 결합되어 있어야 할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것을 의미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첫번째자손은신앙이고두번째자손은체어리티’라는 말을 시간적 또는 영적 우선순위로 곧바로 바꾸어 읽어서는 안 됩니다. 마치 태고교회에서 먼저 신앙이 생긴 뒤 나중에 체어리티가 생겼다는 뜻이 아닙니다. AC.337에서 이미 살펴보았듯 태고교회의 본래 질서는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먼저이고, 그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신앙에 속한 모든 것에 대한 퍼셉션을 받는 질서였습니다. AC.338의 ‘첫번째자손’과 AC.341의 ‘두번째자손’은 그 본래의 천적 질서를 뒤집어 신앙이 본질적으로 체어리티보다 먼저라는 교리를 세우기 위한 표현이 아닙니다. AC.339에서 설명한 것처럼 교회에 속한 것들이 서로 어떻게 파생되고 관계를 이루는지를 출생과 계보의 언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도 태고교회의 고유한 퍼셉션의 질서와 후대 영적 인간의 거듭남의 질서를 뒤섞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벨은 ‘양치는자’였는데, 스베덴보리는 이를 ‘체어리티의선을행하는사람’이라고 풀이합니다. 여기에는 체어리티의 매우 중요한 성격이 담겨 있습니다. 체어리티는 단순히 마음속에서 이웃에게 좋은 감정을 품는 데 머물지 않고 실제로 선을 행하는 데서 나타납니다. 그렇다고 체어리티를 단순한 외적 선행과 동일시해서도 안 됩니다. 어떤 행동이 겉으로 선해 보인다는 것만으로 그것이 곧 체어리티인 것은 아닙니다. 체어리티의 선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받아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고, 자신에게 맡겨진 자리에서 실제 쓰임을 행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양치는자’라는 표현에서 AC.341이 직접 강조하는 것은 양이나 목축에 관한 세부 상응보다 ‘체어리티의선을행한다’는 사실입니다. 체어리티는 살아 움직이고 실제 삶으로 나타나는 선입니다.
반면 가인은 ‘농사하는자’인데, 스베덴보리는 이를 매우 강하게 ‘체어리티가없는사람’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을 농사 자체가 부정적인 것을 의미한다고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에서 ‘땅’은 문맥에 따라 좋은 의미로도 사용되며, 이후 AC에서는 그 의미가 훨씬 세밀하게 설명됩니다. AC.341에서 중요한 것은 ‘농사하는자’라는 표현이 가인이라는 상태와 결합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가인은 앞에서 보았듯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따로 구별하여 ‘그자체로하나의것’으로 인정하기 시작한 교리적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제 그 신앙이 체어리티 없이도 존재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안에 아무리 깊이 들어가 있더라도 체어리티가 없다면 결국 체어리티 없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AC.341의 가장 중요한 문장이 나옵니다. ‘그런신앙은신앙이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을 단순히 ‘불완전한신앙’이나 ‘조금부족한신앙’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 신앙의 본질적인 생명을 잃기 때문에 그것은 더 이상 참된 의미에서 신앙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가인의 문제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AC.340에서는 본래 마음에 새겨져 있던 신앙에 속한 것을 따로 구별하여 교리로 정리하고, 그것을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상태를 보았습니다. 그때에는 아직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결과를 가져올지 쉽게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341은 그 분리의 본질을 이미 드러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고 여기는 순간, 사람이 붙들고 있는 것은 이름으로는 신앙일 수 있어도 생명을 가진 참된 신앙은 아닙니다.
이것은 교리나 신앙고백 자체가 불필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후대의 영적 인간에게는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앞의 AC.337에서도 오늘날에는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서며,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신앙이먼저배워지는가?’가 아니라 ‘그신앙이어디를향하고있는가?’입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향하고, 체어리티와 결합하며, 마침내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어야 합니다. 반대로 체어리티 역시 진리를 불필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주님의 진리를 통하여 무엇이 실제로 이웃에게 선한 것인지를 배우고 분별합니다. 따라서 신앙과 체어리티를 서로 경쟁시키면서 ‘신앙이중요한가,사랑이중요한가?’라고 묻는 것 자체가 이 둘의 본래 관계를 놓치게 할 수 있습니다. 둘은 ‘형제’이며, 진리는 선을 섬기고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 있어야 합니다.
이를테면 서로 사랑하는 부부에게 약속과 원칙은 필요할 수 있습니다. 약속을 지키고 서로에 대한 책임을 분명히 하는 것은 사랑을 보호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사랑 자체는 사라지고 ‘나는정해진규칙을모두지켔으므로좋은배우자다’라는주장만 남는다면, 규칙의 외형은 남아 있어도 관계의 생명은 크게 훼손된 것입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도 이와 비슷합니다. 교리를 알고 그것을 참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 신앙이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서 분리된 채 자기 완결적인 것으로 남는다면 교리적 형식은 유지되어도 신앙의 생명은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AC.341은 ‘체어리티가없는신앙도신앙이기는하지만조금부족하다’고 하지 않고 단호하게 ‘그런신앙은신앙이아니다’라고합니다.
이 기준은 다른 사람의 신앙을 판정하기 위한 잣대보다 먼저 우리 자신의 신앙을 살피는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을 많이 알고, 교리를 정확하게 설명하며, 신학적인 오류를 잘 찾아내는 것 자체는 귀한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참된 신앙인지는 그 진리가 우리 안에서 어떤 생명을 이루고 있는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진리를 더 알수록 주님 앞에서 더 겸손해지고, 자기 안의 악을 더 분명히 보며 그것을 죄로 여겨 피하고,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며 실제 쓰임을 행하게 된다면 신앙은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살아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진리를 많이 알면서도 이웃의 선에는 무관심하고, 그 지식을 자기 우월성과 정당성을 세우는 데 사용한다면 ‘나는무엇을믿는가?’뿐 아니라 ‘내신앙은지금자기형제인체어리티와함께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AC.341은 앞으로 펼쳐질 가인과 아벨의 비극을 이미 한 문장으로 예고합니다. ‘아벨’은 체어리티이고 ‘형제’ 역시 체어리티이며, ‘양치는자’는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반면 가인은 체어리티 없는 신앙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후 가인이 아벨을 죽인다는 것은 단지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우위를 차지하는 정도가 아니라, 분리된 신앙이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때 죽는 것은 아벨만이 아닙니다.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신앙 역시 자기 생명을 잃습니다. ‘사랑에서분리된신앙은신앙이아니다.’ 이 짧고 단호한 선언이 AC.341의 핵심이며, 앞으로 이어지는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읽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AC.338을 읽다 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질문이 생깁니다. 앞의 개요에서 스베덴보리는 가인을 분명히 ‘사랑에서분리된신앙’이라고 설명했는데, 여기서는 태고교회의 ‘첫번째자손,곧처음난것’을 단순히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가인은 신앙 자체를 의미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먼저 태고교회에도 신앙은 있었습니다. 다만 그들의 신앙은 오늘날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어떤 교리를 먼저 배우고 그것을 참이라고 인정하는 방식의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 안에서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주님으로부터 퍼셉션으로 알았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신앙은 사랑과 나란히 서 있는 별개의 무엇이 아니었습니다. 사랑 안에서 살아 있었고, 사랑으로부터 신앙에 속한 것을 알았습니다. AC.337에서 스베덴보리가 태고교회 사람들은 사랑에 속한 신앙 외에는 다른 신앙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설명한 것도 바로 이 뜻입니다.
그런데 AC.338에서 결정적인 변화가 나타납니다.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에게서 신앙이 ‘그자체로하나의것’으로 인식되고 인정되었다고 합니다. 문제는 그들이 갑자기 신앙을 버렸거나 처음부터 거짓된 신앙을 만들어 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본래 사랑 안에서 살아 있던 신앙을 사랑과 별개로 성립할 수 있는 하나의 것으로 보기 시작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AC.338에서 ‘가인=신앙’이라고 한 말과 앞에서 ‘가인=사랑에서분리된신앙’이라고 한 말은 모순되지 않습니다. 가인은 참된 것인 신앙을 붙들고 있지만, 그 신앙을 본래의 사랑의 질서에서 떼어 독립적인 것으로 세우는 교리적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점에서 ‘가인이처음에는완전히정상적인신앙이었다가나중에분리된신앙으로변했다’고 너무 선명하게 시간적 단계를 나누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AC.338의 바로 이 시점에서 이미 신앙을 ‘그자체로하나의것’으로 인정하는 분리의 성격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분리의 결과가 처음부터 모두 완성되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창4의 뒤를 따라가면 신앙이 점차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고, 체어리티가 신앙의 질을 드러낸다는 질서를 거부하며, 결국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데까지 진행됩니다. 따라서 AC.338은 분리의 원리가 처음 드러나는 지점을 보여 주고, 후속 본문은 그 원리가 어디까지 발전하는지를 보여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이 ‘구별’과 ‘분리’의 차이입니다. 신앙과 사랑을 구별하여 설명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는 오히려 그렇게 해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신앙이고 무엇이 체어리티인지, 진리와 선이 어떻게 관계하는지 분명히 배우는 것은 필요합니다. 문제는 구별된 신앙을 사랑 없이도 참된 신앙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여기는 데 있습니다. 신앙을 사랑과 구별하는 것과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전자는 이해를 위한 구별이지만 후자는 생명의 질서를 깨뜨리는 분리입니다.
부부의 관계를 생각하면 이 차이를 조금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서로 깊이 사랑하는 부부에게 배려와 존중과 신실함의 원칙은 사랑 안에서 살아 있습니다. 필요하다면 그 원칙을 글로 정리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 자체가 사랑을 파괴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서로사랑하는지는중요하지않고이원칙들만정확히지키면좋은부부다’라고 생각한다면 원칙은 사랑을 섬기는 자리에서 벗어나 사랑을 대신하기 시작합니다. 원칙 자체가 거짓이어서가 아니라, 참된 것이 본래의 관계에서 분리된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이중요하다’, ‘교리는정확해야한다’, ‘진리와거짓을분별해야한다’는 말 자체는 모두 옳습니다. 그러나 그 신앙과 교리와 진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서 분리되어 자기 자신만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하기 시작하면 가인의 질서가 나타납니다.
이 때문에 가인의 문제는 매우 미묘합니다. 처음부터 노골적인 거짓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참된 것 하나를 전체의 질서에서 떼어 내어 그 자체로 높이는 데서 시작합니다. 이단 역시 반드시 처음부터 모든 진리를 부정하는 방식으로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것 하나를 지나치게 높이고 다른 선과 진리와의 살아 있는 결합을 끊을 때에도 왜곡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337의 ‘오늘날에는사정이전혀다르다’는 설명도 함께 기억해야 합니다. 후대 인간에게서는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서며, 주님께서는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십니다. 따라서 오늘날 교리를 배우고 신앙을 분명히 고백하는 것 자체를 가인의 상태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이먼저나타난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향하지 않고 사랑에서 분리된 채 독립적인 최종 목적이 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진리를 배우는 것은 필요하지만, 그 진리는 주님께서 우리 안에 선과 체어리티를 이루시는 수단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보면 AC.338의 핵심은 ‘가인은신앙이다’와 ‘가인은분리된신앙이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가인은 신앙을 의미하지만, 바로 그 신앙을 사랑 안에 있는 것으로 보지 않고 그 자체로 독립된 것으로 인정한 상태를 표상합니다. 그리고 창4의 뒤는 그 분리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신앙을 독립된 것으로 바라보았고, 나중에는 그것을 체어리티보다 높였으며,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AC.338은 분리가 처음 드러나는 아주 중요한 지점입니다. 신앙 자체는 참된 것이지만, 그것이 어디에 놓여 있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사랑과 체어리티 안에 살아 있는 신앙은 살아 있는 신앙이지만, 사랑에서 떨어져 자기 자신으로 충분하다고 여기는 신앙은 가인의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합니다.
이 원리는 오늘 우리에게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다만 다른 사람의 신앙을 쉽게 ‘가인’이라고 판정하기보다 먼저 자신의 신앙을 살피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내가 진리를 더 알수록 주님 앞에서 더 겸손해지고, 악을 더 잘 보고 피하며,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한다면 그 진리는 체어리티와 결합되고 있습니다. 반대로 진리를 더 알수록 자기 옳음을 증명하고 다른 사람을 낮추며, 사랑보다 교리적 승리를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된다면 우리는 신앙이 그 생명의 자리에서 분리되기 시작하지 않았는지 살펴야 합니다. 가인의 이야기는 남을 정죄하기 위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안에서 신앙과 사랑이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지를 살피게 하는 말씀입니다.
가인이 신앙을 사랑에서‘분리’했다는 말을 처음 들으면 이것이 왜 그렇게 심각한 문제였는지 쉽게 와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신앙을 중요하게 여기고,무엇을 믿는지 분명히 하는 것이 왜 잘못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입니다.이것을 부부관계에 비유하면AC.337의 차이를 조금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서로 깊이 사랑하는 부부가 있다고 해보겠습니다.이들은 상대방을 존중하고 어려울 때 서로 돕고,함부로 상처 주는 말을 하지 않으며,상대방의 기쁨을 자기 기쁨처럼 여깁니다.그렇다고 매일‘부부간준수사항20가지’를 펼쳐 놓고 하나씩 확인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무엇을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지가 이미 서로를 향한 사랑 안에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규칙이나 원칙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오히려 그 원칙들이 사랑 안에 살아 있습니다.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존중하고,사랑하기 때문에 신실하며,사랑하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해가 되는 일을 피합니다.규칙의 내용이 사랑 밖에서 억지로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자연스럽게 살아 있는 것입니다.
태고교회의 사랑과 신앙의 관계도 이와 어느 정도 비슷했습니다.그들은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가운데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주님으로부터 퍼셉션으로 알았습니다.신앙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신앙에 속한 것이 사랑 안에 살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사랑과 별개로 신앙을 따로 떼어 내어‘우리가반드시믿어야할것은이것이다’라고 독립된 체계로 세울 필요가 없었습니다.신앙을 따로 언급하는 것조차 꺼렸다는 스베덴보리의 말은 바로 이 하나 된 질서를 배경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부가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보다‘부부간준수사항20가지’를 더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했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이제 서로의 마음과 유익보다 조항을 먼저 살피고, ‘나는20개가운데19개를지켰으니좋은남편이다’, ‘당신은14번을어겼으니나쁜아내다’라고 서로를 평가합니다.
더 나아가‘서로사랑하는마음이없어도이규칙만정확히지키면좋은부부다’라고 생각한다면 본래 관계가 완전히 뒤집힙니다.사랑에서 나온 원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독립하고,마침내 사랑보다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한 것입니다.
가인의 시작도 이와 비슷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문제는 신앙 자체가 아니었습니다.신앙은 본래 사랑 안에 있었고 그 사랑으로부터 생명을 얻었습니다.그런데 신앙을 사랑에서 떼어 독립적인 것으로 만들고 그것을 주된 것으로 높이면서 질서가 뒤집히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창4의 흐름은 이 작은 분리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신앙과 체어리티가 분리되고,분리된 신앙의 예배가 생기며,체어리티가 소멸되고,교리가 왜곡되며,마지막에는 신앙 자체까지 잃게 됩니다.처음에는‘규칙을조금더중요하게여긴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관계의 생명 자체가 사라지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는 중요한 반전이 있습니다.서로를 향한 사랑이 이미 많이 식어 버린 부부에게는 오히려‘서로모욕하지말자’, ‘상대방의말을끝까지듣자’, ‘어려울때서로돕자’같은 원칙을 다시 배우고 의식적으로 지키는 것이 회복의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지 않더라도 그것이 옳기 때문에 행동할 수 있습니다.그렇게 잘못된 행동을 멈추고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 행동하는 가운데 관계가 다시 회복될 여지가 생길 수 있습니다.물론 인간의 사랑 자체를 단순한 규칙 준수로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이 비유의 요점은 상태가 달라지면 원칙과 사랑의 관계도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AC.337의‘그러나오늘날에는사정이전혀다릅니다’라는 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은 사랑으로부터 신앙에 속한 것을 퍼셉션으로 알았습니다.그러나 후대 인간에게서는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서며,주님께서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십니다.
따라서 오늘날 진리를 배우고 신앙으로 받아들이며 그것을 명확하게 고백하는 것 자체는 가인의 분리가 아닙니다.오히려 그것은 인간이 다시 선과 체어리티로 인도되기 위해 필요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문제는 그 신앙이 체어리티를 향하지 않고 독립된 목적이 되는 데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부부간준수사항’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듯,교리와 신앙고백 자체가 나쁜 것도 아닙니다.사랑이 살아 있을 때 원칙은 그 사랑을 표현하고 지키는 형식이 될 수 있으며,사랑이 약해진 상태에서는 올바른 원칙이 다시 관계의 질서를 배우는 수단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준수 사항이 사랑을 대신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문제가 생깁니다.마찬가지로 신앙과 교리가 체어리티를 향하지 않고‘이것만정확히믿으면된다’는 것으로 바뀌면 진리가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이 부부의 비유가 보여 주는 핵심은‘규칙이냐사랑이냐’의 양자택일이 아닙니다.올바른 질서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태고교회에서는 신앙이 사랑 안에 살아 있었고,후대 인간에게서는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로 이끄십니다.어느 경우에도 최종 목적은 규칙이나 신앙이 사랑과 분리되어 홀로 서는 데 있지 않습니다.
가인의 분리는 바로 이 결합을 깨뜨린 것입니다.그래서 문제는 신앙을 가진 데 있지 않고,신앙을 그 생명인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떼어 낸 데 있습니다.이 비유를 이렇게 이해하면 왜 스베덴보리가 태고교회에서 그 분리를‘엄청난악’이라고 했는지를 조금 더 쉽게 느낄 수 있습니다.
AC.335는 매우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가인도‘신앙’을 의미하고 셋도‘신앙’을 의미한다면,무엇이 한 신앙을 가인으로 만들고 다른 신앙을 셋으로 만드는 것일까요? ‘신앙’이라는 이름 자체만으로는 그 신앙의 질을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가인에게도 신앙에 속한 것이 있었습니다.문제는 신앙 자체가 아니라 그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었다는 데 있었습니다.가인은 신앙을 체어리티와 구별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체어리티보다 높여 주된 것으로 만들었습니다.그 결과 체어리티가 소멸되었고,그 분리된 상태는 점차 왜곡되어 마지막에는 신앙에 속한 것마저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반면 셋은‘주님께서주신새로운신앙’이며,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집니다.따라서 셋으로 의미되는 신앙의 특징은 신앙 자체를 최종 목적으로 삼지 않는 데 있습니다.주님께서 그 신앙을 사용하여 사람 안에 체어리티를 형성하실 수 있는 신앙입니다.
이것은AC.328에서 제시된 원리와 정확히 연결됩니다.그곳에서는‘신앙의질은체어리티로부터알수있다’고 했습니다.사람이 얼마나 많은 교리를 알고 있는지,얼마나 정확한 신조를 고백하는지,얼마나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지만으로는 그 신앙의 내적 질을 충분히 알 수 없습니다.그 신앙이 실제로 어떤 사랑과 삶을 낳는지가 중요합니다.
다만 이 원리를 다른 사람의 내면을 판정하는 잣대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우리는 한 사람의 외적 행동 몇 가지를 보고 그의 신앙 전체가 참인지 거짓인지 최종적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AC.328의 원리는 무엇보다 자신의 신앙을 살피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내가믿는진리가실제로나를어디로이끌고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은 사람으로 하여금 악을 죄로 알고 피하게 하며,주님의 뜻을 자기 뜻보다 앞세우게 하고,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게 합니다.그렇다고 체어리티를 단순히 외적인 선행의 양으로 측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체어리티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의도하고 행하는 내적 사랑이며,외적인 행위는 그 사랑이 삶 속에서 나타나는 형식입니다.
따라서 가인과 셋의 차이는‘교리를가진신앙’과‘교리가없는사랑’의 차이가 아닙니다.셋 역시 신앙입니다.신앙과 진리는 반드시 필요합니다.문제는 그 진리가 어떤 질서 안에 놓여 있는가입니다.진리가 선을 향하고 신앙이 체어리티의 형성을 향할 때 신앙은 자신의 참된 기능을 수행합니다.
이 점에서‘신앙이체어리티를섬긴다’는 표현을 사용할 수도 있지만,더 정확하게는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심으신다고 말하는 것이 좋습니다.체어리티는 인간이 자기 힘으로 신앙을 이용하여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모든 선과 체어리티의 근원은 주님이며,신앙의 진리는 주님께서 그 선을 인간 안에 형성하시는 수단이 됩니다.
그러므로 셋의 신앙도 인간의 공로가 아닙니다.AC.335는‘새로운신앙이주님에의해주어졌다’고 분명히 말합니다.가인의 실패 이후 인간이 스스로 더 나은 종교 체계를 만들어 셋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주님께서 새로운 신앙을 주셨고,그 신앙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심으셨습니다.
이것은 신앙의 목적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말씀을 배우는 목적은 단지 더 많은 정보를 아는 데 있지 않습니다.교리를 정확히 이해하는 목적도 논쟁에서 이기는 데 있지 않습니다.주님께서 그 진리를 통하여 우리의 생각을 바로잡고,악을 보게 하며,선을 의도하고 행하는 삶으로 이끄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신앙이 사람을 더 교만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을 낮추어 보게 하며,자기 옳음을 지키는 도구가 된다면 그 방향을 경계해야 합니다.반대로 진리를 더 알수록 자신 안의 악을 더 분명히 보고,주님의 자비를 더 의지하며,이웃의 유익을 더 지혜롭게 구하게 된다면 그 신앙은 체어리티와 결합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AC와 말씀의 속뜻을 공부하는 사람에게 이 질문은 매우 실제적입니다.속뜻과 상응을 많이 안다는 사실 자체가 셋의 신앙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그 지식이 자신의 영적 우월감을 키우면 가인의 방향으로 기능할 수 있고,반대로 그 진리가 자신을 낮추고 주님을 더 의지하며 실제 체어리티와 쓰임으로 나아가게 한다면 셋의 방향으로 기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내안의가인,내안의셋’이라는 표현을 너무 문자적으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가인과 셋은 본래 태고교회 안의 서로 다른 교리적,교회적 상태를 표상합니다.우리는 그 속뜻에서 드러나는 영적 원리를 자신의 신앙생활에 적용하는 것입니다.역사적 표상과 개인적 적용을 구별하면서 읽는 것이 좋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셋의 새로운 신앙을 곧바로 홍수 이후 영적 인간의 신앙 질서와 동일시하지 않는 것입니다.셋과 에노스는 여전히 태고교회 문맥 안에 있습니다.따라서 여기서는 우선‘주님께서새로운신앙을주셨고,그신앙을통하여체어리티를심으셨다’는AC.335의 직접 진술을 중심에 두는 것이 안전합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AC.336에서 그 신앙을 통하여 심어진 체어리티가‘에노스’라고 불립니다.이것은 셋의 신앙이 어디를 향하는지를 매우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셋에서 이야기가 끝나지 않습니다.셋의 목적은 에노스,곧 체어리티가 심어진 새로운 교회적 상태로 이어지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무엇이신앙을참된신앙답게하는가?’라는 질문에AC.335는 매우 분명한 방향을 제시합니다.신앙을 참된 신앙답게 하는 것은 신앙이 자기 자신을 얼마나 크게 주장하는가가 아니라,주님께서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얼마나 살아 있게 하실 수 있는가에 있습니다.
가인의 신앙은 체어리티를 소멸시켰고,셋의 신앙은 체어리티가 심어질 수 있는 길이 되었습니다.둘 다‘신앙’이지만 그 생명과 방향은 전혀 다릅니다.그러므로 참된 신앙의 표지는 신앙 자체를 높이는 데 있지 않고,주님께서 그 신앙을 통하여 인간 안에 선과 체어리티를 이루실 수 있도록 올바른 질서 안에 놓이는 데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