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05에서 가장 강하게 들리는 문장은 아마 ‘사람에게는의지가없으며단지탐욕만있다’는 말일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만 읽으면 인간에게는 의지 자체가 없으며, 우리가 무엇인가를 원하고 선택하고 결심하는 것은 모두 탐욕일 뿐이라는 뜻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자유와 책임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또한 거듭난 사람이 선을 원하고 행하는 것조차 실제로는 그의 의지가 아니라는 뜻일까요?
이 문장을 이해하려면 먼저 AC.105에서 스베덴보리가 무엇을 설명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주제는 인간에게 선택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생명나무’가 왜 동산 ‘가운데’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는 ‘동산가운데’를 속 사람의 의지라고 설명하고, 말씀에서는 이 의지를 ‘마음’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무도 자기 자신으로부터 선을 행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의지 또는 마음은 사람에게 속한 것으로 말해지기는 하지만 실제 생명의 근원으로서 사람 자신의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의지’는 단순히 일상적인 선택이나 결심의 능력만을 가리키는 말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문맥의 초점은 선을 사랑하고 원하는 생명의 중심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선한 의지의 생명이 인간 자신에게서 발생한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반대로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을 자기 의지라고 부를 때, AC.105는 그것을 ‘탐욕’이라고 부릅니다. 매우 강한 표현이지만, 그 목적은 선의 근원을 인간 자신에게 돌리지 못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이 구별을 놓치면 두 가지 반대 방향의 오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에게는아무런의지도없으므로인간은아무것도선택하거나행하지않는다’는 식의 수동적인 이해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선을원했으므로그선은나에게서나왔다’는 자기 공로의 이해입니다. AC.105의 논지는 어느 쪽도 아닙니다. 이 번호가 직접 강조하는 것은 사람이 선을 행하더라도 그 선의 생명과 근원은 자기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생명나무’가 중요해집니다. AC.105는 생명나무를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이라고 한 뒤, 마지막에는 그것을 ‘주님의자비’라고 합니다. 주님으로부터 모든 사랑과 신앙이 나오고, 따라서 모든 생명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는의지가없다’는 강한 표현만 따로 떼어 놓으면 인간에 대한 부정적인 선언처럼 보이지만, 전체 문맥에서 보면 강조점은 인간의 무가치함보다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께 있습니다.
이 점에서 AC.105가 보여 주는 주님의 모습은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은 인간에게 ‘네안에서선한의지를만들어내어그것으로내게오라’고 요구하시는 분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랑하고 믿고 선을 원할 수 있게 하는 생명 자체가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인간이 생명을 만들어 주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생명을 주시기 때문에 인간이 사랑하고 믿고 선을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생명의 중심에 있는 ‘생명나무’가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자비’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일까요? AC.105하나만으로 인간의 자유와 의지에 관한 스베덴보리의 전체 가르침을 완성해서는 안 됩니다. 이 번호가 직접 다루는 범위에서는 인간의 모든 선택과 책임의 구조를 설명하기보다, 참된 선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밝히는 데 초점이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적어도 분명히 할 수 있는 것은 ‘모든선이주님으로부터온다’는 고백과 ‘그러므로인간은아무것도하지않는다’는 결론은 같은 말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결국 ‘사람에게는의지가없으며단지탐욕만있다’는 말을 이해하는 열쇠는 그 바로 뒤에 있습니다. ‘생명나무는주님의자비이며,주님으로부터모든사랑과신앙이나오고,따라서모든생명이나온다.’ 스베덴보리가 인간에게서 선의 독립적인 근원을 거두어 가는 까닭은 인간을 생명 없는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생명의 참된 근원을 주님께 돌리기 위해서입니다. 에덴동산 한가운데 생명나무가 있다는 것은 인간의 가장 깊은 생명의 중심에 자기 자신이 아니라 모든 사랑과 신앙과 생명을 주시는 주님의 자비가 있음을 보여 줍니다. (AC.105심화1)
AC.162에는 처음 읽으면 조금 뜻밖에 느껴지는 문장이 있습니다. ‘온천국은하나의천적인간인데,이는오직주님만이천적인간이시기때문입니다.’지금까지 창1과 창2에서‘천적인간’이라는 표현은 거듭남의 가장 깊은 상태에 이른 사람이나 태고교회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데 여러 차례 사용되었습니다.그런데 여기서는 갑자기‘오직주님만이천적인간이시다’고 합니다.그렇다면 앞에서 천적 인간이라 했던 사람들은 무엇이며,왜 여기서는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라고 하는 것일까요?
이 문장을 이해하려면AC.162가 무엇을 설명하려는지를 먼저 보아야 합니다.스베덴보리는 모든 진리와 정의의 법이‘천적기원들’,곧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로부터 흘러나온다고 말합니다.이어 온 천국이 하나의 천적 인간이라고 하고,그 이유를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며 주님께서 천국의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시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따라서 여기서 강조점은 누가 천적 상태에 이를 수 있는가보다‘천적인것의근원이어디에있는가’에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창2에서 계속 배워 온 질서와도 같습니다.지혜와 지성은 인간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고 주님에게서 옵니다.선과 진리도 인간이 자기 것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AC.149에서는 더 나아가 오직 주님만이 본래적으로 자기 자신의 것,곧 주님의proprium을 가지고 계시며,주님의proprium은 생명이라고 했습니다.인간의proprium은 그 자체로 생명이 아니지만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그러므로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된다는 것은 인간 자신이 천적인 것의 근원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주님으로부터 오는 천적인 생명을 받아 그 질서 안에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보면‘오직주님만이천적인간이시다’라는 말과 태고교회의 사람들이‘천적인간’이었다는 말은 서로 충돌하지 않습니다.주님은 천적인 생명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본래적으로 천적 인간이십니다.반면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는 만큼 천적 인간이 됩니다.AC.155에서 천사들이 자기들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을 퍼셉션한다고 한 것도 같은 질서를 보여 줍니다.천사가 천사인 까닭도,천적 인간이 천적 인간인 까닭도 생명의 근원이 자기 자신에게 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받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AC.162가‘온천국은하나의천적인간’이라고 한 뒤 곧바로‘오직주님만이천적인간이시기때문’이라고 하는 것은 천국의 모든 천사를 하나의 거대한 사람으로 상상하라는 데 우선적인 뜻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이 문맥에서 먼저 붙들어야 할 것은 천국의 천적인 성질 자체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입니다.본문도‘주님께서천국과천적인간의모든것안에서모든것이시므로,천국과천적인간은그분으로말미암아천적이라한다’고 설명합니다.천국은 스스로 천적인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 말미암아 천적입니다.
이 점은 이어지는‘혼인의법’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지상의 혼인이 천적 혼인으로부터 파생되어야 한다고 할 때,그 천적 혼인의 가장 깊은 중심에도 한 분 주님이 계십니다.AC.162가 천적 혼인을‘한분주님과하나의천국,곧머리가주님이신하나의교회’라고 설명하는 이유입니다.혼인의 하나 됨도 인간 둘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독립적인 하나 됨이 아니라,그 본과 질서를 한 분 주님에게서 받습니다.
따라서‘오직주님만이천적인간이시다’라는 문장은 인간이나 천사의 천적 상태를 부정하는 말이 아닙니다.오히려 그들의 천적인 모든 것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밝히는 말입니다.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고 천국이 천적 천국이 되는 것은 주님과 별도로 천적인 무엇을 소유하기 때문이 아니라,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생명과 질서를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결국 이 짧은 문장은 지금까지 창2가 계속 가르쳐 온 한 가지 질서를 다시 가장 깊은 곳에서 확인합니다. ‘생명의근원은인간에게있지않고주님에게있다’는 것입니다.(AC.162심화1)
인간의proprium은그자체로죽어있으며누구도자기자신으로부터생명을가지고있지않다는사실은영계에서너무도분명하게드러났습니다.자기들의proprium외에는아무것도사랑하지않고,자기들이자기자신으로부터산다고완고하게주장하던악한영들도감각적인경험을통해확신하게되었고,마침내자기들이자기자신으로부터사는것이아님을인정하지않을수없었습니다.저는여러해동안특별한방식으로인간의proprium이실제로어떠한지를알도록허락되었으며,제가자기자신으로부터는아무것도생각할수없고모든생각의관념이흘러든다는것을분명하게퍼셉션하도록허락되었습니다.때로는그것이어떻게,그리고어디에서흘러드는지도퍼셉션할수있었습니다.그러므로자기가자기자신으로부터산다고여기는사람은거짓된것안에있으며,자기가자기자신으로부터산다고믿음으로써모든악과거짓을자기에게귀속시킵니다.만일그의믿음이사물의실제진상과일치한다면그는결코그렇게하지않을것입니다. That man’s own is in itself dead,and that no one has any life from himself,has been shown so clearly in the world of spirits,that evil spirits who love nothing but their own,and obstinately insist that they live from themselves,were convinced by sensible experience,and were forced to confess that they do not live from themselves.For a number of years I have been permitted in an especial manner to know how the case is with what is man’s own,and it has been granted to me to perceive clearly that I could think nothing from myself,but that every idea of thought flows in,and sometimes I could perceive how and whence it flowed in.The man who supposes that he lives from himself is therefore in what is false,and by believing that he lives from himself appropriates to himself everything evil and false,which he would never do if his belief were in accordance with the real truth of the case.
해설
AC.150은 AC.147에서 ‘깊은잠’(deepsleep)으로 설명했던 상태를 다시 받아 그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밝힙니다. 인간이 proprium안에 있으면서 자기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산다고 여기는 상태가 바로 깊은 잠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자신이 새롭게 만들어 낸 비유만이 아니라 고대인들도 그렇게 표현했으며, 말씀에도 깊은 잠이라는 표현이 같은 의미를 담아 사용되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창2:21에서 아담에게 깊은 잠이 임한 것은 속뜻에서 단순한 육체적 수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생명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두고 있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 설명은 AC.147보다 한층 분명합니다. AC.147에서는 사람이 깊은 잠과 같은 상태에 있을 때 자기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살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고 여긴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50에서는 그 상태를 ‘거짓된것안에있는’ 상태라고 명시합니다. 인간이 실제로 살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는 경험 자체가 거짓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 생명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라고 여기는 것이 거짓이라는 뜻입니다. 바로 앞의 AC.149에서 인간 안에 살아 있는 것은 무엇이든 주님의 생명으로부터 온다고 했기 때문에 이 의미는 더욱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 이 사실이 영계에서 감각적인 경험을 통하여 확인되었다고 말합니다. 특히 자기들의 proprium만을 사랑하고 자기들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산다고 완고하게 주장하던 악한 영들조차 경험을 통하여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단순한 철학적 추론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영계에서 관찰하고 경험한 것으로 이 주장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 자신의 증언이라는 사실과, 그 증언을 바탕으로 그가 제시하는 교리적 설명을 구별하면서 읽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경험을 직접 말합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인간의 proprium이 실제로 어떠한지를 특별한 방식으로 알도록 허락되었고, 자신이 자기 자신으로부터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으며 모든 생각의 관념이 흘러든다는 것을 분명하게 퍼셉션했다고 합니다. 때로는 그 생각이 어떻게 그리고 어디에서 흘러드는지도 퍼셉션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조심스럽게 기다려 온 ‘생명과생각의근원’ 문제에 대해 AC본문 자체가 처음부터 상당히 강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인간은 생각의 독립적인 원천이 아니라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직접적인 주장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곧바로 ‘그러면인간은아무것도하지않으며모든생각과행동에책임도없는가?’라고 결론 내려서는 안 됩니다. AC.150의 마지막 문장이 오히려 반대 방향을 보여 줍니다. 자기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산다고 믿는 사람은 바로 그 믿음 때문에 악과 거짓을 자기에게 귀속시킨다고 합니다. 따라서 생명이 자기에게서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은 인간의 책임을 없애기 위한 가르침으로 제시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무엇을 자기에게 귀속시키는가 하는 문제가 함께 등장합니다. 다만 자유와 책임, 유입과 귀속의 관계가 정확히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는 현재 번호 하나만으로 모두 설명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모든생각의관념이흘러든다’는 문장은 매우 강하기 때문에 현재 독자가 지나치게 확대해서 읽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AC.150이 직접 말하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으며 모든 생각의 관념이 흘러든다는 것을 퍼셉션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곧바로 ‘그러므로인간에게사고능력도없고판단도없으며모든생각은외부존재가강제로집어넣는것이다’라고 바꾸어 말하면 본문보다 나아갑니다. 앞의 AC.149에서도 인간은 ‘생명의기관’이라고 하면서 동시에 ‘그기관의성질에따라생명의애정도그러하다’고 했습니다. 인간이 생명의 근원은 아니지만, 받아들이는 인간의 상태와 성질이 무의미한 것은 아닙니다.
마지막 문장은 그래서 특별히 중요합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산다고 믿으면 악과 거짓을 자기에게 귀속시키지만, 자신의 믿음이 ‘사물의실제진상’과 일치한다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거듭남의 중요한 방향 하나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인간이 깨어난다는 것은 자신에게 아무것도 없는 존재라고 느끼며 자기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과 선과 진리의 근원이 자기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실제 질서를 알아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AC.147에서 ‘이것이거짓임을알기시작할때’ 잠에서 깨어난다고 했던 말이 AC.150에서 한층 구체적인 내용을 얻게 됩니다.
따라서 AC.147-150은 하나의 매우 긴밀한 흐름을 이룹니다. 인간에게는 자기 자신의 것처럼 보이는 proprium이 있고, 그 상태에서는 자기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살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인간의 proprium은 그 자체로 죽어 있으며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이제 AC.150은 생각 역시 자기 자신에게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흘러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실제 질서를 알지 못하고 자기 자신을 생명의 근원으로 여기면 악과 거짓을 자기에게 귀속시키게 됩니다. ‘깊은잠’에서 깨어난다는 것은 바로 이 생명의 실제 질서를 알아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AC.150)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창2:21)
AC.149
말씀에서도인간의proprium은‘뼈들’(bones)로의미되며,실제로는주님에의해생명을얻은proprium이의미됩니다.이사야에서는, In the Word also,man’s own is signified by “bones,” and indeed an own vivified by the Lord,as in Isaiah:
라고합니다.이것은에스겔에서더욱분명한데,거기서는뼈들이살을얻고그안에영이들어가는것에관하여말합니다. This is still more evident from Ezekiel,where he speaks of bones receiving flesh,and having spirit put into them:
[2] 인간의proprium은천국에서볼때전적으로뼈로만이루어진듯하고생명이없으며매우추한어떤것으로나타나며,따라서그자체로죽어있는것으로보입니다.그러나주님에의해생명을얻으면살처럼보입니다.인간의proprium은그자체로는단지죽은것에지나지않지만,인간에게는그것이어떤것,참으로모든것인것처럼보이기때문입니다.인간안에서살아있는것은무엇이든주님의생명으로부터오며,만일이것이거두어진다면그는돌처럼죽어쓰러질것입니다.인간은단지생명의기관일뿐이며,그기관의성질에따라생명의애정도그러하기때문입니다.오직주님만이본래적으로자기자신의것,곧주님의proprium을가지고계십니다.주님께서는이proprium으로인간을구속하셨고,이proprium으로인간을구원하십니다.주님의proprium은생명이며,그분의proprium으로부터그자체로는죽어있는인간의proprium이살아있게됩니다.주님의proprium은누가복음에있는주님의말씀으로도의미됩니다. The own of man,when viewed from heaven,appears like a something that is wholly bony,inanimate,and very ugly,consequently as being in itself dead,but when vivified by the Lord it looks like flesh.For man’s own is a mere dead thing,although to him it appears as something,indeed as everything.Whatever lives in him is from the Lord’s life,and if this were withdrawn he would fall down as dead as a stone;for man is only an organ of life,and such as is the organ,such is the life’s affection.The Lord alone has what is his own;by this own he redeemed man,and by this own he saves him.The Lord’s own is life,and from his own,man’s own,which in itself is dead,is made alive.The Lord’s own is also signified by the Lord’s words in Luke:
AC.149는 AC.147-148에서 설명한 뼈와 살의 의미를 말씀의 여러 구절로 확증하면서, 인간의 proprium과 주님의 생명의 관계를 한층 깊이 밝힙니다. AC.147에서는 갈빗대가 생명력이 거의 없지만 인간에게 소중한 proprium을 의미하고, 갈빗대 대신의 살은 생명력이 있는 proprium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AC.148에서는 뼈가 생명력이 극히 적은 것들을, 살이 생명력이 있는 것들을 나타낸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149는 이러한 의미가 창2의 갈빗대 한 구절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다른 곳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사야의 ‘네뼈를견고하게하리니’, ‘너희의뼈가연한풀의무성함같으리라’, 시편의 ‘내모든뼈가이르기를여호와와같은이가누구냐’라는 표현에서 뼈는 단순한 육체의 골격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인간의 proprium, 특히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이 의미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뼈가 proprium을 의미한다고 해서 언제나 죽어 있는 악한 proprium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생명을 주심으로 살아 있게 된 proprium도 말씀에서 뼈로 표현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의미는 에스겔 37장의 마른 뼈 환상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골짜기에 가득한 마른 뼈들은 그 자체로는 생명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말씀에 따라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가죽이 덮이고 생기가 들어가자 살아납니다. AC.149에서 이 본문을 인용하는 이유는 바로 AC.147-148의 설명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 자체로는 생명이 거의 없는 뼈와, 생명이 들어와 살을 얻고 살아나는 상태의 대비가 인간의 proprium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관계를 드러냅니다.
[2]에서 스베덴보리는 이 의미를 더욱 직접적으로 설명합니다. 인간의 proprium을 천국에서 보면 전적으로 뼈로만 이루어진 듯하고 생명이 없으며 매우 추하게 나타나고, 그 자체로는 죽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얻으면 살처럼 보입니다. 여기서 뼈와 살의 차이는 단순히 인간의 자연적인 신체 조직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그자체로있는인간의proprium’과 ‘주님으로부터생명을받은proprium’의 차이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인간 자신에게는 이와 정반대로 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proprium이 그 자체로는 죽어 있는데도 인간에게는 그것이 ‘어떤것’, 더 나아가 ‘모든것’인 것처럼 보인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자연스럽게 ‘내가살고,내가생각하고,내가말하고,내가행동한다’고 느끼며, 그 생명의 근원이 자기 안에 있다고 여깁니다. AC.147에서는 바로 이 상태를 ‘깊은잠’에 비유했습니다. 이제 AC.149는 왜 그것이 잠과 같은지를 더욱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인간 안에서 실제로 살아 있는 것은 무엇이든 주님의 생명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인간은단지생명의기관일뿐이며,그기관의성질에따라생명의애정도그러하다’는 문장은 이 번호의 핵심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기서 인간이 ‘기관’이라는 말은 인간이 아무 역할도 하지 않는 무생물이라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현재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생명의 ‘근원’입니다. 인간은 생명의 근원이 아니며 생명을 자기 안에서 스스로 만들어 내지 않습니다.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오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상태가 어떠한가에 따라 그 생명이 인간 안에서 나타나는 애정의 성질도 달라집니다. 따라서 이 문장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상태를 동시에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proprium과 주님의 proprium사이에 결정적인 구별을 둡니다. ‘오직주님만이본래적으로자기자신의것,곧주님의proprium을가지고계십니다.’ 인간의 proprium은 그 자체로 생명이 아니지만, 주님의 proprium은 생명입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이 자신의 것으로 인간을 구속하셨고 구원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proprium으로부터 그 자체로 죽어 있는 인간의 proprium이 살아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인간의 proprium이 살아난다는 것은 인간이 마침내 독립적인 생명의 근원을 갖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을 받아 살아 있는 proprium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 점에서 눅24:39의 부활하신 주님의 말씀, ‘영은살과뼈가없으되너희보는바와같이나는있느니라’가 인용되는 이유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의 살과 뼈를 주님의 proprium과 연결합니다. 주님의 경우에는 인간처럼 그 자체로 죽어 있는 proprium이 아니라 생명 자체인 신적 proprium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어 출12:46에서 유월절 어린 양의 뼈를 하나도 꺾지 말라고 한 말씀까지 같은 맥락에서 제시됩니다. 현재 번호에서는 이 두 본문의 모든 세부 상응을 풀지 않고, 주님의 proprium이라는 중심 의미를 확인하는 데 사용합니다.
AC.149를 지나면서 AC.140이후 계속되어 온 중요한 문제가 상당히 선명해집니다. 인간에게는 자기 자신의 것처럼 보이는 proprium이 있고, 그 때문에 자기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살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그것은 생명의 실제 근원에 관한 참된 인식이 아닙니다. 인간의 proprium은 그 자체로는 죽어 있으며, 주님의 proprium만이 생명입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인간의 proprium을 없애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으로 그것을 살아 있게 하십니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흐름은 ‘proprium을제거하여인간을없애는것’이 아니라 ‘그자체로죽어있는proprium이주님으로부터생명을받아살아있게되는것’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AC.14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And Jehovah God caused a deep sleep to fall upon the man, and he slept; and he took one of his ribs, and closed up the flesh in the place thereof.(창2:21)
AC.147
가슴의뼈인‘갈빗대’(rib)는생명력이거의없는인간의proprium을의미하며,실제로는그에게소중한proprium을의미합니다.‘갈빗대대신의살’(fleshintheplaceoftherib)은생명력이있는proprium을의미합니다.‘깊은잠’(deepsleep)은사람으로하여금자기에게속한것을가진것처럼스스로에게보이게하기위하여들어가도록허용된상태를의미합니다.이상태는잠과비슷한데,그안에있는동안사람은자기가자기자신으로부터살고,생각하고,말하고,행동한다고만알고있기때문입니다.그러나이것이거짓임을알기시작할때,그는마치잠에서깨어나는것처럼일깨워져깨어있게됩니다. By a “rib,” which is a bone of the chest,is meant man’s own,in which there is but little vitality,and indeed an own which is dear to him;by “fleshintheplaceoftherib” is meant an own in which there is vitality;by a “deepsleep” is meant the state into which he was let so that he might seem to himself to have what is his own,which state resembles sleep,because while in it he knows not but that he lives,thinks,speaks,and acts,from himself.But when he begins to know that this is false,he is then roused as it were out of sleep,and becomes awake.
해설
AC.147은 이제 창2:21의 ‘갈빗대’와 ‘깊은잠’을 직접 설명하면서, AC.132부터 계속 다루어 온 proprium의 문제가 어떻게 인간의 실제 경험 속에 자리 잡게 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앞에서는 인간이 proprium을 원했고, 주님께서 그에게 마치 자기 자신의 것인 듯 보이는 proprium을 허락하셨다고 했습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그 상태를 갈빗대와 살, 그리고 깊은 잠이라는 표현으로 설명합니다.
먼저 ‘갈빗대’(rib)는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두 가지 중요한 설명을 덧붙입니다. 그것은 ‘생명력이거의없는’ proprium이며, 동시에 인간에게 ‘소중한’ proprium입니다. 이 둘은 함께 보아야 합니다. 인간은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느껴지는 것을 매우 소중하게 여기지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그것 자체에는 참된 생명이 거의 없습니다. 앞에서 계속 말해 온 것처럼 실제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가장 자기 것이라고 여기고 애착을 가지는 바로 그것이, 그 자체로는 생명의 근원이 아니라는 역설이 여기서 드러납니다.
이어 ‘갈빗대대신의살’(fleshintheplaceoftherib)은 생명력이 있는 proprium을 의미합니다. AC.147은 아직 갈빗대가 어떻게 살로 바뀌며 그 변화가 어떤 과정을 뜻하는지를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적어도 생명력이 거의 없는 proprium과 생명력이 있는 proprium사이에 분명한 차이를 둡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proprium을 하나의 고정된 부정적 개념으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앞의 AC.141에서 천적 인간과 천사에게 주님께서 주시는 proprium이 있다고 했던 것처럼, 이제 갈빗대와 살의 대비를 통해 proprium의 성질이 변화될 수 있다는 방향이 다시 나타납니다.
‘깊은잠’(deepsleep)의 의미는 더욱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사람이 자기에게 속한 것을 가진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하여 들어가도록 허용된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핵심은 인간이 정말로 주님과 독립된 생명의 근원을 갖게 된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그렇게 ‘보이는’ 상태가 허용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AC.140의 ‘마치자기자신의것인듯보이는proprium’이라는 표현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상태를 잠에 비유하는 이유도 바로 이어서 설명됩니다. 사람은 그 상태 안에 있는 동안 자기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살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고 여깁니다. 그는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생명과 사고와 말과 행동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AC.147은 이것을 사실 그대로의 인식이 아니라 ‘잠과같은상태’로 설명합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독립적인 생명의 근원으로 여기는 동안에는 생명의 실제 근원을 아직 깨어서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문장에서 중요한 전환이 일어납니다. 사람이 ‘이것이거짓임을알기시작할때’ 그는 마치 잠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일깨워져 깨어 있게 된다고 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자기에게서 살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고 느끼는 경험 자체를 없애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 경험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인식입니다.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알기 시작할 때 비로소 인간은 잠에서 깨어나는 것과 같은 상태로 들어갑니다.
이 설명은 AC.140-141에서 제시한 proprium의 구조를 한층 더 분명하게 합니다. 인간에게는 자기 자신의 것처럼 보이는 proprium이 주어지고, 천적 인간과 천사에게도 proprium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proprium안에는 주님의 것들이 있고 주님께서 그것을 다스리십니다. 따라서 인간이 깨어난다는 것은 자기 삶의 경험을 잃는 것이 아니라, 그 삶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임을 알아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현재 AC.147이 직접 말하는 범위 안에서는 여기까지가 가장 안전한 설명입니다.
따라서 AC.147의 ‘깊은잠’은 단순한 육체적 수면을 넘어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살아간다고 여기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갈빗대’는 인간이 소중히 여기지만 생명력이 거의 없는 proprium을, ‘갈빗대대신의살’은 생명력이 있는 proprium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사람이 자기 자신이 생명의 근원이라는 생각이 거짓임을 알기 시작할 때 그는 잠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깨어 있게 됩니다. 이제 이어지는 설명에서는 이 proprium이 어떻게 ‘여자’로 지어지는지가 더욱 구체적으로 밝혀질 것입니다. (AC.147)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창2:11, 12)
AC.112
또한사랑에서나오지않는지혜는없으며,따라서주님으로부터나오지않는지혜는없다는것을알아야합니다.신앙에서나오지않는지성도없으며,따라서주님으로부터나오지않는지성도없습니다.사랑에서나오지않는선도없으며,따라서주님으로부터나오지않는선도없습니다.신앙에서나오지않는진리도없으며,따라서주님으로부터나오지않는진리도없습니다.사랑과신앙에서나오지않고,따라서주님으로부터나오지않는것들도실제로이러한이름들로불리기는하지만,그것들은진정한것이아닙니다. Be it known moreover that there is no wisdom which is not from love,thus from the Lord;nor any intelligence except from faith,thus also from the Lord;and that there is no good except from love,thus from the Lord;and no truth except from faith,thus from the Lord. What are not from love and faith,and thus from the Lord,are indeed called by these names,but they are spurious.
해설
AC.112는 앞의 AC.110-111에서 다소 어렵게 느껴졌던 여러 구별을 매우 간결한 질서로 정리합니다. 지혜는 사랑에서 나오고, 지성은 신앙에서 나오며, 선은 사랑에서 나오고, 진리는 신앙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네 관계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사랑에서 나온다는 말 뒤에도, 신앙에서 나온다는 말 뒤에도 계속 ‘따라서주님으로부터’라고 덧붙입니다. 결국 이 번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혜와 지성, 선과 진리의 궁극적인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먼저 ‘사랑에서나오지않는지혜는없다’는 말은 앞에서 에덴에서 흘러나오는 강을 ‘사랑에서나오는지혜’라고 한 설명과 그대로 이어집니다(AC.107). 참된 지혜는 사랑과 분리되어 머리에서 독립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에서나오지않는지성은없다’는 말은 비손을 ‘사랑에서나오는신앙의지성’이라고 한 AC.110과 연결됩니다. 사랑에서 신앙이 나오고, 그 신앙에서 지성이 나오는 질서입니다. 따라서 사랑, 신앙, 지혜와 지성은 서로 떨어진 여러 능력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의 질서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선과 진리도 같은 구조 안에 있습니다. 선은 사랑에서 나오고 진리는 신앙에서 나옵니다. 이것은 AC.110에서 금이 사랑의 선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선을, 베델리엄과 호마노가 사랑의 진리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진리를 뜻한다고 한 설명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바탕이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선과 진리를 단순한 도덕적 행동과 정확한 지식으로만 보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선에는 그것을 살아 있게 하는 사랑이 있고, 진리에는 그것을 살아 있게 하는 신앙이 있으며, 그 사랑과 신앙의 근원은 다시 주님께 있습니다.
따라서 AC.112는 앞의 AC.111에서 기억지식을 지성과 지혜와 신앙이라고 부르는 겉 사람의 상태를 왜 문제 삼았는지도 밝혀 줍니다. 어떤 사람이 많은 것을 알고 매우 정교하게 추론할 수 있다고 해서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말하는 지혜와 지성이 자동으로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겉으로 선해 보이는 행동이나 사실에 맞는 말을 한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여기서 말하는 선과 진리의 생명이 모두 설명되는 것도 아닙니다. AC.112가 보는 것은 그 외적인 모습만이 아니라 그것이 어디에서 생명을 얻고 있는가 하는 근원과 질서입니다.
이 때문에 마지막 문장의 ‘진정한것이아닙니다’라는 표현을 세심하게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랑과 신앙에서 나오지 않는 것들도 실제로 ‘지혜’, ‘지성’, ‘선’, ‘진리’라는 이름으로 불린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신앙의 생명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여기서 말하는 본래적인 의미의 지혜와 지성, 선과 진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얻는 모든 지식이나 이성적 사고, 또는 자연적인 선행을 무가치하다고 선언하는 말이라기보다, 그것들을 참으로 살아 있게 하는 영적 생명의 근원이 따로 있음을 구별하는 말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AC.112가 보여 주는 주님의 모습이 선명해집니다. 주님은 단지 인간에게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바깥에서 알려 주시는 분만이 아닙니다. 사랑의 근원도 주님이시고, 신앙의 근원도 주님이시며, 그 사랑과 신앙에서 나오는 지혜와 지성, 선과 진리의 근원도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참으로 지혜롭고 선해지는 것은 자기 안에 주님과 별개의 또 하나의 선과 지혜의 원천을 만들어 내는 일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 그 생명이 자기 안에서 지혜와 지성, 선과 진리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AC.112의 반복되는 ‘따라서주님으로부터’는 그래서 단순한 교리적 수식어가 아닙니다. 앞에서 에덴으로부터 강이 흘러나오고 그 강이 동산을 적셨던 것처럼, 이제 그 생명의 흐름이 사랑과 신앙, 지혜와 지성, 선과 진리 전체를 관통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름은 인간에게 붙고 그 지혜와 지성은 인간 안에서 실제로 나타나지만, 그 생명의 근원은 주님께 있습니다. 이 근원의 질서를 놓치지 않는 것이 AC.110-112의 여러 세밀한 구별을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AC.112해설)
지혜와지성이사람안에나타나기는하지만,앞에서말한것처럼그것들은오직주님의것이라는사실이에스겔에서이와유사한표상들을통하여분명히선언됩니다. That although wisdom and intelligence appear in man,they are,as has been said,of the Lord alone,is plainly declared in Ezekiel by means of similar representatives:
여기서‘동쪽’(east)과물과강이흘러나온‘성소’(sanctuary)는주님을뜻합니다.이와마찬가지로요한계시록에서는, Here the Lord is signified by the “east,” and by the “sanctuary,” whence the waters and rivers issued. In like manner in John:
AC.109는 창2:10의 강에 관한 설명을 그 근원까지 거슬러 올라가 마무리합니다. 지혜와 지성은 분명 사람 안에서 나타납니다. 사람이 생각하고 이해하고 분별하며 지혜롭게 행동하기 때문에 그것들이 사람 자신의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앞에서말한것처럼그것들은오직주님의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를 설명하기 위해 에스겔의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과 요한계시록의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에서 나오는 생명수의 강을 인용합니다. 두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물과 강이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물과 강이 ‘어디에서나오는가’입니다.
먼저 겔47:1, 8-9, 12에서 물은 성전 문지방 아래에서 나와 동쪽으로 흐릅니다. 그 물이 바다에 이르면 죽어 있던 물이 되살아나고,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생물이 살며, 강 좌우에는 먹을 과실나무가 자랍니다. 그 나무들은 잎이 시들지 않고 열매가 끊이지 않으며 달마다 새 열매를 맺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생명과 풍성함의 이유가 본문 자체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물이성소에서나오기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점을 붙들어 ‘동쪽’과 물과 강이 나오는 ‘성소’가 주님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인용은 앞의 창2:10과 매우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에덴에서 강이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듯이, 에스겔에서는 성소에서 물이 흘러나와 그 물이 이르는 곳을 살립니다. AC.107에서 에덴에서 나오는 강은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이고, 동산을 적시는 것은 지성을 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AC.109가 에스겔의 말씀을 인용하는 까닭은 지혜와 지성이 사람 안에서 생명을 일으키더라도 그 생명의 근원이 사람 자신에게 있지 않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물이 스스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성소에서 나오듯이, 사람 안에 나타나는 참된 지혜와 지성도 그 근원은 주님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말씀은 이것을 더욱 직접적으로 보여 줍니다. ‘생명수의강’은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그 강 좌우에는 ‘생명나무’가 있어 계속 열매를 맺고 그 잎사귀는 만국을 치료합니다. 여기서는 창2에서 지금까지 살펴본 ‘강’과 ‘생명나무’가 다시 함께 나타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생명수의 강이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온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생명을 주는 물과 강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다시 보여 줍니다.
이렇게 보면 AC.109는 앞의 AC.105와도 깊이 연결됩니다. AC.105에서는 생명나무가 ‘주님의자비’이며 주님으로부터 모든 사랑과 신앙, 따라서 모든 생명이 나온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09에서는 지혜와 지성도 오직 주님의 것이라고 합니다. 사랑과 신앙뿐 아니라 지혜와 지성까지도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모두 주님께 이릅니다. 사람은 그것들을 실제로 받아 자기 안에서 생각하고 이해하며 살아가지만, 그 생명의 근원까지 자기 것으로 돌릴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오직주님의것’이라는 말을 사람 안의 지혜와 지성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표현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에스겔의 물은 실제로 바다를 되살리고 생물을 살리며 나무에 열매를 맺게 합니다. 요한계시록의 생명수의 강도 실제로 생명나무와 그 열매와 치료를 낳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은 인간 안에서 일어나는 생명의 역사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생명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밝혀 줍니다. 사람 안에 지혜와 지성이 나타나는 것은 실제이지만, 그것들이 살아 있는 까닭은 그 근원이 주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창2:10의 한 장면 전체가 여기에서 더욱 선명해집니다. 에덴에서 강이 나와 동산을 적십니다. 사랑에서 지혜가 나오고, 그 지혜가 지성을 줍니다. 그러나 그 사랑과 지혜와 지성의 가장 깊은 근원에는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은 멀리 계시면서 사람이 스스로 지혜로워지기를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라, 성소에서 물이 흘러나오고 보좌에서 생명수의 강이 흘러나오듯이 사람에게 생명을 공급하시는 분입니다. 사람 안에서 지혜와 지성이 살아날수록 그 생명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 이것이 AC.109가 창2:10의 강을 통하여 보여 주는 생명의 질서입니다. (AC.109해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창2:9)
AC.105
‘생명나무’(treeoflives)는사랑과거기서나오는신앙이며,‘동산가운데’(inthemidstofthegarden)는속사람의의지안에있다는뜻입니다.말씀에서‘마음’(heart)이라하는의지는사람과천사안에서주님께서가장먼저소유하시는것입니다.그러나아무도자기자신으로부터선을행할수없으므로,의지또는마음은사람에관하여말해지기는하지만사람의것이아닙니다.사람이자기의의지라고하는것은탐욕이며,이것이사람의것입니다. 그러므로의지가생명나무가놓여있는‘동산가운데’(midstofthegarden)이고,사람에게는의지가없으며단지탐욕만있으므로,‘생명나무’(treeoflives)는주님의자비이며,주님으로부터모든사랑과신앙이나오고,따라서모든생명이나옵니다. The “treeoflives” is love and the faith thence derived; “inthemidstofthegarden” is in the will of the internal man. The will, which in the Word is called the “heart,” is the primary possession of the Lord with man and angel. But as no one can do good of himself, the will or heart is not man’s, although it is predicated of man; cupidity, which he calls will, is man’s. Since then the will is the “midstofthegarden,” where the tree of lives is placed, and man has no will, but mere cupidity, the “treeoflives” is the mercy of the Lord, from whom comes all love and faith, consequently all life.
해설
AC.105는 창2:9의 ‘동산가운데에는생명나무’라는 말씀을 통하여 생명의 가장 깊은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생명나무’는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을 뜻하고, 그것이 있는 ‘동산가운데’는 속 사람의 의지를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에서 이 의지를 ‘마음’이라고도 한다고 하면서, 그것이 사람과 천사 안에서 주님께서 가장 먼저 소유하시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생명나무가 동산의 가장자리가 아니라 ‘가운데’에 있다는 것은 이렇게 사람의 생명의 중심과 관계됩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설명은 매우 강합니다. 아무도 자기 자신으로부터 선을 행할 수 없으므로 의지 또는 마음은 사람의 것이 아니며, 사람이 자기 의지라고 부르는 것은 오히려 ‘탐욕’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인간에게 생각하고 선택하고 행동하는 능력 자체가 없다고 말하는 것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 그가 묻고 있는 것은 ‘선한의지의생명이어디에서오는가?’입니다. 그 생명의 근원을 인간 자신에게 돌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참으로 선을 원하고 행하게 하는 선의 생명은 자기 자신에게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이것은 앞의 AC.99와 AC.104에서 계속 밝혀진 질서와도 이어집니다. 천적 인간은 자신의 지성이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흘러든다는 것을 퍼셉션하며, 퍼셉션 자체도 ‘오직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 감각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AC.105는 그보다 더 중심으로 들어갑니다. 사람의 지성만이 아니라 사랑하고 선을 원하는 의지의 생명 역시 그 근원이 주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에덴동산 한가운데 있는 생명나무는 인간이 자기 안에 독립적으로 가지고 있는 어떤 생명의 원천이 아니라, 모든 사랑과 신앙과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그렇다면 왜 스베덴보리는 인간에게 있는 것은 ‘단지탐욕’이라고까지 말할까요? 이 표현은 인간을 비하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기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것과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것을 철저히 구별하려는 문맥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사람이 선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여기기 시작하면 생명의 근원을 자신에게 돌리게 됩니다. 그러나 AC.105가 가리키는 생명의 질서는 그 반대입니다. 선한 의지와 사랑과 신앙과 생명의 근원은 주님이며, 인간은 그것들을 주님으로부터 받아 살아갑니다. 바로 이것이 생명나무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의자비’를 뜻한다고 하는 이유입니다.
여기서 주님의 모습이 매우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주님은 사람에게서 생명을 요구하시면서 그 생명을 스스로 만들어 내라고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선한 의지를 만들어 내어 먼저 주님께 가져가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AC.105가 말하는 질서에서는 오히려 주님께서 그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사랑도 주님으로부터 오고, 그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도 주님으로부터 오며, 따라서 모든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생명나무’를 마지막에는 ‘주님의자비’라고까지 풀이합니다. 생명나무의 중심에는 인간의 성취가 아니라 주님의 자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없애기보다, 우리가 가진 선의 근원을 어디에 둘 것인가를 묻습니다. 선을 행하면서도 그 선의 생명을 자기에게 돌리지 않고, 사랑하고 믿고 살아갈 수 있는 것 자체가 주님의 자비로 말미암음을 인정하는 것, 이것이 AC.105가 보여 주는 천적 질서와 맞닿아 있습니다. 에덴동산 가운데 생명나무가 있다는 것은 결국 인간 생명의 가장 깊은 중심에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과 그분의 자비가 계셔야 함을 보여 줍니다. (AC.105해설)
2.‘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the Lord,who is the very life itself)
AC.2에서 스베덴보리는 주님을 단지 ‘생명을주시는분’이라고 하지 않고 ‘생명그자체이신주님’(theLord, whoistheverylifeitself)이라고 합니다. 이 표현은 말씀에 왜 생명이 있는지를 설명하는 가운데 등장하지만, 동시에 스베덴보리가 주님과 생명을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보여 주는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우리는 보통 어떤 사람이 ‘생명을가지고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주님을 ‘생명그자체’라고 할 때에는 주님께서 우리처럼 생명을 받아 가지고 계신 존재라는 뜻이 아닙니다. 생명의 근원이 주님 자신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피조물은 스스로 생명의 근원이 될 수 없으며, 살아 있다는 것 자체를 주님에게 의존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생명이 있지만 주님은 ‘생명그자체’이십니다. 이 차이가 중요합니다.
AC.2에서는 이 깊은 주제를 인간 생명의 구조 자체를 설명하기 위해 꺼낸 것이 아니라 ‘말씀의생명은어디에서오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꺼냅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생명이 그 안의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을 가리키는 데서 온다고 합니다. 말씀의 가장 깊은 생명과 주님을 분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이어 ‘그분을내적으로바라보지않는것은살아있지않다’고까지 말합니다.
여기서 ‘주님을가리킨다’는 것을 모든 구절에서 문자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찾아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2자체가 ‘그나름의방식으로’(initsownway)주님을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구약의 어떤 본문은 문자적으로 인물의 생애를 말하고, 어떤 본문은 전쟁이나 율법이나 족보를 말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외적인 것 안에 있는 내적인 것이 각기 그 나름의 방식으로 주님을 향하기 때문에 그것이 살아 있고 신성한 말씀이라고 설명합니다.
‘생명그자체’라는 표현은 이후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읽으면서 훨씬 더 깊어질 주제입니다. 인간이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는다는 것, 그 생명을 마치 자기 자신의 것처럼 느끼도록 허락받는다는 것, 생명이 어떻게 인간에게 유입되는가 하는 문제들은 이후 각각의 문맥에서 더 자세히 살펴야 합니다. AC.2한 번호에서 그 전체 교리를 미리 완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따라서 AC.2에서 ‘생명그자체이신주님’을 이해하는 가장 안전한 출발점은 이것입니다. 말씀에는 그 자체로 독립된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의 모든 것이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을 내적으로 바라보고 그분을 가리키기 때문에 생명이 있습니다. 주님은 단순히 말씀에 생명을 더해 주시는 분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 자체이시며, 바로 그분을 향하는 내적인 것이 말씀을 살아 있고 신성한 말씀 되게 합니다. (AC.2심화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