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02에서 스베덴보리는 ‘선악을알게하는나무’를 ‘감각적인것에서나오는신앙,곧단순한기억지식에서나오는신앙’이라고 설명합니다. 처음 읽으면 상당히 낯선 해석입니다. 성경 본문에는 ‘선악을알게하는나무’라고 되어 있는데, 왜 이것을 감각과 기억지식에서 비롯되는 ‘신앙’의 문제로 해석하는 것일까요? 더구나 이렇게 읽으면 감각이나 지식 자체가 위험하거나 악하다는 뜻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문맥은 그렇게 읽는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앞에서 스베덴보리는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을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AC.99에서는 주님께서 천적 인간의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드신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문제는 감각과 기억지식이 ‘있느냐없느냐’가 아닙니다. 그것들이 생명의 질서 안에서 어디에 놓이며, 무엇이 무엇의 근원이 되느냐가 문제입니다.
이 점에서 AC.102의 두 나무를 함께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생명나무’는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을 뜻합니다. 여기서는 사랑이 먼저이고 신앙이 거기서 나옵니다. 그리고 AC.105에 이르면 이 생명나무를 ‘주님의자비’라고까지 설명합니다. 모든 사랑과 신앙과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생명나무가 나타내는 질서에서는 신앙의 생명과 근원이 인간의 감각이나 지식이 아니라 주님께 있습니다.
반면 ‘선악을알게하는나무’에서는 신앙이 감각적인 것과 단순한 기억지식에서 ‘나옵니다’. 이 차이가 핵심입니다. 사람이 보고 듣고 배우고 기억한 것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들을 출발점으로 삼아 신앙의 진실 여부를 스스로 세우려는 질서가 문제로 제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감각으로확인할수있는가?’, ‘내가가진지식으로납득할수있는가?’가 신앙의 근원을 결정하는 자리에 놓이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그러므로생각하지말라’, ‘이성을사용하지말라’, ‘증거를살피지말라’는 뜻으로 확대해서도 안 됩니다. AC.102-106은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은 계속 인간 안에 있으며 주님의 유입을 받습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 섬기는 자리에 있는가, 아니면 그것들 자체가 참과 선을 판정하는 궁극적인 근원이 되는가 하는 질서의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이 해석은 반지성주의라기보다 신앙의 생명이 어디에서 시작되는가에 관한 설명으로 읽는 것이 적절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스베덴보리가 ‘생명나무’와 ‘선악을알게하는나무’를 서로 다른 신앙의 질서와 연결하는지 조금씩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사랑에서 신앙이 나오고 그 사랑과 신앙의 근원이 주님께 있는 질서이며, 다른 하나는 감각과 기억지식에서 신앙을 끌어내는 질서입니다. 결국 두 나무의 차이는 단순히 ‘신앙대지식’이 아니라, 신앙이 어디에서 생명을 얻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다만 AC.106은 ‘지식의나무’, 곧 감각적인 것과 단순한 기억지식에서 비롯되는 신앙의 본성이 ‘뒤에이어지는글들에서밝혀질것’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그 의미를 모두 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단계에서 분명히 해 둘 것은 감각과 기억지식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스베덴보리가 문제 삼는 것은 그것들로부터 신앙을 만들어 내려고 하는 생명의 질서라는 점입니다. 왜 그것이 인간의 타락과 연결되는지는 이어지는 설명을 따라가면서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AC.102심화1)
먼저 중요한 것은 히브리어 본문에도 이 두 절에서 ‘열매’에 해당하는 별도의 명사가 사용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문자적으로는 ‘동산의모든나무에서너는먹을수있다’, ‘선악을알게하는나무에서는먹지말라’에 가까운 구조입니다. 따라서 AC에 실린 영어가 ‘tree’를 그대로 살린 것은 히브리어의 표현 구조와 잘 맞습니다.
그러나 한국어에서는 ‘나무에서먹는다’ 또는 문맥에 따라 ‘나무를먹는다’는 표현이 독자에게 어색하거나 오해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실제로 사람이 먹는 것은 나무 자체가 아니라 나무에서 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개역개정의 ‘나무의열매’는 이 뜻을 자연스러운 한국어로 전달하기 위해 먹는 대상을 명시적으로 풀어 준 번역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열매’가 히브리어 원문에 별도의 단어로 있는데 영어 번역이 빠뜨린 것도 아니고, 반대로 개역개정이 전혀 근거 없는 내용을 임의로 첨가했다고 볼 필요도 없습니다.
AC를 읽을 때 이 차이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개별 표현을 매우 세밀하게 다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원칙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개역개정의 ‘열매’라는 번역 표현을 근거로 창2:16-17의 속뜻에 원문에 없는 별도의 ‘열매’ 상응을 추가해서는 안 됩니다. AC.80에서 스베덴보리가 해설하는 것은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을 통하여 선과 진리를 아는 것과,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그것들을 알려 하거나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 신앙의 아르카나를 탐구하려 하는 것의 차이입니다.
따라서 이 본문을 AC와 함께 읽을 때는 개역개정의 자연스러운 한국어와 원문의 표현 구조를 함께 기억하면 좋습니다. 예배에서 개역개정을 읽을 때는 그대로 ‘나무의열매’라고 읽으면 됩니다. 그러나 AC의 속뜻을 검토할 때는 히브리어와 AC의 영어가 실제로 ‘나무에서먹는다’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번역문에 명시적으로 보이는 단어와 원문에 실제로 있는 단어를 구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개역개정의 번역이 잘못되었다는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번역’과 ‘AC의속뜻해설’이 서로 다른 일을 한다는 점을 보여 주는 좋은 사례입니다. 성경 번역은 원문의 뜻을 독자가 자연스럽게 이해하도록 한국어로 전달해야 하고, AC해설에서는 그 번역 뒤에 있는 원문의 표현까지 확인하면서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무엇을 근거로 속뜻을 설명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러므로 창2:16-17에서는 개역개정의 ‘열매’를 그대로 존중하여 읽되, AC의 상응을 판단할 때 그것을 원문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단어처럼 취급하지 않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AC.80심화1)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7)
AC.128
세상적이고육체적인인간은마음속으로이렇게말합니다.‘내가볼수있도록감각적인것들을통하여,또는내가이해할수있도록기억지식을통하여신앙과신앙에속한모든것에관하여가르침을받지않는다면,나는믿지않겠다.’그리고그는자연적인것들이영적인것들과모순될수없다는생각으로자기입장을확증합니다.이와같이그는천적이고신적인것에관하여감각적인것들로부터가르침을받고자합니다.그러나이것은낙타가바늘귀로들어가는것만큼이나불가능합니다.그가이러한수단으로지혜로워지기를원하면원할수록그는더욱자기눈을멀게하며,마침내아무것도믿지않게되어영적인것이존재한다는것조차,영원한생명이있다는것조차믿지않게됩니다.이것은그가전제로삼은원리에서비롯됩니다.이것이바로‘선악을알게하는나무의열매를먹는것’(eatofthetreeoftheknowledgeofgoodandevil)이며,누구든지그것을더많이먹을수록더욱죽은상태가됩니다. 그러나세상으로부터가아니라주님으로부터지혜로워지기를원하는사람은마음속으로주님을믿어야한다고,곧주님께서말씀에서하신것들을믿어야한다고말합니다.그것들이진리이기때문입니다.그리고그는이원리에따라자신의생각을질서지웁니다.그는이성에속한것들과기억지식과감각적인것들과자연적인것들을통하여자신을확증하며,확증하지않는것들은제쳐둡니다. The worldly and corporeal man says in his heart, If I am not instructed concerning the faith, and everything relating to it, by means of the things of sense, so that I may see, or by means of those of the memory[scientifica],so that I may understand, I will not believe; and he confirms himself in this by the consideration that natural things cannot be contrary to spiritual. Thus he is desirous of being instructed from things of sense in what is celestial and Divine, which is as impossible as it is for a camel to go through the eye of a needle; for the more he desires to grow wise by such means, the more he blinds himself, till at length he believes nothing, not even that there is anything spiritual, or that there is eternal life. This comes from the principle which he assumes. And this is to “eatofthetreeoftheknowledgeofgoodandevil,” of which the more anyone eats, the more dead he becomes. But he who would be wise from the Lord, and not from the world, says in his heart that the Lord must be believed, that is, the things which the Lord has spoken in the Word, because they are truths; and according to this principle he regulates his thoughts. He confirms himself by things of reason, of knowledge, of the senses, and of nature[per rationalia,scientifica,sensualia et naturalia],and those which are not confirmatory he casts aside.
해설
AC.128은 앞에서 설명한 두 가지 질서를 각각 한 사람의 마음속 말처럼 펼쳐 보여 줍니다.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은 ‘내가감각으로볼수있고기억지식으로이해할수있어야믿겠다’고 말합니다. 반대로 주님으로부터 지혜로워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주님께서 말씀에서 하신 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먼저 그것을 믿고, 그 원리에 따라 자신의 생각을 질서 지웁니다. 따라서 두 사람의 차이는 한쪽은 생각하고 다른 쪽은 생각하지 않는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무엇을 출발점으로 삼아 생각하느냐가 다릅니다.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의 출발점은 감각과 기억지식입니다. 그는 천적이고 신적인 것조차 먼저 자연적인 차원에서 확인되어야 받아들이겠다고 합니다. ‘자연적인것들이영적인것들과모순될수없다’는 생각 자체만 떼어 놓으면 그럴듯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자연적인 것을 영적인 것의 심판자로 세운다는 데 있습니다. 보이지 않으면 믿지 않고, 자기가 가진 기억지식으로 이해되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원리를 먼저 세웠기 때문입니다. 이때 가장 바깥에 있어야 할 것이 가장 위에 올라가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것을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만큼 불가능하다고 표현한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감각적인 것은 자연계에 나타나는 것을 받아들이고, 기억지식은 그렇게 받아들인 것들을 기억에 간직합니다. 그것들은 자기 차원에서 반드시 필요한 기능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천적이고 신적인 것의 근원을 발견하여 그 진위를 판정하려 한다면, 아래에 있는 것으로 위에 있는 것의 근원을 만들어 내려는 셈이 됩니다. AC.121에서 제시된 천적 질서는 정반대였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지혜가 나오고, 지혜를 통하여 지성이, 지성을 통하여 이성이 나오며, 이성을 통하여 기억에 속한 앎들이 생명을 얻습니다.
따라서 ‘선악을알게하는나무의열매를먹는것’은 단순히 지식을 얻는 행위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선과 진리를 주님으로부터 받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알아내려는 질서의 전도를 의미합니다. 그런 까닭에 더 많이 먹을수록 더 많은 정보를 얻어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죽은상태’가 됩니다. 사람이 감각과 기억지식을 최종 기준으로 삼을수록 영적인 것을 받아들이는 내적인 길이 닫히고, 마침내 영적인 실재와 영원한 생명 자체도 믿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AC.128의 후반부는 이 대목을 반지성주의로 읽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매우 분명하게 합니다. 주님으로부터 지혜로워지기를 원하는 사람 역시 이성과 기억지식과 감각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을 사용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을 버리라고 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을 ‘통하여자신을확증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금지되는 것은 이성적 사고나 지식의 사용이 아니라 그것들을 신앙의 최초 원리로 삼는 것입니다. 동일한 이성과 기억지식도 어디에 놓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역할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 ‘주님께서말씀에서하신것들을믿는다’는 것도 생각을 중단하라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어지는 문장이 그 오해를 막습니다. 그는 ‘이원리에따라자신의생각을질서지웁니다.’ 즉 말씀의 진리를 받아들인 뒤 생각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진리를 중심으로 자신의 사고 전체를 질서 있게 세웁니다. 그리고 이성에 속한 것들과 기억지식과 감각적인 것들과 자연적인 것들 가운데 그 진리를 확증하는 것들을 사용합니다. 신앙과 사고가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가 사고의 질서를 바로잡는 것입니다.
마지막의 ‘확증하지않는것들은제쳐둔다’는 표현은 문맥 안에서 신중하게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자신이 믿고 싶은 것과 맞지 않는 사실은 무조건 무시해도 된다는 일반적인 지적 태도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스베덴보리가 다루는 것은 천적이고 신적인 것을 무엇으로부터 배우며 무엇을 최초 원리로 삼을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 문맥에서 핵심은 자연적인 지식이 신적인 진리 위에 서서 그것을 재판하지 못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이 문장을 현대적인 의미의 사실 회피나 무비판적인 확증 편향을 정당화하는 말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결국 AC.128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문제를 ‘지식대무지’의 대립이 아니라 ‘질서대질서의전도’로 보여 줍니다.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인간도 이성과 기억지식과 감각을 사용하고, 주님으로부터 지혜로워지는 사람도 그것들을 사용합니다. 차이는 그것들이 주인의 자리에 있는가, 아니면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를 섬기는 자리에 있는가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시작하여 이성과 기억지식과 감각적인 것에까지 내려가는 것이 생명의 질서라면, 감각과 기억지식에서 시작하여 그것으로 신적인 것을 판단하려는 것은 그 질서를 거꾸로 세우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선악을알게하는나무의열매를먹는것’의 핵심입니다. (AC.128)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Bu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thou shalt not eat of it; for in the day that thou eatest thereof, dying thou shalt die.(창2:17)
AC.126
이말씀을방금설명한말씀과함께보면,주님으로부터오는모든퍼셉션을통하여무엇이참되고선한지를아는것은허락되지만,자기자신과세상으로부터그것을아는것은허락되지않는다는것을의미합니다.다시말하면,우리는감각적인것들과기억지식을통하여신앙의신비를탐구해서는안됩니다.그렇게하면신앙의천적인것이파괴되기때문입니다. These words,taken together with those just explained,signify that it is allowable to become acquainted with what is true and good by means of every perception derived from the Lord,but not from self and the world;that is,we are not to inquire into the mysteries of faith by means of the things of sense and of the memory[per sensualia et scientifica],for in this case the celestial of faith is destroyed.
해설
AC.126은 창2:16의 ‘동산각종나무의열매는네가임의로먹되’라는 허락과 이어지는 창2:17의 금지를 하나의 질서 안에서 이해하게 합니다. AC.125에서는 ‘모든나무의열매를먹는것’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을 통하여 무엇이 선하고 참된지를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AC.126은 그 반대편을 밝힙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을 통하여 선과 진리를 아는 것은 허락되지만,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그것을 알아내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아느냐’보다 ‘어디에서아느냐’입니다. 천적 인간에게 선과 진리를 아는 것 자체가 금지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앎의 근원을 주님으로부터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 바꾸는 데 있습니다. AC.123-124에서도 천적 인간은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퍼셉션하며, 지혜와 지성과 이성과 지식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AC.126의 금지는 지식을 제한하는 금지가 아니라 생명의 근원과 질서를 뒤집지 말라는 금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감각적인것들과기억지식을통하여신앙의신비를탐구해서는안된다’고 표현합니다. 이 문장은 AC.80의 설명을 거의 그대로 다시 불러옵니다. 그러나 여기까지 읽어온 독자는 이제 이것을 감각이나 기억지식 자체에 대한 부정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는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AC.118에서는 기억지식을 천적·영적 인간의 질서에서 최하위 또는 경계라고 했고, AC.120에서는 감각적인 것과 기억지식이 지성과 지혜의 경계를 이룬다고 했으며, AC.121에서는 이성을 통하여 기억에 속한 앎들이 생명을 얻는 것이 천적 질서라고 했습니다. AC.125에서는 태고교회 사람들조차 기억에 간직된 것을 숙고했다고 명시했습니다.
그러므로 ‘감각적인것들과기억지식을통하여’ 탐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그것들을 사용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이 자연계에서 보고 듣고 배우며 기억하고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인간 삶의 정상적인 부분입니다. 문제는 가장 바깥에 있는 감각과 기억지식을 신앙의 신비를 판정하는 최초의 기준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주님으로부터 안을 거쳐 밖으로 흘러야 할 천적 질서가 거꾸로 되어, 바깥의 것이 안의 것을 판단하게 됩니다.
바로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그렇게 할 경우 ‘신앙의천적인것이파괴된다’고 말합니다. 앞에서 계속 보아 온 천적 질서의 핵심은 사랑과 신앙, 지혜와 지성, 이성과 앎이 모두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내감각으로확인할수있는가’, ‘내가이미알고있는기억지식으로설명할수있는가’를 먼저 세우고, 그것으로 신앙의 신비를 받아들일지 말지를 결정한다면 신앙은 더 이상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질서 안에 있지 않게 됩니다. 파괴되는 것은 인간의 이성이나 지식이 아니라 신앙 안에 있어야 할 천적인 질서입니다.
이 점에서 AC.126은 이성을 사용하지 않는 맹목적인 신앙을 권하는 말도 아닙니다. AC.121은 이성을 천적 질서 안에 분명히 포함시켰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성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이성이 어디에서 빛을 받느냐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지혜와 지성을 거쳐 생명을 받는 이성은 그 아래의 기억지식까지 살아 있게 하지만, 감각과 기억지식을 출발점으로 삼아 신앙의 신비를 재판하려는 이성은 질서를 거꾸로 세우게 됩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가 경계하는 것은 이성 자체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 세상에서 출발하는 탐구입니다.
따라서 AC.126은 창2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관한 금지를 이해하는 결정적인 문턱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선과 진리를 알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알아내어 자기 것으로 만들지 말라고 하십니다. 천적 인간에게 허락된 길은 주님으로부터 받아 알고, 받은 것을 자유롭게 누리고 사용하면서도 그 근원이 주님이심을 인정하는 길입니다. 감각과 기억지식도 그 질서 안에서는 제 역할을 하지만, 그것들이 주님을 대신하여 신앙의 신비를 판단하는 출발점이 될 때 신앙의 천적인 것이 파괴됩니다. (AC.126)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And out of the ground made Jehovah God to grow every tree desirable to behold, and good for food; the tree of lives also, in the midst of the garden; and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창2:9)
AC.102
‘나무’(tree)는퍼셉션을뜻하고,‘보기에아름다운나무’(treedesirabletobehold)는진리의퍼셉션을,‘먹기에좋은나무’(treegoodforfood)는선의퍼셉션을뜻합니다.‘생명나무’(treeoflives)는사랑과거기서나오는신앙을,‘선악을알게하는나무’(treeoftheknowledgeofgoodandevil)는감각적인것에서나오는신앙,곧단순한기억지식에서나오는신앙을뜻합니다. A “tree” signifies perception; a “treedesirabletobehold,” the perception of truth; a “treegoodforfood,” the perception of good; the “treeoflives,” love and the faith thence derived; the “treeoftheknowledgeofgoodandevil,” faith derived from what is sensuous, that is, from mere memory-knowledge.
해설
AC.102는 창2:9에 나오는 여러 ‘나무’의 속뜻을 먼저 한꺼번에 제시합니다. ‘나무’ 자체는 퍼셉션을 뜻하고, 그 가운데 ‘보기에아름다운나무’는 진리의 퍼셉션을, ‘먹기에좋은나무’는 선의 퍼셉션을 뜻합니다. 그리고 동산 가운데 있는 ‘생명나무’는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을, ‘선악을알게하는나무’는 감각적인 것에서, 곧 단순한 기억지식에서 나오는 신앙을 뜻합니다.
여기서 먼저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나무’를 단순히 어떤 지식이나 교리를 뜻한다고 하지 않고 ‘퍼셉션’과 연결한다는 점입니다. 앞에서 에덴동산은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흘러드는 천적 인간의 지성을 뜻했습니다(AC.98-101). 그러므로 그 동산에서 자라는 나무들도 그 사람 안에 독립적으로 축적된 지식의 목록이라기보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 안에서 진리와 선을 퍼셉션하는 것과 관계됩니다. ‘보기에아름다운나무’와 ‘먹기에좋은나무’가 각각 진리와 선의 퍼셉션을 뜻하는 것도 이 문맥 안에 있습니다.
특히 ‘생명나무’가 사랑만이 아니라 ‘사랑과거기서나오는신앙’을 뜻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바로 앞에서 살펴본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와 이어집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주된 것이며, 신앙은 그 사랑에서 나옵니다. 따라서 생명나무가 나타내는 것은 사랑과 신앙이 서로 분리된 상태가 아니라, 사랑이 근원이 되고 신앙이 거기서 나오는 질서입니다.
반대로 ‘선악을알게하는나무’는 ‘감각적인것에서나오는신앙,곧단순한기억지식에서나오는신앙’을 뜻합니다. 여기서 곧바로 ‘감각이나기억지식은악하다’고 결론 내리면 안 됩니다. 앞의 여러 번호에서도 이성과 기억지식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질서 안에 놓여야 함을 보았습니다. AC.102에서 대비되는 것은 지식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신앙의 근원과 질서입니다.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앙과, 감각적인 것과 단순한 기억지식에서 신앙을 끌어내려는 질서가 서로 대비되고 있습니다.
AC.102는 아직 이 각각의 의미를 자세히 증명하거나 설명하지 않습니다. 창2:9의 여러 나무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먼저 제시하는 개요에 가깝습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나무는퍼셉션’, ‘생명나무는사랑과거기서나오는신앙’, ‘선악을알게하는나무는감각적인것과단순한기억지식에서나오는신앙’이라는 기본 구조를 붙들고, 이어지는 설명에서 그 의미가 어떻게 구체화되는지를 따라가는 것이 좋습니다. (AC.102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