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And Jehovah God said,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 help as with him. (창2:18)

 

AC.138

‘혼자’(alone)는 사람이 주님께 인도받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상에 의해 인도받기를 원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를 돕는 배필’(help as with him)은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하며, 이것은 뒤에서 ‘여자로 지어진 갈빗대’(rib built into a woman)라고 합니다. By “alone” is signified that he was not content to be led by the Lord, but desired to be led by self and the world; by a “help as with him” is signified man’s own, which is subsequently called a “rib built into a woman.”

 

해설

AC.138부터는 AC.132에서 미리 요약했던 창2:18의 속뜻을 구체적으로 풀기 시작합니다. 먼저 ‘혼자’(alone)는 단순히 곁에 다른 사람이 없는 외로운 상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여기서 ‘혼자’는 사람이 주님께 인도받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상에 의해서도 인도받기를 원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창2:18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는 이 문맥에서 사회적 고독의 문제보다 먼저, 주님의 인도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기에게 속한 어떤 것으로도 살아가기를 원하는 인간의 상태를 다룹니다.

 

이 설명은 AC.131부터 이어져 온 흐름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proprium으로 기울기 시작했고, AC.132에서는 사람이 주님께 인도받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상에 의해서도 인도받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AC.133에서는 주님께서 먼저 그에게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을 알게 하셨지만 그가 여전히 proprium으로 기울었다고 했으며, AC.134에서는 마침내 그가 proprium의 상태로 들어가도록 허용되고 proprium을 받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AC.138의 ‘혼자’는 지금까지 설명된 이 상태를 창2:18의 한 표현 안에서 다시 짚어 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그를 돕는 배필’(help as with him)은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해석입니다. 문자적 의미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하여 돕는 배필을 마련하시는 장면이지만, 지금 다루는 속뜻에서는 인간이 자기에게 속한 것으로 느끼며 살아가기를 원하는 그 proprium이 중심에 놓입니다. 따라서 이 대목에서 스베덴보리가 관심을 두는 것은 남성과 여성 가운데 어느 쪽이 다른 쪽을 돕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주님께만 인도받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 인간에게 proprium이 어떻게 주어지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AC.138은 이 proprium을 뒤에 나오는 ‘여자로 지어진 갈빗대’(rib built into a woman)와도 직접 연결합니다. AC.134에서는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신 장면 전체가 인간에게 proprium이 주어지는 것을 묘사한다고 했는데, 이제 그 관계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창2:18의 ‘그를 돕는 배필’과 창2:21-23의 ‘여자로 지어진 갈빗대’는 서로 떨어진 두 표상이 아니라 동일한 proprium의 문제를 이어서 보여 주는 것입니다. 다만 왜 하필 ‘갈빗대’이며, 그것이 ‘여자’로 지어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직 설명되지 않았으므로 다음 번호들을 기다려야 합니다.

 

여기서 ‘돕는 배필’이 proprium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자연스럽게 중요한 질문을 낳습니다. 앞에서는 인간이 주님께 인도받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상에 의해서도 인도받기를 원하는 것이 proprium으로 기울어지는 상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창2:18에서는 바로 그 proprium에 해당하는 것이 ‘돕는 배필’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원했던 proprium을 주님께서는 어떤 방식으로 다루셔서 인간의 삶 가운데 둘 수 있게 하시는가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나 AC.138은 아직 그 질문에 직접 답하지 않습니다.

 

다만 앞의 개요에서는 이미 몇 가지 중요한 단서가 주어졌습니다. AC.134에서는 인간이 proprium의 상태로 들어가도록 허용되고 proprium을 받는다고 했으며, AC.135에서는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그 proprium에 결합되어 하나처럼 보이게 된다고 했습니다. AC.136에서는 다시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노센스가 그 proprium 안에 스며들게 되어 그것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되지 않도록 하신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인간에게 주어진 proprium을 주님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독립적인 생명의 근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proprium으로 기울어지는 상태를 허용하시면서도 그것을 그대로 방치하지 않으십니다.

 

또한 여기서 ‘여자’를 곧바로 proprium의 고정된 상응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것은 창2:18-23의 특정한 문맥입니다. AC.103에서 확인했듯이 말씀의 표현은 그것이 놓인 주제와 문맥을 떠나 기계적인 일대일 대응표처럼 다룰 수 없습니다. 여기서는 태고교회 후손들이 proprium으로 기울어지는 상태가 주제이므로 ‘그를 돕는 배필’과 ‘여자로 지어진 갈빗대’가 그 proprium을 묘사합니다. 이후 다른 문맥에서 ‘여자’가 등장한다고 해서 언제나 같은 의미를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AC.138에서 지금 붙들어야 할 것은 세 가지 표현을 하나의 흐름 안에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혼자’는 주님께 인도받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상에 의해서도 인도받기를 원하는 상태를 의미하고, ‘그를 돕는 배필’은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하며, 그 proprium은 이어지는 말씀에서 ‘여자로 지어진 갈빗대’로 묘사됩니다. 이제 남는 질문은 ‘그를 돕는 배필’이 왜 proprium을 의미하는지, 갈빗대가 왜 proprium을 나타내는지, 그리고 그 갈빗대가 여자로 지어지는 과정은 무엇을 의미하는지입니다. 이 질문들은 앞질러 답하기보다 이어지는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따라가며 하나씩 확인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AC.138)

 

 

 

AC.137, 창2:18-25 배경, ‘태고교회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 천적 인간에서 proprium으로 기울어진 후

AC.137창세기의 처음 세 장은 전체적으로 태고교회를 다루는데, 이 교회는 그 처음 시기부터 멸망한 마지막 시기에 이르기까지 ‘사람’(man) [homo]이라 합니다. 이 장의 앞부분은 태고교회가 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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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7

창세기의 처음 세 장은 전체적으로 태고교회를 다루는데, 이 교회는 그 처음 시기부터 멸망한 마지막 시기에 이르기까지 ‘사람’(man) [homo]이라 합니다. 이 장의 앞부분은 태고교회가 천적 인간이었던 가장 번성한 상태를 다루며, 여기서는 이제 proprium으로 기울어진 사람들과 그 후손들을 다룹니다. The first three chapters of Genesis treat in general of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is called “man” [homo] from its first period to its last, when it perished; the preceding part of this chapter treats of its most flourishing state, when it was a celestial man; here it now treats of those who inclined to their own, and of their posterity.

 

해설

AC.137은 지금까지 읽어 온 창세기 1장과 2장, 그리고 앞으로 이어질 3장을 하나의 큰 역사로 묶어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의 처음 세 장이 전체적으로 태고교회를 다룬다고 밝힙니다. 그리고 그 태고교회를 그 처음 시기부터 마침내 멸망하는 마지막 시기에 이르기까지 ‘사람’(man) [homo]이라고 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사람’은 단지 한 개인을 가리키는 표현으로만 읽을 수 없습니다. 창1-3의 속뜻에서는 태고교회와 그 교회를 이루었던 사람들의 상태가 하나의 연속적인 역사로 펼쳐지고 있습니다.

 

이 설명은 지금까지 우리가 창1과 창2를 읽어 온 흐름도 다시 정리해 줍니다. 창1에서는 사람이 거듭나는 과정이 단계적으로 묘사되었고, 창2 앞부분에서는 그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된 상태가 다루어졌습니다. AC.137은 이 장의 앞부분을 태고교회의 ‘가장 번성한 상태’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번성했다는 것은 외적인 세력이나 물질적 풍요가 절정에 이르렀다는 뜻이 아니라, 태고교회가 천적 인간으로서 주님께 인도받고 퍼셉션으로 선과 진리를 알며, 모든 지혜와 지성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질서 안에 있었던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제 창2 안에서 중요한 전환이 일어납니다. AC.131에서 태고교회의 후손들이 proprium으로 기울기 시작했다고 했고, AC.132-136은 창2:18-25가 바로 그 문제를 다룬다는 전체 개요를 제시했습니다. AC.137은 이 전환을 태고교회 전체 역사 속에 놓아 줍니다. 앞부분이 태고교회의 가장 번성한 천적 상태였다면, 이제부터는 proprium으로 기울어진 사람들과 그 후손들이 다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창2 후반부는 창3의 타락 이야기와 단절된 별개의 이야기가 아니라, 태고교회의 상태가 변화해 가는 과정 가운데 놓여 있습니다.

 

여기서 ‘그 후손들’이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한 사람의 어느 순간의 심리 변화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대를 따라 변화해 가는 태고교회의 상태를 보고 있습니다. AC.127에서도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 신앙의 신비를 탐구하려는 욕망이 태고교회 후손들의 타락의 원인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37은 창2 후반부에서 시작되는 proprium으로의 기울어짐과 그 후손들의 상태가 결국 창3까지 이어지는 큰 흐름 속에 있음을 보여 줍니다. 다만 그 변화가 구체적으로 어떤 단계를 거쳐 멸망에 이르게 되는지는 앞으로의 본문을 따라가며 확인해야 합니다.

 

또한 AC.137은 ‘태고교회’라는 말을 읽을 때 한 시점의 고정된 상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같은 태고교회 안에도 ‘가장 번성한 상태’가 있었고, 이후 proprium으로 기울어진 사람들과 그 후손들의 상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창1-3 전체가 그 처음 시기부터 마지막 멸망에 이르기까지의 흐름을 다룬다고 합니다. 따라서 ‘태고교회 사람들은 모두 천적 인간이었다’는 식으로 모든 시기를 동일하게 묶어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태고교회 자체에도 시작과 절정, 변화와 쇠퇴의 과정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창3을 읽을 때에도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창3의 뱀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타락을 갑자기 등장한 한 개인의 단회적인 사건으로만 읽기보다, 이미 창2 후반부에서 시작된 태고교회 후손들의 proprium으로의 기울어짐이 어떻게 더 진행되는지를 살펴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AC.137은 아직 그 구체적인 과정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지금 단계에서 중요한 것은 창1-3 전체가 태고교회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를 다루며, 바로 이 지점부터 이야기의 초점이 ‘가장 번성한 천적 상태’에서 ‘proprium으로 기울어진 사람들과 그 후손들’로 이동한다는 큰 구조를 붙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AC.137은 짧지만 창1-3 전체의 독법을 결정하는 중요한 안내문입니다. 창1의 거듭남, 창2 앞부분의 천적 인간, 창2 후반부에서 시작되는 proprium으로의 기울어짐, 그리고 앞으로 창3에서 전개될 태고교회의 쇠퇴와 멸망은 서로 떨어진 이야기들이 아니라 하나의 연속적인 영적 역사 안에 놓여 있습니다. 이 큰 틀을 기억하면 이제부터 상세히 설명될 창2:18-25도 단순히 최초 남녀의 창조와 결혼에 관한 이야기로만 읽지 않고, 태고교회가 가장 번성한 천적 상태에서 proprium으로 기울어 가기 시작하는 중대한 전환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AC.137)

 

 

 

AC.138, 창2:18, ‘혼자와 돕는 배필 - 인간이 원하는 proprium’ (AC.138-141)

창2:18-25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And Jehovah God said,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 help 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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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6, 창2:18-25 개요, ‘프로프리움 안에 주입된 이노센스’ (25절)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25절) AC.136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노센스가 이 proprium 안에 스며들게 되어, 그 proprium이 여전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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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25절)

 

AC.136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노센스가 이 proprium 안에 스며들게 되어, 그 proprium이 여전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되지 않도록 하십니다. (25절) And innocence from the Lord is instilled into this own, so that it still might not be unacceptable (verse 25).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25절)

 

해설

AC.136은 창2:25의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는 말씀의 속뜻을 미리 요약하면서, AC.132부터 이어져 온 proprium의 문제가 어떤 상태에 이르게 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인간에게 proprium이 허락되고,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그 proprium에 결합되어 하나처럼 보이게 된 데 이어, 이제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노센스가 그 proprium 안에 스며들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 proprium이 여전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되지 않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가장 먼저 주목할 것은 이노센스의 근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인간의 proprium 안에 이노센스가 있다고 하지 않고,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온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계속 확인해 온 질서와 일치합니다. 지혜와 지성, 이성과 지식이 주님의 것이며,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도 주님께서 부여하신 것이었습니다. 이제 proprium 안에 들어오는 이노센스 역시 인간 자신에게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따라서 인간에게 proprium이 주어졌다고 해서 생명과 선의 근원이 인간 자신에게 옮겨간 것은 아닙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이노센스가 proprium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스며든다는 점입니다. AC.134에서는 인간에게 proprium이 주어졌고, AC.135에서는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그 proprium에 결합되었습니다. 그런데 AC.136에서도 proprium 자체를 제거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노센스가 그 안에 스며들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흐름만 놓고 보면, 주님께서는 인간이 proprium으로 기울려는 성향을 단순히 없애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허용하시면서도, 그 안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과 이노센스가 함께할 수 있도록 다루고 계십니다.

 

이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되지 않도록’이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이 문장은 proprium 그 자체를 아무 문제 없는 것으로 선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노센스가 그 안에 스며들어야 그것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AC.136까지 읽은 단계에서는 인간의 proprium을 독립적으로 선한 것이라고 볼 수도 없고, 반대로 주님께서 단순히 제거하시는 대상으로만 볼 수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그것을 허락하시고 생명을 결합하시며 이노센스를 스며들게 하시는 과정 전체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 설명은 창2:25의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를 읽는 방향도 미리 보여 줍니다. 아직 ‘벌거벗음’과 ‘부끄러워하지 않음’ 각각의 구체적인 속뜻은 뒤의 설명을 기다려야 하지만, AC.136에 따르면 이 구절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노센스가 proprium 안에 있는 상태와 관계됩니다. 따라서 여기서 벌거벗음은 곧바로 수치나 죄의 상태를 뜻한다고 미리 결정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창3에서 벌거벗음을 부끄러워하게 되는 상태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도 이후 설명을 따라가며 확인해야 합니다.

 

AC.132부터 AC.136까지를 함께 보면 이제 하나의 흐름이 드러납니다. 인간은 주님께만 인도받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proprium으로 기울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인간에게 자신이 받은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을 알게 하셨지만, 인간은 여전히 proprium으로 기울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proprium의 상태로 들어가도록 허용되고 proprium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그 proprium에 결합되어 하나처럼 보이게 되었고, 이제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노센스가 그 안에 스며들게 됩니다. 인간의 proprium을 허용하시면서도 그것을 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는 주님의 질서가 조금씩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AC.136에서 아직 ‘이노센스란 정확히 무엇인가?’를 후대의 교리까지 끌어와 완성해서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현재 독자가 붙들어야 할 것은 더 단순하면서도 중요합니다. 인간에게 proprium이 주어졌지만,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독립된 자기 생명의 근원이 된 것은 아닙니다. 그 안에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천적·영적 생명이 결합되고, 다시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노센스가 스며듭니다. 바로 이 상태가 창2:25의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한’ 상태를 이해하는 문을 열어 줍니다. (AC.136)

 

 

 

AC.137, 창2:18-25 배경, ‘태고교회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 천적 인간에서 proprium으로 기울어진 후

AC.137창세기의 처음 세 장은 전체적으로 태고교회를 다루는데, 이 교회는 그 처음 시기부터 멸망한 마지막 시기에 이르기까지 ‘사람’(man) [homo]이라 합니다. 이 장의 앞부분은 태고교회가 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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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5, 창2:18-25 개요,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proprium에 결합되어 하나처럼 보이다’ (24절)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4절) AC.135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인간의 proprium에 결합되어, 그것들이 하나처럼 보이게 됩니다. (24절) Celestial and 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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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4절)

 

AC.135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인간의 proprium에 결합되어, 그것들이 하나처럼 보이게 됩니다. (24절) Celestial and spiritual life are adjoined to the man’s own, so that they appear as a one (verse 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4절)

 

해설

AC.135는 창2:24의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는 말씀의 속뜻을 미리 요약합니다. AC.132-134에서는 사람이 주님께 인도받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proprium으로 기울었으며, 마침내 자신의 proprium의 상태로 들어가도록 허용되고 proprium을 받는 과정이 설명되었습니다. 이제 AC.135에서는 그 proprium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과 어떤 관계를 맺게 되는지가 처음으로 나타납니다.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인간의 proprium에 결합되어 그것들이 하나처럼 보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proprium이 주어졌다고 해서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독립된 생명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앞의 AC.124에서는 지혜와 지성과 이성과 지식이 사람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고 했고, AC.129에서는 출발점이 주님이면 생명이고 자기 자신이면 죽음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인간에게 proprium이 주어진다는 것은 인간이 자기 안에 독립적인 생명의 근원을 갖게 된다는 뜻일 수 없습니다. AC.135는 오히려 주님으로부터 오는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그 proprium에 결합된다고 말합니다.

 

특히 ‘하나처럼 보이게 된다’는 표현을 주의 깊게 읽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적·영적 생명과 인간의 proprium이 그 근원에서 실제로 하나가 된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이 ‘하나처럼 보인다’고 합니다. 인간의 입장에서는 사랑하고 생각하고 원하고 행동하는 것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처럼 경험됩니다. 그러나 앞에서 계속 밝혀 온 생명의 근원은 주님입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인간이 자기의 것으로 느끼는 삶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이 점에서 AC.135는 ‘허락된 proprium’이라는 AC.132의 표현도 조금씩 이해하게 합니다. 만일 인간에게 proprium이 주어진다는 것이 단순히 주님에게서 떨어져 나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라면, 이어서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그 proprium에 결합된다는 설명은 나오기 어려울 것입니다. 오히려 인간에게 자기의 것으로 느껴지는 어떤 것이 주어지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거기에 결합됨으로써 인간에게는 그것들이 하나처럼 보이는 상태가 형성됩니다. 다만 이 결합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는 아직 이 한 문장만으로 더 나아가 규정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이 때문에 창2:24의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도 이 문맥에서는 먼저 자연적인 부부의 결합을 넘어 인간의 proprium과 천적·영적 생명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씀으로 읽게 됩니다. 앞에서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신 것이 인간에게 proprium이 주어지는 것을 묘사한다고 했으므로, 이제 ‘한 몸’이 되는 것은 그 proprium에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결합되어 하나처럼 보이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구체적인 각 표현의 상응은 이어지는 번호에서 설명될 것이므로 여기서는 그 전체 구조만 붙드는 것이 안전합니다.

 

AC.135는 또한 인간의 자유로운 삶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문을 엽니다. 인간은 모든 것을 주님으로부터 받는다고 하면서도 실제 삶에서는 ‘내가 생각한다’, ‘내가 원한다’, ‘내가 사랑한다’, ‘내가 행한다’고 느끼며 살아갑니다. AC.135의 표현을 따르면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인간의 proprium에 결합되어 ‘하나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러한 경험이 가능하다고 이해할 여지가 생깁니다. 그러나 자유와 책임의 관계까지 여기서 완성해서 설명하기보다는, 현재 본문이 직접 말하는 범위 안에서 그 가능성만 열어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결국 AC.135는 proprium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한 문장을 제공합니다. 인간에게 proprium이 주어지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독립된 별도의 생명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은 여전히 주님으로부터 오며, 그것들이 인간의 proprium에 결합되어 인간에게는 하나처럼 보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창2:24를 해설하면서 중요한 것은 ‘하나가 된다’는 말만이 아니라 ‘하나처럼 보인다’는 스베덴보리의 섬세한 구별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AC.135)

 

 

 

AC.136, 창2:18-25 개요, ‘프로프리움 안에 주입된 이노센스’ (25절)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25절) AC.136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노센스가 이 proprium 안에 스며들게 되어, 그 proprium이 여전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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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4, 창2:18-25 개요,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다 - 인간에게 proprium이 주어짐’ (21-23절)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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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21-23절)

 

AC.134

그러므로 사람은 자신의 proprium의 상태로 들어가도록 허용되고, 그에게 proprium이 주어집니다. 이것은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신 것으로 묘사됩니다. (21-23절) Wherefore he is let into a state of his own, and an own is given him, which is described by the rib built into a woman (verses 21 to 23).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21-23절)

 

해설

AC.134는 AC.131부터 시작된 짧은 개요의 결론에 해당합니다. 태고교회의 후손들이 proprium으로 기울기 시작했고, 주님께서는 먼저 그들에게 자신들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여전히 proprium으로 기울자, 이제 그들은 자신의 proprium의 상태로 들어가도록 허용되고 proprium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창2:21-23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는 장면이 바로 이 과정을 묘사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들어가도록 허용되고’와 ‘주어집니다’라는 두 표현입니다. 인간이 단순히 주님에게서 벗어나 자기 힘으로 proprium을 만들어 냈다고 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proprium을 원하지만, 그 상태로 들어가는 것조차 허용되며 proprium도 그에게 주어집니다. 따라서 앞으로 이 본문을 읽을 때에는 인간의 proprium을 주님과 완전히 독립하여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만 왜 주님께서 이것을 허용하시며 어떤 의미에서 proprium을 ‘주신다’고 하는지는 이어지는 설명을 기다려야 합니다.

 

또한 AC.134는 창2:21-23의 ‘여자’를 해석하는 방향을 미리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이 문맥에서 여자는 우선 자연적 성별로서의 여성을 설명하기 위해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주어진 proprium을 묘사합니다. 따라서 이 본문을 근거로 남성과 여성의 가치나 우열을 논하는 것은 지금 스베덴보리가 다루는 속뜻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갈빗대가 여자로 만들어지는 장면 전체가 태고교회 후손들에게 proprium이 주어지는 내적 과정을 나타낸다는 것이 AC.134의 요점입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여자 곧 proprium’이라는 고정된 상응 공식을 만들어서도 안 됩니다. AC.103에서 이미 보았듯이 어떤 표현의 의미는 그것이 놓인 주제와 문맥에 따라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서는 AC.131부터 계속 다루고 있는 주제가 태고교회 후손들의 proprium이므로, 창2:21-23의 여자가 그 proprium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왜 ‘갈빗대’이며, 왜 그것을 ‘여자’로 만드셨는지는 아직 AC.134가 설명하지 않습니다.

 

특히 이 대목에서는 ‘proprium이 주어졌다’는 말을 곧바로 ‘악이 주어졌다’는 뜻으로 바꾸어 읽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AC.132에서도 ‘허락된 proprium’이라고 했고, AC.134에서는 다시 ‘proprium이 주어진다’고 합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과 세상에 의해서도 인도받기를 원하는 성향이 이 과정의 배경에 있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주님께서 그 상태를 어떻게 다루시고 어떤 proprium을 주시는지는 아직 설명 중에 있습니다. 따라서 proprium의 성질에 대한 최종 판단은 다음 번호들을 읽은 뒤 내려야 합니다.

 

이렇게 보면 AC.132-134에는 하나의 분명한 순서가 있습니다. 인간은 주님께만 인도받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proprium으로 기울어집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그에게 주님께서 부여하신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을 알게 하십니다. 그럼에도 인간이 여전히 proprium으로 기울자, 그가 자신의 proprium의 상태로 들어가는 것을 허용하시고 그에게 proprium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갈빗대와 여자의 이야기는 인간의 요구를 주님께서 단순히 거절하시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 요구를 주님의 질서 안에서 다루시는 과정으로 읽기 시작해야 합니다.

 

AC.134는 아직 그 과정의 의미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창2:21-23이 무엇을 묘사하는지만 먼저 알려 줍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갈빗대가 왜 proprium인가’, ‘여자로 만드셨다는 것은 무엇인가’, ‘주님께서 주시는 proprium은 인간이 처음 원했던 proprium과 같은 것인가’ 같은 질문을 열어 둔 채 다음 설명을 기다리는 것이 좋습니다. 바로 이 질문들이 이어지는 본문을 읽게 하는 열쇠가 될 것입니다. (AC.134)

 

 

 

AC.135, 창2:18-25 개요,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proprium에 결합되어 하나처럼 보이다’ (24절)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4절) AC.135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인간의 proprium에 결합되어, 그것들이 하나처럼 보이게 됩니다. (24절) Celestial and 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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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3, 창2:18-25 개요, ‘먼저 주님께 받은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을 알게 하시다’ (19-20절)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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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19, 20절)

 

AC.133

그리고 먼저 주님께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에게 부여하신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을 알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자신의 proprium으로 기울어집니다. (19-20절) And first it is given him to know the affections of good and the knowledges of truth with which he is endowed by the Lord; but still he inclines to his own (verses 19–20).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19, 20절)

 

해설

AC.133은 창2:19-20의 동물들을 사람에게로 이끌어 이름을 짓게 하시는 장면이 앞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먼저 요약합니다. AC.132에서는 사람이 주님께 인도받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상에 의해서도, 곧 proprium에 의해서도 인도받기를 원하기 때문에 인간에게 허락된 proprium을 다룬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러한 인간에게 곧바로 proprium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에게 이미 주어진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들이 사람에게 있기는 하지만 그 근원은 사람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라는 점입니다. 원문도 그것들이 ‘주님에 의해 부여된 것’이라고 명시합니다. 이것은 AC.122-124에서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며 지혜와 지성과 이성과 지식도 사람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고 한 설명과 그대로 이어집니다. 인간에게 선을 사랑하는 애정이 있고 진리를 아는 앎이 있지만, 그것들의 최초 근원은 주님입니다.

 

따라서 창2:19-20에서 사람이 동물들에게 이름을 붙이는 장면도 아직은 단순히 인간이 자연계의 동물들을 분류하고 명명하는 이야기로 읽어서는 안 된다는 방향이 제시됩니다. AC.133이 먼저 해석의 열쇠를 주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번호들에서 각각의 표현이 어떻게 풀리는지는 기다려야 하지만, 적어도 이 장면이 사람에게 주님께서 부여하신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을 알게 하는 과정과 관련된다는 것은 이미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알게 된 뒤에도 사람은 ‘여전히’ proprium으로 기울어집니다. 이 표현이 중요합니다. 인간이 proprium을 원하는 까닭이 주님께서 주신 것이 부족해서라고 설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먼저 자신에게 주어진 선의 애정과 진리의 앎을 알게 되었는데도, 그는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기에게 고유한 어떤 것을 원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proprium의 문제는 단순히 무지에서 생긴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자기에게 속한 것으로 느끼고 살아가기를 원하는 성향과 연결되어 있음을 조금씩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이 점에서 AC.133은 AC.123과도 의미 있게 연결됩니다. 천적 인간은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퍼셉션으로 인정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주님께서 주신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proprium으로 기울어집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들이 사라진 뒤 proprium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에게 고유한 것을 원하는 방향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 차이는 앞으로 인간에게 ‘허락된 proprium’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AC.133에서는 아직 proprium 자체를 악이라고 단정하거나, 반대로 인간의 독립성과 자유를 위한 좋은 것으로 설명해서도 안 됩니다. 현재 본문이 말하는 것은 매우 제한적이고 분명합니다. 인간은 주님께서 자신에게 부여하신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을 먼저 알게 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proprium으로 기울어집니다. 주님께서 이 기울어짐을 어떻게 다루시며 어떤 proprium을 허락하시는지는 이어지는 본문이 설명할 것입니다.

 

AC.133은 짧지만 창2:18-25의 진행 순서를 이해하게 하는 중요한 번호입니다. 인간이 proprium을 원하자 곧바로 그것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먼저 주님께서 이미 주신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을 알게 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알고도 인간이 여전히 proprium으로 기울어지는 상태에서 다음 단계가 시작됩니다. 따라서 여기서도 중심 질문은 ‘인간에게 무엇이 부족했는가?’보다 ‘주님께 받은 모든 것 가운데 있으면서도 왜 자기에게 고유한 것을 원했는가?’에 있습니다. (AC.133)

 

 

 

AC.134, 창2:18-25 개요,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다 - 인간에게 proprium이 주어짐’ (21-23절)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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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2, 창2:18-25 개요, ‘인간에게 허락된 proprium’ (18절)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18절) AC.132사람은 주님께 인도받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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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18절)

 

AC.132

사람은 주님께 인도받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상에 의해서도, 곧 자신의 proprium에 의해서도 인도받기를 원하는 존재이므로, 여기서는 그에게 허락된 proprium을 다룹니다. (18절) Since man is such as not to be content to be led by the Lord, but desires to be led also by himself and the world, or by his own, therefore the own which was granted him is here treated of (verse 18).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18절)

 

해설

AC.132는 창2:18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이하의 말씀을 해설하기 시작하면서, 그 중심 주제가 ‘인간에게 허락된 proprium’이라고 밝힙니다. 바로 앞 AC.131에서는 태고교회의 후손들이 proprium으로 기울기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32는 왜 이 문제가 생겼는지를 설명합니다. 사람은 주님께 인도받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상에 의해서도 인도받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이 문장은 AC.128-130의 흐름과 직접 연결됩니다. 거기서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은 감각과 기억지식을 출발점으로 삼아 신앙의 신비를 판단하려 했고, AC.129에서는 사람의 출발점이 주님이어야 하고 자기 자신이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AC.130에서는 그 질서가 뒤집힐 때 에덴과 네 강 전체가 어떻게 반대 상태를 나타내는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이제 그 모든 설명의 밑바닥에 있는 인간의 성향을 ‘proprium’이라는 말로 붙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AC.132에서 특히 주의 깊게 보아야 할 표현은 ‘그에게 허락된 proprium’입니다. 앞 번호들만 읽으면 proprium은 단순히 제거되어야 할 악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인간에게 어떤 proprium이 ‘허락되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따라서 지금 단계에서는 proprium을 단순히 ‘자기 사랑의 정수’나 ‘악 그 자체’와 같이 하나의 부정적인 정의로 고정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왜 인간에게 proprium이 허락되었다고 하는지, 그리고 그 proprium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이어지는 설명을 통해 확인해야 합니다.

 

또한 ‘주님께 인도받는 것’과 ‘자기 자신과 세상에 의해 인도받는 것’의 대조는 인간이 아무것도 생각하거나 선택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로 앞 AC.128-129에서도 이성과 기억지식과 학문을 적극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인간이 생각하고 행동하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자기 생명의 근원으로 삼는가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자신의 능력을 통하여 자유롭게 살아 내는 것과, 자기 자신을 주님과 별개의 독립적인 근원으로 삼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이 점에서 AC.122부터 이어진 흐름도 다시 눈에 들어옵니다. 천적 인간은 에덴의 모든 것을 누리고 경작하고 지키지만 그것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퍼셉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AC.123에서는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이 자기가 가진 것을 자기 것이라고 하며, AC.130의 바로는 ‘나의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이제 AC.132에서는 이러한 ‘자기 것’의 문제가 ‘proprium’이라는 용어 아래 본격적으로 다루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창2:18 이하의 말씀을 곧바로 ‘proprium은 악하다’는 결론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본문은 인간이 proprium을 원한다는 현실과, 그 때문에 어떤 proprium이 인간에게 허락되었다는 사실을 함께 말합니다. ‘허락되었다’는 한 단어 때문에라도 여기에는 단순한 정죄 이상의 문제가 들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이러한 성향을 어떻게 다루시며, 그것을 어떤 질서 안에서 인간의 삶과 연결하시는지가 앞으로의 핵심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AC.132는 창2 후반부를 읽는 새로운 질문을 제시합니다.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다’는 말씀은 여기서 단순히 사회적 고독이나 결혼의 필요를 먼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만 인도받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상에 의해서도 인도받기를 원하는 인간의 상태와 연결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바로 그 상태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인간에게 어떤 proprium을 허락하십니다. 그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주님의 질서 안에 놓일 수 있는지가 이제부터 이어질 설명의 중심이 됩니다. (AC.132)

 

 

 

AC.133, 창2:18-25 개요, ‘먼저 주님께 받은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을 알게 하시다’ (19-20절)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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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1, 창2:18-25 개요, ‘proprium으로 기울기 시작한 태고교회의 후손들’ (AC.131-137)

창2:18-25 18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And Jehovah God said,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 hel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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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18-25

 

18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And Jehovah God said,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 help as with him.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And Jehovah God formed out of the ground every beast of the field, and every fowl of the heavens, and brought it to the man to see what he would call it; and whatsoever the man called every living soul, that was the name thereof.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And the man gave names to every beast, and to the fowl of the heavens, and to every wild animal of the field; but for the man there was not found a help as with him.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And Jehovah God caused a deep sleep to fall upon the man, and he slept; and he took one of his ribs, and closed up the flesh in the place thereof. 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And the rib which Jehovah God had taken from the man, he built into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 23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And the man said, This now is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erefore she shall be called wife, because she was taken out of man [vir]. 24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25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And they were both naked, the man and his wife, and were not ashamed. (창2:18-25)

 

AC.131

여기서는 proprium(주3)으로 기울기 시작한 태고교회의 후손들을 다룹니다. The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inclined to their own,3 is here treated of.

 

주3. 라틴어 ‘proprium’은 원문에서 사용된 말로서, 여기와 다른 곳들에서 ‘자기 자신의 것’(own)이라는 표현으로 번역되었습니다. 형용사 ‘proprius’의 사전적 의미는 ‘자기 자신의’(one’s own), ‘고유한’(proper), ‘오직 자기 자신에게 속한’(belonging to one’s self alone), ‘특별한’(special), ‘개별적인’(particular), ‘특유한’(peculiar) 등입니다. 이것의 중성형인 ‘proprium’이 명사로 사용될 때에는 ‘소유물’(possession), ‘재산’(property)을 뜻하며, 또한 ‘특유한 성질’(a peculiarity), ‘특징적인 표지’(characteristic mark), ‘구별되는 표지’(distinguishing sign), ‘특성’(characteristic)을 뜻하기도 합니다. 영어 형용사 ‘own’은 웹스터 사전에서 ‘...에 속하는’(belonging to), ‘전적으로 또는 특별히 ...에 속하는’(belonging exclusively or especially to), ‘특유한’(peculiar)이라는 뜻으로 정의됩니다. 그러므로 영어의 ‘own’은 ‘proprius’에 매우 정확하게 대응하며, 라틴어 명사 ‘proprium’에 대응하도록 ‘own’을 명사로 만들어 사용하면 원문에 매우 가까운 번역이 됩니다. [개정자] The Latin word proprium is the term used in the original text that in this and other places has been rendered by the expression “own.” The dictionary meaning of propius, as an adjective, is “one’s own,” “proper,” “belonging to one’s self alone,” “special,” “particular,” “peculiar.” The neuter of this which is the word proprium, when used as a noun means “possession,” “property”; also “a peculiarity,” “characteristic mark,” “distinguishing sign,” “characteristic.” The English adjective “own” is defined by Webster to mean “belonging to,” “belonging exclusively or especially to,” “peculiar”; so that our word “own” is a very exact equivalent of proprius, and if we make it a noun in order to answer to the Latin proprium, we effect a very close translation. [Reviser]

 

해설

AC.131은 매우 짧지만 창2의 속뜻에서 새로운 구간이 시작되고 있음을 알려 주는 표지입니다. 앞에서는 천적 인간의 상태와 에덴동산,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그리고 에덴에서 흘러나오는 네 강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 지혜와 지성, 이성과 앎이 흘러오는 질서를 설명했습니다. 특히 AC.125-130에서는 그 질서를 지키는 것과 뒤집는 것이 무엇인지를 집중적으로 다루었습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그 설명을 바탕으로 ‘자기 자신의 것으로 기울기 시작한 태고교회의 후손들’을 다루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기울기 시작했다’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직 창3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게 될 타락 자체를 설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태고교회의 후손들 가운데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온전히 받아 사는 이전의 천적 상태에서 조금씩 자기 자신의 것으로 향하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따라서 AC.131은 완성된 악의 상태를 선언하는 문장이 아니라, 내적인 방향이 달라지기 시작하는 과정을 여는 문장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자기 자신의 것’이라는 표현도 지금 단계에서는 너무 많은 후대의 설명을 미리 끌어와 규정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만 바로 앞의 흐름만으로도 기본적인 방향은 분명합니다. AC.122에서는 에덴의 모든 것을 누리는 것은 허락되지만 그것들을 자기 것으로 소유해서는 안 된다고 했고, AC.123-124에서는 천적 인간이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인정한다고 했습니다. 이어 AC.128-130에서는 주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지혜로워지려는 상태를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AC.131의 ‘자기 자신의 것으로 기울기 시작했다’는 말은 이 흐름과 분리해서 읽을 수 없습니다.

 

특히 AC.130의 바로가 ‘나의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고 말한 것과도 연결됩니다. 앞에서는 모든 지혜와 지성과 이성과 지식의 근원이 주님이라고 했는데, 질서가 뒤집히면 사람은 그것들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여기기 시작합니다. AC.131은 이제 이러한 ‘자기에게로 향함’이 태고교회의 후손들에게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설명할 준비를 합니다. 그러므로 문제의 중심에는 단순히 어떤 잘못된 지식을 갖게 되었다는 것보다 생명의 근원을 어디에 두느냐 하는 변화가 있습니다.

 

이것은 거듭남을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대조를 제공합니다. 지금까지 천적 인간의 질서는 인간의 능력들이 없어지는 상태가 아니라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퍼셉션하고,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자기 안에서 누리고 사용하는 상태였습니다. 반대로 ‘자기 자신의 것으로 기울어진다’는 것은 인간에게 생각과 의지와 활동이 생긴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들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방향으로 마음이 기울어진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이어지는 내용을 읽을 때에도 인간의 자유로운 활동 자체와 그것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는 상태를 구별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AC.131은 한 문장으로 다음 단락들의 독법을 미리 정해 줍니다. 이제부터 나오는 창2:18 이하의 말씀을 단순히 남자에게 여자가 필요하여 배우자를 창조하신 이야기로만 읽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후손들이 ‘자기 자신의 것’으로 기울기 시작한 상태와 관련하여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며 주님께서 그 상태를 어떻게 다루시는지는 이어지는 번호들이 설명할 것이므로, 여기서는 앞서 나가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결국 AC.131은 앞의 긴 논의를 다음 구간으로 넘기는 작은 경첩과 같습니다. AC.129의 ‘출발점은 주님이어야 하고 자기 자신이어서는 안 된다’는 결론과 AC.130의 뒤집힌 에덴의 모습이 이제 태고교회 후손들의 실제 상태 변화로 이어집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주님의 것으로 받아들이던 상태에서 ‘자기 자신의 것’으로 기울기 시작하는 변화가 앞으로의 핵심 주제가 됩니다. (AC.131)

 

 

 

AC.132, 창2:18-25 개요, ‘인간에게 허락된 proprium’ (18절)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18절) AC.132사람은 주님께 인도받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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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0, 창2:17, ‘세상으로부터 지혜로워질 때 에덴과 네 강의 질서가 뒤집힌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7) AC.130세상으로부터 지혜로워지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이 그의 ‘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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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7)

 

AC.130

세상으로부터 지혜로워지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이 그의 ‘동산’(garden)이며,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그의 ‘에덴’(Eden)입니다. 그의 ‘동쪽’(east)은 서쪽, 곧 자기 자신입니다. 그의 ‘유브라데강’(river Euphrates)은 정죄받은 그의 모든 기억지식이며, ‘앗수르’(Assyria)가 있는 그의 ‘둘째 강’(second river)은 거짓들을 낳는 어리석은 추론입니다. ‘구스’(Ethiopia)가 있는 그의 ‘셋째 강’(third river)은 거기서 나온 악과 거짓의 원리들이며, 이것들이 그의 신앙에 관한 앎들입니다. 그의 ‘넷째 강’(fourth river)은 거기서 나온 지혜인데, 말씀에서는 이것을 ‘마술’(magic)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기억지식을 의미하는 ‘애굽’(Egypt)도 그 지식이 마술적인 것이 된 뒤에는 이러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지혜로워지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에 관하여 에스겔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He who desires to be wise from the world has for his “garden” the things of sense and of memory-knowledge [sensualia et scientifica]; the love of self and the love of the world are his “Eden”; his “east” is the west, or himself; his “river Euphrates” is all his memory-knowledge, which is condemned; his “second river,” where is “Assyria” is infatuated reasoning productive of falsities; his “third river,” where is “Ethiopia” is the principles of evil and falsity thence derived, which are the knowledges of his faith; his “fourth river” is the wisdom thence derived, which in the Word is called “magic.” And therefore “Egypt”—which signifies memory-knowledge—after the knowledge became magical, signifies such a man, because, as may be seen from the Word, he desires to be wise from self. Of such it is written in Ezekiel:

 

3너는 말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애굽의 바로 왕이여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너는 자기의 강들 가운데에 누운 큰 악어라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 하는도다, 9애굽 땅이 사막과 황무지가 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네가 스스로 이르기를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만들었다 하도다 (겔29:3, 9) Thus hath said the Lord Jehovih, Behold, I am against thee, Pharaoh king of Egypt, the great whale that lieth in the midst of his rivers, who hath said, My river is mine own, and I have made it for myself. And the land of Egypt shall be for a solitude, and a waste, and they shall know that I am Jehovah, because he hath said, The river is mine, and I have made it. (Ezek. 29:3, 9)

 

이러한 사람들은 같은 선지서에서 ‘지옥에 있는 에덴의 나무들’(trees of Eden in hell)이라고도 하는데, 거기서도 바로, 곧 애굽 사람을 다루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Such men are also called “trees of Eden in hell,” in the same prophet, where also Pharaoh, or the Egyptian, is treated of in these words:

 

16내가 그를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스올에 떨어뜨리던 때에 백성들이 그 떨어지는 소리로 말미암아 진동하게 하였고 물을 마시는 에덴의 모든 나무 곧 레바논의 뛰어나고 아름다운 나무들이 지하에서 위로를 받게 하였느니라, 18너의 영광과 위대함이 에덴의 나무들 중에서 어떤 것과 같은고 그러나 네가 에덴의 나무들과 함께 지하에 내려갈 것이요 거기에서 할례를 받지 못하고 칼에 죽임을 당한 자 가운데에 누우리라 이들은 바로와 그의 모든 군대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라 (겔31:16, 18) When I shall have made him descend into hell with them that descend into the pit; to whom art thou thus made like in glory and in greatness among the trees of Eden? yet shalt thou be made to descend with the trees of Eden into the lower earth, in the midst of the uncircumcised, with them that be slain by the sword. This is Pharaoh and all his crew, (Ezek. 31:16, 18)

 

여기서 ‘에덴의 나무들’(trees of Eden)은 말씀으로부터 얻은 기억지식과 앎들을 의미하며, 그들은 추론을 통하여 그것들을 이와 같이 모독합니다. where the “trees of Eden” denote knowledges [scientifica et cognitiones] from the Word, which they thus profane by reasonings.

 

해설

AC.130은 지금까지 설명한 에덴동산과 네 강의 질서를 정반대의 상태에 적용합니다. AC.98 이후 동산은 지성, 에덴은 사랑, 동쪽은 주님을 의미했고, 네 강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질서가 지혜와 지성, 이성과 기억에 속한 앎들에까지 흘러가는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으로부터 지혜로워지기를 원하는 사람에게서는 이 모든 질서가 뒤집힙니다. 같은 동산과 에덴과 강들이 등장하지만, 그것들을 지배하는 근원이 주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그의 ‘동산’은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이며, 그의 ‘에덴’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라고 합니다. 앞에서 에덴이 사랑을 의미했으므로 여기에서도 사랑이라는 기본 관계는 남아 있지만, 그 사랑의 성질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이 아니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중심에 놓입니다. 마찬가지로 그의 ‘동쪽’은 서쪽, 곧 자기 자신입니다. AC.101에서 동쪽이 주님을 의미한다고 했으므로, 여기서 서쪽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방위의 상응을 새로 제시하는 데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향해야 할 내적 방향이 자기 자신을 향하도록 뒤집혔음을 보여 줍니다.

 

이 질서의 전도는 네 강에서도 이어집니다. 유브라데는 앞에서 기억지식과 감각적인 것들이 지성과 지혜의 최하위 또는 경계를 이루는 것으로 설명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정죄받은 그의 모든 기억지식’이 됩니다. 이것은 기억지식 자체가 정죄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로 앞의 AC.129에서 학문을 배우는 것은 결코 금지되지 않으며 삶에 유용하고 즐거운 것이라고 명시했기 때문입니다. 같은 기억지식이라도 주님으로부터 오는 질서 아래에 있을 때에는 생명을 받지만, 자기 자신으로부터 지혜로워지려는 사람에게서는 거짓된 원리를 확증하는 수단이 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정죄받는 것은 기억지식이라는 능력이나 내용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놓인 전도된 질서입니다.

 

둘째 강에 관한 설명도 같은 원리를 보여 줍니다. 앞의 AC.118-119에서 앗수르는 이성을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앗수르가 있는 둘째 강이 ‘거짓들을 낳는 어리석은 추론’이 됩니다. 이성 자체가 악해진 것이 아니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출발점으로 삼은 이성이 거짓을 만들어 내는 추론으로 변한 것입니다. 이것은 AC.129에서 사람이 아무리 거짓된 원리를 받아들여도 그의 지식과 추론이 그 원리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고 한 설명을 그대로 보여 줍니다. 이성은 자신이 무엇을 섬기느냐에 따라 진리를 밝히는 수단이 될 수도 있고 거짓을 확증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습니다.

 

셋째 강과 넷째 강에서는 전도가 더욱 깊어집니다. 구스와 연결된 셋째 강은 악과 거짓에서 나온 원리들이며, 그것들이 그 사람의 ‘신앙에 관한 앎들’이 됩니다. 앞에서 구스는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에 관한 앎을 의미했지만, 이제는 이미 잘못된 원리에서 나온 것들이 신앙에 관한 앎의 자리를 차지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생겨난 넷째 강의 ‘지혜’는 말씀에서 ‘마술’이라고 하는 것이 됩니다. 즉 자기 자신으로부터 지혜로워지려는 질서가 끝까지 진행되면 사람은 자신이 지혜롭다고 여기지만, 그 지혜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지혜와 정반대의 것이 됩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에스겔의 바로와 애굽을 인용합니다. 특히 겔29장에서 바로가 ‘나의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고 하는 말은 AC.130 전체를 압축해서 보여 줍니다. 문제의 핵심은 강 자체가 아니라 ‘내 것’이라고 주장하는 데 있습니다. AC.122-124에서 천적 인간은 동산의 모든 것을 누리면서도 그것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않고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인정했습니다. 바로는 정반대로 강을 자기 것이라고 하며 자기가 만들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인용은 기억지식과 이성과 지혜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상태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기 위해 사용된 것입니다.

 

이어지는 겔31장의 ‘에덴의 나무들’도 같은 이유로 인용됩니다. AC.130은 이것을 말씀으로부터 얻은 ‘기억지식과 앎들’이라고 직접 풀이합니다. 여기서 특히 주목할 것은 그 자료의 출처가 ‘말씀’이라는 점입니다. 사람이 말씀을 많이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앎이 반드시 살아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으로부터 얻은 것조차 자기 자신을 출발점으로 하는 추론에 종속시키면 그것을 모독할 수 있다고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따라서 문제는 성경지식의 양이 아니라 그 지식을 어떤 사랑과 어떤 원리 아래에서 사용하는가에 있습니다.

 

AC.130은 결국 앞에서 설명한 상응들이 고정된 일대일 암호가 아님을 다시 보여 주는 중요한 사례이기도 합니다. 동산·에덴·강·앗수르·애굽 같은 표현들은 앞에서 긍정적인 질서 안에서도 사용되었지만, 여기서는 전도된 질서 안에서 반대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렇다고 그 의미가 임의로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기억지식은 여전히 기억지식과 관련되고, 이성은 여전히 이성과 관련되며, 사랑은 여전히 사랑과 관련됩니다. 달라지는 것은 그것들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질서 안에 있는가, 아니면 자기 자신을 근원으로 삼는 질서 안에 있는가입니다. 그래서 AC.130은 ‘출발점은 주님이어야 하고 자기 자신이어서는 안 된다’고 한 AC.129를 에덴과 네 강 전체에 적용하여 보여 주는 하나의 반대 그림이라 할 수 있습니다. (AC.130)

 

 

 

AC.131, 창2:18-25 개요, ‘proprium으로 기울기 시작한 태고교회의 후손들’ (AC.131-137)

창2:18-25 18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And Jehovah God said,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 hel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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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9, 창2:17, ‘출발점은 주님이어야 한다 - 이성과 학문은 신앙을 확증하는 쓰임 안에 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7) AC.129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받아들인 원리들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원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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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7)

 

AC.129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받아들인 원리들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원리들이 아무리 거짓되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모든 지식과 추론은 그 원리들을 지지하는데, 그것들을 뒷받침하는 무수한 생각들이 그의 마음에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거짓된 것 안에서 더욱 확증됩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보고 이해하기 전에는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원리로 삼는 사람은 결코 믿을 수 없습니다.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은 눈으로 볼 수 없고 상상력으로 그려 낼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참된 질서는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곧 그분의 말씀으로부터 지혜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뒤따르며, 그는 이성과 기억지식에 관한 것들에서도 밝아집니다. 학문들을 배우는 것은 결코 금지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그의 삶에 유용하고 즐거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이라 해서 세상의 학자들처럼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금지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 출발 원리는 주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어야 하며, 가능한 한 영적이고 천적인 진리들을 자연적인 진리들로 확증하되, 학문 세계에 익숙한 표현들을 사용하여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의 출발점은 주님이어야 하고 자기 자신이어서는 안 됩니다. 전자는 생명이고 후자는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Everyone may know that man is governed by the principles he assumes, be they ever so false, and that all his knowledge and reasoning favor his principles; for innumerable considerations tending to support them present themselves to his mind, and thus he is confirmed in what is false. He therefore who assumes as a principle that nothing is to be believed until it is seen and understood, can never believe, because spiritual and celestial things cannot be seen with the eyes, or conceived by the imagination. But the true order is for man to be wise from the Lord, that is, from his Word, and then all things follow, and he is enlightened even in matters of reason and of memory-knowledge [in rationalibus et scientificis]. For it is by no means forbidden to learn the sciences, since they are useful to his life and delightful; nor is he who is in faith prohibited from thinking and speaking as do the learned of the world; but it must be from this principle—to believe the Word of the Lord, and, so far as possible, confirm spiritual and celestial truths by natural truths, in terms familiar to the learned world. Thus his starting point must be the Lord, and not himself; for the former is life, but the latter is death.

 

해설

AC.129는 사람이 왜 잘못된 출발점에 서면 이후의 지식과 추론까지 그 잘못을 강화하게 되는지를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은 자기가 먼저 받아들인 원리들에 의해 지배된다고 말합니다. 그 원리가 아무리 거짓되어도 사람의 지식과 추론은 그 원리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며, 그것을 뒷받침하는 수많은 생각들이 마음에 떠오르기 때문에 결국 사람은 자기의 거짓된 원리 안에서 더욱 굳어집니다.

 

이것은 AC.128에서 본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의 태도를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그는 ‘내가 보고 이해할 수 있어야 믿겠다’는 원리를 먼저 세웁니다. 그런데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은 자연적인 눈으로 볼 수 없고 상상력으로 완전히 그려 낼 수도 없으므로, 이 원리를 끝까지 고수하면 결국 믿을 수 있는 것은 자연적인 것뿐이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문제 삼는 것은 보거나 이해하려는 노력 자체가 아니라, ‘보이고 이해되어야만 참이다’라는 원리를 신앙보다 먼저 세우는 것입니다.

 

반대로 참된 질서는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곧 그분의 말씀으로부터 지혜로워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도 생각과 이해가 중단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과 말씀을 출발점으로 삼을 때 ‘모든 것이 뒤따르며’, 사람은 이성과 기억지식에 관한 것들에서도 밝아진다고 합니다. 따라서 주님으로부터 지혜로워진다는 것은 이성과 지식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올바른 빛을 받아 제 기능을 하게 되는 질서입니다.

 

AC.129에서 가장 눈에 띄는 문장은 ‘학문들을 배우는 것은 결코 금지되어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AC.80 이후 계속 생길 수 있었던 오해를 스베덴보리 자신이 매우 직접적으로 차단하는 표현입니다. 학문은 삶에 유용하고 즐거우며, 신앙 안에 있는 사람도 세상의 학자들처럼 생각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가 감각과 기억지식으로 신앙의 신비를 탐구하지 말라고 한 것을 지적 탐구나 학문 자체에 대한 거부로 읽는 것은 문맥과 맞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학문과 이성이 어떤 위치에서 사용되는가입니다.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은 먼저 주님의 말씀을 믿고, 그 뒤 가능한 한 영적이고 천적인 진리들을 자연적인 진리들로 확증합니다. 이때 자연적인 진리는 영적인 진리를 만들어 내는 근원이 아니라 그것을 확인하고 설명하는 수단으로 사용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심지어 학문 세계에 익숙한 표현들을 사용하여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신앙과 학문은 서로 적대적인 영역이 아니라, 질서가 바로 서 있을 때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AC.128과 AC.129는 서로 정확히 맞물립니다. AC.128에서는 이성·기억지식·감각·자연적인 것들을 사용하여 신앙의 진리를 확증할 수 있다고 했고, AC.129에서는 학문을 배우고 학자들처럼 생각하고 말하는 것도 금지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두 번호 모두 문제를 ‘사용 여부’가 아니라 ‘출발점’에 둡니다. 자기 자신과 세상을 출발점으로 삼아 신적인 것을 판단하려 하면 질서가 전도되지만, 주님과 말씀을 출발점으로 삼아 이성과 학문을 사용하면 그것들은 진리를 확증하고 밝히는 쓰임을 하게 됩니다.

 

마지막 문장은 이 모든 내용을 가장 짧게 압축합니다. ‘출발점은 주님이어야 하고 자기 자신이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전자는 생명이고 후자는 죽음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문제는 결국 지식을 많이 가지느냐 적게 가지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진리의 근원으로 삼느냐, 아니면 주님을 근원으로 삼느냐의 문제입니다. 주님을 출발점으로 할 때 이성과 학문과 기억지식은 생명의 질서 안에서 살아나지만, 자기 자신을 출발점으로 할 때 같은 능력들도 거짓을 확증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AC.129)

 

 

 

AC.130, 창2:17, ‘세상으로부터 지혜로워질 때 에덴과 네 강의 질서가 뒤집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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