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2 심화

2. ‘왜 사랑이 사라지면 사랑과 신앙의 아르카나도 가려지는가?’

 

AC.32에서 스베덴보리는 세 가지를 한 문장 안에서 연결합니다. 사랑과 신앙에 관한 이 아르카나가 특히 마지막 시대에 가려져 있다는 것, 지금이 세대의 종말이라는 것, 그리고 이때에는 사랑이 거의 없으며 그 결과 신앙도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처음 읽으면 ‘사랑이 적은 것과 아르카나가 가려지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 문장을 이해하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은 AC.32가 말하는 ‘아르카나’의 내용을 먼저 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감추어져 있었다는 아르카나는 추상적인 비밀 지식 전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앞에서 말한 사랑과 신앙의 질서입니다. 사랑과 신앙을 처음에는 함께 ‘큰 광명체들’이라 하고, 사랑을 더 큰 광명체, 신앙을 더 작은 광명체라 하며, 사랑은 낮을, 신앙은 밤을 다스린다는 것이 그 아르카나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질서를 이해하려면 신앙을 사랑과 독립된 별도의 종교적 능력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AC.30부터 계속되는 논리는 신앙이 사랑에서 생명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더 큰 광명체이고 신앙이 더 작은 광명체인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이 살아 있을 때 신앙도 살아 있으며,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본래의 생명을 잃습니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 사랑 자체가 거의 사라지면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얻는다’는 진리도 이해하기 어려워집니다. 신앙을 교리의 인정, 지적 동의, 종교적 주장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기 쉬워지고, 사랑은 신앙과 나란히 놓이는 하나의 덕목 정도로 밀려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랑이 더 큰 광명체이고 신앙이 그 사랑에서 생명을 얻는다’는 질서 자체가 보이지 않게 됩니다.

 

바로 이 점에서 ‘아르카나가 가려져 있음’과 ‘사랑이 거의 없음’이 연결됩니다. 아르카나가 말씀 안에서 사라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랑과 신앙의 참된 관계가 교회 안에서 더 이상 알려지거나 인정되지 않게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마지막 시대에 가려져 있던 것을 이제 주님의 신적 자비로 설명하도록 허락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랑이 거의 없고, 그 결과 신앙도 거의 없다’는 표현에서 순서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없어서 사랑이 없다’고 하지 않고, 사랑이 거의 없기 때문에 그 결과 신앙도 거의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AC.30부터 이어진 광명체의 질서와 정확히 같습니다. 사랑이 더 큰 광명체이고 신앙은 그 사랑에서 생명을 얻는 더 작은 광명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AC.32에서 세 가지는 하나의 흐름입니다. 세대의 종말에는 사랑이 거의 없어졌고, 사랑이 거의 없으므로 살아 있는 신앙도 거의 없어졌으며, 그 결과 사랑과 신앙의 본래 질서 자체가 교회에서 가려졌습니다. 그래서 바로 그 시대에 ‘해는 사랑이고 달은 신앙이며,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얻는다’는 아르카나를 다시 밝혀야 했다는 것이 AC.32의 논리입니다. (AC.32 심화 2)

 

 

 

AC.32 심화 1, ‘세대의 종말’은 왜 수백 년이 지나도 끝나지 않은 것처럼 보일까?

AC.32 심화1. ‘세대의 종말’은 왜 수백 년이 지나도 끝나지 않은 것처럼 보일까? AC.32에서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시대를 가리켜 ‘지금이 세대의 종말(the consummation of the age)’이라고 말합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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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 심화

1. ‘세대의 종말’은 왜 수백 년이 지나도 끝나지 않은 것처럼 보일까?

 

AC.32에서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시대를 가리켜 ‘지금이 세대의 종말(the consummation of the age)’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AC가 쓰인 때로부터 이미 수백 년이 지났는데도 세계와 기독교회는 계속 존재하고 있으니, 이 표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이 질문은 ‘세대의 종말’을 현대적인 시간 개념으로 읽을 것인가, 아니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교회의 영적 상태로 읽을 것인가와 관계됩니다.

 

우선 AC.32 자체가 ‘세대의 종말’을 무엇과 연결하는지를 보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곧바로 ‘이때에는 사랑이 거의 없고, 그 결과 신앙도 거의 없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문맥에서 ‘종말’의 핵심은 몇 년 뒤 세상이 사라진다는 시간표가 아니라, 한 교회가 그 본래의 사랑과 신앙을 거의 잃어버린 영적 상태에 있습니다. 사랑이 거의 없고, 그 결과 살아 있는 신앙도 거의 없는 상태를 스베덴보리는 ‘세대의 종말’과 연결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세대’(age)를 우리가 흔히 말하는 한 인간 세대, 곧 20년이나 30년 정도의 기간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합니다. 복음서의 ‘consummation of the age’ 역시 한 사람의 세대가 끝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의 종교적·교회적 시대의 완결과 관계된 표현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18세기에 ‘세대의 종말’이라고 말했다고 해서 ‘몇십 년 안에 지상 세계가 끝난다’는 예언을 한 것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또한 ‘종말’이라는 말을 어떤 상태가 마지막 단계에 이른 것으로 이해하면 시간이 오래 흐른다는 사실 자체가 곧 모순이 되지는 않습니다. 한 교회가 그 본래의 사랑과 신앙을 잃었다고 해서 지상의 조직과 제도, 예배와 교리, 교회 건물과 이름이 그 즉시 모두 사라져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외적인 형태는 남아 있으면서도 그 교회의 내적 생명은 크게 쇠퇴한 상태가 있을 수 있습니다. AC.32의 관심은 바로 그 내적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2026년이라는 현재 시점에서 ‘왜 아직 종말이 끝나지 않았는가?’라고 묻기 전에, 스베덴보리가 무엇을 ‘종말’이라고 불렀는지를 먼저 확인하는 것이 좋습니다. AC.32에서 그는 사랑이 거의 없고, 그 결과 신앙도 거의 없는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계의 물리적 소멸을 가리키는 표현이 아니라 교회의 영적 질서가 소진된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읽는 것이 이 단락의 문맥에 가장 잘 맞습니다.

 

물론 스베덴보리의 다른 저작에서는 최후의 심판과 새 교회에 관하여 훨씬 더 구체적인 설명을 합니다. 그러나 그 후 수백 년의 교회사를 정확히 어떤 단계의 ‘과도기’라고 이름 붙일 것인지, 또는 현재가 그 과정의 어느 지점인지를 AC.32만으로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는 스베덴보리가 자기 시대의 교회를 ‘사랑이 거의 없고 그 결과 신앙도 거의 없는 종말 상태’로 보았다는 사실까지만 분명히 붙드는 것이 안전합니다.

 

따라서 ‘세대의 종말’이 수백 년 동안 계속된다고 생각하기보다, 먼저 ‘종말’이 달력상의 짧은 기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영적 상태를 뜻한다는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AC.32에서 그 상태를 판단하는 기준은 매우 분명합니다. 사랑이 살아 있는가, 그리고 그 사랑에서 생명을 얻는 신앙이 살아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AC.32 심화 1)

 

 

 

AC.32 심화 2, ‘왜 사랑이 사라지면 사랑과 신앙의 아르카나도 가려지는가?’

AC.32 심화2. ‘왜 사랑이 사라지면 사랑과 신앙의 아르카나도 가려지는가?’ AC.32에서 스베덴보리는 세 가지를 한 문장 안에서 연결합니다. 사랑과 신앙에 관한 이 아르카나가 특히 마지막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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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 창1:14-17, ‘해가 사랑이고, 달이 신앙이다 : 마지막 시대에 드러나는 광명체의 아르카나’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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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 심화

3. ‘내적 의미를 몰라도 어떻게 거룩한 표상을 지킬 수 있었을까?’

 

AC.31 [3]에서 스베덴보리는 유대교회에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타는 등불’을 두도록 명하신 규례를 언급합니다. 출27:20-21에는 순수한 감람유를 가져다가 등불을 켜고 회막 안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그것을 보살피도록 하는 명령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등불이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질문이 생깁니다. 유대교회의 사람들은 이러한 규례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실제로 지켰지만, 그 규례가 표상하는 천국의 내적 의미까지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스베덴보리는 여러 곳에서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람이 자기가 하는 행위의 내적 의미를 알지 못하면서도 그 행위를 통하여 거룩한 것을 표상할 수 있었을까요?

 

이 질문을 이해하려면 먼저 ‘표상’과 ‘그 표상을 행하는 사람의 내적 상태’를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거룩한 것을 표상한다고 해서 반드시 그 사람 자신도 그 거룩한 상태 안에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유대교회의 제사, 절기, 성막과 성전, 제사장 직무와 의복 등은 주님과 천국과 교회에 속한 것들을 표상하도록 정해져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 표상의 거룩함은 그것을 행하는 사람이 얼마나 깊은 영적 이해를 가지고 있었느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 제도와 말씀에 부여하신 표상적 질서에서 나왔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제사장이 등불의 내적 의미를 충분히 알지 못했다고 해서 등불의 표상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그 제물과 제단과 불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한다고 해서 주님께서 정하신 표상적 의미가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표상의 의미는 사람의 주관적인 해석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표상이 제대로 기능하려면 그것을 행하는 사람이 반드시 그 의미를 몰라야 했다’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상응과 표상의 의미를 아는 것 자체가 표상을 파괴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더 오래된 교회들에서는 자연계의 사물들이 무엇을 상응하고 표상하는지에 관한 지식이 존재했습니다. 그러므로 ‘무지해야 표상이 가능하다’는 것이 영적 원리는 아닙니다.

 

유대교회의 특별한 점은 다른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교회의 많은 사람이 내적인 것보다 외적인 것에 강하게 기울어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매우 구체적인 율법과 규례를 주셨고, 그 외적 예배가 천국의 것들을 표상하도록 질서 지으셨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내적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정해진 규례를 수행하는 동안 그 외적 행위는 주님께서 정하신 표상으로서 기능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의미를 모르면서 어떻게 그렇게 철저하게 지킬 수 있었는가?’라는 질문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어떤 명령의 모든 깊은 의미를 알아야만 그것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여호와께서 명하신 율법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따라서 내적 의미를 이해하는 것과 외적 명령을 준수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유대인들의 무지를 그 자체로 긍정적으로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그들은 의미를 몰랐기 때문에 오히려 더 좋은 표상 교회가 될 수 있었다’는 식으로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내적인 것을 알지 못하고 외적인 것에만 머무는 것은 그 자체로 더 높은 영적 상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그러한 인간의 상태 속에서도 당신의 질서를 보존하시고, 외적인 예배를 통하여 천국의 것들이 표상되도록 하셨다는 데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주님의 섭리를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상태가 이상적이어야만 주님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처한 상태를 아시고, 그 상태에 맞추어 당신의 질서를 보존하십니다. 유대교회의 외적 예배 역시 그런 의미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내적 이해가 충분하지 않았음에도,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주신 율법과 규례를 통하여 주님과 천국에 관한 표상들이 역사 속에 계속 존재하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AC.31에서 말하는 ‘항상 타는 등불’은 무엇을 표상했을까요? 여기서는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밝힌 만큼만 말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는 ‘광명체들’이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을 표상하고 뜻했기 때문에 유대교회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타는 등불을 두도록 명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규례가 주님께서 속 사람 안에서 사랑과 신앙을 불붙이고 빛나게 하시며,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 안에서도 그렇게 하시는 것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상의 세부적인 의미는 ‘적절한 곳에서’ 설명하겠다고 여기서 유보합니다. 그러므로 AC.31만을 가지고 ‘저녁은 반드시 이런 상태이고, 등불이 밤새 타는 것은 반드시 이런 교회사적 보존을 뜻한다’는 식으로 세부 상응을 미리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AC를 읽을 때에는 스베덴보리가 밝힌 만큼과 우리가 그 원리를 따라 추론한 것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심화의 질문으로 돌아가면 답은 이렇습니다. 유대교회의 사람들이 모든 규례의 내적 의미를 알아야만 그 규례가 표상이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표상의 근거는 인간의 이해가 아니라 주님께서 정하신 영적 질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그들이 의미를 몰랐다는 사실 자체가 표상을 가능하게 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놀라운 것은 주님께서 내적인 것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외적 예배까지 사용하여 천국의 것들을 표상하고 보존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타는 등불’은 유대인들이 그 의미를 얼마나 잘 이해했느냐보다, 그 규례를 통하여 주님께서 무엇을 표상하도록 하셨느냐에 초점을 맞추어 읽는 것이 좋습니다. AC.31에서는 그것이 바로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신앙이며, 주님께서 그것들을 속 사람 안에서 불붙이고 빛나게 하시고 다시 겉 사람의 삶에까지 나타나게 하시는 질서입니다. (AC.31 심화 3)

 

 

 

AC.31, 창1:14-17, ‘해와 달과 별 : 사랑과 신앙의 밝아짐과 어두워짐’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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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 심화 2, 사60의 ‘새 교회’는 어느 교회를 말하는가?

AC.31 심화2. 사60의 ‘새 교회’는 어느 교회를 말하는가? AC.31 [2]에서 스베덴보리는 사60:1-3, 20을 인용하면서 이 말씀이 ‘주님의 강림과 이방인들의 밝아짐, 따라서 새 교회와, 특히 어둠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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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 심화

2. 사60의 ‘새 교회’는 어느 교회를 말하는가?

 

AC.31 [2]에서 스베덴보리는 사60:1-3, 20을 인용하면서 이 말씀이 ‘주님의 강림과 이방인들의 밝아짐, 따라서 새 교회와, 특히 어둠 가운데 있다가 빛을 받아 거듭나는 모든 사람’에 관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새 교회’라는 표현을 보면 자연스럽게 스베덴보리의 다른 저작에서 말하는 ‘새 교회’(New Church), 곧 새 예루살렘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31의 이 한 문장만 놓고 그것을 곧바로 특정한 역사적 교회나 교단으로 한정하는 것은 조심하는 편이 좋습니다.

 

그 이유는 스베덴보리 자신이 같은 문장에서 범위를 함께 밝혀 주기 때문입니다. 그는 먼저 ‘주님의 강림과 이방인들의 밝아짐’을 말하고, 그 결과로 ‘새 교회’를 언급한 뒤, 곧바로 ‘특히 어둠 가운데 있다가 빛을 받아 거듭나는 모든 사람’을 덧붙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중심은 어떤 조직의 명칭보다 ‘어둠 가운데 빛이 임하고, 주님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영적 상태가 시작되는 것’에 있습니다.

 

사60의 본문 자체도 이 문맥과 잘 맞습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그리고 ‘여호와가 네 영원한 빛이 된다’는 말씀은 어둠에서 빛으로의 전환을 묘사합니다. AC.31에서 이 구절이 중요한 이유는 해와 달의 ‘밝아짐’을 통해 사랑과 신앙이 주님에게서 다시 살아나는 상태를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자리에서 ‘새 교회’는 우선 주님의 오심과 빛의 유입으로 새롭게 세워지는 교회의 상태를 뜻한다고 읽는 것이 안전합니다. 동시에 스베덴보리는 그와 같은 질서가 한 개인의 거듭남에도 적용된다고 직접 말합니다. 어둠 가운데 있던 사람이 주님의 빛을 받아 사랑과 신앙이 살아나기 시작할 때, 그 사람 안에서도 일종의 새로운 교회의 상태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교회를 단순히 건물이나 조직의 이름으로만 보지 않는다는 점과도 연결됩니다. 교회가 참으로 교회가 되려면 그 안에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 곧 사랑과 신앙의 생명이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새 교회’라는 말의 핵심도 외적 명칭의 새로움보다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빛과 생명이 들어오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고 스베덴보리의 다른 저작에서 말하는 ‘새 예루살렘’과 전혀 관계없다고 미리 선을 그을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AC.31은 여기서 그 역사적·교회사적 동일성을 논증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단락을 읽을 때에는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밝힌 범위에 머무는 것이 좋습니다. 곧 사60은 주님의 강림으로 어둠 가운데 빛이 임하고, 그로 인해 새 교회가 일어나며, 개별적으로는 어둠 가운데 있던 사람이 빛을 받아 거듭나는 상태를 묘사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60의 새 교회가 어느 교회인가?’라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하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AC.31에서는 특정한 후대 교단명을 먼저 가리키는 표현으로 읽기보다, 주님의 강림과 빛의 유입으로 새롭게 세워지는 교회의 상태를 뜻하며, 그와 같은 새로움은 거듭나는 각 사람 안에서도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이 자리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말하고 있는 범위입니다. (AC.31 심화 2)

 

 

 

AC.31 심화 3, ‘내적 의미를 몰라도 어떻게 거룩한 표상을 지킬 수 있었을까?’

AC.31 심화3. ‘내적 의미를 몰라도 어떻게 거룩한 표상을 지킬 수 있었을까?’ AC.31 [3]에서 스베덴보리는 유대교회에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타는 등불’을 두도록 명하신 규례를 언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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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 심화 1, ‘감각과 단순한 지식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된다는 것은?’

AC.31 심화1. ‘감각과 단순한 지식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된다는 것은?’ AC.31에서 스베덴보리는 바로와 애굽에 관하여 ‘단지 감각과 단지 기억 지식의 원리’(the principle of mere sense and of m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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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 심화

1. ‘감각과 단순한 지식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된다는 것은?’

 

AC.31에서 스베덴보리는 바로와 애굽에 관하여 ‘단지 감각과 단지 기억 지식의 원리’(the principle of mere sense and of mere knowledge)를 뜻하며, 여기서는 그것들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되었음을 말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표현을 읽을 때 먼저 조심해야 할 것은 감각이나 기억 지식 자체를 나쁜 것으로 이해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은 감각을 통하여 자연세계를 접하고, 기억 지식을 통하여 배우고 생각합니다. 앞의 AC.24-29에서도 기억 지식은 거듭남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다루어졌습니다. 문제는 감각과 기억 지식이 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만’을 최종 기준으로 삼는 데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눈으로 확인되지 않는 것은 믿을 수 없다’고 하면서 영적인 모든 것을 감각적 증거 아래에 두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 천국, 영혼, 주님의 섭리와 같은 것을 오직 눈에 보이는 결과가 있는지 없는지로만 판단하는 것입니다. 질문하고 검토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자연적 감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만을 실재의 전부로 정하고, 그 범위를 넘어서는 것은 처음부터 존재할 수 없다고 판단하는 태도입니다. 감각적인 것이 영적인 것을 섬기는 자리가 아니라 영적인 것의 재판관이 될 때 질서가 뒤집힙니다.

 

기억 지식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과 신학과 교리에 관한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한 지식 자체는 귀중하며, 주님께서 거듭남 가운데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내가 알고 있는 것만 참이다’, ‘내 이성이 납득하지 못하면 주님의 말씀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식으로 기억 지식을 가장 높은 자리에 놓으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지식이 사랑과 신앙을 섬기는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사랑과 신앙의 가능 여부를 판정하는 지배 원리가 되는 것입니다.

 

실제 삶에서는 이런 모습이 아주 미묘하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교리에는 매우 정확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대할 때에는 사랑과 자비가 사라질 수 있고, 말씀의 구절을 많이 알면서도 그 지식을 상대방을 판단하고 이기는 데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식이 많아서 사랑이 사라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같은 지식이라도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 쓰이면 매우 유익합니다. 문제는 지식이 자기 지성에 대한 신뢰와 결합하여 사랑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갈 때입니다.

 

감각적인 사고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조 세계를 자세히 관찰하고 과학적으로 탐구하는 것 자체는 신앙의 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연의 질서와 아름다움을 통하여 주님의 지혜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연적 사실만을 전부라고 여기고 영적인 원인이나 목적 자체를 배제할 때, 감각은 더 이상 섬기는 도구가 아니라 지배하는 원리가 됩니다. AC.31에서 경고하는 것은 바로 이런 질서의 전도입니다.

 

그러므로 ‘감각과 단지 기억 지식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된다’는 말을 ‘과학이나 지식이 신앙을 파괴한다’는 뜻으로 읽으면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지식과 이해를 거듭남의 중요한 단계로 봅니다. 오히려 사람의 감각과 지식이 자기보다 높은 것, 곧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섬길 때에는 그것들이 거듭남에 매우 유용하게 사용됩니다.

 

AC.31의 표현은 결국 ‘무엇이 무엇을 다스리는가?’의 문제입니다. 사랑과 신앙이 중심이 되고 감각과 기억 지식이 그것들을 섬기면 질서가 바르게 서지만, 감각과 기억 지식만이 최종 기준이 되어 사랑과 신앙을 재단하기 시작하면 영적 빛은 점차 가려질 수 있습니다. 에스겔에서 해와 달과 별이 어두워지는 모습은 바로 이런 상태를 나타냅니다. 자연적인 것 자체가 악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영적인 것 위에 올라가 지배할 때 사랑과 신앙의 빛이 소멸되기 때문입니다. (AC.31 심화 1)

 

 

 

AC.31 심화 2, 사60의 ‘새 교회’는 어느 교회를 말하는가?

AC.31 심화2. 사60의 ‘새 교회’는 어느 교회를 말하는가? AC.31 [2]에서 스베덴보리는 사60:1-3, 20을 인용하면서 이 말씀이 ‘주님의 강림과 이방인들의 밝아짐, 따라서 새 교회와, 특히 어둠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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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 창1:14-17, ‘해와 달과 별 : 사랑과 신앙의 밝아짐과 어두워짐’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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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 심화

1. ‘태양의 빛이 그것을 받는 대상 안에서 보이듯이, 의지와 이해 안에서 그렇게 나타날 뿐’

 

AC.30 [3]의 ‘그러나 그것들은 태양의 빛이 그것을 받는 대상 안에서 보이듯이, 의지와 이해 안에서 그렇게 나타날 뿐입니다’라는 문장은 스베덴보리 인간론의 중요한 원리를 아주 압축해서 말합니다. 여기서 ‘그것들’은 바로 앞에서 말한 사랑과 신앙이며, 특히 중요한 표현은 ‘in its recipient objects’, 곧 ‘빛을 받아들이는 대상 안에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의 의지와 이해가 사랑과 신앙의 근원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는 수용체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자연적인 태양빛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태양빛이 물이나 나뭇잎, 창문이나 돌에 비치면 빛은 각각의 대상 안에서 여러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 대상이 빛 자체의 근원은 아닙니다. 빛의 근원은 태양이고, 대상은 그 빛을 받아 그것이 나타나게 하는 자리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의지와 이해를 설명할 때 사용하는 비유도 바로 이와 같습니다.

 

사람 안에서 사랑은 의지에, 신앙 또는 진리는 이해에 나타납니다. 그래서 사람은 ‘내가 사랑한다’, ‘내가 진리를 이해한다’, ‘내가 이것을 믿는다’고 느낍니다. 실제로 그것들은 사람의 의지와 이해 안에서 일어나며, 사람은 자유 가운데 그것을 받아들이고 행합니다. 그러나 AC.30이 강조하는 것은 그 생명의 최초 근원이 사람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의지를 사랑으로 움직이게 하고 이해를 진리 또는 신앙으로 비추는 것은 ‘오직 주님의 자비’라고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말합니다.

 

따라서 ‘태양의 빛이 그것을 받는 대상 안에서 보인다’는 말은 인간의 의지와 이해가 아무 역할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수용체는 실제로 받아들이며, 사람은 자유 가운데 주님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습니다. 거듭남에서도 사람은 생각하고 선택하고 악을 피하며 선을 행해야 합니다. 다만 그 모든 과정에서 참된 사랑과 참된 신앙의 생명 자체를 자기에게서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점은 앞에서 살핀 AC.29의 ‘생명 없는’ 상태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사람은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하면서도 처음에는 그것이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사람은 자신이 실제로 행하고 선택하면서도 그 선과 진리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점차 인정하게 됩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 자신의 것과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의 근원을 올바르게 구별하게 합니다.

 

실제 삶에서도 이 원리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돕기로 결정했다고 해 보겠습니다. 그는 실제로 상황을 판단하고, 도울 것을 선택하며, 자신의 손과 시간과 재물을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있는 참된 선, 곧 이웃을 위하는 사랑의 생명까지 자기 자신에게서 만들어 냈다고 여기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태양빛이 물체 안에 실제로 나타나면서도 그 빛의 근원이 그 물체가 아닌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AC.30 [3]의 이 비유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것은 가짜이고 주님만 모든 것을 하신다’는 식의 인간 부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 안에서 사랑과 신앙이 실제로 살아 움직이면서도 그 생명의 근원은 주님이심을 가르칩니다. 의지와 이해는 사랑과 신앙을 받아들이는 살아 있는 수용체이며,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면서 그 수용체 안에 사랑을 일으키시고 진리로 비추십니다. 이것이 ‘태양의 빛이 그것을 받는 대상 안에서 보이듯이’라는 비유의 핵심입니다. (AC.30 심화 1)

 

 

 

AC.30, 창1:14-17(AC.30-37), ‘사랑과 신앙의 광명체 : 사랑으로 생명을 얻는 신앙의 넷째 날’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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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창2:24)

 

AC.162

모든 진리와 정의의 법은 천적 기원들, 곧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로부터 흘러나옵니다. 온 천국은 하나의 천적 인간인데, 이는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천국과 천적 인간의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시므로, 천국과 천적 인간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천적이라 합니다. 모든 진리와 정의의 법이 천적 기원들, 곧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로부터 내려오는 것처럼, 특별히 ‘혼인의 법’(the law of marriages)이 그러합니다. 지상의 모든 혼인은 ‘천적 혼인’(celestial marriage), 곧 천국의 혼인으로부터, 그리고 그 혼인에 따라 파생되어야 합니다. 이 혼인은 한 분 주님과 하나의 천국, 곧 머리가 주님이신 하나의 교회가 있는 그러한 혼인입니다. 여기서 파생되는 ‘혼인의 법’(law of marriages)은 한 남편과 한 아내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경우 그들은 천적 혼인을 표상하며, 천적 인간의 본이 됩니다. 이 법은 태고교회의 사람들에게 계시되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속 사람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당시에는 한 남자가 오직 한 아내만을 두었고, 그들은 하나의 집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후손들이 속 사람이기를 그치고 겉 사람이 되었을 때에는 여러 아내를 맞이하였습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그들의 혼인에서 천적 혼인을 표상했기 때문에, 부부의 사랑은 그들에게 일종의 천국이자 천국의 행복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쇠퇴했을 때 그들은 더 이상 부부의 사랑 안에서 행복을 퍼셉션하지 못하고, 다수에게서 오는 쾌락, 곧 겉 사람의 즐거움에서 행복을 퍼셉션했습니다. 이것을 주님께서는 ‘마음의 완악함’(hardness of heart)이라 하셨으며, 이로 말미암아 그들은 모세를 통하여 여러 아내를 두는 것을 허락받았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다음과 같이 가르치십니다. All the laws of truth and right flow from celestial beginnings, or from the order of life of the celestial man. For the whole heaven is a celestial man because the Lord alone is a celestial man, and as he is the all in all of heaven and the celestial man, they are thence called celestial. As every law of truth and right descends from celestial beginnings, or from the order of life of the celestial man, so in an especial manner does the law of marriages. It is the celestial (or heavenly) marriage from and according to which all marriages on earth must be derived; and this marriage is such that there is one Lord and one heaven, or one church whose head is the Lord. The law of marriages thence derived is that there shall be one husband and one wife, and when this is the case they represent the celestial marriage, and are an exemplar of the celestial man. This law was not only revealed to the men of the most ancient church, but was also inscribed on their internal man, wherefore at that time a man had but one wife, and they constituted one house. But when their posterity ceased to be internal men, and became external, they married a plurality of wives. Because the men of the most ancient church in their marriages represented the celestial marriage, conjugial love was to them a kind of heaven and heavenly happiness, but when the church declined they had no longer any perception of happiness in conjugial love, but in pleasure from a number, which is a delight of the external man. This is called by the Lord “hardness of heart,” on account of which they were permitted by Moses to marry a plurality of wives, as the Lord himself teaches:

 

5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6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7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8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9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막10:5-9) For the hardness of your heart Moses wrote you this precept, but from the beginning of the creation God made them male and female. For this caus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twain shall be one flesh; wherefore they are no more twain but one flesh; what therefore God hath joined together let not man put asunder. (Mark 10:5–9)

 

해설

AC.162는 창2:24의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를 혼인 자체의 질서로 확장하여 설명합니다. 출발점은 지상의 혼인이 아니라 천국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모든 진리와 정의의 법이 인간 사회의 편의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천적 기원들’, 곧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로부터 내려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특별히 혼인의 법이 그러하다고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혼인은 단순한 사회 제도나 생활 방식이 아니라 천국의 질서가 지상에서 표상되는 매우 중요한 형식입니다.

 

이 설명의 중심에는 ‘천적 혼인’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지상의 모든 혼인이 천적 혼인으로부터, 그리고 그 혼인에 따라 파생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천적 혼인을 설명하면서 먼저 ‘한 분 주님과 하나의 천국’을 말하고, 이어 ‘머리가 주님이신 하나의 교회’를 말합니다. 따라서 혼인의 하나 됨을 이해하는 가장 깊은 기준은 두 인간이 서로에게만 집중하여 하나가 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하나 됨의 근원이 한 분 주님에게 있다는 데 있습니다. 천국도 교회도 그분을 머리로 할 때 하나이며, 지상의 혼인도 이 천적 질서를 표상합니다.

 

바로 여기서 한 남편과 한 아내라는 혼인의 법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당시의 관습이나 인간이 만들어 낸 윤리 규정에서 도출하지 않고 천적 혼인으로부터 도출합니다. 한 남편과 한 아내가 혼인을 이룰 때 그들은 천적 혼인을 표상하고 천적 인간의 본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일부일처는 이 단락에서 단순히 허용된 여러 결혼 형태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천적 혼인에서 파생되는 혼인의 질서로 제시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는 이 법이 외적으로 계시되었을 뿐 아니라 속 사람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들이 한 남자와 한 여자로 하나의 집을 이루었던 것은 단지 외적인 명령을 지켰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내적 상태가 그 질서와 상응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부부의 사랑은 ‘일종의 천국이자 천국의 행복’이었습니다. 혼인의 외적 형태와 그들의 내적 생명의 질서가 서로 떨어져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후손들이 속 사람이기를 그치고 겉 사람이 되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변화를 혼인에서도 그대로 보여 줍니다. 그들은 더 이상 부부의 사랑 안에서 행복을 퍼셉션하지 못하고 다수에게서 오는 쾌락, 곧 겉 사람의 즐거움에서 그것을 퍼셉션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아내의 수가 바뀌었다는 외적 사실보다 행복을 어디에서 퍼셉션하게 되었는가 하는 내적 변화입니다. 혼인의 외적 변화는 이미 일어난 인간 내면의 변화를 드러내는 결과였습니다.

 

이 때문에 AC.162가 막10:5-9를 인용하는 이유도 분명합니다. 주님께서는 모세가 허용한 것을 곧바로 창조의 본래 질서와 동일시하지 않으시고,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기록되었다고 말씀하신 뒤 ‘창조 때로부터’의 질서로 돌아가십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말씀을 인용한 핵심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복수의 아내가 허락되었다는 사실이 혼인의 본래 법을 바꾼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상태가 달라짐에 따라 허용된 것이 있었지만, 혼인의 기원과 기준은 여전히 천적 혼인에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마음의 완악함’을 단순히 고집이 세거나 잔인하다는 뜻으로 좁힐 필요는 없습니다. AC.162 자체의 흐름에서 보면, 태고교회의 후손들이 속 사람이기를 그치고 겉 사람이 되었으며, 부부의 사랑에서 누리던 천국의 행복을 더 이상 퍼셉션하지 못하게 된 상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막10장에서 모세의 허용을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창조의 처음을 다시 가리키신 것은, 인간의 변화된 상태와 혼인의 본래 질서를 구별하여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AC.162는 이렇게 창2:24를 천적 혼인에서 지상의 혼인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질서 안에 놓습니다. 한 분 주님, 하나의 천국과 교회, 한 남편과 한 아내, 그리고 하나의 집이라는 흐름의 중심에는 단순한 숫자상의 ‘하나’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질서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 됨이 있습니다. 태고교회의 부부의 사랑이 천국의 행복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의 혼인이 이 천적 질서를 표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단락의 ‘혼인의 법’은 결혼생활에 관한 하나의 규칙을 넘어, 지상의 혼인이 어디에서 그 본과 질서를 받아야 하는지를 밝히는 말씀입니다. (AC.162 해설)

 

심화

1.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다’

 

AC.162 심화 2,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다’

AC.162 심화1.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다’ AC.162에는 처음 읽으면 조금 뜻밖에 느껴지는 문장이 있습니다. ‘온 천국은 하나의 천적 인간인데, 이는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기 때문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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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1, 창2:24, ‘겉 사람의 proprium 안에 영적 천적인 것을 스며들게 하시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창2:24) AC.161이 태고교회의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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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창2:24)

 

AC.161

이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악하지 않았고 여전히 선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겉 사람 안에서, 곧 자기들의 proprium 안에서 살기를 원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이것을 그들에게 허락하셨으며, 다만 영적 천적인 것을 자비롭게 그 안에 스며들게 하셨습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어떻게 하나로서 활동하는지, 또는 어떻게 하나처럼 보이는지는 하나가 다른 하나 안으로 유입되는 것을 알지 못하면 알 수 없습니다. 이에 관하여 어떤 관념을 갖기 위해 하나의 행위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행위 안에 체어리티, 곧 사랑과 신앙이 없고, 또 그 사랑과 신앙 안에 주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그 행위는 체어리티의 행위 또는 신앙의 열매라고 할 수 없습니다. This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as not evil, but was still good; and because they desired to live in the external man or in their own, this was permitted them by the Lord; what is spiritual celestial, however, being mercifully instilled therein. How the internal and external act as a one, or how they appear as a one, cannot be known unless the influx of the one into the other is known. In order to conceive some idea of it, take for example an action. Unless in an action there is charity, that is, love and faith, and in these the Lord, that action cannot be called a work of charity, or the fruit of faith.

 

해설

AC.161에서 먼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이 태고교회의 후손들을 ‘악하지 않았고 여전히 선했다’고 분명히 말한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이미 악에 빠진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이전의 천적 인간처럼 전적으로 속 사람의 질서 안에서 살기보다 겉 사람 안에서, 곧 자기들의 proprium 안에서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므로 proprium을 원했다는 사실만으로 곧바로 그들을 악한 상태라고 규정해서는 안 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그들의 이러한 상태를 허락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허락하셨다는 것은 그들을 proprium에 내버려 두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본문은 곧이어 주님께서 ‘영적 천적인 것’을 자비롭게 그 안에 스며들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AC.151에서 proprium이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는다고 한 것, AC.154에서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이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나타난다고 한 것과 이어집니다. 인간이 proprium 안에서 살아간다고 해도 그 생명의 근원이 proprium 자체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어서 스베덴보리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어떻게 하나로서 활동하면서 하나처럼 보일 수 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유입’(influx)을 제시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둘이 실제로 하나의 것이 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AC.159에서 천적 인간은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서로 구별되며, 겉 사람이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어떻게 다스려지는지를 퍼셉션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은 구별되지만 서로 단절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유입을 통하여 하나로서 활동합니다.

 

이것은 앞서 AC.155에서 천사들의 상태를 설명한 것과도 연결됩니다. 천사들은 자기들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을 퍼셉션하지만, 그것을 특별히 의식하지 않을 때에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사는 것으로밖에는 알지 못합니다. 곧 생명의 근원이 주님께 있다는 사실과 그 생명을 자기 자신의 삶처럼 살아가는 경험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AC.161에서 겉 사람의 proprium 안에 영적 천적인 것이 스며든다는 설명도 같은 흐름 안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유입을 추상적인 설명으로 끝내지 않고 하나의 ‘행위’를 예로 듭니다. 어떤 행위가 겉으로 선하게 보인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체어리티의 행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행위 안에 체어리티, 곧 사랑과 신앙이 있어야 하며, 다시 그 사랑과 신앙 안에 주님이 계셔야 합니다. 여기서 행위는 겉으로 나타나는 것이고, 사랑과 신앙은 그 행위를 안에서 살아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과 신앙의 생명 역시 인간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옵니다.

 

따라서 AC.161에서 말하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의 하나 됨은 둘 사이의 구별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안에 있는 것이 밖으로 흘러들어 실제 삶과 행위 안에서 함께 활동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를 해설하면서 천적·영적 생명이 proprium에 결합되어 하나처럼 된다고 한 내용도 더 분명하게 해 줍니다. 하나처럼 보이는 것은 서로 다른 것이 없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인간 안에서 질서 있게 받아들여져 하나의 삶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AC.161은 창2 후반부의 proprium에 관한 설명을 한 단계 더 깊게 만듭니다. 인간에게 proprium이 허락되었다는 것만으로 설명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proprium 안에 무엇이 스며들어 있으며, 무엇이 그 삶과 행위의 내적 근원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영적 천적인 것이 그 안에 있고, 그것이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 안으로 유입되어 실제 삶에서 나타날 때, 인간은 자기 삶을 자기 삶처럼 살아가면서도 그 생명의 근원은 주님에게 두게 됩니다. 이것이 AC.161이 유입이라는 개념을 통해 보여 주기 시작하는 중요한 질서입니다. (AC.161 해설)

 

심화

1. ‘influx -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하나처럼 보이는 이유’

 

AC.161 심화 1, ‘influx -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하나처럼 보이는 이유’

AC.161 심화1. ‘influx -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하나처럼 보이는 이유’ AC.161에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말을 합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어떻게 하나로서 활동하는지, 또는 어떻게 하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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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2, 창2:24, ‘혼인의 법’(the law of marriages)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창2:24) AC.162모든 진리와 정의의 법은 천적 기원들, 곧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로부터 흘러나옵니다. 온 천국은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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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0, 창2:24, ‘부모를 떠나 한 몸을 이루다 - 천적·영적 생명이 proprium에 결합됨’ (AC.160-162)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창2:24) AC.160‘부모를 떠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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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창2:24)

 

AC.160

‘부모를 떠나는 것’(leave father and mother)은 속 사람에게서 물러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겉 사람을 잉태하고 낳는 것은 속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아내와 합하는 것’(cleave unto his wife)은 속 사람이 겉 사람 안에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하고, ‘한 몸이 되는 것’(be one flesh)은 그 둘이 거기에서 함께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전에는 속 사람과, 속 사람으로부터 나온 겉 사람이 영이었으나 이제는 육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천적·영적 생명이 proprium에 결합되어, 그것들이 하나처럼 되게 되었습니다. To “leave father and mother” is to recede from the internal man, for it is the internal which conceives and brings forth the external; to “cleave unto his wife” is that the internal may be in the external; to “be one flesh,” that they are there together; and because previously the internal man and the external from the internal were spirit, but now they have become flesh. Thus was celestial and spiritual life adjoined to the own, that they might be as one.

 

해설

AC.160은 창2:24의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는 말씀을 앞에서 계속되어 온 속 사람, 겉 사람, proprium의 변화라는 흐름 안에서 해설합니다. AC.159에서는 천적 인간에게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매우 뚜렷하게 구별되어 있었으며, 겉 사람이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다스려진다는 것을 천적 인간이 퍼셉션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손들은 겉 사람에 속한 proprium을 원하면서 이 구별을 더 이상 퍼셉션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AC.160은 바로 그 변화된 상태를 창2:24의 세 표현을 따라 설명합니다.

 

먼저 ‘부모를 떠나는 것’은 속 사람에게서 물러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이유를 스베덴보리는 ‘겉 사람을 잉태하고 낳는 것은 속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부모는 자연적인 부모에 관한 교훈에 머무르지 않고, 겉 사람의 근원이 되는 속 사람을 가리킵니다. 앞 번호에서 천적 인간은 겉 사람이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다스려지는 질서를 퍼셉션했다고 했는데, 이제 후손들은 proprium으로 기울면서 그 속 사람에게서 물러나는 상태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그의 아내와 합하는 것’은 속 사람이 완전히 사라지거나 겉 사람과 관계가 끊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속 사람이 겉 사람 안에 있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대목입니다. 속 사람에게서 물러났다고 해서 속 사람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 방식이 달라진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아내’는 AC.156에서 설명했듯 앞에서 ‘여자’라고 했던 proprium이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결합으로 인해 받게 된 표현입니다.

 

‘한 몸이 되는 것’은 그 둘이 거기에서 함께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도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 되어 구별이 사라졌다고 읽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앞의 AC.159가 천적 인간에게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뚜렷하게 구별된다고 명시했고, 이번 번호의 마지막도 천적·영적 생명이 proprium에 결합되어 ‘하나처럼’ 되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한 몸’은 구별 자체의 소멸보다, 변화된 상태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함께 있게 된 것을 나타냅니다.

 

이어지는 ‘이전에는 속 사람과, 속 사람으로부터 나온 겉 사람이 영이었으나 이제는 육이 되었다’는 문장은 특별히 조심해서 읽어야 합니다. 이것을 곧바로 ‘처음에는 영적이었지만 이제 타락하여 육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일반적인 도식으로 바꾸어 버리면 현재 문맥의 세밀한 흐름을 놓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 천적 인간의 후손들이 proprium을 원하면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영’에서 ‘육’으로의 변화도 그 상태 변화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특히 마지막 문장이 그 의미를 붙들어 줍니다. ‘이렇게 천적·영적 생명이 proprium에 결합되어, 그것들이 하나처럼 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proprium은 천적·영적 생명 자체가 아닙니다. 천적·영적 생명이 proprium에 ‘결합되었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둘이 완전히 동일한 하나가 되었다고 하지 않고 ‘하나처럼’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도 생명의 근원과 그것을 받아 자기 삶처럼 누리는 proprium 사이의 구별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AC.135와 매우 밀접하게 이어집니다. AC.135에서도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proprium에 결합되어 하나처럼 보이게 된다고 했습니다. 당시에도 중요한 것은 ‘결합’과 ‘하나처럼 보임’을 ‘동일해짐’으로 바꾸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AC.160은 이제 창2:24의 ‘한 몸’이라는 말씀을 통하여 같은 내용을 다시 설명합니다. 천적·영적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오지만, 그것이 인간의 proprium에 결합됨으로 인간에게는 자기 자신의 생명과 하나처럼 경험되는 상태가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AC.160은 ‘부모를 떠남’, ‘아내와 합함’, ‘한 몸이 됨’을 각각 떨어진 상응어로 읽기보다 하나의 상태 변화로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속 사람에게서 물러나고, 속 사람이 겉 사람 안에 있게 되며, 그 둘이 함께 있게 되고, 천적·영적 생명이 proprium에 결합되어 하나처럼 되는 흐름입니다. 이것은 AC.131부터 시작된 천적 인간의 후손들이 proprium으로 기울어 가는 과정의 한 단계이며, 동시에 주님께서 그 proprium을 단순히 버려 두지 않으시고 생명과 결합시키시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AC.160)

 

 

 

AC.161, 창2:24, ‘겉 사람의 proprium 안에 영적 천적인 것을 스며들게 하시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창2:24) AC.161이 태고교회의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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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9, 창2:23,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구별을 잃어버린 천적 인간의 후손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창2:23) AC.159그러나 천적 인간의 상태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러한 것들이 어떠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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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창2:23)

 

AC.159

그러나 천적 인간의 상태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러한 것들이 어떠한지를 쉽게 퍼셉션할 수 없습니다. 천적 인간에게서 속 사람은 겉 사람과 구별되며, 참으로 너무나 뚜렷하게 구별되어 있어서 천적 인간은 무엇이 속 사람에게 속하고 무엇이 겉 사람에게 속하는지, 그리고 겉 사람이 속 사람을 통하여 어떻게 주님에 의해 다스려지는지를 퍼셉션합니다. 그러나 이 천적 인간의 후손들의 상태는 겉 사람에게 속한 그들의 proprium을 원한 결과 너무나 달라져, 그들은 더 이상 속 사람이 겉 사람과 구별된다는 것을 퍼셉션하지 못하고, 속 사람이 겉 사람과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이 자기의 proprium으로 기울 때에는 이러한 퍼셉션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But it is not easy to perceive how the case is with these things unless the state of the celestial man is understood. In the celestial man the internal man is distinct from the external, indeed so distinct that the celestial man perceives what belongs to the internal man, and what to the external, and how the external man is governed through the internal by the Lord. But the state of the posterity of this celestial man, in consequence of desiring their own, which belongs to the external man, was so changed that they no longer perceived the internal man to be distinct from the external, but imagined the internal to be one with the external, for such a perception takes place when man inclines to his own.

 

해설

AC.159는 앞에서 다루어 온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붙들어야 할 중요한 구별을 제시합니다. AC.156에서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결합되기 때문에 앞에서 ‘여자’라고 했던 proprium을 ‘아내’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결합은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구별이 사라져 둘이 뒤섞인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AC.159는 천적 인간에게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매우 뚜렷하게 구별되어 있었다고 말합니다.

 

천적 인간은 무엇이 속 사람에게 속하고 무엇이 겉 사람에게 속하는지를 퍼셉션했습니다. 이것은 자기 안에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단순히 교리적으로 알고 있었다는 뜻보다 훨씬 깊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일어나는 것 가운데 무엇이 어느 쪽에 속하는지를 퍼셉션할 수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 겉 사람이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어떻게 다스려지는지도 퍼셉션했습니다. 따라서 천적 인간의 내적 질서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구별’과 ‘결합’이 함께 존재하는 질서였습니다.

 

특히 ‘겉 사람이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다스려진다’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주도권의 근원은 겉 사람에게 있지 않습니다. 겉 사람이 스스로를 다스리면서 속 사람과 협력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을 다스리십니다. 이것은 창2 전반에서 계속되어 온 천적 질서와도 이어집니다. 앞에서 천적 인간은 자기에게 주어진 지혜와 지성, 선과 진리와 모든 능력이 주님께 속한 것임을 퍼셉션했습니다. 이제 같은 질서가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런데 천적 인간의 후손들에게서 상태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들이 원한 것은 겉 사람에게 속한 proprium이었습니다. 이 점은 AC.131 이후 계속된 흐름과 정확히 이어집니다. 처음에는 proprium으로 기울기 시작했고, 자기 자신의 인도 아래 있기를 원했으며, 마침내 그 proprium이 그들에게 허락되었습니다. AC.159는 이러한 변화가 단지 ‘자기 것을 갖고 싶어 했다’는 정도에 머물지 않고,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를 퍼셉션하는 방식 자체를 바꾸었다고 설명합니다.

 

그 결과 후손들은 더 이상 속 사람이 겉 사람과 구별된다는 것을 퍼셉션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속 사람이 겉 사람과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는 AC.156에서 말한 올바른 결합과 구별해야 합니다. 천적 인간에게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은 서로 뚜렷하게 구별되면서도 주님의 질서 안에서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반면 후손들은 그 구별 자체를 잃어버리고 둘을 하나로 여겼습니다. 따라서 참된 결합은 구별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구별된 것들이 올바른 질서 안에서 결합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문장은 이러한 변화가 왜 일어났는지를 다시 proprium과 연결합니다. 사람이 자기의 proprium으로 기울 때에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을 하나라고 여기는 이러한 지각이 생긴다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 있는 설명입니다. 겉 사람에게 속한 proprium을 자기 생명의 중심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사람은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께서 겉 사람을 다스리시는 질서를 더 이상 퍼셉션하지 못하게 됩니다. 겉 사람에서 느끼고 생각하고 원하는 것을 곧 자기 존재 전체의 생명으로 여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AC.159는 AC.147-155에서 계속 다루어 온 ‘자기 자신으로부터 사는 것처럼 보이는 상태’를 또 다른 각도에서 보여 줍니다. 문제는 사람이 자기 자신의 삶을 실제 자기 삶처럼 경험한다는 사실 자체가 아닙니다. AC.155의 천사들도 특별히 그 근원을 의식하지 않을 때에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사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자기들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보편적인 퍼셉션이 있습니다. 반면 여기의 후손들은 proprium으로 기울면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구별과 그 질서를 퍼셉션하지 못하게 됩니다. 바로 이 차이가 중요합니다.

 

따라서 AC.159에서 천적 인간의 상태를 이해하는 열쇠는 ‘구별되어 있으면서 결합되어 있음’에 있습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은 서로 다른 것에 속하지만 분리되어 제각기 움직이는 것이 아니며, 주님께서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을 다스리심으로 하나의 질서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proprium으로 기울면 이 질서에 대한 퍼셉션이 흐려지고, 사람은 속 사람과 겉 사람을 하나라고 여기게 됩니다. AC.159는 proprium으로의 기울어짐이 단순한 도덕적 타락만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생명의 근원과 내적 질서를 퍼셉션하는 방식의 변화이기도 했음을 보여 줍니다. (AC.159)

 

 

 

AC.160, 창2:24, ‘부모를 떠나 한 몸을 이루다 - 천적·영적 생명이 proprium에 결합됨’ (AC.160-162)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창2:24) AC.160‘부모를 떠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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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8, 창2:23, ‘사람 - 지혜롭고 지성 있는 속 사람’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창2:23) AC.158사람이 속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 곧 같은 말로 지성 있고 지혜로운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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