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7)

 

AC.128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볼 수 있도록 감각적인 것들을 통하여, 또는 내가 이해할 수 있도록 기억지식을 통하여 신앙과 신앙에 속한 모든 것에 관하여 가르침을 받지 않는다면, 나는 믿지 않겠다.’ 그리고 그는 자연적인 것들이 영적인 것들과 모순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자기 입장을 확증합니다. 이와 같이 그는 천적이고 신적인 것에 관하여 감각적인 것들로부터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합니다. 그가 이러한 수단으로 지혜로워지기를 원하면 원할수록 그는 더욱 자기 눈을 멀게 하며, 마침내 아무것도 믿지 않게 되어 영적인 것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조차 믿지 않게 됩니다. 이것은 그가 전제로 삼은 원리에서 비롯됩니다. 이것이 바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ea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이며, 누구든지 그것을 더 많이 먹을수록 더욱 죽은 상태가 됩니다. 그러나 세상으로부터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지혜로워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마음속으로 주님을 믿어야 한다고, 곧 주님께서 말씀에서 하신 것들을 믿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들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 원리에 따라 자신의 생각을 질서 지웁니다. 그는 이성에 속한 것들과 기억지식과 감각적인 것들과 자연적인 것들을 통하여 자신을 확증하며, 확증하지 않는 것들은 제쳐 둡니다. The worldly and corporeal man says in his heart, If I am not instructed concerning the faith, and everything relating to it, by means of the things of sense, so that I may see, or by means of those of the memory [scientifica], so that I may understand, I will not believe; and he confirms himself in this by the consideration that natural things cannot be contrary to spiritual. Thus he is desirous of being instructed from things of sense in what is celestial and Divine, which is as impossible as it is for a camel to go through the eye of a needle; for the more he desires to grow wise by such means, the more he blinds himself, till at length he believes nothing, not even that there is anything spiritual, or that there is eternal life. This comes from the principle which he assumes. And this is to “ea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of which the more anyone eats, the more dead he becomes. But he who would be wise from the Lord, and not from the world, says in his heart that the Lord must be believed, that is, the things which the Lord has spoken in the Word, because they are truths; and according to this principle he regulates his thoughts. He confirms himself by things of reason, of knowledge, of the senses, and of nature [per rationalia, scientifica, sensualia et naturalia], and those which are not confirmatory he casts aside.

 

해설

AC.128은 앞에서 설명한 두 가지 질서를 각각 한 사람의 마음속 말처럼 펼쳐 보여 줍니다.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은 ‘내가 감각으로 볼 수 있고 기억지식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믿겠다’고 말합니다. 반대로 주님으로부터 지혜로워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주님께서 말씀에서 하신 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먼저 그것을 믿고, 그 원리에 따라 자신의 생각을 질서 지웁니다. 따라서 두 사람의 차이는 한쪽은 생각하고 다른 쪽은 생각하지 않는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무엇을 출발점으로 삼아 생각하느냐가 다릅니다.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의 출발점은 감각과 기억지식입니다. 그는 천적이고 신적인 것조차 먼저 자연적인 차원에서 확인되어야 받아들이겠다고 합니다. ‘자연적인 것들이 영적인 것들과 모순될 수 없다’는 생각 자체만 떼어 놓으면 그럴듯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자연적인 것을 영적인 것의 심판자로 세운다는 데 있습니다. 보이지 않으면 믿지 않고, 자기가 가진 기억지식으로 이해되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원리를 먼저 세웠기 때문입니다. 이때 가장 바깥에 있어야 할 것이 가장 위에 올라가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것을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만큼 불가능하다고 표현한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감각적인 것은 자연계에 나타나는 것을 받아들이고, 기억지식은 그렇게 받아들인 것들을 기억에 간직합니다. 그것들은 자기 차원에서 반드시 필요한 기능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천적이고 신적인 것의 근원을 발견하여 그 진위를 판정하려 한다면, 아래에 있는 것으로 위에 있는 것의 근원을 만들어 내려는 셈이 됩니다. AC.121에서 제시된 천적 질서는 정반대였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지혜가 나오고, 지혜를 통하여 지성이, 지성을 통하여 이성이 나오며, 이성을 통하여 기억에 속한 앎들이 생명을 얻습니다.

 

따라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얻는 행위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선과 진리를 주님으로부터 받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알아내려는 질서의 전도를 의미합니다. 그런 까닭에 더 많이 먹을수록 더 많은 정보를 얻어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죽은 상태’가 됩니다. 사람이 감각과 기억지식을 최종 기준으로 삼을수록 영적인 것을 받아들이는 내적인 길이 닫히고, 마침내 영적인 실재와 영원한 생명 자체도 믿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AC.128의 후반부는 이 대목을 반지성주의로 읽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매우 분명하게 합니다. 주님으로부터 지혜로워지기를 원하는 사람 역시 이성과 기억지식과 감각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을 사용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을 버리라고 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을 ‘통하여 자신을 확증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금지되는 것은 이성적 사고나 지식의 사용이 아니라 그것들을 신앙의 최초 원리로 삼는 것입니다. 동일한 이성과 기억지식도 어디에 놓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역할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말씀에서 하신 것들을 믿는다’는 것도 생각을 중단하라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어지는 문장이 그 오해를 막습니다. 그는 ‘이 원리에 따라 자신의 생각을 질서 지웁니다.’ 즉 말씀의 진리를 받아들인 뒤 생각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진리를 중심으로 자신의 사고 전체를 질서 있게 세웁니다. 그리고 이성에 속한 것들과 기억지식과 감각적인 것들과 자연적인 것들 가운데 그 진리를 확증하는 것들을 사용합니다. 신앙과 사고가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가 사고의 질서를 바로잡는 것입니다.

 

마지막의 ‘확증하지 않는 것들은 제쳐 둔다’는 표현은 문맥 안에서 신중하게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자신이 믿고 싶은 것과 맞지 않는 사실은 무조건 무시해도 된다는 일반적인 지적 태도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스베덴보리가 다루는 것은 천적이고 신적인 것을 무엇으로부터 배우며 무엇을 최초 원리로 삼을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 문맥에서 핵심은 자연적인 지식이 신적인 진리 위에 서서 그것을 재판하지 못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이 문장을 현대적인 의미의 사실 회피나 무비판적인 확증 편향을 정당화하는 말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결국 AC.128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문제를 ‘지식 대 무지’의 대립이 아니라 ‘질서 대 질서의 전도’로 보여 줍니다.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인간도 이성과 기억지식과 감각을 사용하고, 주님으로부터 지혜로워지는 사람도 그것들을 사용합니다. 차이는 그것들이 주인의 자리에 있는가, 아니면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를 섬기는 자리에 있는가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시작하여 이성과 기억지식과 감각적인 것에까지 내려가는 것이 생명의 질서라면, 감각과 기억지식에서 시작하여 그것으로 신적인 것을 판단하려는 것은 그 질서를 거꾸로 세우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의 핵심입니다. (AC.128)

 

 

 

AC.129, 창2:17, ‘출발점은 주님이어야 한다 - 이성과 학문은 신앙을 확증하는 쓰임 안에 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7) AC.129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받아들인 원리들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원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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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7, 창2:17, ‘감각과 기억지식으로 신앙의 신비를 탐구할 때 교회가 타락한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7) AC.127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 신앙의 신비를 탐구하려는 욕망은 다음 장에서 다루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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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7)

 

AC.127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 신앙의 신비를 탐구하려는 욕망은 다음 장에서 다루게 될 태고교회 후손들의 타락의 원인이었을 뿐 아니라, 모든 교회의 타락의 원인이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거짓들뿐 아니라 삶의 악들도 나오기 때문입니다. A desire to investigate the mysteries of faith by means of the things of sense and of the memory was not only the cause of the fall of the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as treated of in the following chapter, but it is also the cause of the fall of every church; for hence come not only falsities, but also evils of life.

 

해설

AC.127은 바로 앞의 AC.126에서 제시한 경고가 얼마나 중대한 것인지를 밝힙니다.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 신앙의 신비를 탐구하려는 욕망은 단순한 지적 방법의 잘못이 아니라 태고교회 후손들의 타락을 일으킨 원인이었으며, 더 나아가 모든 교회의 타락을 일으키는 원리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제 논점은 한 개인이 선과 진리를 어떻게 아느냐 하는 데서 교회 전체가 어떻게 그 본래의 질서를 잃게 되는가 하는 문제로 확대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다시 한번 감각과 기억지식 자체의 위험성이 아닙니다. AC.118-121과 AC.125에서 이미 본 것처럼 감각과 기억에 속한 것들은 인간의 정상적인 질서 안에 있으며, 천적 인간도 기억에 간직된 것을 숙고했습니다. 문제는 ‘신앙의 신비를 탐구하려는 욕망’이 감각과 기억지식을 출발점으로 삼는 데 있습니다. 즉 주님으로부터 주어진 선과 진리를 받아 그 빛 안에서 자연적인 것들을 이해하는 대신, 자연적인 감각과 이미 알고 있는 기억지식을 기준으로 삼아 신앙의 신비가 참인지 아닌지를 판정하려는 것입니다.

 

AC.126에서는 이렇게 질서가 뒤집힐 때 ‘신앙의 천적인 것’이 파괴된다고 했습니다. AC.127은 그 결과가 왜 교회의 타락으로까지 이어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신앙이 더 이상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받아들이는 질서 안에 있지 않고 인간 자신의 감각과 지식의 판단 아래 놓이게 되면, 인간은 자신이 이해하고 확인할 수 있는 것만을 참이라고 여기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신앙의 근원이 주님에게서 인간 자신으로 옮겨지고, 앞의 AC.122-124에서 반복해서 강조한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라는 천적 질서도 무너지게 됩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그 결과로 ‘거짓들’뿐 아니라 ‘삶의 악들’까지 나온다는 설명입니다. 만일 문제가 단순히 잘못된 추론에 그친다면 이것은 지성의 오류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의 질서는 삶의 질서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과 세상에서 출발하여 선과 진리를 판단하기 시작하면, 자기에게서 나온 욕망과 판단을 정당화하는 거짓도 함께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잘못된 앎의 질서는 결국 잘못된 삶의 질서로 이어집니다.

 

이 점은 왜 스베덴보리가 단순히 ‘탐구’라고 하지 않고 ‘탐구하려는 욕망’이라고 말하는지도 생각하게 합니다. 문제는 질문을 하거나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 자체가 아닙니다. 지금까지 AC 자체가 수많은 성경 구절을 살피고 서로 연결하면서 선과 진리를 이해하도록 이끌어 왔습니다. 여기서 경계하는 것은 인간 자신의 감각과 기억지식을 최종 권위로 삼아 신앙의 신비를 자기 힘으로 파헤치고 판정하려는 내적인 성향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신앙에 관해서는 질문하거나 연구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읽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말하는 핵심을 놓치는 것입니다.

 

또한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태고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명시합니다. 태고교회 후손들의 타락은 다음 장, 곧 창3의 속뜻에서 구체적으로 다루어지겠지만, 여기서는 미리 그 원리를 밝히면서 그것이 ‘모든 교회’의 타락 원인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창3의 뱀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타락의 이야기도 단지 아주 먼 과거의 한 사건으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는 방향이 이미 제시됩니다. 주님에게서 받아야 할 것을 자기 자신과 세상에서 찾으려는 질서의 전도는 어느 시대의 교회에서도 반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AC.127의 핵심은 지성과 연구를 포기하라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무엇이 우리의 지성과 연구를 지배하는가를 묻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위에 있고 이성과 기억지식이 그 아래에서 쓰일 때에는 그것들이 생명을 받습니다. 그러나 감각과 기억지식이 위에 올라가 신앙의 신비를 심판하기 시작하면 질서가 뒤집히며, 그 결과는 거짓된 생각에만 머물지 않고 삶의 악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질서의 전도가 태고교회 후손들의 타락을 설명하는 열쇠이며, 동시에 모든 교회가 경계해야 할 타락의 원리입니다. (AC.127)

 

 

 

AC.126, 창2:17, ‘신앙의 신비를 감각과 기억지식으로 탐구해서는 안 되는 이유’ (AC.126-130)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Bu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thou shalt not eat of it; for in the day that thou eatest thereof, dying thou shalt d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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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Bu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thou shalt not eat of it; for in the day that thou eatest thereof, dying thou shalt die. (창2:17)

 

AC.126

이 말씀을 방금 설명한 말씀과 함께 보면,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퍼셉션을 통하여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를 아는 것은 허락되지만,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그것을 아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 신앙의 신비를 탐구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신앙의 천적인 것이 파괴되기 때문입니다. These words, taken together with those just explained, signify that it is allowable to become acquainted with what is true and good by means of every perception derived from the Lord, but not from self and the world; that is, we are not to inquire into the mysteries of faith by means of the things of sense and of the memory [per sensualia et scientifica], for in this case the celestial of faith is destroyed.

 

해설

AC.126은 창2:16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라는 허락과 이어지는 창2:17의 금지를 하나의 질서 안에서 이해하게 합니다. AC.125에서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을 통하여 무엇이 선하고 참된지를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AC.126은 그 반대편을 밝힙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을 통하여 선과 진리를 아는 것은 허락되지만,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그것을 알아내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아느냐’보다 ‘어디에서 아느냐’입니다. 천적 인간에게 선과 진리를 아는 것 자체가 금지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앎의 근원을 주님으로부터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 바꾸는 데 있습니다. AC.123-124에서도 천적 인간은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퍼셉션하며, 지혜와 지성과 이성과 지식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AC.126의 금지는 지식을 제한하는 금지가 아니라 생명의 근원과 질서를 뒤집지 말라는 금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 신앙의 신비를 탐구해서는 안 된다’고 표현합니다. 이 문장은 AC.80의 설명을 거의 그대로 다시 불러옵니다. 그러나 여기까지 읽어온 독자는 이제 이것을 감각이나 기억지식 자체에 대한 부정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는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AC.118에서는 기억지식을 천적·영적 인간의 질서에서 최하위 또는 경계라고 했고, AC.120에서는 감각적인 것과 기억지식이 지성과 지혜의 경계를 이룬다고 했으며, AC.121에서는 이성을 통하여 기억에 속한 앎들이 생명을 얻는 것이 천적 질서라고 했습니다. AC.125에서는 태고교회 사람들조차 기억에 간직된 것을 숙고했다고 명시했습니다.

 

그러므로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 탐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그것들을 사용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이 자연계에서 보고 듣고 배우며 기억하고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인간 삶의 정상적인 부분입니다. 문제는 가장 바깥에 있는 감각과 기억지식을 신앙의 신비를 판정하는 최초의 기준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주님으로부터 안을 거쳐 밖으로 흘러야 할 천적 질서가 거꾸로 되어, 바깥의 것이 안의 것을 판단하게 됩니다.

 

바로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그렇게 할 경우 ‘신앙의 천적인 것이 파괴된다’고 말합니다. 앞에서 계속 보아 온 천적 질서의 핵심은 사랑과 신앙, 지혜와 지성, 이성과 앎이 모두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내 감각으로 확인할 수 있는가’,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기억지식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를 먼저 세우고, 그것으로 신앙의 신비를 받아들일지 말지를 결정한다면 신앙은 더 이상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질서 안에 있지 않게 됩니다. 파괴되는 것은 인간의 이성이나 지식이 아니라 신앙 안에 있어야 할 천적인 질서입니다.

 

이 점에서 AC.126은 이성을 사용하지 않는 맹목적인 신앙을 권하는 말도 아닙니다. AC.121은 이성을 천적 질서 안에 분명히 포함시켰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성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이성이 어디에서 빛을 받느냐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지혜와 지성을 거쳐 생명을 받는 이성은 그 아래의 기억지식까지 살아 있게 하지만, 감각과 기억지식을 출발점으로 삼아 신앙의 신비를 재판하려는 이성은 질서를 거꾸로 세우게 됩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가 경계하는 것은 이성 자체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 세상에서 출발하는 탐구입니다.

 

따라서 AC.126은 창2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관한 금지를 이해하는 결정적인 문턱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선과 진리를 알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알아내어 자기 것으로 만들지 말라고 하십니다. 천적 인간에게 허락된 길은 주님으로부터 받아 알고, 받은 것을 자유롭게 누리고 사용하면서도 그 근원이 주님이심을 인정하는 길입니다. 감각과 기억지식도 그 질서 안에서는 제 역할을 하지만, 그것들이 주님을 대신하여 신앙의 신비를 판단하는 출발점이 될 때 신앙의 천적인 것이 파괴됩니다. (AC.126)

 

 

 

AC.127, 창2:17, ‘감각과 기억지식으로 신앙의 신비를 탐구할 때 교회가 타락한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7) AC.127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 신앙의 신비를 탐구하려는 욕망은 다음 장에서 다루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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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5, 창2:16,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다 - 퍼셉션으로 선과 진리를 알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And Jehovah God commanded the man, saying, Of every tree of the garden eating thou mayest eat. (창2:16) AC.125‘모든 나무의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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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And Jehovah God commanded the man, saying, Of every tree of the garden eating thou mayest eat. (창2:16)

 

AC.125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eat of every tree)은 퍼셉션으로 무엇이 선하고 참된지를 아는 것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나무’(tree)는 퍼셉션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계속적인 퍼셉션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기억에 간직되어 있는 것을 숙고할 때 그것이 참되고 선한지를 즉시 지각했습니다. 그리하여 어떤 거짓된 것이 나타나면 그것을 피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혐오하기까지 했습니다. 천사들의 상태도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태고교회의 이러한 퍼셉션을 대신하여 후에는 이미 계시된 것으로부터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를 아는 앎(cognitio)이 이어졌고, 그 뒤에는 말씀에 계시된 것으로부터 그것을 아는 앎(cognitio)이 이어졌습니다. To “eat of every tree” is to know from perception what is good and true; for, as before observed, a “tree” signifies perception. They had from the Lord continual perception, so that when they reflected on what was treasured up in the memory they instantly perceived whether it was true and good, insomuch that when anything false presented itself, they not only avoided it but even regarded it with horror: such also is the state of the angels. In place of this perception of the most ancient church, however, there afterwards succeeded the knowledge [cognitio] of what is true and good from what had been previously revealed, and afterwards from what was revealed in the Word.

 

해설

AC.125는 창2:16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라는 말씀에서 ‘먹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합니다.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은 퍼셉션으로 무엇이 선하고 참된지를 아는 것입니다. 앞의 AC.102-104에서 천적 인간을 다루는 문맥에서 ‘나무’가 퍼셉션을 의미한다는 것과 퍼셉션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무엇이 참되고 선한가에 관한 일종의 내적 감각이라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이제 AC.125는 그것을 ‘먹는다’는 표현과 연결하여, 천적 인간이 그 퍼셉션을 통하여 선과 진리를 실제로 받아들이고 아는 상태를 보여 줍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으로부터 ‘계속적인 퍼셉션’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 기억이 필요 없었다는 말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그들이 ‘기억에 간직되어 있는 것’을 숙고했다고 명시합니다. 즉 그들의 기억 안에도 여러 내용이 저장되어 있었고, 그들은 그것을 생각했습니다. 다만 무엇이 참되고 선한가를 최종적으로 판단하는 근거가 기억 자체에 있지 않았습니다. 기억에 들어 있는 어떤 것을 생각하면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을 통하여 그것이 참되고 선한지를 즉시 지각했습니다.

 

이 점은 AC.80 이후 계속 따라온 기억지식의 문제와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감각과 기억에 무엇인가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AC.121에서는 이성을 통하여 기억에 속한 앎들이 생명을 얻는 것이 천적 질서라고 했습니다. AC.125에서도 태고교회 사람들은 기억에 간직된 것을 실제로 숙고합니다. 그러나 기억에 저장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것을 참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기억 속의 것을 퍼셉션의 빛 아래에서 살폈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한번 문제는 기억의 존재가 아니라 무엇이 무엇을 판단하고 지배하는가 하는 질서입니다.

 

거짓된 것이 나타났을 때 그것을 피했을 뿐 아니라 혐오했다는 설명은 퍼셉션이 단순한 지적 판별 능력이 아니었음을 보여 줍니다. 참과 거짓을 머리로 구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선과 진리에 대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거짓에 대한 정서적인 거부도 함께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천사들의 상태도 이와 같다고 덧붙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퍼셉션은 현대적인 직감이나 순간적인 느낌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에 대한 내적 지각이며, 사랑과 삶의 상태에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AC.125의 마지막 문장은 매우 중요한 역사적·영적 변화를 말합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계속 유지된 것이 아니라, 그 뒤에는 이미 계시된 것으로부터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를 아는 ‘앎’(cognitio)이 그 자리를 이어받았고, 다시 그 뒤에는 말씀에 계시된 것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아는 상태가 이어졌습니다. 여기서 사람에게 선과 진리를 알려 주시는 근원이 주님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사람이 그것을 받아 아는 방식에는 변화가 생깁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으로 알았지만, 후대에는 주님께서 이미 계시하신 것을 통하여 알게 되고, 마침내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배우게 됩니다.

 

이것은 바로 AC.123에서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을 구별한 설명을 한층 더 구체적으로 만들어 줍니다. 거기서 천적 인간은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퍼셉션하기 때문에’ 인정하지만, 영적 인간은 그것을 ‘말씀으로부터 배웠기 때문에’ 인정한다고 했습니다. AC.125는 그 차이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보여 줍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사라진 뒤 인간에게 계시와 말씀이 주어졌고, 사람은 이제 말씀에 계시된 선과 진리를 배우고 받아들임으로써 그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으로부터 배우는 상태를 퍼셉션보다 못한 단순한 지식 상태로 폄하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퍼셉션을 잃은 후의 인간에게 주님께서 선과 진리를 알려 주시는 새로운 질서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는다’는 것은 자기 판단대로 무엇이든 취한다는 뜻과 정반대입니다. 천적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 안에서 선과 진리를 알고 받아들입니다. 기억에 있는 것조차 그 퍼셉션 아래에서 판단합니다. 그리고 퍼셉션이 사라진 후에는 이미 주어진 계시와 말씀을 통하여 선과 진리를 알게 됩니다. 이처럼 AC.125는 퍼셉션과 기억과 계시와 말씀의 관계를 한 문단 안에 압축하면서, 인간이 선과 진리를 자기 자신에게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시대와 상태에 따라 주님께서 주시는 방식으로 받아 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AC.125)

 

 

 

AC.126, 창2:17, ‘신앙의 신비를 감각과 기억지식으로 탐구해서는 안 되는 이유’ (AC.126-130)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Bu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thou shalt not eat of it; for in the day that thou eatest thereof, dying thou shalt d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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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4, 창2:15, ‘지혜와 지성과 이성과 지식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창2:15) AC.124지혜와 지성과 이성과 지식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는 사실은 주님께서 가르치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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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창2:15)

 

AC.124

지혜와 지성과 이성과 지식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는 사실은 주님께서 가르치신 모든 것으로부터 매우 분명합니다. 마태복음에서 주님은 자신을 포도원을 만들고 그 둘레에 울타리를 치고 농부들에게 세로 준 집주인에 비유하셨습니다. (마21:33) That wisdom, intelligence, reason, and knowledge [scientia] are not of man, but of the Lord, is very evident from all that the Lord taught; as in Matthew, where the Lord compares himself to a householder who planted a vineyard, and hedged it round, and let it out to husbandmen (21:33);

 

다른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거기에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마21:33)

 

그리고 요한복음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and in John:

 

13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요16:13, 14) The Spirit of truth shall guide you into all truth; for he shall not speak of himself, but what things soever he shall hear, he shall speak; he shall glorify me, for he shall receive of mine, and shall declare it unto you (John 16:13–14).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요3:27) A man can receive nothing except it be given him from heaven (John 3:27).

 

이것이 실제로 그러하다는 것은 천국의 아르카나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That this is really so is known to everyone who is acquainted with even a few of the arcana of heaven.

 

해설

AC.124는 앞의 AC.121-123에서 설명한 천적 질서의 근거를 주님의 말씀에서 확인합니다. AC.121에서는 주님으로부터 지혜가 나오고, 지혜를 통하여 지성이, 지성을 통하여 이성이 나오며, 이성을 통하여 기억에 속한 앎들이 생명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이어 AC.122와 AC.123에서는 천적 인간이 이 모든 것을 누리면서도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않으며,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퍼셉션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24는 지혜와 지성과 이성과 지식이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이 주님께서 친히 가르치신 말씀에서도 분명하다고 합니다.

 

먼저 마21:33의 포도원 비유가 인용됩니다. 집주인은 포도원을 만들고 울타리를 두른 뒤 그것을 농부들에게 맡깁니다. 이 인용에서 중요한 것은 농부들이 포도원의 주인이 아니라 맡아 경작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이것은 바로 AC.122의 에덴동산을 ‘경작하며 지키는 것’과 연결됩니다. 사람은 주님께서 주신 것들을 실제로 받아 사용하고 돌보지만, 그것들의 최초 소유자는 아닙니다. 포도원을 맡은 농부가 포도원을 자기 것으로 주장할 수 없는 것처럼, 사람도 자기 안에 있는 지혜와 지성과 선과 진리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릴 수 없습니다.

 

요16:13-14의 ‘진리의 성령’에 관한 말씀은 이 원리를 더욱 직접적으로 보여 줍니다.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는 표현에서 강조되는 것은 진리의 근원입니다. 진리는 독립적으로 자기에게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속한 것을 받아 전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이 말씀을 인용하는 이유는 지혜와 지성과 이성과 지식의 참된 근원이 인간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사실을 주님의 말씀으로 확증하기 위해서입니다.

 

요3:27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는 말씀은 AC.124의 논지를 가장 간결하게 압축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사람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대신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고 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인간을 무기력한 존재로 만드는 설명이 아닙니다. 사람은 실제로 받고, 생각하고, 이해하고, 판단하고, 행동합니다. 그러나 그가 받는 참된 생명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AC.122의 ‘누리는 것은 허락되지만 자기 것으로 소유해서는 안 된다’는 말의 뜻도 더욱 분명해집니다.

 

따라서 AC.124에서 말하는 ‘사람의 것이 아니다’라는 표현을 사람에게 실제 지혜나 지성이나 이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121은 그것들이 사람 안에서 질서 있게 작용한다고 분명히 설명했습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어디에 있는가’가 아니라 ‘어디에서 오는가’입니다. 사람 안에 실제로 있으면서도 그 생명의 근원은 주님일 수 있습니다. 사람이 그것들을 자기의 것으로 느끼며 자유롭게 사용하는 것과, 그것들의 근원을 자기 자신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이 점은 AC.123의 세 종류의 인간에 관한 설명과도 직접 연결됩니다. 천적 인간은 퍼셉션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인정하고, 영적 인간은 말씀으로부터 그것을 배워 인정하며,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은 자신에게 있는 것을 자기 것이라고 여깁니다. AC.124의 세 성경 인용은 그 가운데 영적 인간이 말씀을 통하여 배우고 인정할 수 있는 근거를 실제로 제시하는 셈입니다. 주님의 말씀 자체가 포도원의 주인이 누구인지, 진리가 어디에서 오는지, 사람이 가진 것이 어디에서 주어지는지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아르카나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이것이 실제로 그러함을 안다고 말합니다. 이는 AC.123에서 천적 인간이 퍼셉션으로 아는 것과도 연결됩니다. 결국 AC.121부터 AC.124까지의 흐름은 매우 일관됩니다. 주님으로부터 생명이 흘러들어 지혜와 지성과 이성과 지식에 이르고, 사람은 그것을 받아 실제로 누리고 사용하지만, 그것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소유해서는 안 됩니다. 천적 인간의 삶은 주님께 받은 것을 잃어버리는 삶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충만히 받아 사용하면서도 그 모든 생명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내적으로 인정하는 삶입니다. (AC.124)

 

 

 

AC.125, 창2:16,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다 - 퍼셉션으로 선과 진리를 알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And Jehovah God commanded the man, saying, Of every tree of the garden eating thou mayest eat. (창2:16) AC.125‘모든 나무의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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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3, 창2:15, ‘천적 인간은 퍼셉션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창2:15) AC.123천적 인간은 퍼셉션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주님의 것임을 인정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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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창2:15)

 

AC.123

천적 인간은 퍼셉션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주님의 것임을 인정합니다. 영적 인간도 실제로 같은 것을 인정하지만, 입으로 인정할 뿐입니다. 그는 그것을 말씀으로부터 배웠기 때문입니다.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은 그것을 인정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가 가진 것은 무엇이든 자기 것이라고 하며, 그것을 잃으면 자기가 완전히 멸망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The celestial man acknowledges, because he perceives, that all things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are the Lord’s. The spiritual man does indeed acknowledge the same, but with the mouth, because he has learned it from the Word. The worldly and corporeal man neither acknowledges nor admits it; but whatever he has he calls his own, and imagines that were he to lose it, he would altogether perish.

 

해설

AC.123은 바로 앞의 AC.122에서 천적 인간이 에덴동산의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지만 그것을 자기 것으로 소유해서는 안 된다고 한 이유를 설명합니다. 천적 인간이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억지로 자기 것을 포기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에게 있는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퍼셉션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AC.122의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않는다’는 말은 금욕이나 자기부정의 외적 규칙이 아니라 천적 인간의 내적 인식에서 나오는 삶의 태도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표현은 ‘퍼셉션하기 때문에’입니다. AC.104에서는 퍼셉션을 주님으로부터만 오는, 무엇이 참되고 선한가에 관한 일종의 내적 감각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123은 그 퍼셉션이 실제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천적 인간에게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다’라는 것은 외부에서 배워 동의한 하나의 교리가 아닙니다. 그는 자기 안에 있는 사랑과 지혜와 선과 생명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내적으로 지각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자기 것으로 주장하지 않는 것도 그에게는 외부에서 강요된 계명이 아니라 자신이 지각하는 생명의 질서에 따르는 것입니다.

 

영적 인간도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다’라는 같은 진리를 인정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가 그것을 ‘입으로’ 인정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영적 인간의 고백이 거짓되거나 위선적이라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어지는 이유가 중요합니다. 그는 그것을 ‘말씀으로부터 배웠기 때문’입니다. 천적 인간은 선과 진리를 퍼셉션으로 아는 반면, 영적 인간은 말씀을 통하여 배우고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의 차이는 한쪽은 참말을 하고 다른 쪽은 빈말을 한다는 차이가 아니라, 같은 진리에 이르는 내적 방식의 차이입니다.

 

이것은 앞서 AC.81 이후 계속 설명되어 온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의 차이를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영적 인간에게 말씀과 신앙과 양심이 중요한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천적 인간처럼 직접적인 퍼셉션으로 선과 진리를 아는 상태가 아니므로, 주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가르치시는 것을 받아들여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AC.123의 ‘입으로’라는 표현을 영적 인간의 신앙을 폄하하는 말로 이해하기보다, 퍼셉션에 의한 천적 인식과 말씀에서 배운 영적 인식을 구별하는 표현으로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 번째로 등장하는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은 이 질서를 인정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것을 ‘내 것’이라고 여기며, 그것을 잃으면 자기 자신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소유는 단순히 재산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필요가 없습니다. 바로 앞의 AC.121과 AC.122에서 다룬 것은 지혜와 지성과 이성과 앎을 포함하여 천적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자신에게 있는 생명과 능력과 선한 것들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고 그것들을 독립적인 자기 소유로 여기는 태도 전체가 여기 포함됩니다.

 

마지막의 ‘그것을 잃으면 자기가 완전히 멸망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표현은 왜 사람이 자기 것을 그토록 붙드는지도 보여 줍니다. 사람은 자신이 자기 것이라고 여기는 것과 자기 존재 자체를 동일시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내려놓는 것을 생명을 잃는 것으로 느낍니다. 그러나 AC.121에서 본 천적 질서는 정반대입니다. 기억에 속한 앎들까지도 주님으로부터 지혜와 지성과 이성을 거쳐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자기에게서 생명이 나온다고 주장하는 것을 내려놓는 것은 참된 생명을 잃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의 실제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AC.123은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과 세상적·육체적 인간의 차이를 ‘모든 것이 누구의 것인가?’라는 하나의 질문으로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천적 인간은 퍼셉션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알고, 영적 인간은 말씀으로부터 배워 그것을 인정하며,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은 자기에게 있는 것을 자기 것이라고 여깁니다. AC.122에서 말한 에덴동산의 삶은 결국 주님께 받은 모든 것을 실제로 누리면서도 그 생명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지 않는 삶입니다. (AC.123)

 

 

 

AC.124, 창2:15, ‘지혜와 지성과 이성과 지식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창2:15) AC.124지혜와 지성과 이성과 지식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는 사실은 주님께서 가르치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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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2, 창2:15, ‘에덴동산을 경작하며 지키다 - 주님의 것을 누리되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않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And Jehovah God took the man, and put him in the garden of Eden, to till it and take care of it. (창2:15) AC.122‘에덴동산’(garden of 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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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And Jehovah God took the man, and put him in the garden of Eden, to till it and take care of it. (창2:15)

 

AC.122

‘에덴동산’(garden of Eden)은 앞에서 설명한 천적 인간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는 것’(till it and take care of it)은 그가 이 모든 것을 누리는 것은 허락되지만, 그것들을 자기 것으로 소유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들은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By the “garden of Eden” are signified all things of the celestial man, as described; by to “till it and take care of it” is signified that it is permitted him to enjoy all these things, but not to possess them as his own, because they are the Lord’s.

 

해설

AC.122는 창2:15의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라는 말씀의 속뜻을 매우 간결하게 설명합니다. ‘에덴동산’은 단순히 하나의 장소가 아니라 앞에서 설명한 천적 인간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동산을 경작하고 지킨다는 것도 자연적인 농경 행위를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천적 인간이 주님께 받은 모든 것을 어떤 태도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는지를 나타냅니다.

 

앞의 설명들을 생각하면 ‘에덴동산’ 안에는 사랑과 지혜와 지성, 그리고 그로부터 질서 있게 이어지는 이성과 앎까지 천적 인간에게 속한 모든 것이 포함됩니다. AC.121에서는 그 생명의 질서가 ‘동쪽’이신 주님으로부터 시작하여 지혜와 지성과 이성을 거쳐 기억에 속한 앎들에까지 이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AC.122에서 말하는 ‘이 모든 것’은 사람이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낸 재산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의 생명과 근원은 주님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 속한 것이라고 해서 인간이 그것을 누려서는 안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에게 ‘이 모든 것을 누리는 것이 허락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주님께 받은 사랑과 지혜와 지성은 인간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인간 안에 주어지고, 인간은 그것을 자기의 생명처럼 느끼며 살아갑니다. 천적 질서는 인간이 아무것도 느끼거나 행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주님께 받은 것을 충만히 누리고 그것으로 살아가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을 ‘자기 것으로 소유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바로 여기에 AC.122의 중심이 있습니다. 천적 인간은 자신 안에 사랑과 지혜와 지성과 선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지만, 그것들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라고 여기지도 않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실제로 누리면서도 그것이 주님의 것임을 압니다. 따라서 ‘내 안에 있다’는 것과 ‘나에게서 나왔다’는 것은 전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주신 것이 사람 안에 있으므로 사람은 그것으로 살아가지만, 그 생명의 근원은 여전히 주님이십니다.

 

이 점에서 ‘경작하며 지킨다’는 표현도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주님께 받은 것을 자기 것으로 주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수동적으로 있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은 동산을 경작하고 돌보듯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실제 삶 가운데 사용합니다. 다만 그렇게 사용하면서 사랑과 지혜와 선을 자신의 독립적인 소유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인간의 활동과 주님의 생명 사이의 질서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사람은 실제로 경작하고 지키지만, 그가 경작하고 지키는 모든 생명의 것은 주님께 속합니다.

 

이것은 바로 앞의 AC.121과도 아름답게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주님으로부터 지혜가 나오고, 지혜를 통하여 지성이, 지성을 통하여 이성이 나오며, 이성을 통하여 기억에 속한 앎들이 생명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22는 그렇게 생명을 얻은 모든 것을 사람이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말합니다. 사람은 그것을 받아 누리고 사용합니다. 그러나 그 흐름의 출발점을 잊고 ‘이 지혜는 내 지혜이고, 이 선은 내 선이며, 이 생명은 나에게서 나온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천적 질서는 생명의 흐름뿐 아니라 그 생명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아는 질서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에덴동산을 ‘경작하며 지킨다’는 말씀에는 천적 인간의 매우 근본적인 삶의 태도가 담겨 있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주시는 것을 거부하지도 않고 자기 것으로 빼앗지도 않습니다. 받아서 누리고, 실제 삶 가운데 사용하면서도 그것이 주님의 것임을 압니다. 주님께 받은 것을 마치 자기에게서 나온 것처럼 소유하려 하지 않고, 주님의 것으로 받아 살아가는 것, 이것이 에덴동산 안에서 살아가는 천적 인간의 질서입니다. (AC.122)

 

 

 

AC.123, 창2:15, ‘천적 인간은 퍼셉션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창2:15) AC.123천적 인간은 퍼셉션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주님의 것임을 인정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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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1, 창2:14, ‘천적 질서 - 주님으로부터 지혜와 지성과 이성을 거쳐 기억지식까지’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창2:14) AC.121천적 질서의 본질, 곧 생명에 속한 것들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는 이 강들로부터 분명합니다. 곧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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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창2:14)

 

AC.121

천적 질서의 본질, 곧 생명에 속한 것들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는 이 강들로부터 분명합니다. 곧 ‘동쪽’(East)이신 주님으로부터 지혜가 나오고, 지혜를 통하여 지성이, 지성을 통하여 이성이 나오며, 이와 같이 이성을 통하여 기억에 속한 앎들이 생명을 얻습니다. 이것이 생명의 질서이며, 천적 인간은 이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천적 인간을 표상했기 때문에 ‘지혜롭고’(wise), ‘지성 있고’(intelligent), ‘아는’(knowing) 사람들이라 불렸습니다. (신1:13, 15) 그러므로 궤를 만든 브살렐에 관하여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The nature of celestial order, or how the things of life proceed, is evident from these rivers, namely, from the Lord, who is the “East,” and that from him proceeds wisdom, through wisdom intelligence, through intelligence reason, and so by means of reason the knowledges of the memory are vivified. This is the order of life, and such are celestial men; and therefore, since the elders of Israel represented celestial men, they were called “wise, intelligent, and knowing” (Deut. 1:13, 15). Hence it is said of Bezaleel, who constructed the ark, that he was:

 

1브살렐과 오홀리압과 및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 곧 여호와께서 지혜와 총명을 부으사 성소에 쓸 모든 일을 할 줄 알게 하신 자들은 모두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할 것이니라 2모세가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및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 곧 그 마음에 여호와께로부터 지혜를 얻고 와서 그 일을 하려고 마음에 원하는 모든 자를 부르매 (출36:1, 2) Filled with the spirit of God, in wisdom, in understanding, and in knowledge [scientia], and in all work. (Exod. 31:3; 35:31; 36:1–2)

 

13너희의 각 지파에서 지혜와 지식이 있는 인정 받는 자들을 택하라 내가 그들을 세워 너희 수령을 삼으리라 한즉, 15내가 너희 지파의 수령으로 지혜가 있고 인정 받는 자들을 취하여 너희의 수령을 삼되 곧 각 지파를 따라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과 조장을 삼고 (신1:13, 15)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 (출31:3)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시되 (출35:31)

 

해설

AC.121은 에덴에서 흘러나와 네 갈래로 나뉜 강들에 관한 설명을 하나의 질서로 종합합니다. 지금까지 각 강을 따라가면서 지혜와 지성, 이성과 기억지식이 차례로 등장했는데,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이 서로 흩어진 능력이 아니라 하나의 ‘천적 질서’를 이룬다고 명시합니다. 그 질서의 출발점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동쪽’이신 주님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지혜가 나오고, 지혜를 통하여 지성이 나오며, 지성을 통하여 이성이 나오고, 마침내 이성을 통하여 기억에 속한 앎들이 생명을 얻습니다.

 

이 순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사실입니다. AC.98과 AC.101에서 ‘동쪽’은 주님을 의미한다고 했고, AC.107에서는 에덴에서 흘러나오는 강이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를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또한 AC.112에서는 지혜는 사랑에서, 지성은 신앙에서 나오며, 따라서 모두 주님으로부터 온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21은 그동안 제시된 내용을 하나의 생명의 흐름으로 묶습니다. 천적 인간의 지혜와 지성과 이성과 앎은 각각 독립적으로 생명을 가진 것이 아니라, 가장 안쪽의 근원이신 주님으로부터 질서 있게 생명을 받습니다.

 

여기서 ‘지혜를 통하여 지성이, 지성을 통하여 이성이 나온다’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앞의 AC.111은 사랑과 신앙, 지혜와 지성, 의지와 이해가 서로 구별되며 참으로 가장 뚜렷하게 구별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AC.121의 질서는 이 모든 것을 같은 것으로 만드는 설명이 아닙니다. 오히려 서로 구별되는 것들이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하나의 생명 안에서 질서 있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지혜와 지성과 이성은 서로 다른 것이지만, 아래에 있는 것이 위에 있는 것과 단절되어 스스로 살아가는 것이 천적 질서는 아닙니다.

 

특히 마지막 단계인 기억에 속한 앎들이 ‘생명을 얻는다’는 표현은 AC.80 이후의 논의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감각과 기억지식 자체를 제거하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AC.118에서는 기억지식이 최하위 또는 경계라고 했고, AC.120에서는 그것이 영적이고 천적인 인간의 지성과 지혜의 경계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121에서는 그 기억에 속한 앎들조차 이성을 통하여 생명을 얻는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기억지식의 존재가 아니라 생명의 방향입니다. 기억지식이 스스로 출발점이 되어 위의 것들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시작된 생명이 지혜와 지성과 이성을 거쳐 기억에 속한 앎들에까지 이르는 것이 올바른 질서입니다.

 

신1:13, 15의 이스라엘 장로들이 인용되는 것도 바로 이 질서를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이 ‘지혜롭고’(wise), ‘지성 있고’(intelligent), ‘아는’(knowing) 사람들이라고 불린 것은 스베덴보리에게 단순히 행정 능력이 뛰어난 지도자들이었다는 뜻에 그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천적 인간을 표상했기 때문에, 그들을 묘사하는 세 표현도 천적 인간 안에 질서 있게 존재하는 지혜와 지성과 앎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 인용은 앞에서 설명한 천적 질서가 말씀의 표현 속에도 나타난다는 것을 확인하는 역할을 합니다.

 

브살렐에 관한 출31:3과 병행 구절들도 같은 이유로 인용됩니다. 성막과 그 기구들을 만드는 일을 맡은 브살렐에게 하나님의 영이 충만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여기서도 출발점은 하나님의 영이며, 그로부터 지혜와 이해와 지식이 이어지고 마침내 실제 ‘일’에까지 이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천적 질서가 단지 인간의 내면에서 끝나는 추상적인 단계가 아니라 가장 바깥의 실제 행위에까지 내려온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은 안에서 시작하여 밖으로 진행되고, 마침내 자연적인 삶의 쓰임 가운데 나타납니다.

 

따라서 AC.121은 에덴의 네 강에 관한 지금까지의 설명을 읽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네 강은 서로 무관한 네 가지 상징을 나열한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시작된 생명이 인간 안에서 어떻게 질서 있게 진행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가장 바깥의 이성과 기억에 속한 앎들도 버려져야 할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생명을 받아야 합니다. 천적 인간이란 지식이 없는 사람도, 이성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도 아니라, 자신의 지혜와 지성과 이성과 앎 전체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도록 질서 지어진 사람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이 강들을 통하여 보여 주는 ‘생명의 질서’입니다. (AC.121)

 

 

 

AC.122, 창2:15, ‘에덴동산을 경작하며 지키다 - 주님의 것을 누리되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않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And Jehovah God took the man, and put him in the garden of Eden, to till it and take care of it. (창2:15) AC.122‘에덴동산’(garden of 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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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0, 창2:14, ‘유브라데 - 기억지식과 감각적인 것들은 지성과 지혜의 경계다’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창2:14) AC.120‘애굽’(Egypt)과 마찬가지로 ‘유브라데’(Euphrates)도 기억지식을 의미하며, 또한 이러한 기억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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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창2:14)

 

AC.120

‘애굽’(Egypt)과 마찬가지로 ‘유브라데’(Euphrates)도 기억지식을 의미하며, 또한 이러한 기억지식이 나오는 감각적인 것들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선지서의 말씀에서 분명합니다. 미가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As by “Egypt,” so also by “Euphrates,” are signified memory-knowledges, and also the sensuous things from which these knowledges come. This is evident from the Word in the prophets, as in Micah:

 

10나의 대적이 이것을 보고 부끄러워하리니 그는 전에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 여호와가 어디 있느냐 하던 자라 그가 거리의 진흙같이 밟히리니 그것을 내가 보리로다 11네 성벽을 건축하는 날 곧 그날에는 지경이 넓혀질 것이라 12그날에는 앗수르에서 애굽 성읍들에까지, 애굽에서 강까지,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이 산에서 저 산까지의 사람들이 네게로 돌아올 것이나 (미7:10-12) My she-enemy hath said, Where is Jehovah thy God? The day in which he shall build thy walls [macerias], that day shall the decree be far removed; that day also he shall come even to thee from Asshur, and to the cities of Egypt, and to the river [Euphrates] (Micah 7:10–12).

 

선지자들은 사람을 거듭나게 하셔서 천적 인간과 같이 되게 하실 주님의 오심에 관하여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예레미야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So did the prophets speak concerning the coming of the Lord who should regenerate man so that he might become like the celestial man. In Jeremiah:

 

네가 시홀의 물을 마시려고 애굽으로 가는 길에 있음은 어찌 됨이며 또 네가 그 강물을 마시려고 앗수르로 가는 길에 있음은 어찌 됨이냐 (렘2:18) What hast thou to do in the way of Egypt, to drink the waters of Sihor? Or what hast thou to do in the way of Asshur, to drink the waters of the river [Euphrates] (Jer. 2:18)?

 

여기서 ‘애굽’(Egypt)과 ‘유브라데’(Euphrates)는 마찬가지로 기억지식을 의미하고, ‘앗수르’(Asshur)는 거기서 나오는 추론을 의미합니다. 시편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where “Egypt” and “Euphrates” likewise signify memory-knowledges, and “Asshur” reasonings thence derived. In David:

 

8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나이다, 11그 가지가 바다까지 뻗고 넝쿨이 강까지 미쳤거늘 (시80:8, 11) Thou hast made a vine to go forth out of Egypt; Thou hast cast out the nations; Thou hast planted her; Thou hast sent out her shoots even to the sea, and her twigs to the river (Euphrates) (Ps. 80:8, 11),

 

여기서도 ‘유브라데강’(river Euphrates)은 감각적인 것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을 의미합니다. 유브라데가 앗수르 쪽을 향한 이스라엘 영토의 경계였던 것처럼, 기억지식은 영적이고 천적인 인간의 지성과 지혜의 경계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다음 말씀도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where also the “river Euphrates” signifies what is sensuous and of the memory [sensuali et scientifico]. For the Euphrates was the boundary of the dominions of Israel toward Assyria, as the knowledge of the memory is the boundary of the intelligence and wisdom of the spiritual and celestial man. The same is signified by what was said to Abraham:

 

그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창15:18) Unto thy seed will I give this land, from the river of Egypt unto the great river, the river Euphrates (Gen. 15:18).

 

이 두 경계는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These two boundaries have a like signification.

 

해설

AC.120은 앞의 AC.118에서 ‘브랏’, 곧 유브라데가 기억지식을 의미하며 최하위 또는 경계라고 한 설명을 말씀의 여러 구절을 통하여 확인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의미가 조금 더 구체화됩니다. ‘애굽’과 마찬가지로 ‘유브라데’도 기억지식을 의미할 뿐 아니라, 그러한 기억지식이 나오는 감각적인 것들까지 의미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기억지식이 왜 천적 인간의 질서에서 가장 바깥쪽에 놓이는지도 점차 분명해집니다. 그것은 사람이 자연계에서 감각을 통하여 받아들이고 기억에 저장하는 것들과 관계되기 때문입니다.

 

먼저 미7:10-12를 인용한 이유는 이 구절에 앗수르와 애굽과 강, 곧 유브라데가 함께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사람을 거듭나게 하셔서 천적 인간과 같이 되게 하실 주님의 오심에 관한 예언으로 읽습니다. 따라서 여러 나라와 지역과 경계에 관한 표현도 단순한 지리적 이동에 머무르지 않고, 거듭나는 사람 안에서 이루어지는 내적인 질서와 관계됩니다. 앞에서 에덴의 네 강을 천적 인간의 내적인 것들에 관한 묘사로 읽었던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렘2:18에서는 애굽의 시홀 물을 마시는 것과 앗수르로 가서 유브라데 물을 마시는 것이 함께 언급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애굽’과 ‘유브라데’가 기억지식을 의미하고, ‘앗수르’는 거기서 나오는 추론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인용은 특히 중요합니다. 앞의 AC.119에서는 앗수르가 이성을 의미한다고 했지만, 여기서는 기억지식에서 나오는 추론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이성적 능력이 있다는 것과 그 이성이 무엇을 출발점으로 삼아 추론하는가는 구별해서 보아야 합니다. 기억지식에서 출발하여 그것을 근거로 위의 것들을 판단하려는 질서와,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통하여 이성의 명철함을 받는 질서는 같지 않습니다.

 

시80:8, 11의 포도나무는 애굽에서 나와 심어지고 그 가지가 바다까지, 넝쿨이 유브라데까지 뻗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유브라데강’이 감각적인 것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자연적인 경계와 영적인 경계의 관계를 통하여 직접 설명합니다. 유브라데가 앗수르 쪽을 향한 이스라엘 영토의 경계였던 것처럼, 기억지식은 영적이고 천적인 인간에게 있는 지성과 지혜의 경계입니다. 따라서 ‘경계’라는 말은 기억지식을 무가치한 것으로 낮추는 표현이 아니라, 그것이 내적인 생명이 자연적인 차원에 이르는 가장 바깥쪽에 놓여 있음을 나타냅니다.

 

창15:18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주겠다고 하신 땅이 애굽 강에서 큰 강 유브라데까지라고 한 것도 같은 이유로 인용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두 경계가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명시합니다. 따라서 약속의 땅을 둘러싼 자연적인 경계 역시 속뜻에서는 인간의 내적인 상태와 관계된 경계를 표현합니다. 이것은 앞의 AC.117에서 말씀의 역사적 부분에 들어 있는 모든 것도 아르카나를 의미하고 표상하며 그 안에 담고 있다고 한 원리가 실제로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보여 주는 또 하나의 사례입니다.

 

AC.120은 또한 AC.80 이후 계속 남아 있던 감각과 기억지식의 문제를 상당히 선명하게 해 줍니다. 감각적인 것과 기억지식은 인간에게 없어야 할 것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천적 인간에게도 그것들은 존재하며 전체 질서의 경계를 이룹니다. 문제는 가장 바깥의 경계에 있는 감각과 기억지식으로부터 출발하여 사랑과 신앙의 내적인 것들을 판단하려는 데 있습니다. AC.118에서 참된 이성의 명철함은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의 이성적 마음 안으로 들어온다고 했으므로, 거듭난 질서에서는 생명의 흐름이 가장 바깥에서 안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안을 거쳐 밖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AC.120의 여러 인용 구절은 모두 유브라데가 왜 기억지식과 감각적인 것을 의미하며, 왜 그것이 ‘최하위 또는 경계’라고 불리는지를 밝히는 데 기여합니다. 미가는 이 의미를 주님의 오심과 인간의 거듭남이라는 큰 문맥에 놓고, 예레미야는 기억지식에서 나오는 추론의 문제를 보여 주며, 시편과 창세기는 유브라데라는 실제 경계를 통하여 기억지식이 지성과 지혜의 경계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처럼 감각과 기억지식은 배척되는 것이 아니라 제자리에 놓여야 하며, 그 위에 있는 이성과 지성과 지혜 역시 궁극적으로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질서 안에 있어야 합니다. (AC.120)

 

 

 

AC.121, 창2:14, ‘천적 질서 - 주님으로부터 지혜와 지성과 이성을 거쳐 기억지식까지’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창2:14) AC.121천적 질서의 본질, 곧 생명에 속한 것들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는 이 강들로부터 분명합니다. 곧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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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9, 창2:14, ‘앗수르는 이성을 의미한다 - 기억지식과 이성과 지성의 구별’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창2:14) AC.119‘앗수르’(Asshur)가 이성적 마음, 곧 사람의 이성을 의미한다는 것은 선지서들에서 매우 분명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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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창2:14)

 

AC.119

‘앗수르’(Asshur)가 이성적 마음, 곧 사람의 이성을 의미한다는 것은 선지서들에서 매우 분명합니다. 에스겔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That “Asshur” signifies the rational mind, or the rational of man, is very evident in the prophets, as in Ezekiel:

 

3볼지어다 앗수르 사람은 가지가 아름답고 그늘은 숲의 그늘 같으며 키가 크고 꼭대기가 구름에 닿은 레바논 백향목이었느니라 4물들이 그것을 기르며 깊은 물이 그것을 자라게 하며 강들이 그 심어진 곳을 둘러 흐르며 둑의 물이 들의 모든 나무에까지 미치매 (겔31:3, 4) Behold, Asshur was a cedar in Lebanon, with fair branches and a shady grove, and lofty in height; and her offshoot was among the thick boughs. The waters made her grow, the deep of waters uplifted her, the river ran round about her plant. (Ezek. 31:3–4)

 

이성은 ‘레바논의 백향목’(cedar in Lebanon)이라 하며, ‘굵은 가지들 사이에 있는 가지’(offshoot among the thick boughs)는 기억에 속한 앎들을 의미하는데, 이것들이 바로 이와 같은 상태에 있습니다. 이것은 이사야에서 더욱 분명합니다. The rational is called a “cedar in Lebanon”; the “offshoot among the thick boughs,” signifies the knowledges of the memory, which are in this very plight. This is still clearer in Isaiah:

 

23그날에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가 있어 앗수르 사람은 애굽으로 가겠고 애굽 사람은 앗수르로 갈 것이며 애굽 사람이 앗수르 사람과 함께 경배하리라 24그날에 이스라엘이 애굽 및 앗수르와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 25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 주시며 이르시되 내 백성 애굽이여, 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라 (사19:23-25) In that day shall there be a path from Egypt to Asshur, and Asshur shall come into Egypt, and Egypt into Asshur, and the Egyptians shall serve Asshur. In that day shall Israel be the third with Egypt and with Asshur, a blessing in the midst of the land, that Jehovah Zebaoth shall bless, saying, Blessed be Egypt my people, and Asshur the work of my hands, and Israel mine inheritance. (Isa. 19:23–25)

 

이 구절과 그 밖의 여러 구절에서 ‘애굽’(Egypt)은 기억지식을, ‘앗수르’(Asshur)는 이성을, ‘이스라엘’(Israel)은 지성을 의미합니다. By “Egypt” in this and various other passages is signified memory-knowledges, by “Asshur” reason, and by “Israel” intelligence.

 

해설

AC.119는 앞의 AC.118에서 ‘앗수르’가 이성적 마음을 의미한다고 한 해석을 에스겔과 이사야의 말씀을 통하여 확인합니다. AC.118에서는 힛데겔강이 이성 또는 이성의 명철함을, 앗수르가 이성적 마음을 의미한다고 했으며, 이성의 명철함이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에 속한 이성적 마음 안으로 들어온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번 번호의 두 인용은 바로 그 가운데 ‘앗수르가 왜 이성을 의미하는가’를 보여 주기 위해 제시됩니다.

 

먼저 겔31:3-4에서는 앗수르를 크고 아름다운 ‘레바논 백향목’으로 묘사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레바논 백향목이 이성을 의미한다고 직접 설명합니다. 또한 그 나무의 가지들과 관련된 표현은 기억에 속한 앎들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인용에서 백향목과 그 가지들은 단순한 거대한 나무의 모습이 아니라, 이성과 그것에 속하여 있는 앎들의 관계를 표현합니다. 특히 물과 깊은 물과 강들이 그 나무를 자라게 한다는 묘사는 앞에서 강과 물이 사람에게 지혜와 지성을 주고 자라게 하는 것들을 의미한다고 한 설명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그러나 앗수르의 의미는 사19:23-25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 말씀에는 애굽과 앗수르와 이스라엘이 함께 등장하며, 서로 왕래하고 함께 여호와를 섬기며 마침내 셋이 함께 복이 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세 이름의 의미를 직접 밝혀 ‘애굽’은 기억지식, ‘앗수르’는 이성, ‘이스라엘’은 지성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앗수르 하나의 의미를 확인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기억지식과 이성과 지성이 서로 구별된다는 사실까지 보여 줍니다.

 

이 점은 최근 여러 번호에서 계속 나타난 용어의 구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AC.111에서는 기억지식을 곧 지성과 지혜와 신앙이라고 여기는 겉 사람의 상태를 지적했습니다. AC.116에서는 선과 진리에 관한 앎이 이해에 속한다고 했고, AC.117에서는 애굽이 기억지식을, 구스 사람들이 앎을 의미한다고 구별했습니다. 이제 AC.119에서는 애굽의 기억지식과 앗수르의 이성과 이스라엘의 지성이 다시 구별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사용하는 기억지식, 앎, 이성, 지성은 서로 바꾸어 써도 되는 비슷한 말들이 아니라 각각의 자리를 가진 개념들임이 점점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특히 사19장의 인용 이유는 단순히 ‘앗수르’라는 이름이 등장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애굽과 앗수르와 이스라엘 사이에 길이 열리고 서로 오가며 함께 섬긴다는 전체 장면 속에서 기억지식과 이성과 지성이 서로 관계를 맺는 질서가 표현됩니다. 이성은 기억지식과 단절되어 홀로 작용하는 것도 아니며, 지성 역시 이성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도 아닙니다. 서로 구별되면서도 올바른 질서 안에서는 함께 작용하고, 그 전체가 여호와께 복을 받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이것은 AC.118에서 유브라데, 곧 기억지식을 ‘최하위 또는 경계’라고 한 설명을 기억지식의 무가치함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도 다시 확인해 줍니다. 사19장에서 애굽은 제거되어야 할 대상으로만 등장하지 않고 ‘내 백성 애굽’이라고까지 불리며 앗수르와 이스라엘과 함께 복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기억지식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이성과 지성과 어떤 질서 안에서 관계를 맺느냐가 중요합니다. 자연적인 앎과 이성적 능력이 올바른 질서 안에 있을 때 그것들도 전체적인 영적 생명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AC.119에서 에스겔과 이사야가 인용된 이유는 충분히 분명합니다. 에스겔은 앗수르를 레바논 백향목으로 묘사함으로써 이성과 그에 속한 것들의 모습을 보여 주고, 이사야는 애굽과 앗수르와 이스라엘을 함께 놓음으로써 기억지식과 이성과 지성의 구별과 관계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이것은 AC.118의 ‘앗수르는 이성적 마음’이라는 해석을 뒷받침하는 동시에, 천적 인간 안에서 기억지식과 이성과 지성이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각각 제자리를 얻어 질서 있게 관계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AC.119)

 

 

 

AC.120, 창2:14, ‘유브라데 - 기억지식과 감각적인 것들은 지성과 지혜의 경계다’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창2:14) AC.120‘애굽’(Egypt)과 마찬가지로 ‘유브라데’(Euphrates)도 기억지식을 의미하며, 또한 이러한 기억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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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8, 창2:14, ‘힛데겔과 유브라데 -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거쳐 이성과 기억지식으로’ (AC.118-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And the name of the third river is Hiddekel; that is it which goeth eastward toward Assyria; and the fourth river is Euphrates. (창2:14) AC.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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