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439를 읽다 보면 한 가지 뜻밖의 표현을 만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에노스’(Enosh)라는 이름 역시 ‘사람’(man)을 뜻한다고 하면서, 그 사람이 ‘천적인간’(celestialman)이 아니라 ‘영적인간’(spiritualman)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지금까지 창1과 창2를 따라온 독자에게 자연스럽게 질문을 일으킵니다. 창1에서는 거듭남의 여섯 날을 거쳐 영적 인간이 형성되고, 창2에서는 일곱째 날과 함께 천적 인간이 다루어지며, 그 천적 상태가 태고교회의 고유한 상태로 설명되었습니다. 반면 홍수 후에 나타나는 고대교회는 영적 성격의 교회로 이해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아직 홍수 이전인 창4에서 에노스가 벌써 ‘영적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먼저 ‘영적인간’이라는 표현을 곧바로 ‘홍수후고대교회에속한사람’이라는 역사적 명칭과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천적’과 ‘영적’은 서로 다른 교회 시대를 가리킬 때도 사용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서로 다른 질서와 상태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나 교회가 홍수 이전에 존재한다고 해서 그 상태가 언제나 천적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며, 반대로 ‘영적인간’이라는 표현이 등장했다고 해서 곧 홍수 후 고대교회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뜻도 아닙니다. AC.439자체도 에노스의 교회를 ‘영적교회’라고 하지 않습니다. 정확히는 에노스라는 이름이 나타내는 ‘사람’을 ‘천적인간이아니라영적인간’이라고 합니다. 이 구별을 그대로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왜 태고교회의 시대 안에서 이런 영적 상태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창2에서 보았던 태고교회의 처음 상태와 창4에서 다루는 상태가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창2의 태고교회는 사랑이 먼저이고 그 사랑으로부터 신앙과 진리를 지각하는 천적 질서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창3과 창4로 진행하면서 인간은 점차 자기 자신에게 기울었고, 마침내 가인으로 나타나는 신앙은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었습니다. 아벨이 나타내는 체어리티가 소멸된 뒤에도 주님께서는 신앙을 완전히 사라지게 하지 않으시고 ‘가인의표’를 통해 보존하셨으며, 이후 라멕에 이르러서는 그렇게 보존되어 있던 신앙마저 황폐해지는 상태가 나타났습니다. 따라서 창4마지막의 회복은 창2의 최초 천적 상태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대로 되돌아오는 장면으로 볼 수 없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셋과 에노스가 중요해집니다. AC.436에 따르면 셋은 ‘체어리티가심어지는신앙’을 뜻하고, 에노스는 ‘신앙을통해심어진체어리티’를 뜻합니다. AC.438에서는 이를 교회의 차원에서 다시 설명하여, 셋은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신앙을, 에노스는 체어리티를 신앙의 으뜸으로 여긴 교회를 나타낸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창2의 천적 인간과는 다른 질서가 보입니다. 최초의 천적 상태에서는 사랑과 체어리티로부터 신앙이 나왔지만, 여기서는 이미 무너진 상태 가운데 보존된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지는 회복의 과정이 나타납니다. 따라서 에노스를 ‘영적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적어도 이 새로운 상태가 최초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와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과 잘 맞습니다.
이 때문에 ‘셋은신앙,에노스는체어리티’라는 표현도 조심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을 인간의 정상적인 영적 질서가 언제나 ‘먼저신앙을얻고그다음체어리티를얻는것’이라는 보편 공식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는 이미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발생했고, 체어리티가 소멸되었으며, 그 가운데 주님께서 신앙을 보존하신 뒤 그것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심으시는 특별한 회복의 과정이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셋에서 에노스로 이어지는 ‘신앙을통한체어리티’는 태고교회 본래의 천적 질서를 설명한다기보다, 그 질서가 무너진 뒤 주님께서 다시 교회를 일으키시는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러므로에노스에서이미영적교회가시작되었다’고 말하는 것도 현재 본문보다 앞서 나갑니다. AC.439가 분명히 말하는 것은 에노스로 나타나는 사람이 ‘천적인간이아니라영적인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AC.438은 에노스를 체어리티를 신앙의 으뜸으로 여긴 교회라고 하며, AC.441은 이전 교회가 소멸된 뒤 나타난 ‘새교회’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 새 교회를 훗날 홍수 후에 나타나는 고대교회와 같은 의미의 ‘영적교회’라고 AC.439가 직접 규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영적인간’이라는 표현과 ‘영적교회’라는 역사적·교회적 구분을 성급하게 하나로 합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오히려 이 대목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주님의 회복이 언제나 과거 상태의 단순한 복원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창2의 천적 상태가 무너진 뒤 주님께서는 인간을 버려 두지 않으시고, 남아 있는 것을 보존하시며 그 상태에서 다시 체어리티를 심으십니다. 에노스는 바로 그러한 과정에서 나타나는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홍수 전에 ‘영적인간’이 등장한다는 사실 자체를 이상하게 여길 필요는 없습니다. ‘영적’이라는 말이 반드시 홍수 후의 특정 교회 시대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적 상태를 나타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왜 스베덴보리가 이 시점의 에노스를 특별히 ‘영적인간’이라고 규정했으며, 이것이 이후 홍수와 고대교회의 영적 질서와 정확히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AC.439만으로 모두 밝혀지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현재까지의 설명 안에서 가장 안전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에노스가 홍수 전에 ‘영적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홍수 후 고대교회가 벌써 시작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창2에서 나타난 태고교회 본래의 천적 상태가 이미 크게 무너진 뒤, 주님께서 보존하신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다시 심으시는 새로운 회복의 상태가 나타났으며, 에노스는 그 과정에서 ‘천적인간이아니라영적인간’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창4마지막은 단순히 최초의 천적 상태로 되돌아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 깊이 무너진 인간을 그 상태에 맞게 다시 붙드시고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시는 주님의 섭리를 보여 줍니다. 이후 AC에서 이 영적 상태의 성격이 더 구체적으로 밝혀진다면, 그때는 여기서 확인한 기초 위에서 한 단계 더 깊이 살펴볼 수 있을 것입니다. (AC.439심화1)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4:26)
AC.442
앞에서설명한이장의내용으로부터,태고시대에도교회에서분리된많은교리와이단들이있었으며,각각에는저마다의이름이있었다는사실이분명합니다.이렇게분리된교리와이단들은오늘날의어떤것보다도훨씬더깊은사고에서나온것이었습니다.그시대사람들의천성이그러했기때문입니다. From the contents of this chapter as above explained, it is evident that in the most ancient time there were many doctrines and heresies separate from the church, each one of which had its name, which separate doctrines and heresies were the outcome of much more profound thought than any at the present day, because such was the genius of the men of that time.
해설
AC.442는 창4의 마지막 절에 대한 세부 해석을 하나 더 덧붙인다기보다, 지금까지 해설한 창4전체를 뒤돌아보며 하나의 중요한 결론을 제시합니다. 창4에 등장한 가인, 에녹, 이랏, 므후야엘, 므드사엘, 라멕과 그의 아내들 및 자녀들, 그리고 마지막의 셋과 에노스에 이르기까지, 이 이름들을 단순히 개인들의 계보로만 읽어서는 이 장의 속뜻을 알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장의 해설 전체를 근거로 태고 시대에 교회로부터 분리되어 나온 여러 교리와 이단들이 있었으며, 그것들이 각각 고유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특히 주의할 표현은 ‘교회에서분리된’(separatefromthechurch)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처음부터 교회와 아무 관계도 없던 외부의 종교나 사상들이 있었다는 뜻이라기보다, 본래 교회 안에 있던 것들이 점차 분리되어 독립적인 교리와 이단으로 발전했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창4에서 가인으로 나타난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고, 그 후 여러 이름으로 나타나는 상태들이 계속 전개된 것도 이러한 흐름 안에 있습니다. 하나였던 교회의 생명에서 어떤 교리적 요소가 떨어져 나가 독자적인 것이 될 때, 그것은 더 이상 본래 교회의 질서 안에 머물지 않게 됩니다.
이 점에서 AC.442는 창4에 그렇게 많은 이름이 등장하는 이유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선 해설에서 이 이름들을 단순한 개인의 이름으로만 다루지 않고, 서로 다른 교리와 교회 상태를 나타내는 이름으로 해석해 왔습니다. 따라서 ‘각각에는저마다의이름이있었다’는 말은 단순히 여러 사람이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서로 구별되는 교리적 흐름들이 존재했다는 뜻입니다. 이름이 달라진다는 것은 그만큼 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온 사상과 교리의 성격도 서로 달랐음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이 글에서 상당히 뜻밖인 대목은 그러한 교리와 이단들이 ‘오늘날의어떤것보다도훨씬더깊은사고’에서 나왔다고 하는 부분입니다. ‘이단’이라고 해서 반드시 사고가 단순하거나 지적으로 수준이 낮았던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태고 시대 사람들의 천성 자체가 오늘날 사람들과 달랐기 때문에, 그들에게서 생겨난 잘못된 교리와 이단조차 매우 깊은 사고의 산물이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깊다’는 것은 그것이 참되거나 선하다는 평가가 아닙니다. 사고의 깊이와 교리의 진실성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아무리 깊은 사고에서 나온 것이라도 교회의 생명에서 분리되면 그릇된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창4의 핵심 문제와도 잘 맞습니다.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의 문제는 신앙 자체가 얕거나 무지했다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따라서 AC.442가 말하는 여러 교리와 이단의 존재 역시 단순히 지적 수준의 저하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매우 깊이 사고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기에 교회에서 분리된 교리 역시 복잡하고 깊게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리의 깊이가 그것을 참된 교회로 만들어 주지는 않습니다. 창4전체에서 계속 드러났듯이, 결정적인 것은 진리가 사랑과 체어리티에 결합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동시에 AC.442의 ‘그시대사람들의천성이그러했다’는 마지막 말은 태고 시대 사람들을 오늘날의 사고방식으로 단순히 환원해서는 안 된다는 점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시대 사람들의 내적 상태와 사고 능력이 오늘날과 달랐다고 전제합니다. 다만 이 짧은 글은 그 차이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까지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태고인의 사고방식을 세부적으로 추정하기보다, 스베덴보리가 명시한 범위에 머무르는 것이 안전합니다. 곧 그들은 매우 깊이 사고할 수 있었고, 그러한 특성 때문에 교회에서 분리된 교리와 이단들 역시 오늘날보다 훨씬 깊은 사고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AC.442는 창4를 마무리하면서 매우 의미 있는 역설을 남깁니다. 교회가 무너지는 것은 반드시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게 되거나 지적으로 무지해지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깊은 사고와 정교한 교리도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될 수 있습니다. 창4에서 가인으로 시작된 문제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장 마지막에서 셋과 에노스를 통해 다시 제시되는 길 역시 단순히 더 깊은 교리를 갖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다시 체어리티를 향하고 체어리티가 신앙의 으뜸이 되며, 그 체어리티에서 주님께 대한 예배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AC.442는 창4전체를 ‘얼마나깊이아는가’보다 ‘그진리가어떠한사랑과결합되어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마무리하게 합니다. (AC.442해설)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4:26)
AC.440
방금인용한말씀이그교회의체어리티에서비롯된예배를뜻한다는것은,‘여호와의이름을부르다’(calluponthenameofJehovah)가주님께드리는모든예배를나타내는관용적이고일반적인표현이라는사실에서분명합니다.그리고이예배가체어리티에서비롯되었다는것은앞절에서는그분을‘하나님’(God)이라고했으나여기서는‘여호와’(Jehovah)라고한사실에서도분명합니다.또한주님은체어리티가아니고서는예배할수없기때문입니다.체어리티에속하지않은신앙에서는참된예배가나올수없습니다.그런예배는단지입술의것일뿐마음의것이아니기때문입니다.‘여호와의이름을부르다’(callonthenameofJehovah)가주님께드리는모든예배를나타내는관용적인표현이라는것은말씀에서도확인할수있습니다.그래서아브라함에관해, That by the words just quoted is signified the worship of that church from charity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o “calluponthenameofJehovah” is a customary and general form of speech for all worship of the Lord; and that this worship was from charity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Jehovah” is here mentioned, whereas in the preceding verse he was called “God,” as well as from the fact that the Lord cannot be worshiped except from charity, since true worship cannot proceed from faith that is not of charity, because it is merely of the lips, and not of the heart. That to “callonthenameofJehovah” is a customary form of speech for all worship of the Lord, appears from the Word; thus it is said of Abraham, that
이말씀에는모든표상적예배의요약이제시되어있습니다. in which text a summary is given of all representative worship.
해설
AC.440은 창4:26의 ‘그때에사람들이비로소여호와의이름을불렀더라’는 말씀 가운데 특히 ‘여호와의이름을부르다’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이것은 단순히 ‘여호와’라는 이름을 소리 내어 부르기 시작했다는 뜻이 아니라, 말씀에서 주님께 드리는 ‘모든예배’를 나타내는 일반적인 표현입니다. 따라서 창4:26의 초점은 하나님의 이름을 처음 발음한 시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에노스로 나타나는 교회에서 어떠한 예배가 이루어졌는가에 있습니다.
그런데 AC.440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예배의 근원이 ‘체어리티’였다고 말합니다. 그 첫 번째 근거로 제시하는 것이 ‘하나님’(God)과 ‘여호와’(Jehovah)라는 이름의 차이입니다. 앞 절, 곧 창4:25에서는 ‘하나님이내게가인이죽인아벨대신에다른씨를주셨다’고 하여 ‘하나님’이라고 했지만, 창4:26에서는 ‘여호와의이름을부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명칭의 변화 자체를 의미 있는 것으로 보고, 여기서 말하는 예배가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라는 근거 가운데 하나로 제시합니다. 다만 AC.440은 이 글에서 ‘하나님’과 ‘여호와’의 차이를 더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으므로, 그 구체적인 의미까지 미리 확대해서 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두 번째 근거는 더욱 직접적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은체어리티가아니고서는예배할수없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핵심은 예배의 외적 형식보다 그것을 낳는 내적 생명입니다. 신앙이 있다고 말하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입술로 신앙을 고백한다고 해서 그 자체로 참된 예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에 속하지 않는다면 그 신앙에서 나오는 예배 역시 ‘입술의것’일 뿐 ‘마음의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참된 예배는 체어리티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이 설명은 창4전체의 흐름과도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나타냈고, 그 분리된 신앙은 아벨이 나타내는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신앙을 보존하셨고, 셋에 이르러서는 ‘체어리티로이어지는신앙’이 나타났으며, 에노스에서는 ‘체어리티를신앙의으뜸으로여긴교회’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제 그 교회의 예배가 ‘체어리티에서비롯된예배’라고 설명됩니다. 결국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가 예배에까지 이어지는 것입니다. 무엇을 믿는가만이 아니라 그 믿음이 어떠한 사랑과 삶에서 나오는가가 예배의 성격을 결정합니다.
아브라함에 관한 창12:8, 13:4와 창21:33의 인용은 ‘여호와의이름을부르다’라는 표현이 예배 전반을 가리킨다는 것을 말씀 자체에서 보여 주기 위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이름을불렀다’거나 브엘세바에서 ‘영원하신하나님여호와의이름을불렀다’는 것은 단순히 이름을 소리 내어 부르는 한 행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드리는 예배를 포괄하는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4:26의 같은 표현 역시 이러한 말씀의 용례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어지는 사43:22-23의 인용은 그 의미를 더욱 넓혀 줍니다. 그 말씀에는 여호와를 부르는 것과 함께 번제, 제물, 향 등 당시의 여러 예배 행위가 함께 언급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모든표상적예배의요약’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여호와의이름을부른다’는 표현 안에는 한 가지 기도 행위만이 아니라 주님을 향한 예배 전반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단, 번제, 제물, 향과 같은 외적 형식들이 서로 달라도 그것들은 모두 예배라는 하나의 큰 범주 안에 놓입니다.
그러나 AC.440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그 모든 예배를 참된 예배로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제단을 쌓고 제물을 드리며 향을 피우는 외적인 예배가 있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마음의 예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신앙을 고백한다고 해도 체어리티와 분리되어 있다면 그것은 ‘입술의것’에 머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에노스로 나타나는 교회에서는 체어리티를 신앙의 으뜸으로 여겼기 때문에 그 체어리티에서 예배가 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 점에서 창4:26의 ‘여호와의이름을부르기시작하였다’는 말씀은 앞에서부터 이어져 온 신앙과 체어리티의 문제가 마침내 예배의 문제로까지 나아간 것을 보여 줍니다. 참된 예배는 입술에서 시작하여 마음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있는 마음에서 나와 입술과 삶으로 표현되는 예배입니다. (AC.440해설)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4:26)
AC.439
‘셋’(Seth)이체어리티로이어지는신앙을뜻한다는것은앞절에서설명했습니다.그의‘아들,곧이름이에노스인이’(son, whosenamewasEnosh)가체어리티를신앙의으뜸으로여긴교회를뜻한다는것역시앞에서말한내용으로분명하며,또한그에게‘에노스’(Enosh)라는이름을붙였다는사실에서도분명합니다.이이름역시‘사람’(man)을뜻하는데,천적인간(celestialman)이아니라여기서‘에노스’라고하는바로그영적인간(spiritualman)을뜻합니다.이것은바로이어지는‘그때에사람들이비로소여호와의이름을부르기시작하였다’(thenbegantheytocalluponthenameofJehovah)는말씀에서도분명합니다. That by “Seth” is signified the faith through which comes charity was shown in the preceding verse. That by his “son,whosenamewasEnosh,” is signified a church that regarded charity as the principal of faith, is also evident from what has been said before, as well as from the fact that it is called “Enosh,” which name also means a “man,” not a celestial man, but that human spiritual man which is here called “Enosh.” The same is evident also from the words that immediately follow: “thenbegantheytocalluponthenameofJehovah.”
해설
AC.439는 앞의 AC.438에서 제시한 에노스의 의미를 그의 이름을 통해 한층 더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셋은 ‘체어리티로이어지는신앙’을 뜻하고, 그의 아들 에노스는 ‘체어리티를신앙의으뜸으로여긴교회’를 뜻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에노스’라는 이름 자체도 ‘사람’(man)을 뜻한다고 하면서 매우 중요한 구별을 하나 덧붙입니다. 에노스가 나타내는 사람은 ‘천적인간’(celestialman)이 아니라 ‘영적인간’(spiritualman)이라는 것입니다.
이 구별은 창세기 앞부분을 읽어 온 독자에게는 오히려 새로운 질문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창1에서는 거듭남의 과정을 거쳐 영적 인간이 되고, 창2에서는 더 나아가 천적 인간이 된 상태를 다루었습니다. 태고교회의 본래 상태는 이 천적 인간의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아직 홍수 이전인 창4의 에노스에게 스베덴보리가 다시 ‘영적인간’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따라서 에노스의 등장을 태고교회 처음의 천적 상태가 그대로 회복된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AC.439자체는 왜 이 시점에서 다시 영적 인간이 나타나는지까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에노스가 천적 인간이 아니라 영적 인간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는 데 머뭅니다.
이 사실은 앞에서 이어져 온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생각하면 더욱 주목할 만합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나타냈습니다.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뒤에도 주님께서는 신앙을 완전히 사라지게 하지 않으시고 보존하셨습니다. 그리고 셋에서는 마침내 ‘체어리티로이어지는신앙’이 나타납니다. 이제 에노스에서는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신앙의 으뜸으로 여기는 교회가 나타납니다. 따라서 에노스는 앞의 가인과 같은 분리된 신앙의 상태가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가 다시 올바른 방향을 찾은 상태와 관련됩니다.
여기서 ‘체어리티를신앙의으뜸으로여겼다’(regardedcharityastheprincipaloffaith)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에노스로 나타나는 교회는 신앙을 버리거나 가볍게 여긴 교회가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을 인정하면서도 그 신앙이 체어리티를 향해야 하며, 체어리티가 신앙에서 으뜸이 되어야 한다고 여긴 교회입니다. 가인에게서 문제였던 것은 신앙 자체가 아니라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것이었습니다. 셋과 에노스에 이르러서는 이 관계가 달라집니다. 셋은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신앙이고, 에노스는 체어리티를 신앙의 으뜸으로 여기는 교회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어지는 ‘그때에사람들이비로소여호와의이름을부르기시작하였다’는 말씀도 에노스의 의미를 뒷받침한다고 합니다. AC.438에서는 이 말씀을 ‘체어리티에서비롯된그교회의예배’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에노스로 나타나는 교회가 체어리티를 신앙의 으뜸으로 여겼다는 것과, 그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예배가 나타났다는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체어리티가 단순히 교리적으로 중요한 것으로 인정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 예배의 근원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는 분명히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AC.439는 에노스로 나타나는 ‘교회’를 직접 ‘영적교회’라고 규정하지 않습니다. 에노스라는 이름이 뜻하는 ‘사람’이 천적 인간이 아니라 영적 인간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 한 글만을 근거로 에노스의 교회를 훗날 홍수 후에 등장하는 고대교회와 같은 의미의 ‘영적교회’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단계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태고교회 처음의 천적 상태가 그대로 되돌아온 것이 아니며, 에노스라는 이름에는 분명히 ‘영적인간’이라는 새로운 성격이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에서 AC.439는 창4마지막의 회복을 단순한 원상복귀로 이해하지 못하게 합니다. 주님께서는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신앙을 그대로 두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처음의 천적 상태를 단순히 되돌려 놓으신 것도 아닙니다. 셋으로 나타나는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다시 중심에 놓이는 교회를 마련하셨고, 그 교회를 나타내는 에노스라는 이름에는 ‘천적인간이아니라영적인간’이라는 중요한 변화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교회에서 체어리티로부터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예배가 나타납니다. 왜 홍수 이전에 벌써 ‘영적인간’이 등장하는지는 이후의 설명까지 더 살펴보아야 하지만, 적어도 AC.439는 태고교회의 쇠퇴 이후 이루어지는 회복이 처음 상태의 단순한 반복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AC.439해설)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And to Seth, to him also there was born a son; and he called his name Enosh: then began they to call upon the name of Jehovah. (창4:26)
AC.438
‘셋’(Seth)은앞에서말한것처럼체어리티로이어지는신앙을뜻합니다.그의‘아들’(son),곧이름이‘에노스’(Enosh)인이는체어리티를신앙의으뜸으로여긴교회를뜻합니다.그리고그때비로소‘여호와의이름을부르기’(callonthenameofJehovah)시작했다는것은체어리티에서비롯된그교회의예배를뜻합니다. By “Seth” is signified the faith through which comes charity, as was said above; by his “son,” whose name was “Enosh,” is signified a church which regarded charity as the principal of faith; by beginning then to “callonthenameofJehovah” is signified the worship of that church from charity.
해설
AC.438은 창4:26전체의 속뜻을 먼저 압축하여 제시하는 글입니다. 바로 앞의 AC.434-437에서 셋은 ‘체어리티로이어지는신앙’, 곧 주님께서 체어리티를 다시 심으시기 위해 주신 새로운 신앙을 뜻했습니다. 이제 그 셋에게서 ‘아들’ 에노스가 태어납니다. 따라서 여기서 에노스는 단순히 셋 다음에 태어난 한 인물을 넘어, 앞에서 준비된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실제로 교회의 중심에 자리 잡은 새로운 교회 상태를 나타냅니다.
특히 중요한 표현은 에노스가 ‘체어리티를신앙의으뜸으로여긴교회’(achurchwhichregardedcharityastheprincipaloffaith)를 뜻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으뜸’은 단순히 체어리티가 여러 덕목 가운데 하나로서 중요했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무엇이 신앙의 중심이며 무엇이 신앙을 살아 있게 하는가 하는 문제에서, 이 교회가 체어리티를 중심적인 것으로 인정했다는 뜻입니다. 앞에서 가인이 나타낸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었다면, 에노스로 나타난 교회에서는 신앙이 다시 체어리티를 중심으로 질서를 찾게 됩니다.
이 점에서 셋과 에노스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셋 자체가 곧 체어리티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셋은 ‘체어리티로이어지는신앙’을 뜻하고, 에노스는 그 신앙을 통하여 형성되어 체어리티를 신앙의 으뜸으로 인정하는 ‘교회’를 뜻합니다. AC.436에서 이미 셋은 ‘체어리티가심어지는신앙’, 에노스는 ‘신앙을통해심어진체어리티’라고 예고되었습니다. AC.438은 이제 그 관계를 창4:26의 본문에 맞추어 더욱 분명하게 풀어 줍니다. 따라서 셋에서 에노스로의 진행은 단순한 부자 관계가 아니라, 새로운 신앙에서 그 신앙의 목적이었던 체어리티 중심의 교회로 나아가는 흐름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에서 살펴본 가인의 보존과도 연결됩니다. 가인이 나타낸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지만, 주님께서는 그 신앙까지 완전히 없어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신앙을 보존하신 목적은 그것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심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창4마지막에 이르러 셋은 그 목적에 맞게 새롭게 주어진 신앙을, 에노스는 마침내 체어리티를 중심으로 삼는 교회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에노스의 등장은 앞에서부터 이어져 온 주님의 보존과 회복의 역사가 하나의 교회 형태로 나타난 지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어서 ‘그때에사람들이비로소여호와의이름을불렀더라’는 말씀도 이러한 흐름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AC.438은 ‘여호와의이름을부르기’(callonthenameofJehovah)를 단순히 여호와라는 이름을 입으로 부르기 시작했다는 역사적 사실로만 읽지 않고, 그 교회의 ‘예배’를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예배가 ‘체어리티에서비롯된’(fromcharity)예배라는 점입니다. 즉 에노스로 나타난 교회의 예배는 신앙에 관한 지식이나 고백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를 그 내적 생명으로 삼은 예배였습니다.
따라서 ‘그때에비로소’라는 표현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문자적으로 ‘그이전에는아무도여호와를부르거나예배하지않았다’는 뜻으로 곧바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적어도 AC.438에서 스베덴보리가 주목하는 것은 예배 행위가 역사상 처음 생긴 시점 자체가 아니라, 앞에서 설명한 새로운 교회가 이제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는 교회적 의미입니다. ‘그때’는 셋으로 나타난 새로운 신앙을 통하여 에노스로 나타난 체어리티 중심의 교회가 형성되고, 그 교회의 성격에 맞는 예배가 나타나는 흐름을 가리킵니다.
이렇게 보면 창4의 마지막은 가인과 라멕으로 이어진 쇠퇴의 이야기와 뚜렷한 대조를 이룹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고 마침내 황폐에 이르렀지만, 주님께서는 남아 있는 것을 보존하시고 새 교회를 준비하셨습니다. 셋에서는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새로운 신앙이 나타나고, 에노스에서는 체어리티를 신앙의 으뜸으로 여기는 교회가 나타나며, 마침내 그 교회에서는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가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AC.438은 창4마지막 절을 통해 신앙의 회복이 어디를 향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 목적은 신앙 자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이며, 그 체어리티에서 참된 예배가 나오는 것입니다. (AC.438해설)
창세기 4장을 문자적으로 읽으면 가인의 후손과 셋의 후손은 자연스럽게 서로 다른 두 계열로 보입니다. 가인에게서 에녹, 이랏, 므후야엘, 므드사엘, 라멕으로 이어지는 계보가 나오고, 장 마지막에는 아담과 하와에게 셋이 태어나며, 다음 장에서는 셋의 계보가 다시 이어집니다. 따라서 가인 계열과 셋 계열이 같은 시대에 나란히 존재했던 두 계보라고 이해하는 것은 문자적 서사에서는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계보들을 속뜻에서 읽을 때 문자적 혈통의 병행 관계를 그대로 교회의 역사에 옮겨서는 안 된다는 중요한 단서를 제시합니다.
AC.435가 그 출발점입니다. 창4:25에서 다시 등장하는 ‘사람과그의아내’는 앞에서 아다와 씰라로 나타났던 새 교회를 뜻하지만, 창5:1-4에서 다시 등장하는 사람과 아내와 셋은 ‘태고교회의첫후손’을 뜻한다고 합니다. 같은 아담과 그의 아내와 셋을 말하면서도 속뜻은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창1과 창2에서 인간의 창조를 거듭 말하지만 전자는 영적 인간의 창조를, 후자는 천적 인간의 창조를 다루는 것을 그 예로 듭니다. 따라서 같은 인물과 사건이 반복된다고 해서 속뜻에서도 반드시 동일한 교회나 동일한 역사적 단계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곧바로 ‘가인계열과셋계열은속뜻에서결코병행하지않는다’는 뜻으로 단정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AC.442는 태고 시대에 ‘교회에서분리된’(separatefromthechurch)많은 교리와 이단들이 있었으며, 각각 저마다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교회에서분리되었다’는 표현은 자연스럽게 하나의 질문을 일으킵니다. 어떤 교리들이 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왔다면, 그들이 분리되어 나온 모체인 교회와 그 안에 남아 있던 이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인으로 시작되는 분리된 교리들의 계열만 존재했다고 생각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 ‘교회에남아있던이들’을 곧바로 셋 계열과 동일시하는 데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AC.441은 에노스와 관련된 예배를 ‘가인과라멕이라고하는이들에의해이전교회가소멸된후의새교회의예배’라고 명시합니다. 여기에는 분명히 ‘이전교회→소멸→새교회’라는 전환이 있습니다. 따라서 셋과 에노스가 나타내는 교회를 처음부터 가인 계열과 나란히 존속해 온 또 하나의 교회라고 단순하게 규정하면, AC.441이 말하는 ‘이전교회가소멸된후의새교회’라는 설명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게 됩니다.
AC.436이 제시하는 창4전체의 연속적인 흐름도 함께 보아야 합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것을 뜻하지만, 주님께서는 ‘가인의표’를 통해 신앙 자체는 보존하셨습니다. 이후 여러 상태를 거쳐 라멕에 이르러서는 그렇게 보존되어 있던 신앙마저 황폐해집니다. 그리고 장 마지막에서 셋은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새로운 신앙을, 에노스는 체어리티를 신앙의 으뜸으로 여긴 교회를 나타냅니다. 이런 속뜻의 흐름에서 창4는 단순히 두 집안의 역사를 번갈아 기록한 장이라기보다, 교회의 분리와 쇠퇴, 보존과 소멸, 그리고 새로운 교회의 형성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영적 서사를 보여 줍니다.
따라서 문자적 계보와 속뜻의 교회사를 서로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문자적으로는 가인 계열과 셋 계열이 서로 다른 두 족보이며, 두 계열이 시간적으로 나란히 존재하는 것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또한 속뜻에서도 AC.442의 ‘교회에서분리된’ 교리들이라는 표현 때문에, 분리된 교리들과 구별되는 교회가 존재했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AC.434-442만으로 그 교회에 남아 있던 이들이 정확히 누구였는지, 그들이 셋 계열과 어떤 관계였는지, 두 교회적 흐름이 실제 시간 속에서 어느 정도 병행했는지까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인 계열과 셋 계열을 ‘악한계열과선한계열이라는두교회가처음부터끝까지나란히존속했다’는 단순한 도식으로 이해하는 것도, 반대로 ‘둘은전혀병행하지않았고하나가완전히끝난뒤다른하나가시작되었다’고 단정하는 것도 현재 본문보다 앞서 나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분명하게 밝히는 것은 다른 데 있습니다. 가인 계열을 통해서는 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온 여러 교리와 그로 인한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가 전개되고, 셋과 에노스에서는 이전 교회가 소멸된 뒤 주님께서 일으키신 새로운 신앙과 새 교회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 사이에 본래 교회에 남아 있던 이들이 누구였으며 이 여러 흐름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겹쳤는지는 이후의 설명을 더 살펴보아야 합니다.
결국 이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창세기의 족보를 속뜻의 교회사와 일대일로 대응시키지 않는 것입니다. 문자적 의미에서는 실제 계보의 흐름을 읽되, 속뜻에서는 각 이름이 나타내는 교리와 교회의 상태가 어떤 순서와 관계로 전개되는지를 따라가야 합니다. 그리고 AC.435, 436, 441, 442를 함께 놓고 보면, 창4의 중심은 두 혈통 가운데 어느 쪽이 어느 시기에 존재했는지를 밝히는 데 있다기보다,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어떻게 교회를 황폐하게 하는지, 그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어떻게 신앙을 보존하시며, 마침내 셋과 에노스로 나타나는 새로운 신앙과 교회를 일으켜 다시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가 가능하게 하시는지를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AC.435심화1)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4:25)
AC.436
그여자의‘아들’(son),곧그가셋이라이름한아들이체어리티에이를수있게하는새로운신앙을뜻한다는것은앞에서말한것으로부터분명하며,또한가인에관해‘아무도그를죽이지못하도록그에게표를주셨다’(markwassetuponhim, lestanyoneshouldslayhim)고기록된사실에서도분명합니다.이주제가연속적으로전개되는순서는다음과같습니다.사랑에서분리된신앙은‘가인’(Cain)으로,체어리티는‘아벨’(Abel)로나타냈으며,분리된상태의그신앙이체어리티를소멸시킨것은가인이아벨을죽인것으로나타냈습니다.체어리티가그신앙을통해주님에의해심어질수있도록신앙을보존하신것은아무도가인을죽이지못하도록여호와께서가인에게표를주신것으로나타냈습니다. That by her “son,” whom she named Seth, is signified a new faith, by which charity may be attained, is evident from what has been previously stated, as well as from its being related of Cain that a “markwassetuponhim,lestanyoneshouldslayhim.” For the subject as it stands in a series is as follows: Faith separated from love was signified by “Cain”; charity, by “Abel”; and that faith in its separated state extinguished charity was signified by Cain slaying Abel. The preservation of faith in order that charity might be thereby implanted by the Lord was signified by Jehovah’s setting a mark on Cain lest anyone should slay him.
그후사랑의거룩한것과거기서나오는선이주님에의해신앙을통해주어진것은아다가낳은야발로나타냈고,신앙의영적인것이주어진것은그의아우유발로나타냈으며,이들로부터자연적선과진리가나온것은씰라가낳은두발가인으로나타냈습니다.창세기4장의마지막두절에는이모든것의결론,따라서그요약이들어있습니다.곧‘사람과그의아내’(manandhiswife)는앞에서아다와씰라라고불렸던그새교회를뜻하고,‘셋’(Seth)은체어리티가심어지는통로가되는신앙을뜻하며,이제이어지는절의‘에노스’(Enosh)는신앙을통해심어진체어리티를뜻합니다. That afterwards the holy of love and the good thence derived were given by the Lord through faith was signified by Jabal whom Adah bare; and that the spiritual of faith was given, was signified by his brother Jubal; and that from these there came natural good and truth was signified by Tubal-Cain whom Zillah bare. In these two concluding verses of Genesis 4 we have the conclusion, and thus the summary, of all these matters, to this effect, that by the “manandhiswife” is signified that new church which before was called Adah and Zillah, and that by “Seth” is signified the faith through which charity is implanted; and in the verse which now follows, by “Enosh” is signified the charity that is implanted through faith.
해설
AC.436은 창4의 가인 이후 이야기를 거의 한눈에 펼쳐 보이는 매우 중요한 글입니다. 지금까지 가인, 아벨, 가인의 표, 야발, 유발, 두발가인, 그리고 마지막의 셋이 각각 무엇을 뜻하는지 개별적으로 설명해 왔다면, 여기서는 그 모든 내용을 하나의 연속된 과정으로 묶습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이주제가연속적으로전개되는순서는다음과같다’고 하며 그 흐름을 다시 정리합니다. 따라서 창4의 인물들을 서로 독립된 상징들로만 읽어서는 안 되고,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와 소멸, 보존, 그리고 다시 결합을 향한 과정으로 읽어야 합니다.
출발점은 가인과 아벨입니다. 가인은 ‘사랑에서분리된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것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AC.436은 가인의 의미를 더욱 정확하게 표현합니다. 단순히 ‘신앙’이 아니라 ‘사랑에서분리된신앙’입니다. 문제는 신앙 자체가 아니라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매우 중요한 반전이 일어납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가인을 곧바로 없애지 않으셨습니다. 아무도 가인을 죽이지 못하도록 표를 주셨습니다. 앞에서 이 ‘가인의표’를 신앙의 보존으로 설명했지만, AC.436은 이제 그 보존의 목적을 아주 분명하게 밝힙니다. 그것은 단순히 분리된 신앙 자체를 영구히 보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체어리티가그신앙을통해주님에의해심어질수있도록’ 하기 위한 보존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을 보존하신 것은 그 신앙을 최종 상태로 인정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장차 체어리티를 다시 심으실 수 있는 수단을 남겨 두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은 ‘가인의표’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가인의 표는 악한 상태를 승인하거나 분리된 신앙을 이상적인 신앙으로 인정한다는 표시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아직 남아 있는 신앙을 파괴되지 않게 보존하시고, 바로 그것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심으십니다. 인간 편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분리되고 체어리티가 소멸되었지만, 주님의 섭리는 그 가운데 남아 있는 것을 보존하여 새로운 교회의 출발점으로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이후 야발, 유발, 두발가인의 의미도 이러한 큰 흐름 안에서 다시 정리됩니다. 야발은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주신 ‘사랑의거룩한것과거기서나오는선’을, 유발은 ‘신앙의영적인것’을, 두발가인은 이들로부터 나온 ‘자연적선과진리’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 인물들의 이야기는 단순히 목축, 음악, 금속 기술의 기원을 말하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속뜻으로는 보존된 신앙을 통하여 주님께서 교회 안에 다시 사랑과 선, 신앙의 영적인 것, 그리고 자연적 선과 진리를 마련해 가시는 과정이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설명은 앞의 AC.434-435에서 제기된 창4의 가인 계열과 창5의 셋 계열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도 중요한 빛을 비춥니다. 문자적으로만 보면 가인에게서 시작된 후손들의 계보와 셋에게서 시작되는 계보를 두 개의 나란한 혈통으로 읽기 쉽습니다. 그러나 AC.436은 속뜻으로는 창4의 가인 이후 이야기가 셋과 단절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연속된 교회적 과정임을 분명히 합니다. 가인이 나타내는 분리된 신앙이 보존되고, 그 보존된 신앙을 통하여 사랑과 선 및 영적인 것이 주어지며, 마침내 셋이 나타내는 새로운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지는 흐름입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창4의 마지막 두 절이 ‘이모든것의결론,따라서그요약’이라고 직접 말합니다. 이것은 창4:25-26을 앞의 가인 계열과 전혀 관계없는 새로운 족보의 시작으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는 강력한 단서입니다. 창4전체에서 전개되어 온 신앙과 체어리티의 이야기가 마지막 두 절에서 결론을 맺는 것입니다. ‘사람과그의아내’는 앞에서 아다와 씰라라고 불렸던 새 교회이고, 그들에게서 난 셋은 체어리티가 심어지는 통로가 되는 신앙입니다. 따라서 셋은 앞의 이야기를 지워 버리고 새로 시작하는 인물이 아니라, 앞에서 보존되고 준비되어 온 것이 새로운 질서 안에서 결실을 향해 나아가는 지점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AC.436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직 읽지 않은 창4:26의 에노스까지 미리 밝혀 줍니다. 셋이 ‘체어리티가심어지는통로가되는신앙’이라면, 에노스는 ‘신앙을통해심어진체어리티’입니다. 이 둘의 구별은 매우 중요합니다. 셋 자체가 체어리티인 것이 아닙니다. 셋은 체어리티가 주님에 의해 심어질 수 있게 하는 신앙이고, 에노스에 이르러 그 체어리티가 실제로 심어진 상태가 나타납니다. 따라서 가인에서 셋과 에노스에 이르는 전체 흐름을 보면, 분리된 신앙에서 시작하여 체어리티가 소멸되고, 그럼에도 신앙이 보존되며, 그 신앙을 통해 주님께서 다시 사랑과 선을 주시고, 마침내 새로운 신앙을 통해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지는 하나의 긴 과정이 드러납니다.
무엇보다 이 과정에서 주도권은 계속 주님께 있습니다. 체어리티를 다시 만들어 내는 것은 보존된 신앙 자체가 아닙니다. AC.436은 체어리티가 ‘주님에의해’ 신앙을 통해 심어진다고 거듭 말합니다. 신앙은 통로이며, 심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가인의 표에서부터 셋과 에노스에 이르는 과정의 중심에는 인간이 무너뜨린 것 가운데서도 남은 것을 보존하시고, 그것을 통하여 다시 사랑과 체어리티를 심으시는 주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이 점에서 AC.436은 창4의 어두운 역사를 단순한 쇠퇴의 기록으로 끝내지 않고, 그 쇠퇴 속에서도 새 교회를 준비하시는 주님의 역사를 보여 주는 글이라 할 수 있습니다. (AC.436해설)
※오늘(2026/09/27)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5, ‘하나님의크신사랑’, 찬95, ‘나의기쁨나의소망되시며’입니다.
오늘은창4절별 주석 그 여섯 번째, 19절로 24절, AC글 번호로는 405번에서 433번입니다. 먼저 본문입니다.
19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20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21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22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24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창4:19-24)
제목은
황폐의 끝에서 다시 시작되는 새 교회
이며, 다음은‘3분요약’입니다. 새로 오신 분들, 그리고 그동안 함께해오신 분들 모두를 위한, 지난 2월부터 시작, 이 특별한 주일예배를 위한, 그 흐름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한 시간입니다.
AC.432를 처음 읽는 독자에게 가장 낯설게 다가올 수 있는 말은 ‘신성모독’입니다. 우리는 흔히 신성모독을 하나님을 욕하거나 거룩한 것을 조롱하는 말과 행동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을 소멸시키는 일을 신성모독이라고 부릅니다. 더 나아가 그 신앙을 통해 태어나야 할 체어리티까지 소멸시키는 일을 훨씬 더 큰 신성모독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신성모독은 무엇과 관련되어 있는 것일까요?
먼저 이번 번호의 대상은 교회 안에 있던 신앙과 체어리티입니다. 앞의 AC.429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신앙을, ‘어린아이’가 체어리티를 나타낸다고 설명했습니다. 라멕이 이 둘을 죽였다는 말은 그들이 신앙과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의 신성모독은 단순히 입으로 거룩한 것을 비난하는 행위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 있던 거룩한 것들이 소멸되는 상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점을 이해하려면 ‘신앙을소멸시켰다’는 말과 ‘신앙이약해졌다’는 말을 구별해야 합니다. 말씀을 이해하지 못해 질문하거나, 의심과 혼란을 겪거나, 자신의 신앙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일이 곧 이번 번호의 신성모독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라멕이 나타내는 황폐의 상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사람을죽였다’고 한 표현이 신앙의 소멸을 뜻한다고 밝힌 것도 같은 문맥입니다. 그러므로 독자가 자신의 일시적인 연약함을 곧바로 신성모독으로 판단하는 것은 이번 번호의 설명을 넘어섭니다.
그렇다면 체어리티의 소멸은 왜 ‘훨씬더큰’ 신성모독일까요? AC.432는 그 이유를 길게 논증하지 않지만, ‘신앙을통해태어나야할체어리티’라는 표현으로 중요한 관계를 보여 줍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서로 무관하게 놓여 있는 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소멸된 데 이어, 그 신앙을 통해 태어나야 할 체어리티까지 소멸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신앙의 소멸이 그 신앙과 연결된 사랑의 소멸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여기서 체어리티를 단순히 착한 일을 많이 하는 것과 동일시하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AC.430에서 스베덴보리는 참된 체어리티가 참된 순진무구와 분리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라멕이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말에는 체어리티의 소멸이라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번 번호에서 그것을 훨씬 더 큰 신성모독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이해하려면, 앞에서 밝혀 온 체어리티의 의미를 함께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신성모독’이라는 말이 등장한다고 해서 우리가 다른 사람의 영적 상태를 쉽게 판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교리에 동의하지 않거나 사랑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가 라멕처럼 신앙과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AC.432는 말씀의 속뜻에서 라멕이 나타내는 상태를 설명하는 번호입니다. 특정한 사람의 내면과 최종적인 영적 상태를 판정하는 기준으로 이 한 번호를 사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결국 AC.432에서 신성모독은 교회 안에 있던 신앙과 그 신앙을 통해 태어나야 할 체어리티가 소멸된 상태와 관련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을 소멸시키는 일을 신성모독이라고, 체어리티까지 소멸시키는 일을 훨씬 더 큰 신성모독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말씀은 신앙을 단지 보존해야 할 지식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그 신앙과 연결된 체어리티까지 함께 살펴보게 합니다. (AC.432심화1)
사1:6은 읽는 사람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말씀입니다. ‘발바닥에서머리까지성한곳이없다’는 표현은 몸의 어느 한 부분이 아니라 온몸이 상한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어 상처와 타박상과 새로 생긴 종기가 등장하고, 그것들을 짜내거나 싸매거나 기름으로 부드럽게 하지도 않았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AC.431에서 이 말씀을 인용하여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를 설명합니다. 독자에게 중요한 질문은 이 신체적 상처의 묘사가 라멕의 영적 상태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연결을 이해하려면 먼저 라멕의 말을 다시 살펴보아야 합니다. 라멕은 ‘한사람’을 죽였고 ‘어린아이’를 죽였다고 말합니다. AC.429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신앙을, 어린아이가 체어리티를 뜻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AC.431에서는 사람에게 연결된 상처가 신앙의 황폐를, 어린아이에게 연결된 타박상이 체어리티의 황폐를 뜻한다고 밝힙니다. 그러므로 라멕의 말에서 상처는 단순히 살인을 저지른 뒤 자신이 입은 육체적 부상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소멸된 상태를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이사야의 말씀은 이러한 상태를 더 넓은 이미지로 보여 줍니다. 상처가 한 곳에만 있다면 몸의 다른 부분은 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에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를 읽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발바닥과 머리의 개별 상응을 새로 정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몸 전체에 성한 곳이 없다는 묘사가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를 얼마나 심각한 상태로 나타내는지 살펴보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상처’, ‘타박상’, ‘종기’를 구별한다는 사실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는 상처를 신앙에, 타박상을 체어리티에, 종기를 그 둘 모두에 연결합니다. 우리 눈에는 모두 몸이 상한 모습을 나타내는 비슷한 말로 보이지만,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표현들이 저마다 고유한 의미를 지닌다고 설명합니다. 이 구별을 알면 이사야의 말씀이 단순히 고통스러운 장면을 반복해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를 함께 나타내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한곳이없다’는 말을 읽는 우리는 무엇을 조심해야 할까요? 우선 이것을 자신이 겪는 모든 신앙의 흔들림에 그대로 적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을 이해하지 못해 답답하거나,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 일을 후회하거나, 자신의 부족함을 발견하는 경험이 곧 라멕의 황폐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AC.431은 라멕이 나타내는 상태와 그 상태를 설명하는 말씀의 표현을 풀이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연약함을 이 본문만으로 최종 판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또한 이사야가 상처를 싸매거나 기름으로 부드럽게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고 해서, AC.431이 그 상태의 회복 가능성에 대한 모든 것을 설명했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번호에서 상처와 타박상과 종기가 무엇을 뜻하는지 밝힙니다. 회복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혹은 특정한 상태가 회복될 수 있는지에 관한 판단은 이번 번호의 직접적인 설명과 구별해야 합니다. 본문이 말하는 황폐의 심각성을 충분히 받아들이되, 본문이 말하지 않은 결론까지 덧붙이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국 ‘발바닥에서머리까지성한곳이없다’는 말씀은 AC.431에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를 보여 주는 강렬한 이미지입니다. 라멕의 ‘상처’와 ‘타박상’은 각각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를 나타내며, 이사야의 ‘종기’는 그 둘 모두에 관해 쓰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신앙과 체어리티를 따로 떼어 놓은 채 교회의 온전함을 생각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살펴보게 됩니다. (AC.431심화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