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429에서 처음 읽는 독자가 특히 멈칫할 만한 표현은 ‘신앙에서태어나는체어리티’입니다. 앞에서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문제를 강조했는데, 이번에는 체어리티가 신앙에서 태어난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 두 설명을 단순히 ‘어느쪽이먼저인가’라는 순서의 문제로만 읽으면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려는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의 우열이 아니라, 라멕이 소멸시킨 두 가지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이번 번호의 문맥을 살펴보겠습니다. 라멕은 ‘한사람’과 ‘어린아이’를 죽였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을 신앙으로 풀이하고, ‘어린아이’를 체어리티로 풀이합니다. 이어 신앙을 부인하고 죽이는 사람은 신앙에서 태어나는 체어리티도 함께 부인하고 죽인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태어난다’는 표현은 여기서 신앙과 체어리티가 서로 무관하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히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신앙이라고 부르는 것에도 서로 다른 상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씀의 내용을 알고 그것이 참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아직 그 진리에 따라 이웃을 사랑하고 살아가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배운 진리가 삶 속에서 사랑과 선행으로 나타날 때, 우리는 그 신앙이 삶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 예는 AC.429의 문장을 이해하기 위한 설명이지, 스베덴보리가 이번 번호에서 신앙의 모든 단계를 상세히 구분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점에서 ‘신앙에서태어나는체어리티’는 체어리티가 신앙에 비해 덜 중요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과 체어리티를 떼어 놓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로 읽을 수 있습니다. 라멕의 고백에서 신앙을 죽이는 일은 체어리티를 죽이는 일과 함께 나타납니다. 신앙의 소멸을 말하면서 체어리티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설명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번 번호를 모든 사람의 거듭남에서 반드시 신앙이 시간적으로 먼저 생기고 체어리티가 나중에 생긴다는 공식으로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AC.429는 라멕의 말에 등장하는 ‘사람’과 ‘어린아이’의 의미를 설명하는 자리입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 전체를 이해하려면 앞에서 다룬 가인과 아벨의 해설, 그리고 이어지는 번호들을 함께 살펴야 합니다. 한 문장의 표현을 떼어 내어 스베덴보리의 전체 설명을 대신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독자의 입장에서 이번 번호가 던지는 질문은 오히려 분명합니다. 내가 신앙이라고 부르는 것이 단지 알고 인정하는 데 머물러 있는지, 아니면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와 실제로 연결되어 있는지 살펴보게 하는 것입니다. 다만 자신의 연약함이나 일시적인 실패를 곧바로 라멕의 ‘소멸’과 동일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번 번호에서 설명하는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가 모두 소멸된 황폐의 상태입니다.
결국 ‘신앙에서태어나는체어리티’라는 표현은 체어리티의 가치를 낮추기 위한 말이 아닙니다. AC.429에서는 신앙을 부인하고 소멸시키는 일이 그 신앙에서 태어나는 체어리티의 소멸과도 연결된다는 사실을 설명합니다. 이 관계를 이해하면 라멕이 ‘사람’과 ‘어린아이’를 함께 죽였다고 한 말이 왜 교회의 황폐를 나타내는지 조금 더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AC.429심화1)
※오늘(2026/09/20)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4, ‘주 우리 하나님’, 찬94,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입니다.
오늘은창4절별 주석 그 다섯 번째, 16절로 18절, AC 글 번호로는 397번에서 404번입니다. 먼저 본문입니다.
16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17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18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창4:16-18)
제목은
보존된 신앙은 어디로 가는가,가인의 성읍 에녹
이며, 다음은 ‘3분요약’입니다. 새로 오신 분들, 그리고 그동안 함께해오신 분들 모두를 위한, 지난 2월부터 시작한 이 특별한 주일예배를 위한, 그 흐름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한 시간입니다.
레위기를 펼치면 현대의 그리스도인에게는 매우 낯선 세계가 나타납니다. 소와 양과 염소를 잡고,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리고,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뜨며, 내장과 정강이를 물로 씻고, 마침내 제물을 불태웁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런 제사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으므로 레위기 1장은 자칫 오래전에 폐지된 제사 규정을 기록한 장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으면 전혀 다른 세계가 열립니다. 스베덴보리는 번제와 희생제사의 의식과 절차 안에 ‘천국의아르카나’가 있으며,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의 인성의 영화에 관한 것이고, 상대적 의미에서는 인간의 거듭남과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정결에 관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레위기 1장은 단순히 짐승을 어떻게 잡고 불사를 것인가를 가르치는 장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을 어떻게 정결하게 하시고 선과 진리를 그 안에 심고 결합하셔서 마침내 인간 전체가 사랑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하게 하시는가를 보여 주는 장입니다.
그런데 레위기의 첫 장은 인간이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장면으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회막에서모세를부르시고그에게말씀하여이르시되’로 시작합니다. 먼저 부르시는 분은 여호와이십니다. 출애굽기 마지막에서 성막이 완성되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한 뒤, 바로 이어지는 레위기의 첫 음성이 ‘부르심’이라는 사실은 중요합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9784(출27:20)는 ‘회막’이 주님의 임재를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제사의 출발점은 인간의 종교적 열심이 아니라 인간 가운데 임재하시는 주님입니다. 거듭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먼저 주님을 찾아내고 무엇인가를 드려 주님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먼저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고 우리를 부르시며 인간은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주님께 나아갑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인간이 가지고 나오는 것이 ‘예물’입니다. 첫 번째로 등장하는 것은 소의 번제입니다. ‘그예물이소의번제이면흠없는수컷으로회막문에서여호와앞에기쁘게받으시도록드릴지니라.’ 스베덴보리는 제사에 사용되는 동물들이 아무렇게나 선택된 것이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각각의 동물은 서로 다른 종류의 선과 진리, 그리고 서로 다른 예배의 상태를 표상합니다. 특별히 소 떼에 속한 동물들은 겉 또는 자연적 인간 안에 있는 선과 진리의 애정을 표상하며, 수송아지는 겉 또는 자연적 인간 안에 있는 이노센스와 체어리티의 선을 의미합니다(AC.9391, 출24:5). 그러므로 번제는 우리의 종교적 생각이나 감정만 주님께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몸을 가지고 세상에서 살아가는 실제 생활, 곧 말과 행동, 습관과 관계, 일상의 선택까지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거듭남입니다.
제물을 가져온 사람은 번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습니다. 이것 역시 단순한 의식적 접촉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는 것이 전달과 이전과 받아들임을 표상한다고 설명하며, 머리는 전체를 의미한다고 말합니다(AC.10023, 출29:10). 따라서 이 장면에는 인간 자신과 번제가 표상하는 예배 사이의 결합이라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번제는 나와 상관없는 짐승 하나가 대신 죽는 외적 사건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번제가 표상하는 정결과 거룩하게 됨이 바로 나의 삶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주님 앞에서 변화되어야 하는 것은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나 자신이며, 나의 생각과 의지와 삶 전체입니다.
그 다음에는 피가 등장합니다. ‘아론의자손제사장들은그피를가져다가회막문앞제단사방에뿌릴것이며.’ 스베덴보리는 제사의 피가 신적 진리를 표상한다고 설명하고(AC.10046, 출29:16), 그 피가 제단에 뿌려지는 것은 신적 진리와 신적 선의 결합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AC.10047, 출29:16). 이것은 거듭남의 매우 중요한 질서를 보여 줍니다. 인간은 막연히 착해지고 싶다고 해서 거듭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가 우리 삶 안으로 들어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밝히고, 그 진리에 따라 악을 피하며 살아갈 때 정결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진리를 우리 안의 선과 결합하십니다. 그러므로 제단에 뿌려지는 피는 단순히 죽음의 흔적이 아니라 인간을 정결하게 하고 선과 진리가 결합하게 하는 신적 진리의 표상입니다.
이제 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뜹니다. 이 두 행위에도 분명 내적 의미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희생제사와 번제의 세세한 의식과 절차 안에 천국의 아르카나가 있으며, 그것들이 인간의 거듭남을 표상한다고 분명히 말하기 때문입니다(AC.10057, 출29:18). 그러나 여기서는 더 나아가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가죽’이 말씀에서 일반적으로 가장 바깥의 것을 표상한다는 원리는 확인할 수 있지만, 레1:6의 ‘가죽을벗기는행위’ 자체를 스베덴보리가 정확히 어떻게 적용하는지 충분한 직접 근거가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럴듯한 의미를 만들어 붙일 필요는 없습니다. ‘각을뜨는것’ 역시 의미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구체적인 상응은 현재로서는 보류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상응은 우리의 상상력이 아니라 말씀 안에 주님께서 두신 질서이므로, 확인되는 만큼만 읽는 것이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 충실합니다.
그러나 ‘그내장과정강이를물로씻을것이요’에서는 다시 매우 분명한 길이 열립니다. 스베덴보리는 제사의 내장을 씻는 것이 가장 낮은 것들의 정결을 의미한다고 설명하고(AC.10049, 출29:17), 이어 정강이는 자연적 인간의 외적인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AC.10050, 출29:17). 인간의 가장 낮고 자연적인 부분은 세상과 직접 접촉하기 때문에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감각적 즐거움과 오류에 쉽게 물듭니다. 그러므로 이 부분도 정결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에서 ‘물로씻는것’은 진리에 의한 정결과 관계합니다. 인간이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면서 악에서 돌이킬 때 자연적 인간도 점차 정결하게 됩니다.
여기서 레위기 1장의 거듭남 이해가 매우 실제적인 것이 됩니다. 주님은 우리의 자연적 인간을 없애려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몸도 없애지 않으시고, 일상생활도 없애지 않으시며, 인간의 자연적인 능력도 없애지 않으십니다. 그것들을 씻으십니다. 거짓과 악에 물든 것을 진리로 정결하게 하시고, 자연적 인간이 속 사람을 섬기며 주님의 선을 실제 삶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질서 안에 두십니다. 거듭남은 자연적인 것을 버리고 영적인 존재가 되는 과정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 자연적인 것 안에서 바르게 표현되도록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질서 있게 결합하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씻은 내장과 정강이는 버리지 않습니다. 제사장은 ‘그전부를제단위에서불살라’ 번제로 드립니다. 여기서 번제의 핵심이 드러납니다. ‘전부’입니다. 머리만도 아니고, 좋은 부분만도 아니며, 속 사람만도 아닙니다. 가장 낮은 자연적 부분까지 씻긴 후에는 모두 제단의 불 위로 올라갑니다. 스베덴보리는 ‘불’이 주님과 그분께 드리는 예배에 사용될 때 사랑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향기로운냄새’는 주님께 기쁘고 받아들여지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은 체어리티와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신앙으로부터의 예배라고 설명하면서 바로 레1:9, 13, 17을 인용합니다(AC.925, 창8:21). 그러므로 번제의 마지막은 인간의 소멸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인간 전체가 정결해져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가는 상태가 번제가 지향하는 내적 실재입니다.
따라서 ‘여호와께향기로운냄새’라는 표현도 문자적으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짐승이 타는 냄새를 좋아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 향기로운 것은 제물의 연기가 아니라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살아 있는 예배입니다. 악을 피하고, 선을 사랑하며,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인간의 변화된 삶이 주님께 ‘향기로운냄새’가 되는 것입니다(AC.925, 창8:21).
10절부터는 양이나 염소의 번제가 이어집니다. 절차는 소의 번제와 매우 비슷하지만 제물의 종류가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소 떼의 동물들과 양 떼의 동물들을 구별하며, 전자가 겉 또는 자연적 인간 안의 선과 진리의 애정을 표상한다면 후자는 속 또는 영적 인간 안의 선과 진리의 애정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AC.9391). 이것은 번제가 인간의 겉 생활만이 아니라 속의 애정과 의도까지 관계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사람은 겉으로 선한 일을 하면서도 속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고, 반대로 선한 뜻을 품고 있다고 하면서 실제 삶에서는 그것을 행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거듭남은 어느 한쪽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속과 겉이 함께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소의 번제에서 양과 염소의 번제, 다시 새의 번제로 이어지는 순서를 거듭남의 시간적인 ‘1단계,2단계,3단계’로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각각의 제물이 서로 다른 종류의 선과 진리 및 예배 상태를 표상한다고 설명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레1의 배열 자체를 인간이 차례로 통과하는 세 단계라고 직접 설명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세 종류의 번제는 거듭나는 인간 전체 안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층위와 상태를 보여 주는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안전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모든 층위가 결국 하나의 목적, 곧 사랑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하는 상태를 향한다는 것입니다.
14절에서는 다시 중요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제 짐승이 아니라 ‘산비둘기나집비둘기새끼’가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노아가 번제를 드린 창8:20을 해설하면서 레1:3-17을 직접 언급합니다. 그는 번제에 사용된 소와 어린양과 염소와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가 각각 특별한 천적인 것을 의미했으며, 큰 구별에서 짐승은 체어리티의 선을, 새는 신앙의 진리를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AC.922, 창8:20). 또한 비둘기는 거듭나는 사람에게 있는 신앙의 진리와 선, 특별히 신앙의 이해에 속한 것들과 관계합니다(AC.870, 창8:8-9). 따라서 주님께서는 인간의 애정만 거듭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생각과 이해, 곧 진리를 받아들이고 분별하는 능력까지 거듭나게 하십니다.
그러나 신앙의 진리 역시 그 자체가 최종 목적은 아닙니다. 말씀을 많이 알고 교리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거듭남의 완성은 아닙니다. 진리는 인간을 선으로 인도하고, 마침내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을 이루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새의 번제도 마지막에는 똑같이 ‘이는화제라여호와께향기로운냄새니라’로 끝납니다. 소의 번제도, 양이나 염소의 번제도, 새의 번제도 마지막 목적지는 같습니다. 서로 다른 선과 진리, 서로 다른 인간의 상태가 결국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 있는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새의 번제에는 ‘모이주머니와그더러운것은제거하여제단동쪽재버리는곳에던지고’, ‘날개자리에서그몸을찢되아주찢지말고’라는 매우 특이한 규정도 있습니다. 이것들 역시 아무 의미 없는 절차는 아닐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희생제사와 번제의 세부 규정 안에 천국의 아르카나가 있다고 분명히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재 확인된 원전만으로 ‘모이주머니는이것이다’, ‘날개자리에서찢는것은이것이다’, ‘아주찢지않는것은이것이다’라고 단정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말씀을 읽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즉시 상징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확인된 상응에는 충실하고 아직 확인되지 않은 곳에서는 멈출 줄 아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제 레위기 1장 전체를 다시 보면 처음 보았던 피와 죽음과 불의 장면 뒤에서 하나의 놀라운 거듭남의 서사가 나타납니다. 주님께서 회막에서 인간을 부르십니다. 인간은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주님께 나아갑니다. 번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으며 자신과 그 예배가 결합합니다. 피, 곧 주님에게서 오는 신적 진리가 인간을 정결하게 하고 선과 결합합니다. 가장 낮은 자연적 삶까지 진리의 물로 씻깁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함께 질서 안으로 들어옵니다. 신앙의 진리와 체어리티의 선이 함께 주님께 향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전부’가 불 위에 놓입니다. 인간 전체가 사랑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전체 과정을 매우 간결하고 실제적으로 정리합니다. 희생제사와 번제는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정결, 선과 진리의 심음, 그리고 선과 진리의 결합을 표상하며, 이것이 바로 거듭남이라고 설명합니다(AC.10143, 출29:42). 그리고 악과 거짓에서 정결해진다는 것은 그것들을 삼가고 피하며 싫어하는 것이고, 선과 진리가 심어진다는 것은 선하고 참된 것을 생각하고 의지하며 말하고 행하는 것이며, 선과 진리의 결합은 그것들로 이루어진 삶을 사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번제는 종교적 감정의 한 순간이나 ‘모든것을바치겠다’는 결단에 머물지 않습니다. 실제 삶 전체가 주님의 선과 진리에 의해 변화되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레위기 1장이 오늘 우리에게 묻는 질문은 ‘나는하나님께무엇을희생할것인가?’보다 더 깊습니다. ‘내안에서아직진리의물로씻기지않은것은무엇인가?’, ‘내속사람과겉사람은서로하나가되어있는가?’, ‘내가알고있는진리는실제선한삶과결합하고있는가?’, ‘나의가장자연적이고일상적인삶까지주님의질서안으로들어오고있는가?’, 그리고 ‘내삶전체는사랑으로부터주님을예배하고있는가?’입니다.
번제와 희생제사 자체가 예배의 본질이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것들은 내적 예배를 표상하는 외적 형식이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외적 제사가 내적 예배와 분리되면 참된 예배가 될 수 없다고 설명합니다(AC.922). 그러므로 오늘날 동물의 번제가 사라졌다고 해서 레위기 1장의 말씀이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외적 표상이 사라진 지금 우리는 그 표상 안에 감추어져 있던 내적 실재, 곧 실제 삶에서 이루어지는 거듭남을 읽어야 합니다.
레위기 1장의 번제는 인간이 하나님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인간을 악과 거짓에서 정결하게 하시고, 선과 진리를 그 안에 심으시며, 그것들을 서로 결합하셔서 마침내 인간의 가장 깊은 애정에서 가장 바깥의 일상생활까지 주님을 향하게 하시는 이야기입니다. 그때 인간의 예배는 더 이상 입술이나 의식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삶 전체가 예배가 됩니다. 이것이 ‘그전부를제단위에서불살라’라는 번제의 아르카나이며, 주님께 ‘향기로운냄새’가 되는 살아 있는 예배입니다. (SWC.레1해설)
※오늘(2026/09/13)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3, ‘영원한하늘나라’, 찬93, ‘예수는나의힘이요’입니다.
오늘은창4절별 주석 그 네 번째, 9절로 15절, AC글 번호로는 370번에서 396번입니다. 먼저 본문입니다.
9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10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11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12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13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1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15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창4:9-15)
제목은
가인의표,인간의실패보다더깊은주님의섭리
이며, 다음은 지난주부터 시작한 ‘3분요약’입니다. 새로 오신 분들, 그리고 그동안 함께해오신 분들 모두를 위한, 지난 2월부터 시작한 이 특별한 주일예배를 위한, 그 흐름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한 시간입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And Jehovah said unto Cain,Where is Abel thy brother?And he said,I know not,am I my brother’s keeper? (창4:9)
AC.370
‘여호와께서가인에게말씀하셨다’(JehovahsaiduntoCain)는것은체어리티,곧‘아우아벨’(brotherAbel)에관하여그들에게어떤딕테이트를주는,내면에서오는어떤퍼셉션(acertainperceptivityfromwithin)을의미합니다.가인의대답인‘내가알지못하나이다내가내아우를지키는자니이까?’(Iknownot,amImybrother’skeeper?)는신앙이체어리티를아무것도아닌것으로여겼으며,체어리티에종속되기를원하지않았고,그결과신앙이체어리티에속한모든것을완전히거부했음을의미합니다.그들의교리는이와같이되었습니다. “JehovahsaiduntoCain”signifies a certain perceptivity from within that gave them a dictate concerning charity or the“brotherAbel.” Cain’s reply, “Iknownot,amImybrother’skeeper?”signifies that faith considered charity as nothing, and was unwilling to be subservient to it, consequently that faith altogether rejected everything of charity.Such did their doctrine become.
해설
AC.370은 창4:9의 ‘여호와께서가인에게이르시되네아우아벨이어디있느냐’와 가인의 대답 ‘내가알지못하나이다내가내아우를지키는자니이까’를 설명합니다. 앞의 창4:6-8에서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이 체어리티와의 올바른 질서를 거부하다가 마침내 아벨을 죽이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이제 아벨이 죽은 뒤 주님께서는 가인에게 ‘네아우아벨이어디있느냐’고 물으십니다. 문자적으로는 살인한 가인에게 아벨의 행방을 묻는 장면이지만, 속뜻에서는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신앙에게 다시 ‘체어리티는어디에있는가?’라고 묻는 장면입니다. 그러므로 AC.370은 앞의 가인과 아벨 이야기를 한 단계 더 깊은 교리적 상태로 끌고 갑니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여호와께서가인에게말씀하셨다’에 대한 설명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체어리티,곧아우아벨에관하여그들에게어떤딕테이트를주는,내면에서오는어떤퍼셉션’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우리가 살펴본 AC.359-360과 함께 읽으면 특히 흥미롭습니다. 거기서는 ‘여호와께서가인에게말씀하셨다’를 ‘consciencedictated’, 곧 ‘양심이말해주었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acertainperceptivityfromwithin’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 자신이 이 가인 계열의 내적 경고를 설명하면서 ‘양심’과 ‘퍼셉션’에 관련된 표현을 모두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두 용어의 교리적 구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에게 특징적인 것은 사랑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지각하는 퍼셉션이고, 홍수 후 고대교회의 영적 인간에게 특징적인 것은 배운 진리와 선으로부터 형성되는 양심입니다. 그러므로 AC.370의 표현은 가인 계열에게 후대 고대교회의 양심이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는 증거로 읽기보다, 태고교회의 질서가 크게 훼손된 상태에서도 체어리티에 관하여 내면에서 무엇인가를 알리고 지시하는 퍼셉션이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안전합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아벨은 이미 죽었습니다. 속뜻으로는 체어리티가 소멸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여호와께서가인에게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체어리티를 거부했다고 해서 주님께서 즉시 그를 완전히 버리시는 것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내면에서는 여전히 ‘아벨이어디있느냐’, 곧 ‘체어리티는어디에있느냐’는 딕테이트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모르셔서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를 알 수 있도록 내면에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앞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기 전에도 주님께서 ‘네가분하여함은어찌됨이며안색이변함은어찌됨이냐’고 말씀하셨듯이, 체어리티를 실제로 소멸시킨 뒤에도 주님의 말씀은 계속됩니다. 인간의 상태가 변한다고 해서 주님의 사랑과 자비가 먼저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가인의 대답은 이제 그들의 상태가 얼마나 깊이 굳어졌는지를 보여 줍니다. ‘내가알지못하나이다내가내아우를지키는자니이까?’ 스베덴보리는 이 짧은 대답을 세 단계로 풉니다. 첫째, 신앙이 체어리티를 ‘아무것도아닌것으로여겼습니다.’ 둘째, 신앙은 체어리티에 ‘종속되기를원하지않았습니다.’ 셋째, 그 결과 신앙은 ‘체어리티에속한모든것을완전히거부했습니다.’ 앞의 번호들에서 진행되어 온 가인의 타락이 여기에서 하나의 완성된 교리적 태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신앙과 체어리티를 구별하는 데서 시작했지만, 신앙을 사랑에서 독립된 것으로 여기면서 둘의 분리가 생겼고, 그 결과 체어리티 없는 행위와 예배가 나타났습니다. 이어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주도권을 가지려 했고, 마침내 아벨을 죽였습니다.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내가왜아벨을지켜야하는가?’라고 말합니다. 체어리티 자체를 신앙과 무관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여기서 ‘체어리티에종속되기를원하지않았다’는 표현은 특별히 주의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체어리티가 신앙을 억압하거나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열등하여 없어져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과 체어리티가 결합될 때 각각의 기능이 온전해진다는 뜻입니다. 신앙의 진리는 무엇이 선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밝혀 주지만, 그 진리를 사랑하고 실제로 행하게 하는 생명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체어리티 아래 있다는 것은 신앙이 체어리티를 섬기며 그것을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앞의 AC.361-365에서 스베덴보리가 강조했듯이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면 질서가 뒤집힙니다.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야 하며, 체어리티는 신앙을 통하여 자신이 어떻게 선을 행해야 하는지를 알아갑니다. 둘은 서로를 필요로 하지만 그 생명의 근원과 주도권은 사랑과 체어리티에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내아우를지키는자니이까?’라는 말은 단순한 책임 회피보다 훨씬 깊은 뜻을 갖습니다. 가인은 아벨을 ‘아우’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신앙과 체어리티가 본래 서로 완전히 무관한 두 실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씀의 문자 자체가 보존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둘은 ‘형제’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이제 ‘내가그를지켜야하는가?’라고 묻습니다. 속뜻으로 읽으면 ‘신앙이왜체어리티를돌보아야하는가?신앙이체어리티와무슨상관이있는가?’라는 말이 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신앙은 자기 존재의 목적을 잃어버립니다. 신앙의 모든 진리는 궁극적으로 인간을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인도하고, 악을 죄로 여겨 피하며, 선을 실제 삶으로 행하게 하기 위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선언한다면 자신에게 생명을 주는 목적과 결합을 거부하는 셈입니다.
마지막의 ‘그들의교리는이와같이되었습니다’라는 한 문장도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가인이라는 한 개인이 순간적으로 거짓말하고 책임을 회피했다는 심리적 설명에 머물지 않습니다.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의 ‘교리’가 이렇게 되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지만, 그것이 반복되고 확증되면서 하나의 교리가 되었습니다. 신앙을 그 자체로 구원의 본질적인 것으로 높이고, 체어리티를 부차적인 것으로 낮추며, 마침내 체어리티에 속한 것을 신앙에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는 체계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벨을죽였다’는 것은 단지 사람들이 이웃 사랑을 잘 실천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체어리티가 신앙의 생명이라는 사실 자체를 교리적으로 거부하기에 이른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교리가 왜 중요한지도 역으로 보여 줍니다. 교리는 단순히 머릿속에 저장된 신학적 문장이 아닙니다. 무엇을 본질적인 것으로 여기느냐에 따라 사람의 사랑과 삶의 방향도 영향을 받습니다. 체어리티를 신앙의 생명으로 인정하는 교리는 사람이 ‘내가믿는진리가어떻게이웃의선으로나타나야하는가?’를 묻게 합니다. 반대로 체어리티를 신앙과 무관한 것으로 만드는 교리는 결국 ‘내가내아우를지키는자니이까?’라는 태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을 오늘날 특정 교파나 특정 신학적 표어를 가진 모든 사람에게 기계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다루는 것은 신앙이 실제로 사랑과 삶에서 분리되어 체어리티를 무가치한 것으로 만드는 내적 원리입니다. 사람의 실제 영적 상태는 그가 사용하는 교리적 명칭만이 아니라 그가 무엇을 사랑하고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AC.370의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을 함께 놓으면 더욱 깊은 대비가 나타납니다. 한쪽에서는 내면으로부터 ‘아벨이어디있느냐’는 퍼셉션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다른 한쪽에서는 그들이 ‘내가내아우를지키는자니이까?’라고 대답하는 교리를 만들어 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내적 딕테이트와 인간이 스스로 확증한 교리가 서로 맞서는 것입니다. 내면에서는 체어리티가 신앙의 생명임을 알리고 있는데, 인간은 신앙이 체어리티 아래 있기를 거부하는 교리를 세웁니다. 따라서 가인의 문제는 단순히 진리를 몰랐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체어리티에 관한 어떤 내적 퍼셉션이 있었음에도 그것을 거부하고 반대되는 것을 교리로 굳혔다는 데 있습니다.
결국 AC.370은 창4:9의 질문을 우리에게도 돌려놓습니다. ‘네아우아벨이어디있느냐?’ 이것은 단지 가인에게 죽은 동생의 행방을 묻는 질문이 아니라,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사람에게 ‘그신앙안에서체어리티는어디에있는가?’라고 묻는 질문이 됩니다. 우리가 알고 고백하는 진리가 실제로 이웃의 참된 선을 구하게 하는지, 우리의 신앙이 사랑과 자비와 쓰임의 삶으로 이어지는지, 아니면 신앙의 정확성을 주장하면서 체어리티를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지는 않은지를 돌아보게 합니다. 참된 신앙은 ‘내가내아우를지키는자니이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신앙은 체어리티와 분리되어 홀로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 안에서 비로소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1부
이 영상은 처음부터 ‘장자권’이라는 교리를 차분히 설명하는 성경강의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약 35분 동안 찬양과 기도, 집회를 향한 기대와 사모함이 길게 이어지고, 그 가운데 반복해서 강조되는 것은 ‘이번집회를통하여하나님께서주시려는것을받아가자’, ‘이영환목사를통해주시려는것을취하고가자’는 태도입니다. 특히 인도자는 이영환 목사가 자신의 몸을 찢어 주듯 무엇인가를 전하려 한다는 상당히 강한 표현까지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이 영상의 ‘장자권’을 이해하려면 단순히 하나의 성경 주제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는 ‘어떤영적유산을전달받고, 그것을다시가지고가는것’이라는 강한 전수의 분위기가 처음부터 형성되어 있습니다. 실제 영상 후반에는 ‘장자선교회’ 정기후원과 ‘장자권교재’가 소개되고, 이 교재를 그동안의 핵심 내용을 모은 일종의 ‘장자권의완결판교재’라고 설명합니다. 즉 ‘장자권’은 이 집회에서 우연히 선택한 한 번의 설교 제목이 아니라, 이미 하나의 체계적인 교육 내용과 운동으로 발전한 주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렌즈’는 처음부터 상당히 흥미로운 지점에 서게 됩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 역시 성경의 ‘장자’, ‘처음난것’, ‘장자권’을 결코 사소하게 다루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를 읽다 보면 아벨의 ‘양의첫새끼’에서부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에서와 야곱의 장자권 문제, 르우벤의 장자권에 이르기까지 ‘처음난것’과 ‘장자권’은 말씀의 속뜻을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열쇠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장자권을강조한다’는 사실 자체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장자권을무엇으로이해하느냐’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설명은 일반적인 장자권 운동과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들어갑니다. ‘장자’는 단순히 집안에서 먼저 태어난 사람을 뜻하는 데 그치지 않으며, 더구나 ‘하나님의특별한복을남들보다먼저, 더많이받을권리를가진사람’이라는 의미로 고정되지 않습니다. 말씀의 속뜻에서 ‘장자’는 무엇이 ‘첫째자리를차지하는가’, 다시 말해 사람과 교회 안에서 무엇이 우선권과 주도권을 갖는가 하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생각보다 아주 미묘합니다. 사람이 거듭나는 과정에서는 먼저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를 신앙으로 받아들인 뒤, 마침내 그것을 삶으로 살아 선에 이르게 됩니다. 시간적으로 보면 ‘진리와신앙’이 먼저 나타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말씀에서는 어떤 문맥에서 신앙이나 진리가 ‘장자’처럼 나타납니다. 그러나 실제 질서에서는 정반대입니다. 진리는 선을 위해 존재하고, 신앙은 체어리티를 위해 존재합니다. 진리가 먼저 배워진다고 해서 진리가 목적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가 사람 안에서 살아 있는 진리가 되는 것은 그것이 선과 결합할 때이며, 신앙이 살아 있는 신앙이 되는 것도 체어리티와 결합할 때입니다.
이것이 ‘장자권’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먼저나타난것’과 ‘실제로첫째인것’이 반드시 같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가 먼저 글자를 배우고 나중에 그 글자로 사랑의 편지를 쓴다고 해서 글자가 사랑보다 높은 것은 아닙니다. 의학을 먼저 공부하고 나중에 환자를 치료한다고 해서 의학지식 자체가 환자를 살리려는 사랑보다 궁극적인 목적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먼저 진리를 배우고 신앙을 형성하지만, 그 모든 것은 결국 선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는 사람이 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의미의 ‘장자권’은 단순한 특권 문제가 아니라 ‘무엇이나를지배해야하는가’라는 질서의 문제입니다.
이 점에서 최근 우리가 살펴본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놀랍도록 직접 연결됩니다. 가인은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표상합니다. 처음에는 신앙이 먼저 등장합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면 가인이 ‘장자’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겨야 합니다. 사람이 진리를 배우는 이유는 결국 그 진리를 따라 선하게 살기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앙이 자신을 첫째 자리에 놓고 체어리티와 분리되면 어떻게 됩니까? 가인이 아벨을 죽입니다. 이것이 단순한 형제 살인의 역사적 사건을 넘어, ‘신앙이사랑보다자신을높일때교회안에서체어리티가소멸한다’는 무서운 속뜻이 됩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장자권회복’을 말하려면 상당히 조심해야 합니다. 만일 그것이 ‘내가영적장자가되어특별한권세를얻는다’, ‘내가문이특별한복을받는다’, ‘내자녀에게축복이계승된다’, ‘내가남보다앞선영적위치를차지한다’는 방향으로 흘러간다면, 성경의 장자권을 자연적인 특권 체계로 되돌려 놓을 위험이 있습니다. 반대로 ‘내안에서무엇이첫째가되어야하는가’, ‘내가아는진리가사랑을섬기고있는가’, ‘내신앙이체어리티를낳고있는가’, ‘주님께서내삶의첫째자리를실제로차지하고계시는가’를 묻는다면 장자권은 대단히 깊은 거듭남의 주제가 됩니다.
특히 AC에서 ‘처음난것’이 궁극적으로 주님께 속한다고 설명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아벨이 드린 ‘양의첫새끼’가 거룩했던 까닭도 인간 자신이 어떤 영적 우월성을 소유하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사랑과 거기서 비롯되는 참된 신앙이 주님에게서 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난것’을 여호와께 돌리는 표상은 ‘내가장자이므로이것은내권리다’라는 선언이라기보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내안에있는선도, 진리도, 사랑도, 신앙도그근원은내가아니라주님이십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사용자가 작업해 둔 AC 자료에서도 ‘처음난것은모두거룩했는데, 이는그것들이오직홀로장자이신주님을가리켰기때문’이며, ‘사랑과거기서비롯된신앙’이 장자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장자권’이라는 말은 오히려 인간의 특권의식을 꺾는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참된 장자는 내가 아니라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먼저 받았다면 그것은 남보다 높은 사람이 되라는 뜻이 아니라, 먼저 받은 것을 다른 사람의 선을 위해 사용하라는 뜻이 됩니다. 진리를 먼저 알았다면 진리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진리대로 먼저 살아야 하고, 은혜를 먼저 받았다면 그것을 자신의 영적 계급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흘려보내야 합니다. 직분을 먼저 받았다면 권위가 커지는 것이 아니라 쓰임의 책임이 커집니다. 이 의미에서 ‘장자권’은 ‘특권’보다 ‘쓰임’에 가깝습니다.
영상 초반의 뜨거운 찬양과 기도 역시 바로 이 기준으로 분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한분밖에는사랑할이가없다’, ‘주님의마음이있는곳에나의마음이있기원한다’는 고백 자체는 매우 귀합니다. ‘이집회를통해무엇인가를받아가겠다’는 사모함 역시 그 자체로 잘못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진리를 향한 애정이 필요하며, 냉랭한 지성만으로는 영적 생명이 자라기 어렵습니다. 스베덴보리도 사람의 의지와 애정이 실제 생명의 중심이라는 사실을 거듭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이 집회의 뜨거움 자체를 경계할 이유는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는 매우 세심하게 보아야 합니다. 초반 인도자가 반복해서 ‘이영환목사를통해주시려는것’, ‘목사가찢어주듯주려는것’을 ‘취하여가자’고 강조하는 대목입니다. 이것을 선의로 이해하면 ‘한목회자가평생깨닫고살아온신앙의유산을배우자’는 뜻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신앙의 선배에게서 배우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도 반드시 하나의 안전장치를 둡니다. ‘사람에게서받은진리라해도그진리가참된것은그사람에게서나왔기때문이아니라주님과말씀에서나왔기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교사는 통로일 수 있지만 근원은 아닙니다. 어떤 목회자의 체험이나 교리 체계가 아무리 강력하더라도 그것이 말씀보다 높은 해석의 열쇠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저는 이 영상의 첫 35분을 단순히 ‘찬양이길다’ 정도로 지나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이 도입부가 이후 장자권 강의를 받아들이는 청중의 마음을 미리 형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청중은 단순히 ‘장자권이라는성경개념을공부하겠다’는 상태가 아니라 ‘이집회에는특별히받아야할무엇인가가있고, 이영환목사를통해그것이전달된다’는 기대 속에서 강의를 듣게 됩니다. 이것은 강력한 장점이면서 동시에 위험 가능성이기도 합니다. 선한 진리가 전달된다면 사람의 마음을 열어 주는 좋은 토양이 되지만, 특정한 인간의 해석이 지나치게 절대화될 경우에는 검증보다 수용이 먼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렌즈’는 이영환 목사나 장자선교회를 처음부터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방식으로 접근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아주 단순한 질문 하나를 끝까지 붙들면 됩니다. ‘여기서말하는장자권은결국누구를첫째자리에세우는가?’입니다. 주님을 첫째 자리에 세우는가, 아니면 장자권을 가진 인간을 특별한 사람으로 만드는가. 선과 사랑을 첫째 자리에 세우는가, 아니면 신앙의 지식과 영적 권위를 첫째 자리에 세우는가. 이웃을 섬기는 쓰임으로 나아가는가, 아니면 나와 내 가문이 특별한 복을 받는 체계로 나아가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직 영상 초반만으로 단정할 수 없습니다. 이후 이영환 목사가 장자권을 실제로 어떻게 풀어 가는지를 충분히 들은 뒤 판단해야 합니다.
다만 출발점 하나만큼은 분명히 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참된 ‘장자권’은 ‘내가남보다먼저복받을권리’가 아닙니다. 더 깊게는 ‘내안에서주님의선과사랑이첫째가되고, 진리와신앙은그것을섬기는질서로돌아가는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깊은 의미에서는 인간 누구도 스스로 장자가 아닙니다. 모든 선과 진리의 처음이시며 근원이신 주님만이 참된 ‘장자’이십니다. 따라서 인간이 장자권을 제대로 받는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자기 것으로 움켜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것이라고생각했던선과진리와능력까지주님께돌려드리는것’입니다.
이 기준을 세워 놓고 다음 2부에서는 이영환 목사가 본격적으로 ‘장자권’을 어떤 성경적 구조로 설명하는지 들어가 보겠습니다. 특히 ‘장자에게주어진복’, ‘장자의명분’, ‘아브라함·이삭·야곱과에서’,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의 성도와 가정과 다음 세대에 어떻게 적용된다고 보는지를 따라가면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먼저인진리와실제로첫째인선’, 곧 신앙과 체어리티의 질서와 하나씩 대조해 보겠습니다.
2부
1부에서는 이 집회의 전체 분위기와 ‘장자권’이라는 주제를 바라보는 기본적인 렌즈를 먼저 세웠습니다. 이번 2부부터는 그 렌즈를 조금 더 안쪽으로 가져가 보겠습니다. 이 집회에서 장자권은 단순히 ‘이스라엘사회에서맏아들이가졌던권리’라는 역사적 지식을 가르치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장자선교회라는 조직과 교육용 교재가 따로 있을 만큼 하나의 영적 체계로 발전해 있습니다. 영상 끝에서도 현재 사용하는 교재를 이전 교재들의 핵심적인 장자권 내용을 모은 사실상의 ‘완결판교재’처럼 설명하고, 목회자 전문교재가 아니라 평신도 교육용으로 보급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분별해야 할 것도 단순한 설교 한 편이 아니라 ‘장자권이라는성경개념을오늘의그리스도인에게적용하는하나의해석체계’입니다.
이 점에서 먼저 인정할 것은 ‘장자권을소중히여기라’는 권면 자체에는 상당히 좋은 영적 직관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판 사건은 분명히 가볍지 않습니다. 눈앞의 욕구 때문에 하나님께 속한 더 높은 것을 하찮게 여겼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장자권을 ‘눈앞의욕망때문에영적인것을팔아버리지말라’는 교훈으로 읽는 것은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실제 다른 관련 강의 자료에서도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판 것을 ‘식욕의지배를받아하나님이주신영적우선순위, 영적질서를파괴한행위’라고 설명합니다. 이 적용에는 귀담아들을 만한 부분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사람의 낮은 자연적 욕망이 더 높은 영적인 것을 지배하게 되는 상태를 매우 심각하게 봅니다. 거듭남이란 결국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것을 지배하던 질서가 뒤집혀, 영적인 것이 자연적인 것을 다스리고 궁극적으로는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의 통치 아래 놓이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팥죽한그릇때문에장자권을팔지말라’를 ‘순간적인자연적욕망때문에영적인선과진리를희생하지말라’고 읽는다면,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인간론과도 상당히 가까워집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중요한 갈림길이 생깁니다. ‘에서가장자권을팔았다’는 것을 단순히 ‘에서는귀한영적복을가볍게여겼고야곱은그것을귀하게여겼다’ 정도로 읽으면 비교적 간단합니다. 그러나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의 속뜻으로 들어가면 에서와 야곱의 관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에서는나쁜사람, 야곱은좋은사람’, ‘에서는장자권을잃은사람, 야곱은장자권을쟁취하여복받은사람’이라는 도식만으로는 말씀의 내적 구조가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에서와 야곱은 두 개인의 성격을 넘어 사람의 거듭남 안에서 일어나는 ‘선과진리의관계’를 표상합니다. 크게 말하면 에서는 자연적 차원의 ‘선’을, 야곱은 자연적 차원의 ‘진리’를 표상합니다. 그런데 거듭남의 초기에는 사람이 무엇이 선인지 아직 직접적으로 사랑하고 지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먼저 진리를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옳다’, ‘이렇게살아야한다’, ‘이것은주님의뜻이다’라는 진리를 배우고, 처음에는 그것을 의무와 순종으로 실천합니다. 그래서 시간의 순서에서는 진리가 앞에 나섭니다. 이 단계에서는 야곱이 앞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최종 질서가 아닙니다. 진리는 왕이 되기 위해 먼저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선을섬기기위해’ 먼저 들어옵니다. 사람이 거듭나면서 처음에는 ‘진리이기때문에선을행하지만’, 나중에는 ‘선을사랑하기때문에진리를행하는’ 상태로 바뀝니다. 처음에는 ‘주님께서하라고하셨으니해야한다’였다면, 나중에는 ‘그것이선하기때문에하고싶다’가 됩니다. 바로 이때 외적으로 먼저였던 진리가 본래 자리로 물러나고, 실제로 첫째인 선이 앞에 서게 됩니다. 이것이 장자권을 둘러싼 말씀의 역설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그래서 ‘누가장자인가?’라는 질문은 스베덴보리에게 단순히 출생순위를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사람안에서무엇이첫째가되어야하는가?’를 묻는 질문입니다. 진리가 먼저 배워지므로 진리가 장자처럼 보이지만, 실제 목적에서는 선이 먼저입니다. 신앙이 먼저 형성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생명에서는 체어리티가 먼저입니다. 사람은 ‘무엇을믿어야하는가’를 먼저 배우지만,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목적은 그를 교리를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선을사랑하고행하는사람’으로 만드는 데 있습니다.
이것을 놓치면 장자권이 쉽게 ‘영적특권론’으로 변합니다. ‘나는장자권을가진사람이다’, ‘우리가정에는장자권의복이있다’, ‘내가이장자권을자녀에게물려준다’는 식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면 장자권의 중심이 주님에게서 인간에게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물론 부모의 신앙과 삶이 자녀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부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모가 주님을 사랑하고 정직하게 살며 자녀에게 말씀을 가르친다면 그것은 자녀에게 귀한 영적 환경과 리메인스를 형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과 ‘부모가가진영적신분이나권리가혈통을따라자녀에게이전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구원도, 거듭남도, 천국도 혈통으로 상속되지 않습니다. 선한 부모에게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자녀가 선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목회자의 자녀라는 이유로 영적인 장자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마다 자유 안에서 주님을 향하여 돌이키고, 진리를 받아들이고, 악을 죄로 여기며 피하고, 받은 진리를 삶으로 살아야 합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귀한 ‘장자권’이 있다면 그것은 특별한 영적 신분증이 아니라 ‘주님을사랑하고이웃에게선을행하는삶이무엇인지보여주는것’일 것입니다.
이 점에서 ‘처음난것’을 여호와께 돌리라는 성경의 명령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흔히 장자권이라고 하면 ‘장자가무엇을받는가’를 먼저 생각합니다. 그러나 말씀은 오히려 ‘처음난것은누구의것인가’를 묻습니다. 그리고 대답은 인간의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것’입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에서 ‘양의첫새끼’가 주님께 속한 것을 표상한다고 설명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처음 난 것은 거룩하게 구별되었으며, 궁극적으로는 오직 주님만이 참된 ‘장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거기서 비롯되는 신앙 역시 인간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옵니다. 사용자가 번역·해설해 둔 AC 자료에서도 이 점을 분명히 정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성경의 장자권에는 놀라운 방향 전환이 일어납니다. 자연적인 인간은 ‘장자이므로더받는다’에 관심을 둡니다. 그러나 속뜻은 ‘처음난것이므로주님께돌린다’고 말합니다. 자연적인 인간은 ‘나에게어떤복이오는가’를 묻지만, 영적인 인간은 ‘내가받은것이누구에게서왔으며무엇을위해사용되어야하는가’를 묻습니다. 자연적인 장자권은 소유의 언어로 읽기 쉽지만, 영적인 장자권은 ‘귀속과질서와쓰임’의 언어로 읽어야 합니다.
따라서 장자권과 함께 ‘복’을 말할 때도 매우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성경에서 복에는 자연적인 차원도 분명히 있습니다. 자녀, 토지, 풍요, 건강, 평안 같은 것이 복으로 표현됩니다. 이것을 억지로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연계의 좋은 것들도 모두 주님의 섭리 안에서 감사히 받을 수 있는 선물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영적 실체 그 자체로 만들어 버릴 때입니다. ‘장자권을회복하면사업이잘된다’, ‘가문이일어난다’, ‘자녀가성공한다’, ‘물질적인형통이따라온다’는 식의 공식이 만들어지는 순간, 말씀의 영적인 복이 자연적인 성공의 약속으로 축소될 위험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진정한 복은 훨씬 안쪽에 있습니다. 사람이 주님과 결합하는 것,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게 되는 것, 진리를 단지 아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기쁨으로 행하게 되는 것, 자기중심적인 proprium의 지배가 약해지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이 사람의 삶을 이끌게 되는 것, 그리고 마침내 자신에게 주어진 쓰임을 이웃을 위해 기쁘게 감당하게 되는 것이 복입니다. 이런 사람이 부자가 될 수도 있고 가난할 수도 있습니다. 건강할 수도 있고 병들 수도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성공할 수도 있고 이름 없이 살 수도 있습니다. 외적인 형편이 그의 장자권을 증명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에서의 팥죽 이야기도 한층 깊어집니다. 에서의 문제를 단순히 ‘먹는것을좋아했다’는 데 두어서는 안 됩니다. 팥죽은 눈앞에 있는 즉각적인 자연적 만족입니다. 장자권은 그보다 더 깊고 먼 질서에 속한 것입니다. 따라서 ‘팥죽한그릇에장자권을판다’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 ‘눈앞의자연적만족때문에영적인질서를뒤집어버리는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돈 때문에 양심을 버리는 것, 인정받고 싶은 욕망 때문에 진리를 왜곡하는 것, 교회 성장을 위해 체어리티를 희생하는 것, 교리를 지키겠다는 명분으로 사람을 미워하는 것, 영적 권위를 얻으려다 겸손을 잃는 것, 심지어 ‘장자권을얻겠다’는 열심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고 싶은 욕망에 빠지는 것까지 모두 이 원리 아래에서 성찰할 수 있습니다.
특히 마지막 경우는 역설적입니다. ‘장자권을귀하게여기라’는 가르침을 듣다가 오히려 ‘내가장자가되어야한다’는 자기 우월성에 사로잡힌다면, 장자권을 지키려다가 장자권의 속뜻을 잃어버리는 일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나라에서 첫째가 된다는 것은 다른 사람 위에 서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더 많이 받은 사람은 더 높은 사람이 아니라 더 많이 쓰임을 감당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진리를 더 많이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평가할 권리를 더 많이 받은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먼저 그 진리대로 살아야 할 책임을 더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장자권을 ‘권세’보다 ‘책임’, ‘소유’보다 ‘귀속’, ‘특권’보다 ‘쓰임’으로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장자권’보다 ‘주님의장자권’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내가 첫째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내 안에서 첫째가 되셔야 합니다. 내 신앙이 첫째가 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통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체어리티가 첫째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가인과 아벨 이야기가 다시 연결됩니다. ‘양의첫새끼’를 드린 아벨은 체어리티를 표상합니다. 사용자가 작업한 AC.351 자료에서도 ‘양의첫새끼’가 오직 주님께 속한 것을 상징하며, ‘사랑과거기서비롯된신앙’이 ‘장자’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순서입니다. ‘신앙과거기서비롯된사랑’이 아니라 ‘사랑과거기서비롯된신앙’입니다.
이 차이는 작아 보이지만 사실 장자권 전체를 뒤집습니다. 사람이 처음 거듭날 때에는 ‘신앙에서사랑으로’ 가는 것처럼 경험합니다.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믿고, 그 결과 선을 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관점에서 실제 유입의 질서는 ‘사랑에서신앙으로’입니다.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오고, 그 선으로부터 진리가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전자는 사람에게 ‘나타나는순서’이고 후자는 주님에게서 오는 ‘실제질서’입니다. 이 둘을 구별하지 못하면 신앙이 영원히 장자 자리를 차지하려 하고, 결국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상태, 곧 신앙이 체어리티를 억압하는 교회가 됩니다.
그래서 저는 ‘장자권’이라는 주제가 오히려 ‘스베덴보리의렌즈’로 읽기에 아주 좋은 주제라고 봅니다. 일반적인 설교에서는 장자권을 ‘빼앗기지말아야할복’으로 읽기 쉽지만, 속뜻에서는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가 ‘내안에서무엇이진짜장자인가’를 묻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내가장자인가?’라는 질문마저 내려놓게 합니다. 모든 선과 모든 참된 신앙의 근원이신 주님만이 참된 장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장자권을 회복한다는 것은 ‘내가특별한사람이되는것’이 아닙니다. ‘내안의질서가회복되는것’입니다.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것을 섬기고, 진리가 선을 섬기며, 신앙이 체어리티와 결합하고, 지식이 삶이 되며, 자기 사랑이 쓰임의 사랑 아래 놓이고, 마침내 나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 첫째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루어진다면 장자권이라는 표현을 굳이 사용하든 사용하지 않든 그 사람 안에서는 말씀의 ‘장자권’이 실제로 회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준을 가지고 보면 다음 단계에서 더 민감한 문제가 나타납니다. ‘그렇다면조상의신앙과죄, 부모와자녀, 가문과장자의관계는어떻게보아야하는가?’입니다. 제공된 자막에는 후반부에 한국의 전통적인 제사와 탈상, 장자에게 제사 음식을 먹이는 관습을 이야기하면서 ‘우리나라는장자들이빨리죽는다’는 상당히 강한 주장까지 등장합니다. 이 지점부터는 단순한 ‘장자권의영적의미’ 문제를 넘어 ‘조상의죄와영적영향, 가문의저주, 제사와장자, 세대간영적계승’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훨씬 중요한 분별의 문제가 시작됩니다. 바로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유전악’, 영들의 유입, 인간의 자유, 책임, 섭리를 함께 놓고 보아야 정확히 풀립니다. 3부에서는 이 문제를 집중해서 살펴보겠습니다.
3부
2부 끝에서 저는 이영환 목사의 장자권 가르침이 ‘가문·조상·제사·유전적영적영향’의 문제로 들어간다고 예고했습니다. 그런데 자막의 해당 부분을 더 자세히 확인해 보니, 여기서는 한 가지를 먼저 바로잡아야겠습니다. 이영환 목사는 흔히 일부 영적 전쟁이나 가계치유 계열에서 주장하는 ‘가계의저주’를 오히려 매우 강하게 부정합니다. 그는 부모나 조상의 죄가 오늘의 그리스도인에게 어떤 영적 저주로 계속 이어진다는 주장을 거부하면서, 갈라디아서 3장 13절의 ‘그리스도께서우리를위하여저주를받은바되사율법의저주에서우리를속량하셨다’는 말씀과 고린도후서 5장 17절의 ‘누구든지그리스도안에있으면새로운피조물’이라는 말씀을 근거로 듭니다. 부모가 살아온 문화와 정서가 자녀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것을 ‘조상의죄때문에지금도저주받는다’는 영적 법칙으로 만드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아무리신령하고아무리대단해도가계를저주하면저주부분에서는잘못된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이 부분은 앞서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건전하며, 정확하게 평가해 주어야 합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렌즈’에서도 상당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유전악’이라는 말을 분명히 사용하지만, 이것은 ‘조상이지은특정죄의형벌이후손에게영적저주로전가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유전되는 것은 조상의 죄책 그 자체가 아니라 악으로 기울어지는 성향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사람은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축적된 자연적 성향을 물려받지만, 그 성향 때문에 곧바로 죄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자기 의지로 받아들여 실제 악으로 만들 때 비로소 자신의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집안에이런죄가있었으니나는영적으로묶여있다’, ‘조상이우상숭배를했으므로후손이그저주를끊어야한다’는 식으로 개인의 현재 상태를 조상의 행위와 기계적으로 연결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인간론과도 맞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영환 목사가 ‘삶의공간에서문화와정서는영향을줄수있다’고 구별한 대목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경험적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폭력적인 가정에서 성장하면 폭력적인 반응방식을 배우기 쉽고,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가정에서 성장하면 물질 중심의 가치관을 습득하기 쉽습니다. 반대로 정직과 섬김과 기도가 일상화된 가정에서 성장하면 그러한 삶의 형식들이 마음에 깊이 남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적저주가혈통을타고흐른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전자는 인간의 유전적·심리적·문화적 조건이고, 후자는 조상의 죄책이 후손에게 영적으로 전가된다는 주장입니다. 이영환 목사가 이 둘을 구별하려 한 것은 좋은 지점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더하면 이 문제는 오히려 인간의 자유를 더욱 선명하게 만듭니다. 사람에게 악으로 기울어지는 수많은 유전적 성향이 있다는 사실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을 그 성향 속에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어린 시절부터 선과 진리에 관한 수많은 상태를 사람 안에 보존하시는데, 이것이 우리가 계속 다루어 온 ‘리메인스’입니다. 사람에게 유전악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은밀하게 보존하시는 선과 진리의 상태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성장하여 자유롭게 진리를 받아들이고 악을 죄로 여기며 싸우기 시작할 때, 주님은 그 리메인스를 사용하여 사람을 거듭나게 하십니다. 따라서 인간의 이야기는 ‘조상에게서무엇을물려받았는가’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주님께서내게주시는선과진리에내가어떻게응답하는가’입니다.
이것은 장자권 문제와도 직접 연결됩니다. 만일 영적 저주가 혈통을 따라 자동으로 전달되지 않는다면, 반대로 영적 장자권이나 축복 역시 혈통을 따라 자동으로 전달된다고 말하기 어려워집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가문의저주’를 부정하면서 ‘가문의영적특권’은 자동적으로 계승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양쪽에 같은 원리를 적용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조상의 악 때문에 내가 자동적으로 정죄되지 않는 것처럼 조상의 선 때문에 내가 자동적으로 거듭나는 것도 아닙니다. 부모가 훌륭한 신앙인이었다고 해서 자녀가 자동으로 천국의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며, 반대로 부모가 악한 삶을 살았다고 해서 자녀가 그 때문에 지옥의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은 각 사람을 자유로운 존재로 대하십니다.
그렇다고 부모와 조상의 삶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매우 중요합니다. 다만 그 영향의 방식이 ‘영적신분의자동이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모가 선하게 살면 자녀에게 좋은 환경을 만들어 줄 수 있고, 말씀과 기도와 체어리티의 삶을 보여 줄 수 있으며, 어린 마음에 귀한 리메인스가 형성되는 자연적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부모의 악한 삶은 자녀에게 매우 어려운 자연적 조건을 남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그 자녀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섭리는 그보다 훨씬 깊고 개별적입니다.
여기서 ‘장자’라는 말의 의미도 다시 조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연적 가정에서는 장자가 부모의 유산을 물려받고 가문의 책임을 이어받을 수 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에서도 장자에게 특별한 법적·종교적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그대로 영적 세계에 옮겨 ‘영적인장자도부모의영적권세와축복을상속받는다’고 하면 자연적 질서와 영적 질서를 혼동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자연계의 장자 제도는 영적 실재를 표상하는 하나의 형식입니다. 중요한 것은 형식 자체를 오늘날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형식이무엇을표상했는가’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강의에는 또 하나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 등장합니다. 이영환 목사는 한국의 전통적인 제사문화를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농촌에서 성장하며 실제로 보았던 옛 상례와 제례의 모습을 상당히 생생하게 회상합니다. 특히 탈상 때까지 죽은 이를 위해 밥을 차려 놓고, 그 음식을 장자가 먹던 풍습을 언급하면서 ‘그래서우리나라는장자들이빨리죽어버려요’, ‘조선시대부터장자들이빨리죽어버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어 ‘제사문화는반드시없어져야한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서는 앞의 ‘가계의저주’를 부정한 대목과 달리 상당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입장에서 조상을 신적 존재처럼 섬기거나 죽은 사람에게 종교적인 제의를 드리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과, ‘제사음식을장자가먹었기때문에한국의장자들이빨리죽었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주장입니다. 전자는 신앙과 예배의 대상에 관한 신학적 판단이지만, 후자는 역사적·의학적 인과관계에 관한 주장입니다. 제공된 자막 안에서는 ‘조선시대부터장자들이실제로다른형제보다일찍죽었다’는 통계나 역사적 근거가 제시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대목은 설교자의 어린 시절 경험과 해석을 일반화한 것으로 보는 것이 안전합니다.
더구나 조금 전까지 ‘경험도존재할수없고사람들의논리도존재할수없다’, 결국 진리가 선포하는 것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취지로 가계저주론을 비판했던 논리와도 긴장이 생깁니다. ‘우리집안에이런일이반복되니가계의저주다’라는 경험적 추론을 경계했다면, ‘내가농촌에서이런제사풍습을보았고장자들이일찍죽었다’는 경험 역시 같은 엄격한 기준으로 검증해야 합니다. 이 부분에서는 이영환 목사가 앞에서 세운 좋은 원칙을 자기 자신의 제사문화 해석에도 동일하게 적용했으면 훨씬 더 설득력 있었을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렌즈’에서는 이 문제를 또 다른 방향에서 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 의하면 사람이 죽으면 자연계 어딘가에 머물면서 제삿밥을 받아먹는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은 물질적인 몸을 벗는 것이며, 사람은 영적 몸을 가진 채 영계에서 계속 살아갑니다. 따라서 죽은 조상이 제삿날 집으로 돌아와 차려 놓은 음식을 먹는다거나, 그 음식에 어떤 영적인 기운이 들어가 그것을 먹은 장자에게 죽음의 영향이 전달된다는 식의 사고는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 이해와 맞지 않습니다. 자연적인 음식은 자연계에 속하고 영은 영계의 질서 안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제사 행위의 ‘영적의미’가 전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음식 자체에 어떤 마력이 있느냐가 아니라 ‘그행위를하는사람의애정과의도’입니다. 사람이 죽은 조상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과, 그 조상에게 자신의 운명과 복을 맡기며 종교적인 숭배를 드리는 것은 다릅니다. 부모와 조상을 존경하고 그들의 선한 삶을 기억하는 것은 체어리티의 질서와 충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영을 주님에게 속한 자리에 올려놓고 그에게 복과 화를 좌우하는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핵심은 ‘제삿밥이라는물질’이 아니라 ‘예배와신뢰가누구에게향하고있는가’입니다.
이 구별은 한국 기독교가 제사 문제를 다룰 때도 상당히 중요합니다. 제사를 반대한다면서 조상에 대한 모든 기억과 존경까지 악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면 가족 간 갈등만 커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그냥문화일뿐’이라며 그 행위에 담긴 종교적 의미를 전혀 살피지 않는 것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렌즈’라면 외적인 형식만 보고 판단하기보다 그 형식 안에 있는 ‘애정과목적’을 보려고 할 것입니다. 주님께 돌려야 할 예배가 죽은 인간에게 향한다면 바로잡아야 하지만, 돌아가신 부모를 기억하며 감사하고 가족이 함께 모여 그들의 선한 삶을 되새기는 것까지 같은 범주로 묶을 이유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죽은조상이살아있는후손에게영향을미칠수있는가?’라는 더 미묘한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영들의 유입을 매우 실제적으로 말합니다. 사람의 생각과 애정에는 영계로부터 유입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우리할아버지의영이나를따라다닌다’, ‘우리가문의조상영들이후손에게붙어있다’는 식으로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사람에게 결합되는 영들은 사람이 그들의 개인적 정체를 알아보고 관계를 맺도록 붙어 있는 것이 아니며, 유입은 주님의 섭리 아래 인간의 자유가 보존되는 질서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영계론을 한국적인 ‘조상신’ 개념이나 기독교 일부에서 말하는 ‘가계의영’과 섞어서는 안 됩니다.
이 점에서 오히려 이영환 목사가 ‘가계의저주’를 부정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와 만날 수 있는 중요한 접점입니다. ‘아버지와어머니가무슨죄를지었기때문에내가저주를받는다’는 사고에서 사람을 해방시키려는 방향은 옳습니다. 강의에서 ‘그리스도안에있으면새로운피조물’이라는 말씀을 붙들고 ‘옛것은지나갔다’고 강조하는 것도, 신약의 문자적 의미 안에서는 분명한 복음적 힘이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합니다. ‘새로운피조물’이 된다는 것을 단지 신분의 즉각적인 변경으로만 보지 않고 ‘거듭남’이라는 실제적인 과정으로 봅니다. 주님께 돌아섰다고 해서 오랜 세월 형성된 악한 성향과 습관이 순간적으로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죄책의 전가나 가계저주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지만, 내가 물려받고 스스로 강화해 온 악한 성향과는 평생 싸워야 합니다. 이것은 ‘저주가남아있기때문’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을 자유롭게 거듭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믿었으니가계의저주는끝났다’에서 멈추면 사람은 자기 안의 실제 악을 너무 쉽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조상의죄때문에정죄받는사람이아니지만, 내안에는유전적으로기울어진수많은악의성향이있으며그것이실제악으로나타나지않도록주님앞에서날마다살펴야한다’고 이해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여기에는 두려움이 아니라 책임이 생깁니다. ‘우리집안이원래화를잘내니까어쩔수없다’고 할 수도 없고, ‘조상의분노의영을끊으면된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내가 분노를 악으로 인정하고, 그것이 행동으로 나오려 할 때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피해야 합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반대로 부모가 훌륭한 신앙인이었다고 해서 안심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집안은몇대째목회자집안이다’, ‘우리부모는기도의사람이었다’, ‘우리가문에는장자의복이흐른다’는 사실이 나의 거듭남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장자권 가르침에서 특히 지켜야 할 균형입니다. ‘저주는상속되지않지만복은자동으로상속된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자연적 환경과 영적 기회는 전달될 수 있지만, 사랑과 신앙 자체는 각 사람이 주님에게서 받아 자기 삶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부모가 자녀에게 남겨 줄 수 있는 최고의 영적 유산은 ‘내가받은장자권을네게넘긴다’는 선언보다 훨씬 실제적입니다. 부모 자신이 악을 죄로 여기고 피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 잘못했을 때 자녀에게 사과하는 것, 말씀을 삶보다 앞세우지 않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 어려운 사람을 섬기는 것, 돈과 명예보다 선한 양심을 귀하게 여기는 것, 자녀를 자기 소유가 아니라 주님께 맡겨진 한 사람으로 존중하는 것입니다. 그런 삶 속에서 자녀의 마음에는 수많은 선한 상태가 심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씨앗을 나중에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일은 결국 그 자녀 자신의 자유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보면 ‘가문의회복’이라는 말도 새로운 의미를 얻습니다. 가문의 회복은 어떤 영적 의식을 통해 조상의 저주를 끊는 일이 아니라, ‘나에게서부터악의반복을멈추는것’입니다. 할아버지가 폭력적이었고 아버지도 폭력적이었다면 ‘폭력의영을끊는다’는 선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분노와 폭력을 죄로 여기고 실제 삶에서 그것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집안이 대대로 돈 때문에 싸웠다면 ‘가난의저주’를 끊는 것보다 탐욕과 소유욕을 살피는 것이 먼저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억압해 왔다면 내가 내 자녀에게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는 것이 가문의 영적 질서를 바꾸는 실제적인 시작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거듭남과 훨씬 가깝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지점에서 ‘장자권’이라는 말을 아주 아름답게 다시 사용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내가우리가문의장자가되어복을독점하겠다’가 아니라 ‘내게서부터악의대물림을멈추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장자권’을 직접 이런 문장으로 정의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의 거듭남 교리를 오늘의 가정 문제에 적용한 표현입니다. 내가 먼저 용서하고, 내가 먼저 정직해지고, 내가 먼저 악을 끊고, 내가 먼저 이웃을 섬기며, 내 자녀에게 이전 세대와 다른 선한 환경을 남기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라면 ‘영적장자’라는 표현은 특권이 아니라 매우 무거운 책임을 뜻하게 됩니다.
더 깊게는 그 책임마저 ‘내힘으로우리가문을바꾸겠다’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남의 주체는 주님이십니다. 사람은 ‘마치자기힘으로하는것처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지만, 실제 능력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므로 ‘내가장자니까내가우리집안을구한다’가 아니라 ‘주님께서나부터고쳐주셔서, 나를통하여다음세대에조금더선한길이열리게하신다’가 되어야 합니다. 이때 장자권은 인간의 영적 영웅주의에서 벗어나 주님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로운 협력이라는 질서 안으로 들어옵니다.
결국 이영환 목사의 이 부분에는 ‘함께보존해야할것’과 ‘분별해서내려놓아야할것’이 동시에 있습니다. ‘조상의죄때문에그리스도인이계속저주아래있다’는 가계저주론을 거부하는 것은 보존할 만합니다. 부모의 삶과 문화와 정서가 자녀에게 실제 영향을 미친다는 구별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제사 음식을 장자가 먹었기 때문에 한국 장자들이 일찍 죽었다는 식의 주장은 근거가 충분하지 않으며, 앞서 자신이 가계저주론을 비판할 때 사용한 엄격한 기준과도 잘 맞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렌즈’는 이 둘을 함께 볼 수 있게 합니다. 사람을 심판할 필요도 없고, 한 대목의 오류 때문에 그가 말한 모든 진리까지 버릴 필요도 없습니다. 반대로 좋은 가르침 몇 가지가 있다고 해서 검증되지 않은 주장까지 받아들일 필요도 없습니다. ‘조상의죄책은나의죄책이아니다. 그러나유전된악의성향은실제로존재한다. 그것은저주풀이로없어지는것이아니라주님안에서평생의거듭남을통해질서가바로잡힌다. 부모의선도자동으로나의선이되지는않는다. 나는주님에게서선과진리를직접받아자유롭게살아야한다.’ 저는 이 정도가 이 부분을 통과하는 가장 균형 잡힌 정리라고 봅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4부는 자연스럽게 ‘그러면장자에게주어진복이란도대체무엇인가?’라는 문제로 넘어갑니다. ‘복’을 가정과 자녀와 물질과 사역의 형통으로 읽을 것인지, 아니면 그 자연적 표현들 안에서 더 깊은 영적 실재를 읽을 것인지가 핵심입니다. 이 지점이 이 장자권 가르침을 ‘스베덴보리의렌즈’로 분별할 때 사실상 가장 중요한 고비 가운데 하나입니다.
4부
앞의 3부에서는 이영환 목사가 ‘가계의저주’를 오히려 분명하게 부정한다는 점을 살펴보았습니다. 조상의 죄책이 후손에게 자동으로 넘어오는 것은 아니라는 그의 설명은 스베덴보리의 ‘유전악’ 개념과 구별하면서도 상당 부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4부에서는 장자권 가르침에서 더 중요한 문제, 곧 ‘복’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장자에게 복이 있다는 것은 성경적으로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복을 ‘무엇’이라고 이해하느냐에 따라 장자권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는 이영환 목사의 다른 강의 자료에서 초보적 신앙의 성도가 좋아하는 것을 ‘주일성수, 교회봉사, 물질축복, 행복한가정’ 등으로 설명하면서, 그것을 신앙의 완성으로 보지 않고 이후 죄성과 정욕을 다루는 연단의 과정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대목도 함께 참고할 만합니다. 즉 그의 전체 가르침을 단순히 ‘장자권 = 물질축복’이라고 축소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장자에게 주어지는 복을 생각하면 먼저 ‘두몫’이라는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신명기의 율법에서도 장자는 아버지 소유 가운데 다른 자녀보다 두 몫을 받았습니다. 이삭의 축복을 둘러싼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도 있고,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통하여 요셉이 사실상 두 지파의 몫을 받게 되는 모습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연적 의미에서 ‘장자권’과 ‘더많은몫’이 연결되는 것은 성경에 근거가 있습니다. 문제는 이 자연적인 질서를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그대로 옮겨 ‘영적장자는다른사람보다더많은물질과성공과권세를받는다’는 공식으로 만드는 순간입니다. 그렇게 되면 표상이 가리키는 실재를 보는 대신 표상의 외형을 다시 붙잡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말씀 해석에서 이것은 매우 중요한 원칙입니다. 구약의 토지, 재산, 자녀, 장수, 승리, 풍요는 실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연적인 복이었습니다. 그것을 역사적 사실이 아니었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신적 말씀인 이유는 그 자연적인 사건들 안에 영원하고 천국적인 실재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땅’은 단지 부동산을, ‘곡식과포도주’는 단지 식량과 경제적 풍요를, ‘자손’은 단지 생물학적 후손의 증가를 의미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말씀의 속뜻으로 들어가면 그것들은 선과 진리, 신앙과 체어리티, 교회의 번성, 거듭남에서 생겨나는 영적인 열매들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갑절의복’을 받는다는 것도 반드시 ‘연봉이두배가된다’, ‘사업규모가두배가된다’, ‘자녀가남보다크게성공한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사람 안에서 선과 진리가 풍성해지고, 그것을 이웃의 선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능력과 책임이 커지는 것으로 읽어야 합니다. 주님에게서 더 많은 것을 받았다는 것은 더 많은 것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뜻보다 ‘더많이섬길수있게되었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복 개념과 정반대입니다. 세상은 ‘많이가진사람이복받은사람’이라고 말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천국의 질서에서는 ‘많이흘려보낼수있는사람이복받은사람’입니다. 세상에서는 권한이 커지면 나를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것이 많아지지만, 천국에서는 쓰임이 커집니다. 지혜가 많으면 사람들을 지배할 자격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에게 진리를 나눌 책임이 생깁니다. 재물이 많으면 그것 자체가 높은 영적 상태의 증거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재물을 어떤 애정과 목적으로 사용하는지가 중요해집니다.
그래서 ‘장자의두몫’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다면 ‘두배의특권’보다 ‘두배의쓰임’이라고 읽는 편이 훨씬 안전합니다. 이것은 ‘두몫’의 모든 속뜻을 단순히 ‘쓰임’ 하나로 번역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말씀의 각 문맥마다 상응은 더 정밀하게 살펴야 합니다. 다만 오늘날 우리의 삶에 적용할 때, ‘장자는더받아누리는사람’보다 ‘먼저받아더많이섬기는사람’이라는 방향이 천국의 질서와 훨씬 잘 맞는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물질적인복을구하면안되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연계의 삶을 하찮게 여기지 않습니다. 집이 필요하고, 음식이 필요하고, 건강이 필요하며, 자녀가 평안하기를 바라고,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는 경제적 조건을 구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주기도문에도 ‘오늘우리에게일용할양식을주시옵고’가 있습니다. 문제는 자연적인 복 자체가 아니라 ‘질서’입니다.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것을 섬기느냐, 영적인 것이 자연적인 것을 얻기 위한 수단이 되느냐입니다.
이 차이는 생각보다 큽니다. ‘주님을사랑하니주님께서내사업을잘되게해주실것이다’와 ‘주님께서맡겨주신사업을통하여정직하게일하고사람들에게유익을주며얻은재물을선한쓰임에사용하고싶다’는 말은 겉으로는 모두 신앙과 사업을 연결하지만 안쪽의 방향이 다릅니다. 첫 번째에서는 주님이 나의 성공을 위한 수단이 되기 쉽고, 두 번째에서는 자연적인 사업이 주님의 선을 행하기 위한 수단이 됩니다. 전자는 종교가 자연적 욕망을 섬기는 방향으로 뒤집힐 위험이 있고, 후자는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목적을 섬기는 질서입니다.
바로 이것이 ‘장자권의복’을 분별하는 핵심입니다. 장자권을 배운 뒤 사람이 ‘이제우리가정이잘되고, 자녀가잘되고, 사업이잘되고, 경제적으로형통할것이다’라는 기대를 주로 갖게 된다면, 그 가르침이 아무리 성경 구절을 많이 사용하더라도 그 열매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반대로 장자권을 배운 뒤 ‘나는우리가정에서먼저회개해야겠다’, ‘내가먼저용서해야겠다’, ‘내가가진것을가족과이웃의선을위해사용해야겠다’, ‘자녀를내성공의연장이아니라주님께맡겨진독립된영혼으로대해야겠다’, ‘더많이받기를구하기보다더충실하게쓰임을감당해야겠다’는 방향으로 마음이 움직인다면 그 장자권 가르침은 상당히 다른 열매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자녀의복’은 매우 조심해서 다룰 필요가 있습니다. 부모라면 자녀가 잘되기를 원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건강하고, 좋은 배우자를 만나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지 않고, 사회에서도 인정받으며 살기를 바랍니다. 그것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복이 이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자녀에게 가장 큰 복은 ‘천국에적합한사람이되어가는것’입니다. 정직을 사랑하고, 악을 죄로 여기며, 이웃의 선을 기뻐하고, 자신에게 맡겨진 쓰임을 성실히 감당하며, 궁극적으로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자녀가 세상에서 크게 성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좋은 직장에 들어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건강하게 오래 살 수도 있고 뜻밖의 질병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외적인 사건 하나하나를 ‘장자권의복을받았는가, 잃었는가’를 판단하는 척도로 삼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시작하면 신앙은 필연적으로 결과 중심이 됩니다. 일이 잘되면 ‘하나님이복주셨다’고 하고, 일이 안 되면 ‘내가장자권을놓쳤나’, ‘가정에무슨문제가있나’, ‘신앙이부족한가’를 찾게 됩니다. 그러면 고난당하는 의인과 가난한 성도, 병든 사람을 설명하기 어려워집니다.
스베덴보리의 ‘신적섭리’는 이보다 훨씬 깊습니다. 주님의 섭리는 사람을 이 세상에서 가능한 한 편안하고 성공하게 만드는 것을 최종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궁극적인 목적은 사람을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자연적 성공은 그 사람에게 허용될 수 있고, 어떤 성공은 오히려 막힐 수도 있습니다. 어떤 실패가 사람을 겸손하게 하여 더 깊은 선으로 이끄는 도구가 될 수도 있고, 반대로 큰 성공이 사람의 자기애와 세상 사랑을 키워 영적으로 위험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한 사건만 보고 그 섭리 전체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복 = 형통’이라는 공식은 영적으로 매우 위험합니다. 이 공식이 자리 잡으면 자연스럽게 ‘고난=복없음’이라는 반대 공식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 자신은 세상적인 의미에서 형통한 생애를 사신 분이 아닙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천국의 행복을 자연적인 부와 명예의 확대판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천국의 기쁨은 사랑과 쓰임에서 옵니다. 다른 사람의 선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기쁨, 주님에게서 오는 선이 자신을 통해 흘러간다는 기쁨이 천국의 행복과 연결됩니다.
이 점에서 이영환 목사의 전체 가르침에는 흥미롭게도 ‘번영신학’과 단순히 동일시하기 어려운 요소가 보입니다. 관련 강의에서 그는 초보적인 성도가 ‘물질축복받고행복한가정을꾸리는것’을 좋아한다고 말하면서,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자신의 죄성을 뼈저리게 발견하고 다루는 과정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또 부자 청년 본문을 설명하면서 예수께서 ‘소유를다팔라’고 하신 것을 단지 물질적 재산만이 아니라 사람 안의 ‘정욕, 죄성과정욕이라는소유’까지 내려놓는 문제로 확대합니다. 이것 역시 문자적 본문의 정밀한 속뜻 해석과는 별도로, 자연적인 소유보다 내면의 악을 더 근본적인 문제로 본다는 점에서는 주목할 만합니다.
따라서 이영환 목사의 장자권을 평가하면서 ‘결국돈많이벌고자녀잘되자는이야기’라고 단순화하면 그의 가르침에 있는 중요한 부분을 놓칠 수 있습니다. 그는 분명히 영적 훈련과 죄의 처리, 헌신과 사명도 강조합니다. 오히려 문제는 그 여러 요소들이 ‘장자권’이라는 하나의 틀 안에서 어떻게 결합되느냐입니다. 자연적 축복과 영적 성숙이 함께 언급될 때 무엇이 목적이고 무엇이 수단인지 끝까지 지켜봐야 합니다. 이 구별 하나가 전체 가르침의 방향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렌즈’가 특히 유용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연적인 것을 없애지 않습니다. 자연적인 것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몸도 필요하고, 돈도 필요하고, 가정도 필요하고, 직업도 필요하며, 교회라는 외적 조직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그 안에 영적인 것이 담길 때 제자리를 찾습니다. 자연적인 것은 그릇이고 영적인 것은 그 안의 내용입니다. 그릇을 깨뜨릴 필요는 없지만, 빈 그릇을 내용 자체라고 착각해서도 안 됩니다.
그래서 ‘복된가정’도 새롭게 정의할 수 있습니다. 아무 문제가 없는 가정이 반드시 복된 가정은 아닙니다. 경제적으로 넉넉한 가정이 반드시 복된 가정도 아닙니다. 자녀들이 모두 사회적으로 성공한 가정도 그것만으로는 복된 가정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서로 잘못했을 때 용서를 구할 수 있고, 약한 가족을 버리지 않으며, 돈보다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갈등 속에서도 진리를 따라 자신을 돌아보며, 가족 구성원을 자기 소유물로 대하지 않는 가정이라면 그 안에는 천국의 질서가 조금씩 형성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복된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좋은 배우자, 높은 소득은 감사할 조건일 수 있지만 영적인 복의 척도는 아닙니다. 오히려 자녀가 자기 능력을 남을 누르는 데 쓰지 않고 쓰임에 사용하며, 성공했을 때 교만해지지 않고 실패했을 때 악한 길을 선택하지 않으며,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업신여기지 않고, 진실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성장한다면 부모로서는 그보다 더 큰 복을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고 ‘복된장자’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남들보다 두 몫을 차지한 사람이 아니라 ‘두몫을맡은사람’입니다. 많이 받은 만큼 많이 책임지고, 먼저 깨달은 만큼 먼저 실천하며, 먼저 주님을 알게 된 만큼 아직 알지 못하는 사람을 정죄하기보다 섬기는 사람입니다. 장자의 권위가 있다면 그것은 지배할 권위가 아니라 섬길 책임에서 나오는 권위여야 합니다.
여기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첫째’의 역설이 장자권을 비추는 매우 좋은 빛이 됩니다. 제자들은 누가 큰가를 자주 다투었지만 주님은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에게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장자권에 적용하면 놀라운 전환이 일어납니다. ‘장자이므로첫째다’에서 ‘첫째이므로가장먼저섬긴다’가 됩니다. ‘장자이므로더받는다’에서 ‘더받았으므로더많이내어놓는다’가 됩니다. ‘장자이므로내자녀가복받는다’에서 ‘내가먼저거듭나자녀에게더선한삶을보여준다’가 됩니다.
그리고 이 전환은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가인과 아벨의 문제까지 다시 풀어 줍니다. 가인의 오류는 단순히 ‘신앙이있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우위에 서려 한 것입니다. 먼저 태어난 것이 실제로도 첫째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질서에서는 진리가 선을 섬겨야 하고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겨야 합니다. 따라서 참된 장자권의 회복은 ‘신앙의우월권을회복하는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이 자기 자리를 찾아 체어리티를 섬기는 것입니다.
여기에 AC.351의 ‘양의첫새끼’가 다시 결정적인 빛을 줍니다. 사용자가 작업한 해당 자료에는 ‘처음난것은모두거룩했는데, 이는그것들이오직홀로장자이신주님을가리켰기때문’이며, 이어 ‘사랑과거기서비롯된신앙이장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더욱 결정적인 문장이 뒤따릅니다. ‘모든사랑은주님에게서오는것이며, 인간에게서오는것은조금도없습니다. 그러므로오직주님만이장자이십니다.’
이 한 문장은 인간 중심의 장자권 이해를 근본에서 뒤집습니다. ‘내가장자다’가 최종 진리가 아닙니다. ‘주님이장자이시다’가 최종 진리입니다. 내가 받은 복의 근원도 주님이고, 내가 가진 진리의 근원도 주님이며, 내가 행할 수 있는 선의 근원도 주님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남보다 먼저 무엇을 받았다는 사실은 자랑할 근거가 아니라 감사하고 돌려드릴 이유가 됩니다. 장자의 첫 열매가 여호와께 속했던 것처럼, 내 삶의 첫째도 주님께 속해야 합니다.
이렇게 읽으면 장자권은 ‘성공의신학’에서 ‘헌신의신학’으로, ‘소유의신학’에서 ‘쓰임의신학’으로, ‘가문의특권’에서 ‘거듭남의책임’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저는 이 변화가 이영환 목사의 가르침 안에 있는 좋은 요소들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장자권을 훨씬 안전하게 이해하게 해 준다고 봅니다. 사명을 강조하는 것은 살릴 수 있습니다. 다음 세대를 생각하는 것도 살릴 수 있습니다. 신앙의 유산을 전하자는 열망도 살릴 수 있습니다. 부모가 먼저 바로 서야 한다는 책임도 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의 중심에서 ‘장자인나’가 점점 커지는 것이 아니라 ‘참된장자이신주님’이 점점 커져야 합니다.
결국 ‘장자의복’은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얼마나받았는가?’가 아니라 ‘받은것이내안에서무엇이되었는가?’입니다. 재물이 선한 쓰임이 되었는가, 지식이 지혜가 되었는가, 신앙이 체어리티가 되었는가, 권위가 섬김이 되었는가, 자녀에 대한 사랑이 소유욕이 아니라 그들의 영원한 선을 구하는 사랑이 되었는가, 그리고 내가 받은 진리가 나 자신을 먼저 고치는 진리가 되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그렇게 보면 장자권의 가장 큰 복은 어쩌면 ‘갑절의재산’이 아니라 ‘질서의회복’일 것입니다. 내 안에서 주님이 첫째가 되고, 선이 진리를 다스리며, 체어리티가 신앙의 생명이 되고, 영적인 것이 자연적인 것을 다스리고, 내가 가진 모든 것이 쓰임을 향해 배열되는 것, 이것이 이루어질수록 사람은 천국의 질서에 가까워집니다. 자연적인 형통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지만, 이 질서가 사람 안에 이루어진다면 그는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복을 받은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5부에서는 조금 더 넓게 보겠습니다. 이영환 목사의 ‘장자권’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놓고 ‘무엇은보존할것인가, 무엇은재해석할것인가, 무엇은내려놓아야하는가’를 정리하겠습니다. 특히 ‘장자권이라는별도의교리체계가과연필요한가?’라는 질문까지 들어가 보겠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장자권이 독립된 영적 특권의 교리라기보다 ‘선과진리의질서, 신앙과체어리티의질서, 거듭남과쓰임’이라는 훨씬 큰 질서 안에서 이해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5부에서 이 영상 전체를 종합하겠습니다.
5부
이제 마지막 5부에서는 이영환 목사의 ‘장자권’ 가르침 전체를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보겠습니다. 앞의 네 편에서 우리는 이 가르침 안에 분명히 보존할 만한 요소가 있다는 것과, 동시에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과하면서 상당히 깊게 재해석해야 할 부분도 있다는 것을 함께 보았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결론을 ‘장자권은옳다’ 또는 ‘장자권은잘못되었다’ 가운데 하나로 단순하게 내리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중요한 질문은 ‘성경의장자권이라는표상이궁극적으로우리를어디로데려가는가?’입니다. 이영환 목사의 장자권 가르침이 사람을 주님께 더 가까이 데려가고, 자기 안의 악을 살피게 하며, 받은 진리를 삶으로 옮기고, 가정과 교회와 이웃을 섬기는 쓰임으로 나아가게 한다면 그 안에는 분명 보존해야 할 선한 것이 있습니다. 반대로 장자권이 ‘특별한사람’, ‘특별한가문’, ‘특별한복’, ‘특별한영적권세’를 소유하는 의식으로 굳어진다면 바로 그 지점에서 장자권의 속뜻과 멀어질 수 있습니다.
먼저 이영환 목사의 장자권 가르침에서 긍정적으로 보아야 할 것은 ‘신앙을다음세대에전해야한다’는 강한 책임의식입니다. 영상 마지막까지 ‘장자선교회’라는 이름으로 후원과 교재 보급이 이루어지고 있고, 장자권에 관한 여러 내용을 하나의 교재로 정리하여 평신도들도 배우게 하려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것은 이영환 목사에게 장자권이 단순히 설교를 위한 흥미로운 소재가 아니라 자신의 목회와 사역에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주제임을 보여 줍니다. 이런 열심 자체를 가볍게 볼 필요는 없습니다. 한 세대가 받은 신앙을 자기 세대에서 소비하고 끝내지 않고 다음 세대에 전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오늘날 교회에도 매우 중요합니다.
또 하나 보존할 것은 ‘가계의저주’를 함부로 말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3부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영환 목사는 조상의 죄 때문에 오늘의 그리스도인이 영적인 저주 아래 있다는 주장을 분명히 거부합니다. 부모의 삶과 문화와 정서가 자녀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과 조상의 죄책이 영적으로 후손에게 전가된다는 것을 구별합니다. 이것은 장자와 가문을 강조하는 가르침에서 특히 중요합니다. 가문을 강조하다 보면 쉽게 ‘가문의저주’와 ‘가문의복’이라는 양극단으로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영환 목사의 전체 가르침을 단순한 ‘물질축복론’으로 규정하는 것도 공정하지 않습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 관련 강의에서는 물질 축복과 행복한 가정을 신앙생활의 최종 단계로 보지 않고, 사람이 자기 안의 죄성과 정욕을 발견하고 다루는 더 깊은 과정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 점은 중요합니다. 장자권과 복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곧바로 ‘번영신학’이라는 꼬리표를 붙이면 실제로 그가 말하고 있는 더 넓은 신앙의 구조를 놓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렌즈’에서 가장 먼저 조정해야 할 것은 ‘장자권’이라는 개념 자체의 위치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장자권은 기독교인의 삶 전체를 설명하는 독립된 중심교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말씀 안에 반복해서 나타나는 매우 중요한 ‘표상’이며, 그 표상이 가리키는 것은 궁극적으로 ‘선과진리의우선순위’, ‘사랑과신앙의질서’, 그리고 더 깊게는 주님 자신입니다. 따라서 장자권을 하나의 거대한 교리 체계로 확대하여 성경 전체와 신앙생활 전체를 그 틀로 설명하려 하면, 본래 더 큰 질서를 설명하기 위해 주어진 하나의 표상이 오히려 전체를 지배하는 해석의 틀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성경 주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언약’을 붙들고 성경 전체를 언약 하나로만 읽을 수도 있고, ‘성전’을 붙들고 모든 것을 성전으로 설명할 수도 있으며, ‘영적전쟁’을 중심에 놓고 모든 문제를 귀신과 전쟁으로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각각의 주제에는 분명 성경적 진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의 진리가 다른 모든 진리를 흡수하기 시작하면 균형이 깨집니다. 장자권도 마찬가지입니다. 장자권은 중요하지만, ‘모든것을설명하는열쇠’는 아닙니다. 말씀 전체의 중심은 장자권을 가진 인간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오직주님만이장자이시다’는 설명이 결정적인 기준이 됩니다. 사용자가 작업한 AC 자료에는 ‘처음난것은모두거룩했는데, 이는그것들이오직홀로장자이신주님을가리켰기때문’이며, 이어 ‘사랑과거기서비롯된신앙’이 장자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더욱 결정적으로 ‘모든사랑은주님에게서오는것이며, 인간에게서오는것은조금도없으므로오직주님만이장자이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을 장자권 가르침의 맨 중심에 놓으면 많은 것이 저절로 정리됩니다. ‘내가장자가되는법’보다 ‘주님이내안에서첫째가되시는가?’가 중요해집니다. ‘장자의복을어떻게받을것인가?’보다 ‘내가받은모든선과진리가주님에게서왔음을인정하는가?’가 중요해집니다. ‘장자의권세를어떻게행사할것인가?’보다 ‘내가받은것을어떤쓰임에돌릴것인가?’가 중요해집니다. 장자권의 초점이 인간에게서 주님에게로 이동합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우리가 최근 AC에서 계속 만나 온 ‘가인과아벨’의 문제가 정확하게 들어옵니다. 가인이 먼저 태어났습니다. 외적인 시간의 순서에서는 가인이 장자입니다. 가인은 신앙을 표상하고 아벨은 체어리티를 표상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거듭날 때 경험하는 순서와도 닮았습니다. 사람은 먼저 진리를 배우고 신앙을 형성한 뒤 그것을 따라 살아가면서 체어리티로 나아가는 것처럼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먼저’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 질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위해 존재합니다. 진리는 선을 위해 존재합니다. 사람이 진리를 배우는 목적은 진리에 관한 지식을 축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선하게 살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시간적으로 먼저 나타난 신앙이 자기 자신을 본질적으로도 첫째라고 주장하는 순간 질서가 뒤집힙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은 바로 이 비극을 표상합니다. ‘사랑과분리된신앙’이 자신을 첫째 자리에 놓으면서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장자권 운동을 바라볼 때 매우 중요한 경고가 됩니다. 장자권을 그렇게 열심히 강조하면서도 그 결과 사람이 더 사랑하지 못하고, 더 용서하지 못하고, 더 섬기지 못하며, 오히려 ‘나는특별한영적권리를가진사람’이라는 의식이 강해진다면 무엇인가 잘못된 것입니다. 반대로 장자권을 배운 사람이 ‘내가먼저회개하겠다’, ‘내가먼저용서하겠다’, ‘내가먼저악을죄로여기고피하겠다’, ‘내가먼저가족을섬기겠다’고 한다면 그 가르침은 체어리티를 향하고 있습니다. 결국 나무는 열매로 분별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가문’이라는 말도 다시 볼 수 있습니다. 장자권 가르침에서는 자연스럽게 ‘우리가문’과 ‘다음세대’가 중요해집니다. 이것에는 좋은 면이 있습니다. 현대사회가 지나치게 개인화되면서 신앙도 ‘나와하나님사이의개인적인문제’로 축소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가 자녀에게 영향을 주고, 한 세대의 선택이 다음 세대의 환경을 바꾸며, 내가 받은 선한 것을 다음 사람에게 전해야 한다는 책임의식은 소중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반드시 ‘자유’를 놓습니다. 나의 거듭남을 자녀에게 물려줄 수는 없습니다. 내가 받은 천국의 상태를 유산처럼 자녀에게 넘길 수도 없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좋은 환경을 마련하고 말씀을 가르치며 선한 삶을 보여 주고, 주님께서 그 어린 마음에 귀한 리메인스를 보존하시는 데 자연적 도구가 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그 자녀 역시 자기 자유 안에서 주님을 향하여 돌아서야 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의 유산은 ‘영적신분의상속’이 아니라 ‘거듭남에유리한선한환경과본보기의전달’이라고 하는 편이 훨씬 정확합니다.
이렇게 보면 부모가 자녀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도 달라집니다. ‘너는우리집안의장자권을이어받았다’고 가르치는 것보다 ‘나는주님앞에서이렇게살려고애썼다. 너도사람을두려워하기보다선과진리를사랑하고, 악을죄로여기며, 네게맡겨진쓰임을찾아살아라’고 삶으로 보여 주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부모의 신앙이 진짜였다면 자녀가 물려받아야 할 것은 부모의 영적 지위가 아니라 부모가 사랑했던 ‘선과진리’입니다.
‘복’도 마찬가지입니다. 장자권을 말할 때 자연적인 복이 자꾸 중심으로 올라오면 경계해야 합니다. 건강, 물질, 성공, 자녀의 형통은 감사할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장자권을 가진 사람이라는 증거가 아닙니다. 4부에서 살펴보았듯 스베덴보리의 신적 섭리의 최종 목적은 사람을 자연계에서 가능한 한 성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에게는 성공이 허용되고 다른 사람에게는 실패가 허용될 수도 있습니다. 자연적인 결과만 가지고 주님의 복을 측정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놓치면 장자권 신앙은 매우 고통스러운 역설을 만들 수 있습니다. 열심히 믿었는데 자녀가 잘되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장자권을 붙들고 기도했는데 사업이 망하면 어떻게 합니까? 병이 낫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사랑하는 가족이 일찍 세상을 떠나면 어떻게 합니까? 그때 ‘장자권을제대로행사하지못했다’, ‘믿음이부족했다’, ‘무엇인가영적원리를어겼다’는 설명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복음이 오히려 사람을 짓누르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섭리는 그런 공식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장자권의 ‘두몫’을 오늘의 그리스도인에게 적용한다면 ‘두배의소유’보다 ‘더큰쓰임’으로 읽는 편이 좋다고 봅니다. 먼저 받은 사람은 먼저 섬깁니다. 많이 배운 사람은 많이 가르치기 전에 먼저 많이 살아야 합니다. 재물이 많은 사람은 그만큼 더 넓은 쓰임의 가능성을 갖습니다. 권위가 있는 사람은 더 큰 책임을 집니다. 부모는 자녀보다 먼저 태어났기 때문에 지배자가 아니라 돌보는 사람이 됩니다. 목회자는 성도보다 높은 계급이기 때문에 목회자가 아니라 말씀과 사람을 섬기는 쓰임을 맡았기 때문에 목회자입니다.
그렇게 읽으면 ‘장자’라는 말이 오히려 무거워집니다. 장자가 되려고 경쟁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왜냐하면 장자권이 특권이 아니라 책임이라면 ‘내가장자다’라고 주장하는 것보다 ‘내가먼저섬기겠다’고 하는 것이 장자의 실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천국의 첫째 자리 역시 바로 이런 역설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제사’ 문제 역시 마지막으로 이 기준에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영환 목사가 제사문화를 강하게 비판하는 배경에는 ‘예배의대상은오직하나님이어야한다’는 신앙적 의도가 있습니다. 그 핵심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사음식을먹은장자들이일찍죽었다’는 식의 경험적 주장은 별도로 검증되어야 하며, 신학적 확신과 역사적 인과관계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죽은 조상을 기억하고 존경하는 것과 그들을 예배의 대상으로 삼는 것도 구별합니다. 외적 형식만 보지 않고 그 행위 안의 애정과 목적을 살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영적전쟁’ 역시 장자권과 결합할 때 조심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 천사와 악한 영들의 실재를 매우 분명하게 말합니다. 인간에게 영계로부터 유입이 있다는 것도 말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모든 실패와 질병과 가정 문제를 어떤 특정한 영이나 조상에게 연결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자유가 보존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악한 영이 있다고 해서 ‘내가악을행한책임’을 악한 영에게 넘길 수 없습니다. 선한 천사가 있다고 해서 ‘내가선하다’고 자랑할 수도 없습니다. 선의 근원은 주님이고 악은 인간이 자기 것으로 만든 proprium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장자권의 회복도 어떤 특별한 영적 선언 한 번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거듭남’이라는 긴 과정이 필요합니다. 오늘 진리를 하나 배우고, 그 진리의 빛으로 자기 안의 악 하나를 발견하고, 그것을 죄로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실제로 피하고, 그 자리에 반대되는 선을 행합니다. 그리고 또 넘어지고 다시 일어섭니다. 그렇게 수없이 많은 상태를 지나면서 주님께서 사람의 내적 질서를 조금씩 바꾸십니다.
그러므로 ‘장자권회복’이라는 말을 굳이 스베덴보리식으로 번역한다면 저는 ‘질서의회복’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물론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직접 ‘장자권회복=질서의회복’이라는 용어로 정의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전체 교리를 바탕으로 오늘의 장자권 담론을 재해석한 표현입니다. 내 안에서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것 아래 놓이고, 거짓이 진리에 의해 밝혀지고, 진리가 선을 섬기며, 신앙이 체어리티와 결합하고, 자기애가 쓰임의 사랑 아래 놓이고, 궁극적으로 모든 것이 주님의 통치 아래 배열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장자권’이라는 말을 사용해도 괜찮습니다. 오히려 아주 깊은 말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내가무엇을더받을까?’가 먼저 떠오르느냐, ‘내안에서무엇이첫째가되어야할까?’가 먼저 떠오르느냐입니다. 전자는 자연적인 장자권의 욕망으로 내려가기 쉽고, 후자는 거듭남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영환 목사의 장자권 가르침에서 가장 귀하게 건질 수 있는 부분도 바로 이 방향이라고 봅니다. ‘내세대에서끝내지말자. 다음세대를생각하자. 받은것을전하자. 먼저선사람이책임을감당하자.’ 이런 정신은 버릴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오늘날 개인주의적인 신앙에 필요한 부분도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가문의특별한영적권리’에서 떼어 내고 ‘선과진리를다음세대에삶으로전달하는책임’으로 바꾸면 훨씬 깊어집니다.
그러면 장자선교회의 ‘장자’도 새로운 의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남들과다른특별한장자들이다’가 아니라 ‘우리가먼저들었으니먼저살자’입니다. ‘우리가장자의복을받자’가 아니라 ‘먼저받은만큼먼저섬기자’입니다. ‘우리자녀에게장자권을물려주자’가 아니라 ‘우리자녀가주님을자유롭게선택할수있도록우리가먼저선과진리를살아보여주자’입니다. 이렇게 바뀐다면 장자라는 이름은 우월성의 이름이 아니라 책임의 이름이 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렌즈’가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면서도 가르침을 분별하는 이유가 드러납니다. 이영환 목사의 내면이 어떠한지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오랜 목회 가운데 어떤 사랑으로 장자권을 가르쳤는지, 주님 앞에서 그 사역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도 우리가 최종 판단할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가 말한 내용은 말씀 앞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 안에 진리가 있다면 받아들이고, 자연적 의미에 머문 부분은 영적으로 더 깊게 읽고, 충분한 근거가 없는 주장은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됩니다. 사람을 버리지 않으면서 오류를 분별하고, 오류를 발견했다고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으며, 진리를 발견했다고 그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두 문장을 붙들면 장자권을 지나치게 높일 필요도, 반대로 장자권이라는 성경의 귀중한 표상을 버릴 필요도 없습니다. 장자권은 그 자체가 목적지가 아니라 주님께로 향하게 하는 하나의 표지판이 됩니다. 그 표지판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나의권리’에서 ‘주님의질서’로, ‘나의복’에서 ‘이웃을위한쓰임’으로, ‘내가문의특별함’에서 ‘모든사람을향한주님의섭리’로, ‘신앙의우월성’에서 ‘신앙과체어리티의결합’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자리에서 우리는 다시 아벨의 ‘양의첫새끼’를 만나게 됩니다. ‘처음난것’은 내 것이 아니었습니다. 처음부터 주님의 것이었습니다. 사랑도 주님에게서 오고, 그 사랑에서 살아나는 신앙도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므로 장자권의 완성은 결국 ‘내가장자권을얻었다’는 선언이 아니라 ‘주님, 처음것도마지막것도모두주님의것입니다’라는 고백일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영환 목사의 ‘장자권’이라는 긴 가르침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과하면서 아주 뜻밖의 자리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장자가되어라’에서 출발했지만 마지막에는 ‘참된장자는오직주님이시다’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인간에게 남는 것은 장자의 특권이 아니라 ‘먼저받은만큼먼저사랑하고, 먼저섬기며, 먼저살아내는쓰임’입니다. 저는 바로 그 지점에 이 영상에서 건져 올릴 수 있는 가장 깊고 아름다운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스베덴보리 저작에서 ‘charity’는 우리말 한 단어로 온전히 옮기기 매우 어려운 중요한 용어입니다. ‘자선’이라고 하면 가난한 사람을 돕는 행위로 지나치게 좁아지고, ‘사랑’이라고 하면 감정적인 사랑과 구별하기 어려우며, ‘인애’라고 하면 현대 한국어에서 뜻이 즉시 전달되지 않습니다. ‘이웃사랑’은 상당히 가까운 표현이지만, 이것 역시 charity가 실제 삶과 행위 안에서 나타나는 폭넓은 의미를 언제나 다 담아내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이 번역과 해설에서는 charity를 기본적으로 ‘체어리티’라고 음역하여 사용하고, 그 의미를 문맥에서 풀어 설명합니다.
체어리티의 가장 기본적인 방향은 ‘이웃을향한사랑’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주 ‘주님을향한사랑’(lovetotheLord)과 ‘이웃을향한체어리티’(charitytowardtheneighbor)를 함께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체어리티는 단순히 다른 사람에게 따뜻한 감정을 느끼거나 그 사람을 좋아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웃의 선과 유익을 바라며, 실제 삶에서 그 선을 행하려는 의지와 삶의 방향까지 포함합니다.
따라서 체어리티는 현대 영어의 charity에서 흔히 떠올리는 ‘자선행위’보다 훨씬 넓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주거나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도 체어리티의 한 표현이 될 수 있지만, 체어리티 전체가 그것으로 한정되지는 않습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정직하게 수행하는 것, 다른 사람을 속이지 않는 것, 공정하게 판단하는 것,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 자신의 책임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것, 다른 사람과 공동체의 참된 유익을 생각하며 행동하는 것 역시 체어리티와 연결됩니다.
이 때문에 체어리티를 단순한 ‘착한행동’과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겉으로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게 행동한다고 해서 그 행동의 동기와 목적까지 언제나 선한 것은 아닙니다. 칭찬받기 위해 선을 행할 수도 있고, 자신의 명예나 이익을 위해 누군가를 도울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때로는 이웃의 참된 유익을 위해 그의 잘못을 그대로 용인하지 않는 것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에는 단순한 감정적 친절을 넘어 무엇이 실제로 이웃에게 선한 것인지를 분별하는 진리도 필요합니다.
이 점에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가 중요해집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은 단지 어떤 교리를 사실이라고 인정하는 지적인 동의가 아닙니다. 진리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밝혀 주고, 체어리티는 그 진리가 실제 삶에서 선으로 나타나게 합니다. 그래서 이후 AC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가 끊임없이 다루어집니다. 진리가 삶과 분리되어 머릿속 지식으로만 남아 있으면 아직 살아 있는 신앙이 아니며, 체어리티 역시 진리의 인도 없이 단순한 호의나 감정에 머물러서는 온전한 질서를 이루기 어렵습니다.
AC.9에서 스베덴보리가 특별히 ‘체어리티의일들’(worksofcharity)을 언급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세 번째 상태의 사람은 이제 실제로 회개하기 시작하고,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에 속한 선들을 행합니다. 이것은 분명히 앞선 상태보다 큰 진전입니다. 체어리티가 생각 속의 이상에만 머물지 않고 실제 행위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AC.9의 핵심 문제는 그 사람이 아직 그 선들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한다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AC.9는 ‘체어리티의일을행한다’는 것만으로 거듭남이 완성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사람은 실제로 이웃에게 선을 행하면서도 그 선을 자기 공로로 붙들 수 있습니다. ‘내가저사람을도왔다’, ‘내가이런좋은일을했다’, ‘나는저사람보다사랑이많다’는 생각이 중심에 자리 잡으면 체어리티의 외적인 행위 안에도 proprium이 개입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단계의 선들이 아직 ‘생명이없다’고 말합니다. 선의 참된 생명은 인간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 번째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체어리티의 행위가 아무 의미도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거듭남의 중요한 시작입니다. 사람은 실제로 선을 행하면서 배우고, 자기 안에 섞여 있는 동기들을 발견하며, 점차 선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에서 거듭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마치 자기 자신에게서 하는 것처럼 선을 선택하고 행하는 가운데 그 사람을 이끄십니다.
그래서 체어리티는 한두 번의 특별한 선행보다 삶 전체의 방향과 더 깊이 관련됩니다. 교회에서 봉사하는 시간만 체어리티의 시간이 아니라 가정에서 배우자를 대하는 태도, 직장에서 맡은 일을 처리하는 방식, 돈을 사용하는 태도, 다른 사람의 명예를 다루는 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대하는 자세와 같이 일상의 수많은 선택 속에서 체어리티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체어리티는 삶에서 분리된 종교적 활동 하나가 아니라, 이웃의 선과 유익을 향하도록 삶이 질서 잡혀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번역과 해설에서 영어 charity를 ‘체어리티’라고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뜻을 설명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풍성한 의미를 하나의 한국어 단어로 성급하게 축소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문맥에 따라 ‘이웃을향한사랑’, ‘이웃의선을위한삶’, ‘체어리티의행위’등이 무엇을 뜻하는지 풀어 설명할 수 있지만, 기본 용어 자체는 ‘체어리티’로 유지합니다. 이렇게 해야 이후 AC에서 신앙과 체어리티, 사랑과 체어리티, 선과 진리의 관계가 점점 더 정교하게 전개될 때 동일한 개념의 흐름을 놓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결국 체어리티는 단순한 자선도, 따뜻한 감정도, 외적인 선행만도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받아 이웃의 참된 선과 유익을 바라며 삶으로 행하는 것과 관련됩니다. 그리고 신앙은 바로 이러한 체어리티와 결합할 때 삶 속에서 살아 움직입니다. AC.9에서는 아직 그 선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고 있기 때문에 완성된 상태가 아니지만, 사람이 실제로 체어리티의 일을 행하기 시작했다는 사실 자체는 거듭남의 중요한 진전입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그 사람이 선을 행하는 데서 더 나아가, 그 선의 생명과 근원이 누구에게서 오는지를 배우도록 이끄십니다. (AC.9심화2)
네번째상태는사람이사랑에감동되고신앙으로밝아지는때입니다.그는이전에도경건하게말하고선들을행하기는했지만,그것은그가겪고있던시험과곤경의결과였으며,신앙과체어리티에서나온것은아니었습니다.그러므로이제신앙과체어리티가그의속사람안에서불붙게되며,이것들을두‘광명체’(luminaries)라고합니다. The fourth state is when the man becomes affected with love,and illuminated by faith.He indeed previously discoursed piously,and brought forth goods,but he did so in consequence of the temptation and straitness under which he labored,and not from faith and charity;wherefore faith and charity are now enkindled in his internal man,and are called two “luminaries.”
해설
AC.10은 거듭남의 네 번째 상태를 설명합니다. 첫 번째 상태에서 인간은 아직 혼돈과 공허와 흑암 가운데 있었고, 두 번째 상태에서는 주님께 속한 것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이 구별되기 시작했으며, 세 번째 상태에서는 회개하고 경건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의 일과 같은 선을 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 상태의 사람은 아직 그 선들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네 번째 상태에서는 한층 더 중요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사람은 ‘사랑에감동되고신앙으로밝아지며’, 신앙과 체어리티가 그의 속 사람 안에서 실제로 ‘불붙게’됩니다.
여기서 먼저 주목할 것은 이전 상태에서도 사람이 경건하게 말하고 선들을 행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네 번째 상태에서 비로소 외적으로 선한 행동이 처음 나타난다는 뜻은 아닙니다. 차이는 그 선의 내적인 근원과 상태에 있습니다. 이전에는 시험과 곤경을 지나면서 경건하게 말하고 선을 행했지만, 아직 그것이 신앙과 체어리티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AC.9가 덧붙여 보여 준 것처럼 그는 그 선을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AC.10의 변화는 단순히 ‘악을행하던사람이선을행하게되었다’는 변화가 아니라, 이미 행하고 있던 선이 이제 신앙과 체어리티라는 내적 생명과 연결되기 시작하는 변화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를 먼저 ‘사랑에감동된다’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사랑은 단순히 종교적인 감정이 강해지거나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뜻한다고 볼 필요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선을 외적인 압박 때문에 행하는 데서 점차 벗어나 선 자체에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시험과 곤경이 겉 사람에 속한 것들을 잠잠하게 하는 과정에서 선이 나타났다면, 이제는 속 사람 안에서 사랑과 체어리티가 실제로 활동하기 시작합니다.
동시에 사람은 ‘신앙으로밝아집니다.’신앙은 여기서 단순히 알고 있는 교리나 기억 속의 신앙 지식에 머물지 않습니다. AC.8에서 리메인스로 저장되어 있던 신앙의 지식들이 언급되었고, AC.9에서는 사람이 경건하게 말하고 선을 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AC.10에서는 신앙이 사람을 밝히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진리가 단지 밖에서 주어진 지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속 사람 안에서 실제로 빛의 기능을 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변화의 핵심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 주는 말이 ‘불붙게된다’(enkindled)는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이제 사람의 속 사람 안에서 불붙는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신앙과 체어리티에 생명을 불어넣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선 상태들에서 주님께서는 리메인스를 보존하시고, 겉 사람과 속 사람 사이에 구별이 일어나도록 이끄시며, 사람이 회개하고 선을 행하는 과정을 지나게 하셨습니다. 이제 그 준비 가운데 신앙과 체어리티가 속 사람 안에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이 점에서 AC.9와 AC.10의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AC.9의 사람도 선을 행했습니다. 그러므로 ‘선행이있느냐없느냐’만으로 두 상태를 구별할 수 없습니다. AC.9에서는 사람이 그 선을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아직 생명이 없다고 했습니다. AC.10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속 사람 안에서 불붙습니다. 따라서 거듭남이 깊어진다는 것은 외적으로 선한 행동의 수가 늘어나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 행동의 내적인 생명과 근원이 달라져 가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불붙은 신앙과 체어리티를 두 ‘광명체’(luminaries)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창1:14-18에서 넷째 날에 등장하는 두 큰 광명체와 직접 연결됩니다. 그러나 AC.10은 아직 그 광명체들의 세부적인 상응을 모두 설명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우선 거듭남의 네 번째 상태에서 신앙과 체어리티가 사람의 속 사람 안에서 빛을 발하기 시작하며, 창조 이야기의 두 광명체가 바로 이 내적 변화를 나타낸다는 큰 틀을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세부적인 의미는 이후 해당 절의 해설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 순서는 창세기 1장의 거듭남 구조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빛은 첫째 날에 이미 나타났지만, 해와 달과 별에 해당하는 광명체들은 넷째 날에 나타납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에게도 처음부터 어떤 빛과 신앙의 지식이 주어질 수 있지만, 그것이 곧바로 속 사람 안에서 살아 있는 신앙과 체어리티로 자리 잡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여러 상태를 거치게 하시면서 사람 안의 것을 질서 있게 준비하시고, 마침내 신앙과 체어리티가 내적으로 살아 움직이도록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AC.10에서 말하는 네 번째 상태를 단순히 ‘신앙심이강해지는단계’라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더 중요한 변화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이제 사람의 내적 삶에서 실제로 생명을 가지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선을 단지 해야 하기 때문에 행하는 데서 점차 벗어나 선에 마음이 움직이고, 진리를 단지 알고 있는 데서 더 나아가 그 진리로 밝아지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사랑에감동되고신앙으로밝아진다’고 표현한 변화입니다.
또한 이 상태를 인간의 성취로 읽어서도 안 됩니다. AC.7부터 이어지는 거듭남의 모든 상태에서 주도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인간은 실제로 회개하고, 진리를 배우고, 선을 행하며, 마치 자기 자신에게서 하는 것처럼 자유롭게 움직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신앙과 체어리티에 생명을 주시고 그것들을 속 사람 안에서 불붙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인간은 점차 이 사실을 인정하면서 자기에게 선의 공로를 돌리는 데서 벗어나게 됩니다.
따라서 AC.10의 네 번째 상태는 앞선 세 상태에서 준비되어 온 것이 속 사람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는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리메인스로 저장되어 있던 것, 시험과 곤경 가운데 드러나기 시작한 것, 회개와 선행으로 나타났지만 아직 자기에게 귀속되던 것이 이제 신앙과 체어리티라는 살아 있는 내적 원리로 불붙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것을 창조의 넷째 날에 나타난 두 ‘광명체’로 표현합니다. 이후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상태에서는 이 내적인 생명이 더욱 풍성한 살아 있는 결과들을 낳게 됩니다. (AC.10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