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95 심화

1. 왜 신앙의 생명은 사람을 ‘준비’할 뿐이고, 사랑의 생명이 그를 ‘사람’이 되게 하는가?

 

AC.95의 마지막 문장은 매우 강합니다. ‘신앙의 생명은 그를 준비하지만, 그를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은 사랑의 생명’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신앙만으로는 왜 아직 충분하지 않으며, 왜 사랑의 생명이 그를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일까요?

 

이 말을 신앙의 가치를 낮추는 것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의 생명이 필요 없다고 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이 사람을 ‘준비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준비는 없어도 되는 단계가 아닙니다. 사람의 이해가 진리를 받아들이고, 무엇이 선이며 무엇이 악인지 배우며, 주님과 말씀에 속한 것들을 인정하게 되는 것은 거듭남의 실제 과정에 속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어떤 진리를 이해하고 믿는 것과 그 진리가 그의 의지와 사랑의 생명이 되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무엇이 옳은지 알면서도 그것을 원하지 않을 수 있고, 선을 인정하면서도 실제로는 다른 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때 진리는 이해 안에 있지만 아직 사람의 삶 전체를 움직이는 사랑이 된 것은 아닙니다. 바로 이 점에서 신앙의 생명은 사람을 준비합니다.

 

앞의 AC.83에서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이 될 때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고 사랑이 주된 것이 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AC.95의 ‘사랑의 생명이 그를 ‘사람’이 되게 한다’는 말은 신앙이 없어지고 사랑만 남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이 사랑과 하나를 이루고, 사람이 알고 믿는 진리가 그가 사랑하고 원하는 것과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AC.91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와도 연결됩니다.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할 때 싸움이 그칩니다. 단지 이해로 ‘순종해야 한다’고 아는 것만으로는 싸움이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닙니다. 겉 사람의 바람 자체가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질서와 조화를 이루기 시작할 때 비로소 그 순종은 억지 복종이 아니라 삶이 됩니다. AC.85에서 주님의 뜻이 천적 인간의 ‘바람’이 된다고 했던 것도 이와 연결됩니다.

 

따라서 사랑은 여기서 단순한 감정이 아닙니다. 사랑은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원하며 무엇을 자신의 삶으로 삼는가와 관련됩니다. AC.95가 사랑을 의지와 나란히 놓아 ‘사랑 또는 의지의 생명’이라고 하는 것도 이 점을 보여 줍니다. 진리가 이해 안에서 받아들여지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의지와 사랑 안에서 살아날 때, 그것은 실제 삶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생명은 준비하고 사랑의 생명은 사람을 ‘사람’이 되게 한다’는 말은 신앙과 사랑의 경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거듭남의 질서를 말합니다. 진리는 사람을 준비하고 인도하지만, 마침내 그 진리가 사랑과 의지의 생명이 되어 사람이 그것을 원하고 살아갈 때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룹니다. AC.95가 천적 인간의 겉 사람을 비로소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생명의 질서가 겉 사람에까지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AC.95 심화 1)

 

 

 

AC.95, 창2:7, ‘신앙의 생명은 준비하고, 사랑의 생명은 그를 ‘사람’이 되게 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2:7) AC.95여기서는 겉 사람의 생명을 다룹니다. 앞의 두 절에서는 그의 신앙 또는 이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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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2:7)

 

AC.95

여기서는 겉 사람의 생명을 다룹니다. 앞의 두 절에서는 그의 신앙 또는 이해의 생명을, 이 절에서는 그의 사랑 또는 의지의 생명을 다룹니다. 지금까지 겉 사람은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려 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와 싸워 왔으며, 그러므로 그때의 겉 사람은 ‘사람’(man)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천적 인간이 되면서 겉 사람은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하며, 신앙의 생명과 사랑의 생명으로 그렇게 되어 겉 사람도 ‘사람’(man)이 됩니다. 신앙의 생명은 그를 준비하지만, 그를 ‘사람’(man)이 되게 하는 것은 사랑의 생명입니다. The life of the external man is here treated of—the life of his faith or understanding in the two former verses, and the life of his love or will in this verse. Hitherto the external man has been unwilling to yield to and serve the internal, being engaged in a continual combat with him, and therefore the external man was not then “man.” Now, however, being made celestial, the external man begins to obey and serve the internal, and it also becomes “man,” being so rendered by the life of faith and the life of love. The life of faith prepares him, but it is the life of love which causes him to be “man.”

 

해설

AC.95는 AC.94에서 말한 ‘겉 사람이 생명을 얻음’을 더욱 세밀하게 설명합니다. 그 생명에는 신앙 또는 이해의 생명과 사랑 또는 의지의 생명이라는 두 측면이 있습니다. 앞의 두 절에서는 전자를 다루었고, 이제 이 절에서는 후자를 다룬다고 합니다. 따라서 창2의 이 부분은 단순히 겉 사람이 살아났다는 한 사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이해와 의지, 신앙과 사랑이 어떤 질서로 생명을 얻는지를 보여 줍니다.

 

지금까지 겉 사람이 ‘사람’이 아니었던 이유도 다시 분명해집니다. 겉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려 하지 않고 계속 싸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AC.91에서 처음 분명하게 설명된 속 사람과 겉 사람의 싸움이 여기서 ‘사람’이라는 표현과 직접 연결됩니다. 겉 사람이 속 사람과 올바른 질서 안에 있지 않을 때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아직 ‘사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이 되면서 관계가 달라집니다.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하며, 신앙의 생명과 사랑의 생명으로 생명을 얻습니다. 따라서 AC.94의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는 말은 겉 사람까지 이러한 생명 안에 들어왔다는 뜻이었습니다. 거듭남은 속 사람만 변화시키고 겉 사람을 남겨 두는 일이 아니라, 마침내 겉 사람까지 속 사람과 질서를 이루어 살아나게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AC.95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구별을 하나 더 합니다. ‘신앙의 생명은 그를 준비하지만, 그를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은 사랑의 생명’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신앙이 불필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의 생명은 사람을 준비하는 실제적이고 필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의 완성에서는 신앙이 독립적으로 주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하나를 이루며 사랑이 주된 것이 됩니다. 이것은 AC.83에서 이미 설명한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고 사랑이 주된 것이 된다’는 질서와 정확히 이어집니다.

 

따라서 AC.95의 핵심은 신앙과 사랑 가운데 하나를 버리고 하나만 택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신앙의 생명이 준비하고 사랑의 생명이 그를 ‘사람’이 되게 한다는 질서에 있습니다. 이해에 속한 것이 먼저 준비되고, 마침내 의지와 사랑에 속한 생명이 그 사람의 삶 자체가 될 때 겉 사람도 속 사람과 함께 살아 있는 질서 안에 들어옵니다.

 

이렇게 AC.94와 AC.95를 함께 읽으면 ‘생명의 숨’이 왜 ‘신앙과 사랑의 생명’이라고 했는지도 더욱 분명해집니다. 그것은 단순히 어떤 종교적 지식을 더해 주는 생명이 아니라 사람의 이해와 의지, 신앙과 사랑을 새롭게 하고, 마침내 그의 겉 사람까지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게 하는 생명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의 완성에서 주된 것은 사랑입니다. (AC.95 해설)

 

심화

1. 왜 신앙의 생명은 사람을 ‘준비’할 뿐이고, 사랑의 생명이 그를 ‘사람’이 되게 하는가?

 

AC.95 심화 1, 왜 신앙의 생명은 사람을 ‘준비’할 뿐이고, 사랑의 생명이 그를 ‘사람’이 되게

AC.95 심화1. 왜 신앙의 생명은 사람을 ‘준비’할 뿐이고, 사랑의 생명이 그를 ‘사람’이 되게 하는가? AC.95의 마지막 문장은 매우 강합니다. ‘신앙의 생명은 그를 준비하지만, 그를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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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6, 창2:7, ‘콧구멍과 향기와 퍼셉션, 사랑과 신앙의 생명을 불어넣으심’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2:7) AC.96‘여호와 하나님이 그의 콧구멍에 불어넣으셨다’(Jehovah God breathed into his nostri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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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4, 창2:7,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 - 겉 사람도 살아 있게 되다’ (AC.94-9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And Jehovah God formed man, dust from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ves, and man became a l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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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 심화

3. 왜 셋째 날을 ‘회개의 상태’라고 하는가?

 

AC.29의 문맥을 처음 읽으면 앞에서는 식물 이야기—‘풀’(tender herb), ‘씨 맺는 채소’(herb yielding seed), ‘열매 맺는 나무’(tree bearing fruit)—를 하다가 갑자기 ‘회개의 상태’라는 말이 등장하기 때문에 논리 점프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창1 해석 구조를 보면 이것은 갑작스러운 전환이 아니라 ‘앞 단계에서 준비된 상태의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이 연결을 이해하려면 창1에서 말하는 거듭남의 초기 단계들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창1의 첫 부분을 인간 거듭남의 초기 과정으로 설명하면서 대략 이런 흐름을 말합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완전히 혼돈과 어둠 속에 있습니다. 그다음 진리의 빛이 조금씩 들어옵니다. 그리고 진리와 거짓이 분리되기 시작합니다. 이런 과정을 지나면 사람 안에 ‘진리를 받아들이는 상태’, 곧 식물로 상징되는 단계가 나타납니다. 바로 여기서 ‘풀’과 ‘나무’가 등장합니다. 즉 사람 안에 처음으로 선과 진리의 싹이 나타나는 단계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회개의 상태’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처음으로 진리를 받아들이고 선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할 때 반드시 함께 일어나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상태를 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했던 것들, 자신의 생각과 삶이 괜찮다고 여겼던 것들이 진리의 빛 속에서 다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 순간에 사람은 처음으로 ‘자기 삶을 돌아보고 바꾸려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회개’입니다.

 

여기서 ‘회개’라는 말을 오늘날 흔히 생각하는 의미—큰 죄를 뉘우치며 눈물로 회개하는 사건—으로 이해하면 연결이 어려워집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회개’는 훨씬 더 기본적인 의미입니다. 그것은 ‘자기 삶을 돌아본 후,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보고, 그것을 바꾸려는 의지’입니다. 다시 말해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이 자신의 삶을 그 진리에 맞추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AC.29의 식물 비유와 회개는 실제로 매우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풀’은 사람이 처음으로 진리를 듣고 마음이 움직이는 상태입니다. ‘씨 맺는 채소’는 그 진리가 생각 속에서 자라 다른 진리를 낳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열매 맺는 나무’는 그 진리가 실제 삶 속에서 행동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이렇게 진리에 따라 삶을 바꾸기 시작하는 바로 그 과정이 ‘회개’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식물 단계 전체를 ‘회개의 상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말씀을 듣다가 ‘나는 지금까지 너무 자기중심적으로 살았구나’라는 생각이 처음으로 듭니다. 이것이 풀입니다. 그다음 그는 말씀을 더 배우면서 자신의 행동들을 돌아보기 시작합니다. ‘내가 왜 이렇게 말했을까?’, ‘이 행동은 옳았을까?’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이것이 씨 맺는 채소입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는 실제 행동을 바꾸기 시작합니다. 이전에는 쉽게 화를 냈다면 이제는 참아 보려고 노력합니다. 이전에는 남을 비판했다면 이제는 말을 조심합니다. 이것이 열매 맺는 나무입니다. 바로 이 전체 과정이 회개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AC.29에서 회개가 갑자기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식물의 성장 비유가 바로 회개의 실제 모습’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삶에 적용하기 시작할 때, 그 순간이 바로 회개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회개를 거듭남의 매우 초기 단계로 보고 있습니다. 아직 완전히 거듭난 상태는 아니지만, 사람이 처음으로 ‘자기 삶을 진리의 빛 속에서 고치기 시작하는 단계’이기 때문에 그것을 ‘회개의 상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회개는 어떤 특별한 감정 사건이 아니라, 진리를 알게 된 사람이 ‘자기 삶을 그 진리에 맞추어 바꾸기 시작하는 과정’입니다. 창1에서 식물이 처음 자라는 장면이 바로 그 회개의 시작을 상징한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AC.29 심화 3)

 

 

 

AC.29, 창1:11-13, ‘연한 풀에서 열매 맺는 나무까지 : 회개 안에서 자라나는 거듭남의 셋째 날’

11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12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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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 심화 2, 열매를 맺는데도 왜 아직 ‘생명 없는’ 상태인가?

AC.29 심화2. 열매를 맺는데도 왜 아직 ‘생명 없는’ 상태인가? AC.29을 읽다 보면 조금 이상한 대목을 만나게 됩니다. 셋째 날에는 이미 땅에서 ‘연한 풀’이 돋고, ‘씨 맺는 채소’가 나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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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And God said, Let there be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distinguish between the day and the night; and let them be for signs, and for seasons, and for days, and for years. And let them be for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give light upon the earth; and it was so. And God made two great luminaries, the greater luminary to rule by day, and the lesser luminary to rule by night; and the stars. And God set them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give light upon the earth; (창1:14-17)

 

AC.30

‘큰 광명체들’(great luminaries)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먼저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새로 창조되고 있는 사람들 안에서 신앙이 어떻게 자라 가는지를 알지 않으면 분명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신앙의 본질과 생명은 오직 주님이시며,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생명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친히 요한복음에서 밝히신 바입니다. What is meant by “great luminaries” cannot be clearly understood unless it is first known what is the essence of faith, and also what is its progress with those who are being created anew. The very essence and life of faith is the Lord alone, for he who does not believe in the Lord cannot have life, as he himself has declared in John: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3:36) He that believeth on the son hath eternal life, but he that believeth not on the son shall not see life, but the wrath of God shall abide upon him (John 3:36).

 

[2] 새로 창조되고 있는 사람들 안에서 신앙이 자라 가는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처음에는 그들에게 생명이 없습니다. 생명은 선과 진리 안에만 있고, 악과 거짓 안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다음에 그들은 신앙을 통해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는데, 먼저는 기억에 속한 신앙, 곧 단지 지식에 불과한 신앙인 기억 지식의 신앙을 받습니다. 다음에는 이해에 속한 신앙, 곧 이성적 신앙을 받고, 마지막으로는 마음에 속한 신앙, 곧 사랑의 신앙이며 구원의 신앙을 받습니다. 앞의 두 종류의 신앙은 3절로 13절까지 생명 없는 것들로 표현되며, 사랑에 의해 생명을 얻는 신앙은 20절로 25절까지 생명 있는 것들로 표현됩니다. 이 때문에 여기서는 이제 처음으로 사랑과 거기서 나온 신앙을 다루는데, 이것들이 바로 ‘광명체들’(luminaries)입니다. 사랑은 ‘낮을 다스리는 큰 광명체’(the greater luminary which rules by day)이고, 사랑에서 나온 신앙이 ‘밤을 다스리는 작은 광명체’(the lesser luminary which rules by night)입니다. 이 두 광명체는 하나가 되어야 하므로, ‘광명체들이 있어’(Let there be luminaries, [sit luminaria])라는 라틴어 단수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라틴어 복수 표현인 [sint luminaria]가 아니고 말입니다. The progression of faith with those who are being created anew is as follows. At first they have no life, for it is only in the good and the true that there is life, and none in the evil and the false; afterwards they receive life from the Lord by faith, first by faith of the memory, which is a faith of mere knowledge [fides scientifica]; next by faith in the understanding, which is an intellectual faith; lastly by faith in the heart, which is the faith of love, or saving faith. The first two kinds of faith are represented from verse 3 to verse 13, by things inanimate, but faith vivified by love is represented from verse 20 to verse 25, by animate things. For this reason love, and faith thence derived, are now here first treated of, and are called “luminaries”; love being “the greater luminary which rules by day”; faith derived from love “the lesser luminary which rules by night”; and as these two luminaries ought to make a one, it is said of them, in the singular number, “Let there be luminaries” [sit luminaria], and not in the plural [sint luminaria].

 

[3] 속 사람 안에서의 사랑과 신앙은 겉 사람의 육체적 차원에서의 열과 빛과 같으므로, 전자는 후자로 표현됩니다. 이런 이유로 광명체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set in the expanse of heaven)라고 하는데, 이는 속 사람 안에 놓였다는 뜻입니다. 큰 광명체는 의지 안에, 작은 광명체는 이해 안에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태양의 빛이 그것을 받는 대상 안에서 보이듯이, 의지와 이해 안에서 그렇게 나타날 뿐입니다. 의지를 사랑으로 움직이게 하고, 이해를 진리 또는 신앙으로 비추는 것은 오직 주님의 자비뿐입니다. Love and faith in the internal man are like heat and light in the external corporeal man, for which reason the former are represented by the latter. It is on this account that luminaries are said to be “set in the expanse of heaven,” or in the internal man; a great luminary in its will, and a lesser one in its understanding; but they appear in the will and the understanding only as does the light of the sun in its recipient objects. It is the Lord’s mercy alone that affects the will with love, and the understanding with truth or faith.

 

해설

AC.30은 창세기 1장의 넷째 날, 곧 큰 광명체와 작은 광명체가 나타나는 장면을 설명하기 시작하면서 먼저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묻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넷째 날의 광명체들을 단순히 해와 달의 상징으로 바로 풀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신앙이 무엇이며, 특히 새로 창조되고 있는 사람 안에서 신앙이 어떻게 생명을 얻어 가는지를 먼저 알아야 큰 광명체와 작은 광명체의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출발점에서 매우 강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신앙의 본질과 생명은 오직 주님이시다’라고 합니다. 신앙의 생명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종교적 확신이나 교리 지식에 있지 않고 주님에게 있습니다. 바로 이 명제를 뒷받침하기 위해 요3:36,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를 인용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이 AC.30에 인용된 직접적인 이유는 먼저 ‘달로 상징되는 신앙에는 순종이 포함된다’는 것을 논증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신앙의 생명 자체가 주님과의 관계에 있으며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개역개정의 후반부가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라고 번역되어 있어 신앙과 삶의 순종이 분리될 수 없다는 점도 생각하게 하지만, AC.30은 여기서 그 어휘를 별도로 해설하지 않습니다. 이 구절의 직접적인 초점은 신앙과 생명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데 있습니다.

 

이어서 스베덴보리는 새로 창조되는 사람 안에서 신앙이 자라 가는 세 상태를 구별합니다. 처음은 ‘기억에 속한 신앙’, 곧 단지 지식에 불과한 ‘fides scientifica’입니다. 사람은 말씀과 교리를 배우고 기억하지만 아직 그것이 신앙의 살아 있는 생명이 된 것은 아닙니다. 다음은 ‘이해에 속한 신앙’, 곧 이성적 신앙입니다. 이제 사람은 단지 기억할 뿐 아니라 자신이 배우는 진리를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마지막은 ‘마음에 속한 신앙’, 곧 사랑의 신앙이며 구원의 신앙입니다. 이 마지막 신앙은 사랑에 의해 생명을 얻은 신앙입니다.

 

이 세 단계는 앞에서 지나온 창조의 날들과도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의 두 종류의 신앙이 창1:3-13의 ‘생명 없는 것들’로 표상되고, 사랑에 의해 생명을 얻은 신앙은 창1:20-25의 ‘생명 있는 것들’로 표상된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생명 없는’이라는 말은 기억 지식이나 이해가 무가치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반드시 필요한 준비입니다. 그러나 아직 신앙의 생명이 사랑과 결합하여 살아 움직이는 상태에 이른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AC.29에서 열매까지 나타났는데도 아직 ‘생명 없는 것들’로 표현되었던 이유도 이 문맥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제 AC.30에서 처음으로 사랑과 ‘사랑에서 나온 신앙’이 함께 등장하고, 이것들이 ‘광명체들’이라고 불립니다. 사랑은 낮을 다스리는 ‘큰 광명체’이고, 사랑에서 나온 신앙은 밤을 다스리는 ‘작은 광명체’입니다. 여기서 특별히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단순히 ‘사랑과 신앙’이라고 병렬시키지 않고 ‘사랑과 거기서 나온 신앙’이라고 말한다는 점입니다. 신앙은 사랑과 독립하여 스스로 생명을 가진 별개의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나와 사랑에 의해 생명을 얻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이 두 광명체가 하나를 이루어야 한다는 사실을 스베덴보리는 라틴어 표현에서도 읽어 냅니다. 그는 ‘sit luminaria’라는 단수 표현과 ‘sint luminaria’라는 복수 표현을 의도적으로 대조하면서, 사랑과 신앙이 둘로 분리된 영적 실체가 아니라 하나의 생명 안에서 결합되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큰 광명체와 작은 광명체는 중요도의 차이는 있지만 서로 경쟁하는 두 원리가 아닙니다. 사랑이 주된 것이며, 신앙은 그 사랑에서 나와 그것과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사랑과 신앙의 관계를 자연계의 열과 빛에 비유합니다. 속 사람 안의 사랑은 열과 같고, 신앙은 빛과 같습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둘의 근원과 수용에 있습니다. 광명체가 ‘하늘의 궁창에’ 놓인다는 것은 속 사람 안에 놓인다는 뜻이며, 큰 광명체는 의지 안에, 작은 광명체는 이해 안에 놓입니다. 즉 사랑은 의지와 연결되고 신앙 또는 진리는 이해와 연결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또 하나의 중요한 아르카나가 나옵니다. 사랑과 신앙이 의지와 이해 안에 나타난다고 해서 그것들의 근원이 사람의 의지와 이해라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태양의 빛이 그것을 받는 대상 안에서 보이듯이’ 그것들이 의지와 이해 안에서 나타날 뿐이라고 말합니다. 햇빛이 물체에 비쳐 그 안에서 보이더라도 빛의 근원이 그 물체가 아닌 것처럼, 인간 안에 나타나는 참된 사랑과 신앙의 생명도 인간 자신에게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수동적 그릇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사람은 실제로 사랑하고, 생각하고, 선택하고, 진리에 따라 살아야 하며, 자유 가운데 주님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합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그는 자신이 마치 자기에게서 하는 것처럼 행동하면서도, 그 안의 참된 선과 진리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의지를 사랑으로 움직이게 하고 이해를 진리 또는 신앙으로 비추는 것이 ‘오직 주님의 자비’라는 AC.30 마지막 문장은 바로 이 근원을 분명히 합니다.

 

따라서 넷째 날의 전환점은 단순히 ‘신앙을 더 많이 아는 것’이 아닙니다. 기억 속에 있던 신앙이 이해로 나아가고, 마침내 사랑과 결합하여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과 신앙조차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소유하지 않고, 그 근원이 주님임을 점차 인정하게 됩니다. 앞의 날들에서 준비되었던 모든 것이 이제 사랑이라는 큰 광명체와 사랑에서 나온 신앙이라는 작은 광명체의 빛 아래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AC.30이 넷째 날의 광명체를 설명하기 전에 먼저 신앙의 본질과 성장 과정을 밝히는 이유입니다. (AC.30 해설)

 

심화

1. ‘태양의 빛이 그것을 받는 대상 안에서 보이듯이, 의지와 이해 안에서 그렇게 나타날 뿐’

 

AC.30 심화 1, ‘태양의 빛이 그것을 받는 대상 안에서 보이듯이, 의지와 이해 안에서 그렇게 나타

AC.30 심화1. ‘태양의 빛이 그것을 받는 대상 안에서 보이듯이, 의지와 이해 안에서 그렇게 나타날 뿐’ AC.30 [3]의 ‘그러나 그것들은 태양의 빛이 그것을 받는 대상 안에서 보이듯이, 의지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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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 창1:14-17, ‘해와 달과 별 : 사랑과 신앙의 밝아짐과 어두워짐’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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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 창1:11-13, ‘연한 풀에서 열매 맺는 나무까지 : 회개 안에서 자라나는 거듭남의 셋째 날’

11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12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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