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C.레10 심화

2. 왜 같은 ‘여호와 앞의 불’이 제물은 받고 나답과 아비후는 삼켰을까?

 

레9:24과 레10:2를 나란히 놓으면 놀라운 문장이 반복됩니다. 레9에서는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번제물과 기름을 사르고, 레10에서는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나답과 아비후를 삼킵니다. 왜 같은 주님의 불이 한쪽에서는 예배를 완성하고 다른 쪽에서는 심판처럼 나타날까요?

 

스베덴보리의 상응에서 불은 좋은 의미에서는 신적 사랑을 나타냅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6832(출3:2)는 제단의 거룩한 불을 신적 사랑과 연결합니다. 따라서 레9에서 주님에게서 나온 불이 번제물과 기름을 사르는 것은 주님의 사랑이 참된 예배에 생명을 주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주님의 사랑 자체가 레10에서 갑자기 증오나 분노로 변한 것은 아닙니다. 달라진 것은 불의 근원이 아니라 그것을 만나는 상태입니다. AC.9375(출24:1)는 나답과 아비후가 말씀 이외의 다른 근원에서 나온 교리와 예배를 표상했다고 설명하고, AC.10244(출30:20)는 그들의 예배가 주님을 향한 사랑이 아닌 다른 사랑에서 나온 것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 신학의 중요한 원리와 연결됩니다. 주님에게서 나오는 것은 언제나 선과 사랑과 생명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받는 사람의 상태에 따라 동일한 신적 생명이 다르게 경험됩니다. 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신적 사랑은 기쁨과 생명이 되지만, 그 사랑에 반대되는 상태에서는 그것이 견딜 수 없는 것으로 경험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레9과 레10의 두 불을 ‘좋은 하나님과 화난 하나님’의 변화로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변한 것은 인간의 상태입니다. 레9에서는 주님께서 명하신 질서 안에 놓인 제물이 그 불을 받아 예배가 완성됩니다. 레10에서는 다른 사랑에서 나온 예배가 그 동일한 거룩함과 만납니다.

 

빛도 비슷합니다. 같은 햇빛이 건강한 눈에는 세상을 보게 하지만 심하게 상한 눈에는 고통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태양이 어떤 사람에게는 사랑으로 빛나고 어떤 사람에게는 분노로 빛나는 것이 아니라 빛을 받는 상태가 다른 것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3절의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겠다’는 말씀도 달리 들립니다. 주님의 거룩함은 인간의 상태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주님께 가까이 갈수록 그 거룩함과 조화를 이루는 것과 이루지 못하는 것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래서 레10의 불은 주님의 사랑과 반대되는 별도의 ‘분노의 에너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레9의 불과 근본적으로 같은 신적 사랑의 거룩함 앞에서 무엇이 그 사랑에 속하고 무엇이 다른 사랑에 속하는지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거듭남에서도 일어납니다. 처음에는 자기애가 선처럼 보이고 자기 지혜가 진리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더 가까이 들어올수록 그 안에서 무엇이 주님의 것이고 무엇이 proprium의 것인지 드러납니다. 신적 불은 참된 선을 살리고 다른 불을 드러냅니다.

 

따라서 레9의 불과 레10의 불은 서로 반대되는 두 하나님을 보여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변함없는 한 분 주님의 신적 사랑 앞에서 서로 다른 인간의 상태가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보여 줍니다. 주님의 불은 언제나 사랑의 불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어떤 불을 품은 채 그 사랑 앞에 서는가입니다. (SWC.레10 심화 2)

 

 

 

SWC.레10 심화3, ‘왜 제사장에게 포도주와 독주를 금하셨을까? -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분별한다

SWC.레10 심화3. ‘왜 제사장에게 포도주와 독주를 금하셨을까? -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분별한다는 것’ 나답과 아비후 사건 직후 여호와께서는 아론에게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라고 명하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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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10 심화1, 나답과 아비후의 ‘다른 불’은 정확히 무엇이었을까?

SWC.레10 심화1. 나답과 아비후의 ‘다른 불’은 정확히 무엇이었을까? 나답과 아비후 이야기를 읽으면 가장 먼저 드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도대체 다른 불이 무엇이었기에 두 사람이 즉시 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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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10 심화

1. 나답과 아비후의 ‘다른 불’은 정확히 무엇이었을까?

 

나답과 아비후 이야기를 읽으면 가장 먼저 드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도대체 다른 불이 무엇이었기에 두 사람이 즉시 죽어야 했을까?’ 성경 본문은 그들이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향로에 담아 분향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불이 물리적으로 정확히 어디에서 온 불이었는지보다 스베덴보리는 그 사건이 표상한 영적 의미를 매우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9375(출24:1)는 나답과 아비후를 직접 다룹니다. 그들은 아론의 아들들이므로 말씀에서 나오는 교리를 표상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다른 불’을 가지고 분향한 것은 ‘말씀 이외의 다른 근원에서 나온 교리로 예배를 세우는 것’을 표상했다고 설명합니다. 불은 사랑의 선을, 향은 그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진리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AC.9965(출28:43)는 더욱 직접적입니다. 제단의 불은 신적 사랑, 곧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표상했지만 ‘다른 불’은 지옥에서 나오는 사랑을 표상했다고 설명합니다. AC.10244(출30:20) 역시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로 향을 피운 것은 ‘주님을 향한 사랑이 아닌 다른 사랑에서 나온 예배’를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다른 불’의 핵심은 불의 종류가 아니라 사랑의 근원입니다. 외적으로는 똑같이 향을 피웁니다. 똑같은 성소이고 똑같은 제사장이고 똑같은 향로입니다. 그러나 예배를 움직이는 사랑이 주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인간의 proprium에서 나온다면 영적으로는 전혀 다른 예배가 됩니다.

 

이것은 매우 무서운 동시에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거룩한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일을 움직이는 사랑까지 거룩하다고 보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하면서 명예를 사랑할 수 있고, 봉사하면서 인정받기를 사랑할 수 있으며, 진리를 변호하면서 자기 우월감을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겉의 향은 거룩하지만 속의 불은 다른 불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레9 마지막 장면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레9에서 불은 ‘여호와 앞에서 나왔습니다.’ 인간이 만든 불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불이 번제물과 기름을 사릅니다. 참된 예배의 생명인 사랑은 주님에게서 인간에게 오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 사랑을 받아 다시 주님을 예배합니다.

 

그런데 레10에서 나답과 아비후는 자기들이 불을 가져옵니다. 바로 이 대비가 두 장을 연결합니다. 레9은 ‘주님의 불’이고 레10은 ‘다른 불’입니다. 하나는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 아닌 다른 근원에서 오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불’을 단순히 현대 예배 방식의 차이나 예전의 형식 문제에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찬양 형식이나 예배 순서가 익숙하지 않다고 그것을 ‘다른 불’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본문의 내적 의미와 거리가 멉니다. 핵심은 외적 형식보다 훨씬 깊은 곳, 곧 그 예배를 움직이는 사랑의 근원입니다.

 

레10은 그래서 우리에게 ‘얼마나 뜨겁게 예배하는가?’보다 더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그 뜨거움은 어디에서 오는가?’입니다. 자기애도 뜨겁고 종교적 열광도 뜨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의 불은 오직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입니다. 참된 거듭남은 내 안의 모든 불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어떤 불이 주님의 불이고 어떤 불이 proprium의 다른 불인지를 분별하여,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으로 예배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SWC.레10 심화 1)

 

 

 

SWC.레10 심화2, 왜 같은 ‘여호와 앞의 불’이 제물은 받고 나답과 아비후는 삼켰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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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10,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 - 거룩한 예배를 움직이는 사랑은 어디에서

SWC.레10,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 - 거룩한 예배를 움직이는 사랑은 어디에서 오는가?’ 1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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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9 심화

5. ‘왜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제물을 살랐을까?’

 

레9의 마지막은 장엄합니다. 아론이 모든 제사를 마치고 백성을 축복하고,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 다시 백성을 축복하자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갑자기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제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릅니다. 백성은 그것을 보고 소리 지르며 엎드립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불’만이 아니라 ‘여호와 앞에서 나와’입니다. 제단에는 이미 불이 있었고 제사장들도 제물을 불살랐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 제사의 참된 근원이 어디인지를 보여 주듯 불이 주님에게서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불을 사랑과 매우 깊게 연결합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6832(출3:2)는 불이 좋은 의미에서는 신적 사랑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레6:12-13의 ‘제단의 불은 항상 피워 꺼지지 않게 하라’는 말씀을 직접 인용하면서 그 영속적인 제단 불이 신적 선 자체, 곧 신적 사랑을 표상한다고 밝힙니다.

 

따라서 레9 마지막의 불을 인간의 종교적 열심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이 자기 힘으로 뜨거워져서 제사가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불은 ‘여호와 앞에서’ 나옵니다. 예배에 생명을 주는 사랑의 근원은 인간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이것은 레6의 ‘꺼지지 않는 불’을 한층 더 깊게 이해하게 합니다. 레6에서는 제단의 불을 끄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불은 주님의 영원하고 끊임없는 사랑과 자비를 표상합니다. 레9에서는 이제 그 불의 출처가 명시됩니다. 그 사랑은 인간에게서 시작되어 하나님께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인간에게 내려옵니다.

 

인간이 하는 일도 분명히 있습니다. 제물을 가져오고, 잡고, 피를 뿌리고, 씻고, 제단에 올리고, 규례에 따라 행합니다. 거듭남에서도 인간은 악을 죄로 여겨 피하고, 말씀을 배우고, 선을 행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노력 자체가 영적 생명을 만들어 내지는 못합니다.

 

주님의 사랑이 그 안에 들어올 때 비로소 선은 살아 있는 선이 됩니다. 같은 구제를 해도 자기 명예를 위해 할 수 있고 체어리티에서 할 수 있습니다. 같은 설교를 해도 자기 지식을 보이기 위해 할 수 있고 사람의 영적 선을 위해 할 수 있습니다. 외적 행위가 같아도 그 안에 어떤 ‘불’이 있는지가 다릅니다.

 

따라서 레9의 불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만이 아니라 ‘그 일을 움직이는 불은 어디에서 오는가?’입니다. 자기애와 세상 사랑의 불도 사람을 열심히 움직이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의 불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불이 내려왔을 때 백성은 아론을 칭찬하지 않습니다.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 지르며 엎드렸더라.’ 모든 예배와 모든 쓰임의 마지막 방향이 여기 있습니다. 참된 신적 사랑이 나타날 때 인간의 proprium은 자신을 높이지 않고 주님 앞에 엎드립니다.

 

레8에서 인간의 귀와 손과 발이 준비되었습니다. 레9에서 그 준비된 인간이 실제 쓰임을 행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서 성경은 다시 분명히 합니다. 거듭남을 시작하시고 완성하시며 쓰임에 생명을 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인간은 제물을 제단에 올리지만 불은 여호와 앞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지만 그 선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바로 이것이 레9 마지막 한 절에 담긴 거듭남의 가장 깊은 아르카나입니다. (SW.레9 심화 5)

 

 

 

SWC.레9,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나타나실 것임이니라 - 거듭남이 쓰임이 되고 주님의 영광

SWC.레9,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나타나실 것임이니라 - 거듭남이 쓰임이 되고 주님의 영광이 나타날 때’ 1여덟째 날에 모세가 아론과 그의 아들들과 이스라엘 장로들을 불러다가 2아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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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9 심화4, ‘왜 아론은 제사를 마친 뒤 손을 들어 백성을 축복했을까?’

SWC.레9 심화4. ‘왜 아론은 제사를 마친 뒤 손을 들어 백성을 축복했을까?’ 레9:22에서 아론은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를 모두 마친 뒤 백성을 향하여 손을 들어 축복합니다. 제사장으로 위임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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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6 심화

2. ‘왜 제단의 불은 밤새도록, 끊임없이 꺼지지 않아야 했을까?’

 

레6에서 가장 강렬하게 반복되는 명령은 ‘불을 끄지 말라’는 것입니다. 번제물은 밤새도록 제단 위에 있고, 불은 아침까지 타고 있어야 합니다. 제사장은 아침마다 나무를 더 놓아야 하며, 13절에서는 마침내 ‘불은 끊임이 없이 제단 위에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라’고 선언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스베덴보리의 해설이 놀랄 만큼 직접적입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2177(창18:6)은 레6:13-17을 직접 인용한 뒤, 제단에서 계속 타야 했던 불은 ‘주님의 사랑, 곧 영원하고 영속적인 주님의 자비’를 표상했다고 설명합니다. AC.6832(출3:2) 역시 레6:12-13을 직접 인용하면서 이 영속적인 불이 신적 사랑을 표상했다고 밝힙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처음부터 ‘우리의 신앙 열심을 절대로 식히지 말라’는 명령으로 읽으면 중심이 인간에게 옮겨집니다. 제단의 불이 가장 먼저 나타내는 것은 인간의 사랑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입니다. 꺼지지 않는 것은 우리의 감정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입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의 영적 상태는 끊임없이 변합니다. 뜨거울 때도 있고 차가울 때도 있으며, 밝은 아침 같은 때도 있고 긴 밤 같은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밤이 되었다고 제단의 불까지 꺼지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주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때에도 주님의 사랑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제사장은 ‘아침마다’ 나무를 불 위에 놓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영원하지만 인간에게는 날마다의 응답이 필요하다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어제의 예배로 오늘을 살 수 없고, 십 년 전의 뜨거웠던 체험으로 오늘의 악을 이길 수도 없습니다. 매일 말씀 앞에 서고, 오늘 보이는 악을 피하며, 오늘 행할 선을 행해야 합니다.

 

그래서 거듭남에는 두 방향이 동시에 있습니다. 하나는 위에서 아래로 끊임없이 오는 주님의 사랑과 자비이고, 다른 하나는 그 사랑을 날마다 받아들이고 응답하는 인간의 자유입니다. 전자가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후자가 없다면 주님의 사랑은 우리 안에서 삶이 되지 못합니다.

 

결국 ‘꺼지지 않는 불’은 레6 전체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훔친 것을 돌려주고, 악과 거짓에서 정결하게 되고, 주님의 선을 받아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있는 이유는 그 모든 과정 아래에서 주님의 사랑이 한순간도 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불이 꺼질 때조차 주님의 불은 꺼지지 않습니다. 거듭남은 바로 그 영원한 불에 날마다 다시 자신의 삶을 가져가는 과정입니다. (SWC.레6 심화 2)

 

 

 

SW.레6.심화3, ‘왜 번제의 재까지 거룩하게 다루어야 했을까?’

SW.레6.심화3. ‘왜 번제의 재까지 거룩하게 다루어야 했을까?’ 번제가 모두 타고 나면 남는 것은 재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제사는 끝났고 재는 치워야 할 폐기물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레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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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레6.심화1, ‘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기 전에 이웃에게 먼저 돌려주어야 했을까?’

SW.레6.심화1. ‘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기 전에 이웃에게 먼저 돌려주어야 했을까?’ 레6:1-7에서 가장 눈여겨볼 것은 범죄의 대상입니다. 맡긴 물건을 속이고, 도둑질하고, 착취하고, 잃어버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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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 심화

1. ‘자비’(mercy)와 ‘은혜’(grace)는 어떻게 다른가?

 

AC.19에서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의 영’이 ‘주님의 자비’(the Lord’s mercy)를 뜻한다고 말합니다. 한국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표현이 훨씬 익숙하기 때문에, 스베덴보리 저작에서 반복해서 ‘자비’라는 말을 만나면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더구나 한국어의 ‘자비’가 일상적으로 불교와도 자주 연결되어 사용되기 때문에, 차라리 ‘은혜’라고 번역하면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번역에서는 두 말을 임의로 하나로 합치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사용한 말을 구별해 주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라틴어에서 영어 ‘mercy’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말은 ‘misericordia’입니다. 이것은 긍휼, 자비, 불쌍히 여김과 관련된 말입니다. 따라서 Potts가 이를 ‘mercy’로 옮겼을 때 한국어로 ‘자비’라고 번역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자비’가 반드시 불교적 용어인 것도 아닙니다. 성경과 기독교 전통에서도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는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mercy’를 ‘자비’라고 하는 것은 다른 종교의 개념을 끌어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긍휼하심을 나타내는 기독교적 언어로 읽어야 합니다.

 

반면 ‘grace’는 일반적으로 ‘은혜’라고 번역합니다. 두 말은 서로 매우 가까우며 실제 신앙 언어에서는 겹치는 영역도 많기 때문에 ‘자비는 이것, 은혜는 저것’이라고 완전히 분리된 두 개념처럼 정의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다만 일반적인 뉘앙스에서 ‘mercy’는 비참하고 연약한 상태에 있는 사람을 향한 긍휼과 자비의 측면을 보다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grace’는 값없이 베풀어지는 호의와 은혜의 측면을 보다 자연스럽게 드러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해를 돕는 구별이지 두 단어 사이에 넘을 수 없는 교리적 경계가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AC.19에서는 특히 왜 ‘자비’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지가 본문의 흐름에서 드러납니다. 사람은 아직 혼돈과 공허와 흑암 가운데 있고, ‘깊음’으로 표현되는 욕정과 거짓에 잠겨 있습니다. 아직 빛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상태에서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를 운행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주님의 자비’라고 합니다. 사람이 먼저 선해져서 주님의 관심을 얻은 것이 아니라, 사람이 아직 그런 어두운 상태에 있을 때부터 주님께서 그 안에 선과 진리에 속한 것들을 감추어 보존하시고 그 위에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이런 문맥에서는 ‘자비’라는 말이 AC.19의 장면을 매우 잘 전달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저작에서 ‘주님의 신적 자비로’라는 표현을 반복해서 사용하는 것도 같은 방향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것을 보고 이해하며 인간의 구원과 거듭남에 관한 것을 알게 되는 근원을 자기 지성이나 공로에 돌리지 않고 주님께 돌리는 표현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가 ‘mercy’를 사용하는 모든 곳을 하나의 간단한 공식으로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각각의 문맥에서 그 말이 무엇을 강조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더 깊이 보면 주님의 자비는 주님의 사랑과 떨어진 별개의 속성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타락하고 연약한 인간을 구원으로 이끄시는 그 사랑이 인간의 비참한 상태를 향할 때 우리는 그것을 자비와 긍휼의 언어로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자비’를 단순히 불쌍해서 봐주는 감정 정도로 축소해서도 안 됩니다. AC.19에서 주님의 자비는 실제로 사람 안에 선과 진리에 속한 것들을 보존하고, 그것들 위에서 운행하며, 장차 거듭남에 사용하시는 적극적인 신적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한국어 번역에서는 ‘mercy’를 ‘은혜’로 바꾸어 익숙하게 만들기보다 ‘자비’로 구별하여 두는 편이 좋습니다. 독자에게 처음에는 조금 낯설더라도 AC를 계속 읽으면서 ‘주님의 자비’가 어떤 문맥에서 반복되는지를 경험하면 그 말의 깊이가 점차 드러납니다. ‘grace’가 나오면 ‘은혜’, ‘mercy’가 나오면 ‘자비’라는 기본적인 구별을 유지하되, 둘을 서로 경쟁하는 신학 개념으로 만들지는 않는 것이 좋습니다.

 

AC.19에서 이 차이를 가장 잘 보여 주는 그림은 결국 ‘품으심’입니다. 아직 빛이 나타나기도 전에 주님의 자비는 이미 수면 위를 운행하며, 사람 안에 감추어 보존하신 것들을 품고 있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새 생명을 만들어 내기 전에 주님께서 먼저 그를 떠나지 않고 거듭남을 준비하십니다. 이 장면에서 ‘자비’는 단순한 번역어 하나가 아니라 거듭남이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주님의 역사임을 보여 주는 중요한 말입니다. (AC.19 심화 1)

 

 

 

AC.19 심화 2, ‘move와 brood가 나란히 나오는 이유’

AC.19 심화2. ‘move와 brood가 나란히 나오는 이유’ AC.19의 Potts 영어에는 ‘하나님의 영’이 주님의 자비를 뜻하며, 그 자비가 ‘move’, 또는 암탉이 알을 품듯 ‘brood’한다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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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 창1:2, ‘수면 위를 품으시는 자비 : 리메인스 위에서 시작되는 거듭남’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9‘하나님의 영’(spirit of God)이란 주님의 자비(mercy)를 뜻하며, 이를 가리켜 ‘운행하시니라’(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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