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AC.323

이 장의 끝에서는,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 이와 다르게 생각했던 사람들의 몇 가지 사례를 제시하겠습니다. At the end of the chapter, several examples will be given of those who during their abode in this world had thought otherwise.

 

해설

AC.323은 한 문장으로 된 매우 짧은 글이지만, 앞의 AC.320-322를 마무리하면서 이 장 끝에 나올 실제 사례들을 미리 예고하는 연결고리입니다. 여기서 ‘이와 다르게 생각했던 사람들’이란 앞에서 설명한 사후의 인간 상태를 지상에 있을 때 믿지 않았던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AC.320에서는 사람이 저세상에 들어간 직후에도 자신이 여전히 감각하고 원하고 생각하는 한 사람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AC.321에서는 영의 감각과 사고와 말의 능력이 육체 안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탁월하다고 했으며, AC.322에서는 그것을 시각과 청각, 후각과 촉각, 욕망과 애정, 사고와 언어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으로 설명했습니다. AC.323은 이제 이러한 사실을 지상에서 믿지 않았던 사람들의 사례를 이 장 끝에서 보여 주겠다고 예고합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가 사후세계에 관하여 말하는 방식에서도 주목할 만합니다. 그는 앞의 AC.322에서 자신이 ‘수천 번 반복된 경험’을 통하여 영들의 감각이 육체 안에 있을 때보다 오히려 더 섬세하다는 것을 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사후의 인간을 전혀 다르게 생각했던 사람들이 실제로 저세상에서 무엇을 경험하는지를 사례로 제시하겠다고 합니다. 즉 자신의 설명을 추상적인 교리적 진술에만 머물게 하지 않고 자신이 경험했다고 말하는 구체적인 사례로 이어 가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와 다르게 생각했다’는 것은 단순히 사후세계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다는 뜻으로만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앞의 문맥을 따르면, 사람이 죽은 뒤에도 여전히 온전한 사람으로 살아가며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말한다는 사실, 그리고 이러한 능력들이 육체 안에 있을 때보다 오히려 더 완전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경우까지 포함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323은 또한 AC.320-322가 창세기 4장의 속뜻과 직접 연결된 본문이 아니라, 창4를 시작하기 전에 삽입된 사후세계에 관한 연속 기사라는 사실을 다시 보여 줍니다. 이 짧은 기사는 여기서 일단 멈추지만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창4의 속뜻을 설명한 뒤 장의 끝에서 다시 이 주제로 돌아와, 앞에서 말한 사실들을 믿지 않았던 사람들의 사례를 제시하겠다고 합니다.

 

따라서 AC.323의 역할은 새로운 사후세계 교리를 하나 더 가르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앞의 세 글에서 말한 것을 기억하게 하면서 ‘뒤에서 실제 사례를 통해 다시 확인하겠다’고 약속하는 데 있습니다. AC.320-323을 통해 먼저 붙들어야 할 핵심은 분명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증언에 따르면 육체의 죽음은 인간 존재의 소멸이 아니며, 사람은 사후에도 여전히 감각하고 원하고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이 짧은 사후세계 기사를 잠시 내려놓고, AC.324부터 본격적으로 창세기 4장의 속뜻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AC.324, 창4, 교회에서 분리된 교리들과 에노스라는 새로운 교회 (AC.324-337)

창4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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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2, 창4 앞, 시각과 청각, 후각과 촉각, 욕망과 애정, 사고와 말의 능력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AC.322영들이 육체 안에서 살 때보다 훨씬 더 섬세한 감각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그릇된 생각을 조심해야 합니다. 저는 수천 번 반복된 경험을 통하여 사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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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2 심화

1. 공주농아교회를 생각하며

 

이 글을 읽으면서 반대로 농아(聾啞)인들, 그러니까 못 듣고, 말 못 하는 분들 생각과, 그분들을 대상으로 목회하시는, 저의 친구 목사님 생각이 났습니다. 이 ‘육체적 장애’를 갖고 살아가시는 분들에 대해서 좀 깊이 다루어 주세요.

 

 

AC.322를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농인교회와 농인목회, 그리고 지상에서 듣고 말하는 육체적 기능에 제한을 지닌 채 살아가는 분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실제 한국 교계에서는 오랫동안 ‘농아인교회’, ‘농아목회’라는 명칭을 사용해 왔으므로 그 현장 용어를 존중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분들의 본질을 이해할 때에는 육체적 청각과 음성언어의 제한을 영 자체의 결핍과 혼동하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AC.322의 핵심은 감각 능력이 육체 안에서 나타나기는 하지만 감각하는 생명 자체가 육체에 속한 것은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사람이 육체 안에서 살 때에도 실제로 감각하는 것은 영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지상에서 청각기관의 제한으로 자연적 소리를 듣지 못하거나 음성언어를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사람의 영이나 생각하고 사랑하고 다른 사람과 교통하는 인간적 능력 자체가 결여되어 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보고 듣고 말하는 육체적 기능이 뛰어난 사람을 더 온전한 사람처럼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에서 사람의 본질은 자연적 육체의 기능에 있지 않습니다. 사람은 의지와 이해, 사랑과 생각을 지닌 영적 존재이며, 자연적 육체는 그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활동하는 데 필요한 몸입니다. 그러므로 육체적 장애가 그 사람의 영적 가치나 인간으로서의 온전함을 결정하지 않습니다.

 

이 점에서 AC.322는 농인들의 사후 상태를 생각하는 데에도 중요한 원리를 제공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육체를 벗은 영에게 시각과 청각과 촉각이 있으며, 생각하고 말하는 능력도 지상에서보다 훨씬 더 완전하다고 말합니다. AC.322가 농인의 사후 경험을 별도로 설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원리에 따른다면 지상에서 자연적 청각에 제한이 있었다는 이유로 사후에도 그 사람의 영적 교통 능력이 제한된다고 볼 이유는 없습니다. 육체적 기관의 제한과 영 자체의 능력은 서로 구별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농인은 사후에 비로소 온전해진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농인은 지금 이 땅에서도 온전한 인간입니다. 수어는 부족한 몸짓이 아니라 생각과 감정, 신앙과 예배를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언어입니다. 청인이 음성언어로 말씀을 받고 기도하듯 농인은 수어와 시각적 언어를 통하여 말씀을 받고 기도하며 다른 사람과 깊이 교통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수어로 드리는 기도와 예배를 음성으로 드리는 기도와 예배보다 낮은 것으로 볼 이유가 없습니다.

 

성경에서 ‘듣는다’는 것 역시 육체적 청각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말씀을 영적으로 듣는다는 것은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에 순종하는 것과 연결됩니다. 육체의 귀로 말씀을 듣고도 삶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영적으로 듣지 않을 수 있으며, 자연적 소리를 듣지 못하더라도 말씀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사랑과 삶으로 응답하는 사람은 영적으로 듣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연적 청각과 영적 청각을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말한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교통을 음성을 내는 행위에만 한정할 수 없습니다. 농인이 손과 얼굴과 몸의 움직임으로 수어를 사용할 때 그는 분명히 자신의 생각과 애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오히려 AC.322에서 말하는 인간의 교통이 단순한 육체적 소리에만 의존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하게 합니다. 중요한 것은 소리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서 표현되고 전달되는 생각과 애정입니다.

 

따라서 농인목회도 단순히 청인의 음성 설교를 수어로 옮겨 주는 보조적 사역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농인의 언어와 문화와 삶의 경험 안에서 말씀이 받아들여지고, 공동체 안에서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실제 삶으로 나타나도록 섬기는 온전한 목회입니다. 교회 역시 농인을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아야 할 대상으로만 바라보기보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말씀을 받고 표현하는 같은 교회의 지체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또한 육체적 장애를 개인의 죄나 신앙의 부족과 직접 연결해서는 안 됩니다. 자연계의 몸은 여러 자연적 조건과 원인 아래 놓여 있으며, 육체의 기능만으로 사람의 내적인 상태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사람이 어떤 육체적 조건을 가지고 있는가만이 아니라, 그에게 주어진 조건 안에서 선과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주님과 이웃에게 어떻게 응답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농인을 위해 기도할 때에도 신체적 치유만을 유일한 목표로 삼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치유를 구하는 기도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 먼저 그 사람이 지금도 온전한 인격이며 그의 언어와 삶과 신앙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고립된 사람이 공동체 안에서 교통하고, 배제되던 사람이 한 지체로 받아들여지며, 자신의 언어로 말씀을 받고 주님을 예배할 수 있게 되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한 회복입니다.

 

AC.322의 마지막 말처럼 ‘감각 능력이 어떠하냐에 따라 생명도 그러합니다.’ 이것을 단순히 청력이나 시력 같은 자연적 감각기관의 성능을 평가하는 말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귀가 밝아도 이웃의 아픔을 듣지 못할 수 있고, 자연적 소리를 듣지 못해도 다른 사람의 마음과 필요에 깊이 응답할 수 있습니다. 영적 생명의 깊이는 청력의 수치나 발음의 정확성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받아들이며 주님과 이웃에게 어떻게 응답하는가와 관계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AC.322는 농인에게 ‘언젠가 육체의 제한이 없어질 것이니 지금을 견디라’고만 말하는 글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육체의 귀와 음성을 인간의 온전함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지 말라’고 말하는 글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듣는 것은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참으로 말하는 것은 받은 선과 진리를 자신의 삶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농인교회와 농인목회는 바로 그 영적인 듣기와 말하기가 수어와 공동체의 삶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소중한 교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322, 창4 앞, 시각과 청각, 후각과 촉각, 욕망과 애정, 사고와 말의 능력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AC.322영들이 육체 안에서 살 때보다 훨씬 더 섬세한 감각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그릇된 생각을 조심해야 합니다. 저는 수천 번 반복된 경험을 통하여 사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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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AC.322

영들이 육체 안에서 살 때보다 훨씬 더 섬세한 감각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그릇된 생각을 조심해야 합니다. 저는 수천 번 반복된 경험을 통하여 사실은 그 반대임을 알고 있습니다. 영의 본성에 관하여 미리 형성된 관념 때문에 이것을 믿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저세상에 들어갔을 때 자신의 경험을 통해 배우게 하십시오. 그러면 믿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영들은 시각(sight)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빛 가운데 살기 때문인데, 선한 영들과 천사적 영들, 그리고 천사들은 이 세상의 한낮 정오의 빛으로는 거의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더 밝은 빛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들이 머물며 사물을 보는 그 빛에 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로 이후에 설명하겠습니다. 영들은 또한 청각(hearing)을 가지고 있으며, 그 청각 또한 육체의 청각으로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섬세합니다. 그들은 여러 해 동안 거의 끊임없이 저와 말해 왔습니다. 다만 그들의 말에 관해서도 주님의 신적 자비로 이후에 설명하겠습니다. 그들에게는 후각(the sense of smell)도 있으며, 이에 관해서도 역시 주님의 신적 자비로 이후에 다루고자 합니다. 그들에게는 지극히 섬세한 촉각(a most exquisite sense of touch)이 있습니다. 지옥에서 겪는 고통과 고문도 이 촉각에서 비롯됩니다. 모든 감각은 촉각과 관련되며, 다른 감각들은 단지 촉각의 여러 차이와 다양한 형태일 뿐입니다. 그들은 또한 육체 안에 있을 때 가졌던 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욕망과 애정들을 가지고 있는데, 이에 관해서도 주님의 신적 자비로 이후에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Beware of the false notion that spirits do not possess far more exquisite sensations than during the life of the body. I know the contrary by experience repeated thousands of times. Should any be unwilling to believe this, in consequence of their preconceived ideas concerning the nature of spirit, let them learn it by their own experience when they come into the other life, where it will compel them to believe. In the first place spirits have sight, for they live in the light, and good spirits, angelic spirits, and angels, in a light so great that the noonday light of this world can hardly be compared to it. The light in which they dwell, and by which they see, will of the Lord’s Divine mercy be described hereafter. Spirits also have hearing, hearing so exquisite that the hearing of the body cannot be compared to it. For years they have spoken to me almost continually, but their speech also will of the Lord’s Divine mercy be described hereafter. They have also the sense of smell, which also will of the Lord’s Divine mercy be treated of hereafter. They have a most exquisite sense of touch, whence come the pains and torments endured in hell; for all sensations have relation to the touch, of which they are merely diversities and varieties. They have desires and affections to which those they had in the body cannot be compared, concerning which of the Lord’s Divine mercy more will be said hereafter. Spirits think with much more clearness and distinctness than they had thought during their life in the body.

 

영들은 육체 안에서 살 때보다 훨씬 더 맑고 분명하게 생각합니다. 그들의 생각에 속한 하나의 관념 안에는 이 세상에서 가졌던 천 개의 관념 안에 들어 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이 담겨 있습니다. 그들은 매우 예리하고 섬세하며, 명민하고 분명하게 서로 말합니다. 만일 사람이 그것 가운데 무엇이라도 지각할 수 있다면 크게 놀랄 것입니다. 요컨대 영들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으나, 육체와 뼈, 그리고 그것들에 따르는 불완전함을 제외하면 훨씬 더 완전한 방식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육체 안에서 살 때에도 실제로 감각한 것은 영이었음을 인정하고 지각합니다. 감각 능력이 육체 안에서 나타나기는 했지만, 그것이 육체에 속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육체를 벗어 버리면 감각은 훨씬 더 섬세하고 완전해집니다. 생명은 감각의 활동으로 이루어집니다. 감각이 없다면 생명도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감각 능력이 어떠하냐에 따라 생명도 그러합니다. 이것은 누구나 관찰할 수 있는 사실입니다. There are more things contained within a single idea of their thought than in a thousand of the ideas they had possessed in this world. They speak together with so much acuteness, subtlety, sagacity, and distinctness, that if a man could perceive anything of it, it would excite his astonishment. In short, they possess everything that men possess, but in a more perfect manner, except the flesh and bones and the attendant imperfections. They acknowledge and perceive that even while they lived in the body it was the spirit that sensated, and that although the faculty of sensation manifested itself in the body, still it was not of the body; and therefore that when the body is cast aside, the sensations are far more exquisite and perfect. Life consists in the exercise of sensation, for without it there is no life, and such as is the faculty of sensation, such is the life, a fact that anyone may observe.

 

해설

AC.322는 앞의 AC.321에서 간략하게 제시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펼칩니다. 스베덴보리는 영이 육체를 벗으면 감각을 잃거나 희미한 존재가 된다는 생각을 ‘그릇된 생각’이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수천 번에 걸친 경험을 근거로 오히려 그 반대라고 증언합니다. 영들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접촉하며, 욕망하고 사랑하고 생각하고 말합니다. 더구나 이러한 능력들은 육체 안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섬세하고 완전하다고 합니다.

 

이 설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실제로 감각하는 것은 영’이라는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입니다. 우리는 눈이 보고 귀가 듣는다고 생각하지만,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육체의 감각기관은 자연계의 것을 인간의 내적인 생명에 전달하는 기관입니다. 감각 능력이 육체를 통하여 나타나기는 하지만 감각하는 생명 자체가 육체에 속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육체가 죽는다고 인간의 감각까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적 육체의 제약을 벗으면서 영의 감각은 더욱 섬세하고 완전하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시각을 예로 듭니다. 영들은 빛 가운데 살며, 특히 선한 영들과 천사적 영들, 천사들은 이 세상의 한낮과 거의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밝은 빛 가운데 있다고 합니다. 청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영들과 거의 끊임없이 대화했다고 말하면서, 그들의 청각이 육체의 청각보다 훨씬 섬세하다고 증언합니다. 후각과 촉각 역시 존재하며, 특히 모든 감각이 어떤 의미에서는 촉각과 관계된다는 흥미로운 설명도 덧붙입니다. 다만 이러한 각각의 감각과 영계의 빛과 언어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이후에 하겠다고 여러 차례 예고합니다.

 

여기서 감각만큼 중요한 것이 욕망과 애정입니다. 영들은 육체 안에서 가졌던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한 욕망과 애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후의 인간이 생각만 남은 추상적인 정신적 존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사람의 생명에는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사랑하는가가 본질적으로 포함되어 있으며, 육체의 죽음이 그러한 애정의 생명을 없애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후에도 인간은 감각하고 생각할 뿐 아니라 원하고 사랑하는 사람으로 계속 살아갑니다.

 

사고와 언어에 관한 설명은 더욱 놀랍습니다. 영들의 하나의 관념에는 지상에서 가졌던 천 개의 관념보다 더 많은 것이 들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생각은 훨씬 더 맑고 분명하며, 서로 말할 때에도 예리하고 섬세하며 명민하고 분명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려는 것은 단순히 사후에 머리가 좋아진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계의 육체와 그 제약 안에서 표현되던 인간의 내적인 생각이 영의 상태에서는 훨씬 풍부하고 직접적으로 활동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인상적인 결론을 내립니다. 영들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으나, 육체와 뼈, 그리고 그것들에 따르는 불완전함을 제외하면 훨씬 더 완전한 방식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AC.320부터 계속된 설명의 핵심을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사후의 인간은 지상 인간에게서 무엇인가가 크게 빠져나간 불완전한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이 여전히 보고 듣고 생각하고 말하고 원하고 사랑하는 온전한 사람임을 경험합니다.

 

마지막으로 ‘생명은 감각의 활동으로 이루어진다’는 말은 AC.322 전체를 압축합니다. 여기서 감각은 단순히 육체의 오감만을 뜻한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이 글 전체가 시각과 청각뿐 아니라 욕망과 애정, 사고와 언어까지 함께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받아들이고 느끼고 원하고 사랑하고 생각하며 다른 존재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감각 능력이 어떠하냐에 따라 생명도 그러하다고 말합니다.

 

AC.320-322를 함께 읽으면 하나의 흐름이 선명해집니다. AC.320에서는 사람이 죽은 뒤에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자기 자신으로 살아 있기 때문에 처음에는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AC.321에서는 사후의 감각과 사고와 말의 능력이 오히려 더 탁월하다고 했고, AC.322에서는 그것을 구체적인 감각과 애정과 사고의 경험으로 펼쳐 보였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반복해서 전하려는 것은 분명합니다. 죽음은 인간의 생명이 희미해지는 과정이 아닙니다. 육체를 벗은 뒤에도 인간은 여전히 감각하고 원하고 사랑하고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심화

1. 공주농아교회를 생각하며

 

AC.322 심화 1, 공주농아교회를 생각하며

AC.322 심화1. 공주농아교회를 생각하며 이 글을 읽으면서 반대로 농아(聾啞)인들, 그러니까 못 듣고, 말 못 하는 분들 생각과, 그분들을 대상으로 목회하시는, 저의 친구 목사님 생각이 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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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3, 창4 앞, 사후의 삶을 다르게 생각했던 사람들의 사례를 이 장 끝에서 살펴봅니다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AC.323이 장의 끝에서는,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 이와 다르게 생각했던 사람들의 몇 가지 사례를 제시하겠습니다. At the end of the chapter, several examples will be gi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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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1, 창4 앞, 육체를 벗은 뒤 감각과 사고와 말의 능력은 더욱 뛰어납니다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AC.321두 번째 일반적인 사실은 영이 육체 안에서 살 때보다 훨씬 더 뛰어난 감각 기능을 누리며, 생각하고 말하는 능력 또한 훨씬 더 탁월하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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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AC.321

두 번째 일반적인 사실은 영이 육체 안에서 살 때보다 훨씬 더 뛰어난 감각 기능을 누리며, 생각하고 말하는 능력 또한 훨씬 더 탁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 상태는 거의 비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영들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성찰하는 능력을 허락하시기 전까지는 이 사실을 스스로 깨닫지 못합니다. A second general fact is that a spirit enjoys much more excellent sensitive faculties, and far superior powers of thinking and speaking, than when living in the body, so that the two states scarcely admit of comparison, although spirits are not aware of this until gifted with reflection by the Lord.

 

해설

AC.321은 앞의 AC.320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AC.320에서는 사람이 죽은 뒤에도 자신이 여전히 감각하고 원하고 생각하는 한 사람으로 살아 있기 때문에 처음에는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AC.321에서는 사후의 삶이 단지 지상 삶의 의식이 그대로 계속되는 정도가 아니라, 감각과 생각과 말의 능력에 있어서 육체 안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뛰어나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차이가 ‘두 상태를 거의 비교할 수 없을 정도’라고까지 표현합니다. 이것은 사후의 인간을 희미한 의식이나 그림자 같은 존재로 생각하는 관념과 정반대입니다. 사람이 육체를 벗었다고 해서 감각과 사고가 흐릿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으로서 감각하고 생각하고 말하는 능력이 훨씬 더 탁월해진다는 것입니다. 바로 다음 AC.322에서는 스베덴보리가 이것을 자신의 반복된 경험을 바탕으로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흥미로운 점이 하나 있습니다. 영들 자신은 처음부터 자신들의 능력이 그렇게 달라졌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앞의 AC.320과 연결해서 생각하면 그 이유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죽은 뒤에도 ‘나’라는 의식의 연속성을 경험합니다. 여전히 보고 듣고 생각하고 말하기 때문에 자신이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전보다 자신의 감각과 사고가 훨씬 더 탁월해졌음에도 그것을 당연한 자신의 상태처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영들이 이 사실을 깨닫는 것도 ‘주님께서 그들에게 성찰하는 능력을 허락하실 때’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능력이 향상되었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자기 상태를 돌아보고 그것을 이전 상태와 비교하여 알아차리는 것 역시 주님으로부터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생명의 근원이 자신에게 있다고 느끼기 쉽지만, 스베덴보리에게 모든 생명과 그것을 인식하는 능력의 근원은 주님께 있습니다.

 

AC.320과 AC.321을 함께 놓으면 사후세계에 관한 매우 중요한 그림이 나타납니다. 죽음 이후에도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 계속 살아가며, 그 연속성이 너무 자연스러워 처음에는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 삶은 지상에서보다 희미해진 삶이 아니라, 감각하고 생각하고 말하는 능력에 있어서 오히려 훨씬 더 탁월한 삶입니다. 죽음은 인간의 의식과 인격이 흐려져 사라져 가는 과정이 아니라는 것이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전하는 증언입니다.

 

다만 AC.321에서는 아직 이러한 차이가 왜 생기는지, 각각의 감각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달라지는지까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어지는 AC.322에서 훨씬 구체적으로 다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한 가지를 분명히 붙들면 충분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사후의 인간은 지상의 인간보다 덜 인간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감각과 사고와 말의 능력이 더욱 탁월한 상태에서 계속 살아가는 인간입니다.

 

이 점은 결국 우리가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만일 육체가 죽은 뒤에도 감각하고 생각하고 말하는 인간 자신이 계속 살아가며, 오히려 그러한 능력이 더욱 탁월해진다면 인간의 본질을 자연계의 육체에만 둘 수는 없습니다. AC.321은 그 사실을 긴 논증으로 설명하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영들과 함께하면서 거듭 경험한 하나의 일반적인 사실로 제시합니다. 그리고 다음 AC.322에서는 그 증언을 더욱 구체적인 경험으로 펼쳐 보이게 됩니다.

 

 

 

AC.322, 창4 앞, 시각과 청각, 후각과 촉각, 욕망과 애정, 사고와 말의 능력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AC.322영들이 육체 안에서 살 때보다 훨씬 더 섬세한 감각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그릇된 생각을 조심해야 합니다. 저는 수천 번 반복된 경험을 통하여 사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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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0, 창4 앞,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AC.320-323)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On The Nature Of The Life Of The Soul Or Spirit AC.320영혼(soul)으로서의 삶, 곧 죽은 뒤 처음 영계에 들어가는 신참, 신생 영들(novitiate spirits)의 삶에 관한 일반적인 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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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0 심화

2. ‘자신이 저세상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임종, 그러니까 지상에서 숨을 거두는, 정말 수없이 다양한 케이스가 있습니다. 평안한, 온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쓸쓸히 홀로 고독사하는 사람도 있고... 병원이나 요양원에서 편안하게 떠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교통사고 등 갑작스런 사고사나 전쟁이나 강도, 감옥 형장의 이슬, 혹은 자살 등... 제가 말씀드리고픈 것은 저는 고등학생 때 모친을 교통사고로 잃은 경험이 있는데요, 그러니까 이런 사별의 경험은 정말 선 굵은 인생의 자국을 남기더라는 거죠. 아마 숨을 거두시는 분도 그러지 싶은데... 그런데 어떻게 사후 자기가 죽은지조차 모를 수가 있는 건가요? 모든 게 이어진다면서 말이죠...

 

 

임종, 곧 지상에서 숨을 거두는 모습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온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안히 숨을 거두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도 곁에 없는 가운데 홀로 생을 마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병원이나 요양원에서 오랜 치료 끝에 떠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교통사고나 재난, 전쟁이나 범죄처럼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 역시 고등학생 때 모친을 교통사고로 잃은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 갑작스러운 사별은 남겨진 사람의 삶에 아주 깊고 오래가는 자국을 남깁니다.

 

그래서 AC.320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질문이 생깁니다. 죽음의 모습이 이렇게 다양하고, 어떤 죽음은 너무나 갑작스럽고 충격적인데, 어떻게 죽은 사람이 처음에는 자신이 죽은 사실조차 모를 수 있을까요? 더구나 스베덴보리는 죽음 이후에도 삶과 의식이 이어진다고 말합니다. 모든 것이 이어진다면 사고나 죽음의 순간에 대한 의식도 그대로 이어져야 하는 것 아닐까요?

 

여기서 먼저 구별할 것은 ‘의식의 연속’과 ‘자신이 처한 새로운 상태에 대한 인식’입니다. AC.320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사람이 죽은 뒤에도 자신이 여전히 감각하고, 원하고, 생각하는 한 사람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연속성이 너무나 자연스럽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처음에는 알지 못합니다. 자신에게는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흔히 ‘의식이 끊어지는 사건’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죽은 사람이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즉시 알아야 할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AC.320의 설명은 그 반대입니다. 육체의 생명은 끝났지만 사람 자신은 계속 살아 있기 때문에, 그는 오히려 ‘나는 죽지 않았는데 왜 내가 죽었다고 하는가?’라고 느낄 수 있습니다. 누군가 자신에게 영이라고 말해 주었을 때 놀라고 경이로워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자신은 여전히 감각과 욕구와 생각을 가진 온전한 사람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교통사고나 전쟁, 범죄와 같은 갑작스러운 죽음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AC.320만으로 각각의 경우에 죽은 사람이 정확히 무엇을 경험하는지까지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 항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증언하는 것은 죽음의 방식에 따른 세부 과정이 아니라, 사람이 저세상에 들어가도 자신의 존재와 의식이 계속되기 때문에 처음에는 자신이 저세상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일반적인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특정한 임종의 경우를 상상하여 그 사람이 반드시 이런 순서로 경험할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지상에서 남겨진 사람이 경험하는 ‘죽음’과, 죽은 사람 자신이 경험하는 ‘계속되는 삶’은 서로 다른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겨진 사람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어느 순간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너무나 큰 단절입니다. 특히 갑작스러운 사별은 그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AC.320에서 스베덴보리가 전하는 죽은 사람의 경험은 ‘나는 없어졌다’가 아니라 오히려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입니다.

 

이것은 제가 어린 시절 모친을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떠나보낸 경험을 생각할 때에도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남겨진 저에게 그 사건은 너무나 갑작스러운 단절이었지만, AC.320의 관점에서 생각하면 어머니 자신의 생명까지 그 사고의 순간에 함께 끊어진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그 이후 어머니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경험하셨는지를 제가 알 수 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육체의 죽음이 그분의 존재 자체를 소멸시킨 것은 아니라는 스베덴보리의 증언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저세상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 말은 사람이 죽음이라는 사건을 부정하거나 혼란에 빠져 있다는 뜻으로만 이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AC.320의 초점은 삶의 놀라운 연속성에 있습니다. 사람은 죽었는데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육체는 죽었지만 사람 자신은 계속 살아 있기 때문에 자신이 여전히 살아 있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결국 AC.320은 우리에게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어 줍니다. 지상에 남은 사람에게 죽음은 분명 슬프고 때로는 견디기 어려운 이별입니다. 그 슬픔을 가볍게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증언을 따른다면 그 이별의 순간에 사랑하는 사람의 존재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육체의 죽음 너머에서도 인간은 여전히 생각하고 느끼고 사랑하는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AC.320이 들려주는 첫 번째 사후세계의 소식은 어쩌면 아주 단순합니다. ‘죽음 뒤에도 사람은 살아 있습니다.’

 

 

 

AC.320, 창4 앞,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AC.320-323)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On The Nature Of The Life Of The Soul Or Spirit AC.320 영혼(soul)으로서의 삶, 곧 죽은 뒤 처음 영계에 들어가는 신참, 신생 영들(novitiate spirits)의 삶에 관한 일반적인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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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0, 심화 1, ‘soul’과 ‘spirit’

AC.320.심화 1. ‘soul’과 ‘spirit’ ‘soul’과 ‘spirit’의 차이가 뭔가요? 그리고 적절한 우리말 번역은? AC.320에는 흥미롭게도 ‘soul’과 ‘spirit’이라는 두 단어가 함께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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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0 심화

1. ‘soul’과 ‘spirit’

AC.320에는 흥미롭게도 ‘soul’과 ‘spirit’이라는 두 단어가 거의 나란히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the life of souls’라고 말한 뒤 곧바로 ‘that is, of novitiate spirits’라고 덧붙입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이 문맥에서는 soul과 spirit을 서로 전혀 다른 두 종류의 존재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죽음 이후 계속 살아가는 동일한 인간을 서로 조금 다른 관점에서 표현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일반적으로 soul은 ‘영혼’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특히 AC.320의 ‘the life of souls’에서는 육체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 살아가는 인간의 생명 또는 인간 자신을 포괄적으로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를 단순히 육체 안에 들어 있는 어떤 비물질적 ‘부분’으로 생각하면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말하려는 뜻을 충분히 살리기 어렵습니다. AC.320의 관심은 인간을 육체와 영혼이라는 두 부품으로 나누는 데 있지 않고, 육체가 죽은 뒤에도 인간 자신이 계속 살아간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반면 spirit은 ‘영’으로 옮기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특히 ‘novitiate spirits’는 죽음 이후 처음 영계에 들어간 사람들을 가리키므로 ‘신참, 신생 영들’ 정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그 ‘영’이 지상에서 살던 사람과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바로 AC.320이 이어서 설명하듯 그는 여전히 감각하고, 원하고, 생각하며, 자신을 전과 같은 한 사람으로 경험합니다.

 

그러므로 AC.320의 첫 문장은 ‘영혼이라는 어떤 것이 죽은 뒤 어떻게 되는가’를 추상적으로 설명하는 문장이 아닙니다. 오히려 ‘육체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 살아가는 인간은 처음 영계에서 어떤 상태에 있는가’를 소개하는 문장입니다. ‘soul’이라는 표현으로 사후에 계속되는 인간의 생명을 넓게 제시하고, 곧이어 ‘novitiate spirits’라는 표현으로 지금부터 다룰 대상이 죽음 직후 영계에 들어온 사람들임을 구체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 이해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흔히 ‘영혼’이라고 하면 육체에서 빠져나온 희미한 무엇을 떠올리고, ‘영’이라고 하면 더욱 비현실적인 존재를 상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은 죽은 뒤에도 인간은 인간이라는 사실입니다. AC.320에서도 바로 그 때문에 새로 영계에 들어온 사람이 자신에게 ‘당신은 영입니다’라고 말하면 놀란다고 합니다. 자신은 여전히 감각하고 원하고 생각하며, 전과 마찬가지로 분명히 살아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번역에서는 soul과 spirit의 차이를 완전히 지워 버릴 필요도 없고, 반대로 두 단어 사이에 지나치게 엄격한 존재론적 구별을 세울 필요도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soul은 ‘영혼’, spirit은 ‘영’으로 구별하여 옮기되, 이 문맥에서는 둘 다 육체의 죽음 이후 계속 살아가는 동일한 인간을 가리킨다는 점을 기억하면 됩니다.

 

결국 AC.320에서 더 중요한 질문은 ‘soul과 spirit 가운데 어느 것이 진짜 나인가?’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그보다 훨씬 단순합니다. 육체의 죽음 이후에도 생각하고 사랑하고 느끼며 살아가는 바로 그 사람이 ‘나’입니다. 그래서 죽음은 인간이 사라지고 영이라는 전혀 다른 존재가 생겨나는 사건이 아니라, 육체를 벗은 인간이 자신이 여전히 살아 있는 사람임을 발견하는 사건입니다.

 

 

 

AC.320, 심화 2, ‘자신이 저세상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AC.320.심화 2. ‘자신이 저세상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임종, 그러니까 지상에서 숨을 거두는, 정말 수없이 다양한 케이스가 있습니다. 평안한, 온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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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0, 창4 앞,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AC.320-323)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On The Nature Of The Life Of The Soul Or Spirit AC.320영혼(soul)으로서의 삶, 곧 죽은 뒤 처음 영계에 들어가는 신참, 신생 영들(novitiate spirits)의 삶에 관한 일반적인 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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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On The Nature Of The Life Of The Soul Or Spirit

 

AC.320

영혼(soul)으로서의 삶, 곧 죽은 뒤 처음 영계에 들어가는 신참, 신생 영들(novitiate spirits)의 삶에 관한 일반적인 사항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저는 많은 경험을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저세상(the other life)에 들어가면 그는 자신이 저세상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여전히 이 세상에 있으며, 심지어 아직도 육체 안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상태는 매우 실제적이어서, 누군가 그에게 자신이 영이라고 말해 주면 그는 크게 놀라고 경이로워합니다. 이는 자신이 감각과 욕구, 생각에 있어서 전과 똑같이 한 인간으로 존재함을 발견하기 때문이며, 또한 세상에 살 때에는 영의 존재를 믿지 않았거나, 혹은 어떤 사람들처럼 영이 지금 자신이 경험하는 것과 같은 존재일 수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With regard to the general subject of the life of souls, that is, of novitiate spirits, after death, I may state that much experience has shown that when a man comes into the other life he is not aware that he is in that life, but supposes that he is still in this world, and even that he is still in the body. So much is this the case that when told he is a spirit, wonder and amazement possess him, both because he finds himself exactly like a man, in his senses, desires, and thoughts, and because during his life in this world he had not believed in the existence of the spirit, or, as is the case with some, that the spirit could be what he now finds it to be.

 

해설

AC.320부터 AC.323까지는 창세기 4장의 속뜻으로 들어가기 전에 삽입된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라는 짧은 연속 기사입니다. 앞의 AC.314-319에서 사람이 영생에 들어가는 과정에 관한 여러 경험을 소개했다면, 여기서는 사람이 육체의 죽음 이후 영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실제로 어떤 상태인지를 좀 더 일반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AC.320에서 가장 먼저 주목할 것은 사람이 죽은 뒤에도 자기 존재가 단절되었다고 느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저세상에 들어가면 처음에는 자신이 저세상에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여전히 이 세상에 있으며 심지어 육체 안에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죽음 이후의 삶이 지상의 의식과 전혀 연결되지 않은 낯선 존재 상태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여전히 ‘나’라는 분명한 자각 가운데 계속된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를 스베덴보리는 매우 단순하게 설명합니다. 사람은 죽은 뒤에도 ‘감각과 욕구, 생각’에 있어서 자신이 이전과 똑같이 한 인간임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이 계속되고 있음을 알고, 무엇인가를 원하고 사랑하며, 주변의 것을 경험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영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오히려 놀라게 됩니다. 지상에서는 영을 육체를 잃은 희미한 존재처럼 생각했는데, 실제로 영이 되고 보니 자신이 여전히 온전한 사람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 이해에서 매우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죽음으로 없어지는 것은 사람 자신이 아니라 자연계에서 살아가기 위해 입고 있던 육체입니다. 사람의 생각과 애정, 곧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원하는가 하는 내적인 생명은 육체의 죽음과 함께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 죽음은 ‘존재하던 사람이 없어지고 전혀 다른 존재가 생기는 사건’이 아니라, 사람이 자연계의 육체를 벗고도 여전히 자기 자신으로 살아 있음을 발견하는 사건입니다.

 

특히 AC.320은 우리가 흔히 가지고 있는 ‘영’에 대한 막연한 관념을 돌아보게 합니다. 사람은 영을 눈에 보이지 않는 기운이나 의식만 남은 어떤 것으로 상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증언하는 영은 그렇게 막연한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죽은 사람 자신이 ‘나는 전과 똑같은 사람인데 무엇이 달라졌다는 것인가?’라고 생각할 만큼 자기 존재와 감각과 사고의 연속성을 경험합니다. 이어지는 AC.321-323에서는 이 점이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됩니다.

 

그러므로 AC.320이 우리에게 던지는 중요한 질문은 ‘죽으면 내가 없어지는가?’가 아니라 ‘육체를 벗은 뒤에도 계속 살아가는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입니다. 죽음 이후에도 생각하고 원하고 사랑하는 내가 계속된다면, 지금 무엇을 사랑하며 어떤 내적인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가는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AC.320 자체의 초점은 아직 사후의 심판이나 천국과 지옥의 결정에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먼저 확실하게 말하려는 것은 훨씬 기본적인 사실입니다. 육체의 죽음으로 인간의 의식과 인격이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은 자신이 여전히 살아 있으며 여전히 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AC.320은 이후 이어질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 설명으로 들어가는 하나의 문과 같습니다.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은 희미하고 추상적인 상태로 존재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이 여전히 보고 느끼고 원하고 생각하는 ‘나’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죽음은 삶의 소멸이 아니라, 사람이 육체를 벗은 뒤에도 자신의 생명이 계속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경계입니다.

 

심화

1. ‘soul’과 ‘spirit’

 

AC.320, 심화 1, ‘soul’과 ‘spirit’

AC.320.심화 1. ‘soul’과 ‘spirit’ ‘soul’과 ‘spirit’의 차이가 뭔가요? 그리고 적절한 우리말 번역은? AC.320에는 흥미롭게도 ‘soul’과 ‘spirit’이라는 두 단어가 함께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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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자신이 저세상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AC.320, 심화 2, ‘자신이 저세상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AC.320.심화 2. ‘자신이 저세상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임종, 그러니까 지상에서 숨을 거두는, 정말 수없이 다양한 케이스가 있습니다. 평안한, 온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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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1, 창4 앞, 육체를 벗은 뒤 감각과 사고와 말의 능력은 더욱 뛰어납니다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AC.321두 번째 일반적인 사실은 영이 육체 안에서 살 때보다 훨씬 더 뛰어난 감각 기능을 누리며, 생각하고 말하는 능력 또한 훨씬 더 탁월하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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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9, 창3 뒤, ‘두 번째 사례’

사람이 영생에 들어감에 관하여 (계속) AC.319 나는 또 다른 한 사람도 보았는데, 그는 천사들에 의해 곧바로 천국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는 주님께 받아들여졌고, 천국의 영광을 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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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5 심화

1. ‘태고 시대’

 

AC.45에는 ‘태고 시대’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처음 읽는 독자라면 이 말을 듣고 자연스럽게 석기 시대, 동굴 생활, 돌도구, 사냥과 채집 같은 모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곧 의문이 생깁니다. ‘그렇게 원시적인 시대의 사람들이 어떻게 이해와 의지의 상태를 동물로 표현할 만큼 깊은 영적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려면 먼저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사용하는 ‘태고 시대’와 현대의 역사학·고고학에서 사용하는 시대 구분을 그대로 같은 것으로 놓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현대의 선사시대 구분은 주로 도구, 생활 방식, 유물과 같은 자료를 바탕으로 이루어집니다. 반면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에서 태고 시대를 말할 때 스베덴보리의 주된 관심은 그러한 기술사적 분류가 아니라 ‘태고교회’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영적 상태입니다.

 

따라서 ‘태고 시대 사람들은 영적으로 깊었다’는 말을 ‘석기 시대에 살았던 모든 사람이 높은 영적 상태에 있었다’는 주장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AC.45도 그런 역사학적 주장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태고교회와 관련하여 설명하는 사람들의 내적 상태와 표현 방식입니다. 이 둘을 구별해 두면 현대 고고학과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불필요하게 정면충돌시키지 않고 그의 글이 실제로 무엇을 말하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특별히 돌리는 특징 가운데 하나가 ‘퍼셉션’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사람이 무엇이 선하고 참인지 교리와 지식을 통해 배우고 양심에 따라 판단하는 방식과는 다른 내적인 지각을 가리킵니다. AC를 계속 읽으면 태고교회와 퍼셉션의 관계가 훨씬 자세하게 설명됩니다. 따라서 AC.45의 ‘태고 시대 사람들’이라는 표현도 그러한 전체 문맥 안에서 읽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동물들을 가지고 이해와 의지에 속한 것을 표현했다는 말은 무엇일까요? AC.45가 직접 말하는 것은 태고 시대 사람들이 그렇게 ‘상징으로 표현했다’는 사실이며, 그와 같은 표현이 이후 선지서들과 구약 말씀 전체에도 계속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그들의 구체적인 언어생활이나 의사소통 방식을 상상하여 복원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은 추상어가 없어서 동물 그림으로 말했던 원시인들’이라는 뜻도 아니고, 반대로 모든 태고교회 사람이 오늘날의 신학자보다 더 많은 교리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지식의 양’과 ‘영적 상태의 깊이’를 같은 척도로 재지 않는 것입니다. 현대인은 자연과학, 역사, 언어, 기술에 관해 과거 사람이 알지 못했던 엄청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현대인이 그만큼 더 깊은 퍼셉션을 가지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반대로 스베덴보리가 태고교회의 높은 영적 상태를 말한다고 해서 그들이 현대 과학과 기술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뜻도 아닙니다. 두 종류의 ‘앎’을 구별해야 합니다.

 

이 구별은 앞으로 AC를 읽는 데 상당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류의 역사를 단순히 ‘옛날에는 무지했고 오늘날은 발전했다’는 한 방향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자연적인 지식과 문명이 발전할 수 있는 것과, 인간의 내적 상태가 주님을 향해 얼마나 열려 있는가는 서로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의 저술에서 태고교회가 높은 상태로 묘사되는 것을 현대의 기술 발전에 대한 부정으로 읽을 필요도 없습니다.

 

또 하나 주의할 것은 태고교회를 낭만적인 ‘완전무결한 황금시대’로 만드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이하와 AC의 설명을 따라가면 바로 그 태고교회 안에서도 인간의 proprium이 강해지고 질서가 무너지는 과정이 나타납니다. 따라서 ‘태고 시대=모든 사람이 완전했던 시대’라는 식으로 이해하면 이후의 설명과 맞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높이 평가하는 것은 특별히 태고교회의 초기 상태와 그들에게 있었던 천적인 성질과 퍼셉션이지, 아주 먼 옛날이라는 시간 자체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AC.45에서 ‘태고 시대’를 만났을 때 ‘석기 시대와 어떻게 맞지?’라는 질문에 너무 오래 붙잡힐 필요는 없습니다. 먼저 이렇게 구별하면 충분합니다. 현대 역사학의 시대 구분은 인간의 외적인 생활과 물질문화를 중심으로 하고,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말하는 태고 시대는 태고교회와 관련된 인간의 영적 상태를 중심으로 합니다. 두 설명은 애초에 같은 질문에 답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렇게 이해하고 나면 AC.45의 문장도 훨씬 자연스럽게 읽힙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려는 것은 ‘원시인들이 놀랍게도 고등 신학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사람들이 인간의 이해와 의지에 속한 내적인 것들을 동물들을 통해 표현했으며, 그러한 상징적 표현이 이후 말씀에도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자연의 형상과 인간의 내적 상태 사이의 관계를 오늘날과는 다르게 지각했던 태고교회의 영적 상태가 놓여 있습니다.

 

 

 

AC.45, 창1:24-25, ‘짐승으로 드러나는 마음 : 애정과 욕정의 질서화’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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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4 심화

1. 왜 AC는 처음부터 끝까지 ‘선과 진리’를 말하는가?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처음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왜 이 책은 처음부터 계속 선과 진리 이야기인가?’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 의지와 이해, 그리고 이제 AC.44에서는 듣는 것과 행하는 것까지 비슷한 구도가 계속 나타납니다. 창세기에는 빛과 어둠, 물과 땅, 풀과 나무, 해와 달, 물고기와 새, 짐승이 나오는데,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다시 인간 안의 선과 진리 이야기로 돌아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질문은 AC를 처음 읽는 사람에게 매우 자연스러운 질문입니다. 그리고 사실 이 질문을 잘 이해하면 앞으로 AC를 읽기가 훨씬 쉬워집니다. 스베덴보리가 선과 진리를 수많은 교리 가운데 특별히 좋아하는 두 주제로 골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적 생명과 거듭남을 설명할 때 이 둘의 관계가 매우 근본적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먼저 인간을 생각해 보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사람에게는 무엇인가를 알고 생각하고 이해하는 면이 있고, 무엇인가를 사랑하고 원하며 행하는 면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크게 이해와 의지로 구별합니다. 진리는 이해와 특별히 관계되고 선은 의지와 특별히 관계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진리 = 이해, 선 = 의지’라는 기계적인 공식으로만 외우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참된 것을 알고 이해하는 것과, 그것을 좋아하고 원하여 실제로 행하는 것이 하나의 삶을 이루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AC.44가 바로 그 문제를 매우 실제적인 언어로 보여 줍니다. 말씀을 ‘듣는 것’은 이해의 역할이고, 그것을 ‘행하는 것’은 의지의 역할입니다. 사람은 들으면서 행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무엇이 참인지 알면서도 그것을 원하지 않을 수 있고, 신앙을 말하면서도 그 신앙에 따라 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선과 진리의 문제는 추상적인 철학이 아니라 ‘내가 아는 진리가 내가 사랑하고 행하는 선과 하나가 되어 있는가?’라는 삶의 문제입니다.

 

그러면 왜 창세기 1장을 설명하면서 이 문제가 계속 나타날까요? 지금 스베덴보리가 창조 이야기를 한 사람의 거듭남에 관한 속뜻으로 읽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듭남은 한순간에 완성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진리가 비치고, 서로 다른 것들이 구별되고, 지식이 생기고, 그 지식들이 살아나며, 마침내 이해에 속한 것뿐 아니라 의지에 속한 것들도 새롭게 되어 갑니다. 그러므로 창조의 날들이 진행될수록 선과 진리의 관계도 같은 모습으로 단순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점차 다른 단계에서 나타납니다.

 

이 점에서 ‘사랑과 신앙’, ‘의지와 이해’, ‘선과 진리’, ‘행함과 들음’을 완전히 같은 말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각각은 서로 다른 것을 가리키며 사용되는 문맥도 다릅니다. 그러나 서로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신앙은 진리와 관계되고 사랑은 선과 관계되며, 이해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기능과 관계되고 의지는 선을 받아들이고 행하는 것과 관계됩니다. 그래서 AC를 읽다 보면 서로 다른 용어들이 계속 선과 진리의 관계를 중심으로 연결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천국을 설명할 때도 선과 진리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의 생명은 단순히 많은 진리를 알고 있는 상태도 아니고, 막연히 좋은 감정을 많이 가지고 있는 상태도 아닙니다. 천사들의 생명 역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그것들이 결합된 삶과 관계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거듭남도 결국 천국의 질서를 받아들이는 과정이며, 선과 진리의 결합은 그 설명에서 계속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합니다.

 

말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내적 의미가 인간의 거듭남과 천국, 그리고 궁극적으로 주님을 다룬다고 봅니다. 따라서 말씀 속의 수많은 자연물과 사건이 속뜻에서 선과 진리, 그리고 그것들의 여러 상태와 관계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성경의 모든 단어를 ‘이것은 선, 저것은 진리’라는 두 칸짜리 표에 넣어 해석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상응은 훨씬 다양하고 문맥에 따라 세밀하게 달라집니다. 다만 그 다양한 상응들이 결국 사람의 사랑과 신앙, 의지와 이해, 선과 진리의 상태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선과 진리는 둘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라는 경쟁 구도로 읽지 않는 것입니다. 진리를 많이 아는 것만으로 거듭나는 것도 아니지만, ‘마음만 착하면 진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사람은 무엇이 선인지 알기 위해 진리가 필요하고, 알게 된 진리는 실제 선한 삶을 향해야 합니다. AC.44에서 신앙의 지식이 먼저 사람 안에 심겨야 한다고 한 뒤 곧바로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의 결합을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따라서 AC에서 선과 진리가 계속 등장하는 것을 ‘또 같은 이야기’라고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번에는 선과 진리의 관계가 거듭남의 어느 단계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라고 물으며 읽으면 좋습니다. 창조 첫째 날의 빛에서 말하는 진리와 여섯째 날의 이해와 의지의 관계는 똑같은 상태가 아닙니다. 거듭남이 진행됨에 따라 같은 근본 문제가 점점 더 깊은 차원에서 다시 나타나는 것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가 선과 진리를 계속 말하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사람의 영적 생명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들이 서로 결합하여 하나의 삶을 이루는 것과 깊이 관계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AC를 읽을 때 선과 진리가 또 나왔다고 생각하기보다, ‘이번에는 이 둘이 어떻게 만나고 있으며, 아직 무엇이 분리되어 있고, 거듭남이 그것을 어떻게 하나로 만들어 가는가?’라고 살펴보면 글의 흐름이 훨씬 선명해집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끝까지 선, 진리 이야기만 한다’는 첫인상도 조금 달라질 수 있습니다. 같은 두 단어를 되풀이하는 책이라기보다, 인간의 내면이 주님에 의해 어떻게 새롭게 창조되어 가는지를 선과 진리의 관계를 통해 아주 오랫동안, 여러 각도와 여러 단계에서 추적하는 책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AC.44, 창1:24-25, ‘지식에서 생명으로 : 이해와 의지가 하나 될 때 나타나는 참된 신앙’(AC.44-48)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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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 심화

1. 스베덴보리는 인용 구절들의 이런 속뜻을 어떻게 아는가?

 

AC.42를 처음 읽으면 놀라운 장면을 계속 만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겔29:3의 바로와 큰 악어, 겔32:2의 바다와 강을 휘젓는 악어, 사27:1의 리워야단과 바다의 용, 렘51:34의 삼키는 큰 뱀을 차례로 인용하면서 그것들이 기억 지식과 그 일반 원리, 그리고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신앙의 신비에 들어가려는 상태와 관계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질문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먼저 분명히 할 것은 스베덴보리 자신이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의 속뜻을 단순한 개인적 성경 연구의 결과라고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 저작 전체의 전제 자체가 말씀에는 문자적 의미 안에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내적 의미가 있으며, 그것이 주님의 자비로 밝혀졌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의 주장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면 적어도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말씀의 내적 의미에 관한 계시를 받았다고 이해했다’는 사실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곧바로 ‘그러면 주님이나 천사가 옆에서 한 문장씩 불러 주었고 스베덴보리는 받아 적었는가?’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의 저술에는 영들과 천사들과의 대화, 영계에서 보고 들은 것, 어떤 것의 의미를 지각하거나 알도록 허락받았다는 진술 등이 매우 많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것들을 모두 하나의 방식으로 묶어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는 천사가 구술한 책이다’라고 말하면 그의 저술 방식 자체를 지나치게 단순화하게 됩니다.

 

반대로 ‘성경을 펼치면 속뜻이 화면처럼 눈앞에 자동으로 나타났다’고 말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영계에서 실제로 보고 들었다고 기록한 경험과, 말씀의 내적 의미를 해설하는 작업은 서로 깊이 관련되어 있지만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닙니다. 그가 어떤 한 절의 속뜻을 알게 되는 모든 순간에 정확히 어떤 인식 과정이 일어났는지를 우리가 재구성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실제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으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일관된 상응의 연결’입니다. 예를 들어 AC.42에서 큰 물고기가 기억 지식의 일반적인 것을 뜻한다고 한 뒤, 스베덴보리는 그 뜻을 한 구절에만 기대지 않습니다. 여러 선지서의 서로 다른 구절을 가져와 같은 상징이 문맥에 따라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앞으로 AC를 계속 읽으면 물, 땅, 씨, 나무, 빛, 새, 짐승, 애굽, 앗수르, 바벨론 같은 표현들이 한 번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에서 서로 연결되어 해석되는 것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속뜻을 ‘단어마다 비밀 암호 하나가 붙어 있는 것’처럼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물고기=기억 지식’, ‘새=이성적인 것’이라는 대응표를 외운 뒤 모든 성경 구절에 기계적으로 대입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같은 표현도 문맥과 그것이 놓인 관계, 긍정적 또는 부정적 의미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AC.42에서 ‘큰 바다짐승’이 좋은 창조의 일부로 등장하면서도, 선지서에서는 인간 자신의 지혜와 결합된 부정적인 상태를 표현하는 데 사용되는 것이 좋은 예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내적 의미를 인간이 임의로 만들어 내는 비유적 해석으로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의 설명에서 상응은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에 주님께서 세우신 질서에 근거합니다. 따라서 그에게 속뜻은 ‘이 구절을 오늘 내 삶에 이렇게 적용해 볼 수 있겠다’는 설교적 적용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우리는 그의 해석에 동의할 것인지 검토할 수 있지만, 적어도 그가 무엇을 주장하는지는 정확하게 구별해야 합니다. 그는 자신이 성경에 재미있는 상징적 의미를 덧붙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스베덴보리의 속뜻 설명을 읽을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스베덴보리가 계시를 받았다고 했으니 아무것도 묻지 말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할 필요도 없고, 반대로 한 구절만 떼어 놓고 ‘문자만 보면 이런 뜻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며 즉시 버릴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AC를 계속 읽으면서 그가 같은 상징을 말씀 전체에서 어떻게 사용하는지, 서로 다른 구절의 해석이 일관되는지, 앞뒤의 교리적 맥락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좋습니다.

 

AC.42의 겔32:2가 좋은 사례입니다. 그 한 절만 처음 보면 ‘기억 지식을 수단으로 삼아 자기 자신으로부터 신앙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려는 사람’이라는 해석은 매우 갑작스럽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AC.40-42에서 물고기와 큰 물고기, 기억 지식과 그 일반적인 것, 인간의 지혜와 지성이라는 연결을 차례로 읽고 나면 적어도 스베덴보리가 어떤 구조 안에서 그 구절을 읽고 있는지는 조금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AC 전체를 더 읽을수록 그 연결이 다른 곳에서도 반복되는지 검토할 수 있습니다.

 

결국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어떻게 알았는가?’라는 질문에는 두 층의 답이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의 주장에 따르면 말씀의 내적 의미는 인간의 독창적인 추론으로 발명한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밝혀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계시가 매 구절마다 정확히 어떤 심리적·지각적 과정으로 전달되었는지를 우리가 하나의 공식으로 재구성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그의 저작에서 실제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영계와의 열린 교통을 주장했고, 말씀의 내적 의미가 주님으로부터 밝혀졌다고 증언했으며, 그것을 방대한 성경 구절과 상응의 연결 속에서 체계적으로 설명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어떻게 이런 뜻이 나오지?’라는 어리둥절함을 그대로 가지고 읽어도 괜찮습니다. 오히려 그 질문을 가지고 계속 읽는 것이 좋습니다. 한두 구절에서 모든 것을 납득하려 하기보다 AC 전체를 따라가면서 같은 상응이 어떻게 되풀이되고, 문맥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며, 전체 말씀의 내적 의미 안에서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확인하는 것 자체가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검토하는 가장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AC.42, 창1:21, 큰 바다짐승들 : 기억 지식을 묶는 일반 원리

하나님이 큰 바다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created great whales, and every living 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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