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4 심화

1. 천적 천사들의 ‘생명과 지성의 빛’은 어떤 상태일까?

 

위 AC.34 본문, ‘그러한 생명과 지성의 빛 가운데 있는 그 상태는 거의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and are in such a life and light of intelligence that scarcely anything of it can be described.) 말인데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라고 했지만... 그래도 최대한 어떤 묘사가 좀 가능할까요? 저렇게만 말하면 그저 어리둥절하기만 해서요...

 

AC.34에서 스베덴보리는 자신에게 허락된 영계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천적 사랑 가운데 있는 천사들은 주님에게서 오는 그 사랑으로 인해 ‘신앙에 속한 모든 지식 안에 있으며’, ‘그러한 생명과 지성의 빛 가운데 있는 그 상태는 거의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만 읽으면 오히려 궁금증이 커집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다니, 도대체 어떤 상태라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먼저 가장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AC.34에서 실제로 말한 범위를 정확히 붙드는 것입니다. 그는 여기서 그 상태를 세세하게 묘사하지 않습니다. 천적 천사들이 어떤 느낌을 느끼는지, 생각이 어떤 속도로 움직이는지, 어떤 방식으로 진리를 알아보는지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 빈자리를 상상으로 채워 ‘천적 천사들은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이런 감정을 느낀다’고 단정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럼에도 AC.34 자체가 알려 주는 것은 분명합니다. 첫째, 그들은 ‘천적 사랑 가운데’ 있습니다. 둘째, 그 사랑은 그들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입니다. 셋째, 그 사랑으로 인해 그들은 ‘신앙에 속한 모든 지식 안에’ 있습니다. 넷째, 그 결과 그들에게는 놀라운 ‘생명과 지성의 빛’이 있습니다. 이 네 가지를 함께 보면 어느 정도 그 상태의 윤곽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장 먼저 주목할 것은 ‘생명’입니다. 바로 앞의 AC.33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랑과 생명을 떼어 놓을 수 없다고 설명했습니다. 사랑이 없다면 생명도 있을 수 없고, 사랑이 어떠한가에 따라 생명과 기쁨도 그러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참된 생명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AC.34의 천적 천사들이 놀라운 ‘생명’ 가운데 있다는 말은 앞의 설명과 연결됩니다. 그들은 주님에게서 오는 천적 사랑 안에 있기 때문에 그 사랑에 따른 생명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다음은 ‘지성의 빛’입니다. 이것을 단순히 머리가 매우 좋다거나 지식이 많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34가 강조하는 것은 천적 천사들이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으로 인해 ‘신앙에 속한 모든 지식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즉 사랑과 신앙에 속한 지식이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들의 지성의 빛은 사랑 없는 지적 능력이나 교리 지식의 축적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 점은 바로 뒤에 나오는 반대 사례를 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랑 없이 신앙의 교리적 지식만 가진 영들’을 보았다고 합니다. 이들에게는 지식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신앙에 관한 교리적 지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생명의 차가움과 빛의 어두움’ 가운데 있었습니다. 천적 천사들에게는 ‘생명과 지성의 빛’이 있고, 사랑 없는 교리적 지식만 가진 영들에게는 ‘생명의 차가움과 빛의 어두움’이 있습니다. 이 대조가 AC.34의 핵심입니다.

 

따라서 천적 천사들의 ‘지성의 빛’을 이해하는 가장 안전한 방법은 ‘사랑에서 분리되지 않은 지성의 상태’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신앙에 속한 지식은 차가운 지식으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생명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바로 그 결합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그들의 상태를 단순히 ‘많이 아는 상태’가 아니라 ‘생명과 지성의 빛 가운데 있는 상태’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앞의 AC.32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스베덴보리는 천적 천사들이 ‘사랑에 속한 신앙’ 외에 다른 신앙을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자기들의 사랑과 생명과 행복이 자기 자신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알고, 고백하며, 지각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AC.34의 천적 천사들을 이해할 때에도 같은 질서를 볼 수 있습니다. 사랑과 신앙이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고, 그 모든 생명의 근원이 주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우리의 경험에 빗대어 조금이라도 상상해 볼 수 있을까요? 아주 제한적인 비유는 가능합니다. 어떤 사람이 선한 일을 ‘해야 하니까’ 억지로 하는 경우와, 진심으로 이웃의 유익을 사랑하여 기쁘게 하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같은 행동이라도 후자의 경우에는 ‘무엇이 옳은가’라는 앎과 ‘그것을 하고 싶다’는 애정이 더 가까이 결합되어 있습니다. 이런 경험은 천적 천사들의 상태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랑과 진리가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자연적 수준에서 희미하게 이해하도록 돕는 비유 정도로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적 천사들의 상태를 ‘아무런 고민도 없이 모든 진리를 한순간에 직관적으로 아는 상태’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AC.34가 여기서 그렇게 자세히 설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생명과 지성의 빛’을 어떤 특별한 황홀감이나 감정 상태로 묘사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것은 그보다 더 근본적인 사랑과 신앙의 질서입니다.

 

왜 그 상태를 ‘거의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했는지도 여기에서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직접 경험했다고 말하는 천적 사랑의 생명과 지성의 빛은 자연계에 사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사랑과 지식의 관계와 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진리에 어긋날 수 있고, 진리를 안다고 하면서도 그대로 살고 싶어 하지 않을 수 있으며, 신앙에 관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실제 사랑의 삶과 분리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34에서 천적 천사들의 상태는 바로 그 반대편에 놓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천적 사랑과 신앙에 속한 지식이 결합되어 있고, 거기에서 생명과 지성의 빛이 나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분리된 상태를 가지고 그 결합의 상태를 온전히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에 스베덴보리도 ‘거의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문장을 신비한 황홀경에 대한 묘사로 읽는 것이 아닙니다. AC.34의 문맥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과 신앙의 결합에 관한 것입니다. 사랑과 신앙은 하나를 이루며, 사랑 없는 신앙의 지식은 겨울 햇빛처럼 생명을 내지 못하지만,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은 봄의 햇빛처럼 생명을 일으킵니다. 천적 천사들의 ‘생명과 지성의 빛’은 바로 이 사랑과 신앙의 결합이 천국에서 얼마나 충만한 생명을 이루는지를 보여 주는 사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상태를 완전히 묘사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무엇이 그 상태의 핵심인지는 말할 수 있습니다. ‘많이 아는 상태’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 안에서 신앙에 속한 지식이 살아 있는 상태’, ‘사랑과 신앙이 분리되지 않아 생명과 지성의 빛을 이루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 설명은 결국 우리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게 합니다. AC.34가 천적 천사들의 놀라운 상태를 보여 주는 목적은 단순히 천국에 대한 호기심을 채우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바로 다음에 사랑 없이 신앙의 교리적 지식만 가진 영들의 차갑고 어두운 상태를 대조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은 ‘얼마나 많은 신앙 지식을 알고 있는가?’만이 아니라 ‘그 지식이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의 삶과 결합되어 있는가?’입니다.

 

천적 천사들의 ‘생명과 지성의 빛’은 우리에게 아직 충분히 표현할 수 없는 천국의 상태입니다. 그러나 AC.34가 밝혀 주는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그 생명과 빛의 근원은 천사들 자신에게 있지 않고 주님에게 있으며, 그들에게 사랑과 신앙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바로 이 질서가 그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운 상태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입니다.

 

 

 

AC.34, 심화 2,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

AC.34.심화 2.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위 AC.34 본문 중 인용 구절,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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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 창1:14-17, ‘사랑 없는 신앙은 빛이 아니다 : 생명을 가르는 광명체의 본질’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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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 심화

2. 왜 광명체 본문에서 갑자기 ‘사랑, 생명, 기쁨과 행복’을 말하는가?

 

지금 광명체 본문인데, AC.33은 조금은 뜬금없이 참된 사랑, 참된 생명, 참된 기쁨과 행복 얘기를 하네요. 짐작은 되지만... 좀 풀어 설명해 주세요.

 

창1:14-17의 넷째 날 본문은 해와 달과 별, 곧 ‘광명체들’에 관한 말씀입니다. AC.30부터 스베덴보리는 이 광명체들을 사랑과 신앙으로 설명해 왔습니다. 그런데 AC.33에 이르면 갑자기 ‘참된 사랑’, ‘참된 생명’, ‘참된 기쁨과 행복’을 이야기합니다. 얼핏 보면 광명체의 속뜻을 설명하다가 잠시 다른 주제로 빠진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30-33의 흐름을 함께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AC.33은 앞에서 말한 ‘더 큰 광명체’, 곧 사랑이 왜 그렇게 근본적인지를 설명하는 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AC.30에서 스베덴보리는 ‘두 큰 광명체’를 사랑과 신앙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더 큰 광명체’는 사랑이고 ‘더 작은 광명체’는 신앙이라고 했습니다.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얻기 때문에 사랑이 먼저입니다. AC.32에서는 이 질서를 더욱 분명히 하여, 태고교회와 천적 천사들은 사랑과 분리된 신앙을 알지 못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왜 사랑이 그토록 근본적일까요? 왜 사랑이 ‘더 큰 광명체’이고, 신앙은 그 사랑에서 생명을 얻는다고 하는 것일까요?

 

AC.33은 바로 이 지점에서 사랑과 생명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랑이 없다면 생명도 있을 수 없으며, 사랑에서 흘러나오지 않는 기쁨도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랑이 어떠한가에 따라 생명이 그러하고, 기쁨도 그러하다’고 합니다.

 

따라서 사랑은 단순히 신앙과 나란히 놓이는 하나의 종교적 덕목이 아닙니다. 사랑은 사람의 생명과 직접 관계됩니다.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생명의 성질이 달라지고, 그 사람이 무엇에서 기쁨을 느끼는지도 달라집니다. 이것이 ‘더 큰 광명체’인 사랑을 설명하다가 생명과 기쁨의 이야기가 나오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더욱 강하게 설명하기 위해 ‘사랑, 같은 말이지만 욕망을 제거한다면 생각은 즉시 멈추고 사람은 마치 죽은 사람과 같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앞의 심화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것은 생각이 무가치하다는 뜻이 아니라 생각을 움직이는 더 깊은 생명의 원리가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은 무엇인가를 원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생각하고 추구하고 행동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구별이 하나 더 필요합니다. 사랑이 생명과 기쁨의 근원이라고 해서 모든 사랑에서 나오는 생명과 기쁨이 같은 것은 아닙니다. 바로 이 때문에 AC.33은 ‘참된 사랑’, ‘참된 생명’, ‘참된 기쁨과 행복’을 구별하여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도 ‘생명과 기쁨의 어떤 모양’이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사람은 자기 자신을 높이는 데서 큰 활력을 느낄 수도 있고, 재물이나 지위나 명예를 얻는 데서 강한 기쁨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나는 무엇인가를 사랑한다’, ‘나는 이것을 하면서 매우 기쁘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이 참된 사랑과 참된 기쁨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참된 사랑은 무엇일까요? AC.33은 ‘참된 사랑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참된 생명은 그분에게서 오는 사랑의 생명이며, 참된 기쁨은 그 생명에서 오는 기쁨’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사랑, 생명, 기쁨이 하나의 질서로 연결됩니다. 그 근원은 사람 자신이 아니라 주님입니다.

 

이것이 AC.32와도 정확하게 이어집니다. AC.32에서 천적 천사들은 자기들의 사랑과 생명과 행복이 자기 자신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알고, 고백하며, 지각한다’고 했습니다. AC.33은 이제 그 원리를 좀 더 일반적인 형태로 설명합니다. 참된 사랑은 주님을 향한 사랑이고, 참된 생명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생명이며, 참된 기쁨은 바로 그 생명에서 나옵니다.

 

따라서 AC.33의 사랑·생명·기쁨 이야기는 광명체 본문에서 벗어난 별도의 주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더 큰 광명체가 사랑이다’라는 말의 깊이를 밝혀 주는 설명입니다. 사랑이 큰 광명체라는 것은 단순히 사랑이 신앙보다 더 밝다거나 더 중요하다는 정도의 뜻이 아닙니다. 신앙이 사랑에서 생명을 얻고, 인간의 생명과 기쁨의 성질 역시 사랑의 성질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사랑이 근본적인 것입니다.

 

여기서 또 하나 조심할 점은 ‘광명체’를 단순히 ‘진리의 빛’이라고 바꾸어 설명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문맥에서 두 광명체는 각각 사랑과 신앙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진리의 빛이 사랑과 결합되어야 참된 빛이 된다’는 식으로 설명하기보다, AC.30-33이 실제로 말하는 사랑과 신앙의 관계를 그대로 따라가는 편이 정확합니다. 사랑이 더 큰 광명체이고 신앙은 더 작은 광명체이며,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넷째 날에 광명체가 나타난다는 것을 곧바로 ‘이제 참된 기쁨과 행복이 완성된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도 없습니다. AC.33은 거듭남의 넷째 상태 전체를 여기서 완결하여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광명체 가운데 특히 사랑이 가지는 생명적 성격을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후 거듭남의 과정은 계속 이어집니다.

 

이렇게 보면 AC.33의 흐름은 오히려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더 큰 광명체는 사랑이다. 그런데 왜 사랑이 더 큰 광명체인가? 사랑은 생명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의 성질에 따라 생명의 성질도, 기쁨의 성질도 달라진다. 그리고 참된 사랑과 참된 생명과 참된 기쁨의 근원은 주님에게 있다.’ 이런 흐름입니다.

 

결국 AC.33에서 ‘참된 사랑, 생명, 기쁨과 행복’이 등장하는 이유는 광명체 이야기를 떠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광명체의 속뜻을 더 깊이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해가 단순히 밝은 천체가 아니라 ‘사랑’을 나타낸다고 할 때, 그 사랑은 인간 생명의 가장 깊은 곳과 관계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참된 생명은 사람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래서 창1의 넷째 날은 단순히 사람 안에 무엇인가 ‘밝은 것’이 생기는 단계가 아닙니다. AC.30-33의 흐름에서 보면 사랑과 신앙의 질서가 나타나고, 신앙이 사랑에서 생명을 얻으며, 그 사랑과 생명의 참된 근원이 주님이라는 사실이 점차 밝혀지는 단계입니다. AC.33의 사랑과 생명과 기쁨에 관한 설명은 바로 이 넷째 날의 아르카나를 한층 더 깊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AC.33, 창1:14-17, ‘사랑이 곧 생명이다 : 참된 사랑과 거짓 사랑의 결정적 분별’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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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 심화 1, ‘생각이 즉시 멈춘다’

AC.33.심화 1. ‘생각이 즉시 멈춘다’ 위 AC.33 본문, ‘만일 사랑, 같은 말이지만 욕망을 제거한다면, 욕망은 사랑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생각은 즉시 멈추고, 사람은 마치 죽은 사람과 같이 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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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 심화

1. 사랑을 제거하면 왜 ‘생각이 즉시 멈추는가?’

 

위 AC.33 본문, ‘만일 사랑, 같은 말이지만 욕망을 제거한다면, 욕망은 사랑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생각은 즉시 멈추고, 사람은 마치 죽은 사람과 같이 될 것입니다. 실제로 저는 이것을 생생히 본 적이 있습니다.’(if you were to remove loves, or what is the same thing, desires—for these are of love—thought would instantly cease, and you would become like a dead person, as has been shown me to the life.) 말인데요,이 사례에 대한 좀 더 생생한 얘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생각이 즉시 멈춘다’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AC.33에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강한 말을 합니다. ‘만일 사랑, 같은 말이지만 욕망을 제거한다면, 욕망은 사랑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생각은 즉시 멈추고, 사람은 마치 죽은 사람과 같이 될 것입니다. 실제로 이것이 나에게 생생하게 보여진 바와 같습니다.’ 여기서 특히 눈에 들어오는 것은 ‘생각이 즉시 멈춘다’는 표현입니다. 사랑이 없어지면 왜 생각까지 멈추는 것일까요?

 

먼저 한 가지는 정확하게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AC.33에서 이것이 자신에게 ‘생생하게 보여졌다’고 말하지만, 이 글에서는 그것이 어떤 장면이었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어떤 영에게서 사랑을 제거했더니 그 영이 갑자기 생각을 멈추었다는 식의 상세한 사례도 여기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 장면을 상상하여 구체적인 영계의 실험처럼 재구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AC.33에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사랑과 생각의 관계를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자신에게 실제적으로 확인된 사실로 제시하고 있다는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생각이 멈춘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 문장을 이해하려면 바로 앞의 말을 보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랑이 없다면 생명도 있을 수 없고, 사랑에서 흘러나오지 않는 기쁨도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랑이 어떠한가에 따라 생명이 그러하고, 기쁨도 그러하다’고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사랑은 단순히 여러 감정 가운데 하나가 아닙니다. 사람이 무엇을 원하고 추구하며 무엇에서 기쁨을 느끼는지를 움직이는 생명의 근본적인 애정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생각은 사랑과 완전히 독립하여 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무엇인가를 사랑하고 원하기 때문에 그것을 생각합니다. 어떤 목적을 이루고 싶기 때문에 방법을 궁리하고, 어떤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람을 생각하며, 어떤 일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그것에 관한 생각이 계속 이어집니다. 생각의 내용은 매우 다양하지만 그 생각을 움직이고 방향을 주는 더 깊은 곳에는 무엇인가를 원하고 사랑하는 애정이 있습니다.

 

일상생활에서도 이것의 희미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일에 깊은 관심이 생기면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그 일에 관한 생각이 계속 떠오릅니다. 반대로 아무런 관심도 목적도 없는 일에 대해서는 생각을 오래 지속하기가 어렵습니다. 이것이 AC.33의 말을 완전히 증명하는 사례는 아니지만, 사랑과 관심과 목적이 사고의 방향과 지속성에 깊이 관계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에는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AC.33의 말은 단순히 ‘관심 있는 것은 많이 생각한다’는 심리적 관찰보다 훨씬 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인간 생명의 구조에 관한 것입니다. 사랑이 생명의 근본적인 것이기 때문에, 사랑에서 완전히 분리된 생각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사랑과 그 사랑에 속한 욕망을 모두 제거한다고 가정하면 생각도 ‘즉시 멈춘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욕망’(desires)이라는 말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욕망’이라고 하면 흔히 악하거나 육체적인 욕구만을 떠올리기 쉽지만, AC.33에서는 더 넓은 의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욕망은 사랑에 속한다’고 말하는 것은 사람이 사랑하는 것을 향하여 움직이고 원하는 모든 애정적 경향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선한 사랑에도 그 사랑에 속한 바람과 목적이 있고, 악한 사랑에도 그 사랑에 속한 욕망과 목적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웃의 유익을 사랑하는 사람은 ‘어떻게 하면 이 사람에게 실제로 도움이 될 수 있을까?’를 생각합니다. 어떤 쓰임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쓰임을 더 잘 수행할 방법을 생각합니다. 반대로 자기의 명예를 지배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어떻게 인정받고 높아질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생각은 서로 매우 다르지만, 각각의 생각 뒤에는 그 생각을 움직이는 사랑과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AC.33의 핵심은 ‘생각은 아무 가치가 없고 사랑만 중요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과 이해는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생각이 어디에서 생명을 받고 어떤 사랑을 섬기느냐입니다. 참된 사랑에서 나오는 생각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지배에서 나오는 생각은 겉으로는 똑같이 지적이고 논리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을 움직이는 생명의 성질은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이 점은 AC.33의 앞뒤 문맥과도 정확하게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랑이 어떠한가에 따라 생명이 그러하고, 기쁨도 그러하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사랑의 성질이 생각의 방향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중심이 되면 생각은 그 사랑을 섬기는 방향으로 형성되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지배하면 생각 역시 그것들을 이루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쉽습니다.

 

그렇다고 사람이 자기 안에 떠오르는 모든 생각을 보고 곧바로 ‘이것이 나의 진짜 사랑이다’라고 단정해서도 안 됩니다. 사람에게는 여러 생각과 충동이 오갈 수 있고, 거듭남의 과정에서는 서로 반대되는 것들 사이의 싸움도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이 무엇을 의도적으로 받아들이고 선택하며, 무엇을 삶의 목적으로 삼아 살아가는가입니다. 그런 지속적인 방향에서 그 사람을 지배하는 사랑의 성질이 점차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제거하면 생각이 즉시 멈춘다’는 말을 뇌의 작동이 물리적으로 정지한다거나 사람이 아무런 의식도 없는 상태가 된다는 식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AC.33의 초점은 자연적 생리현상을 설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려는 것은 생각이 그 자체로 인간 생명의 최초 원인이 아니며, 그 생각을 움직이는 더 깊은 생명의 원리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그는 사랑을 제거한 사람을 ‘마치 죽은 사람과 같다’고 표현합니다. 사랑이 없다면 원하는 것도, 추구하는 것도, 기뻐하는 것도 없고, 따라서 생각을 움직이는 생명의 동력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 표현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단순히 ‘생각하는 존재’만이 아니라 ‘사랑하고, 그 사랑에 따라 생각하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를 매우 압축적으로 보여 줍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자신을 살피는 데에도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나는 무엇을 많이 생각하는가?’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깊은 질문은 ‘나는 무엇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가?’입니다. 같은 성경을 읽고 같은 일을 하고 같은 말을 하더라도 그 배후의 사랑과 목적은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AC.33의 ‘생각이 즉시 멈춘다’는 말은 생각을 낮추기 위한 표현이 아닙니다. 오히려 생각이 어디에서 생명을 받는지를 보여 주는 말입니다. 생각은 고립되어 스스로 살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연결되어 있으며, 사랑이 어떠한가에 따라 생각이 향하는 방향도 달라집니다. 그리고 참된 사랑과 참된 생명의 궁극적인 근원은, AC.33이 마지막에 밝히듯 사람 자신이 아니라 오직 주님에게 있습니다.

 

 

 

AC.33, 심화 2, ‘광명체 본문과 참된 사랑, 생명, 기쁨과 행복’

AC.33.심화 2. ‘광명체 본문과 참된 사랑, 생명, 기쁨과 행복’ 지금 광명체 본문인데, AC.33은 조금은 뜬금없이 참된 사랑, 참된 생명, 참된 기쁨과 행복 얘기를 하네요. 짐작은 되지만... 좀 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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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 창1:14-17, ‘사랑이 곧 생명이다 : 참된 사랑과 거짓 사랑의 결정적 분별’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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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창2:24)

 

AC.160

‘부모를 떠나는 것’(leave father and mother)은 속 사람에게서 물러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겉 사람을 잉태하고 낳는 것은 속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아내와 합하는 것’(cleave unto his wife)은 속 사람이 겉 사람 안에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하고, ‘한 몸이 되는 것’(be one flesh)은 그 둘이 거기에서 함께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전에는 속 사람과, 속 사람으로부터 나온 겉 사람이 영이었으나 이제는 육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천적·영적 생명이 proprium에 결합되어, 그것들이 하나처럼 되게 되었습니다. To “leave father and mother” is to recede from the internal man, for it is the internal which conceives and brings forth the external; to “cleave unto his wife” is that the internal may be in the external; to “be one flesh,” that they are there together; and because previously the internal man and the external from the internal were spirit, but now they have become flesh. Thus was celestial and spiritual life adjoined to the own, that they might be as one.

 

해설

AC.160은 창2:24의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는 말씀을 앞에서 계속되어 온 속 사람, 겉 사람, proprium의 변화라는 흐름 안에서 해설합니다. AC.159에서는 천적 인간에게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매우 뚜렷하게 구별되어 있었으며, 겉 사람이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다스려진다는 것을 천적 인간이 퍼셉션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손들은 겉 사람에 속한 proprium을 원하면서 이 구별을 더 이상 퍼셉션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AC.160은 바로 그 변화된 상태를 창2:24의 세 표현을 따라 설명합니다.

 

먼저 ‘부모를 떠나는 것’은 속 사람에게서 물러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이유를 스베덴보리는 ‘겉 사람을 잉태하고 낳는 것은 속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부모는 자연적인 부모에 관한 교훈에 머무르지 않고, 겉 사람의 근원이 되는 속 사람을 가리킵니다. 앞 번호에서 천적 인간은 겉 사람이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다스려지는 질서를 퍼셉션했다고 했는데, 이제 후손들은 proprium으로 기울면서 그 속 사람에게서 물러나는 상태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그의 아내와 합하는 것’은 속 사람이 완전히 사라지거나 겉 사람과 관계가 끊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속 사람이 겉 사람 안에 있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대목입니다. 속 사람에게서 물러났다고 해서 속 사람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 방식이 달라진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아내’는 AC.156에서 설명했듯 앞에서 ‘여자’라고 했던 proprium이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결합으로 인해 받게 된 표현입니다.

 

‘한 몸이 되는 것’은 그 둘이 거기에서 함께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도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 되어 구별이 사라졌다고 읽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앞의 AC.159가 천적 인간에게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뚜렷하게 구별된다고 명시했고, 이번 번호의 마지막도 천적·영적 생명이 proprium에 결합되어 ‘하나처럼’ 되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한 몸’은 구별 자체의 소멸보다, 변화된 상태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함께 있게 된 것을 나타냅니다.

 

이어지는 ‘이전에는 속 사람과, 속 사람으로부터 나온 겉 사람이 영이었으나 이제는 육이 되었다’는 문장은 특별히 조심해서 읽어야 합니다. 이것을 곧바로 ‘처음에는 영적이었지만 이제 타락하여 육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일반적인 도식으로 바꾸어 버리면 현재 문맥의 세밀한 흐름을 놓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 천적 인간의 후손들이 proprium을 원하면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영’에서 ‘육’으로의 변화도 그 상태 변화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특히 마지막 문장이 그 의미를 붙들어 줍니다. ‘이렇게 천적·영적 생명이 proprium에 결합되어, 그것들이 하나처럼 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proprium은 천적·영적 생명 자체가 아닙니다. 천적·영적 생명이 proprium에 ‘결합되었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둘이 완전히 동일한 하나가 되었다고 하지 않고 ‘하나처럼’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도 생명의 근원과 그것을 받아 자기 삶처럼 누리는 proprium 사이의 구별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AC.135와 매우 밀접하게 이어집니다. AC.135에서도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proprium에 결합되어 하나처럼 보이게 된다고 했습니다. 당시에도 중요한 것은 ‘결합’과 ‘하나처럼 보임’을 ‘동일해짐’으로 바꾸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AC.160은 이제 창2:24의 ‘한 몸’이라는 말씀을 통하여 같은 내용을 다시 설명합니다. 천적·영적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오지만, 그것이 인간의 proprium에 결합됨으로 인간에게는 자기 자신의 생명과 하나처럼 경험되는 상태가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AC.160은 ‘부모를 떠남’, ‘아내와 합함’, ‘한 몸이 됨’을 각각 떨어진 상응어로 읽기보다 하나의 상태 변화로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속 사람에게서 물러나고, 속 사람이 겉 사람 안에 있게 되며, 그 둘이 함께 있게 되고, 천적·영적 생명이 proprium에 결합되어 하나처럼 되는 흐름입니다. 이것은 AC.131부터 시작된 천적 인간의 후손들이 proprium으로 기울어 가는 과정의 한 단계이며, 동시에 주님께서 그 proprium을 단순히 버려 두지 않으시고 생명과 결합시키시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AC.160)

 

 

 

AC.161, 창2:24, ‘겉 사람의 proprium 안에 영적 천적인 것을 스며들게 하시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창2:24) AC.161이 태고교회의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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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9, 창2:23,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구별을 잃어버린 천적 인간의 후손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창2:23) AC.159그러나 천적 인간의 상태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러한 것들이 어떠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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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창2:23)

 

AC.159

그러나 천적 인간의 상태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러한 것들이 어떠한지를 쉽게 퍼셉션할 수 없습니다. 천적 인간에게서 속 사람은 겉 사람과 구별되며, 참으로 너무나 뚜렷하게 구별되어 있어서 천적 인간은 무엇이 속 사람에게 속하고 무엇이 겉 사람에게 속하는지, 그리고 겉 사람이 속 사람을 통하여 어떻게 주님에 의해 다스려지는지를 퍼셉션합니다. 그러나 이 천적 인간의 후손들의 상태는 겉 사람에게 속한 그들의 proprium을 원한 결과 너무나 달라져, 그들은 더 이상 속 사람이 겉 사람과 구별된다는 것을 퍼셉션하지 못하고, 속 사람이 겉 사람과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이 자기의 proprium으로 기울 때에는 이러한 퍼셉션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But it is not easy to perceive how the case is with these things unless the state of the celestial man is understood. In the celestial man the internal man is distinct from the external, indeed so distinct that the celestial man perceives what belongs to the internal man, and what to the external, and how the external man is governed through the internal by the Lord. But the state of the posterity of this celestial man, in consequence of desiring their own, which belongs to the external man, was so changed that they no longer perceived the internal man to be distinct from the external, but imagined the internal to be one with the external, for such a perception takes place when man inclines to his own.

 

해설

AC.159는 앞에서 다루어 온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붙들어야 할 중요한 구별을 제시합니다. AC.156에서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결합되기 때문에 앞에서 ‘여자’라고 했던 proprium을 ‘아내’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결합은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구별이 사라져 둘이 뒤섞인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AC.159는 천적 인간에게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매우 뚜렷하게 구별되어 있었다고 말합니다.

 

천적 인간은 무엇이 속 사람에게 속하고 무엇이 겉 사람에게 속하는지를 퍼셉션했습니다. 이것은 자기 안에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단순히 교리적으로 알고 있었다는 뜻보다 훨씬 깊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일어나는 것 가운데 무엇이 어느 쪽에 속하는지를 퍼셉션할 수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 겉 사람이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어떻게 다스려지는지도 퍼셉션했습니다. 따라서 천적 인간의 내적 질서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구별’과 ‘결합’이 함께 존재하는 질서였습니다.

 

특히 ‘겉 사람이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다스려진다’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주도권의 근원은 겉 사람에게 있지 않습니다. 겉 사람이 스스로를 다스리면서 속 사람과 협력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을 다스리십니다. 이것은 창2 전반에서 계속되어 온 천적 질서와도 이어집니다. 앞에서 천적 인간은 자기에게 주어진 지혜와 지성, 선과 진리와 모든 능력이 주님께 속한 것임을 퍼셉션했습니다. 이제 같은 질서가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런데 천적 인간의 후손들에게서 상태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들이 원한 것은 겉 사람에게 속한 proprium이었습니다. 이 점은 AC.131 이후 계속된 흐름과 정확히 이어집니다. 처음에는 proprium으로 기울기 시작했고, 자기 자신의 인도 아래 있기를 원했으며, 마침내 그 proprium이 그들에게 허락되었습니다. AC.159는 이러한 변화가 단지 ‘자기 것을 갖고 싶어 했다’는 정도에 머물지 않고,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를 퍼셉션하는 방식 자체를 바꾸었다고 설명합니다.

 

그 결과 후손들은 더 이상 속 사람이 겉 사람과 구별된다는 것을 퍼셉션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속 사람이 겉 사람과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는 AC.156에서 말한 올바른 결합과 구별해야 합니다. 천적 인간에게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은 서로 뚜렷하게 구별되면서도 주님의 질서 안에서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반면 후손들은 그 구별 자체를 잃어버리고 둘을 하나로 여겼습니다. 따라서 참된 결합은 구별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구별된 것들이 올바른 질서 안에서 결합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문장은 이러한 변화가 왜 일어났는지를 다시 proprium과 연결합니다. 사람이 자기의 proprium으로 기울 때에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을 하나라고 여기는 이러한 지각이 생긴다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 있는 설명입니다. 겉 사람에게 속한 proprium을 자기 생명의 중심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사람은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께서 겉 사람을 다스리시는 질서를 더 이상 퍼셉션하지 못하게 됩니다. 겉 사람에서 느끼고 생각하고 원하는 것을 곧 자기 존재 전체의 생명으로 여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AC.159는 AC.147-155에서 계속 다루어 온 ‘자기 자신으로부터 사는 것처럼 보이는 상태’를 또 다른 각도에서 보여 줍니다. 문제는 사람이 자기 자신의 삶을 실제 자기 삶처럼 경험한다는 사실 자체가 아닙니다. AC.155의 천사들도 특별히 그 근원을 의식하지 않을 때에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사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자기들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보편적인 퍼셉션이 있습니다. 반면 여기의 후손들은 proprium으로 기울면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구별과 그 질서를 퍼셉션하지 못하게 됩니다. 바로 이 차이가 중요합니다.

 

따라서 AC.159에서 천적 인간의 상태를 이해하는 열쇠는 ‘구별되어 있으면서 결합되어 있음’에 있습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은 서로 다른 것에 속하지만 분리되어 제각기 움직이는 것이 아니며, 주님께서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을 다스리심으로 하나의 질서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proprium으로 기울면 이 질서에 대한 퍼셉션이 흐려지고, 사람은 속 사람과 겉 사람을 하나라고 여기게 됩니다. AC.159는 proprium으로의 기울어짐이 단순한 도덕적 타락만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생명의 근원과 내적 질서를 퍼셉션하는 방식의 변화이기도 했음을 보여 줍니다. (AC.159)

 

 

 

AC.160, 창2:24, ‘부모를 떠나 한 몸을 이루다 - 천적·영적 생명이 proprium에 결합됨’ (AC.160-162)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창2:24) AC.160‘부모를 떠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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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8, 창2:23, ‘사람 - 지혜롭고 지성 있는 속 사람’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창2:23) AC.158사람이 속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 곧 같은 말로 지성 있고 지혜로운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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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창2:23)

 

AC.158

사람이 속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 곧 같은 말로 지성 있고 지혜로운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사야에서 분명합니다. That man signifies the internal man, or what is the same, one who is intelligent and wise, is plain from Isaiah:

 

내가 본즉 한 사람도 없으며 내가 물어도 그들 가운데에 한 말도 대답할 조언자가 없도다 (사41:28) I behold, and there is no man [vir], even among them, and there is no counselor, (Isa. 41:28)

 

이는 지혜롭고 지성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뜻입니다. 또한 예레미야에서는, meaning none wise and intelligent. Also in Jeremiah: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렘5:1) Run ye to and fro through the streets of Jerusalem, and see if ye can find a man, if there be any executing judgment, seeking the truth. (Jer. 5:1)

 

이라고 합니다. ‘정의를 행하는 사람’(One who executes judgment)은 지혜로운 사람을 의미하고, ‘진리를 구하는 사람’(one who seeks the truth)은 지성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One who executes judgment” means a wise person; and “one who seeks the truth,” an intelligent one.

 

해설

AC.158은 AC.156에서 제시한 ‘사람은 속 사람을 의미한다’는 해석을 말씀의 다른 구절들로 확증합니다. AC.156에서는 창2:23의 ‘사람’이 속 사람을 의미하며, 앞에서 ‘여자’라고 했던 겉 사람의 proprium이 속 사람과 결합하기 때문에 이제 ‘아내’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그 가운데 ‘사람’이 왜 속 사람을 의미할 수 있는지를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말씀을 통해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속 사람을 ‘지성 있고 지혜로운 사람’과 같은 의미로 설명합니다. 이것은 속 사람이 단순히 인간의 보이지 않는 안쪽 부분이라는 공간적인 개념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현재 문맥에서 속 사람은 지혜와 지성이 있는 사람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창2:23에서 ‘사람’이 속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도 단순히 겉 사람의 반대편에 있는 어떤 내부 구조를 가리킨다기보다, 지혜와 지성이 속하는 인간의 내적 상태를 가리킨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첫 번째로 인용되는 사41:28에는 ‘한 사람[vir]도 없으며 그들 가운데 한 모사도 없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히 그 자리에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뜻으로 읽지 않고, ‘지혜롭고 지성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의미로 설명합니다. 특히 원문이 ‘man’ 뒤에 라틴어 ‘vir’를 명시한 것은 눈여겨볼 만합니다. 현재 번호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사람’은 단순한 인간 일반을 가리키는 데 그치지 않고, 지혜와 지성을 지닌 사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5장의 인용은 이 의미를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사람’을 찾으라는 말씀에서 스베덴보리는 ‘정의를 행하는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으로, ‘진리를 구하는 사람’을 지성 있는 사람으로 풀이합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지혜와 지성이 추상적인 능력으로만 제시되지 않습니다. 정의를 행하는 것과 진리를 구하는 것이라는 실제적인 표현을 통해 각각 드러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한 이유도 바로 ‘사람’이라는 표현 안에 지혜와 지성의 의미가 들어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지혜’와 ‘지성’을 완전히 같은 말로 만들어 버리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예레미야의 두 표현을 구별하여 ‘정의를 행하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 ‘진리를 구하는 사람’은 지성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현재 번호에서는 그 둘의 차이를 더 자세히 설명하지 않으므로 우리가 별도의 체계를 만들어 넣을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가 두 표현을 의도적으로 구별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대로 보존해야 합니다. 앞에서 AC.107과 AC.112에서도 지혜와 지성을 구별하여 사용했던 흐름과도 잘 맞습니다.

 

이렇게 보면 AC.158은 앞 번호들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를 조금 더 분명하게 합니다. AC.156에서 ‘뼈 중의 뼈와 살 중의 살’은 겉 사람의 proprium이고 ‘사람’은 속 사람이라고 했으며, AC.157에서는 그 겉 사람의 proprium 안에 속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58에서는 그 속 사람이 지혜롭고 지성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갖는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현재의 결합은 단순히 인간 안의 두 부분이 서로 붙어 있다는 뜻이 아니라, 지혜와 지성이 있는 속 사람과 생명을 얻은 겉 사람의 proprium이 결합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다만 여기서도 ‘사람’[vir]이 말씀 어디에서나 언제나 속 사람을 의미한다고 기계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AC.158이 보여 주는 것은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해당 문맥에서 ‘사람’이 지혜와 지성을 지닌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으며, 그것이 창2:23에서 사람을 속 사람으로 읽는 해석을 뒷받침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계속 확인한 것처럼 스베덴보리의 상응 해석은 단어 하나를 고정된 암호로 바꾸는 작업이 아니라, 그 단어가 놓인 주제와 문맥 안에서 그 의미를 살피는 방식으로 읽어야 합니다.

 

결국 AC.158의 두 성경 인용은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41:28은 ‘사람’이 지혜롭고 지성 있는 사람을 의미할 수 있음을 보여 주고, 렘5:1은 그 지혜와 지성을 ‘정의를 행하는 것’과 ‘진리를 구하는 것’이라는 표현을 통해 더욱 구체적으로 확인해 줍니다. 이로써 AC.156에서 제시된 ‘사람은 속 사람을 의미합니다’라는 해석이 말씀의 다른 용례를 통해 한층 단단하게 뒷받침됩니다. (AC.158)

 

 

 

AC.159, 창2:23,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구별을 잃어버린 천적 인간의 후손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창2:23) AC.159그러나 천적 인간의 상태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러한 것들이 어떠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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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7, 창2:23, ‘뼈 중의 뼈와 살 중의 살 -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창2:23) AC.157‘뼈 중의 뼈와 살 중의 살’(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이 속 사람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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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창2:23)

 

AC.157

‘뼈 중의 뼈와 살 중의 살’(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이 속 사람이 그 안에 있는 겉 사람의 proprium을 의미했기 때문에, 고대에는 자기 사람들[proprii]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 곧 한 집안이나 한 가족에 속하거나 어떤 정도로든 친족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뼈 중의 뼈와 살 중의 살’(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라반은 야곱에게, Inasmuch as “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 signified the own of the external man in which was the internal, therefore in ancient times all those were called “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 who could be called their own [proprii], and were of one house, or of one family, or in any degree of relationship. Thus Laban said of Jacob,

 

라반이 이르되 너는 참으로 내 혈육이로다 하였더라 야곱이 한 달을 그와 함께 거주하더니 (창29:14) Surely thou art my bone and my flesh. (Gen. 29:14)

 

라고 했습니다. 또 아비멜렉은 그의 외삼촌들과 외조부의 온 가족에 관하여, And Abimelech said of his mother’s brethren, and of the family of the house of his mother’s father,

 

청하노니 너희는 세겜의 모든 사람들의 귀에 말하라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명이 다 너희를 다스림과 한 사람이 너희를 다스림이 어느 것이 너희에게 나으냐 또 나는 너희와 골육임을 기억하라 하니 (삿9:2) Remember that I am your bone and your flesh. (Judges 9:2)

 

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도 자신들에 관하여 다윗에게, The tribes of Israel also said of themselves to David,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는 왕의 한 골육이니이다 (삼하5:1) Behold, we are thy bone and thy flesh. (2 Sam. 5:1)

 

라고 했습니다.

 

해설

AC.157은 AC.156에서 설명한 ‘뼈 중의 뼈와 살 중의 살’이라는 표현이 고대에는 실제로 어떤 관계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는지를 성경의 여러 사례를 통해 보여 줍니다. AC.156에서는 이 표현이 속 사람이 그 안에 있는 겉 사람의 proprium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57은 바로 이러한 의미 때문에 고대 사람들이 한 집안이나 한 가족에 속하거나 어떤 친족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뼈 중의 뼈와 살 중의 살’이라고 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속 사람이 그 안에 있는 겉 사람의 proprium’이라는 표현입니다. AC.156에서는 ‘뼈 중의 뼈와 살 중의 살’이 겉 사람의 proprium을 의미하고, 사람은 속 사람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57은 그 둘을 한 문장 안에서 다시 결합하여, 이 겉 사람의 proprium 안에 속 사람이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현재의 ‘뼈와 살’은 속 사람과 아무 관계 없이 홀로 존재하는 겉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속 사람이 그 안에 있으면서 결합되어 있는 겉 사람의 proprium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관계 때문에 고대에는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을 같은 ‘뼈와 살’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여기서 원문의 ‘[proprii]’도 주목할 만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계속 사용해 온 ‘proprium’과 같은 어근에 속하지만, 현재 문맥에서는 한 사람의 내적인 proprium을 그대로 가리키는 전문용어라기보다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 곧 자기 집안과 가족과 친족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는 단어 하나를 기계적으로 같은 뜻으로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속한다’는 기본적인 의미가 인간의 proprium과 친족을 가리키는 고대 표현 사이에서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예는 라반이 야곱에게 한 말입니다. 라반은 야곱에게 ‘너는 참으로 내 혈육이로다’라고 합니다. 야곱이 라반과 친족 관계에 있기 때문에 자기에게 속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두 번째로 아비멜렉은 외가 친족들에게 자신이 그들의 ‘골육’임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세 번째로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다윗에게 나아와 ‘우리는 왕의 한 골육이니이다’라고 합니다. 세 본문 모두 뼈와 살이라는 표현이 단순히 육체를 구성하는 신체 부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속해 있는 가까운 관계를 나타내는 언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세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창2:23의 표현이 고립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말은 문자에서도 자기와 밀접하게 결합되어 자기에게 속한 존재를 나타내는 표현이며, 고대의 언어에서도 같은 방식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창2의 표현이 속뜻에서 속 사람과 결합된 겉 사람의 proprium을 나타낸다는 해석은 이러한 고대의 언어 사용과도 연결됩니다.

 

이 점에서 AC.157은 앞의 ‘이름’에 관한 AC.144-145와도 방법상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어떤 표현의 속뜻을 제시한 뒤 그것을 임의의 상징 풀이로 끝내지 않고, 고대인들이 실제로 그 말을 어떻게 이해하고 사용했는지, 그리고 말씀의 다른 곳에서 그 표현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함께 살핍니다. 다만 이것을 모든 고대 표현이 언제나 하나의 고정된 속뜻만을 가진다는 뜻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현재 번호가 확증하는 것은 ‘뼈와 살’이 자기에게 속한 사람과 밀접한 결합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AC.157은 앞 번호에서 설명한 ‘여자’에서 ‘아내’로의 변화도 간접적으로 더 이해하게 합니다. AC.156에서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결합되기 때문에 앞에서 여자라고 했던 proprium을 이제 아내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AC.157에서는 그 결합이 ‘자기에게 속함’이라는 관계의 언어로 설명됩니다. 그러므로 ‘뼈 중의 뼈와 살 중의 살’은 단순히 두 부분이 나란히 존재한다는 뜻이 아니라, 속 사람과 겉 사람의 proprium이 서로 결합되어 하나에게 속한 것으로 관계 맺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결국 AC.157의 핵심은 ‘뼈와 살’이라는 표현 안에 들어 있는 ‘자기에게 속함’과 ‘결합’의 의미입니다. 라반과 야곱, 아비멜렉과 그의 친족, 이스라엘 지파들과 다윗의 사례는 모두 그 의미를 문자적 언어의 차원에서 보여 줍니다. 그리고 창2:23의 속뜻에서는 그 관계가 속 사람이 그 안에 있는 겉 사람의 proprium에 적용됩니다. 이렇게 AC.156에서 제시된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결합이 AC.157에서는 고대의 친족 언어를 통하여 한 번 더 확증됩니다. (AC.157)

 

 

 

AC.158, 창2:23, ‘사람 - 지혜롭고 지성 있는 속 사람’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창2:23) AC.158사람이 속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 곧 같은 말로 지성 있고 지혜로운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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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6, 창2:23, ‘뼈 중의 뼈와 살 중의 살 - 속 사람과 결합한 proprium’ (AC.156-159)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And the man said, This now is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erefore she shall be called wife, be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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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And the man said, This now is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erefore she shall be called wife, because she was taken out of man [vir]. (창2:23)

 

AC.156

‘뼈 중의 뼈와 살 중의 살’(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은 겉 사람의 proprium을 의미합니다. ‘뼈’(bone)는 생명을 덜 얻은 이 proprium을, ‘살’(flesh)은 생명을 얻은 proprium을 의미합니다. 또한 사람은 속 사람을 의미하며, 다음 절에 언급된 것처럼 속 사람이 겉 사람과 결합되기 때문에, 앞에서 ‘여자’(woman)라고 했던 proprium을 여기서는 ‘아내’(wife)라고 합니다. ‘이제’(Now)는 상태가 변화되었기 때문에 이때 이렇게 이루어졌음을 의미합니다. “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 signify the own of the external man; “bone,” this own not so much vivified, and “flesh,” the own that is vivified. Man, moreover, signifies the internal man, and from his being so coupled with the external man as is stated in the subsequent verse, the own which was before called “woman” is here denominated “wife.” “Now” signifies that it was thus effected at this time because the state was changed.

 

해설

AC.156은 창2:23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라는 말씀을 해설하면서, 지금까지 이어져 온 proprium의 의미를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로 연결합니다. 먼저 ‘뼈 중의 뼈와 살 중의 살’은 겉 사람의 proprium을 의미합니다. 여기서도 뼈와 살은 같은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뼈’는 생명을 덜 얻은 proprium을, ‘살’은 생명을 얻은 proprium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겉 사람의 proprium 안에서도 생명의 정도가 구별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AC.147-149의 설명과 직접 이어집니다. AC.147에서는 갈빗대가 생명력이 거의 없는 인간의 proprium을, 갈빗대 대신의 살은 생명력이 있는 proprium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AC.149에서는 인간의 proprium이 그 자체로는 죽어 있지만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으면 살처럼 보인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56에서는 같은 뼈와 살의 구별을 ‘겉 사람의 proprium’이라는 관점에서 다시 제시합니다. 특히 이번에는 뼈를 ‘생명을 얻지 못한’ proprium이라고 하지 않고 ‘생명을 덜 얻은’ proprium이라고 한다는 점도 그대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이 그 차이를 더 설명하지 않으므로 지금 단계에서 그 이유를 별도로 만들어 낼 필요는 없습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속 사람을 의미한다고 밝힙니다. 따라서 창2:23의 사람과 여자는 속뜻에서 단순히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인물을 가리키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현재 문맥에서 사람은 속 사람을, 앞에서 여자라고 했던 것은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AC.156은 이 proprium이 겉 사람의 proprium임을 명시합니다. 이렇게 해서 지금까지 각각 설명되던 ‘사람’, ‘여자’, ‘proprium’, ‘뼈와 살’이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 안에서 연결되기 시작합니다.

 

특히 앞에서 ‘여자’(woman)라고 했던 것이 여기서는 왜 ‘아내’(wife)라고 하는지가 처음으로 밝혀집니다. 그 이유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서로 결합되기 때문입니다. AC.151에서는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을 ‘여자’라고 하고 뒤에서는 ‘아내’라고 한다고만 했으며, 그 차이를 아직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그때 그 차이를 미리 정하지 않고 기다렸던 이유가 여기서 확인됩니다. AC.156에 이르러 스베덴보리 자신이 ‘아내’라는 표현을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결합과 직접 연결합니다.

 

이 결합은 AC.155의 ‘천국의 결혼’과도 이어집니다. AC.155에서는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을 주님의 ‘신부와 아내’라고 하면서, 그 가장 깊은 내용이 천국의 결혼을 바라본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56에서는 현재 인간 안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결합하는 모습이 ‘사람’과 ‘아내’라는 표현을 통해 나타납니다. 다만 현재 번호는 이 결합과 AC.155의 천국의 결혼 사이의 관계를 더 자세히 설명하지 않으므로, 두 표현을 곧바로 완전히 동일한 하나의 교리로 펼치기보다 본문이 제시하는 연결만 붙드는 것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제’(Now)라는 한 단어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상태가 변화되었기 때문에 이때 이렇게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창2:23의 ‘이는 이제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에서 ‘이제’는 단순히 사건의 시간적 순서를 나타내는 말이 아닙니다. 앞의 상태와 다른 새로운 상태가 이루어졌음을 나타냅니다. 생명을 얻은 proprium이 주어지고, 그것이 속 사람과 결합하는 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에 ‘이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점은 창2를 역사적 사건의 연속으로만 읽는 것과 상태의 변화로 읽는 것의 차이를 다시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제’라는 시간 표현조차 현재 다루는 사람들의 내적 상태가 달라졌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읽습니다. 따라서 갈빗대에서 여자가 지어지고, 여자가 사람에게 이끌려 오고, 사람이 ‘이제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는 일련의 흐름은 속뜻에서 인간의 proprium이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고, 마침내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결합이라는 새로운 상태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AC.156은 짧지만 앞의 여러 번호를 정리하는 역할을 합니다. 뼈와 살은 겉 사람의 proprium 안에서 생명의 정도를 나타내고, 사람은 속 사람을 의미하며, 앞에서 여자라고 했던 proprium은 속 사람과 겉 사람이 결합하면서 아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바로 이 결합으로 상태가 변화되었음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 번호의 중심은 개별 상응어를 따로 암기하는 데 있지 않고,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이 속 사람과 결합하여 새로운 상태에 이르게 되는 전체 흐름을 보는 데 있습니다. (AC.156)

 

 

 

AC.157, 창2:23, ‘뼈 중의 뼈와 살 중의 살 -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창2:23) AC.157‘뼈 중의 뼈와 살 중의 살’(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이 속 사람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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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5, 창2:22, ‘주님의 신부와 아내 -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창2:22) AC.155‘갈빗대가 여자로 지어졌다’(a rib was built into a woman)는 말씀에는 누구도 문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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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창2:22)

 

AC.155

‘갈빗대가 여자로 지어졌다’(a rib was built into a woman)는 말씀에는 누구도 문자로부터는 결코 발견할 수 없는 더 많은 것들이 가장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그 가장 깊은 내용이 주님 자신과 그분의 나라를 바라보는 그러한 것이며, 말씀의 모든 생명은 여기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이 구절도 그 가장 깊은 내용에서는 천국의 결혼을 바라봅니다. 천국의 결혼은 proprium 안에 존재하는 그러한 성질의 것이며, 이 proprium은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을 때 주님의 ‘신부와 아내’(bride and wife)라고 합니다. 이렇게 생명을 얻은 인간의 proprium은 사랑의 모든 선과 신앙의 진리를 퍼셉션하며, 그 결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행복과 결합된 모든 지혜와 지성을 소유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신부와 아내’(bride and wife)라고 하는 이 생명을 얻은 proprium이 어떠한 것인지는 간단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천사들은 자기들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을 퍼셉션하지만, 그것을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을 때에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사는 것으로밖에는 알지 못한다는 점만 말해 두면 충분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곧 변화를 퍼셉션하는 그러한 보편적인 애정이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자기들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보편적인 퍼셉션 안에 있는 동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평화와 행복을 누립니다. 예레미야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도 바로 이 proprium을 의미합니다. The words “a rib was built into a woman” have more things inmostly concealed in them than it is possible for anyone ever to discover from the letter; for the Word of the Lord is such that its inmost contents regard the Lord himself and his kingdom, and from this comes all the life of the Word. And so in the passage before us, it is the heavenly marriage that is regarded in its inmost contents. The heavenly marriage is of such a nature that it exists in the own, which, when vivified by the Lord, is called the “bride and wife” of the Lord. Man’s own thus vivified has a perception of all the good of love and truth of faith, and consequently possesses all wisdom and intelligence conjoined with inexpressible happiness. But the nature of this vivified own, which is called the “bride and wife” of the Lord, cannot be concisely explained. Suffice it therefore to observe that the angels perceive that they live from the Lord, although when not reflecting on the subject they know no other than that they live from themselves; but there is a general affection of such a nature that at the least departure from the good of love and truth of faith they perceive a change, and consequently they are in the enjoyment of their peace and happiness, which is inexpressible, while they are in their general perception that they live from the Lord. It is this own also that is meant in Jeremiah, where it is said:

 

반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둘러싸리라 (렘31:22) Jehovah hath created a new thing in the earth, a woman shall compass a man. (Jer. 31:22)

 

이 구절에서도 천국의 결혼이 의미되며, 여기서 ‘여자’(woman)는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을 의미합니다. 이 여자에 관하여 ‘둘러싸는 것’(to compass)이라는 표현이 사용되는 까닭은 이 proprium이, 살이 된 갈빗대가 심장을 둘러싸는 것처럼 둘러싸는 성질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It is the heavenly marriage that is signified in this passage also, where by a “woman” is meant the own vivified by the Lord, of which woman the expression “to compass” is predicated, because this own is such that it encompasses, as a rib made flesh encompasses the heart.

 

해설

AC.155는 ‘갈빗대가 여자로 지어졌다’는 말씀의 속뜻을 지금까지보다 훨씬 깊은 층위로 이끕니다. AC.151에서는 갈빗대가 생명을 얻지 못한 인간의 proprium이고 여자는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이라고 했습니다. AC.154에서는 그 자체로서의 인간의 proprium은 악하고 흉측하지만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은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55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말씀의 가장 깊은 내용은 ‘천국의 결혼’을 바라보고 있다고 밝힙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말씀의 가장 깊은 내용이 주님 자신과 그분의 나라를 바라보며, 바로 여기에서 말씀의 모든 생명이 나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갈빗대가 여자로 지어졌다’는 말씀을 단순히 인간의 proprium에 관한 심리적 설명으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지의 설명도 이미 속뜻이지만, 그보다 더 깊은 곳에서는 주님과 그분의 나라가 중심에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proprium이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는다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인간이 주님과 어떤 관계 안에 들어가는가를 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여기서 ‘천국의 결혼’이라고 합니다.

 

그는 천국의 결혼이 proprium 안에 존재하며, 그 proprium이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을 때 주님의 ‘신부와 아내’(bride and wife)라고 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주님과의 결합이 인간의 proprium을 없애 버린 뒤 이루어진다고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이 주님의 신부와 아내가 됩니다. AC.151에서 갈빗대가 여자로 지어지는 것을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라고 했던 이유도 여기에서 더욱 깊어집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자기 자신이 없는 존재로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proprium을 생명 있게 하셔서 주님과 결합할 수 있게 하십니다.

 

이렇게 생명을 얻은 proprium에는 놀라운 성질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모든 선과 신앙의 진리를 퍼셉션하며, 그 결과 지혜와 지성을 누리고, 거기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행복이 결합됩니다. 여기서도 순서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혜와 지성이 인간 자신에게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이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를 퍼셉션함으로써 그것들을 누리게 됩니다. 앞에서 계속 강조된 ‘생명의 근원은 주님’이라는 질서가 천국의 결혼 안에서도 그대로 유지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 생명을 얻은 proprium의 성질을 간단히 설명할 수 없다고 명시합니다. 따라서 우리도 여기서 천국의 결혼이나 주님의 신부와 아내에 관한 전체 교리를 미리 끌어와 채울 필요가 없습니다. 대신 스베덴보리는 지금 독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천사들의 상태 한 가지를 제시합니다. 천사들은 자기들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을 퍼셉션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특별히 의식하며 생각하고 있지 않을 때에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사는 것처럼 압니다. 이 짧은 설명은 AC.140 이후 계속되어 온 문제에 매우 중요한 답을 줍니다.

 

즉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과 ‘자기 자신의 생명처럼 산다’는 경험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천사들조차 자기 생명을 끊임없이 ‘지금 이 생명은 주님에게서 흘러오고 있다’고 의식적으로 분석하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자기 자신으로부터 사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들의 가장 깊은 상태에는 자기들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보편적인 퍼셉션이 있습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마치 자기 자신의 것인 듯 보이는 proprium’이라는 AC.140의 표현도 더욱 분명해집니다. 생명은 실제로 주님으로부터 오지만 인간과 천사는 그것을 참으로 자기 자신의 생명처럼 받아 누립니다.

 

그 보편적인 퍼셉션은 단순한 교리 지식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사들이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즉시 변화를 퍼셉션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명제를 머리로 암기하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그 생명의 질서 안에서 실제로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 질서에서 벗어나는 순간 상태의 변화를 느끼며, 반대로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보편적인 퍼셉션 안에 있을 때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평화와 행복을 누립니다. AC.154에서 생명을 얻은 proprium이 가장 깊은 내면으로부터 행복을 퍼셉션한다고 했던 설명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렘31:22의 ‘여자가 남자를 둘러싸리라’를 인용하여 같은 천국의 결혼을 확증합니다. 여기서 ‘여자’(woman)는 다시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을 의미하고, ‘둘러싸는 것’(to compass)은 살이 된 갈빗대가 심장을 둘러싸듯 이 proprium이 둘러싸는 성질을 가진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도 신체의 모양을 보고 우리가 임의로 상응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스베덴보리 자신이 현재의 갈빗대와 여자, 심장의 관계 안에서 그 의미를 직접 제시하고 있다는 점을 붙들어야 합니다.

 

결국 AC.155는 지금까지의 proprium 논의를 매우 중요한 지점으로 이끕니다. 그 자체로 죽어 있고 악한 인간의 proprium이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으며, 그 생명을 얻은 proprium이 주님의 ‘신부와 아내’가 되고, 그 안에서 천국의 결혼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 상태의 천사들은 자기 자신의 생명처럼 자유롭게 살아가면서도 가장 깊은 곳에서는 자기들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을 퍼셉션합니다. 따라서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은 인간의 고유한 삶의 경험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삶이 참으로 살아 있게 되는 근원을 밝혀 줍니다. AC.140부터 계속되어 온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과 자기 자신의 것처럼 경험되는 proprium’의 문제가 여기서 상당히 깊고 아름다운 답을 얻습니다. (AC.155)

 

 

 

AC.156, 창2:23, ‘뼈 중의 뼈와 살 중의 살 - 속 사람과 결합한 proprium’ (AC.156-159)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And the man said, This now is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erefore she shall be called wife, be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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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4, 창2:22, ‘악 자체인 인간의 proprium과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창2:22) AC.154악하고 거짓된 것은 무엇이든 인간의 proprium이 아니거나 인간의 proprium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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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창2:22)

 

AC.154

악하고 거짓된 것은 무엇이든 인간의 proprium이 아니거나 인간의 proprium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것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인간의 proprium은 악 자체이며, 따라서 인간은 그 자체로는 악과 거짓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인간의 proprium에 속한 것들이 영계에서 보이도록 제시될 때, 더 추한 것은 묘사할 수 없을 정도로 흉측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통해 제게 분명해졌습니다. 다만 그 모습은 proprium의 성질에 따라 서로 다릅니다. 그러므로 proprium에 속한 것들이 눈에 보이도록 제시되는 사람은 공포에 사로잡혀 마치 악마에게서 달아나듯 자기 자신에게서 달아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인간의 proprium에 속한 것들은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나타나며, 주님의 천적인 것이 적용될 수 있는 생명의 성질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실제로 체어리티를 부여받았거나 체어리티에 의해 생명을 얻은 사람들은 매우 아름다운 얼굴을 한 소년들과 소녀들처럼 나타나며, 이노센스 안에 있는 사람들은 벌거벗은 어린아이들처럼 나타납니다. 그들은 가슴을 두른 꽃 화환과 머리 위의 관으로 다양하게 단장하고, 다이아몬드 같은 기운 속에서 살아 움직이며 뛰놀고, 가장 깊은 내면으로부터 행복을 퍼셉션합니다. Nothing evil and false is ever possible which is not man’s own, and from man’s own, for the own of man is evil itself, and consequently man is nothing but evil and falsity. This has been evident to me from the fact that when the things of man’s own are presented to view in the world of spirits, they appear so deformed that it is impossible to depict anything more ugly, yet with a difference according to the nature of the own, so that he to whom the things of the own are visibly exhibited is struck with horror, and desires to flee from himself as from a devil. But truly the things of man’s own that have been vivified by the Lord appear beautiful and lovely, with variety according to the life to which the celestial of the Lord can be applied; and indeed those who have been endowed with charity, or vivified by it, appear like boys and girls with most beautiful countenances; and those who are in innocence, like naked infants, variously adorned with garlands of flowers encircling their bosoms, and diadems upon their heads, living and sporting in a diamond-like aura, and having a perception of happiness from the very inmost.

 

해설

AC.154는 인간의 proprium을 매우 강한 표현으로 규정하면서도, 동시에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이 얼마나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지를 대조합니다. 첫 문장만 보면 ‘인간의 proprium은 악 자체이며 인간은 악과 거짓일 뿐’이라는 선언이 모든 것을 압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번호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후반부에서는 바로 그 인간의 proprium이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으면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따라서 AC.154를 정확히 이해하려면 이 두 상태를 반드시 함께 보아야 합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악과 거짓은 인간의 proprium에서 나오며, 인간의 proprium은 그 자체로 악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AC.150에서 자기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산다고 믿는 사람이 악과 거짓을 자기에게 귀속시킨다고 한 설명과 이어집니다. 인간이 생명과 선과 진리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두고 자기 자신의 인도 아래 살려고 할 때, 그 proprium에서는 선과 진리가 나올 수 없습니다. AC.149-150에서 이미 생명은 인간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온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proprium의 악은 단순히 인간이 개별적으로 몇 가지 잘못된 행동을 한다는 정도보다 훨씬 근원적인 문제를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다시 자신의 영계 경험으로 설명합니다. 인간의 proprium에 속한 것들이 영계에서 눈에 보이도록 나타날 때에는 더 추한 것을 묘사할 수 없을 정도로 흉측하게 보이며, 그것을 자기 앞에서 보게 된 사람은 공포에 사로잡혀 마치 악마에게서 도망하듯 자기 자신에게서 달아나고 싶어 한다고 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그 모습이 모두 똑같다고 하지 않고 ‘proprium의 성질에 따라’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고 덧붙입니다. 따라서 여기에서도 proprium은 획일적인 하나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루고 있는 생명의 성질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어지는 ‘그러나’가 AC.154 전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인간의 proprium에 속한 것들은 앞의 흉측한 모습과 정반대로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나타납니다. 이것은 AC.151에서 ‘여자’가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한다고 했던 설명을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proprium을 없애 인간을 proprium 없는 존재로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는 죽고 악한 proprium을 생명 있게 하신다는 지금까지의 흐름이 여기서 다시 확인됩니다.

 

이 때문에 AC.154는 AC.141과 함께 읽는 것이 특히 중요합니다. AC.141에서는 천적 인간과 천사에게도 proprium이 있으며, 그 proprium 안에는 주님의 것들이 있고 그것은 주님에 의해 다스려지므로 ‘가장 참된 천적인 것 자체’라고 했습니다. 반면 AC.154에서는 인간의 proprium은 악 자체라고 합니다. 두 문장은 모순되는 것이 아닙니다. AC.154 자체가 그 구별을 보여 줍니다. 인간에게서 나온 것으로서의 proprium은 악하지만,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은 아름답고 사랑스럽습니다. 그러므로 proprium이라는 단어 하나만 보고 언제나 동일한 영적 성질을 가진 것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그 자체로서의 인간의 proprium인지,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인지 문맥을 살펴야 합니다.

 

후반부의 모습들은 이러한 차이를 영계의 표상으로 보여 줍니다. 체어리티를 부여받았거나 체어리티에 의해 생명을 얻은 사람들은 매우 아름다운 얼굴의 소년들과 소녀들처럼 나타나고, 이노센스 안에 있는 사람들은 꽃 화환과 관으로 단장한 어린아이들처럼 나타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연계에서의 실제 나이나 외모가 아니라 그 사람의 내적 생명의 성질입니다. 앞에서는 proprium의 성질에 따라 그 흉측함이 달라진다고 했고, 여기서는 주님의 천적인 것이 적용될 수 있는 생명의 성질에 따라 아름다움도 다양하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영계에서 외적인 모습이 내적인 생명의 성질을 드러낸다는 설명이 이 대조 안에 들어 있습니다.

 

특히 ‘체어리티에 의해 생명을 얻는다’는 표현은 현재 문맥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AC.148에서는 가슴이 체어리티를 의미한다고 했고, AC.151에서는 갈빗대가 여자로 지어지는 것을 생명 없는 proprium이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는 것으로 설명했습니다. 이제 AC.154에서는 체어리티를 부여받거나 체어리티에 의해 생명을 얻은 사람들이 아름답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따라서 ‘proprium이 생명을 얻는다’는 말이 점차 구체적인 내용을 얻고 있습니다. 다만 이것을 근거로 아직 체어리티와 proprium의 관계에 관한 전체 교리를 미리 완성하기보다 이후의 설명을 더 기다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마지막의 ‘가장 깊은 내면으로부터 행복을 퍼셉션한다’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상태의 아름다움은 단순히 외적인 모습의 아름다움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들은 살아 움직이며 뛰놀고, 가장 깊은 내면으로부터 행복을 퍼셉션합니다. 따라서 앞부분의 죽음과 추함, 뒷부분의 생명과 아름다움과 행복은 서로 대응되는 대조를 이룹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살려는 proprium 안에 갇혀 있을 때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살아 있을 때의 차이가 영계에서 보이는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결국 AC.154는 proprium에 관한 지금까지의 설명을 한쪽으로 단순화하지 못하게 하는 중요한 번호입니다. ‘인간의 proprium은 악 자체’라는 문장은 분명히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지만, 동시에 같은 번호가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인간의 proprium은 아름답고 사랑스럽다’고 말한다는 사실도 똑같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주님께서 구원하시는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지워 버리는 방식이 아니라, 그 자체로는 죽고 악한 인간의 proprium을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으로 살아 있게 하시는 방식으로 묘사됩니다. 이것이 AC.141에서 시작하여 AC.147-154를 거치면서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는 proprium의 중요한 아르카나입니다. (AC.154)

 

 

 

AC.155, 창2:22, ‘주님의 신부와 아내 -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창2:22) AC.155‘갈빗대가 여자로 지어졌다’(a rib was built into a woman)는 말씀에는 누구도 문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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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3, 창2:22, ‘짓다 -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창2:22) AC.153갈빗대가 ‘여자로 지어졌다’(built into a woman)고 하지만, 앞에서 거듭남을 다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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