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창2:22)

 

AC.153

갈빗대가 ‘여자로 지어졌다’(built into a woman)고 하지만, 앞에서 거듭남을 다룰 때처럼 여자가 ‘창조되었다’(created), ‘형성되었다’(formed), 또는 ‘만들어졌다’(made)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짓는 것’(build)이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미로 이 말이 말씀에서 사용되는데, 거기서 ‘짓는 것’(build)은 악들에 관하여, ‘일으켜 세우는 것’(raise up)은 거짓들에 관하여, ‘새롭게 하는 것’(renew)은 그 둘 모두에 관하여 사용됩니다. 이사야에서는, The rib is said to be “built into a woman,” but it is not said that the woman was “created,” or “formed,” or “made,” as before when treating of regeneration. The reason of this is that to “build” is to raise up that which has fallen; and in this sense it is used in the Word, where to “build” is predicated of evils; to “raise up,” of falsities; and to “renew,” of both; as in Isaiah:

 

그들은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며 예부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킬 것이며 황폐한 성읍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을 중수할 것이며 (사61:4) They shall build the wastes of eternity, they shall set up again the ancient desolations, and they shall renew the cities of the waste, the desolations of generation and generation. (Isa. 61:4)

 

라고 합니다. 이 구절과 다른 구절들에서 ‘황폐한 곳들’(Wastes)은 악들을 의미하고, ‘무너진 곳들’(desolations)은 거짓들을 의미합니다. ‘짓는 것’(build)은 전자에 적용되고,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set up again)은 후자에 적용됩니다. 이러한 구별은 다른 곳에서도 선지자들에 의해 주의 깊게 지켜지는데, 예레미야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경우가 그러합니다. “Wastes” in this and other passages signify evils; “desolations,” falsities; to “build” is applied to the former, to “set up again” to the latter, and this distinction is carefully observed in other places by the prophets, as where it is said in Jeremiah: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네가 세움을 입을 것이요 네가 다시 소고를 들고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춤추며 나오리라 (렘31:4) Yet still will I build thee, and thou shall be built, O virgin of Israel. (Jer. 31:4)

 

해설

AC.153은 창2:22에서 왜 갈빗대가 여자로 ‘지어졌다’(built into a woman)고 표현되는지를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먼저 주목하는 것은 동사의 선택입니다. 앞에서 인간의 거듭남을 설명할 때에는 ‘창조하다’, ‘형성하다’, ‘만들다’라는 표현들이 사용되었는데, 여기서는 여자가 그렇게 되었다고 하지 않고 갈빗대가 여자로 ‘지어졌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차이를 우연한 표현상의 변화로 보지 않고, 현재 다루는 인간의 상태와 관련된 의미 있는 구별로 읽습니다.

 

그 이유는 ‘짓는 것’(build)이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AC.151에서 이미 짧게 제시되었지만, AC.153에서 그 근거가 본격적으로 설명됩니다. 지금 다루는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새롭게 천적 인간으로 형성되고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미 조상들의 천적 상태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의 인도 아래 있기를 원했고 proprium으로 기울었습니다. 따라서 현재 필요한 것은 처음의 창조를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넘어진 것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일입니다. 이 때문에 ‘짓다’라는 표현이 사용됩니다.

 

이것은 AC.151에서 ‘여자’가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한다고 한 것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갈빗대는 생명을 얻지 못한 proprium이고, 여자는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입니다. 따라서 갈빗대를 여자로 ‘짓는 것’은 인간이 원했던 proprium을 주님께서 그대로 방치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기울어진 상태에 있는 것을 일으켜 세워 생명을 얻게 하시는 것을 나타냅니다. ‘짓다’라는 한 동사가 지금까지의 proprium 논의와 연결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 말씀의 선지서에서 사용되는 동사들을 더욱 세밀하게 구별합니다. ‘짓는 것’(build)은 악들에 관하여 사용되고, ‘일으켜 세우는 것’(raise up)은 거짓들에 관하여 사용되며, ‘새롭게 하는 것’(renew)은 악과 거짓 모두에 관하여 사용된다고 합니다. 이사야 61장의 ‘황폐한 곳들’과 ‘무너진 곳들’을 인용하는 이유도 이 구별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황폐한 곳들’은 악들을 의미하고 ‘무너진 곳들’은 거짓들을 의미하며, 전자에는 ‘짓다’가, 후자에는 ‘다시 일으켜 세우다’가 적용됩니다.

 

여기서는 이 구별을 스베덴보리가 직접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말씀의 비슷한 동사들을 우리가 임의로 나누어 각각 다른 속뜻을 붙이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선지자들이 이러한 구별을 ‘주의 깊게’ 지켰다고 명시합니다. 따라서 현재 본문에서는 ‘짓다’, ‘일으켜 세우다’, ‘새롭게 하다’를 비슷한 뜻의 수사적 반복으로만 보지 않고, 각각 악과 거짓의 회복에 관련된 구별된 표현으로 읽어야 합니다. 동시에 이것을 근거로 말씀에 나오는 모든 동사의 동의어적 차이에 우리가 임의의 상응을 만들어 붙여서도 안 됩니다. 여기서는 AC.153이 직접 밝힌 범위가 기준입니다.

 

렘31:4의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네가 세움을 입을 것이요’라는 말씀은 ‘짓다’의 의미를 다시 확증합니다. 이미 무너진 이스라엘을 다시 세우시는 장면에서 같은 표현이 사용됩니다. 따라서 창2:22의 ‘짓다’ 역시 단순히 무엇인가를 제작한다는 뜻보다, 이미 기울어지고 넘어진 것을 주님께서 다시 세우시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현재 다루는 태고교회 후손들의 상태와 잘 맞습니다.

 

AC.153은 또한 창2 후반부를 단순한 ‘proprium의 획득’으로만 읽지 않게 해 줍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의 인도 아래 있기를 원하여 proprium으로 기울었다는 것만 본다면 이 과정은 타락의 시작으로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갈빗대가 여자로 ‘지어졌다’는 표현 안에는 이미 그 상태를 향한 주님의 회복의 역사도 들어 있습니다. 인간은 기울어졌지만 주님께서는 그를 버리지 않으시고, 생명 없는 proprium을 생명을 얻은 proprium으로 일으켜 세우십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장면에는 인간의 기울어짐과 주님의 회복하시는 역사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다만 ‘짓는 것’이 악들에 관하여 사용된다는 말을 ‘주님께서 악을 지으신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현재 문맥에서 ‘짓는다’는 것은 이미 악으로 인해 황폐해지고 넘어진 것을 다시 세우는 데 적용되는 표현입니다. 사61:4와 렘31:4의 인용도 바로 그 회복의 문맥입니다. 따라서 이 동사는 악의 발생을 주님께 돌리는 것이 아니라, 악으로 무너진 상태를 다시 일으키시는 주님의 역사를 나타냅니다. 이것이 갈빗대를 여자로 ‘짓는다’는 표현을 이해할 때에도 놓치지 말아야 할 점입니다. (AC.153)

 

 

 

AC.154, 창2:22, ‘악 자체인 인간의 proprium과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창2:22) AC.154악하고 거짓된 것은 무엇이든 인간의 proprium이 아니거나 인간의 proprium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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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2, 창2:22, ‘여자가 proprium을 의미하는 이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창2:22) AC.152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도 여자가 남자의 갈빗대에서 형성된 것이 아니며,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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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창2:22)

 

AC.152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도 여자가 남자의 갈빗대에서 형성된 것이 아니며, 여기에는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깨닫지 못했던 더 깊은 아르카나가 함축되어 있음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자’(woman)가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한다는 것은 속임을 당한 것이 여자였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을 속이는 것은 오직 그의 proprium, 곧 같은 말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뿐이기 때문입니다. It requires but little attention in anyone to discern that woman was not formed out of the rib of a man, and that deeper arcana are here implied than any person has heretofore been aware of. And that by the “woman” is signified man’s own may be known from the fact that it was the woman who was deceived; for nothing ever deceives man but his own, or what is the same, the love of self and of the world.

 

1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창3:1-6)

 

해설

AC.152는 먼저 창2:21-22의 갈빗대와 여자 이야기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 매우 직접적인 입장을 밝힙니다. 스베덴보리는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도 여자가 실제로 남자의 갈빗대에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별할 수 있으며, 이 말씀 안에는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훨씬 깊은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적어도 AC.152에서 스베덴보리 자신이 말하는 범위에서는 이 장면을 먼저 신체적으로 여성이 만들어진 과정을 기록한 사건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 사람들의 내적 상태에 관한 말씀으로 읽고 있습니다.

 

이것은 앞에서 계속되어 온 해석과 정확히 이어집니다. AC.147에서는 갈빗대가 생명력이 거의 없는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한다고 했고, AC.148-149에서는 뼈와 살의 의미를 통해 그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AC.151에서는 갈빗대가 ‘생명을 얻지 못한 인간의 proprium’을, 여자가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한다고 직접 밝혔습니다. 그러므로 AC.152의 첫 문장은 갑자기 등장하는 주장이 아니라, 지금까지 이어진 속뜻의 설명을 전제로 한 결론입니다. 문자에 나타난 갈빗대와 여자의 장면 안에 인간의 proprium이 어떻게 다루어지고 생명을 얻는가 하는 더 깊은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여자’(woman)가 왜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하는지를 창3의 이야기와 연결합니다. 그 근거는 ‘속임을 당한 것이 여자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창2의 여자와 창3의 여자를 하나의 연속된 내적 의미 안에서 읽고 있다는 뜻입니다. 창2에서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어 인간에게 허락된 proprium이 ‘여자’로 표현되었고, 이후 창3에서는 바로 그 여자가 속임을 당하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연결을 통해 여자가 proprium을 의미한다는 해석을 확증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문장은 매우 조심해서 읽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을 속이는 것은 오직 그의 proprium, 곧 같은 말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뿐’이라고 말합니다. 이 문장만 떼어 놓으면 ‘proprium은 곧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며 언제나 악하다’고 읽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로 앞의 AC.141에서는 천적 인간과 천사에게도 주님께서 proprium을 주시며, 그들의 proprium 안에는 주님의 것들이 있고 그것이 ‘가장 참된 천적인 것 자체’라고 했습니다. AC.151에서도 여자는 단순히 proprium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AC.152의 마지막 문장을 앞의 설명들과 분리하여 proprium 전체에 대한 보편적인 정의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여기서는 ‘속임을 당하는’ 상태에 놓인 인간의 proprium이 문제입니다. 인간이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으로 여기고 자기 자신의 인도 아래 있으려 할 때, proprium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지배 아래 놓일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proprium이 인간을 속입니다. 이것은 AC.146에서 ‘자기 자신의 것을 원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것들이 아무리 분명하게 표상되고 보여도 그것들을 업신여기기 시작한다’고 한 설명과도 이어집니다. 문제의 핵심은 인간에게 proprium이 있다는 사실 자체보다 그것이 어디에서 생명을 받고 무엇의 지배를 받는가에 있습니다.

 

이 점에서 AC.152는 창2와 창3 사이에 중요한 다리를 놓습니다. 창2에서는 인간이 주님의 직접적인 인도에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인도 아래 있기를 원하면서 proprium으로 기울어지는 과정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proprium을 그대로 죽어 있는 상태에 두지 않으시고 생명을 주어 인간에게 허락하십니다. 그런데 이 proprium이 이후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쪽으로 기울게 되면, 창3에서 여자가 뱀에게 속임을 당하는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창3의 타락 이야기는 창2와 단절된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 창2 후반부에서 시작된 proprium의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동시에 ‘여자 = proprium’이라는 표현 역시 모든 성경 구절에 기계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AC.151-152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그렇게 설명하는 것은 현재 창2-3의 이 특정한 문맥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상응의 의미는 다루는 주제와 문맥에 따라 살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여자’가 등장할 때마다 무조건 proprium으로 바꾸어 읽는 것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현재 이 여자를 왜 proprium으로 해석하는지를 그 이야기의 연속성과 함께 이해해야 합니다.

 

결국 AC.152는 매우 짧은 번호이지만 창2 후반부의 해석을 창3으로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갈빗대와 여자는 인간 남녀의 기원에 관한 문자적 설명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proprium에 관한 깊은 아르카나를 담고 있으며, 특히 여자가 속임을 당한다는 다음 장의 이야기를 통해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동시에 앞 번호들을 함께 읽으면 proprium 자체를 악이라고 단순화해서는 안 되고,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기울어 인간을 속이는 proprium을 구별해야 한다는 사실도 놓치지 않게 됩니다. (AC.152)

 

 

 

AC.153, 창2:22, ‘짓다 -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창2:22) AC.153갈빗대가 ‘여자로 지어졌다’(built into a woman)고 하지만, 앞에서 거듭남을 다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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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1, 창2:22, ‘여자 -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 (AC.151-155)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And the rib which Jehovah God had taken from the man, he built into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 (창2:22) AC.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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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And the rib which Jehovah God had taken from the man, he built into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 (창2:22)

 

AC.151

‘짓는 것’(build)은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는 것을 의미하고, ‘갈빗대’(rib)는 생명을 얻지 못한 인간의 proprium을, ‘여자’(woman)는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하며, ‘그 여자를 사람에게로 이끌어 오신 것’(he brought her to the man)은 그의 proprium이 그에게 허락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 교회의 후손들은 그들의 조상들처럼 천적 인간이 되기를 원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인도 아래 있기를 원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proprium으로 기울었고, 그것이 그들에게 허락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이었으며, 그러므로 ‘여자’(woman)라 하고, 뒤에는 ‘아내’(wife)라고 합니다. By to “build” is signified to raise up what has fallen; by the “rib,” man’s own not vivified; by a “woman,” man’s own vivified by the Lord; by “he brought her to the man,” that what is his own was granted him. The posterity of this church did not wish, like their parents, to be a celestial man, but to be under their own self-guidance; and, thus inclining to their own, it was granted to them, but still an own vivified by the Lord, and therefore called a “woman,” and afterwards a “wife.”

 

해설

AC.151은 창2:22의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라는 말씀의 주요 표현들을 하나씩 풀이하면서, AC.131부터 이어져 온 proprium의 논의를 중요한 지점까지 정리합니다. 특히 이제 ‘갈빗대’와 ‘여자’의 차이가 명확하게 제시됩니다. 갈빗대는 생명을 얻지 못한 인간의 proprium이고, 여자는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인간의 proprium입니다.

 

먼저 ‘짓는 것’(build)은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여자를 지으신다는 것은 속뜻에서 전혀 없던 어떤 독립적인 proprium을 새로 만들어 인간에게 붙여 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에서 인간은 이미 자기 자신의 인도를 원하며 proprium으로 기울었습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그 상태에 있는 인간을 그대로 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라, 그 proprium이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얻도록 하십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짓는다’는 것은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는 의미를 가집니다.

 

‘갈빗대’(rib)는 AC.147-149에서 설명한 것처럼 생명을 얻지 못한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합니다. 인간에게는 이것이 매우 소중하고 심지어 모든 것처럼 보이지만, 그 자체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AC.149에서는 인간의 proprium이 천국에서 볼 때 생명 없는 뼈처럼 보이지만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으면 살처럼 보인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갈빗대에서 여자가 지어지는 장면은 그 자체로 죽어 있는 proprium이 그대로 존속한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역사로 생명을 얻는 방향으로 변화되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 때문에 ‘여자’(woman)는 이제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합니다. 이 대목은 앞의 AC.138을 읽을 때 우리가 조심스럽게 유보했던 부분을 본문 자체가 확정해 줍니다. AC.138에서는 ‘그를 돕는 배필’이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하고 뒤에서 ‘여자로 지어진 갈빗대’라고 한다는 정도까지만 설명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때에는 ‘여자’를 문맥과 관계없이 언제나 proprium을 뜻하는 고정된 상응으로 만들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AC.151에 이르러서야 현재 창2:22의 문맥에서 ‘여자’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직접 밝혀집니다. 곧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인간의 proprium’입니다.

 

‘그 여자를 사람에게로 이끌어 오신 것’(he brought her to the man)은 그의 proprium이 그에게 허락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 역시 AC.132 이후 반복되어 온 ‘허락된 proprium’의 주제와 연결됩니다. 인간은 주님께만 인도받는 천적 상태에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인도 아래 있기를 원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욕구 자체를 인간 안에 악으로 주입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허용하셨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이 원하는 proprium을 그 자체로 죽어 있는 상태에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proprium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둘째 문단에서 스베덴보리는 이 역사적·교회적 배경을 다시 분명히 합니다. 여기서 다루는 사람들은 태고교회의 후손들입니다. 그들은 조상들처럼 천적 인간이 되어 주님의 직접적인 인도 아래 있기를 원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인도 아래 있기를 원했습니다. 바로 이 욕구 때문에 proprium으로 기울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이 기울어진 상태에서조차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에게 proprium이 허락되었지만, 그것은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이었습니다. 이 점이 창2의 이 장면을 단순한 타락의 묘사로만 읽을 수 없게 합니다.

 

여기서 AC.147의 ‘깊은 잠’도 다시 의미를 갖습니다. 인간은 자기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살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고 여기며, 자기에게 속한 것을 가진 것처럼 느낍니다. 그러나 AC.149-150에서 밝혀졌듯 실제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이제 AC.151은 인간이 원했던 바로 그 proprium이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어 그에게 허락되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역사는 인간에게 자기 경험을 빼앗아 자기 자신이 없는 존재로 만드는 데 있지 않고, 인간이 자기 것으로 경험하는 proprium이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때문에 그것을 ‘여자’(woman)라 하고 뒤에는 ‘아내’(wife)라고 한다고 말합니다. 현재 번호에서는 아직 ‘여자’와 ‘아내’라는 두 표현 사이의 차이를 자세히 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그 차이에 별도의 의미를 만들어 넣을 필요는 없습니다. 현재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문맥의 ‘여자’가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인간의 proprium이며, 그 proprium이 인간에게 허락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음 설명에서 이 여자가 사람과 어떤 관계를 이루는지가 더 밝혀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AC.151)

 

 

 

AC.152, 창2:22, ‘여자가 proprium을 의미하는 이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창2:22) AC.152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도 여자가 남자의 갈빗대에서 형성된 것이 아니며,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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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0, 창2:21, ‘깊은 잠 - 자기 자신으로부터 산다고 여기는 상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창2:21) AC.150인간이 자신의 proprium 안에 있을 때, 곧 자기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산다고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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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창2:21)

 

AC.150

인간이 자신의 proprium 안에 있을 때, 곧 자기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산다고 여길 때의 상태는 ‘깊은 잠’(deep sleep)에 비유되며, 실제로 고대인들은 그것을 깊은 잠이라고 했습니다. 말씀에서도 그러한 사람들에 관하여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셨다’(poured out upon them the spirit of deep sleep)고 하며(사29:10), 또 그들이 잠을 잔다고 합니다. (렘51:57) The state of man when in his own, or when he supposes that he lives from himself, is compared to “deep sleep,” and indeed by the ancients was called deep sleep; and in the Word it is said of such that they have “poured out upon them the spirit of deep sleep” (Isa. 29:10), and that they sleep a sleep (Jer. 51:57).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그가 선지자들과 너희의 지도자인 선견자들을 덮으셨음이라 (사29:10)

 

만군의 여호와라 일컫는 왕이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그 고관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도백들과 태수들과 용사들을 취하게 하리니 그들이 영원히 잠들어 깨어나지 못하리라 (렘51:57)

 

인간의 proprium은 그 자체로 죽어 있으며 누구도 자기 자신으로부터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영계에서 너무도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자기들의 proprium 외에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고, 자기들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산다고 완고하게 주장하던 악한 영들도 감각적인 경험을 통해 확신하게 되었고, 마침내 자기들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사는 것이 아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여러 해 동안 특별한 방식으로 인간의 proprium이 실제로 어떠한지를 알도록 허락되었으며, 제가 자기 자신으로부터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고 모든 생각의 관념이 흘러든다는 것을 분명하게 퍼셉션하도록 허락되었습니다. 때로는 그것이 어떻게, 그리고 어디에서 흘러드는지도 퍼셉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산다고 여기는 사람은 거짓된 것 안에 있으며, 자기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산다고 믿음으로써 모든 악과 거짓을 자기에게 귀속시킵니다. 만일 그의 믿음이 사물의 실제 진상과 일치한다면 그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That man’s own is in itself dead, and that no one has any life from himself, has been shown so clearly in the world of spirits, that evil spirits who love nothing but their own, and obstinately insist that they live from themselves, were convinced by sensible experience, and were forced to confess that they do not live from themselves. For a number of years I have been permitted in an especial manner to know how the case is with what is man’s own, and it has been granted to me to perceive clearly that I could think nothing from myself, but that every idea of thought flows in, and sometimes I could perceive how and whence it flowed in. The man who supposes that he lives from himself is therefore in what is false, and by believing that he lives from himself appropriates to himself everything evil and false, which he would never do if his belief were in accordance with the real truth of the case.

 

해설

AC.150은 AC.147에서 ‘깊은 잠’(deep sleep)으로 설명했던 상태를 다시 받아 그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밝힙니다. 인간이 proprium 안에 있으면서 자기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산다고 여기는 상태가 바로 깊은 잠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자신이 새롭게 만들어 낸 비유만이 아니라 고대인들도 그렇게 표현했으며, 말씀에도 깊은 잠이라는 표현이 같은 의미를 담아 사용되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창2:21에서 아담에게 깊은 잠이 임한 것은 속뜻에서 단순한 육체적 수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생명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두고 있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 설명은 AC.147보다 한층 분명합니다. AC.147에서는 사람이 깊은 잠과 같은 상태에 있을 때 자기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살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고 여긴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50에서는 그 상태를 ‘거짓된 것 안에 있는’ 상태라고 명시합니다. 인간이 실제로 살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는 경험 자체가 거짓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 생명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라고 여기는 것이 거짓이라는 뜻입니다. 바로 앞의 AC.149에서 인간 안에 살아 있는 것은 무엇이든 주님의 생명으로부터 온다고 했기 때문에 이 의미는 더욱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 이 사실이 영계에서 감각적인 경험을 통하여 확인되었다고 말합니다. 특히 자기들의 proprium만을 사랑하고 자기들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산다고 완고하게 주장하던 악한 영들조차 경험을 통하여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단순한 철학적 추론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영계에서 관찰하고 경험한 것으로 이 주장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 자신의 증언이라는 사실과, 그 증언을 바탕으로 그가 제시하는 교리적 설명을 구별하면서 읽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경험을 직접 말합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인간의 proprium이 실제로 어떠한지를 특별한 방식으로 알도록 허락되었고, 자신이 자기 자신으로부터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으며 모든 생각의 관념이 흘러든다는 것을 분명하게 퍼셉션했다고 합니다. 때로는 그 생각이 어떻게 그리고 어디에서 흘러드는지도 퍼셉션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조심스럽게 기다려 온 ‘생명과 생각의 근원’ 문제에 대해 AC 본문 자체가 처음부터 상당히 강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인간은 생각의 독립적인 원천이 아니라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직접적인 주장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곧바로 ‘그러면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모든 생각과 행동에 책임도 없는가?’라고 결론 내려서는 안 됩니다. AC.150의 마지막 문장이 오히려 반대 방향을 보여 줍니다. 자기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산다고 믿는 사람은 바로 그 믿음 때문에 악과 거짓을 자기에게 귀속시킨다고 합니다. 따라서 생명이 자기에게서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은 인간의 책임을 없애기 위한 가르침으로 제시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무엇을 자기에게 귀속시키는가 하는 문제가 함께 등장합니다. 다만 자유와 책임, 유입과 귀속의 관계가 정확히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는 현재 번호 하나만으로 모두 설명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모든 생각의 관념이 흘러든다’는 문장은 매우 강하기 때문에 현재 독자가 지나치게 확대해서 읽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AC.150이 직접 말하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으며 모든 생각의 관념이 흘러든다는 것을 퍼셉션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곧바로 ‘그러므로 인간에게 사고 능력도 없고 판단도 없으며 모든 생각은 외부 존재가 강제로 집어넣는 것이다’라고 바꾸어 말하면 본문보다 나아갑니다. 앞의 AC.149에서도 인간은 ‘생명의 기관’이라고 하면서 동시에 ‘그 기관의 성질에 따라 생명의 애정도 그러하다’고 했습니다. 인간이 생명의 근원은 아니지만, 받아들이는 인간의 상태와 성질이 무의미한 것은 아닙니다.

 

마지막 문장은 그래서 특별히 중요합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산다고 믿으면 악과 거짓을 자기에게 귀속시키지만, 자신의 믿음이 ‘사물의 실제 진상’과 일치한다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거듭남의 중요한 방향 하나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인간이 깨어난다는 것은 자신에게 아무것도 없는 존재라고 느끼며 자기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과 선과 진리의 근원이 자기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실제 질서를 알아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AC.147에서 ‘이것이 거짓임을 알기 시작할 때’ 잠에서 깨어난다고 했던 말이 AC.150에서 한층 구체적인 내용을 얻게 됩니다.

 

따라서 AC.147-150은 하나의 매우 긴밀한 흐름을 이룹니다. 인간에게는 자기 자신의 것처럼 보이는 proprium이 있고, 그 상태에서는 자기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살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인간의 proprium은 그 자체로 죽어 있으며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이제 AC.150은 생각 역시 자기 자신에게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흘러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실제 질서를 알지 못하고 자기 자신을 생명의 근원으로 여기면 악과 거짓을 자기에게 귀속시키게 됩니다. ‘깊은 잠’에서 깨어난다는 것은 바로 이 생명의 실제 질서를 알아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AC.150)

 

 

 

AC.151, 창2:22, ‘여자 -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 (AC.151-155)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And the rib which Jehovah God had taken from the man, he built into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 (창2:22) AC.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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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9, 창2:21, ‘죽어 있는 인간의 proprium과 생명을 주시는 주님의 proprium’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창2:21) AC.149말씀에서도 인간의 proprium은 ‘뼈들’(bones)로 의미되며, 실제로는 주님에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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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창2:21)

 

AC.149

말씀에서도 인간의 proprium은 ‘뼈들’(bones)로 의미되며, 실제로는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이 의미됩니다. 이사야에서는, In the Word also, man’s own is signified by “bones,” and indeed an own vivified by the Lord, as in Isaiah: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사58:11) Jehovah shall satisfy thy soul in droughts, and make thy bones alert, and thou shalt be like a watered garden. (Isa. 58:11)

 

너희가 이를 보고 마음이 기뻐서 너희 뼈가 연한 풀의 무성함 같으리라 여호와의 손은 그의 종들에게 나타나겠고 그의 진노는 그의 원수에게 더하리라 (사66:14) Then shall ye see, and your heart shall rejoice, and your bones shall sprout as the blade. (Isa. 66:14)

 

시편에서는, In David:

 

내 모든 뼈가 이르기를 여호와와 같은 이가 누구냐 그는 가난한 자를 그보다 강한 자에게서 건지시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노략하는 자에게서 건지시는 이라 하리로다 (시35:10) All my bones shall say, Jehovah, who is like unto thee? (Ps. 35:10)

 

라고 합니다. 이것은 에스겔에서 더욱 분명한데, 거기서는 뼈들이 살을 얻고 그 안에 영이 들어가는 것에 관하여 말합니다. This is still more evident from Ezekiel, where he speaks of bones receiving flesh, and having spirit put into them:

 

1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4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5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6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겔37:1, 4-6) The hand of Jehovah set me in the midst of the valley, and it was full of bones; and he said to me, prophesy upon these bones, and say unto them, O ye dry bones, hear the word of Jehovah; thus saith the Lord Jehovih to these bones, Behold, I bring breath [spiritus] into you, and ye shall live, and I will lay sinews upon you, and will make flesh come upon you, and cover you with skin, and I will put breath in you, and ye shall live, and ye shall know that I am Jehovah. (Ezek. 37:1, 4–6)

 

[2] 인간의 proprium은 천국에서 볼 때 전적으로 뼈로만 이루어진 듯하고 생명이 없으며 매우 추한 어떤 것으로 나타나며, 따라서 그 자체로 죽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으면 살처럼 보입니다. 인간의 proprium은 그 자체로는 단지 죽은 것에 지나지 않지만, 인간에게는 그것이 어떤 것, 참으로 모든 것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인간 안에서 살아 있는 것은 무엇이든 주님의 생명으로부터 오며, 만일 이것이 거두어진다면 그는 돌처럼 죽어 쓰러질 것입니다. 인간은 단지 생명의 기관일 뿐이며, 그 기관의 성질에 따라 생명의 애정도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본래적으로 자기 자신의 것, 곧 주님의 proprium을 가지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이 proprium으로 인간을 구속하셨고, 이 proprium으로 인간을 구원하십니다. 주님의 proprium은 생명이며, 그분의 proprium으로부터 그 자체로는 죽어 있는 인간의 proprium이 살아 있게 됩니다. 주님의 proprium은 누가복음에 있는 주님의 말씀으로도 의미됩니다. The own of man, when viewed from heaven, appears like a something that is wholly bony, inanimate, and very ugly, consequently as being in itself dead, but when vivified by the Lord it looks like flesh. For man’s own is a mere dead thing, although to him it appears as something, indeed as everything. Whatever lives in him is from the Lord’s life, and if this were withdrawn he would fall down as dead as a stone; for man is only an organ of life, and such as is the organ, such is the life’s affection. The Lord alone has what is his own; by this own he redeemed man, and by this own he saves him. The Lord’s own is life, and from his own, man’s own, which in itself is dead, is made alive. The Lord’s own is also signified by the Lord’s words in Luke: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눅24:39) A spirit hath not flesh and bones as ye see me have. (Luke 24:39)

 

또한 유월절 어린 양의 뼈를 하나도 꺾지 말라고 한 것으로도 이를 의미했습니다. (출12:46) It was also meant by not a bone of the paschal lamb being broken (Exod. 12:46).

 

한 집에서 먹되 그 고기를 조금도 집 밖으로 내지 말고 뼈도 꺾지 말지며 (출12:46)

 

해설

AC.149는 AC.147-148에서 설명한 뼈와 살의 의미를 말씀의 여러 구절로 확증하면서, 인간의 proprium과 주님의 생명의 관계를 한층 깊이 밝힙니다. AC.147에서는 갈빗대가 생명력이 거의 없지만 인간에게 소중한 proprium을 의미하고, 갈빗대 대신의 살은 생명력이 있는 proprium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AC.148에서는 뼈가 생명력이 극히 적은 것들을, 살이 생명력이 있는 것들을 나타낸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149는 이러한 의미가 창2의 갈빗대 한 구절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다른 곳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사야의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희의 뼈가 연한 풀의 무성함 같으리라’, 시편의 ‘내 모든 뼈가 이르기를 여호와와 같은 이가 누구냐’라는 표현에서 뼈는 단순한 육체의 골격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인간의 proprium, 특히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이 의미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뼈가 proprium을 의미한다고 해서 언제나 죽어 있는 악한 proprium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생명을 주심으로 살아 있게 된 proprium도 말씀에서 뼈로 표현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의미는 에스겔 37장의 마른 뼈 환상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골짜기에 가득한 마른 뼈들은 그 자체로는 생명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말씀에 따라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가죽이 덮이고 생기가 들어가자 살아납니다. AC.149에서 이 본문을 인용하는 이유는 바로 AC.147-148의 설명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 자체로는 생명이 거의 없는 뼈와, 생명이 들어와 살을 얻고 살아나는 상태의 대비가 인간의 proprium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관계를 드러냅니다.

 

[2]에서 스베덴보리는 이 의미를 더욱 직접적으로 설명합니다. 인간의 proprium을 천국에서 보면 전적으로 뼈로만 이루어진 듯하고 생명이 없으며 매우 추하게 나타나고, 그 자체로는 죽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얻으면 살처럼 보입니다. 여기서 뼈와 살의 차이는 단순히 인간의 자연적인 신체 조직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있는 인간의 proprium’과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은 proprium’의 차이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인간 자신에게는 이와 정반대로 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proprium이 그 자체로는 죽어 있는데도 인간에게는 그것이 ‘어떤 것’, 더 나아가 ‘모든 것’인 것처럼 보인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자연스럽게 ‘내가 살고, 내가 생각하고, 내가 말하고, 내가 행동한다’고 느끼며, 그 생명의 근원이 자기 안에 있다고 여깁니다. AC.147에서는 바로 이 상태를 ‘깊은 잠’에 비유했습니다. 이제 AC.149는 왜 그것이 잠과 같은지를 더욱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인간 안에서 실제로 살아 있는 것은 무엇이든 주님의 생명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인간은 단지 생명의 기관일 뿐이며, 그 기관의 성질에 따라 생명의 애정도 그러하다’는 문장은 이 번호의 핵심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기서 인간이 ‘기관’이라는 말은 인간이 아무 역할도 하지 않는 무생물이라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현재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생명의 ‘근원’입니다. 인간은 생명의 근원이 아니며 생명을 자기 안에서 스스로 만들어 내지 않습니다.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오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상태가 어떠한가에 따라 그 생명이 인간 안에서 나타나는 애정의 성질도 달라집니다. 따라서 이 문장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상태를 동시에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proprium과 주님의 proprium 사이에 결정적인 구별을 둡니다. ‘오직 주님만이 본래적으로 자기 자신의 것, 곧 주님의 proprium을 가지고 계십니다.’ 인간의 proprium은 그 자체로 생명이 아니지만, 주님의 proprium은 생명입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이 자신의 것으로 인간을 구속하셨고 구원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proprium으로부터 그 자체로 죽어 있는 인간의 proprium이 살아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인간의 proprium이 살아난다는 것은 인간이 마침내 독립적인 생명의 근원을 갖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을 받아 살아 있는 proprium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 점에서 눅24:39의 부활하신 주님의 말씀,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가 인용되는 이유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의 살과 뼈를 주님의 proprium과 연결합니다. 주님의 경우에는 인간처럼 그 자체로 죽어 있는 proprium이 아니라 생명 자체인 신적 proprium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어 출12:46에서 유월절 어린 양의 뼈를 하나도 꺾지 말라고 한 말씀까지 같은 맥락에서 제시됩니다. 현재 번호에서는 이 두 본문의 모든 세부 상응을 풀지 않고, 주님의 proprium이라는 중심 의미를 확인하는 데 사용합니다.

 

AC.149를 지나면서 AC.140 이후 계속되어 온 중요한 문제가 상당히 선명해집니다. 인간에게는 자기 자신의 것처럼 보이는 proprium이 있고, 그 때문에 자기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살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그것은 생명의 실제 근원에 관한 참된 인식이 아닙니다. 인간의 proprium은 그 자체로는 죽어 있으며, 주님의 proprium만이 생명입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인간의 proprium을 없애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으로 그것을 살아 있게 하십니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흐름은 ‘proprium을 제거하여 인간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죽어 있는 proprium이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살아 있게 되는 것’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AC.149)

 

 

 

AC.150, 창2:21, ‘깊은 잠 - 자기 자신으로부터 산다고 여기는 상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창2:21) AC.150인간이 자신의 proprium 안에 있을 때, 곧 자기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산다고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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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8, 창2:21, ‘왜 proprium을 갈빗대라고 하는가 - 가슴과 뼈와 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창2:21) AC.148인간의 proprium, 곧 그에게 소중한 proprium을 가슴의 뼈인 ‘갈빗대’(rib)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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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창2:21)

 

AC.148

인간의 proprium, 곧 그에게 소중한 proprium을 가슴의 뼈인 ‘갈빗대’(rib)라고 하는 까닭은,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가슴은 심장과 폐를 모두 담고 있기 때문에 체어리티를 의미했고, 뼈는 생명력이 극히 적기 때문에 더 비천한 것들을 의미했으며, 살은 생명력이 있는 것들을 나타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미들의 근거는 태고교회 사람들이 알고 있던 가장 깊은 아르카나 가운데 하나이며, 이에 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뒤에서 다루겠습니다. The reason why what is man’s own (and indeed an own which is dear to him) is called a “rib,” which is a bone of the chest, is that among the most ancient people the chest signified charity, because it contains both the heart and the lungs; and bones signified the viler things, because they possess a minimum of vitality; while flesh denoted such as had vitality. The ground of these significations is one of the deepest arcana known to the men of the most ancient church, concerning which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해설

AC.148은 AC.147에서 인간의 proprium을 ‘갈빗대’(rib)라고 한 이유를 설명합니다. AC.147에서는 갈빗대가 생명력이 거의 없으면서도 인간에게 소중한 proprium을 의미하고, 갈빗대 대신의 살은 생명력이 있는 proprium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48은 왜 이러한 의미가 갈빗대와 살에 담길 수 있는지를 태고교회 사람들이 알고 있던 신체의 상응을 통해 설명합니다.

 

먼저 가슴은 체어리티를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제시하는 이유는 가슴 안에 심장과 폐가 함께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현재 번호에서는 심장과 폐가 각각 무엇을 의미하며, 그것들이 어떻게 함께 체어리티와 연결되는지까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심장은 사랑이고 폐는 신앙이라는 식으로 뒤의 설명을 미리 가져와 체계를 완성하기보다, 우선 ‘가슴은 심장과 폐를 함께 담고 있기 때문에 체어리티를 의미한다’는 AC.148의 직접적인 설명을 그대로 붙드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음으로 뼈는 ‘더 비천한 것들’을 의미합니다. 그 이유는 뼈에 생명력이 극히 적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AC.147에서 갈빗대가 생명력이 거의 없는 proprium을 의미한다고 한 배경입니다. 여기서 ‘비천하다’는 말을 곧바로 ‘악하다’와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제시하는 근거는 뼈가 악한 신체 부위이기 때문이 아니라 생명력이 극히 적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대목의 초점은 도덕적인 악의 판정이라기보다 생명력의 정도에 있습니다.

 

반대로 살은 생명력이 있는 것들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AC.147의 ‘갈빗대 대신의 살’이라는 표현에는 생명력이 거의 없는 proprium과 생명력이 있는 proprium 사이의 차이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AC.148 역시 그 변화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까지는 아직 설명하지 않습니다. 지금 단계에서 분명한 것은 갈빗대와 살의 차이가 단순히 신체 조직의 차이가 아니라, 속뜻에서는 생명력이 거의 없는 것과 생명력이 있는 것의 차이를 나타낸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특히 조심해야 할 것은 신체의 특징을 관찰하여 우리가 새로운 상응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슴에는 심장과 폐가 있으니 이런 뜻일 것이다’, ‘뼈는 단단하니 이런 성질을 뜻할 것이다’라는 식으로 자유롭게 상징을 추론하도록 초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의미들의 근거가 태고교회 사람들이 알고 있던 ‘가장 깊은 아르카나 가운데 하나’라고 명시합니다. 따라서 현재 본문에서 밝혀진 가슴과 뼈와 살의 의미는 받아들이되, 그 이상의 세부 관계는 스베덴보리가 뒤에서 직접 설명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안전합니다.

 

이 점은 지금까지 살펴본 고대인들의 상응 이해와도 연결됩니다. AC.143에서는 고대인들이 천국적인 관념 안에 있었고 영계에서 애정들이 동물로 표상되기 때문에 짐승을 통해 애정을 말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AC.144에서는 이름이 본질과 성질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그 성질을 아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48에서는 인간 신체의 가슴과 뼈와 살에도 태고교회 사람들이 알고 있던 깊은 의미가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자연적인 대상과 영적인 실재의 관계가 동물이나 이름에만 한정되지 않고 인간의 몸에도 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바로 여기서 멈춥니다. 그 근거가 ‘가장 깊은 아르카나 가운데 하나’라고 밝힌 뒤 ‘주님의 신적 자비로 뒤에서’ 설명하겠다고 합니다. 이 유보 자체가 현재 독자에게 중요한 지침이 됩니다. 갈빗대가 왜 proprium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첫 번째 답은 얻었습니다. 가슴은 체어리티를 의미하고, 갈빗대는 그 가슴의 뼈이며, 뼈는 생명력이 극히 적은 것을 의미하고, 살은 생명력이 있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 이상의 깊은 근거는 아직 독자에게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AC.148은 AC.147의 갈빗대와 살의 대비에 상응적 근거를 제공하면서도 동시에 해석의 경계를 분명히 정해 주는 번호입니다. 인간에게 소중하지만 생명력이 거의 없는 proprium이 왜 ‘갈빗대’로 표현되는지 이제 어느 정도 알 수 있게 되었지만, 그 상응의 가장 깊은 질서는 아직 설명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스베덴보리가 밝혀 준 만큼 정확히 이해하고, 그가 뒤에서 다시 이 아르카나를 열어 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이 번호를 읽는 가장 적절한 태도입니다. (AC.148)

 

 

 

AC.149, 창2:21, ‘죽어 있는 인간의 proprium과 생명을 주시는 주님의 proprium’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창2:21) AC.149말씀에서도 인간의 proprium은 ‘뼈들’(bones)로 의미되며, 실제로는 주님에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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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7, 창2:21, ‘갈빗대와 깊은 잠 - 자기에게서 사는 것처럼 보이는 상태’ (AC.147-150)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And Jehovah God caused a deep sleep to fall upon the man, and he slept; and he took one of his ribs, and closed up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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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And Jehovah God caused a deep sleep to fall upon the man, and he slept; and he took one of his ribs, and closed up the flesh in the place thereof. (창2:21)

 

AC.147

가슴의 뼈인 ‘갈빗대’(rib)는 생명력이 거의 없는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하며, 실제로는 그에게 소중한 proprium을 의미합니다. ‘갈빗대 대신의 살’(flesh in the place of the rib)은 생명력이 있는 proprium을 의미합니다. ‘깊은 잠’(deep sleep)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에게 속한 것을 가진 것처럼 스스로에게 보이게 하기 위하여 들어가도록 허용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상태는 잠과 비슷한데, 그 안에 있는 동안 사람은 자기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살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고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거짓임을 알기 시작할 때, 그는 마치 잠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일깨워져 깨어 있게 됩니다. By a “rib,” which is a bone of the chest, is meant man’s own, in which there is but little vitality, and indeed an own which is dear to him; by “flesh in the place of the rib” is meant an own in which there is vitality; by a “deep sleep” is meant the state into which he was let so that he might seem to himself to have what is his own, which state resembles sleep, because while in it he knows not but that he lives, thinks, speaks, and acts, from himself. But when he begins to know that this is false, he is then roused as it were out of sleep, and becomes awake.

 

해설

AC.147은 이제 창2:21의 ‘갈빗대’와 ‘깊은 잠’을 직접 설명하면서, AC.132부터 계속 다루어 온 proprium의 문제가 어떻게 인간의 실제 경험 속에 자리 잡게 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앞에서는 인간이 proprium을 원했고, 주님께서 그에게 마치 자기 자신의 것인 듯 보이는 proprium을 허락하셨다고 했습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그 상태를 갈빗대와 살, 그리고 깊은 잠이라는 표현으로 설명합니다.

 

먼저 ‘갈빗대’(rib)는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두 가지 중요한 설명을 덧붙입니다. 그것은 ‘생명력이 거의 없는’ proprium이며, 동시에 인간에게 ‘소중한’ proprium입니다. 이 둘은 함께 보아야 합니다. 인간은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느껴지는 것을 매우 소중하게 여기지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그것 자체에는 참된 생명이 거의 없습니다. 앞에서 계속 말해 온 것처럼 실제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가장 자기 것이라고 여기고 애착을 가지는 바로 그것이, 그 자체로는 생명의 근원이 아니라는 역설이 여기서 드러납니다.

 

이어 ‘갈빗대 대신의 살’(flesh in the place of the rib)은 생명력이 있는 proprium을 의미합니다. AC.147은 아직 갈빗대가 어떻게 살로 바뀌며 그 변화가 어떤 과정을 뜻하는지를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적어도 생명력이 거의 없는 proprium과 생명력이 있는 proprium 사이에 분명한 차이를 둡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proprium을 하나의 고정된 부정적 개념으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앞의 AC.141에서 천적 인간과 천사에게 주님께서 주시는 proprium이 있다고 했던 것처럼, 이제 갈빗대와 살의 대비를 통해 proprium의 성질이 변화될 수 있다는 방향이 다시 나타납니다.

 

‘깊은 잠’(deep sleep)의 의미는 더욱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사람이 자기에게 속한 것을 가진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하여 들어가도록 허용된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핵심은 인간이 정말로 주님과 독립된 생명의 근원을 갖게 된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그렇게 ‘보이는’ 상태가 허용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AC.140의 ‘마치 자기 자신의 것인 듯 보이는 proprium’이라는 표현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상태를 잠에 비유하는 이유도 바로 이어서 설명됩니다. 사람은 그 상태 안에 있는 동안 자기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살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고 여깁니다. 그는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생명과 사고와 말과 행동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AC.147은 이것을 사실 그대로의 인식이 아니라 ‘잠과 같은 상태’로 설명합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독립적인 생명의 근원으로 여기는 동안에는 생명의 실제 근원을 아직 깨어서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문장에서 중요한 전환이 일어납니다. 사람이 ‘이것이 거짓임을 알기 시작할 때’ 그는 마치 잠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일깨워져 깨어 있게 된다고 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자기에게서 살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고 느끼는 경험 자체를 없애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 경험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인식입니다.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알기 시작할 때 비로소 인간은 잠에서 깨어나는 것과 같은 상태로 들어갑니다.

 

이 설명은 AC.140-141에서 제시한 proprium의 구조를 한층 더 분명하게 합니다. 인간에게는 자기 자신의 것처럼 보이는 proprium이 주어지고, 천적 인간과 천사에게도 proprium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proprium 안에는 주님의 것들이 있고 주님께서 그것을 다스리십니다. 따라서 인간이 깨어난다는 것은 자기 삶의 경험을 잃는 것이 아니라, 그 삶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임을 알아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현재 AC.147이 직접 말하는 범위 안에서는 여기까지가 가장 안전한 설명입니다.

 

따라서 AC.147의 ‘깊은 잠’은 단순한 육체적 수면을 넘어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살아간다고 여기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갈빗대’는 인간이 소중히 여기지만 생명력이 거의 없는 proprium을, ‘갈빗대 대신의 살’은 생명력이 있는 proprium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사람이 자기 자신이 생명의 근원이라는 생각이 거짓임을 알기 시작할 때 그는 잠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깨어 있게 됩니다. 이제 이어지는 설명에서는 이 proprium이 어떻게 ‘여자’로 지어지는지가 더욱 구체적으로 밝혀질 것입니다. (AC.147)

 

 

 

AC.148, 창2:21, ‘왜 proprium을 갈빗대라고 하는가 - 가슴과 뼈와 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창2:21) AC.148인간의 proprium, 곧 그에게 소중한 proprium을 가슴의 뼈인 ‘갈빗대’(rib)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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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6, 창2:19-20, ‘선과 진리를 알고도 proprium으로 기울다’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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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창2:19, 20)

 

AC.146

지금까지 말한 것으로부터 여기서 의미하는 것들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18절에서는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 help as with him)라고 하며, 곧이어 이미 앞에서 다루었던 ‘짐승들’(beasts)과 ‘새들’(birds)이 언급됩니다. 그리고 곧바로 다시 ‘사람을 위하여 그를 돕는 배필을 찾지 못했다’(for the man there was not found a help as with him)고 합니다. 이것은 그가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에 관하여 그것들이 어떠한 성질을 지니는지 알도록 허락되었음에도 여전히 proprium으로 기울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자기 자신의 것을 원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것들이 아무리 분명하게 자신들에게 표상되고 보여진다 해도 그것들을 업신여기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From what has been stated, the connection of what is signified may be seen. In verse 18 it is said,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 help as with him,” and presently “beasts” and “birds” are spoken of, which nevertheless had been treated of before, and immediately it is repeated that “for the man there was not found a help as with him,” which denotes that although he was permitted to know his quality as to the affections of good, and knowledges of truth, still he inclined to his own; for those who are such as to desire what is their own, begin to despise the things of the Lord, however plainly they may be represented and shown to them.

 

해설

AC.146은 AC.138부터 이어져 온 창2:18-20의 설명을 하나로 연결합니다. 문자 그대로 읽으면 조금 이상해 보이는 순서가 있습니다. 창2:18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시겠다고 하신 뒤, 곧바로 이미 창1에서 다루었던 짐승들과 새들이 다시 등장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그것들에게 이름을 준 뒤에는 다시 사람을 위하여 돕는 배필을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AC.146은 이 반복과 배열이 속뜻에서는 하나의 연속된 인간 상태를 보여 준다고 설명합니다.

 

먼저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다’는 것은 AC.138-140에서 설명한 것처럼, 태고교회의 후손들이 주님께만 인도받는 천적 상태에 더 이상 만족하지 않고 proprium을 원하기 시작한 상태를 나타냅니다. 여기서 ‘혼자’는 본래 결핍이나 고독을 뜻하지 않았습니다. AC.139에서 살펴본 것처럼 주님의 인도 아래 악으로부터 구별되어 있는 천적 인간의 상태가 ‘혼자 거하는’ 것으로 표현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후손들은 그 상태를 더 이상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왜 바로 다음에 짐승들과 새들이 등장하는가 하는 질문이 생깁니다. AC.142에서 그 이유가 밝혀졌습니다. 짐승들은 천적 애정들, 곧 의지에 속한 것들을 의미하고, 새들은 영적 애정들, 곧 이해에 속한 것들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그것들을 사람에게로 이끄신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 성질을 알게 하신 것이며, 사람이 이름을 준 것은 실제로 그 성질을 알았다는 뜻입니다. AC.143-145는 다시 왜 동물이 애정을 의미하며 왜 이름을 주는 것이 그 성질을 아는 것을 의미하는지를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짐승들과 새들의 등장은 창2:18의 흐름을 중단시키는 삽입이 아니라 그 다음 단계입니다.

 

이제 AC.146에서 그 연결이 선명해집니다. 사람은 proprium으로 기울었지만, 그 즉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내버려진 것이 아닙니다. 그는 먼저 주님께서 주신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이 어떠한지를 알도록 허락되었습니다. 이것은 AC.133에서 이미 요약되어 있던 내용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에게 주신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을 알고도 사람은 여전히 proprium으로 기울었습니다. 그래서 짐승들과 새들의 이름을 모두 준 뒤에도 ‘사람을 위하여 그를 돕는 배필을 찾지 못했다’고 다시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앞 번호들의 내용을 연결하는 설명이지만, AC.146의 마지막 문장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자기 자신의 것을 원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것들이 아무리 분명하게 자신들에게 표상되고 보여진다 해도 그것들을 업신여기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인간이 선과 진리를 몰라서 proprium으로 기울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을 알고, 그것들이 무엇인지까지 분명하게 보면서도 자기 자신의 것을 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업신여기기 시작한다’는 표현도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사람들이 처음부터 주님의 모든 것을 완전히 거부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의 것을 원하는’ 데서 시작하여 주님의 것들을 업신여기기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지금 묘사되는 것은 하나의 진행 과정입니다. 주님께로부터 오는 것을 자기 삶의 근원으로 받아들이는 질서에서 벗어나 자기에게서 나온 것을 원하기 시작할 때, 이미 알고 있는 주님의 선과 진리조차 점차 낮게 평가하게 되는 방향이 시작됩니다.

 

이것은 AC.140-141에서 설명한 proprium의 구별과 함께 읽을 때 더욱 중요합니다. AC.141에서는 천적 인간과 천사에게도 주님께서 proprium을 주시며, 그 proprium 안에는 주님의 것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AC.146의 문제는 단순히 ‘proprium이 존재한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인간이 ‘자기 자신의 것’을 원하면서 주님의 것들보다 그것을 앞세우는 방향으로 기울어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proprium이라는 용어를 무조건 악과 동일시하기보다, 그 proprium 안에 무엇이 있으며 인간이 그것을 어떤 근원에서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계속 구별해야 합니다.

 

AC.146은 결국 창2:18-20 전체가 왜 이 순서로 기록되어 있는지를 밝혀 줍니다. 인간은 주님께만 인도받는 천적 상태에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것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가 자신에게 주어진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의 성질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proprium으로 기울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돕는 배필’에 대한 말씀이 짐승들과 새들의 장면을 사이에 두고 다시 반복됩니다. 이제 다음 단계에서는 이 인간에게 proprium이 어떻게 주어지는지가 갈빗대와 여자의 표상으로 더욱 구체적으로 펼쳐지게 됩니다. (AC.146)

 

 

 

AC.147, 창2:21, ‘갈빗대와 깊은 잠 - 자기에게서 사는 것처럼 보이는 상태’ (AC.147-150)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And Jehovah God caused a deep sleep to fall upon the man, and he slept; and he took one of his ribs, and closed up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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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5, 창2:19-20, ‘말씀에서 이름은 본질과 성질을 의미하다’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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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창2:19, 20)

 

AC.145

말씀에서도 ‘이름’(name)은 어떤 것의 본질을 의미하고, ‘보고 이름으로 부르는 것’(seeing and calling by name)은 그 성질을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사야에서는, In the Word also by “name” is signified the essence of a thing, and by “seeing and calling by name” is signified to know the quality. As in Isaiah:

 

3네게 흑암 중의 보화와 은밀한 곳에 숨은 재물을 주어 네 이름을 부르는 자가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줄을 네가 알게 하리라 4내가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자 이스라엘 곧 너를 위하여 네 이름을 불러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네게 칭호를 주었노라 (사45:3, 4) I will give thee the treasures of darkness, and hidden riches of secret places, that thou mayest know that I, Jehovah, who call thee by thy name, am the God of Israel. For Jacob my servant’s sake, and Israel my chosen, I have even called thee by thy name, I have surnamed thee, and thou hast not known me. (Isa. 45:3–4)

 

이 구절에서 ‘이름으로 부르는 것’(call by name)과 ‘칭호를 주는 것’(surname)은 그 성질을 미리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In this passage, to “call by name” and to “surname” signifies to foreknow the quality. Again:

 

이방 나라들이 네 공의를, 뭇 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 (사62:2) Thou shalt be called by a new name, which the mouth of Jehovah shall declare, (Isa. 62:2)

 

라고 하는데, 앞뒤 구절에서 분명한 것처럼 이것은 다른 성질을 지니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signifying to become of another character, as appears from the preceding and subsequent verses. Again: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사43:1) Fear not, O Israel, for I have redeemed thee, I have called thee by thy name; thou art mine, (Isa. 43:1)

 

라고 하는데, 이는 그들의 성질을 아셨음을 뜻합니다. 같은 선지서의 또 다른 곳에서는, denoting that he knew their quality. Again in the same prophet: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사40:26) Lift up your eyes on high, and behold who hath created these things, that bringeth out their army by number. He will call them all by name, (Isa. 40:26)

 

라고 하는데, 이는 그들 모두를 아셨음을 의미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meaning that he knew them all. In the Revelation:

 

4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5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계3:4, 5) Thou hast a few names even in Sardis who have not defiled their garments: he that overcometh, the same shall be clothed in white raiment, and I will not blot out his name out of the book of life, but I will confess his name before my Father, and before his angels. (Rev. 3:4–5)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계13:8) Whose names are not written in the lamb’s book of life. (Rev. 13:8)

 

라고 합니다. 이 구절들에서 ‘이름들’(names)은 결코 이름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질들을 의미합니다. 또한 천국에서는 누구의 이름도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그의 성질이 알려집니다. By “names” in these passages are by no means meant names, but qualities; nor is the name of anyone ever known in heaven, but his quality.

 

해설

AC.145는 AC.144에서 설명한 ‘이름’의 의미를 말씀의 여러 구절로 확증합니다. AC.144에서는 고대인들이 이름을 어떤 것의 본질과 관련하여 이해했고,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그 성질을 아는 것으로 이해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45에서는 이것이 단지 고대인의 언어 습관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자체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번에 연이어 인용되는 이사야와 요한계시록의 구절들은 모두 ‘이름’이 단순한 호칭을 넘어 그 사람이나 사물의 본질과 성질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 제시됩니다.

 

먼저 사45:3-4에서 여호와께서는 고레스를 ‘네 이름을 부르는 자’라고 하시고, 그가 여호와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그의 이름을 불러 칭호를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이름으로 부르는 것’과 ‘칭호를 주는 것’이 그 성질을 미리 아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인용의 초점은 하나님께서 단순히 어떤 개인의 고유명사를 알고 계셨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성질과 그가 맡게 될 쓰임을 이미 알고 계신다는 의미가 이름을 부르는 표현 안에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사62:2의 ‘새 이름’은 이 의미를 한층 더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라는 말씀을 다른 성질을 지니게 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이름이 단순한 명칭이라면 새 이름은 호칭의 변경에 지나지 않겠지만, 이름이 성질을 함축한다면 새 이름은 상태와 성질의 변화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의미는 앞뒤 구절에서 분명하다고 덧붙이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름의 의미를 단어 하나에서 임의로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 구절이 놓인 문맥을 통해 확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43:1과 사40:26도 같은 원리를 확인합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는 말씀에서 이름으로 부르시는 것은 그들의 성질을 아시는 것을 의미하고, 하늘의 만상을 수효대로 이끌어 내시며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신다’는 말씀 역시 그 모두를 아신다는 뜻입니다. 여기서도 핵심은 하나님께서 무수한 존재들의 명칭을 기억하신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각 존재가 어떠한지를 온전히 아신다는 의미가 ‘이름을 부르다’라는 말씀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인용에서는 이 원리가 더욱 깊어집니다. 사데 교회 가운데 옷을 더럽히지 않은 ‘몇 명’과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은 단순히 천국의 명부에 사람들의 지상 이름이 적혀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들에서 ‘이름들’(names)은 결코 이름 자체가 아니라 성질들을 의미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따라서 생명책에 이름이 있다는 표현 역시 사람의 외적인 신분이나 명칭보다 그 사람이 실제로 어떠한 상태와 성질 가운데 있는가와 관련하여 이해해야 합니다.

 

이러한 인용들을 거친 뒤 나오는 마지막 문장은 AC.145 전체의 결론입니다. ‘천국에서는 누구의 이름도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그의 성질이 알려집니다.’ 이것은 이름의 상응을 설명하기 위한 매우 강한 진술입니다. 자연계에서는 이름을 통해 사람을 식별하지만,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설명하는 천국의 관점에서는 사람을 규정하는 핵심이 지상에서 사용하던 이름이 아니라 그가 실제로 어떠한 사람인가 하는 성질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이름’이 본질과 성질을 나타내는 것은 단순한 문학적 장치가 아니라, 외적인 명칭보다 내적인 상태가 본질적인 영적 질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제 이것을 다시 창2:19-20으로 가져오면 AC.142의 의미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사람이 짐승들과 새들에게 이름을 주었다는 것은 단지 각각의 동물에게 명칭을 붙였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에게 주신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이 어떠한 성질을 지니는지를 그가 알았다는 뜻입니다. AC.144가 고대인의 이름 짓는 관습을 통해 이것을 설명했다면, AC.145는 말씀 전체의 용례를 통해 같은 원리를 확증합니다. 따라서 AC.142-145는 하나의 연속된 설명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설명은 결국 다시 proprium의 문제로 돌아갑니다.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을 단지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성질까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AC.142가 말하듯 그는 여전히 proprium으로 기울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일련의 이름에 관한 설명은 흥미로운 성경 상징 하나를 알려 주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인간이 주님께 받은 선과 진리를 상당히 분명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자기 자신의 것으로 느껴지는 삶을 원할 수 있다는 사실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바로 그 상태에서 이제 갈빗대와 여자의 의미에 관한 설명이 이어집니다. (AC.145)

 

 

 

AC.146, 창2:19-20, ‘선과 진리를 알고도 proprium으로 기울다’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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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4, 창2:19-20, ‘이름으로 부르다 - 그 본질과 성질을 알다’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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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창2:19-20)

 

AC.144

‘이름으로 부르는 것’(call by name)이 그 성질을 아는 것을 의미하는 까닭은, 고대인들이 ‘이름’(name)을 어떤 것의 본질로 이해했고, ‘보고 이름으로 부르는 것’(seeing and calling by name)을 그 성질을 아는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그 까닭은 그들이 의미되는 것들에 따라 아들과 딸들에게 이름을 지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이름에는 그 이름에 고유한 어떤 것이 들어 있어서, 그것으로부터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그들은 자녀들의 기원과 성질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이 저작에서 주님의 신적 자비로 야곱의 열두 아들을 다루게 될 때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름들이 그 이름으로 지칭되는 것들의 근원과 성질을 함축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름으로 부르는 것’(calling by name)으로 다른 어떤 것도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그들 사이에서 관습적으로 사용되던 말하는 방식이었지만,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러한 것들이 이런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을 이상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That to “call by name” signifies to know the quality, is because the ancients by the “name” understood the essence of a thing, and by “seeing and calling by name” they understood to know the quality. The reason was that they gave names to their sons and daughters according to the things which were signified, for every name had something peculiar in it, from which, and by which, they might know the origin and the nature of their children, as will be seen in a future part of this work, when, of the Lord’s Divine mercy, we come to treat of the twelve sons of Jacob. As therefore the names implied the source and quality of the things named, nothing else was understood by “calling by name.” This was the customary mode of speaking among them, but one who does not understand this may wonder that such things should be signified.

 

해설

AC.144는 AC.142에서 사람이 짐승들과 새들에게 이름을 주었다는 것이 왜 그들의 성질을 알았다는 뜻이 되는지를 직접 설명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이름은 대개 어떤 사람이나 사물을 다른 것과 구별하여 지칭하는 명칭으로 먼저 이해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고대인들에게 이름은 단순한 호칭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름’(name)을 어떤 것의 본질과 관련하여 이해했고, 그래서 ‘보고 이름으로 부르는 것’(seeing and calling by name)을 그 대상의 성질을 아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 배경에는 고대인들의 실제 이름 짓는 방식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들과 딸들에게 임의로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의미하는 것에 따라 이름을 지었습니다. 따라서 이름에는 그 사람에게 고유한 어떤 것이 담겨 있었고, 그 이름을 통하여 자녀의 기원과 성질을 알 수 있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에 대한 구체적인 예를 지금 모두 설명하지 않고, 앞으로 야곱의 열두 아들을 다룰 때 자세히 살펴보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현재 독자는 우선 ‘고대인의 이름은 그 사람의 기원과 성질을 드러내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는 정도를 붙들면 충분합니다.

 

이 설명은 AC.142의 창2:19-20 해석을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주님께서 짐승들과 새들을 사람에게로 이끌어 그가 무엇이라 하는지를 보셨고, 사람이 그것들에게 이름을 주었다는 것은 단순히 최초의 인간이 동물들의 명칭을 정했다는 장면만을 속뜻에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에게 주신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의 성질을 알게 하셨고, 사람이 그것들의 성질을 알았다는 것이 ‘이름을 주는 것’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AC.144는 바로 이 해석의 언어적·고대적 배경을 설명합니다.

 

여기서 특히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이름’, ‘본질’, ‘근원’, ‘성질’을 서로 긴밀하게 연결한다는 점입니다. 어떤 것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단지 그것을 가리키는 소리를 기억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이 어디에서 비롯되며 어떤 성질을 가진 것인지를 아는 것과 관련됩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이름이 중요하게 사용될 때에는 오늘날의 명칭 개념만 가지고 읽기보다, 그 이름이 그 대상에 관하여 무엇을 드러내고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이름은 하나의 고정된 뜻을 가지고 있다’는 식으로 기계적인 규칙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AC.144가 말하는 핵심은 이름이 본질과 근원과 성질을 함축한다는 것이지, 이름 하나마다 문맥과 관계없이 언제나 동일한 한 가지 의미만 적용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말씀의 표현은 현재 다루는 주제와 문맥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름의 의미를 살필 때에도 그 이름이 누구에게 주어졌는지, 어떤 사건 가운데 등장하는지, 그리고 말씀에서 무엇을 드러내는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AC.143과 AC.144를 나란히 놓으면 고대인들의 언어가 조금 더 선명하게 보입니다. AC.143에서는 고대인들이 천국적인 관념 안에 있었기 때문에 동물들을 말하면서 인간 안의 애정들을 의미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44에서는 그들이 이름을 통하여 사물과 사람의 본질과 성질을 이해했다고 설명합니다. 자연적인 대상과 그 이름이 단순히 외적인 사물과 호칭에 머물지 않고 그 안에 담긴 성질을 드러내는 언어로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독자에게는 낯설지만, 고대인들에게는 관습적인 말하는 방식이었다고 스베덴보리는 설명합니다.

 

따라서 AC.144는 창2에서 아담이 동물들에게 이름을 짓는 장면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직접적인 해설인 동시에, 앞으로 말씀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명과 지명을 읽는 데 필요한 하나의 기본 원리를 제공합니다.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그저 명칭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의 성질을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AC.142에서 사람은 주님께 받은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의 성질을 알고 있었다고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proprium으로 기울었다는 사실은 더욱 의미심장해집니다.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proprium을 원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성질을 알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proprium으로 기울었던 것입니다. (AC.144)

 

 

 

AC.145, 창2:19-20, ‘말씀에서 이름은 본질과 성질을 의미하다’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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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3, 창2:19-20, ‘짐승들이 애정을 의미하는 이유 - 천국적인 관념과 영계의 표상’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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