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창2:15)
AC.123
천적인간은퍼셉션하기때문에,모든것이전체적으로나개별적으로나주님의것임을인정합니다.영적인간도실제로같은것을인정하지만,입으로인정할뿐입니다.그는그것을말씀으로부터배웠기때문입니다.세상적이고육체적인인간은그것을인정하지도받아들이지도않습니다.오히려자기가가진것은무엇이든자기것이라고하며,그것을잃으면자기가완전히멸망할것이라고생각합니다. The celestial man acknowledges,because he perceives,that all things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are the Lord’s.The spiritual man does indeed acknowledge the same,but with the mouth,because he has learned it from the Word.The worldly and corporeal man neither acknowledges nor admits it;but whatever he has he calls his own,and imagines that were he to lose it,he would altogether perish.
해설
AC.123은 바로 앞의 AC.122에서 천적 인간이 에덴동산의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지만 그것을 자기 것으로 소유해서는 안 된다고 한 이유를 설명합니다. 천적 인간이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억지로 자기 것을 포기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에게 있는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퍼셉션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AC.122의 ‘자기것으로소유하지않는다’는 말은 금욕이나 자기부정의 외적 규칙이 아니라 천적 인간의 내적 인식에서 나오는 삶의 태도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표현은 ‘퍼셉션하기때문에’입니다. AC.104에서는 퍼셉션을 주님으로부터만 오는, 무엇이 참되고 선한가에 관한 일종의 내적 감각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123은 그 퍼셉션이 실제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천적 인간에게 ‘모든것이주님의것이다’라는 것은 외부에서 배워 동의한 하나의 교리가 아닙니다. 그는 자기 안에 있는 사랑과 지혜와 선과 생명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내적으로 지각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자기 것으로 주장하지 않는 것도 그에게는 외부에서 강요된 계명이 아니라 자신이 지각하는 생명의 질서에 따르는 것입니다.
영적 인간도 ‘모든것이주님의것이다’라는 같은 진리를 인정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가 그것을 ‘입으로’ 인정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영적 인간의 고백이 거짓되거나 위선적이라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어지는 이유가 중요합니다. 그는 그것을 ‘말씀으로부터배웠기때문’입니다. 천적 인간은 선과 진리를 퍼셉션으로 아는 반면, 영적 인간은 말씀을 통하여 배우고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의 차이는 한쪽은 참말을 하고 다른 쪽은 빈말을 한다는 차이가 아니라, 같은 진리에 이르는 내적 방식의 차이입니다.
이것은 앞서 AC.81이후 계속 설명되어 온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의 차이를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영적 인간에게 말씀과 신앙과 양심이 중요한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천적 인간처럼 직접적인 퍼셉션으로 선과 진리를 아는 상태가 아니므로, 주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가르치시는 것을 받아들여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AC.123의 ‘입으로’라는 표현을 영적 인간의 신앙을 폄하하는 말로 이해하기보다, 퍼셉션에 의한 천적 인식과 말씀에서 배운 영적 인식을 구별하는 표현으로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 번째로 등장하는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은 이 질서를 인정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것을 ‘내것’이라고 여기며, 그것을 잃으면 자기 자신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소유는 단순히 재산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필요가 없습니다. 바로 앞의 AC.121과 AC.122에서 다룬 것은 지혜와 지성과 이성과 앎을 포함하여 천적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자신에게 있는 생명과 능력과 선한 것들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고 그것들을 독립적인 자기 소유로 여기는 태도 전체가 여기 포함됩니다.
마지막의 ‘그것을잃으면자기가완전히멸망할것이라고생각한다’는 표현은 왜 사람이 자기 것을 그토록 붙드는지도 보여 줍니다. 사람은 자신이 자기 것이라고 여기는 것과 자기 존재 자체를 동일시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내려놓는 것을 생명을 잃는 것으로 느낍니다. 그러나 AC.121에서 본 천적 질서는 정반대입니다. 기억에 속한 앎들까지도 주님으로부터 지혜와 지성과 이성을 거쳐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자기에게서 생명이 나온다고 주장하는 것을 내려놓는 것은 참된 생명을 잃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의 실제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AC.123은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과 세상적·육체적 인간의 차이를 ‘모든것이누구의것인가?’라는 하나의 질문으로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천적 인간은 퍼셉션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알고, 영적 인간은 말씀으로부터 배워 그것을 인정하며,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은 자기에게 있는 것을 자기 것이라고 여깁니다. AC.122에서 말한 에덴동산의 삶은 결국 주님께 받은 모든 것을 실제로 누리면서도 그 생명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지 않는 삶입니다. (AC.123)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And Jehovah God took the man, and put him in the garden of Eden, to till it and take care of it.(창2:15)
AC.122
‘에덴동산’(gardenofEden)은앞에서설명한천적인간에게속한모든것을의미합니다.‘그것을경작하며지키는것’(tillitandtakecareofit)은그가이모든것을누리는것은허락되지만,그것들을자기것으로소유해서는안된다는것을의미합니다.그것들은주님의것이기때문입니다. By the “gardenofEden” are signified all things of the celestial man, as described; by to “tillitandtakecareofit” is signified that it is permitted him to enjoy all these things, but not to possess them as his own, because they are the Lord’s.
해설
AC.122는 창2:15의 ‘여호와하나님이그사람을이끌어에덴동산에두어그것을경작하며지키게하시고’라는 말씀의 속뜻을 매우 간결하게 설명합니다. ‘에덴동산’은 단순히 하나의 장소가 아니라 앞에서 설명한 천적 인간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동산을 경작하고 지킨다는 것도 자연적인 농경 행위를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천적 인간이 주님께 받은 모든 것을 어떤 태도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는지를 나타냅니다.
앞의 설명들을 생각하면 ‘에덴동산’ 안에는 사랑과 지혜와 지성, 그리고 그로부터 질서 있게 이어지는 이성과 앎까지 천적 인간에게 속한 모든 것이 포함됩니다. AC.121에서는 그 생명의 질서가 ‘동쪽’이신 주님으로부터 시작하여 지혜와 지성과 이성을 거쳐 기억에 속한 앎들에까지 이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AC.122에서 말하는 ‘이모든것’은 사람이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낸 재산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의 생명과 근원은 주님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 속한 것이라고 해서 인간이 그것을 누려서는 안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에게 ‘이모든것을누리는것이허락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주님께 받은 사랑과 지혜와 지성은 인간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인간 안에 주어지고, 인간은 그것을 자기의 생명처럼 느끼며 살아갑니다. 천적 질서는 인간이 아무것도 느끼거나 행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주님께 받은 것을 충만히 누리고 그것으로 살아가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을 ‘자기것으로소유해서는안된다’고 합니다. 바로 여기에 AC.122의 중심이 있습니다. 천적 인간은 자신 안에 사랑과 지혜와 지성과 선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지만, 그것들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라고 여기지도 않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실제로 누리면서도 그것이 주님의 것임을 압니다. 따라서 ‘내안에있다’는 것과 ‘나에게서나왔다’는 것은 전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주신 것이 사람 안에 있으므로 사람은 그것으로 살아가지만, 그 생명의 근원은 여전히 주님이십니다.
이 점에서 ‘경작하며지킨다’는 표현도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주님께 받은 것을 자기 것으로 주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수동적으로 있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은 동산을 경작하고 돌보듯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실제 삶 가운데 사용합니다. 다만 그렇게 사용하면서 사랑과 지혜와 선을 자신의 독립적인 소유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인간의 활동과 주님의 생명 사이의 질서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사람은 실제로 경작하고 지키지만, 그가 경작하고 지키는 모든 생명의 것은 주님께 속합니다.
이것은 바로 앞의 AC.121과도 아름답게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주님으로부터 지혜가 나오고, 지혜를 통하여 지성이, 지성을 통하여 이성이 나오며, 이성을 통하여 기억에 속한 앎들이 생명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22는 그렇게 생명을 얻은 모든 것을 사람이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말합니다. 사람은 그것을 받아 누리고 사용합니다. 그러나 그 흐름의 출발점을 잊고 ‘이지혜는내지혜이고,이선은내선이며,이생명은나에게서나온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천적 질서는 생명의 흐름뿐 아니라 그 생명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아는 질서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에덴동산을 ‘경작하며지킨다’는 말씀에는 천적 인간의 매우 근본적인 삶의 태도가 담겨 있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주시는 것을 거부하지도 않고 자기 것으로 빼앗지도 않습니다. 받아서 누리고, 실제 삶 가운데 사용하면서도 그것이 주님의 것임을 압니다. 주님께 받은 것을 마치 자기에게서 나온 것처럼 소유하려 하지 않고, 주님의 것으로 받아 살아가는 것, 이것이 에덴동산 안에서 살아가는 천적 인간의 질서입니다. (AC.122)
AC.121은 에덴에서 흘러나와 네 갈래로 나뉜 강들에 관한 설명을 하나의 질서로 종합합니다. 지금까지 각 강을 따라가면서 지혜와 지성, 이성과 기억지식이 차례로 등장했는데,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이 서로 흩어진 능력이 아니라 하나의 ‘천적질서’를 이룬다고 명시합니다. 그 질서의 출발점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동쪽’이신 주님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지혜가 나오고, 지혜를 통하여 지성이 나오며, 지성을 통하여 이성이 나오고, 마침내 이성을 통하여 기억에 속한 앎들이 생명을 얻습니다.
이 순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사실입니다. AC.98과 AC.101에서 ‘동쪽’은 주님을 의미한다고 했고, AC.107에서는 에덴에서 흘러나오는 강이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를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또한 AC.112에서는 지혜는 사랑에서, 지성은 신앙에서 나오며, 따라서 모두 주님으로부터 온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21은 그동안 제시된 내용을 하나의 생명의 흐름으로 묶습니다. 천적 인간의 지혜와 지성과 이성과 앎은 각각 독립적으로 생명을 가진 것이 아니라, 가장 안쪽의 근원이신 주님으로부터 질서 있게 생명을 받습니다.
여기서 ‘지혜를통하여지성이,지성을통하여이성이나온다’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앞의 AC.111은 사랑과 신앙, 지혜와 지성, 의지와 이해가 서로 구별되며 참으로 가장 뚜렷하게 구별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AC.121의 질서는 이 모든 것을 같은 것으로 만드는 설명이 아닙니다. 오히려 서로 구별되는 것들이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하나의 생명 안에서 질서 있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지혜와 지성과 이성은 서로 다른 것이지만, 아래에 있는 것이 위에 있는 것과 단절되어 스스로 살아가는 것이 천적 질서는 아닙니다.
특히 마지막 단계인 기억에 속한 앎들이 ‘생명을얻는다’는 표현은 AC.80이후의 논의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감각과 기억지식 자체를 제거하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AC.118에서는 기억지식이 최하위 또는 경계라고 했고, AC.120에서는 그것이 영적이고 천적인 인간의 지성과 지혜의 경계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121에서는 그 기억에 속한 앎들조차 이성을 통하여 생명을 얻는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기억지식의 존재가 아니라 생명의 방향입니다. 기억지식이 스스로 출발점이 되어 위의 것들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시작된 생명이 지혜와 지성과 이성을 거쳐 기억에 속한 앎들에까지 이르는 것이 올바른 질서입니다.
신1:13, 15의 이스라엘 장로들이 인용되는 것도 바로 이 질서를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이 ‘지혜롭고’(wise), ‘지성있고’(intelligent), ‘아는’(knowing)사람들이라고 불린 것은 스베덴보리에게 단순히 행정 능력이 뛰어난 지도자들이었다는 뜻에 그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천적 인간을 표상했기 때문에, 그들을 묘사하는 세 표현도 천적 인간 안에 질서 있게 존재하는 지혜와 지성과 앎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 인용은 앞에서 설명한 천적 질서가 말씀의 표현 속에도 나타난다는 것을 확인하는 역할을 합니다.
브살렐에 관한 출31:3과 병행 구절들도 같은 이유로 인용됩니다. 성막과 그 기구들을 만드는 일을 맡은 브살렐에게 하나님의 영이 충만하여 ‘지혜와총명과지식과여러가지일’을 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여기서도 출발점은 하나님의 영이며, 그로부터 지혜와 이해와 지식이 이어지고 마침내 실제 ‘일’에까지 이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천적 질서가 단지 인간의 내면에서 끝나는 추상적인 단계가 아니라 가장 바깥의 실제 행위에까지 내려온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은 안에서 시작하여 밖으로 진행되고, 마침내 자연적인 삶의 쓰임 가운데 나타납니다.
따라서 AC.121은 에덴의 네 강에 관한 지금까지의 설명을 읽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네 강은 서로 무관한 네 가지 상징을 나열한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시작된 생명이 인간 안에서 어떻게 질서 있게 진행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가장 바깥의 이성과 기억에 속한 앎들도 버려져야 할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생명을 받아야 합니다. 천적 인간이란 지식이 없는 사람도, 이성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도 아니라, 자신의 지혜와 지성과 이성과 앎 전체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도록 질서 지어진 사람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이 강들을 통하여 보여 주는 ‘생명의질서’입니다. (AC.121)
‘애굽’(Egypt)과마찬가지로‘유브라데’(Euphrates)도기억지식을의미하며,또한이러한기억지식이나오는감각적인것들을의미합니다.이것은선지서의말씀에서분명합니다.미가에서는다음과같습니다. As by “Egypt,” so also by “Euphrates,” are signified memory-knowledges, and also the sensuous things from which these knowledges come. This is evident from the Word in the prophets, as in Micah:
선지자들은사람을거듭나게하셔서천적인간과같이되게하실주님의오심에관하여이와같이말했습니다.예레미야에서는다음과같습니다. So did the prophets speak concerning the coming of the Lord who should regenerate man so that he might become like the celestial man. In Jeremiah:
여기서‘애굽’(Egypt)과‘유브라데’(Euphrates)는마찬가지로기억지식을의미하고,‘앗수르’(Asshur)는거기서나오는추론을의미합니다.시편에서는다음과같습니다. where “Egypt” and “Euphrates” likewise signify memory-knowledges, and “Asshur” reasonings thence derived. In David:
여기서도‘유브라데강’(riverEuphrates)은감각적인것과기억지식에속한것을의미합니다.유브라데가앗수르쪽을향한이스라엘영토의경계였던것처럼,기억지식은영적이고천적인인간의지성과지혜의경계이기때문입니다.아브라함에게하신다음말씀도같은것을의미합니다. where also the “riverEuphrates” signifies what is sensuous and of the memory[sensuali et scientifico]. For the Euphrates was the boundary of the dominions of Israel toward Assyria, as the knowledge of the memory is the boundary of the intelligence and wisdom of the spiritual and celestial man. The same is signified by what was said to Abraham:
이두경계는같은의미를지닙니다. These two boundaries have a like signification.
해설
AC.120은 앞의 AC.118에서 ‘브랏’, 곧 유브라데가 기억지식을 의미하며 최하위 또는 경계라고 한 설명을 말씀의 여러 구절을 통하여 확인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의미가 조금 더 구체화됩니다. ‘애굽’과 마찬가지로 ‘유브라데’도 기억지식을 의미할 뿐 아니라, 그러한 기억지식이 나오는 감각적인 것들까지 의미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기억지식이 왜 천적 인간의 질서에서 가장 바깥쪽에 놓이는지도 점차 분명해집니다. 그것은 사람이 자연계에서 감각을 통하여 받아들이고 기억에 저장하는 것들과 관계되기 때문입니다.
먼저 미7:10-12를 인용한 이유는 이 구절에 앗수르와 애굽과 강, 곧 유브라데가 함께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사람을 거듭나게 하셔서 천적 인간과 같이 되게 하실 주님의 오심에 관한 예언으로 읽습니다. 따라서 여러 나라와 지역과 경계에 관한 표현도 단순한 지리적 이동에 머무르지 않고, 거듭나는 사람 안에서 이루어지는 내적인 질서와 관계됩니다. 앞에서 에덴의 네 강을 천적 인간의 내적인 것들에 관한 묘사로 읽었던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렘2:18에서는 애굽의 시홀 물을 마시는 것과 앗수르로 가서 유브라데 물을 마시는 것이 함께 언급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애굽’과 ‘유브라데’가 기억지식을 의미하고, ‘앗수르’는 거기서 나오는 추론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인용은 특히 중요합니다. 앞의 AC.119에서는 앗수르가 이성을 의미한다고 했지만, 여기서는 기억지식에서 나오는 추론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이성적 능력이 있다는 것과 그 이성이 무엇을 출발점으로 삼아 추론하는가는 구별해서 보아야 합니다. 기억지식에서 출발하여 그것을 근거로 위의 것들을 판단하려는 질서와,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통하여 이성의 명철함을 받는 질서는 같지 않습니다.
시80:8, 11의 포도나무는 애굽에서 나와 심어지고 그 가지가 바다까지, 넝쿨이 유브라데까지 뻗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유브라데강’이 감각적인 것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자연적인 경계와 영적인 경계의 관계를 통하여 직접 설명합니다. 유브라데가 앗수르 쪽을 향한 이스라엘 영토의 경계였던 것처럼, 기억지식은 영적이고 천적인 인간에게 있는 지성과 지혜의 경계입니다. 따라서 ‘경계’라는 말은 기억지식을 무가치한 것으로 낮추는 표현이 아니라, 그것이 내적인 생명이 자연적인 차원에 이르는 가장 바깥쪽에 놓여 있음을 나타냅니다.
창15:18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주겠다고 하신 땅이 애굽 강에서 큰 강 유브라데까지라고 한 것도 같은 이유로 인용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두 경계가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명시합니다. 따라서 약속의 땅을 둘러싼 자연적인 경계 역시 속뜻에서는 인간의 내적인 상태와 관계된 경계를 표현합니다. 이것은 앞의 AC.117에서 말씀의 역사적 부분에 들어 있는 모든 것도 아르카나를 의미하고 표상하며 그 안에 담고 있다고 한 원리가 실제로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보여 주는 또 하나의 사례입니다.
AC.120은 또한 AC.80이후 계속 남아 있던 감각과 기억지식의 문제를 상당히 선명하게 해 줍니다. 감각적인 것과 기억지식은 인간에게 없어야 할 것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천적 인간에게도 그것들은 존재하며 전체 질서의 경계를 이룹니다. 문제는 가장 바깥의 경계에 있는 감각과 기억지식으로부터 출발하여 사랑과 신앙의 내적인 것들을 판단하려는 데 있습니다. AC.118에서 참된 이성의 명철함은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의 이성적 마음 안으로 들어온다고 했으므로, 거듭난 질서에서는 생명의 흐름이 가장 바깥에서 안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안을 거쳐 밖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AC.120의 여러 인용 구절은 모두 유브라데가 왜 기억지식과 감각적인 것을 의미하며, 왜 그것이 ‘최하위또는경계’라고 불리는지를 밝히는 데 기여합니다. 미가는 이 의미를 주님의 오심과 인간의 거듭남이라는 큰 문맥에 놓고, 예레미야는 기억지식에서 나오는 추론의 문제를 보여 주며, 시편과 창세기는 유브라데라는 실제 경계를 통하여 기억지식이 지성과 지혜의 경계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처럼 감각과 기억지식은 배척되는 것이 아니라 제자리에 놓여야 하며, 그 위에 있는 이성과 지성과 지혜 역시 궁극적으로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질서 안에 있어야 합니다. (AC.120)
‘앗수르’(Asshur)가이성적마음,곧사람의이성을의미한다는것은선지서들에서매우분명합니다.에스겔에서는다음과같습니다. That “Asshur” signifies the rational mind, or the rational of man, is very evident in the prophets, as in Ezekiel:
이성은‘레바논의백향목’(cedarinLebanon)이라하며,‘굵은가지들사이에있는가지’(offshootamongthethickboughs)는기억에속한앎들을의미하는데,이것들이바로이와같은상태에있습니다.이것은이사야에서더욱분명합니다. The rational is called a “cedarinLebanon”; the “offshootamongthethickboughs,” signifies the knowledges of the memory, which are in this very plight. This is still clearer in Isaiah:
이구절과그밖의여러구절에서‘애굽’(Egypt)은기억지식을,‘앗수르’(Asshur)는이성을,‘이스라엘’(Israel)은지성을의미합니다. By “Egypt” in this and various other passages is signified memory-knowledges, by “Asshur” reason, and by “Israel” intelligence.
해설
AC.119는 앞의 AC.118에서 ‘앗수르’가 이성적 마음을 의미한다고 한 해석을 에스겔과 이사야의 말씀을 통하여 확인합니다. AC.118에서는 힛데겔강이 이성 또는 이성의 명철함을, 앗수르가 이성적 마음을 의미한다고 했으며, 이성의 명철함이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에 속한 이성적 마음 안으로 들어온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번 번호의 두 인용은 바로 그 가운데 ‘앗수르가왜이성을의미하는가’를 보여 주기 위해 제시됩니다.
먼저 겔31:3-4에서는 앗수르를 크고 아름다운 ‘레바논백향목’으로 묘사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레바논 백향목이 이성을 의미한다고 직접 설명합니다. 또한 그 나무의 가지들과 관련된 표현은 기억에 속한 앎들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인용에서 백향목과 그 가지들은 단순한 거대한 나무의 모습이 아니라, 이성과 그것에 속하여 있는 앎들의 관계를 표현합니다. 특히 물과 깊은 물과 강들이 그 나무를 자라게 한다는 묘사는 앞에서 강과 물이 사람에게 지혜와 지성을 주고 자라게 하는 것들을 의미한다고 한 설명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그러나 앗수르의 의미는 사19:23-25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 말씀에는 애굽과 앗수르와 이스라엘이 함께 등장하며, 서로 왕래하고 함께 여호와를 섬기며 마침내 셋이 함께 복이 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세 이름의 의미를 직접 밝혀 ‘애굽’은 기억지식, ‘앗수르’는 이성, ‘이스라엘’은 지성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앗수르 하나의 의미를 확인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기억지식과 이성과 지성이 서로 구별된다는 사실까지 보여 줍니다.
이 점은 최근 여러 번호에서 계속 나타난 용어의 구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AC.111에서는 기억지식을 곧 지성과 지혜와 신앙이라고 여기는 겉 사람의 상태를 지적했습니다. AC.116에서는 선과 진리에 관한 앎이 이해에 속한다고 했고, AC.117에서는 애굽이 기억지식을, 구스 사람들이 앎을 의미한다고 구별했습니다. 이제 AC.119에서는 애굽의 기억지식과 앗수르의 이성과 이스라엘의 지성이 다시 구별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사용하는 기억지식, 앎, 이성, 지성은 서로 바꾸어 써도 되는 비슷한 말들이 아니라 각각의 자리를 가진 개념들임이 점점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특히 사19장의 인용 이유는 단순히 ‘앗수르’라는 이름이 등장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애굽과 앗수르와 이스라엘 사이에 길이 열리고 서로 오가며 함께 섬긴다는 전체 장면 속에서 기억지식과 이성과 지성이 서로 관계를 맺는 질서가 표현됩니다. 이성은 기억지식과 단절되어 홀로 작용하는 것도 아니며, 지성 역시 이성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도 아닙니다. 서로 구별되면서도 올바른 질서 안에서는 함께 작용하고, 그 전체가 여호와께 복을 받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이것은 AC.118에서 유브라데, 곧 기억지식을 ‘최하위또는경계’라고 한 설명을 기억지식의 무가치함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도 다시 확인해 줍니다. 사19장에서 애굽은 제거되어야 할 대상으로만 등장하지 않고 ‘내백성애굽’이라고까지 불리며 앗수르와 이스라엘과 함께 복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기억지식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이성과 지성과 어떤 질서 안에서 관계를 맺느냐가 중요합니다. 자연적인 앎과 이성적 능력이 올바른 질서 안에 있을 때 그것들도 전체적인 영적 생명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AC.119에서 에스겔과 이사야가 인용된 이유는 충분히 분명합니다. 에스겔은 앗수르를 레바논 백향목으로 묘사함으로써 이성과 그에 속한 것들의 모습을 보여 주고, 이사야는 애굽과 앗수르와 이스라엘을 함께 놓음으로써 기억지식과 이성과 지성의 구별과 관계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이것은 AC.118의 ‘앗수르는이성적마음’이라는 해석을 뒷받침하는 동시에, 천적 인간 안에서 기억지식과 이성과 지성이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각각 제자리를 얻어 질서 있게 관계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AC.119)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And the name of the third river is Hiddekel; that is it which goeth eastward toward Assyria; and the fourth river is Euphrates.(창2:14)
AC.118
‘힛데겔강’(riverHiddekel)은이성,또는이성의명철함을의미합니다.‘앗수르’(Asshur)는이성적마음을의미합니다.‘앗수르동쪽으로흐르는강’(riverwhichgoetheastwardtowardAsshur)은이성의명철함이주님으로부터속사람을통하여겉사람에속한이성적마음안으로들어오는것을의미합니다.‘브랏’(Phrath),곧유브라데는기억지식을의미하며,이것은최하위또는경계입니다. The “riverHiddekel” is reason, or the clearsightedness of reason. “Asshur” is the rational mind; the “riverwhichgoetheastwardtowardAsshur” signifies that the clearsightedness of reason comes from the Lord through the internal man into the rational mind, which is of the external man; “Phrath,” or Euphrates, is memory-knowledge, which is the ultimate or boundary.
해설
AC.118은 셋째 강 힛데겔과 넷째 강 유브라데를 설명하면서 에덴에서 나온 네 강의 구조를 거의 완성합니다. 힛데겔은 이성, 또는 이성의 명철함을 의미하고, 앗수르는 이성적 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유브라데는 기억지식을 의미하며 그것은 최하위 또는 경계라고 합니다. 앞의 두 강이 의지와 이해에 관계했다면, 이제 셋째와 넷째 강에서는 이성과 기억지식까지 나타나면서 천적 인간 안에 있는 것들이 더욱 바깥쪽으로 펼쳐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특히 ‘앗수르동쪽으로흐르는강’에 대한 설명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표현이 이성의 명철함이 ‘주님으로부터속사람을통하여겉사람에속한이성적마음안으로들어오는것’을 의미한다고 직접 밝힙니다. 여기서는 단순히 힛데겔은 이성이고 앗수르는 이성적 마음이라는 각각의 의미보다, 그 둘 사이에서 무엇이 어떻게 흘러가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이성의 참된 명철함은 겉 사람의 이성적 마음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통하여 그 안으로 들어옵니다.
이것은 AC.115에서 처음 분명하게 등장한 ‘유입’의 설명을 한층 구체화합니다. 거기서는 사랑의 선이 신앙의 진리 안으로 흘러드는 것을 말했습니다. 이번에는 그 유입의 근원과 통로와 도착점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성의 명철함은 주님으로부터 오며,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의 이성적 마음 안으로 들어옵니다. 따라서 사람의 이성이 참으로 밝아지는 것은 이성이 자기 자신을 생명의 근원으로 삼을 때가 아니라,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받아들일 때입니다.
이 설명은 앞의 AC.99와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거기서는 질서가 회복된 사람에게서 주님께서 사랑을 통하여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드신다고 했습니다. AC.118에서는 그 가운데 특히 이성적 마음에 초점을 맞추어, 이성의 명철함이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 안으로 들어온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성은 거듭남에서 제거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올바른 근원에서 생명을 받아야 할 겉 사람의 중요한 능력입니다.
마지막으로 ‘브랏’, 곧 유브라데는 기억지식을 의미하며 ‘최하위또는경계’라고 합니다. 이것 역시 앞에서 기억지식을 부정적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고 한 이유를 다시 보여 줍니다. 기억지식이 최하위에 있다는 것은 그것이 불필요하거나 악하다는 뜻이 아니라, 여기서 묘사되는 질서 가운데 가장 바깥쪽에 있다는 뜻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속 사람을 거쳐 이성과 같은 겉 사람의 능력에 이르고, 기억지식은 그 질서의 가장 바깥 경계에 놓입니다. 문제는 기억지식이 존재한다는 데 있지 않고, 그 가장 바깥의 것을 근원으로 삼아 위의 질서를 거꾸로 세우는 데 있습니다.
이 점에서 AC.118은 AC.80에서 제기되었던 문제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 천적 인간이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에서 출발하여 신앙의 신비를 탐구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성과 기억지식을 버린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기억지식은 분명히 전체 질서 안에 자리를 가지고 있으며, 이성적 마음 역시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통하여 명철함을 받습니다. 따라서 문제는 이성과 기억지식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질서입니다. 가장 바깥에 있는 것이 스스로 근원이 되려 하는가, 아니면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속 사람을 통하여 받아들이는가 하는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AC.118은 네 강에 관한 설명 가운데서도 유입의 방향을 매우 선명하게 보여 주는 번호입니다. 사람에게 이성적 마음과 기억지식이 실제로 있지만, 참된 명철함의 근원은 그 사람 자신에게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리고 기억지식은 그 질서의 최하위 또는 경계를 이룹니다. 이렇게 볼 때 에덴의 강들은 천적 인간 안에 있는 여러 능력을 단순히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사람 안에서 질서를 이루며 받아들여지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AC.118)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창2:11, 12)
AC.115
태고인들은‘땅들’(lands)에관하여말할때그것들이뜻하는바를이해했습니다.오늘날에도가나안땅과시온산이천국을뜻한다는관념을가진사람들은이장소들이언급될때어떤땅이나산을생각하기보다그것들이뜻하는것만을생각하는것과같습니다.여기서‘하윌라땅’(landofHavilah)도마찬가지입니다.하윌라는창25:18에다시언급되는데,거기서이스마엘의아들들에관하여그들이‘하윌라에서부터앗수르로가는길에애굽앞술까지’(dweltfromHavilahevenuntoShur, whichisbeforeEgypt, asthougoesttowardAssyria)거주했다고합니다. When the most ancient people spoke of “lands,” they understood what was signified by them, just as those at the present day who have an idea that the land of Canaan and Mount Zion signify heaven, do not so much as think of any land or mountain when these places are mentioned, but only of the things which they signify. It is so here with the “landofHavilah,” which is mentioned again in Genesis 25:18, where it is said of the sons of Ishmael, that they “dweltfromHavilahevenuntoShur,whichisbeforeEgypt,asthougoesttowardAssyria.”
AC.115는 AC.110에서 ‘하윌라땅’이 마음을 뜻한다고 한 해석을 태고인들의 말씀 이해 방식과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태고인들은 어떤 ‘땅’에 관하여 말할 때 단지 지리적인 장소만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 땅이 뜻하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그는 오늘날에도 가나안 땅이나 시온산을 천국과 연결하여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그 이름을 들을 때 물리적인 땅이나 산만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예를 듭니다. 즉 장소의 문자적 이미지 너머에 그 장소가 나타내는 영적인 관념이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하윌라땅’도 이와 같다고 합니다. 그리고 창25:18에서 이스마엘의 아들들이 ‘하윌라에서부터앗수르로가는길에애굽앞술까지’ 거주했다는 말씀을 인용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명들을 곧바로 하나씩 암호처럼 치환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적인관념안에있는사람들’이 이 말씀에서 ‘지성과지성에서흘러나오는것’을 퍼셉션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하윌라를 포함한 이 지리적 묘사는 천국적인 관념 안에서는 인간의 지성과 그로부터 이어지는 내적인 질서와 관계되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입니다.
이 설명은 태고인들의 퍼셉션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됩니다. 그들은 ‘하윌라=마음’이라는 대응표를 머릿속에서 찾아 문자에 대입했다는 식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은 그들이 그 말씀에서 지성과 지성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퍼셉션한다’는 것입니다. 앞의 AC.104에서 퍼셉션을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에 관하여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는 일종의 내적 감각이라고 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단순한 상징 해독이나 지적인 연상과는 다릅니다. 말씀의 자연적인 표현 안에서 그것이 담고 있는 천적이고 영적인 것을 알아차리는 방식에 가깝습니다.
이어지는 ‘두르다’에 대한 설명은 창2:11의 움직임 자체에도 속뜻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비손 강이 하윌라 온 땅을 ‘두른다’는 말씀에서 천국적인 관념 안에 있는 사람들은 ‘유입’을 퍼셉션한다고 합니다. 앞에서 비손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지성을 뜻했고, 하윌라 땅은 마음을 뜻했습니다(AC.110). 따라서 비손이 하윌라 땅을 두르는 모습은 단순히 강이 어떤 지역의 경계를 따라 흐르는 지리적 장면을 넘어, 지성과 관계된 것이 마음 안으로 흘러드는 생명의 움직임을 나타냅니다. 에덴에서 강이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는 것으로 시작된 ‘흐름’의 이미지가 여기에서도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두름’의 의미를 아론의 에봇에 있는 호마노를 통하여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출28:11에서 호마노는 금테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앞의 AC.113에서 금은 사랑의 선을 뜻했고, AC.114에서 호마노를 비롯한 보석들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진리를 표상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15는 금이 호마노를 둘러싼 그 모습을 ‘사랑의선이신앙의진리안으로흘러들어야한다’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선과 진리가 단지 나란히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선이 신앙의 진리 안으로 유입되어 그것을 살아 있게 하는 관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AC.110에서 처음에는 상당히 낯설었던 ‘사랑의선’과 ‘사랑에서나오는신앙의선’, ‘사랑의진리’와 ‘사랑에서나오는신앙의진리’라는 구별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을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를 서로 분리된 네 가지 항목으로 늘어놓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에서 신앙이 나오고, 사랑의 선이 신앙의 진리 안으로 흘러들며, 그 결과 지혜와 지성과 선과 진리가 하나의 생명의 질서 안에서 서로 연결됩니다. 그러면서도 AC.111에서 보았듯이 각각의 것은 서로 구별됩니다. 하나 됨은 차이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서로 구별되는 것들을 질서 있게 결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다시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유입’의 궁극적인 근원입니다. AC.112는 지혜와 지성, 선과 진리가 사랑과 신앙에서 나오며 ‘따라서주님으로부터’ 나온다고 네 차례에 걸쳐 반복했습니다. 그러므로 AC.115의 ‘사랑의선이신앙의진리안으로흘러든다’는 말도 인간 내부에서 독립적으로 일어나는 자기 발생적인 과정으로 읽을 수 없습니다. 에덴에서 강이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비손이 하윌라를 두르며, 금이 호마노를 둘러싸는 일련의 이미지들은 모두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흘러와 인간 안의 서로 다른 것들을 살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결합하는 모습을 조금씩 다른 각도에서 보여 줍니다. (AC.115해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And Jehovah God formed man, dust from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ves, and man became a living soul.(창2:7)
AC.94
‘지면의흙으로사람을지으셨다’(formman,dustfromtheground)는것은그의겉사람을형성하셨다는뜻입니다.그겉사람은이전에는사람이아니었습니다.5절에서‘땅을갈사람이없었다’(nomantotilltheground)고했기때문입니다.‘그의코에생명의숨을불어넣으셨다’(breatheintohisnostrilsthebreathoflives)는것은그에게신앙과사랑의생명을주셨다는뜻이며,‘사람이생령이되었다’(manbecamealivingsoul)는것은그의겉사람도살아있게되었다는것을의미합니다. To“formman,dustfromtheground”is to form his external man,which before was not man;for it is said(verse 5)that there was“nomantotilltheground.” To“breatheintohisnostrilsthebreathoflives”is to give him the life of faith and love;and by“manbecamealivingsoul”is signified that his external man also was made alive.
해설
AC.94는 창2:7의 세 표현을 차례로 해석하면서 천적 인간의 형성이 어디에 이르는지를 보여 줍니다. 첫째는 ‘지면의흙으로사람을지으셨다’, 둘째는 ‘그의코에생명의숨을불어넣으셨다’, 셋째는 ‘사람이생령이되었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들을 각각 겉 사람의 형성, 신앙과 사랑의 생명을 받음, 그리고 마침내 겉 사람까지 살아 있게 됨으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단순히 육체를 만들고 거기에 생물학적 생명을 불어넣는 장면의 속뜻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인간의 겉 사람에까지 이르는 천적 인간의 형성을 묘사합니다.
먼저 ‘지면의흙으로사람을지으셨다’는 것은 겉 사람을 형성하셨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지면’은 앞의 AC.90과 직접 연결됩니다. 사람이 영적 인간으로 있는 동안에는 그의 겉 사람이 ‘땅’이라 불리지만, 천적 인간이 되면 ‘지면’ 또는 ‘들’이라 불린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지면의 흙으로 사람이 형성된다는 것은 이미 천적 인간의 문맥 안에서 겉 사람이 새롭게 형성되는 것을 뜻합니다. 바로 앞 AC.89에서도 천적 인간의 형성은 속 사람, 곧 ‘하늘’로부터 시작된다고 했으므로, 이것은 겉 사람이 자기 힘으로 새로 만들어진다는 뜻이 아니라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질서에 따라 겉 사람이 형성되는 과정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겉 사람이 ‘이전에는사람이아니었다’고 상당히 강하게 말합니다. 그 근거가 창2:5의 ‘땅을갈사람이없었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이것은 이전에 육체를 가진 인간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 다루는 속뜻에서 아직 겉 사람이 천적 질서 안에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참된 의미의 ‘사람’이라고 할 수 없었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사람’이라는 말은 단순한 생물학적 인간을 넘어,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올바른 질서 안에 있는 인간이라는 깊은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도록 형성되어 갈 때 비로소 그것도 ‘사람’이 됩니다.
다음으로 ‘그의코에생명의숨을불어넣으셨다’는 것은 신앙과 사랑의 생명을 주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앞의 AC.76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AC.76에서도 천적 인간의 생명이 ‘생명의숨을불어넣으심’으로 묘사된다고 했는데, AC.94는 이제 그 생명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신앙과사랑의생명’이라고 밝힙니다. 따라서 ‘생명의숨’은 단순히 호흡이나 육체적 생명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속뜻에서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앙과 사랑의 생명입니다. 앞서 AC.83에서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고 사랑이 주된 것이 되면서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된다고 했던 흐름도 여기와 연결됩니다.
마지막으로 ‘사람이생령이되었다’는 것은 ‘그의겉사람도살아있게되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도’가 중요합니다. 천적 인간의 형성은 속 사람에서 시작되지만 그 생명이 속 사람에만 머물러서는 완성되지 않습니다. AC.91에서는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하며,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평온이 마치 비와 안개처럼 겉 사람을 적신다고 했습니다. AC.92에서는 그것을 ‘내적인평화로부터나오는생명’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AC.94에서는 그 생명이 겉 사람에까지 이르러 겉 사람 ‘또한’ 살아 있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속 사람으로부터 시작된 생명이 겉 사람에까지 내려와 전체 인간을 살아 있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살아있음’도 자연적 생존과 구별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사람은 육체적으로 살아 있고 이성적으로 사고하며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적 의미에서는 아직 참된 생명을 받지 못한 상태일 수 있습니다. 참된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오며, AC.94에서는 그것을 신앙과 사랑의 생명이라고 합니다. 이 생명이 겉 사람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까지 흘러들 때 겉 사람도 살아 있게 됩니다. 이것은 자연적인 삶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삶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 생명을 받아 그 생명을 표현하고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AC.94는 AC.89이후의 흐름을 매우 선명하게 완성합니다. 천적 인간의 형성은 속 사람에서 시작되고(AC.89), 겉 사람은 ‘지면’과 ‘들’이 되어 속 사람의 질서 아래 놓이며(AC.90),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하고(AC.91), 내적인 평화에서 나오는 생명을 받아 선과 진리를 산출합니다(AC.92-93). 그리고 이제 ‘생명의숨’, 곧 신앙과 사랑의 생명이 겉 사람에까지 이르러 그 겉 사람도 살아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면의흙으로사람을지으시고그의코에생명의숨을불어넣으시니사람이생령이되었다’는 말씀은 속뜻에서 주님께서 천적 인간의 겉 사람까지 형성하시고 살리시는 거듭남의 완성을 묘사합니다. (AC.94)
이 파일을 처음 열어 보시는 분은 아마 먼저 분량에 놀라실 것 같습니다. 창세기 1장 한 장을 다루는데 500쪽이 넘습니다. ‘천지창조한장을설명하는데무슨이야기가이렇게많을까?’ 하는 생각이 드실 수도 있습니다.
저도 처음부터 이렇게 많은 분량을 계획했던 것은 아닙니다. 출발은 비교적 단순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이하AC)를 처음부터 차례로 우리말로 옮기고, 그 뜻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설을 붙여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AC.1부터 한 글씩 읽어 가면서 번역만으로는 그냥 지나가기 어려운 질문들이 계속 생겼습니다. 어떤 질문은 짧은 해설만으로 충분했지만, 어떤 질문은 그 자리에서 조금 더 깊이 살펴보지 않으면 다음 글로 넘어가기 어려웠습니다. 그렇게 번역에 해설이 붙고, 해설에서 다시 질문이 생겨 심화가 붙으면서 지금의 분량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파일은 처음부터 한 권의 책으로 기획하여 집필한 결과물이라기보다, AC.1에서 AC.66까지 한 걸음씩 걸어가며 남긴 ‘읽기의기록’에 가깝습니다. 원문을 번역하다가 표현 하나에서 멈추기도 했고, 스베덴보리가 왜 이런 해석을 하는지 질문하기도 했으며, 처음 AC를 접하는 분이라면 어디에서 이해하기 어려울지를 생각하면서 설명을 덧붙이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제가 가지고 있던 생각을 다시 검토해야 했고, 처음에는 그럴듯해 보였던 설명을 AC전체의 문맥과 대조하면서 고치기도 했습니다. 이 파일에는 그런 과정까지 함께 들어 있습니다.
이 자료의 기본 구성은 ‘번역,해설,심화’입니다. 먼저 ‘번역’은 영어 AC본문이 실제로 무엇을 말하는지를 가능한 한 정확하게 우리말로 옮기려는 부분입니다. 그다음 ‘해설’은 단순히 번역문을 다시 풀어쓰는 것이 아니라, 그 AC가 앞뒤 글과 어떻게 이어지는지, 창세기 본문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그리고 처음 읽는 독자가 어디에서 ‘이게무슨뜻이지?’ 하고 멈출 수 있는지를 생각하며 설명한 부분입니다. ‘심화’는 한 걸음 더 나아간 질문을 다룹니다. 본문을 이해하고 나면 자연스럽게 생기는 ‘그렇다면이것은어떻게되는가?’라는 질문 가운데 해설 안에 모두 넣기에는 너무 큰 문제들을 따로 살펴본 것입니다.
그래서 심화까지 반드시 차례대로 모두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 읽으시는 분이라면 먼저 AC본문의 번역과 해설을 따라가시는 것만으로도 좋습니다. 읽다가 특별히 궁금한 주제가 나오면 그때 관련 심화를 읽으셔도 됩니다. 반대로 이미 AC를 어느 정도 읽어 오신 분이라면 관심 있는 글 번호나 심화 주제를 찾아 들어가셔도 됩니다. 500쪽이 넘는다고 해서 처음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한 번에 ‘완독해야하는책’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1장 한 장에서 왜 이렇게 많은 이야기가 나오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스베덴보리가 창세기 1장을 읽는 방식과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창세기 1장을 펼치면 천지창조를 만납니다. 흑암 가운데 빛이 생기고, 물과 물 사이에 궁창이 놓이며, 뭍이 드러나고 식물이 자랍니다. 해와 달과 별이 나타나고, 물고기와 새와 짐승이 생기며, 마침내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읽는 말씀의 문자입니다.
그런데 AC는 그 문자 안에서 또 하나의 창조를 봅니다. ‘사람의거듭남’입니다. 아직 영적 생명이 없는 사람 안에 주님께서 새로운 생명을 이루어 가시는 과정을 창세기 1장의 여섯 날이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AC.6은 이것을 처음부터 분명하게 밝힙니다. 여섯 날은 서로 무관한 여섯 가지 영적 교훈이 아니라, 인간이 거듭나는 동안 지나가는 ‘연속적인상태들’입니다. 처음에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상태에 있던 사람이 조금씩 주님에게서 오는 빛을 받고, 주님에게 속한 것과 자기 자신에게 속한 것이 구별되며, 선과 진리가 생겨나고, 마침내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 상태로 나아갑니다.
이것을 알고 나면 창세기 1장의 풍경이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빛이있으라’는 말씀을 읽으면서 자연계의 최초의 빛과 함께 ‘내안에는언제처음빛이비치기시작하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궁창이 물과 물을 나누는 장면에서는 ‘사람안에서는무엇이구별되어야하는가?’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땅에서 식물이 돋고 씨를 맺고 열매를 맺는 것을 보면서는 ‘진리가사람안에서어떻게선한삶의열매가되는가?’를 묻게 됩니다. 해와 달과 별, 물고기와 새, 짐승과 사람도 더 이상 서로 떨어져 있는 창조물의 목록으로만 보이지 않고, 한 사람 안에 영적 생명이 조금씩 형성되어 가는 긴 흐름 속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오해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면창세기1장은천지창조에관한말씀이아니고인간의거듭남만을말한다는것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 자료는 그렇게 읽지 않습니다. 우리가 읽는 문자에는 분명 천지와 빛과 물과 땅과 광명체와 생물과 사람의 창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AC가 밝히려고 하는 것은 그 문자를 없애고 다른 이야기를 대신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그 문자 안에 담긴 ‘속뜻’입니다. 이 자료에서도 이 점을 여러 차례 조심해서 구별했습니다. 창조의 말씀을 지우고 거듭남을 넣는 것이 아니라, 창조의 말씀 안에서 인간의 새로운 창조가 어떻게 펼쳐지는지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이 자료를 읽으실 때 처음부터 모든 ‘상응’을 외우려고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빛은이것,물은이것,나무는이것,새는이것’ 하는 식으로 대응표를 만들어 외우기 시작하면 오히려 창1전체의 생명 있는 흐름을 놓치기 쉽습니다. 중요한 것은 각각의 표현이 하나의 거듭남 안에서 어떻게 서로 이어지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첫째 날과 둘째 날이 이어지고, 둘째 날이 셋째 날을 준비하며, 그렇게 여섯째 날까지 진행됩니다. 실제 파일에서도 ‘창1의여섯날은속뜻에서여섯개의서로떨어진교훈이아니라하나의거듭남이진행되는여섯연속적상태’라는 점을 중요하게 붙들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이 창1을 읽으며 가장 놀라웠던 것 가운데 하나입니다. 창조의 순서가 곧 거듭남의 질서로 읽히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어느 날 갑자기 완성된 영적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자기 안에 무엇이 어둠인지조차 잘 모릅니다. 그러다가 빛이 비치고, 구별이 생기고, 무엇인가 싹트고, 진리가 자라고, 사랑과 신앙이 점차 생명의 중심으로 들어오며, 마침내 그 사람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삶 전체가 달라져 갑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이미 완성된 사람이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되는 정도의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 안에 새로운 영적 질서를 이루시는 ‘새창조’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계속해서 중심에 계시는 분은 ‘주님’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자기 안에 빛을 만들고, 자기 힘으로 선을 생산하고, 마침내 자기 노력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읽어 갈수록 ‘내가한다’고 생각하던 것의 생명이 실제로 어디에서 오는가를 배우게 됩니다. 거듭남의 시작도 주님에게서 오고, 선과 진리의 생명도 주님에게서 오며, 시험 가운데 사람을 붙드시고 악과 거짓에 맞서 싸우시는 분도 주님입니다. 사람이 자유롭게 응답하고 싸우고 살아가지만 그 모든 영적 생명의 근원과 능력은 주님에게 있습니다. 이 점은 이 자료가 창1의 여섯 날을 읽으면서 계속 되돌아가는 중심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렇다고 이 자료가 처음부터 끝까지 거듭남의 ‘단계’를 정리하는 교과서는 아닙니다. 오히려 작업을 진행하면서 ‘나는지금몇째날에있는가?’라고 자기 영적 수준을 판정하려는 읽기를 조심하게 되었습니다. 여섯 날은 사람에게 영적 등급표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의 생명을 어떤 질서 가운데 새롭게 하시는지를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실제 삶에서는 여러 상태가 복잡하게 경험될 수 있고, 이미 배운 것처럼 보이는 문제를 다시 만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 자료를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영적 수준을 재는 잣대로 사용하기보다, 거듭남의 방향과 질서를 배우는 데 사용하시면 좋겠습니다.
또 하나 이 파일에서 적지 않은 분량을 차지하는 것이 ‘질문’입니다. AC를 처음 읽다 보면 정말 많은 질문이 생깁니다. ‘속사람과겉사람은무엇인가?’, ‘리메인스란무엇인가?’, ‘영적인간과천적인간은어떻게다른가?’, ‘왜같은짐승이어떤곳에서는선한것을뜻하고다른곳에서는악한것을뜻하는가?’, ‘형상과모양은무엇이다른가?’, ‘천상의결혼이란무엇인가?’, ‘왜주님께서는악과거짓을즉시없애지않으시는가?’, ‘천사들은말씀을어떻게지각하는가?’ 같은 질문들입니다.
이런 질문들을 가능하면 그냥 지나가지 않은 것이 이번 작업의 한 특징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질문에 곧바로 거대한 교리 체계를 가져와 답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작업이 진행될수록 오히려 ‘이AC가지금말하는만큼만충분히말하고,다음글의몫은다음글에남겨두는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어떤 설명이 스베덴보리의 이 글에 직접 있는 것인지, 관련 AC들을 통해 충분히 뒷받침되는 것인지, 아니면 이해를 돕기 위해 덧붙인 설명이나 적용인지도 가능한 한 구별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자료는 처음 작성한 글을 그대로 모은 것만도 아닙니다. AC.1부터 AC.66까지 다시 검토하면서 번역과 해설, 심화 가운데 지나치게 나간 설명은 줄이고, 처음 읽는 분에게 꼭 필요한 설명은 오히려 보충했습니다. 성경 구절이나 다른 AC글 번호가 인용되었다고 해서 모두 별도의 심화로 남겨 두기보다, 그 인용이 왜 사용되었는지를 해설 안에서 이해할 수 있다면 그곳에서 소화했습니다. 반대로 본문을 읽은 독자가 정말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을 품을 만하고, 그 질문 자체로 독립적인 가치가 있는 경우에는 심화로 남겼습니다.
특히 성경과 AC의 관계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이 자료에서 AC는 성경을 대신하는 책이 아닙니다. 성경의 표현을 AC에 맞추어 고치는 것도 이 작업의 목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먼저 말씀이 있고, AC는 그 말씀의 속뜻을 밝히고 설명하는 책이라는 순서를 지키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AC의 영어 인용과 우리가 사용하는 개역개정의 표현이 다르더라도 의미상 문제가 없다면 익숙한 성경의 표현을 우선했고, 의미 차이가 실제로 중요할 때에는 성경을 AC의 문장에 맞추어 바꾸기보다 ‘개역개정은이렇게되어있지만스베덴보리는여기서이런표현을사용한다’고 차이를 밝히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파일 마지막 AC.66의 삼상2:3심화는 바로 그런 문제를 실제 사례로 다룹니다.
AC.64-66에 이르면 창1의 거듭남 이야기는 다시 ‘말씀’ 자체의 문제로 돌아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까지 살펴본 것이 말씀의 속뜻이며, 그것이 말씀의 ‘가장참된생명’이라고 말합니다. 천사들은 우리가 읽는 나라와 성읍과 강과 사람의 이름 자체가 아니라 그것들이 의미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지각한다고 설명하고, 자신이 말씀을 읽을 때 그 내적 의미가 얼마나 아름답고 완전한 질서 가운데 지각되는지를 ‘영광’이라는 표현과 함께 전합니다. 마지막 AC.66에서는 말씀의 네 가지 서로 다른 스타일을 설명하면서, 우리가 앞으로 성경의 모든 부분을 똑같은 방식으로 기계적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는 중요한 안내도 남깁니다. 특히 태고교회의 표상적 스타일과 아브람 이후의 역사적 스타일을 구별하는 설명은 앞으로 창세기를 계속 읽어 갈 때 매우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그러므로 AC.1-66은 창세기 1장의 마지막 절에서 끝나는 것만은 아닙니다. 이 부분을 다 읽고 나면 오히려 창세기 2장을 읽을 준비가 됩니다. 여섯째 날까지 진행된 거듭남이 그다음에는 어떤 상태로 들어가는지, ‘일곱째날’의 안식은 무엇인지가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파일은 하나의 완결된 창1작업인 동시에 앞으로 계속될 긴 AC읽기의 첫걸음이기도 합니다.
이 자료를 처음 읽으시는 분께 한 가지를 권하고 싶습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상응 하나하나를 기억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심화까지 모두 읽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대신 한 가지 질문을 마음에 품고 읽어 보시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는한사람을어떻게새롭게창조하시는가?’
그 질문을 가지고 읽다 보면 ‘빛이있으라’가 조금 달리 들릴 수 있습니다. 궁창이 나뉘고 땅이 드러나며 씨가 싹트는 모습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해와 달과 별이 빛나고 생물이 살아 움직이며 마침내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는 장면들이 먼 옛날의 창조 이야기로만 머물지 않고, 지금도 한 사람 안에서 주님께서 이루고 계시는 새 창조의 질서와 연결되어 보이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 작업에는 ChatGPT가 함께했습니다. 번역을 비교하고, 문장을 다듬고, 앞뒤 AC의 문맥을 살피며, ‘처음읽는사람이라면여기에서무엇을궁금해할까?’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는 데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자료를 ‘ChatGPT가AC를해석해준결과’라고 소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AC원문과 말씀 앞에서 계속 질문하고, 답을 다시 원문에 비추어 검토하며, 때로는 앞서 쓴 해설을 고치고 다시 쓰는 긴 협업의 결과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그래서 이 파일의 제목에도 ‘withChatGPT’라고 적었습니다. ‘byChatGPT’가 아니라 ‘withChatGPT’입니다. 이 작은 차이가 이번 작업의 성격을 잘 보여 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제 이 자료는 제 손에서만 읽히는 작업 노트를 넘어, 처음 AC를 접하는 분들과도 나누어 보려 합니다. 어떤 분에게는 낯설고, 어떤 대목에서는 쉽게 동의하기 어려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서둘러 받아들이거나 서둘러 거부하기보다, 먼저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천천히 따라가 보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AC자체에 머무르기보다, AC가 계속해서 가리키는 말씀으로 돌아가 보셨으면 합니다.
500쪽이 넘는 긴 여정이지만, 그 시작은 아주 짧은 한 말씀입니다.
‘빛이있으라.’
그리고 어쩌면 창세기 1장을 속뜻으로 읽는 긴 여정은 결국 이 한 말씀을 우리 자신의 삶에서 듣는 과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 가운데 있는 한 사람에게 주님께서 빛을 주시고, 구별하시고, 생명을 싹트게 하시고, 사랑과 신앙을 자라게 하시며, 마침내 그 사람을 당신의 형상으로 빚어 가시는 과정 말입니다.
이 자료가 그 놀라운 말씀의 여정을 조금 더 깊이 따라가는 데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삼상2:3)Speak what is high!high!Let what is ancient come out of your mouth(1 Sam. 2:3).
AC.66을 읽다가 가장 먼저 멈추게 되는 곳 가운데 하나가 삼상2:3입니다.개역개정은‘심히교만한말을다시하지말것이며오만한말을너희의입에서내지말지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그런데AC의 영어 인용은‘높은것을말하라,높은것을!옛것이네입에서나오게하라’는 식입니다.단어 몇 개가 다른 정도가 아니라 명령의 방향 자체가 거의 반대로 보입니다.그렇다면 어느 쪽이 맞는 것일까요?
먼저 우리의 성경을AC영어에 맞추어 바꿀 필요는 없습니다.삼상2:3의 히브리어 본문에는 금지를 나타내는 말이 있고,문맥 역시 한나가 교만과 오만을 경계하는 내용입니다.오늘날의 주요 영어 번역들도 대체로‘더이상그렇게교만하게말하지말라’, ‘오만한말이입에서나오지않게하라’는 방향으로 번역합니다.따라서 개역개정의‘심히교만한말을다시하지말것이며’는 히브리어 본문과 일반적인 번역 전통에 잘 맞습니다.
그러므로AC의 영어 문장을 보고‘개역개정번역자들이아르카나를몰라서잘못번역했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더구나AC의 영어 인용을‘문자적번역보다더깊은내적의미의번역’이라고 부르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AC.66자체는‘이구절의문자적의미는사실높은것을말하라는뜻이다’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단지 태고교회의 스타일을 설명하면서 현재 우리가 보는 것과 매우 다른 형태로 삼상2:3을 인용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원칙 하나가 생깁니다.성경 본문과AC의 인용문이 현저하게 다를 때에는 두 문장을 억지로 하나로 만들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성경은 성경대로 정확하게 제시하고,AC가 어떤 형태로 그 말씀을 인용하는지도 그대로 보여 주며,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독자에게 숨기지 않는 것입니다.그래서 이번AC.66의 한국어 본문에서도 삼상2:3은 개역개정 그대로‘심히교만한말을다시하지말것이며오만한말을너희의입에서내지말지어다’로 두는 것이 좋습니다.바로 뒤의 영어 원문에는 스베덴보리가 사용한 인용형이 그대로 남아 있으므로 독자는 차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는 왜 이처럼 다른 형태의 문장을 인용했을까요?그 정확한 문헌적 배경을 확인하지 않은 채‘스베덴보리가히브리어를영적으로다시번역했기때문이다’라고 설명하는 것은 위험합니다.스베덴보리가 사용한 당시의 성경 텍스트나 번역 전통,인용 관행을 문헌적으로 더 조사해야 할 문제입니다.현 단계에서 확실한 것은AC.66의 영어 인용이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히브리어 본문에 따른 일반적인 번역과 크게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이런 차이가AC.66전체의 설명을 무너뜨리는 것일까요?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스베덴보리가 이 인용을 사용하는 목적은 태고교회의 스타일이‘높은것’과‘옛것’에 관계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따라서 이 특정 인용이 그의 설명에서 수행하는 역할은 분명합니다.다만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더 조심해야 합니다.인용된 성경의 실제 문자와AC가 사용하는 인용형을 같은 것처럼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성경과AC의 관계를 다루는 데 중요한 사례가 됩니다.AC를 존중한다는 것이 성경을AC의 표현에 맞추어 다시 번역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오히려 성경의 문자적 본문을 먼저 존중하고,스베덴보리가 그 말씀을 어떤 방식으로 인용하고 사용하는지를 그 다음에 정확하게 살피는 것이 좋습니다.의미 차이가 없다면 익숙한 성경 표현을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지만,이번 삼상2:3처럼 의미 차이가 너무 크다면 그 차이를 감추지 않고 설명해야 합니다.
따라서 이번 경우에는‘개역개정과AC가운데하나를선택해야한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성경 번역에서는 개역개정의 문구를 유지합니다.동시에AC의 원문을 읽을 때에는 스베덴보리가 실제로‘높은것을말하라’는 형태로 인용했다는 사실도 그대로 인정합니다.그리고 그 차이가 왜 생겼는지는 확인 가능한 문헌적 근거 이상으로 추측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이 사례가 성경보다AC를 높이는 방향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번역에는보이지않는진짜뜻을AC만알고있다’는 식으로 말하기 시작하면,말씀의 속뜻을 밝힌다는AC의 역할과 말씀 자체의 권위가 뒤집힐 수 있습니다.AC.66역시 결국‘말씀의네가지스타일’을 설명하는 글입니다.중심은AC의 문장이 아니라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가장 안전하게 처리하는 방법은 단순합니다.삼상2:3은 개역개정 그대로 읽습니다.AC가 그와 다른 형태로 인용한다는 사실은 숨기지 않습니다.그리고 그 차이를‘성경은낮은문자,AC는높은영적번역’이라는 구조로 만들지 않습니다.바로 이런 태도가 말씀을 존중하면서 동시에 스베덴보리의 텍스트도 정직하게 읽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