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2026/09/06)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2, ‘다 함께 주를 경배하세’, 찬230, ‘우리의 참되신 구주시니’, 찬92, ‘위에 계신 나의 친구’입니다.

 

오늘은 창4 절별 주석 그 세 번째, 6절로 8절, AC 글 번호로는 359번에서 369번입니다. 먼저 본문입니다.

 

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6-8)

 

제목은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이며, 다음은 오늘부터 시작하는 ‘3분 요약’입니다. 새로 오신 분들, 그리고 기존 성도 모두를 위한, 지난 2월부터 시작한 이 특별한 주일예배를 위한, 그 흐름과 문맥을 잊지 않기 위한 시간입니다.

 

 

오늘 리딩에 들어가기 전에 지금까지의 큰 흐름을 잠깐 돌아보겠습니다. 우리는 창세기의 문자적 의미를 존중하면서, 스베덴보리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따라 그 속뜻을 함께 읽고 있습니다. 창1에서는 천지창조를 주님께서 인간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거듭남의 과정으로, 창2에서는 에덴동산을 주님의 사랑과 생명 안에 살아가는 천적인 상태로 읽었습니다. 그리고 창3에서는 사람이 주님보다 자기 감각과 proprium을 따르면서 그 질서가 무너지는 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창4에서는 그 이후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가 어떻게 변해 가는지를 읽고 있습니다. 가인은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본래 신앙과 체어리티는 함께 있어야 할 형제이지만, 신앙을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떼어 내어 그 자체로 중요한 것으로 여기기 시작하면서 둘 사이의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지난주에는 가인과 아벨의 제물을 읽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제물을 드렸지만 중요한 것은 제물의 종류가 아니라 그 예배가 어디에서 나왔는가였습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에서도 행위와 예배가 나올 수 있지만, 사랑의 생명이 없으면 ‘죽은 행위’와 ‘죽은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가인은 자기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분노했고 그의 얼굴이 떨어졌습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지난주 리딩이 끝났습니다.

 

오늘은 그 다음 장면입니다. 아직 가인은 아벨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먼저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시며 돌이킬 길을 열어 두십니다. 오늘은 한 가지를 마음에 두고 읽겠습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본래 함께 살아야 할 형제이며,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이제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도 주님께서 어떻게 인간을 부르시는지 함께 읽겠습니다.

 

 

다음은 오늘 리딩 범위인 AC.359-369 요약입니다.

 

 

AC.359-369는 앞의 AC.346-358에서 가인의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그 결과 가인이 분하여 얼굴이 떨어진 뒤, 그러니까 안색이 변한 뒤, 주님께서 아직 그에게 돌이킬 길을 열어 주시는 장면에서 시작, 마침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창4:6-8의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그리고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는 말씀을 하나씩 풀면서, 스베덴보리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할 수도 있었지만 오히려 체어리티 위에 군림하려 함으로써 마침내 그것을 소멸시키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이번 구간의 중심은 단순히 ‘가인이 왜 아벨을 죽였는가?’가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무엇이 주도해야 하며, 그 질서가 뒤집힐 때 신앙은 어떻게 자기 생명인 체어리티를 잃게 되는가?’에 있습니다.

 

AC.359-360에서 가장 먼저 주목할 것은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라는 말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양심이 말해 주었다’(conscience dictated)는 뜻이라고 설명합니다. 가인은 이미 분노했고 얼굴이 떨어졌으며, 체어리티가 떠남으로써 그의 내적인 것들이 변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아벨을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바로 그 사이에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악이 실제 행위로 완성되기 전에 주님께서 인간의 내면에 경고하시며 돌이킬 가능성을 열어 두신다는 매우 중요한 장면입니다. 가인의 상태가 이미 크게 기울어졌어도 주님의 부르심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여기서 ‘양심’이라는 표현은 태고교회와 고대교회의 차이를 염두에 두고 조심스럽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은 퍼셉션으로 인도되었고, 홍수 후 고대교회의 영적 인간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바탕으로 형성된 양심으로 인도되었다고 구별합니다. 그러므로 AC.359-360에서 가인에게 ‘양심이 말해 주었다’고 한다고 해서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이 후대 영적 인간과 똑같은 형태의 완성된 양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이미 타락의 길에 들어섰어도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인 딕테이트와 경고가 아직 남아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인간이 악을 선택하기 전에 끊임없이 선을 향하여 돌이킬 길을 보여 주십니다.

 

이것은 주님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를 함께 생각하게 합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이 아벨을 죽이지 못하도록 그의 자유를 강제로 빼앗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침묵하신 것도 아닙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고 말씀하시며 그의 상태를 보여 주시고,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고 경고하시며, 아직 선택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십니다. 주님의 섭리는 인간을 강제로 선하게 만드는 방식이 아니라, 자유 가운데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스스로 악에서 돌아서도록 끊임없이 이끄시는 방식으로 역사합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이야기는 악이 이미 결정된 운명처럼 진행된 이야기가 아니라, 여러 차례의 경고와 돌이킬 가능성에도 불구, 인간이 점차 체어리티를 거부하는 이야기입니다.

 

AC.361부터는 그 돌이킬 길이 무엇인지 더욱 분명해집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는 것은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면 체어리티가 함께 있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는 것은 선한 의도가 없다면 체어리티가 없고 오히려 악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는 말씀을 스베덴보리는 매우 뜻밖의 방식으로 풉니다. 여기서 ‘너를 원하는 것’은 체어리티이며,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하지만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함께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문제는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어느 하나를 버려야 한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둘 사이의 질서에 있습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아벨로 표상되는 체어리티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을 없애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본래 서로 적대하는 두 원리가 아니라 하나의 교회적 생명을 이루어야 하는 형제입니다. 문제는 가인, 곧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와 함께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 위에 서서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한다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창4:7의 깊은 긴장은 ‘신앙이냐 체어리티냐’가 아니라 ‘누가 주도권을 가지느냐’입니다.

 

AC.362는 이 질서의 전도가 어떻게 하나의 교리로 굳어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여기서 ‘가인’은 이제 단순히 한 사람의 내적 상태가 아니라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하고, 그 결과 사랑의 자손인 체어리티에서도 신앙을 분리하는 하나의 ‘신앙의 교리’를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는 어느 교회에서든 사람들이 신앙의 어떤 한 조항에 지나치게 집중하여 그것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만들 때 이단이 생길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거짓으로 믿어서 이단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한 가지를 전체보다 앞세우고 그것을 중심으로 나머지 모든 것을 재배열하면서 교리의 질서가 무너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그 생각을 자신이 발견한 것으로 여기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거기에 결합하면 문제는 더욱 깊어집니다. 사람은 자기가 특별히 발견했다고 생각하는 한 가지에 마음이 사로잡히면 점차 모든 것이 그것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게 됩니다. 처음에는 하나의 생각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성경도, 경험도, 다른 교리도 모두 자기 생각을 확증하는 자료처럼 읽히기 시작합니다. 마침내 그것이 거짓이라 해도 틀림없는 진리라고 맹세할 정도가 됩니다. 이것이 AC.362가 보여 주는 가인의 교리가 굳어지는 과정입니다.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은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고, 사랑 없이 살아감으로써 자기 사랑과 거기서 나온 판타지가 서로 결합하여 그 교리를 더욱 확증했습니다.

 

이 대목은 교리를 공부하는 사람에게 특별히 중요한 경고가 됩니다. 문제는 교리를 깊이 연구하는 것 자체가 아닙니다. 진리의 한 측면을 전체 질서에서 떼어 내어 가장 중요한 것으로 만들고, 그 지식을 자기의 발견이나 영적 우월성으로 소유하려 할 때 문제가 시작됩니다. 이것은 AC를 읽고 말씀의 속뜻과 상응을 배우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아르카나를 안다는 사실이 우리를 더 겸손하게 하고 이웃을 더 사랑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깊은 진리를 안다는 자기 의식을 강화한다면 높은 진리조차 가인의 교리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진리는 언제나 사랑과 체어리티를 섬겨야 합니다.

 

AC.363은 그래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올바른 질서를 매우 명확하게 선언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결합될 수 있지만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권을 가져야’ 합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에서 ‘선을 행한다’는 것은 속뜻으로 선한 의도를 가지는 것을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선을 행하는 것은 선을 의도하는 것(from willing what is good)에서 나오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가인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단순히 겉으로 착한 행동 몇 가지를 더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적 의지가 선을 향하고 그 선에서 실제 행위가 나오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고대에는 행위와 의지가 하나였다’고 말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을 고대에 살았던 모든 사람이 거짓이나 위선을 전혀 몰랐다는 일반적인 역사적 진술로 확대하기보다, 이 문맥에서 다루는 태고교회 사람들의 특유한 내적 상태와 연결하여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는 의지와 행위가 아직 하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행위를 보면 그 사람의 의지를 알 수 있었으며, 속마음과 다른 모습을 밖으로 꾸미는 위선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AC.363의 관심은 당시 인류 전체의 사회사를 설명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었는지를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앞에서 살펴본 가인의 제물과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가인에게는 행위가 있었고 예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AC.348-349에서 그것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죽은 행위’와 ‘죽은 예배’로 설명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선을 행한다’는 것은 단지 외적 행위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선한 의지에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한 의지의 궁극적 근원 역시 인간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있습니다. 인간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받아 의지하고 행할 때,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다시 결합되며 그의 얼굴, 곧 내적인 것들도 다시 들릴 수 있습니다.

 

AC.364에서는 그 반대의 상태가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는 말씀으로 나타납니다. 선한 의도가 없으면 체어리티가 없고, 체어리티가 없는 곳에는 무자비함과 증오가 있으며 그 결과 온갖 악이 들어올 준비를 합니다.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는 것은 악이 아직 완전히 들어와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 최종 상태라기보다, 마음 문 앞에서 들어오기를 원하며 기다리는 상태를 보여 줍니다. 가인은 이미 분노했고 얼굴도 떨어졌지만 아직 아벨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에는 경고와 함께 아직 돌아설 수 있다는 가능성도 들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죄를 일반적으로 ‘마귀’라고 부르며, 사람이 체어리티를 잃을 때 마귀, 곧 지옥의 무리가 가까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이 악을 행한 책임을 외부 마귀에게 돌릴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유입에 관한 가르침에서 인간에게 선과 악의 영향이 유입되지만, 인간은 자유 가운데 어느 것을 받아들이고 자기 것으로 삼을지를 선택합니다. 그러므로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는 것은 악이 강제로 인간 안으로 들어온다는 뜻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사라진 마음이 악의 유입을 받아들이기 쉬운 상태가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AC.364는 그 악을 마음 문에서 몰아내는 길을 매우 단순하면서도 강하게 제시합니다. 그것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입니다. 더 강한 자기 의지나 더 많은 종교 지식만으로 악을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받아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악을 몰아내는 근본적인 힘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계속 이어져 온 가인의 문제를 정확히 뒤집습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회복의 길 역시 신앙을 더욱 독립적으로 강화하는 데 있지 않고, 신앙이 다시 사랑과 체어리티 안으로 돌아가는 데 있습니다.

 

AC.365는 이 관계를 ‘불꽃’과 ‘빛’이라는 아름다운 비유로 설명합니다. 체어리티는 불꽃과 같고 신앙은 그 불꽃에서 나오는 빛과 같습니다. 불꽃에는 열과 빛이 함께 있으며, 열과 빛은 모두 불꽃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 불꽃의 열이 없는 빛과 같아집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겨울의 빛’이라고 부릅니다. 겨울에도 빛은 있습니다. 사물을 볼 수도 있고 무엇이 어디 있는지 분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빛에는 생명을 일으키는 따뜻함이 없기 때문에 그 아래에서는 모든 것이 굳어지고 죽습니다.

 

이 ‘겨울의 빛’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성질을 매우 정확하게 보여 줍니다. 사람에게 성경 지식과 교리적 이해가 있을 수 있고, 상당히 정확하게 진리를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 빛에는 열이 없습니다. 반대로 이것이 진리나 신앙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도 아닙니다. 불꽃에는 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빛도 있습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진리의 빛을 필요로 하며, 진리는 사랑이 어떻게 지혜롭게 이웃을 섬겨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문제는 빛 자체가 아니라 빛이 불꽃에서 떨어져 나와 홀로 존재하려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AC.361-365가 반복해서 말하는 것은 ‘신앙을 버리고 체어리티만 가지라’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다시 올바른 질서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는 동안에는 참된 신앙이 아니며, 체어리티가 주도할 때 비로소 신앙이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사랑이 신앙을 지배해야 한다는 단순한 인간 중심적 명제가 아닙니다. 모든 참된 체어리티의 근원은 주님이시므로, 체어리티가 주도한다는 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이 진리를 통하여 인간의 삶을 이끈다는 뜻입니다.

 

AC.366에서 마침내 창4:8의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에 이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먼저 ‘가인이 아벨에게 말하고’라는 표현이 ‘시간의 간격’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아벨의 죽음은 가인의 분노 직후 갑자기 일어난 사건으로만 읽히지 않습니다. 가인이 분노하고, 얼굴이 떨어지고, 주님의 경고를 받고,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는 말씀을 들었음에도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단계에 이른 것입니다. 가인의 타락은 이번에도 점진적입니다.

 

여기서 아벨을 거듭 ‘아우’, 곧 ‘형제’라고 부르는 것도 중요합니다. 아벨로 표상되는 체어리티는 신앙의 적이 아니라 신앙의 형제입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본래 한 교회 안에서 함께 태어나 함께 살아야 하는 두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것은 신앙이 자기와 무관한 적을 제거했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에게 생명을 주어야 할 형제를 죽였다는 뜻입니다.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순간 신앙은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생명의 근원을 잃게 됩니다.

 

또한 가인이 아벨을 죽인 장소가 ‘들’이라는 것도 중요합니다. ‘들’은 교리에 속한 것들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체어리티의 소멸은 단순히 감정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교리의 ‘들’에서도 일어납니다. AC.362에서 보았듯이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세우는 생각이 하나의 교리로 굳어지고, 그 교리가 체어리티를 부차적인 것으로 밀어낼 때, 바로 그 교리의 들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일이 일어납니다. 교리는 체어리티를 살리는 들이 될 수도 있고,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들이 될 수도 있습니다.

 

AC.367은 그래서 ‘체어리티가 신앙의 형제’라는 사실을 말씀 전체를 통해 확증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에서와 야곱, 베레스와 세라, 에브라임과 므낫세처럼 말씀에 반복해서 나타나는 형제와 장자권의 이야기를 가져옵니다. 이 이야기들에는 공통적으로 ‘누가 장자인가’, ‘누가 주도권을 가지는가’라는 문제가 등장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둘 다 교회의 자손이지만, 인간의 거듭남 과정에서는 어느 것이 앞서는 것처럼 보이는가와 궁극적으로 어느 것이 주도해야 하는가 사이에 긴장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특히 야곱과 에서의 관계는 가인과 아벨의 관계와 비슷한 문제를 보여 줍니다. 야곱은 형 에서를 밀어내려 했으며 장자권과 주도권을 차지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궁극적으로 에서로 표상되는 체어리티가 주도권을 가지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거듭남의 질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영적 인간의 거듭남 과정에서는 진리와 신앙이 먼저 앞에 서서 사람을 이끄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사람은 먼저 말씀을 배우고 무엇이 선인지 알며, 그 진리에 따라 자신을 훈련합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깊어지면 진리가 선 안으로 들어가고, 마침내 선과 체어리티가 진리를 이끄는 천국의 질서가 세워집니다. 따라서 체어리티의 주도권은 진리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본래의 목적 안에 두는 것입니다.

 

AC.367의 마지막에서 주님께서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고 하신 눅8:21의 말씀도 같은 질서를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듣는 것’을 신앙에, ‘행하는 것’을 체어리티에 연결합니다. 말씀을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은 서로 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마7에서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습니다. 따라서 참된 ‘형제 관계’는 신앙을 고백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들은 진리가 체어리티의 삶으로 나타날 때 이루어집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의 ‘형제의 언약’은 진리를 듣는 것과 그 진리를 행하는 것이 하나가 되는 삶입니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 ‘형제’라는 말의 의미도 새롭게 보여 줍니다. 같은 교리를 고백하고 같은 교회에 속했다고 해서 자동으로 영적 형제 관계가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초대교회에서 서로를 형제라 부른 깊은 이유는 체어리티에 있었습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고, 말씀을 듣고 행하며, 서로의 쓰임을 위하여 살아갈 때 신앙의 형제 관계가 실제가 됩니다. 따라서 교회의 참된 연합 역시 단순한 교리적 동일성만이 아니라 진리와 체어리티가 함께 살아 있는 데서 이루어집니다.

 

AC.368은 AC.366에서 ‘들’이 교리를 상징한다고 한 것을 말씀의 여러 구절을 통해 더욱 자세히 확증합니다. 씨를 뿌리는 들, 좋은 씨와 가라지가 함께 있는 들, 밭에 감추인 보화 등 말씀에서 ‘들’은 단순한 농경지가 아니라 진리와 선이 심기고 자라며 열매 맺는 교리적 영역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가인이 아벨을 죽인 장소가 왜 ‘들’이어야 했는지를 이해하게 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결정하는 중요한 싸움이 바로 교리의 영역에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교리는 본래 인간을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인도하기 위한 것입니다. 말씀의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이유도 결국 그 진리가 삶이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교리가 그 목적을 잃고 자기 정당화나 우월성을 위한 체계가 되면, 같은 ‘들’이 오히려 체어리티를 죽이는 장소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교리의 참됨은 단순히 논리적으로 얼마나 정교한가만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참된 교리는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를 살리고, 인간이 실제 선과 쓰임의 삶으로 나아가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들’은 생명의 씨앗이 자라는 장소인 동시에, 그 질서가 뒤집히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장소가 될 수도 있습니다.

 

AC.369는 지금까지의 설명을 하나로 모아 창4:8의 결론을 밝힙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고, 아벨은 체어리티이며, 둘은 본래 형제이고, 들은 신앙의 교리에 속한 것들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는 말씀은 신앙과 체어리티가 둘 다 교회의 교리 안에서 나왔음에도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고, 그로 말미암아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상태를 뜻합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체어리티의 소멸이 처음부터 ‘체어리티는 필요 없다’고 노골적으로 선언하는 방식으로만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먼저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세웁니다. 그러면 체어리티는 신앙에 비해 부차적인 것이 됩니다. 입술로는 사랑과 선한 삶이 중요하다고 말하면서도 구원의 본질은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 자체에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러한 전제가 결국 체어리티를 소멸시킨다고 말합니다.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것’이 마침내 아벨을 죽이는 데까지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AC.369는 스베덴보리 당시 기독교의 ‘체어리티의 행위가 없어도 오직 신앙만으로 구원받는다’는 교리를 직접 비판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단순히 특정 교파나 종교개혁의 표어를 공격하는 것으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문제 삼는 것은 신앙 자체가 아니라 신앙을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하는 영적 질서입니다. 실제로 입술로는 ‘사랑이 없는 신앙은 구원하지 못한다’고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구원하는 본질은 오직 신앙이라고 전제한다면 체어리티는 실제 교리와 삶에서 점차 주변으로 밀려날 수 있습니다. 바로 그 내적 모순을 가인의 상태가 보여 줍니다.

 

따라서 AC.359-369 전체를 보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은 결코 갑작스럽지 않습니다. AC.338에서 시작된 작은 구별이 사랑과 신앙의 분리가 되고, AC.346-358에서 그 분리가 죽은 행위와 죽은 예배로 나타났으며, 예배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분노와 내적인 것들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번 구간에서는 주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신앙이 체어리티 위에 주도권을 가지려 하고, 그 질서의 전도가 하나의 교리로 굳어지며, 마침내 교리의 들에서 자기 형제인 체어리티를 소멸시킵니다. ‘구별 → 분리 → 죽은 행위 → 죽은 예배 → 분노 → 내적인 것들의 변화 → 체어리티에 대한 지배 → 체어리티의 소멸’이라는 하나의 긴 흐름이 창4:8에서 절정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 구간에는 심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매우 중요한 자비의 메시지도 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기 전에 여호와께서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고 하셨고, 죄가 아직 문에 있을 때 경고하셨으며, 선을 행하면 다시 얼굴을 들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악의 길로 상당히 깊이 들어갔어도 주님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선으로 돌아올 길을 열어 두신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변하는 것은 주님의 사랑과 자비가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상태입니다. 주님의 얼굴은 여전히 인간을 향하고 있지만, 가인은 그 얼굴을 받아들이는 대신 자기 사랑과 분리된 신앙을 선택합니다.

 

이것은 거듭남의 과정에서도 매우 실제적인 문제입니다. 우리 안에도 어떤 진리를 다른 모든 것보다 높이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 있고, 내가 옳다는 확신 때문에 이웃에 대한 사랑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교리를 지키겠다는 명분으로 사람을 정죄하고, 진리를 변호한다는 이유로 체어리티를 희생할 수도 있습니다. 바로 그때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는 말씀과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는 말씀이 우리에게도 들려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진리는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 자유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이웃을 지혜롭게 사랑할 것인지를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특히 AC를 읽는 우리에게 가인의 이야기는 더욱 조심스러운 자기 점검을 요구합니다. 말씀의 속뜻을 알고 상응을 이해하며 스베덴보리의 아르카나를 많이 배운다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지식 때문에 ‘나는 다른 사람보다 더 깊은 진리를 안다’는 생각이 자라나고,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을 쉽게 판단하거나 그 안에 있는 선과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게 된다면 바로 우리가 공부하는 ‘교리의 들’에서 아벨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참된 교리는 사람을 높이는 지식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 더욱 겸손하게 하고, 이웃을 더 지혜롭게 사랑하게 하며, 실제 쓰임으로 나아가게 하는 진리여야 합니다.

 

결국 AC.359-369가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나는 옳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내가 가진 신앙 안에서 아벨은 살아 있는가?’를 묻습니다. 내가 알고 믿는 진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따뜻해지고 있는지, 아니면 많은 빛은 있지만 열이 없는 ‘겨울의 빛’이 되어 가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경쟁자로 여기지 않고 자기 형제로 받아들이며, 체어리티 안에서 비로소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따라서 이번 AC.359-369는 앞의 AC.346-358에서 나타난 ‘죽은 행위와 죽은 예배’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결정적인 구간입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은 처음에는 여전히 행위하고 예배하며 진리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분리가 계속되면 체어리티를 자기 아래 두려 하고, 교리적으로 그 질서를 정당화하며, 마침내 체어리티 자체를 소멸시킬 수 있습니다. 반대로 주님께서 이루시는 거듭남은 이 과정을 거꾸로 돌리는 일입니다. 진리가 다시 선을 섬기고, 신앙이 체어리티와 결합하며, 우리가 듣는 말씀을 실제로 행하고,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이 이웃을 향한 쓰임으로 나타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결국 우리 안에서 매일 일어나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질서에 관한 말씀입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였지만,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가인과 아벨이 형제로 함께 사는 것입니다. 신앙의 빛이 체어리티의 불꽃에서 나오고, 진리가 선을 섬기며, 아는 것과 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이 주님 안에서 점차 하나가 되는 것, 이것이 거듭남의 질서입니다. 그리고 그 질서가 회복될 때 우리의 신앙은 더 이상 모든 것을 얼어붙게 하는 ‘겨울의 빛’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열을 품고 이웃을 살리는 살아 있는 빛이 됩니다.

 

 

이상 요약을 마치고, 아래는 AC 본문, 해설 및 심화입니다.

 

 

AC.359, 창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다 - 양심을 통한 주님의 부르심 (AC.359-360)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And Jehovah said unto Cain, Why is thine anger kindled? And why are thy faces fallen? (창4:6) AC.359‘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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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0, 창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 다시 확인되는 양심의 딕테이트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창4:6) AC.360‘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Jehovah said unto Cain)가 양심이 말해 주었음을 뜻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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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1, 창4:7,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AC.361-365)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If thou doest well, is there not an uplifting? And if thou doest not w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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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2, 창4:7,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든 가인의 교리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7) AC.362여기서는 ‘가인’(Cain)이라 하는 신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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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3, 창4:7,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권을 가져야 합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7) AC.363‘가인’(Cain)이라 불린 신앙의 교리가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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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4, 창4:7,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 악을 물리치는 것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7) AC.364 둘째로, ‘네가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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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5, 창4:7,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겨울의 빛과 같습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7) AC.365셋째로,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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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6, 창4: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죽이다 -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다 (AC.366-369)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And Cain spake to Abel his brother; and it came to pass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hat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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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7, 창4:8, 신앙과 체어리티는 형제입니다 - 장자권과 주도권의 속뜻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8) AC.367이러한 것들은 말씀의 비슷한 구절들로 확증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체어리티가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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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8, 창4:8, ‘들’은 왜 교리를 상징하는가? - 신앙의 씨가 뿌려지는 곳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8) AC.368‘들’(field)이 교리를 상징하며, 따라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교리에 속한 모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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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9, 창4:8, 가인이 아벨을 죽이다 -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신앙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8) AC.369그러므로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였다. 그들이 함께 들에 있을 때에’(Cain r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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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AC 리딩 본문 전체는 여기까지이고, 이 가운데 필수 리딩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AC.361, 창4:7,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AC.361-365)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If thou doest well, is there not an uplifting? And if thou doest not w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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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5, 창4:7,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겨울의 빛과 같습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7) AC.365셋째로,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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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9, 창4:8, 가인이 아벨을 죽이다 -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신앙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8) AC.369그러므로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였다. 그들이 함께 들에 있을 때에’(Cain r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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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이어서 성찬 있습니다.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9-06(D1)

 

2667, 4, 창4.4, 2026-09-06(D1)-주일예배(창4,6-8, AC.359-369, 성찬),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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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8/30, 창4:3-5, AC.346-358), ‘가인과 아벨의 제물 - 무엇이 예배를 살아 있게 하는가?’

※ 오늘(2026/08/30)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1, ‘홀로 한 분 하나님께’, 찬91, ‘슬픈 마음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은 창4 절별 주석 그 두 번째, 3절로 5절, AC 글 번호로는 346번에서 358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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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8)

 

AC.369

그러므로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였다. 그들이 함께 들에 있을 때에’(Cain rose up against his brother Abel, and slew him,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ogether)라는 말씀은, 신앙과 체어리티가 둘 다 신앙의 교리에서 나온 것이라 할지라도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고, 그로 말미암아 결국 체어리티를 소멸시킬 수밖에 없었음을 뜻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체어리티의 행위가 없어도 오직 신앙만으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경우와 같습니다. 그들은 사랑이 없으면 신앙이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입술로 고백하면서도, 바로 ‘오직 신앙만으로 구원받는다’는 그 전제 자체로 체어리티를 소멸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From this then it follows that the words “Cain rose up against his brother Abel, and slew him,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ogether,” denote that while both faith and charity were from the doctrine of faith, yet faith separate from love could not but disregard and thereby extinguish charity; as is the case at the present day with those who maintain that faith alone saves, without a work of charity, for in this very supposition they extinguish charity, although they know and confess with their lips that faith is not saving unless there is love.

 

해설

AC.369는 앞의 여러 단락에서 하나씩 설명해 온 상응을 창4:8의 한 장면 안에 다시 모아 줍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형제’는 본래 서로 결합되어야 하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들’은 교리, 곧 신앙과 체어리티의 교리에 속한 것들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였다. 그들이 함께 들에 있을 때에’라는 말씀은 단순히 한 형제가 다른 형제를 죽인 사건을 넘어,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교리의 영역에서 자기 형제인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여기서 특별히 눈여겨볼 것은 스베덴보리가 ‘신앙과 체어리티가 둘 다 신앙의 교리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한다는 점입니다. 가인과 아벨은 처음부터 전혀 관계없는 두 원리가 아니었습니다. AC.367에서 이미 보았듯이 둘은 모두 ‘교회의 자손’이며 형제입니다. 참된 교리 안에는 신앙도 있고 체어리티도 있습니다. 진리를 믿는 것과 그 진리에 따라 선을 행하는 것은 본래 하나의 교회적 삶 안에서 함께 있어야 합니다. 문제는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자기 자신을 독립적인 구원의 원리로 세울 때 시작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사용하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먼저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게 여긴다’(disregard)고 합니다. 처음부터 ‘체어리티는 필요 없다’고 노골적으로 부정하는 것만이 문제인 것은 아닙니다. 신앙을 구원의 본질적인 것으로 세우고 체어리티를 그 뒤에 따라오는 부차적인 것으로 밀어내는 순간 이미 질서가 뒤집히기 시작합니다. AC.365에서 보았듯이 신앙이 주도권을 가지려 하는 동안에는 참된 신앙이 아니며, 체어리티가 주도할 때 비로소 신앙이 됩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에 덧붙이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신앙에 생명을 주는 본질적인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말씀의 깊은 의미입니다.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것은 단순히 체어리티의 위치를 조금 낮추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로 말미암아 결국 체어리티를 소멸시킨다’고 말합니다.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채 구원하는 신앙으로 세워지면, 사람이 실제로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사는가는 구원의 본질에서 점차 밀려나게 됩니다. 입술로는 사랑과 선한 삶이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교리의 구조 자체가 그것들을 구원의 본질에서 제외한다면 체어리티는 실제 삶에서 점점 생명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AC.369 후반은 스베덴보리 당시의 기독교를 향한 매우 직접적인 비판으로 이어집니다. 그는 ‘체어리티의 행위가 없어도 오직 신앙만으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가인의 상태와 연결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비판하는 것은 신앙 자체가 아닙니다. 오히려 앞에서 계속 보았듯이 신앙과 체어리티는 형제이며 둘 다 교회의 자손입니다. 문제는 ‘신앙만으로’라는 분리입니다. 신앙을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떼어 내어 그것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만드는 순간, 신앙은 자기 생명의 근원과 분리됩니다.

 

더욱 날카로운 것은 그들이 체어리티의 필요성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들도 ‘사랑이 없으면 신앙이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입술로 고백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교리적으로는 ‘사랑도 중요합니다’, ‘선한 삶도 필요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구원은 오직 신앙만으로 받는다’고 전제한다면, 사랑과 체어리티는 결국 구원의 본질 밖으로 밀려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문제 삼는 것은 바로 이 내적인 모순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특정 교파의 교리 문구를 공격하기 위한 설명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가인은 하나의 역사적 교리 논쟁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하려는 영적 경향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나는 오직 신앙만을 주장하지 않으니 가인과 관계없다’고 쉽게 지나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것, 올바른 교리를 고백하는 것, AC의 속뜻을 이해하는 것을 실제 사랑과 삶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한다면 같은 질서의 전도가 우리 안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특히 AC를 읽는 우리에게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경고가 됩니다. 말씀의 속뜻과 상응을 많이 알고,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아르카나를 이해한다고 해서 그것 자체가 영적 생명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러한 지식 때문에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은 진리를 알고 있다고 여기고, 그 지식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며, 실제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을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게 된다면 바로 그 교리의 ‘들’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높은 진리라 할지라도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 겨울의 빛이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소멸시키지 않고 살립니다. 진리를 알수록 주님을 더 사랑하게 되고,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더 분명히 보게 되며, 이웃을 더 지혜롭게 사랑하고 실제 쓰임을 행하게 된다면 신앙과 체어리티는 형제로 함께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체어리티에게서 생명을 받고, 체어리티는 신앙의 진리를 통하여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배우며, 둘은 하나의 삶 안에서 결합됩니다.

 

따라서 AC.369에서 가장 무서운 말은 어쩌면 ‘죽였다’보다 그 앞의 ‘중요하지 않게 여겼다’일 수 있습니다. 체어리티의 소멸은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사랑보다 신앙을 조금 더 본질적인 것으로 여기고, 다음에는 체어리티를 신앙 뒤에 따라오는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며, 마침내는 체어리티가 없어도 신앙 자체가 사람을 구원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AC.338부터 이어져 온 가인의 길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이 먼저 그 자체로 어떤 것으로 구별되고, 점차 사랑에서 분리되고, 체어리티 없는 행위와 예배를 낳으며,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고, 마침내 자기 형제 아벨을 소멸시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우리에게 ‘당신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가?’만을 묻지 않습니다. 오히려 ‘당신의 신앙 안에서 아벨은 살아 있는가?’라고 묻습니다. 내가 믿고 고백하는 진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살아 움직이고 있는지, 아니면 입술로는 체어리티를 인정하면서 실제로는 그것을 신앙보다 덜 중요한 것으로 밀어내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참된 신앙은 자기 형제를 죽이지 않습니다. 체어리티와 함께 살며,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그리고 그 체어리티의 궁극적인 근원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모든 선과 사랑의 근원이신 주님이십니다.

 

 

 

AC.370, 창4:9,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 체어리티를 완전히 거부하게 된 신앙’ (AC.370-3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And Jehovah said unto Cain, Where is Abel thy brother? And he said, I know not, am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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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8, 창4:8, ‘들’은 왜 교리를 상징하는가? - 신앙의 씨가 뿌려지는 곳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8) AC.368‘들’(field)이 교리를 상징하며, 따라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교리에 속한 모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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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And Cain spake to Abel his brother; and it came to pass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hat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r, and slew him. (창4:8)

 

AC.366

‘가인이 아벨에게 말하고’(Cain spake to Abel)는 시간의 간격을 상징합니다. ‘가인’(Cain)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아벨’(Abel)은 신앙의 형제인 체어리티를 상징하며, 이런 이유로 여기서는 아벨을 두 번이나 가인의 ‘아우’(brother)라고 부릅니다. ‘들’(field)은 교리에 속한 모든 것을 상징합니다.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r, and slew him)는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음을 상징합니다. “Cain spake to Abel” signifies an interval of time. “Cain,” as before stated, signifies faith separated from love; and “Abel” charity, the brother of faith, on which account he is here twice called his “brother.” A “field” signifies whatever is of doctrine.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r, and slew him” signifies that separated faith extinguished charity.

 

해설

AC.366에서 마침내 창4의 결정적인 사건, 곧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장면에 이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AC.338부터 이어진 설명을 따라왔다면, 이 사건이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 안에서 살아 있던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자신을 구별하기 시작했고, 그 구별이 점차 분리가 되었으며, 분리된 신앙에서 죽은 행위와 죽은 예배가 나왔습니다. 이어 체어리티가 떠나면서 가인의 분노가 일어나고 안색이 변했으며, 마침내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주도권을 가지려 했습니다. 이제 그 과정의 마지막 단계가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는 말씀으로 나타납니다. 곧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것’입니다.

 

먼저 매우 흥미로운 것은 ‘가인이 아벨에게 말하였고’(Cain spake to Abel)를 스베덴보리가 ‘시간의 간격’(an interval of time)이라고 해석한다는 점입니다. 개역개정 창4:8은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라고 되어 있지만, 무엇을 말했는지는 기록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도 여기서 그 대화의 내용을 추측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표현이 하나의 상태에서 다음 상태로 넘어가기까지 일정한 시간이 있었음을 나타낸다고 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흐름에서 상당히 중요합니다. 가인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상태에 즉시 도달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AC.346에서는 이미 ‘세월이 지난 후에’가 시간의 진행을 뜻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AC.359-365에서는 가인이 분노하고 안색이 변한 뒤에도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며, 선을 행하면 얼굴을 들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고 경고하십니다. 체어리티 역시 여전히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벨의 죽음은 최초의 작은 구별이 생긴 바로 그 순간 일어난 일이 아니라,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로부터 점차 멀어져 마침내 그것을 완전히 배척하기에 이른 결과입니다.

 

이 점은 영적으로도 중요합니다. 인간의 내면에서 어떤 악이 완성되는 과정 역시 대개 한순간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하나의 생각이나 애정으로 나타나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확증하면서 점차 의지의 일부가 되며, 마침내 삶으로 굳어집니다. 물론 AC.366 자체가 이러한 거듭남의 심리적 단계를 상세히 설명하는 것은 아니므로 지나치게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가인의 상태가 시간의 진행을 거쳐 아벨을 소멸시키는 단계까지 왔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다음으로 스베덴보리는 다시 ‘가인’과 ‘아벨’의 의미를 확인합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faith separated from love)이고, 아벨은 ‘신앙의 형제인 체어리티’(charity, the brother of faith)입니다. 여기서 특별히 주목할 표현은 ‘신앙의 형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때문에 이 절에서 아벨을 두 번이나 가인의 ‘아우’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361-365와 매우 깊이 연결됩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의 적이 아닙니다. 아벨은 가인의 적이 아니라 ‘아우’입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을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AC.365에서 보았듯이 신앙은 체어리티와 결합할 때, 비로소 참된 신앙이 됩니다. 따라서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것은 신앙이 자기의 적을 제거한 것이 아니라, 본래 자기와 하나를 이루어야 할 ‘형제’를 제거한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이 사건의 비극성이 있습니다.

 

더구나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체어리티가 사라지면, 신앙 자체도 결국 생명을 잃습니다. AC.365의 비유를 빌리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은 빛이 자기에게 생명을 주는 불꽃의 열을 제거하는 것과 같습니다. 빛은 잠시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교리도 있고, 종교적 지식도 있고, 예배도 계속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겨울의 빛’입니다. 체어리티라는 열이 사라졌으므로 그 안에서는 결국 모든 것이 굳어지고 죽게 됩니다.

 

그리고 AC.366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중요한 상응이 ‘들’(field)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들은 교리에 속한 모든 것(whatever is of doctrine)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일이 아무 곳에서나 일어난 것이 아니라 ‘들’에서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속뜻으로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충돌이 바로 ‘교리에 속한 것들’ 가운데서 일어난 것입니다.

 

이 대목은 앞의 AC.362를 떠올리게 합니다.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은 신앙이라는 어떤 것을 붙잡아 그것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그들을 부풀게 하자 모든 것이 자기 생각과 일치하고 그것을 확증하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하나의 교리적 입장이 삶의 질서를 뒤집었습니다. 이제 AC.366에서는 바로 그 교리의 영역인 ‘들’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입니다.

 

그러므로 ‘들’은 교리 자체가 나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리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문제는 교리 안에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질서가 어떻게 세워져 있느냐입니다. 교리가 신앙을 체어리티와 결합시키고, 진리를 선으로 인도하며, 사람을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끈다면 그 교리는 생명을 섬깁니다. 그러나 교리가 신앙을 사랑으로부터 분리시키고, ‘무엇을 믿느냐’를 ‘어떻게 사느냐’와 떼어 놓으며, 체어리티를 부차적인 것으로 밀어내기 시작한다면 바로 그 ‘들’에서 아벨이 죽을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가인의 이야기는 교회의 역사에서도 반복될 수 있고, 개인의 신앙생활에서도 반복될 수 있습니다. 어떤 교리적 문제를 붙들고 그것이 너무 중요해진 나머지 그 교리를 지키기 위해 이웃을 미워하고, 정죄하고, 체어리티를 버린다면 외적으로는 ‘진리를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내적으로는 가인이 아벨을 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진리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진리가 체어리티와 분리될 때 진리의 올바른 질서가 무너진다는 뜻입니다.

 

특히 앞서 AC.362에서 살펴본 ‘이단’의 형성과 연결하면 더욱 선명합니다. 이단은 반드시 처음부터 완전한 거짓을 선택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하나의 신앙 항목을 전체보다 앞세워 ‘주된 것’으로 만드는 데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이 한 일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고, 마침내 교리의 영역에서 체어리티를 소멸시키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므로 ‘가인이 들에서 아벨을 죽였다’는 것은 단순히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죽였다는 이야기를 넘어, 교리 안에서 신앙이 체어리티를 배제하는 비극적인 교회적 상태를 묘사합니다.

 

여기서 ‘소멸시켰다’(extinguished)는 표현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체어리티가 약해졌다거나 뒤로 밀려났다고 하지 않습니다.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고 합니다. 이것은 가인의 상태가 이제 결정적인 단계에 이르렀음을 보여 줍니다. AC.361에서는 체어리티가 아직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했습니다. AC.364에서는 죄가 아직 ‘문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AC.366에서는 그 문턱을 넘어섭니다. 체어리티를 지배하려던 신앙이 마침내 체어리티를 제거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AC.359-366의 흐름은 매우 엄중합니다. 얼굴이 떨어졌을 때, 곧 안색이 변했을 때에도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죄가 문에 있을 때에도 경고하셨습니다. 체어리티는 여전히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했습니다. 아직 돌아설 수 있는 여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계속 자기의 주도권을 고집하면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갑니다. 악은 처음부터 완성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반복하여 받아들이고 확증할수록 점차 자기 것이 되고 결국 삶의 질서 자체를 바꾸어 놓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앞서 우리가 살펴본 ‘가인의 진행 과정’이 이제 거의 완전한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처음에는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이 하나의 것으로 구별되었습니다. 그 구별 자체가 곧 악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을 ‘그 자체로 어떤 것’으로 여기면서 사랑으로부터 분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체어리티 없는 행위가 나타났고, 체어리티 없는 예배가 나타났으며, 체어리티가 떠나자 분노와 내적 상태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어 신앙은 체어리티보다 위에 서려고 했고, 자기 사랑과 환상으로 자신의 입장을 확증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교리의 ‘들’에서 체어리티를 소멸시킵니다.

 

‘구별 → 분리 → 죽은 행위 → 죽은 예배 → 분노와 내적 상태의 변화 → 체어리티에 대한 지배 → 체어리티의 소멸.’

 

이 흐름을 보면 왜 처음의 ‘구별’과 이후의 ‘분리’를 정확히 구별해야 하는지도 다시 분명해집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서로 구별될 수 있습니다. 신앙은 진리에 속하고, 체어리티는 선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별된 것이 분리되어서는 안 됩니다. 서로 다른 기능을 가지면서 하나의 생명을 이루어야 합니다. 눈의 빛과 몸의 열이 다르다고 해서 생명에서 떼어 놓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읽어 온 창4의 속뜻을 매우 실제적인 질문으로 돌려놓습니다. ‘나는 가인인가, 아벨인가?’라고 사람을 두 종류로 나누어 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 안의 신앙이 체어리티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진리가 이웃을 사랑하도록 이끌고 있는지, 아니면 그 진리를 가지고 이웃을 판단하고 있는지,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교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더욱 살아 있게 하는지, 아니면 그 교리를 지키기 위해 체어리티를 희생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특히 AC를 읽는 우리에게 이 말씀은 더욱 조심스럽게 다가옵니다. 말씀의 속뜻을 알고, 기존의 성경 해석과 다른 깊은 의미를 발견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가인의 위험은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것을 알고, 저 사람들은 모른다’는 자기 사랑이 들어오면, 매우 높은 진리조차 겨울의 빛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진리를 가지고 다른 교회나 다른 그리스도인을 낮추고 체어리티를 잃는다면,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말씀을 해설하면서 바로 그 일을 우리 안에서 반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교리는 언제나 아벨을 살려야 합니다. 진리는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무기가 아니라 체어리티가 더욱 지혜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비추는 빛이어야 합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지배하는 주인이 아니라 체어리티와 함께 주님의 뜻을 이루는 형제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둘이 올바른 질서 안에서 하나가 될 때, 신앙은 더 이상 겨울의 빛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따뜻한 빛이 됩니다.

 

결국 AC.366에서 아벨의 죽음은 육체적인 죽음의 장면을 넘어 ‘체어리티가 교회 안에서 소멸되는 상태’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사랑에서 신앙을 떼어내고, 신앙을 사랑보다 높이며, 그 신앙을 자기 사랑으로 확증하는 작은 질서의 전도가 계속될 때, 마침내 일어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가인에게 미리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아직 죄가 문에 있을 때, 아직 아벨이 살아 있을 때, 아직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하고 있을 때, 돌아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AC.366은 지금까지의 가인 이야기에 하나의 무거운 마침표를 찍습니다.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였다’는 것은 결국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는 것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잃으면 체어리티만 죽는 것이 아닙니다. AC.365에서 보았듯이 신앙 자신도 생명의 열을 잃습니다. 아벨을 죽인 가인은 결국 자기 신앙의 생명까지 죽이는 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AC.367, 창4:8, 신앙과 체어리티는 형제입니다 - 장자권과 주도권의 속뜻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8) AC.367이러한 것들은 말씀의 비슷한 구절들로 확증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체어리티가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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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5, 창4:7,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겨울의 빛과 같습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7) AC.365 셋째로,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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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9 심화

1. ‘아벨의 죽음’은 교회 안에서 어떻게 일어나는가?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죽이니라.’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의 속뜻을 ‘체어리티가 소멸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교회 안에서도 ‘아벨의 죽음’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을 다른 교회나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데 사용하기보다 먼저 우리 자신의 신앙과 교회를 살피는 질문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벨의 죽음은 교회에서 ‘사랑’이라는 말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체어리티를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체어리티가 신앙의 본질적인 생명으로 여겨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랑과 봉사와 구제를 강조하면서도 그것들을 교회의 중심적인 영적 생명과는 별개의 부수적인 활동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입술로 체어리티를 말하는 것과 신앙이 실제로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아벨의 죽음은 교리가 너무 많아서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교리는 필요합니다. 진리가 없으면 무엇이 참된 선인지 분별하기 어렵고, 사람은 자기 욕망을 사랑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확한 진리를 배우고 가르치는 것은 교회의 중요한 쓰임입니다. 문제는 교리가 선과 삶에서 분리되어 그 자체가 목적이 될 때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교회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에는 큰 관심을 기울이면서 ‘그 진리에 따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는 상대적으로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교리적으로 정확한 신앙 고백을 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거의 전부처럼 여겨지고, 악을 죄로 여기고 피하며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삶은 신앙의 결과 가운데 하나 정도로만 취급될 수 있습니다. 이런 질서가 굳어질수록 신앙과 체어리티 사이의 거리는 멀어집니다.

 

반대로 체어리티를 강조한다면서 진리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것도 올바른 해결은 아닙니다. ‘사랑만 있으면 무엇을 믿든 상관없다’고 한다면 선과 진리의 또 다른 분리가 일어납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진리를 필요로 합니다. 진리는 누구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무엇이 이웃의 참된 유익인지, 어떤 악을 피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따라서 가인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가인을 없애고 아벨만 남기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가 다시 하나를 이루게 하는 데 있습니다.

 

아벨의 죽음은 교회 공동체의 관계에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교리적 차이를 다룰 때 상대방을 한 사람의 이웃으로 보는 일을 잃어버리고, 논쟁에서 이기는 것이 더 중요해질 수 있습니다. 진리를 지키겠다는 명분 아래 상대방을 모욕하거나 정죄하고, 그의 말을 공정하게 들으려 하지 않으며,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는 데만 몰두한다면 우리가 붙들고 있는 진리가 어떤 사랑과 결합되어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교리적 비판이나 분별을 체어리티의 결핍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거짓을 거짓이라고 말하고 해로운 가르침을 경계하는 것은 때로 이웃을 향한 참된 사랑에서 나올 수 있습니다. 체어리티는 무조건적인 동의나 무분별한 관용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와 함께 ‘어떤 사랑에서 그것을 말하는가?’입니다. 진리를 말하면서도 상대방의 참된 유익을 구할 수 있고, 오류를 지적하면서도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주님께 남겨 둘 수 있습니다.

 

아벨의 죽음은 개인의 신앙생활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많이 읽고 교리를 깊이 공부하며 신앙에 대한 확신도 강해지는데, 이상하게도 가족에게는 더 거칠어지고 다른 사람의 허물에는 더 예민해지며 자신의 잘못은 점점 보이지 않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 문제는 진리를 너무 많이 배웠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배운 진리가 체어리티와 결합되지 않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특히 속뜻과 상응을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더욱 조심해야 할 위험이 있습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를 알게 되면서 자신이 문자적 의미만 아는 사람보다 영적으로 더 높은 곳에 있다고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많이 아는 것과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천국적인 삶을 사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아르카나에 관한 지식이 많아질수록 오히려 자신의 proprium을 더 분명히 보고 주님께 의지하며 이웃에게 더 유익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아벨이 살아 있는지를 살피는 가장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는 ‘이 교회가 얼마나 사랑을 많이 말하는가?’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실제로 사람의 삶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말씀을 배운 사람이 악을 더 분명히 보고 피하려 하는가, 자기 맡은 일을 더욱 정직하고 충실하게 감당하는가, 약한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가, 이웃의 참된 유익을 위해 실제 쓰임을 행하는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우리는 타인의 내면을 최종적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외적인 행동만으로 한 사람의 지배적인 사랑을 완전히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 교회는 아벨을 죽였다’, ‘저 사람에게는 체어리티가 없다’고 쉽게 선언하는 것은 이 심화의 목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안에서 아벨이 죽어 가고 있지는 않은가?’라고 묻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는 희망도 있습니다. 창4의 이야기는 아벨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인간 편에서는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갔지만, 주님의 섭리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후 가인의 상태가 어떻게 다루어지고, 마침내 셋과 에노스를 통하여 새로운 교회적 상태가 어떻게 일으켜 세워지는지를 보게 됩니다. 인간이 질서를 무너뜨려도 주님께서는 인간의 구원을 위한 길을 계속 마련하십니다.

 

따라서 오늘 교회에서 ‘아벨을 살린다’는 것은 단순히 사랑과 봉사 프로그램을 더 많이 만드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신앙과 체어리티, 진리와 선, 교리와 삶을 다시 결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배우는 진리가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는 삶으로 이어지고,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이 이웃을 향한 지혜로운 사랑과 실제 쓰임 안에서 생명을 얻도록 하는 것입니다.

 

AC.329의 짧은 한 문장은 그래서 교회에 매우 무거운 질문을 남깁니다. ‘우리에게 가인은 살아 있는데 아벨은 죽어 있지 않은가?’ 교리와 신앙 고백과 예배의 외형은 풍성한데 체어리티가 그 신앙의 생명으로 살아 있지 않다면 우리는 이 질문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목적은 우리를 정죄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보여 주시는 진리 안에서 우리 자신의 상태를 살피고, 신앙과 체어리티가 다시 형제로 함께 있도록 질서를 회복하는 데 있습니다.

 

 

 

AC.329, 창4:8-9,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And Cain talked to Abel his brother; and it came to pass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hat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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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And Cain talked to Abel his brother; and it came to pass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hat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r, and slew him. 9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And Jehovah said to Cain, Where is Abel thy brother? And he said, I know not, am I my brother’s keeper? (창4:8-9)

 

AC.329

체어리티가 소멸된 것은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죽인 것’(Cain slaying his brother Abel)으로 묘사됩니다. (8절) That charity was extinguished in those who separated faith, and set it before charity, is described by “Cain slaying his brother Abel.” (verses 8–9)

 

해설

AC.329는 매우 짧지만 창4의 속뜻에서 하나의 결정적인 지점입니다. ‘체어리티가 소멸된 것은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죽인 것으로 묘사됩니다.’ 이제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무엇을 나타내는지가 분명해집니다. 이것은 단지 한 형제가 다른 형제를 살해한 사건의 속뜻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태고교회 안에서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이른 교회적 상태를 보여 줍니다.

 

이 결과는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AC.325부터 하나의 과정이 계속되어 왔습니다. 처음에는 사랑과 신앙이 분리되었습니다. AC.326에서는 그 분리가 예배에 나타나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와 분리된 신앙에서 비롯된 예배가 서로 달라졌습니다. AC.327에서는 분리된 신앙에 속한 사람들의 상태가 악해졌습니다. 그리고 AC.328에서는 그럼에도 체어리티가 여전히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자신을 주된 것으로 만들어 체어리티보다 높임을 받으려 했고, 이제 AC.329에서 그 과정이 끝까지 진행되어 체어리티 자체가 소멸됩니다.

 

따라서 아벨의 죽음은 사랑과 신앙 사이의 단순한 의견 차이나 긴장이 아닙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와의 결합을 거부하고 마침내 체어리티를 자기 신앙의 본질적인 요소로 인정하지 않게 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것이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말씀의 속뜻입니다. 아벨이라는 사람이 체어리티를 표상하기 때문에 아벨의 죽음은 교회 안에서 체어리티가 소멸된 것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가인’이 단순히 신앙 자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신앙 자체가 체어리티를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AC.325에서부터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를 나타냈습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와 함께 있기를 원하며, 진리는 선과 결합하기를 원합니다. 문제는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된 뒤 자신을 독립적인 것으로 세우고, 더 나아가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주된 것으로 만들려는 데 있습니다.

 

이 점에서 AC.328과 AC.329의 연결은 매우 중요합니다. AC.328에서는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아벨은 가인을 죽이지 않습니다. 체어리티가 신앙을 없애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자기 아래에 두고 마침내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게 되면, 체어리티가 소멸되는 결과에 이르게 됩니다. 따라서 문제의 핵심은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둘의 올바른 결합과 질서를 회복하는 데 있습니다.

 

‘소멸되었다’는 표현도 주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세상에서 체어리티 자체가 완전히 없어졌다거나 주님께서 더 이상 체어리티를 주실 수 없게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329가 말하는 것은 가인으로 표상되는 그 교회적 상태 안에서 체어리티가 소멸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한 문장을 당시 모든 사람에게 일률적으로 적용하여 ‘그 시대의 모든 인간에게 체어리티가 사라졌다’고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이 구별은 이후의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만일 이 시점에서 세상의 모든 선과 체어리티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한다면 이후 새로운 교회가 일으켜 세워지는 과정이나 셋과 에노스의 계열을 이해하기 어려워집니다. 창4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특정한 교회적 계열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보여 주며, 동시에 주님께서는 인간에게서 교회의 생명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도록 계속 섭리하십니다.

 

오늘의 교회와 개인에게 적용할 때에도 같은 주의가 필요합니다. ‘아벨을 죽인다’는 것을 특정 교파나 특정 사람에게 붙여 ‘저 사람에게는 체어리티가 없다’고 판정하는 말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먼저 우리 자신의 신앙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위험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나는 진리를 알고 믿는 것을 실제 삶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지는 않은가, 올바른 교리를 고백한다는 사실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는 일을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를 돌아볼 수 있습니다.

 

체어리티의 소멸은 반드시 사람이 모든 선행을 즉시 중단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외적으로는 종교적 활동과 도덕적인 행동이 계속될 수도 있습니다. 가인도 이미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신앙과 교리가 삶의 선과 분리되고, 체어리티가 신앙의 본질적인 생명으로 인정되지 않는다면 외적인 종교성은 남아 있으면서도 내적인 질서는 무너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가인으로 표상되는 상태의 심각성입니다.

 

특히 말씀과 교리를 깊이 공부하는 사람에게 AC.329는 무거운 경고가 됩니다. 진리를 많이 아는 것은 귀한 일이지만, 그 지식이 사람을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끌지 않고 오히려 자기 지성을 높이며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수단이 된다면 진리의 목적이 뒤집힐 수 있습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는 목적 역시 속뜻에 관한 지식을 축적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 진리를 통하여 자신의 악을 보고 피하며, 주님께 받은 선을 실제 삶에서 행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AC.329의 한 문장은 창4 전체에서 매우 무겁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은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던 결말처럼 갑자기 등장하지 않습니다. ‘구별’이 ‘분리’가 되고, 분리가 예배에 나타나며, 사람들의 상태가 악해지고,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인 끝에 마침내 체어리티가 소멸되는 긴 과정의 결과입니다.

 

이제 창4의 문제는 새로운 단계로 들어갑니다. 아벨은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체어리티가 소멸된 신앙은 어떻게 되는가, 주님께서는 그러한 신앙을 완전히 없애시는가, 아니면 그 안에 아직 보존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는가 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가인은 심판을 받고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지만, 동시에 그에게 ‘표’가 주어집니다. 따라서 AC.329의 체어리티 소멸은 이야기의 끝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가 그처럼 무너진 상태를 어떻게 다루시는지를 살펴보게 하는 새로운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심화

1. ‘아벨의 죽음’은 교회 안에서 어떻게 일어나는가?

 

AC.329 심화 1, ‘아벨의 죽음’은 교회 안에서 어떻게 일어나는가?

AC.329 심화1. ‘아벨의 죽음’은 교회 안에서 어떻게 일어나는가?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죽이니라.’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의 속뜻을 ‘체어리티가 소멸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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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0, 창4:10-16, 창4:10-16 전체의 속뜻

10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And he said, What hast thou done? The voice of thy brother’s bloods crieth to me from the ground. 11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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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8, 창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If thou doest well, art thou not exalted? And if thou doest not well,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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