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91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자들이 모든 사람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저세상에서 악령들의 상태를 보면 가장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스스로 모든 체어리티를 빼앗아 버린 자들은 이리저리 유리하며 이곳에서 저곳으로 도망합니다. 그들이 어디로 가든 어떤 공동체에 가게 되면, 그 공동체는 그들이 오는 것만으로도 즉시 그들의 성질을 알아차립니다. 저세상에는 그러한 퍼셉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들을 쫓아낼 뿐 아니라 심하게 벌하기도 하며, 할 수만 있다면 죽이려 할 만큼 적의를 품습니다. 악령들은 서로 벌하고 괴롭히는 데서 가장 큰 즐거움을 느끼며, 그것이 그들에게는 최고의 만족입니다. 지금까지는 악과 거짓 자체가 이러한 일의 원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누구든지 다른 사람에게 바라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오기 때문입니다. 거짓은 그 자체 안에 거짓의 형벌을 가지고 있고, 악은 그 자체 안에 악의 형벌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그 형벌들에 대한 두려움도 그 자체 안에 가지고 있습니다. The state of evil spirits in the other life shows most clearly that those who are in evil and falsity are afraid of everybody. Those who have deprived themselves of all charity wander about, and flee from place to place. Wherever they go, if to any societies, these at once perceive their character by their mere coming, for such is the perception that exists in the other life; and they not only drive them away, but also severely punish them, and with such animosity that they would kill them if they could. Evil spirits take the greatest delight in punishing and tormenting one another; it is their highest gratification. Not until now has it been known that evil and falsity themselves are the cause of this, for whatever anyone desires for another returns upon himself. Falsity has in itself the penalty of falsity, and evil has in itself the penalty of evil, and consequently they have in themselves the fear of these penalties.

 

해설

AC.391은 앞의 AC.390에서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자들은 죽임을 당할 것에 대한 끊임없는 두려움 가운데 있다’고 한 설명을 스베덴보리가 사후세계에서 관찰한 악령들의 상태를 통해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모든 체어리티를 스스로 빼앗아 버린 악령들은 이곳저곳을 유리하며 계속 도망합니다. 어떤 공동체에 들어가도 그곳의 영들은 그들이 오는 것만으로 그들의 성질을 알아차리고 그들을 쫓아내며 심하게 벌합니다. 그런데 이번 번호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이러한 영계의 장면 자체보다 그 장면을 설명하는 마지막 원리입니다. ‘거짓은 그 자체 안에 거짓의 형벌을 가지고 있고, 악은 그 자체 안에 악의 형벌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AC.391의 중심입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저세상에는 사람의 내적 성질을 알아차리는 퍼셉션이 있다고 말합니다. 자연계에서는 사람의 내면이 외적인 말과 행동에 의해 상당 부분 가려질 수 있습니다. 악한 의도를 품으면서도 친절하게 말할 수 있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면서도 선한 목적을 가진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묘사하는 영계에서는 이러한 내적 성질이 훨씬 직접적으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악령이 어떤 공동체에 접근하면 그 공동체는 ‘그들이 오는 것만으로도’ 그 성질을 알아차린다고 합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이것을 영계에 존재하는 퍼셉션이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이 ‘perception’은 우리가 태고교회의 퍼셉션을 설명할 때 사용하는 교회시대적 의미와 문맥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번에는 사후세계에서 영들의 성질을 알아차리는 영적 지각을 설명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퍼셉션이라는 단어가 나왔으므로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완전히 동일한 현상이다’라고 곧바로 등치하기보다, 같은 어휘가 영적 상태를 직접 알아차리는 능력이라는 넓은 의미망 안에서 사용되고 있다고 보는 편이 안전합니다.

 

그런데 악령들을 몰아내고 벌하는 자들도 악령들이며, 스베덴보리는 그들이 서로 벌하고 괴롭히는 데서 ‘가장 큰 즐거움’을 느낀다고까지 말합니다. 이 장면은 상당히 충격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천사들이 악령들을 고문한다거나 주님께서 악령들에게 고통을 주도록 명령하신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악 자체의 성질을 보여 주는 묘사입니다. 악은 자기만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수단으로 삼으며, 지배하고 해치고 보복하는 데서 즐거움을 찾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사랑을 선택한 영들이 함께 있게 되면 각자가 다른 사람에게 행하려는 바로 그 악이 서로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바로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누구든지 다른 사람에게 바라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온다’고 합니다. 이것을 외부에서 작동하는 기계적인 인과응보 법칙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면 자연계에서 반드시 똑같은 일을 당한다’는 공식도 아닙니다. 문맥은 악의 사랑이 지배하는 영적 공동체의 질서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괴롭히고 파괴하려는 사랑 안에 있다면, 나와 같은 사랑 안에 있는 자들 역시 나를 그렇게 대하려 합니다. 결국 내가 다른 사람에게 향하게 한 악의 성질이 내가 살아가는 영적 환경의 성질이 되어 나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짓은 그 자체 안에 거짓의 형벌을 가지고 있고, 악은 그 자체 안에 악의 형벌을 가지고 있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형벌이 악과 전혀 관계없이 밖에서 덧붙여지는 것이 아니라 악 자체가 파괴적인 결과를 품고 있습니다. 미움은 관계를 파괴하고, 속임은 신뢰를 파괴하며, 지배욕은 서로의 자유를 파괴합니다. 거짓은 사람이 현실과 진리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고, 그 잘못된 판단에 따라 더 깊은 악으로 들어가게 합니다. 따라서 악과 거짓은 그 자체 안에서 고통과 불안과 충돌의 원인을 만들어 냅니다.

 

이 원리는 주님의 형벌을 이해할 때도 매우 중요합니다. 말씀의 문자에는 여호와께서 진노하시고 벌하시며 멸하시는 것처럼 보이는 표현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더 깊은 설명에서는 주님은 선 자체, 사랑 자체, 자비 자체이시며 누구에게도 악을 행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이 악을 선택하고 그 악의 질서 안으로 들어갈 때 그 악 자체가 가진 결과를 경험합니다. 물론 주님의 섭리는 그 결과조차 가능한 한 제한하고 선한 목적을 위해 다스리지만, 악의 고통을 주님에게서 나오는 악으로 돌려서는 안 됩니다.

 

AC.391의 마지막에 ‘따라서 그들은 그 형벌들에 대한 두려움도 그 자체 안에 가지고 있다’고 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악령이 다른 악령을 두려워하는 까닭은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품고 있는 악의 성질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기회만 있으면 상대를 속이고 지배하고 괴롭히려 하므로 상대도 자신에게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끊임없는 불안을 만들어 냅니다. 체어리티가 없으면 서로를 연결하는 사랑과 자비의 결속이 없고, 결국 각자가 서로에게 잠재적인 위협이 됩니다.

 

이것은 AC.390의 ‘쫓는 자가 없어도 도망한다’는 말씀의 이미지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두려움의 가장 깊은 원인이 외부의 추격자가 아니라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악과 거짓은 세상을 적대적인 곳으로 보게 하고, 다른 사람의 의도를 의심하게 하며,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품고 있는 악을 다른 사람도 자신에게 품고 있을 것이라고 느끼게 합니다. 그러므로 외부의 위험을 제거한다고 해서 그 두려움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근원이 되는 사랑의 성질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설명을 자연계의 모든 불안이나 두려움에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불안장애, 트라우마, 질병, 실제적인 위험 등으로 두려움을 겪는 사람에게 ‘당신 안에 악과 거짓이 있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라고 적용하는 것은 AC.391의 문맥을 벗어난 해석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설명하는 것은 체어리티를 완전히 빼앗아 버리고 악과 거짓을 자기 삶의 지배적인 원리로 삼은 악령들의 영적 상태입니다. 따라서 이 번호는 다른 사람의 심리 상태를 판단하는 잣대가 아니라 악 자체의 내적 성질을 이해하는 교리로 읽어야 합니다.

 

또한 이번 번호의 ‘서로 죽이려 한다’는 묘사도 자연계의 모든 악한 사람이 실제 살인을 원한다는 뜻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앞의 AC.374와 AC.390에서 살펴보았듯이 스베덴보리는 미움의 가장 깊은 성질 안에 상대의 선과 생명을 파괴하려는 방향이 있다고 봅니다. 영계에서는 외적인 사회 규범과 체면 때문에 감추어졌던 지배적인 사랑이 더 직접적으로 드러나므로 그 성질이 더욱 노골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 그의 설명입니다.

 

AC.389-391을 함께 읽으면 하나의 매우 일관된 구조가 보입니다. AC.389에서는 체어리티를 잃으면 주님과의 결합에서 분리되고 자기의 것에 맡겨지며, 그 결과 생각은 거짓이 되고 의지는 악이 되어 생명에 속한 것을 소멸시킨다고 했습니다. AC.390에서는 그러한 악과 거짓의 상태가 끊임없는 두려움과 도망으로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91에서는 사후세계의 악령들을 통해 그 원인을 더욱 깊이 설명합니다. 악과 거짓은 외부에서 형벌이 붙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 안에 형벌과 그 형벌에 대한 두려움을 품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제 곧 나올 ‘가인의 표’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가인을 위협하는 악과 거짓은 주님께서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가인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상태로 내려가면서 악과 거짓의 파괴적인 질서에 노출된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상태를 방치하여 남아 있는 모든 것까지 파괴되게 하지 않으시고 가인을 보존하십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표는 악을 승인하는 표가 아니라, 악과 거짓 자체가 가진 파괴력으로부터 아직 보존되어야 할 것을 지키시는 주님의 섭리라는 방향으로 이해할 준비가 더욱 갖추어집니다.

 

결국 AC.391은 형벌에 대한 매우 중요한 관점을 제시합니다. 악의 가장 깊은 형벌은 주님께서 악인에게 악을 돌려주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악 자체가 사람을 주님과 이웃에게서 분리하고 서로를 적으로 만들며 두려움과 고통의 세계를 형성하는 데 있습니다. 반대로 체어리티는 주님과 사람을 결합시키고 사람과 사람을 결합시킵니다. 그러므로 천국과 지옥의 차이는 단순히 한쪽에는 상이 있고 다른 쪽에는 벌이 있다는 차이보다 훨씬 깊습니다. 하나는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자비 안에서 서로의 선을 원하는 질서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사랑과 악 안에서 서로를 해치려는 질서입니다. AC.391의 악령들이 경험하는 두려움과 형벌은 바로 그들이 선택하고 사랑한 악의 질서가 어떤 세계를 만들어 내는지를 보여 줍니다.

 

 

 

AC.392, 창4:15,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시다 - 분리된 신앙까지 보존하시는 이유’ (AC.392-396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And Jehovah said unto 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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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0, 창4:14,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사람은 왜 끊임없이 두려워하는가?’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90악과 거짓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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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90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자들은 죽임을 당할 것에 대한 끊임없는 두려움 가운데 있는데, 이는 레위기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됩니다. Those who are in evil and falsity are in continual dread of being slain, as is thus described in Moses:

 

33내가 너희를 여러 민족 중에 흩을 것이요 내가 칼을 빼어 너희를 따르게 하리니 너희의 땅이 황무하며 너희의 성읍이 황폐하리라, 36너희 남은 자에게는 그 원수들의 땅에서 내가 그들의 마음을 약하게 하리니 그들은 바람에 불린 잎사귀 소리에도 놀라 도망하기를 칼을 피하여 도망하듯 할 것이요 쫓는 자가 없어도 엎드러질 것이라 37그들은 쫓는 자가 없어도 칼 앞에 있음같이 서로 짓밟혀 넘어지리니 너희가 원수들을 맞설 힘이 없을 것이요 (레26:33, 36-37) Your land shall be a desolation, and your cities a waste, and upon them that are left of you I will bring softness into their heart in the land of their enemies, and the sound of a driven leaf shall chase them, and they shall flee as fleeing from a sword, and they shall fall when none pursueth, and shall stumble everyone upon his brother, as it were before a sword, when none pursueth. (Lev. 26:33, 36–37)

 

이사야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In Isaiah:

 

16땅끝에서부터 노래하는 소리가 우리에게 들리기를 의로우신 이에게 영광을 돌리세 하도다 그러나 나는 이르기를 나는 쇠잔하였고 나는 쇠잔하였으니 내게 화가 있도다 배신자들은 배신하고 배신자들이 크게 배신하였도다 17땅의 주민아 두려움과 함정과 올무가 네게 이르렀나니 18두려운 소리로 말미암아 도망하는 자는 함정에 빠지겠고 함정 속에서 올라오는 자는 올무에 걸리리니 이는 위에 있는 문이 열리고 땅의 기초가 진동함이라 19땅이 깨지고 깨지며 땅이 갈라지고 갈라지며 땅이 흔들리고 흔들리며 20땅이 취한 자 같이 비틀비틀하며 원두막같이 흔들리며 그 위의 죄악이 중하므로 떨어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리라 (사24:16-20) The treacherous deal treacherously, yea, in the treachery of the treacherous they deal treacherously.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he who fleeth from the noise of the fear shall fall into the pit, and he that cometh up out of the midst of the pit shall be taken in the snare; the transgression thereof shall be heavy upon it, and it shall fall, and not rise again. (Isa. 24:16–20)

 

예레미야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In Jeremiah: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두려움을 네 사방에서 네게 오게 하리니 너희 각 사람이 앞으로 쫓겨 나갈 것이요 도망하는 자들을 모을 자가 없으리라 (렘49:5) Behold, I bring a dread upon thee, from all thy circuits shall ye be driven out every man toward his faces, and none shall gather up him that wandereth. (Jer. 49:5)

 

이사야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In Isaiah:

 

16이르기를 아니라 우리가 말 타고 도망하리라 하였으므로 너희가 도망할 것이요 또 이르기를 우리가 빠른 짐승을 타리라 하였으므로 너희를 쫓는 자들이 빠르리니 17한 사람이 꾸짖은즉 천 사람이 도망하겠고 다섯이 꾸짖은즉 너희가 다 도망하고 너희 남은 자는 겨우 산꼭대기의 깃대 같겠고 산마루 위의 기치 같으리라 하셨느니라 (사30:16-17) We will flee upon the horse, therefore shall ye flee; and, we will ride upon the swift, therefore shall they that pursue you be rendered swift; one thousand shall flee at the rebuke of one, at the rebuke of five shall ye flee. (Isa. 30:16–17)

 

말씀의 이 구절들과 그 밖의 여러 구절에서 거짓과 악 가운데 있는 자들은 ‘도망하는 자들’(fleeing)로, 그리고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하는 자들’(fear of being slain)로 묘사됩니다. 그들은 자기를 보호해 줄 자가 아무도 없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자들은 모두 이웃을 미워하므로 서로 죽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In these and other passages of the Word, those who are in falsity and evil are described as “fleeing,” and as in “fear of being slain.” They are afraid of everybody, because they have no one to protect them. All who are in evil and falsity hate their neighbor, so that they all desire to kill one another.

 

해설

AC.390은 바로 앞 AC.389에서 설명한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의 의미를 말씀의 여러 구절을 통해 확증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죽임을 당할 것에 대한 끊임없는 두려움’ 가운데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레위기, 이사야, 예레미야에서 사람들이 쫓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고, 작은 소리에도 놀라며, 두려움에서 달아나다가 함정에 빠지고, 사방으로 흩어지는 장면들을 가져옵니다. 이 인용들의 공통점은 실제로 누군가가 그들을 죽이려고 쫓아오는가보다 ‘쫓는 자가 없어도 도망한다’는 데 있습니다. 두려움의 근원이 외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내적 상태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레26:33,36-37은 이 점을 특히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바람에 불린 잎사귀 소리’만 들어도 칼을 피해 달아나는 것처럼 도망하고, 심지어 ‘쫓는 자가 없어도’ 엎드러집니다. 실제 위험의 크기와 그들이 느끼는 공포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상태 자체가 사람 안에 불안을 만들기 때문에 외부의 작은 자극도 자신을 위협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24:16-20에서도 같은 구조가 나타납니다. 두려움에서 벗어나려고 도망하지만 함정에 빠지고, 함정에서 올라오면 다시 올무에 걸립니다. 이것은 단순히 불운이 계속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사람이 자기 힘으로 안전을 확보하려 할수록 또 다른 두려움 속으로 들어가는 영적 상태를 묘사합니다. 주님과의 결합에서 오는 내적인 안전을 잃었기 때문에 장소를 바꾸거나 외적인 조건을 바꾸는 것만으로는 두려움의 근본 원인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렘49:5의 ‘두려움이 사방에서 온다’는 표현도 같은 상태를 보여 줍니다. 사방이 모두 위협으로 느껴지고 각자가 흩어지지만 ‘도망하는 자들을 모을 자’가 없습니다. 그리고 사30:16-17에서는 ‘빠른 것을 타고 도망하겠다’고 하지만 오히려 쫓는 자들이 더 빨라지고, 한 사람의 꾸짖음에도 천 사람이 도망합니다. 자기 힘으로 위험에서 더 빨리 벗어나려 할수록 두려움도 함께 빨라지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모든 장면을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사람의 내적 상태를 보여 주는 말씀의 표상으로 읽습니다.

 

그렇다면 왜 악과 거짓은 이러한 두려움을 만들어 냅니까? AC.389가 이미 그 근본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사람이 체어리티를 스스로 빼앗아 버리면 자신을 주님에게서 분리하고, 주님과 분리되면 자기 자신, 곧 자기의 것에 맡겨집니다. 그 상태에서는 생각이 거짓으로, 의지가 악으로 향합니다. 이제 AC.390은 그 상태가 인간관계에서는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여 줍니다. ‘자기를 보호해 줄 자가 아무도 없다’고 느끼게 되고, 그래서 모든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여기서 ‘자기를 보호해 줄 자가 아무도 없다’는 말은 단순히 사회적으로 친구나 후원자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더 깊게는 주님과의 결합에서 오는 영적 보호와 질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체어리티는 사람을 주님과 결합시키는 동시에 이웃과도 결합시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단순히 자기에게 유익한가 해로운가에 따라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체어리티가 사라지면 관계의 중심에 자기 사랑이 놓이게 되고, 다른 사람도 경쟁자나 위협으로 보이기 쉬워집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을 해칠 수 있는 마음으로 바라보므로 다른 사람도 자신을 그렇게 바라볼 것이라고 두려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마지막에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자들은 모두 이웃을 미워하므로 서로 죽이고자 한다’고 매우 강하게 말합니다. 이것은 악한 상태에 있는 모든 사람이 자연계에서 실제 살인을 계획한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AC.374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스베덴보리는 미움을 살인의 내적 뿌리와 연결합니다. 외적인 법, 명예, 손실에 대한 두려움, 사회적 규범 등의 제약 때문에 손으로 살인을 행하지 않을 수 있지만, 상대가 없어지기를 바라거나 그의 선을 파괴하려 하고 그의 불행을 기뻐하는 미움 속에는 영적인 의미에서 상대를 제거하려는 성질이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AC.390의 ‘두려움’도 모든 자연적인 두려움에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위험한 상황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인간의 정상적인 보호 반응입니다. 질병이나 사고, 전쟁이나 범죄 앞에서 두려움을 느낀다고 해서 그 사람이 악과 거짓 가운데 있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이번 번호에서 말하는 것은 악과 거짓이 지배적인 원리가 되었을 때 생기는 영적인 두려움입니다. 실제로 쫓는 자가 없어도 모두를 적으로 느끼고, 자기 안의 미움과 불신 때문에 다른 사람도 자신을 해칠 것이라고 끊임없이 의심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 점에서 가인의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도 새롭게 보입니다. 문자적으로는 살인을 저지른 가인이 이제 자신도 살해당할까 두려워하는 장면입니다. 속뜻에서는 체어리티를 소멸시키고 주님과의 결합에서 멀어진 신앙이 악과 거짓에 의해 자신에게 남아 있는 생명마저 파괴될 것을 두려워하는 상태입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였고 이제 자신이 죽임당할 것을 두려워합니다. 체어리티를 파괴하는 원리가 결국 자기 자신에게도 죽음의 위협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번호의 목적은 ‘악인은 항상 공포 속에 사니 그것이 벌이다’라고 말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악과 거짓 자체가 왜 평안과 안전을 만들어 낼 수 없는지를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악은 다른 사람과의 결합을 깨뜨리고, 거짓은 현실과 진리에 대한 시야를 왜곡합니다. 그 결과 사람은 점점 자기 자신 안에 갇히고 다른 사람을 신뢰하지 못하며 모든 것을 자기에게 대한 위협으로 해석하게 됩니다. 악과 거짓의 형벌은 외부에서 임의로 덧붙여지는 것만이 아니라 그 자체 안에 이미 파괴와 두려움의 결과를 품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는 결합을 만듭니다. 이것이 모든 자연적 위험을 없애 주거나 신앙인이 어떤 두려움도 느끼지 않게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영적인 중심에서는 차이가 생깁니다. 자기 자신만을 의지하여 모든 사람을 잠재적 위협으로 바라보는 대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이웃과의 관계를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AC.389가 ‘체어리티가 사람을 주님과 결합시킨다’고 한 뒤 AC.390이 두려움을 설명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대조를 보여 줍니다.

 

이번에 인용된 네 성경 구절도 각각 독립적인 새로운 교리를 제시하기 위해 나온 것이 아닙니다. 레위기의 ‘쫓는 자가 없어도 도망함’, 이사야의 ‘두려움에서 도망하다 함정에 빠짐’, 예레미야의 ‘사방에서 임하는 두려움’, 다시 이사야의 ‘한 사람의 꾸짖음에도 천 사람이 도망함’은 모두 하나의 상태를 서로 다른 모습으로 보여 줍니다.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사람은 내적인 결합과 보호를 잃었기 때문에 외부 전체를 위협으로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네 인용은 하나의 증거 묶음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결국 AC.390은 가인의 두려움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설명합니다. 가인을 두렵게 만드는 가장 깊은 원인은 밖에서 그를 찾아다니는 어떤 적이 아니라, 체어리티를 소멸시키고 주님과의 결합에서 멀어진 그의 영적 상태입니다. 악과 거짓은 사람을 다른 사람과 분리하고, 그 분리는 불신과 두려움을 낳으며, 마침내 남아 있는 생명까지 파괴하려 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지점에서 다음 이야기는 예상 밖의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가인이 죽임당할 것을 두려워할 때 주님은 그를 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표’를 주어 보존하십니다. 따라서 AC.390은 ‘가인의 표’ 직전에서 인간의 두려움과 주님의 보존을 극명하게 대비시키는 마지막 준비라고 볼 수 있습니다.

 

 

 

AC.391, 창4:14, ‘악과 거짓은 그 자체 안에 형벌을 품고 있습니다 - 악령들이 서로 두려워하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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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9, 창4:14,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 체어리티를 잃으면 왜 악과 거짓에 맡겨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9‘그를 만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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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9

‘그를 만나는 자마다 그를 죽이리라’(everyone finding him would slay him)는 모든 악과 거짓이 그를 멸망시키리라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지금까지 말한 것으로부터 따라 나옵니다. 그 까닭은 이렇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체어리티를 빼앗아 버릴 때 그는 자신을 주님에게서 분리합니다. 사람을 주님과 결합시키는 것은 오직 체어리티, 곧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이기 때문입니다. 체어리티가 없는 곳에는 분리가 있고, 분리가 있는 곳에서 사람은 자기 자신, 곧 자기의 것(own)에 맡겨집니다. 그러면 그가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든 거짓이고, 그가 의지하는 것은 무엇이든 악입니다. 바로 이러한 것들이 사람을 죽이는 것, 곧 그에게 생명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That “everyone finding him would slay him” signifies that every evil and falsity would destroy him, follows from what has been said. For the case is this. When a man deprives himself of charity, he separates himself from the Lord, since it is solely charity, that is, love toward the neighbor, and mercy, that conjoin man with the Lord. Where there is no charity, there is disjunction, and where there is disjunction, man is left to himself or to his own; and then whatever he thinks is false, and whatever he wills is evil. These are the things that slay man, or cause him to have nothing of life remaining.

 

해설

AC.389는 창4:14의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라는 말이 왜 ‘모든 악과 거짓이 그를 멸망시키리라’는 것을 의미하는지 설명합니다. 앞의 AC.385에서 그 의미를 먼저 제시했고, 이제 이번 번호에서 그 이유를 밝힙니다. 그 논리는 매우 분명합니다. 사람이 체어리티를 스스로 빼앗아 버리면 주님에게서 자신을 분리하고, 주님과 분리되면 자기 자신, 곧 자기의 것에 맡겨지며, 그렇게 자기의 것에 맡겨지면 생각하는 것은 거짓이 되고 의지하는 것은 악이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악과 거짓이 사람에게 생명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게 합니다. 이것이 속뜻에서 ‘죽임’입니다.

 

먼저 주목할 것은 ‘사람이 스스로 체어리티를 빼앗아 버릴 때’라는 표현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에게서 체어리티를 거두어 가신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체어리티를 배척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주님에게서 분리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가인의 ‘저주’,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함’ 등을 해석하면서 계속 확인해 온 원리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주님께서 먼저 사람에게서 돌아서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악을 받아들이고 선을 거부함으로써 주님에게서 돌아섭니다. 주님의 사랑과 자비는 변하지 않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상태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매우 강한 말을 합니다. ‘사람을 주님과 결합시키는 것은 오직 체어리티, 곧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이다.’ 이것은 체어리티를 단순히 신앙생활에 추가되는 좋은 행실 정도로 보는 관점과 전혀 다릅니다. 체어리티는 사람을 주님과 결합시키는 생명의 결속입니다. 물론 이것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낸 사랑이나 선행이 주님과의 결합을 획득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AC.387에서 바로 확인했듯이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은 주님의 자비로부터 나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자비를 사람이 받아들여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로 살아낼 때, 그 체어리티 안에서 사람은 주님과 결합됩니다.

 

따라서 ‘오직 체어리티가 사람을 주님과 결합시킨다’는 말은 신앙이 필요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지금까지 가인 이야기 전체가 보여 준 것처럼 문제는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하나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둘을 분리하는 데 있습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으며, 진리는 선을 섬깁니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신앙도 결국 체어리티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부정하는 것은 ‘체어리티 없이도 신앙만으로 주님과 결합될 수 있다’는 가인의 원리입니다.

 

이어지는 ‘분리가 있는 곳에서 사람은 자기 자신, 곧 자기의 것에 맡겨진다’는 문장은 이번 번호의 중심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proprium 이해와 깊이 연결됩니다. 인간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자기 것으로 받아 살아갈 때는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지만, 주님과의 결합을 거부하여 자기 자신에게 맡겨지면 인간의 고유한 것에서 나오는 악과 거짓이 지배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에게 맡겨진다’는 것은 인간이 참으로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생명의 근원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의 질서에서 벗어나 자기의 것에 갇히는 상태입니다.

 

바로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가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든 거짓이고, 그가 의지하는 것은 무엇이든 악’이라고 강하게 말합니다. 여기서 생각과 의지가 함께 등장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생각은 진리와 거짓의 측면에, 의지는 선과 악의 측면에 연결됩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와 선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의 것만으로 살아가면 이해의 영역에서는 거짓이, 의지의 영역에서는 악이 나타납니다. 인간의 영적 생명 전체가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문장을 인간의 모든 자연적 사고와 의지를 무차별적으로 정죄하는 말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거듭나는 사람에게도 자기의 것에서 올라오는 악한 충동과 거짓된 생각이 있는 동시에,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며 그것들과 싸우는 과정이 있습니다. 이번 번호에서 말하는 것은 ‘주님과 분리되어 자기의 것에 맡겨진 상태’입니다. 즉 자기에게서 나온 것을 선과 진리의 근원으로 삼는 상태를 말합니다. 인간에게서 스스로 나오는 것은 악과 거짓이지만, 인간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마치 자기 것처럼 자유롭게 의지하고 생각하며 행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이것은 AC.379의 ‘의지가 실제 사람이다’라는 설명과도 연결됩니다. 그곳에서는 선한 것을 생각한다고 말하면서 악하게 산다면 실제로는 악을 의지하는 것이므로 거기에 신앙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89에서는 그 문제를 한 단계 더 근원적으로 설명합니다. 주님과의 결합을 잃고 자기의 것에 맡겨지면 의지는 악으로, 생각은 거짓으로 기울게 됩니다. 따라서 참된 변화는 단순히 생각의 내용을 바꾸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의지 안에 받아들이고, 그 선으로부터 진리를 보고 살아가는 질서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의 ‘바로 이러한 것들이 사람을 죽인다’는 말도 중요합니다. 가인을 죽이는 것은 문자적으로 그를 찾아오는 어떤 사람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속뜻에서는 악과 거짓이 사람을 죽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죽인다’는 말의 의미를 곧바로 설명합니다. ‘그에게 생명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적 죽음은 단순히 어떤 형벌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 곧 참된 생명에 속한 것이 사람 안에서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 대목은 바로 앞 AC.384와 매우 중요하게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가인에게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가인이 두려워하는 ‘죽임’은 무엇이겠습니까? 악과 거짓이 계속 지배하여 아직 남아 있는 생명에 속한 것마저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AC.389의 마지막 표현인 ‘생명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게 한다’는 말은 AC.384의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다’는 말과 정확히 긴장을 이룹니다. 아직 남아 있는 것이 있기 때문에 완전한 죽음의 위험이 있으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보존이 필요합니다.

 

이제 ‘가인의 표’가 왜 주어지는지에 대한 배경도 더욱 선명해집니다. 주님께서 가인의 잘못된 교리를 옳다고 인정하시기 때문에 그를 보호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은 분명 잘못된 것이며, 그 결과 가인은 선과 진리에서 멀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아직 생명에 속한 어떤 것이 남아 있다면, 악과 거짓이 그것마저 완전히 파괴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보존의 섭리가 필요합니다. ‘가인의 표’는 바로 이 문제와 연결하여 읽어야 할 것입니다.

 

결국 AC.389는 가인 이야기의 핵심 교리를 매우 압축적으로 보여 줍니다. 체어리티는 사람을 주님과 결합시키고, 체어리티의 상실은 주님과의 분리를 가져오며, 그 분리는 사람을 자기의 것에 맡겨지게 합니다. 자기의 것만으로는 생각이 거짓으로, 의지가 악으로 향하고, 악과 거짓은 마침내 사람 안에서 생명에 속한 것을 소멸시킵니다. 따라서 가인의 문제는 단순히 ‘체어리티를 충분히 실천하지 않았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함으로써 신앙의 생명 자체를 그 근원이신 주님과의 결합에서 떼어 놓았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반대 방향도 암시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생명은 자기의 것에서 나오지 않고 주님에게서 옵니다. 선도 주님에게서 오고 진리도 주님에게서 옵니다. 사람은 그것들을 받아들이며, 주님께서는 사람이 자유롭게 그것을 자기 것처럼 의지하고 생각하고 행하도록 하십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자기 자신을 생명의 근원으로 만드는 과정이 아니라, 자기의 것에서 나오는 악과 거짓을 보면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더욱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과정입니다. 가인의 길이 ‘체어리티의 상실에서 자기의 것, 그리고 악과 거짓과 죽음으로’ 내려가는 길이라면, 거듭남의 길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를 받아 체어리티와 신앙이 다시 하나의 살아 있는 생명을 이루는 길입니다.

 

 

 

AC.390, 창4:14,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사람은 왜 끊임없이 두려워하는가?’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90악과 거짓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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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8, 창4:14, ‘피하며 유리하는 자 - 선과 진리를 알지 못하는 상태’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8‘땅에서 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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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Behold thou hast cast me out this day from the faces of the ground, and from thy faces shall I be hid; and I shall be a 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everyone that findeth me shall slay me. (창4:14)

 

AC.385

‘지면에서 쫓겨나는 것’(cast out from the faces of the ground)은 교회의 모든 진리에서 분리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하는 것’(hid from thy faces)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모든 선에서 분리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가 된다는 것은 무엇이 진리고 선인지 알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everyone that findeth me shall slay me)는 모든 악과 거짓이 그를 멸망시키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To be “cast out from the faces of the ground” signifies to be separated from all the truth of the church; to be “hid from thy faces” signifies to be separated from all the good of faith of love; to be a “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 is not to know what is true and good; “everyone that findeth me shall slay me” signifies that all evil and falsity would destroy him.

 

해설

AC.385는 창4:14의 네 표현을 차례로 해석하면서 가인이 처한 영적 상태가 얼마나 위태로워졌는지를 보여 줍니다. ‘지면에서 쫓겨나는 것’은 교회의 모든 진리에서 분리되는 것이고,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하는 것’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모든 선에서 분리되는 것이며,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는 것은 무엇이 진리고 선인지 알지 못하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는 모든 악과 거짓이 그를 멸망시키리라는 뜻입니다. 이 네 가지는 서로 떨어진 상응들이 아니라 하나의 영적 붕괴가 진행되는 순서를 보여 줍니다.

 

먼저 ‘지면에서 쫓겨나는 것’은 ‘교회의 모든 진리에서 분리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앞에서 ‘땅’은 문맥에 따라 사람 자신, 교리, 그리고 가인의 경우에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열이 자리 잡은 상태를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지면에서 쫓겨난다’는 표현을 교회의 진리와의 단절로 해석합니다. 가인은 신앙을 높이려 했지만, 체어리티에서 신앙을 분리함으로써 결국 교회의 진리 자체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이것은 앞의 AC.380-382에서 보았던 역설과 같습니다. 진리를 지키기 위해 체어리티를 버렸다고 생각했지만, 그 결과 무엇이 진리인지 알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두 번째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하는 것’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모든 선에서 분리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는 진리의 상실에서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갑니다. 단지 무엇이 참인지 알지 못하는 것만이 아니라, 사랑에서 생명을 받는 신앙의 선과도 분리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얼굴’은 단순한 외적 형상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사랑과 자비, 선의 현존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얼굴에서 숨겨진다는 것은 주님께서 얼굴을 돌리셨다는 뜻으로 이해하기보다, 사람이 악과 거짓 때문에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흘러오는 사랑과 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살펴본 ‘저주’와도 같은 원리입니다. 주님께서 가인을 미워하시고 그에게서 선과 진리를 빼앗으신 것이 아닙니다. 가인이 체어리티를 배척함으로써 스스로 그것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자비는 변하지 않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상태가 변합니다. 그러므로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한다’는 표현은 주님의 부재라기보다 인간 쪽에서 일어난 수용 능력의 상실을 나타낸다고 보는 것이 안전합니다.

 

세 번째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는 AC.380과 AC.382에서 이미 설명했듯이 ‘무엇이 진리고 선인지 알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번 번호에서 이 표현이 다시 나오는 것은 앞의 두 상태가 실제로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교회의 진리에서 분리되고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선에서 분리되면, 결국 선과 진리를 분별할 방향을 잃습니다.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이 많은 종교적 지식을 가지고 있을 수는 있지만, 그 지식을 선을 위해 사용할 생명의 중심을 잃으면 무엇이 실제로 선이며 무엇이 실제로 진리인지 알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번 번호에서 가장 주목할 부분은 마지막입니다.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는 ‘모든 악과 거짓이 그를 멸망시키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문자적으로 읽으면 가인이 다른 사람에게 살해당할 것을 두려워하는 장면이지만, 속뜻에서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의 상태가 악과 거짓에 의해 완전히 파괴될 위험에 놓였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죽인다’는 것은 자연적인 생명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아직 남아 있는 영적인 것을 소멸시키는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AC.384가 중요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자기 악 때문에 어떤 내적 고통을 느끼고 그것을 어느 정도 고백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서 ‘가인에게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AC.385의 ‘모든 악과 거짓이 그를 멸망시킨다’는 말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존재가 다시 멸망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가인의 상태 안에 아직 보존되어 있는 어떤 것이 악과 거짓에 의해 완전히 소멸될 위험을 말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곧이어 가인을 죽이지 못하게 하는 ‘가인의 표’가 왜 필요한지를 이해하는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다만 여기서도 AC.384의 ‘선의 어떤 것’을 곧바로 전문적인 의미의 ‘리메인스’라고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아직 그렇게 부르지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가인에게 선에 속한 무엇인가가 아직 남아 있었으며, 이제 악과 거짓이 그것마저 파괴할 위험이 있었다는 정도입니다. 이후 스베덴보리가 가인의 표와 보존의 의미를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본 뒤 리메인스와의 관계를 판단하는 것이 더 안전합니다.

 

이렇게 보면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라는 가인의 두려움은 단순한 자기보존의 공포 이상으로 읽힙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뒤에도 신앙에 속한 어떤 지식과 선에 반응할 가능성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상태가 악과 거짓에 완전히 삼켜지면 그것마저 없어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섭리는 단지 완전한 사람이나 온전한 교회만을 보존하시는 방식으로 역사하지 않습니다. 심각하게 훼손된 상태에서도 아직 보존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지키시고, 궁극적으로 구원을 위해 사용하십니다.

 

여기서 앞으로 나올 ‘가인의 표’의 의미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문자적으로는 살인자인 가인을 왜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는지가 매우 낯설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속뜻에서 가인은 한 개인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교리와 그것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상태를 표상합니다. 그 상태가 잘못되었다고 해서 거기에 남아 있는 신앙에 속한 모든 것까지 즉시 소멸되도록 허용하시는 것이 주님의 목적은 아닙니다. 악과 거짓 가운데에서도 아직 보존될 수 있는 것을 보존하시는 것이 주님의 섭리입니다.

 

이 점은 ‘악과 거짓이 그를 멸망시킨다’는 표현을 이해할 때도 중요합니다. 악과 거짓은 주님에게서 오는 어떤 독립된 형벌의 도구가 아닙니다. 악은 선을 파괴하고 거짓은 진리를 왜곡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그것들을 받아들이고 확증할수록 자신 안에 남아 있는 선과 진리를 더욱 밀어냅니다. 따라서 악과 거짓에 의한 멸망은 외부에서 임의적으로 부과되는 형벌이라기보다 사람이 악과 거짓을 받아들임으로써 영적 생명을 스스로 파괴하는 과정입니다.

 

AC.385의 네 표현을 다시 연결하면 흐름이 매우 분명합니다. 먼저 교회의 진리에서 분리됩니다. 이어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선에서 분리됩니다. 그러자 무엇이 진리고 선인지 알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악과 거짓이 아직 남아 있는 것마저 완전히 파괴할 위험에 이릅니다. 이것은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가 단순한 교리상의 작은 차이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선과 진리는 서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그 결합을 깨뜨리면 결국 둘 모두를 잃어버리는 방향으로 진행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가장 위태로운 지점에서 창4의 이야기는 뜻밖의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가인이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라고 말한 뒤 주님은 그를 즉시 멸하도록 내버려 두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에게 표를 주어 죽임을 당하지 않게 하십니다. 따라서 AC.385는 단지 가인의 멸망을 선언하는 번호가 아니라, 왜 그에게 보존이 필요했는지를 보여 주는 번호이기도 합니다. 가인에게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고, 모든 악과 거짓이 그것을 완전히 파괴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어지는 ‘가인의 표’에서는 잘못된 상태를 승인하지 않으면서도 그 안에 남아 있는 것을 보존하시는 주님의 섭리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AC.386, 창4:14, ‘지면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 교회의 진리에서 분리되는 것’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6‘지면에서 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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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4, 창4:13, ‘가인에게도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습니다 - 라멕에 이르러 소멸되는 체어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창4:13) AC.384이로부터 가인에게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후 체어리티의 모든 선이 소멸되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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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창4:10)

 

AC.377

여기서 ‘땅’(ground)이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한다는 것은 ‘밭’(field)이 교리를 의미한다는 사실에서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밭을 그 안에 가지고 있는 ‘땅’은 분열을 의미합니다. 사람 자신이 ‘땅’이며 또한 ‘밭’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사람 안에 심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기 안에 심어진 것에 따라 그런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선들과 진리들로부터는 선하고 참된 사람이 되고, 악들과 거짓들로부터는 악하고 거짓된 사람이 됩니다. 어떤 특정한 교리나 이단 안에 있는 사람은 그것으로부터 이름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다루고 있는 구절에서도 ‘땅’이라는 말은 사람 안에 있는 분열 또는 이단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됩니다. That the “ground” here signifies a schism or heresy,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a “field” signifies doctrine, and therefore the “ground,” having the field in it, is a schism. Man himself is the “ground,” and also the “field,” because these things are inseminated in him, for man is man from what is inseminated in him, a good and true man from goods and truths, an evil and false man from evils and falsities. He who is in any particular doctrine or heresy is named from it, and so in the passage before us the term “ground” is used to denote a schism or heresy in man.

 

해설

AC.377은 AC.373에서 짧게 제시했던 ‘땅(ground)은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한다’는 해석을 설명합니다. 창4:10에서 아벨의 피들이 ‘땅에서부터’ 주님께 부르짖는다고 했습니다. 앞의 AC.374-376에서 ‘피들’은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을, 그 ‘부르짖음’은 죄책의 고발을 의미한다는 것이 설명되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그 피들이 부르짖어 올라오는 ‘땅’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땅을 단순히 악이 벌어진 장소로 보지 않고 ‘분열 또는 이단’으로 해석합니다. 이것은 가인이 표상하는 것이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하여 하나의 교리적 원리로 만든 상태라는 지금까지의 흐름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첫 논리는 ‘밭’이 교리를 의미하므로 밭을 그 안에 가지고 있는 ‘땅’은 분열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앞의 AC.368에서 ‘들’ 또는 ‘밭’이 교리를 의미한다고 이미 설명했습니다. 밭은 씨가 뿌려지고 자라나는 곳입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씨는 선과 진리에 속한 것들이며, 그것들이 사람 안에서 받아들여지고 조직되는 교리적 영역이 밭으로 표상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밭을 품고 있는 더 근원적인 ‘땅’으로 시선이 옮겨갑니다. 가인의 문맥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본래의 결합에서 갈라지고 그 분리가 하나의 교리로 굳어졌으므로, 그 땅은 ‘분열 또는 이단’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AC.377의 설명은 여기서 한 단계 더 깊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 자신이 땅이며 또한 밭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이번 번호의 핵심 문장입니다. 교리는 인간 바깥에 존재하는 추상적인 명제들의 집합만이 아닙니다. 선과 진리 또는 악과 거짓이 실제로 심어지고 자라는 장소는 사람 자신입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땅과 밭이 교회와 교리의 상태를 나타낼 수 있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러한 것들이 인간 안에서 받아들여지고 그의 생명의 일부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무엇인가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생각하고 사랑하고 의도하며, 마침내 삶으로 내보내는 살아 있는 땅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사람은 자기 안에 심어진 것에 따라 그런 사람이 된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선들과 진리들로부터는 선하고 참된 사람이 되고, 악들과 거짓들로부터는 악하고 거짓된 사람이 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많은 지식을 접하면 그 지식대로 자동적으로 사람이 변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여기서 ‘심어진다’는 것은 무엇인가가 인간의 내면에 받아들여져 그의 생각과 의지와 삶의 일부가 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진리를 단순히 기억 속에 알고 있는 것과 그 진리를 인정하고 사랑하여 삶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거짓을 잠깐 듣거나 잘못 이해했다고 해서 곧바로 그 사람이 ‘거짓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고 확증하며 그에 따라 살아갈 때 그것이 점차 그의 영적 성질을 형성합니다.

 

이 점에서 ‘심어진 것’이라는 표현은 인간의 자유와도 연결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 안으로 들어오는 모든 생각과 감정이 곧바로 그 사람 자신인 것은 아닙니다. 여러 선한 생각과 악한 생각,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이 인간에게 제시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무엇을 받아들이고 자기 것으로 인정하며 의지와 행동으로 확증하느냐입니다. 그러므로 AC.377을 ‘나쁜 생각이 한 번 들어오면 악한 사람이 된다’는 식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사람이 어떤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삶으로 만들고, 어떤 악과 거짓을 거부하거나 받아들여 굳히느냐에 따라 그의 내적 성질이 형성된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선과 진리의 실제 근원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인간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땅’입니다.

 

이것은 가인의 역사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돌아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가인의 문제는 어느 날 갑자기 아벨을 죽였다는 한 사건으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먼저 신앙을 체어리티와 구별하고, 이어 둘을 분리하며, 신앙을 체어리티보다 높이고,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해야 한다는 원리를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이 점차 하나의 교리가 되었고, 결국 체어리티에 속한 모든 것을 거부하는 데까지 나아갔습니다. 즉 하나의 거짓된 원리가 사람 안에 심어지고 확증되면서 그의 교리와 삶을 형성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벨의 피들이 부르짖는 ‘땅’은 단순한 흙이 아니라 그러한 분열이 자리 잡은 인간의 내적 상태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마지막 문장인 ‘어떤 특정한 교리나 이단 안에 있는 사람은 그것으로부터 이름을 얻게 된다’는 것도 이런 의미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인간은 자기가 받아들이고 확증하여 살아가는 교리적 성질에 따라 영적으로 특징지어집니다. 그래서 이 문맥에서는 그 사람 안에 있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열 또는 이단을 ‘땅’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이단’이라는 말을 오늘날 어떤 교단이나 종파에 붙이는 제도적 낙인으로 먼저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스베덴보리가 다루는 핵심은 살아 있는 전체 질서에서 어떤 진리를 떼어 내어 독립시키고, 그것을 다른 진리나 선과 대립시키며 절대화하는 영적·교리적 분열입니다. 가인의 경우에는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여 신앙이 홀로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고 만든 것이 바로 그 분열입니다.

 

이 때문에 AC.377은 교리의 중요성을 매우 깊은 차원에서 보여 줍니다. 교리는 단지 시험을 보기 위해 외우는 신학적 명제가 아닙니다. 사람이 무엇을 참되다고 받아들이느냐는 결국 그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영향을 줍니다. 그렇다고 ‘올바른 교리만 머리로 정확히 알면 선한 사람이 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진리는 선과 결합되어야 합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겨야 하고, 진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진리가 삶에서 분리되면 가인의 문제가 다시 시작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선을 추구한다고 하면서 진리를 무시하면 무엇이 참된 선인지를 분별하기 어려워집니다. 그러므로 사람이라는 ‘땅’에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함께 심어지고 결합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히 ‘사람 자신이 땅이며 또한 밭이다’라는 말은 말씀을 읽는 우리의 태도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의 땅과 밭을 고대에 있었던 어떤 교회나 사람들의 상태로만 읽으면 우리는 그 말씀의 바깥에 서 있게 됩니다. 그러나 내가 바로 그 땅이고 밭이라면 질문이 달라집니다. ‘지금 내 안에는 무엇이 심어지고 있는가? 내가 반복하여 받아들이고 확증하는 생각은 무엇인가? 내가 붙드는 신앙의 진리는 실제로 체어리티와 결합되고 있는가? 아니면 어떤 진리를 자기 사랑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됩니다. 말씀의 속뜻은 이렇게 역사적 표상에서 현재 인간의 거듭남으로 들어옵니다.

 

동시에 이 말씀은 희망도 줍니다. 사람이 ‘땅’이라는 것은 악과 거짓만 심어질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선과 진리도 심어질 수 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주님께서 끊임없이 선과 진리를 인간에게 주시고 심으시며,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이끄십니다. 거듭남은 사람이라는 땅이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주님의 도움으로 거부하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그것들이 자라고 결합하도록 하는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나는 원래 어떤 땅인가?’라는 고정된 자기 규정보다 ‘나는 지금 무엇을 받아들이고 있으며, 주님께서 내 안에 심으시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입니다.

 

결국 AC.377에서 ‘땅’이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하는 이유는 그 분열과 이단이 추상적인 교리책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 심어지고 그 사람의 영적 상태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 안에 받아들여진 선과 진리로부터 선하고 참된 사람이 되고, 받아들이고 확증한 악과 거짓으로부터 악하고 거짓된 사람이 됩니다. 가인의 ‘땅’은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열이 심어져 하나의 교리가 된 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벨의 피들이 바로 그 땅에서부터 부르짖습니다.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은 가인의 교리와 분리된 삶 밖에서 우연히 생긴 사건이 아니라, 그 분열이 사람 안에 뿌리내리고 열매를 맺은 결과였기 때문입니다.

 

 

 

AC.378, 창4:11,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 분열로 말미암아 주님에게서 돌아선 가인’ (AC.378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And now cursed art thou from the ground, which hath opened its mouth to receive thy brother’s bloods from thy hand. (창4:11) AC.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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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6, 창4:10, ‘피들이 부르짖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 체어리티에 가한 폭력이 드러내는 죄책’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창4:10) AC.376이로부터 ‘피들이 부르짖는 것’(crying of bloods)은 죄책의 고발을 의미한다는 것이 따라 나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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