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66에는 처음 읽는 독자를 상당히 놀라게 할 만한 문장이 있습니다. ‘창조,에덴동산등에관한이모든내용,곧아브람시대까지의기록을모세는태고교회의후손들로부터전해받았습니다.’우리는 흔히 창세기를‘모세가기록한책’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에,이 문장을 읽으면 곧 여러 질문이 생깁니다. ‘그러면스베덴보리는창세기1장부터아브람이전까지의내용을모세가직접계시받아기록한것이아니라고보는가?’, ‘그렇다면그내용은실제역사가아니라전승된이야기일뿐이라는뜻인가?’
먼저AC.66의 문장을 약화시키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스베덴보리는 분명히 창조와 에덴동산 등을 포함하여 아브람 시대까지의 내용을 모세가‘태고교회의후손들로부터’받았다고 말합니다.따라서 적어도 스베덴보리 자신의 설명에서는 이 부분의 자료가 모세에게서 처음 생겨난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전해져 내려온 것입니다.이것은AC.66이 직접 말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문장을 이해하려면 바로 앞의‘첫째스타일’설명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태고교회 사람들은 땅과 세상의 것을 말하면서 동시에 그것들이 표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생각했고,그러한 표상들을‘일종의역사적연속’으로 엮었다고 했습니다.그리고 바로 그 설명 뒤에 한나와 시편을 인용한 다음,창조와 에덴동산 등의 내용을 모세가 태고교회 후손들로부터 받았다고 합니다.따라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전승은 단순히 후대 사람들이 꾸며 낸 민담이라는 뜻이 아니라,태고교회의 표상적 표현 방식과 연결된 오래된 자료입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이어지는 둘째 스타일과의 구별입니다.아브람 이후의 모세오경과 여호수아,사사기,사무엘기,열왕기에 대해서는 스베덴보리가‘역사적사실들은문자적의미에나타난그대로’라고 명시합니다.반면 아브람 이전의 첫째 스타일에 대해서는 표상들을‘일종의역사적연속’으로 만들었다고 표현합니다.스베덴보리가 두 부분을 의도적으로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아브람이전은역사가아니고아브람이후부터만역사이다’라고 한 줄로 정리해도 될까요?AC.66하나만으로 그렇게까지 단정하는 것도 조심하는 편이 좋겠습니다.이 글은 첫째 스타일과 둘째 스타일의 차이를 분명히 하지만,창세기 앞부분의 각각의 인물과 사건이 어느 의미에서 역사적이며 어느 의미에서 표상적 구성인지를 세세하게 판정하지는 않습니다. ‘아담은실제개인이아니었다’, ‘노아홍수는실제사건이아니었다’같은 결론을AC.66한 문장에서 바로 끌어내는 것은 본문보다 앞서가는 것입니다.
반대로 이 문장을 없었던 것처럼 만들어‘창1부터모든내용은아브람이후와똑같은의미에서문자그대로의역사라고스베덴보리도가르친다’고 하는 것도 정확하지 않습니다.AC.66은 분명히 서로 다른 두 스타일을 구별하고 있습니다.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익숙한 선입견에 맞추어 그 구별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앞으로 스베덴보리가 아담,노아,홍수,족보 등을 실제로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따라가면서 조금씩 구체화하는 것입니다.
또 이것을 곧 현대 성서학의 문서설이나 구전 전승론과 동일시할 필요도 없습니다.현대 성서학도 모세오경의 자료와 전승을 연구하지만,그 학문적 이론과 스베덴보리가 말하는‘태고교회후손들로부터받은표상적역사’는 출발점과 목적이 다릅니다.용어상‘전승된자료’라는 공통점이 있다고 해서 같은 이론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AC.66은 현대적인 문헌비평을 제시하는 글이 아니라 말씀의 네 가지 스타일과 그 속뜻을 설명하는 글입니다.
그러면 모세가 이전 자료를 받았다는 것이 말씀의 신적 권위를 약화시키는 것일까요?반드시 그렇다고 볼 이유는 없습니다.성경의 권위가 성경의 모든 문장이 기록자의 머릿속에 아무 선행 자료 없이 직접 받아쓰기처럼 들어왔다는 방식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적어도AC.66에서 중요한 것은 모세 이전부터 태고교회의 표상들이 전해졌고,그것이 말씀의 창세기 앞부분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입니다.스베덴보리의 관심은 자료의 인간적 전달 경로를 밝혀 말씀을 낮추는 데 있지 않고,그 오래된 표상적 기록 속에 영적이고 천적인 의미가 들어 있음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오히려 이 설명은 지금까지 창세기1장을 왜 그렇게 읽었는지를 돌아보게 합니다.빛과 궁창과 물,식물과 광명체,물고기와 새와 짐승,사람의 창조를 스베덴보리가 거듭남의 상태로 읽은 것은 후대의 문자 기록에 임의로 상징을 붙인 것이라고 그 자신은 생각하지 않습니다.AC.66에 따르면 바로 이런 방식으로 자연적인 것을 말하면서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생각하던 태고교회의 표현 방식이 창세기 앞부분의 배경에 있습니다.
또 하나 기억할 것은 모세가‘태고교회사람들’에게 직접 받은 것이 아니라‘태고교회의후손들’에게서 받았다고 한다는 점입니다.즉 매우 오래된 표상적 자료가 후손들을 통해 보존되어 모세에게 전해졌다는 그림입니다.그 구체적인 전승 과정이 몇 세대를 거쳤고 어떤 형태의 문헌이었는지AC.66은 설명하지 않습니다.따라서 그 빈칸을 우리가 상상으로 채울 필요도 없습니다.
처음에는 이런 설명이 성경에 대한 익숙한 생각을 흔드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그러나AC를 읽는 과정에서는 바로 이런 곳에서‘스베덴보리가실제로무엇을말하는가’를 먼저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우리가 미리 가지고 있던 성경관에 맞지 않는다고 문장을 약화시키지도 않고,반대로 한 문장을 가지고AC가 아직 말하지 않은 결론까지 확대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현 단계에서 가장 정확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스베덴보리는 창조와 에덴동산 등을 포함하여 아브람 시대까지의 기록을 모세가 태고교회 후손들로부터 받았다고 실제로 말합니다.그는 그 부분을 태고교회의 표상적 스타일과 연결하며,아브람 이후의 역사적 스타일과 구별합니다.그러나 이 한 문장만으로 창세기 앞부분의 개별 인물과 사건의 역사성 여부를 모두 결정하지는 않습니다.그것은 앞으로 관련AC들이 직접 설명하는 내용을 따라가며 판단해야 합니다.
이렇게 읽으면 이 문장은 말씀의 권위를 낮추기보다 오히려 창세기1장을 지금까지 왜‘거듭남의아르카나’를 담은 표상적 연속으로 읽어 왔는지를 이해하게 해 줍니다.그리고 동시에 우리에게 중요한 독법 하나를 가르쳐 줍니다.성경의 권위를 존중하는 것과 스베덴보리가 성경의 형성과 스타일에 대해 실제로 한 말을 정직하게 읽는 것은 서로 반대되는 일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 영상의 가장 큰 장점은 성막을 단순히 고대 이스라엘의 종교 시설로 보지 않고,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보여 주는 하나의 거대한 상징 체계로 읽으려 한다는 점입니다. ‘성막하나를제대로보면성경전체가달리보이기시작한다’는 영상의 출발점은 ‘스베덴보리의렌즈’에서도 매우 의미 있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에게 성막은 단순한 예표 정도가 아니라, 그 구조와 재료와 기구와 방향과 의식 하나하나가 천국과 주님, 그리고 인간의 거듭남에 상응하도록 주어진 거룩한 표상입니다. 그러므로 성막을 자세히 설명하는 출애굽기의 긴 기록은 불필요한 건축 설명이 아니라, 말씀의 속뜻에서는 인간이 어떻게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며 어떻게 천국의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지를 보여 주는 영적 설계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상은 먼저 ‘미쉬칸’, 곧 장막을 하나님께서 인간 가운데 거하시는 장소로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높은 하늘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에게 가까이 오시고, 모세와 ‘사람이자기의친구와이야기함같이’ 말씀하셨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 방향은 매우 좋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종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멀리 계신 하나님을 인간이 힘겹게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인간에게 끊임없이 가까이 오시는 주님을 인간이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사랑과 진리를 끊임없이 흘려보내십니다. 문제는 주님이 멀리 계신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그리고 거기서 나온 거짓들이 그 유입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상의 ‘우리의기도가하늘까지힘겹게올라가는것이아니라이미곁에계신그분께건네는대화일지도모른다’는 표현은 아름답고도 의미 있는 통찰입니다.
그러나 에덴을 설명하는 부분부터는 조금 더 조심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영상은 아담을 ‘첫번째제사장’, 에덴을 ‘첫번째성전’으로 설명하면서, 창세기 2장의 ‘경작하며지키게하시고’라는 표현과 성막 봉사에 사용되는 히브리어를 연결합니다. 성경신학적으로 흥미로운 연결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에덴은 무엇보다 실제 지리적 정원이나 최초의 성전 건물을 가리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에덴동산은 태고교회 사람들의 내적 상태, 곧 사랑과 퍼셉션을 통해 주님과 직접 교통하던 천적 상태를 표상합니다. 따라서 에덴이 ‘성전’이었다고 말한다면 건축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태고교회 사람의 내면 자체가 주님이 거하시는 성전이었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더 깊습니다. 성막은 잃어버린 에덴이라는 장소를 복원하는 모형이라기보다, 인간 안에서 무너진 천국의 질서를 주님께서 다시 세우시는 과정을 표상한다고 보는 편이 스베덴보리에 더 가깝습니다.
영상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뒤 에덴 동쪽에 그룹과 불칼이 놓였고, 훗날 성막의 휘장에도 다시 그룹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연결하면서 ‘쫓아내신것으로끝내신게아니라돌아올길을다시짜고계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아름다운 연결이지만, ‘스베덴보리의렌즈’에서는 여기에도 한 단계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창세기 3장의 그룹은 단순히 화난 하나님께서 인간의 귀환을 막기 위해 세워 놓으신 경비병이 아닙니다. ‘생명나무의길’을 지키는 것은 타락한 인간이 거룩한 것에 함부로 접근하여 그것을 모독하지 못하도록 보호하는 주님의 자비로운 섭리입니다. 그러므로 닫힌 길조차 심판만이 아니라 보호입니다.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거룩함에 접근하여 더 깊은 모독에 빠지는 것보다, 한동안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으시는 것이 오히려 구원의 섭리인 것입니다. 성막 휘장의 그룹 역시 그런 의미에서 ‘거룩한것의보호’를 나타냅니다.
성막 뜰의 동쪽 문 하나를 강조하는 부분도 흥미롭습니다. 영상은 ‘제사장이든평민이든족장이든이문하나로들어가거나아니면들어가지못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을 곧바로 ‘예수만이유일한문’이라는 교리적 공식으로만 읽기보다, 상응적으로 보면 더욱 풍성해집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길은 인간의 신분이나 지식이나 공로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특히 성경에서 ‘동쪽’은 주님과 주님을 향한 사랑에 상응합니다. 해가 뜨는 방향이라는 자연적 이유 때문이 아니라, 영계에서 천사들이 주님을 영적 태양으로 바라보는 질서와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막의 동쪽 입구는 단지 출입구 하나가 아니라 모든 영적 여정의 시작이 ‘주님을향함’에 있음을 보여 주는 상응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번제단에 이르러서는 영상과 스베덴보리 사이에 중요한 차이가 나타납니다. 영상은 제물을 가져온 사람이 양의 머리에 손을 얹을 때 ‘내죄가바로그순간이양에게로옮겨가고있었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전통적인 대속 신학에서 익숙한 설명이지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죄가 어떤 법적 실체처럼 한 존재에게서 다른 존재에게 이전된다고 이해하지 않습니다. 죄는 인간의 의지와 사랑, 그리고 실제 삶에 속한 것이므로 다른 존재에게 법적으로 옮겨질 수 없습니다. 제물과 피는 죄의 물질적 이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드려지는 사랑과 선,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과 정결을 표상합니다. 따라서 제사의 중심은 ‘죄인이받을형벌을동물이대신받는다’는 데 있지 않고, 악으로 인해 무너진 인간의 질서가 주님께로 다시 돌아가고 회복되는 데 있습니다.
물두멍 역시 단순한 의식적 세척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성막으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물로 씻는 것은 말씀의 진리로 삶을 정결하게 하는 것을 표상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물은 특히 자연적 차원에서의 진리에 상응합니다. 사람이 주님께 가까이 간다는 것은 어떤 신비로운 감정만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진리를 통해 자신의 실제 생각과 말과 행동을 살피고 고치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영상이 ‘깨끗해져서가는것이아니라가면그자리에서씻기는구조’라고 말한 것은 목회적으로는 따뜻한 표현이지만,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여야 합니다. 주님은 있는 모습 그대로 인간을 받아 주시지만, 받아 주신 인간을 있는 모습 그대로 내버려 두지는 않으십니다. 성막의 길은 받아들임의 길인 동시에 정결과 거듭남의 길입니다.
성소 안으로 들어가면 등잔대와 진설병과 분향단이 등장합니다. 영상은 등잔대를 ‘나는세상의빛’, 진설병을 ‘나는생명의떡’이라는 주님의 말씀과 연결합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렌즈’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빛은 신적 진리를, 떡은 신적 선을 표상합니다. 인간에게 적용하면 등잔대의 빛은 이해를 밝혀 주는 진리이며, 떡은 의지를 살리고 영혼을 먹이는 사랑의 선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 신학 전체를 관통하는 ‘선과진리’, 또는 ‘사랑과지혜’의 결합과도 연결됩니다. 주님은 단순히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치시는 분만도 아니고, 사랑만 주시는 분도 아닙니다. 사랑과 지혜, 선과 진리가 주님 안에서는 완전히 하나이며, 거듭나는 인간 안에서도 이 둘이 다시 결합되어야 합니다.
향 역시 영상이 기도와 연결한 것처럼 성경에서 기도를 표상하지만, 스베덴보리에게는 단순히 인간의 말이 위로 올라가는 모습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참된 기도는 인간의 입술에서 나온 문장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있는 사랑과 신앙이 주님께 향하는 내적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향기가 올라간다는 것은 주님께서 인간의 아름다운 문장을 들으신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 안에서 주님을 향하는 선한 애정과 진실한 신앙을 받으신다는 뜻입니다. 말없이 드리는 기도도 기도이고, 때로는 무엇을 구해야 할지 몰라 침묵하는 것조차 주님을 향한 내적 애정이 있다면 깊은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지성소와 법궤에 대한 영상의 설명도 매우 인상적입니다. 다른 민족의 신전과 달리 이스라엘의 지성소에는 신상이 없고, 그룹 사이의 보이지 않는 공간이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낸다는 설명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은어떤자연적형상으로제한될수없는분’이라는 중요한 진리를 보여 줍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에게는 여기서 놀라운 전환이 하나 더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결국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이시는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보이지 않는 신성을 ‘아버지’, 나타난 신적 인성을 ‘아들’, 그리고 그분에게서 나오는 신적 활동을 ‘성령’으로 이해합니다. 따라서 성막의 가장 깊은 곳에 임재하시는 여호와와 복음서에서 우리 가운데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서로 다른 두 신적 존재가 아니라 한 분 주님의 계시입니다.
여기에서 영상이 속죄소, 곧 카포렛 위에 피가 뿌려지는 장면을 ‘하나님이위에서내려다보실때보이는건깨어진율법이아니라그위를덮은피였다’고 설명하는 부분은 특별히 분별해서 읽어야 합니다. 이 표현은 감동적이지만, 자칫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의 실제 악은 그대로 두시면서 피를 보고 법적으로 죄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신다는 인상을 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구원은 그런 법적 선언이 아닙니다. 주님은 인간의 죄를 못 본 체하지 않으시며, 다른 존재의 의를 인간에게 외적으로 덮어씌우지도 않으십니다. 인간이 주님의 능력으로 악을 실제로 멀리하고 선을 행할 수 있도록 변화시키십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그러므로 ‘덮음’이 있다면 죄를 감추어 하나님께 보이지 않게 하는 덮음이라기보다, 주님의 자비와 선이 인간의 악을 제어하고 정복하며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대속죄일의 반복과 그리스도의 ‘단번에’ 이루신 일을 연결하는 영상의 흐름 역시 히브리서에 충실한 전형적인 기독교 해석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단번의사건’을 형벌 대속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는 성난 아버지를 달래거나 인간에게 내려질 형벌을 대신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시 인간에게 압도적으로 밀려 들어오던 지옥의 세력을 직접 만나 싸우고 정복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주님의 지상 생애 전체는 연속적인 시험과 승리의 과정이었으며, 십자가는 그 마지막 시험이자 마지막 승리였습니다. 동시에 주님께서는 그 과정을 통해 자신이 입으신 인간성을 완전히 신성하게 하셨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구속’과 ‘영화’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 점에서 ‘휘장이찢어졌다’는 영상의 장면은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더욱 깊어집니다. 휘장은 단순히 하나님께 들어가는 법적 장벽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인성을 영화롭게 하심으로써 신성과 인성 사이의 모든 분리가 사라지고, 동시에 인간이 주님의 신적 인성을 통해 신성에 접근할 수 있는 완전한 길이 열린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인간은 알 수 없는 절대자를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나를본자는아버지를보았다’고 말씀하신 주님 안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화를 풀어 주신 순간이 아니라, 주님께서 지옥을 정복하시고 자신의 인성을 완전히 신성하게 하심으로 인간과 천국 사이의 질서를 회복하신 결정적인 승리입니다.
영상이 요한복음 1장 14절의 ‘말씀이육신이되어우리가운데거하시매’를 성막과 연결한 부분은 매우 좋습니다. ‘거하다’에 사용된 헬라어가 장막을 치는 이미지와 연결된다는 것은 요한복음의 성육신 이해를 풍성하게 합니다. 광야에서 장막 가운데 임재하셨던 여호와께서 마침내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흐름입니다. ‘스베덴보리의렌즈’에서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성육신은 하나님께서 잠시 인간의 옷을 입으셨다가 벗으신 사건이 아닙니다. 주님은 어머니 마리아에게서 받은 유한한 인간적 요소를 시험과 승리를 통해 차례로 벗으시고, 그 자리에 자신 안의 신성으로부터 오는 신적 인간성을 입으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다시 이전의 보이지 않는 하나님으로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영원히 ‘신적인간’이 되셨습니다. 이것이 성막이 가리키는 궁극적인 실체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리고 영상은 에덴에서 성막으로, 성막에서 성육신으로, 십자가에서 요한계시록 21장의 ‘하나님의장막이사람들과함께있으매’로 이야기를 이어 갑니다. 이 큰 방향은 아름답습니다. 다만 마지막의 ‘더이상성막이필요하지않은날’은 단순히 먼 미래에 물리적인 새 지구가 만들어지고 그곳에서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산다는 그림으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요한계시록의 새 예루살렘은 새 교회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장막이사람들과함께있다’는 것은 주님께서 그 교회의 선과 진리 가운데 거하시며, 궁극적으로는 거듭난 인간의 내면 가운데 거하신다는 뜻입니다. 성막의 완성은 건축물이 사라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 주님의 성전이 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이 영상 전체를 ‘스베덴보리의렌즈’로 다시 바라보면, 성막은 ‘죄인이피를통해법적으로용서받아하나님께접근하는과정’보다 훨씬 더 크고 깊은 것을 보여 줍니다. 뜰에서 성소로, 성소에서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은 인간의 겉 사람에서 점점 더 깊은 속 사람으로 들어가는 거듭남의 여정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놋에서 은으로, 다시 금으로 깊어지는 재료의 변화 역시 자연적 차원에서 영적 차원으로, 다시 천적 차원으로 깊어지는 질서를 생각하게 합니다. 물로 씻는 것은 진리에 의한 정결이며, 등잔대의 빛은 신앙의 진리이고, 떡은 사랑의 선이며, 향은 그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올라가는 예배이고, 가장 깊은 지성소는 주님과 인간의 내적 결합을 향합니다.
따라서 영상의 마지막 문장, ‘하나님은멀리계신적이없었습니다. 처음부터지금까지줄곧이쪽을향해걸어오고계셨던겁니다’는 이 영상 전체에서 가장 아름답게 건질 수 있는 문장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렌즈’에서는 여기에 한 문장을 더 붙이고 싶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향해 오시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안으로 들어오셔서 그 사람을 자신의 형상과 모양으로 다시 만드시기를 원하십니다. 성막의 목적은 우리가 잠깐 하나님을 방문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인간의 마음 자체가 주님의 거처가 되는 데 있습니다.
처음 에덴에서 인간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지혜 안에 살았습니다. 그 질서가 무너지자 주님은 표상적인 성막과 성전을 통해 다시 천국의 질서를 보여 주셨고, 마침내 친히 세상에 오셔서 지옥을 정복하시고 자신의 인성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말씀을 통해 각 사람의 마음 안에서 또 하나의 성막을 세우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성막의 마지막 질문은 ‘성막의각기구가무엇을예표하는가?’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더 본질적인 질문은 이것입니다. ‘지금내안에서주님이거하실성막은어떻게세워지고있는가?’
성막을 그렇게 읽기 시작하면 출애굽기의 낯설고 복잡한 치수와 재료와 기구와 의식들이 전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것들은 오래전에 사라진 종교 시설의 설계도가 아니라, 주님께서 한 사람의 겉 사람에서 시작하여 그의 가장 깊은 속 사람까지 들어오시며 그를 거듭나게 하시는 질서의 표상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길의 중심에는 인간의 공로나 제물의 피 자체가 아니라 한 분 주님이 계십니다. 성막도 주님을 가리키고, 제사도 주님을 가리키며, 빛도 떡도 향도 법궤도 주님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 주님께서 마침내 인간 가운데 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내안에거하라나도너희안에거하리라.’
결국 성막의 이야기는 ‘어떻게죄인이무서운하나님에게가까이갈수있는가?’의 이야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더 깊게는 ‘어떻게주님께서타락한인간안으로다시들어오셔서그를천국의형상으로회복시키시는가?’의 이야기입니다. 그 관점에서 보면 성막은 건물이 아니라 거듭남의 지도이고, 지성소는 장소가 아니라 주님과 인간의 결합이며, 휘장이 열리는 것은 단순한 출입 허가가 아니라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까지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들어올 길이 다시 열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지금도 각 사람 안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And Jehovah God took the man, and put him in the garden of Eden, to till it and take care of it.(창2:15)
AC.122
‘에덴동산’(gardenofEden)은앞에서설명한천적인간에게속한모든것을의미합니다.‘그것을경작하며지키는것’(tillitandtakecareofit)은그가이모든것을누리는것은허락되지만,그것들을자기것으로소유해서는안된다는것을의미합니다.그것들은주님의것이기때문입니다. By the “gardenofEden” are signified all things of the celestial man, as described; by to “tillitandtakecareofit” is signified that it is permitted him to enjoy all these things, but not to possess them as his own, because they are the Lord’s.
해설
AC.122는 창2:15의 ‘여호와하나님이그사람을이끌어에덴동산에두어그것을경작하며지키게하시고’라는 말씀의 속뜻을 매우 간결하게 설명합니다. ‘에덴동산’은 단순히 하나의 장소가 아니라 앞에서 설명한 천적 인간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동산을 경작하고 지킨다는 것도 자연적인 농경 행위를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천적 인간이 주님께 받은 모든 것을 어떤 태도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는지를 나타냅니다.
앞의 설명들을 생각하면 ‘에덴동산’ 안에는 사랑과 지혜와 지성, 그리고 그로부터 질서 있게 이어지는 이성과 앎까지 천적 인간에게 속한 모든 것이 포함됩니다. AC.121에서는 그 생명의 질서가 ‘동쪽’이신 주님으로부터 시작하여 지혜와 지성과 이성을 거쳐 기억에 속한 앎들에까지 이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AC.122에서 말하는 ‘이모든것’은 사람이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낸 재산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의 생명과 근원은 주님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 속한 것이라고 해서 인간이 그것을 누려서는 안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에게 ‘이모든것을누리는것이허락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주님께 받은 사랑과 지혜와 지성은 인간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인간 안에 주어지고, 인간은 그것을 자기의 생명처럼 느끼며 살아갑니다. 천적 질서는 인간이 아무것도 느끼거나 행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주님께 받은 것을 충만히 누리고 그것으로 살아가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을 ‘자기것으로소유해서는안된다’고 합니다. 바로 여기에 AC.122의 중심이 있습니다. 천적 인간은 자신 안에 사랑과 지혜와 지성과 선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지만, 그것들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라고 여기지도 않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실제로 누리면서도 그것이 주님의 것임을 압니다. 따라서 ‘내안에있다’는 것과 ‘나에게서나왔다’는 것은 전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주신 것이 사람 안에 있으므로 사람은 그것으로 살아가지만, 그 생명의 근원은 여전히 주님이십니다.
이 점에서 ‘경작하며지킨다’는 표현도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주님께 받은 것을 자기 것으로 주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수동적으로 있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은 동산을 경작하고 돌보듯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실제 삶 가운데 사용합니다. 다만 그렇게 사용하면서 사랑과 지혜와 선을 자신의 독립적인 소유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인간의 활동과 주님의 생명 사이의 질서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사람은 실제로 경작하고 지키지만, 그가 경작하고 지키는 모든 생명의 것은 주님께 속합니다.
이것은 바로 앞의 AC.121과도 아름답게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주님으로부터 지혜가 나오고, 지혜를 통하여 지성이, 지성을 통하여 이성이 나오며, 이성을 통하여 기억에 속한 앎들이 생명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22는 그렇게 생명을 얻은 모든 것을 사람이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말합니다. 사람은 그것을 받아 누리고 사용합니다. 그러나 그 흐름의 출발점을 잊고 ‘이지혜는내지혜이고,이선은내선이며,이생명은나에게서나온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천적 질서는 생명의 흐름뿐 아니라 그 생명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아는 질서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에덴동산을 ‘경작하며지킨다’는 말씀에는 천적 인간의 매우 근본적인 삶의 태도가 담겨 있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주시는 것을 거부하지도 않고 자기 것으로 빼앗지도 않습니다. 받아서 누리고, 실제 삶 가운데 사용하면서도 그것이 주님의 것임을 압니다. 주님께 받은 것을 마치 자기에게서 나온 것처럼 소유하려 하지 않고, 주님의 것으로 받아 살아가는 것, 이것이 에덴동산 안에서 살아가는 천적 인간의 질서입니다. (AC.122)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And out of the ground made Jehovah God to grow every tree desirable to behold, and good for food; the tree of lives also, in the midst of the garden; and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창2:9)
AC.102
‘나무’(tree)는퍼셉션을뜻하고,‘보기에아름다운나무’(treedesirabletobehold)는진리의퍼셉션을,‘먹기에좋은나무’(treegoodforfood)는선의퍼셉션을뜻합니다.‘생명나무’(treeoflives)는사랑과거기서나오는신앙을,‘선악을알게하는나무’(treeoftheknowledgeofgoodandevil)는감각적인것에서나오는신앙,곧단순한기억지식에서나오는신앙을뜻합니다. A “tree” signifies perception; a “treedesirabletobehold,” the perception of truth; a “treegoodforfood,” the perception of good; the “treeoflives,” love and the faith thence derived; the “treeoftheknowledgeofgoodandevil,” faith derived from what is sensuous, that is, from mere memory-knowledge.
해설
AC.102는 창2:9에 나오는 여러 ‘나무’의 속뜻을 먼저 한꺼번에 제시합니다. ‘나무’ 자체는 퍼셉션을 뜻하고, 그 가운데 ‘보기에아름다운나무’는 진리의 퍼셉션을, ‘먹기에좋은나무’는 선의 퍼셉션을 뜻합니다. 그리고 동산 가운데 있는 ‘생명나무’는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을, ‘선악을알게하는나무’는 감각적인 것에서, 곧 단순한 기억지식에서 나오는 신앙을 뜻합니다.
여기서 먼저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나무’를 단순히 어떤 지식이나 교리를 뜻한다고 하지 않고 ‘퍼셉션’과 연결한다는 점입니다. 앞에서 에덴동산은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흘러드는 천적 인간의 지성을 뜻했습니다(AC.98-101). 그러므로 그 동산에서 자라는 나무들도 그 사람 안에 독립적으로 축적된 지식의 목록이라기보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 안에서 진리와 선을 퍼셉션하는 것과 관계됩니다. ‘보기에아름다운나무’와 ‘먹기에좋은나무’가 각각 진리와 선의 퍼셉션을 뜻하는 것도 이 문맥 안에 있습니다.
특히 ‘생명나무’가 사랑만이 아니라 ‘사랑과거기서나오는신앙’을 뜻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바로 앞에서 살펴본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와 이어집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주된 것이며, 신앙은 그 사랑에서 나옵니다. 따라서 생명나무가 나타내는 것은 사랑과 신앙이 서로 분리된 상태가 아니라, 사랑이 근원이 되고 신앙이 거기서 나오는 질서입니다.
반대로 ‘선악을알게하는나무’는 ‘감각적인것에서나오는신앙,곧단순한기억지식에서나오는신앙’을 뜻합니다. 여기서 곧바로 ‘감각이나기억지식은악하다’고 결론 내리면 안 됩니다. 앞의 여러 번호에서도 이성과 기억지식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질서 안에 놓여야 함을 보았습니다. AC.102에서 대비되는 것은 지식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신앙의 근원과 질서입니다.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앙과, 감각적인 것과 단순한 기억지식에서 신앙을 끌어내려는 질서가 서로 대비되고 있습니다.
AC.102는 아직 이 각각의 의미를 자세히 증명하거나 설명하지 않습니다. 창2:9의 여러 나무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먼저 제시하는 개요에 가깝습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나무는퍼셉션’, ‘생명나무는사랑과거기서나오는신앙’, ‘선악을알게하는나무는감각적인것과단순한기억지식에서나오는신앙’이라는 기본 구조를 붙들고, 이어지는 설명에서 그 의미가 어떻게 구체화되는지를 따라가는 것이 좋습니다. (AC.102해설)
주님이‘동쪽’(east)이시기때문에,성전이세워지기전표상적유대교회에서는기도할때얼굴을동쪽으로향하는거룩한관습이있었습니다. It was in consequence of the Lord’s being the “east” that a holy custom prevailed in the representative Jewish church, before the building of the temple, of turning their faces toward the east when they prayed.
해설
AC.101은 AC.98에서 ‘동쪽’이 주님을 뜻한다고 한 것을 에스겔의 말씀으로 확인합니다. 에스겔의 환상에서 선지자는 ‘동쪽을향한문’으로 인도되고,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에서부터’ 옵니다. 그리고 그 영광이 동문을 통하여 성전으로 들어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에서 ‘동쪽’을 주님과 연결합니다.
이것은 AC.98의 ‘동쪽에덴동산’이라는 표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동산’이 지성이고 ‘에덴’이 사랑이라면, ‘동쪽’은 그 사랑과 지성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천적 인간의 지성은 자기 자신에게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흘러듭니다. 따라서 ‘동쪽’이 주님을 뜻한다는 것은 AC.98-99에서 계속 설명한 생명의 질서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서 표상적 유대교회의 한 관습을 언급합니다. 성전이 세워지기 전에는 기도할 때 얼굴을 동쪽으로 향하는 거룩한 관습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방향 자체에 어떤 독립적인 거룩함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그 방향이 주님을 표상했다는 점입니다. ‘동쪽’을 향한다는 외적인 행위는 그 표상 안에서 주님을 향하는 내적인 것을 나타냈습니다. 따라서 이 관습은 말씀 안의 ‘동쪽’과 예배의 표상이 서로 같은 중심, 곧 주님을 향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렇게 AC.98-101의 흐름을 보면 ‘동쪽에덴동산’의 세 요소가 하나씩 분명해집니다. ‘동산’은 지성이고, ‘에덴’은 사랑이며, ‘동쪽’은 주님입니다. 그러므로 이 표현 전체가 나타내는 것은 단순히 아름답고 지혜로운 인간의 상태가 아니라,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지성이 흘러드는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입니다. (AC.101해설)
이구절에서‘광야’(wilderness),‘기쁨’(joy),‘감사함’(confession)은신앙의천적인것들,곧사랑에관계되는것들을나타내는표현들이며,‘사막’(desert),‘즐거움’(gladness),‘노랫소리’(thevoiceofsinging)는신앙의영적인것들,곧이해에속한것들을나타내는표현들입니다.앞의것들은‘에덴’(Eden)에,뒤의것들은‘동산’(garden)에관계됩니다.이선지서에서는같은것에관하여두표현이끊임없이나타나는데,하나는천적인것을,다른하나는영적인것을뜻하기때문입니다.‘에덴에있는동산’(gardeninEden)이더나아가무엇을뜻하는지는뒤의10절에관한설명에서볼수있습니다. In this passage, “wilderness,” “joy,” and “confession” are terms expressive of the celestial things of faith, or such as relate to love; but “desert,” “gladness,” and “thevoiceofsinging,” of the spiritual things of faith, or such as belong to the understanding. The former have relation to “Eden,” the latter to “garden”; for with this prophet two expressions constantly occur concerning the same thing, one of which signifies celestial, and the other spiritual things. What is further signified by the “gardeninEden,” may be seen in what follows at verse 10.
해설
AC.100은 AC.98에서 밝힌 ‘동산’과 ‘에덴’의 뜻을 이사야의 말씀으로 확인합니다. 사51:3에는 황폐해진 시온을 여호와께서 회복하실 때 ‘그광야를에덴같게,그사막을여호와의동산같게’ 하신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에덴’과 ‘동산’이 단순히 같은 아름다운 장소를 반복해서 표현한 말이 아니라, 서로 구별되면서도 함께 하나를 이루는 두 종류의 것을 나타낸다고 봅니다.
그는 먼저 ‘광야’, ‘기쁨’, ‘감사함’을 신앙의 천적인 것들, 곧 사랑에 관계되는 것들로 보고 이것들을 ‘에덴’과 연결합니다. 반면 ‘사막’, ‘즐거움’, ‘노랫소리’는 신앙의 영적인 것들, 곧 이해에 속한 것들로 보고 이것들을 ‘동산’과 연결합니다. 따라서 AC.98의 ‘에덴은사랑,동산은지성’이라는 설명이 이사야의 병행 표현에서도 같은 질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신앙의천적인것들’과 ‘신앙의영적인것들’을 서로 분리된 두 종류의 신앙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번호가 직접 밝히는 구별은 앞의 것들이 사랑에 관계되고 뒤의 것들이 이해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AC.99에서 천적 인간에게 주님께서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통하여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드신다고 한 설명과도 이어집니다. 사랑과 이해는 서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질서 안에서 함께 있습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이사야에서 ‘같은것에관하여두표현’이 끊임없이 나타난다고 말하는 점입니다. 그는 성경의 이러한 병행 표현을 단순한 문학적 반복으로만 읽지 않고, 한 표현은 천적인 것을, 다른 표현은 영적인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읽습니다. 따라서 ‘광야와사막’, ‘기쁨과즐거움’, ‘감사함과노랫소리’, 그리고 ‘에덴과동산’이라는 짝은 같은 말을 아무 뜻 없이 되풀이한 것이 아니라, 사랑에 관계되는 것과 이해에 속한 것이 함께 말씀 안에 나타나는 방식입니다.
다만 AC.100은 ‘에덴에있는동산’의 의미를 여기서 모두 설명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그 더 나아간 의미는 뒤의 10절에 관한 설명에서 보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에덴’은 사랑에, ‘동산’은 지성에 관계되며, 이 둘의 결합이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를 나타낸다는 데까지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AC.100해설)
심화
1.‘왜같은것을말하는두표현을하나는천적,다른하나는영적이라고하는가?’
AC.100에서 스베덴보리는 사51:3의 말씀을 매우 독특하게 읽습니다. ‘광야를에덴같게,사막을여호와의동산같게’ 하신다는 말씀에서 ‘광야’, ‘기쁨’, ‘감사함’은 신앙의 천적인 것들, 곧 사랑에 관계되는 것들을 나타내고, ‘사막’, ‘즐거움’, ‘노랫소리’는 신앙의 영적인 것들, 곧 이해에 속한 것들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사야에서는 같은 것에 관하여 두 표현이 끊임없이 나타나며, 그중 하나는 천적인 것을, 다른 하나는 영적인 것을 뜻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왜 같은 것을 말하는 두 표현에 서로 다른 속뜻이 있다고 보는 것일까요?
먼저 AC.100이 말하는 ‘같은것에관하여두표현’이라는 말을 ‘두표현의뜻이완전히동일하다’는 의미로 읽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두 표현은 하나의 주제를 함께 말하지만, 스베덴보리는 그 안에서 서로 구별되는 두 측면을 봅니다. 하나는 사랑에 관계되는 천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해에 속한 영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에덴’과 ‘동산’도 서로 떨어진 두 주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의 질서 안에서 사랑과 지성을 각각 나타냅니다.
이것은 바로 앞의 AC.98-99에서 설명한 천적 인간의 질서와 연결됩니다. ‘에덴’은 사랑이고 ‘동산’은 지성이며, 천적 인간의 지성은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흘러듭니다. 따라서 사랑과 지성은 하나를 이루지만 그렇다고 서로 같은 것은 아닙니다. 사랑은 사랑이고 지성은 지성이며,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도 구별됩니다. 하나를 이루는 것 안에 이러한 구별이 있기 때문에, 말씀에서도 같은 하나의 주제를 말하면서 서로 다른 표현을 통하여 그 구별되는 측면들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 AC.100을 읽는 중요한 실마리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성경에 나오는 모든 병행 표현을 우리가 임의로 둘씩 짝지어 ‘첫째표현은천적,둘째표현은영적’이라고 판정해서는 안 됩니다. AC.100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말하는 것은 이사야에서 같은 것에 관하여 두 표현이 끊임없이 나타나며 그중 하나가 천적인 것을, 다른 하나가 영적인 것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표현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는 실제 말씀의 문맥과 스베덴보리가 밝히는 속뜻을 따라 확인해야 합니다. 이것을 독자가 마음대로 적용할 수 있는 기계적인 해석 공식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구별이 중요할까요? 그것은 말씀의 속뜻에서 사랑과 이해, 선과 진리,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서로 결합되어 있으면서도 구별되기 때문입니다. AC.100의 이사야 인용에서도 ‘광야’와 ‘사막’, ‘기쁨’과 ‘즐거움’, ‘감사함’과 ‘노랫소리’가 하나의 회복을 함께 묘사하지만, 스베덴보리는 그 안에서 사랑에 관계되는 것과 이해에 속한 것을 구별합니다. 그리고 앞의 것은 ‘에덴’에, 뒤의 것은 ‘동산’에 관계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AC.100은 단순히 ‘에덴은사랑,동산은지성’이라는 두 단어의 상응을 증명하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말씀에서 서로 나란히 놓인 표현들이 하나의 내용을 풍성하게 말하면서도 그 속에서는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랑에 관계되는 것과 이해에 속한 것이 서로 구별되어 나타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이것이 낯설게 느껴질 수 있지만, 여기서는 우선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반복을 단순한 중복으로만 보지 않고 그 안의 구별과 결합을 함께 읽고 있다는 데까지 이해하면 충분합니다. 이후 AC에서 이러한 병행 표현들이 다시 나타날 때마다 실제 본문 안에서 그 원리가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하나씩 확인해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AC.100심화1)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창2:8)
AC.99
영적인간에게서생명,곧생명의질서는이러합니다.주님께서는신앙을통하여그의이해와이성과기억지식에속한것들[intellectualia, rationalia, etscientifica]안으로흘러드시지만,그의겉사람이속사람과싸우기때문에지성이주님으로부터흘러드는것이아니라마치사람자신에게서기억지식과이성을통하여[perscientificaetrationalia]나오는것처럼보입니다.그러나천적인간의생명,곧생명의질서는이러합니다.주님께서는사랑과사랑에서나오는신앙을통하여그의이해와이성과기억지식에속한것들안으로흘러드시며,속사람과겉사람사이에싸움이없으므로그는실제로그러하다는것을퍼셉션합니다.이와같이지금까지영적인간에게서뒤집혀있던질서가이제천적인간에게서회복된것으로묘사되며,이질서,곧이사람을‘동쪽에덴에있는동산’(gardeninEdenintheeast)이라합니다. 가장높은뜻에서‘여호와하나님이동쪽에덴에심으신동산’(gardenplantedbyJehovahGodinEdenintheeast)은주님자신입니다.가장내적인뜻,곧보편적인뜻에서는주님의나라와,사람이천적인간이되었을때놓이는천국입니다.그때사람의상태는천국의천사들과함께있으며마치그들가운데하나인것과같습니다.사람은이세상에살면서동시에천국에도있을수있도록창조되었기때문입니다.이상태에서는그의모든생각과생각의관념들,심지어그의말과행동까지도열려있으며,참으로주님으로부터열려있고,그안에천적이고영적인것을담고있습니다.이모든것하나하나안에주님의생명이있으며,그생명으로말미암아그는퍼셉션을가질수있기때문입니다.Life,or the order of life,with the spiritual man,is such that although the Lord flows in,through faith,into the things of his understanding,reason,and memory[in ejus intellectualia,rationalia,et scientifica],yet as his external man fights against his internal man,it appears as if intelligence did not flow in from the Lord,but from the man himself,through the things of memory and reason[per scientifica et rationalia].But the life,or order of life,of the celestial man,is such that the Lord flows in through love and the faith of love into the things of his understanding,reason,and memory,and as there is no combat between the internal and the external man,he perceives that this is really so.Thus the order which up to this point had been inverted with the spiritual man is now described as restored with the celestial man,and this order,or man,is called a“gardeninEdenintheeast.”In the supreme sense,the“gardenplantedbyJehovahGodinEdenintheeast”is the Lord himself.In the inmost sense,which is also the universal sense,it is the Lord’s kingdom,and the heaven in which man is placed when he has become celestial.His state then is such that he is with the angels in heaven,and is as it were one among them;for man has been so created that while living in this world he may at the same time be in heaven.In this state all his thoughts and ideas of thoughts,and even his words and actions,are open,even from the Lord,and contain within them what is celestial and spiritual;for each one[of these]has the Lord’s life within it,which enables him to have perception.
해설
AC.99는 앞의 AC.98에서 ‘동쪽에덴동산’이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흘러드는 천적 인간의 지성을 뜻한다고 한 이유를,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생명의질서’를 비교하여 설명합니다. 두 사람 모두 생명의 근원은 주님입니다. 차이는 주님께서 흘러드시느냐 아니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유입이 어떤 질서 안에서 이루어지며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퍼셉션하는가에 있습니다.
영적 인간에게도 주님께서는 신앙을 통하여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드십니다. 그러나 이때에는 겉 사람이 아직 속 사람과 싸우고 있기 때문에 실제 질서가 그대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성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기 자신에게서 기억지식과 이성을 통하여 생겨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기서 ‘뒤집혀있던질서’라는 말은 주님께서 실제로 유입하지 않으신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이 그 유입의 참된 질서를 그대로 퍼셉션하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는 이 질서가 회복됩니다. 주님께서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통하여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드시고,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의 싸움도 그쳤기 때문에 사람은 자신의 지성과 생명이 실제로 어디에서 오는지를 퍼셉션합니다. 이것은 AC.91에서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하면 싸움이 그치고 평온이 뒤따른다고 한 것과도 연결됩니다. 천적 인간에게 이성과 기억지식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통하여 흘러드는 생명의 질서 안에 놓이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회복된 질서, 더 정확히는 이러한 질서 안에 있는 사람을 ‘동쪽에덴에있는동산’이라 합니다. 그리고 그 뜻을 한 사람의 거듭남에만 한정하지 않습니다. 가장 높은 뜻에서는 ‘여호와하나님이동쪽에덴에심으신동산’이 주님 자신이며, 가장 내적인 뜻이면서 동시에 보편적인 뜻에서는 주님의 나라와 천국을 뜻합니다. 천적 인간이 된 사람은 이 세상에 살면서도 천국의 천사들과 함께 있으며 마치 그들 가운데 하나인 것과 같은 상태에 놓입니다. 사람은 본래 이 세상에 살면서 동시에 천국에도 있을 수 있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부분은 그러한 사람의 삶 전체가 어떤 질서 안에 놓이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의 생각과 생각의 관념들뿐 아니라 말과 행동까지 열려 있으며, 그 안에는 천적이고 영적인 것이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그의 내면에 어떤 특별한 종교적 생각이 더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그 모든 것 하나하나 안에 ‘주님의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생명으로 말미암아 천적 인간은 자신의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퍼셉션합니다. 따라서 ‘동쪽에덴동산’은 아름다운 영적 상태를 가리키는 데서 그치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통하여 생명이 흘러들고 그 질서가 사람의 이해와 이성, 기억지식, 생각과 말과 행동에까지 이어지는 천적 인간의 온전한 생명의 질서를 나타냅니다. (AC.99해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And Jehovah God planted a garden eastward in Eden, and there he put the man whom he had formed.(창2:8)
AC.98
‘동산’(garden)은지성을뜻하고,‘에덴’(Eden)은사랑을,‘동쪽’(east)은주님을뜻합니다.그러므로‘동쪽에덴동산’(gardenofEdeneastward)은천적인간의지성을뜻하는데,이지성은사랑을통하여주님으로부터흘러듭니다. By a“garden”is signified intelligence;by“Eden,”love;by the“east,”the Lord;consequently by the“gardenofEdeneastward”is signified the intelligence of the celestial man,which flows in from the Lord through love.
해설
AC.98은 창2:8의 ‘동쪽에덴에동산을창설하시고’라는 말씀을 이루는 세 표현, 곧 ‘동산’, ‘에덴’, ‘동쪽’의 속뜻을 먼저 밝힙니다. ‘동산’은 지성을, ‘에덴’은 사랑을, ‘동쪽’은 주님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를 하나로 모으면 ‘동쪽에덴동산’은 천적 인간의 지성을 뜻합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지성의 근원과 질서입니다. 천적 인간의 지성은 그 사람 자신에게서 독립적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통하여주님으로부터흘러듭니다.’ 앞에서 천적 인간은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되 사랑이 주된 것이 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AC.83). 따라서 여기서도 지성이 사랑과 분리되어 홀로 앞서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흘러드는 것으로 설명됩니다.
이 점은 앞의 AC.90-93에서 살펴본 질서와도 이어집니다. 천적 인간에게서 겉 사람은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며,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생명과 평온을 받아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을 산출합니다. 이제 ‘에덴동산’에서는 그 질서의 더 깊은 중심이 드러납니다. 천적 인간의 지성은 자기 자신의 지성을 독립적으로 세우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통하여 생명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에덴동산’을 단순히 지성이 풍성한 상태라고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 지성의 중심에는 ‘에덴’, 곧 사랑이 있고, 그 사랑의 근원에는 ‘동쪽’, 곧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에게서 사랑을 통하여 흘러드는 지성, 이것이 AC.98이 ‘동쪽에덴동산’이라는 말씀 안에서 보여 주는 천적 인간의 질서입니다. (AC.98해설)
천적인간은그러한동산입니다.그러나그동산은주님의것이므로,이사람은이모든것을누리는것은허락되지만,그것들을자기것으로소유해서는안됩니다.(15절)The celestial man is such a garden.But as the garden is the Lord’s,it is permitted this man to enjoy all these things,and yet not to possess them as his own(verse 15).
여호와하나님이그사람을이끌어에덴동산에두어그것을경작하며지키게하시고(15절)
해설
AC.79는 앞에서 묘사한 에덴동산을 천적 인간 자신과 연결합니다. AC.77에서는 그의 지성이 동쪽에 있는 에덴동산으로 묘사되고, 그 안의 나무들은 진리와 선에 대한 퍼셉션이며, 생명나무와 지식의 나무는 사랑과 신앙을 뜻한다고 했습니다. AC.78에서는 동산의 강이 지혜이고, 그 지혜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에게 속한 여러 것이 나온다고 했습니다. 이제 AC.79는 이 모든 것을 종합하여 ‘천적인간은그러한동산’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에덴동산은 천적 인간과 무관한 외부의 장소로만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지성과 지혜와 그 안에 있는 선과 진리의 질서를 함께 보여 주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곧바로 ‘그동산은주님의것’이라고 합니다. 천적 인간이 동산이라고 하면서도 그 동산의 소유권을 인간에게 돌리지 않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퍼셉션, 사랑과 신앙, 지혜, 선과 진리, 앎, 이성, 기억지식 등은 모두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것들이지만, 그 근원을 사람 자신에게 둘 수는 없습니다. AC.78에서도 이 모든 것이 지혜에서 나오며 그 지혜는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서 나온다고 했는데, AC.79는 이제 그 질서를 ‘그동산은주님의것’이라는 말로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따라서 ‘누리는것’과 ‘자기것으로소유하는것’의 구별이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것을 사람이 실제로 누린다는 사실은 부정되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지혜와 지성,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가 실제로 있으며, 그는 그것들 안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자기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처럼 자기 것으로 소유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아무것도 없으므로 아무것도 생각하거나 행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는 선하고 참된 것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지 않는 질서와 관계됩니다.
AC.79는 아직 이 문제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특히 ‘자기것으로소유한다’는 것이 정확히 무엇이며, 인간에게 자기 자신의 것으로 보이는 것과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의 관계가 어떠한지는 뒤에서 더 깊이 다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후대의 ‘proprium’교리를 모두 앞당겨 넣기보다, 천적 인간이 모든 것을 풍성하게 누리면서도 그것을 자기에게서 나온 자기 소유로 삼지 않는다는 기본 질서를 먼저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천적 인간이 에덴동산이라는 말과 그 동산은 주님의 것이라는 말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질서 안에서 함께 성립합니다. (AC.79해설)
그다음그의지성은동쪽에있는에덴동산으로묘사됩니다.그동산에서보기에아름다운나무들은진리에대한퍼셉션이고,먹기에좋은나무들은선에대한퍼셉션입니다.생명나무는사랑을뜻하고,지식[scientiae]의나무는신앙을뜻합니다.(8-9절)Afterwards his intelligence is described by the garden in Eden,in the east;in which the trees pleasant to the sight are perceptions of truth,and the trees good for food are perceptions of good. Love is meant by the tree of lives,faith by the tree of knowledge[scientiae](verses 8–9).
AC.77은 천적 인간의 ‘지성’이 어떻게 묘사되는지를 개요로 보여 줍니다. AC.75에서는 그의 기억지식과 이성을, AC.76에서는 그의 생명을 다루었고, 이제 그의 지성은 ‘동쪽에있는에덴동산’으로 묘사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에덴동산은 이 문맥에서 단순히 아름다운 장소를 가리키는 데 그치지 않고, 천적 인간의 지성과 관계되는 모습으로 제시됩니다. 다만 왜 ‘에덴’이고 왜 ‘동쪽’인지까지 AC.77이 설명하는 것은 아니므로, 그 구체적인 속뜻은 뒤따르는 해설을 기다려야 합니다.
동산 안의 나무들도 구별됩니다. ‘보기에아름다운나무들’은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고, ‘먹기에좋은나무들’은 선에 대한 퍼셉션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단순히 진리와 선의 ‘지식’을 말하지 않고 ‘퍼셉션’을 말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이 개요만 가지고 퍼셉션의 성격을 모두 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은 천적 인간의 지성 안에 진리와 선에 대한 퍼셉션이 있으며, 창2:9의 서로 다른 나무들이 그것을 묘사한다는 사실을 먼저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그 가운데 특별히 두 나무가 언급됩니다. 생명나무는 사랑을 뜻하고, 지식의 나무는 신앙을 뜻합니다. 이 대목은 이후 창2와 창3을 읽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특히 ‘지식의나무’ 자체를 처음부터 악한 것으로 규정해서는 안 됩니다. AC.77에서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분명히 ‘신앙’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후 지식의 나무와 관련하여 문제가 생길 때에는 신앙 자체가 악하기 때문이라고 단순화할 것이 아니라, 사랑과 신앙이 어떤 질서와 관계 안에 놓이는지가 어떻게 설명되는지를 따라가야 합니다.
AC.77은 이처럼 천적 인간의 지성을 하나의 동산으로, 그 안의 나무들을 진리와 선에 대한 퍼셉션으로, 그리고 그 중심적인 두 나무를 사랑과 신앙으로 제시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 창2:8-9의 상세 해설이 아니라 개요입니다. 그러므로 에덴, 동쪽, 나무, 보는 것, 먹는 것, 생명나무와 지식의 나무를 각각 고정된 상응표처럼 미리 완성하기보다, 지금은 이 모든 것이 천적 인간의 지성 안에서 서로 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전체 그림을 붙들고 뒤따르는 설명을 기다리는 것이 좋습니다. (AC.77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