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97 심화

1. 태고교회 사람들은 어떻게 사랑과 신앙의 상태를 ‘호흡의 상태’로 퍼셉션했는가?

 

AC.97에서 가장 놀라운 대목은 태고교회 사람들이 ‘사랑과 신앙의 상태들을 호흡의 상태들로 퍼셉션했다’는 말입니다. 오늘날의 독자라면 자연스럽게 ‘그것이 도대체 어떤 호흡이었는가?’라고 묻게 됩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질문 앞에서 스베덴보리 자신이 멈춥니다. 그는 ‘이 호흡에 관해서는 아직 아무것도 말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에는 그러한 것들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라고 합니다. 따라서 AC.97을 충실하게 읽으려면 먼저 이 한계를 그대로 인정해야 합니다. 이 번호만으로 태고교회 사람들이 어떤 속도나 방식으로 호흡했는지, 특정한 사랑이나 신앙의 상태에 어떤 호흡이 대응했는지를 재구성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이것을 오늘날의 명상 호흡법이나 복식호흡, 호흡 훈련 같은 것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AC.97은 태고교회 사람들이 어떤 호흡법을 훈련하여 영적 상태에 들어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방향은 반대에 가깝습니다. 그들의 사랑과 신앙의 상태와 호흡의 상태가 서로 연결되어 있었고, 그들은 그것을 퍼셉션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호흡은 영적 상태를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는 기술로 제시되지 않습니다.

 

이 점은 지금까지 태고교회의 퍼셉션에 관하여 읽어 온 내용과도 어울립니다. 그들의 퍼셉션은 오늘날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막연한 직감이나 감정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인 퍼셉션과 관련됩니다. 따라서 호흡의 상태를 퍼셉션했다는 말도 단순히 자신의 몸 상태를 예민하게 관찰했다는 뜻으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호흡이 그들의 후손들에게서 점차 변화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태고교회의 독특한 내적 상태가 후대로 그대로 보존되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오늘날 이 땅에서는 더 이상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하지만 ‘다른 삶에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안다고 덧붙입니다. 따라서 이 호흡은 스베덴보리에게 단순한 고대인의 생리적 습관이 아니라 인간의 영적 상태와 관련된 현상이었습니다.

 

그렇다면 AC.97에서 우리가 확실히 붙들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첫째,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사랑과 신앙의 상태와 호흡의 상태 사이에 실제적인 관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 관계는 오늘날에는 알려져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셋째, 따라서 그것을 현대적인 호흡법으로 재현하거나 추측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넷째, 바로 이러한 배경 때문에 고대인들과 말씀에서 영 또는 생명이 ‘바람’과 ‘숨’으로 표현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대목의 가치는 잃어버린 태고교회의 호흡법을 복원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영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이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것보다 훨씬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엿보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왜 창2:7의 ‘생명의 숨’이 단순한 시적 표현이 아니라 그들에게 실제적인 의미를 가진 표현이었는지를 이해하게 합니다. 그 이상의 구체적인 내용은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밝히지 않은 만큼 우리도 여기서는 밝히지 않는 것이 맞습니다. (AC.97 심화 1)

 

 

 

AC.97, 창2:7, '호흡과 숨이 생명을 뜻하는 이유, 태고교회의 퍼셉션'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2:7) AC.97생명을 ‘숨을 내쉼’(breathing)과 ‘숨’(breath)으로 묘사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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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2 심화

1. ‘신앙과 체어리티의 소멸은 왜 신성모독인가?’

 

AC.432를 처음 읽는 독자에게 가장 낯설게 다가올 수 있는 말은 ‘신성모독’입니다. 우리는 흔히 신성모독을 하나님을 욕하거나 거룩한 것을 조롱하는 말과 행동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을 소멸시키는 일을 신성모독이라고 부릅니다. 더 나아가 그 신앙을 통해 태어나야 할 체어리티까지 소멸시키는 일을 훨씬 더 큰 신성모독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신성모독은 무엇과 관련되어 있는 것일까요?

 

먼저 이번 번호의 대상은 교회 안에 있던 신앙과 체어리티입니다. 앞의 AC.429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신앙을, ‘어린아이’가 체어리티를 나타낸다고 설명했습니다. 라멕이 이 둘을 죽였다는 말은 그들이 신앙과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의 신성모독은 단순히 입으로 거룩한 것을 비난하는 행위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 있던 거룩한 것들이 소멸되는 상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점을 이해하려면 ‘신앙을 소멸시켰다’는 말과 ‘신앙이 약해졌다’는 말을 구별해야 합니다. 말씀을 이해하지 못해 질문하거나, 의심과 혼란을 겪거나, 자신의 신앙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일이 곧 이번 번호의 신성모독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라멕이 나타내는 황폐의 상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사람을 죽였다’고 한 표현이 신앙의 소멸을 뜻한다고 밝힌 것도 같은 문맥입니다. 그러므로 독자가 자신의 일시적인 연약함을 곧바로 신성모독으로 판단하는 것은 이번 번호의 설명을 넘어섭니다.

 

그렇다면 체어리티의 소멸은 왜 ‘훨씬 더 큰’ 신성모독일까요? AC.432는 그 이유를 길게 논증하지 않지만, ‘신앙을 통해 태어나야 할 체어리티’라는 표현으로 중요한 관계를 보여 줍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서로 무관하게 놓여 있는 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소멸된 데 이어, 그 신앙을 통해 태어나야 할 체어리티까지 소멸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신앙의 소멸이 그 신앙과 연결된 사랑의 소멸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여기서 체어리티를 단순히 착한 일을 많이 하는 것과 동일시하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AC.430에서 스베덴보리는 참된 체어리티가 참된 순진무구와 분리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라멕이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말에는 체어리티의 소멸이라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번 번호에서 그것을 훨씬 더 큰 신성모독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이해하려면, 앞에서 밝혀 온 체어리티의 의미를 함께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신성모독’이라는 말이 등장한다고 해서 우리가 다른 사람의 영적 상태를 쉽게 판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교리에 동의하지 않거나 사랑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가 라멕처럼 신앙과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AC.432는 말씀의 속뜻에서 라멕이 나타내는 상태를 설명하는 번호입니다. 특정한 사람의 내면과 최종적인 영적 상태를 판정하는 기준으로 이 한 번호를 사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결국 AC.432에서 신성모독은 교회 안에 있던 신앙과 그 신앙을 통해 태어나야 할 체어리티가 소멸된 상태와 관련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을 소멸시키는 일을 신성모독이라고, 체어리티까지 소멸시키는 일을 훨씬 더 큰 신성모독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말씀은 신앙을 단지 보존해야 할 지식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그 신앙과 연결된 체어리티까지 함께 살펴보게 합니다. (AC.432 심화 1)

 

 

 

AC.432 심화 2, ‘일흔일곱 배의 보복은 주님의 분노를 뜻하는가?’

AC.432 심화2. ‘일흔일곱 배의 보복은 주님의 분노를 뜻하는가?’ 창4:24에서 라멕은 가인을 위한 벌이 일곱 배라면 자신을 위한 벌은 일흔일곱 배라고 말합니다. 문자적으로 읽으면 가인보다 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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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2, 창4:24, ‘라멕의 일흔일곱 배 보복은 무엇을 뜻하는가?’ (AC.432-433)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If Cain shall be avenged sevenfold, truly Lamech seventy and sevenfold. (창4:24) AC.432 이 말씀은 그들이 ‘가인’(Cain)이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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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9 심화

1. 왜 제사장 위임식이 끝난 다음 날을 ‘여덟째 날’이라고 했을까?

 

레9은 단순히 ‘다음 날’이라고 하지 않고 굳이 ‘여덟째 날에’라고 시작합니다. 앞 장에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이레 동안 회막 문에 머물며 위임식을 완성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이 표현은 더욱 눈에 들어옵니다. 일곱 날이 끝나고 여덟째 날이 시작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스베덴보리의 직접적인 설명이 있습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9228(출22:30)은 ‘일곱’이 완전한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에 제사장 위임이 이레 동안 계속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여덟째 날’은 ‘그 다음 상태의 첫 단계’를 의미한다고 밝힙니다.

 

따라서 여덟째 날은 단순히 숫자 8의 신비한 힘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핵심은 ‘일곱이 완성된 뒤에 오는 새로운 시작’입니다. 한 상태가 충만하게 완성되고 그 다음 상태가 열리는 것입니다.

 

레8과 레9의 관계가 정확히 그렇습니다. 레8에서 아론은 준비됩니다. 씻고, 옷을 입고, 기름 부음을 받고, 피를 바르고, 손에 제물을 받고, 이레 동안 회막 문에 머뭅니다. 그러나 레9의 여덟째 날이 되자 그 모든 준비가 실제 쓰임으로 전환됩니다. 아론이 직접 제단에 나아가 제사를 드리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거듭남을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어떤 상태를 충분히 형성하신 뒤 새로운 상태를 여십니다. 진리를 배우는 시간이 있고 그 진리를 실제 삶에서 행해야 하는 시간이 옵니다. 악을 깨닫는 시간이 있고 그것을 실제로 끊어 내야 하는 시간이 옵니다. 준비가 영원히 준비로만 남아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영적 삶에는 ‘일곱째 날’도 필요하고 ‘여덟째 날’도 필요합니다. 충분히 머물고 배우고 형성되는 시간이 필요하지만, 어느 순간에는 받은 것을 가지고 밖으로 나가 쓰임을 행해야 합니다. 계속 배우기만 하면서 살아가지 않는다면 준비는 목적을 잃습니다.

 

반대로 여덟째 날을 너무 빨리 만들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레8의 이레를 건너뛰고 곧바로 레9의 사역으로 뛰어갈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내면을 준비하시고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상태를 형성하시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충만함 없는 활동은 쉽게 proprium의 열심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레9의 ‘여덟째 날’은 거듭남에서 매우 희망적인 표현입니다. 주님께서 한 상태를 완성하시면 거기서 끝내지 않으십니다. 완성은 다음 상태의 시작이 됩니다. 정결은 쓰임으로, 배움은 삶으로, 준비는 봉사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바로 그 새로운 상태에서 레9의 약속,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나타나실 것임이니라’가 시작됩니다. (SWC.레9 심화 1)

 

 

 

SWC.레9 심화2, ‘왜 아론은 백성을 위한 제사보다 자기 속죄제를 먼저 드려야 했을까?’

SWC.레9 심화2. ‘왜 아론은 백성을 위한 제사보다 자기 속죄제를 먼저 드려야 했을까?’ 아론은 이미 레8에서 제사장으로 위임되었습니다. 물로 씻었고 거룩한 옷을 입었으며 관유를 받았고, 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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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레9,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나타나실 것임이니라 - 거듭남이 쓰임이 되고 주님의 영광이

※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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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7 심화

2. ‘왜 감사제는 그날 먹고 서원제와 자원제는 이튿날까지 먹었을까?’

 

레7의 화목제에는 아주 미묘한 시간 차이가 있습니다. 감사함으로 드린 화목제의 고기는 반드시 그날 먹어야 하며 아침까지 남겨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서원이나 자원으로 드린 화목제는 그날뿐 아니라 이튿날에도 먹을 수 있습니다. 본문이 의도적으로 두 경우를 구별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감사는 하루이고 서원과 자원은 이틀일까요? 이것 역시 현재 확인된 스베덴보리의 1차 원전에서 레7:15-16의 차이를 직접 풀어 주는 강한 대목은 찾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첫째 날은 정확히 무엇, 둘째 날은 정확히 무엇’이라고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상응 원리에서는 중요한 방향을 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날’은 단순한 24시간보다 상태를 나타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제물을 먹을 수 있는 날의 차이도 단순한 식품 보관 규정 이상의 대표적 의미가 있었다고 보는 것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특히 감사는 이미 받은 선을 즉시 주님께 돌려드리는 응답입니다. 어떤 은혜를 경험하고 그 선의 근원이 주님임을 바로 인정하는 상태입니다. 그런 감사는 살아 있는 현재의 상태입니다. 어제 받은 감사를 저장해 두었다가 오늘 자기 공로처럼 꺼내 쓰는 것이 아닙니다.

 

서원과 자원에는 인간의 의지와 약속이라는 요소가 조금 더 들어옵니다. 서원은 앞으로 행할 것을 약속한 뒤 이루어진 상태와 관련되고, 자원제는 인간이 자유롭게 드리는 응답과 관련됩니다. 따라서 감사제와 정확히 같은 시간 규정을 갖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 세 종류의 화목제가 서로 다른 영적 상태를 표상했음을 보여 줍니다.

 

다만 여기서 ‘감사제는 더 높고 서원제는 더 낮다’는 식으로 순위를 매길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인간의 다양한 선한 상태를 하나의 획일적인 방식으로 다루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즉각 솟아나는 감사도 있고, 약속을 지키는 신실함도 있으며, 자유롭게 선을 선택하는 기쁨도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경우에 공통된 한계가 있습니다. 셋째 날까지는 갈 수 없습니다. 아무리 거룩한 선이라도 인간이 그것을 붙잡아 proprium의 소유로 만들기 시작하면 처음의 살아 있는 교통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화목제의 선은 살아 있는 상태에서 받아들여지고 누려져야 합니다.

 

따라서 레7:15-16은 거듭남이 ‘한 번 받은 은혜를 저장하여 평생 소비하는 삶’이 아님을 생각하게 합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은 언제나 살아 있으며 인간도 날마다 새롭게 그것을 받아야 합니다. 감사든 서원이든 자원이든, 중요한 것은 주님의 선이 현재의 삶 안에서 살아 있는 선이 되는 것입니다. (SWC.레7 심화 2)

 

 

 

SW.레7 심화3, ‘왜 화목제 고기는 셋째 날에는 가증한 것이 되었을까?’

SW.레7 심화3. ‘왜 화목제 고기는 셋째 날에는 가증한 것이 되었을까?’ 레7:17-18은 매우 강한 말씀입니다. 화목제 고기가 셋째 날까지 남으면 불살라야 하고, 만일 셋째 날에 그것을 먹으면 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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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레7 심화1, ‘왜 감사의 화목제에는 무교병과 유교병이 함께 있었을까?’

SW.레7 심화1. ‘왜 감사의 화목제에는 무교병과 유교병이 함께 있었을까?’ 레7:12-13은 레2를 읽은 사람에게 아주 뜻밖의 장면입니다. 감사의 화목제에는 기름 섞은 무교병과 기름 바른 무교전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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