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38 심화

2. 주님께서는 왜 ‘가인의 분리’를 처음부터 막지 않으셨을까?

 

AC.338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질문이 있습니다. 태고교회 안에서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따로 떼어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보기 시작했을 때, 주님께서는 이미 그 분리가 장차 어디까지 갈 것인지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실제로 창4의 흐름을 따라가면 신앙은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고, 마침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곧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상태에까지 이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왜 그 분리가 처음 나타났을 때 강제로라도 막지 않으셨을까요?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주님께서 그것을 ‘방치’하신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섭리 이해에서 주님은 인간이 악과 거짓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무관심하게 바라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선으로 이끄시고 악을 억제하시며, 사람이 돌이킬 수 있도록 진리를 공급하십니다. 다만 그 모든 일을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지 않는 방식으로 행하십니다.

 

따라서 ‘왜 막지 않으셨는가?’라는 질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를 없애는 방식으로 막지 않으셨다’고 대답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인간이 주님과 결합하려면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자유롭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강제로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사람의 행동을 외적으로 통제할 수는 있어도 그 사람으로 하여금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만일 인간이 잘못된 선택을 전혀 할 수 없도록 의지와 사고가 강제된다면, 겉으로는 질서 있는 행동이 나타날지 몰라도 자유로운 사랑의 결합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허용’의 원리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악을 허용하신다는 것은 악을 원하시거나 승인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는 가운데 그 자유가 잘못 사용되는 것까지 허용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허용’과 ‘방치’는 전혀 다릅니다. 방치는 인간을 내버려 두는 것이지만, 주님의 허용 안에는 끊임없는 억제와 인도와 보존이 함께 있습니다. 사람이 악으로 기울 때에도 주님께서는 그 악이 가능한 한 더 멀리 진행되지 않도록 억제하시고, 남아 있는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며, 다시 돌아설 수 있는 길을 계속 마련하십니다. 창4의 가인 이야기에서도 주님께서는 가만히 계시지 않습니다. 가인이 분하여 안색이 변했을 때 주님께서는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가인이 더 멀리 나아가기 전에 다시 선으로 돌아오도록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AC.328에 따르면 체어리티는 신앙이 자신을 주된 것으로 삼아 체어리티보다 높아지지만 않는다면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은 ‘신앙을 버려라’는 뜻이 아니라, 신앙이 다시 선과 체어리티와 올바른 관계 안에 놓이도록 부르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마지막 선택을 강제로 빼앗지 않으십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지 못하도록 그의 내면을 강제로 조종하시거나 다른 생각밖에는 할 수 없도록 만드시지 않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자유가 거듭남과 결합에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선을 보여 주시고 진리로 깨우치시며, 악을 억제하시고 내적으로 경고하시며, 돌아올 길을 열어 두십니다. 그러나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마지막 자리까지 대신 차지하지는 않으십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이 자유를 잘못 사용한다고 해서 주님의 섭리가 실패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가인은 결국 아벨을 죽이고, 속뜻에서는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킵니다. 인간 편에서 보면 매우 깊은 실패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뒤 주님께서는 가인에게 표를 주십니다. AC.330은 장차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질 것이기 때문에 신앙에 속한 것이 보존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보존된 것은 분리된 신앙의 잘못된 상태 자체가 승인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장차 선한 목적에 사용하실 수 있는 신앙에 속한 것을 보존하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섭리가 인간의 방식과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 줍니다. 우리는 어떤 것이 잘못되면 그것을 통째로 없애 버리고 싶어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인간이 왜곡한 것 가운데에서도 장차 구원의 질서 안에서 사용될 수 있는 것을 보존하십니다. 가인으로 표상되는 분리된 신앙은 잘못되었지만 신앙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그것을 사랑에서 떼어 냈지만 주님께서는 신앙이라는 수단 자체를 버리지 않으시고, 이후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될 수 있도록 보존하십니다.

 

이 점은 바로 뒤의 셋과 에노스에서도 보게 됩니다. AC.335에서는 주님께서 새로운 신앙을 주시고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심으셨다고 합니다. 따라서 인간이 신앙을 잘못 사용했다고 해서 주님께서 신앙 자체를 폐기하신 것이 아닙니다. 더 넓은 이후의 AC 문맥에서는 태고교회의 종말 가운데에서도 주님께서 리메인스를 보존하시고, 마침내 노아로 표상되는 새로운 교회가 일어나도록 준비하시는 흐름도 나타납니다. 다만 이것은 AC.338 한 번호가 직접 말하는 내용이라기보다 이후 AC에서 더 넓게 전개되는 섭리의 맥락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실패와 주님의 섭리는 동시에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은 자유를 오용하여 사랑과 신앙의 질서를 깨뜨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자유를 빼앗지 않으면서도 가능한 한 악을 억제하시고,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며, 새로운 회복의 길을 준비하십니다.

 

‘왜 주님께서는 가인의 분리를 처음부터 막지 않으셨는가?’라는 질문은 결국 ‘왜 인간에게 잘못 선택할 수 있는 자유까지 허용하셨는가?’라는 더 깊은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자유가 주님과의 결합에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다만 ‘자유롭게 사랑하려면 반드시 실제로 악을 행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자유란 악을 행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라는 뜻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인간이 강제가 아니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악을 선택할 가능성은 자유의 오용에서 따라오는 것이지 주님께서 원하시는 목적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의 섭리는 인간이 한 번도 잘못 선택하지 못하도록 모든 길을 차단하는 방식으로 역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유와 이성을 보존하면서 선으로 이끄시고, 악을 억제하시며, 잘못 선택했을 때에도 가능한 한 회개의 길을 열어 두십니다. 이것이 ‘허용’과 ‘방치’의 차이입니다. 방치는 인간을 포기하는 것이지만, 섭리는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면서도 한순간도 구원의 목적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이 가인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자유를 억지로 없애지는 않으시지만, 동시에 그가 다시 선으로 돌아설 길도 계속 마련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섭리를 ‘왜 더 강제로 개입하지 않으셨는가?’라는 기준으로만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가장 깊은 섭리는 때로 인간의 자유를 유지하면서 안에서 선을 향해 이끄시고, 인간의 실패 가운데에서도 남아 있는 것을 보존하여 다시 구원의 질서 안에서 사용하시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가인의 이야기는 바로 그것을 보여 줍니다. 인간은 사랑과 신앙을 분리할 수 있지만, 주님께서는 그 분리 자체를 선이라고 하시지 않으면서도 신앙에 속한 것을 보존하시고, 다시 체어리티와 결합될 길을 마련하십니다. 인간의 실패는 실제이지만, 그 실패보다 주님의 섭리가 더 깊습니다.

 

 

 

AC.338, 창4: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AC.338-340)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v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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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8 심화 1, ‘가인’은 처음부터 ‘사랑에서 완전히 분리된 신앙’이었나?

AC.338 심화1. ‘가인’은 처음부터 ‘사랑에서 완전히 분리된 신앙’이었나? AC.338을 읽다 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질문이 생깁니다. 앞의 개요에서 스베덴보리는 가인을 분명히 ‘사랑에서 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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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4 심화

1. 왜 새 교회는 이전 교회의 ‘가장 어두운 때’에 일어나는가?

 

AC.334에서 매우 인상적인 것은 새로운 교회가 이전 교회적 상태가 조금 쇠퇴했을 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모든 것이 소멸되고’ 그것들에 폭력이 가해져 극도의 모독에 이르렀을 때 일어났다는 점입니다. 왜 새로운 교회는 이렇게 이전 상태의 가장 어두운 종말과 맞닿아 나타날까요?

 

먼저 이것을 주님께서 이전 교회를 일부러 타락시키신 뒤 새로운 교회를 세우신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타락과 왜곡은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거절하고 자신의 proprium을 따르는 데서 생깁니다. 주님께서는 선과 진리를 끊임없이 공급하시지만,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면서까지 그것을 받아들이게 하시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한 교회적 상태 안에 아직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남아 있는 동안에는 주님께서 그것을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보존하시고 이끄신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계속해서 선과 진리를 거부하고 왜곡하며, 마침내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에 폭력까지 가하는 상태에 이르면 그 교회적 상태는 더 이상 본래의 교회적 기능을 수행할 수 없게 됩니다.

 

이때 ‘새로운 교회가 일어난다’는 것은 실패한 상태를 강제로 수리하여 원래대로 돌려놓는 것과는 다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면서도 교회의 생명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도록 새로운 교회적 상태를 마련하십니다. 인간의 한 상태가 끝나는 것과 주님의 구원의 섭리가 끝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이 점에서 AC.330의 가인의 표를 다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가인에게 아직 신앙에 속한 것이 있었을 때, 그것은 장차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질 수 있도록 보존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보존은 가인에서 이어지는 모든 상태가 반드시 올바르게 회복될 것이라는 보장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라멕에 이르러 그 계열은 신앙에 속한 것마저 잃고, AC.334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에 폭력을 가하는 상태에까지 이릅니다.

 

그렇다고 주님의 섭리가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바로 그 종말의 때에 아다와 씰라로 의미된 새로운 교회가 일어납니다. 이것은 주님의 섭리가 특정한 한 교리적 계열의 성공에 매여 있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한 상태가 자유의 오용으로 종말에 이를 수 있지만, 구원의 길 자체까지 인간이 소멸시킬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아다와 씰라가 문자적으로 라멕의 아내들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렇다면 새 교회가 라멕의 악에서 생겨난 것인가?’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초기의 가족과 계보는 속뜻에서 교회와 교리의 상태 관계를 표상합니다. 따라서 라멕의 악이 변하여 새 교회가 되었다고 읽기보다, 라멕으로 표상되는 종말의 상태와 새로운 교회의 출현이 말씀의 계보 안에서 함께 묘사된다고 이해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이 새로운 교회가 홍수 이후 노아로 표상되는 고대교회와 같다는 뜻도 아닙니다. 아다와 씰라로 표상되는 교회는 아직 홍수 이전의 문맥 안에 있습니다. 노아의 교회는 이후 태고교회의 종말과 더 큰 거듭남 질서의 전환 속에서 다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교회’라는 표현이 나온다고 해서 모두 동일한 역사적 교회 시대를 가리킨다고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왜 말씀은 새로운 교회의 출현을 굳이 가장 어두운 종말과 함께 묘사할까요? 그것은 인간의 실패와 주님의 섭리를 동시에 보여 주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인간 편에서는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을 정도로 선과 진리를 소멸시키고 모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에도 주님께서는 구원의 길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가장 어두워져야 주님이 역사하신다’는 법칙을 만들자는 뜻도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역사하십니다. 오히려 인간이 그 역사를 받아들이지 않다가 한 상태가 끝에 이르렀을 때, 주님의 섭리가 그 종말 너머에서도 계속되고 있음을 우리가 뒤늦게 보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AC.334의 ‘가장 어두운 때’는 절망의 증거라기보다 인간의 종말이 주님의 종말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는 자리입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이 모두 소멸되고 모독이 극에 이른 상태에서도 주님의 뜻은 변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다시 선과 진리가 결합되고, 체어리티와 신앙이 살아 있는 교회적 상태가 일어날 수 있도록 계속 섭리하십니다.

 

이것이 AC.334가 교회의 종말을 말하면서도 동시에 희망을 품고 있는 이유입니다. 이전 교회의 내적 생명은 끝날 수 있지만, 교회를 향한 주님의 사랑과 섭리는 끝나지 않습니다. 인간이 만든 가장 깊은 어둠보다 주님의 구원의 뜻이 더 멀리 갑니다.

 

 

 

AC.334 심화 2,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에게 폭력을 가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AC.334 심화2.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에게 폭력을 가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AC.334의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모든 것이 소멸되고, 그것들에 폭력이 가해졌다’는 표현은 처음 읽으면 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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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4, 창4:23-24, 신앙과 체어리티가 소멸되고 모독이 극에 이르렀을 때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And Lame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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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2.심화

2. 가인의 표로 신앙을 보존하신 주님의 섭리는 라멕에서 실패한 것인가?

 

AC.330에서는 주님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어 신앙이 침해받지 않도록 보존하셨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도 분명했습니다. 이후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불과 두 번호 뒤인 AC.332에서는 라멕에 이르러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시면서까지 신앙을 보존하신 섭리가 결국 실패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먼저 ‘가인의 표’를 가인 계열 전체가 끝까지 신앙을 잃지 않도록 보장하신 약속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330에서 보존된 것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상태 자체가 아닙니다. 장차 인간을 다시 체어리티로 인도하는 데 필요할 신앙에 속한 것이 완전히 소멸하지 않도록 보존된 것입니다.

 

따라서 ‘보존’은 ‘강제’와 다릅니다. 주님께서 신앙에 속한 것을 보존하셨다고 해서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이 그 신앙을 반드시 올바르게 사용하도록 강제하신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자유 가운데 그 진리를 받아들여 선과 결합할 수도 있고, 계속 분리하고 왜곡하여 마침내 그것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라멕은 바로 그 후자의 길이 끝까지 진행된 상태입니다. 가인에게는 아직 신앙에 속한 것이 있었지만, 그 상태가 계속 체어리티와 분리된 채 여러 형태로 변질되면서 라멕에서는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 이릅니다. 이것은 주님의 섭리가 실패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 특정 교리적 계열이 주님께서 보존하신 가능성을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AC.330과 AC.332는 오히려 인간의 자유와 주님의 섭리가 함께 작용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구원의 길을 보존하시지만 인간에게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이 주님께로 돌아설 수 있는 수단은 마련하시되 그 수단을 어떻게 사용할지는 인간의 자유 가운데 두십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라멕의 상태를 인류 전체의 상태와 동일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AC.332가 말하는 것은 가인으로부터 파생된 그 교리적 계열의 종말입니다. 라멕 안에 신앙에 속한 것이 남지 않았다고 해서 당시 모든 사람에게서 신앙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창4와 창5, 그리고 이후 노아로 이어지는 흐름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후속 AC 전체를 보면 주님의 섭리는 훨씬 더 긴 시야에서 움직입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질서가 마침내 지속될 수 없는 상태에 이를 때 주님께서는 리메인스를 보존하시고, 노아로 표상되는 새로운 교회를 준비하십니다. 그 새로운 영적 교회에서는 이전의 천적 인간과 달리 진리와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로 인도되는 질서가 중심이 됩니다.

 

이런 더 넓은 문맥에서 보면 AC.330의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지게 될 것’이라는 말은 가인 계열 하나의 미래만을 말하는 것으로 좁혀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신앙을 통한 체어리티의 길 자체가 사라지지 않도록 섭리하십니다. 한 특정 계열이 그 가능성을 잃어버려도 주님의 전체적인 구원의 질서가 함께 무너지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가인의 표’와 ‘라멕에서 신앙이 남지 않음’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하나는 주님께서 신앙에 속한 것을 보존하여 구원의 길을 남겨 두시는 섭리를 보여 주고, 다른 하나는 인간이 자유 안에서 그 보존된 것을 끝까지 왜곡하여 잃을 수도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주님의 섭리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원리를 줍니다. 주님의 섭리는 어떤 한 사람이나 한 교회적 계열이 반드시 성공해야만 전체 계획이 이루어지는 방식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시면서도 구원의 길 자체는 계속 보존하십니다. 어떤 교회가 종말에 이르더라도 주님의 교회와 구원의 역사가 함께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라멕은 주님의 계획의 실패를 보여 주는 인물이 아니라 인간이 주어진 가능성을 얼마나 멀리 거절할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반대로 이후 노아를 향해 나아가는 흐름은 인간의 실패보다 더 넓은 주님의 섭리를 보여 줍니다. 한 계열에서 신앙마저 사라질 수 있지만, 주님께서는 리메인스를 보존하시고 다시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로 나아갈 새로운 길을 준비하십니다.

 

 

 

AC.332 심화 3, 라멕에서 신앙이 사라졌는데 아다와 씰라의 계열에서는 왜 유용한 것들이 나타나는

AC.332 심화3. 라멕에서 신앙이 사라졌는데 아다와 씰라의 계열에서는 왜 유용한 것들이 나타나는가? AC.332에서 라멕에 이르러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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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2 심화 1, 왜 ‘분리된 신앙’은 결국 신앙 자체까지 잃게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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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 심화

1. 왜 처음에는 ‘내가 선을 행한다’고 생각하도록 허락하실까?

 

AC.39에서 특히 마음에 오래 남는 문장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자기가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하는 걸 허락하십니다.’

 

처음 이 문장을 읽으면 조금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모든 선과 진리가 오직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 사실이라면, 왜 주님께서는 처음부터 그 사실을 분명히 알게 하지 않으실까요? 왜 사람이 ‘내가 선을 행한다’, ‘내가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허락하실까요?

 

AC.39은 그 이유를 직접 말합니다. 그 단계의 사람은 ‘달리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방법으로는 나중에 모든 선과 진리가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믿고, 마침내 퍼셉션하도록 인도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주님께서 사람을 일부러 속여 ‘네가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라’고 가르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원문이 사용하는 말은 ‘허락하신다’(permit)는 것입니다. 사람은 거듭남의 처음부터 자기 생명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것을 깊이 알고 살아갈 수 있는 상태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가 현재 생각할 수 있는 상태에서부터 출발하도록 허락하시고, 거기서부터 점차 더 깊은 인식으로 이끄십니다.

 

이것은 AC.39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아직 도달하지 못한 영적 상태를 처음부터 완성된 형태로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상태에서부터 거듭남을 시작하게 하십니다.

 

사람은 실제로 ‘내가 공부한다’, ‘내가 선택한다’, ‘내가 선을 행한다’, ‘내가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AC.39은 그런 인간의 활동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이 실제로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하는 가운데, 그 근원에 대한 인식이 점차 달라지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처음에는 ‘내가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사람은 ‘내가 행하는 이 선의 근원은 정말 나 자신인가?’라는 것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모든 참된 선과 진리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것을 먼저 ‘믿게’ 됩니다. AC.39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나중에는 그것을 ‘퍼셉션’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여기에는 중요한 순서가 있습니다. 처음부터 완전한 퍼셉션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한다고 생각하는 상태’에서 출발하여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다고 믿는 상태’를 지나, 마침내 그것을 더욱 내적으로 퍼셉션하는 상태로 나아갑니다. AC.39은 바로 이 과정을 주님께서 허락하시고 이끄신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모든 선은 주님께서 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AC.39의 관심은 인간의 행동을 없애는 데 있지 않고, 그 행동의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알게 하는 데 있습니다. 사람이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선을 행하면서 그것을 자기 고유의 선으로 여기지 않는 데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점은 신앙생활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하시니까 나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면 AC.39이 보여 주는 거듭남의 흐름과 맞지 않습니다. 반대로 ‘내가 노력해서 선한 사람이 되었다’고 모든 것을 자기에게 돌리는 것도 AC.39이 향하는 방향과 다릅니다. 사람은 실제로 배우고 선택하고 행하지만,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그 안에 있는 참된 선과 진리의 근원이 주님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다른 글들에서는 이것이 나중에 ‘마치 자기로부터인 것처럼’ 행한다는 중요한 원리와 더욱 분명하게 연결됩니다. 그러나 AC.39 자체에서는 아직 그 전체 교리를 펼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먼저 주님께서 사람의 현재 상태를 허락하시고, ‘내가 한다’고 생각하는 데서부터 시작하여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믿고 퍼셉션하는 데까지 이끄신다는 사실을 붙드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이렇게 읽으면 ‘허락하신다’는 한 단어가 참 깊게 다가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처음부터 완성된 영적 인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거듭남을 시작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 자기에게서 생각하고 자기에게서 행한다고 여기는 바로 그 상태에서도 시작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씩 이끌어, 마침내 선과 진리의 참된 근원을 알아보게 하십니다.

 

지난 삶을 돌아보면서 ‘그때는 정말 내가 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 안에서도 주님께서 나를 이끌고 계셨던 것은 아닐까?’라는 감사가 생길 수 있습니다. 다만 개별 사건 하나하나에 대해 ‘이것은 주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이다’라고 우리가 섣불리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AC.39이 분명히 말해 주는 것은 더 근본적인 사실입니다. 우리의 거듭남을 시작하시고, 선과 진리의 근원을 자기에게서 찾던 상태에서 그것을 주님에게서 인정하는 상태로 이끄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AC.39의 이 짧은 문장은 인간의 미숙함을 정죄하는 말이라기보다, 그 미숙함 속에서부터 사람을 이끄시는 주님의 자비를 생각하게 합니다. 사람이 아직 ‘내가 한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단계에서도 주님께서는 거듭남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사람은 자기가 선의 근원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선을 행하고, 자기가 진리의 근원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진리를 말하게 됩니다. ‘내가 한다’는 자기 공로에서 ‘주님으로부터 받는다’는 인정으로 옮겨 가는 것, AC.39이 보여 주는 살아남의 과정에는 바로 이러한 깊은 변화가 들어 있습니다.

 

 

 

AC.39, 창1:20, ‘비로소 살아나는 신앙 : 주님이 행하심을 알 때 시작되는 생명’(AC.39-41)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And God said, Let the waters cause to creep forth the creeping thing, the living soul; and let fowl fly above the earth upon the f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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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 심화

1. ‘우리를 자비로 붙들어 주시는 주님’

 

위 AC.35본문, ‘만일 주님께서 그 사람을 자비로 붙들어 주지 않으신다면’(if it were not that the Lord has mercy on him.)말인데요, 우리를 지으신 신(神)이 이런 자비의 신이시라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AC.35 마지막의 ‘만일 주님께서 그 사람을 자비로 붙들어 주지 않으신다면’이라는 말은 짧지만 참으로 큰 위로를 줍니다. 앞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의 이해는 하늘을 향하면서도 의지는 지옥을 향할 수 있으며, 모든 행위에서 실제로 행하는 쪽은 의지이므로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 사람 전체가 지옥으로 곤두박질할 것이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절망적인 문장의 끝에 ‘주님의 자비’가 등장합니다. 인간의 상태에 대한 마지막 말이 인간의 악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인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자비’라고 하면 죄를 지은 사람을 불쌍히 여겨 용서해 주시는 것을 먼저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도 자비에 포함됩니다. 그러나 AC.35의 문맥에서 자비는 조금 더 근본적인 의미로 다가옵니다. 사람이 자기 악한 의지에 따라 끝까지 떨어지도록 버려 두지 않으시는 주님의 자비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주님께서 그 사람을 자비로 붙들어 주지 않으신다면’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인간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매우 엄중한 진단과 주님에 대한 그의 신뢰가 함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인간의 악을 가볍게 보지 않습니다. 사람이 조금 노력하면 자기 힘으로 충분히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의지가 얼마나 깊이 자기 사랑과 악으로 기울 수 있는지를 매우 강하게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자비가 더욱 크게 드러납니다. 사람이 여전히 돌이킬 수 있고, 진리를 들을 수 있고, 선을 향하여 움직일 가능성이 남아 있다는 것 자체가 인간 자신의 힘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붙들어 주신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여기서는 조금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AC.35은 그 작동 방식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어떤 생각이 갑자기 떠오르는 것, 어떤 일이 뜻밖에 막히는 것, 고통이나 시험을 겪는 것 등을 하나하나 가리켜 ‘이것이 바로 그때 주님께서 붙드신 것이다’라고 AC.35만을 근거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섭리와 거듭남에 관한 다른 가르침을 함께 살펴보면 주님의 인도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지만, 이 글에서는 우선 ‘인간이 자기 악에 완전히 내맡겨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붙드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가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자비로 붙드신다고 해서 사람을 강제로 선하게 만드시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여전히 진리를 받아들일 수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으며, 악과 싸울 수도 있고 그것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자비는 인간의 자유를 없애는 방식으로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유 안에서 선과 진리를 향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길을 열어 주시는 자비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점에서 주님의 자비를 ‘공의라면 벌해야 하지만 자비가 그것을 눈감아 주는 것’처럼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주님의 자비는 신적 질서와 반대되는 것이 아닙니다. 악을 악이 아니라고 하거나 거짓을 진리라고 인정해 주시는 것이 자비가 아닙니다. 오히려 악 가운데 있는 사람을 그대로 버리지 않고, 그가 악에서 돌이켜 선을 선택할 수 있도록 구원을 향해 이끄시는 것이 자비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자비는 인간의 악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악에서 건져 내고자 합니다.

 

그래서 AC.35의 이 한마디는 거듭남을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에도 중요한 위로를 줍니다.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다 보면 ‘나는 왜 아직도 이렇지?’, ‘왜 알고 있는 것과 실제 삶이 이렇게 다르지?’ 하고 낙심할 수 있습니다. 특히 AC.35처럼 이해는 하늘을 향하면서 의지는 그 반대 방향으로 갈 수 있다는 말씀을 읽으면 자기 안의 모순이 더욱 크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이 문장의 끝까지 읽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희망이 없다’고 끝내지 않습니다. ‘만일 주님께서 그 사람을 자비로 붙들어 주지 않으신다면’이라고 말합니다. 거꾸로 말하면 우리는 주님의 자비로 붙들려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희망은 우리의 의지가 이미 완전해졌다는 데 있지 않고, 그런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는 주님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을 ‘어차피 주님께서 붙드시니 나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자비를 알수록 우리는 그 자비에 응답하여 악에서 돌아서고, 알고 있는 진리를 실제 삶으로 옮기며, 주님께서 이끄시는 방향을 자유롭게 선택해야 합니다. 자비는 거듭남을 대신해 주는 면허가 아니라 거듭남이 가능하도록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지으신 신이 이런 자비의 신이시라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라는 고백은 AC.35을 읽고 충분히 나올 수 있는 고백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붙들고 계십니다. 우리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사실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주님의 자비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AC.35은 그 자비가 구체적으로 어떤 모든 방식으로 역사하는지를 설명하는 글은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것만큼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인간이 자기 악한 의지의 무게만을 따라 끝없이 떨어지도록 버려져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짧은 한마디 때문에, 인간의 비참한 상태를 그렇게 엄중하게 말한 AC.35도 결국 절망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를 바라보며 끝납니다.

 

 

 

AC.35, 창1:14-17, ‘의지와 이해 : 하나의 생명이냐, 둘로 갈라진 마음이냐'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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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3 심화

1. ‘그때에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신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AC.63의 ‘그때에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신다’는 표현은 처음 읽으면 조금 불편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움직이신다’고 하면 사람이 자기 생각과 의지를 잃고 외부의 힘에 의해 조종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문장을 앞뒤 문맥에서 떼어 내지 않고 읽으면 강조점이 조금 달라집니다. 바로 앞에서는 ‘사랑이 주된 원리가 되어 작용할 때’ 전투가 그친다고 했고, 이어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게 되면’ 그 상태를 ‘심히 좋았더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신다고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가장 먼저 붙들어야 할 것은 ‘움직이신다’보다 ‘그때’입니다. 어떤 때인가 하면 사랑이 주된 원리로 작용하고 신앙이 사랑과 결합한 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사람을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신다는 것은 사랑과 신앙의 결합이라는 거듭남의 문맥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사람이 자기 의지를 잃고 수동적인 도구가 된다는 뜻을 이 문장에 넣을 이유는 없습니다.

 

또 ‘자신의 모양으로’라는 말도 중요합니다. 바로 앞 AC.62는 사람이 여섯째 날에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AC.63은 이제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신다고 합니다. 이것은 거듭난 인간의 생명이 자기 자신에게서 독립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사람은 주님처럼 신적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을 받아 살아가는 가운데 주님의 형상과 모양이 됩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자유는 어떻게 되는가 하는 질문이 남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질문이지만 AC.63 한 문장이 인간의 자유와 주님의 유입에 관한 전체 교리를 설명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의지와 인간의 의지가 완전히 하나가 된다’, ‘이 상태가 인간에게 가능한 최고의 자유이다’ 같은 결론까지 이번 글의 직접적인 뜻으로 확정하기보다, 관련 AC들이 자유와 의지를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함께 보면서 다루는 것이 좋습니다.

 

다만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AC.63은 주님의 역사와 인간의 존재를 서로 없애는 방식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그를’ 움직이십니다. 사람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동시에 그 움직임의 근원이 주님에게 있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문장을 ‘주님이 전부 하시니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수동주의로 읽는 것도, 반대로 ‘결국 인간이 자기 힘으로 선하게 사는 것이다’라고 읽는 것도 본문의 균형을 놓치게 됩니다.

 

처음 AC를 읽는 독자에게는 일상적인 예가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웃을 용서해야 한다는 진리를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미움과 싸우고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 진리와 사랑이 아직 충분히 결합되어 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가운데 진리와 사랑이 결합하고 사랑이 삶의 주된 원리가 된다면, 그가 선을 행하는 생명의 근원은 자기 공로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고 고백하게 됩니다. 다만 이것은 AC.63을 이해하기 위한 예이지,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신다’는 표현의 모든 의미를 이 한 사례로 정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이 표현이 지키고 있는 가장 중요한 진리는 거듭난 생명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 되었다고 해서 이제 스스로 생명의 근원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과 사랑이 결합하고 사랑이 주된 원리가 되어도 생명의 근원은 여전히 주님입니다. 오히려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자기 안의 선이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여기기보다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더 깊이 인정하게 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신다’는 말을 가장 안전하게 이해하면, 신앙과 사랑이 결합한 사람 안에서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 그의 생명을 이끌게 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와 주님의 유입이 정확히 어떻게 하나가 되는지는 이 한 문장보다 훨씬 큰 주제이므로, 이번에는 AC.63이 말하는 범위 안에서 멈추는 것이 좋겠습니다.

 

 

 

AC.63 심화 2,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란 무슨 뜻인가?

AC.63 심화 2,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란 무슨 뜻인가? AC.63은 ‘여섯째 날의 끝에서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 선한 영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앞 AC.59에서는 악한 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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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3, 창1:31, 주님이 싸우시는 거듭남의 전투 : 신앙과 사랑의 결합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1:31) AC.63그동안 주님은 계속해서 인간을 위하여 악과 거짓에 맞서 싸우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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