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C.레2 심화

2. ‘왜 누룩과 꿀은 금하고 소금은 반드시 넣으라 하셨을까?’

 

레위기 2장에서 가장 흥미로운 규정 가운데 하나는 누룩과 꿀은 제단에서 불사르지 못하게 하면서 소금은 모든 소제에 반드시 넣도록 한 것입니다. 특히 꿀까지 금지했다는 것이 뜻밖입니다. 성경에서 꿀은 흔히 좋은 것으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규정을 매우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137(출29:40)은 레2:11-13의 규정을 직접 다루면서 누룩은 ‘악에서 나오는 거짓’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악이 먼저 있고 그 악을 정당화하기 위해 거짓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소제에 누룩을 넣지 않는 것은 주님께 드리는 예배 안에 악에서 나온 거짓이 섞여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꿀은 조금 다릅니다. 꿀은 그 자체로 언제나 악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꿀이 자연적 인간의 즐거움, 외적인 즐거움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문제는 그것이 세상 사랑과 자기 사랑의 즐거움에 오염되어 거룩한 것과 섞이는 경우입니다. AC.5650(창43:11)은 바로 레2:11을 인용하면서 꿀이 세상에서 감각을 통해 오는 외적 즐거움과 관계하기 때문에 소제에서 금지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섬세한 문제입니다. 신앙생활에는 기쁨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에게서 오는 선에는 깊은 기쁨이 있습니다. 문제는 ‘내가 무엇 때문에 기쁜가?’입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아서 기쁜 것인지,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해서 기쁜 것인지, 종교적인 일을 통해 명예나 영향력을 얻어서 기쁜 것인지, 아니면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이웃에게 실제 선이 이루어져서 기쁜 것인지가 다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은 예배와 선행이라도 그 안에 ‘꿀’이 섞일 수 있습니다. 사람의 칭찬을 기대하고 행하는 선, 자기 의를 즐기는 봉사, 인정받지 못하면 금세 낙심하거나 분노하는 헌신이라면 외적인 즐거움이 예배의 동기 속에 깊이 들어와 있을 수 있습니다. 레2는 그런 것을 제단의 불에 올리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누룩과 꿀을 빼라고만 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AC.9207(출22:22)은 레2:13을 직접 인용하면서 소금이 ‘진리가 선을 갈망하고 선이 진리를 갈망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언약의 소금’이라고 부릅니다. 언약은 결합이고, 소금은 그 결합을 향한 갈망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선과 결합하기를 원합니다. 내가 ‘용서해야 한다’는 진리를 참으로 받아들였다면 그 진리는 실제 용서의 선으로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진리를 받아들였다면 그것은 실제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삶으로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반대로 참된 선은 진리를 원합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무엇이 상대방에게 실제로 유익한지 알지 못한다면 선한 의도만으로 잘못된 일을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선은 진리를 통해 형태와 방향을 얻습니다.

 

그래서 소금은 단순히 ‘변하지 않게 보존한다’는 정도를 넘어섭니다. 스베덴보리의 설명에서 소금의 핵심은 ‘결합을 향한 갈망’입니다. 진리와 선이 서로를 바라보며 하나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예물에 있어야 합니다.

 

레2의 이 세 가지를 나란히 놓으면 놀라운 영적 원리가 보입니다. ‘누룩은 빼라. 꿀도 제단의 불에 올리지 말라. 그러나 소금은 절대로 빼지 말라.’ 악에서 나오는 거짓은 버리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물든 외적 즐거움도 예배의 동기로 삼지 말되, 선과 진리가 결합하려는 갈망만은 절대로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와 신앙생활을 돌아보며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내 신앙에는 어떤 누룩이 들어 있는가?’, ‘내가 주님을 섬기면서 은밀히 맛보고 싶은 꿀은 무엇인가?’, 그리고 무엇보다 ‘내게는 소금이 있는가? 내가 아는 진리가 실제 선한 삶이 되기를 간절히 원하는가?’

 

주님께서 찾으시는 소제는 겉으로 화려한 소제가 아닙니다. 거짓이 섞이지 않고, 자기 사랑의 즐거움이 지배하지 않으며, 선과 진리가 서로 결합하기를 갈망하는 소제입니다. 그래서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는 짧은 말씀은 우리의 모든 예배와 삶을 관통하는 명령이 됩니다. (SWC.레2 심화 2)

 

 

 

SW.4 심화 3, ‘왜 소제의 일부만 불사르고 나머지는 제사장이 먹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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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4 심화 1, ‘왜 고운 가루에 기름과 유향을 함께 놓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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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창2:22)

 

AC.152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도 여자가 남자의 갈빗대에서 형성된 것이 아니며, 여기에는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깨닫지 못했던 더 깊은 아르카나가 함축되어 있음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자’(woman)가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한다는 것은 속임을 당한 것이 여자였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을 속이는 것은 오직 그의 proprium, 곧 같은 말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뿐이기 때문입니다. It requires but little attention in anyone to discern that woman was not formed out of the rib of a man, and that deeper arcana are here implied than any person has heretofore been aware of. And that by the “woman” is signified man’s own may be known from the fact that it was the woman who was deceived; for nothing ever deceives man but his own, or what is the same, the love of self and of the world.

 

1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창3:1-6)

 

해설

AC.152는 먼저 창2:21-22의 갈빗대와 여자 이야기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 매우 직접적인 입장을 밝힙니다. 스베덴보리는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도 여자가 실제로 남자의 갈빗대에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별할 수 있으며, 이 말씀 안에는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훨씬 깊은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적어도 AC.152에서 스베덴보리 자신이 말하는 범위에서는 이 장면을 먼저 신체적으로 여성이 만들어진 과정을 기록한 사건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 사람들의 내적 상태에 관한 말씀으로 읽고 있습니다.

 

이것은 앞에서 계속되어 온 해석과 정확히 이어집니다. AC.147에서는 갈빗대가 생명력이 거의 없는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한다고 했고, AC.148-149에서는 뼈와 살의 의미를 통해 그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AC.151에서는 갈빗대가 ‘생명을 얻지 못한 인간의 proprium’을, 여자가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한다고 직접 밝혔습니다. 그러므로 AC.152의 첫 문장은 갑자기 등장하는 주장이 아니라, 지금까지 이어진 속뜻의 설명을 전제로 한 결론입니다. 문자에 나타난 갈빗대와 여자의 장면 안에 인간의 proprium이 어떻게 다루어지고 생명을 얻는가 하는 더 깊은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여자’(woman)가 왜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하는지를 창3의 이야기와 연결합니다. 그 근거는 ‘속임을 당한 것이 여자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창2의 여자와 창3의 여자를 하나의 연속된 내적 의미 안에서 읽고 있다는 뜻입니다. 창2에서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어 인간에게 허락된 proprium이 ‘여자’로 표현되었고, 이후 창3에서는 바로 그 여자가 속임을 당하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연결을 통해 여자가 proprium을 의미한다는 해석을 확증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문장은 매우 조심해서 읽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을 속이는 것은 오직 그의 proprium, 곧 같은 말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뿐’이라고 말합니다. 이 문장만 떼어 놓으면 ‘proprium은 곧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며 언제나 악하다’고 읽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로 앞의 AC.141에서는 천적 인간과 천사에게도 주님께서 proprium을 주시며, 그들의 proprium 안에는 주님의 것들이 있고 그것이 ‘가장 참된 천적인 것 자체’라고 했습니다. AC.151에서도 여자는 단순히 proprium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AC.152의 마지막 문장을 앞의 설명들과 분리하여 proprium 전체에 대한 보편적인 정의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여기서는 ‘속임을 당하는’ 상태에 놓인 인간의 proprium이 문제입니다. 인간이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으로 여기고 자기 자신의 인도 아래 있으려 할 때, proprium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지배 아래 놓일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proprium이 인간을 속입니다. 이것은 AC.146에서 ‘자기 자신의 것을 원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것들이 아무리 분명하게 표상되고 보여도 그것들을 업신여기기 시작한다’고 한 설명과도 이어집니다. 문제의 핵심은 인간에게 proprium이 있다는 사실 자체보다 그것이 어디에서 생명을 받고 무엇의 지배를 받는가에 있습니다.

 

이 점에서 AC.152는 창2와 창3 사이에 중요한 다리를 놓습니다. 창2에서는 인간이 주님의 직접적인 인도에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인도 아래 있기를 원하면서 proprium으로 기울어지는 과정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proprium을 그대로 죽어 있는 상태에 두지 않으시고 생명을 주어 인간에게 허락하십니다. 그런데 이 proprium이 이후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쪽으로 기울게 되면, 창3에서 여자가 뱀에게 속임을 당하는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창3의 타락 이야기는 창2와 단절된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 창2 후반부에서 시작된 proprium의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동시에 ‘여자 = proprium’이라는 표현 역시 모든 성경 구절에 기계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AC.151-152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그렇게 설명하는 것은 현재 창2-3의 이 특정한 문맥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상응의 의미는 다루는 주제와 문맥에 따라 살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여자’가 등장할 때마다 무조건 proprium으로 바꾸어 읽는 것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현재 이 여자를 왜 proprium으로 해석하는지를 그 이야기의 연속성과 함께 이해해야 합니다.

 

결국 AC.152는 매우 짧은 번호이지만 창2 후반부의 해석을 창3으로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갈빗대와 여자는 인간 남녀의 기원에 관한 문자적 설명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proprium에 관한 깊은 아르카나를 담고 있으며, 특히 여자가 속임을 당한다는 다음 장의 이야기를 통해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동시에 앞 번호들을 함께 읽으면 proprium 자체를 악이라고 단순화해서는 안 되고,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기울어 인간을 속이는 proprium을 구별해야 한다는 사실도 놓치지 않게 됩니다. (AC.152)

 

 

 

AC.153, 창2:22, ‘짓다 -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창2:22) AC.153갈빗대가 ‘여자로 지어졌다’(built into a woman)고 하지만, 앞에서 거듭남을 다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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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1, 창2:22, ‘여자 -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 (AC.151-155)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And the rib which Jehovah God had taken from the man, he built into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 (창2:22) AC.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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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 심화

1. ‘빛처럼 보였던 어둠’과 proprium : 실제 사례들

 

AC.21의 ‘빛처럼 보였던 것들’이라는 표현은 매우 현실적인 인간 경험을 가리킵니다. 사람은 거듭남 이전에 악을 언제나 악처럼 느끼고 거짓을 언제나 거짓처럼 알아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에게서 나오는 어떤 생각과 행동을 선하고 옳은 것으로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악이 선처럼 보이고 거짓이 진리처럼 보였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실제 삶에서 ‘빛처럼 보였던 어둠’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을까요? 다음 사례들은 AC.21의 상태를 판정하는 공식이 아니라, 그 표현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예들입니다.

 

먼저 ‘자기 의로움’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평생 성실하게 살고 교회생활도 충실히 하며 큰 잘못 없이 살아왔다고 생각합니다. 그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삶을 근거로 ‘나는 저 사람보다 낫다’, ‘나는 적어도 저런 사람과는 다르다’는 마음이 자라날 수 있습니다. 본인에게는 이것이 바른 삶에 대한 확신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빛 가운데 자신을 보기 시작하면서, 선하게 살았다는 자기평가 안에 다른 사람보다 자신을 높이려는 마음이 섞여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빛처럼 보였던 것이 더 큰 빛 가운데 다른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섞인 선행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봉사하고 헌신하며 다른 사람을 실제로 돕습니다. 그 행동의 외적 쓰임 자체를 무조건 악하다고 할 이유는 없습니다. 또한 인간의 동기는 거듭남 과정에서 여러 요소가 섞여 있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인정과 칭찬을 얻는 것이 점점 그 행동의 지배적인 목적이 되는 경우입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때 선행 자체를 후회하거나, 다른 사람이 칭찬받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면 ‘나는 이웃을 위해서 했다’고 생각했던 일 안에 자기 사랑이 얼마나 깊이 섞여 있었는지를 보게 될 수 있습니다. AC.21의 빛은 바로 이런 분별을 가능하게 합니다.

 

세 번째는 신앙적인 열심입니다. 말씀을 공부하고 교리를 소중히 여기며 진리를 전하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나는 진리를 알고 있고 저 사람들은 모른다’, ‘내 신앙이 더 높다’는 마음이 중심을 차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진리 자체보다 ‘진리를 가진 나’가 중요해집니다. 이런 상태는 당사자에게 오히려 매우 밝은 신앙의 열심처럼 느껴질 수 있기 때문에 더욱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주님의 빛이 비칠 때 사람은 진리를 사랑하는 것과 진리를 이용하여 자기 자신을 높이는 것이 같은 것이 아님을 조금씩 보게 됩니다.

 

네 번째는 이른바 ‘의로운 분노’입니다. 불의한 일을 보고 분노하는 것 자체를 모두 자기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악과 불의를 보고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명예가 손상되거나 자기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 일어난 분노를 ‘나는 진리를 위해 화내는 것이다’라고 포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 사람은 자기 상처와 진리에 대한 열심을 구별하지 못합니다. 이후 더 밝은 빛 가운데 들어가면서 ‘내가 정말 진리를 위해 분노한 것인가, 아니면 내 proprium이 상처받았기 때문인가?’라고 묻게 됩니다. 바로 이런 질문 자체가 이전에는 하나로 보였던 빛과 어둠을 구별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다섯 번째로 목회나 신앙적 봉사에서도 같은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사람을 변화시키고 교회를 세우고 말씀을 전하려는 열망은 선한 목적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역이 자기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 지나친 분노와 좌절이 일어난다면, ‘주님의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안에 ‘내가 이루어야 할 일’이라는 자기 소유의 마음이 섞여 있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사역 자체가 어둠이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 안에서 무엇이 주님에게서 오고 무엇이 proprium에서 나오는지를 구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사례들을 이해할 때 ‘proprium’을 인간의 개성이나 인격 전체와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proprium의 문제는 사람이 가진 고유한 성격이나 재능 자체가 아니라, 선과 진리와 생명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고 자기에게서 나온 것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매우 종교적이고 도덕적으로 보이는 일 안에서도 proprium은 작용할 수 있고, 반대로 자연적인 재능과 개성은 주님의 질서 아래에서 좋은 쓰임에 사용될 수 있습니다.

 

또한 자기 안에서 혼합된 동기를 발견했다고 해서 ‘그러면 내가 지금까지 한 모든 선은 가짜였다’고 절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AC.21은 사람에게서 나온 모든 행동을 분석하여 자기혐오에 빠지게 하는 단락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빛과 어둠을 ‘나누신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이전에는 서로 뒤섞여 하나처럼 보였던 것을 이제 구별할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구별이 가능해져야 사람은 자기에게서 나온 것을 붙들지 않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빛처럼 보였던 어둠’을 발견하는 것은 단순히 ‘내가 생각보다 나쁜 사람이구나’를 깨닫는 데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이 주님에게서 왔고 무엇이 아직 내 proprium에서 나오는가’를 분별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AC.20에서 자기의 선들이 선이 아님을 알기 시작했다면, AC.21에서는 그 첫 빛 안에서 이전에 빛처럼 보였던 것과 참된 빛이 구별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실제 삶에서 일어나는 빛과 어둠의 분별입니다. (AC.21 심화 1)

 

 

 

AC.21, 창1:4-5, ‘빛과 어둠의 분별 : 주님에게서 난 것은 낮, 사람에게서 난 것은 밤’

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And God saw the light, that it was good; and God distinguished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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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 심화

1. ‘자기의 선이 선이 아님을 안다는 것 : 실제 사례들’

 

AC.20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새로 잉태될 때 ‘자기의 선들이 선이 아님을 알기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문장으로 읽으면 이해하기 어렵지 않지만 실제 목회 현장에서 이런 변화를 분명하게 발견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교회생활을 하면서도 자신이 옳고 자신이 선하다는 확신은 오히려 더 강해질 수 있고, 봉사와 헌신까지 자기 의를 강화하는 재료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AC.20이 말하는 첫 빛은 실제 삶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을까요? 몇 가지 사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들은 AC.20의 상태를 판정하는 공식이 아니라 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한 예들입니다.

 

가장 쉽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열심히 봉사하는 신앙인의 경우입니다.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교회에서 많은 일을 하고 다른 사람을 돕습니다. 자신도 그것을 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의 봉사가 인정받지 못했을 때 예상보다 훨씬 큰 섭섭함과 분노가 올라오는 것을 발견합니다. 다른 사람이 칭찬받으면 질투하고, ‘나는 이렇게까지 했는데’라는 생각이 반복됩니다. 이때 그 사람이 단순히 ‘나도 인간이니까 그럴 수 있지’라고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선이라고 생각했던 이 일 안에도 나를 높이고 인정받으려는 마음이 있었구나’라고 보기 시작한다면, AC.20의 ‘자기의 선들이 선이 아님을 알기 시작한다’는 말씀을 이해하는 데 좋은 사례가 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을 매우 정직하고 도덕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자기 이익을 지키기 위해 사실을 왜곡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돌리는 자기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한 번 실수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닙니다. 그 일을 통해 ‘나는 원래 선한 사람인데 이번에만 잘못했다’는 자기상을 지키는 대신,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자기 사랑이 훨씬 깊게 작용하고 있음을 인정하기 시작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 역시 자기 자신을 선의 기준으로 삼던 확신에 처음 빛이 비치는 모습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용서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신앙인이니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용서하려 애씁니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상대방이 먼저 잘못을 인정하기를 기다리고, 자신이 용서하는 사람이라는 도덕적 우월감까지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내 힘으로는 이 사람을 진심으로 용서할 수 없구나’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기 시작합니다. 훗날 마음에 실제 변화가 생겼을 때 그것을 자기 의지력이나 인격의 성취로 돌리기보다 ‘이것은 내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라고 느끼게 된다면, 자기 선에서 주님의 선으로 시선이 옮겨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목회자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설교하고 가르치고 상담하며 사람을 돕는 일은 그 자체로 선한 쓰임입니다. 그러나 사역의 열매가 보이지 않거나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지나치게 낙심하고 분노한다면, 그 안에 ‘내가 사람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자기 소유의 마음이 섞여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때 ‘나는 주님의 일을 열심히 했을 뿐인데 사람들이 문제다’라고 끝내지 않고, 선한 사역조차 자기 공로와 자기 성취로 붙들 수 있는 자신을 보게 된다면 이것도 AC.20을 이해하는 실제적인 사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례를 보고 ‘자기 동기가 불순함을 발견했으니 이 사람은 AC.20의 첫 상태에 들어갔다’고 판정해서는 안 됩니다. 심리학적인 자기성찰만으로도 사람은 자기 모순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AC.20의 빛에는 방향이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의 선이 선이 아님을 알기 시작할 뿐 아니라 ‘빛 안으로 더 들어가면서 주님이 계시며, 그분이 선 자체요 진리 자체’이심을 알아갑니다. 따라서 단순한 자기비판이나 낮은 자존감이 아니라, 자기에게서 선의 근원을 찾던 데서 주님에게로 방향이 옮겨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AC.20은 사람이 자기 안에서 악을 많이 발견하여 점점 자신을 혐오하게 되는 과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선의 허상을 보는 목적은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절망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참된 선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알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에게서 나온 선의 한계를 볼수록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열립니다. 이것이 ‘빛 안으로 더 들어간다’는 방향입니다.

 

목회 현장에서 이런 변화가 드물게 보인다는 느낌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의 내적 상태를 직접 볼 수 없기 때문에 겉으로 나타난 변화만으로 거듭남의 정도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매우 작은 깨달음처럼 보이는 것이 내적으로 중요한 시작일 수도 있고, 반대로 매우 극적인 회심의 말이 실제 삶의 지배적인 사랑을 아직 바꾸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의 영적 단계를 판정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빛을 가능한 한 분명하게 제시하고, 사람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을 선과 진리의 근원으로 바라보도록 돕는 것입니다.

 

결국 AC.20의 실제 사례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나는 생각보다 덜 선한 사람이구나’라는 자기평가 자체가 아닙니다. 더 본질적인 변화는 ‘참된 선의 근원은 내가 아니구나’라는 방향 전환입니다. 자기에게서 선을 찾던 사람이 자기의 선을 의심하기 시작하고, 그 의심이 단순한 자기비난으로 끝나지 않고 주님이 선 자체요 진리 자체이심을 알아가는 데까지 이어질 때, 우리는 창1:3의 ‘빛이 있으라’가 인간의 삶에서 무엇을 뜻하는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20 심화 1)

 

 

 

AC.20 심화 2,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과정을 어떻게 알았을까?’

AC.20 심화2.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과정을 어떻게 알았을까?’ AC.20의 설명을 실제 인간의 삶에 대입해 보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더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처음에는 자기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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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 창1:3, ‘빛의 첫 인식 : 자기의 선이 선이 아님을 알고 주님을 알기 시작하는 때’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And God said,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창1:3) AC.20첫 번째 상태는 사람이 선과 진리가 더 높은 것임을 알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전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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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과 천국의 기쁨에 관하여 Concerning Heaven and Heavenly Joy

 

AC.450

세상에 사는 동안 말씀에 관하여 특별히 밝은 깨달음을 가진 것처럼 보였던 어떤 사람들은 천국에 대하여 너무나 잘못된 생각을 품고 있어서, 자신들이 높은 곳에 올라가 있으면 천국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며, 그 위치에서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고, 그리하여 자기 영광(self-glory)을 누리며 다른 사람들보다 높은 지위에 있을 수 있다고 상상하였습니다. 그들이 이러한 공상(fantasy)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이 잘못되어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하여, 그들은 높은 곳으로 올려졌으며 거기서 아래에 있는 것들을 어느 정도 다스리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부끄러움 가운데 이것이 공상의 천국(a heaven of fantasy)임을 깨달았으며, 천국은 높은 곳에 있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체어리티 안에 있는 사람이 있는 곳, 곧 그 안에 주님의 나라(the Lord’s kingdom)가 있는 사람이 있는 곳이면 어디에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또한 천국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높은 자리에 있기를 원하는 데 있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자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기 때문입니다. Some who during their abode in this world had seemed to be preeminently enlightened in regard to the Word, had conceived so false an idea about heaven that they supposed themselves to be in heaven when they were high up, and imagined that from that position they could rule all things below, and thus be in self-glory and preeminence over others. On account of their being in such a fantasy, and in order to show them that they were in error, they were taken up on high, and from there were permitted in some measure to rule over things below; but they discovered with shame that this was a heaven of fantasy, and that heaven does not consist in being on high, but is wherever there is anyone who is in love and charity, or in whom is the Lord’s kingdom; and that neither does it consist in desiring to be more eminent than others, for to desire to be greater than others is not heaven, but hell.

 

해설

AC.450은 천국에 대한 두 가지 잘못된 생각, 곧 ‘공간적으로 높은 곳이 천국이다’라는 생각과 ‘다른 사람보다 높은 자리에 서는 것이 천국의 행복이다’라는 생각을 동시에 바로잡습니다. 이 둘은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뿌리는 같습니다. 천국을 주님과 사랑의 상태가 아니라 ‘높음’이라는 외적인 조건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특히 이 사람들이 ‘말씀에 관하여 특별히 밝은 깨달음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는 점은 주목할 만합니다. 말씀을 많이 알고 잘 설명하며 영적인 것에 밝아 보이는 것과 실제로 천국적 성품을 지니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말씀에 관한 지식조차 자기 영광과 우월감을 위해 사용한다면, 외적으로는 깨달음처럼 보여도 그 사람의 내면은 천국의 질서와 정반대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단순히 말로 반박하지 않으시고, 그들이 원하던 상태를 실제로 경험하도록 허락하십니다. 높은 곳으로 올려 보내고 아래의 것들을 어느 정도 다스리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꿈꾸던 것을 실제로 얻고 보니 그것은 참된 천국이 아니라 ‘공상의 천국’이었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 그들 자신의 욕망이 무엇이었는지가 스스로에게 드러난 것입니다.

 

여기서 AC.450은 천국에 대한 매우 중요한 정의를 제시합니다. ‘천국은 사랑과 체어리티 안에 있는 사람이 있는 곳, 곧 그 안에 주님의 나라가 있는 사람이 있는 곳이면 어디에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천국의 본질은 장소가 아니라 주님의 나라가 사람 안에 이루어진 상태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가 그 사람의 의지와 삶을 다스리는 곳에 이미 천국의 질서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자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지옥이라고까지 말하는가 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여기서 모든 책임이나 지도력, 혹은 뛰어난 능력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핵심은 ‘다른 사람보다 위에 있고 싶어 하는 사랑’입니다. 천국에서는 받은 능력과 지위가 이웃을 섬기는 쓰임(use)을 위한 것이지만, 자기 사랑이 지배하면 다른 사람을 자기 아래에 두는 것 자체에서 즐거움을 얻습니다. 외적으로 같은 권한을 가지고 있어도 그 권한을 움직이는 사랑은 완전히 다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천국의 질서와도 정확히 통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라는 말씀처럼(마20:26), 천국에서 ‘높아짐’은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깊이 사랑하고 섬기는 방향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참된 천국의 기쁨은 ‘내가 얼마나 높은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받은 것으로 얼마나 기쁘게 쓰임이 되는가’에서 옵니다.

 

결국 AC.450은 천국을 먼 곳에 있는 어떤 높은 세계로만 바라보던 시선을 인간의 내면과 삶으로 돌립니다. ‘내 안에 주님의 나라가 있는가? 내가 알고 있는 말씀과 진리는 나를 높이는가, 아니면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게 하는가?’가 천국을 이해하는 실제적인 질문이 됩니다. 천국은 높은 곳에 올라가 다른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곳이 아니라, 자기 영광을 내려놓고 주님의 사랑과 체어리티가 다스리도록 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AC.450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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