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창4:22)

 

AC.426

‘쇠’(iron)가 자연적 진리를 뜻한다는 사실은 에스겔이 두로에 관해 말한 다음 말씀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That “iron” signifies natural truth is further evident from what Ezekiel says of Tyre:

 

12다시스는 각종 보화가 풍부하므로 너와 거래하였음이여 은과 철과 주석과 납을 네 물품과 바꾸어 갔도다, 19워단과 야완은 길쌈하는 실로 네 물품을 거래하였음이여 가공한 쇠와 계피와 대나무 제품이 네 상품 중에 있었도다 (겔27:12, 19) Tarshish was thy trader by reason of the multitude of all riches; in silver, iron, tin, and lead, they gave thy traffickings. Dan, and Javan, and Meusal furnished bright iron in thy tradings; cassia and calamus were in thy mart. (Ezek. 27:12, 19)

 

이 말씀과 같은 장의 앞뒤에 나오는 내용에서 천적·영적 부요함을 뜻한다는 사실이 매우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또한 각각의 표현은 물론 언급된 이름들까지도 저마다 고유한 의미를 지닙니다. 주님의 말씀은 단순히 문자적인 말이 아니라 영적인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From these words, as well as from what is said both previously and subsequently in the same chapter, it is very evident that celestial and spiritual riches are signified; and that every particular expression, and even the names mentioned, have some specific signification, for the Word of the Lord is spiritual, and not verbal.

 

[2] 예레미야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In Jeremiah:

 

12누가 능히 철 곧 북방의 철과 놋을 꺾으리요 13그러나 네 모든 죄로 말미암아 네 국경 안의 모든 재산과 보물로 값없이 탈취를 당하게 할 것이며 (렘15:12-13) Can one break iron, even iron from the north, and brass? Thy substance [facultates] and thy treasures will I give for a spoil without price, and this for all thy sins, (Jer. 15:12–13)

 

여기서 ‘쇠’(iron)와 ‘놋’(brass)은 자연적 진리와 선을 뜻합니다. 그것들이 ‘북방’(north)에서 왔다고 한 것은 감각적이고 자연적인 것을 나타냅니다. 자연적인 것은 영적·천적인 것에 비하면 짙은 어둠이 빛에 비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곧 ‘북방’이 ‘남방’(south)에 비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는 그늘이 빛에 비하는 것과도 같은데, 여기서는 ‘어머니’(mother)인 ‘씰라’(Zillah)도 이러한 그늘을 나타냅니다. ‘재산’(substance)과 ‘보물’(treasures)이 천적·영적 부요함을 뜻한다는 사실도 매우 분명합니다. where “iron” and “brass” signify natural truth and good; that it came from the “north” signifies what is sensuous and natural; for what is natural, relatively to what is spiritual and celestial, is like thick darkness (that is, the “north”) relatively to light or the “south”; or like shade, which is also signified here by “Zillah,” who is the “mother.” That the “substance” and “treasures” are celestial and spiritual riches is also very evident.

 

[3] 에스겔에서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Again in Ezekiel:

 

또 철판을 가져다가 너와 성읍 사이에 두어 철벽을 삼고 성을 포위하는 것처럼 에워싸라 이것이 이스라엘 족속에게 징조가 되리라 (겔4:3) Take thou unto thee a pan of iron, and set it for a wall of iron between thee and the city, and set thy faces toward it, and let it be for a siege, and thou shalt straiten against it, (Ezek. 4:3)

 

여기서도 ‘쇠’가 진리를 뜻한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진리에는 아무도 저항할 수 없는 힘이 있으므로, 힘은 진리에 속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진리, 곧 신앙의 진리를 뜻하는 쇠에 관해 ‘산산이 부순다’(breaks in pieces), ‘짓부순다’(crushes)고 말합니다. 다니엘서에서도 그러하며(단2:34, 40), 계시록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where also it is evident that “iron” signifies truth. Strength is attributed to truth, because it cannot be resisted, and for this reason it is said of iron—by which is signified truth, or the truth of faith—that it “breaks in pieces” and “crushes”; as in Daniel (2:34, 40), and in John:

 

34또 왕이 보신즉 손대지 아니한 돌이 나와서 신상의 쇠와 진흙의 발을 쳐서 부서뜨리매, 40넷째 나라는 강하기가 쇠 같으리니 쇠는 모든 물건을 부서뜨리고 이기는 것이라 쇠가 모든 것을 부수는 것 같이 그 나라가 뭇 나라를 부서뜨리고 찧을 것이며 (단2:34, 40)

 

26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27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계2:26–27) He that overcometh, to him will I give sovereign power over the nations, that he may pasture them with a rod of iron; as the vessels of a potter shall they be broken to shivers. (Rev. 2:26–27)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계12:5) The woman brought forth a man child, who should pasture all nations with a rod of iron. (Rev. 12:5)

 

[4] ‘쇠 지팡이’(rod of iron)가 주님의 말씀에 속한 진리라는 사실은 계시록의 다음 말씀에서 설명합니다. That a “rod of iron” is the truth which is of the Word of the Lord, is explained in John:

 

11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13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15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계19:11, 13, 15) I saw heaven open, and behold a white horse, and he that sat upon him was called faithful and true, and in righteousness he doth judge and fight; He was clothed with a vesture dipped in blood, and his name is called the Word of God; out of his mouth goeth a sharp sword, that with it he should smite the nations; and he shall pasture them with a rod of iron. (Rev. 19:11, 13, 15)

 

해설

AC.426은 앞의 AC.425에서 밝힌 금속의 속뜻 가운데 특별히 ‘쇠’에 집중합니다. 앞 번호에서 놋이 자연적 선을 뜻한다는 사실을 여러 말씀으로 확인했다면, 이번 번호에서는 쇠가 자연적 진리를 뜻한다는 사실을 살펴봅니다. 스베덴보리는 에스겔과 예레미야, 다니엘과 계시록을 차례로 인용하면서 쇠가 나타내는 진리의 성격을 설명합니다. 그 가운데 중요한 것은 자연적 진리와 영적·천적 부요함의 관계,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차이, 그리고 진리가 지닌 힘입니다.

 

먼저 겔27:12, 19는 두로의 무역에 관한 말씀입니다. 다시스는 은과 쇠와 주석과 납을 가져오고, 단과 야완과 므우살은 빛나는 쇠와 향료를 제공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뿐 아니라 같은 장의 앞뒤 내용을 함께 살펴보면, 이 모든 것이 천적·영적 부요함에 관한 말씀임을 알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앞의 AC.425에서도 두로는 영적·천적 부요함을 지닌 사람들을 나타냈습니다. 따라서 두로의 무역품 가운데 등장하는 쇠 역시 단순한 금속을 넘어 자연적 진리를 뜻합니다. 다만 이번 번호는 주석과 납, 향료, 각각의 지명에 대한 구체적인 속뜻까지 밝히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각각의 표현뿐 아니라 이름들까지도 저마다 고유한 의미를 지닌다고 강조합니다. 그 이유는 ‘주님의 말씀은 영적이며, 단순히 문자적인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는 말씀의 문자적 기록이 무의미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두로의 무역에 관한 기록은 문자적으로도 읽을 수 있지만, 스베덴보리는 그 안에 천적·영적 부요함에 관한 속뜻이 담겨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읽을 때 특정한 단어나 이름 하나만 떼어 내어 의미를 정하기보다, 앞뒤 문맥과 함께 살피는 일이 중요합니다.

 

렘15:12-13에서는 쇠와 놋이 함께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쇠가 자연적 진리를, 놋이 자연적 선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북방의 쇠’라는 표현에 주목하여, 북방이 감각적이고 자연적인 것을 나타낸다고 밝힙니다. 자연적인 것은 영적·천적인 것에 비하면 짙은 어둠이 빛에 비하는 것과 같으며, 북방이 남방에 비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어둠은 자연적 진리가 곧 거짓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연적인 것과 영적·천적인 것의 관계를 밝음의 차이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 설명은 창4장의 씰라와도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어머니’인 씰라가 그늘을 나타낸다고 말합니다. 앞의 AC.421에서 씰라는 새 교회의 자연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의미했습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씰라의 의미를 북방과 그늘의 이미지에 연결하여, 자연적인 것이 영적·천적인 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외적인 차원에 있음을 설명합니다. 따라서 씰라가 그늘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근거로 씰라 자체가 악이나 거짓을 뜻한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어지는 ‘재산’과 ‘보물’은 천적·영적 부요함을 뜻합니다. 예레미야의 문자적 말씀에서는 죄로 인해 재산과 보물이 노략물로 넘어간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에서 재산과 보물이 단순한 물질적 소유가 아니라 천적·영적 부요함을 나타낸다고 밝힙니다. 다만 이번 번호는 그 부요함이 어떤 과정을 거쳐 상실되는지까지 상세히 풀이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쇠와 놋, 북방, 재산과 보물의 의미를 함께 살피는 데 초점이 있습니다.

 

겔4:3에서는 에스겔이 쇠판을 가져다가 자신과 성읍 사이에 쇠벽으로 세우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에서도 쇠가 진리를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진리에는 저항할 수 없는 힘이 있으므로 힘은 진리에 속한다고 말합니다. 이 설명은 이번 번호의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앞에서는 쇠가 어떤 차원의 진리를 나타내는지 살펴보았다면, 이제는 왜 쇠가 진리를 나타내는지, 특히 진리의 힘이 말씀에서 어떻게 표현되는지를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단2:34, 40을 언급합니다. 다니엘의 신상 환상에서 쇠는 부수고 깨뜨리는 힘을 지닌 것으로 묘사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러한 표현을 진리의 힘과 연결합니다. 그러나 이번 번호는 다니엘의 네 나라가 각각 무엇을 뜻하는지, 손대지 않은 돌과 쇠와 진흙이 섞인 발이 어떤 상태를 나타내는지까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인용의 직접적인 목적은 다니엘의 환상 전체를 풀이하는 데 있지 않고, 쇠에 ‘부수고 깨뜨리는’ 힘이 부여되는 이유를 밝히는 데 있습니다.

 

계2:26-27과 계12:5에서는 ‘쇠 지팡이’가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들을 진리가 지닌 힘을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인용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가 인용한 영어 본문이 ‘다스린다’는 표현을 ‘목양한다’(pasture)고 옮긴다는 사실입니다. 쇠 지팡이는 문자적으로 강한 통치의 이미지를 불러일으키지만, 스베덴보리가 이 번호에서 밝히는 속뜻은 진리의 힘에 관한 것입니다. 다만 ‘토기장이의 그릇’이나 계12장의 ‘남자아이’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는 이번 번호에서 따로 풀이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계19:11, 13, 15는 앞의 철장 구절들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백마를 타신 분은 ‘충신과 진실’이라 불리고, 그의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명시됩니다. 그분의 입에서는 예리한 검이 나오며, 그분은 쇠 지팡이로 민족들을 목양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통해 ‘쇠 지팡이’가 주님의 말씀에 속한 진리라는 사실이 설명된다고 밝힙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의 마지막 인용은 단순히 쇠가 강하다는 사실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힘이 주님의 말씀의 진리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결국 AC.426의 핵심은 쇠가 자연적 진리를 뜻하며, 진리에는 저항할 수 없는 힘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두로의 무역은 자연적 진리가 천적·영적 부요함에 관한 말씀 안에 등장한다는 점을 보여 주고, 북방의 쇠는 자연적인 것과 영적·천적인 것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쇠벽과 다니엘의 쇠는 진리의 힘을 드러내며, 계시록의 쇠 지팡이는 그 힘이 주님의 말씀에 속한 진리와 연결되어 있음을 분명히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두발가인이 다루는 쇠가 단순한 금속이 아니라, 자연적 차원에서 나타나는 진리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AC.426 해설)

 

심화

1. ‘철장은 왜 주님의 말씀의 진리를 의미하는가?’

 

AC.426 심화 1, ‘놋뱀은 왜 주님의 감각적·자연적 선을 표상하는가?’

AC.426 심화1. ‘철장은 왜 주님의 말씀의 진리를 의미하는가?’ AC.426에서 스베덴보리는 쇠가 자연적 진리를 뜻한다는 사실을 설명하면서, 진리에는 아무도 저항할 수 없는 힘이 있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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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7, 창4:23, ‘라멕은 왜 신앙과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고 고백하는가?’ (AC.427-431)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And Lamech 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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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5, 창4:22, ‘놋은 왜 자연적 선을 의미하는가?’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창4:22) AC.425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놋’(brass)이 자연적 선을 뜻한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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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창4:22)

 

AC.425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놋’(brass)이 자연적 선을 뜻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또한 말씀에 등장하는 모든 금속이 속뜻으로는 각각 고유한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도 알지 못합니다. 이를테면 ‘금’(gold)은 천적 선을, ‘은’(silver)은 영적 진리를, ‘놋’(brass)은 자연적 선을, ‘쇠’(iron)는 자연적 진리를 뜻합니다. 다른 금속들도 마찬가지이며, ‘나무’(wood)와 ‘돌’(stone) 역시 저마다 고유한 의미를 지닙니다. 궤와 성막과 성전을 만드는 데 사용한 ‘금’, ‘은’, ‘놋’, ‘나무’도 이러한 것들을 나타냅니다. 이에 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나중에 설명하겠습니다. 이러한 의미는 예언서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이사야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It is unknown to the world at the present day that “brass” signifies natural good, and also that every metal mentioned in the Word has a specific signification in the internal sense—as “gold,” celestial good; “silver,” spiritual truth; “brass,” natural good; “iron,” natural truth; and so on with the other metals, and in like manner “wood” and “stone.” Such things were signified by the “gold,” “silver,” “brass,” and “wood,” used in the ark and in the tabernacle and in the temple, concerning which,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That such is their signification is manifest from the prophets, as from Isaiah:

 

16네가 이방 나라들의 젖을 빨며 뭇 왕의 젖을 빨고 나 여호와는 네 구원자, 네 구속자, 야곱의 전능자인 줄 알리라 17내가 금을 가지고 놋을 대신하며 은을 가지고 철을 대신하며 놋으로 나무를 대신하며 철로 돌을 대신하며 화평을 세워 관원으로 삼으며 공의를 세워 감독으로 삼으리니 (사60:16, 17) Thou shalt also suck the milk of the gentiles, and shalt suck the breast of kings. For brass I will bring gold, and for iron I will bring silver, and for wood brass, and for stones iron; I will also make thy tribute peace, and thine exactors righteousness, (Isa. 60:16–17)

 

이 말씀은 주님의 오심과 그분의 나라, 그리고 천적 교회에 관한 것입니다. ‘놋 대신 금’(for brass gold)은 자연적 선 대신 천적 선을, ‘쇠 대신 은’(for iron silver)은 자연적 진리 대신 영적 진리를 뜻합니다. ‘나무 대신 놋’(for wood brass)은 육체적 선 대신 자연적 선을, ‘돌 대신 쇠’(for stones iron)는 감각적 진리 대신 자연적 진리를 뜻합니다. 에스겔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treating of the Lord’s advent, of his kingdom, and of the celestial church. “For brass gold,” signifies for natural good celestial good; “for iron silver,” signifies for natural truth spiritual truth; “for wood brass,” signifies for corporeal good natural good; “for stones iron,” signifies for sensuous truth natural truth. In Ezekiel:

 

야완과 두발과 메섹은 네 상인이 되었음이여 사람과 놋그릇을 가지고 네 상품을 바꾸어 갔도다 (겔27:13) Javan, Tubal, and Meshech, these were thy merchants, in the soul of man, and vessels of brass they gave thy trading, (Ezek. 27:13)

 

이 말씀은 두로에 관한 것입니다. 두로는 영적·천적 부요함을 지닌 사람들을 뜻하며, ‘놋그릇’(vessels of brass)은 자연적 선을 가리킵니다. speaking of Tyre, by which are signified those who possess spiritual and celestial riches; “vessels of brass” are natural goods.

 

신명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In Moses:

 

네가 먹을 것에 모자람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 (신8:9) A land whose stones are iron, and out of whose mountains thou mayest hew brass, (Deut. 8:9)

 

여기서도 ‘돌’(stones)은 감각적 진리를, ‘쇠’(iron)는 자연적 진리, 곧 이성적 진리를, ‘놋’(brass)은 자연적 선을 뜻합니다. 에스겔은 다음과 같은 모습을 보았습니다. where also “stones” denote sensuous truth; “iron,” natural, that is, rational truth; and “brass,” natural good. Ezekiel saw:

 

5그 속에서 네 생물의 형상이 나타나는데 그들의 모양이 이러하니 그들에게 사람의 형상이 있더라 6그들에게 각각 네 얼굴과 네 날개가 있고 7그들의 다리는 곧은 다리요 그들의 발바닥은 송아지 발바닥 같고 광낸 구리 같이 빛나며 (겔1:7) Four living creatures, or cherubs, whose feet sparkled like the appearance of burnished brass, (Ezek. 1:7)

 

여기서도 ‘놋’은 자연적 선을 뜻합니다. 사람의 ‘발’(foot)이 자연적인 것을 표상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다니엘에게도 다음과 같은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where again “brass” signifies natural good, for the “foot” of man represents what is natural. In like manner there appeared to Daniel,

 

5그 때에 내가 눈을 들어 바라본즉 한 사람이 세마포 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우바스 순금 띠를 띠었더라 6또 그의 몸은 황옥 같고 그의 얼굴은 번갯빛 같고 그의 눈은 횃불 같고 그의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고 그의 말소리는 무리의 소리와 같더라 (단10:5, 6) A man clothed in linen, whose loins were girded with gold of Uphaz, his body also was like the beryl, and his arms and his feet like the appearance of burnished brass. (Dan. 10:5–6)

 

‘놋뱀’(brazen serpent, 민21:9)이 주님의 감각적·자연적 선을 표상했다는 사실은 앞에서 살펴보았습니다. That the “brazen serpent” (Num. 21:9) represented the sensuous and natural good of the Lord may be seen above.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민21:9)

 

해설

AC.425는 두발가인이 다루는 ‘놋과 쇠’의 속뜻을 더 넓은 말씀의 문맥에서 확인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에 등장하는 금속들이 단순한 재료가 아니라 각각 고유한 의미를 지닌다고 설명합니다. 금은 천적 선, 은은 영적 진리, 놋은 자연적 선, 쇠는 자연적 진리를 뜻합니다. 이 구별은 금속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나무와 돌에도 각각 고유한 의미가 있으며, 궤와 성막과 성전을 만드는 데 사용한 재료들 역시 그러한 의미를 지닙니다. 다만 이번 번호는 모든 재료의 속뜻을 자세히 설명하기보다, 두발가인과 직접 관련된 놋과 쇠의 의미를 밝히는 데 집중합니다.

 

먼저 사60:16-17은 금속과 재료들의 의미를 서로 비교하여 보여 줍니다. ‘놋 대신 금’은 자연적 선 대신 천적 선을, ‘쇠 대신 은’은 자연적 진리 대신 영적 진리를 뜻합니다. 이어 ‘나무 대신 놋’은 육체적 선 대신 자연적 선을, ‘돌 대신 쇠’는 감각적 진리 대신 자연적 진리를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이 주님의 오심과 그분의 나라, 그리고 천적 교회에 관한 것이라고 밝힙니다. 따라서 이 구절의 재료 교체는 단순히 값싼 물건을 값비싼 물건으로 바꾸는 일이 아니라, 서로 다른 차원의 선과 진리를 나타냅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이 구절을 인간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거듭남의 단계표로 곧바로 바꾸어 읽지 않는 것입니다. AC.425는 각각의 재료가 무엇을 뜻하는지 분명히 밝히지만, 사람이 육체적 선에서 자연적 선으로, 다시 천적 선으로 나아가는 구체적인 과정까지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자연적 선을 단순한 도덕적 의무감으로, 천적 선을 특정한 감정 상태로 정의하지도 않습니다. 우선 말씀 안에서 선과 진리가 서로 다른 차원으로 구별되어 표현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겔27:13에서는 ‘놋그릇’이 등장합니다. 이 말씀은 두로의 무역에 관한 기록이며, 스베덴보리는 두로가 영적·천적 부요함을 지닌 사람들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그 문맥에서 ‘놋그릇’은 자연적 선을 나타냅니다. 앞의 AC.424에서 세공업자가 선과 진리를 아는 사람 또는 그 기억지식과 관련되었다면, 이번 번호에서는 두로의 상품 가운데 등장하는 놋그릇을 통해 자연적 선의 의미를 확인합니다. 다만 ‘그릇’이라는 말에 별도의 의미를 더하여 인간의 마음이나 교리의 그릇이라고 풀이하는 것은 이번 번호가 직접 제시한 설명은 아닙니다.

 

겔27:13에 등장하는 ‘두발’이라는 이름도 창4장의 ‘두발가인’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AC.425는 이 두 이름의 관계를 따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름이 비슷하고 놋이 함께 등장한다는 이유만으로 두 인물이 동일한 속뜻을 지닌다고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이 구절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밝히는 것은 두로의 의미와 ‘놋그릇’이 자연적 선을 나타낸다는 사실입니다.

 

신8:9에서는 ‘돌’, ‘쇠’, ‘놋’이 함께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돌을 감각적 진리로, 쇠를 자연적 진리, 곧 이성적 진리로, 놋을 자연적 선으로 풀이합니다. 특히 여기서는 자연적 진리를 ‘이성적 진리’라고도 표현합니다. 앞에서 쇠가 자연적 진리를 뜻한다고 설명한 내용을 이 구절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만 ‘돌은 쇠’라는 표현을 감각적 진리가 실제로 이성적 진리로 변화하는 과정에 관한 상세한 설명으로 확대하기보다는, 본문이 밝힌 두 진리의 구별에 먼저 주목해야 합니다.

 

겔1:7은 놋의 의미를 ‘발’과 연결하여 보여 줍니다. 에스겔이 본 네 생물, 곧 그룹들의 발은 광낸 놋처럼 빛났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의 발이 자연적인 것을 표상하므로, 그 발에 나타난 놋 역시 자연적 선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는 놋이 자연적 선이라는 설명과 발이 자연적인 것을 표상한다는 설명이 서로 맞물립니다. 그러나 ‘광낸 놋’이 정결하게 된 자연적 선의 특정한 상태를 뜻한다거나, 이 환상의 모든 신체 부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까지 이번 번호에서 밝히지는 않습니다.

 

단10:5-6도 비슷한 방식으로 인용합니다. 다니엘이 본 사람은 세마포 옷을 입고 우바스의 금띠를 띠었으며, 팔과 발은 광낸 놋과 같았습니다. 이 구절에서는 금과 놋이 한 형상 안에 함께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에서 금이 천적 선을, 놋이 자연적 선을 뜻한다고 밝혔습니다. 따라서 다니엘의 환상은 놋이 자연적 선을 나타낸다는 설명을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사례가 됩니다. 다만 이 번호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팔과 허리와 몸의 각 부분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까지 풀이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민21:9의 ‘놋뱀’을 언급합니다. 그는 놋뱀이 주님의 감각적·자연적 선을 표상했다는 사실을 앞에서 이미 설명했다고 말합니다. 앞의 인용들이 놋의 의미를 여러 말씀에서 확인하는 사례였다면, 놋뱀은 그 의미가 주님과 직접 관련되는 사례입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그 설명을 반복하지 않고 앞선 해설을 가리키므로, 놋뱀의 의미는 별도의 심화에서 살펴보겠습니다.

 

결국 AC.425는 금속과 재료의 속뜻을 통해 선과 진리가 서로 다른 차원에서 나타난다는 사실을 설명합니다. 특히 이사야와 에스겔, 신명기와 다니엘의 말씀은 ‘놋은 자연적 선, 쇠는 자연적 진리’라는 앞선 설명을 뒷받침합니다. 그리고 놋뱀에 관한 마지막 언급은 자연적 선의 의미가 궁극적으로 주님과도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창4장의 두발가인이 다루는 놋과 쇠가 단순한 금속이 아니라 자연적 선과 진리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이해하게 됩니다. (AC.425 해설)

 

심화

1. ‘놋뱀은 왜 주님의 감각적·자연적 선을 표상하는가?’

 

AC.425 심화 1, ‘놋뱀은 왜 주님의 감각적·자연적 선을 표상하는가?’

AC.424 심화1. ‘놋뱀은 왜 주님의 감각적·자연적 선을 표상하는가?’ 민21:9에서 모세는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았습니다. 뱀에게 물린 사람이 그 놋뱀을 바라보면 살아났습니다. 스베덴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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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6, 창4:22, ‘쇠는 왜 자연적 진리를 의미하는가?’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창4:22) AC.426‘쇠’(iron)가 자연적 진리를 뜻한다는 사실은 에스겔이 두로에 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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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4, 창4:22, ‘세공업자는 왜 선과 진리를 아는 사람을 뜻하는가?’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창4:22) AC.424말씀에서 ‘세공업자’(artificer)는 지혜롭고 총명하며 지식을 갖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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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And Zillah, she also bare Tubal-Cain, an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 and the sister of Tubal-Cain was Naamah. (창4:22)

 

AC.421

앞서 말했듯이, ‘씰라’(Zillah)는 새 교회의 자연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의미합니다. ‘놋과 쇠로 온갖 기구를 만드는 자의 스승’(an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인 ‘두발가인’(Tubal-Cain)은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놋’(brass)은 자연적 선을, ‘쇠’(iron)는 자연적 진리를 뜻합니다. ‘두발가인의 누이’(the sister of Tubal-Cain)인 ‘나아마’(Naamah)는 그와 비슷한 교회, 곧 그 교회 밖에 있는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를 의미합니다. By “Zillah” is signified, as previously stated, the mother of the natural things of the new church; by “Tubal-Cain, an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 the doctrine of natural good and truth, “brass” denoting natural good, and “iron” natural truth. By “Naamah, the sister of Tubal-Cain” is signified a similar church, or the doctrine of natural good and truth outside of that church.

 

해설

AC.421은 창4:22에 등장하는 씰라와 두발가인, 나아마의 속뜻을 설명합니다. 앞서 야발과 유발을 통해 사랑의 천적인 것들과 신앙의 영적인 것들을 살펴보았다면, 이번에는 ‘자연적인 것들’로 시선이 옮겨갑니다. 스베덴보리는 두발가인을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로 해석하고, 놋과 쇠가 각각 자연적 선과 자연적 진리를 나타낸다고 밝힙니다. 이로써 라멕의 자손들에 관한 기록은 교회의 서로 다른 측면을 설명하는 흐름을 이어갑니다.

 

먼저 ‘씰라’는 새 교회의 자연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자연적인 것들은 앞서 다룬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에 비해 사람의 외적인 삶과 관련된 차원을 가리킵니다. 다만 자연적이라는 말이 곧 악하거나 영적인 것과 무관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번 번호에서 자연적인 것들 안에도 선과 진리가 있음을 분명히 밝힙니다. 그러므로 자연적인 것을 단순히 극복하거나 버려야 할 대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두발가인’은 ‘놋과 쇠로 온갖 기구를 만드는 자의 스승’이라는 설명과 함께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를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로 해석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두발가인을 단순히 금속을 다루는 기술자로 풀이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창세기의 문자적 기록은 그가 놋과 쇠를 다루는 기술과 관련된 인물임을 말하지만, 스베덴보리는 그 기록의 속뜻에서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를 읽어 냅니다. ‘스승’이라는 표현 역시 이번 번호의 해석이 단순한 기술이나 물건이 아니라 교리에 관한 것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렇다면 자연적 선과 자연적 진리는 무엇입니까? 이번 번호는 두 개념의 구체적인 사례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놋과 쇠가 각각 무엇을 뜻하는지만 밝힙니다. 따라서 자연적 선을 특정한 선행 하나로, 자연적 진리를 특정한 지식 하나로 좁혀서는 안 됩니다. 우선 자연적인 차원에도 선과 진리의 구별이 있으며, 두발가인이 그 둘에 관한 교리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놋’은 자연적 선을, ‘쇠’는 자연적 진리를 뜻합니다. 두 금속은 문자적으로는 기구를 만드는 재료이지만, 속뜻에서는 자연적인 차원의 선과 진리를 구별하여 나타냅니다. 앞의 AC.419에서 수금과 퉁소가 각각 영적 진리와 영적 선을 나타냈던 것처럼, 이번 번호에서는 놋과 쇠가 자연적 선과 자연적 진리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악기와 금속의 의미를 하나의 기계적인 대응표로 만들기보다는, 각각의 말씀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밝힌 뜻을 따라 읽는 것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나아마’는 두발가인의 누이로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나아마가 ‘그와 비슷한 교회, 곧 그 교회 밖에 있는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그 교회 밖’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두발가인과 나아마가 모두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련되지만, 스베덴보리는 둘을 완전히 동일한 것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나아마는 앞서 말한 교회 밖에 있는, 그와 비슷한 교회 또는 교리를 나타냅니다. 다만 이번 번호만으로 그 교회가 역사적으로 어떤 집단인지, 왜 교회 밖에 있다고 표현하는지까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는 교회의 삶이 내적인 사랑과 신앙에 관한 가르침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연적인 차원에도 선과 진리가 있으며, 그것들에 관한 교리도 구별하여 설명합니다. 그렇다고 이번 번호가 자연적인 선과 진리만으로 거듭남이 완성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는 라멕의 자손들에 관한 기록이 교회의 어떤 측면을 나타내는지 밝히는 데 초점을 둡니다.

 

결국 AC.421의 핵심은 두발가인이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를, 놋과 쇠가 각각 자연적 선과 자연적 진리를 나타낸다는 사실입니다. 씰라는 새 교회의 자연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의미하고, 나아마는 그 교회 밖에 있는 비슷한 교회 또는 교리를 나타냅니다. 우리는 이 짧은 번호를 통해 자연적인 것들 역시 교회의 선과 진리에 관한 설명 안에 포함되어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AC.421 해설)

 

 

 

AC.422, 창4:22, ‘레아와 라헬은 왜 외적 교회와 내적 교회를 나타내는가?’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창4:22) AC.422이 새 교회가 어떠한 상태에 있었는지는 유대교회를 통해 알 수 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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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0, 창4:21, ‘말씀에 여러 악기가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창4:21) AC.420말씀에는 여러 가지 악기가 언급되며, 각 악기에는 저마다 고유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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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11 심화

2. ‘왜 기어 다니는 곤충 중 메뚜기 종류는 먹을 수 있었을까?’

 

레11의 음식법 가운데 상당히 뜻밖의 규정이 하나 있습니다. 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어 다니는 곤충은 일반적으로 가증하게 여기라고 하시면서도 ‘그 발에 뛰는 다리가 있어서 땅에서 뛰는 것’은 먹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메뚜기와 베짱이와 귀뚜라미와 팥중이 종류가 예외가 됩니다. 왜 이런 작은 차이가 정함과 부정함을 가르는 기준이 되었을까요?

 

여기에 대해서는 스베덴보리가 놀라울 만큼 직접적인 설명을 남겼습니다.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1757-1759, AE) 543(계9:3)은 바로 레11:20-22를 인용하면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런 메뚜기 종류를 먹도록 허용한 이유를 설명합니다. ‘다리’는 영적 선과 결합된 자연적 선을 의미하고, ‘발’은 그 선에서 나오는 자연적 진리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에서 나오는 진리는 인간에게 받아들여지고 결합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런 곤충을 먹는 것이 허용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흥미로운 원리를 보여 줍니다. 메뚜기는 땅 가까이 사는 낮은 생물입니다. 가장 높은 천적인 것을 직접 표상하는 동물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선과 결합되어 있고, 거기에서 자연적인 진리가 나온다면 그것은 인간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 됩니다. 중요한 것은 자연적인가 영적인가의 단순한 대립이 아니라 자연적인 것이 무엇과 연결되어 있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에서 자연적 인간은 제거되어야 할 인간이 아닙니다. 자연적 인간도 거듭나야 합니다. 우리의 몸과 직업과 돈과 음식과 휴식과 인간관계와 일상의 즐거움은 그 자체로 악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자기애와 세상 사랑에 지배되는가, 아니면 영적인 선과 체어리티를 섬기는가입니다.

 

예를 들어 돈을 버는 것은 매우 자연적인 일입니다. 그러나 돈 자체를 사랑하고 그것으로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려 한다면 자연적인 것이 자기애와 결합한 것입니다. 반대로 가족을 책임지고 다른 사람을 돕고 선한 쓰임을 하기 위해 정직하게 일하여 돈을 번다면 같은 자연적 활동이 영적인 선과 연결됩니다. 음식과 휴식과 취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들이 삶의 목적이 될 때와 선한 쓰임을 위한 몸과 마음을 돌보는 수단이 될 때는 그 내적 질이 다릅니다.

 

그래서 이 작은 곤충의 ‘뛰는 다리’는 자연적인 삶을 무조건 버리지 말라는 중요한 가르침을 품고 있습니다. 다만 물리적으로 위로 뛰는 행위 자체를 영적 상승이라고 단순하게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직접 강조하는 핵심은 ‘영적 선과 결합된 자연적 선’과 ‘그 선에서 나오는 자연적 진리’입니다.

 

거듭남은 인간을 세상에서 떼어내어 순수하게 영적인 존재로 만드는 과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평범한 자연적 삶까지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과정입니다. 일하고, 먹고, 쉬고, 가족을 돌보고, 사람을 만나고, 작은 친절을 행하는 모든 일이 체어리티와 연결될 때 자연적인 삶도 천국의 질서를 섬기게 됩니다.

 

따라서 레11의 메뚜기 규례는 뜻밖의 희망을 보여 줍니다. 땅에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부정한 것이 아닙니다. 자연적인 것이라도 영적인 선과 결합되어 그 선에서 진리가 나오면 인간에게 받아들여져 삶의 일부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자연적인 삶을 버리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삶까지 거듭나게 하십니다. (SWC.레11 심화 2)

 

 

 

SWC.레11 심화3, ‘왜 부정한 짐승의 주검은 만지기만 해도 부정해졌을까?’

SWC.레11 심화3. ‘왜 부정한 짐승의 주검은 만지기만 해도 부정해졌을까?’ 레11에서는 ‘먹지 말라’는 명령만큼이나 ‘만지지 말라’는 명령이 반복됩니다. 특히 부정한 짐승의 주검을 만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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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11 심화1,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은 왜 나뉘었을까? - 음식법에 감추어진 애정의 분별’

SWC.레11 심화1.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은 왜 나뉘었을까? - 음식법에 감추어진 애정의 분별’ 레11을 읽으면 가장 먼저 생기는 질문은 ‘하나님께서는 왜 어떤 동물은 정하다고 하고 어떤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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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7)

 

AC.129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받아들인 원리들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원리들이 아무리 거짓되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모든 지식과 추론은 그 원리들을 지지하는데, 그것들을 뒷받침하는 무수한 생각들이 그의 마음에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거짓된 것 안에서 더욱 확증됩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보고 이해하기 전에는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원리로 삼는 사람은 결코 믿을 수 없습니다.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은 눈으로 볼 수 없고 상상력으로 그려 낼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참된 질서는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곧 그분의 말씀으로부터 지혜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뒤따르며, 그는 이성과 기억지식에 관한 것들에서도 밝아집니다. 학문들을 배우는 것은 결코 금지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그의 삶에 유용하고 즐거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이라 해서 세상의 학자들처럼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금지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 출발 원리는 주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어야 하며, 가능한 한 영적이고 천적인 진리들을 자연적인 진리들로 확증하되, 학문 세계에 익숙한 표현들을 사용하여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의 출발점은 주님이어야 하고 자기 자신이어서는 안 됩니다. 전자는 생명이고 후자는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Everyone may know that man is governed by the principles he assumes, be they ever so false, and that all his knowledge and reasoning favor his principles; for innumerable considerations tending to support them present themselves to his mind, and thus he is confirmed in what is false. He therefore who assumes as a principle that nothing is to be believed until it is seen and understood, can never believe, because spiritual and celestial things cannot be seen with the eyes, or conceived by the imagination. But the true order is for man to be wise from the Lord, that is, from his Word, and then all things follow, and he is enlightened even in matters of reason and of memory-knowledge [in rationalibus et scientificis]. For it is by no means forbidden to learn the sciences, since they are useful to his life and delightful; nor is he who is in faith prohibited from thinking and speaking as do the learned of the world; but it must be from this principle—to believe the Word of the Lord, and, so far as possible, confirm spiritual and celestial truths by natural truths, in terms familiar to the learned world. Thus his starting point must be the Lord, and not himself; for the former is life, but the latter is death.

 

해설

AC.129는 사람이 왜 잘못된 출발점에 서면 이후의 지식과 추론까지 그 잘못을 강화하게 되는지를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은 자기가 먼저 받아들인 원리들에 의해 지배된다고 말합니다. 그 원리가 아무리 거짓되어도 사람의 지식과 추론은 그 원리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며, 그것을 뒷받침하는 수많은 생각들이 마음에 떠오르기 때문에 결국 사람은 자기의 거짓된 원리 안에서 더욱 굳어집니다.

 

이것은 AC.128에서 본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의 태도를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그는 ‘내가 보고 이해할 수 있어야 믿겠다’는 원리를 먼저 세웁니다. 그런데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은 자연적인 눈으로 볼 수 없고 상상력으로 완전히 그려 낼 수도 없으므로, 이 원리를 끝까지 고수하면 결국 믿을 수 있는 것은 자연적인 것뿐이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문제 삼는 것은 보거나 이해하려는 노력 자체가 아니라, ‘보이고 이해되어야만 참이다’라는 원리를 신앙보다 먼저 세우는 것입니다.

 

반대로 참된 질서는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곧 그분의 말씀으로부터 지혜로워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도 생각과 이해가 중단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과 말씀을 출발점으로 삼을 때 ‘모든 것이 뒤따르며’, 사람은 이성과 기억지식에 관한 것들에서도 밝아진다고 합니다. 따라서 주님으로부터 지혜로워진다는 것은 이성과 지식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올바른 빛을 받아 제 기능을 하게 되는 질서입니다.

 

AC.129에서 가장 눈에 띄는 문장은 ‘학문들을 배우는 것은 결코 금지되어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AC.80 이후 계속 생길 수 있었던 오해를 스베덴보리 자신이 매우 직접적으로 차단하는 표현입니다. 학문은 삶에 유용하고 즐거우며, 신앙 안에 있는 사람도 세상의 학자들처럼 생각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가 감각과 기억지식으로 신앙의 신비를 탐구하지 말라고 한 것을 지적 탐구나 학문 자체에 대한 거부로 읽는 것은 문맥과 맞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학문과 이성이 어떤 위치에서 사용되는가입니다.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은 먼저 주님의 말씀을 믿고, 그 뒤 가능한 한 영적이고 천적인 진리들을 자연적인 진리들로 확증합니다. 이때 자연적인 진리는 영적인 진리를 만들어 내는 근원이 아니라 그것을 확인하고 설명하는 수단으로 사용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심지어 학문 세계에 익숙한 표현들을 사용하여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신앙과 학문은 서로 적대적인 영역이 아니라, 질서가 바로 서 있을 때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AC.128과 AC.129는 서로 정확히 맞물립니다. AC.128에서는 이성·기억지식·감각·자연적인 것들을 사용하여 신앙의 진리를 확증할 수 있다고 했고, AC.129에서는 학문을 배우고 학자들처럼 생각하고 말하는 것도 금지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두 번호 모두 문제를 ‘사용 여부’가 아니라 ‘출발점’에 둡니다. 자기 자신과 세상을 출발점으로 삼아 신적인 것을 판단하려 하면 질서가 전도되지만, 주님과 말씀을 출발점으로 삼아 이성과 학문을 사용하면 그것들은 진리를 확증하고 밝히는 쓰임을 하게 됩니다.

 

마지막 문장은 이 모든 내용을 가장 짧게 압축합니다. ‘출발점은 주님이어야 하고 자기 자신이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전자는 생명이고 후자는 죽음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문제는 결국 지식을 많이 가지느냐 적게 가지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진리의 근원으로 삼느냐, 아니면 주님을 근원으로 삼느냐의 문제입니다. 주님을 출발점으로 할 때 이성과 학문과 기억지식은 생명의 질서 안에서 살아나지만, 자기 자신을 출발점으로 할 때 같은 능력들도 거짓을 확증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AC.129)

 

 

 

AC.130, 창2:17, ‘세상으로부터 지혜로워질 때 에덴과 네 강의 질서가 뒤집힌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7) AC.130세상으로부터 지혜로워지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이 그의 ‘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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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8, 창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다 - 감각과 기억지식을 출발점으로 삼는 신앙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7) AC.128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볼 수 있도록 감각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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