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C.레10 심화

3. ‘왜 제사장에게 포도주와 독주를 금하셨을까? -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분별한다는 것’

 

나답과 아비후 사건 직후 여호와께서는 아론에게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라고 명하십니다. 이것 때문에 ‘나답과 아비후가 술에 취해 다른 불을 드렸던 것이 아닌가?’라고 추측하기도 하지만, 성경 본문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음주 여부를 사실처럼 연결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포도주 금지 규례가 이 자리에 놓인 영적 이유에 대해서는 스베덴보리가 직접적인 단서를 줍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71(창9:21)은 레10:8-10을 직접 인용하면서 ‘술 취함’이 신앙의 진리에 관한 오류와 혼란을 표상했기 때문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는 것이 금지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포도주 자체가 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AC.6377은 포도주가 좋은 의미에서는 영적 사랑의 선과 신앙의 선을 의미하며,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의 신적 선에서 나오는 신적 진리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성찬에서도 포도주가 거룩하게 사용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포도주에는 반대 의미도 있습니다. 진리가 악과 섞여 왜곡되면 포도주는 거짓을 나타내며, ‘술 취함’은 진리와 거짓을 분별하지 못하고 오류 속에서 비틀거리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레10의 핵심은 술이라는 물질보다 ‘분별력을 잃는 상태’입니다.

 

실제로 본문 자체가 이유를 말합니다. ‘그리하여야 너희가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고’ 백성에게 여호와의 규례를 가르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에게 필요한 것은 종교적 흥분이 아니라 맑은 영적 분별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의 ‘다른 불’과 연결됩니다. 나답과 아비후의 문제는 거룩해 보이는 것과 실제로 거룩한 것을 분별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향로와 향과 성소와 제사장이라는 외적 요소만 보면 모두 거룩했습니다. 그러나 그 안의 불은 다른 불이었습니다. 외적 거룩함과 내적 거룩함을 구별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같은 위험이 있습니다. 감동적이라고 해서 모두 신적이지 않고, 열정적이라고 해서 모두 체어리티에서 나온 것도 아니며, 성경 구절을 사용한다고 해서 모든 교리가 말씀에서 나온 것도 아닙니다. ‘내가 강하게 느낀다’는 사실과 ‘이것이 주님의 진리다’라는 사실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영적 생활은 단순한 흥분보다 분별을 향합니다. 무엇이 선처럼 보이는가보다 그 선의 근원이 무엇인지, 무엇이 진리처럼 들리는가보다 그것이 실제 말씀과 주님의 사랑에 일치하는지를 살핍니다.

 

특히 다른 사람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에게 이 분별은 더욱 중요합니다. 레10:11은 제사장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여호와의 규례를 가르쳐야 한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분별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진리를 가르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포도주 금지 규례는 레10의 중심 주제와 정확히 맞닿습니다. 다른 불과 주님의 불을 분별하고,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분별하며,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분별하는 것, 이것이 주님의 쓰임을 맡은 사람에게 필요한 영적 맑음입니다. (SWC.레10 심화 3)

 

 

 

SWC.레10 심화4, ‘나답과 아비후는 왜 진영 밖으로 옮겨졌을까?’

SWC.레10 심화4. ‘나답과 아비후는 왜 진영 밖으로 옮겨졌을까?’ 나답과 아비후가 죽은 뒤 모세는 미사엘과 엘사반에게 그들을 ‘성소 앞에서 진영 밖으로’ 메고 나가라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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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10 심화2, 왜 같은 ‘여호와 앞의 불’이 제물은 받고 나답과 아비후는 삼켰을까?

SWC.레10 심화2. 왜 같은 ‘여호와 앞의 불’이 제물은 받고 나답과 아비후는 삼켰을까? 레9:24과 레10:2를 나란히 놓으면 놀라운 문장이 반복됩니다. 레9에서는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번제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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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9 심화

4. ‘왜 아론은 제사를 마친 뒤 손을 들어 백성을 축복했을까?’

 

레9:22에서 아론은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를 모두 마친 뒤 백성을 향하여 손을 들어 축복합니다. 제사장으로 위임된 아론이 처음으로 실제 사역을 수행한 뒤 행한 마지막 행동이 ‘축복’이라는 점은 매우 의미가 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축복을 단순히 좋은 일이 일어나기를 비는 종교적 인사로 보지 않습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422(창12:3)는 ‘축복’이 주님에게서 오는 모든 선과 진리, 곧 천적·영적·자연적 차원의 좋은 것들을 포괄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제사장이 백성을 축복한다는 것은 아론 자신이 복을 만들어 백성에게 주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제사장의 쓰임을 통해 백성에게 전달되는 것을 표상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레8의 장면을 기억하면 더욱 아름답습니다. 레8에서는 아론의 ‘손’에 위임식의 제물들이 놓였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것이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의 것이며 주님에게서 온다는 인정을 나타낸다고 설명했습니다. 그 손이 레9에서는 백성을 향해 올라갑니다.

 

즉 먼저 받아야 줄 수 있습니다. 레8에서는 손이 주님에게서 받고, 레9에서는 그 손이 백성을 향해 축복합니다. 이것이 쓰임의 질서입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자기 것으로 움켜쥐지 않고 이웃에게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영적 쓰임의 기준은 ‘내가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가?’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은 것이 나를 통해 얼마나 선한 쓰임으로 흘러가는가?’입니다. 진리를 많이 알고 있다면 그것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돕는 데 사용해야 하고, 물질을 받았다면 선한 쓰임에 사용하며, 경험과 지혜를 받았다면 다른 사람을 살리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론은 ‘손을 들어’ 축복합니다. 손이 능력과 행함을 나타낸다는 스베덴보리의 일반적인 상응을 생각하면 축복은 말만의 행위가 아니라 선을 실제로 전달하는 쓰임과 잘 연결됩니다. 진정한 축복은 ‘복 받으십시오’라고 말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내가 가진 것을 통해 실제로 이웃에게 선이 전달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레9의 첫 제사장 사역은 자기 영광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아론이 제사를 성공적으로 마쳤으니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손이 백성을 향해 올라갑니다. 그리고 곧이어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이것이 주님의 쓰임에 부름받은 사람의 방향입니다. 주님에게서 받고 이웃에게 흘려보내며, 마지막에는 사람의 시선이 자신에게 머물지 않고 주님께 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레8에서 채워진 손이 레9에서 축복하는 손이 되는 것, 이것이 위임에서 쓰임으로 나아가는 거듭남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SW.레9 심화 4)

 

 

 

SWC.레9 심화5, ‘왜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제물을 살랐을까?’

SWC.레9 심화5. ‘왜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제물을 살랐을까?’ 레9의 마지막은 장엄합니다. 아론이 모든 제사를 마치고 백성을 축복하고,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 다시 백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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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9 심화3,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난다는 것은 무엇일까?’

SWC.레9 심화3.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난다는 것은 무엇일까?’ 레9에는 같은 약속이 두 번 나옵니다. 6절에서 모세는 ‘여호와의 영광이 너희에게 나타나리라’고 말하고, 23절에서는 모든 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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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9 심화

2. ‘왜 아론은 백성을 위한 제사보다 자기 속죄제를 먼저 드려야 했을까?’

 

아론은 이미 레8에서 제사장으로 위임되었습니다. 물로 씻었고 거룩한 옷을 입었으며 관유를 받았고, 귀와 손과 발에 위임식 숫양의 피까지 발랐습니다. 그런데 레9에서 실제 사역을 시작하려 하자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이 또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한 속죄제와 번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모세는 아론에게 ‘네 속죄제와 네 번제를 드려서 너를 위하여,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라’고 합니다. 실제 순서도 아론 자신의 제사가 먼저이고 그 후 백성의 제사가 이어집니다. 이것은 제사장이라는 직분이 인간 자신을 자동으로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님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레4에서 보았듯 속죄제는 악과 거짓에서의 정결을 표상합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을 위해 거룩한 쓰임을 행하는 사람도 계속해서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주님 앞에서 살펴야 합니다. 직분은 거듭남을 대신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영적 쓰임을 많이 맡을수록 이 원리는 더 중요해집니다. 다른 사람의 문제를 다루다 보면 자기 문제를 보지 못하기 쉽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말씀을 적용하다 보면 그 말씀이 먼저 자기 자신에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회개를 말하면서 자기 분노와 교만과 자기애는 정당화할 수도 있습니다.

 

이때 쓰임은 아주 미묘하게 proprium의 도구가 됩니다. ‘나는 가르치는 사람이다’, ‘나는 돕는 사람이다’, ‘나는 영적인 사람이다’라는 자기상이 오히려 자기 악을 보지 못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레9의 첫 실제 제사장 사역은 남을 위한 제사가 아니라 자신을 위한 속죄제로 시작합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완벽하게 깨끗해진 뒤에야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도 계속 주님의 정결을 필요로 하는 사람임을 인정하면서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 인정은 오히려 체어리티를 깊게 합니다. 내가 주님의 자비 없이는 설 수 없는 사람임을 알수록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쉽게 정죄하기 어렵습니다. 자기 속죄제를 먼저 드린 제사장이 백성의 속죄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레9의 순서는 모든 영적 쓰임에 하나의 원리를 줍니다. ‘먼저 네 자신을 주님 앞에 세우라.’ 남의 악을 보기 전에 자기 악을 보고, 남에게 말씀을 적용하기 전에 자신에게 적용하며, 다른 사람을 정결하게 하려 하기 전에 자신도 주님의 정결하심 아래 있는 사람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때 쓰임은 자기 의가 아니라 체어리티에서 흘러나올 수 있습니다. (SWC.레9 심화 2)

 

 

 

SWC.레9 심화3,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난다는 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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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레9 심화1, 왜 제사장 위임식이 끝난 다음 날을 ‘여덟째 날’이라고 했을까?

SW.레9 심화1. 왜 제사장 위임식이 끝난 다음 날을 ‘여덟째 날’이라고 했을까? 레9은 단순히 ‘다음 날’이라고 하지 않고 굳이 ‘여덟째 날에’라고 시작합니다. 앞 장에서 아론과 그의 아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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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8 심화

2. ‘왜 관유를 아론의 머리에 부었을까?’

 

레8:12에서 모세는 관유를 아론의 머리에 붓고 그에게 발라 거룩하게 합니다. 기름을 손이나 옷에 조금 바른 것이 아니라 ‘머리에 붓습니다.’ 제사장 위임식에서 왜 기름 부음이 이토록 중요한 것일까요?

 

스베덴보리는 출29의 병행 본문을 해설하면서 관유를 ‘신적 선으로의 취임’을 표상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아론은 최고 의미에서 주님을 신적 선에 관하여 표상하고, 그의 머리에 기름을 붓는 것은 주님의 인성 전체에 있는 신적 선을 나타냅니다. 기름이 사랑의 선을 의미한다는 것은 제사의 여러 규례에서도 반복해서 확인됩니다.

 

따라서 제사장직의 가장 깊은 중심은 ‘사랑의 선’입니다. 제사장은 진리를 알고 가르치는 사람이지만 그 진리의 생명은 선에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진리는 차갑고,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은 생명이 없습니다.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외적으로는 제사장의 옷을 입었어도 그 안에 관유가 없는 셈입니다.

 

관유가 ‘머리’에 부어진다는 것도 중요합니다. 머리는 몸 전체의 첫째와 가장 높은 부분이며, 스베덴보리의 상응에서 첫째와 가장 높은 것은 전체를 포함합니다. 따라서 머리에 기름을 붓는 것은 사랑의 선이 일부 행동에만 붙는 것이 아니라 전체 사람을 지배하고 질서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목회나 교회 봉사에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가정을 섬기든, 직장에서 일하든, 어려운 사람을 돕든, 말씀을 가르치든, 그 쓰임을 실제로 천국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은 그 일을 움직이는 사랑입니다. 똑같은 행동도 자기 명예를 위해 할 수도 있고 이웃의 선을 위해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레8에서는 씻음 다음에 옷을 입히고, 그 후 관유를 붓습니다. 진리로 정결하게 되고 진리를 입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진리가 사랑의 선에서 살아 움직여야 합니다. 진리가 길을 보여 준다면 사랑은 그 길을 실제로 걷게 하는 생명입니다.

 

참된 기름 부음은 어떤 특별한 종교적 감정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이 우리의 의지 안으로 들어와 ‘선한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가 아니라 ‘선한 것을 사랑하기 때문에’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듭남이 깊어지면서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따라서 아론의 머리에 부어진 관유는 제사장이라는 지위에 권위를 더하는 의식이 아닙니다. 모든 거룩한 쓰임의 근원이 사랑의 선이라는 선언입니다. 진리가 아무리 많아도 사랑이 없으면 생명이 없으며,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선이 전체 사람을 채울 때 비로소 진리는 살아 있는 쓰임이 됩니다. (SWC.레8 심화 2)

 

 

 

SW.레8 심화3, ‘왜 피를 오른쪽 귀와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에 발랐을까?’

SW.레8 심화3. ‘왜 피를 오른쪽 귀와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에 발랐을까?’ 레8:23-24는 제사장 위임식 가운데 가장 낯설면서도 인상적인 장면입니다. 모세는 위임식 숫양의 피를 아론과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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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레8 심화1, ‘왜 제사장은 옷을 입기 전에 먼저 물로 씻어야 했을까?’

SW.레8 심화1. ‘왜 제사장은 옷을 입기 전에 먼저 물로 씻어야 했을까?’ 레8의 제사장 위임식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순서입니다. 모세는 아론에게 화려한 에봇이나 흉패부터 입히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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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6 심화

3. ‘왜 번제의 재까지 거룩하게 다루어야 했을까?’

 

번제가 모두 타고 나면 남는 것은 재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제사는 끝났고 재는 치워야 할 폐기물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레6은 그 재를 처리하는 일까지 매우 세밀하게 규정합니다. 제사장은 세마포 긴 옷과 세마포 속바지를 입고 재를 제단 곁에 두었다가, 다시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그 재를 ‘진영 바깥 정결한 곳’으로 가져갑니다.

 

여기서 가장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세마포의 의미입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9959(출28:42)는 세마포를 외적 진리, 곧 자연적 진리와 연결하면서 바로 레6:10-11의 이 장면을 직접 인용합니다. 제사장이 재를 처리할 때조차 세마포 옷을 입어야 했던 것은 이 마지막 외적 처리까지 진리의 질서 안에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본문은 재를 단순히 ‘진영 밖’에 버리라고 하지 않습니다. ‘진영 바깥 정결한 곳’으로 가져가라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제물은 이미 불에 완전히 살라졌지만 그 결과물까지 아무렇게나 취급되지 않습니다. 제사가 끝난 뒤 남은 것에도 질서가 있는 것입니다.

 

다만 여기에서는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번에 확보한 스베덴보리 원전 가운데 레6의 ‘재’ 자체를 직접적으로 세밀하게 풀이하는 강한 근거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재는 정확히 무엇을 상응한다’고 하나의 공식으로 못 박지는 않겠습니다. 오히려 확실한 본문의 구조를 붙드는 편이 좋습니다. 거룩한 제사의 마지막 결과까지 정결한 질서 속에서 처리되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거듭남에도 좋은 통찰을 줍니다. 어떤 악과의 싸움이 끝났다고 해서 그 경험 전체를 무가치한 것으로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어떤 시험에서 건져 내셨다면 그 과정에서 배운 진리와 겸손, 자기 인식은 이후의 삶에 남습니다. 그러나 지나간 악 자체를 계속 붙잡고 살아갈 필요도 없습니다. 끝난 것은 끝난 자리로 옮겨야 합니다.

 

특히 ‘다른 옷을 입고’ 진영 밖으로 나가는 장면은 제단에서 봉사하는 일과 그 결과를 밖으로 옮기는 일이 서로 다른 외적 질서를 필요로 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모든 영적 경험을 같은 방식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각 상태에 맞는 질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번제의 재는 적어도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남깁니다. ‘주님께서 이미 태워 없애신 것을 나는 아직 제단 위에 붙들고 있지는 않은가?’입니다. 회개한 죄를 끝없이 되씹고, 이미 지나간 실패를 자기 정체성으로 붙들고 있는 것은 정결의 완성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끝내신 것은 정결한 질서 가운데 제자리로 옮겨 놓고, 제단에서는 다시 새로운 불과 새로운 번제가 시작되어야 합니다. (SWC.레6 심화 3)

 

 

 

SW.레6.심화4, ‘왜 제사장은 제물을 먹어야 했을까? - 거룩한 것을 자기 삶으로 삼는다는 것’

SW.레6.심화4. ‘왜 제사장은 제물을 먹어야 했을까? - 거룩한 것을 자기 삶으로 삼는다는 것’ 레6에는 현대 독자에게 조금 낯선 장면이 반복됩니다. 하나님께 드린 소제와 속죄제의 일부를 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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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레6.심화2, ‘왜 제단의 불은 밤새도록, 끊임없이 꺼지지 않아야 했을까?’

SW.레6.심화2. ‘왜 제단의 불은 밤새도록, 끊임없이 꺼지지 않아야 했을까?’ 레6에서 가장 강렬하게 반복되는 명령은 ‘불을 끄지 말라’는 것입니다. 번제물은 밤새도록 제단 위에 있고, 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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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2 심화

3. ‘왜 소제의 일부만 불사르고 나머지는 제사장이 먹었을까?’

 

레위기 1장의 번제와 레위기 2장의 소제 사이에는 눈에 띄는 차이가 있습니다. 번제에서는 제물 전체를 제단 위에서 불살랐습니다. 그래서 레1에는 반복해서 ‘그 전부를 제단 위에서 불살라’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레2에서는 고운 가루와 기름과 유향 가운데 일부만 ‘기념물’로 제단 위에서 불사르고, 남은 것은 아론과 그의 자손들에게 돌립니다. 왜 하나님께 드린 예물을 사람이 다시 먹는 것일까요?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2177(창18:6)은 이 부분을 매우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남은 소제를 먹는 것이 ‘인간 편에서의 상호성’과 ‘자기 것으로 받아들임’을 표상하며, 그로 말미암아 사랑과 체어리티를 통한 결합이 이루어진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자기 것으로 받아들임’은 인간이 선과 진리의 주인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선과 진리의 근원은 언제나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것들을 인간의 바깥에 놓아두지 않으십니다. 인간이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생각하고, 원하고, 행함으로써 마치 자신의 것처럼 살아가게 하십니다. 그래야 실제 결합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음식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이 식탁 위에 놓여 있어도 바라보기만 해서는 몸의 생명이 되지 않습니다. 먹고 소화하여 자신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의 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책 안에 있는 진리, 설교에서 들은 진리, 머릿속으로 이해한 교리는 아직 완전히 우리의 삶이 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받아 실제로 살아야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아는 것과 나를 힘들게 한 사람에게 실제로 악으로 갚지 않는 것은 다릅니다. ‘거짓말하지 말라’는 진리를 아는 것과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정직하게 말하는 것은 다릅니다. 체어리티가 중요하다는 교리를 이해하는 것과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실제 선을 행하는 것도 다릅니다. 진리가 의지와 행동으로 내려와 삶이 될 때 비로소 영적으로 ‘먹은 것’이 됩니다.

 

그런데 소제의 일부는 먼저 제단 위에서 불살라집니다. 이것도 중요합니다. 인간이 진리와 선을 자기 삶으로 받아들이기 전에 그 모든 것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질서가 먼저 서 있습니다. 내가 선을 행했다고 해서 그 선의 근원이 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진리를 깨달았다고 해서 그 진리를 내가 만들어 낸 것도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인간이 자유롭게 받아 자신의 삶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제에는 매우 아름다운 왕복 운동이 있습니다. 주님에게서 선과 진리가 옵니다.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인간은 그것을 자신의 삶에서 실제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삶의 선을 다시 주님께 돌립니다. 주님께서 주시고, 인간은 받아 응답하며, 그 응답을 통해 다시 주님과 결합합니다.

 

AC.2177이 이것을 ‘상호성’이라고 표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과 인간의 결합은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물론 모든 선의 능력은 주님에게서 오지만, 인간에게는 그것을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응답하는 일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랑하시고 인간이 그 사랑에 응답하며, 주님께서 진리를 주시고 인간이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찬과도 매우 깊은 연결을 생각하게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소제와 전제가 교회와 천국에 속한 것들을 표상하며, 성찬의 떡과 포도주 역시 같은 방식으로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를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AC.10137, 출29:40). 성찬에서도 떡을 바라보기만 하지 않고 ‘먹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받아 자신의 영적 생명으로 삼는다는 표상입니다.

 

그래서 레2에서 제사장이 남은 소제를 먹는 장면은 사소한 제사 규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말씀의 진리가 어떻게 인간의 삶이 되는가를 보여 줍니다. 진리는 읽는 것에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이해하는 데서도 끝나서는 안 됩니다. 먹어야 합니다. 곧 받아들여 의지하고 행하며 살아야 합니다.

 

레1의 번제가 ‘나의 전부가 주님께 속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면, 레2의 소제는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내가 실제 삶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주님께 드리는 것과 주님에게서 받아 먹는 것이 서로 반대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의 순환입니다. 주님에게서 받고, 그것을 살아 내고, 다시 주님께 돌리는 것, 바로 그 안에서 주님과 인간의 결합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소제의 남은 것을 먹는다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 매우 실제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말씀을 읽고 있는가?’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나는 말씀을 먹고 있는가?’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진리가 오늘 나의 말과 선택과 관계와 행동이 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진리가 삶이 될 때, 주님께서 주신 선과 진리는 비로소 우리 안에 살아 있게 됩니다. (SWC.레2 심화 3)

 

 

 

SW.4, 레2, ‘고운 가루에 기름을 붓고 - 선과 진리가 하나 되어 삶의 예물이 되기까지’

※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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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4 심화 2, ‘왜 누룩과 꿀은 금하고 소금은 반드시 넣으라 하셨을까?’

SW.4 심화2. ‘왜 누룩과 꿀은 금하고 소금은 반드시 넣으라 하셨을까?’ 레위기 2장에서 가장 흥미로운 규정 가운데 하나는 누룩과 꿀은 제단에서 불사르지 못하게 하면서 소금은 모든 소제에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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