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7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하는 것’(hid from thy faces)이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에서 분리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여호와의 얼굴’(faces of Jehovah)의 의미에서 분명합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여호와의 얼굴’은 자비이며, 그 자비로부터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주님의 ‘얼굴’(faces)은 신앙의 선들을 의미합니다. That to be “hid from thy faces” signifies to be separated from all the good of the faith of love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faces of Jehovah.” The “face of Jehovah,” as before said, is mercy, from which proceed all the goods of the faith of love, and therefore the goods of faith are here signified by his “faces.”

 

해설

AC.387은 창4:14의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하리니’라는 말을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에서 분리되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그 근거를 ‘여호와의 얼굴’의 상응에서 찾습니다. 앞에서 이미 설명했듯이 ‘여호와의 얼굴’은 자비를 의미하며, 그 자비로부터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는 ‘얼굴’이라는 한 상응어를 설명하는 짧은 문장이면서도, 선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매우 분명하게 밝혀 주는 번호입니다.

 

가장 먼저 붙들어야 할 것은 ‘여호와의 얼굴은 자비’라는 말입니다. 성경의 문자적 표현에서는 하나님께서 얼굴을 보이시기도 하고 감추시기도 하며, 얼굴을 사람에게 향하시거나 돌리시는 것처럼 묘사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주님의 사랑과 자비 자체가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언제나 사랑이시며 자비이십니다. 따라서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한다’는 것은 주님께서 어느 순간 자비를 거두시고 가인에게서 얼굴을 돌리셨다는 뜻이 아니라, 가인이 그 자비를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가인의 ‘저주’를 설명하면서 계속 지켜 온 원리와 같습니다. 주님께서 먼저 사람에게서 돌아서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악과 거짓으로 말미암아 주님에게서 돌아섭니다. 태양은 계속 빛을 비추고 있지만 사람이 등을 돌리거나 문을 닫으면 어둠 가운데 있게 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물론 이것은 이해를 위한 비유일 뿐이지만,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한다’는 상태가 주님의 자비가 사라진 상태가 아니라 그 자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간의 상태라는 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런데 AC.387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여호와의 얼굴이 자비일 뿐 아니라 ‘그 자비로부터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이 나온다’고 합니다. 이것은 이번 번호에서 매우 중요한 문장입니다. 사람에게 있는 참된 선의 근원을 사람 자신에게 두지 않습니다.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은 여호와의 얼굴, 곧 주님의 자비로부터 나옵니다. 사람이 선을 의도하고 행한다고 해서 그 선의 최초 근원이 인간의 proprium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사람이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자기 삶에서 의지하고 행할 때 그것이 사람 안에서 신앙의 선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한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을 느끼지 못한다거나 종교적인 위로가 사라졌다는 정도의 의미가 아닙니다. 훨씬 깊게는 신앙에 생명을 주는 선의 근원과의 결합을 잃은 상태입니다. 가인은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체어리티를 신앙 아래에 두려 했으며, 마침내 아벨을 죽이는 것으로 표상된 체어리티의 소멸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체어리티를 제거한 결과는 신앙만 깨끗하게 남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랑의 신앙에 속한 선에서 분리되고, 결국 그 선의 근원이신 주님의 자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사랑의 신앙’이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참된 신앙은 사랑과 독립하여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생명을 받는 신앙이 참된 신앙입니다. 따라서 ‘사랑의 신앙에 속한 선’이라는 표현은 신앙과 사랑을 두 개의 독립된 것으로 놓은 뒤 나중에 결합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신앙 자체가 사랑과 결합되어 있으며, 그 신앙 안에서 선이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인이 주장했던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과 정반대입니다.

 

AC.386과 AC.387을 나란히 놓으면 창4:14의 두 표현도 아름답게 대응합니다. ‘지면에서 쫓겨남’은 교회의 진리에서 분리되는 것이고,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함’은 사랑의 신앙에 속한 선에서 분리되는 것입니다. 하나는 진리의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선의 측면입니다. 결국 가인의 길은 진리만 잃는 것도 아니고 선만 잃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한 결과 선과 진리 모두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이어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어 무엇이 진리고 선인지 알지 못하게 된다는 설명은 바로 이 두 가지 분리의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AC.385-387의 구조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교회의 진리에서 분리되고, 주님의 자비에서 나오는 사랑의 신앙의 선에서 분리되자, 선과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고 유리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악과 거짓이 그를 멸망시킬 위험에 놓입니다.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하나의 교리적 오류가 점차 인간의 영적 생명 전체를 흔드는 결과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함’을 주님의 거절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바로 다음 전개가 그것을 더욱 분명히 보여 줍니다. 가인은 주님의 얼굴에서 숨겨졌다고 느끼고 자신이 죽임을 당할 것을 두려워하지만, 주님은 그를 완전히 버려두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에게 표를 주어 보존하십니다. 주님의 얼굴이 자비라는 AC.387의 선언은 이후 ‘가인의 표’를 이해하는 열쇠 가운데 하나가 됩니다. 인간이 자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에 빠졌어도 주님의 자비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AC.384에서 가인에게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다고 한 것도 여기와 연결하여 볼 수 있습니다. 그 선의 근원이 가인 자신에게 있었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번 번호가 모든 선의 근원을 분명히 밝혀 줍니다.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은 주님의 자비로부터 나옵니다. 그러므로 가인에게 아직 남아 있던 선의 어떤 것도 궁극적으로는 주님에게서 온 것이며, 주님께서는 악과 거짓이 그것을 완전히 파괴하지 못하도록 보존하실 수 있습니다. 이후의 가인의 표를 단순한 형벌의 완화가 아니라 주님의 보존 섭리와 연결하여 볼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결국 AC.387의 중심은 ‘여호와의 얼굴은 자비’라는 짧은 선언에 있습니다. 주님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단지 주님을 지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자비에서 흘러오는 사랑과 선을 받아들이는 것과 연결됩니다. 반대로 그 얼굴에서 숨겨진다는 것은 주님의 자비가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이 그 자비에서 나오는 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가인의 비극은 주님께서 자비를 거두신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함으로써 그 자비에서 나오는 사랑의 신앙의 선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 데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가인에게도 주님은 보존의 길을 마련하십니다. 이것이 곧이어 나타날 ‘가인의 표’를 바라보게 하는 중요한 준비가 됩니다.

 

 

 

AC.388, 창4:14, ‘피하며 유리하는 자 - 선과 진리를 알지 못하는 상태’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8‘땅에서 피하

bygrace.kr

 

AC.386, 창4:14, ‘지면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 교회의 진리에서 분리되는 것’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6‘지면에서 쫓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And Cain said unto Jehovah, Mine iniquity is greater than can be taken away. (창4:13)

 

AC.383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Cain said unto Jehovah)는 어떤 내적 고통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악 가운데 있음을 어느 정도 고백한 것을 의미합니다. ‘내 죄악이 너무 커서 사함을 받을 수 없나이다’(mine iniquity is greater than can be taken away)는 그로 인한 절망을 의미합니다. “Cain said unto Jehovah” signifies a certain confession that he was in evil, induced by some internal pain; “mine iniquity is greater than can be taken away” signifies despair on that account.

 

해설

AC.383은 창4:13의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의 속뜻을 설명하면서 가인의 상태에 새로운 변화가 나타났음을 보여 줍니다. 앞에서는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도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대답했습니다. 체어리티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라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어떤 내적 고통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악 가운데 있음을 어느 정도 고백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완전한 회개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이전의 완강한 부인과는 다른 상태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기서 ‘a certain confession’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자기의 악을 고백했다’고 단정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제한된 표현을 사용합니다. 또한 그 고백이 ‘some internal pain’, 곧 ‘어떤 내적 고통’에 의해 일어났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것을 곧바로 참된 회개나 거듭남의 시작이라고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가인은 자신이 처한 상태 때문에 내적으로 고통을 느꼈고, 그 고통 가운데 적어도 자기가 악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앞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와 비교하면 분명한 변화이지만, 아직 그 악에서 돌이켜 선을 향하는 완전한 회개라고 말할 단계는 아닙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이 자기 악 때문에 고통을 느낀다고 해서 그 고통이 언제나 악 자체를 미워하는 회개의 고통인 것은 아닙니다. 악의 결과가 두렵기 때문에 괴로울 수도 있고, 자기에게 닥친 손실이나 형벌 때문에 괴로울 수도 있으며, 자기 상태가 회복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절망할 수도 있습니다. 참된 회개에서는 ‘이 악 때문에 내가 고통스럽다’는 데서 더 나아가 ‘이것이 주님을 거스르는 악이므로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는 방향 전환이 필요합니다. AC.383은 아직 가인에게 그 전체 과정이 일어났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의 고백’이라는 제한된 표현이 적절합니다.

 

이어지는 ‘내 죄악이 너무 커서 사함을 받을 수 없나이다’는 ‘그로 인한 절망’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가인의 시선은 자신의 악을 인정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이것은 더 이상 제거될 수도, 용서될 수도 없다’는 절망으로 내려갑니다. 악을 악으로 보는 것과 ‘나는 이 악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고 믿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전자는 회개의 출발점이 될 수 있지만, 후자는 오히려 사람을 움직이지 못하게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악을 보지 않는 것도 위험하지만, 자기 악을 보고 주님의 자비보다 그것을 더 크게 여기는 것 역시 위험합니다.

 

이 점에서 AC.383은 앞의 AC.379-382와도 연결됩니다. 체어리티가 소멸되면서 주님과 사람을 연결하는 결속이 끊어지고,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결실하지 못하며, 결국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하여 피하며 유리하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그런 상태에 놓인 가인이 이제 자기 악의 결과를 느끼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체어리티와의 살아 있는 결합을 잃었기 때문에 그 인식은 곧바로 주님의 자비를 향한 신뢰로 나아가기보다 절망으로 기울어집니다. 악을 깨달았지만 그 악보다 크신 주님의 자비를 아직 바라보지 못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도 한 가지 균형이 필요합니다. AC.383의 ‘절망’을 모든 영적 절망에 대한 일반론으로 곧바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다른 곳에서는 거듭남 과정의 시험 가운데 사람이 자기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절실히 느끼는 상태도 다룹니다. 그러한 상태는 주님만을 의지하도록 이끄는 과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가인의 문맥에서 말하는 절망은 체어리티를 소멸시키고 선과 진리의 방향을 잃은 결과로 나타나는 절망입니다. 따라서 다른 종류의 영적 고통이나 시험과 섞어 해석하기보다 우선 이 문맥 자체를 따라가는 것이 안전합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가인이 다시 ‘여호와께’ 말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이후의 전개를 보기 위해 중요하게 남겨 둘 필요가 있습니다. 가인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고 악 가운데 있으며 절망한다고 해서 주님과의 모든 관계가 이야기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는 여호와께 자기 상태를 말하고 있으며, 이어지는 구절에서는 자신의 두려움을 호소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후에는 가인을 죽이지 못하도록 ‘표’를 주시는 주님의 보존이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AC.383의 절망만을 보고 가인이 완전히 버림받았다고 결론짓는 것은 이후의 흐름과 맞지 않습니다.

 

이 점은 앞에서 살펴본 ‘저주’의 의미와도 연결됩니다. 저주는 주님께서 사람에게서 돌아서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악으로 말미암아 선에서 돌아서는 상태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돌아섰다고 해서 주님의 자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여전히 그 사람의 보존과 궁극적인 선을 위해 역사하십니다. 가인의 절망은 ‘내 죄악은 너무 커서 제거될 수 없다’고 느끼지만, 이어지는 이야기는 인간의 절망이 주님의 섭리와 자비의 마지막 말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줄 준비를 합니다.

 

목회적으로도 이 구별은 중요합니다. 자기 안의 악을 발견하는 것은 거듭남에서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악을 발견하는 목적은 ‘나는 이렇게 악하니 끝났다’는 결론에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힘으로는 악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주님께 돌이키는 데 있습니다. 자신의 악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면서도 그 악을 주님의 구원 능력보다 더 크게 만들어서도 안 됩니다. 참된 겸손은 자기 악을 정확히 보면서 동시에 모든 선과 구원의 능력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있습니다.

 

결국 AC.383은 가인의 내면에서 일어난 미묘하지만 중요한 변화를 보여 줍니다.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책임을 부인하던 상태에서 이제는 어떤 내적 고통 때문에 자기가 악 가운데 있음을 어느 정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인정은 아직 주님의 자비를 신뢰하는 회개로 나아가지 못하고 ‘내 죄악이 너무 커서 사함을 받을 수 없다’는 절망으로 기울어집니다. 악을 인정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절망이 마지막이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의 악보다 주님의 사랑과 자비가 크며, 이후 가인에게 주어지는 보존의 표는 바로 이 절망 뒤에서도 주님의 섭리가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 주게 됩니다.

 

 

 

AC.384, 창4:13, ‘가인에게도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습니다 - 라멕에 이르러 소멸되는 체어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창4:13) AC.384이로부터 가인에게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후 체어리티의 모든 선이 소멸되었다는

bygrace.kr

 

AC.382, 창4:12, ‘피하며 유리하는 자란 누구인가? - 선과 진리를 알지 못하게 된 신앙’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창4:12) AC.382‘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가 된다는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4:5)

 

AC.358

‘안색이 변했다’(faces falling)는 것이 내적인 것들이 변했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얼굴’(face)과 얼굴이 ‘떨어짐’(falling)의 의미에서 분명합니다. 고대인들에게 얼굴은 내적인 것들을 의미했는데, 내적인 것들이 얼굴을 통하여 빛나기 때문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얼굴이 내적인 것들과 완전히 일치하는 사람들이어서, 누구든 사람의 얼굴을 보고 그가 어떤 성품과 마음을 가진 사람인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얼굴로는 한 가지를 나타내면서 속으로는 다른 것을 생각하는 일을 괴물 같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가장과 기만은 당시 혐오스러운 것으로 여겨졌으며, 그러므로 내적인 것들이 ‘얼굴’로 의미되었습니다. 체어리티가 얼굴에서 빛날 때에는 얼굴이 ‘들렸다’(lifted up)고 하였고, 그 반대의 경우에는 얼굴이 ‘떨어졌다’(fall)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축복의 말씀에서처럼 주님께서도 사람을 향하여 ‘그 얼굴을 드신다’(lifts up his faces upon man)고 표현됩니다. That by the “faces falling” is signified that the interiors were changed,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face” and of its “falling.” The face, with the ancients, signified internal things, because internal things shine forth through the face; and in the most ancient times men were such that the face was in perfect accord with the internals, so that from a man’s face everyone could see of what disposition or mind he was. They considered it a monstrous thing to show one thing by the face and think another. Simulation and deceit were then considered detestable, and therefore the things within were signified by the face. When charity shone forth from the face, the face was said to be “lifted up”; and when the contrary occurred, the face was said to “fall”; wherefore it is also predicated of the Lord that he “lifts up his faces upon man,” as in the benediction (Num. 6:26; and in Ps. 4: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민6:26)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시4:6)

 

이 말씀들은 주님께서 인간에게 체어리티를 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얼굴이 ‘떨어진다’(face falling)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예레미야에서 알 수 있습니다. by which is signified that the Lord gives charity to man. What is meant by the “face falling,” appears from Jeremiah: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3:12) I will not make my face to fall toward you, for I am merciful, saith Jehovah. (Jer. 3:12)

 

‘여호와의 얼굴’(face of Jehovah)은 자비입니다. 주님께서 어떤 사람을 향하여 ‘그 얼굴을 드신다’(lifts up his face)는 것은 자비로 그에게 체어리티를 주신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 반대가 얼굴을 ‘떨어뜨리는 것’(makes the face to fall), 곧 인간의 얼굴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The “face of Jehovah” is mercy, and when he “lifts up his face” upon anyone, it signifies that out of mercy he gives him charity; and the reverse when he “makes the face to fall,” that is, when man’s face falls.

 

해설

AC.358은 창4:5의 ‘안색이 변하니’를 설명합니다. 개역개정의 ‘안색이 변하다’는 자연스러운 번역이지만, 스베덴보리가 해설하는 표현은 훨씬 구체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영어로는 ‘faces falling’, 곧 ‘얼굴이 떨어짐’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속뜻을 이해하려면 먼저 왜 ‘얼굴’이 인간의 내적인 것들을 의미하며, 얼굴이 ‘들리는 것’과 ‘떨어지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바로 앞 AC.357에서 가인의 ‘분노가 타올랐다’는 것은 체어리티가 떠났음을 의미했습니다. 이제 AC.358은 그 결과를 한 단계 더 깊이 보여 줍니다. 체어리티가 떠나자 단순히 감정 하나가 변한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들’ 자체가 변했고, 그것이 ‘얼굴이 떨어졌다’는 말씀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고대인들에게 ‘얼굴’이 내적인 것들을 의미했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내적인 것들이 얼굴을 통하여 빛나기 때문’입니다. 특히 태고교회 사람들은 얼굴과 내적인 것이 완전히 일치하여 사람의 얼굴을 보면 그가 어떤 성품과 마음을 가진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그들이 표정을 잘 읽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의 천적 상태에서는 내적 사랑과 외적 표현 사이에 오늘날과 같은 분리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얼굴로는 한 가지를 나타내면서 속으로는 다른 것을 생각하는 ‘가장과 기만’을 괴물 같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다만 이것을 오늘날의 사회생활에 그대로 적용하여 속에 있는 감정을 무엇이든 얼굴과 말로 드러내야 한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여 감정을 절제하는 것과 상대를 속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거짓된 모습을 만드는 것은 다릅니다. 거듭남의 목표도 악한 속마음을 그대로 외부에 표출하여 속과 겉을 일치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내면 자체를 변화시키셔서 속에서 선을 사랑하고 겉에서도 그 선을 행하게 하시는 데 있습니다.

 

이 배경에서 ‘얼굴이 들린다’와 ‘얼굴이 떨어진다’는 표현의 의미가 열립니다. 체어리티가 얼굴에서 빛날 때에는 얼굴이 ‘들렸다’고 하고, 그 반대의 경우에는 얼굴이 ‘떨어졌다’고 합니다. 따라서 가인의 ‘안색이 변했다’는 것은 단순히 화가 나서 얼굴빛이 어두워졌다는 뜻이 아니라, 가인으로 표상되는 상태에서 체어리티가 떠남으로써 내적인 것들이 변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도 가인의 진행 과정이 보입니다. 사랑에서 신앙이 분리되고, 그 분리가 가능하다고 인정하는 교리가 생기며, 체어리티 없는 행위와 예배가 나타납니다. 이어 체어리티가 떠난 상태가 분노로 드러나고, 이제 그 결과 내적인 것들이 변합니다. 곧이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은 이러한 내적 변화가 마침내 체어리티 자체의 소멸로 나아가는 것을 보여 줍니다.

 

민6:26과 시4:6을 인용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서 분명해집니다.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라는 말씀에서 주님께서 인간을 향하여 ‘얼굴을 드신다’는 것은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주님께서 인간에게 체어리티를 주신다’는 뜻입니다. 자연적인 의미에서 ‘얼굴을 든다’고 하면 자신감이나 당당함을 생각하기 쉽지만, 여기서는 자기 자신을 높이는 것과 정반대입니다. 인간의 얼굴이 참으로 들리는 것은 자기 사랑으로 자신을 높일 때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가 그의 내적인 것들 안에 받아들여져 그것이 외적인 삶을 통하여 빛날 때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라는 기도 역시 주님께서 우리를 외면하고 계시다가 마음을 바꾸어 다시 바라봐 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우리가 받아들여 그것이 우리 안에서 체어리티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렘3:12은 같은 사실을 반대 방향에서 보여 줍니다. 개역개정은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고 번역하지만, 스베덴보리가 인용한 표현은 문자적으로 ‘내 얼굴을 너희에게 떨어뜨리지 아니하리라’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고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여호와의 얼굴’과 ‘자비’를 연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그는 매우 간결하게 ‘여호와의 얼굴은 자비’라고 설명합니다. 주님께서 얼굴을 드신다는 것은 자비로 인간에게 체어리티를 주시는 것이고, 얼굴을 떨어뜨린다는 것은 그 반대의 외관을 나타냅니다. 민6:26과 시4:6, 렘3:12은 서로 따로 떨어진 증거 구절들이 아니라 ‘얼굴’, ‘자비’, ‘체어리티’, ‘들림과 떨어짐’의 상응을 하나로 밝혀 주는 인용들입니다.

 

여기서 바로 앞 AC.357의 ‘여호와의 진노’와 동일한 원리가 다시 나타납니다. AC.357에서는 말씀에서 여호와께 분노와 진노가 돌려지지만 실제 분노는 인간에게 속한 것이며, 인간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가운데 주님의 질서에 반발할 때 마치 주님께서 분노하시는 것처럼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AC.358에서도 주님의 얼굴 자체가 실제로 들렸다가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어떤 때에는 자비로운 얼굴로 인간을 바라보다가 인간이 잘못하면 노한 얼굴로 바꾸시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마지막에 그 반대가 얼굴을 떨어뜨리는 것이라고 한 뒤 곧바로 ‘곧 인간의 얼굴이 떨어지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변하는 것은 주님의 사랑과 자비가 아니라 인간의 상태입니다. 주님의 얼굴은 자비이며 그 자비는 변하지 않지만, 인간이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에 따라 그의 내적인 것들이 달라집니다.

 

이 점은 가인의 경우를 더욱 분명하게 해 줍니다. 주님께서 먼저 가인에게 얼굴을 떨어뜨리셨기 때문에 가인의 얼굴이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가인이 체어리티에서 떠남으로써 그의 내적인 것들이 변한 것입니다. 주님은 여전히 자비로 인간에게 체어리티를 주시는 분이시지만,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그 체어리티에 반발합니다. 따라서 한쪽에는 ‘주님께서 얼굴을 드심’, 곧 자비로 체어리티를 주시는 끊임없는 신적 사랑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인간의 얼굴이 떨어짐’, 곧 그 체어리티를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내적인 것들이 변하는 상태가 있습니다. 이 대비를 붙들면 ‘하나님께서 왜 가인을 외면하셨는가?’라는 질문의 방향도 달라집니다. 주님께서 먼저 사랑을 거두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질서에서 돌아선 것입니다.

 

AC.358에서 태고교회 사람들의 얼굴과 내면의 일치를 설명하는 것도 이런 점에서 중요합니다. 다만 여기서 ‘태고교회 전체가 이 지점에서 곧바로 속과 겉이 완전히 분리된 인간 상태로 바뀌었다’고 너무 크게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AC.358이 직접 말하는 것은 고대인들에게 얼굴이 내적인 것을 의미했던 이유와 태고시대의 특별한 상태입니다. 가인은 태고교회 안에서 사랑과 신앙의 질서가 무너져 가는 특정 계열과 상태를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이 번호에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가인으로 표상되는 상태에서 체어리티가 떠남으로 내적인 것들이 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변화가 이후 태고교회의 쇠퇴 과정과 연결되지만, 이 한 번호만으로 당시 모든 사람의 내적·외적 상태를 동일하게 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얼굴’의 상응은 거듭남을 생각할 때에도 아름다운 방향을 보여 줍니다. 주님의 얼굴은 자비입니다. 주님께서 인간을 향하여 얼굴을 드신다는 것은 자비로 체어리티를 주신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그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면 내적인 것이 주님의 질서 안에서 변화하고, 그 선이 말과 행동과 관계와 일상의 쓰임을 통하여 외적으로 나타납니다. 태고교회에서 내적인 것들이 얼굴을 통하여 빛났듯이, 거듭나는 인간에게서도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과 선은 외적 삶을 통하여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나 그 선의 근원은 인간 자신의 proprium이 아니라 언제나 주님이십니다. 인간의 얼굴이 ‘들리는’ 것도 결국 자기 힘으로 자신을 높인 결과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체어리티를 받아들인 결과입니다.

 

결국 AC.358의 핵심은 ‘얼굴은 내적인 것들이 빛나는 자리’라는 데 있습니다. 체어리티가 있을 때 얼굴은 들리고, 체어리티가 떠날 때 얼굴은 떨어집니다. 주님께서 인간을 향하여 얼굴을 드신다는 것은 자비로 체어리티를 주신다는 뜻이며, 주님의 얼굴 자체는 변하지 않습니다. 변하는 것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얼굴, 곧 인간의 내적인 상태입니다. 따라서 가인의 ‘안색이 변함’은 단순한 표정 변화가 아니라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인간의 내적인 것들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보여 줍니다. AC.357이 ‘분노’를 통하여 체어리티가 떠난 상태를 보여 주었다면, AC.358은 그 결과 인간의 내적인 것들이 변했음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말씀에서 주님께서는 그 가인에게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고 말씀하십니다. 내적인 것들이 이미 변하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도 주님의 부르심은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AC.359, 창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다 - 양심을 통한 주님의 부르심 (AC.359-360)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And Jehovah said unto Cain, Why is thine anger kindled? And why are thy faces fallen? (창4:6) AC.359‘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

bygrace.kr

 

AC.357, 창4:5, ‘가인의 분노는 무엇을 뜻하는가 - 자기 사랑과 체어리티의 떠남’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4:5) AC.357‘가인의 분노가 타올랐다’(Cain’s anger was kindled)는 것이 체어리티가 떠났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뒤에서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39 심화

1. 왜 처음에는 ‘내가 선을 행한다’고 생각하도록 허락하실까?

 

AC.39에서 특히 마음에 오래 남는 문장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자기가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하는 걸 허락하십니다.’

 

처음 이 문장을 읽으면 조금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모든 선과 진리가 오직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 사실이라면, 왜 주님께서는 처음부터 그 사실을 분명히 알게 하지 않으실까요? 왜 사람이 ‘내가 선을 행한다’, ‘내가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허락하실까요?

 

AC.39은 그 이유를 직접 말합니다. 그 단계의 사람은 ‘달리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방법으로는 나중에 모든 선과 진리가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믿고, 마침내 퍼셉션하도록 인도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주님께서 사람을 일부러 속여 ‘네가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라’고 가르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원문이 사용하는 말은 ‘허락하신다’(permit)는 것입니다. 사람은 거듭남의 처음부터 자기 생명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것을 깊이 알고 살아갈 수 있는 상태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가 현재 생각할 수 있는 상태에서부터 출발하도록 허락하시고, 거기서부터 점차 더 깊은 인식으로 이끄십니다.

 

이것은 AC.39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아직 도달하지 못한 영적 상태를 처음부터 완성된 형태로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상태에서부터 거듭남을 시작하게 하십니다.

 

사람은 실제로 ‘내가 공부한다’, ‘내가 선택한다’, ‘내가 선을 행한다’, ‘내가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AC.39은 그런 인간의 활동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이 실제로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하는 가운데, 그 근원에 대한 인식이 점차 달라지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처음에는 ‘내가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사람은 ‘내가 행하는 이 선의 근원은 정말 나 자신인가?’라는 것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모든 참된 선과 진리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것을 먼저 ‘믿게’ 됩니다. AC.39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나중에는 그것을 ‘퍼셉션’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여기에는 중요한 순서가 있습니다. 처음부터 완전한 퍼셉션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한다고 생각하는 상태’에서 출발하여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다고 믿는 상태’를 지나, 마침내 그것을 더욱 내적으로 퍼셉션하는 상태로 나아갑니다. AC.39은 바로 이 과정을 주님께서 허락하시고 이끄신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모든 선은 주님께서 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AC.39의 관심은 인간의 행동을 없애는 데 있지 않고, 그 행동의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알게 하는 데 있습니다. 사람이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선을 행하면서 그것을 자기 고유의 선으로 여기지 않는 데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점은 신앙생활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하시니까 나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면 AC.39이 보여 주는 거듭남의 흐름과 맞지 않습니다. 반대로 ‘내가 노력해서 선한 사람이 되었다’고 모든 것을 자기에게 돌리는 것도 AC.39이 향하는 방향과 다릅니다. 사람은 실제로 배우고 선택하고 행하지만,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그 안에 있는 참된 선과 진리의 근원이 주님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다른 글들에서는 이것이 나중에 ‘마치 자기로부터인 것처럼’ 행한다는 중요한 원리와 더욱 분명하게 연결됩니다. 그러나 AC.39 자체에서는 아직 그 전체 교리를 펼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먼저 주님께서 사람의 현재 상태를 허락하시고, ‘내가 한다’고 생각하는 데서부터 시작하여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믿고 퍼셉션하는 데까지 이끄신다는 사실을 붙드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이렇게 읽으면 ‘허락하신다’는 한 단어가 참 깊게 다가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처음부터 완성된 영적 인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거듭남을 시작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 자기에게서 생각하고 자기에게서 행한다고 여기는 바로 그 상태에서도 시작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씩 이끌어, 마침내 선과 진리의 참된 근원을 알아보게 하십니다.

 

지난 삶을 돌아보면서 ‘그때는 정말 내가 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 안에서도 주님께서 나를 이끌고 계셨던 것은 아닐까?’라는 감사가 생길 수 있습니다. 다만 개별 사건 하나하나에 대해 ‘이것은 주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이다’라고 우리가 섣불리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AC.39이 분명히 말해 주는 것은 더 근본적인 사실입니다. 우리의 거듭남을 시작하시고, 선과 진리의 근원을 자기에게서 찾던 상태에서 그것을 주님에게서 인정하는 상태로 이끄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AC.39의 이 짧은 문장은 인간의 미숙함을 정죄하는 말이라기보다, 그 미숙함 속에서부터 사람을 이끄시는 주님의 자비를 생각하게 합니다. 사람이 아직 ‘내가 한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단계에서도 주님께서는 거듭남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사람은 자기가 선의 근원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선을 행하고, 자기가 진리의 근원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진리를 말하게 됩니다. ‘내가 한다’는 자기 공로에서 ‘주님으로부터 받는다’는 인정으로 옮겨 가는 것, AC.39이 보여 주는 살아남의 과정에는 바로 이러한 깊은 변화가 들어 있습니다.

 

 

 

AC.39, 창1:20, ‘비로소 살아나는 신앙 : 주님이 행하심을 알 때 시작되는 생명’(AC.39-41)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And God said, Let the waters cause to creep forth the creeping thing, the living soul; and let fowl fly above the earth upon the fac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35 심화

1. ‘우리를 자비로 붙들어 주시는 주님’

 

위 AC.35본문, ‘만일 주님께서 그 사람을 자비로 붙들어 주지 않으신다면’(if it were not that the Lord has mercy on him.)말인데요, 우리를 지으신 신(神)이 이런 자비의 신이시라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AC.35 마지막의 ‘만일 주님께서 그 사람을 자비로 붙들어 주지 않으신다면’이라는 말은 짧지만 참으로 큰 위로를 줍니다. 앞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의 이해는 하늘을 향하면서도 의지는 지옥을 향할 수 있으며, 모든 행위에서 실제로 행하는 쪽은 의지이므로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 사람 전체가 지옥으로 곤두박질할 것이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절망적인 문장의 끝에 ‘주님의 자비’가 등장합니다. 인간의 상태에 대한 마지막 말이 인간의 악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인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자비’라고 하면 죄를 지은 사람을 불쌍히 여겨 용서해 주시는 것을 먼저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도 자비에 포함됩니다. 그러나 AC.35의 문맥에서 자비는 조금 더 근본적인 의미로 다가옵니다. 사람이 자기 악한 의지에 따라 끝까지 떨어지도록 버려 두지 않으시는 주님의 자비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주님께서 그 사람을 자비로 붙들어 주지 않으신다면’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인간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매우 엄중한 진단과 주님에 대한 그의 신뢰가 함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인간의 악을 가볍게 보지 않습니다. 사람이 조금 노력하면 자기 힘으로 충분히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의지가 얼마나 깊이 자기 사랑과 악으로 기울 수 있는지를 매우 강하게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자비가 더욱 크게 드러납니다. 사람이 여전히 돌이킬 수 있고, 진리를 들을 수 있고, 선을 향하여 움직일 가능성이 남아 있다는 것 자체가 인간 자신의 힘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붙들어 주신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여기서는 조금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AC.35은 그 작동 방식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어떤 생각이 갑자기 떠오르는 것, 어떤 일이 뜻밖에 막히는 것, 고통이나 시험을 겪는 것 등을 하나하나 가리켜 ‘이것이 바로 그때 주님께서 붙드신 것이다’라고 AC.35만을 근거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섭리와 거듭남에 관한 다른 가르침을 함께 살펴보면 주님의 인도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지만, 이 글에서는 우선 ‘인간이 자기 악에 완전히 내맡겨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붙드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가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자비로 붙드신다고 해서 사람을 강제로 선하게 만드시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여전히 진리를 받아들일 수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으며, 악과 싸울 수도 있고 그것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자비는 인간의 자유를 없애는 방식으로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유 안에서 선과 진리를 향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길을 열어 주시는 자비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점에서 주님의 자비를 ‘공의라면 벌해야 하지만 자비가 그것을 눈감아 주는 것’처럼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주님의 자비는 신적 질서와 반대되는 것이 아닙니다. 악을 악이 아니라고 하거나 거짓을 진리라고 인정해 주시는 것이 자비가 아닙니다. 오히려 악 가운데 있는 사람을 그대로 버리지 않고, 그가 악에서 돌이켜 선을 선택할 수 있도록 구원을 향해 이끄시는 것이 자비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자비는 인간의 악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악에서 건져 내고자 합니다.

 

그래서 AC.35의 이 한마디는 거듭남을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에도 중요한 위로를 줍니다.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다 보면 ‘나는 왜 아직도 이렇지?’, ‘왜 알고 있는 것과 실제 삶이 이렇게 다르지?’ 하고 낙심할 수 있습니다. 특히 AC.35처럼 이해는 하늘을 향하면서 의지는 그 반대 방향으로 갈 수 있다는 말씀을 읽으면 자기 안의 모순이 더욱 크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이 문장의 끝까지 읽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희망이 없다’고 끝내지 않습니다. ‘만일 주님께서 그 사람을 자비로 붙들어 주지 않으신다면’이라고 말합니다. 거꾸로 말하면 우리는 주님의 자비로 붙들려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희망은 우리의 의지가 이미 완전해졌다는 데 있지 않고, 그런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는 주님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을 ‘어차피 주님께서 붙드시니 나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자비를 알수록 우리는 그 자비에 응답하여 악에서 돌아서고, 알고 있는 진리를 실제 삶으로 옮기며, 주님께서 이끄시는 방향을 자유롭게 선택해야 합니다. 자비는 거듭남을 대신해 주는 면허가 아니라 거듭남이 가능하도록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지으신 신이 이런 자비의 신이시라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라는 고백은 AC.35을 읽고 충분히 나올 수 있는 고백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붙들고 계십니다. 우리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사실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주님의 자비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AC.35은 그 자비가 구체적으로 어떤 모든 방식으로 역사하는지를 설명하는 글은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것만큼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인간이 자기 악한 의지의 무게만을 따라 끝없이 떨어지도록 버려져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짧은 한마디 때문에, 인간의 비참한 상태를 그렇게 엄중하게 말한 AC.35도 결국 절망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를 바라보며 끝납니다.

 

 

 

AC.35, 창1:14-17, ‘의지와 이해 : 하나의 생명이냐, 둘로 갈라진 마음이냐'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창1:14-17)

 

AC.35

사람에게는 두 가지 타고나는 역량(faculties), 곧 의지와 이해(will and understanding)가 있습니다. 이해가 의지의 지배를 받을 때, 이 둘은 함께 하나의 마음을 이루며, 그 결과 하나의 생명이 됩니다. 이때에는 사람이 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을 동시에 생각하고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해가 의지와 어긋날 때에는, 그러니까 신앙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신앙과 반대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의 경우인데요, 이때는 하나의 마음이 둘로 나뉘는데, 하나, 곧 이해는 스스로를 하늘로 높이려 하고, 다른 하나, 곧 의지는 지옥을 향해 기울어지지요. 그런데 모든 행위에서 실제로 행동하는 쪽은 의지이기 때문에, 만일 주님께서 그 사람을 자비로 붙들어 주지 않으신다면, 그 사람 전체는 곧장 지옥으로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Man has two faculties: will and understanding. When the understanding is governed by the will they together constitute one mind, and thus one life, for then what the man wills and does he also thinks and intends. But when the understanding is at variance with the will (as with those who say they have faith, and yet live in contradiction to faith), then the one mind is divided into two, one of which desires to exalt itself into heaven, while the other tends toward hell; and since the will is the doer in every act, the whole man would plunge headlong into hell if it were not that the Lord has mercy on him.

 

해설

AC.35는 인간에게 있는 두 가지 기본 역량, 곧 ‘의지’와 ‘이해’를 다룹니다. 얼핏 보면 아주 단순한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사람은 무엇인가를 원하고,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이해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 두 역량의 관계를 통해 앞에서 계속 다루어 온 사랑과 신앙의 문제를 인간 마음의 구조 안으로 가져옵니다.

 

먼저 처음 읽는 독자에게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 있는 문장이 있습니다. ‘이해가 의지의 지배를 받을 때’ 의지와 이해가 하나의 마음과 하나의 생명을 이룬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보통 반대로 생각합니다. ‘욕망대로 행동하지 말고 이성으로 욕망을 통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의지’는 단순히 순간적인 욕망이나 충동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원하고 사랑하는가와 연결된 마음의 근본적인 역량입니다. ‘이해’ 역시 단순한 지능이 아니라 무엇이 참인지 알고 생각하는 역량입니다.

 

그러므로 AC.35의 핵심은 ‘생각하지 말고 원하는 대로 행동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실제로 원하는 것과 그가 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대로라면 사람이 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을 또한 생각하고 의도할 때 의지와 이해는 함께 하나의 마음을 이루며, 그 결과 하나의 생명을 이룹니다. 안에서 원하는 것과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또 하나의 주의가 필요합니다. 의지와 이해가 일치하기만 하면 무조건 좋은 사람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악을 원하면서 그것을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어떤 의미에서는 생각과 욕구가 일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AC.35가 지금 다루는 문맥은 앞선 AC.34의 ‘사랑과 신앙’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신앙을 이해로는 인정하면서 실제 의지는 그 신앙과 반대되는 삶을 원하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직접 예로 드는 사람이 바로 ‘신앙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신앙과 반대되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진리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해로는 하늘을 향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옳은지 알고, 신앙을 말하고, 교리를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원하는 것과 살아가는 방향은 그것과 반대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때 ‘하나의 마음이 둘로 나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AC를 처음 읽는 사람에게 상당히 중요한 대목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은 단순히 머릿속에서 어떤 교리를 참이라고 인정하는 데서 완성되지 않습니다. 이해가 하늘을 향한다고 해서 사람 전체가 하늘을 향하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고 원하는가, 그리고 그 의지가 삶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가 함께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그래서 AC.35에는 매우 강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해는 자신을 하늘로 높이려 하지만 의지는 지옥을 향하며, 모든 행위에서 실제로 행하는 쪽은 의지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자비를 베풀지 않으신다면 사람 전체가 곧장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의지가 행위자’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사람이 무엇을 알고 있는가만으로 그의 삶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무엇을 원하며 그 원하는 바가 행위로 어떻게 나타나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해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AC.35 자체도 이해가 ‘하늘로 높아지려 한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진리를 이해할 수 있고, 자기 삶과 다른 더 높은 것을 볼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의지와 분리된 채 머리에만 머물 때입니다. ‘나는 이것이 옳다는 것을 안다’와 ‘나는 이것을 원하고 행한다’ 사이에 깊은 틈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서 AC.35의 마지막 말이 더욱 중요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이런 분열을 설명하고 끝내지 않고 ‘만일 주님께서 그 사람을 자비로 붙들어 주지 않으신다면’이라고 덧붙입니다. 인간에게 이해와 의지의 모순이 있다는 사실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 주님의 자비라는 것입니다. 이 한 문장에서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자비가 없다면 인간이 스스로 자기 상태를 유지하거나 구원할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다만 AC.35은 여기서 주님께서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그 사람을 붙드시고 의지와 이해를 회복시키시는지까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해를 이용하여 의지를 이렇게 교정하신다’는 식으로 작동 방식을 미리 확정하기보다, 우선 이 글이 직접 말하는 데 머무는 것이 좋습니다. 사람이 자기 의지대로만 내버려져 있지 않고 주님의 자비 아래 붙들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AC.35는 단순한 인간 심리 분석을 넘어 우리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게 합니다. ‘나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만 묻지 않고 ‘나는 실제로 무엇을 원하는가?’까지 묻게 하기 때문입니다. 입으로는 주님을 믿고, 이해로는 선과 진리를 인정하면서도 실제 의지가 전혀 다른 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이 분열입니다.

 

그러므로 의지와 이해가 ‘하나의 마음, 하나의 생명’을 이룬다는 말은 단순히 생각과 행동을 일치시키라는 도덕적 충고보다 깊습니다. 사람이 이해로 받아들인 신앙과 실제로 원하는 삶이 서로 갈라지지 않고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 그 둘이 갈라져 있는 우리를 절망 가운데 버려두지 않고 붙드시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AC.35의 마지막에 ‘자비’가 등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심화

1. ‘우리를 자비로 붙들어 주시는 주님’

 

AC.35, 심화 1, ‘우리를 자비로 붙들어 주시는 주님’

AC.35.심화1. ‘우리를 자비로 붙들어 주시는 주님’ 위 AC.35본문, ‘만일 주님께서 그 사람을 자비로 붙들어 주지 않으신다면’(if it were not that the Lord has mercy on him.)말인데요, 우리를 지으신 신(神

bygrace.kr

 

 

 

AC.36, 창1:14-17, '신앙이란 무엇인가?'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bygrace.kr

 

AC.34, 창1:14-17, ‘사랑과 신앙은 하나’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