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창5:1)
AC.473
‘하나님의모양’(likenessofGod)이천적인간을,‘하나님의형상’(imageofGod)이영적인간을의미한다는것은앞에서도보여준바있습니다.‘형상’(image)은‘모양’(likeness)을위한준비단계이며,‘모양’은실제적인닮음(realreplica)입니다.천적인간은전적으로주님의다스림을받기때문에주님의‘모양’이기때문입니다.That a “likenessofGod” is a celestial man, and an “imageofGod,” a spiritual man, has also been previously shown. An “image” is preparatory to a “likeness,” and a “likeness” is a real replica, for a celestial man is entirely governed by the Lord, as his “likeness.”
해설
AC.473은 우리가 흔히 거의 같은 뜻으로 사용하는 ‘하나님의형상’과 ‘하나님의모양’을 거듭남의 서로 다른 상태로 구별합니다. ‘형상’은 영적 인간을, ‘모양’은 천적 인간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둘의 관계를 ‘형상은모양을위한준비단계’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서로 무관한 두 종류의 인간을 나란히 놓은 구별이라기보다,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과정에서 앞선 상태와 더 완성된 상태의 관계를 보여 줍니다.
‘형상’이 영적 인간을 뜻한다는 것은 그가 이미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생명을 받아 주님의 질서를 반영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아직 진리와 신앙을 통하여 선과 사랑으로 나아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그는 주님께 순종하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자 하지만, 아직 자신의 의지와 주님의 뜻 사이에서 싸움과 선택을 경험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형상’은 ‘모양’을 향한 준비입니다.
반면 ‘모양’은 단순히 외형적으로 비슷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실제적인닮음’이라고 표현하면서 그 이유를 곧바로 밝힙니다. 천적 인간은 ‘전적으로주님의다스림을받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천적 인간이 주님과 동일한 존재가 된다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그의 사랑과 의지와 삶의 질서가 주님으로부터 흘러오는 생명을 더욱 온전히 받아들이게 되어, 그 삶에서 주님의 사랑과 선이 실제로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AC.472의 ‘창조하다’와 ‘만들다’의 구별도 더욱 선명해집니다. 사람이 새롭게 ‘창조되어’ 영적 인간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것과 연결되고, 그 영적 인간이 더욱 온전하게 ‘만들어져’ 천적 인간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모양’이 되는 것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창조→형상→영적인간’과 ‘만들다→모양→천적인간’이라는 두 흐름은 서로 다른 설명이 아니라 동일한 거듭남의 질서를 서로 다른 말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전적으로주님의다스림을받는다’는 말을 인간의 자유가 없어지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참된 자유는 주님과 반대되는 것을 마음대로 행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에 따라 선을 기쁘게 행하는 데 있습니다. 천적 인간은 억지로 주님께 복종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뜻과 자신의 사랑이 점점 하나의 방향을 향하기 때문에 선을 행하는 것이 그의 기쁨과 자유가 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의 ‘모양’이라고 불릴 수 있습니다.
결국 AC.473은 거듭남의 목적이 단지 ‘올바른것을아는사람’을 만드는 데 있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우리 안에 당신의 ‘형상’을 이루시고,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그 형상이 사랑과 삶 속에서 더욱 실제적인 ‘모양’이 되도록 이끄십니다. 신앙과 진리가 사랑을 향하여 나아가고, 마침내 사람이 주님의 다스림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며 그 사랑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모양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AC.473해설)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창5:1)
AC.472
‘하나님이사람을창조하신날’(dayinwhichGodcreatedman)이그가영적으로만들어진것을의미하고,‘하나님이자기의모양대로그를만드셨다’(Godmakinghiminhislikeness)가그가천적으로만들어진것을의미한다는것은앞에서말하고보여준것으로부터분명합니다.‘창조하다’(create)라는표현은본래사람이새롭게창조되는것,곧거듭나는것과관련되고,‘만들다’(make)라는말은사람이완전하게되는것과관련됩니다.그러므로말씀에서는‘창조하다’(create),‘짓다’(form),‘만들다’(make)가정확하게구별되어사용됩니다.이것은앞서2장에서보여준바와같습니다.거기서는영적인간이천적인간으로만들어진것에관하여‘하나님이그만드시던모든일을마치시고안식하셨다’고하였습니다.다른구절들에서도마찬가지로‘창조하다’는영적인간과관련되고,‘만들다’,곧완전하게하다는천적인간과관련됩니다.(AC.16, 88)That by the “dayinwhichGodcreatedman” is signified his being made spiritual, and that by “Godmakinghiminhislikeness” is signified his being made celestial, appears from what was said and shown above. The expression to “create” properly relates to man when he is being created anew, or regenerated; and the word “make,” when he is being perfected; wherefore in the Word there is an accurate distinction observed between “creating,” “forming,” and “making,” as was shown above in the second chapter, where it is said of the spiritual man made celestial that “Godrestedfromallhiswork,whichGodcreatedinmaking”; and in other passages also, to “create” relates to the spiritual man, and to “make,” that is, to perfect, to the celestial man. (See n. 16 and 88.)
해설
AC.472는 창5:1에 사용된 ‘창조하다’와 ‘만들다’를 같은 뜻의 반복으로 보지 않습니다. 말씀에서 ‘창조하다’, ‘짓다’, ‘만들다’는 서로 비슷해 보이지만, 속뜻으로는 사람의 거듭남에서 서로 다른 상태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창조하다’는 사람이 새롭게 창조되어 영적 인간이 되는 것과 관련되고, ‘만들다’는 그렇게 영적으로 거듭난 사람이 더욱 완전하게 되어 천적 인간이 되는 것과 관련됩니다.
따라서 여기에는 거듭남의 진행이 들어 있습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완성된 천적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새롭게창조’되어야 합니다. 자연적인 삶과 자기 자신의 것, 곧 proprium에 매여 있던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진리와 신앙을 받아 새로운 영적 생명을 얻는 것이 ‘창조’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역사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진리가 사랑과 결합하고, 사람이 진리를 단지 알고 믿는 상태를 넘어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지각하고 행하는 상태에 이를 때 그는 점차 천적 인간으로 ‘만들어집니다’.
이 때문에 AC.472는 창2의 ‘하나님이그만드시던모든일을마치시고안식하셨다’는 말씀을 다시 불러옵니다. AC.16과 AC.88에서 살펴본 것처럼 ‘안식’은 주님께서 더 이상 사람을 변화시키지 않으신다는 뜻이 아니라, 거듭남의 싸움이 지나고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움직이는 천적 상태에 이른 것을 뜻합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따라 살아가기 위해 애쓰지만, 천적 상태에서는 사랑이 중심이 되어 선으로부터 진리를 보고 행하게 됩니다. 그래서 ‘창조’에서 시작된 거듭남이 ‘만드심’, 곧 완전하게 하심으로 나아갑니다.
여기서 ‘완전하게된다’는 표현도 주의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이 흠이 전혀 없는 절대적인 완전성에 도달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피조물인 인간에게 그런 완전성은 있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완전하게 하심은 거듭남의 질서가 더 온전히 이루어져, 신앙과 진리가 사랑과 선에 결합되고 사람이 점점 더 주님의 질서 안에서 살아가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 구별은 태고교회가 왜 ‘천적교회’라고 불리는지도 설명해 줍니다. 창5:1은 먼저 ‘하나님이사람을창조하셨다’고 한 뒤 ‘하나님의모양대로그를만드셨다’고 합니다. AC는 이 순서를 ‘영적인간이됨’에서 ‘천적인간이됨’으로 읽습니다. 그러므로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도 그들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의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을 창조하거나 완전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을 새롭게 창조하시고 계속해서 당신의 모양을 닮도록 만들어 가십니다.
결국 AC.472는 말씀의 단어 하나까지도 거듭남의 질서를 담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창조하다’는 새로운 영적 생명의 시작을, ‘만들다’는 그 생명이 사랑과 결합하여 더욱 온전해지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단지 진리를 알고 신앙을 갖게 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진리가 사랑이 되고, 그 사랑으로부터 삶이 흘러나오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이 그 목적입니다. 태고교회는 바로 이 질서가 가장 충만하게 이루어진 교회였습니다. (AC.472해설)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창5:1)
AC.471
그들이이처럼따로떨어져살면서오직집과가족과민족으로구별되어있었던이유는,그렇게함으로써교회가온전하게보존되고모든집과가족이그들의부모에게의존하여사랑과참된예배안에머물수있도록하기위해서였습니다.또한각집은다른모든집과구별되는고유한성향(genius)을가지고있었다는점도주목해야합니다.자녀들뿐아니라먼후손들까지도부모로부터어떤특정한성향을물려받으며,그특징이매우뚜렷하여얼굴과그밖의여러고유한특징들을통해서도서로구별할수있다는것은잘알려져있습니다.그러므로서로뒤섞이는일이없이정확한구별이유지되도록하기위하여,주님께서는그들이이러한방식으로거주하는것을기뻐하셨습니다.이와같이교회는주님의나라를살아있게표상하는것이었습니다.주님의나라에는헤아릴수없이많은공동체들이있으며,각공동체는사랑과신앙의차이에따라다른모든공동체와구별되기때문입니다.이것이앞에서살펴본바와같이‘홀로거함’(livingalone)과‘장막에거함’(dwellingintents)이의미하는것입니다.또한같은이유로주님께서는유대교회가집과가족과민족으로구별되도록하셨고,각사람이자기가족안에서혼인하도록하셨습니다.그러나이에관해서는주님의신적자비로나중에말씀드리겠습니다.The reason why they dwelt thus alone by themselves, distinguished only into houses, families, and nations, was that by this means the church might be preserved entire, that all the houses and families might be dependent on their parent, and thereby remain in love and in true worship. It is to be remarked also that each house was of a peculiar genius, distinct from every other; for it is well known that children, and even remote descendants, derive from their parents a particular genius, and such marked characteristics that they can be distinguished by the face, and by many other peculiarities. Therefore, in order that there might not be a confounding, but an exact distinction, it pleased the Lord that they should dwell in this manner. Thus the church was a living representative of the kingdom of the Lord; for in the Lord’s kingdom there are innumerable societies, each one distinct from every other, according to the differences of love and faith. This, as observed above, is what is meant by “livingalone,” and by “dwellingintents.” For the same reason also it pleased the Lord that the Jewish church should be distinguished into houses, families, and nations, and that everyone should contract marriage within his own family; but concerning this,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해설
AC.471은 앞 번호에서 설명한 ‘집-가족-민족’이라는 구조가 단순한 고대 사회의 생활 방식이 아니었음을 밝힙니다. 그들이 서로 구별되어 살았던 목적은 ‘교회가온전하게보존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각 집과 가족이 자기 부모에게 의존함으로써 그 부모로부터 이어진 사랑과 참된 예배의 고유한 성격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구별’이 곧 ‘분열’을 뜻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서로 다르면서도 각자의 사랑과 신앙 안에서 주님께 속할 수 있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각 집에 고유한 ‘성향’(genius)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genius는 오늘날 흔히 말하는 ‘천재성’이 아니라, 부모로부터 후손에게 이어지는 고유한 성향과 기질, 내적 특성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서로 다른 집과 가족들이 무분별하게 뒤섞이지 않고 각자의 고유성을 유지하는 것은 단순한 혈통 보존 이상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 고유한 성향과 함께 사랑과 예배의 특정한 형태도 보존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구조가 중요한 가장 깊은 이유는 지상의 교회가 ‘주님의나라를살아있게표상하는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모든 천사가 똑같아지는 곳이 아닙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동체가 있으며, 각 공동체는 사랑과 신앙의 차이에 따라 서로 구별됩니다. 그럼에도 그 모든 공동체가 주님을 중심으로 하나의 천국을 이룹니다. 따라서 태고 시대의 집과 가족과 민족이 서로 구별되면서 하나의 교회를 이루었던 모습은 천국의 이러한 질서를 지상에서 살아 있게 나타내는 표상이었습니다.
이 점에서 ‘홀로거함’과 ‘장막에거함’의 의미도 분명해집니다. ‘홀로’라는 말은 다른 사람들과 단절되어 고립된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께서 각 공동체에 주신 고유한 사랑과 신앙의 질서를 다른 것과 혼동하지 않고 보존하는 것을 뜻합니다. ‘장막’ 역시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사랑의 거룩한 것과 예배를 표상합니다. 따라서 서로 구별된 장막에 거한다는 것은 각 공동체가 자기에게 주어진 사랑과 예배의 고유한 형태를 보존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리고 AC.471은 지금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창4와 창5의 관계에도 상당히 중요한 단서를 제공합니다. 태고 시대의 교회가 처음부터 하나의 획일적인 집단으로만 존재한 것이 아니라 ‘집과가족과민족’이라는 여러 공동체로 구별되어 있었고, 각 공동체가 서로 다른 고유한 성향과 사랑과 신앙의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한 공동체에서 교리적 변화나 분리가 일어났다고 해서 태고교회 전체가 동시에 똑같은 상태로 변했다고 전제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 교회적 계열이 서로 구별된 채 존재하고 변화할 수 있었던 구조적 배경이 이미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것만으로 창4와 창5의 두 계열이 정확히 어떻게 병행했는지를 확정하기보다는, 이후 AC의 설명을 계속 축적해 보아야 합니다.
결국 AC.471에서 주님이 보존하시는 것은 획일성이 아니라 ‘질서있는다양성’입니다. 천국의 수많은 공동체가 서로 다른 사랑과 신앙의 상태를 가지면서도 주님 안에서 하나의 천국을 이루듯, 지상의 교회 역시 서로 다른 집과 가족과 민족의 고유성이 주님 안에서 바르게 보존될 때 하나의 살아 있는 교회를 이룰 수 있습니다. 태고교회의 공동체 질서는 바로 그 천국의 질서를 지상에서 표상하고 있었습니다. (AC.471해설)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창5:1)
AC.470
‘계보의책’(bookofthebirths)이태고교회에속했던사람들을열거한것이라는사실은뒤에이어지는내용으로부터매우분명합니다.여기서부터11장,곧에벨(Eber)의시대에이르기까지이름들은결코사람들을의미하지않고,실제적인것들(actualthings)을의미하기때문입니다.태고시대에인류는집(houses)과가족(families)과민족(nations)으로구분되어있었습니다.하나의집은남편과아내와그자녀들,그리고그가족에속하여섬기는몇몇사람들로이루어졌고,하나의가족은서로멀리떨어져있지는않지만함께살지는않는많거나적은수의집들로이루어졌으며,하나의민족은많거나적은수의가족들로이루어졌습니다.That the “bookofthebirths” is an enumeration of those who were of the most ancient church is very evident from what follows, for from this to the eleventh chapter, that is, to the time of Eber, names never signify persons, but actual things.In the most ancient time mankind were distinguished into houses, families, and nations; a house consisting of the husband and wife with their children, together with some of their family who served; a family, of a greater or lesser number of houses, that lived not far apart and yet not together; and a nation, of a larger or smaller number of families.
해설
AC.470은 창5의 이름들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매우 분명하게 밝혀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창5에서 시작하여 창11의 에벨 시대에 이르기까지 등장하는 이름들이 ‘결코사람들을의미하지않고,실제적인것들을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실제적인것들’은 이름을 가진 개인 자체가 아니라, 그 이름으로 표상되는 교회와 그 교회의 상태, 교리와 같은 실재적인 영적 내용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창5의 계보를 읽을 때 ‘이사람다음에저사람이태어났다’는 문자적 흐름만 따라가서는 속뜻으로 기록된 교회사의 구조를 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 설명을 ‘그런이름을가진개인은역사적으로전혀존재하지않았다’는 단순한 주장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AC.470의 초점은 이름들의 역사적 실재 여부를 판정하는 데 있지 않고, 말씀 안에서 그 이름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것은 창5에서 창11의 에벨에 이르기까지 그 이름들이 속뜻으로는 개인이 아니라 그 이름으로 대표되는 교회적 실재를 가리킨다는 사실입니다.
이어지는 ‘집,가족,민족’에 관한 설명은 그러한 이름들이 어떻게 교회적 집단을 나타낼 수 있는지를 이해하게 합니다. 태고 시대의 사람들은 오늘날처럼 서로 분리된 개인들의 집합으로만 존재한 것이 아니라, 먼저 한 부부와 자녀 및 그 집에 속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집’을 이루었고, 여러 집이 모여 ‘가족’을 이루었으며, 다시 여러 가족이 하나의 ‘민족’을 이루었습니다. 즉 개인에서 집으로, 집에서 가족으로, 가족에서 민족으로 확대되는 공동체적 구조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앞으로 창5의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한 이름이 단지 한 개인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어떤 공통된 신앙과 삶, 교리와 내적 상태를 공유하는 집단을 대표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셋다음에에노스가태어났다’는 말씀도 속뜻으로는 단순한 생물학적 출생의 연속이 아니라, 한 교회적 상태로부터 또 다른 교회적 상태가 생겨나고 이어지는 과정으로 읽게 됩니다.
이 설명은 우리가 앞서 창4와 창5의 관계를 살펴보면서 제기했던 문제에도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 특히 스베덴보리가 이름들을 개인이 아니라 교회적 실재를 나타내는 것으로 읽고 있으며, 그 배경에 ‘집-가족-민족’이라는 복수의 공동체 구조가 있었다는 점은 앞으로 서로 다른 교회적 계열이 어떻게 형성되고 이어질 수 있었는지를 검토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합니다. 다만 AC.470만으로 창4와 창5가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병행했다고 결론 내리기보다는, 이후 설명을 더 살펴보면서 그 관계를 계속 확인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결국 ‘계보의책’은 단순히 누가 누구를 낳았는지를 기록한 명단을 넘어섭니다. 그 이름들 안에는 태고교회 이후 여러 공동체 가운데 나타난 교회의 상태와 변화가 담겨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개인 한 사람만이 아니라 집과 가족과 민족이라는 공동체 안에서도 교회를 보존하시고 이어 가셨으며, 창5의 이름들은 바로 그 교회적 역사를 드러내는 표지들이 됩니다. (AC.470해설)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This is the book of the births of man. In the day that God created man, in the likeness of God made he him.(창5:1)
AC.469
‘계보의책’(bookofthebirths)은태고교회에속했던사람들을열거한것이고,‘하나님이사람을창조하실때에’(inthedaythatGodcreatedman)는그가영적으로만들어진것을뜻하며,‘하나님의모양대로지으셨다’(inthelikenessofGodmadehehim)는그가천적으로만들어진것을의미합니다.그러므로이것은태고교회에대한묘사입니다.“bookofthebirths” is an enumeration of those who were of the most ancient church; “inthedaythatGodcreatedman” denotes his being made spiritual; and “inthelikenessofGodmadehehim” signifies that he was made celestial: thus it is a description of the most ancient church.
해설
AC.469는 창5:1을 단순한 족보의 머리말로 읽지 않고, 태고교회의 성립과 그 성격을 압축하여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읽습니다. 먼저 ‘계보의책’은 문자적으로는 아담 이후의 후손들을 기록하는 족보처럼 보이지만, 속뜻으로는 태고교회에 속했던 사람들, 곧 이후 이 장에서 여러 이름으로 표상되는 교회들을 열거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이어질 ‘셋’, ‘에노스’, ‘게난’ 등의 이름도 단순히 개인들의 이름으로만 읽어서는 이 장이 말하려는 교회적 역사를 충분히 볼 수 없습니다.
특히 주목할 것은 ‘하나님이사람을창조하실때에’가 ‘사람이영적으로만들어진것’을 뜻한다는 설명입니다. 여기서 ‘창조’는 단순히 육체를 가진 인간이 처음 생겨났다는 의미에 머물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셔서 자연적이고 외적인 삶에 머물던 사람에게 영적인 생명을 주시는 것을 가리킵니다. 창1의 창조 기사가 사람의 거듭남을 다루었던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사람의창조’는 주님께서 사람 안에 새로운 영적 질서를 세우시는 일입니다.
그런데 AC.469는 거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하나님의모양대로지으셨다’는 것은 그 사람이 ‘천적으로만들어졌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창1에서 살펴본 거듭남의 질서를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사람은 먼저 영적이 되고, 그다음 주님께서 그를 천적인 사람으로 이끄십니다. 영적인 상태에서는 아직 신앙을 통하여 사랑으로 나아가는 질서가 두드러지지만, 천적인 상태에서는 주님을 향한 사랑이 중심이 되고 그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지각합니다. 태고교회가 바로 이러한 천적 교회였습니다.
따라서 창5:1은 단순히 ‘아담의후손들이누구였는가’를 알려 주기 위한 족보의 시작이 아닙니다. 이 한 절 안에서 먼저 태고교회 자체가 어떤 교회였는지를 다시 세워 놓고, 그다음 그 교회로부터 이어지는 여러 교회들의 상태를 살펴볼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창조’에서 영적 상태가, ‘하나님의모양’에서 천적 상태가 언급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이 점은 앞으로 창5전체를 읽는 데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창5의 여러 이름을 단순히 사람들의 출생과 죽음의 연속으로만 보면 이 장은 긴 족보에 지나지 않지만, AC가 밝히는 속뜻으로는 주님께서 세우신 태고교회가 여러 후대의 교회들을 거치면서 어떻게 계승되고 변화되어 갔는지를 보여 주는 교회사입니다. 그리고 그 출발점에는 사람이 스스로 자신을 높여 ‘하나님의모양’이 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를 영적으로 창조하시고 마침내 천적인 사람으로 만드셨다는 사실이 놓여 있습니다. 태고교회의 모든 생명과 지혜의 시작은 사람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셨습니다. (AC.469해설)
앞장에서말하고보여준것으로부터,이름들이이단과교리를의미한다는것이분명합니다.그러므로이장의이름들이사람을뜻하는것이아니라어떤것들을뜻하며,여기서는교리들또는교회들을뜻한다는것을알수있습니다.이교리들또는교회들은여러변화를겪었음에도불구하고태고교회때부터‘노아’(Noah)에이르기까지보존되었습니다.그러나모든교회는시간이흐르면서쇠퇴하여마침내소수에게만남게됩니다.홍수때그것이남아있던그소수를‘노아’(Noah)라하였습니다. From what has been said and shown in the foregoing chapter, it is evident that by names are signified heresies and doctrines. Hence it may be seen that by the names in this chapter are not meant persons, but things, and in the present instance doctrines, or churches, which were preserved, notwithstanding the changes they underwent, from the time of the most ancient church even to “Noah.” But the case with every church is that in course of time it decreases, and at last remains among a few; and the few with whom it remained at the time of the flood were called “Noah.”
[2]참된교회가쇠퇴하여소수에게만남게된다는것은이와같이쇠퇴해온다른교회들에서도분명히알수있습니다.남아있는사람들은말씀에서‘리메인스’(remains)와‘남은자’(remnant)라하며,‘땅의가운데’또는‘중앙에’있다고합니다.전체적인경우가그러한것처럼개별적인경우도그러합니다.즉교회의경우와마찬가지로각사람에게도그러합니다.주님께서모든사람안에리메인스를보존하지않으신다면그는필연적으로영원히멸망할수밖에없습니다.영적생명과천적생명이리메인스안에있기때문입니다.일반적또는보편적인경우도마찬가지입니다.교회또는참된신앙이남아있는사람들이언제나얼마간존재하지않는다면인류는멸망할것입니다.일반적으로알려진것처럼몇사람을위하여한성읍이,때로는한나라전체가구원받기도하기때문입니다.이점에서교회는인체와같습니다.심장이건강한동안에는그주변의내장들도생명을유지할수있지만,심장이쇠약해지면신체의다른부분들이영양을공급받지못하여사람이죽습니다.마지막리메인스가바로‘노아’(Noah)가의미하는것입니다.창6:12과다른여러곳에서알수있듯온땅이부패하였기때문입니다.That the true church decreases and remains with but few, is evident from other churches which have thus decreased. Those who are left are in the Word called “remains,” and a “remnant,” and are said to be “inthemidst,” or “middle,” “oftheland.” And as this is the case in the universal, so also it is in the particular, or as it is with the church, so it is with every individual man; for unless remains were preserved by the Lord in everyone, he must needs perish eternally, since spiritual and celestial life are in the remains. So also in the general or universal—if there were not always some with whom the church, or true faith, remained, the human race would perish; for, as is generally known, a city, nay, sometimes a whole kingdom, is saved for the sake of a few. It is in this respect with the church as it is with the human body; so long as the heart is sound, life is possible for the neighboring viscera, but when the heart is enfeebled, the other parts of the body cease to be nourished, and the man dies. The last remains are those which are signified by “Noah”;for(as appears from Gen. 6:12, as well as from other places) the whole earth had become corrupt.
하나님이보신즉땅이부패하였으니이는땅에서모든혈육있는자의행위가부패함이었더라(창6:12)
[3]각사람안에존재하는리메인스뿐아니라교회전체안에존재하는리메인스에관해서도선지서에서많이말씀하고있습니다.이사야에서는, Of remains as existing in each individual as well as in the church in general, much is said in the prophets; as in Isaiah:
이말씀에서거룩함은리메인스에관하여서술되며,이리메인스는교회의리메인스뿐아니라교회에속한사람의리메인스도의미합니다.시온과예루살렘에‘남아있는자들’(thoseleft)이단지‘남아있다’는이유만으로거룩할수는없기때문입니다.다시이사야에서는, in which passage holiness is predicated of the remains, by which are signified the remains of the church, and also of a man of the church; for “thoseleft” in Zion and Jerusalem could not be holy merely because they were “left.” Again:
[4]사람또는교회의남은것,곧리메인스는또한십분의일로표상되었으며,그것은거룩한것이었습니다.그래서십을포함하는수도거룩하였으며,따라서‘십’(ten)은리메인스에관하여서술됩니다.이사야에서는, The residue or remains of a man, or of the church, were also represented by the tenths, which were holy; hence also a number with ten in it was holy, and “ten” is therefore predicated of remains; as in Isaiah:
이말씀들과다른많은구절에서속뜻으로는지금까지말해온‘리메인스’(remains)가의미됩니다.교회의리메인스로말미암아한성읍이보존된다는것은소돔에관하여아브라함에게하신말씀에서도분명합니다. In these and many other passages, in the internal sense are signified the “remains” of which we have been speaking. That a city is preserved for the sake of the remains of the church, is evident from what was said to Abraham concerning Sodom:
AC.468은 창5의 ‘장개요’를 마무리하면서 지금까지 제시된 이름들의 의미를 매우 분명하게 확정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장의이름들이사람을뜻하는것이아니라’ 교리 또는 교회를 뜻한다고 명시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우리가 조심스럽게 유보해 두었던 문제에 대해서도 중요한 기준을 줍니다. 적어도 창5의 속뜻을 해설하는 이 자리에서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므두셀라’, ‘라멕’, ‘노아’는 개인들의 일대기를 설명하기 위한 이름들이 아니라, 태고교회로부터 이어지며 변화해 온 교리와 교회들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창5의 족보 형식은 속뜻으로는 교회의 영적 역사가 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교회들이 ‘여러변화를겪었음에도불구하고’ 태고교회로부터 노아에 이르기까지 보존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앞의 AC.462-467을 하나의 흐름으로 묶어 줍니다. 처음에는 천적인 태고교회가 있었고, 이후 그 상태가 점차 달라졌으며, 라멕에 이르러서는 태고교회가 누렸던 퍼셉션이 전혀 남아 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완전히 소멸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홍수 때까지 참된 교회가 남아 있던 소수가 있었고, 바로 그들을 ‘노아’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노아’는 이 문맥에서 단지 열 번째 교회의 명칭만이 아니라, 이전 교회가 거의 사라진 가운데 주님께서 보존하신 ‘마지막리메인스’를 나타냅니다.
[2]에서 이 ‘리메인스’의 원리는 교회 전체에서 한 사람의 내면으로 확대됩니다. 이것이 AC.468의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교회 전체에 참된 것과 선한 것이 소수에게 남아 있어 인류 전체가 보존되는 것처럼, 한 사람 안에도 주님께서 보존하시는 리메인스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히 과거의 좋은 기억 정도로 말하지 않습니다. 영적 생명과 천적 생명이 바로 이 리메인스 안에 있다고 합니다. 사람이 살아오는 동안 주님께서 그의 내면에 보존하신 선과 진리,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들이 훗날 거듭남의 토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모든사람안에리메인스를보존하지않으신다면그는필연적으로영원히멸망할수밖에없다’고까지 말합니다.
이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심장의 비유를 사용합니다. 심장이 건강한 동안에는 주변의 장기들도 생명을 유지하지만, 심장이 쇠약해져 더 이상 영양을 공급하지 못하면 다른 부분들도 함께 죽게 됩니다. 교회 안의 리메인스가 이와 같습니다. 참된 교회가 외적으로 크게 쇠퇴하더라도 주님께서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소수를 보존하시는 동안에는 인류와 교회가 완전히 끊어지지 않습니다. ‘노아’가 바로 홍수 직전 이러한 마지막 리메인스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노아의 보존은 단지 몇 사람이 재난에서 살아남는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인류 가운데 영적 생명이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주님께서 ‘교회안에마지막까지남아있는선과진리,곧리메인스’를 보존하시는 섭리를 보여 줍니다.
[3]에서 인용되는 사4:3-4, 사10:20-21, 렘50:20, 미5:7은 바로 이 원리가 말씀 전체에 반복되어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남아있는자’, ‘남은자’, ‘피한자’가 중요한 것은 그들이 단순히 숫자상 살아남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특별히 ‘시온과예루살렘에남아있는자들이단지남아있다는이유만으로거룩할수는없다’고 말하는 까닭도 이것입니다. 이들이 ‘거룩하다’고 일컬어지는 것은 속뜻으로는 주님께서 보존하신 선과 진리, 곧 리메인스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말하는 ‘남은자’의 주제는 AC의 리메인스 교리와 깊이 연결됩니다.
[4]에서는 이 리메인스가 왜 ‘십’이라는 수와 연결되는지가 설명됩니다. 십분의 일이 리메인스를 표상하였기 때문에 십을 포함하는 수가 거룩하게 사용되었고, ‘십’은 리메인스에 관하여 서술되었습니다. 그래서 사6:12-13에서는 모든 것이 황폐해진 뒤에도 ‘십분의일’과 ‘거룩한씨’가 남으며, 암5:3에서는 천 명 가운데 백 명, 백 명 가운데 열 명이 남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산술적인 비율 자체가 아니라, 황폐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무엇인가를 남겨 두신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주님께서 보존하신 거룩한 씨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창18:32의 소돔 이야기가 인용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거기서십명을찾으시면’이라는 아브라함의 간구와 ‘내가십명으로말미암아멸하지아니하리라’는 주님의 말씀에서 ‘십’은 단순한 인원수를 넘어 리메인스를 표상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몇사람을위하여한성읍이,때로는한나라전체가구원받기도한다’는 설명과 연결됩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외적인 규모가 아니라 그 안에 아직 보존되어 있는 선과 진리입니다.
이렇게 AC.468은 창5의 장 개요 전체를 ‘리메인스’라는 놀라운 원리로 마무리합니다. 태고교회는 쇠퇴했고 퍼셉션도 마침내 사라졌지만, 주님은 모든 것을 소멸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마지막까지 보존된 것을 ‘노아’라 하셨고, 바로 그것으로부터 새로운 고대교회를 일으키셨습니다. 그리고 이 질서는 교회의 역사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 사람의 거듭남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 안에서도 때로는 선과 진리가 거의 사라진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주님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깊은 곳에 리메인스를 보존하시며 그것을 붙들고 다시 영적 생명을 일으키십니다. 그러므로 ‘노아’는 교회의 마지막 남은 자인 동시에, 인간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도록 끝까지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는 주님의 자비와 섭리를 보여 주는 이름입니다. (AC.468해설)
‘라멕’(Lamech)은태고교회가누렸던퍼셉션을전혀간직하지못한것으로묘사되며,‘노아’(Noah)는새교회로묘사됩니다.(29절)“Lamech” is described as retaining nothing of the perception which the most ancient church enjoyed; and “Noah” is described as a new church. (verse 29)
AC.467은 앞의 AC.466에서 노아를 ‘고대교회’라고 한 이유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아홉 번째 교회인 ‘라멕’에 이르러서는 태고교회가 누렸던 퍼셉션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고, 그다음 ‘노아’는 ‘새교회’로 묘사됩니다. 따라서 라멕에서 노아로 넘어가는 것은 단순히 아홉 번째 교회 다음에 열 번째 교회가 이어지는 것만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한 질서가 끝나고 새로운 교회의 질서가 시작되는 중요한 전환입니다.
여기서 ‘태고교회가누렸던퍼셉션’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태고교회의 특징은 주님에 대한 사랑 안에서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를 내적으로 퍼셉션하는 데 있었습니다. 이것은 외부에서 교리를 배우고 그것이 참인지 추론하여 받아들이는 방식과 달랐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선 안에서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 내적으로 알아차리는 것이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AC.467은 라멕에 이르러 그 퍼셉션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AC.462에서 시작하여 지금까지 이어져 온 변화가 어디에 이르렀는지를 보여 줍니다. ‘셋’은 처음의 태고교회만큼 천적이지 않았고, 이후 여러 교회가 계속 이어졌으며, 마침내 ‘라멕’에 이르러서는 태고교회가 누렸던 퍼셉션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창5의 여러 이름을 통하여 나타나는 변화는 단순히 교회의 명칭이 바뀌어 온 과정이 아니라, 태고교회를 특징짓던 내적 상태가 점차 달라져 마침내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는 지속될 수 없게 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노아’가 등장합니다. AC.467은 노아를 단순히 라멕 다음의 교회라고 하지 않고 ‘새교회’라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라멕에게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면, 다음 교회는 이전의 상태를 그대로 회복하거나 반복하는 방식으로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는 달라진 인간의 상태에 맞는 새로운 교회의 질서가 필요했고, 그 새 교회를 ‘노아’라고 한 것입니다. 앞의 AC.466에서 이 교회를 ‘고대교회’라고 한 것도 바로 이러한 전환과 연결됩니다.
이렇게 보면 앞의 에녹에 관한 AC.464도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에녹이라 하는 교회가 태고교회에 계시되고 퍼셉션된 것들을 교리로 형성하여 후대의 쓰임을 위해 보존했던 것은,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영원히 같은 방식으로 지속되지 않을 것을 전제로 합니다. 이제 라멕에 이르러 그 퍼셉션이 사라지고 노아라는 새 교회가 시작된다는 AC.467의 설명은, 왜 앞선 시대에 그러한 교리의 보존이 필요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줍니다. 다만 그 보존된 교리가 새 교회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용되는지는 이후의 본문 해설을 따라가며 살펴보아야 합니다.
AC.467은 결국 태고교회에서 고대교회로 넘어가는 경계선을 매우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한쪽에는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라멕’이 있고, 다른 쪽에는 ‘새교회’인 ‘노아’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전 교회의 끝이 곧 주님의 역사의 끝은 아닙니다. 한 형태의 교회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을 때에도 주님은 인간의 달라진 상태에 맞추어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십니다. 그러므로 라멕과 노아 사이에는 단절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한 교회의 끝에서도 다음 교회를 준비하시고 이어 가시는 주님의 섭리가 함께 나타나 있습니다. (AC.467해설)
열번째교회는홍수후세교회의모체가되었으며,그이름을‘노아’(Noah)라하였습니다.이교회를고대교회라합니다.(28-29절)A tenth, the parent of three churches after the flood, was named “Noah.” This church is to be called the ancient church. (verses 28–29)
AC.466은 AC.460부터 이어져 온 교회들의 계승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을 보여 줍니다. 태고교회로부터 시작하여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므두셀라’, ‘라멕’으로 이어진 뒤, 열 번째 교회로 ‘노아’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노아를 단순히 그 연속 가운데 하나를 더 추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 교회에 새로운 이름을 붙입니다. 바로 ‘고대교회’입니다. 따라서 노아는 태고교회의 이어지는 여러 교회가 끝나 가는 지점인 동시에, 새로운 교회의 시작을 보여 주는 이름입니다.
원문에서 특히 중요한 표현은 ‘홍수후세교회의모체’(theparentofthreechurchesaftertheflood)입니다. 노아라 하는 교회로부터 홍수 후에 다시 세 교회가 이어져 나오게 된다는 뜻입니다. AC.466은 아직 그 세 교회가 무엇이며 각각 어떠한 상태인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우선 노아가 이전 교회의 마지막에만 서 있는 것이 아니라, 홍수 이후에 이어질 교회들의 출발점이 된다는 사실을 밝혀 줍니다.
이 점에서 ‘노아’를 열 번째 교회라고 하는 것과 ‘고대교회’라고 하는 것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노아는 앞에서부터 이어져 온 순서로는 열 번째이지만, 그 성격에서는 새로운 교회의 시작입니다. 즉 교회의 역사가 완전히 끊어진 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새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앞선 시대에서 보존된 것을 통하여 다음 시대의 교회가 준비됩니다. 창5의 교회 계승이 노아에 이르면서 하나의 큰 전환점을 맞는 것입니다.
‘이교회를고대교회라한다’는 말은 앞에서 계속 다루어 온 ‘태고교회’와도 분명히 구별됩니다. 태고교회와 고대교회는 단순히 시대가 앞서고 뒤선다는 차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교회의 상태와 방식에도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다만 AC.466은 아직 그 차이를 자세히 설명하는 곳이 아니므로, 여기서는 노아와 함께 ‘고대교회’라는 새로운 교회가 시작된다는 점을 붙들어 두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 구체적인 차이는 이후의 해설에서 차례로 밝혀집니다.
또한 AC.466은 앞에서 에녹에 관하여 살펴본 내용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에녹이라 하는 교회에서는 태고교회에 계시되고 퍼셉션된 것들이 교리로 형성되어 후대의 쓰임을 위해 보존되었습니다. 이제 노아에 이르러서는 태고교회와는 다른 상태의 교회가 등장합니다. 따라서 앞선 교회에서 보존된 것이 후대에 쓰이도록 준비되었다는 AC.464의 설명은, 교회의 상태가 달라져도 주님께서 필요한 것을 보존하시며 다음 교회를 준비하신다는 큰 흐름 속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466은 그래서 창5전체의 방향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이정표입니다. 이 장은 태고교회에서 출발하여 여러 교회를 거쳐 단순히 쇠퇴와 종말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노아’라는 열 번째 교회에 이르러 다음 시대를 준비합니다. 태고교회의 한 시대가 저물어 가는 가운데서도 주님은 다음 교회를 위한 것을 보존하시고, 홍수 이후 다시 교회가 이어질 길을 마련하십니다. ‘노아’는 바로 그 연속과 전환의 자리에 놓인 교회이며, 그 교회를 가리켜 스베덴보리는 ‘고대교회’라고 합니다. (AC.466해설)
아홉번째교회를가리켜‘라멕’(Lamech)이라하였습니다.(25절)A ninth church was called “Lamech.” (verse 25)
25므두셀라는백팔십칠세에라멕을낳았고(25절)
해설
AC.465는 앞에서 이어져 온 교회의 순서 가운데 ‘라멕’을 아홉 번째 교회로 제시합니다. AC.463에서 ‘에노스’부터 ‘므두셀라’까지 세 번째에서 여덟 번째 교회가 차례로 제시되었고, 이제 그다음 교회가 ‘라멕’입니다. 따라서 창5:25의 ‘라멕’ 역시 장 개요에서는 한 교회의 이름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 한 문장은 짧지만 AC.460에서 시작된 흐름을 그대로 이어 갑니다. 태고교회로부터 여러 교회가 차례로 이어졌고, ‘라멕’은 그 연속 가운데 아홉 번째에 해당합니다. 문자상으로는 족보 속에서 ‘므두셀라는백팔십칠세에라멕을낳았고’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속뜻으로는 ‘라멕’이라는 이름을 통하여 태고교회로부터 이어진 또 하나의 교회를 보여 줍니다.
여기서도 AC.465가 말하는 범위를 넘어 ‘라멕’이라는 교회의 구체적인 상태를 미리 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장 개요에서 우선 밝혀 주는 것은 그 위치와 순서입니다. ‘라멕’은 ‘므두셀라’ 다음에 이어지는 아홉 번째 교회이며, 그 교회가 구체적으로 어떠했는지는 이후 해당 본문에 대한 해설에서 밝혀집니다.
특히 ‘아홉번째’라는 표현은 창5의 이름들이 서로 무관하게 나열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연속적인 흐름 안에 있음을 다시 확인시켜 줍니다. ‘셋’에서 시작하여 여러 이름을 거쳐 ‘라멕’에 이르는 동안 각각의 이름은 이어지는 교회를 가리키며, 창5는 그 순서를 통하여 태고교회의 여러 상태가 어떻게 계속되어 갔는지를 보여 줍니다.
따라서 AC.465의 핵심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라멕’은 태고교회로부터 이어져 온 교회들의 흐름 가운데 아홉 번째 교회를 가리킵니다. 이처럼 장 개요는 각 이름의 의미를 자세히 풀기 전에 먼저 전체 계승의 뼈대를 세워 줍니다. 독자는 이 뼈대를 붙들고 이후 본문 해설로 들어가면서 ‘라멕’이라 하는 교회가 앞선 교회와 어떻게 이어지며 또 어떤 상태를 나타내는지를 살펴보게 됩니다. (AC.465해설)
‘에녹’(Enoch)이라하는교회는태고교회에계시되고그교회가퍼셉션한것들로부터교리를형성한것으로묘사됩니다.이교리는당시에는쓸모가없었지만후대의쓰임을위해보존되었습니다.이것을가리켜‘에녹이더이상있지아니하였으니,하나님이그를데려가셨기때문이라’(Enochwasnomore, becauseGodtookhim)고한것입니다.(22-24절)The church called “Enoch” is described as framing doctrine from what was revealed to and perceived by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doctrine, although of no use at that time, was preserved for the use of posterity.This is signified by its being said that “Enochwasnomore, becauseGodtookhim.” (verses 22–24)
AC.464는 앞의 AC.463에서 일곱 번째 교회로 제시된 ‘에녹’이 다른 교회들과 구별되는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보여 줍니다. 에녹이라 하는 교회는 태고교회에 계시되고 그 교회가 퍼셉션한 것들을 모아 ‘교리’로 형성하였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에녹이 새로운 진리를 스스로 만들어 냈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태고교회가 주님으로부터 계시받고 퍼셉션을 통해 알았던 것들을 일정한 교리 형태로 정리한 것입니다.
이것은 태고교회의 상태와 이후 교회의 상태가 달라지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태고교회는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를 교리로 배워서 아는 교회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 안에서 그것을 퍼셉션하던 천적 교회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퍼셉션이 살아 있던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이 이미 내적으로 알고 있는 것을 따로 교리 형태로 정리하여 배우는 일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AC.464가 에녹이 형성한 교리가 ‘당시에는쓸모가없었다’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교리는 ‘후대의쓰임을위해’ 보존되었습니다. 이 짧은 표현 안에는 교회의 상태가 앞으로 달라질 것이라는 사실이 들어 있습니다. 태고교회와 같은 퍼셉션이 계속 유지된다면 별도의 교리가 필요하지 않았겠지만, 그것이 사라져 갈 때에는 이전에 퍼셉션으로 알았던 것들을 다른 방식으로 보존하고 전달할 필요가 생깁니다. 에녹이라 하는 교회가 한 일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살아 있는 퍼셉션으로 받아들였던 것들을 교리 형태로 남김으로써 후대가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교리’는 퍼셉션을 대신하여 에녹이 만들어 낸 인간적인 사상이 아닙니다. 그 근원은 여전히 주님으로부터 태고교회에 계시되고 퍼셉션된 것들입니다. 다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교회의 상태가 달라짐에 따라, 이전에는 내적으로 직접 퍼셉션하던 것이 이제는 가르치고 배우며 보존할 수 있는 형태로 옮겨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에녹은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이후 교회가 사용할 교리 사이에 놓인 중요한 전환점을 보여 줍니다.
이와 연결되는 말씀이 ‘하나님이그를데려가시므로세상에있지아니하였더라’입니다. 장 개요에서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에녹이라는 교회가 형성한 교리가 ‘후대의쓰임을위해보존되었다’는 뜻으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하나님이그를데려가셨다’는 말씀은 장 개요의 속뜻으로는 에녹이라는 교회의 역할과 그 교리가 보존된 일을 가리킵니다. 이 표현의 보다 구체적인 의미는 뒤의 본문 해설에서 다시 자세히 다루어집니다.
AC.464에서 특히 눈여겨볼 것은 주님께서 한 교회의 상태가 변해 가는 가운데서도 다음 시대에 필요한 것을 미리 보존하신다는 점입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은 계속 같은 방식으로 이어지지 않았지만, 그들에게 계시되고 퍼셉션된 것이 함께 사라지도록 두지 않으셨습니다. 에녹이라 하는 교회를 통하여 그것을 교리 형태로 보존하여 후대의 쓰임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에녹의 이야기는 단순히 한 교회의 상태만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상태가 달라질 때에도 진리가 다음 세대에 전달될 길을 마련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함께 보여 줍니다. (AC.464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