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3 심화

2. 왜 광명체 본문에서 갑자기 ‘사랑, 생명, 기쁨과 행복’을 말하는가?

 

지금 광명체 본문인데, AC.33은 조금은 뜬금없이 참된 사랑, 참된 생명, 참된 기쁨과 행복 얘기를 하네요. 짐작은 되지만... 좀 풀어 설명해 주세요.

 

창1:14-17의 넷째 날 본문은 해와 달과 별, 곧 ‘광명체들’에 관한 말씀입니다. AC.30부터 스베덴보리는 이 광명체들을 사랑과 신앙으로 설명해 왔습니다. 그런데 AC.33에 이르면 갑자기 ‘참된 사랑’, ‘참된 생명’, ‘참된 기쁨과 행복’을 이야기합니다. 얼핏 보면 광명체의 속뜻을 설명하다가 잠시 다른 주제로 빠진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30-33의 흐름을 함께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AC.33은 앞에서 말한 ‘더 큰 광명체’, 곧 사랑이 왜 그렇게 근본적인지를 설명하는 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AC.30에서 스베덴보리는 ‘두 큰 광명체’를 사랑과 신앙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더 큰 광명체’는 사랑이고 ‘더 작은 광명체’는 신앙이라고 했습니다.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얻기 때문에 사랑이 먼저입니다. AC.32에서는 이 질서를 더욱 분명히 하여, 태고교회와 천적 천사들은 사랑과 분리된 신앙을 알지 못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왜 사랑이 그토록 근본적일까요? 왜 사랑이 ‘더 큰 광명체’이고, 신앙은 그 사랑에서 생명을 얻는다고 하는 것일까요?

 

AC.33은 바로 이 지점에서 사랑과 생명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랑이 없다면 생명도 있을 수 없으며, 사랑에서 흘러나오지 않는 기쁨도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랑이 어떠한가에 따라 생명이 그러하고, 기쁨도 그러하다’고 합니다.

 

따라서 사랑은 단순히 신앙과 나란히 놓이는 하나의 종교적 덕목이 아닙니다. 사랑은 사람의 생명과 직접 관계됩니다.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생명의 성질이 달라지고, 그 사람이 무엇에서 기쁨을 느끼는지도 달라집니다. 이것이 ‘더 큰 광명체’인 사랑을 설명하다가 생명과 기쁨의 이야기가 나오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더욱 강하게 설명하기 위해 ‘사랑, 같은 말이지만 욕망을 제거한다면 생각은 즉시 멈추고 사람은 마치 죽은 사람과 같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앞의 심화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것은 생각이 무가치하다는 뜻이 아니라 생각을 움직이는 더 깊은 생명의 원리가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은 무엇인가를 원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생각하고 추구하고 행동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구별이 하나 더 필요합니다. 사랑이 생명과 기쁨의 근원이라고 해서 모든 사랑에서 나오는 생명과 기쁨이 같은 것은 아닙니다. 바로 이 때문에 AC.33은 ‘참된 사랑’, ‘참된 생명’, ‘참된 기쁨과 행복’을 구별하여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도 ‘생명과 기쁨의 어떤 모양’이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사람은 자기 자신을 높이는 데서 큰 활력을 느낄 수도 있고, 재물이나 지위나 명예를 얻는 데서 강한 기쁨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나는 무엇인가를 사랑한다’, ‘나는 이것을 하면서 매우 기쁘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이 참된 사랑과 참된 기쁨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참된 사랑은 무엇일까요? AC.33은 ‘참된 사랑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참된 생명은 그분에게서 오는 사랑의 생명이며, 참된 기쁨은 그 생명에서 오는 기쁨’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사랑, 생명, 기쁨이 하나의 질서로 연결됩니다. 그 근원은 사람 자신이 아니라 주님입니다.

 

이것이 AC.32와도 정확하게 이어집니다. AC.32에서 천적 천사들은 자기들의 사랑과 생명과 행복이 자기 자신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알고, 고백하며, 지각한다’고 했습니다. AC.33은 이제 그 원리를 좀 더 일반적인 형태로 설명합니다. 참된 사랑은 주님을 향한 사랑이고, 참된 생명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생명이며, 참된 기쁨은 바로 그 생명에서 나옵니다.

 

따라서 AC.33의 사랑·생명·기쁨 이야기는 광명체 본문에서 벗어난 별도의 주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더 큰 광명체가 사랑이다’라는 말의 깊이를 밝혀 주는 설명입니다. 사랑이 큰 광명체라는 것은 단순히 사랑이 신앙보다 더 밝다거나 더 중요하다는 정도의 뜻이 아닙니다. 신앙이 사랑에서 생명을 얻고, 인간의 생명과 기쁨의 성질 역시 사랑의 성질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사랑이 근본적인 것입니다.

 

여기서 또 하나 조심할 점은 ‘광명체’를 단순히 ‘진리의 빛’이라고 바꾸어 설명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문맥에서 두 광명체는 각각 사랑과 신앙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진리의 빛이 사랑과 결합되어야 참된 빛이 된다’는 식으로 설명하기보다, AC.30-33이 실제로 말하는 사랑과 신앙의 관계를 그대로 따라가는 편이 정확합니다. 사랑이 더 큰 광명체이고 신앙은 더 작은 광명체이며,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넷째 날에 광명체가 나타난다는 것을 곧바로 ‘이제 참된 기쁨과 행복이 완성된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도 없습니다. AC.33은 거듭남의 넷째 상태 전체를 여기서 완결하여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광명체 가운데 특히 사랑이 가지는 생명적 성격을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후 거듭남의 과정은 계속 이어집니다.

 

이렇게 보면 AC.33의 흐름은 오히려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더 큰 광명체는 사랑이다. 그런데 왜 사랑이 더 큰 광명체인가? 사랑은 생명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의 성질에 따라 생명의 성질도, 기쁨의 성질도 달라진다. 그리고 참된 사랑과 참된 생명과 참된 기쁨의 근원은 주님에게 있다.’ 이런 흐름입니다.

 

결국 AC.33에서 ‘참된 사랑, 생명, 기쁨과 행복’이 등장하는 이유는 광명체 이야기를 떠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광명체의 속뜻을 더 깊이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해가 단순히 밝은 천체가 아니라 ‘사랑’을 나타낸다고 할 때, 그 사랑은 인간 생명의 가장 깊은 곳과 관계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참된 생명은 사람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래서 창1의 넷째 날은 단순히 사람 안에 무엇인가 ‘밝은 것’이 생기는 단계가 아닙니다. AC.30-33의 흐름에서 보면 사랑과 신앙의 질서가 나타나고, 신앙이 사랑에서 생명을 얻으며, 그 사랑과 생명의 참된 근원이 주님이라는 사실이 점차 밝혀지는 단계입니다. AC.33의 사랑과 생명과 기쁨에 관한 설명은 바로 이 넷째 날의 아르카나를 한층 더 깊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AC.33, 창1:14-17, ‘사랑이 곧 생명이다 : 참된 사랑과 거짓 사랑의 결정적 분별’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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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 심화 1, ‘생각이 즉시 멈춘다’

AC.33.심화 1. ‘생각이 즉시 멈춘다’ 위 AC.33 본문, ‘만일 사랑, 같은 말이지만 욕망을 제거한다면, 욕망은 사랑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생각은 즉시 멈추고, 사람은 마치 죽은 사람과 같이 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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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창1:14-17)

 

AC.33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떤 사랑도 없이는 생명이라는 게 있을 수도, 그리고 사랑에서 흘러나오지 않는 기쁨이라는 것도 있을 수 없음을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사랑이 어떠한가에 따라 생명이 그러하고, 기쁨도 그러합니다. 만일 사랑(loves), 같은 말이지만 욕망(desires)을 제거한다면, 욕망은 사랑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생각은 즉시 멈추고, 사람은 마치 죽은 사람과 같이 될 것입니다. 실제로 저는 이것을 생생히 본 적이 있습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The loves of self and of the world)에도 어떤 생명과 기쁨의 모습 같은 것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들은 참된 사랑과는 전적으로 반대됩니다. 참된 사랑이란 사람이 무엇보다도 주님을 사랑하고, 자기 자신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 자신과 세상을 사랑하는 만큼, 그만큼 이웃을 미워하게 되고, 그 결과 주님을 미워하게 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따라서 그것들은 사랑이 아니라 미움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사랑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참된 생명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생명이며, 참된 기쁨은 그 생명에서 나오는 기쁨입니다. 참된 사랑은 하나뿐이므로, 참된 생명도 하나뿐입니다. 그 하나의 생명에서 참된 기쁨과 참된 행복이 흘러나오는데, 이것이 바로 천국(heavens)의 천사들이 누리는 기쁨과 행복입니다. It is in everyone’s power very well to know that no life is possible without some love, and that no joy is possible except that which flows from love. Such however as is the love, such is the life, and such the joy: if you were to remove loves, or what is the same thing, desires—for these are of love—thought would instantly cease, and you would become like a dead person, as has been shown me to the life. The loves of self and of the world have in them some resemblance to life and to joy, but as they are altogether contrary to true love, which consists in a man’s loving the Lord above all things, and his neighbor as himself, it must be evident that they are not loves, but hatreds, for in proportion as anyone loves himself and the world, in the same proportion he hates his neighbor, and thereby the Lord. Wherefore true love is love to the Lord, and true life is the life of love from him, and true joy is the joy of that life. There can be but one true love, and therefore but one true life, whence flow true joys and true felicities, such as are those of the angels in the heavens.

 

해설

AC.33에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생명과 사랑의 관계를 매우 단순하면서도 근본적인 원리로 설명합니다. 사람에게 어떤 사랑도 없다면 생명도 있을 수 없고, 사랑에서 흘러나오지 않는 기쁨도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곧바로 ‘사랑이 어떠한가에 따라 생명이 그러하고, 기쁨도 그러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AC.33 전체를 이해하는 핵심입니다.

 

여기서 ‘사랑’은 단순히 우리가 흔히 말하는 따뜻한 감정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랑과 욕망(desires)을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사람이 무엇을 원하고 추구하며 그것에서 기쁨을 느끼는가는 그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래서 사랑을 제거하면 생각도 즉시 멈추고 사람은 마치 죽은 사람과 같이 된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자신이 실제로 생생하게 보았다고 덧붙입니다.

 

이 말은 인간의 생각과 삶을 움직이는 더 깊은 곳에 사랑이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먼저 생각하고 그다음 무엇을 사랑한다고 여기기 쉽지만, AC.33은 그보다 더 근원적인 차원을 보여 줍니다. 어떤 것을 원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것에 관한 생각이 일어나고, 그 사랑에 따라 기쁨도 생깁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생명의 성질을 알려면 그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만 볼 것이 아니라,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에서 기쁨을 얻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매우 중요한 구별이 나옵니다. 사랑이 생명을 움직인다고 해서 모든 사랑이 같은 생명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도 ‘생명과 기쁨의 어떤 모양’이 있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높이고 세상의 것을 얻는 데서 강한 욕망과 활력을 느낄 수 있고, 그것이 이루어질 때 큰 기쁨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만 보면 이것도 분명히 하나의 ‘살아 있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참된 사랑과 분명히 구별합니다. 참된 사랑은 무엇보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지배하게 되면 사람은 자기 자신과 세상을 다른 모든 것보다 앞세우게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자기 자신과 세상을 사랑하는 만큼 이웃을 미워하고, 그 결과 주님을 미워한다고까지 강하게 말합니다.

 

여기서 ‘미워한다’는 말을 단순히 감정적으로 누군가를 싫어하는 것만으로 좁혀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33의 문맥에서 중요한 것은 지배적인 사랑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지배하면 이웃과 주님을 향한 참된 사랑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삶이 형성됩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사랑처럼 보이고 기쁨과 생명까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참된 사랑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이 구별 때문에 ‘사랑이 어떠한가에 따라 생명이 그러하고, 기쁨도 그러하다’는 첫 문장이 더욱 중요해집니다. 문제는 단순히 ‘나는 무엇인가를 열심히 사랑하고 있는가?’가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무엇인가를 사랑하며 살아갑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내가 사랑하는 것은 무엇이며, 그 사랑은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는가?’입니다. 사랑의 성질에 따라 그 사람의 생명과 기쁨의 성질도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스베덴보리는 참된 사랑, 참된 생명, 참된 기쁨을 하나의 근원으로 연결합니다. 참된 사랑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참된 생명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생명’이고, 참된 기쁨은 바로 그 생명에서 나오는 기쁨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참된 사랑의 근원이 사람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람 안에 사랑이 있는 것처럼 경험되지만, 그 사랑의 참된 생명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이것은 앞의 AC.30-32와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큰 광명체는 사랑이고 작은 광명체는 신앙이며,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그리고 천적 천사들은 자기들의 사랑과 생명과 행복이 자기 자신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알고, 고백하며, 지각한다고 했습니다. AC.33은 이제 그 원리를 ‘생명과 기쁨’이라는 차원에서 더욱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따라서 AC.33이 광명체 본문 한가운데에서 갑자기 사랑과 생명과 기쁨을 이야기하는 것은 본문에서 벗어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앞에서 ‘더 큰 광명체’라고 한 사랑이 왜 그렇게 중심적인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단지 신앙 옆에 놓이는 하나의 종교적 덕목이 아니라 사람의 생명을 움직이는 근본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랑이 사람을 지배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생명과 기쁨도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가 마지막에 천사들의 기쁨과 행복을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참된 사랑은 하나이고, 따라서 참된 생명도 하나이며, 그 생명에서 참된 기쁨과 행복이 흘러나옵니다. 천사들의 기쁨과 행복은 바로 이러한 사랑의 생명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행복은 단순히 좋은 환경을 얻거나 원하는 것을 마음껏 누리는 데서 생기는 행복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 근원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생명에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AC.33은 우리에게 매우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살아 있는가?’라는 질문보다 먼저 ‘무엇이 나를 살아 있게 하고 있는가?’를 묻게 합니다. 사람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도 강렬한 활력과 기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활력이 있다는 사실이나 기쁨을 느낀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이 참된 생명이라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결국 분별의 기준은 사랑의 성질과 그 근원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참된 사랑, 그리고 주님에게서 오는 그 사랑의 생명이 사람 안에 있을 때 거기에서 참된 기쁨과 행복도 흘러나옵니다. 이것이 AC.33에서 스베덴보리가 ‘사랑이 어떠한가에 따라 생명이 그러하고, 기쁨도 그러하다’는 말로 밝히는 핵심입니다.

 

심화

1. 사랑을 제거하면 왜 ‘생각이 즉시 멈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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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왜 광명체 본문에서 갑자기 ‘사랑, 생명, 기쁨과 행복’을 말하는가?

 

AC.33, 심화 2, ‘광명체 본문과 참된 사랑, 생명, 기쁨과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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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 창1:14-17, ‘사랑 없는 신앙은 빛이 아니다 : 생명을 가르는 광명체의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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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 창1:14-17, ‘큰 광명체’는 사랑, ‘작은 광명체’는 신앙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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