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415에는 양 떼와 가축뿐 아니라 우리, 목초지, 떡, 밀, 기름, 새 포도주가 잇달아 등장합니다. 이 많은 표현을 하나씩 외우려 하면 정작 스베덴보리가 밝히려는 중심을 놓치기 쉽습니다. 그가 이 구절들을 인용한 목적은 모든 농경·목축 용어의 뜻을 빠짐없이 정리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야발의 ‘가축’이 사랑의 거룩한 것에서 나오는 선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말씀에서 그와 관련된 표현들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통해 밝히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각 구절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풀이한 표현을 확인하고, 그 표현들이 공통으로 드러내는 관계를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렘23:3에서 주님은 흩어진 양 떼의 남은 자들을 모아 다시 그 우리로 돌아오게 하시고, 그들이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양 떼는 스스로 길을 찾아 돌아오는 것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모으고 돌아오게 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우리’가 사랑의 선과 관련된다는 근거로 인용합니다. 따라서 우리를 단순한 축사의 울타리로만 생각하기보다, 주님께서 양 떼를 돌아오게 하시는 말씀 안에서 그 의미를 살펴야 합니다. 다만 이 구절의 ‘남은자’를 곧바로 개인 안에 보존된 선과 진리라는 기술적 의미의 ‘리메인스’로 확정하는 것은 AC.415의 직접 설명을 넘어섭니다. 여기서는 흩어진 양 떼를 다시 모으시는 주님의 행위와 그들이 돌아가는 우리에 주목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겔34:14는 이 관계를 더욱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주님은 양 떼를 좋은 꼴로 먹이시고, 이스라엘의 높은 산에 그들의 우리가 있게 하시며, 좋은 우리에 눕게 하고 살진 꼴을 먹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에서 ‘우리’와 ‘목초지’가 사랑의 선들을 나타내고, ‘기름짐’도 그러한 선들에 관하여 사용되는 표현이라고 직접 밝힙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이해할 때에는 ‘우리는보호,목초지는진리의공급,눕는것은안식’이라는 식으로 각 낱말에 별도의 뜻을 먼저 붙일 필요가 없습니다. 좋은 우리와 좋은 꼴, 살진 목초지가 함께 묘사하는 풍성함을 살피면서, 스베덴보리가 그것들을 사랑의 선과 연결했다는 사실을 붙드는 것이 이번 번호에 더 충실한 읽기입니다.
사30:23에서는 땅의 소산으로 만든 떡이 풍성하고 기름지며, 가축이 넓은 초장에서 먹는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떡’이 천적인 것을, 가축이 먹는 ‘기름진것’이 거기서 나오는 선들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설명은 야발의 장막과 가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비교가 됩니다. 장막과 가축이 나란히 놓였을 때 장막이 사랑의 거룩한 것을, 가축이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을 나타내듯이, 이사야서에서도 천적인 것과 거기서 나오는 선이 함께 나타납니다. 다만 비·씨·땅·넓은 초장에 각각 세부적인 상응을 부여하고 그것들을 하나의 거듭남 단계로 연결하는 것은 AC.415가 직접 제시한 논증이 아닙니다. 그러한 해석은 다른 근거를 확인한 뒤 별도로 다루어야 합니다.
렘31:11-12에서는 밀과 새 포도주와 기름, 양 떼와 소 떼의 새끼들이 함께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밀’과 ‘기름’이 여호와의 거룩한 것을 묘사하고, ‘새포도주’와 ‘양떼와소떼의새끼들’이 거기서 나오는 선들을 묘사한다고 밝힙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단순히 곡식과 가축이 풍성하다는 사실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여호와의 거룩한 것과 거기서 나오는 선을 구별하여 설명한다는 점입니다. 기존 심화에서 새 포도주를 별도의 설명 없이 ‘영적선’이나 ‘그사랑에서나오는진리’로 확정하면, 이번 번호가 직접 제시한 구별과 어긋날 수 있습니다. AC.415에서는 그가 실제로 밝힌 범위, 곧 새 포도주가 여기서 거룩한 것에서 나오는 선들을 묘사한다는 설명을 우선해야 합니다.
이 네 구절을 함께 놓으면 우리와 목초지와 가축의 의미를 이해하는 길이 열립니다. 렘23:3에서는 흩어진 양 떼를 다시 모으시는 주님을, 겔34:14에서는 좋은 우리와 목초지에서 먹이시는 주님을 봅니다. 사30:23과 렘31:11-12에서는 천적인 것 또는 여호와의 거룩한 것과, 거기서 나오는 선이 함께 묘사됩니다. 이 말씀들은 모두 동일한 장면을 말하지는 않지만, AC.415에서는 사랑의 거룩한 것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의 관계를 밝히는 근거로 모입니다. 가축의 속뜻은 동물이라는 외형만 보고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가축이 말씀 안에서 무엇과 함께 등장하는지를 살필 때 더욱 분명해집니다.
여기서 ‘사랑이먼저이고선이그다음’이라는 말을 시간적인 순서로만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이 먼저 마음속에 사랑을 완성한 뒤에야 비로소 선을 행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AC.415가 강조하는 것은 선의 근원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이 선의 근원이므로, 선을 그 사랑과 분리하여 독립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사랑을 말하면서도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에는 관심이 없다면, 장막과 가축을 함께 놓은 말씀의 관계를 충분히 받아들이지 못한 셈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야발의 속뜻을 ‘사랑의거룩한것들과그사랑에서나오는선들에관한교리’라고 함께 설명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결국 우리와 목초지와 가축은 성도에게 외워야 할 상응 용어를 늘려 주기 위해 등장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사랑의 거룩한 것에서 나오는 선이 무엇인지를 말씀의 여러 장면을 통해 생각하게 합니다. 흩어진 양 떼를 모으시고 먹이시는 분은 주님이시며, 그분에게서 오는 사랑은 선의 근원입니다. 그러므로 야발의 ‘가축의조상’이라는 표현을 읽을 때에는 목축의 기원을 설명하는 문자적 기록을 인정하면서도, 그 속뜻에서 사랑과 선이 서로 분리되지 않는 질서를 보아야 합니다. (AC.415심화1)
그이유는그교회가내적인것조차인정하지않았으며,천적인것은더더욱인정하지않는그러한교회였기때문입니다. This was because that church was such that it did not even acknowledge internal, much less celestial things.
[2] ‘기름’(fat)이천적인것들과체어리티의선들을의미한다는것은선지서에서도분명합니다.이사야에서는다음과같이말합니다. That “fat” signifies celestial things, and the goods of charity, is evident in the prophets; as in Isaiah:
여기서‘기름진것’이문자그대로의기름을뜻하는것이아니라천적·영적선을뜻한다는것은매우분명합니다.시편에서도다음과같이말합니다. where it is very evident that fatness is not meant, but celestial spiritual good.So in David:
여기서‘살진것’(fatness)과‘생명의원천’(fountainoflives)은사랑에속한천적인것을의미하고,‘복락의강물’(riverofdeliciousnesses)과‘빛’(light)은사랑에서비롯된신앙에속한영적인것을의미합니다.다시시편에서는다음과같이말합니다. Here “fatness” and the “fountainoflives” signify the celestial, which is of love; and the “riverofdeliciousnesses,” and “light,” the spiritual, which is of faith from love.Again in David:
[3] 천적인것들은헤아릴수없이많은종류와,그보다도더헤아릴수없이많은세부종류로이루어져있기때문에,모세가백성앞에서읊은노래에서는그것들을다음과같이총괄적으로묘사합니다. As celestial things are of innumerable genera, and still more innumerable species, they are described in general in the song which Moses recited before the people:
이러한표현들의의미는속뜻을통하지않고서는누구도알수없습니다.속뜻이없다면‘소의엉긴젖’(butterofkine),‘양의젖’(milkofsheep),‘어린양의기름’(fatoflambs),‘숫양과염소의기름’(fatoframsandgoats),‘바산의아들들’(sonsofBashan),‘밀의콩팥의기름’(fatofthekidneysofwheat),‘포도의피’(bloodofthegrape)와같은표현들은단지말들에지나지않을것입니다.그러나이모든표현하나하나는천적인것들의종류와세부종류를의미합니다. It is impossible for anyone to know the signification of these expressions except from the internal sense.Without the internal sense, such expressions as the “butterofkine,” the “milkofsheep,” the “fatoflambs,” the “fatoframsandgoats,” the “sonsofBashan,” the “fatofthekidneysofwheat,” and the “bloodofthegrape,” would be words and nothing more, and yet they all and each signify genera and species of celestial things.
해설
AC.353은 앞의 AC.350에서 아벨이 드린 ‘기름진것’이 ‘천적인것자체이며,이것역시주님께속한다’고 한 내용을 자세히 풉니다. 첫 문장부터 핵심은 분명합니다. ‘천적인것은사랑에속한모든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기름’은 단순히 풍요롭고 좋은 것을 막연하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속한 천적인 선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앞 AC.352의 ‘모든사랑은주님에게서오는것이며,인간에게서오는것은조금도없습니다’라는 선언과 연결됩니다. 아벨이 드린 ‘기름’의 생명도 인간 자신의 선함이나 공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선에 있습니다.
그런데 곧이어 매우 중요한 말이 나옵니다. ‘신앙역시사랑에서비롯될때에는천적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가인과 아벨을 통하여 살펴본 신앙과 사랑의 관계를 정확하게 정리해 줍니다. 스베덴보리가 신앙을 낮추거나 배척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입니다. 반대로 신앙이 사랑에서 비롯되고 사랑과 결합되어 있다면 그 신앙 역시 천적인 성질을 가집니다. 이어 ‘체어리티는천적인것입니다.체어리티의모든선도천적인것입니다’라고 합니다. 사랑, 사랑에서 비롯된 신앙, 체어리티, 체어리티의 선은 서로 경쟁하는 별개의 종교 요소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생명 안에서 서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문제는 ‘신앙을가졌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그 생명인 사랑에서 떼어 내어 독립적인 것으로 만든 데 있습니다.
이 때문에 희생 제사에서는 여러 종류의 기름이 특별히 거룩한 것으로 구별되어 제단 위에서 불살라졌습니다. 출29장과 레3장, 4장, 8장에는 간을 덮는 기름, 콩팥 위의 기름, 내장을 덮는 기름 등이 매우 세밀하게 규정되어 있습니다. 문자만 보면 왜 이런 신체 부위의 기름까지 세세하게 구별하는지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353은 그 기름들이 천적인 것과 체어리티의 선을 표상했기 때문에 거룩하게 여겨졌다고 설명합니다. 다만 이 번호만을 근거로 간의 기름은 정확히 어떤 사랑이고 콩팥의 기름은 또 어떤 선이라고 세분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직접 밝히는 범위는 여러 종류의 기름이 천적인 것들을 표상했으며, 그것들이 거룩하여 제단 위에 드려졌다는 데 있습니다.
그 기름들이 ‘여호와께향기로운화제의음식’이라고 불린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자연적인 음식이나 기름을 필요로 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외적인 제사가 내적인 사랑과 선을 표상하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된 것입니다. AC.349에서 이미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으로부터 생명을 얻고, 그것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생명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제단 위 기름의 거룩함은 물질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표상하는 천적인 사랑과 선에 있습니다. 자연적인 제물은 그 내적 실재를 담아 보여 주는 표상적 그릇입니다.
같은 이유로 유대 백성이 기름을 먹지 못하도록 한 규례도 설명됩니다. AC.353은 그 이유를 매우 강하게 말합니다. 그 교회가 ‘내적인것조차인정하지않았으며,천적인것은더더욱인정하지않는’ 성격의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모든 유대인 개인의 내면을 일률적으로 단정하는 말로 확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표상교회로서의 그 교회의 일반적 성격과 기능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가장 내적인 사랑의 선을 표상하는 기름을 인간이 자기 것으로 취하는 대신 여호와께 속한 것으로 구별한 규례는, 표상적으로 보아 천적인 선이 인간의 proprium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속한다는 질서를 보존합니다.
[2]에서 스베덴보리는 제사법에서 선지서와 시편으로 이동하여 ‘기름진것’이 천적인 선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여러 말씀으로 확인합니다. 사55:2에서는 ‘기름진것’으로 영혼이 즐거움을 얻고, 렘31:14에서는 제사장의 마음이 ‘기름’으로 흡족해지는 것이 주님의 선으로 백성이 만족하는 것과 나란히 놓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기름은 문자적인 지방이나 풍성한 음식만을 뜻할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들을 연이어 인용하는 목적은 각각의 구절에 별개의 교리를 붙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씀 안에서 ‘기름’과 ‘기름진것’이 영혼을 만족시키는 천적·영적 선을 의미한다는 것을 하나의 논증으로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시36:8-9은 그 관계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살진것’과 ‘생명의원천’을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으로, ‘복락의강물’과 ‘빛’을 사랑에서 비롯된 신앙에 속한 영적인 것으로 풀이합니다. 여기서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은 서로 끊어진 두 세계가 아닙니다. 사랑에서 신앙이 비롯되는 질서 안에서 연결되어 있습니다. 특히 ‘주의빛안에서우리가빛을보리이다’라는 말씀은 이 문맥에서 인간의 신앙과 진리의 빛이 독립적인 자기 지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생명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신앙역시사랑에서비롯될때에는천적’이라는 AC.353첫머리의 선언과도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시63:5에서도 ‘기름진것’은 영혼을 만족시키는 천적인 것을, ‘찬송하는입술’은 영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민18:12에서는 땅의 첫 열매까지 ‘기름’이라는 말로 표현됩니다. 이것은 앞의 AC.352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처음 난 것이 오직 주님께 속한 거룩한 것을 의미했고, 여기서는 기름이 주님께 속한 천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아벨이 ‘양떼의처음난것과그기름진것’을 드렸다는 짧은 표현 안에는 두 가지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거룩한 것도 주님께 속하고, 그 거룩함 안에 있는 사랑의 선과 생명도 주님께 속합니다. 아벨의 예배는 인간이 자기 안에서 만들어 낸 선을 주님께 자랑스럽게 내놓는 예배가 아니라, 자기 안의 모든 참된 선과 사랑의 근원이 주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예배입니다.
[3]에서 신32:14가 인용되면서 AC.353은 한 단계 더 넓은 원리를 밝힙니다. ‘천적인것들은헤아릴수없이많은종류와,그보다도더헤아릴수없이많은세부종류로이루어져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노래에는 ‘소의엉긴젖’, ‘양의젖’, ‘어린양의기름’, ‘바산에서난숫양과염소’, ‘밀의콩팥의기름’, ‘포도의피’와 같이 매우 다양한 자연적 표현들이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각각이 천적인 것들의 서로 다른 종류와 세부 종류를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다만 AC.353은 각각이 정확히 어느 종류의 천적 선을 뜻하는지까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소의엉긴젖은이것’, ‘양의젖은저것’, ‘바산의숫양은이것’이라는 식으로 우리가 상응표를 더 만들어 붙이는 것은 스베덴보리보다 앞서 나가는 해석이 됩니다.
오히려 여기서 붙들어야 할 더 큰 원리는 천적인 사랑과 선의 헤아릴 수 없는 다양성입니다. 우리는 ‘사랑’, ‘선’, ‘체어리티’라는 말을 하나의 단순한 성질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주님에게서 오는 선은 실제 삶에서 무수한 형태와 쓰임으로 나타납니다. 한 사람을 위로하는 선과 잘못을 바로잡아 주는 선, 어린아이를 돌보는 선과 공동체의 질서를 지키는 선, 진리를 가르치는 선과 말없이 필요한 일을 감당하는 선은 모두 선에 속하면서도 그 질과 쓰임은 서로 다릅니다. 이것은 AC.353이 직접 각각의 사례를 열거한 것은 아니지만, ‘천적인것들의헤아릴수없는종류와세부종류’라는 원리를 우리의 삶에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예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은 획일적인 하나의 행동 양식이 아니라 각 사람과 공동체의 상태와 쓰임에 따라 무수한 형태로 받아들여집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상응을 읽는 방법에도 매우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기름= 사랑’, ‘빛= 신앙’과 같은 기본적인 대응을 아는 것은 유익하지만, 상응을 단순한 암호표처럼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AC.353자체가 기름에도 여러 종류가 있고, 천적인 것에는 헤아릴 수 없는 종류와 세부 종류가 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자연물이 어떤 문맥에서, 어떤 다른 표상들과 함께, 어떤 교회적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는지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상응은 자연물에 영적 단어 하나를 기계적으로 붙이는 방식이 아니라, 천국의 무수한 질서와 인간의 내적 상태가 자연계의 형상 안에 표현되는 살아 있는 관계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신32:14의 표현들을 두고 ‘속뜻이없다면단지말들에지나지않을것’이라고까지 말합니다. ‘밀의콩팥의기름’이나 ‘포도의피’와 같은 표현은 문자적으로만 보면 매우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353은 그러한 낯선 세부조차 말씀 안에서 무의미하게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천적인 실재의 종류와 세부 종류를 담고 있다고 봅니다. 이것이 문자적 의미가 무가치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말씀의 문자 안에 속뜻이 담겨 있기 때문에 그 문자적 형상 하나하나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말씀의 속뜻은 문자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문자 안에 담긴 천국의 실재를 열어 보여 줍니다.
다시 창4:4의 아벨에게 돌아오면 이 긴 설명의 목적이 선명해집니다. 아벨은 체어리티이고, ‘양떼의처음난것’은 오직 주님께 속한 거룩한 것이며, ‘기름’은 역시 주님께 속한 천적인 것, 곧 사랑에 속한 선입니다. 따라서 아벨의 제물은 ‘내가좋은것을만들어주님께드린다’는 인간 중심의 예배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모든 참된 사랑과 선의 생명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하는 예배를 나타냅니다. 가인에게도 소산과 제물이 있었지만 그것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행위와 예배였습니다. 반면 아벨의 제물에는 체어리티와 사랑의 생명이 있고, 그 생명의 근원이 주님께 있다는 인정이 있습니다. 두 제물의 차이는 자연적인 재료가 아니라 내적 생명의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AC.353의 핵심을 단지 ‘기름은천적인것을의미한다’는 상응 하나로만 기억해서는 부족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천적인 것이 ‘사랑에속한모든것’이며, 그 사랑의 근원이 오직 주님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신앙도 사랑에서 비롯될 때 살아 있고 천적이며, 체어리티와 체어리티의 모든 선 역시 그 사랑 안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결국 우리의 신앙과 예배와 행위 안에 ‘기름’이 있는가를 묻는다는 것은, 그 안에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의 생명이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진리를 많이 알고 예배를 충실히 드리며 많은 일을 하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 안에서 주님의 사랑이 이웃을 향한 선과 쓰임으로 살아 움직이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아벨이 드린 ‘기름’은 바로 그 살아 있는 사랑의 생명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창1:31)
AC.61
신앙에관한지식에속하는모든것은영적(靈的, spiritual)이라하고,주님과이웃을사랑하는데속한모든것은천적(天的, celestial)이라합니다.전자는인간의이해(understanding)에속하고,후자는그의의지(will)에속합니다. All things relating to the knowledges of faith are called spiritual, and all that are of love to the Lord and our neighbor are called celestial; the former belong to man’s understanding, and the latter to his will.
해설
AC.61은 매우 짧지만 앞으로 AC를 읽는 데 자주 만나게 될 두 용어, 곧 ‘영적’(spiritual)과 ‘천적’(celestial)을 이해하는 중요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에관한지식에속하는모든것’을 영적이라 하고, ‘주님과이웃을사랑하는데속한모든것’을 천적이라 합니다. 그리고 전자는 인간의 ‘이해’에, 후자는 ‘의지’에 속한다고 합니다.
바로 앞 AC.60에서는 창1:31의 ‘심히좋았더라’가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루고, 그 결과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 사이에 결혼이 이루어지는 상태라고 설명했습니다. AC.61은 그 설명에 이어 ‘그러면영적인것이무엇이고천적인것이무엇인가?’를 아주 간결하게 밝혀 주는 글입니다.
먼저 ‘영적’이라는 말을 주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영적이다’라고 하면 세속적이지 않다거나, 신앙심이 깊다거나,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관심이 많다는 뜻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AC.61에서 스베덴보리는 훨씬 구체적인 뜻으로 사용합니다. ‘신앙에관한지식에속하는모든것’을 영적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인간의 ‘이해’에 속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이해’는 단순히 ‘무슨말인지알아들었다’는 결과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무엇이 참인지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분별하는 능력과 관계된 말입니다. 이 점은 연결된 심화에서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반면 ‘천적’이라고 하는 것은 ‘주님과이웃을사랑하는데속한모든것’입니다. 이것들은 인간의 ‘의지’에 속합니다. 여기서 의지도 단순히 ‘의지가강하다’, ‘무엇을해내려는의욕이있다’는 일상적인 의미보다 넓게 읽어야 합니다. 사람이 무엇을 원하고 사랑하는가 하는 내적 생명의 한 능력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AC.61의 문장을 가장 단순하게 놓아 보면 이렇습니다. 신앙에 관한 지식에 속하는 것들은 이해에 관계되고,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 속하는 것들은 의지에 관계됩니다. 전자를 ‘영적’, 후자를 ‘천적’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영적인것은지식이고천적인것은사랑이니,영적인것은머리에만있고천적인것만실제생명이라는뜻인가?’ 그러나 AC.61을 그렇게 읽으면 곤란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두 종류의 것을 구별하고 있는 것이지, 영적인 것을 무가치한 지식으로 낮추고 천적인 것만 참된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앞 AC.60에서도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이 서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결혼’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구별되지만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또 ‘신앙에관한지식’을 단순한 성경 상식이나 교리 암기로만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물론 말씀과 교리를 배우고 아는 것이 포함되겠지만, AC에서 신앙에 관한 지식은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데 관계됩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이해’를 단순한 정보 저장소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과이웃을사랑하는것’을 단순한 따뜻한 감정으로만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것을 ‘의지’에 속한다고 하는 데에는 사람이 무엇을 실제로 원하고 사랑하는가 하는 문제가 들어 있습니다. 사랑은 단순히 어떤 대상에 좋은 느낌을 갖는 것보다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너무 쉽게 ‘이해=머리’, ‘의지=가슴’이라고 바꾸는 것도 조심하는 것이 좋습니다. 처음 설명하기에는 쉬운 비유지만, 이해와 의지는 신체 기관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인간의 내적 생명을 설명할 때 사용하는 두 근본적인 능력에 관한 말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이웃을사랑해야한다’는 말씀을 알고 그것이 참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신앙에 관한 지식과 이해의 측면을 생각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실제로 이웃의 선을 원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면, 여기에는 의지와 사랑의 측면이 있습니다.
이 예는 AC.61의 구별을 이해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아는것은무조건영적이고행동하는것은무조건천적이다’라는 공식으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행동의 근원이 어떤 사랑과 의지에 있는지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조심해야 할 것은 ‘영적’과 ‘천적’을 단순히 신앙의 낮은 단계와 높은 단계로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AC전체에서는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가 매우 중요한 주제로 발전하지만, AC.61자체는 ‘먼저영적인간이된다음더발전하면천적인간이된다’는 단계표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특히 앞에서 이미 살펴본 것처럼 스베덴보리는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질서에 차이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영적→천적’이라는 하나의 직선적인 승급 과정으로 이해하면 앞으로의 AC를 읽을 때 오히려 혼란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AC.61이 말하는 만큼만 정확히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신앙에관한지식에속하는모든것은영적이고이해에속하며,주님과이웃을사랑하는데속한모든것은천적이고의지에속한다.’ 이것이 이 글의 직접적인 정의입니다.
그러면 왜 바로 앞 AC.60에서는 이 둘 사이에 ‘결혼’이 이루어진다고 했을까요? 이해와 의지,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서로 완전히 무관한 채 따로 존재하는 것이 거듭남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AC.60은 그것들이 하나를 이루는 상태를 말했고, AC.61은 그 결합을 이루는 두 종류의 것이 각각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여기서 ‘주님과이웃을사랑하는데속한모든것’이라는 표현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천적인 것을 설명하면서 막연히 ‘사랑’이라고만 하지 않고 그 사랑의 방향을 분명히 합니다. ‘주님과이웃’을 향한 사랑입니다.
따라서 자기 자신을 높이려는 사랑이나 세상을 지배하려는 사랑까지 단지 ‘사랑’이라는 이유로 천적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AC.61이 천적이라고 부르는 사랑은 구체적으로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입니다.
이 점은 처음 AC를 읽는 독자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사랑’을 강조한다고 해서 모든 종류의 사랑을 동일하게 선한 것으로 보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을 사랑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바로 ‘주님과이웃을사랑하는데속한모든것’을 천적이라고 명시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의지에 속한다는 말은 신앙생활에서 사랑이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사람이 무엇을 실제로 원하고 사랑하는가는 그의 내적 생명과 깊이 관계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해를 버리고 사랑만 있으면 된다는 결론도 나오지 않습니다. 바로 앞 말씀의 속뜻은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이 ‘결혼’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이해와 의지,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서로 결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AC.60과 AC.61을 함께 읽으면 창1:31의 ‘심히좋았더라’가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AC.60은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루기 때문에 ‘심히좋았더라’라고 한다고 했고, AC.61은 그 가운데 신앙에 관한 지식에 속하는 것들은 영적이며 이해에 속하고,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 속하는 것들은 천적이며 의지에 속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이번 글을 읽으면서 ‘나는영적인간인가,천적인간인가?’부터 판정하려 하기보다 먼저 스베덴보리가 사용하는 언어를 정확히 익히는 것이 좋습니다. 앞으로 AC에서 ‘영적’, ‘천적’, ‘이해’, ‘의지’라는 말이 계속 등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설명의 출발점은 여전히 창1:31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지으신그모든것을보시니보시기에심히좋았더라.’ AC.61은 말씀을 대신하여 인간에 관한 별도의 철학 체계를 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앞 AC.60에 이어 이 말씀의 ‘심히좋았더라’ 안에 있는 신앙과 사랑,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의 결합을 좀 더 분명하게 밝혀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And God saw everything that he had made, and behold it was very good.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sixth day.(창1:31)
AC.60
이상태를‘심히좋았더라’(verygood)라고하는이유는,앞선상태들을단지‘좋았더라’(good)라고만했던것과달리,이제는신앙에속한것들과사랑에속한것들이하나를이루기때문입니다.이로써영적인것들과천적인것들사이에결혼이이루어집니다. This state is called “verygood,” the former ones being merely called “good”; because now the things which are of faith make a one with those which are of love, and thus a marriage is effected between spiritual things and celestial things.
해설
AC.60은 창1:31의 ‘하나님이지으신그모든것을보시니보시기에심히좋았더라’라는 말씀 가운데 특히 ‘심히좋았더라’에 주목합니다. 앞선 창조의 날들에도 하나님께서는 지으신 것을 보시고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섯째 날에는 처음으로 ‘심히좋았더라’고 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왜 여기에서만 ‘심히’라는 말이 더해지는지를 사람의 거듭남이라는 속뜻에서 설명합니다.
AC.60의 대답은 매우 간결합니다. 이제 ‘신앙에속한것들’과 ‘사랑에속한것들’이 하나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영적인것들’과 ‘천적인것들’ 사이에 결혼이 이루어집니다.
여기서 먼저 중요한 것은 ‘심히좋았더라’라는 말씀 자체입니다. AC는 이 말씀을 다른 표현으로 바꾸어 놓는 것이 아니라, 왜 말씀에서 앞선 상태들은 ‘좋았더라’라고 하고 이 상태에서는 ‘심히좋았더라’라고 하는지 그 속뜻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해설의 중심도 언제나 창1:31의 이 말씀에 두는 것이 좋습니다.
‘좋았더라’와 ‘심히좋았더라’의 차이는 단순히 앞의 것들도 좋았지만 마지막 것은 조금 더 좋았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AC.60은 그 차이를 신앙과 사랑의 관계에서 찾습니다. 앞선 상태에서는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아직 이렇게 ‘하나’를 이루는 상태로 설명되지 않았지만, 이제 여섯째 상태에서는 둘이 하나를 이룹니다.
그렇다고 앞선 상태의 신앙이나 선과 진리가 살아 있지 않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앞의 AC들에서도 이미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과 선과 진리를 말했습니다. 따라서 여섯째 날 이전의 상태를 ‘아직죽어있는상태’, 여섯째 날을 ‘비로소생명이처음생긴상태’라고 구분할 필요는 없습니다.
AC.60이 직접 강조하는 것은 ‘하나가됨’입니다. 신앙에 속한 것들이 따로 있고 사랑에 속한 것들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 그것들이 하나를 이룹니다. 이것이 ‘심히좋았더라’라고 불리는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에속한것들’과 ‘사랑에속한것들’은 무엇일까요? 처음 AC를 읽는 독자에게는 이 표현이 조금 추상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현재 연결된 심화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만 메인에서는 신앙과 사랑을 단순히 ‘머리와가슴’, 또는 ‘아는것과행동하는것’ 정도로만 축소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로 다음 AC.61에서 스베덴보리는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을 ‘영적’이라 하고, 사랑에 속한 모든 것을 ‘천적’이라 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AC.60은 그 다음 설명으로 들어가기 위한 문을 열어 줍니다. 여기서는 우선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가 되며, 이것이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의 ‘결혼’이라고 불린다는 사실을 붙들면 충분합니다.
‘결혼’이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신앙과사랑이함께있다’고 하지 않고,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 사이에 ‘결혼이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하나 됨은 어느 한쪽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구별되는 것들이 결합하여 하나를 이루는 상태입니다.
다만 이번 한 문장만 가지고 ‘결혼’의 전체 교리를 펼칠 필요는 없습니다. 선과 진리의 결혼, 천상의 결혼, 의지와 이해의 결합 등은 AC전체에서 계속 깊어지는 주제입니다. AC.60에서는 ‘신앙에속한것들과사랑에속한것들이하나를이루는것이영적인것들과천적인것들의결혼이다’라는 직접적인 설명까지만 정확히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또 ‘영적인것’과 ‘천적인것’을 곧바로 서로 경쟁하는 높고 낮은 두 단계로 읽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번 문장에서는 둘 사이에 ‘결혼’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즉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것은 둘의 분리가 아니라 결합입니다.
그렇다고 ‘영적’과 ‘천적’의 차이가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결혼이라는 표현 자체가 둘의 구별을 전제로 합니다. 서로 다른 것이면서 하나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영적이고 무엇이 천적인지는 바로 다음 AC.61이 설명하므로, 여기에서 미리 지나치게 세분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신앙과사랑이하나가된다는것이실제로무슨뜻인가?’라는 질문도 생길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말씀의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 실제로는 그것과 반대되는 것을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 그가 아는 것과 그가 사랑하는 것은 하나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그가 참된 것을 알고 그것을 사랑하며, 사랑하는 것과 믿는 것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면 ‘신앙에속한것들과사랑에속한것들이하나를이룬다’는 말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AC.60의 문장을 독자가 이해하도록 돕기 위한 예이지, 이 한 가지 예가 ‘결혼’의 전체 뜻을 정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사랑’을 단순한 감정으로 이해하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사랑에 속한 것들이 신앙에 속한 것들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믿는내용에대해따뜻한감정을느낀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사랑은 의지와 삶에 깊이 관계됩니다. 다만 이 부분 역시 이어지는 AC들이 더 자세히 설명합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을 단순히 교리 내용을 많이 아는 것으로 축소해서도 안 됩니다. 신앙에 속한 것들은 진리와 이해에 관계하지만, AC.60에서 말하는 상태는 그것들이 사랑에 속한 것들과 하나를 이루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신앙과 사랑을 서로 독립된 두 종교적 능력처럼 생각하기보다, 하나의 생명 안에서 결합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이 점에서 창1:31의 ‘하나님이지으신그모든것을보시니’라는 말씀도 해설의 중심을 다시 주님께 돌려놓습니다. 이 상태를 ‘심히좋았더라’고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보고 ‘이제나는충분히거듭났고심히좋은사람이되었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심히좋았더라’를 인간의 영적 자기평가 기준으로 사용해서도 안 됩니다. ‘나는신앙과사랑이하나가되었는가?그렇다면나는여섯째날인간인가?’라고 자신의 영적 등급을 판정하는 것이 이 말씀의 목적은 아닙니다. AC는 창조의 날들을 통해 거듭남의 질서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이지, 사람에게 자기 영적 수준표를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또 현재의 여섯째 상태를 ‘거듭남의최종완성’이라고 부르는 것도 조금 조심하는 것이 좋습니다. 창1의 여섯째 날이 매우 높은 상태이고 ‘심히좋았더라’고 불리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창2에는 일곱째 날이 이어지고, AC.62부터는 일곱째 날과 천적 인간의 상태가 설명됩니다.
따라서 AC.60의 ‘심히좋았더라’를 가볍게 낮출 필요도 없지만, 뒤에 이어지는 일곱째 날의 몫까지 여기에 미리 가져와 ‘모든거듭남의최종완성’이라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번 글이 말하는 만큼만 충분히 말하면 됩니다.
그렇다면 왜 앞선 상태들은 ‘좋았더라’이고 이번에는 ‘심히좋았더라’일까요? AC.60의 답은 끝까지 단순합니다. 이제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 사이에 결혼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창세기 1장의 거듭남 흐름에서 매우 중요한 변화입니다. 사람에게 진리가 있고 신앙이 있다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이 사랑에 속한 것들과 하나를 이룹니다. 신앙과 사랑이 서로 분리되어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고 하나를 이루는 상태를 말씀은 ‘심히좋았더라’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생명의 근원을 인간 자신에게 돌려서는 안 됩니다. 창1:31은 ‘하나님이지으신그모든것을보시니’라고 합니다. 창조의 주체가 하나님이신 것처럼, 속뜻에서 진행되는 거듭남 역시 인간이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내는 새로운 창조가 아닙니다.
그래서 AC.60을 읽을 때 가장 마지막에 남아야 할 말도 인간의 성취보다 말씀의 선언이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지으신그모든것을보시니보시기에심히좋았더라.’ AC.60은 바로 이 말씀의 ‘심히좋았더라’ 안에,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루고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 사이에 결혼이 이루어지는 거듭남의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고 밝힙니다.